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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며,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 - E.Kant
by Ko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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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에 해당되는 글 862건

  1. 2019.02.28
    북미회담 결렬, 별 일 아니다.
  2. 2019.02.13
    성인 사이트 등 불법 사이트 차단 사태에 대한 단상.
  3. 2019.02.10
    권력욕의 작동에 대한 단상.
  4. 2019.01.31
    김경수 징역을 선고한 사법부의 정치판사. 2
  5. 2019.01.19
    가담항설 리뷰.
  6. 2019.01.15
    언론간 진영 싸움의 현실. 4
  7. 2019.01.14
    고위 범죄자를 더 적극적으로 배제해야할 이유.
  8. 2019.01.12
    The Hu - Wolf totem // 가사, 해석
  9. 2019.01.11
    chloe moriondo - Instagram // 커버, 가사
  10. 2018.12.29
    오보에 대한 책임이 필요한 언론. 3
  11. 2018.12.02
    페미들의 현실감각 문제와 정신병적 공격성의 구조. 6
  12. 2018.11.25
    조선의 왕권과 신권의 대립에 대한 기초 이해. 2
  13. 2018.11.22
    이수역 사건 등에서 찾아볼 수 있는 페미를 하는 여성들의 정신적 기제. 4
  14. 2018.11.04
    한국 보수의 태생적 한계와 근원.
  15. 2018.10.27
    신고했을 때, 경찰이 그냥 가지 않게 하는 법.
  16. 2018.10.05
    자한당원 심재철의 안보파괴적 국가반역 행위. 1
  17. 2018.09.29
    섭스턴스 페인터에서 오파시티 적용하기. 1
  18. 2018.09.28
    섭스턴스 페인터 기본 튜토리얼.
  19. 2018.09.25
    감정과 판단 능력에 대해서.
  20. 2018.08.27
    논리의 객관성에 대한 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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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한국 보수세력과 일본에게 있어서 아주 기쁜 날일 겁니다. 북미회담이 결렬되어 한반도 평화가 보장되지 못한 날이니까요. 재밌는 건 미국 좌파들에게도 기쁜 날이라는 거죠. 트럼프를 공격할 명분이 생겼으니까요. 한국 보수와 같은 이유로.



하지만 이에 대해서 크게 걱정할 건 없다고 봐도 됩니다. 다르게 말하자면, 오늘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해도 변하는 건 크게 없을 거라는 거고, 결국 더 나은 미래로 향하게 되긴 할 거라는 겁니다. 서로 여기까지 왔고, 원하는 게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 영구적인 후퇴가 있을 수는 없다고 봅니다.


트럼프·김정은 합의문 서명식 무산된 듯···오찬도 취소 가능성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hm&sid1=100&oid=032&aid=0002925355

트럼프 "영변 외에 발견한 게 있다..우리가 안다는 데 北놀라"

https://news.v.daum.net/v/20190228164757035

[전문]트럼프 "北제재 확대? 옳지 않다…북한 국민도 생각해야"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hm&sid1=100&oid=008&aid=0004181764
트럼프 "김정은 중재해달라", 문대통령 "가까운 시일 내 만나자"
http://www.newspim.com/news/view/20190228001045


애초에 상식적으로, 북한의 비핵화라는 거 자체가 회담 몇번으로 성사된다는 거 자체가 망상급으로 말이 안 되는 일인 것도 사실이죠. 그렇게 됐으면 참 좋겠고, 많은 노력이 필요하긴 하겠지만, 단지 회담 몇번으로는 될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만큼 어렵고 많은 노력과 시도, 전략이 필요한 일이라는 거죠. 


북한 입장에서, 비핵화를 위한 노력을 하겠다고 했고, 그 노력을 위해 자기들이 할 수 있는 최대의 카드가 영변 핵시설 폐쇄였다고 봐야합니다. 사실 이것도 역대급으로 놀라운 일인 게 사실이고, 그게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었으니 정말 놀라운 일이기까지 했죠. 


하지만 주지해야할 것은, 북한의 핵시설은 영변 하나뿐이 아니고, 숨겨진 시설이 있을 거라는 건 누구나 알고 있을 거라는 겁니다. 적어도 분명한 건, 안보에 대한 직간접적인 정보망을 가진 국가 고위직(대통령, 국정원장, 군 고위 등)은 알고 있었을 거라는 거죠. 얼마나 정확하게 알고 있는지에 대한 차이가 있을 뿐이지.



북한이 낼 수 있는 가장 큰 딜은 영변 폐쇄였지만, 트럼프의 생각은 거기에서 더 나아간 것 뿐입니다. 그리고 그건 북한이 감당하기에 너무 무리한 요구였던 거죠. 트럼프가 어떠한 생각으로, 그리고 김정은도 어떠한 생각으로 이렇게 일을 진행시켰는지 알기는 정보와 입장을 알 수 없기 때문에 파악할 순 없습니다.


정상적이라면 물밑에서 실무적인 조율을 다 끝내고 대통령 등 고위급이 나와서 더 조율할 거 있으면 하고 적당히 이야기 나누다가 서명해야 되는 일인데, 어째 얘네들은 이걸 거꾸로 하고 있으니..


어떻게 보면 벼랑끝 전술이고, 어떻게 보면 미국 국내의 요구를 트럼프가 받아들인 것일지도 모르고.. 



어찌됐든 분명한 건 이겁니다. 그런 식으로 결렬되었음에도 제재를 확대하는 것에 반대한다는 건 아직 대화의 여지가 분명하게 남아있음을 보여주는 거죠. 대화는 하겠지만, 그 조건은 북한이 많이 양보하게 될 것이다.(=내가 더 많은 이득을 볼 작정이다.) 라는 거라고 봅니다. 


아예 트럼프 스스로도 문 대통령에게 김정은은 중재해달라는 요청을 하며 가까운 시일 내에 만나자는 거 보면 확실합니다. 또 어떻게 보면 북미회담에 있어서 한국이 빠지는 모양새에서 한국을 끼워넣으려는 외교적 정치공학의 일면이 아닐까 싶을 정도이기도 하고요. 트럼프의 친한적인 태도를 생각해보면, 더불어 근래에 한미간의 동맹을 이간질하려는 국내 언론 및 보수 세력에 대해 미군이 직접적이고 적극적으로 한미동맹은 굳건함을 밝히는 걸 생각해보면 또 모를 일입니다.



아니면.. 아예 현재 미국내에서 이루어지는 반트럼프 활동 중 하나인 러시아 대선개입 청문회에 대한 이슈를 묻어버리려는 정치행위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실제로 외신들 찾아보면 청문회 이야기 쏙 들어가고 회담에 대한 기사만 올라오고 있는 거 보면.. 좀 오바다 싶긴 하지만 트럼프라서 그런 일을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보면 미국에 대한 국익에 집중했다는 명분으로 방어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보니.. 일반적으로 그런 국제적으로 큰 의미와 중요성을 가진 일을 자신의 정치적 부담을 이슈는 이슈로 덮는다는 정치공학적 판단으로 결렬내버릴까 싶긴 하지만 이 역시 트럼프라서...;;


사실 한국을 끼워넣는다는 딱히 얻을 거 없는 행위를 위해 했다기 보단 청문회 이슈를 묻기 위해 했고 결렬된 회담을 다시 무마하기 위해 한국에게 도움을 요청했다고 보는 게 더 개연성 높은 일이긴 합니다.



뭐..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트럼프는 북한에게 영변 이외의 다른 시설에 대한 폐쇄를 --갑작스레-- 요구했고 이는 북한에 있어서 받아들이기 너무 무거운 요구였죠. 그렇기 때문에 결렬된 것 뿐이지, 이거 하나만으로 무슨 전쟁 위험이 생겼거나 북미관계의 파탄이 발생하거나 하는 건 아닙니다.


그저 시간이 좀 더 길어질 뿐이고, 협상 테이블에 올라오는 가짓수와 메뉴가 조금씩 달라질 뿐이죠. 설레발 칠 거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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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이번 차단 사태는 기본적으로 문재인 정부만의 탓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차단, 검열 자체는 이명박 정부시절부터, 그리고 좀 더 포괄적으로는 걍 그 이전부터 쭉. 꾸준히 해왔던 겁니다. 물론 이명박 정권 때부터 검열이 좀 더 빡세진 건 사실입니다. 칼과 흡연 장면에 모자이크를 넣는 등.. 이번엔 HTTPS와 같은 방법을 통한 차단 무력화가 가능한 시스템을 무력화시킨 거고, 다시 말해서 원래 막아왔던 걸 뚫는 기술을 이용했는데, 이번엔 그것도 막았다. 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좀 더 상세하게 패킷 검열 등등은 제가 그런 쪽으로 잘 아는 것도 아니고, 딱히 지금 조사를 한 게 아니라 확정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건 아니다보니 보류하고, 지금 이야기하려는 것도 그런 쪽은 아닙니다. 



앞서 말했듯이 검열과 차단 자체는 이전부터 꾸준히 해왔던 겁니다. 단지 그 기술이 좀 더 발달했을 뿐이고, 그 범위가 넓어졌으며, 그에 따라 여러가지 논점들이 발생했습니다. 물론 이거 가지고 정부를 비판하지 말라는 건 아닙니다. 어쩌다보니 그 정권에서 그런 일이 발생했다고 해도, 하필 그 정권에서 그 일을 실행하거나 완료되었다고 해서 어차피 어떤 정부든 그랬을테니, 혹은 그냥 재수가 없어서 하필 그 정권이었으니 그 정권에 책임이 없다는 건 말이 안 되죠.


경우에 따라 그 책임의 소지는 줄어들 수 있지만, 없어질 순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문재인 정권기에 벌어진 이번 차단, 검열 논란은 정부에 비판이 돌아가는 건 맞아요. 하지만 그게 문재인의 잘못이다? 비판의 근거가 될 수는 있지만 문재인 개인이나 대통령의 잘못이 될 수는 없습니다.



하여간, 몇가지 논점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1.패킷 검열 문제.

2.성인의 성인물 소비 문제.

3.리벤지 포르노 문제.



1번의 패킷 검열 문제는 여기서 다룰 이야기가 아니니까 넘어가고.


2번 문제는 확실히 많은 사람들의 공분을 사는 일입니다. 유교 탈레반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그리고 사회주의 독재국가 소리를 들을 정도로 확실히 엇나가는 거고, 무식하게 일을 진행시킨 것이며, 음란물에 대한 한국 기득권과 정부 단체의 시각을 잘 보여주는 짓거리이긴 합니다.


사실 한국은 유교보다는 기독교의 영향력이 더더욱 강력하기 때문에 유교 탈레반이라기 보단 그냥 기독교 근본주의나 기독 탈레반(?)이라는 표현이 더 사리에 맞을 겁니다. 음란물이나 성적 컨텐츠에 대한 기독교계(더 엄밀히 좁히자면 개신교계)의 위선적인 혐오증은 유명하죠.


어찌됐든, 성인이 성인물을 제대로 즐길 수 없다는 건 확실히 비상식적인 일입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하기 이전에 몇가지 사실들을 이야기하자면, 한국에서 성인 컨텐츠가 아예 없는 건 아닙니다. 공사치고 하거나 아니면 카메라 각도, 연기 등을 통해 성기가 보여지지 않는 성인 영화 같은 것들은 적지만 이미 생산되고 있고, 그 외에도 수입되는 성인 작품들이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문제가 뭐냐면, 해외의 성인 컨텐츠들에 비해 분명하게 경쟁력이 없거나 매우 떨어진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사거나 즐길 수 있는 합법적인 성인 컨텐츠가 있어도 그 수준이 낮고 질이 떨어지기 때문에 불법으로 가게 되어 있다는 거죠.


실제로 수많은 사람들이 좋든 싫든 그냥 그렇게 이용했고, 어떤 이들은 그게 불법인지 아닌지도 인지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인이 성인 컨텐츠를 즐길 수 없다는 건 비상식적이고, 쓸모없는 엄숙주의 쩔어주는 위선적 꼰대식 규제가 엄청나게 많은 게 문제 중 하나인 거고요.



물론 동시에 이런 문제가 하나 발생하는데, 정부-의회-법원이 절대 양보하지 않으려는 영역이 바로 청소년, 미성년자들의 성인물에 대한 접근입니다. 물론 실질적으로 막을 수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최대한 막으려는 개짓거리가 바로 이러한 사태로까지 이어진 거죠. 


여기서 문제가 되는 원인은, 미성년자의 접근을 어떻게 차단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알다시피 성인인증은 개인정보 도용 등으로 쉽게 우회가 되고, 다른 방법들도 어렵지 않게 우회가 가능하죠. 그렇기에 아예 접근 자체를 차단해버리자는 발상으로 성인이든 아니든 걍 싹 다 차단해버리는 겁니다.


여기서 성인들의 불만이 터져나오는 거고요. 합리적인 방법을 내놓지도, 그럴 생각도 없으니 일괄 도매금으로 묶어서 싹 다 차단해버린 겁니다.



리벤지 포르노 문제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고 상식적으로 누구나 동의해야할만한 문제가 맞습니다. 리벤지 포르노는 진짜 불법 맞고, 그걸 떠나서 사람이면 해선 안 될 심각한 폭력 중 하나이자 범죄입니다. 따라서 이건 아동포르노를 전세계적으로 때려잡아서 없애버리고 찾아볼 수 없게 만들었던 것처럼 때려 잡고 없애버려야 하는 게 맞습니다.


문제는 이에 대한 규제와 실질적으로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다는 거죠. 잊혀질 권리 등 그걸 해결해주는 업체나 단체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모자라죠.


그리고 이번 차단 사태의 근거 중 하나가 바로 그 리벤지 포르노 문제입니다. 실제 한국에서 생산된 리벤지 포르노가 해외 성인사이트에 떡하니 올려져 있거나 하는 경우가 너무 많고, 사실상 그쪽 루트로 공개, 보급되는 실정이기도 합니다. 그 외의 루트가 있기는 하겠지만(ex.트위터 등의 SNS, 카톡 등..) 제가 그런 쪽으로는 잘 알지 못하니 대충 그렇게 돌아가겠지 할 뿐이네요. SNS를 통한 음란물 유통은 이미 유명하고요.



하지만 이 역시 성인이 불법이 아닌 성인 컨텐츠를 즐길 수 없게 한다는 문제가 남는데, 사실 이것도 애초에 해외 포르노를 보는 것도 불법인 걸로 압니다.. 애초에 수입할 수도 없고 방통위 심의를 통과할 수도 없는 컨텐츠들이라, 사실 한국에서 진짜 허용된 극소수의 성인물 컨텐츠를 제외하면 걍 다 불법일 수밖에 없는 거죠. 그래서 방통위가 욕을 존나게 먹어야 하고, 그에 못지 않게 그런 법을 만들고 유지해온 국회를 까야 하는 겁니다.



그리고 이번 사태에 대해 좀 더 이야기를 하자면.. 지금과 같은 불법 사이트 차단은 밤토끼, 마루마루 등의 사이트를 차단하는 것의 연장선입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서 망가쇼미, 해외 성인물 사이트를 차단하는 거고요. 심지어 그 이전에 클로저스 티나 사건에서 연장되어온 레진 등의 메갈 관련 작가, 사이트에 대해 예스컷 운동을 했었던 것의 연장이기도 하고요.


그 당시 규제를 찬성한다(이후 규제를 해도 안 도와주겠다.)는 사람들이 결국 이렇게 될 줄 몰랐을까요? 네 몰랐겠죠. 근데 이렇게 될 거라는 거 자체는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아마 그 당시 예스컷 하겠다는 사람들을 봤던 정부 관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요? 존나 개돼지 같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또, 이번에 이런 식으로까지 이루어지는 차단 사태는 아직도 구시대 인간들이 권력을 쥐고 있기 때문에 발생한 문제라고도 보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통제는 삶의 일부였습니다. 독재시절부터 체화 당해온 통제는 그것을 벗어나는 순간 불안해지게 만들기도 하고, 어떤 식으로든 어떻게든 통제하고자 하는 일종의 패티시를 부여하기도 하죠.


어렸을 때부터 자유에 익숙해지지 못했기 때문에 통제에 대한 패티시, 혹은 강박이 발생하게 된 현행 권력자들이 인터넷이라는 자유로운 공간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통제하지 못한, 혹은 못했던 자유로운(=위험하고 방종한) 세상이라고 봤을 지도 모를 일이죠.


그러니 어렵고 복잡하고 힘들고 오래 걸리는 방식과 이해보다는, 여러가지 껀수와 명분을 가지고 걍 차단해버리는 방법론을 써버린 게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지금 가장 큰 문제는 영상물 등의 경우 방통위의 심의를 받지 못하면 팔 수도 없다는 등의 문제와, 검열과 차단 문제에 대해 제대로된 법안을 마련하거나 개정하지 않고, 더 나아가 선진국 기준의 성 관련 인식과 규제 수준을 갖추지 못한 꼰대정신의 국회에 문제가 있죠.


앞서 이야기 했듯이 한국에서 정상적으로, 그리고 경쟁력 있는 성인물 컨텐츠를 즐기기란 극히 어려운 문제입니다. 소라넷이 규제를 받으며 점점 음지화되고 변태성이 극화되는 범죄적 변태소굴로 변화했듯이, 여전히 사람들은 우회를 하든 뭘 하든 방법을 찾아내겠지만 그 과정 속에서 반동이 없을 수가 없을 겁니다.


그러니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규제(대체적으로 선진국 수준으로 완화)와 합리적인 생산-유통 구조를 만들어서 양지화시키고 성인들이 정상적으로 컨텐츠를 즐길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세계에서 음란물, 성인물에 대한 규제가 그 어느 나라보다 심한 게 한국이죠. 거의 중동 이슬람 원리주의 국가 수준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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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권력을 가지면 욕심이 더 커지기 때문에 더 많은 권력을 원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돈이 생기면 더 부족하게 느껴지고 권력을 가지면 더 많은 권력을 가지고 싶어한다는 거죠. 단지 더 커진 욕심 때문에요.


하지만 이건 너무나도 1차원적인 이해가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권력, 혹은 돈이 생기면 더 많은 걸 가지고 싶어지는 욕심이 생기는 건 맞습니다. 하지만 단지 그것만으로 끝 없이 붙는 욕심의 가속도가 붙게 된다는 건 설명하기에 덜 정확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권력, 자본주의 사회에선 자본이 될수도 있겠죠. 이러한 권력을 가지면 거기에서 만족하지 않고 더 많은 권력을 얻고자 하는 가속도가 붙는 것에는 단순 인간의 내적 욕심이라는 기제 뿐만 아니라 권력을 유지시키기 위한 비용의 발생으로 설명하는 것이 더 보편적인 설명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권력을 유지시키는 것은 쉬운 게 아닙니다. 단지 가지기만 했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얻기 위해 투자하고 사용되어야 할 많은 비용들이 있으며, 그것을 획득한 이후에도 유지시키기 위한 비용 또한 있습니다. 즉, 권력을 얻고 유지시키기 위해서는 꾸준히 나가는 것이 있다는 거죠.


권력을 자본으로 비유하자면, 권력은 자본이고 유지비용은 부채라고 볼 수 있겠죠. 그리고 자본의 순이익과 부채의 간극만큼 만족도가 상승하게 됩니다. 순이익이 높은 수록, 부채는 낮을 수록 권력에 만족도가 높을 수 있다는 거죠. 


실제로 더 많은 연봉을 받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노동과 다각적인 인간관계, 사내정치, 정신력, 인지력, 가정, 커리어, 미래 등에 소모되고 투자되고 이것저것 발생하는 비용들 또한 높은 편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자신의 연봉만큼의 비용이 발생한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불행하다고 여길 것이고, 버는 것도 많지만 그만큼 만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즉, 더 많은 돈을 벌고 싶고 더 높은 직위에 올라가고 싶어하게 될 것이죠.


마찬가지로 실제 정치인, 고위 공무원 등의 수 많은 권력자들은 그만큼 높은 업무 강도를 가지고 있고, 그러한 강도를 버티는 능력적으로는 굉장히 뛰어난 인재들인 것은 사실입니다. 단지 높은 곳으로 갈수록 큰 그림을 보는 통찰력과 그러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안목에 따라 실무 행정능력과는 별개로 유능함과 무능함이 갈리는 거겠지만요.


하여간, 그러한 상승성 있는 인간들은 거기에서 다 내려놓고 모아놓은 것을 가지고 만족하고 사는 것보다 -비록 타성에 젖은 행동일순 있어도- 더 비용을 투자하여 높은 직위를 얻거나 더 높은 연봉을 받으려 하는 경우가 많을 겁니다. 



권력에 대한 획득 욕심의 가속도는 바로 여기에서 발생하는 거죠. 자신이 권력을 획득하기 위해 투자한 비용대비 만족도가 낮다면 더 높은 권력을 가지고 싶어하는 겁니다. 욕심은 부족함에서 발생하는 거고, 부족한 만큼 추구하게 되는 겁니다. 물론 이걸 아주 간단히 통찰하자면 권력(돈)을 가지면 가질 수록 더 원하게 된다. 즉, 욕심이 더 커지게 된다. 라고 말할 수 있지만, 너무 함축된 설명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는 설명에 설득력을 가지기엔 모자라죠.


물론 이러한 설명은 불완전하고, 권력에서 발생하는 정신적 쾌감과 같은 보편적인 원인 또한 존재할 겁니다.


하지만 권력을 가지면 욕심이 더 커지기 때문에 더 많은 권력을 가지고 싶어한다. 라는 고전적이고 일차원적인 설명보다는 더 보편적인 원리를 더 말이 되게 설명할 수 있지 않나 싶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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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수 재판 방청기② 위키백과가 증거라고?

http://news.newbc.kr/news/view.php?no=4260
‘김경수 법정구속’ 성창호 판사…양승태 비서실 출신, 사법농단 연루자
http://www.goba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6935
느닷없는 우병우 석방, '법원발 역습'의 서막?
https://news.v.daum.net/v/20190109050602610?d=y
'김경수 실형' 성창호 부장판사, 양승태 '연금증액' 관여 정황
http://news1.kr/articles/?3538704
박주민 "김경수 1심 판결 허술…'킹크랩 시연' 증거 없어"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hm&sid1=100&oid=003&aid=0009041632
[비하인드 뉴스] '김경수 구속' 예측 못 한 여야..부랴부랴 '긴급회의'
https://news.v.daum.net/v/20190130222220956


문재인 정권이 적폐청산을 목표로 국가 전방위를 대상으로 정화 작업을 실시하고 있는 건 아실 겁니다. 이 문제는 사법부 또한 다를 게 없는지라, 검찰과 다를 바 없이 썩어 있는 곳이 바로 판사, 사법부라는 것을 우리는 양승태 대법원장의 범죄 행위로 물 위로 드러나게 되었지요.


이러한 상황에서 조직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천지분간 안 하고 때리려는 주인을 물려는 개들이 객관적, 법리적, 가치중립적 심판이 아닌 정치적 판단을 우선하면서 행동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김경수 지사 관련한 현 상황이 바로 그것이죠.


이것은 명백한 정치적 판단에 따른 정치적 행위로, 정치판사라 불려야할 부패한 이들에 의해 자행된 정치공세이자, 사법파괴 행위입니다. 



당연하지만 특검 자체도 허술하기 그지 없었고, 재판에서도 고작 위키백과 따위를 근거로 제출할 정도로 어처구니 없을 정도의 공방이었습니다. 그럼에도 1심 구속, 징역이 나왔다는 건 정치적인 의도를 의심해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너무나도 허술하고 부실한 증거와 증언이었지만 유죄를 줬다는 건, 어차피 2심이나 3심까지 가면 무죄가 뜰 것은 당연하지만 이렇게 유죄를 줌으로서 민주당과 대통령에 대한 공격을 한 겁니다. 당장 자한당, 바미당 등의 정당에서 공격하고 있고, 이러한 판결에 환호할 보수세력에 힘을 실어주며 정권을 공격하는 거죠.


정권 측에서는 이러한 판결로 인해 불필요한 비용이 생기게 되며, 스트레스가 발생하게 되죠. 정치적 공세에 대한 대응 또한 고려해야 됩니다. 어차피 무죄가 뜨겠지만, 2심, 개억지를 부려서 3심까지 가게 된다면 그 기간 동안 민주당과 정권은 자한당과 이명박근혜 정권에 대한 주요한 비판과 범죄인 댓글공작에 대한 명분을 상실하거나 의제를 통제할 힘이 약화될 겁니다.


그러한 관리력과 비용발생 동안 정부는 사법부에 대해 더 적극적인, 최소한 지금과 같은 적폐청산을 진행하기 어려워집니다. 양승태에 대한 집중도가 떨어질 수 있죠.



그렇기 때문에 정치적인 의도와 목적을 가진 판결이었고, 이를 더욱 의심케 하는 정황은 성창호 본인이 양승태 비서실 출신인데다 사법농단 연루자 중 하나입니다. 그런 문제가 있는 본인이 이러한 판결을 내렸다는 거 자체가 보복성이거나 분명한 정치적 의도를 지닌 행위인 셈이죠. 과장 좀 보탠다면 피의자가 자기를 수사하는 집단의 주요 일원에게 처벌을 선고하는 겁니다. 비상식적인 일이죠.


이 와중에 우병우를 석방한다는 것은 서로 선후배, 심지어 동료이기까지 한 검사이자 사법농단의 주요 관계자 하나를 풀어주는 상황이 연출되는 거죠. 부패의 카르텔은 당연히 서로가 서로의 뒷배를 봐주는 관계이기 때문에, 우병우를 풀어준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모를 사람은 없을 겁니다. 최소한 스트레스를 발생시키고 사법부에 대한 정부의 공격(본인들은 공격이라 여길 겁니다. 분명.)을 약화시키고 상황 통제에서 주도권을 조금이라도 가져가기 위한 권력지향적 경쟁이라고 볼 수 있고요.


[Why 뉴스] 남재준 무죄, 왜 양승태의 반격이라 하나?

http://www.nocutnews.co.kr/news/5085715


더불어, 성창호 판사 관련 이야기 중 하나로 남재준 전 국정원장 관련한 판결이 하나 있습니다. 이 판결을 보자면 직권남용 관련 건에 대해 매우 엄격한 잣대를 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죠. 그렇게 무죄를 만들어 냈는데 이게 또 양승태 관련과도 연관이 됩니다. 양승태와 관련해서 이 잣대를 들이대면 양승태도 무죄가 되거나 죄가 가볍게 되어 상식적인 판단보다 더 낮은 판결이 떨어지게 되죠. 


극히 정치적인 판단이고, 판결을 선고할 수 있다는 위치에 서서 정치적 판단을 하기 때문에 법치를 파괴하는 행위이자, 사회를 혼란시키는 주범인 셈입니다.


자신의 잣대에 본인조차도 걸린다는 점에서 극우보수의 틀에 훌륭하게 들어가는 인물이기도 하고요. 


'김경수 실형' 성창호 부장판사, 양승태 '연금증액' 관여 정황

http://news1.kr/articles/?3538704


정황만으로 실형을 받는다면, 본인부터가 실형을 받아야 합니다. 아예 국정농단에 연루되어 있어 검찰조사까지 받았다는 점까지 포함하면 뭐.



마지막으로, 이번 판결에 있어서 발생한 가장 큰 문제가 뭐냐면, 증거재판주의에 손상을 입었다는 겁니다. 이미 불과 얼마전까지 페미 관련해서 증거도 없는데 성범죄자 만든다는 비판이 있었을 정도인데, 아예 정치적 계산을 깔고 정황만 가지고 선고를 내렸다는 거 자체가 굉장한 수위의 문제입니다.


증거재판주의가 무너지거나 판사 마음대로 적용하고 말고할 수 있는 게 된다면 이는 다시 말해 검사와 판사가 자기 마음대로 아무나 범죄자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게 됩니다. 이게 일반인들에게도 어떤 의미가 될 수 있는지, 그리고 정치적으로는 얼마나 더 악용이 될 수 있는지 생각해본다면 가벼운 일이 아니고 무시할만한 일이 아닙니다. 물론 깨어있는 보수국민들은 그게 뭐 문제되는 것인지도 모르고 뭐 진보새끼들 설레발만 존나게 치지 대단한 일이 일어나겠냐 싶겠지만, 그렇게 해서 일어난 크고 작은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이해를 못하기 때문이겠죠.



완벽한 가치중립성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고, 상식적인 법리의 적용조차 안 하고 정치적인 의도와 목적, 계산을 깔고 선고를 내려버리며 사법부와 법치의 신뢰성을 스스로 깍아부수는 짓을 저지르는 작금의 사태가 굉장히 실망스럽기 그지 없습니다.


다르게 말하자면 그들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무슨 짓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또 하나의 단면이기도 하겠죠. 그런 이들이 지금까지 대한민국의 사회, 그것도 고위직에 수 십년이나 암약해왔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그리고 그러한 이들이 적폐청산 과정 속에서 하나둘 씩 나타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이 나라가 얼마나 썩었고, 얼마나 더 많은 곰팡이들이 있을까 심란하기까지 하군요.


문재인 정권이 아무리 삽질을 하고 스스로 비판점을 발생시켜도, 지지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들이 정의이거나 선하거나 훌륭하기 때문이 아니라, 정치에서 최선은 존재하지 않고, 여러 선택지 중 차선을 선택해야 하며, 차선이 없다면 차라리 차악이라도 선택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자한당조차도 김경수에게 이러한 선고가 떨어질지 몰랐다는 것을 보면 이는 자한당과의 어떠한 커넥션이 있었던 것이 아닌, 사법부의 독자적인 적폐 행위라고 봐야할 겁니다. 자기 기득권을 지키고 정부에 반격(본인들 기준)을 하는 정치적 행위입니다. 똑같이 썩었기 때문에 발생할 수 있는 시츄에이션인 거죠. 참나.. 사법부가 정치질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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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난 작가는 뛰어난 철학자이기도 하다. 저는 예전부터 뛰어난 작품을 창작해내고 가공해내는 작가들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뛰어난 작가는 정식으로 철학을 공부한 것은 아니나, 철학자와 같은 것을 작가의 관점으로 관찰하고 통찰하기에, 뛰어난 작가일수록 그 작품에 담긴 지성과 나타나는 통찰은 깊고도 진하다고요. 

 

그런 의미에서 랑또 작가는 뛰어난 작가인 것이 사실입니다. 가담항설은 길 위의 소문, 항간의 뜬소문을 의미하는 사자성어로서, 넓은 의미에서 보자면 민중 그 자체를 의미하기도 한다고 생각하는데, 신룡이라는 철혈의 독재자라는 절대통치자, 절대무력을 무너뜨리고 인간의 주제성을 살리기 위한 목적의 플롯으로 이야기가 돌아가는 것으로 보고 있는데, 제목이 작품의 정체성을 나타낸다는 점을 생각하면 상당히 감각적인 네이밍 센스가 아닐까 싶습니다. 

 

 

개인적으로 가담항설의 1화는 참으로 마음에 드는 것이, 단지 관심과 임팩트를 주기 위해 1화를 일부러 자극적으로 연출해내고 시작해내는 일부 작품들--주로 라노벨 등에서--과는 다르게, 1화에서 보여주는 작품 속 중요 캐릭터와 전체 극의 중심을 꿰뚫을 요소를 배치해내 그 성격을 너무 자연스럽게 드러냈다는 점에서 가담항설 1화를 처음 보자마자 확 꽂혀버렸거든요.

 

1화에 등장하는 작품 속 최중요 주, 조연은 4명입니다. 세력으로 구분지었을 때는 신룡, 동죽과 복아와 한설이죠. 그리고 신룡은 얼핏 가벼워 보이지만 처음부터 인간에게 기대하지 않았다는, 어떻게 보면 싸이코처럼 보일 법한 캐릭터성을 드러내고, 신룡이 무엇을 명령하든 절대 복종하는 동죽의 캐릭터성을 보여줍니다. 

 

동시에 유약해보이고 걱정 많아 보이나 무언가를 진심으로 바라고 간절히 소망하는 복아와 천진하면서도 깨끗한 한설이가 나타나죠. 복아는 진심의 힘과 간절함을 분명하게 아는 캐릭터이고, 명영과의 과거에서 크게 변화한 인물이죠.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 그리고 제가 확 꽂혔다는 부분은 바로 한설의 등장입니다.

 

한설의 등장은 매우 상징성이 깊습니다. 복아는 천지신명께 무언가를 진심으로 간절히 빌었고, 그 직후 한설이가 등장하죠. 가담항설의 세계관에서 신룡은 철혈의 절대자, 독재자이고, 그 밑에서 만백성이 복종하게 되는 구조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다른 무엇도 아닌 사람의 형상으로 나타난 존재가 바로 한설이지요. 이는 마치 한설을 이 세상에 내려 무언가를 이룩하고자 하는 천지신명의 의중으로 해석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로 뒤에 한설은 왕을 만나러 간다고 했습니다. 중요한 건, 왕을 만나러 간다는 점과, 만나러 가는 것이 신룡이 아니라는 점이지요. 즉, 한설은 왕에게 무언가를 말해줘야 할 임무를 가지고 만들어졌으며, 그 시작은 복아의 기도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겁니다. 복아의 기원은 도련님(강명영)이 과거에 급제해서 익히고 깨달은 것을 왕에게 말하게 해달라는 것이었고요.

 

한설이 사람의 형상인 이유는, 단지 그게 기능적으로 편하고 오해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이 아니라면 알 수 없고, 사람의 형태가 아니라면 겪을 수 없는 여러 관계를 경험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더불어 자신이 깨달은 것을 왕에게 말하러 가기 위해선 먼 거리를 이동해야할 것이고, 많은 사람들과 여러 관계를 경험하게 될 것이죠. 한설이는 돌이었기에 태어나 자라 여러 경험을 하고 성장한 다른 이들과 다르게 깨끗한 하나의 백지 상태와 같습니다.

 

천동지가 글을 적어 소원을 실현시키는 보물이라면, 한설이는 사람의 형태로 복아의 소원을 실현시키는 보물이겠죠. 한설이가 백지이기 때문에 그 위에 적히고 그려질 것은 좋은 것들이어야 하겠죠. 하지만 글과 그림엔 안 좋은 것이 끼어 있다면 튈 것이고 완성도가 떨어지게 되겠지만, 사람에겐 그러한 안 좋은 것 또한 하나의 경험이고 성장의 양분이 됩니다.

 

종이는 성장할 수 없죠. 하지만 사람이 된 한설이는 성장할 수 있게 됩니다. 순수하기에 명확하고, 명확하기에 정확하죠. 한설이가 모험을 통해 보고 듣고 배운 것. 깨달음을 왕에게 말한다면, 무언가 변하게 될 것입니다. 왕은 인간 중 가장 높은 존재로서, 신룡이라는 비현실적인 요소를 제외하고 보면 만인지상의 위치에 있는 자입니다. 신룡이 아닌 왕에게 가서 말을 해줘야 한다는 점은 천지신명이 신룡이라는 존재를 거부하거나, 거부하고자 하는 인간의 의지를 돕기 위함이지 싶더군요.

 

 

가담항설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다 각자의 사정이 있었고, 그 삶에서 얻어진 깊이가 깊습니다. 보고 배워서 얻어진 지성이 아니라, 삶을 살아서 겪고 다치며 생각하고 이입하면서 얻어진 감성이기에 그들이 하는 말들은 사람의 마음 속 깊은 곳을 자극하고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지 명확하게 알 수 있게 하죠.

 

이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마음입니다. 주체성은 마음에서 시작되는 거죠. 누군가를 사모하고, 아끼고, 걱정하고 슬퍼하는 모든 것은 주체적이기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이고, 도구나 장치였다면 할 수 없는 것이죠. 설령 그것이 노비이고 백정이라도 그들이 주체적으로 살아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것이 마음이지요. 혹은 마음이 있기 때문에 주체적일 수 있는 것일 겁니다.

 

백정인 태하가 장님 아가씨를 사모하고, 그 장님 아가씨 또한 태하를 사모했던 것처럼 마음, 진심이라는 것엔 장벽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죠. 신분이나 상황이 어떠하든 의지를 가지고 진심을 드러내며 인간 개개인의 주체성을 직접적으로 보여주죠. 

 

 

랑또라는 작가의 실력이 다른 어중이떠중이들에 비해 격이 몇 단계는 높다고 여겨지는 부분은 바로 사람의 마음을 정확하게 통찰해내고, 그것을 부족함 없고 차고도 넘치지 않는 문장으로 정리해냈다는 점입니다.

 

가슴으로만 하는 이해는 문장이 부족하기에 설명할 수 없어 아쉽고, 말만으로 설명하는 사실은 감정이 깃들어 있지 않아 사람을 움직일 수 없습니다. 사람이 분노하든 행복하든 자신의 상태를 정확히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은 나름의 지적능력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타인에게 설명할 수 있다면 공감할 수 있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인연인 것이며 관계인 것이지요.

 

책을 읽고 풍부한 단어를 알게된 다는 건, 슬픔의 저 끝에서부터 기쁨의 저 끝까지. 자신이 알고 있는 수많은 감정의 결들을 하나하나 구분해내는 거에요. 정확히 그만큼의 감정을 정확히 그만큼의 단어로 집어내어 자신의 마음을 선명하게 들여다보는 거죠.  

 

(중략)

 

같은 단어를 알고 있다면 감정의 의미를 공유할 수 있고 같은 문장을 이해할 수 있다면, 감정의 흐름을 공유할 수있어요. 그리고 그건 서로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게 만들죠. 정기씨가 저에게, 제가 정기 씨에게. 그런 사람이면 좋겠어요.

 

앞으로의 많은 고난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와 위로가 되도록.

- 가담항설 90화 中 홍화

 

감정을 정확히 이해하고, 무엇인지 설명해낼 수 있다는 것은 동시에 자기 자신의 상태를 정확히 파악한다는 것이며, 자신을 정확히 파악한다는 것은 자신이 누구이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게 해줍니다. 나는 누구이며,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자신을 파악하고 재정의해낸다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재정립해내는 과정이기도 하죠.

 

언어란 바로 그런 것이며, 그런 힘을 가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의 힘. 거리를 떠도는 말들엔 무언가 담겨 있을 것이고, 한설의 임무가 바로 그것을 왕에게 전달하는 것입니다.

 

 

다른 캐릭터들은 어떤가요? 명영과 복아는 서로 살아온 삶이 달랐으면서도 서로를 이해할 수 있었고,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공부하던 명영이 달을 벗삼아 지냈던 시기에 복아라는 첫 친구, 나눌 수 있는 첫 타인이라는 관계를 겪으며 생소했을 복아와의 관계에서 올바른 길을 찾아 소중한 관계를 만들어가는 현명함과 조심스러움을 보았고, 그렇게 태어났기에 평생 불행할 거란 복아가 명영이라는 빛을 보고 올바른 길을 뒤따라갔으나, 그것은 온전히 명영 혼자만의 힘이 아니었고, 자신이 있었기에 그럴 수 있었음을 깨닫게 되죠.

 

명영은 복아를 아꼈고, 복아는 그 이상으로 명영을 아끼고 소중히 여겼습니다. 자신은 불행하게 태어났으니, 불행하게 될 것이라 여겼지만 그 지독한 밤 하늘 속 커다란 벗, 달을 보고 가르쳐준 지성을 통해 자신 또한 올바른 길을 걸을 수 있는 안목이 생겼죠. 

 

그렇지만 사람의 마음은 결코 강할수만은 없기에 서로가 서로를 아끼는 마음에 약점이 되기도 합니다. 명영은 과거를 보러 가지만 복아는 놔두고 가려 했고, 복아는 위험하니 보낼 수 없다고 했지만, 실은 서로가 서로를 걱정하기 때문에 명영은 자신의 신념을 위해 복아를 그런 위험한 책임 속에 같이 데려갈 수 없었고, 단지 자신이 없이도 현명히 살 수 있도록 안배해왔던 것이죠. 복아는 그런 명영을 그런 위험에 가게 둘 수 없었지만, 사실은 명영이 자신의 곁에 있어줬으면 한다는 소망이 더 강했기에 그저 보내지 못한 것일 뿐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약하기 때문에.

 

하지만.

 

복아야. 우린 오랜 시간 서로에게 둘 뿐이었지. 그동안 나의 세상이 훌륭했다면 그건 네가 훌륭했기 때문이야. 너는 나의 세상이고 나는 너의 세상이니까. 우린 세상의 일원이자 그 자체야. 하지만 같은 고통도 사람에 따라 견뎌낼 수 있는 정도가 다르고 어떤 고통은 개인이 도저히 극복해낼 수 없어. 

 

그때 우리가 서로의 약한 순간을 위해 손을 잡아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누구나, 언젠가 약할 수밖에 없는데도, 평생 약해지는 걸 두려워하며 살아야만 해.  

 

그래서 나는 더 많은 사람의 손을 잡으러 가려해. 과거시험은 그 길의 과정일 뿐이야. 그래서 과거를 보러 가는 거야. 하지만 그건 너의 신념이 아니니까 너를 데려갈 순 없어. 나는 나의 신념을 내가 이루기 위해 궁으로 가는 거니까.

 

(복아) 하지만... 그건 너무 위험하고 불가능한 일이에요. 

 

나의 신념은 그런 세상을 만들어내는 게 아니야. 그 길을 향해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는 내가 되는 것. 그게 나의 신념이야. 

 

 

명영은 복아에게 자신의 신념을 말하며 자신이 혼자 가야하는 당위를 설명합니다. 힘들어하는 이들, 약한 순간에 빠진 사람들의 손을 잡아주기 위해서 자신의 길을 가는 것이라고 하죠. 그리고 그것은 그런 세상을 만들기 위한 원대한 무언가. 어쩔 수 없이 손이 가닿지 않는 외부의 세계가 아니라 언제나 살펴보고 가다듬을 수 있는 내부의 세계, 자기 자신을 위해서라면서요.

 

복아야 괜찮아?!! 괜찮은 거 맞지?!!

나 지금...

앞이 안 보여서 잘 모르겠어. 

 

그 뒤 바로 현재 시점으로 돌아와 머리 위쪽이 날아가 앞을 볼 수 없는 한설이가 절벽에서 떨어지는 복아의 손을 잡아 줍니다. 정말 상징적인 컷이자 예술적인 구성이죠. 자신의 상태가 말이 아님에고 복아를 걱정하고 결코 놓지 않으려는, 자신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한설과, 앞이 보이지 않는 한설에게 눈이 되어주고, 길이 되어주며, 더불어 올바른 길을 볼 수 있게 해줄 수 있는 복아의 구조를 고작 몇 컷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명영이 복아 자신에게 그랬던 것처럼, 복아는 한설이에게 밤 길 위의 밝은 볓이, 달이 되어줄 수 있는 것입니다. 

 

 

복아야, 복아야!! 복아야!!

나... 과거 시험 봐야해. 알잖아, 넌.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나도 알아. 네가 날 위해 얼마나 헌신했는지!! 그러니까 제발... 너의 헌신이, 나의 노력이, 우리의 지난 모든 날이,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말하지 마... 

 

명영이 약하고 힘들어하는 시기.

 

그리고 바로 이어지는 복아의 자조어린 독백.

 

나는 반드시 불행해질 거야. 불행해질 수밖에 없게 태어났으니까. 

절대로 벗어날 수 없는 완벽한 불행을 가졌으니까.

이 사람은 왜 날 데려가는 걸까? 어르신은 날 왜 데려왔을까?

어차피 난 반드시 불행해질 텐데...

대체 왜 나를 데려온 거야!

나는... 어차피...

반드시 불행해질 텐데.

왜 나를 더 비참하게 만든 거야. 

 

복아는 노비입니다. 노비로 태어났기 때문에 노비인 것이죠. 그러니 반드시 불행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약자의 권리는 고통받는 것 뿐이니까요. 어차피 고통 받을 거라면 계속 고통을 받는 것이 낫지, 잠시라도 편안하고 행복하고, 미래를 꿈꿀 수 있으며, 그 상태에 젖어버리면 곧이어 뒤찾아올 채찍은 가시가 달린 듯 더 고통스럽고 아프게 하겠죠. 오히려 행복했기 때문에 앞으로 평생을 행복했던 때를 떠올리며 더 고통스럽게 될 것입니다.

 

잘해주지 말지.

다정하게 말하지 말지.

어쩌면...

어쩌면...

행복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만들지 말지.

 

사실은 여자라는 걸 알아챘음에도 모른 척하고, 이제는 키도 더 크고 힘도 더 세져 이길 수 있게 된 가슴 속 거대했던 명영이 자신보다 작고 약해져 지켜주고 싶은 사람이 되어버려, 속으로 몰래 사모하지만, 결코 같은 자리에 있을 수 없는 분명한 신분의 틀 속에서 자신은 더 비참해질 텐데.

 

 

복아야..!! 복아야...!!

 

(복아) 괜찮아요, 울지 마세요 도련님. 울지 마세요. 

 

복아야... 나는 왜... 나는.. 왜!!!

이렇게 태어났을까...!!

 

태생적 한계와 절망. 복아는 노비로 태어났기 때문에 스스로 불행해질 거라고 태생을 저주하고 자조했지만, 이는 자기 혼자만의 고민과 고통이 아니었죠. 명영은 여자로 태어났기에 사실은 과거를 볼 수 없었고, 때때로 그러한 사실은 칼날처럼 마음을 비집고 들어와 너는 여자야. 과거를 볼 수 없어. 여자이기 때문이야. 라는 현실을 끌어올리죠. 나는 왜 이렇게 태어났을까.

 

그 날

나는 왜

이곳에 따라온 걸까.

평생을 불행에 시달려놓고.

그게 얼마나 커다란 고통인지 누구보다 잘 알면서.

왜 똑같은 고통을 겪게 만든 거야!!

그 날

나는 왜

이곳에 따라온 걸까.

나는 왜...

나는 왜...!!

 

제가 대신 볼게요. 도련님이 글을 알려주시면, 제가 도련님 이름으로 시험을 볼테니까, 같이, 계속 공부해서-

궁으로 함께 들어가요. 

 

당신을 떠날 수가 없을까.

 

같은 날, 같은 고민과 후회. 자신은 행복할 수 없고, 비참해질 뿐이며, 명영은 과거를 보러 떠나게 되어 혼자가 될 것이니, 이제 그만 떠나자고 마음 먹었지만 그 고통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자신이 그러한 경험을 해본 적 없는 명영에게 같은 고통을 주게 될 것이라는 남을 생각하는 마음은 되려 그 자신을 더더욱 아프게 했습니다.

 

그래서 복아는 다시 돌아왔죠. 마음은 한가지 면만 있는 것이 아니므로, 하나는 후회와 미안함으로, 하나는 사랑과 미련의 마음으로. 같이 있고 싶어서 도련님의 이름으로 시험을 보고자 같이, 그리고 계속 공부해서 함께 궁에 들어가고 싶고, 그런 마음 때문에 떠나고자 해도 달 밝은 밤 환히 빛나는 밤 하늘과 그 별빛 아래 훤히 보이는 내가 갈 수 있는 길을 보고 내가 가야할 길을 가서 명영에게 돌아왔던 거죠. 

 

이걸 미련이라고 부르면 미련이 되겠지만, 난 이걸 희망이라고 불러. 

별들은 작고 멀리에 있지만 반드시 그 자리에 존재해. 그리고 그건 우리에게 길을 안내하지. 

 

(복아) 별은 하늘에 있고 제 발은 땅에 있어요. 눈앞은 어둡고 길은 너무 험해요.

 

걱정마, 복아야.

우리가 배운 모든 것이 네 길을 밝힐 테니.

넌 이미 많은 걸 알고 있어, 네가 안다는 걸 모를 뿐이지. 네가 정말 아무 것도 모른다면, 내가 널 혼자 돌려보낼 리 없잖아. 

날 믿지, 복아야? 나도 널 믿어. 네가-

다른 사람들에게 훌륭한 세상이 되어줄 거라는걸.

 

아무리 많은 것을 알아도 안다는 것을 모른다면 알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명영은 복아에게 자신이 어디에 있고 어디로 가야할지 알려주는 별이었지만 그 명영이 떠난다면 자신은 다시 어두운 세상 속에 내던져져 돌아가게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하지만 명영은 복아를 새로운 별로 만들었고 복아는 그걸 몰랐을 뿐이죠.

 

별은 타인에게 길을 알려주고, 별이 되어 누군가에게 훌륭한 세상이 되어줄 수 있습니다. 저 위에 복아가 앞이 보이지 않는 한설에게 별, 세상이 되어 가야할 길을 정확히 알려주게 되는 것은 명영의 이러한 가르침을 이어 받았기 때문입니다.

 

(복아) 이제 겨우 글자 배웠는데 벌써 이렇게 비단옷을 입어야 하는 이유가 있나요? 지금 당장 시험 보러 가는 것도 아닌데... 으이 어색해.

 

복아야, 옷차림은 단순히 신분을 드러내는 수단이 아니야. 그저 비단옷을 입었다고 남들이 널 양반으로 볼 거라고 생각하면 안 돼. 옷에 어울리는 자세를 갖춰야지!

 

(복아) 근데 뭐 대충 비단 옷 입으면 양반으로 보지 않나요? 양반이라고 다 품행이 바른 것도 아닌데.

 

그런 사람이 되지 않으려고 배우는 거니까. 네가 입은 옷을 통해서 예절, 기품, 자세, 몸가짐, 행동가지를 익히는 거야. 삶은 항상 그 자체로 우리에게 많은 걸 배우게 하잖아?

 

(복아) 뭐...뭔 소린지 모르겠어요.

 

후후 지금은 어색하겠지만, 언젠가는 이 옷에 잘 어울리는 네가 될 거라 믿어.

 

도련님은... 분명히 해낼 수 있을 거예요. 저는 도련님을 믿어요.

 

고마워 복아야. 이젠 그 옷이 아주 잘 어울리는구나.

 

벼는 익을 수록 고개를 숙이고, 기품과 품위는 행동가지에서 나타나죠. 단지 어떻게 입고 어떤 모양새를 하느냐가 아니라, 그 안에 든 것이 자연스럽게 밖으로 보여지는 것에서 우리는 그 사람의 품위를 느끼는 겁니다. 복아는 노비로 태어나 노비로 살아왔지만, 명영과 함께 공부하고 보고 배우면서 지성인의 품격을 갖춘 것입니다. 믿어주고 이끌어주는 훌륭한 스승을 두었으니.

 

인간은 누구나 약해. 어느 부분이, 어느 순간이, 단드시 약해. 인간은.

완벽한 인간이란 건 없어.

하지만 나의 약점은, 나의 불행은, 나와 같은 고통을 겪는 타인을 이해할 수 있게 하고, 너의 불행이 나의 불행이 되게 만들지.

그리고 그건 날 강하게 만들어.

네가 소중하니까.

너를 위한 강한 내가 되는 거야.

 

명영에게 복아는 이토록 소중한 존재입니다. 복아를 위해서 강해질 수 있었던 것이죠. 사람의 마음은 결코 갈할수만은 없기에 서로가 서로를 아끼는 마음에 약점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서로 헤어져 명영은 과거를 보러갔고, 복아 또한 결국 명영을 찾아 나서기 위해 길을 떠나게 된 것이죠.

 

서로가 서로의 약점이 되었지만, 그러한 약점이, 상대를 소중하게 여기기 때문에 더 강한 자신이 되는 겁니다. 복아가 힘들 때 명영이 손을 내밀어줬고, 명영이 힘들 때 복아가 희망이 되어주었죠. 서로가 서로를 붙잡고 넘어지지 않게, 떨어지지 않게 해줬다는 것이 그들은 성장하고 강해졌다는 증명입니다. 

 

 

이러한 명영과 복아의 관계 뿐 아니라 작품 속에 등장하는 명영-암주, 갑연-갑희, 영호-이청, 이청-춘복, 홍화-정기, 동죽-하난 등의 대비되며 입체성을 더더욱 부각시키고 극대화시키는 조합들에 대해서도 나름의 해석과 설명을 하면서 의미를 서술하고 싶지만, 명영과 복아만으로도 이렇게 길어질줄 몰랐던지라 엄두가 나지 않는군요.

 

어찌됐든 가담항설에서 주요하게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각기 다른 신분과 상황에서 서로간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간극을 어떤 이들은 진심과 배려를 통해 좁히고 이해하는 과정과, 어떤 이들은 반복과 갈등으로 그저 이기려 하는 싸움이 되는 또 하나의 대비가 발생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두가지 규모 다른 대비양상은 작품의 활동성을 구조적으로 보이게 하는 동시에 더더욱 입체적이고 간결하게 이해된다는 점에서 작품 구성의 뛰어남을 되새겨보게 됩니다. 만들기는 쉽지만 그게 입체적으로 보이게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고, 자연스럽게 배치하고 구성한다는 점에서 더더욱 작가의 역량에 놀라울 따름입니다.

 

심지어 그 뿐만이 아니라 컷 구성과 그림의 연출은 거의 예술적이라 여겨질 정도인 씬들이 있고, 그것을 수식하게 되는 문장들은 하나하나 버릴 게 없고 더할 것 없는 것들이니, 단지 경제적이라고 할 수도 없을 정도이죠.

 

 

정말이지, 이 작품 가담항설에선 그러한 보석 같이 빛나는 문장들이 사람의 마음을 정확히 짚어내고,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명확히 이해시킵니다. 그러한 통찰력은 아무나 가질 수 없기에 뛰어난 철학자인 것이고 그러한 문장력은 아무나 가질 수 없기에 뛰어난 작가인 것입니다. 이게 그 랑또라이로 불렸던 그 작가가 맞을까 싶을 정도로 대단한 역량입니다.

 

 

각기 다른 입장과 위치에서 세상을 보고 해석하는 것은 그만큼 세상의 복잡성을 보여주는 것이고, 사람의 마음은 같은 것을 보고 같은 세상에 있어도 서로 다를 수밖에 없음을 극명하게 드러내어 묘사하고 있죠. 명영과 암주가 달랐고, 갑연-갑희와 명영-복아와 달랐습니다. 세상 자체가 완전히 다른 세계였어요.

 

이들이 아니라도, 누군가는 축복 받으며 태어나 행복 속에서 자랐지만, 누군가는 축복 없이 태어나 고통과 두려움 속에서 아득바득 살아오며 자란 사람도 있는 법이죠. 이들의 세상은 같은 세상이지만, 사는 세계는 완전히 다릅니다. 그렇기에 선의의 신념을 담은 명영의 세상과 갑희의 세상이 다른 겁니다. 

 

인간에게 배신 당하고 춘매를 잃은 신룡의 세상 또한 그렇습니다. 겪기 전에는 전혀 알 수 없고, 될 수도 없었던 내가 하루 아침에 되는 경험은 누구도 겪고 싶지 않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는 그런 경험이죠. 상실喪失은 잃어버리는 것이라면, 상심傷心은 마음을 다치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룡은 마음喪心을 잃었습니다.

 

그런 마음을 잃어버린 사이코패스가 가진 유일한 감정이 바로 분노죠. 추국이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고 단지 기억만 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마을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마음 없는 지성은 분노와 광기에 빠진 괴물보다 더 잔혹한 괴물입니다.

 

인간이 아닌 신룡은, 마음 없는 신룡은 괴물인 셈이죠. 그런 괴물이 통치하는 세상이 어떻겠습니까? 그곳이 곳 지옥인 셈입니다. 그러한 지옥. 신룡이 그리는 인세의 지옥은 매우 소름끼치는 곳이죠. 

 

 

아주 예전에 들었던 말인데, 정확히는 기억이 나지 않아 개략적으로 서술하자면, 예술은 시대에 따라 변화했고, 과거 그리스적 기승전결에 따라 카타르시스, 감정적 전율을 느끼게 하는 작품과, 사회비판적 불편함을 느끼게 하여 시대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예술로 구분을 지은 내용인데, 저는 신룡이 그리는 인간세상에 대해 그러한 것을 떠올렸습니다.

 

너는 숱한 인간들이 어째서 나를 죽이려고 하는지 알고 있느냐.

내가 폭정을 휘두르고, 수많은 이들을 죽였기 때문에?

내가 죽인 자의 측근이 나를 향한 복수를 하려고?

아니면 새로운 권력을 잡기 위해서?

정의를 외치고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해?

아니, 날 죽이려고 하는 모든 이유는 오로지-

내가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내가 영생의 삶을 가진 불로불사의 몸이었다면 그 누구도 날 죽이러 오지 않았을 거다.

인간은 오로지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만 움직인다. 나라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든, 반드시 그 제도 하에 이득을 보는 자가 있고, 그렇지 않은 자가 세상을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바꾸기 위한 싸움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어떤 방식의 태도를 취하든, 누군가는 반드시 나를 죽이려 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공포와 절망으로 통제하려 한다.

어떤 명분을 가진 인간이든, 한치 앞이 보이지 않는 끝없는 어둠 속에선 절대로 섣불리 움직일 수 없다.

깊고 고요한 어둠은 인간의 두려움과 상상력을 자극하고 스스로를 공포에 몰아넣으며 생각과 행동을 위축되게 만들기 때문이다.

백매야.

과거의 나는...

춘매를 한없이 사랑하였으나, 그것은 그때의 춘매를 그때의 내가 사랑한 것이며, 내가 그리워하는 것은 그때의 그 순간임을.

하지만 다시는 그때로 돌아갈 수 없음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춘매의 시간은 그날로 멈추었지만, 나는 그 후로 9년을 더 살았고, 나는 춘매에게 그때의 내가 아니며, 나 또한 그때와 같은 마음으로 춘매를 대할 수 없다.

춘매가 알고 있던 세상과 내가 알게 된 세상은 완전히 다른 것이고, 춘매의 이상과 나의 이상은 더 이상 동시에 공존할 수가 없는 것이 되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것은 내게 춘매를 다시 살려내길 간절히 바라면서도 바랄 수 없게 만들었다.

하지만 나와 사군자는 오백 년을 넘긴 기도로 영원히 늙지 않고 병들지 않는 불로의 몸을 가졌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육신일 뿐이며, 무엇으로도 죽지 않는 불사의 몸인 것은 아니다.

오직 춘매만이 나와 사군자를 불사와 다름이 없는 몸으로 만들 수 있다.

춘매는 생명을 만들어내는 봄의 화신으로 춘매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우릴 죽음에서 부활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나의 천명은-

백성을 위한 완벽한 신이 되는 것이다.

춘매는 언제나 나에게 완벽한 신으로서의 용서와 자비를 말했지만, 용서와 자비는 비열한 자들을 위한 기회이고 구실이며, 오히려 압도적인 공포야말로 어리석은 인간들이 저지를 잘못을 사전에 차단하는 것이다.

애초에 이 나라의 평안을 나라는 단 한 사람의 선의에 의존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느냐?

인간이란, 다른 이의 잘못은 용서없는 처벌을 받길 원하면서 자신의 잘못에는 자비와 관용을 바란다.

자신의 비열함은 삶의 요령으로 포장하면서 타인은 원칙을 지키길 바라며 배신하면서도 배신당하고 싶지 않아하고, 악습인 걸 알면서도 자신이 이득을 보는 순간에는 그대로 답습하며, 공정한 기회보다 공평한 불행을 바라는게

바로 인간이다.

인간 본연의 성품이 저열하고 추악하기 그지없는, 지옥에나 걸맞는 것이라면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어주는 것이야말로, 완벽한 신이 해야 할 일이다.

그러므로 나는 인간들에게 지켜지지 않는 원칙과 명확하지 않은 규칙으로 어둠 속에서 눈을 멀게 하고,

단 한 번의 실수도 용서하지 않는 처절한 처벌로 한 걸음도 섣불리 내딛지 못하게 하며

불공정한 기회와 불공평한 결과로 포기와 체념에 익숙해지게 하겠다. 

그런 세상이 삶이 되고, 그 삶에서 얻은 경험이 자식에게 '삶이 준 교훈'이란 이름으로 대물림되며,

그것을 익혀 자란 모두가 그 삶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순응하지 않는 자를 배척하게 만들어

모두가 자발적으로 틀 안을 벗어나지 않는 영원한 통제의 굴레를 만들려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춘매를 되살려

나의 불사로 하여금 인간들에게 완벽한 절망을 안겨주고,

스스로를 끝없는 어둠 속에 가두게 하겠다.

 

... 정말 공포스럽기 그지 없는 말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장면 중 하나가 바로 명영과 복아의 진심이 드러나는 장면과, 춘복이 아들을 잃고 깨닫게 되며 다시 청이를 구하러 가는 장면과 더불어 신룡이 진심을 드러내며 세상을 어떻게 만들 것인지 '천명'하는 이 장면이죠.

 

이 말들은 어느 시대든 그럴 것이지만, 분명한 인간과 사회의 원리, 원칙을 이해하고 그 핵심을 정확하게 꿰뚫으며, 초인 독재자가 존재한다면, 그리고 그가 악하다면(혹은 악한 신념을 가졌다면) 어떻게 통치될 것인가를 묘사한 것과 다름 없다고 봅니다. 더불어 이러한 서술로 그 핵심적 요소들을 나열한 것은 독자로 하여금 그러한 사회를 상상하게 만들고, 자연히 현 사회와 비교하게 만들거나 연상하게끔 합니다.

 

이는 동양 판타지라는 작품임에도 사회적 비판이 가장 날카롭고 차갑고도 뜨겁게 벼려진 송곳. 아니, 작두처럼 휘둘러지는 장면이 아닌가 싶을 정도죠. 어지간한 사회비판 작품보다도 더 날카로웠습니다. 

 

그러한 사회를 바라는 집단이 현실에도 존재했고, 지금도 존재하고 있으며, 그러한 원칙 아래 정치와 통치가 작동한다는 점은 이 작품에서 말하는 지옥 같은 세상이 단지 작품 속 세상, 말 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그리스적 기승전결을 정석적으로 따라가는 판타지소년 만화인 동시에, 날선 비판성이 뚫고 나오는 현대적 문학작품이기도 하다는 평가를 주고 싶습니다.

 

물론 이런 작품이 한 두개도 아니지만, 사람의 감정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면서도 단지 감정만을 건드리지도, 어중간한 비판만을 하며 사실, 혹은 해석만을 나열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작품성을 거대하게 팽창시키고 있죠.

 

 

그리고 꼭 이야기하고 지나가야만 하는 요소가 있는데, 바로 판타지 장르답게 여러 마법 같은 능력을 사용하는 데 있어서 작가가 구축해대고 창조해낸 능력의 설정입니다.

 

이게 왜 꼭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냐면, 기본적으로 가담항설은 문학이라는 것을 근간으로 세계관의 능력을 만들어낸 작품입니다. 따라서 작품 내에서 사용되는 여러 능력들은 그러한 문학의 구성요소, 말과 글의 구성요소를 모티브로 따와서 만들어낸 것들이거든요.

 

능력의 수준은 지식의 깊음에서 나오고, 각인과 같은 능력을 사용하기 위해선 그에 대한 지식과 이해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하죠. 또한 결계 같은 능력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랑또가 정말 대단한게 다른 양판소나 일본산 라노벨 같은 곳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유치한 능력이 아니라 현실에 존재하는 개념을 설득력 있고 개연성 있는 능력으로 가공해내서 이용한다는 겁니다. 각인, 결계, 독안과 같은 능력을 문학과 접목시켜. 아니, 문학의 개념을 통해 각각을 구체적인 능력으로 만들어냈는데, 그러한 것들이 어떻게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설득력 있게 서술해냅니다. 

 

결계와 같은 것을 만들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묘사력인데, 무언가를 정확히 묘사할 수 없다면 그것을 타인에게 전달할 수 없죠. 그렇기 때문에 결계와 같은 자신의 의지, 상상을 타인에게 전달하기 위해선 그만큼 구체적이고 와닿는 묘사력이 필요하게 됩니다. 그리고 묘사를 더 정확하게 하기 위해선 많은 것을 알아야 하는데, 단순히 단어를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독서를 통해지식을 쌓고, 직접 보고 들어 견문을 넓혀 식견을 만들어야 한다고 하죠.

 

독서를 통해 지식과 통찰력을 기르고, 직접 보고 겪는 현실을 통해 자신이 아는 것을 단지 지식으로서 아는 것이 아닌, 몸으로 직접 느끼며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글쓰기, 문학 또한 그러한 맥락에서 좋은 묘사력이라는 것은 여러 종류의 경험에서 나오는 법이죠.

 

많은 글을 읽어봐야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고, 직접 겪어본 것을 더 정확히 묘사하며, 직접 많이 써봐야 그러한 시행착오를 통해 더 좋은 글, 더 훌륭한 글, 뛰어난 문장력이 만들어지죠. 작품 내에서도 시 짓기 또한 결계사들의 중요한 수련이라고 합니다. 

 

능력 중에서 개인적으로 독안이라는 개념을 참 좋아하는데, 독안으로 결계를 읽는 것을 독력, 이를 풀어내는 것을 해력이라고 합니다. 합쳐서 독해력이라고 하죠. 독해력은 현실에서도 글을 읽고 해석하고 이해하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단지 읽기만 해서는 무슨 의미인지 모르고, 이해하기 위해선 해석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읽을 수 있어야 하죠.

 

뛰어난 독해력을 가졌다는 것은 문장의 기본 단위를 논리적으로 분해해서 파악하고 그 구성과 성분을 이해하는 지적과정을 잘 해낸다는 것입니다. 마땅히 뛰어난 독해력을 갖추기 위해선 그만큼 뛰어난 지성을 필요로 하고요. 그러한 것을 갖추어 많은 것을 알고 잘 쓴 글을 쓰며, 잘 이해하는 사람을 보고 우리는 뛰어난 식견을 갖췄다고도 합니다. 

 

가담항설에 나오는 비현실적인 능력이 말의 힘, 글의 힘에서 나온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독해력이라는 현실에 존재하는 문학적 개념을 판타지적으로 해석하여 독력과 해력이라는 개념으로 재가공하는(비단 독안 뿐만 아니라 다른 능력들도.) 랑또의 창의력은 정말 참신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무엇보다 대단한 점은, 그것들이 결코 유치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전혀 있어보이기만 하지도 않다는 것 또한이요. 넘치치도, 부족하지도 않은 그 상태에서 발휘되는 작품 완성도의 완전성은 독자로 하여금 압도되게 하지 않나 싶습니다.

 

 

더불어 랑또 작가, 가담항설의 특기할만한 점은, 문학성에 있어서 일본 작품들과의 차이점인데, 일본 작품들의 경우 작가의 사색이나 통찰이 뛰어나도 철학적 정리가 잘 되어 있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대신 감정을 잡아내는데에는 꽤 일품인 경우가 적지 않죠. 다르게 말하자면 말로 정리하는 건 잘 못해도, 감각적으로 이해시키는 건 나름 잘하는 편이라는 겁니다. 물론 그것도 잘 하는 작가들이 그런 거긴 합니다만..

 

반면 랑또 작가는 그러한 사색을 말로써 아주 잘 정리해서 우리에게 제시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글(말)로 정리해서 소개할 수 없다면 그것은 진짜 자신의 지식이 아니고, 자기가 진짜 알고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하는 편인지라, 단지 일본 작가들의 문학적 이해도, 철학적 정립성이 떨어졌기 때문에 자신이 느끼고 상상하고 직간접적으로 감각하는 그 감정과 감성들을 글로 잘 표현해내지 못해서 어떤 면에선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느낌에 답답하기도 할 때가 있더군요.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랑또 작가의 가담항설은 그러한 감각을 정확하게 글로 표현하고,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문학적 표현의 형식으로서 아주 정확하게 정리해서 대사를 뽑아낸다는 점에서 굉장한 철학가인 셈이죠. 그렇다고 독자의 감정과 감성을 잘 못잡아내느냐? 그것도 결코 아닙니다. 아주 능수능란하게 가지고 논다는 점에서 괴물 같은 작가이기까지 하죠. 일본식 신파와 심각한 척 분위기 잡는 것은 전혀 없고, 그 인물들의 깊은 캐릭터성을 통해 우려내기에 어색함도, 작위성도 느껴지지 않죠. 결코 말을 늘이지도, 줄이지도 않기 때문에 각각의 대사를 음미할 수 있고, 음미하면할 수록 캐릭터성의 깊은 맛에 큰 매력을 느끼며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대사를 허투루 쓰질 않더군요.

 

 

가담항설이라는 작품처럼 훌륭한 작품은 참으로 욕심이 납니다. 정말 각각의 캐릭터와 구성, 인물관계가 흥미롭고 재미있어서 하나도 빠짐없이 설명하고 이야기하고 싶어지게 된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갑연, 갑희나 암주, 홍화, 정기, 이청, 영호, 춘복 등.. 설명하고 해석해보고 싶은 캐릭터들이 너무 많습니다. 하지만 그러기 너무 힘들죠. 글도 길어지고. 보는 이에게 욕심이 나게 만드는 작품이 좋은 작품이겠죠. 전 이 작품을 현재 연재되는 작품 중 가장 수준이 높고 뛰어난 작품이라고 평가합니다. 당연히 그런 창작물을 만드는 랑또 작가에 대한 평가는 더더욱 높아야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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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 언론의 핵심은 조중동이고, 진보 언론의 핵심은 한경오라고 하죠.


가장 덩치가 크고, 큰 만큼 영향력도 크니까요. 그런 만큼 각각 진보적 의제와 보수적 의제를 가지고 사회적 이슈로 간접적인 경쟁과 대립을 하곤 했지만, 이는 엄밀히 말해서 그들 중 어느 쪽이 더 정의롭거나 공정하거나 뛰어난 지성을 갖추었기 때문이 아니고, 반대로 각각 다른 이념을 기반으로 사회현상을 설명하거나 전달하기 위함인 것도 아닙니다. 



이들은 그저 서로의 미디어라는 상품을 파는 대상이 달랐던 것 뿐입니다. 조중동은 보수, 우파라는 고객에게 자기들의, 혹은 자기들의 파트너가 원하는 이념과 메시지를 팔았을 뿐이고, 한경오는 그 반대에 불과했습니다.



독재와 부패의 핵심과 오랫동안 붙어 먹은 조중동과 다르게 그들을 오랫동안 비판해왔고, 실제로 올곧은 신념을 가지고 투쟁했던 이들도 있는 만큼 한경오가 조금 더 낫다고 할 수 있지만, 지금에 와서 그러한 구분은 의미가 없을 정도로 동질화 되었습니다. 어느 한쪽에 동질화 됐다는 게 아니라, 그냥 똑같은 수준과 냄새로 타락했다는 것 뿐입니다. 


만약 진보 언론이라던 한경오가 그토록 더 도덕적이었다면, 노무현 정부와 문재인 정부에 대한 잔혹한 이빨질이 있어선 안 됩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어느 누구보다 비윤리적으로 물어 뜯는 개가 되어버렸죠.



그 이유는 그들이 정말 도덕적이거나 정의로운 집단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문재인은 정의와 공정을 기치로 대통령직에 올랐고, 그것을 실현시키리라 공언했습니다. 물론 애초에 불가능한 일도 있었고, 어떤 것들은 현실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었으며, 어떤 문제에 대해선 야당과 언론, 일부 국민의 불공정하고 부당한 발목잡기와 공격이 있었기 때문에 실현하지 못하고 있죠.


이는 어떠한 면에선 분명 비판의 요인이 되고, 되어야만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원론과 별개로 한경오가 그러한 부정부패에서 상당한 거리가 있는 이 정부를 그토록 잔혹하게 물어뜯는 이유는, 그들 또한 조중동과 다를 바 없이 부정부패하고 타락한 집단이었기 때문이죠.


자신들 또한 그러한 부정부패와 함께 재미 좀 봤던 이들이기도 합니다. 당장 부정청탁 금지법. 흔히 김영란 법이라 알려진 그 법을 추진하고 실행하는 과정에서 진보 언론이라는 이들은 보수 언론이라는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고, 여러 정부의 더 도덕적이고 더 정의로운 정책과 개혁을 꾸준히 반대해 왔습니다.


부정, 혹은 특혜를 옹호하는 자들은 그것의 혜택을 받는 자들이거나 노예근성 쩌는 개돼지인 경우인 점을 생각해본다면, 언론 권력을 쥐고 있고 직접 휘두르는 기자, 언론인, 언론사의 행동이 어떠한 기저에서 나왔는 지는 명약관화한 셈이죠.


'그들'은 '그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상당히 닮았어요. 언론 또한 기업이고, 한국에서 기업에게서 도덕성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 이해하기 쉬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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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 한국만의 이야기는 아니지만, 높은 직위에 있는 사람을 처벌하거나 짤라야할 때 간혹 이런 이야기가 나오곤 합니다.


저 뛰어난 사람, 더 높은 직위에 올라간 사람을 내치면 일할 사람 누가 있겠느냐. 


귀한 사람은 고쳐 쓰는 거라는 말이죠. 하지만 기본적으로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닙니다. 고장 났음에도 쓸 수밖에 없을 때나 쓰는 것 뿐이죠. 실제로 말은 안 할 뿐이지 부정부패한 범죄자를 다시 데려와서 다른 높은 자리에 보내거나, 다시 쓰는 경우는 꽤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런 경우에 욕 한번 하고 마는 것 뿐이지 사실 굉장히 무감각한 것도 찾아볼 수 있고요.


하지만 우리가 그런 사람들을 더 적극적으로 배재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에겐 인재가 썩어 넘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없다. 인재가 없다는 말은 웃기지도 않은 거짓말입니다. 사람이 없다는 말은 내 입맛에 맞는 사람이 없다. 라는 말로 바꿔야 합니다. 내 편이 아니어서 입맛에 안 맞고, 내 진영이 아니라 입맛에 안 맞고, 내 이해관계와 달라서 입맛에 안 맞는 거죠.


한국은 세계에서 대학진학자들이 가장 많은 나라 중 하나고, 고스펙에 능력도 뛰어난 사람들 많습니다. 젊은 이들 중에도 많고, 중년 이상의 세대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는 있어요. 하지만 그들이 기존의 기득권에 편입되지 못하는 이유는 다른 능력은 있는 자들과의 경쟁에서 패배했기 때문에 자리를 차지하지 못했기 때문이거나, 그들의 집단과 사상, 이해관계 등이 다르기 때문이죠.


가령, 부정부패한 집단엔 청렴한 인재가 들어갈 수 없습니다. 가도 못 버티곤 하고요.



그런 집단 내에서 부정부패나 범죄, 다른 도덕적 문제 등으로 인해 짤릴 때 여러가지 이유를 들어가며 쉴드를 치곤 하는데, 그 변명과 명분 중에서도 쓸 사람이 없어서 안 된다 같은 이야기는 그냥 같은 편, 같은 진영의 소속원을 지키기 위한 행동이고, 우리는 그런 집단을 카르텔이라 부릅니다. 


인재는 많아요. 진짜 정말 많습니다. 단지 자기들 입맛에 맞지 않기 때문에 배제 당하는 것이고, 카르텔을 지키기 위해서, 서로가 서로를 봐주고 지켜주기 위해 견고하게 이루어진 것 뿐이죠.


정당하고 정의로운 집단이라면 그런 정치적 논리와 의도하에 굳이 보호하지 않을 겁니다. 최소한 그 선이 매우 높겠죠. 아무나 지켜주지 않을.



고위직이 범죄를 저지른다는 것은 사회적 손실을 발생시키는 거고, 그 직위가 높고, 그 권한이 클수록 그 병폐는 더 크고 더 넓게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이에 따라 정당한 처벌이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정치논리와 진영논리로 그런 고장난 부품을 지키는 것은 결국 고장난 부품을 그대로 굴리는 일이고, 고쳐지지 못한 장치는 결국 망가지게 되어 있습니다. 국가는 그렇게 쉽게 망하는 게 아니니 더 큰 피해를 발생시키는 더 큰 고장이 나게 되죠.


부패의 카르텔을 없애야 하는 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부정부패란 정의롭지 않은(不正) 도덕적, 정신적 타락(腐敗)을 말합니다. 정의롭지 않은 것이 전체의 이익을 발생시킬 수는 없습니다. 언제나 다수의 이익을 착취하여 소수의 이익으로 걸러내죠. 이익은 내꺼, 손해는 니꺼.



인재가 없는 것도, 적은 것도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고장난 부품을 빠르게 교체해내야 합니다. 물론 그 정도를 따져야 할 것이고, 그 처벌의 선상은 공정해야할 것입니다. 하지만 일정 선상을 넘은 고장이라면, 그 부품은 교체되어야 맞죠. 수리가 불가능하거나 그 비용이 더 크다면 새로 쓰는 게 맞습니다.



따라서 인재가 없다느니 정치공세라느니 큰 문제가 아니라느니 하는 둥 하는 이들은 딱 두가지 부류밖에 없습니다. 선동에 넘어간 자, 혹은 선동을 하는 자. 


후자의 경우 자기 진영의 인물, 자기가 소속된 카르텔을 지켜야 한다는 직간접적인 이해관계가 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전자의 경우는 그냥 자기 의견과 판단력 없이 그 부패한 진영의 정치 논리를 그대로 답습하여 앵무새처럼 떠드는 것 뿐입니다. 다시 말해, 선동 당했다는 겁니다.



현재 한국의 고위 공직자, 고위 재계 인사 중에서 가볍지 않은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지 생각해본다면, 정말 거대한 규모의 물갈이가 필요하다는 결론만 나옵니다. 이 또한 결코 작지 않은 파장과 여파, 비용과 손실을 발생시키겠지만, 해야하는 일이라면 반드시 하는 게 맞습니다. 할 수 있느냐는 별개고 그 방법 또한 다양할테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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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뽕 겁나 차오르게 만드는 영상입니다. 이거 말고도  Yuve Yuve Yu (https://www.youtube.com/watch?v=v4xZUr0BEfE)라는 곡도 있는데, 이것도 괜찮은 곡입니다.


몽골 평원을 배경으로 거친 몽골 상남자들이 모여서 유목적 사운드를 바탕으로 메탈을 하는데, 이게 이렇게 멋지고 Badass해보일 줄이야.. 몽골 간지야 전부터 알았지만, 이게 메탈과 만나니 아주 죽여주네요.


배경에 있는 멤버들도 인상과 무게감이 정말 압도적인데, 스티븐 연 닮은 멤버는 좀 가벼워 보인다는 점 때문에 튀는 인상이 있긴 하지만, 대부분 인상에서 나오는 무게감과 카리스마가 죽여줍니다. 


아래는 키릴 문자, 로마자 표기, 영어, 한국어 가사 및 해석입니다.


Lyrics -


https://lyricstranslate.com/ko/wolf-totem-%D1%87%D0%BE%D0%BD%D0%BE%D0%BD-%D1%81%D2%AF%D0%BB%D0%B4%D1%8D%D1%82-wolf-totem-wolfs-totem.html


Арслан ирвээс алалдан уралдъя

Arslan irvaiis alaldan urald'ya

The lion is in a bloody battle to the death

한 사자가 죽음을 향한 혈투를 하네

Барс ирвээс байлдан уралдъя

Bars irvaiis bayildan urald'ya

The tiger overcomes the leopard in a match

범은 표범을 물어 죽이고

Заан ирвээс жанчилдан уралдъя

Zaan irvaiis zhanchildan urald'ya

The elephant thrashes the leopard in a contest

장에서 코끼리는 표범을 박살냈다네

Хүн ирвээс хүчилдэн уралдъя

Khün irvaiis khüchilden urald'ya

Man intensely struggles with a leopard to contend

남자는 표범과 극렬히 투쟁한다.


Бид арслан ирвээс алалдан уралдъя

Bid arslan irvaiis alaldan urald'ya

We, the lions slaughter the leopards in a match

우리, 사자는 표범을 도살하였고,

Барс ирвээс байлдан уралдъя

Bars irvaiis bayildan urald'ya

The tiger beats the leopard in a contest

범이 표범을 짓밟았으며,

Заан ирвээс жанчилдан уралдъя

Zaan irvaiis zhanchildan urald'ya

The elephant trounces the leopard in a fight

코끼리는 표범을 때려 눕혔다.

Хүн ирвээс хүчилдэн уралдъя

Khün irvaiis khüchilden urald'ya

Man strenuously strains with a leopard in contention

남자는 표범과 격렬하게 투전한다.


Хатгагч эрээн могой болох бол

Khatgagch airaiin mogoyi bolokh bol

An instigator, the jealousy of a snake it could be

뱀 조차 질시할 한 선동자가 있었고,

Хангарьд болон дээгүүр нь дүүлнэ

Khangar'd bolon daiigüür en düülnai

And Khan Garuda leaps up above into the air

칸 가루다는 공중에 뛰어 올랐네.

Хүрхрэх эрээн барс болох бол

Khürkhraikh aiaiin bars bolokh bol

A growl, the jealousy of a tiger it could be

범조차 질시한 그 포효.

Хөх зогдорт алслан болъё

Khökh zogdort alsan bol'yö

The blue wolf comes too from far away

푸른 늑대는 그리도 먼 곳에서 오는가.



ху - ху - ху - ху...

khu - khu - khu - khu...

Hu - hu - hu - hu...

후 - 후 - 후 - 후...

ху - ху - ху - ху...

khu - khu - khu - khu...

Hu - hu - hu - hu...

후 - 후 - 후 - 후...


Өдөөд ирвээс өрсөлдөн тэмцэе

Ödööd iraiis örsöldön taimtsaie

Provoked, the snow leopard competes with it's rivals

자극받은 설표는 필적과 경쟁한다.


Аравт болон аянгалан ниргэе

Aravt bolon ayangalan nirgaie

Ten thunderbolts strike at the same time

열의 우뢰가 일시에 내려치며

Зуут болон зүрхэнд нь ниргэе

Zuut bolon zürkhaind en nirgaie

A hundred hearts energized in the thundering roar

백의 심장이 천둥처럼 울린다.

Мянгат болон мөргөлдөн ниргэе

Myangat bolon mörgöldön nirgaie

Simultaneously a thousand colliding thunderbolts

천의 우뢰가 일시에 터져울린다.

Түмт болон тэнгэрээр ниргэе

Tümt bolon taingairaiir nirgaie

And too, ten thousand lightning strikes in the heavens

그리하며, 만의 번개가 천국에 울리는 도다.



ху - ху, ху - ху...

khu - khu - khu - khu...

Hu - hu - hu - hu...

후- 후 - 후 - 후...

ху - ху, ху - ху...

khu - khu - khu - khu...

Hu - hu - hu - hu...

후- 후 - 후 - 후...



Үерлэн ирвээс үхэлдэн үзэлцье

Üerlain iraiis ükhaildain üzailts'e

This deluge is the leopard battling in a deadly fight

표범의 살투는 대홍수를 일으켰고

Нөмрөн ирвээс нүдэлдэн уралдъя

Nömrön irvaiis nüdaildain urald'ya

The surges of the leopard scuffling in competition

표범의 난투는 큰 파도를 일으키며,

Нисэлдэн ирвээс харвалдан унагъя

Nisaildain irvaiis kharvaldan unag'ya

The awesome leopard swats, blows to overthrow

이 뛰어난 표범은 정복자를 타도한다.

Цахилан ирвээс цавчилдан тэмцье

Tsakhilan irvaiis tsavchildan taimys'e

The glistening leopard slashes in the scramble

눈부신 표범이 경합을 찢발긴 도다.


 

ху - ху, ху - ху...

khu - khu - khu - khu...

Hu - hu - hu - hu...

후- 후 - 후 - 후...

ху - ху, ху - ху...

khu - khu - khu - khu...

Hu - hu - hu - hu...

후- 후 - 후 - 후...

 

Шонхорын хурдаар хурцлан давшъя

Shonkhoryn khurdaar khrtslan davsh'ya

With the speed of the falcon advancing

매의 사냥과 같은 빠르기로,

Чонын зоригоор асан дүрэлзэье

Chonyn zorigoor asan dürailzai'e

The wolf's courage at times flaring up

늑대의 용맹은 점점 커져만 간다.

Тэнхээт морьдын туурайгаар нүргэе

Tainkhaiit mor'dyn tuurayigaar nürgaie

The strength of horses hooves, their paces pounding

말의 발굽과 같은 힘으로, 그들은 땅을 박찬다.

Тамгат Чингисийн ухаанаар даръя

Tamgat Chingisiyin ukhaanaar dar'ya

The mark of Genghis Khan, an overwhelming impression

징기스 칸의 징표가 압도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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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 곱슬, 계란형에 동글동글한 얼굴, 수줍은 입술, 동그랗고 얇은 테의 안경, 빨간 코, 적당히 후줄근하게, 혹은 털털하게 입은 옷 등.. 살짝 보이쉬하면서도 되게 귀여운 인상이라 눈이 되게 간 유튜버입니다. 이런 인상, 스타일이 흔하진 않죠. 소화하기도, 만들기도 어렵다보니..


사실 이 유튜버는 한국어를 못 합니다. 근데 그냥 한국어 발음을 외워서 부른 거죠. 그래서인지 ㅔ로 끝나는 발음을 ㅔㅣ로 처리하기도 하는데, 오히려 그런 면에서 외국인 특유의 매력적인 서투른 발음이 더 귀엽습니다.


노래를 잘 부른다고 하기엔 수수하고 평범하지만, 특유의 목소리와 나긋나긋한 분위기가 더해지니 참 매력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Lyrics - 


내일이 올 걸 아는데

난 핸드폰을 놓지 못해

잠은 올 생각이 없대 yeah

다시 인스타그램 인스타그램 하네

잘 난 사람 많고 많지

누군 어디를 놀러 갔다지

좋아요는 안 눌렀어

나만 이런 것 같아서

저기 인스타그램 인스타그램 속엔


문제야 문제

온 세상 속에

똑같은 사랑노래가

와 닿지 못해

나의 밤 속엔

생각이 너무 많네


복잡해 틈 만나면 바뀌는 게

관둘래 이 놈의 정보화 시대

단단히 잘못 됐어

요즘은 아는게 더 괴로운 것 같은데


가면 갈 수록

너무 어려워

나만 이런 건지

클럽 말고 뭐

영화 말고 뭐

없나 하다 결국 동네

내 맘에는 구멍이 있어

그건 뭘로도 못 채우는 것 yeah

난 지금 가라앉는 중 인걸 네모난 바다 속에서


문제야 문제

온 세상 속에

똑같은 사랑 노래가

와 닿지 못해

나의 밤 속엔

생각이 너무 많네


뚜루루뚜 뚜루루뚜 뚜루루뚜 뚜루루뚜


all night

그렇게 시간 낭비를 하네

저 인스타그램 속에서

Lonely lonely so lonely

원래 이리도 힘든가요

no way no way

이 피드 속엔

나완 다른 세상 뿐인데


부질없이 올려 놓은 사진

뒤에 가려진 내 마음을

아는 이 없네

난 또 헤 메이네

저 인스타그램 속에서


그래 너는 요즘 어때

잠 못 자는 건 여전해

자른 단발이 참 예쁘던데

좋아요는 안 눌렀어

조금 웃긴것 같아서


뚜루루뚜 뚜루루뚜 뚜루루뚜 뚜루루뚜


all night

그렇게 시간 낭비를 하네

네 인스타그램 속에서


작사: Kwon Hyuk / CHO DAE H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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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정보도 무조건 1면에 실으라는 與… 세계에서 유례없는 법안

https://news.naver.com/main/ranking/read.nhn?mid=etc&sid1=111&rankingType=popular_day&oid=020&aid=0003189842&date=20181228&type=1&rankingSeq=9&rankingSectionId=100



오보 사건, 혹은 무고 사건에 대해 열심히 욕하고 까대던 언론이, 정작 상황이 뒤바뀌자 입 싹 다물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굴거나, 어디 구석탱이에 잘 보이지도 않는 곳에 정정보도를 자그맣게 실어서 우린 정정보도 했다는 식의 면피를 하는 경우, 한국 뿐만 아니라 어디를 가든 비슷한 경우는 많습니다. 단지 한국 언론의 양심 수준은 과거 독재시기 시민을 향해 총을 쏘았다는 소식을 전하지 못한 이들이 붓은 놓은 이후로 처참하리만치 땅에 떨어져버렸죠.


그러나 현대사회에서 정보의 중요성은 그 무엇보다 높고, 정치적 실력을 통해 언론을 반드시 통제하거나, 자기 편으로 만들거나, 협상하고 대화할 수 있는 상대로 만들려는 이유가 거기에 있죠. 인식을 지배해야 행동을 통제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보를 공식적으로, 그리고 대대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힘을 가진 것은 사실상 언론이 유일합니다. 정부가 무언가를 발표하고, 어딘가에서 어떠한 사건이 벌어지고, 인터넷에 아무리 글을 올려도, 최소한의 공신력과 신뢰성을 갖춘데다, 그러한 정보력과 전파성을 가진 유일한 매체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러한 언론이 사회에 해가 되는 공해성 행위를 했을 때인데, 일부러 교묘히 프레임을 만들어 선동을 하거나, 일부 진실은 가리고 일부 진실만 전하고, 혹은 일부 진실과 일부 거짓을 교묘히 섞어서 마치 전부가 하나의 사실인양 호도하거나, 기묘한 화법으로 비상식적인 일을 문제가 없는 것으로, 혹은 그 반대로 서술하기도 하죠. 


이러한 언론에 대해선 어떠한 견제책이 필요하지만, 마찬가지로 그러한 견제가 지나치거나 특정한 정치적 의도, 정치적 악의가 깃들어있다면 그게 곧 언론탄압이 되는 아슬아슬한 문제를 가지고 있죠.


이에 대해 저는 언론을 검증할 수 있는 전문팩트체크, 컨텍스트 검증 기관이나 조직 같은 게 필요하다고 보는 편이지만, 결국 정보를 전달하고 의도와 맥락을 서술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이라는 점에서 무엇이든 믿을 수 있는 게 있기나 한가 싶기도 합니다.



뭐 아무튼, 앞서의 이야기처럼 언론의 권력은 그 규모에 비해 막대하고, 그 영향력은 그 이상입니다. 이것이 잘못 작용하게 된다면 굉장한 사회적, 국가적, 심지어 국제적 문제가 터져버릴 수 있고 심대한 피해를 입힐 수도 있죠.


가령 저 위의 기사는 동아일보에서 쓴 것인데, 그 동아일보가 과거 신탁통치오보 사건을 통해 나라를 절단내버렸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그들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하는 말인지, 또한 얼마나 양심이 없고 수치를 모르는 지를 알 수 있습니다. 세계에서 유례가 없지만 그것이 정의롭고 올바른 방향성을 갖추고 있다면, 그것은 유례가 없는 게 아니라 최선진적인 거죠. 우리가 다른 나라를 앞서고 있다는 게 됩니다.



언론이 오보를 일으키면 수 많은 사람들에게 거짓된, 잘못된 정보를 인식시키는 계기가 됩니다. 연예계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죠. 여러 차례의 구설수나, 심지어 성범죄 의혹에 대해 열심히 물어뜯고 마치 그게 사실인양 보도했지만, 실제로는 아니었거나, 무고가 된 사례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에 대해 정정보도를 적극적으로 하지 않았고, 한다고 해도 작게, 잘 모르게 했죠.


그래서 몇년전까지만 해도 그러한 사건이 벌어지면 사람들은 실제로 어떻게 끝났는지 알지 못했고, 그 때문에 이미지는 나락에 떨어진 이들이 연예계에 쉽사리 복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나마 연예인 같은 유명인이기 때문에 찾아보려는 사람도, 알려지기도 쉽다는 점 덕분에 이미지가 복구되는 경우도 있지만, 일반인의 경우는 사회적 타살을 당하게 되는 것 뿐이죠. 개새끼가 됐을 뿐 누구도 알아주지 않으니까.



개인에게도, 사회적으로도 오보라는 위험과 피해, 비용을 발생시켰다면 언론은 그에 대해 합당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도의적으로든 아니든 언론은 자신의 실수와 발생시킨 피해에 대해서 그렇게 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언론이 그러지 않고 있으니, 이는 강제되어야 합니다. 


해당 법안을 발의한 사람 또한 언론계 출신인데, 그런 사람인만큼 언론계의 생리를 잘 알고 있을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저러한 법안을 발의한 것이겠죠. 또한 저도 동의합니다. 1면이 가지는 이점과 중요성, 무게감 또한 있지만, 사회적 비용과 피해에 대한 책임이 가지는 것 또한 매우 거대합니다. 그러니 그러한 이점을 포기하거나 손해보기 싫다면 그들의 취재와 보도에 있어서 더 큰 책임감과 검증력이 필요하게 되겠죠. 사회적인 이점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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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디 사회생활과 같이 기존의 집단에서 벗어나 더 다양한 환경과 인간관계의 경험을 접해보지 못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개 현실감각이 뒤떨어진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일베와 메갈과 같은 비정상적인 집단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특히 메갈과 같은 페미를 한다는 여성 진영에서는 특이할 정도로 현실감각과 개념이 결여되어 있는 경우를 너무 자주 찾아볼 수 있다는 점은 특기할만한 요소가 아닐까 합니다.



사실 이는 비단 페미를 한다는 여성들 뿐만 아니라 적지 않은 여성들이 가지는 이상한 착각들이 있습니다. 페미거나, 페미에 가까운 성향을 가지고 있거나 하는 경우 특히 더 그렇더군요.


가령 이수역 사건이나 아래의 방송에서 가지는 남성에 대한 이상한 관념이 그렇습니다. 흉기를 찾아온 가해자를 제압할 수 있느냐 물어놓고, 남자는 막을 수 있다. 제압할 수 있다는 듯이 말합니다.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죠. 남자 또한 사람이고, 그리 대단한 존재가 아닙니다.


여자들이 참 이상한게, 남자들을 무슨 초인, 슈퍼맨 같은 거라 생각해요. 그렇다보니 자기들이 때려도 별로 안 아픈 줄 알고, 세게 때려도 안 다치는 줄 알고, 무슨 엄청난 힘이나 맷집, 신체능력을 지닌 줄 압니다. 그러니 저런 가해자가 흉기를 들고 와도 제압할 수 있을 거다. 라는 이상한 생각을 가지고 있죠.




이는 이수역 사건 때도 여성 가해자측이 하는 말을 들어보세요. 발로 차서 언니가 그대로 공중으로 날았다고 하는데, 영화에서나 나오는 연출이지 일반적인 남성이 일반적인 여성(이라고 하기엔 체급이 뛰어났으나)을 발로 찬다고 공중에 날지는 않습니다.


그 정도가 되려면 체중이 거의 두배는 되어야 하고, 근육질이어야 하며, 여성은 평균보다 더 작고 체중도 적게 나가야 합니다. 가령 그 움짤 있잖아요. 최홍만이 여자가 들고 있는 짐볼을 발로 차니 뻥 하고 날아가는 그런 거. 그마저도 짐볼의 탄력 때문에 더 날아간 거지, 맨몸에 차서 그 정도 날아가려면 맞은 사람 내장 터질 정도로 온 힘을 실어 차야할 겁니다. 


이수역 폭행, 불편한 진실? 상대 커플 女 “언어강간·조리돌림 자매가 먼저” 반전 주장

http://www.gnmaeil.com/news/articleView.html?idxno=386474


그는 “가만히 있는 우리를 비웃으며 계속 쳐다봤고 5명의 남자가 끼어들어 비난하고 공격했다”라며 “폭행 후 도망가려던 남성을 붙잡는 중에 발로 차서 언니가 그대로 공중으로 날아서 계단 모서리에 뒷통수를 박았다”라고 주장했다.



뭐 어렸을 때부터 남성성이 부각되고 남자들 스스로도 허세 좀 섞어서 과장하는 면이 있고 그런 영향을 좀 받았다고 해도, 나이 먹어서도 그런 관념을 가지고 있다는 거 자체가 현실감각이 없다는 겁니다. 남성과의 접점과 현실에 대한 탐구심이 없고 관심이 없기 때문에 실제 남성의 현실적인 상태와 능력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거죠.


특히 이는 젊은 쪽일수록 심한데, 반대로 나이가 좀 있거나 결혼을 한 사람들은 그런 정도가 훨씬 떨어집니다. 남성과, 배우자와 더 현실적인 관계와 경험을 더 많이 했기 때문에 이상한 환상이나 관념이 상당히 깍여나간 상태죠.


다르게 말하자면, 여성은 남성에 대한 성적 감수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무슨 초인이니 슈퍼맨이니 할 법한 신체능력을 가지고 있고, 사회적으로는 여성보다 압도적으로 유리한 고지에서 온갖 특혜를 보고 있으며, 그에 대한 반대급부, 나름의 차별성을 겪고 있지 않거나 여성에 비할 바가 아니라는 한심한 인식을 가지고 있다는 거죠. 


더불어 여기엔 여성 특유의 비극 소설의 주인공이라도 되는 양 모든 도덕적 정당성과 정의를 갖추고 있는 무결한 존재이자 그런 입지에서 죄인에게 무엇을 요구해도 정당한 피해자라는 인지부조화와 자기합리화가 뒤섞인 극도의 감정적 이입과 함께 성 권력의 압도적인 우위를 원하고 있죠. 


모든 여성들이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상황을 겪는 여성들에게 있어 그러한 경향성은 여성 특유의 생물적 성질 중 하나이고, 그 중에서도 특히 페미를 한다는 둥의 그런 여성들은 그게 정신병적으로 작용하고 발현되는 이들이기 때문에 앞서 서술한 기제들과 합쳐서 한심할 정도로 현실감각이 없습니다.



그러한 현실감각이 없는 여성들에 대한 비판은 같은 여성이자 워킹맘의 맘카페에 대한 이야기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회생활을 해본 것도 아니고, 혹은 그리 해본 것도 아니며, 판단력과 이성적 사고력이 증발한 채 자기 개인의 감정에 매몰된 여성들이, 혹은 그럴 수 있는 여성들이, 여성 특유의 끼리끼리 모이고 자기들끼리 뭉치며 동조해주고 심화되어가는 성질에 따라, 자기 집단의 폐쇄성과 막장성만큼이나 관념의 문제는 심각해지면서 자정작용을 잃고, 더 나아가 맘카페와 같은 배타적이고 까다로우며, 비정상적 집단으로 비화되기 쉽습니다.


즉, 여시, 메갈, 워마드, 맘카페와 같은 독재적 환경, 또는 종교적 광신도들이 모인 페네티시즘 타운이 형성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런 곳을 채우는 개인들은 현실감각이 없고, 여성 특유의 감정매몰에 빠진 정신병적 환자들이죠. 현실감각이 없으니 온갖 헛소리와 개소리와 병신논리가 판을 치고, 이성적 사고력과 정상적 판단력이 존재하지 않으니 그런 소음들을 믿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광신성과 접목되어 하나의 신앙이 되고, 그 광신적 신앙은 배타성을 가지며 타 집단에 대한 공격성으로 작동하죠. 


현실을 살지 못하니 현실에 없는 이야기들을 만들거나, 현실과 전혀 맞지 않는 헛소리를 해대는 겁니다. 오직 자기들끼리 태울 장작이 필요한 거고, 진실은 아무런 필요 요소가 아니니, 자기들끼리 맞장구 쳐주고 동조해주고 끼리끼리 모이며 소속감과 동지의식에 심리적 만족을 느끼는 여성 특유의 집단의식을 위해 특이할 정도로 많은 페미들의 증거, 증언, 사건 자체를 조작하는 사례가 만들어지는 것이고요. 


이수역 사건에서도 당연히 들킬 수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당당하게 거짓말을 해대는 건 그들이 정신병적 광신성을 가졌기 때문에 자기들 스스로도 그렇게 믿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자기 모집단에 태울 땔감을 공급하기 위함입니다. 자기 편을 들어줄 병자들이 많으니까요.


그렇다고 반박 당하거나 부정 당한다고 태도가 변하는 건 아닙니다. 그래서 정신병이라고 하는 거죠. 아니라고 해도 자기들끼리 그렇게 믿고 그런 믿음에 따라 같은 행동을 반복한다는 거 자체가 정신병이기 때문입니다. 과거 환빠들이나 일베들처럼 말이죠. 둘 다 완벽하게 논리와 증거와 근거가 논파되고 박살난 채 쫓겨나거나 스스로 도망가도 결국 조금 지나서 다른 곳에서 똑같은 행동을 반복합니다.


단지 페미들이 더 질이 나쁜 건, 자기 감정에 대한 매몰 문제인데, 당장 지 기분이 나쁘면 옳고 그름도, 증거와 근거도, 논리와 합리도 무시된 채, 무조건 자기 기분을 나쁘게 한 놈이 개새끼인 거고, 씹새끼가 되기 때문입니다. 뭐 어디 행사나 매장 같은 곳에서 뭐 안 되거나 할 수 없는 거 요구했다고 안 된다고 하면 바로 조금 기분 나쁘다고 바로 사람 무시하는 소리(ex.아 뭐래 찐따 같은 게.) 뒤돌아 서면서 툭 던지고 훽 가버리는 것처럼요. 


즉, 다른 병신들이 개털리면 아가리 닫고 꼬리 말고 떠난다면, 페미는 쳐털리고도 인정 안 하고 눈앞에서 뻔뻔하게 군다는 겁니다.




덧- 그런 현실감각의 문제는 한국 드라마에서 찾아볼 수 있는, 더불어 자극되는 신데렐라 컴플렉스에 빠진 여성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죠. 진짜 별 것도 아니고 스펙도, 가치도 없는 여성이 도대체 뭘 믿고 그러는지 대단한 재벌이나 뛰어난 인재, 돈 많이 벌고 잘생기고 성격 좋고 자기만 바라봐주는 남자를 낚아서 결혼하길 바라는 거죠. 정확히 말하면 운 좋게 만나서 사귀고 결혼하게 되는. 


하지만 현실은 자기 자신은 별 다른 능력도 없고 스펙도 안 되고 외모가 훌륭한 것도 아닌 주제에 그런 것들을 한 없이 바란다는 겁니다. 노력도 안 하고 그냥 글자 그대로 운 좋게 멋진 남자, 조건 좋은 남자 걸리길 바라며 근처 카페에서 시간만 죽치고 있는 것처럼요.


딱히 머리가 좋지도 않고 인성이 좋아 보일 거라고 생각되지 않고 그냥 몸매와 얼굴만 예쁜 골빈 창녀 같은 여자만큼 자기 관리와 타고난 미모가 뛰어나질 않으니 반대로 남들의 기준을 낮춰서 평균을 자신에게 맞추고자 하는게 현 페미들의 탈코르셋의 실체입니다.


코르셋을 입어본 적도 없는 이들이 탈코르셋이라는 명분을 얻고 그걸 이용하는 거죠. 전형적인 인지부조화인 겁니다. 노력과 관리로 얻은 뛰어난 몸매와 외모는 (자기들이 얻을 수 없기에) 신 포도이니까 화장과 관리를 하지 않은 자연스러운 외모를 기준화 시키는 속 보이는 짓거리죠. 자기들끼리는 여러 논리와 명분을 대겠지만, 애초에 자기 감정에 매몰된 정신병적 환자들이 하는 자기세뇌에 불과합니다. 자기들은 전혀 아니라고 하겠지만요.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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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 

- 마오쩌둥



권력의 실체는 무력입니다. 정당성도, 권위도, 명분이 없어도 원하는 바를 실현시킬 수 있는 힘은 오직 폭력에서만 나옵니다. 그리고 정부란 그러한 폭력을 정당하게 독점하고 있는 공동체 유일한 조직이죠. 따라서 국가의 가장 강력한 힘은 군대와 경찰에게서 생산되는 폭력이며, 그것을 잃는다면 정부는 존속될 수 없고, 국가는 멸망하게 됩니다. 


그러한 위험 때문에 군대는 국가에게서 반드시 필요한 불가결한 조건이며, 동시에 군대가 총을 거꾸로 겨냥하는 일을 막기 위해 반드시 통제해야 하는 위험 또한 동반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제 3세계의 국가들은 언제나 쿠데타의 위험이 있고, 쿠데타를 겪기도 하는 등 군부의 통제에 힘겨움을 겪고 있습니다.



마오쩌둥의 저 말을 전근대 시대에 맞게 바꾼다면, 권력은 칼 끝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어떤 국가든 최고 권력은 결국 실력에서 나오는 것이고, 모든 실력의 우위에 설 수 있는 힘은 오직 폭력 뿐이죠. 그러한 폭력을 언변이든, 카리스마든, 재력이든, 혈통이든, 인적물량이든 어떤 방법으로든 독점하는 자가 가장 강한 힘을 가진 자가 됩니다. 그리고 그들을 우리는 주로 왕이라고 불렀죠.


그러나 국가는 여러 변화를 거치게 되고, 국가의 크기와 복잡성이 더해지며, 통치를 위한 더 나은, 더 세련된 방법론이 필요하게 됨에 따라 여러 견제장치 또한 발생하게 됩니다. 주로 왕권과 신권의 대립으로 대표되는 경쟁과 견제 또한 그렇죠.



조선에서 유교를 비판하는 이들은 무의미한 붕당놀음과 당리당략에 따른 무익한 정치싸움 때문에 나라가 망했다고들 합니다만, 실상 조선이 멸망한 이유는 되려 유교적 질서의 붕괴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2013/12/01 - [취미/이야기] - 유교에 대한 오해, 유교는 어떻게 사람을 통제하였는가.


먼저, 조선은 유교라는 통치 시스템을 국시로 삼았고, 이것을 근본으로 하게 됩니다. 국가 정체성이 유교 성리학에 있다보니, 이것을 거스르거나 무너뜨리는 일은 곧 역모, 반란, 반상의 법도를 뒤엎는 죄악이 됩니다. 이것은 우리가 민주주의를 국가의 근본 정체성으로 삼으며, 이것을 무너뜨리거나 위협하는 일은 반체제적 범죄로 여기거나, 최소한 반체제적인 행위라고 비판을 받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조선은 약 200년간 평화기를 거쳤고, 그 동안의 군주는 꽤 뛰어난 이들이 많았습니다. 태조부터 세종, 심지어 선조에까지 나름 뛰어나고 훌륭한 왕들이 많았으며, 왕권 또한 높은 편이었죠. 선조 또한 능력은 뛰어났으나, 소인배적이고 책임감을 짊어지지 못하는 찌질함은 그의 평가를 뒤엎는 요소가 되었습니다.


임진왜란 때 조선은 거대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왕의 무능과 초기에 속수무책으로 밀린 패배의 쇼크는 왕권을 흔들었고, 조선의 무력에 회의를 주는 사건이 되었죠. 물론 어느 정도 복구하긴 했지만, 그마저도 훗날 이괄의 난으로 날려먹고 병자호란과 삼전도의 굴욕으로 권위도 실력도 날려먹게 됩니다.



이 두 사건이 중요한 이유는, 왕권의 실추에 기여한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왕이 궁궐, 도성을 버리고 도망을 갔고 왕이 오랑캐들에게 머리를 박으며 굴욕을 보였다는 희대의 사건으로 하여금 조선 전기의 왕권은 중기, 후기를 거치는 동안 추락할 수밖에 없었죠.



더불어 신하들 또한 왕을 위해서 일하는 자들만은 아니었습니다. 뛰어난 학식과 배움을 가진 자들이기 때문에 정치에 대한 감각은 남달았고, 그런 그들이 자신들의 이익과 권력의 주도권을 쥐기 위해선 당연히 모이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익과 손해, 다른 권위와 권력에 의한 축출을 방지하고 방어해내기 위해선 조직을 이룰 필요성이 있기 때문이죠. 


그렇게 똑똑하고 조직력 있는 세력이 신권 하에서 발생하게 되었기에, 왕권은 더 거대해지고 강력해진 신권 세력과 맞서 싸워야 했습니다. 무슨 말을 하고 공격을 해도 유교적 원리 하에 있는 성현의 말씀을 명분으로 삼아 방해해버리기 때문이죠. 그러나 말은 맞는 말이고, 논리도 겉으로는 타당하기 때문에 그들을 견제하려면 무력이 있거나 지력이 어마어마한 천재거나 해야 했습니다만..


하여간, 붕당이라는 게 그래서 생겼고, 붕당정치가 그래서 생겼으며, 환국은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발생한 것입니다. 왕이라는 것은 하나의 명분입니다. 성리학이라는 정치철학, 사상 내에서 왕은 충성의 대상이었고, 하늘과 같이 여겨졌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만만해도 정당한 명분이 없이는 함부로 폐위시킬 수 없었고, 겉으로는 따르거나 통치를 위한 일이라 포장을 해야 했죠.


물론 그 목적은 왕권의 견제, 혹은 실추를 위한 정치싸움이었습니다. 가령 말하자면 이런 건데, 왕권을 견제하고 차기 왕권의 실추를 위해 세자의 흠을 잡아 세자를 폐하고 다른 대군을 책봉하라는 등의 주장이라던가 하는 게 있겠죠. 



따라서 왕의 입장에선 신하들이 모두 모여서 왕권을 견제하는 것보다, 서로 싸우게 분열시키는 게 올바른 판단이었습니다. 그런다고 명분도 없이 신하들을 죄다 도륙해버리거나 누구 하나 꼬투리 잡아도 자기들끼리 뭉쳐서 보호해주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실각시키는 데 실패한 책임이 그대로 역공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런 이유로 붕당정치는 왕권의 신권에 대한 견제책이었습니다. 서로 분열하여 서로 당리당략을 위해 싸우는 것이 서로 힘을 합칠 수 없게 하고 그들의 역량을 스스로 갉아먹게 만드는 방법론이었죠. 물론 이러한 것의 문제점은 진짜 국가의 통치를 위해서 일하기 보다는 당리당략과 같은 자기 진영의 손익에 대한 싸움으로 환원되어 버린다는 문제가 있고, 그렇다 해도 왕권을 위한다는 건 또 아니라는 겁니다. 왕권이 적극적으로 기를 피려 한다면 차라리 뭉치게 되어 버릴 수 있다는 점이죠.


근데 진짜 붕당정치의 문제는 그런 게 아닙니다. 그러한 붕당이 너무 오래 되었다는 겁니다. 차라리 지속적으로 솎아내거나 한번 쓸어버려서 다른 정치토양을 만들었어야 했는데, 왕의 역량 탓인지, 신권의 힘 때문인지 그러지 못했죠.


붕당이 너무 오래된다면, 서로 싸우기 보다는 서로 야합하게 됩니다. 겉으로는 서로 견제하고 싸우는 모양새를 하지만, 진짜 위험하거나 곤란할 때는 서로 적당히 타협하고 줄 거 주고 받을 거 받으며 협력하는 관계가 되어버린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게 더 쉽고 편하고 안전하기 때문이죠. 


물론 그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치를 아예 못한 건 아니고 여러 환국, 사화를 통해서 그럭저럭 성과를 보긴 했습니다. 가령 경종이 대리 청정의 문제로 함정을 판 뒤, 영조를 지지하는 노론의 수뇌부를 대거 숙청하고 삼수의 옥이 터지면서 다시금 죽이는 등의 성과를 손꼽을 수 있죠.. 그러나, 결과적으로 붕당정치는 조선의 역량을 갉아먹고 왕권이 주도권을 잡아서 이끌지 못했다는 점에서, 결국 신권에게 사실상 패배하게 되는 시점까지 온다는 점에서 성공한 정치까진 아니지 싶습니다. 



그런 신권과 왕권의 대립에서 왕권이 힘을 키우기 위한 여러 방법론은 몇 있었는데, 그건 바로 군사력입니다. 실질적인 힘이 있어야 권력은 보장되고 휘두를 수 있게 됩니다. 그러기 위해 전통적인 방법론이 바로 북벌론인데, 효종 같은 경우 삼전도의 굴욕으로 땅에 떨어진 왕권을 높히기 위해 청나라에 복수하자는 명분을 걸고 시작한 일이죠.


당연히 명분이 있고, 내부적인 정치보단 외부적인 일이기 때문에 견제하기 까다로운 일이기도 합니다. 실제 청나라에게 굴욕을 본 것도 사실이고, 이에 대한 복수를 천명한다면 이를 막을 논리를 많지 않죠. 대놓고 그 군사력으로 우리 견제하는 거 아니냐. 같은 소리를 대놓고 할 수는 없으니 사공농상과 같은 명분으로 그렇게 징집하면 농사지을 인력이 부족하게 된다거나, 결국 모든 것은 백성들의 부담으로 돌아가니 민심을 생각하라는 등의 논리를 써야하죠. 물론 그런 논리라도 쪽수가 모이면 왕의 논리와 명분 또한 큰 견제가 됩니다만.


그러한 북벌론은 효종 때만이 아니라 숙종대까지 올라가는데, 그 때쯤 가면 제대로 먹히는, 약빨이 되는 명분이 아니기 때문에 써먹을 수 없게 됩니다.


그나마 정조 때의 왕권강화책은 꽤 성과를 봤는데, 수원화성 같은 것이 그렇습니다. 수원화성의 건축 목적이야 여럿 있지만, 그 중 하나가 바로 군사적으로 써먹을 수 있는 성을 만들고, 군대를 주둔하게 한다면, 수도인 한양과 아주 멀리 있는 것도 아닌 수원은 언제든 신권을 견제할 수 있는 실질적 무력의 역할을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결국 실패하게 되는 것이, 순조 대부터 발생하게 되는 세도정치로 완전히 터져버리게 됩니다. 왕권의 신권, 그것도 특정 세도가문이 독점하는 명분이 되어버리고, 왕권이란 그 가문의 도구로 쓰이는 꼴이 되어버리죠. 



이러한 모든 맥락은, 왕에게 충성하며 섬기고, 백성을 하늘로 여기며, 예를 지켜야 할 사대부들이 그러한 원칙을 명분삼아 자신들의 경제적, 정치적 권세를 얻기 위해 남용한 결과입니다. 왕을 섬겨야 하는 이들이 왕을 견제하기 위해 세력화하고, 왕권의 성장을 억제하며, 백성을 노비로 만들어 역과 세에서 면제를 받아 결과적으로 역과 세를 통해 부강해져야할 국가, 왕실의 권력이 뿌리부터 흔들리고, 반대로 사대부 가문들은 더 많은 노비들을 소유하게 됨에 따라 더 많은 땅에서 재산을 창출해낼 수 있게 되죠.


심지어 그러기 위해 일부러 양민을 노비로 만드는 여러 정책, 수작질을 벌이며 소작 때는 양민들을 노비로 만들어 재산화 하였고, 권세를 더 불리기에 바빳습니다. 이러한 활동은 국가적으로 발생하는 것이고, 그 규모가 결코 작지 않았기 때문에 훗날 조선의 경제적 구조를 무너뜨리고 지속적 발전과 안정을 해치게 됩니다. 


이러한 굴레는 국가 멸망테크로 돌아가게 되어 있죠. 


2013/11/09 - [취미/이야기] - 망국의 징조.


그래도 조선이 500년을 간 걸출한 국가라는 것을 반증하듯이, 노비종부법(결국 망함), 속오군(정작 군사적 효용이 영..) 등 여러 정책을 통해 노비를 줄이고자 했고, 실제로 조선 후기로 갈수록 노비 자체는 줄어듭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양민들의 삶이 좋은 것만은 아니었는데, 여러 이중적인 착취와 그나마 다른 나라보단 나았긴 했다만, 역과 세의 부담, 사실상 임노동자 및 사대부에 예속된 소작농 인생이라는 점에서 어떻게 보면 노비보다 못한 이들도 많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 차례 양민에서 노비가 되는 게 유행하거나 그렇게 부담을 피하고자 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죠.



뭐.. 결국 모든 국가들이 다 그렇지만, 왕권과 신권의 견제는 항상 있었고, 그 난이도도 높았으며, 그렇기 위해 왕은 반드시 뛰어나야 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차라리 군사력을 기반으로 하는 강압적 절대왕권이라도 가지고 있었거나.. 물론 그게 더 낫다는 보장은 없다만.


조선 또한 다를 게 없었던 겁니다. 단지 더 뛰어났기에 더 오래 갔을 뿐. 조선은 유교 때문에 망한 게 아닙니다. 부정부패 때문에 망한 거고, 정치싸움 때문이라곤 하지만, 그 또한 그나마 차악적인 방법론이었을 뿐입니다. 조선이 멸망한 것은 오히려 성리학적 질서의 붕괴 때문이라고 봐야죠. 왕을 섬기지도, 백성에게 베풀지도 않으며 그것을 통해 이익을 추구하려 했으니. 성리학과 성현의 말씀을 명분과 정당성으로 이용했을 뿐 결코 성리학적 통치와 정치가 아니었습니다.


지금의 한국도, 다른 나라들도 그 나라의 사상과 이념, 정치적 정체성과 그 방법론을 이루는 논리와 명분, 절차, 정당성을 이용해 그 사회의 이익과 질서를 역행하는 행위를 하는 이들이 얼마나 됩니까? 정말 많습니다. 단지 조선은 그 싸움에서 왕권이 패배했을 뿐이죠. 멸망하는 모든 국가가 다 그렇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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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과 남성에겐 감각, 인지의 영역에 여러 차이가 있는데, 그 이유가 호르몬이 됐든 그 호르몬에 의한 뇌 발달의 차이가 됐든 실제로 그러한 차이가 존재한다는 건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한 차이가 그 자체로 문제가 되는 건 아니지만, 그러한 차이가 문제로 발생하는 건 생물학적인 작용과 현실적 규칙 사이의 충돌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러한 현실적 규칙은 도덕, 윤리, 법률 등 여러가지 사회적 규칙들을 말하는데, 남성의 본능적 충동이 살인이나 폭력을 더 쉽게 발생시킬 수 있고, 여성의 본능적 충동이 따돌림, 질투 등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모두가 그런 건 아니지만, 누구 말마따라 남성은 잠재적 살인마고 여성은 잠재적 아동학대범이라고 하죠..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주제는 한국에서 페미라 자칭하는 온갖 집단, 혹은 개인들의 인지적 오류와, 정신적 장애기제에 대한 겁니다. 


트페미를 비롯한 수 많은 꼴페미, 메갈, 워마드들의 여러 망발과 논리적 빈약성, 내로남불의 사례는 그러한 이유에서 발생하는 겁니다. 인지능력에 문제가 있어 오류가 발생하고,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어 장애적 기제를 가지고 사고를 합니다. 단적으로 이수역 사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의 모습을 볼 수 있죠.


이수역 사건에서도 여성들이 먼저 반사회적 표현으로 반사회적 공격을 남성들에게 가했고, 먼저 폭력을 휘둘렀습니다. 그래놓고 온갖 거짓과 조작으로 사건을 여성혐오를 당했다는 듯이 피해자 코스프레를 시작했지만, 여러 증언과 증거가 발표되면서 그들의 웃기지도 않고, 도대체 뭘 믿고 그런 소리를 했는지 이해가 안 되는 정신병적 거짓말임이 증명되고 있는 상황이죠.


심지어 --기존의 여러 사례들과 마찬가지로-- 그것에 동조하는 여성들의 모습은 더더욱 정상적이지 않는 모습입니다.


이는 여성들의 본질적 정신기제의 발동 때문인데, 하나의 종교성이죠. 무조건 자기들이, 자기 진영이 절대적으로 옳고, 무오하며, 도덕적으로 우월함을 넘어 절대적이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은 스스로 자기세뇌를 걸며 자기합리화, 인지부조화로 이어지죠. 그냥 이어지는 게 아니라, 아주 강력하게 발생합니다.



모든 극단주의는 정신병적이라 수차례 이야기한 바가 있는데, 그러한 페미들의 활동 또한 정신적으로 극단주의와 동일합니다. 오히려 정치에서 찾아볼 수 있는 극단주의보다 더 심각한 편향성을 가지고 있을 정도고, 이는 여성이라는 생물이 내포하고 있는 강력한 인지적 되새김 문제입니다. 어떠한 믿음에 빠르고 강력하게 자기세뇌를 걸죠.


정신병적이기 때문에 있지도 않는 사실을 조작해내고, 종교적이기 때문에 그것을 믿습니다. 모든 근본주의자들은 스스로를 신의 사자로서 올바른 행위를 하고, 그것은 정의로우며, 결과적으로 신, 혹은 자기 종교의 진영에 이로운 행위를 하는 투사라고 믿습니다. 현재의 페미는 그 자체로 극단적 종교이기 때문에 그것을 추종하는 이들은 근본주의자라고 할 수 있죠. 언제든지 테러리스트가 될 수 있고, 어떤 면에선 이미 그러한 행위를 하고 있는 폭력자들입니다.



심지어 감정적 오버는 살면서 한번쯤은 여성과의 갈등에서 겪어봤을만한 일일텐데, 여기에 앞서 이야기한 스스로 절대무오하다고 믿는 증상과 거기에서 파생되는 문제에 대한 절대회피는 답이 없는 문제로 만듭니다. 


흔히 커플들이 싸울 때 여성측이 잘못하거나 문제가 일부 있어도 결코 인정하지 않고 결국 남자 쪽에서 먼저 손을 들고 내 탓이오 하고 사과하게 되는 것처럼요. 이처럼, 분노한 여성은 논리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미친 코끼리처럼 주변의 모든 것을 부수고 공격하며 화가 풀려야 직성이죠. 그리고 현 페미를 한다는 여성들은 무언가에 분노해 있고(그것에 대한 옳고 그름, 정당과 부당과 무관하게) 주변의 모든 이들을 공격합니다. 단, 자신들의 거울상 이성질체에 대해서만 빼고요.(ex.일베, 안페협, 박사모)



하여간, 그러한 감정적 오버와 절대무오, 절대회피는 그들의 용어와 행위에서 어떻게 나타나냐면, 시선강간이라는 말도 안 되는 용어를 대표할 수 있습니다. 이거 말고도 웃기지도 않는 용어들과 논리들은 많지만, 저에겐 이게 가장 인상 깊었죠.


시선강간이라, 사람을 훑어보면 임신하거나 처녀막이 파열되나요? 정신병이 걸려버릴 정도로 강렬한 폭력을 물리적으로 격게 되나요? 전혀 아니죠. 물론 자신의 몸을 성적인 욕망 가득한 눈으로 훑어보고 뚫어지게 쳐다본다면 눈을 뽑아버리고 싶을 정도로 스트레스와 불쾌함을 느끼는 거야 당연합니다.


근데 시선강간이라? 이러한 표현이 나오는 이유는 감정적으로 오버해버렸기 때문입니다. 여성이 분노를 하게 되면 논리와 합리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물론 분노하게 되면 다 그렇죠. 남자든 여자든. 범죄자들이 잡히면 자기는 억울하다고 하는 이유도 결국 체포가 되었다는 현실에서 자신의 잘못과 죄를 인정하기 보단 누군가, 무언가가 잘못해서 내가 이 꼴을 하고 있다고 여기는 게 더 편하기 때문입니다. 인지부조화죠.


이건 단순한 경향성인데, 이런 게 있습니다. 남자는 화가 나면 먼저 설명을 듣고 화를 내든 풀든 삭히든 하는데, 여성은 먼저 화를 낸 뒤 이유를 듣는다고요. 


이게 사회적 현상과 얽히게 된다면 언제나 분노해 있는 그들은 논리와 합리를 완벽하게 등져버린 채 헛소리를 하되, 그러한 헛소리들을 스스로 무오하게 여기며 자기 진영에 대한 탄탄한 결속력을 갖춘 채 하나의 덩어리가 되어버린다는 겁니다. 


시선강간이라는 표현이 나온 이유도, 정확하고 객관적으로 판단하기 보다는, 자신의 감정과 기분에 마치 마약을 한 것마냥 깊게 빠져버려 오버해버리는 거고, 무오하다 여기기 때문에 나는 어떠한 잘못이 없고(이건 그럴 수 있지만.) 상대방이 절대악이자 파괴, 절멸해버려야 하는 종자가 되는 겁니다. 따라서 남성이 여성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최악의 폭력인 강간이라는 오버해버린 표현을 합쳐서 시선강간이라는 말도 안 되는 용어를 창조해낸 거고요. 


그 시선강간을 이미 쓰고 있고, 올바른 용어로 고친다면 성추행이 됩니다. 실제 판례도 있고요. 이 경우는 단순 한 문장으로 설명할만한 사건 아니다만.



그럼에도 시선강간이라는 표현을 쓰는 이유? 그것이 자신들을 무조건 올바르고 보호 받고 지지 받고 지원 받으며 모든 정당성과 명분과 싸움에 있어서 그러한 것들을 기반으로 하는 파워를 얻고, 상대방은 추악한 괴물이자 쓰레기 악당, 최악의 적이자 짓밟아 없애버려야 하고, 없앨 수 있는 그런 것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그러한 말도 안 되는 과장된, 감정적 오버 심각한 용어를 만들어서 쓰는 겁니다.



모든 인간들이 다 그렇지만, 경향성이라는 면에서 여성들의 약자 코스프레, 그러한 위치에서 발생하는 도덕적 정당성과 명분의 획득에 더 환장하는 편입니다. 문제는 그것을 얻는 방법과 과정이 없거나 어처구니 없는 수준이고, 그 상태에서 싸우려드니 그저 정신병자들처럼 보이게 되는 거죠. 


자기 스스로를 너무나도 무오하다 보기 때문에 절대적인 선의 위치에 서 있고, 내가 싸우는 사람, 남자들은 그 정극단에 서서 죽여 없애야 하는 존재가 되는 겁니다. 그냥 정신적으로 그렇게 집중해나가고 자기세뇌를 시켜요. 그렇게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나 스스로를 세뇌하고 정당화하는 겁니다. 


왜 이수역 가해자들이 스스로를 피해자라 지칭하고 거짓을 조작해내겠습니까? 그들 스스로 그러한 행위가 도덕적이지 않다는 걸 알고, 그것이 자신들에게 불리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지만, 그것을 인정하기엔 정신병적으로 편협하고 그러한 인지능력과 사고력이 작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신 그 남자들이 원인부터 과정에 결과까지 모두 잘못한 거라 믿는 것은 더 쉽죠. 아니라는 걸 알아도 스스로를 세뇌하는 건 인정하고 사과하는 정상적인 행동보다 더 쉽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페미를 한다는 인간 중에 정상인이 단 하나도 없고, 정상인이라면 스스로 페미를 한다고 말하지 않는 겁니다. 그것은 여성 특유의 경향성이 내포되어 발생하는 감정적 오버, 종교적 신앙, 강력한 자기세뇌, 인지부조화, 자기합리화로 점철된 변기통이기 때문이죠. 남성들이라고 그렇지 않다는 게 아닙니다. 여성들에게서 더 강력하게 발생한다는 것 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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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보수에 속하는 이들 중 누구 하나 정상적이지 않고 반국가적이며 반사회적인 가치관과 정체성을 지니고 있으며 한국의 발전과 성숙을 저해하는 이유는, 그들의 태생과 근원이 그러한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은 일제강점기를 겪으며 기존 질서와 정체성을 가진 과거와의 단절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외부 정체성(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에 의한 이식과 정착을 겪으며 기존의 질서는 단계적으로 무너져갔죠. 식민지하의 사회가 다 그렇듯이, 누군가는 반발을, 누군가는 순응을, 누군가는 적극적인 변절을 선택하지만, 당연히도 가장 큰 이익을 보는 것은 적극적 변절자들입니다.


기존의 사회와 정체성을 그들 내부에서 무너뜨리고, 불신과 질투를 유발해 분열을 시키기 때문입니다. 확고하게 뭉쳐진 정체적과 질서를 부순 뒤, 그 틈에 (힘의 우위에 따른) 더 경쟁력 있는 질서와 정체성을 이식하고 고착화 시키기에 앞잡이만큼 빼어난 선동수단은 없죠.



애초에 일제의 질서, 정체성은 한국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한국의 토양에 이질적인 면이 있었고, 궁극적으로 한국이 아닌 일본 중심적인 가치를 담고 있습니다. 이는 곧 어떠한 행동을 하고 세부적으로 어떤 갈래의 사상을 가지고 있든, 그 근본적인 논리와 기제는 일본에 이익에 가까워지고, 최소한 한국의 이익에 배반되기 때문에 한국에겐 반국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 보수의 계보와 뿌리를 올라가보면, 일제시대에 큰 돈과 명성 등, 권세를 얻은 이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그들에 대한 청산이 이루어질 수 없었던 것은 그럴 수 없었던 현실적인 사유와, 그러한 친일파의 힘을 세력 기반으로 삼고자 했던 이승만의 정치적 계산하에 이루어진 생존이었으며, 일제시대에 정체성과 도의를 팔아 성장한 그들의 생존감각은 해방 이후, 전후 한국에서 빛을 보았죠.


적지 않은.. 거진 대부분의 거물 친일파의 후손들은 그러한 기반으로 하여금 막강한 권세를 되찾았고, 뭉치고 모여 세력을 이루었으며, 일제 패망 이후에도 그들 일제의 질서와 정체성을 한국에 유의미하고 강력하게 고착시킬 수 있게 했습니다. 즉, 살아남은 일제의 후손은 사람이 아니라 사상인 셈이죠.



당연하지만 돈과 권력을 지닌 이들이 무너진 사회의 주도권과 질서를 빠르게 휘어 잡았고, 이는 머리와 머리의 모양만 달라졌을 뿐 여전히 일제의 그것이 살아남아 기능하고 있었습니다. 이승만 본인은 반일이었지만, 친일파를 세력화 시키면서 타협과 용인을 하여 일본 제국주의의 질서와 정체성을 국가에 이식시켰고, 박정희는 그것을 군사독재적 방법론으로 용접했습니다. 전두환은 그걸 더 심화시켰고요.


그리고 그들의 후신들은 여러 이름과 형태로 살아남아 현재 국회에서도 힘을 쓰고 있으며, 그들의 사상 또한 여러 변화를 겪었으나, 그 근본적인 속성은 결코 변한 적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60년대나 2010년대나 그들의 행태는 얼마나 세련되졌는가의 차이일 뿐이지(그마저도 보이는 걸 신경쓰지 않으면 그 시절 모습 그대로 입니다.) 변한 게 없는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한국의 시작부터 단추를 잘못 끼웠다는 말은 상투적이고 정치혐오적인 말이 아닌 셈이죠.



어쨌든, 이러한 역사적 흐름에서 보이듯이, 한국 보수의 뿌리는 일본 제국주의에 있습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 한국 모든 보수에게 태생적인 문제가 있는 것인데, 국가든 정치든 그것을 이루는 근원에 해당되는 정신적인 정체성 자체가 한국이 아니라 일본을 뿌리로 두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행태는 반국가적인 것입니다. 단지 그 뿐이기만 하면 차라리 다행이겠지만, 문제는 그 사상 자체가 일본 제국주의, 파시즘에 있다는 겁니다. 즉, 극우 극단주의에 속하고, 거기에 일본 특유의 전근대적 광기 또한 섞여있죠. 근본도 없는 정신론과 중세적 인명 경시풍조 등등..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한국의 보수는 근본적으로 한국적일 수 없고, 애국적일 수 없으며, 민족주의적일 수조차 없는 겁니다. 그들이 뿌리로 삼고 근본으로 삼는 정체성 자체가 한국의 것이 아니며, 그 근원이 일본에 있기 때문이죠. 따라서 한국에 제대로된 보수가 들어서기 위해서라면 현재의 정치 풍조와 이념 지형이 모두 박살내놓아야 합니다. 이는 보수 하나만 박살나서는 안 되고, 진보 등 다른 이념진영도 부서져야만 합니다.


한국 진보 또한 보수와 경쟁하고, 반발하고, 심지어 공생하면서 맞춰진 짝이기 때문입니다. 그 이후에 한국적 정체성을 가진 보수가 들어서야 (말하자면) 국제적 기준의 보수라는 게 만들어질 수 있는 기회가 생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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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경찰은 우리의 안전을, 정확히는 나 개인의 안전을 특별히 더 챙겨주거나 내 편을 들어주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 생각과는 다르죠. 경찰과 일반인들의 시각차이, 한계에 대한 인식 차이가 생각보다 꽤 나는 편입니다.


이렇다보니 사법불신, 경찰에 대한 불신이 커지는 거고, 그럴 수밖에 없는 것도 사실이며, 그게 아니더라도 실제 불신할 수밖에 없는 무책임하고 비양심적인 윤리파탄적 사건이 터지곤 하기에 더더욱 부채질 되는 것도 있죠.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우리는 이러한 사법체계의 작동과 활용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보통 우리가 어떠한 괴한이나 시비가 붙은 사람, 아니면 그냥 미친놈이나 정신병자에게 위협을 받을 경우 경찰을 부르는데, 그렇게 되는 경우 적지 않은 경우 싸우면 대충 말리고, 싸우지 말라고 하고 가거나, 아니면 대충 상황보다 그냥 가버립니다. 이에 대한 악명과 불신이 굉장한 편이죠.


그런 상황을 봤을 때 우리가 보고 생각하는 건 분명해보이지만, 경찰 입장은 대충 이렇습니다. 양쪽 모두 시민이기 때문에 어느 한쪽의 이야기만 일방적으로 듣거나, 대충 눈치껏 어느 한 쪽의 편을 듣거나, 한 쪽을 체보하거나 위압해서 쫓아내거나 할 수 없다는 거죠. 


좀 짜증나긴 하지만, 원론적으로 맞는 말입니다.. 무죄추정의 원칙과 증거에 의한 판단을 해야하는 입장에서 그러한 요소를 중시해야하는 공권력 입장에서는 당연한 거죠.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증거를 보여주면 됩니다. 녹화를 하든 구체적인 증거를 마련해놓으면, 경찰은 '절차대로' 처리하게 됩니다. 가령 집 앞에서 깽판치고 소리지르고 문 두들기고 욕하고 협박하고 위압하는 거, 죄다 녹화를 해서 그 파일 그대로 경찰에게 넘겨주면 경찰이 알아서 고발해줍니다. 안 해주면 뭐 자기가 하면 될 거고.. 그것도 모자라다 싶으면 변호사 찾아가서 접근금지 요청도 받게 하면 됩니다. 녹화 파일, 사진 파일 같은 증거만 있으면 됩니다.



물론 세상엔 미친놈들도 많고, 맛이 가버린 또라이들도 많기 때문에, 그거 씹고 찾아와서 죽이거나 공격할 수 있는 건 사실이지만, 미친놈들도 급이 다르고 진짜 맛이 가버린 개또라이는 또 생각보다 적습니다. 판사가 하라고 했는데, 가지 말라고 했는데 갈 수 없고 못 가는 경우가 더 많고, 그럴 경우 어떻게든 도망가서 안전한 곳에서 경찰에 신고하거나 해야 합니다. 그럼 현행범이라 바로 잡히죠. 



경찰 입장에서, 나중에 상황에 도착한 뒤 봤을 때, 또 어떻게 상황이 달라졌을 지, 혹은 말과는 또 다른 상황일지, 나중에 또 말이 달라질 수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한 쪽 편을 들기 힘든 거죠. 그렇기 때문에 그런 구체적인 증거가 없다면 할 수 있는 건 일단 사람들 때어놓는 거고, 그냥 그게 할 수 있는 전부입니다. 누가 수상하고 딱 봤을 때 저 쪽이 문제인 거 같다고 무작정 체포하거나 유치장에 끌고갈 수가 없다는 겁니다.


실제로 이게 문제가 되는 건, 과거 독재정권 때 그 짓거리로 끌고간 사람이 한 두명이 아니고, 그렇게 피해를 본 사람도 한 두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민주화가 됐으면 그런 짓은 하지 말아야 하는 거죠.



그러니, 스마트폰으로 녹화한 뒤 물증 확보하고 경찰에 신고하든가, CCTV나 차량 블박에 있는 증거자료라도 찾아서 경찰에 넘겨야 합니다. 그냥 출동해달라고 한다고 다 해결되는 게 아니고, 그 미친놈이 뭔 짓을 하는 지 경찰에 확인시키고 증거, 자료를 확보해야 합니다. 보호 요청을 할 수도 있는데, 접근 금지 같은 법적 근거가 있어야 경찰이 보호 임무를 해줄 거라서 이 쪽은 좀 더 번거롭고 어려울 수 있죠.



맨 위의 문단에서 했던 말이 이런 맥락에서 하는 말입니다. 내 개인의 안전을 특별히 챙겨주거나 하는 게 아니라, 행정 절차에 따른 치안을 유지하는 집단, 조직이 경찰입니다. 그게 아니라 경찰관 개개인의 자의적인 판단으로 규정과 법으로 정해진 바를 넘어서는 치안활동은 독재시절의 경찰이나 하는 짓입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한국이 독재 시절에 딱 그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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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심재철 다운로드 ‘800만건+α’… 몇건 유출됐는지 모르는 기재부

http://www.hankookilbo.com/News/Read/201810041769785852?did=da
청와대, '심재철 주장'에 '결제내역' 일일이 보여주며 반박
https://news.v.daum.net/v/20181002202445139
문희상 "이석기도 압수수색" vs 한국당 "어떻게 이석기와 비교"
http://www.viewsnnews.com/article?q=161713
기재부 "심재철 의원실에 국가안보, 보안장비 정보까지"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1&oid=421&aid=0003613768
심재철 ‘알권리 행보’ 짚어보니..“본인 혈세 사용은 비공개 혹은 침묵”
http://www.goba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6069
김의겸 "심재철 의원, '불법 습득 정보'를 거짓으로 포장해 청와대 공격"
http://www.enews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233815


초기 40만건이라 여겨졌던 것이 실제 800만건 이상으로 밝혀졌습니다. 40만건만 해도 결코 적지 않은 것일텐데, 800만건이라면 어마어마한 수준입니다. 만약 외부로 유출이 되었다면 주변국 정보부서 일복 터진 거죠.



심재철이 되도 않는 주장을 하면서 정부를 비판하려고 시도했지만, 현재 하고 있는 주장 대부분이 반박에 의해 논파되었다는 점도 우습지만, 그 이상으로 지적해야할 것이 바로 안보를 위협하는 기밀 유출이라는 사실입니다. 문희상이 괜히 이석기와 비교한 게 아닌데, 이석기야 망상증 수준으로 헛소리 해댔지만, 심재철은 구체적이고 분명하게, 증거를 스스로 내놓으며 유출을 시인했다는 겁니다. 불법적인 해킹을 통해서요.



위 링크의 기사들에서도 서술됐지만, 외교, 치안 등 국가안보전략을 유출시켰고, 보안장비 등 국가주요 장비의 인프라 노출, 특히 이 부분이 말초적으로 다가올 법한데, 주요 고위직 인사의 일정과 동선, 심지어 청와대로 가는 식자재 제공시설관리 등 거래 업체에 대한 정보마저도 유출시켰습니다.



영화나 소설, 만화 같은 곳에서나 일어날 법한 암살이 벌어진다면, 이 정보들은 정말 유용하게 사용될 거고, 일반인들. 특히 한국같은 그런 사례가 이젠 공식적으로 없어진 사회에서는 와닿지 않을지 몰라도, 실제로 러시아나 필리핀, 멕시코 같은 국가들에게선 분명하게 발생하고 있는 게 암살입니다. 심지어 러시아 공작원에 의해 유럽에서도 그러한 공작이 벌어지고 있고, 가장 유명한 영화 뮌헨에서처럼 이스라엘도 이 분야에서 꽤나 독보적이죠.


그 모사드와 꽤 오랫동안 투닥였던 것이 중국 정보부 또한 세계 최고의 정보부서라는 평을 듣고 있는데, 그 중국의 국가안전부에서 이러한 정보들을 입수했다면 얼마나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겠습니까? 당장 국가 고위직이나 심지어 대통령마저도 독이 든 식자재, 식품을 보낼 수도 있고, 일정과 동선에 따라 폭탄이든 총기든 암살을 시도할 수 있습니다. 



그외에도 인프라 파괴와 교란, 혼란을 위해서도 정말 좋은 정보를 꽁으로 제공해줘버린 거죠. 물론 실제 그런 사건이 발생할 가능성은 극히 적지만, 그렇게 따지면 뭔들 의미가 없겠습니까? 분명한 건, 안보를 위협하는 기밀 정보를 유출했다는 거고, 그것 때문에 굉장히 많은 사회적 비용이 투입되어야할 것이라는 거죠.



심재철은 되잖은 방식과 이유로 되잖은 주장을 하며 정부를 비판하기 위해 국가안보에 위협이 될 수 있는 중요 기밀들을 유출한 것이고, 이는 국보법을 적용해도 될 정도의 결코 작지 않은 수위입니다. 한국이 이런 면에서 굉장히 매너리즘과 나이브함을 가지고 있고, 애당초 극우보수 세력 자체가 안보를 위협하는 제1세력이고, 사회를 혼란스럽게 하는 원흉이기 때문에 미국 같았으면 당장 스파이 혐의부터 붙어서 FBI에서 체포해야할 법한 일이 고작 사회적 논란 수준에, 정치인, 국민, 언론에 의해 쉴드를 받고 있는 거죠.


생각해보십시오. 미국에서 미국 대통령, 상원의원, 국회의장, 각 장차관 등에 대한 일정과 동선이 유출되고, 거기에 더불어 백악관으로 가는 식자재에 대한 업체 정보 등이 다 유출된다면, 국가안보에 대한 편집증적 집착을 가진 미국 정계와 사회가 어떻게 반응했을 거 같습니까?



심재철은 간첩행위를 한 것과 다를 바 없을 정도고, 고장 당리당략, 사리사욕에 눈먼 정치꾼 인생을 위해 국가기밀을 유출하며 국가안보를 위협하는 주범이 되었습니다. 같은 방식으로 이명박, 박근혜 시절 그 이명박, 박근혜가 북한에 의해 암살이라도 당했으면 아주 볼만 했을 겁니다. 심각성과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한 인간들은 머리 좀 굴려봐야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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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맵이라는 게 늘 그렇듯, 여러가지 귀찮은 과정들을 겪어야 합니다.


먼저 아래의 Shader Settings로 들어가야 하는데, 그냥 레이어칸 같은 곳에 우클릭하면 여러가지 뜨는데 그 중에 셰이더 세팅을 찾아서 눌러주면 됩니다.


그 뒤 pbr-metal-rough-with-alpha-blending을 찾아서 셰이더를 바꿔줘야 합니다. 참고로 알파 테스트로 끝나는 것도 있는데, 그건 글자 그대로 테스트이고 세세한 조정이 잘 안 되는 걸로 알기 때문에 써줄 수 있는 건 아닙니다.


그 뒤 레이어 옆의 Texture Set Settings로 들어가준 뒤, 채널을 오파시트로 바꿔줘야 합니다.





그럼 위 이미지처럼 PROPERTIES에서 op이라는 옵션이 하나 뜨는데, 그게 오파시티를 조절할 수 있는 거죠. 모니터 길이 때문에 아래까지 이미지에 나오진 않았는데, 다른 메탈릭이나 러프니스랑 다를 거 없습니다. 그냥 양옆으로 긴 바가 있고 잡고 수치 조절해주면 투명도가 달라지죠.




성공적으로 적용, 조절해주면 위 이미지처럼 오파시티가 적용된 모델링을 볼 수 있습니다.


참고로 이건 그냥 오브젝트 전체에 오파시티를 주는 것이지, 특정 부분만 투명도를 주려면 좀 더 귀찮은 과정이 필요합니다. 



더불어 노파심으로 말하자면 내용물이 없는, 아무 것도 그려지거나 색이 들어가지 않은 레이어에 적용하면 당연히 아무 것도 변하는 게 없기 때문에 조절이 안 된다 싶으면 자신이 올바른 레이어에 적용을 하고 수치를 조절했는지 확인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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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3D 툴들이 다 그렇듯 3DMAX만 써오거나, 뭐든 하나만 써온 경우 처음 봤을 때 쓸때없이 생소하게 만들어졌다 싶은 구성으로 되어 있어 아주 기본적이고 기초적인 것임에도 튜토리얼을 찾거나 따로 공부해줘야 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섭스턴스 페인터도 그런 면에서 비슷한 점이 있을 수 있는데, 처음 킨 사람들은 다른 3D 툴처럼 자신의 3D 파일을 올리고 싶지만 하는 방법을 헤맬 수 있습니다.





섭스턴스로 3D 오브젝트를 불러오기 위해선 먼저 왼쪽 위에서 File-New로 들어가야 합니다. Open이나 Import가 아니라요.


위 이미지에서 보이는 템플릿은 다른 툴 등이 있는데, 필요한 경우 써야할 거고, 그냥 간단히 3D 오브젝트만 불러오겠다고 한다면 Mesh의 Select를 누른 뒤 FBX나 OBJ 등으로 저장된 파일을 찾아서 불러오면 됩니다. 아래 쪽의 Add 등은 이미 있는 노말맵 등의 메터리얼을 불러오는 거라 그걸로 3D 파일 등을 불러올 수는 없습니다.





대충 불러오면 위 이미지처럼 보이는데, 오른 쪽은 레이어나 브러쉬 크기, 종류, 적용된 메터리얼의 여러 수치들(러프니스, 메탈릭, 디퓨즈, 오파시티 등)을 조절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이외에도 적용된 맵을 베이크 하거나 할 수 있죠.


아래 쪽엔 메터리얼, 노말, 알파, 환경 맵 등이 있는데, 기본적으로 주어지는 메터리얼들도 꽤 쓸만한 게 많고, 몇몇 수치나 적용될 맵만 수정, 적용이나 비적용을 체크해주면 여러 방식과 종류대로 써먹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수치를 바꾼 메터리얼을 새로 저장해서 메터리얼의 수를 늘릴 수도 있죠.





적용하는 방법은 어려울 거 없는데, 위 모델링은 맵을 펴주지 않았기 떄문에 오른쪽 UV와 맵 적용 상태가 저 꼬라지입니다. UV를 핀 모델링이면 문제 없이 뜹니다. 


어찌됐든 메터리얼을 적용하는 방법은 아래의 메터리얼에서 아무거나 골라 잡아서 오른쪽의 레이어에 드래그 앤 드롭해주면 됩니다. 그럼 바로 꽉 차진 레이어가 하나 생성이 되어 바로 적용이 되죠. 물론 브러쉬로 해줄 수도 있지만, 하나를 꽉 채워서 맵핑할 거라면 저게 더 쉽고 빠르죠. 





위 이미지는 특정 오브젝트만 보고 싶을 때 하는 방법인데, 오른쪽 위의 Solo와 All, 오브젝트 레이어 왼쪽 원형칸을 클릭해서 조정할 수 있는 겁니다. Solo를 누르면 자기가 원하는 오브젝트만 보이고 나머지 오브젝트는 맥스로 치면 Hide가 되죠. 다 보고 싶으면 마찬가지로 All을 누르면 되고요.


특히나 중요한 점은, 섭스턴스 페인터는 적용된 맵 단위로 오브젝트가 구분되어 나뉘게 됩니다. 즉, 여러 오브젝트에 한개의 맵을 통해 맵핑이 되었다면, 그 모든 오브젝트들이 섭스턴스 페인터에선 하나의 오브젝트로 취급됩니다. 따라서 개별적인 조정이나 수정을 하려면 브러쉬 모드로 수정해줘야 하고, 단지 브러쉬로만 수정할 수 있기 때문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죠.


따라서 섭스턴스 페인터에서 개별 오브젝트나 원하는 오브젝트를 맵핑해주고 싶으면 다른 맵(메터리얼)을 적용해서 불러와야 합니다. 흔히 맥스에서 여러 오브젝트의 UV를 편 뒤 어태치 한 뒤 하나의 맵으로 맵핑을 하거나, 아예 메터리얼 슬롯의 회색을 모든 오브젝트에 적용해서 섭스턴스로 보내는 경우 모든 오브젝트가 하나의 오브젝트로 취합되버리기 때문에 각 오브젝트마다 다른 맵을 적용할 수 없게 됩니다. 


따라서 따로, 다른 메터리얼을 넣어줘야 하는 경우 반드시 다른 메터리얼을 써줘야 합니다.





그렇게 넣어준 맵은 오른쪽 아래에서 Base Color에서 색을 조절할 수 있습니다. 물론 기본적인 매터리얼 고유의 특징은 놔두고 색만 바꿔준 거고, 그 값은 아래의 메탈릭, 러프니스 등으로 조절 가능합니다.


참고로 Base Color를 처음 열면 원래 메터리얼에 있는 고유색(위 이미지의 메터리얼은 노란색이었음.)의 명암, 채도만 조절되는데, 그 경우 Dynamic을 눌러주면 다른 색으로도 바꿀 수 있습니다.


이것저것 건드려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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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감정을 배재하면 더 올바른 판단을 냉철하고 이성적으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감정이라는 기반이 없다면 사람은 어떠한 판단도 내릴 수 없는 혼란에 빠질 것입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감정을 배재한다는 것은 그것을 철저히 통제한다는 것이지 그것을 아예 없애버린 채 판단을 내리는 게 아니기 때문이죠.



모든 판단은 자극이 이루어진 뒤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고, 그 감각이 뜨겁다, 차갑다, 보다와 같은 감각적인 것이 있는가 하면, 어떠한 사회적 경험이나 감정적 교류와 같은 감성적인 것도 있습니다. 불에 손을 넣어보기 전에는 불이 뜨겁고 위험하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그러한 경험이 지식이 되어 판단으로 이어지는 거죠.


이러한 간단한 도식에서도 감정이 완전히 사라진다면 고통은 느낄지언정 그것에 어떠한 위험성이나 거부감을 느끼지 못합니다. [각주:1]불에 대한 공포가 있어야 불을 능동적으로 피할 것이고, 불편함을 느껴야 그것을 배제하고자 할테죠. 따라서 감정이란 판단의 첫 문턱, 혹은 디딤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요컨데, 감정이 없다면 판단의 동기조차 없습니다. 



좀 더 고차원적인 경험과 관계에서도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타인과의 관계나 어떠한 행동판단에 있어서 감정, 혹은 감정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결여된다면 이성적인 판단을 내릴 수 없습니다. 실제로 신경학적으로 감정이 없는 사람은 이성적인 판단을 내릴 수 없습니다. 그에 따른다면 (감정 자체가 없는 사람은 없으니..) 감정의 공감능력이 결여된 이들은 대체적으로 사회성이 떨어지는 경향성이 있고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는 사회생활을 할 때 올바른 판단과 행동을 선택하지 못하죠.


그러한 문제는 앞서 이야기한 것과 같이 어떤 것이 올바른 것인지 판단할 수 없게 되는데, 자신에게 좋든 안 좋든 간에 왜 자신이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전혀 인식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립니다. 


어떤 것에 대한 호불호가 작용해야만 인간은 판단과 행동으로 이어지는 것이고, 이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이성 자체가 없는 것은 아니니 어떤 것이 불리한 것인지에 대해 인식할 수는 있지만, 왜 그것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알 수 없게 되면서 결과적으로 큰 손해나 위험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인류가 공통적인 인식과 사회적 규칙, 룰이 생겨나고 변화하고 이해하고 유지되며 그것을 사회성, 혹은 상식이라 부르는 

이유는 인류가 공통적으로 비슷한 방식과 도식의 감정과 비슷한 수준의 공감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억울하게 손해를 본다면 그에 대해 대부분은 비슷하게 피해자에게 감정이입을 할 것이고, 비슷한 지점에서, 비슷한 방식으로, 비슷하게 화를 낼 겁니다.


하지만 감정이 없거나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이들은 이러한 능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에 올바른 판단이나 행동을 할 수 없게 되죠. 가령 사이코패스는 누군가 떨어져 크게 죽거나 죽어도 남들은 놀라거나 공포에 빠지거나 충격을 받기보단 그 상황이 우습다고 웃을 수도 있는 법이며, 이는 사회적으로 큰 지탄을 받게 될 겁니다. 



감정이 없는 사람은 어떠한 상황이나 판단의 상황에서 판단의 디딤돌이 없기 때문에, 어디로 가야할지, 어떻게 가야할지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없게 되고, 결코 이성적일 수 없는 판단을 내리게 됩니다. 감정이 없는 사람은 항상 이성적이고 냉철한 판단을 내리는 게 아니라 어떠한 선택과 판단을 내려야할지 모르는 혼란 속에 빠져 있는 인간에 가까울 겁니다. 

  1. 좀 모호하게 서술하게 되었는데, 정확히 말하자면 어떤 것이 자신에게 불리한 지는 인식할 수 있지만, 왜 자신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 쪽으로 선택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동기부여가 되지 않습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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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간은 죽는다.

2.나는 인간이다.

3.나는 죽는다.


논리적 구성의 대표적인 예시인 삼단논법입니다. 우리가 어떠한 판단을 할 때 논리적 사고는 매우 중요하고, 그러한 올바른 사고가 올바른 결론을 내놓을 수 있게 됩니다. 그렇다면 논리라는 것은 어떻게 시작되고, 구성되어, 사용할 수 있는 걸까요?


어떠한 명제가 있다고 칩시다. 저 위에 있는 인간은 죽는다. 라는 명제가 있다고 쳐보죠. 이 한 문장을 더 작은 단위로 나눈다면 인간/은/ /죽는/다/./ 정도로 나눌 수 있을 겁니다. 인간, 은, 띄어쓰기, 죽는, 다, 마침표. 더 세부적으로 정의하자면 나눌 수 있겠지만, 간단히 설명하려는 것이니 이렇게 봅시다.


인간은 죽는다. 라는 명제를 따지기 위해 필요한 것은 위에서 세부적으로 나눈 것들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입니다. 즉, 용어정의죠. 문제는, 우리가 이것을 객관적으로 판단하기 위해선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합니다. 하지만 앞서 나눈 개념들은 모두 언어로서 정의해야 하고, 정의된 것들이죠. 즉, 기호나 상징으로서의 의미를 지녔다기 보단, 그 이상의 고차원적인 개념으로서 기능하는 것들이니다.


말했듯, 객관성은 편견에서 자유롭고, 오롯이 존재하는 지식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말, 언어는 너무나도 많은 의미를 담고 있고, 그 개념의 폭은 너무 넓습니다. 한 문장, 한 단어도 여러 갈래로 해석되고 받아들여질 수 있고, 이는 각기 다른 판단과 개념, 사유를 낳게 됩니다. 따라서 어떠한 언어적 문장도 객관적일 수 없습니다. 다만 더 정확히 쓸 때 더 많은 사람들이 더 정확하게 비슷하거나 같은 범주의 사고로 유도되고 이해될 수 있기 때문에 언어는 기능할 수 있는 것이죠. 



그렇다면 언어보다 더 정확하고, 더 낮은 단위로 나눌 수 있는 논리적 구성은 무엇이 있을까요? 대표적으로 숫자가 있습니다. 논리학은 논리를 다루지만, 그 중에서도 수리 논리는 더 구체적이고 개념적인 기호를 사용하며 인간적 편견에서 더더욱 멀어질 수 있었죠. 마찬가지로 수학 또한 객관적 지식 그 자체에 가까운 지식을 다루는 학문입니다.


실제 논리학, 수학 등이 어떤지는 더 잘 알 사람들이 많겠지만, 요는 한글, 한국어, 영어 등의 언어로서 서술될 수 있는 문장은 인간적 한계와 편견을 담고 있고, 그에 따라 근본적 오류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반면 숫자를 이용하는 논리체계는 그러한 오해가 큰 폭으로 줄어들 수 있죠.


하지만 역시 숫자, 혹은 기호라는 가공된 개념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컴퓨터 공학 쪽으로 가본다면(비단 컴공만은 아니지만, 대표적이라서.) 온갖 프로그래밍 언어를 통해 가공된 언어들은 사실 비효율적이라고 하죠. 컴퓨터의 기초적인, 가장 낮은 단위의 논리적 구성은 0과 1의 2진법입니다. 사실 이는 컴퓨터 공학만이 아니고, 고전역학에서 설명하는 우주 전체가 0과 1로 해체될 수 있겠습니다. 


이 0과 1은 있음과 없음으로 정의되고, 존재로서 가장 낮은 단위의 논리적 구성입니다. 약간 곁다리로 나가자면, 그 있음과 없음은 받아들이는 개념이기 때문에 논리적 체계에서 가장 낮아질 수 있는 구성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죠. 하지만 재밌게도, 사실 우리가 보고 받아들이는 세계 자체는 단지 있음 하나 뿐으로 정리됩니다. 우리 주변에 없다. 라고 여길 수 있는 곳에는 사실 있음으로 가득차 있죠. 공기, 빛 등등.


그건 범위를 확장해서 지구나 태양계, 우주 전체로 넓혀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숫자로 이 세상을 바라본다면 온 세상이 1로 가득차 보일 것이고, 우주 밖에서 이 우주룰 쳐다본다면 그저 커다란 하나의 1로 보일지도 모르겠죠. 따라서 없음이라는 것은 개념적으로만 존재하고, 실존하는 게 아닐 수 있습니다. 이 우주에 보이드라는 공간이 있어서 아무 것도 없다곤 하지만, 빛이 지나기 때문에 광자는 있을 것이고, 그게 아니더라도 공간이라는 물리적 실체는 존재하고, 시간이라는 개념 또한 존재합니다. 단지 빈 공간일 뿐이지, 아무 것도 없는 게 아닙니다. 따라서 있습니다.


이 우주 내는 있음(1)로 가득하고 이 우주 밖으로 시야를 돌린다고 해도 단지 알 수 없을 뿐이지 실은 1로 구성되어 있을 지도 모르는 일이죠. 그렇게 된다면 정말로 없음(0)은 존재하지 않고, 그렇기 때문에 개념적으로만 존재하는 사유일 것이며, 우주 밖이 정말 아무 것도 없다면 그제서야 0과 1은 실존하여 존재하는 게 될 겁니다. 우주가 끝없이 팽창하는 이유가 사실은 그 없음을 채우기 위해서일지도 모를 일이죠.



뭐.. 아무튼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논리라는 것은 그러한 언어, 단위, 기호, 개념, 사유의 구성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구성이라는 게 어디까지나 지적능력을 기반으로 하는 편견이라는 것이죠.


가령 모래사장에 랜덤하게 배치된 돌멩이들이 있다고 칩시다. 우리가 위에서 보면서 돌멩이들을 둘러보니, 어느 한 구석에서 1열로 10개의 돌멩이가 뉘여져 있는 것을 봅니다. 우리는 그것에서 패턴을 찾게 되고, 그것을 보고 앞서처럼 1열로 10개의 돌멩이가 있다는 것으로 구성하여 논리적 패턴을 발생시키게 됩니다. 


반대로 아무렇게나 떨어져 있는 돌멩이들을 모아 중앙의 돌을 기준으로 방사형으로 돌을 놓거나, 아예 더 간단하게 두 돌멩이를 서로 양 옆에 두었다고 칩시다. 우리는 이것에서 어떠한 패턴이나 기호를 발견할 수 있지만, 사실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단지 우연찮게 돌멩이들이 10개가 1열로 뉘여져 있는 것이고, 다시 말해 그냥 돌멩이, 돌멩이, 돌멩이 ... 돌멩이, 돌멩이, 돌멩이. 가 있는 것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돌 두개를 주워서 나란히 둔다고 해서 어떠한 논리적 구성이 생기는 게 아닙니다. 단지 돌멩이 하나가 있고, 다른 돌멩이 하나가 있을 뿐이죠.


여기엔 어떠한 논리적 구성이 없고, 어떠한 상징도, 의미도 없습니다. 단지 돌멩이라는 객체 하나가 있고, 다른 돌멩이라는 객체 하나가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모양을 보고 어떠한 패턴을 발생시키고 기호화할 수도 있죠. 바로 이게 인간적 편견이라는 거고, 논리적 구성이 인간적 편견에 오염된 오류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장 기본적인 단위와 개념, 가장 낮은 단위의 논리라 하여도 객관적일 수 없습니다. 이는 다르게 말해서, 객관성은 허상이고,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논리와 객관성은 오류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의문은 다음의 두가지입니다.


1.객관성이라는 것은 인간의 편견에 의해 근본적으로 오류를 내포하고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인가.

2.객관적인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후자라면, 우리는 어떤 것이 됐든 아무 것도 알 수 없을 것입니다. 단지 안다고 착각하고 오해하고 있을 뿐이죠. 그저 쓸만한 구성 내에서 논리적이거나, 합리적이라고, 객관적이라고 여기며 그 작은 틀 내에서 무한히 틀리고 있을 뿐일 겁니다. 이 세계에 필연적인 것은 단 하나도 없고, 모든 것은 우연이며, 객체로서 존재할 뿐 모든 것이 다 허상이 된다는 겁니다.


우리가 사는 이 문명과 지식이 그러한 논리적 구성 위에 세워졌지만, 그것은 일정 이하의 작은 틀 내에서일 뿐이고, 실제로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일 수 있죠. 돌 10개가 1열로 늘어선 것처럼. 그게 어떠한 패턴이나 기호, 상징으로 여겨질 수 있고, 똑같은 방식으로 더 많은 열과 더 긴 줄을 만들 수 있지만, 실제로는 단지 돌 하나가 있고 돌 하나가 있으며 돌 하나가 있는 것에 불과한 것지도 모를 일이죠.



반면 전자일 땐, 모든 지식과 그 지식의 가장 기본 단위가 될 수 있는 논리적 구성이 오류를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절대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없고 그것을 담보하거나 증명해낼 수 없습니다. 단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객관적인 것에 한 없이 가까워질 수 있을 뿐이죠.


그러한 절대적 객관성을 우리는 진리라 부를 것이고, 우리의 문명, 도구, 삶의 방식 모두가 제각기 의미를 지닐 것입니다. 추구할 수 있고 발전할 수 있으며, 단지 한계가 있어 완벽해질 수만은 없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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