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hrodin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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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며,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 - E.Kant
by Ko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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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난 작가는 뛰어난 철학자이기도 하다. 저는 예전부터 뛰어난 작품을 창작해내고 가공해내는 작가들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뛰어난 작가는 정식으로 철학을 공부한 것은 아니나, 철학자와 같은 것을 작가의 관점으로 관찰하고 통찰하기에, 뛰어난 작가일수록 그 작품에 담긴 지성과 나타나는 통찰은 깊고도 진하다고요. 


그런 의미에서 랑또 작가는 뛰어난 작가인 것이 사실입니다. 가담항설은 길 위의 소문, 항간의 뜬소문을 의미하는 사자성어로서, 넓은 의미에서 보자면 민중 그 자체를 의미하기도 한다고 생각하는데, 신룡이라는 철혈의 독재자라는 절대통치자, 절대무력을 무너뜨리고 인간의 주제성을 살리기 위한 목적의 플롯으로 이야기가 돌아가는 것으로 보고 있는데, 제목이 작품의 정체성을 나타낸다는 점을 생각하면 상당히 감각적인 네이밍 센스가 아닐까 싶습니다. 



개인적으로 가담항설의 1화는 참으로 마음에 드는 것이, 단지 관심과 임팩트를 주기 위해 1화를 일부러 자극적으로 연출해내고 시작해내는 일부 작품들--주로 라노벨 등에서--과는 다르게, 1화에서 보여주는 작품 속 중요 캐릭터와 전체 극의 중심을 꿰뚫을 요소를 배치해내 그 성격을 너무 자연스럽게 드러냈다는 점에서 가담항설 1화를 처음 보자마자 확 꽂혀버렸거든요.


1화에 등장하는 작품 속 최중요 주, 조연은 4명입니다. 세력으로 구분지었을 때는 신룡, 동죽과 복아와 한설이죠. 그리고 신룡은 얼핏 가벼워 보이지만 처음부터 인간에게 기대하지 않았다는, 어떻게 보면 싸이코처럼 보일 법한 캐릭터성을 드러내고, 신룡이 무엇을 명령하든 절대 복종하는 동죽의 캐릭터성을 보여줍니다. 


동시에 유약해보이고 걱정 많아 보이나 무언가를 진심으로 바라고 간절히 소망하는 복아와 천진하면서도 깨끗한 한설이가 나타나죠. 복아는 진심의 힘과 간절함을 분명하게 아는 캐릭터이고, 명영과의 과거에서 크게 변화한 인물이죠.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 그리고 제가 확 꽂혔다는 부분은 바로 한설의 등장입니다.


한설의 등장은 매우 상징성이 깊습니다. 복아는 천지신명께 무언가를 진심으로 간절히 빌었고, 그 직후 한설이가 등장하죠. 가담항설의 세계관에서 신룡은 철혈의 절대자, 독재자이고, 그 밑에서 만백성이 복종하게 되는 구조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다른 무엇도 아닌 사람의 형상으로 나타난 존재가 바로 한설이지요. 이는 마치 한설을 이 세상에 내려 무언가를 이룩하고자 하는 천지신명의 의중으로 해석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로 뒤에 한설은 왕을 만나러 간다고 했습니다. 중요한 건, 왕을 만나러 간다는 점과, 만나러 가는 것이 신룡이 아니라는 점이지요. 즉, 한설은 왕에게 무언가를 말해줘야 할 임무를 가지고 만들어졌으며, 그 시작은 복아의 기도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겁니다. 복아의 기원은 도련님(강명영)이 과거에 급제해서 익히고 깨달은 것을 왕에게 말하게 해달라는 것이었고요.


한설이 사람의 형상인 이유는, 단지 그게 기능적으로 편하고 오해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이 아니라면 알 수 없고, 사람의 형태가 아니라면 겪을 수 없는 여러 관계를 경험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더불어 자신이 깨달은 것을 왕에게 말하러 가기 위해선 먼 거리를 이동해야할 것이고, 많은 사람들과 여러 관계를 경험하게 될 것이죠. 한설이는 돌이었기에 태어나 자라 여러 경험을 하고 성장한 다른 이들과 다르게 깨끗한 하나의 백지 상태와 같습니다.


천동지가 글을 적어 소원을 실현시키는 보물이라면, 한설이는 사람의 형태로 복아의 소원을 실현시키는 보물이겠죠. 한설이가 백지이기 때문에 그 위에 적히고 그려질 것은 좋은 것들이어야 하겠죠. 하지만 글과 그림엔 안 좋은 것이 끼어 있다면 튈 것이고 완성도가 떨어지게 되겠지만, 사람에겐 그러한 안 좋은 것 또한 하나의 경험이고 성장의 양분이 됩니다.


종이는 성장할 수 없죠. 하지만 사람이 된 한설이는 성장할 수 있게 됩니다. 순수하기에 명확하고, 명확하기에 정확하죠. 한설이가 모험을 통해 보고 듣고 배운 것. 깨달음을 왕에게 말한다면, 무언가 변하게 될 것입니다. 왕은 인간 중 가장 높은 존재로서, 신룡이라는 비현실적인 요소를 제외하고 보면 만인지상의 위치에 있는 자입니다. 신룡이 아닌 왕에게 가서 말을 해줘야 한다는 점은 천지신명이 신룡이라는 존재를 거부하거나, 거부하고자 하는 인간의 의지를 돕기 위함이지 싶더군요.



가담항설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다 각자의 사정이 있었고, 그 삶에서 얻어진 깊이가 깊습니다. 보고 배워서 얻어진 지성이 아니라, 삶을 살아서 겪고 다치며 생각하고 이입하면서 얻어진 감성이기에 그들이 하는 말들은 사람의 마음 속 깊은 곳을 자극하고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지 명확하게 알 수 있게 하죠.


이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마음입니다. 주체성은 마음에서 시작되는 거죠. 누군가를 사모하고, 아끼고, 걱정하고 슬퍼하는 모든 것은 주체적이기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이고, 도구나 장치였다면 할 수 없는 것이죠. 설령 그것이 노비이고 백정이라도 그들이 주체적으로 살아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것이 마음이지요. 혹은 마음이 있기 때문에 주체적일 수 있는 것일 겁니다.


백정인 태하가 장님 아가씨를 사모하고, 그 장님 아가씨 또한 태하를 사모했던 것처럼 마음, 진심이라는 것엔 장벽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죠. 신분이나 상황이 어떠하든 의지를 가지고 진심을 드러내며 인간 개개인의 주체성을 직접적으로 보여주죠. 



랑또라는 작가의 실력이 다른 어중이떠중이들에 비해 격이 몇 단계는 높다고 여겨지는 부분은 바로 사람의 마음을 정확하게 통찰해내고, 그것을 부족함 없고 차고도 넘치지 않는 문장으로 정리해냈다는 점입니다.


가슴으로만 하는 이해는 문장이 부족하기에 설명할 수 없어 아쉽고, 말만으로 설명하는 사실은 감정이 깃들어 있지 않아 사람을 움직일 수 없습니다. 사람이 분노하든 행복하든 자신의 상태를 정확히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은 나름의 지적능력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타인에게 설명할 수 있다면 공감할 수 있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인연인 것이며 관계인 것이지요.


책을 읽고 풍부한 단어를 알게된 다는 건, 슬픔의 저 끝에서부터 기쁨의 저 끝까지. 자신이 알고 있는 수많은 감정의 결들을 하나하나 구분해내는 거에요. 정확히 그만큼의 감정을 정확히 그만큼의 단어로 집어내어 자신의 마음을 선명하게 들여다보는 거죠.  


(중략)


같은 단어를 알고 있다면 감정의 의미를 공유할 수 있고 같은 문장을 이해할 수 있다면, 감정의 흐름을 공유할 수있어요. 그리고 그건 서로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게 만들죠. 정기씨가 저에게, 제가 정기 씨에게. 그런 사람이면 좋겠어요.


앞으로의 많은 고난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와 위로가 되도록.

- 가담항설 90화 中 홍화


감정을 정확히 이해하고, 무엇인지 설명해낼 수 있다는 것은 동시에 자기 자신의 상태를 정확히 파악한다는 것이며, 자신을 정확히 파악한다는 것은 자신이 누구이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게 해줍니다. 나는 누구이며,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자신을 파악하고 재정의해낸다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재정립해내는 과정이기도 하죠.


언어란 바로 그런 것이며, 그런 힘을 가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의 힘. 거리를 떠도는 말들엔 무언가 담겨 있을 것이고, 한설의 임무가 바로 그것을 왕에게 전달하는 것입니다.



다른 캐릭터들은 어떤가요? 명영과 복아는 서로 살아온 삶이 달랐으면서도 서로를 이해할 수 있었고,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공부하던 명영이 달을 벗삼아 지냈던 시기에 복아라는 첫 친구, 나눌 수 있는 첫 타인이라는 관계를 겪으며 생소했을 복아와의 관계에서 올바른 길을 찾아 소중한 관계를 만들어가는 현명함과 조심스러움을 보았고, 그렇게 태어났기에 평생 불행할 거란 복아가 명영이라는 빛을 보고 올바른 길을 뒤따라갔으나, 그것은 온전히 명영 혼자만의 힘이 아니었고, 자신이 있었기에 그럴 수 있었음을 깨닫게 되죠.


명영은 복아를 아꼈고, 복아는 그 이상으로 명영을 아끼고 소중히 여겼습니다. 자신은 불행하게 태어났으니, 불행하게 될 것이라 여겼지만 그 지독한 밤 하늘 속 커다란 벗, 달을 보고 가르쳐준 지성을 통해 자신 또한 올바른 길을 걸을 수 있는 안목이 생겼죠. 


그렇지만 사람의 마음은 결코 강할수만은 없기에 서로가 서로를 아끼는 마음에 약점이 되기도 합니다. 명영은 과거를 보러 가지만 복아는 놔두고 가려 했고, 복아는 위험하니 보낼 수 없다고 했지만, 실은 서로가 서로를 걱정하기 때문에 명영은 자신의 신념을 위해 복아를 그런 위험한 책임 속에 같이 데려갈 수 없었고, 단지 자신이 없이도 현명히 살 수 있도록 안배해왔던 것이죠. 복아는 그런 명영을 그런 위험에 가게 둘 수 없었지만, 사실은 명영이 자신의 곁에 있어줬으면 한다는 소망이 더 강했기에 그저 보내지 못한 것일 뿐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약하기 때문에.


하지만.


복아야. 우린 오랜 시간 서로에게 둘 뿐이었지. 그동안 나의 세상이 훌륭했다면 그건 네가 훌륭했기 때문이야. 너는 나의 세상이고 나는 너의 세상이니까. 우린 세상의 일원이자 그 자체야. 하지만 같은 고통도 사람에 따라 견뎌낼 수 있는 정도가 다르고 어떤 고통은 개인이 도저히 극복해낼 수 없어. 


그때 우리가 서로의 약한 순간을 위해 손을 잡아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누구나, 언젠가 약할 수밖에 없는데도, 평생 약해지는 걸 두려워하며 살아야만 해.  


그래서 나는 더 많은 사람의 손을 잡으러 가려해. 과거시험은 그 길의 과정일 뿐이야. 그래서 과거를 보러 가는 거야. 하지만 그건 너의 신념이 아니니까 너를 데려갈 순 없어. 나는 나의 신념을 내가 이루기 위해 궁으로 가는 거니까.


(복아) 하지만... 그건 너무 위험하고 불가능한 일이에요. 


나의 신념은 그런 세상을 만들어내는 게 아니야. 그 길을 향해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는 내가 되는 것. 그게 나의 신념이야. 



명영은 복아에게 자신의 신념을 말하며 자신이 혼자 가야하는 당위를 설명합니다. 힘들어하는 이들, 약한 순간에 빠진 사람들의 손을 잡아주기 위해서 자신의 길을 가는 것이라고 하죠. 그리고 그것은 그런 세상을 만들기 위한 원대한 무언가. 어쩔 수 없이 손이 가닿지 않는 외부의 세계가 아니라 언제나 살펴보고 가다듬을 수 있는 내부의 세계, 자기 자신을 위해서라면서요.


복아야 괜찮아?!! 괜찮은 거 맞지?!!

나 지금...

앞이 안 보여서 잘 모르겠어. 


그 뒤 바로 현재 시점으로 돌아와 머리 위쪽이 날아가 앞을 볼 수 없는 한설이가 절벽에서 떨어지는 복아의 손을 잡아 줍니다. 정말 상징적인 컷이자 예술적인 구성이죠. 자신의 상태가 말이 아님에고 복아를 걱정하고 결코 놓지 않으려는, 자신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한설과, 앞이 보이지 않는 한설에게 눈이 되어주고, 길이 되어주며, 더불어 올바른 길을 볼 수 있게 해줄 수 있는 복아의 구조를 고작 몇 컷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명영이 복아 자신에게 그랬던 것처럼, 복아는 한설이에게 밤 길 위의 밝은 볓이, 달이 되어줄 수 있는 것입니다. 



복아야, 복아야!! 복아야!!

나... 과거 시험 봐야해. 알잖아, 넌.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나도 알아. 네가 날 위해 얼마나 헌신했는지!! 그러니까 제발... 너의 헌신이, 나의 노력이, 우리의 지난 모든 날이,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말하지 마... 


명영이 약하고 힘들어하는 시기.


그리고 바로 이어지는 복아의 자조어린 독백.


나는 반드시 불행해질 거야. 불행해질 수밖에 없게 태어났으니까. 

절대로 벗어날 수 없는 완벽한 불행을 가졌으니까.

이 사람은 왜 날 데려가는 걸까? 어르신은 날 왜 데려왔을까?

어차피 난 반드시 불행해질 텐데...

대체 왜 나를 데려온 거야!

나는... 어차피...

반드시 불행해질 텐데.

왜 나를 더 비참하게 만든 거야. 


복아는 노비입니다. 노비로 태어났기 때문에 노비인 것이죠. 그러니 반드시 불행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약자의 권리는 고통받는 것 뿐이니까요. 어차피 고통 받을 거라면 계속 고통을 받는 것이 낫지, 잠시라도 편안하고 행복하고, 미래를 꿈꿀 수 있으며, 그 상태에 젖어버리면 곧이어 뒤찾아올 채찍은 가시가 달린 듯 더 고통스럽고 아프게 하겠죠. 오히려 행복했기 때문에 앞으로 평생을 행복했던 때를 떠올리며 더 고통스럽게 될 것입니다.


잘해주지 말지.

다정하게 말하지 말지.

어쩌면...

어쩌면...

행복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만들지 말지.


사실은 여자라는 걸 알아챘음에도 모른 척하고, 이제는 키도 더 크고 힘도 더 세져 이길 수 있게 된 가슴 속 거대했던 명영이 자신보다 작고 약해져 지켜주고 싶은 사람이 되어버려, 속으로 몰래 사모하지만, 결코 같은 자리에 있을 수 없는 분명한 신분의 틀 속에서 자신은 더 비참해질 텐데.



복아야..!! 복아야...!!


(복아) 괜찮아요, 울지 마세요 도련님. 울지 마세요. 


복아야... 나는 왜... 나는.. 왜!!!

이렇게 태어났을까...!!


태생적 한계와 절망. 복아는 노비로 태어났기 때문에 스스로 불행해질 거라고 태생을 저주하고 자조했지만, 이는 자기 혼자만의 고민과 고통이 아니었죠. 명영은 여자로 태어났기에 사실은 과거를 볼 수 없었고, 때때로 그러한 사실은 칼날처럼 마음을 비집고 들어와 너는 여자야. 과거를 볼 수 없어. 여자이기 때문이야. 라는 현실을 끌어올리죠. 나는 왜 이렇게 태어났을까.


그 날

나는 왜

이곳에 따라온 걸까.

평생을 불행에 시달려놓고.

그게 얼마나 커다란 고통인지 누구보다 잘 알면서.

왜 똑같은 고통을 겪게 만든 거야!!

그 날

나는 왜

이곳에 따라온 걸까.

나는 왜...

나는 왜...!!


제가 대신 볼게요. 도련님이 글을 알려주시면, 제가 도련님 이름으로 시험을 볼테니까, 같이, 계속 공부해서-

궁으로 함께 들어가요. 


당신을 떠날 수가 없을까.


같은 날, 같은 고민과 후회. 자신은 행복할 수 없고, 비참해질 뿐이며, 명영은 과거를 보러 떠나게 되어 혼자가 될 것이니, 이제 그만 떠나자고 마음 먹었지만 그 고통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자신이 그러한 경험을 해본 적 없는 명영에게 같은 고통을 주게 될 것이라는 남을 생각하는 마음은 되려 그 자신을 더더욱 아프게 했습니다.


그래서 복아는 다시 돌아왔죠. 마음은 한가지 면만 있는 것이 아니므로, 하나는 후회와 미안함으로, 하나는 사랑과 미련의 마음으로. 같이 있고 싶어서 도련님의 이름으로 시험을 보고자 같이, 그리고 계속 공부해서 함께 궁에 들어가고 싶고, 그런 마음 때문에 떠나고자 해도 달 밝은 밤 환히 빛나는 밤 하늘과 그 별빛 아래 훤히 보이는 내가 갈 수 있는 길을 보고 내가 가야할 길을 가서 명영에게 돌아왔던 거죠. 


이걸 미련이라고 부르면 미련이 되겠지만, 난 이걸 희망이라고 불러. 

별들은 작고 멀리에 있지만 반드시 그 자리에 존재해. 그리고 그건 우리에게 길을 안내하지. 


(복아) 별은 하늘에 있고 제 발은 땅에 있어요. 눈앞은 어둡고 길은 너무 험해요.


걱정마, 복아야.

우리가 배운 모든 것이 네 길을 밝힐 테니.

넌 이미 많은 걸 알고 있어, 네가 안다는 걸 모를 뿐이지. 네가 정말 아무 것도 모른다면, 내가 널 혼자 돌려보낼 리 없잖아. 

날 믿지, 복아야? 나도 널 믿어. 네가-

다른 사람들에게 훌륭한 세상이 되어줄 거라는걸.


아무리 많은 것을 알아도 안다는 것을 모른다면 알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명영은 복아에게 자신이 어디에 있고 어디로 가야할지 알려주는 별이었지만 그 명영이 떠난다면 자신은 다시 어두운 세상 속에 내던져져 돌아가게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하지만 명영은 복아를 새로운 별로 만들었고 복아는 그걸 몰랐을 뿐이죠.


별은 타인에게 길을 알려주고, 별이 되어 누군가에게 훌륭한 세상이 되어줄 수 있습니다. 저 위에 복아가 앞이 보이지 않는 한설에게 별, 세상이 되어 가야할 길을 정확히 알려주게 되는 것은 명영의 이러한 가르침을 이어 받았기 때문입니다.


(복아) 이제 겨우 글자 배웠는데 벌써 이렇게 비단옷을 입어야 하는 이유가 있나요? 지금 당장 시험 보러 가는 것도 아닌데... 으이 어색해.


복아야, 옷차림은 단순히 신분을 드러내는 수단이 아니야. 그저 비단옷을 입었다고 남들이 널 양반으로 볼 거라고 생각하면 안 돼. 옷에 어울리는 자세를 갖춰야지!


(복아) 근데 뭐 대충 비단 옷 입으면 양반으로 보지 않나요? 양반이라고 다 품행이 바른 것도 아닌데.


그런 사람이 되지 않으려고 배우는 거니까. 네가 입은 옷을 통해서 예절, 기품, 자세, 몸가짐, 행동가지를 익히는 거야. 삶은 항상 그 자체로 우리에게 많은 걸 배우게 하잖아?


(복아) 뭐...뭔 소린지 모르겠어요.


후후 지금은 어색하겠지만, 언젠가는 이 옷에 잘 어울리는 네가 될 거라 믿어.


도련님은... 분명히 해낼 수 있을 거예요. 저는 도련님을 믿어요.


고마워 복아야. 이젠 그 옷이 아주 잘 어울리는구나.


벼는 익을 수록 고개를 숙이고, 기품과 품위는 행동가지에서 나타나죠. 단지 어떻게 입고 어떤 모양새를 하느냐가 아니라, 그 안에 든 것이 자연스럽게 밖으로 보여지는 것에서 우리는 그 사람의 품위를 느끼는 겁니다. 복아는 노비로 태어나 노비로 살아왔지만, 명영과 함께 공부하고 보고 배우면서 지성인의 품격을 갖춘 것입니다. 믿어주고 이끌어주는 훌륭한 스승을 두었으니.


인간은 누구나 약해. 어느 부분이, 어느 순간이, 단드시 약해. 인간은.

완벽한 인간이란 건 없어.

하지만 나의 약점은, 나의 불행은, 나와 같은 고통을 겪는 타인을 이해할 수 있게 하고, 너의 불행이 나의 불행이 되게 만들지.

그리고 그건 날 강하게 만들어.

네가 소중하니까.

너를 위한 강한 내가 되는 거야.


명영에게 복아는 이토록 소중한 존재입니다. 복아를 위해서 강해질 수 있었던 것이죠. 사람의 마음은 결코 갈할수만은 없기에 서로가 서로를 아끼는 마음에 약점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서로 헤어져 명영은 과거를 보러갔고, 복아 또한 결국 명영을 찾아 나서기 위해 길을 떠나게 된 것이죠.


서로가 서로의 약점이 되었지만, 그러한 약점이, 상대를 소중하게 여기기 때문에 더 강한 자신이 되는 겁니다. 복아가 힘들 때 명영이 손을 내밀어줬고, 명영이 힘들 때 복아가 희망이 되어주었죠. 서로가 서로를 붙잡고 넘어지지 않게, 떨어지지 않게 해줬다는 것이 그들은 성장하고 강해졌다는 증명입니다. 



이러한 명영과 복아의 관계 뿐 아니라 작품 속에 등장하는 명영-암주, 갑연-갑희, 영호-이청, 이청-춘복, 홍화-정기, 동죽-하난 등의 대비되며 입체성을 더더욱 부각시키고 극대화시키는 조합들에 대해서도 나름의 해석과 설명을 하면서 의미를 서술하고 싶지만, 명영과 복아만으로도 이렇게 길어질줄 몰랐던지라 엄두가 나지 않는군요.


어찌됐든 가담항설에서 주요하게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각기 다른 신분과 상황에서 서로간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간극을 어떤 이들은 진심과 배려를 통해 좁히고 이해하는 과정과, 어떤 이들은 반복과 갈등으로 그저 이기려 하는 싸움이 되는 또 하나의 대비가 발생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두가지 규모 다른 대비양상은 작품의 활동성을 구조적으로 보이게 하는 동시에 더더욱 입체적이고 간결하게 이해된다는 점에서 작품 구성의 뛰어남을 되새겨보게 됩니다. 만들기는 쉽지만 그게 입체적으로 보이게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고, 자연스럽게 배치하고 구성한다는 점에서 더더욱 작가의 역량에 놀라울 따름입니다.


심지어 그 뿐만이 아니라 컷 구성과 그림의 연출은 거의 예술적이라 여겨질 정도인 씬들이 있고, 그것을 수식하게 되는 문장들은 하나하나 버릴 게 없고 더할 것 없는 것들이니, 단지 경제적이라고 할 수도 없을 정도이죠.



정말이지, 이 작품 가담항설에선 그러한 보석 같이 빛나는 문장들이 사람의 마음을 정확히 짚어내고,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명확히 이해시킵니다. 그러한 통찰력은 아무나 가질 수 없기에 뛰어난 철학자인 것이고 그러한 문장력은 아무나 가질 수 없기에 뛰어난 작가인 것입니다. 이게 그 랑또라이로 불렸던 그 작가가 맞을까 싶을 정도로 대단한 역량입니다.



각기 다른 입장과 위치에서 세상을 보고 해석하는 것은 그만큼 세상의 복잡성을 보여주는 것이고, 사람의 마음은 같은 것을 보고 같은 세상에 있어도 서로 다를 수밖에 없음을 극명하게 드러내어 묘사하고 있죠. 명영과 암주가 달랐고, 갑연-갑희와 명영-복아와 달랐습니다. 세상 자체가 완전히 다른 세계였어요.


이들이 아니라도, 누군가는 축복 받으며 태어나 행복 속에서 자랐지만, 누군가는 축복 없이 태어나 고통과 두려움 속에서 아득바득 살아오며 자란 사람도 있는 법이죠. 이들의 세상은 같은 세상이지만, 사는 세계는 완전히 다릅니다. 그렇기에 선의의 신념을 담은 명영의 세상과 갑희의 세상이 다른 겁니다. 


인간에게 배신 당하고 춘매를 잃은 신룡의 세상 또한 그렇습니다. 겪기 전에는 전혀 알 수 없고, 될 수도 없었던 내가 하루 아침에 되는 경험은 누구도 겪고 싶지 않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는 그런 경험이죠. 상실喪失은 잃어버리는 것이라면, 상심傷心은 마음을 다치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룡은 마음失心을 잃었습니다.


그런 마음을 잃어버린 사이코패스가 가진 유일한 감정이 바로 분노죠. 추국이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고 단지 기억만 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마을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마음 없는 지성은 분노와 광기에 빠진 괴물보다 더 잔혹한 괴물입니다.


인간이 아닌 신룡은, 마음 없는 신룡은 괴물인 셈이죠. 그런 괴물이 통치하는 세상이 어떻겠습니까? 그곳이 곳 지옥인 셈입니다. 그러한 지옥. 신룡이 그리는 인세의 지옥은 매우 소름끼치는 곳이죠. 



아주 예전에 들었던 말인데, 정확히는 기억이 나지 않아 개략적으로 서술하자면, 예술은 시대에 따라 변화했고, 과거 그리스적 기승전결에 따라 카타르시스, 감정적 전율을 느끼게 하는 작품과, 사회비판적 불편함을 느끼게 하여 시대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예술로 구분을 지은 내용인데, 저는 신룡이 그리는 인간세상에 대해 그러한 것을 떠올렸습니다.


너는 숱한 인간들이 어째서 나를 죽이려고 하는지 알고 있느냐.

내가 폭정을 휘두르고, 수많은 이들을 죽였기 때문에?

내가 죽인 자의 측근이 나를 향한 복수를 하려고?

아니면 새로운 권력을 잡기 위해서?

정의를 외치고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해?

아니, 날 죽이려고 하는 모든 이유는 오로지-

내가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내가 영생의 삶을 가진 불로불사의 몸이었다면 그 누구도 날 죽이러 오지 않았을 거다.

인간은 오조리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만 움직인다. 나라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든, 반드시 그 제도 하에 이득을 보는 자가 있고, 그렇지 않은 자가 세상을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바꾸기 위한 싸움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어떤 방식의 태도를 취하든, 누군가는 반드시 나를 죽이려 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공포와 절망으로 통제하려 한다.

어떤 명분을 가진 인간이든, 한치 앞이 보이지 않는 끝없는 어둠 속에선 절대로 섣불리 움직일 수 없다.

깊고 고요한 어둠은 인간의 두려움과 상상력을 자극하고 스스로를 공포에 몰아넣으며 생각과 행동을 위축되게 만들기 때문이다.

백매야.

과거의 나는...

춘매를 한없이 사랑하였으나, 그것은 그때의 춘매를 그때늬 내가 사랑한 것이며, 내가 그리워하는 것은 그때의 그 순간임을.

하지만 다시는 그때로 돌아갈 수 없음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춘매의 시간은 그날로 멈추었지만, 나는 그 후로 9년을 더 살았고, 나는 춘매에게 그때의 내가 아니며, 나 또한 그때와 같은 마음으로 춘매를 대할 수 없다.

춘매가 알고 있던 세상과 내가 알게 된 세상은 완전히 다른 것이고, 춘매의 이상과 나의 이상은 더 이상 동시에 공존할 수가 없는 것이 되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것은 내게 춘매를 다시 살려내길 간절히 바라면서도 바랄 수 없게 만들었다.

하지만 나와 사군자는 오백 년을 넘긴 기도로 영원히 늙지 않고 병들지 않는 불로의 몸을 가졌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육신일 뿐이며, 무엇으로도 죽지 않는 불사의 몸인 것은 아니다.

오직 춘매만이 나와 사군자를 불사와 다름이 없는 몸으로 만들 수 있다.

춘매는 생명을 만들어내는 봄의 화신으로 춘매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우릴 죽음에서 부활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나의 천명은-

백성을 위한 완벽한 신이 되는 것이다.

춘매는 언제나 나에게 완벽한 신으로서의 용서와 자비를 말했지만, 용서와 자비는 비열한 자들을 위한 기회이고 구실이며, 오히려 압도적인 공포야말로 어리석은 인간들이 저지를 잘못을 사전에 차단하는 것이다.

애초에 이 나라의 평안을 나라는 단 한 사람의 선의에 의존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느냐?

인간이란, 다른 이의 잘못은 용서없는 처벌을 받길 원하면서 자신의 잘못에는 자비와 관용을 바란다.

자신의 비열함은 삶의 요령으로 포장하면서 타인은 원칙을 지키길 바라며 배신하면서도 배신당하고 싶지 않아하고, 악습인 걸 알면서도 자신이 이득을 보는 순간에는 그대로 답습하며, 공정한 기회보다 공평한 불행을 바라는게

바로 인간이다.

인간 본연의 성품이 저열하고 추악하기 그지없는, 지옥에나 걸맞는 것이라면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어주는 것이야말로, 완벽한 신이 해야 할 일이다.

그러므로 나는 인간들에게 지켜지지 않는 원칙과 명확하지 않은 규칙으로 어둠 속에서 눈을 멀게 하고,

단 한 번의 실수도 용서하지 않는 처절한 처벌로 한 걸음도 섣불리 내딛지 못하게 하며

불공정한 기회와 불공평한 결과로 포기와 체념에 익숙해지게 하겠다. 

그런 세상이 삶이 되고, 그 삶에서 얻은 경험이 자식에게 '삶이 준 교훈'이란 이름으로 대물림되며,

그것을 익혀 자란 모두가 그 삶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순응하지 않는 자를 배척하게 만들어

모두가 자발적으로 틀 안을 벗어나지 않는 영원한 통제의 굴레를 만들려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춘매를 되살려

나의 불사로 하여금 인간들에게 완벽한 절망을 안겨주고,

스스로를 끝없는 어둠 속에 가두게 하겠다.


... 정말 공포스럽기 그지 없는 말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장면 중 하나가 바로 명영과 복아의 진심이 드러나는 장면과, 춘복이 아들을 잃고 깨닫게 되며 다시 청이를 구하러 가는 장면과 더불어 신룡이 진심을 드러내며 세상을 어떻게 만들 것인지 '천명'하는 이 장면이죠.


이 말들은 어느 시대든 그럴 것이지만, 분명한 인간과 사회의 원리, 원칙을 이해하고 그 핵심을 정확하게 꿰뚫으며, 초인 독재자가 존재한다면, 그리고 그가 악하다면(혹은 악한 신념을 가졌다면) 어떻게 통치될 것인가를 묘사한 것과 다름 없다고 봅니다. 더불어 이러한 서술로 그 핵심적 요소들을 나열한 것은 독자로 하여금 그러한 사회를 상상하게 만들고, 자연히 현 사회와 비교하게 만들거나 연상하게끔 합니다.


이는 동양 판타지라는 작품임에도 사회적 비판이 가장 날카롭고 차갑고도 뜨겁게 벼려진 송곳. 아니, 작두처럼 휘둘러지는 장면이 아닌가 싶을 정도죠. 어지간한 사회비판 작품보다도 더 날카로웠습니다. 


그러한 사회를 바라는 집단이 현실에도 존재했고, 지금도 존재하고 있으며, 그러한 원칙 아래 정치와 통치가 작동한다는 점은 이 작품에서 말하는 지옥 같은 세상이 단지 작품 속 세상, 말 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그리스적 기승전결을 정석적으로 따라가는 판타지소년 만화인 동시에, 날선 비판성이 뚫고 나오는 현대적 문학작품이기도 하다는 평가를 주고 싶습니다.


물론 이런 작품이 한 두개도 아니지만, 사람의 감정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면서도 단지 감정만을 건드리지도, 어중간한 비판만을 하며 사실, 혹은 해석만을 나열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작품성을 거대하게 팽창시키고 있죠.



그리고 꼭 이야기하고 지나가야만 하는 요소가 있는데, 바로 판타지 장르답게 여러 마법 같은 능력을 사용하는 데 있어서 작가가 구축해대고 창조해낸 능력의 설정입니다.


이게 왜 꼭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냐면, 기본적으로 가담항설은 문학이라는 것을 근간으로 세계관의 능력을 만들어낸 작품입니다. 따라서 작품 내에서 사용되는 여러 능력들은 그러한 문학의 구성요소, 말과 글의 구성요소를 모티브로 따와서 만들어낸 것들이거든요.


능력의 수준은 지식의 깊음에서 나오고, 각인과 같은 능력을 사용하기 위해선 그에 대한 지식과 이해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하죠. 또한 결계 같은 능력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랑또가 정말 대단한게 다른 양판소나 일본산 라노벨 같은 곳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유치한 능력이 아니라 현실에 존재하는 개념을 설득력 있고 개연성 있는 능력으로 가공해내서 이용한다는 겁니다. 각인, 결계, 독안과 같은 능력을 문학과 접목시켜. 아니, 문학의 개념을 통해 각각을 구체적인 능력으로 만들어냈는데, 그러한 것들이 어떻게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설득력 있게 서술해냅니다. 


결계와 같은 것을 만들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묘사력인데, 무언가를 정확히 묘사할 수 없다면 그것을 타인에게 전달할 수 없죠. 그렇기 때문에 결계와 같은 자신의 의지, 상상을 타인에게 전달하기 위해선 그만큼 구체적이고 와닿는 묘사력이 필요하게 됩니다. 그리고 묘사를 더 정확하게 하기 위해선 많은 것을 알아야 하는데, 단순히 단어를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독서를 통해지식을 쌓고, 직접 보고 들어 견문을 넓혀 식견을 만들어야 한다고 하죠.


독서를 통해 지식과 통찰력을 기르고, 직접 보고 겪는 현실을 통해 자신이 아는 것을 단지 지식으로서 아는 것이 아닌, 몸으로 직접 느끼며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글쓰기, 문학 또한 그러한 맥락에서 좋은 묘사력이라는 것은 여러 종류의 경험에서 나오는 법이죠.


많은 글을 읽어봐야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고, 직접 겪어본 것을 더 정확히 묘사하며, 직접 많이 써봐야 그러한 시행착오를 통해 더 좋은 글, 더 훌륭한 글, 뛰어난 문장력이 만들어지죠. 작품 내에서도 시 짓기 또한 결계사들의 중요한 수련이라고 합니다. 


능력 중에서 개인적으로 독안이라는 개념을 참 좋아하는데, 독안으로 결계를 읽는 것을 독력, 이를 풀어내는 것을 해력이라고 합니다. 합쳐서 독해력이라고 하죠. 독해력은 현실에서도 글을 읽고 해석하고 이해하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단지 읽기만 해서는 무슨 의미인지 모르고, 이해하기 위해선 해석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읽을 수 있어야 하죠.


뛰어난 독해력을 가졌다는 것은 문장의 기본 단위를 논리적으로 분해해서 파악하고 그 구성과 성분을 이해하는 지적과정을 잘 해낸다는 것입니다. 마땅히 뛰어난 독해력을 갖추기 위해선 그만큼 뛰어난 지성을 필요로 하고요. 그러한 것을 갖추어 많은 것을 알고 잘 쓴 글을 쓰며, 잘 이해하는 사람을 보고 우리는 뛰어난 식견을 갖췄다고도 합니다. 


가담항설에 나오는 비현실적인 능력이 말의 힘, 글의 힘에서 나온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독해력이라는 현실에 존재하는 문학적 개념을 판타지적으로 해석하여 독력과 해력이라는 개념으로 재가공하는(비단 독안 뿐만 아니라 다른 능력들도.) 랑또의 창의력은 정말 참신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무엇보다 대단한 점은, 그것들이 결코 유치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전혀 있어보이기만 하지도 않다는 것 또한이요. 넘치치도, 부족하지도 않은 그 상태에서 발휘되는 작품 완성도의 완전성은 독자로 하여금 압도되게 하지 않나 싶습니다.



더불어 랑또 작가, 가담항설의 특기할만한 점은, 문학성에 있어서 일본 작품들과의 차이점인데, 일본 작품들의 경우 작가의 사색이나 통찰이 뛰어나도 철학적 정리가 잘 되어 있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대신 감정을 잡아내는데에는 꽤 일품인 경우가 적지 않죠. 다르게 말하자면 말로 정리하는 건 잘 못해도, 감각적으로 이해시키는 건 나름 잘하는 편이라는 겁니다. 물론 그것도 잘 하는 작가들이 그런 거긴 합니다만..


반면 랑또 작가는 그러한 사색을 말로써 아주 잘 정리해서 우리에게 제시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글(말)로 정리해서 소개할 수 없다면 그것은 진짜 자신의 지식이 아니고, 자기가 진짜 알고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하는 편인지라, 단지 일본 작가들의 문학적 이해도, 철학적 정립성이 떨어졌기 때문에 자신이 느끼고 상상하고 직간접적으로 감각하는 그 감정과 감성들을 글로 잘 표현해내지 못해서 어떤 면에선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느낌에 답답하기도 할 때가 있더군요.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랑또 작가의 가담항설은 그러한 감각을 정확하게 글로 표현하고,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문학적 표현의 형식으로서 아주 정확하게 정리해서 대사를 뽑아낸다는 점에서 굉장한 철학가인 셈이죠. 그렇다고 독자의 감정과 감성을 잘 못잡아내느냐? 그것도 결코 아닙니다. 아주 능수능란하게 가지고 논다는 점에서 괴물 같은 작가이기까지 하죠. 일본식 신파와 심각한 척 분위기 잡는 것은 전혀 없고, 그 인물들의 깊은 캐릭터성을 통해 우려내기에 어색함도, 작위성도 느껴지지 않죠. 결코 말을 늘이지도, 줄이지도 않기 때문에 각각의 대사를 음미할 수 있고, 음미하면할 수록 캐릭터성의 깊은 맛에 큰 매력을 느끼며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대사를 허투루 쓰질 않더군요.



가담항설이라는 작품처럼 훌륭한 작품은 참으로 욕심이 납니다. 정말 각각의 캐릭터와 구성, 인물관계가 흥미롭고 재미있어서 하나도 빠짐없이 설명하고 이야기하고 싶어지게 된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갑연, 갑희나 암주, 홍화, 정기, 이청, 영호, 춘복 등.. 설명하고 해석해보고 싶은 캐릭터들이 너무 많습니다. 하지만 그러기 너무 힘들죠. 글도 길어지고. 보는 이에게 욕심이 나게 만드는 작품이 좋은 작품이겠죠. 전 이 작품을 현재 연재되는 작품 중 가장 수준이 높고 뛰어난 작품이라고 평가합니다. 당연히 그런 창작물을 만드는 랑또 작가에 대한 평가는 더더욱 높아야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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