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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며,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 - E.Kant
by Ko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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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에 해당되는 글 862건

  1. 2018.08.05
    한국 페미의 젠더 감수성 주장의 위선과 편파성.
  2. 2018.07.07
    탄핵시 계엄령 선포, 군에 암약하는 국가 반역자들. 2
  3. 2018.06.21
    라스트 제다이, LOL, 배틀필드5와 PC의 문제에 대해서.
  4. 2018.06.20
    예멘 난민을 받아야 하는 이유와 오해. 13
  5. 2018.06.02
    최저임금법 개정안에 대한 단상.
  6. 2018.05.27
    북미회담에 대한 외교적 맥락의 이해.
  7. 2018.05.11
    왕이 방북과 김정은 방중에 대한 단상.
  8. 2018.04.30
    아프리카의 시위 민주주의.
  9. 2018.04.27
    한국전쟁 종전. 오늘 우리는 역사 속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10. 2018.04.19
    김경수-드루킹 사건. 민주당과 문 정권에 대한 부당한 선동비난.
  11. 2018.04.17
    천재의 죽음과 죄인의 고백, 아마데우스 리뷰.
  12. 2018.04.08
    통치 수장의 유능함과 무능함.
  13. 2018.04.08
    공과 사의 구분이 중요한 이유.
  14. 2018.04.07
    Julia Westlin - Unintended // 가사, 해석, 커버
  15. 2018.04.06
    Holly Henry - Hello // 가사, 해석, 커버
  16. 2018.03.23
    남들보다 더 논리적이라는 무엇인가?
  17. 2018.03.10
    주체적이고 선진적인 작품. 오만과 편견 리뷰.
  18. 2018.03.09
    실망스러운 게임. 야생의 땅:듀랑고 리뷰.
  19. 2018.03.04
    맞는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
  20. 2018.03.04
    관점은 어떻게 발생하고 차이를 이루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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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시대 오늘의 유머 회원 성폭행 조작 사건

https://www.fmkorea.com/168560237

https://namu.wiki/w/%EC%97%AC%EC%84%B1%EC%8B%9C%EB%8C%80%20%EC%98%A4%EB%8A%98%EC%9D%98%EC%9C%A0%EB%A8%B8%20%ED%9A%8C%EC%9B%90%20%EC%84%B1%ED%8F%AD%ED%96%89%20%EC%A1%B0%EC%9E%91%20%EC%82%AC%EA%B1%B4


이거 말고도 예시는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그 '젠더 감수성'이라는 것의 허명과 실체를 까발리기에 이만한 사건도 없을 겁니다. 


기본적으로, 젠더 감수성이라는 건 이성의 성별이 다름에서 나오는 차이와 간극을 이해하고 동감할 수 있는 능력 정도로 이해할 수 있는데, 문제는 이러한 개념과는 다르게 그러한 것을 극도로 편파적이고 진영적으로 사용하는 게 현 한국 페미들의 현실입니다. 심지어 같은 성별을 가진 이들 또한 진영적, 정치적 소재로 사용하면서 옳고 그름이나 정의, 법의 문제가 아닌 진영적, 정치적 승리를 위한 떡밥이자 도구로 사용하죠.


가령 위의 여시 조작 사건의 경우 그들은 진정으로 해당 인물의 성폭행 사안에 대해 걱정하고 공분을 터뜨리는 게 아니라, 그러한 사건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것을 이용할 목적으로 반응한 것으로 봐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선 저러한 눈에 보이는 위선적 반응들이 나올 수가 없고, 나중으로 가면 서로 말이 바뀌고 글, 댓글이 삭제되며 일부는 손절 들어가는 게 아니죠.


심지어 이 사건에서 나온 말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지만, 이러한 사건에 진짜여야 하는데! 하는 식으로 나온 적도 있는 걸로 기억합니다. 해당 캡쳐본을 찾을 수가 없는데, 누군가 발견한다면 댓글로 남겨주시길 바랍니다.



이러한 태도는 그들 스스로도 젠더 감수성을 의미 있게 여기지 않는다는 겁니다. 강남역 살인사건 때도 여혐사건이 아닌 정신질환자의 비정상적인 정신상태에서 발생한 범죄였지만 그 타겟이 여성이었다는 점을 들어 여혐사건이라 조작을 시도했죠. 심지어 추모 현장에서 싸움질, 비난 하는 행태가 이어졌고, 그런 성갈등 현장으로 비화되자 유족의 오빠 되는 분이 분노하기도 하고 유족들이 그러한 이유는 역시 그 사건의 본질과 다르게 흘러가는 상황에 반감을 가지며 하지 말라고 했지만, 정작 여성 측 진영에선 되려 유족들을 공격하고 자기들은 뭐 다른 목적으로 하는 거네 어쩌네 하는 식으로 나왔죠.


처음부터 정치적인 이용을 목적으로 했기 때문에 몰려갔던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남성을 공격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한 것이지, 피해자의 애도나 더 나은 건설적인 담론으로 이어지지 않은 것입니다. 그들은 누군가의 죽음 또한 수단과 도구로 사용하는 지독한 소시오패스인 셈이죠. 


그런 주제에 젠더 감수성을 따진다는 건 정신병적입니다.



이러한 것은 남성에 대한 태도가 특히 다른데, 남성 관련 사건, 남성의 죽음에 대해선 조롱하곤 하죠. 간단히 검색만 해봐도 무더기로 나옵니다.



이런 수준임에도 젠더 감수성을 주장한다는 것은, 그들 스스로 그러한 개념을 방패, 혹은 무기로 사용하는 목적입니다. 흔히 나오는 공부 하세요. 같은 말과 같은 맥락의 것이고, 그들이 불리할 때는 젠더 감수성, 유리할 때도 젠더 감수성을 운운하며 우위에서 계도하겠다는 소아병적인 정치성을 보여주는 것이죠.



단적으로 보자면, 병역 문제에 대해 한국 여성들의 젠더 감수성은 없는 수준에 가깝습니다.


한국에서 특히나 그런 문화가 강한데, 이는 성갈등의 영역 이전에 여성들의 군대, 병역에 대한 무관심과 어쩌면 의도적인 무시에서 비롯된 일입니다. 다른 나라 여성의 경우 병역에 대해 의외로 관심을 가지거나 재밌게 들어주는 사람이 많다지만, 한국은 오히려 지겹고 짜증나는 이야기로 여기죠. 자신들이 포함될 수 없는 것에 대한 열등감 비슷한 것인지, 남성 위주의 마초 집단에 대한 결벽증 같은 건진 모르겠습니다만..


하여간, 병역 문제에 있어 남성들은 여성에 비해 무조건 손해입니다. 남자들은 군대를 선택하지도 않고, 그것에 동의하지도 않았습니다. 국가가 법으로 강제로 끌고 가는 거죠. 그리고 성인으로서 청년의 황금기를 겪어야할 20대 초반의 2년이라는 시간을, 20대의 1/5의 기간을 군대에서 날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잃는 건 너무 많죠. 심지어 건강이나 생명마저도.


근데 여자들은 그거 이해나 하던가요? 군대가 뭔지도 모르고 뭐 하는 건지도 모르고 관심도 없고 아예 듣기도 싫어하죠. 병역 이야기에 대해 임신 이야기를 꺼내는 머저리들이 성별 안 가리고 튀어나오는 경우가 있고, 병역 논리에 대한 방어 논리로 임신을 끌고 오는 여성들도 있다만, 병역과 군대에 대해 이해하고 아는 여성은 극히 없지만, 반대로 남자들은 임신의 고충과 고통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압니다. 특히 찾아보거나 관심 있는 이들은 더 잘 알죠. 개월마다 어떤 문제와 고통이 있고 .. 심지어 임신 중에 여자는 거의 보물단지처럼 봐줍니다. 조금만 무거운 거 옮기려고 해도 남자가 대신 해주고 움직일 때도 손 잡아주며 부축해주고 할 정도로.


심지어 그 임신조차도 선택이지 의무가 아니고 안 한다고 처벌 받는 것도 아니며 군대의 2년 가까이 되는 시간에 비하면 그 절반의 기간이죠. 바로 이 지점에서 서로 논쟁의 대상이 아니고, 전혀 관계 없는 요소를 억지로 싸움 붙히는 거라 멍청한 짓인 거고요.


하지만 이러한 것들은 오히려 이해를 안 하고 무시를 하고 소통을 거부하며 무조건적으로 군대는 모르겠고, 니들이 우리를 이해하라는 간접적인 강요를 여자들이 남자들에게 하는 겁니다. 그게 불만이라면 자기들도 군대를 가거나, 아니면 남자들도 군대로 끌고가지 말라고 모병제 전환 시위라고 하면서 공동전선을 이루며 남자들의 입장을 지지해줘야죠.



이 점이 바로 여성의 젠더 감수성이 없다는 대표적인 예시입니다. 여성들이 남성들이 겪는 병역의무에 대한 고충을 이해하거나 최소한 알기라도 하던가요? 전혀. 오히려 군대 이야기 나오면 지루하게 여기고 무시하고 그만 하라는 식으로 눈치주죠. 


병역의무는 명백히 성별의 차이에서 나오는 일방적인 제도적 착취와 인생 전반에 영향을 주는 요소입니다. 그러나 젠더 감수성을 운운하는 이들 치고 이러한 진짜 젠더 감수성이 발휘되어야 하는 지점에 대해선 아무런 관심도 없죠. 아니, 사실 남성의 고충과 현실에 대한 모든 지점에서 그렇습니다.


왜냐면 처음부터 젠더 감수성은 정치적 의도로 사용되는 개념이지 성평등과 건설적 발전을 목적으로 사용하고 활동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죠. 그들은 정치병에 걸린 극단주의 집단이고, 반사회적인 집단일 뿐이지 어떠한 건설적 이상을 가진 이들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배제되어야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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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미애 "기무사, 촛불집회때 계엄검토..12·12 군사반란과 닮아"

http://v.media.daum.net/v/20180706093916554
"광화문 3개 여단 배치" 촛불시위 때 계엄령 구체 계획 짰다
http://v.media.daum.net/v/g3aqkWrpQe
"광화문에는 공수부대 투입"..구체적 '계엄군 편성안'까지
http://v.media.daum.net/v/20180706085144700

이철희 "기무사, 탄핵심판 때 위수령·계엄 검토"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8/07/05/0200000000AKR20180705168500001.HTML
기무사, 세월호 유족 성향파악에 과거캐기까지…‘맞불집회’도 조장
http://mn.kbs.co.kr/news/view.do?ncd=4003029
기무사 세월호 TF 대부분 현직에…장성도 포함
http://www.hani.co.kr/arti/politics/defense/851967.html
기무사 ‘세월호 사찰’ 첫 확인…단원고에 숨어 일일보고 했다
http://www.hani.co.kr/arti/politics/defense/851520.html
추미애 ‘계엄령 경고’가 사실로…이철희 “당시 영관급 군인 제보”
http://www.goba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5450
군인권센터 "軍 서울시내 장갑차 500대 보내려 했다···삼군사령부도 관여"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011&aid=0003341385&sid1=00



이 사실은, 군대에 여전히 국가 반역자들이 남아 있고, 언제든 반세기 전의 영광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한 한국의 헌법과 체제를 정면 부정하는 행위로, 반체제분자들이 군에 암약하고 있으며, 실질적 권력과 군사적 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줍니다.


대한민국의 진보 세력을 모조리 종북이라는 말도 안 되는 인식으로 바라본다는 것 자체가 국민을 '적'으로 본다는 것이고, 군대를 끌고 서울 수도를 점령한다는 것과, 그동안 북한에 대한 경계와 대비에 공백이 생긴다는 것은 마치 12.12 사태를 연상시키지요. 그 당시 전두환, 노태우는 쿠데타를 성공시키기 위해 전방부대마저도 빼서 쿠데타에 동원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계획은 군, 극우보수에서 항상 팔아먹는 북한에 대한 견제와 안보를 등한시한, 종북적 행위이자 반체제적 반역행위인 겁니다. 



이 자료들이 보여주는 바는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국내 정치 문제에서 군이 동원된다는 최악의 사태에 이들의 사상과 가치관, 목적의식을 적나라하게 드러냈고, 그것이 한국과 국민들에게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 반체제적이고 반국가적인 반역 사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북한은 우리의 주적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북한이 일으키는 한국인에 대한 피해와 인명손실보다 한국 군에서 발생시키는 한국인에 대한 피해와 인명손실은 더더욱 거대하죠. 휴전 협정 이후 한국인을 가장 많이 죽인 것은 북한이 아니라 한국군이었죠.



물론 이 계획이 실제로 실해외거나, 명령에 따라 실질적인 행사가 가능했을 거라고 보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계획이 보여주는 바, 한국의 군대엔 그 시절 그 사상을 가진 반국가적 반역자들이 암약해 있고, 그저 행동하지 못하고만 있다는 사실이죠.


외부의 적보다 내부의 적이 더 무섭고 치명적인 만큼, 이러한 반역자들을 걸러내고 숙청해야 합니다.


사실, 한국의 군대는 단 한번도 실질적인 의미에서의 숙청, 숙군을 당한 적이 없죠. 단지 정치권력의 비호와 견제를 받는다는 전제 하에서 예전과 같은 전면적이고 구체적인 권력탈취 행위를 자제할 뿐이지. 실제로 하나회가 날아간 것도 김영삼 때일 뿐이고, 그들과 같거나 비슷한 사상과 가치관, 인맥관계로 맺어진 놈들은 여전히 군대에 있습니다.


그런 만큼 군대의 물갈이는 제대로 된 적이 없었죠. 여전히 안보를 기반으로 하는 정치적 프로파간다의 역풍을 맞을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번 만큼은 절대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단호하고 확실한 숙청이 있어야만 합니다. 계획에 대놓고 진보=종북이라는 표현을 썼다는 건 그만큼 그들의 인식 수준과 정국 판단력이 5.16 당시의 박정희보다 못하다는 걸 증명하고 있죠.


아무리 군사력으로 밀어버린다 해도 수 백만, 천만 단위의 국민들을 밀어버릴 순 없고, 세월호 유가족을 시찰하는 헛짓거리는 왜 하는 지 의문이며, 힘으로 한다고 해도 국민들을 상대로 국가적 반발을 맞아 갈려나가기 싫으면 유화책도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것도 없죠.


즉, 그들의 인식 수준이 본질적으로 반세기전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겁니다. 진보=종북? 이런 규정과 표현은 극우보수의 정치꾼들이나 선동꾼, 일베틀딱들이나 쓰는 거지 실제적 보안상의 이유나 가치는 전혀 없습니다. 왜냐? 실체가 없는 허구이거나, 혹은 이미 박살났거나 관리 가능한, 이미 알고 있는 세력(통진당과 그 계열)이기 때문이죠.


그럼에도 작전계획 문건에 이렇게 명시되어 있다는 건 한국 군부의 현실인식 수준이 딱 그 정도 수준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한국 군대에서 높은 위치에 있는 놈들의 사고방식 수준이 사회운동은 진보고 진보는 종북빨갱이고 종북빨갱이는 공산당이며, 매국노에 종북좌파, 북한 간첩.. 뭐 이런 수준이라는 거죠. 



실제로 실행해봤자 여러 문제점과 역풍, 심지어 군 내부에서의 반발마저도 있을 겁니다. 아무리 군대 애들이 병신이라고 해도, 앞서 까댄 것과는 다르게 진짜 정국 판단력이 개쓰레기일 리는 없죠. 그렇기 때문에 실행하지도, 해봤자 성공 못했을 거라 보긴 합니다만, 그러한 가능성의 문제가 아니라, 그러한 사상을 가지고 있고, 그걸 계획으로 남기는 등(심지어 대선 때 추미애가 위수령 관련 이야기를 꺼냈음에도 불구하고 몇달 뒤 계엄령으로 관련 문서를 남겨대는 짓까지..) 실질적인 증거가 있을 정도로 지향하고 있다는 사실은 민주주의 국가에서 결코 용납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이들은 내란 모의를 한 국가 반역자들이고, 반국가, 반헌법, 반체제적 가치관을 가진 족속입니다. 또한 그런 위험한 불순분자들이 실질적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국가 안보에 심대한 위험성을 내포한다는 말이고 이걸 용납해서는 안 됩니다. 


한국의 체제와 헌법을 부정하고 한국을 혼란스럽고 위험하게 만들어 결과적으로 북한에 이익을 준다면, 한국에는 엄청 많은 종북이 있는 셈이고, 그 중에 한국 군 지휘관, 기무사가 빠질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들은 국보법으로 처벌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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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적으로, 이들의 행동을 비판할 때 저는 '사상오염'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사상적으로 타인을 오염시키고자 한다는 매우 비난적 어조가 강한 의미를 가지고 있죠. 그 이유는 그들이 자신의 사상을 남에게 전파, '전도'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자신들의 사상과 가치관을 작품 상에 넣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러한 행위 자체는 나쁜 게 아닙니다. 작가와 창작자들은 자신의 작품에 자신의 사상과 가치관을 담을 자유가 있고, 심지어 어떤 면에서 그러한 활동은 의무이기까지 합니다. 문화 작품은 아니다만 저 같은 경우에도 나 자신의 사상, 가치관을 글로써 담아 블로그로 표현하고 있죠.


하지만 그 자체라 문제가 되거나 비난 받아 마땅한 일은 아닌데, 그 이유는 그것이 정당하기 때문입니다. 정당하지 않다면 그것은 글(표현) 내용의 문제이지 그 자체가 아닙니다.



그러나 롤의 바루스 스토리, 라스트 제다이와 배틀필드5와 관련된 PC의 문제는 어째서 이렇게 욕을 먹고 비판의 대상이 되는 지는 앞서의 이야기와는 다른 문제인데, 롤과 스타워즈, 배틀필드는 각각 기존의 독립적이고 독자적인 세계관으로서의 시리즈와 성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각각의 세계관에서 나타나는 스타일과 개연성 등이 있었죠. 굳이 필요가 없고 바꿀 이유가 없는 기존 챔피언을 특정한 사상적 가치관을 담아 그 스토리를 리부트 해버리거나, 작품 외적인 사상을 보여주기 위해 일부러 배우와 내용을 기존 시리즈들과 다르게 이끌었거나, 아예 의수를 단 여군 같은 있지도 않는 것들을 만들어 적용하는 등이요.



이것들 자체는 그럴 수도 있습니다. 작품에 변화가 있는 거야 당연한 거고, 백이 넘는 챔피언이 있는 롤에서 동성애적 성향을 가진 챔피언 하나 없는 거야 이상할 수 있고, 현대적인 가치관과 시각이 적용된 시리즈가 나올 수 있으며, 배필 같은 경우 또한 현실을 배경으로 하지만, 완벽하게 묘사하여 고증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나 마찬가지의 이유로 이들이 욕을 먹어야 하는 이유는, 그러한 문제로 지적 당하는 요소들 때문 자체라기 보다는 그 PC충이라 불리는 이들이 독립적이고 독자적인 영역에서 작품을 만들어내는 창작자로서의 면모봐는, 기존의 시리즈와 작품에 기생하여 자신들의 사상과 가치관을 적용하여 작품과 작품성보다 자신들의 사상과 가치관을 우선해서 표현했기 때문입니다.



즉, 이는 앞서 말한 사상오염을 위한 행동들이지 작품에 도움이 되는 건 아니라는 겁니다. 자기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PC를 표현하고 그러한 가치관이 적용된 게임, 영화를 만들고 싶다면 그냥 자기들끼리 모여서 하나 만들면 되는 겁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을 표현하기 위해 기존에 팬들이 사랑하고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한 작품에 자기들이 끼어들어 기존의 성격을 변화시켰다는 겁니다. 그들은 전작의 명성이 기생하여 자신들의 가치관을 표출하는 도구로 사용했죠. 자신들의 사상을 남들에게 전도하기 위함이며, 그 때문에 저는 이러한 이들의 행위를 보고 사상오염이라는 표현을 쓰는 겁니다. 



그들이 창작자로서 역량과 능력이 있다면 자기들끼리 모여서 새로운 PC적 작품을 만들고, 그 작품의 작품성과 재미를 충분히 잡아내는 역작을 만들어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호평을 받는다면 그들의 목적은 충분히 성공한 거죠. PC가 대중적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의미이고, 그러한 PC에 대해 많은 이들이 호감이나 온건한 태도로 받아들이거나 검토할 겁니다.



하지만 그들이 그랬나요? 전혀 아닙니다. 기존의 게임, 작품에 기생하여 자신들의 사상으로 오염시켜 표현하려고 했죠. 변질시킨 겁니다. 최소한 작품의 매력과 개연성을 무너뜨리지 않는 선에서 자신들의 요구를 작품에 적용시킬 수도 있었을 겁니다. 배필5에서는 매드맥스의 퓨리오사를 어설프게 복제해 적용하면서 오히려 욕을 먹었습니다. 고증이 반드시 완벽해야할 게임은 아니지만, 배필 시리즈는 (물론 게임적인 면도 크다만) 상당히 현실적인 묘사를 하고자 하던 게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현실적 개연성을 무너뜨리고, 있지도 않은 PC적 캐릭터들과 요소들을 가져다 붙히며 심지어 아예 일본도 들고 나대는 캐릭터를 만들 게 아닙니다. 전작부터 있었던 사실성을 무너뜨리는 액션활극적 변질일 뿐이죠. 



배틀필드 제작자는 자기 딸에게 (PC적 견지에서 만들어진 ) 여성 캐릭터를 보여주고 싶다는 이유로 그러한 캐릭터들을 만들었고, 다른 제작자는 모두가 백인 캐릭터로 만들어주는 버튼이라도 만들어줘야 하냐는 비아냥을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들의 문제는 PC를 어설프게 적용했다는 점도 있지만, 그러한 이유는 그들의 사유가 부족했다는 점도 있습니다. 매드맥스처럼 작품성과 PC를 모두 잡은 훌륭한 걸작도 있지만, 그들은 이 둘 모두 팬들에게 설득하는데 실패했고 그 이유는 그들의 사유의 완결성이 부족했기 때문이죠. 어떻게 해야 좋은 작품을 만들고, PC적 요소를 무리 없이 적용하며, 게이머들로 하여금 호평을 받거나, 최소한 용인될 수 있도록 설득할 수 있을까. 그러한 캐릭터, 요소를 녹여낼 수 있을까.


그게 부족했습니다. 그 때문에 현재의 배필, 라스트 제다이 등 많은 영역에서 PC에 대한 비판과 부정적 인식, PC충에 대한 비난과 조롱이 발생하는 거죠. 뭔가 하고 싶다면, 제대로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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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형사 정책 연구원 2016년 12월 자료>


http://www.police.go.kr/portal/main/contents.do?menuNo=200529


http://www.iom-mrtc.org/lib/download.php?file_name=IOM%20MRTC%20IB%202015-14(Korean%20version).pdf&save_file=b_201709272055310.pdf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6/02/12/0200000000AKR20160212064900371.HTML


http://news.joins.com/article/21430012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37068



유럽의 난민 상황과 한국의 난민 상황은 완전히 다릅니다. 그 이전에 한국의 이슬람, 다문화 상황과 유럽의 상황은 또 다르고요.


고작 500명 난민 받았다고 치안이 악화되거나 범죄율이 치솟을 거라는 건 그냥 혐오와 인종차별을 기반으로 하는 망상이고, 실제로는 그런 일 발생 안 합니다.


기본적으로, 유럽은 자기들이 감당하지 못할 만큼 어마어마한 난민을 떼로 받았습니다. 메르켈이 냅다 수 만명 단위로 받아버렸는데, 그 당시 독일 경찰들은 입을 모아 말했죠. 그 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관리할 거냐고. 그리고 그 결과 난민으로 인한 혼란과 통제의 난항을 계속 겪고 있는 거고요.


근데 한국은 고작 500명입니다. 이들 뿐만 아니라 한국의 모든 무슬림 인구 다 합쳐도 한 20만명 안팍 정도 되는데, 이 정도면 전체 탈북자 인구보다 적습니다. 그리고 한국에서 무슬림에 의한 범죄가 발생했다는 소식이 없는 이유는, 무슬림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냥 통제가 잘 되고 사회화, 한국화가 잘 됐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외국에서 인식 되게 안 좋고 욕 존나 먹는 파키스탄 쪽 애들도 별다른 사고 안 일으키고 있죠. 사실상 그럴듯한 사례가 전무할 정도로.


한국의 경찰력과 치안이 굉장히 높은 수준이고, 그들에 대한 관리도 잘 되고 있습니다. 근데 그런 애들도 아니고 예멘 같은 큰 문제가 없는 동네의 난민, 그것도 고작 500명 정도 받는 걸로 문제가 생긴다면, 걍 한국은 망해야죠. 내국인 범죄율 때문에.


전체 범죄율 중 97~98%를 한국인이 차지하고 있고, 성범죄와 강력범죄 등 대부분의 범죄조차 한국인에 의해 발생하는 겁니다. 살인죄만 한국인의 2배 정도 되는데, 그마저도 내국인이 아니라 자기네 동포나 같은 외국인 출신끼리 싸움질 하다 죽이거나 분쟁 터져서 죽이거나 하는 겁니다.


그 범죄도시의 모티브가 된 것도 잔혹하게 살해 됐지만, 내국인이 아니라 조선족이 살해 당한 거였죠. 실제로 한국의 경찰력은 뛰어난 수준이고, 내국인을 건드리면 자기들도 좆된다는 건 압니다. 그래서 함부로 못 건드리는 것도 있고요.



근데 고작 500명, 난민으로 받아서 관리하고 한국에 정착하거나 적응할 수 있도록 사회화를 도와주는 거 가지고 뭐 치안이 나빠지네 테러가 걱정되네 성범죄가 걱정되네 이딴 개소리 하는 건 글자 그대로 혐오거나, 무지에 의한 혐오거나 둘 중 하나일 뿐입니다.


실제로 동남아 쪽 이슬람 강세의 국가들은 중동과 다르게 종교 때문에 큰 문제가 발생하진 않았습니다. 최근엔 좀 문제가 늘어난 추세라곤 하지만, 중동 쪽과 비교하면 걍 다른 세상이죠. 그리고 한국의 무슬림들은 또 그들과 달라서, 그런 종류의 문제를 일으키지도 않고 있습니다. 수 십만명의 무슬림들 때문에 문제가 발생한 적이 있기는 하던가요? 오히려 국내 종교인들에 의한 문제가 더 많고 잦고 크죠.


그리고 한국은 선진국으로서 그런 난민들 받을 수밖에 없어요. 그 동안 한국이 난민 문제로 욕을 먹거나 그런 요구를 강하게 받아오지 않은 이유는 탈북자들을 딴 말 없이 모두 다 받아줬기 때문에 그걸로 퉁친 거지, 지금은 그럴 수도 없습니다. 많이는 아니더라도 연간 수 백명 정도. 이 정도는 받을 수밖에 없어요. 세계에서 세계적 기준 하에 놀고 국제적 이슈의 생산, 판단이 되는 글로벌 국가로 놀고 싶으면 그래야 됩니다. 일본은 그것도 안 하니까 욕 존나게 먹고 있는 거고요.


이건 한국이 글로벌화 되면서 세계적 시류와 기준을 따라야하기 때문에 좋든 싫든 받긴 해야 합니다. 유럽만큼도 아니고 유럽처럼 답도 없이 받지 말아야할 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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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임금에는 통상임금과 평균임금이 있습니다. 통상임금은 최저임금과 연장근로수당과 연관이 있는 거고, 평균임금은 통상임금을 포함하는 넓은 임금 개념이죠. 여기서, 과거에는 기업들이 연장근로수당을 적게 주려고 통상임금 항목에서 급여인상이 아닌 순평균임금항목에서 인상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번 개정안은 그걸 통상임금화하자는 거죠.



이번에 개정한 최저임금법에 따르면, 상여금과 복리후생비 초과분을 최저임금을 계산할 때 합산하는 것으로 개정되었습니다. 


한 달에 상여금 50, 최저임금으로 150을 받고, 최저임금이 10% 오르게 된다면, 현행법 체계에선 최저임금이 10%올라 15만원이 추가되어야 할테니, 상여금 50만원 + 165만원으로 215만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번에 개정된 법률에 따르게 되면, 상여금의 25% 초과분은 최저임금에 산입해도 되기 때문에, 41만 2500원 + 8만 7500원 + 156만 2500원으로 총 206만 2500원을 받게 되는 거죠. 여기서 8만 7500원이 25% 초과분이고요.)



즉, 이제까지 주던 상여금과 복리후생비 같은 돈을 최저임금 인상분으로 퉁칠 수 있다는 건데, 이제껏 상여금이나 복리후생비를 많이 받아왔던 직종은 꽤 큰 피해를 받을 수 있다는 겁니다.


원래 최저임금 1500만원에 상여금 포함해서 200만원 받았던 사람이 10% 인상분으로 15만원을 더 받았어야 했던 것이, 이번 개정을 통해 6만 2500원만 더 받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거죠. 



노동계에서 꾸준히 최저임금 범위에 기본급을 제외한 나머지 상여금이나 식대 등 각종 수당을 넣으면 안 된다고 주장한 이유가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최저임금의 범위가 상여금과 같은 각종 수당으로 확대되면, 내년에 최저임금이 두 자리수로 인상이 되어도 실질적인 최저임금의 인상 효과가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는 현행 임금을 삭감하는 건 아니고, 기대상승분이 대폭 삭감 되는 겁니다. 즉, 원래 받아야 했던 것을 덜 주기 위함 꼼수 같은 거죠. 다만 시간당 수당이 최저임금보다 많이 받는 직종에선 큰 피해는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공무직 같은 경우는..


문재인 정부에서 최저임금 1만원을 공약으로 내세웠고, 그걸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건 사실이지만, 실질적으로 그게 힘들다는 현실이 이러한 개악소리까지 듣는 정책을 만든 모양입니다. 문재인 대통령도 이에 대해 못할 수도 있다고 말할 정도면 뭐.. 상여금에 복리후생비까지는 심했습니다.


그래서 이번 개정안에 대해 불만과 반발이 큰 거고, 파업에 시위 등을 하는 거고요. 뭐 다음해 최저임금 때문에 타협을 했다곤 해도, 현실적으로 그러한 타협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걸 이해해도 이번 개정안은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심지어 배신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적지 않을 거고요.


이번건 민주당이 잘못한 겁니다. 까놓고 말해서 지금 정부, 민주당 지지율이 문재인 원맨캐리지 민주당 새끼들이 잘해서 받는 지지가 아니라는 걸 좀 알아야 할텐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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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북한과 미국 사이의 회담에 대해 잡음이 발생하며, 돌연 취소가 되어버리고, 바로 다음 긍정적 시그널이 나오는 것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혼란스러워하고 있고, 판단이 상황을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확실히 이 부분은 정치외교에 있어서 굉장히 흥미로운 상황이고, 훗날 역사에서 지금 이 순간에 대해 굉장히 흥미롭고 다양한 해석과 주장이 나오지 싶지 않을까 싶더군요.



일단은, 현재까지의 회담 취소와 같은 잡음은 외부적인 요인으로 봤을 때, 서로 이야기가 안 맞은 거라고 봐야 합니다.  북한은 북한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고, 중국은 중국대로, 미국은 미국대로인데, 현재 미국이 존 볼턴 등의 강경파, 치킨호크들의 무리한 개짓거리 때문에 북한이 한번 튕긴 시점이었습니다. 중국은 그런 북한과 이야기하고 뭔가 딜을 했고, 이 때문에 중국과의 접촉 이후 북한의 태도가 달라진 거고요.



그러면서 미국과의 핀트는 더 안 맞게 되니 결국 이번에는 결렬난 거고, 이후로 미뤄진 겁니다. 이에 대해 시진핑에 대해 세계 최고의 포커 플레이어라는 칭호까지 써주면서 시진핑의 외교적 감각과 역할을 인지하게 되었고요. 물론 그게 미국에 도움이 되는 쪽은 아니니, 단지 시진핑에 대한 분석과 북중간의 관계에 대해 새로운 판단을 하게 되겠죠.



북한 입장에서도 그러한 갑작스럽게 돌아서는 태도는 협상전략이라고 봐야 합니다. 미국과 북한의 시각차이 때문에 벌어진 건데, 그걸 바로잡아보자고 북한이 튕기는 겁니다. 사실 미국이 굉장히 오만하게 대하고 있는 것도 아예 틀린 건 아니다보니.


존 볼턴 같은 또라이가 대북정책에 영향력을 내고 있기 때문에 문제인 겁니다. 북한이 굴복하고 복종하는 걸 보는 게 미국 매파의 바람이죠. 말초적 마초 오르가즘을 느끼고 싶은 거지 실질적이고 유의미한 외교적, 군사적 판단이 주가 되는 게 아닙니다. 볼턴 같은 놈이 있는데 당연히 그렇게 될 수밖에..ㅡㅡ 


그러니 그걸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리고 그럴 수밖에 없고 따져보면 오히려 북한의 태도가 정상적일 정도로 미국이 막나가는 겁니다. 그래서 북한이 튕기는 거고요. 미국, 더불어 한국에게도 무언의 메시지를 보내는 겁니다. 외교적 메시지는 글자 그대로의 의미가 아니니까. 



특히 한미연합훈련에 대해서 그러한 갈등이 발생했다고 봐야하지 싶습니다. 혹은 그것이 명분으로 삼았다거나. 알다시피 한미연합훈련은 연례적으로 하는 겁니다. 게다가 이번 기회에는 미국의 대규모 최신예 전력과 같이 하는 거라서 한국 입장에서도 안 하거나 줄이면 아쉬울 문제입니다.


근데 문제는 북한 입장에서, 한미는 작년말부터 시작된 핵위기 때부터 훈련 규모를 광범위하게 강화했습니다. 이번 맥스 썬더도 그 영향 중 하나고요.


이번 훈련에는 B-52가 참가하는데, 이건 B-2와 함께 60m의 철근 콘크리트를 관통하는 GBU-57의 투하가 가능한 폭격기입니다. 북한 애들에겐 참수작전이니 하는 김정은 목 딸 수 있는 훈련에 민감하게 반응하는데, 이거의 훈련 투입은 북한 입장에서 당연히, 그리고 충분히 지랄할 일이긴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전력에 대해서 북한이 지랄해대는 이유는 북한이 막을 수도 없고 대응할 수도 없는 압도적이고 불가해한 전력이기 때문입니다. 즉, 하겠다면 막을 방법이 없이 걍 앉아서 죽을 때까지 땀만 뻘뻘 흘려야 한다는 거죠.


이번의 고위급 회담이 파토된 건 이전까지 있었던 대규모 군사훈련에 대한 북한의 항의표시입니다. 일반적인 형태와 방식의. 근데 사람들이 북한에 대해 이 개새끼들이 어디 건방지게? 라는 식으로 받아들이니까 문제죠. 정치적, 외교적, 군사적, 정무적 판단이 안 되는 혼돈의 집단, 혹은 일종의 정상적인 판단으로 돌아가지 않는 도적단 정도로 보는 사람들이 많아서 대북관계와 정책이 그 꼬라지 였던 겁니다.


북한은 가진 것도, 딱히 할 수 있는 것도 없어서 이렇게 입털고 손절하는 각 보여주는 거 말고는 할 수 있는 것도 없어요. 훈련에 불만이 있어도 할 수 있는 게 이런 거 밖에 없다는 겁니다.



이런 식의 대규모 훈련은 우리의 당연한 권리다. 라고 인식하고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원래 이런 식의 대규모 군사 동원이라는 무력시위는 상대에 대한 압박수단으로 활용됩니다. 당장 중국, 러시아가 그런 거 많이 했고 잘하는데, 유독 한국인들이 북한과 관계된 것들에 대해서는 갈라파고스식의 사고가 돌아가기 때문에 국제표준의 상식적 판단이 안 되는 겁니다.


이는 한국인들이 외교, 군사, 국제에 대한 안목과 인식 수준이 낮다는 반증이기도 하고요. 뭐, 사실 북한과의 관계가 지금같지 않았다면 북한의 반응 따위 씹고 해도 되는 거긴 합니다. 하지만 지금의 평화적 분위기와 회담, 평화, 종전에 대한 이슈가 있는 지금 해서는 안 된다는 거고요. 최소한, 규모를 줄이거나 미루거나 하는 건 맞습니다.


하여간, 이런 훈련을 자국 근처에서 하면 진짜 지랄합니다. 물론 진짜 위기감을 느끼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는 그냥 외교적 관례에 따라 지랄하는 것 뿐이죠.


그렇기 때문에 이런 식의 5월 16일에 열렸어야 할 고위급 회담 파토는 점잖은 수준이고, 애교 수준입니다. 90년대나 그 이전에는 위협사격도 흔했고만.. 위협사격이 말이 위협사격이지, 낮은 수준의 '국지전, 혹은 국지도발'으로 이해해보세요. 말이 달라지죠.



북한은 정상적인 정권이 아니고, 정상적인 국가도 아닙니다. 따라서 중세적, 왕조적 특성이 있는데, 대표적으로 '위신'이 그것입니다. 북한에게는 대응 불가능한 규모의 한미훈련은 큰 스트레스 요소고요. 그래서 평화 협상 같은 거 할 때마다 줄창 나오는 이야기가 그놈의 한미 연합 훈련 좀 줄이라는 겁니다. 회수를 줄이든 규모를 줄이든 둘 다 줄이든.


심지어 평창 때도 수위 조절은 해달라는 말은 나왔죠. 이거 북한 입장에서 굉장히 양보해준 겁니다. 사람들이 이해를 못해서 그렇지..



뭐 하여간.. 훈련 자체는 연례적으로 하는 거고 할 수도 있고 해도 되는 거긴 한데, 그에 대한 규모는 줄이는 거 자체는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다만 고려해야할 점은 북한에게 있어서 진짜 문제는 그러한 훈련의 문제 뿐만 아니라, 미국이 강경 매파에 의해 주장되고 요구하는 것들인데, 북한을 거의 일방적으로 굴복시키고 복종하려는 듯한 오만한 태도입니다. 북한에선 그거에 대해 냅다 손절하기 어려우니 훈련을 명분, 핑계 삼아 그런 메시지들을 던지고 있지 않나 싶다는 거죠.



여기까지는 북한의 입장이었고, 우리와 미국은 이에 대해 이해해야 합니다. 특히, 현재 문제가 되는 건 미국이 북한의 내부사정과 정치적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우려죠. 이제 트럼프의 행보를 보자면, 사업가는 사업가이고, 쇼 프로그램을 했던 인물인 게 맞다는 게 느껴지더군요.


기본적으로 북미회담과 평화협정은 미국보다 북한이 더 간절한 겁니다. 물론 그런 내색을 보이는 거 자체가 협상력의 약화이고, 갑을관계가 분명하게 정립되는 일이니 북한은 이러한 문제에서라도 튕기는 거야 5월초부터 예상했던 거긴 하고요. 


그리고 미국, 트럼프는 그걸 알기 때문에 이번 회담의 성공과 실패에 대해 어떠한 압박감이나 절박함, 조급함 따위를 보이고 있지는 않습니다. 심지어 중간 선거와 관계된 이슈임에도 불구하고 압박을 받고 있다는 징후는 보이고 있지 않죠. 한미회담, 인터뷰를 보면 되면 좋지만 안 되어도 상관 없다는 스텐스이고, 북한의 스텐스가 기본적으로 핵과 미사일 폐기를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죠.


미국 공화당, 존 볼턴을 비롯한 강경파는 걍 힘으로 깔아버리고 굴복시키고 싶어하는 모양이지만, 한국이 세계를 상대로 하는 글로벌 국가가 된 이상 그런 대량 살상을 전제로 하는 전면전, 혹은 북폭은 최대한 피해야 하는 게 맞습니다. 그러니 미국이 그러한 강경한 스텐스로 북한을 더더욱 압박하고자 한다면 한국은 그걸 중재해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회담이 취소가 되고 지난 24일 올라온 성명을 보면, 대충 다음과 같이 요약/정리할 수 있습니다. 북한이 이빨 가는 게 마음에 안 들고, 북핵 포기 협상이 필요한 건 북한이지 우리가 아니다. 우린 밀어버리면 끝이다. 북한이 태도를 고치고 숙이고 오면 받아준다. 라는 겁니다.


이에 대해서 풍계리 핵실험장 폐기하자마자 이런 소리 해대니 미국이 북한을 뒤통수 쳤다. 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꽤 있었는데, 이에 대해선 상당히 많고 복잡한 역학관계 속에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이전부터 북미간의 잡음이 있었다는 거야 이미 충분히 설명했고, 거기에 중국의 역할과 행동이 있었죠. 미국의 태도 변화에 대해 북한은 중국과 접촉했고, 시진핑은 무언가 딜을 해줬을 겁니다. 그 이후에 북한의 태도가 변화했으니. 


이 내용을 맥락적으로 이해해보자면, 기존 김정은의 입장은 CIVD(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불가역적인 폐기) 받겠다는 거였꼬, 이에 대해서 트럼프로 물리적으로 어쩔 수 없는 시간적 문제가 있다는 걸 인정했습니다. 문제는 아마 펜스는 깐 게 아닌가 싶은데, 실제 의도가 어찌되었던 명분이 되는 건수는 펜스를 깐 거였습니다. 


볼턴과 다르게 펜스는 부통령 + 런닝 메이트였습니다. 이건 격이 다르죠. 


뭐.. 이건 그렇다 치고, 하여간 여기서 북한이 숙여야 되는 건 맞다고 봅니다. 어느 정도 시간과 모양새를 갖춰야할 필요성은 있지만, 미국의 이러한 행보는 중국에게 간보지 말고 우리랑 직접 대화해라. 회담이 필요한 건 너희지 우리가 아니다. 라는 의미죠. 북한에게도 그렇지만, 중국에게 한방 먹이는 거라고 봐야지 싶습니다. 중국도 북한에게 나름의 짓거리 하지 말라고, 혹은 해도 대응한다는 걸 보여주는 거죠. 여기까지 오는 중국의 의도가 대충 보이긴 합니다만 그건 지금 별로 중요한 게 아니고...



물론 여기에선 미국 내부적인 정치사정에 대해서도 고려를 해야할 겁니다. 가령 미국 언론들의 동향을 본다면, 회담이 최소되기 전엔 뉴욕타임즈에서 비판적인 기사가 실렸는데, 대충 내용이 트럼프가 멍청하게 북한에 엄청난 양보를 해줘버렸고, 외교적으로 멍청했으며, 김정은에게 놀아나고 있다는 식이라고 합니다.


이어 폭스 같은 전통적인 보수언론에선 리비아식을 주장하는 헛소리를 해댔죠. 그런데 여기에서 트럼프는 갑작스레 회담 최소를 선언합니다. 여기에 대해 미국 진보, 보수언론 가리지 않고 모두 당혹스럽게 되었죠. 자기들 딴에는 트럼프가 이런 강수를 둘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어찌됐든 언론에게 두들겨 맞으며 성과를 내려고 할 것으로 여겨졌는데(사실 오바마나 힐러리 같은 기존의 정치인, 대통령이었다면 그랬겠죠. 단지 언론을 얼마나 다독이고 자기들의 의중을 얼만큼 내비쳐줄지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그냥 냅다 취소 해버렸으니.


그러자 진보보수 안 가리고 그렇다고 그런 역사적인 회담을 그렇게 냅다 취소해버리냐. 좀 더 철저히 준비해서 해야지. 라는 분위기로 의견이 통일되었죠. 북미회담에 계속 딴지 걸던 민주당도 회담을 반대한 것도 아니고 준비 좀 더 잘하고 전문가들 의견도 다양하게 들어보면서 진행하라는 식으로 나왔죠.


심지어 뉴욕 타임즈에서도 북미회담이 꼭 성사되어야 한다는 등 비판적인 어조가 뒤집히게 됩니다. 


그 결과 바로 다음날 트럼프가 북미 회담을 다시 재개할 의향이 있다고 한 그 폭스에서도 당파를 따너서 북미회담이 설공하길 바란다는 식으로 인터뷰가 나왔고요. 당연히 공화당 쪽에서도 같은 이야기 해주고 있었습니다. 


이는 트럼프의 강수를 통해 내부적인 비판을 소거하고 의견통일을 이루는 정치적 통합을 이끌어냈죠. 또한 북한에게는 역으로 벼랑끝 전술을 강요하면서 어차피 회담을 원하는 건 북한이지 미국이 아니라는 입장을 보여주며 서로간의 입장에서 미국이 더 유리한 갑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외교적으로는 이걸 받아들일 거라는 것을 한미회담에서 문재인에게 확신을 받았거나, 아니면 통크게 배팅하거나 였는데(아마 사업가적 기질?..), 이러한 미국 국내 사정을 파악하면 좀 더 뚜렷하고 설득력 있으며 개연성 있게 보이지 싶습니다.


더불어 이 판에서 중국에게 한방 먹인 게도 되는 거였고요. 내부 정치, 외교적 목적에 대해 목적을 달성하거나, 유의미한 목적을 이끌어낸 강수였다고 봅니다. 확실히 쇼 프로그램 하던 사람이라 그런지 사람들 속을 들었다 놨다 하는 쇼맨쉽 같은 게 있다는 느낌이 든다는 게 이런 거죠. 밀당 쩌네요;


확실히 외교는 외부적인 요인만이 영향력을 주는 변수가 되는 게 아닌 내부적인 요소 또한 영향력을 주는 변수가 되죠. 병자호란에서도 조선의 태도와 반응만을 보는 건 오류이고, 청 내부적인 사정에 대해서도 알아야 정확한 설명과 판단이 되듯이.


이는 북한에게서도 마찬가지인데, 가령 앞서 이야기한 왕조국가적 요소인 위신의 문제 등이 북한의 내외부적 태도와 정책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가 되죠. 한국이든, 북한이든, 미국이든, 이걸 이해해야 합니다.



근데, 그렇다고 해서 현 상황이 좋게만 돌아가는 건 아닙니다. 북한의 ICMB의 문제는 미국이 정무적으로 다루게 되는 문제로 격상되었고, 그에 따라 비핵화에 대한 필요성이 어느 때보다 높아졌으며, 김정은 또한 이걸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진전이 있어왔는데, 현재 북미회담이 파토난 판으로 이끌어졌다는, 그리고 다시 재개할 수도 있다. 라는 가능성을 암시한 바로 지금, 이때가 가장 중요한 터닝 포인트가 될 것이기 때문이죠. 모든 요소가 최악으로 돌아간다면 북폭과 같은 가능성도 결코 허구만은 아니게 되는.. 그럴 가능성은 낮다고 봅니다만.



그렇기 때문에 지금의 문재인 대통령의 행동은 굉장히 기민하고 감각이 있는 행동입니다. 과연 유능한 대통령이긴 하네요. 회담 취소 소식 들려오자마자 북한과 통화한 뒤 바로 만나서 이야기하자고 하고 바로 가서 또 만나서 갑작스러운 회담을 만들어버렸습니다. 물론 김정은이 먼저 연락을 한 거긴 하고 사실 그게 맞는 거긴 합니다. 남한 쪽이 먼저 대화하자고 요구하기 쉬운 건 아니라서..


어찌됐든 이러한 갑작스러운 회담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적절한 결과물은 만들어냈으니 감각적이고 유능한 대통령인 거죠. 



이제 16일날 미뤄졌던 고위급 회담을 6월 1일에 하게 되고, 거기에서 양국간의 조율이 끝난 뒤 북미와의 관계에 진전을 이루게 된다면 상당한 업적이자 성과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이제 중요한 건 여기에서 할 수 있는 한국의 역할입니다.


미국의 백악관 관료들은 아직 북한의 시스템과 정신세계, 내부적 원리와 논리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걸 중재하고 이해시켜줘야 하는 것이 바로 한국이고, 그에 대한 책임이 있는 게 청와대인 거고요. 백악관이 북한의 행동에 대해 왜 저러느냐. 하는 반응일 때 그들이 질의할 대상이 바로 청와대라는 겁니다. 청와대에서 북한의 행동을 분석하고 미국에 그러한 역학적 움직임을 설명해줘야 하죠.


마찬가지로 외교부 또한 할 일이 많고 책임이 막중한데, 수 십년 동안 일본은 미국 국무부에 엄청난 돈을 뿌렸습니다. 오랜 기간 한국보다 중요하거나, 최소한 동등한 입장에서 미국의 최중요 동맹 중 하나로서 유리한 외교적 고지를 차지해왔었고요. 일본은 대놓고 한반도 분쟁이 심화되는 것을 적극적으로 바라고 있고, 이번 회담 취소에 대한 일본의 성명도 트럼프의 판단을 지지한다는 식이었죠. 외교적 수사지만, 회담파토, 한반도 문제의 심화를 반긴다라는 의미나 다름 없습니다.


문제는, 미국 국무부가 그러한 맥락에서 와패니즘에 쩔어있는 친일적 생각을 가진 이들이 많을 거라는 우려죠. 즉, 미국의 국익보다 일본의 바램에 좀 더 유화적이고 친화적인 입장에 있을 수 있다는 겁니다. 물론 미국의 국익을 역행하는 거까진 아니지만, 일본의 입장을 생각해서 일본이 얼굴 굳힐 일은 피해서 판단해준다. 라는 건 있을 수 있다는 겁니다. 한국 외교부는 이러한 미국 국무부의 와패니즘 정책에 맞서야 하는 중대한 책임과 의무가 있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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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왕이 외교부장 평양 방문...'급했던' 방북 이유

https://www.bbc.com/korean/news-43971924

[문정인 대통령특보 인터뷰]“김정은 방중, 북·미 간 이견 징후지만 상식적”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05090600045&code=910302


종전 문제에 대해 논의하고 조율해야할 문제는 많습니다. 특히 중국 입장에서 북한은 계속해서 어그로를 끌고 미국의 이목과 역량을 집중시켜줄 수 있었는 국가였는데, 그 북한이 태도를 다르게 했다면 중국 입장에서 그에 대해 많은 생각을 가질 것이고, 종전 문제에 대해서 비협조적으로 나올 수 있죠.


그리고 한국도, 미국도 좋아할만한 상황이 아니고, 특히 아쉬운 건 북한이니 가장 골치가 아플 문제입니다.


그러니 김정은이 중국에 가서 이에 대해 직접적으로 조율하고 사전 협상을 끝내놓기 위해 간다는 건 말이 되는 이야기죠. 이는 왕이 방북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 일이고, 중국이 왕이를 통해 언론에 뭐라고 말하든, 그 속내는 별개일 수 있으며, 지난 메시지를 통해 비핵화, 평화를 지지한다고 한다는 건 다시 말해, 그걸 용인해주고 협력해줄테니, 북한 또한 우리에게 어떠한 대가를 내놓으라는 겁니다. 물론 북한 뿐만 아니라 미국, 한국도 마찬가지고. 단지 받아낼 수 있는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


그에 따라 차이나 패싱 같은 소리도 나온 걸 보면 김정은의 방중은 그러한 이야기를 불식시키고 더 직접적이고 적극적으로 종전, 평화에 대한 사전 협의를 가지고자 하는 겁니다. 중국에서 왕이를 보내서 북한 입장에서 지나친 요구를 하게 만들고, 그에 대해 외교적 잡음이 나올 수 있으니 김정은이 중국에 방문하게 만드는 외교적 전략으로 보고, 그러한 이유로 방중을 해서 중국 입장에서 더 나은 협상, 조율을 끝마칠 수 있게 하는 거지 싶군요.


중국도 중국 나름대로 북한에게서 얻어내고 양보 받을 게 있을 것이고, 그걸 더 나은 조건으로 받기 위해서 일부러 왕이를 보낸 뒤 김정은이 오게 만든 거라 봅니다.



물론 문정인 특보의 말처럼 북미간의 조율 과정상 잡음이 있었을 수 있고, 그에 따라 중국에 협조를 구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둘 다 일 수도 있죠. 애당초 북한은 한국, 중국, 일본, 미국, 러시아에게 있어서 한국보다 중요한 완충지대로 역할해왔던 곳이고, 지금에 와서 북한에서 어떠한 문제가 발생하는 건 누구도 원치 않는 일입니다.


사실 중국이 꾸준히 북한에 영향력을 투사하려고 했고, 석유 지원 등 여러 교류와 지원으로 북한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하려고 했지만, 사드 문제 때부터 사드는 북한이 아니라 중국을 목적으로 해서 설치하는 것이다. 라고 한 다음날 북한에서 미사일 쏘는 걸 보면 중국이 북한은 통제하고 컨트롤하지 못하고 있다는 건 분명합니다.


다만, 반대로 북한이 무언가를 할 때 중국의 협조가 없으면 안 될 일도 있다는 것도 사실이고요. 그런 의미에서 문정인의 의견 또한 상식적으로 말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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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ted.com/talks/zachariah_mampilly_how_protest_is_redefining_democracy_around_the_world?language=ko




예전에, 타 커뮤니티에서 민주주의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 누군가 선거 또한 하나의 세뇌라는 표현을 썼던 것이 기억이 납니다. 당연히 세뇌라는 용어가 부정적으로 여겨졌고 반발했죠. 하지만 어떤 면에서 그 말은 틀린 말은 아니었다고도 봅니다. 기실, 보수 진영에서 시위와 집회를 부정적으로 보고, 실제로 그러한 것들이 억압 받으며, 불만이 있으면 힘을 가지던가 선거를 통해 해결하라는 화법을 사용하곤 했죠.


그것은 한국의 역사적 경험에 의한 일일 것이며, 그러한 맥락에서 선거와 투표만이 올바르고 정당하다는, 시위와 집회는 강경한 행위이고, 혼란과 폭력이 발생하기 쉬운 위험하거나 어찌됐든 부정적인 인식이 있는 그런 것이다. 라는 편견이 선거 또한 세뇌이다. 라는 의미였지 싶습니다.


뭐, 사실 시위와 집회가 많았고, 지금도 이루어지는 일이며, 요 몇년 동안 이루어진 집회와 시위 문화는 꽤 성숙하다는 평가를 받는 역사적 경험이고 사례이죠.



그런 맥락에서 시위와 같은 직접적 행위, 비정규적 실천은 민주주의라는 것이 시행되고 작동하는, 혹은 그래야 하는 어떤 사회에서든 장려되야할 것입니다. 국가와 같은 비대한 집단에서 문제는 언제나 발생하고, 그 규모가 크든 작든 누군가는 피해를 보고, 이것들은 고쳐져야할 일들이죠. 그러나 그것을 선거와 같은 방식으로 요구한다면 더욱 비효율적이고 더 많은 비용을 야기할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더욱 적극적이어야 하고, 집회와 시위는 폭력적인 것도, 위험한 것도, 부정적인 것도 아닌, 집단화되어 다수의 의견을 표출하고, 그에 대해 많은 이들이 같은 문제의식을 가지게 하며, 의제에 동참하고, 변화를 이끌어내는 조직화된 민주적 의견 표출 방식입니다.


이건 아주 이상한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며, 위험한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러한 편견이나 인식이 은연 중에 남아 있다면, 그것은 그러한 활동을 반대하고 억압하고, 묵살하려는 세력이 만들어낸, 만들어냈던 의지에 오염된 것이죠. 



우리의 생각보다 시위와 같은 적극적 의견 표현 방식은 우리가 잘 알지 못하고, 관심가지지 못했던 아프리카에서도 활발하게 나타나고 있는 모양입니다. 아프리카 또한 사람 사는 곳이고, 시간의 흐름만큼 변화하는 세상이라는 걸 새삼 느끼게 되더군요. 




많은 분들처럼 저도 종종 민주적인 절차에 불만을 느낍니다. 골치 아프고 복잡하죠. 때로는 비효율적입니다. 우리의 정치적인 지도자들은 평범한 이들의 관심사로부터 단절되어 있습니다. 몇 년에 한 번씩 있는 우리 일상의 과업과 동떨어져있는 지도자의 투표는 무의미하다고 많은 이들이 느낍니다. 하지만 민주주의를 거부하기에 앞서 이것이 무엇인지를 상상해봅시다. 그리고 저는 아프리카의 운동가들이 시위를 중심에 두며 민주주의를 재정의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시위 민주주의"라 일컫는 것이죠.



00:53


국제 기관과 전문가들은 민주주의가 평범한 여러 정당의 선거 경쟁이라고 정의합니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투표함을 앞에 둔 엘리트들의 경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이것이 의미를 지니기 위해서 민주주의는 우리가 매일 참여하는 무언가가 되어야만합니다. 제가 "시위 민주주의"라고 말할 때 저는 민주주의 활동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거스르게 됩니다. 민주주의를 선거로만 바라보는 것은 부적절하며 민주주의 자체를 위협하는 것입니다. 이에 우리는 민주주의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이를 거부해야만 합니다.



01:36


그렇다면 어떤 모습일까요? 우리는 평범한 사람들이 그들의 삶을 바꾸기 위해 점점 더 거리로 나아가고 있는 아프리카 사회에 눈을 돌려야 합니다. 아프리카의 사회적 운동은 이런 방식으로 민주주의를 정의하는데 앞장서 왔습니다. 이는 아프리카인들이 정치에 참여하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놀라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젊은이들은 더 효과적인 비폭력 행동을 위해 점점 더 거리로 나아가고 조직화된 폭력을 거부합니다.



02:12


저는 지난 이 십년의 대부분 동안 폭력적, 비폭력적인 아프리카 활동가들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아프리카 대륙 전역에서는 알려진 거의 대부분의 정권들에 대항하기 위하여 젊은이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제 친구 티아트입니다. 그는 세네갈 출신의 래퍼입니다. 세네갈의 큰 운동을 이끌었고 이 운동은 대통령이 세 번째 임기를 채우는 것을 성공적으로 막았습니다. 모로코에서 레소토에 이르기까지 뿌리 깊은 군주제를 저지하기 위해 젊은이들이 일어서고 있습니다. 이집트와 수단에서는 잔혹한 독재에 맞서고 있죠. 우간다와 에티오피아에서는 유사 민주주의의 탈을 쓴 강력한 군사국가에 대항하고 있습니다. 이 사진이 찍힌 남아프리카와 브룬디에서는 평범한 이들의 형편을 나아지게 하는데 기여하지 못한 민주적으로 선출된 지도자에게 대항했죠. 대륙 전체에서 시위는 예외적인 것이 아니라 삶의 일부분입니다. 아프리카인들은 독재자에게 대항하기 위해 시위를 할 뿐 아니라 권력을 멈추게 할 때도 사용합니다. 어떤 면으로 아프리카인들은 민주주의 자체에 저항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를 위해 그 가치를 높이면서 말이죠.



03:26


아프리카의 시위에는 두 가지 큰 흐름이 있었고 현재 우리는 2005년에 시작된 세 번째의 물결 속에 살고 있습니다. 이는 아프리카 대륙의 대부분에서 일어났던 아랍의 봄이라 불리는 것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흐름은 1940년대와 1950년대 사이에 일어났고 아프리카의 탈식민지화를 이끌었습니다. 과메 은크루마가 이끈 가나의 연립정부가 영국의 지배를 무너뜨렸습니다. 전세계에 비폭력 운동의 본보기를 보여주면서 말이죠. 두 번째 물결은 1980년대와 1990년대 사이에 일어났습니다. 아프리카 경제에 심각한 위기를 가져온 긴축 정책에 맞서는 것이었죠. 이러한 시위들은 독재정권의 붕괴를 이끌었고 아프리카 대륙 전체에 복수 정당 선거를 도입했습니다.



04:13


현재 진행중인 세 번째 물결은 앞선 두 개의 물결의 결점을 보완합니다. 첫 번째 물결은 자유를 가져왔지만 민주주의를 가져오진 않았습니다. 두 번째는 선거를 도입했지만 엘리트들을 위한 선거였죠. 세 번째 물결은 민주주의를 보통 사람들의 통치로 바꾸는 것과 가장 연관이 있습니다. 이는 세네갈의 '지긋지긋해' 운동과 부르키나 파소의 시민의 빗자루 운동 짐바브웨의 타자무카 콩고 민주공화국의 루차와 플림비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경제적, 정치적인 시스템에 도전하기 위해 인습적인 비정부기관이나 정당 밖으로 뻗어나가려는 운동들이 종종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루차의 프레드 바우마와 같은 똑똑한 젊은 활동가들이 구금되고 고문을 당했습니다. 국제사회의 항의는 거의 없었죠. 저희가 모든 데이터에서 보시다시피 목록은 계속됩니다. 2005년 이후 40개가 넘는 아프리카의 국가에서 규모가 큰 유명한 시위들이 있었습니다. 보시면 2011년 아랍의 봄이라 불리는 해에 실제로 이 광범위한 파장이 절정에 달합니다. 일반적인 생각과는 다르게 많은 시위들이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우리는 튀니지와 이집트의 독재자들이 몰락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유명한 시위들은 대통령이 세 번째 임기를 채우는 것을 막았죠. 세네갈, 말라위, 그리고 부르키나 파소에서요.



05:43


이 시위를 고조시키는 것은 무엇일까요? 인구통계학적으로 아프리카는 가장 젊고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대륙입니다. 국민들과 지도자들의 나이 차도 가장 크죠. 아프리카는 엄청난 속도로 도시화되고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아프리카 국가들은 십 년이 넘게 성장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은 아시아의 투자의 영향을 받았죠. 그러나 이 부의 극히 일부만이 국민에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산업 분야의 정규직은 실질적으로 감소하고 있습니다. 생계를 겨우 꾸려나가는 이들에게 비정규직의 일자리만 남아있죠. 그 결과 불평등이 극심해지고 있으며 정치 지도자들은 그들보다 나이 어린 국민들과 점점 더 멀어지고 있습니다.



06:26


아프리카 외부에 있는 우리들에게 이런 이야기들은 친숙합니다. 극심화된 불평등 한 때, 진보된 사회의 전형이라 여겨졌던 높은 임금의 좋은 일자리들의 감소, 한때 평범한 이들의 목소리가 되어 주었던 시민 사회가 사라져가며 발생한 엘리트 정당의 몰락 여러분이 무슨 일을 하든 국제 경제와 관련된 외부 요소들이 여러분의 생활을 망가뜨릴 수 있다는 가슴 철렁하는 느낌. 우리의 정치 지도자들은 절약만을 외치며 무기력해 보입니다. 몇십 년간 공공재가 보이지 않는 단계까지 사라지는데도 말이죠. 동시에 그들은 우리의 고통을 강자가 아닌 약자에게 떠넘기며 배타적 민족주의에 굴복하지 않고 있습니다. 북미인들이나 서구 유럽인들이 생각하는 새로운 것이란 1970년대 이후 아프리카인들의 평범한 삶입니다. 그렇다면 가장 오랜 기간동안 이런 상황에 저항했던 사람들보다 더 많이 배울 수 있는 사람들은 과연 누구일까요?



07:29


아프리카의 민주화 운동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첫 번째, 민주주의는 평범한 사람들로부터 시작해야합니다. 민주주의를 선거로만 바라보는 것은 만연한 환멸감을 가져옵니다. 대신 평범한 이들이 민주주의적 삶의 중심이 되도록 힘써야합니다. 시위는 그렇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합니다. 여러분의 나이, 성적 취향, 성별에 관계 없이 시민이든 외국인이든,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누구나 참여할 수 있습니다. 선거와는 반대로 시위는 엄격한 선거 주기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즉각적인 피드백의 시대에 즉각적인 형태의 조치를 더 많이 제공하죠.



08:08


둘째로, 시위는 혼란스러울 수 있지만 이로 인해 강력해집니다. 시위는 논쟁을 벌이고 경쟁적인 과정이며 불확실한 행동에 의해 규정됩니다 때로는 명확한 메세지가 결여되어 있고 불완전한 기관에 의해 규정되죠. 이 역동성이 시위를 폭동이라고 폄하하거나 제한된 정치적 효용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게 하기도합니다. 억압하기 쉽다고 생각하게 만들기도 하죠. 빈번히, 정부는 시위를 민주주의의 기본으로 바라보지 않습니다. 대신, 이들의 메세지의 신빙성을 떨어뜨리기 위해 사회적인 운동을 폭력적으로 짓밟습니다.



08:53


세 번째, 제가 언급한 것처럼 시위는 새로운 정치적 상상이 생겨날 수 있는 공간입니다. 시위는 선 밖을 색칠하는 작업입니다. 평범한 이들이 자신들에게 불리하다고 느끼는 게임의 규칙들을 새로 만드는 방법이죠. 아프리카의 많은 젊은이들은 자신들의 일생동안 단 한 명의 지배자가 통치하는 사회에서 자라왔어요. 시위는 새로운 가능성이 생겨나는 공간입니다. 젊은이들이 그들이 지닌 힘을 발견하게 되면서요.



09:24


제 친구인 린다 마사리라의 상황을 생각해보세요. 다섯 아이를 홀로 키우는 엄마죠. 그녀는 짐바브웨의 무가베 정권에 대항하는 시위를 이끌고 있어요. 두들겨 맞고, 체포되고, 괴롭힘을 당했죠. 하지만 견뎠어요. 몇 달 전 제게 말했던 것처럼, 시위는 그녀에게 의미와 방향성을 주기 때문이죠. 자신에게 닥칠 역경을 알고 있지만 린다는 굴하지 않습니다.



09:47


린다나 아프리카의 다른 젊은 활동가들처럼 우리 모두는 민주주의를 선거와 정당 그 이상으로 재정의하기 위해 노력해야합니다. 민주주의는 창의적인 과정이며 시위는 늘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 이상의 정치적인 상상력을 확장시키기 위한 매개체가 되어 왔습니다.



10:08


(스와힐리어) 대단히 고맙습니다.



10:09


(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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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대대적인 남침으로 인해 시작되었던 전쟁은 1953년 한국만 빠진 휴전협정을 통해 중단되었고, 65년이 지났습니다. 반세기 넘도록 수 많은 일이 있었고, 수 많은 사람이 태어났으며, 수 많은 이들이 죽었고, 슬픔과 고통, 번민과 괴로움, 행복과 즐거움, 사랑이 있었습니다. 누군가는 투쟁을 하며 살았고, 누군가는 깔아놓은 전철을 타고 살았으며, 때로는 좋은 일도, 때로는 힘든 일도 있으며 일상을 살아갔습니다. 남들과 같은 일상. 다른 나라의 사람들과 같은 일상을요. 하지만 이 모든 시간 동안 우리는 휴전의 상황에서 언제나 발생할 수 있는 전쟁의 위협 아래에서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모두에게, 전쟁 이후, 전후 세대에게 있어선 태어나서 지금까지 겪어야 했던 하나의 투쟁이었지요. 이전의 체제 하에서 우리는 모두 다른 체제를 하나의 선을 두고 다르게 살아가야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합의를 통해 마침내 전쟁이 끝났음을 공식적으로 확인했습니다. 이제 전쟁은 없습니다. 전쟁은 끝났습니다. 그간의 위협은 이제 없고,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한 시대가 끝났고, 한 체제가 끝났으며,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고, 또 다른 체제를 이어가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역사 속에 있었고, 역사 속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이 그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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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김경수-드루킹 관련 사안 때문에 문재인 정부에 대한 광범위하고 대대적인 비난과 선동이 들어가고 있는데, 솔직히 전 이 문제에 대해 민주당-문재인 정권에 대한 비난은 아예 틀렸다고 봅니다. 김경수가 비판을 받을 껀덕지는 있지만, 민주당 이상으로 올라가는 건 글자 그대로 악의적 선동이죠.


이미 드루킹과 김경수의 관계, 어떠한 청탁과 그것을 통한 엽관적 이익관계가 있었는지, 그리고 드루킹이라는 사람이 어떠한 정신을 가진 인물인지에 대해 판단에 있어서 충분할 정도의 정보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종합하여 판단할 때, 김경수가 비판 받을 껀덕지는 있지만, 민주당과 문재인 정권에 대한 비판은 악의적 선동이라고 봐야 할 것이고, 드루킹이라는 인물은 정신과에 가야할 사람이라는 겁니다.



드루킹이 발생시킨 문제는 아주 간단합니다. 기존의 파워블로거지라 불리던 이들과 다를 거 없는 행태였죠. 내가 여기 블로그에 포스팅 했으니 공짜로 해달라, 그래서 싫다고 하니 역으로 공격하는 겁니다. 드루킹도 하등 창의성 없는 행위를 반복할 겁니다. 단지 그 영역과 수준이 달랐을 뿐이죠.


자기 혼자 정치인 후원하고 지지운동하면서, 문재인 정권이 들어서고 의원이 당선이 되자 그에 대해 공직 자리를 청탁을 하는 엽관을 요구했죠. 그리고 그게 들어먹지 않으니 반대로 휙 돌아서서 매크로를 돌리는 등 댓글부대로 여론조작에 나선 것이죠.



정작 김경수 본인은 그것을 거부했고, 드루킹이 보내는 문자를 거의 대부분 무시했으며, 추천을 한 것까지야 있을 수 있는 일인데, 이는 추천을 한 것 뿐이지 검증은 추천을 받은 쪽에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검증에서 결격되었으니 드루킹이 그 짓거리를 해댄 것 뿐이죠.



바로 그 이유로 드루킹에 대해 프락치가 아니었나. 하는 이야기마저 나왔던 겁니다. 제정신으로 할 행위가 아니었고, 상식적이지 않은 행동이었으며, 그 결과가 문재인 정부에 대한 공격이었다면 프락치로 여겨질 수 있을 법도 했으니까요. 하지만 드루킹은 그마저도 못 되는 모지리였던 것 뿐입니다.


드루킹과 민주당원들의 여론조작 사태에 대해서 민주당이 욕을 먹을 수도 있다고 하는데, 앞서처럼 비난 받을 이유는 없습니다. 다만 비판을 받을 껀덕지가 아예 없는 건 아닌데, 그건 단지 그 당사자들이 민주당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건 사실 별 의미가 없다는 점에서 그러한 비판의 껀덕지도 의미가 없는 수준으로 사라집니다. 따라서 민주당원이 여론조작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민주당과 문재인 정부를 비판, 비난하는 건 의심할 법한 정치적 의도를 가졌다고 밖에 할 수 없습니다.


당원이 되는 건 단지 신청하고 당적이 오르기만 하면 되는 거고, 매달 당비 1000원만 내면 되는 그런 겁니다. 원한다면 그 누구든지 될 수 있고, 귀찮을 뿐이지 이 당 저 당 옮겨다니는 것도 이상한 거 아닙니다. 민주당 내부에서 높은 위치나 입지가 있고 영향력이 유의미한 수준인 사람이 아니라면 민주당원이라는 이유만으로 민주당을 비판하는 건 앞서와 같이 의심할 법한 정치적 의도가 있다고 밖에요.



이번 사태는 전적으로 드루킹이라는 이상한 인간과, 그 인간을 추종하는 머저리들에 의한 것입니다. 직접 당사자인 김경수는 관련 의혹이 있으니 판단을 유보하겠지만, 현재로선 민주당은 관련 의혹이 없는 건 아니더라도, 직접 당사자가 아닌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오히려 피해자라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웬 정신이상자와 그 추종자들에 의해 뜬금 없는 피해와 정당치 못한 비난을 받고 있으니. 민주당도, 문재인도 연관된 증거와 정황이 없는데 댓글부대를 운용하여 여론조작을 했다느니, 심지어 문캠 산하 조직이 의심된다느니 배후가 어쩌고 국기문란이 어쩌고 국정원과 다를 게 뭐냐, MB, 근혜와 다를 게 뭐냐. 이 소리를 해대고 있죠.



야당과 언론이 한 마음 한 뜻이고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을 부당하게 공격하는 의도와 이유는 뻔 합니다. 기본적으로, 그 동안 까일 껀덕지가 너무 없었던, 상식적이고 도덕적인 정권이었던 만큼 공격할 여지가 적었는데, 이번에 한번 잘 걸렸다라는 이유에서입니다.


그 이유로 부당하고 과장되고 선동적인 비난을 신나서 해대고 있는 거죠. 그러한 목적이야 당연히 문재인 정부에 대한 지지율을 떨어뜨리고 이번 지선에서 살아남기 위해서이고요. 적어도 전자만큼은 확실한 목표입니다.


그러니 정당, 정치인들은 망상을 뿜어대는 거고 언론에선 부당하고 과장된 문장과 문구를 사용하고, 심지어 소설에 가까운 내용을 써가며 공격하는 겁니다.



그들은 문재인 정부를 과거 범죄정권과 같은 적폐로 몰고 있지만, 실상 그러한 행동을 보이는 그들이 적폐 그 자체라는 점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이번 사건은 국정원 사건과는 비교할 수 없고, 과거 십알단 사건보다도 급이 낮은 사건입니다. 언론과 야당에서 기를 쓰고 확대시키고 불을 붙히며 키우는 것에 비해, 어떤 의미로는 사소할 정도의 스캔들이죠. 일이 이렇게 커졌으니 민주당 쪽에서도 기민하고 영민한 대응이 필요해졌지만, 그들에게 하는 비판만큼 대단한 일은 아닙니다. 이번 사건만 보면 찰스 기토 같은 놈인데, 실은 그보다 멍청한 인간일 뿐이죠. 망상에 기인한 사이비 종교를 만들어 교주가 된 인간인데 이게 정상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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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리뷰는 작품에 대한 내용누설이 있습니다. 

 

 

작품은 살리에리의 고백으로 시작합니다. 자신의 죄악에 대한 죄책감으로 절규하듯 뱉어나다 끝내 자신의 목을 그어 자결하려고 하죠. 그러나 하인들에 의해 구조 당하고 정신병원에 갇히게 됩니다. 그리고 신부가 찾아와 자신의 이야기를 고백하라고 권하죠.

 

작품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천재성이 곳곳에서 부각되곤 하는데, 여기서부터 모차르트의 천재성은 부각됩니다. 신부에게 자신의 음악을 들려주었으나, 알지 못하고, 모짜르트의 곡을 들려주자 너무나도 쉽고 열정적으로 칭찬하죠. 유력한 궁정악장이자 작곡가였던 살리에리의 곡을 기억하는 사람은 이제 없고, 오직 천재의 곡만이 수 십년이 지나서도 기억되고 있음을 묘사합니다.

 

그렇게 자신의 고백을 통해 과거의 이야기가 시작되죠.

 

 

실제 역사가 어떠했든, 작품이 수 십년이 지난 지금까지 명작이라 여겨지는 이유는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정할 것입니다. 그만큼 잘 만들어졌기 때문이겠죠. 특히 작품이 끝날 때까지 살리에리의 질투라는 속성은 아주 높은 수준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질투라는 건 사람을 망치죠. 자신을 더 낮은 수준으로 끌어내리고, 더 추하게 만들죠. 살리에리는 궁정악장으로 왕정의 예법과 정치에 박식한 모습을 보입니다. 그러나 그런 격 있고 귀족적, 신사적인 태도의 모습과 대조되게, 아마데우스의 모습은 천박하고 방정맞죠.

 

그리고 그의 음악을 들은 살리에리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신의 범속함을, 평범함을. 그리고 질투는 거기에서 시작하죠. 자신의 노력과 열정이 부정당하는 현실 속에서 진정한 천재에 대해 절대 넘을 수 없는 벽임을 알았을 때, 열등감이 발생하고, 질투가 생깁니다. 그가 없었다면, 그만 없었다면. 자신이 그와 같고 싶고, 그 재능을 빼앗고 싶지만, 결코 그럴 수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됨을 압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자신을 끌어내리는 것이 질투이고, 추하게 만드는 것이 질투이니, 그러면 안 됨을 알면서도 결국 그렇게 하게 되고, 그러기 위해 변해가는 자신의 모습은 역겹기 짝이 없죠.

 

살리에리는 그러한 열등감과 질투를 이겨내지 못했고, 모차르트의 성장과 성공을 의도적으로 막았습니다. 심지어 한 순간의 충동이었으나, 볼프강의 아내에게 몸을 요구하기도 했죠. 물론 바로 내보내긴 했지만, 모차르트의 아내인 콘스탄체의 수치심은 돌이킬 수 없습니다.

 

 

내가 오직 원했던건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이었소. 하느님은 내게 그 열망을 주셨지만... 날 또한 벙어리로 만드셨소. 어째서? 말해 보시오. 하느님께서 내가 주님을 음악으로 찬미하는걸 원하지 않으셨다면 왜 내 몸을 좀먹는 그런 열망을 심으셨는지... 그러면서 왜 재능은 주시지 않으셨는지 말이오.

 

영화 『아마데우스』 중에서 -

 

 

모차르트의 행동은 오만하지만 자기 영역에 있어서만큼은 그것이 허용될 정도의 능력이 있었고, 그에 대해 자신만만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오만함은 사람들의 반감을 불렀죠. 너무 경박하고 방종하여 높은 사람들이 그의 태도를 싫어했지만, 천재 모차르트는 자유로웠던 것이고, 자유롭고 했던 겁니다. 그는 음악을 제외하면 생활과 인간관계에 있어서 어색하고 뻔뻔했지만, 그만큼 순수했죠. 

 

그는 진정 음악사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하나였습니다. 이러한 작품에서 묘사되는 모차르트의 특이성은 그가 범속하지 않은 천재임을 드러내는 장치이기도 하죠. 그러한 재능은 더 높은 수준의 음악 작품을 추구했고, 그러한 추구는 법, 통속에서 벗어나고자 했으며, 이러한 성향과 추구는 왕실과 다른 인물들간의 충돌이 벌어지는 이유이기도 했었습니다.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묘사하는 여러 장치들이 작품 속에서 많다고 했는데, 살리에리와 첫 대면을 할 때, 처음 들은 음악을 듣자 마자 똑같이 연주하고, 그 이상으로 편곡하여 더 다채롭고 아름다운 음악으로 진화시켜버리는 모습도 그렇고, 특히 인상적인 것들은 술집에서 거꾸로 피아노를 연주한 부분에서, 그리고 이러한 사소한 것보다 인상적인 부분은 마치 일상 그 자체가 음악의 영감이 된다는 듯, 장모님의 비난에서 음악적 영감을 받고 승화시켜 그 유명한 마술피리의 아리아 중 하나인 밤의 여왕의 아리아가 나왔죠.

 

그리고 중간 중간 곡 작업 중 단지 악보를 쓸 때에도, 보기만 함에도 머리속에서 음악이 완벽하고 충실하게 연주되죠. 이 부분이 정말 예술적이고 천재성을 부각시키는 연출로 여겨지는데, 그의 말처럼 머리 속에 곡이 있다. 그리고 난 그것을 옮겨 적는 것일 뿐이다. 하는 것처럼 그에게 있어서 음악이란 이미 완성된 것이고, 완전하게 창조되는 것이었습니다.

 

재밌는 점은 그러한 것을 살리에리는 통찰해냈죠. 단지 악보만 보고, 수정한 부분이 없다. 그저 처음부터 완성되어 있었다. 라고요. 그만큼 그의 음악적 실력이 출중하다는 점인데 말이죠.

 

 

그러한 천재성은 살리에리로 하여금 극도의 열등감을 발생시켰고, 심화되어 질투로 이어졌으며, 그의 삶을 파괴하게 되었습니다. 천재성이 천재를 죽인 거죠. 모차르트의 형편이 좋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밥줄을 끊으려 했고, 아버지의 죽음이 그를 괴롭게 한다는 것을 알고 정신적으로 괴롭히며, 종래엔 모차르트의 심력이 다해 죽음에 이르게 하죠.

 

하지만 살리에리의 수작에 의해 그렇게 되었음에도 그의 천재성과 음악성만큼은 누구보다 깊게 이해하고 인정하고 있었던 것 또한 살리에리였습니다. 본인이 회고하듯, 자신의 수작에 의해 공연은 몇 차례 할 수 없었지만, 그때마다 자신은 가서 관람을 했다고 하죠. 마치 자신만 그것을 독점하여 즐기고자 하고 싶기에.

 

그것이 질투의 속성입니다. 자신이 가질 수 없기에, 가지고 있지 않기에 생기는 복잡함. 가질 수 없기에 고통스럽고, 가질 수 없기에 그것에서 해방되기 위해 없애버리고 싶지만, 그것을 즐길 수 있다면 환희마저 느끼는 그러한 것. 살리에리는 모차르트의 재능을 가질 수 없기에 모차르트를 싫어했고, 싫어하기에 죽이고 싶어했으며, 그러면서도 그의 작품을 사랑했습니다. 눈앞에 보이는 모차르트는 음악에선 결코 가닿을 수 없었지만, 손에 닿는 인간이었고, 그렇기에 존재를 보는 것 자체로 자신을 괴롭게 했으니까요. 그럼에도 작품만큼은 음악인으로서 황홀했고.

 

결국 살리에리는 자신의 질투에 굴복했죠. 자신의 열정, 노력을 바쳤으며 기도를 통해 자신의 소원이 이루어졌다고 믿었고, 충실히 독실했던 살리에리가 그렇게 망가졌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기독교의 7대 죄악 중 하나가 질투라는 점이죠. 질투가 사람을 망치고, 사람을 죽이기 때문입니다. 독실했지만 천재를 옆에서 지켜봐야 했던, 그것도 방종하기 짝이 없는 자의 절대로 따라갈 수 없는 재능을 보아야 했던 범재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부담이었을지도 모르겠군요.

 

그렇게 살리에리는 신을 부정하고자 했습니다. 신이 자신을 버렸다면, 신의 거룩함을 노래할 수 있는 도구로 자신이 선택되지 않았다면 신을 조롱하고자 했습니다. 신의 아름다움을 음악으로 표현해주는 진짜 천재인 모차르트를 죽임으로써!

 

 

모차르트는 뛰어난 천재이자 음악가였지만 인간적으로 부족한 면이 많았습니다. 예의, 예절, 인격, 생활.. 아내를 사랑했지만 가장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하진 못했습니다. 자유로운 천재에게 그러한 것은 너무나 중요한 일이 아니었으니까요. 그래도 다른 것들에 비해선 중요했으니 그가 괴물이 아니라는 증거였지요.

 

앞서 말했듯, 그의 예의와 예절, 금기에 대한 도전은 그가 천재로서 자유로웠고, 창조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더 많은 시도와 더 많은 도전이 자신의 음악을 더 다채롭게 해주는 도구이며, 그러한 것을 통해 더 높은 수준의 음악을, 더 완벽한 예술을 펼칠 수 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오만한 천재는 반감을 사기 쉽고, 뛰어난 천재는 시대를 앞서 나가기에, 빈의 사람들은 그에게서 등을 돌리게 되기까지 합니다. 이해할 수 없었거든요.

 

아버지의 죽음은 그에게 크나큰 음악적 변화를 이끌어냈죠. 음악은 자신의 감성에서 창조되는 바, 그만큼 힘들고 괴로웠음을 보여주는 일면입니다. 살리에리는 그의 음악을 통해 그의 심경과 변화를 읽어냈고, 그를 죽이고자 하는 계획이 실행됩니다.

 

아버지가 썼던 가면을 하인에게 뒤집어 씌우고 진혼곡을 작곡하게 하죠. 바로 자기 자신의 진혼곡이 될 그 곡을.

 

인정 받지 못하는 모차르트는 점점 망가져갔고, 가정형편의 어려움은 아내와의 신뢰마저도 갈라지게 합니다. 아내를 배신하고 친구와 술마시고 놀 때 아내는 떠나갔고, 가정에서 한번 더 실패한 모차르트는 점점 더 힘들어져가죠. 공포스러운 아버지의 가면을 입은 자는 독촉하고, 불길한 곡을 쓰면서도 친구의 공연에서 연주하다 결국 쓰러집니다. 살리에리가 그의 집까지 옮겨주었으나, 결국 작업 도중 사망하게 됩니다. 그의 심력이 다해버린 것처럼 묘사되죠. 다만 진혼곡은 완성하지 못한 채 죽었고요.

 

 

살리에리의 회고는 모차르트의 장례식과 함께 끝났습니다. 살리에리는 그의 죽음에 죄책감을 느꼈습니다. 자신의 아이돌을 자신의 손으로 죽였으니까요. 추악한 죄인으로서. 그의 계획은 성공했고, 신을 조롱하고 욕보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거기에 즐거워했죠. 광오하게도, 자신이 신에게 한방 먹였음을 그는 믿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마치 자신이 신이라도 된 듯, 혹은 신과 같은 권위를 가진 자인양 다른 환자들에게 너의 죄를 사하노라며 웃으며 퇴장합니다. 그것은 모든 범속한 자를 대표하는 범인의 대표자로서의 권위이겠지요.

 

 

작품이 오랜 시간 동안 인정 받고 사랑 받는 이유는 그것이 시대를 초월한 감성과 심미성을 가지기 때문이겠죠. 그림과 음악이란 그런 것이죠. 영화에서도 그러한 예술성이 시대를 초월해 존재한다면, 아마데우스 또한 그러한 조건에 부합되는 작품이 아닐까 싶습니다.

 

고전적 미를 잘 살렸으며, 예술적인 감각과 감성으로 작품의 연출과 묘사를 이끌어낸 영화 아마데우스는 예술가의 일생과 인간의 감성을 섬세하게 작품에 담았죠. 그 구성, 연출, 묘사. 

 

앞서에서도 서술했듯이, 작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부각하고, 그러한 천재로서 사회와 규범에서 돌출되는 자유분방함을 보여줍니다. 심지어 그게 사치와 철 없음을 묘사하면서 그의 인격의 성숙을 비판하고 있음에도요.

 

처음 듣는 곡을 완벽하게 연주하는 것도, 그러한 것을 원작보다 더 다채롭고 더 아름답게 편곡하는 능력도, 모든 음악과 곡은 머리 속에 다 있어서 단지 옮겨적기만 하면 되는 비상함도, 작곡을 할 때 울리는 음악의 연출과, 악보를 보면 역시 연주되는 곡의 연출 등 그에게 음악은 최고의 음악가들에 비해 더 다양하고 다채롭고 황홀한 것이었습니다. 음악을 통해 신을 찬미하고자 했던 살리에리의 말처럼, 그것은 단연 신의 음성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안토니오 살리에리의 됨됨이와 성숙함, 사회적 존경에 대한 자격이 있음을 보여줬으나, 질투와 열등감에 빠져 파괴되고 몰락해가는 인격의 인간상은 더더욱 잘 묘사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찬미와 경외를 가지고 있으며 신실한 신자로서 자신의 소원을 들어준 하나님과의 약속을 충실히 이행했으며, 덕을 베푼 기독교인이었지만, 자신의 생활태도와는 전혀 다른 방탕하고 방종한 모차르트의 모습과 그러한 모습과는 전혀 걸맞지 않는 재능은 그에게 하여금 모차르트는 그의 재능에 자격이 없다는 생각도 들었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그의 음악을 동경하고 경배했으나, 그러한 작품이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라는 인간에게서 나왔음을 저주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저주는 그러한 찬미와 신의 음성을 대변할 도구로 신실하고 노력하는 자신이 아니라 범재에겐 불허되는 재능을 가진 천재 모차르트를 선택한 신에게까지 이르죠. 질투는 가속화되기에.

 

결국 범인의 한계를 넘지 못하고, 가져선 안 될 질투는 모차르트라는 천재를 죽이게 되었고, 자신 또한 32년간 죄책감 속에 갇혀 살다 정신병원에서 폐인이 되죠.

 

 

실제 역사와 차이가 꽤 있는 작품이지만, 단순한 작품으로서, 이만한 완성도와 예술성을 갖춘 음악 영화가 또 얼마나 있을까요. 단지 이야기로서, 작품으로서만 본다면 굉장한 걸작인 셈입니다. 고전 명작이라 이름 붙을만한 작품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죠. 

 

완성도 있는 짜임새의 극과, 섬세하면서도 도전적인 묘사와 직관적인 연출, 그것을 완벽하게 살리는 배우들의 정확한 연기. 감독판의 경우 3시간이라는 길이가 단점이라면 단점이지만, 너무 재밌어서 시간가는 줄 모르고 볼 정도의 영화죠. 도대체 이 작품에서 어디가 빠질만한 부분이 있었는가가 의문일 정도로.

 

마지막으로 범인의 대표자로서, 모든 범속한 자들의 평범함을 용서하는 살리에리의 판결로 글을 마칩니다.

 

 

난 세상의 모든 범인(凡人)을 대변한다오. 내가 그들의 대변자이지. 난 그들의 수호성인이야. 세상의 범인들이여! 내가 너를 용서하노라. 내가 너를 용서하노라. 내가 너를 용서하노라. 내가 너를 용서하노라. 내가 너희 모두를 용서하노라.

 

영화 『아마데우스』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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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과 같은 집단의 수장이 무능하고 멍청하면 주변 사람도 피곤하겠지만 그 이상으로 그 집단의 구성원 다수는 괴롭습니다. 통치자로서 가지는 권한과 권력이 거대한 만큼 무능함에 의해 발생하는 피해는 사회 전방위적인 분야에 들이닥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집단의 수장은 그 자리에 어울릴만큼 유능해야하며, 그 이상으로 판단력과 덕성의 수준이 높아야 합니다. 그렇지 못한다면 유능하되 사익을 추구하여 사회적 병폐를 발생시키고, 무능하되 덕성이 높다면 실패한 정치를 하게 되죠. 그런 문제를 가졌기 때문에 집단의 수장은 반드시 유능하고 도덕적이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공과 사의 구분은 고래로부터 하나의 공의로 여겨졌는데, 수장이 공과 사의 구분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건 그만큼 공사에 대한 판단력이 부족하다는 것이고 자기 통제력이 약하다는 것입니다. 사적인 감정과 관계가 공적인 영역에 적용된다면 그 자체로 불공정한 통치인 셈이죠.


공과 사의 구분이 중요한 점은, 사적인 관계가 공적인 영역에서 불공평을 발생시키고 그 이상으로 폐혜를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이런 문제는 높은 자리에 있는 이에게서 발생할 수록 문제가 커지는데, 가령 일국의 대통령과의 친분에 따라 공적인 재화, 서비스, 권리, 권한 따위를 사적으로 유용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죠. 외교관계에 있어서는 그러한 친분만으로 이권이 달라지게 됨을 의미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박근혜는 이런 조건들에서 실격되었습니다. 사적인 관계로 최순실에게 정치를 통치의 의무와 권한을 넘겼고, 공적인 영역에선 실패했으며, 도덕적이지 않은 통치와 인간관계와 조직관계를 맺어왔죠. 



무능한 통치자는 일반적으로 환영받지 못하지만, 사실 환영 받는 이들은 있습니다. 무능하거나 딱 일정 정도까지만 유능한 간신과 그러한 통치자를 대해야 하는 타국이죠. 


무능하고 멍청하기 때문에 판단력이 뒤떨어지고, 뒤떨어지는 판단력은 첨예한 이성과 합리가 아닌 감정과 선호에 의해 의사결정이 이루어지며, 간신과 같은 이들의 감언이설에 넘어가게 된다면 그들의 말에만 귀 기울이게 되며, 마찬가지로 올바른 결과로 나아가지도 않을 것입니다. 더욱이 능력과 실력이 아닌 통치자와의 관계에 따라 인사가 이루어질 수 있기에 더더욱 나쁩니다.


결국 무능하고 덕성이 떨어지는 통치자와 그 주변인들은 정치를 자신들의 사익을 추구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할 것이고, 공적 신뢰는 파탄날 것이며 그 이상으로 국가의 중추적 영역(특히 경제)은 점차적으로 혼란하게 됩니다. 


여기서 외교에 있어서는 더 문제가 커지는데, 무능하고 멍청한 통치자만큼 이용하기 좋은 대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전자의 문제가 국가 내부적으로 발생하는 착취와 부정이라면, 후자의 문제는 국가 외부로 발생하는 착취와 다름 없다는 게 문제죠. 여기서 공과 사의 구분이 엄격하지 못한다면 더더욱 큰 문제가 발생하게 되는 거고요.



정치, 외교는 개인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공적인 사안이며 이러한 사안을 다룰 때 사적인 감정은 접어둬야 합니다. 없을 수는 없겠지만 공적인 영역에 영향을 줘서는 안 됩니다. 국가의 역량이 부족하고 아쉬운 입장에서 타국에게 굽힐 수밖에 없는 상황이 아니라면, 자국의 역량만큼의 태도와 확신은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한다면 무능한 거고 멍청한 거죠.


물론 정치구조에 있어서 시스템 속에 있으면서도 그 정점이기 때문에 시스템에서도 돌출될 수밖에 없는 대통령과 같은 통치자에게 감정과 사적 인식을 거세하라고 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만, 그러한 요소가 과도하게 공적인 영역에서 발현되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대통령, 독재자가 사적인 감정을 공적인 영역에 투사하거나 영향을 받게 되면 사적인 관계를 잘 이루는 것만으로도 이익을 뽑아낼 수 있기 때문에 나쁩니다. 그 나라의 참모, 싱크탱크 등의 인력들에 의해 조언을 받고,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는 정치와 외교적 정책의 구조를 무너뜨리고 시스템을 무의미하게 만듭니다. 주변인, 혹은 타국은 자신들이 내줄 비용과 협상력을 아낄 수 있고, 그러한 개인간의 관계와 판단만을 통제하고 유도하여 자신들에게 이익을 만들어낼 수 있게 되죠.



물론 실제 현실에서 아무리 멍청해도 공과 사의 구분을 그만큼 못하는 대통령, 독재자, 군주같은 통치자가 있진 않습니다. 있어도 드물죠.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공사 구분의 문제를 차치해놓더라도, 무능하고 멍청한 통치자를 타국이 좋아하는 이유는 다름 아닌 자국의 유능한 참모와 실무자, 통치자 본인에 의해 이루어지는 타국에 대한 이익추구 행위가 수월해지기 때문입니다.


타국에 이루어지는 활동과 공작, 협상에 있어 상대국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대처하지 못하게 되면 그만큼 국가의 이익과 권리가 밖으로 유출되는 거고, 그런 수준은 아니더라도 타국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노무현 정부는 외교의 면에선 유능했지만 내부적으로 무능했고, 대통령 개인과 그와 가까웠던 주변인은 덕성이 높았지만, 그 정당 내부의 이들은 도덕적이지 못했으며, 이명박과 박근혜 정부는 내외부적으로 무능했고 도덕성은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특히 외교의 면에서 이명박 정권, 특히 박근혜 정권은 매우 무능했고, 이명박 정권은 친미일변도의 기조를 유지하며 극친미적 외교로 미국과의 관계는 좋았지만, 그 외 국가와의 관계에 있어서 무능했고, 미국에게도 의존하는 태도를 보였기에 정당한 협상과 대화보다는 언듯 끌려가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박근혜 정권의 외교는 총체적인 실패인데, 능력도 없으면서 어중간한 줄타기, 혹은 그런 의도는 없었지만 결과적으로 그렇게 된 외교는 중국에게 큰 제재와 불신을, 미국에게도 신뢰에 대한 시험을 발생시키며 사드 배치 문제에 있어서 양국의 압박과 제재를 받았죠. 일본 또한 꾸준히 평화헌법 개정과 보통국가화를 이룩해가는 것을 억제하거나 견제하지도 못했습니다.


미국, 일본에 대한 이명박의 태도와 중국, 미국에 대한 박근혜의 태도는 다분히 비굴했고, 그러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타국은 더더욱 한국을 낮게 평가했을 겁니다.


이러한 무능함은 타국에겐 업신여김과 무시를 받고, 겉으로 보이는 나름 괜찮은 평가와 대우는 그만큼 뜯어먹을 게 많은 먹잇감이기 때문에 그 대표자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모습을 보이기 위함이었죠. 정치의 기본이니까요.



사실 한국의 덩치와 역량은 충분히 유럽에서도 독-프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하며, 그러한 국력을 가진 국가로서 오만할 건 없지만, 그에 맞는 태도와 외교를 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서의 두 정권과는 반대로 문재인 정권은 상당히 유능하고 적절한 외교를 하고 있고, 그런 성과를 보이고도 있죠.


한국이 자국인들은 자각하지 못할 지 몰라도, 대통령이 되는 인물이 그러한 수준은 정확하게 판단하지 못하면 안 되는데, 문재인은 그러한 면에서 합격점에 속한다고 봐야합니다. 자국의 힘을 정확하게 판단하고 있고 그 역량을 가지고 외교를 하고 있기에 중국은 문재인 정권이 들어서나 사드 배치를 철회하지도 않고 반대하지도 않았음에도 사드 배치에 대한 문제제기는 크게 줄었고, 경제제재는 공식적으로 철회했고 실제로도 크게 줄었죠.


미국과의 관계는 트럼프의 발언과 취급에서도 알 수 있듯이 친한국, 친문적인 관계를 만들었고, 대북문제에 있어선 문재인만의 성과는 아니지만 남북정상회담까지 이끌어냈고, 일본패싱이라 칭할 수 있는 외교적 견제를 발생시켰습니다. 일본은 한반도 문제에 끼고 싶지만 끼어들 여지가 없어서 최근 아주 몸이 달아올랐죠.



한국이 자국의 역량에 맞는 외교와 정치를 하고 있기 때문에 주변국은 한국을 이전과 같은 태도와 방식으로 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더불어 이러한 차이는 시대인식에 의해 발생하는 문제이기도 한데, 극우보수들이 통치로서의 정치와 외교에 있어서 무능하고 부정하며 심지어 시대를 제대로 인식하고 파악하지 못해 멍청하기까지 하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있겠죠.


특히 시대 인식의 문제는 그들이 70년대, 80년대에 사는 줄 안다는 비판을 받는 원인과 같은 궤를 가지고 있으며, 그들에게 있어서 인식의 업데이트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정치, 국제에 대한 인상과 가치관, 방법론은 그 시절 그것과 크게 달라진 게 없습니다.


그들에게 외국, 특히 강대국과 선진국들이라 여겨지는 국가들은 한국보다 잘살고 강하고 발달된 국가로서 잘보여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들에게 비굴하고 사대적이며 두려워하고 동경하는 대상으로 보는 것이죠. 과거의 한국은 그만큼 모자랐고 부족했고 약했기 때문에 후진적 의식수준과 결부해 그러한 태도와 가치관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국민들에게도, 특히 정치 일선에 서 있는 이들에게 있어선 더더욱 빠르고 정확한 인식과 판단이 필요했지만, 극우보수 세력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바로 그런 인식과 가치관 때문에 이명박과 박근혜 정부는 외교에 있어서 비굴하고 소극적이었으며 자국의 역량과 가능성을 제대로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외교적 실패는 그들의 무능에도 있지만, 그들의 시대인식에도 문제가 있었음을 시사하는 바죠. 가령 G20 당시의 국격드립은 그러한 천박하고 비굴한 인식수준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일면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통치자가 유능하고 도덕적이어야 하는 이유는 이러한 문제를 발생시키지 말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국가는 항상 발전을 지향해야 하며, 국가구성원을 안정시키고 평화롭게 해야 합니다. 그러한 무능한 통치자는 내치에서도, 외치에서도 대개 실패하기 마련이고, 거기에 도덕적으로도 결함이 있다면 그러한 공권력을 이용해 사익을 추구하게 되죠. 


p.s 전에 한번 썼다 날려먹은 글이라 처음 썼던 내용과 완전히 달라져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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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과 사의 구분이 중요한 점은, 사적인 관계가 공적인 영역에서 불공평을 발생시키고 그 이상으로 폐혜를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이런 문제는 높은 자리에 있는 이에게서 발생할 수록 문제가 커지는데, 가령 일국의 대통령과의 친분에 따라 공적인 재화, 서비스, 권리, 권한 따위를 사적으로 유용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죠. 외교관계에 있어서는 그러한 친분만으로 이권이 달라지게 됨을 의미합니다.


정치, 외교는 개인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공적인 사안이며 이러한 사안을 다룰 때 사적인 감정은 접어둬야 합니다. 없을 수는 없겠지만 공적인 영역에 영향을 줘서는 안 됩니다. 국가의 역량이 부족하고 아쉬운 입장에서 타국에게 굽힐 수밖에 없는 상황이 아니라면, 자국의 역량만큼의 태도와 확신은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한다면 무능한 거고 멍청한 거죠.


대통령, 독재자가 사적인 감정을 공적인 영역에 투사하거나 영향을 받게 되면 사적인 관계를 잘 이루는 것만으로도 이익을 뽑아낼 수 있기 때문에 나쁩니다. 그 나라의 참모, 싱크탱크 등의 인력들에 의해 조언을 받고,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는 정치와 외교적 정책의 구조를 무너뜨리고 시스템을 무의미하게 만듭니다. 주변인, 혹은 타국은 자신들이 내줄 비용과 협상력을 아낄 수 있고, 그러한 개인간의 관계와 판단만을 통제하고 유도하여 자신들에게 이익을 만들어낼 수 있게 되죠.


발췌 : http://konn.tistory.com/593



공사의 구분은 공적인 영역에 존재하는 모든 이라면 기본적으로 구분해야 하는 능력입니다. 이 구분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것은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폐혜를 발생시키며, 거시적으로 조직에 독이 되는 결과를 낳기 때문입니다. 불공평하고 정당하지 않다면 그 조직의 공적 신뢰도가 어떻게 될 지는 모두 알만한 일이겠죠.


공과 사의 구분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조직과 집단, 수장은 더 이상 능력과 실력이 평가의 대상이 아닌 인맥과 친분이 평가의 요소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뛰어난 인재라도 그러한 친분에서 밀리면 승진할 수 없고, 정당한 대우를 받을 수 없게 되죠. 흔한 증소기업에서 발생하는 인맥, 친목 문제와도 맞닿은 문제입니다.


조직은 조직화되어 있을 수록 시스템에 의해 돌아가게 됩니다. 시스템이라는 구조가 발생하고, 그 시스템을 규칙으로 움직이죠. 실제 돌아가는 건 인간에 의해서이지만, 시스템이라는 비인간적 구조가 있기 때문에 부정이 발생하고 문제가 발생할 여지가 적어지죠. 그게 시스템과 구조의 가치이자 안전성입니다.


그러한 시스템은 기본적으로 인적 관리와 효율을 대상으로 하는데, 공사의 구분이 무너지면 이 시스템의 근본 목적이 무너지게 되죠.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조직은 언제가 됐든 비효율과 부정함을 안고 가게 되고, 조직의 기반과 역량이 약하다면 무너지게 되거나 쇠퇴됩니다.


단지 친분에 의해 능력과 별개로 승진하고 더 높은 권한과 의무를 짊어진다면 어떠한 파탄이 나는지는 태평양 전쟁기의 일본군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단지 친분만으로 높은 계급을 가지게 해주고 능력도 없는 이가 그 계급의 권한을 함부로 유용하다 어마어마한 손해를 입곤 했었죠.



이러한 약점이 조직 밖의 인물에게 이용된다면 더 큰 문제가 일어납니다. 가령 독재자, 대통령 개인간의 친분만으로 공적 이익을 얻어낼 수 있다면 일은 굉장히 편해지기 때문이죠. 자국의 역량과 협상력을 아끼고 단지 개인간의 친분만에 공을 들여 더 쉽게, 더 많은 이익을 뽑아낼 수 있으니까요. 


이는 단 한 사람을 통제하여 국가, 집단 단위의 부정과 부패를 발생시키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런 이유로 고래로부터 군주, 통치자는 공사의 구분을 명확히 하는 것이 공의라 여겨졌죠. 이게 이루어지지 않으면 내부적 불만은 점차 높아져가고 야비한 자, 간사한 자들은 자신의 실력과 능력을 갈고 닦지 않고, 덕성을 다듬으려 하지 않으며, 단지 권력자 개인에게 충성과 간언을 하며 부정한 이익과 특혜를 받게 됩니다.


그 결과 누구도 자신의 능력과 실력만으로 대접 받으려 하지 않을 것이고 종래엔 간신배와 모지리들만 모여 있는 잡조직이 되어 버립니다. 과거 간신과 암군에 의해 통치 받는 국가가 그러했죠. 국가와 국가의 관계가 그러했다면 그것은 일방적인 착취의 영역이 되어 버립니다. 통치자에 의해 발생하는 국가 단위의.


이러한 것은 규모와 관계 없는 조직이라면 모두 가지고 있는 문제이며, 조직이 커지고 성장하기 위해선 공사의 구분이 철저하고 명확해야 하는 이유이며, 그러하기 위해서 공적인 시스템을 만들고 그것을 기반으로 활용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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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음과 깔끔한 음색의 당당한 목소리가 굉장히 매력적이네요. 한때 뮤즈의 음악을 매일 들을 정도로 좋아했고 그 중에서도 언인텐디드의 차분하고 잔잔함이 마음에 들어 많이 듣곤 했었습니다. 특히 기타 반주가 정말 마음에 들었었는데 말이죠.


그 이후 뮤즈의 곡들은 잘 듣지 않게 되었지만, 뮤즈는 뮤즈고 명반은 명반이며, 좋은 곡은 좋은 곡이죠. 


뮤즈는 의외로 여자들이 부를 때 더 좋은 곡들이 많은 듯 합니다. 매튜 벨라미가 저음도, 고음도 있는 곡들을 많이 부르다보니 오히려 이런 저음의 목소리를 가진 여성이 부를 때 더 돋보이지 않나 싶군요.



뮤즈 (MUSE) - Unintended


You could be my unintended. Choice to live my life extended

넌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사랑이었어. 네가 나타나 내 삶은 새로워졌어

You could be the one I'll always love

이제 넌 내가 언제까지나, 영원히 사랑할 사람이고,

You could be the one who listens to my deepest inquisitions

내 마음 속의 가장 깊은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되어준 걸

You could be the one I'll always love

넌 내가 언제까지나 영원히 사랑할 단 한 사람이야


 

I'll be there as soon as I can

당장이라도 네게 달려가고 싶은데

But I'm busy mending broken pieces of the life I had before

그 전에 아직 부숴진 내 삶을 주워담아야만 하는 걸

First there was the one who challenged. All my dreams and all my balance

그녀에게 내 꿈과 모든 것들을 걸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She could never be as good as you

결국 그녀는 네가 될 수 없었지 



I'll be there as soon as I can

당장이라도 네게 달려가고 싶지만

But I'm busy mending broken pieces of the life I had before

아직, 부숴진 내 삶을 주워담아야만 해



가사 출처 :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warnermusickorea&logNo=220464990105&parentCategoryNo=1&categoryNo=&viewDate=&isShowPopularPosts=true&from=sea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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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이 빠진듯, 얇은듯 하지만 심지는 굳은 듯한 목소리가 특징적인 홀리 헨리가 부른 아델의 Hello 커버 곡입니다. 이 영상 말고도 다른 영상, 이를테면 레이디 가가의 Bad Romance와 같은 곳에서 특히 그 특징과 기교가 돋보이는 편인데, 차분하면서도 몽황적인 면이 있는 목소리로 자기 색깔 풍부하게 부르는 면에 아주 큰 매력을 느꼈죠. 위 영상 말고도 글에 링크 되어 있는 배드 로맨스 곡도 들어보는 걸 권합니다.


Lyrics - 

[Verse 1]

Hello, it's me
안녕 나야.
I was wondering if after all these years You'd like to meet,
시간이 지나고 날 만나고 싶을지 궁금해졌어.
 to go over Everything
이 모든걸 다 지나가기 위해선,
They say that time's supposed to heal ya
그들은 시간이 해결해준다고 말했지만,
But I ain't done much healing
그렇게 되진 않더라.


Hello, can you hear me?
안녕, 내 말 들리니?
I'm in California dreaming about who we used to be
난 우리가 그렇게 그려왔던 캘리포니아 드리밍 안에 있어
When we were younger and free
우리가 젊고 자유로웠을 때 꿈꿨었던
I've forgotten how it felt before the world fell at our feet
세상을 우리 발 밑에 두고 있을 때의 기분을 잊어버렸어.


[Pre-Chorus 1]
There's such a difference between us
우리 사이엔 차이점이 있지
And a million miles
백만 마일이나 떨어진


[Chorus]
Hello from the other side
안녕......
I must've called a thousand times to tell you
이 말을 하려고 천번은 전화했을거야
I'm sorry, for everything that I've done
미안해. 내가 저지른 모든 일들
But when I call you never seem to be home
하지만 내가 전화할 때마다 넌 집에 없었지.


Hello from the outside
안녕.......
At least I can say that I've tried to tell you
적어도 내가 너에게 말하고 싶었던 거라고 얘기할 수 있어.
I'm sorry, for breaking your heart
미안해 네 마음을 아프게 해서.
But it don't matter, it clearly doesn't tear you apart anymore
하지만 상관 없어, 더이상 네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을거니까.


[Verse 2]
Hello, how are you?
안녕, 어떻게 지내?
It's so typical of me to talk about myself
이런식으로 내 이야기 하는거 이젠 질리지.
I'm sorry, I hope that you're well
미안해, 그냥 네가 잘 지냈으면 해서.
Did you ever make it out of that town Where nothing ever happened?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은 그곳을 떠나려고 한적이 있었니?



[Pre-Chorus 2]
It's no secret That the both of us are running out of time
우리 둘의 시간이 다 된건 숨길 게 아냐


[Chorus]
Hello from the other side
안녕.....
I must've called a thousand times to tell you
이 말을 하려고 천번은 전화했을거야
I'm sorry, for everything that I've done
미안해. 내가 저지른 모든 일들
But when I call you never seem to be home
하지만 내가 전화할 때마다 넌 집에 없었지.


Hello from the outside
안녕......
At least I can say that I've tried to tell you
적어도 내가 너에게 말하고 싶었던 거라고 얘기할 수 있어.
I'm sorry, for breaking your heart
미안해 네 마음을 아프게 해서.
But it don't matter, it clearly doesn't tear you apart anymore
하지만 상관 없어, 더이상 네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을거니까.


[Bridge]
Ooooohh, anymore
우↑ ↘↘↗↘~~ 더이상은.....
Ooooohh, anymore
우↑ ↗↘↗~~ 네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을거야....
Ooooohh, anymore
우↑ ↘↘↗↘~~ 더이상은..
Anymore
더이상은... ↗


[Chorus]

Hello from the other side
안녕......
I must've called a thousand times to tell you
이 말을 하려고 천번은 전화했을거야
I'm sorry, for everything that I've done
미안해. 내가 저지른 모든 일들
But when I call you never seem to be home
하지만 내가 전화할 때마다 넌 집에 없었지.


Hello from the outside
안녕......
At least I can say that I've tried to tell you
적어도 내가 너에게 말하고 싶었던 거라고 얘기할 수 있어.
I'm sorry, for breaking your heart
미안해 네 마음을 아프게 해서.
But it don't matter, it clearly doesn't tear you apart anymore
하지만 상관 없어, 더이상 네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을거니까.


가사 출처 : http://gall.dcinside.com/board/view/?id=pop&no=124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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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 [論理] 국어

생각이나 추론이 지녀야 하는 원리나 법칙


논리적이다. 합리적이다. 쉽게 말해서, 똑똑하다. 라는 것은 같은 것을 보아도 남들보다 더 정확하게, 더 많이 보고 설명해낼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겁니다.


생각외로 사람들은 논리적이지도 않고 합리적이지도 않습니다. 인간의 논리력과 합리성은 DNA에 각인된 본능적 능력이 아니라 교육과 훈련을 통해 얻어낸 기술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교육과 훈련의 수준과 성취에 따라 그 능력의 수준은 천차만별이죠.


그만큼 같은 것을 보고도 그것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설명해낼 수 있는 건 그만큼 논리력과 합리성이 훈련 받은 사람이라는 것이죠.



논리라는 것은 위의 사전적 정의처럼, 그것의 원리와 법칙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단순한 정의일 뿐이고, 그러한 기술이나 방법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죠. 따라서 논리라는 것도 그 수준에 따라 허술한 논리와 견고하고 탄탄한 논리가 있을 수 있는 거고, 당연히 후자의 논리가 더 합리적인 결론을 내놓을 수 있게 됩니다. 학계와 같은 영역에서 후자의 싸움이 치열해지죠.


이러한 논리는 같은 문장을 보고도 더 명확한 명제로 나눌 수 있습니다. 더 논리적일 수록, 더 똑똑할 수록 기본 단위의 논리로 분해가 가능해집니다. 이러한 명제 나누기, 논리적 분해는 결국 수리 논리와 같은 분야로 다다르게 되죠.


하여간 이를 다르게 말하자면, 같은 문장 속의 상이한 두개의 명제가 하나의 명제인 것처럼 둔갑하여 잘못된 주장이나 결론으로 호도하는 것을 파악하고 그것을 비판, 논박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은 굉장히 중요한 것으로, 일상에서야 별 상관 없겠지만 토론과 논쟁의 상황에서 첨예한 논리를 가진 쪽이 이길 수 있고, 여기서 이겼다는 것은 그의 주장이 더 합리적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올바른 논리가 합리적 결과를 내놓지 못할 수가 없죠. 이 합리성이 선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건 아닙니다만.



이 블로그에서도 수 차례 언급한 적 있지만, 멍청할 수록 피상적인 것 밖에 보지 못하고, 더 뛰어난 지성을 가진 사람일 수록 그 근본적인 원인과 원리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현상을 논리적으로 분석하고 비판하는 능력이 개인의 두뇌활동으로 어느 정도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했듯, 할 수 있는 기본 단위의 논리로 명제를 분할하며 그것의 타당성을 따지며 옳고 그름을 가려낼 수 있으니까요.


또한 이러한 지성은 그러한 것을 감각적으로 느끼기만 하는 것 뿐만이 아니라 그것을 언어적으로 설명할 수 있기도 합니다. 지성이 뛰어나지 못한 이들,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지 못한 이들은 부당함을 느끼지만 그것의 원인을 파악하지 못하고 마찬가지로 설명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당함을 느끼고 그것이 불만과 분노를 느끼지만 그것을 풀 대상을 제대로 찾지 못하는 경우가 있죠. 그러한 상황에 놓인 개인, 더 나아가 그들이 모인 대중은 쉽게 극단주의에 빠지기 쉽죠. 정치에선 나치, 일본 극우, 미국 네오콘, 사회나 인터넷에선 메갈, 일베, 그냥 흔해 빠진 멍청이나 초딩, 중2병 환자 등등..



뭐 하여간, 더 논리적이라는 것은 더 합리적인 판단이 가능하게 되면서, 독립적 지성체로 기능하게 할 수 있게 해주는 능력이 됩니다. 완벽히 독립적일 순 없고 사실상 달성 불가능한 지점이지만, 능력에 따라 최대한 그럴 수 있게 되겠죠. 미국의 저소득층, 저학력층에게 철학을 가르쳤더니 자신의 분노와 불만이 어째서 발생하는지 이해하고, 그것을 언어적으로 정리할 수 있게 되면서 그러한 내적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는 그러한 지성이 자신을 통제하는 수단이 됨을 의미합니다. 스마트폰이라는 단말기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한다면 그것을 통해 정보와 통신을 제대로 받아들이고 연결될 수 없고, 이를 보고 우리는 고장났다고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이라는 단말기가 자신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휘둘리고 부당한 영향에 올바른 반응을 발생시키지 못한다면 그것 또한 제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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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리뷰는 작품에 대한 내용누설이 있습니다. 


오만과 편견을 읽은지 꽤 되서 내용이 아주 선명하게 기억나는 건 아니지만, 과연 걸작이라 칭송 받는 고전 연애소설이라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만큼은 기억에 남습니다. 


개인적으로 흥미롭게 여겨졌던 것은 작품 내의 등장인물과 사건보다는, 그것을 쓰는 필체에 있었습니다. 산문이기에 자유롭게 쓰여진 오만과 편견은, 개인적으로 어떤 면에선 감춤 없이 서술되는 표현에서 고전적인 맛을 느꼈습니다. 그러면서도 세련되었고 내용적으로는 그런 필체이기에 정확하고 잘 짚어낸 심리와 행동을 독자로 하여금 쉽게 이해토록 하며, 잘 구성된 짜임새의 작품으로서 어째서 200년도 전의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오랜 기간 전세계 다양한 독자들에게 후한 평가를 받을 수 있었는지 알만하게 했죠.


가장 구체적으로 그러한 고전적인 맛을 느끼게 해주는 부분은, 뭐 이건 번역의 차이이긴 하지만 ~~의 좋은 점을 나열했다. 같은 식의, 허례적인 표현들은 읽으면서 당시 사회 상류층과 젠트리들의 허례적인 태도를 느끼게 해주는 아주 좋은 요소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비단 번역(Good Thing; 좋은 점)이 저랬기 때문만은 아니지만, 뭔가 초등학생 애들이나 할 법한 표현 같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그게 그들의 허례적인 가치관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듯한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지요.



뭐 어찌됐든, 소설을 읽으면서 그래도 고전 소설은 고전 소설이기 때문에 현대적 가치관과 맞지 않는 부분들이 꽤 보였습니다. 결혼에 대한 의식과 가치관이 그렇지요. 다만 그렇기 때문에 제인 오스틴이 얼마나 선진적인 작품을 썼는지, 그러한 여성을 묘사했는지 잘 보여준 작품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남성들에게도 마찬가지였지만, 여성들에게도 결혼이란 전통적인 그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여자는 좋은 남자 잡아서 결혼해야만 하는 것이며, 여기에 있어서 정조나 처녀성과 같은 위신과 명예는 굉장히 중요한 요소이자 하나의 자산가치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작품 속 샬럿 루카스와 같은 여성은, 나름 현명한 편일진 몰라도, 자신의 못난 외모 때문인지 결혼에 대한 가능성이 높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 때문에 윌리엄 콜린스와 결혼해버립니다.


이는 그 당시의 좋은 결혼상대의 조건인 재산과 지위, 평판을 기준으로 하였고, 교구목사로서 높은 사회적 지위와 많은 재산, 더욱이 앞으로도 많은 돈을 상속 받을 가능성 등을 조건으로 하여, 루카스양에겐 최고의 결혼 대상으로 보였고, 그것을 이유로 그와 결혼하게 됩니다.


이에 대해 작품의 주인공인 엘리자베스 베넷은 샬럿에게 실망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고--물론 그 이전에 콜린스가 자신에게 청혼했다는 점과 더불어 나름 충격을 받았지만-- 현명한 대화상대를 잃고 싶지도 않으며, 좋은 친구와 데면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샬럿에 대한 감정을 금방 털어냅니다. 사실, 객관적으로 본인이 그에 대해 나쁘게 생각할 이유는 없었기 때문이죠. 본인 스스로도 그런 남자와 결혼을 했다는 사실에 대해 실망한 것이지 그 외의 조건은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것들이었으니까요.


이는 주인공 리지 베넷의 현명하고 주체적인 균형의식과 높은 판단력을 드러내는 장면입니다. 


뭐 각각의 등장인물에 대해 논하자고 한다면 너무 무의미한 지면을 할애해야되고 별로 중요한 게 아니니 넘어가도록 하고, 작품의 제목이 되는 오만과 편견은 참으로 중심적이다 싶은데, 애초에 그렇게 쓴 것이지만 엘리자베스 베넷의 편견과 피츠윌리엄 다아시의 오만으로 대표되는 그들의 결점과 특성을 그대로 서술한 것이 작품의 제목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진부한 제목이지만, 반대로 작품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훌륭한 제목이지 싶기도 하네요.



리지와 다아시가 처음 만나는 빙리의 파티에서 다아시의 첫인상은 정말 안 좋았죠. 오만하고 재수없는 태도는 마치 속 좁고 찌질하다는 듯한 인상마저도 줍니다. 상류층으로서 오만하고 자신과 격이 맞지 않는 이들을 깔보고 폄하하는 듯한 그의 태도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래도 굉장히 누구에게든 안 좋은 첫인상으로 시작하게 되죠.


하지만 이는 사실인 동시에 첫인상의 오류를 내포하는 시작이기도 합니다. 리지 베넷은 그런 다아시의 모습을 보고 거기에서 편견이 시작되거든요. 그런 편견은 다아시가 고백을 하는 시점까지 꾸준히 이어졌고, 다아시의 오만함이 리지를 평가절하하기 위해 관찰하면서 점점 무뎌지고 깍여나가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어버리는 과정에서 오만함이라는 단점 요소가 사라지는 원인이 될 때에도, 그러한 다아시의 관심과 관찰이 역으로 리지에겐 자신의 편견을 강화하며 다아시의 모든 행동이 타인을 깍아내리고 비난하기 위한 행동일 것이다. 라고 여기며 다아시를 공격합니다.


원래라면 기분 나쁠 법도한 태도이지만, 사랑이라는 것은 그것마저도 받아주는 이유가 되죠. 캐롤라인이 옆에서 다아시의 관심과 사랑을 끌어오기 위해 뻘짓거리를 할 때에도 그녀를 무시했지만 리지에겐 꾸준한 관심과 관용, 인내를 발휘했습니다.



그러다 다아시가 자신의 타는 듯한 감정을 참지 못하고 리지에게 고백하는 장면은 전기 부분과 후기 부분의 전개를 뒤바꾸는 작품의 중심적인 시점 역할을 하게 되는데, 이때의 대화도 참 재미있죠. 다아시는 자신의 고백을 리지가 당연히 받아들일 것이라는 오만함을 버리지 못했고, 리지는 기존의 편견대로 다아시를 공격합니다.


왜 이 부분이 재밌냐면, 이러한 서로간의 태도에 오만과 편견이 묻어 있기 때문인 동시에, 그러한 가혹한 경험에 감정적으로 매몰되지 않고 현명하고 침착한 지성을 발휘하여 스스로와 타인을 성찰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정말로 배울 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리지의 감정적 우월감에 도취되는 비난 행위에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도, 다아시 또한 그러한 가멸찬 비난에도 분노와 수치를 느끼지 않고 차분한 상태에서 신사로서의 의무를 발휘하여 자신의 생각과 사실을 적어 설명하고 설득하고자 하는 편지를 보냈다는 것이 말입니다.


리지는 이에 자신의 생각이 틀렸고 다아시가 생각보다 뛰어난 인품과 지성을 겸비한 사람임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사랑은 시작되어 버리죠. 그 동안 가진 편견에 따른 반감의 반동으로 그에 대한 진심과 가치를 깨닫게 된 엘리자베스는 다아시에 대한 조심스럽고도 뜨거운 감정을 가집니다. 다아시 역시도 그러한 경험을 겪었음에도 리지에 대한 감정이 변치 않고, 되려 할 수 있는 지원과 희생을 스스로 감수하면서까지 다가가려고 하고요.


제인-빙리의 결혼은 전통적 결혼관의 가장 훌륭하고 아름다운 예시라면, 위컴-리디아의 결혼은 전통적 결혼관의 가장 저열하고 천박한 예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리지-다아시의 결혼은 이러한 각기 다른 방향의, 그러나 같은 전통적 가치관의 결혼 사례를 앞에 두고 이루어지는 새로운 사례입니다.


결혼 대상의 외면적 가치인 재산과 외모, 평판, 지위보다는 애정과 존중, 신뢰와 공감이라는 내면적 가치를 중시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서로를 사모하고 결혼하게 되었으니까요. 당시 기준으로, 그러한 외면적 가치가 중심적인 이유로 기능하고, 내면적 가치는 서로 결혼한 뒤 저절로 생기고 가지게 되는 것으로 여겨지는 만큼, 리지와 다아시의 관계를 그만큼 선진적이고 진보적인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다아시의 오만이었던, 귀족 상류층으로서 자신과 격이 맞지 않고, 그 가족들의 천박함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이로선 과감한 결정이었고, 젠트리 계급으로서 내면적 지성과 통찰을 최고 규범으로 여기는 엘리자베스의 반지성적 편견이 깨지고 저열하다 여겼던 다아시의 진면목을 보며 선택한 달성적 결정은 그 당시 보편적 결혼관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것이었습니다.


다아시의 그러한 떨어지는 집안의 여식을 배우자로 삼는 것도 파격적이었고, 높은 사회적 지위와 평판, 재산을 보유하여 자신의 미래를 보장해줄 수 있는 남편감에 대해서도, 실리적이었던 루카스양과는 다른, 가치관이 맞지 않아 존경할 수 없다는 이유로 거부한 것은 역시 굉장히 파격적이었습니다. 


사회가 중요시하고 인정하는 조건을 거부하고 자신의 내면적 가치에 걸맞는 이를 인정하고자 하는 태도, 그리고 그러한 태도를 논리적이고 합리적으로 설명하며 납득시키고자 하는 여 주인공은 200년전 그 시대를 기준으로 과감한 것을 넘은 파격 그 자체였으며, 흔치 않은 캐릭터성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캐릭터성과 전개는 흔해 빠진 두 남녀의 갈등과 성장, 반성과 사랑으로 이어지는 틀과는 또 다른 내면적 가치의 교훈을 남기며, 당시 뭇 여성들에게 제시한 새로운 가치관의 전달이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지금도 흔해 빠진 남녀간의 사랑 이야기는 많지만, 이렇게 주체적이고 발전적인 여성상을 그린 작품은 의외로 많지 않다는 점을 본다면 이 작품이 가지는 가치과, 품는 가치는 20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전세계적으로 많은 인정을 받은 이유가 있다는 것을 납득하게 해줄 수 밖에 없죠.


사랑이라는 만고의 보편성을 지닌 진리를 장르로 하였지만, 그 이상의 가치를 담았기 때문에 명작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시대를 뛰어넘는 재미는 그것이 시대를 뛰어넘는 가치를 담았기 때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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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간 개발한 3세대 MMORPG 게임으로서 많은 기대를 받아왔던 게임치고는 너무나도 아쉽고 그 이상으로 아까운 게임입니다. 저도 해보기 전까지는 굉장히 많은 기대와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실제로 발매한 이후 하다보니 정말이지, 흔한 한국 게임의 문제점들을 계승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문제들이 발생했죠.



일단 먼저 장점을 이야기해보자면, 3세대 MMORPG로서 HnH와 같은 게임에서 제시되었던 개념과 요소들을 적용했습니다. 특히 듀랑고 시스템 중 가장 많은 관심과 호평을 받았던 것은 제작 시스템인데, 마인크래프트와 같은, 정해진 재료 아이템과 정해진 결과물이라는 틀에서 벗어나 각 아이템들에 특성이라는 성질 개념을 부여한 뒤, 그 특성이 맞기만 한다면 아무리 말이 안 되는 결과물이라도 제작이 가능하다는 한 차원 진보한 제작 개념을 만들어냈습니다.


이는 앞으로의 MMORPG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게임사적 획을 그었다고 평가하는데, 기존의 한정적이고 한계가 뚜렷한 제작과 재료라는 개념에서 벗어나, 더 현실적이고 넓은 가능성이 존재하는 게임을 만들어낼 수 있는 비전을 보여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구라도 이런 제작 시스템에 대해서는, 그 개념 자체로서는 호평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봅니다.


그 외에 불안정섬이라는 개념도 굉장히 흥미로운데, 많은 사람들이 우려할 수 밖에 없는 한정적인 자원과 맵의 크기와 거리 문제를 해소한 훌륭한 구조적 설계라고 봅니다. 시간을 제한한 채 그 기간 내에 그 섬에 있는 모든 것은 채집, 설치 가능한 것들이고 이는 이런 류의 게임에 고질적으로 존재하는 자원과 맵의 문제를 해소할 수 있는 기획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냥터나 채집터 통제의 문제도 없어지고 희소한 자원을 특정인들만 독점적으로 얻거나 사실상 무의미하게 없어지는 일이 줄어들고 우려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죠. 아예 없는 건 아닙니다만..


게임 자체가 쉽다는 것도 장점이라면 장점입니다. 시스템 자체가 복잡하지 않고 몇몇 개념과 요소만 알면 되기 때문에 특별히 더 배우거나 연구할만한 부분이 많지는 않죠. 이는 폰게임으로서 많은 시간과 정신을 할애할 수 없는 이들에게 쉬운 접근성과 빠른 적응력을 가지게 하는 부분이죠. 



근데 솔까 장점이라고 꼽을만한 건 이런 것들 밖에 없는 거 같습니다. 솔직히 문제는 너무 많아요. 6년 동안 개발한 게임 치고는 정말이지 아쉽고 아까울 수 밖에 없다고 봅니다. 소재도, 게임의 설계도 괜찮았지만, 구조적인 문제점과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버렸습니다.


먼저, 땅이 부족합니다. 불안정섬은 잘 만든 시스템이지만, 안정섬은 그야말로 구조적 게임 설계 실패의 시작이자 끝입니다.


사람들이 원했던 것은 마인크래프트와 같은 무한하고 범용성이 넓은 활동을 보장 받는 플레이였다고 봅니다. 즉, 자기가 원하는 때 자기가 원하는 행위를 하고 원하는 것들을 얻어서 원하는 결과를 만드는 겁니다. 마인크래프트가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샌드박스로서 게이머가 원하는 요소를 잘 충족시켰기 때문이죠. 다소간의 한계는 있었지만 게임에 큰 문제가 되는 한계를 발생시키는 건 아니었죠.


하지만 듀랑고의 안정섬은, 그 좁아터진 섬에 수 많은 사람들이 다닥다닥 붙어서 서로 땅따먹기를 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바로 옆에 사람들 땅이 존재하고, 답답해 터진 섬에서 만들고 어쩌고 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는 생존게임으로서(혹은 그러한 컨셉을 잡은 게임으로서) 존재 의의 자체를 말소시켜버린 기획입니다.


누구도 그런 답답하고 불쾌한 사유지 시스템을 원하지 않을 겁니다. 심지어 안정섬도 좁고 지형에 따라 유리와 불리가 어느 정도 결정된다는 점에서 더더욱이요. 사람들은 넓은 땅에서 자기가 원하는 만큼, 능력껏 땅을 넓히고 자신이 발전해나가는 모습을 보고 느끼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듀랑고의 시스템은 그딴 거 없고 좁아터진 한정적인 땅 내에서 느그 혼자 알아서 해봐라 하는 건데.. 참...


더불어, 게임 자체가 별로 재미가 없습니다. 볼륨이 적고, 할만한 게 적습니다. 애초에 소유지를 크게 발전시킬 방법이 부족 시스템 말고는 없는데, 이는 필연적으로 다른 사람들간의 커뮤니티 활동과 사회적 활동이 강요받는데, 먼저 폰 게임으로서 그러한 소통의 필요성은 태생적인 불리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떄문에 보이스 채팅도 있지만, 까놓고 말해서 그리 잘 쓰인다곤 생각 안 합니다. 적어도 라이트 유저들에게 있어선 더더욱이요. 


더불어 이런 류의 생존 게임은 불특정한 사람들끼리 노는 것보다는 자기 혼자 어떠한 장소에서 자원을 채취하고 건물과 사물을 만들어 설치하고 정비하고 방비하고 발전시켜나가는 것에서 재미를 얻습니다. 근데 듀랑고는 그러한 점에 있어서 뚜렷한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즉, 발전의 한계는 뚜렷하고, 그 틀은 좁습니다.


근데 심지어 거기에 사냥, 채집, 제작의 반복이고, 퀘스트 내용도 거기서 거기인데다, 그 퀘스트 또한 그저 레벨업을 위한 행위에 불과한 게 사실입니다. 그냥 경험치를 많이 주니까. 이런 반복적인 활동은 기존의 RPG 게임, 특히 한국형 RPG 게임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재미 없는 뻘짓거리의 루틴 퀘스트로 여겨지고, 여기서 재미는 반감됩니다. 뭐 이런 퀘스트 없는 RPG 거의 없지만 한국형 RPG에서 이런 퀘스트의 남용은 많은 이들이 귀찮아하는 방식이죠. 만들긴 쉬워도.


솔까 이런 퀘스트 자체는 그럴 수 있습니다. 말했듯이 그런 퀘스트야 엄청 많고 당연한 거기도 하니까요. 하지만 문제는 그거 말고 할 게 거의 없습니다. 폰 게임이다보니 게임의 볼륨이 적은 것도 이해는 되지만, 이러한 요소들과 결합해서 보면 그냥 게임을 계속 하고자 하는 생각이 안 드는, 재미 없고 지루한 게임이 되어 버립니다.



제작자들도 그걸 알기 때문에 최대한 오래 붙어놓게 만드는 시스템들을 설계해서 넣은 의도가 보이긴 합니다. 아이템들의 내구도 수명과 사유지의 유지기간 같은. 아이템의 내구도는 시간이 지날수록 낮아지고, 이는 설치물도 마찬가지죠. 그에 따라 그런 아이템을 통해 충분히 뽕을 뽑기 위해선 오래 게임을 하는 게 경제적이며, 이는 소모품에 있어서 특히 그런 의도가 강하게 느껴지죠.


설치 아이템이나 장비 아이템도 수명이 줄어들기 때문에 수리 아이템으로 수리할 수 있지만, 최대 내구도가 줄어들기 때문에 결국 다시 만들어야 하고요. 이런 식의 설계는 최대한 게임을 오래 하게 만들고, 계속 하게 만드는 요소로 작용합니다. 지금까지 한 게 아까우면, 지금들고 있는 아이템들 다 날려먹는 게 아까우면 계속 하라는 거죠. 


이런 시스템 자체가 나쁜 건 아닙니다. 제작자와 게임사로서 많은 유저들이 오래 하는 건 그만큼 많은 돈을 보장해주죠. 근데 문제는 이런 시스템이 게임 전반적으로 존재하고, 사유지와 같은 근본적인 요소에도 적용되며, 게임 자체가 재미가 없어서 이러한 시스템에 개연적 납득(오래된 아이템이 삭는 게 현실적이지. 같은.)보다는 그냥 접지 않으려고 만든 시스템이구나 라고 여겨지게 된다는 점이죠.



스킬 시스템에 대해선 그럭저럭 괜찮다고 볼 수도 있는데, 스킬 레벨을 높히기 위해 해당 제작이나 활동을 많이 하게 만드는 건 훌륭한 설계이긴 하다고 봅니다. 귀찮아서 그렇지. 더불어 일부러 스킬 포인트를 부족하게 만들어 더 많은 레벨을 올리게 해야 하는 것도 나름 괜찮다고 보고요.


하지만 이러한 요소들은 앞서 말한 최대한 오래 하게 만드는 수작질이라는 의심과 더불어 최대한 오래, 많이 하게 만드는 설계 의도로도 여겨집니다. 더불어 이런 시스템에 대해 호불호도 있을 수 있죠.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은데 이것들은 할 수 있어도 저것들은 못한다고. 



이러한 요소들은 결국 게임의 커뮤니티성을 통해 극복하라는 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땅이 부족하고 채집과 제작에 한계가 있다면 부족을 만들고 가입해서 커뮤니티 활동을 하라는 겁니다. 듀랑고 기획자가 마영전 기획자와 동일인물이죠. 그에 따라 커뮤니티성에 주안점을 둔 거 같은데, 대다수의 라이트 유저들은 그런 걸 원하지 않습니다. 더불어 폰 게임이라는 태생적 한계는 그러한 활동을 잘 할 수 없게 만들죠.


까놓고 말해서 많은 이들이 집에서 녹스, 블루스택 같은 걸로 돌리게 되는데, 그렇게 된다면 폰 게임으로 만들 이유가 있었을 지 모르겠습니다. 차라리 PC게임으로 만들고 구조적 문제나 볼륨의 문제를 다소 해소해서 출시했다면 차라리 더 나았을 겁니다.



하지만 결국 구조적인 문제는 존재하고 게임으로 하여금 게임성을 통해 계속 해야할 이유를 만들기 못하고 시스템적 제약을 통해 계속하게 만드는 만큼 이러한 비판은 나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차라리 마인크처럼 싱글, 멀티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고, 멀티 또한 마인크래프트처럼하는 게 나았다고 봅니다. 전세계 단일 서버나 다수의 인원을 수용하는 게임사에서 제공 서버를 만들겠다면 HnH와 비슷하게 만드는 게 나았죠.


광활한 맵을 주고 랜덤하게 사람을 뿌린 뒤 스킬과 레벨, 자원 등에 따라 사유지를 더 넓힐 수 있고 원한다면 그러한 멀티 서버에서 타인과 하나의 부족을 일굴 수 있게 만들어야 합니다. 불안정섬은 여전히 존재하고 그걸 통해 자원을 얻는 것은 그대로 두고요.


사유지를 얻기 위해선 돈을 벌어야 하는데, 이걸 훨씬 어렵게 만들어야 했고요. 그래야 사유지를 늘려야 한다(=발전에 대한 게임성)는 비전을 주고 더 많은 노력과 활동을 발생시킬 수 있고, 실제로 늘리면서 성취감 등을 느낄 수 있죠. 또 섬 장터 같은 기능은 없애거나 최소화 해야 했습니다. 섬 장터에 대한 문제도 꽤 있죠.


싱글 플레이라면 여기의 요소 몇개를 도입한 채 마인크래프트와 비슷한 포맷으로 가는 게 나을 겁니다. 거기에 듀랑고만의 특색과 시스템을 설계해서 넣었다면 진짜 갓겜 하나 만들어졌겠죠. 가령 펫 같은 걸 전투 때의 고기방패나 짐꾼으로 쓰는데, 이걸 통해 격투나 경주 같은 스포츠를 즐길 수도 있고 아예 건설이나 농사에 쓸 수도 있으며, 일종의 군대나 사냥부대 같은 걸 만드는 등 RTS적 요소를 적용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물론 이런 펫에 대한 건 멀티에서도 적용해야겠죠. 군대 같은 RTS적 요소는 좀 제한해서. 물론 싱글에선 좀 풀고..


더불어 싱글이니까 더 많은 가능성을 열어둘 수도 있겠죠. 림월드에서처럼 조난자 같은 이들이 어디에서 발생하거나 발견되어 노예나 일꾼 비슷한 것으로 쓸 수도 있고, 그런 구조해준 인간 조난자들끼리 자식을 낳아서 아예 마을이나 왕국까지 발전시킬 수 있는 비범한 확장성과 발전성을 구조적으로 설계했다면, 물론 MMORPG라기 보단 생존 시뮬레이션에 더 가까워지긴 하겠다만, 말할 것도 없는 샌드박스 게임사에 큰 획을 그어 놓는 갓겜으로 세계적인 인정을 받을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듀랑고는 개발 기간에 비해 그러한 볼륨과 게임성을 갖추지 못했고, 이 때문에 많은 이들이 실망하고 비판하는 것이죠. 솔직히 많은 이들의 기대에 비해 실망스럽고 아쉬운 게임입니다. 고작 이렇게 밖에 못 만들었냐. 라는 말이 나올 수 밖에 없을 정도로요. 괜히 라스트 데이 온 어스 하다 듀랑고 해보고 다시 LDOE로 돌아가는 게 아닌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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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본인이 항상 맞는 말을 한다곤 생각하지 않지만, 이 블로그에서 쓴 글에서 제대로된 '비판'을 시도한 이는 진짜 거의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적습니다. 제가 글을 장황하게 쓴다는 자각은 있지만, 이는 제가 글을 이해하기 쉽게 쓰고자 함에 따라 글이 쭉쭉 늘어지는 거라서, 그리고 필력이 고수들에 비하면 일천하기 때문에 정확한 용어와 간단한 표현을 사용해서 누구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글을 쓸만한 수준의 능력에 도달하지 못해서 이기도 합니다.


어찌됐든, 비단 저 뿐만 아니라 많은 지식인들의 글과 그 반응에서 찾아볼 수 있는 현상이 있는데, 많은 이들이 맞는 말을 하고 정론직필을 써도 그 글을 받아들이지 않고 비난하거나, 무시하는 경우가 많다는 겁니다.


이러한 현상은 그에 대해 비판을 받는 쪽, 혹은 그러한 이념과 사상, 가치관을 공유하는 이의 반응이라는 점과, 특히 주목할 점은 그 글의 어조가 세고 감정적이며, 조롱과 비난의 강도가 셀 수록 발생한다는 거죠.


쉽게 말해서 진중권이 맞는 말을 하지만, 그 강도가 너무 세기 때문에 감정적인 반발이 발생해서 비판 대상이나 그 진영에 속하는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겁니다.



물론 순수 논리의 영역에서 중요한 건 그것이 논리적 정합성을 지녀서 합리적 사실을 지적하고 그것을 근거하거나 증명했느냐입니다.


하지만 실제 현실에선 그런 식으로만 따지지 않게 되는데, 이는 인간이 그리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인격자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실상 이러한 문제에 있어서 논리적 훈련이 잘 이루어지고 감정적 통제를 잘 수행하지 못하는, 훈련된 지성과 정신적 수양이 부족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한 사고를 잘 할 수 없는 것이 그 이유이죠.


어떠한 주장에 있어 그것이 참이냐 아니냐, 그것을 이루는 논리와 합리적, 객관적 근거가 얼마나 잘 구성되어 주장을 뒷받침하느냐가 아니라, 그 주장이 자신의 기분을 얼마나 나쁘게 하느냐라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맞는 말을 좆같이 하면 사람들은 그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이런 현상은 단기적으로 서로 진영간의 갈등과 분쟁을 심화시키고 각 진영끼리의 이해와 합의가 이루어질 수 없는 환경을 조성하며, 이념이나 진영 그 자체에 매몰되게 만들기 때문에 굉장히 비건설적이고 비생산적입니다. 심지어 해악적이기까지 하죠. 개인과 집단을 가리지 않고.



그런 의미에서 고백하건데, 저 또한 그러한 사실을 일찍부터 알고 있었음에도 자신의 감정에 매몰되어 '적'으로 여겨지는 집단 따위에게 가멸찬 비난을 던진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제 실수이기도 합니다. 이는 (그 종류와 성질과 별개로) 이러한 지성과 지식에 어떠한 재미나 성취를 느끼는, 부끄럽지만 저 같은 사람들 또한 그것을 잘 통제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설사 저보다 뛰어난 사람들이라고 해도 인간이고 감정이 정확히 기능하는 한 피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죠. 그 한계선은 사람마다 다를 뿐이고요.


그런데 하물며 일반인들, 대중들은 어떻겠습니까? 이러한 지적 훈련이 잘 되지 않은 이들에게 있어서 그들에게 정신적 성숙과 수양이 있다곤 해도, 그러한 감정적인 영향에서 벗어날 수는 없기 때문에, 감정적으로 마음에 안 드는 표현을, 공격적이고 조롱스러운 레토릭으로 전개할 경우 당연히 반발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것이 아무리 논리적 정합성이 높고, 그 구조의 짜임새가 훌륭하며, 근거의 배치와 논증 과정이 정확하다고 해도 말입니다. 쉽게 말해서, 아무리 맞는 말을 해도 좆같이 쓰면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논리와 그 주장의 객관성과 별개로, 그러한 것을 도구로 하여금 상대방, 독자를 공격하기 때문에, 그러한 것과 접붙혀진 글쓴이의 비난과 조롱에도 동의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자신에 대한 공격과 조롱을 아무런 반발과 반응 없이 수용할만한 사람들은 없겠죠. 그런 면에서 예수나 부처, 교황 같은 이들은 어마어마한 아다만티움 멘탈이었지 않을까 싶은데, 이런 건 뭐 별로 중요한 건 아니고, 중요한 건 남에게 자신의 주장을 설득하려면 아주 당연하게도, 침착하고 차분한 작문으로, 감정적 반발을 이끌어내지 않고, 충분히 설득력 있을 수 있는 독자 위주의 글을 써야 한다는 겁니다.


가령 제 글의 경우(비단 블로그에서 뿐만 아니고, 게임 등에서 발생하는 분쟁에 있어서도;) 자기 자신이나 나와 같은 관점을 공유하는 이들에게 심리적, 말초적 쾌감을 주고자 하는 강렬하고 날카로운 표현으로 비난과 조롱을 퍼부었고, 이는 읽는 이로 하여금 반대파에게 설득의 기능을 전혀 할 수는 없었습니다.


사실 앞서 말했듯이, 이러한 사실은 몇년 전부터 꾸준히 알고 있었고, 쓰면서도 아 이건 좀 아닌가 싶을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역시나 말했듯, 전 그만큼 감정적 통제가 잘 이루어지는 인격자는 아니었다는 점이죠. 



뭐.. 그런 면에서, 이러한 종류의 모든 글은 타인의 생각을 바꾸거나, 지식을 제공하기 위함인 고로, 그것이 제대로 기능하기 위해선 남들을 설득할 수 있는 글을 써야 한다는 것이 맞습니다. 토론이나 논쟁, 심지어 정치적 선동(가치중립적인 의미의 사용임.)에 있어서도 반대파의 지지나 설득을 이끌어내기 위해선 그만큼 설득력 있는 주장과 표현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죠.


만약 본인이 정치나 사회에 대한 글을 쓰고자 한다면 누군가를, 특히 그것이 거대한 진영과 집단을 이루고 있는 이들에게 비난하고 조롱하면 결코 성공할 수 없고, 되려 그들의 결집과 반발만을 이끌어내게 됩니다. 반대로 그러한 말초적 쾌감이 자기 집단의 결집이나 상대방의 반응을 통한 대립 구도를 만드는 데에 있어서도 전략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수단인 건 맞긴 하지만, 여튼간에 마치 북한이 핵도발을 하면서 양국간의 긴장도를 높히고 집단간의 결집을 이룰 수 있는 것처럼요.


하지만 역시 그런 것은 건설적이지 못하고, 정치적 전략의 수로서 사용되는 바, 더 건설적이고 평화적이며 항구적인 발전을 지향한다면 그러한 글을 쓰는 것은 하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정치에 있어서도 정적을 다룰 때의 상책은 겉으로는 웃으면서 뒤로는 상대방의 영향력을 제거하는 작업을 하는 것이고, 하책은 면전에서 공격하며 정적의 지지자를 집결시키고 구체적인 대립구도를 만드는 일이죠. 후자의 경우는 힘의 균형에서 압도적이거나 명분에서 크게 앞설 때나 사용해야할 전략이죠.



뭐, 잡설이 길었는데, 그냥 내용은 이겁니다. 맞는 말을 통해 상대방을 설득시키고자 한다면 좆같이 말하지 말라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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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을 의미하는 관점이라는 것은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이것이 사람마다 다르게 발생하고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관점은 가치관에 기초합니다. 가치관이 다르다면 사람은 같은 것을 보고도 다르게 판단하게 되죠.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이견이 발생하게 되고, 이견은 갈등이 되기 쉽죠. 그렇다면 이러한 갈등을 어떻게 조절해야 하는가에 대한 탐구에서 관점과 그것의 발생, 형성에 대한 사색은 반드시 거쳐가게 되는 영역이 되죠.


가치관은 서로간의 다른 환경에서 발생합니다. 서로 살아온 환경이 다르고 경험이 다르기 때문에 가치관은 사람마다 다르게 형성되고, 단지 그 환경의 유사성에 따라 그러한 가치관의 유사성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흔히 관점에 대해 이야기할 때, 타인의 관점을 존중하고 이해하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말은 일견 맞아보이지만, 단지 덕목으로서의 의미 이상의 원칙이 될 수는 없죠. 가령 무언가를 어그로라고 여기는 사람과, 그것을 그렇지 않게 여기는 사람의 경우 서로간의 관점 차이에서 갈등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전자의 사람은 어그로에게 욕과 비난, 배제를 시도할 수 있고, 후자의 사람은 그것을 놔두고 오히려 전자의 사람을 비판, 혹은 비난할 수 있죠. 그렇다면 앞서 말한 덕목처럼 그들의 관점을 모두 존중하고 이해해야 할까요? 당연히 아니죠.



관점이란 사람마다 다른 것이지만, 그것이 나름의 존중을 받을 수 있다는 것과, 그것이 올바르다는 것은 전혀 다른 말입니다. 따라서 존중하고 이해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절대 아니라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덕목일 뿐, 원칙이 되긴 어렵습니다. 때로는 존중하려고 하면 할 수는 있지만,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가 안 되는 것이 있기 따름입니다. 이는 인간이 완벽히 타인과 동조할 수 없는 다른 개체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궁극적 한계죠.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판별해낼 수 있어야만 합니다. 누군가의 관점이 틀렸거나, 적어도 맞지 않다면 그것을 논증하고 증명해내 그것을 거부하든 배척하든 할 수 있으니까요. 모두의 관점이 일정 이상의 가치나 존중성을 가진다면 그것을 다루고 판단하기에 까다롭고 조심스럽겠죠.


그렇기 때문에 필요한 것은 논리와 합리성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논리와 합리성은 사람마다, 집단마다 다르게 여겨질 수 있는데, 이러한 요소는 가치관을 구성하는 것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누군가의 관점을 비판한다는 것은 나아가 그의 가치관을 비판하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은 실로 이성적이지 않기 때문에, 어떠한 주장이나 명제에 대해 논리와 합리만으로 판단하지 못합니다. 이는 합리성 하에 이루어질 수 있는 논리적 근거와 합리적 사유를 기반으로 어떠한 사물에 대해 판단하고, 그 판단에 대해 감상을 가지는 것이 아닌, 어떠한 사물에 대해 감상을 가지고 그에 따른 논리를 찾는 쪽에 더 가깝기 때문입니다.


흔히 비논리적 행동으로 보이는 정답을 정해놓고 논리를 찾는 것이 그것입니다. 이것은 누군가의 주장을 보았을 때 나타나는 반응으로 설명하자면, 그 주장이 마음에 든다면 그것이 맞다는 것을 증명하거나 근거할 수 있는 논리를 찾을 것이고,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에 반대되는, 틀렸음을 증명하거나 근거할 수 있는 논리를 찾는 것처럼 말이죠. 


이처럼 감정의 문제는 관점에서 기인하고, 그러한 작용이 논리성과 합리성을 무뎌지게 하거나 반대로 강화시킬 수도 있습니다.



앞서 이야기 했듯이, 논리와 합리성은 사람마다, 집단마다 다르게 여겨질 수 있다는 점은, 그 개인이나 집단이 공유하는 가치관에 따라 다른 관점을 가지게 되고, 다르게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올바른 논리를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요? 모두의 관점이 존중 받아야할 것이고, 어떤 것이 옳고 그른지를 구분할 수 없다면 우리는 무엇이 올바른 관점이고 아닌지를 구별할 수 없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그에 대한 근거를 찾을 수 있습니다. 수학과 수리 논리와 같은 것이 그것인데, 수학과 같은 것은 가치관이나 관점이 지배할 수 없는 순수한 이성과 논리로 돌아가는 독자적인 학문 영역을 스스로 구축하였고, 매우 견고합니다. 따라서 인간 문명에서 절대적 논리(혹은 그렇게 기능할 수 있는 논리)를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은 수학이 될 것이고, 여기에서부터 논리의 근간을 세우면 되는 것입니다.


1+1=2라는 5개의 기호로 이루어진 명제는 참이고, 그것을 증명하기 위한 수 십줄의 증명과정은 그것이 사실임을 인정하게 만들죠. 만약 이러한 수학의 논리성을 부정하려면 그것을 우리는 비논리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논리는 마치 생물학과 같아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 부정된다면 이후의 모든 것이 부정되겠죠. 최소의 생식세포가 잘못 분열되었다면 암이나 장애를 가질 수 있듯이요.


하지만 이후의 것들은 그러한 문제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수학이 근본적으로 틀렸다면 우리는 컴퓨터를 쓸 수도 없습니다.


어찌됐든, 이러한 논리를 기반으로 우리는 이성과 논리를 발전시켜왔고, 사상과 이념은 그것을 언어의 형태로 정립할 수 있게 되었죠.


그에 따라, 우리는 보편적 정의를 성립시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근대적 합리, 인권 등의. 이러한 보편적 정의는 전지구적인 것이고, 어떠한 사회나 개인이 그것을 거부하거나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들이 그러한 근대적 합리와 보편적 정의에 대한 공감을 갖추지 못한 것이지 그들의 행태가 올바르다는 근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보편적 정의로 작용하는 논리를 구할 수 있고, 그것을 기반으로 관점을 판단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가령, 일베와 일반인의 차이를 예시로 들 수 있습니다. 아니면 나치나 이슬람 극단주의, 일본 극우나 북한 수뇌부를 예시로 들어도 좋죠. 


일베 내에서는 자기들끼리 내부적인 관점과 가치관을 가지고 있고, 대충 그들 다수는 스스로의 논리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일베를 비판하는 이유는 그들이 공유하는 가치관이 보편적 정의와 사회질서, 도덕과 윤리라는 관념에 위배되기 때문임을 알고 있습니다.


반대로 일베에서 사회를 비판하는 논리는 그들 스스로 확대재생산 하는 내부 논리와 그것이 구성해낸 가치관에 따라 예의와 도덕, 윤리, 보편적 정의에 동의하지 않고, 오히려 조롱하죠.


하지만 일베의 가치관과 관점은 전지구적으로 보편적인 개념이 아니고, 지향되는 바가 아닙니다. 발전적이지 않고 전근대적이거나 최소한 현대적이지 않습니다.


그러한 문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일베의 관점, 가치관은 틀린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사회 다수가 일베를 비판하는 이유는 그것이 옳지 않다. 맞지 않다. 틀렸다. 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앞서 비판한 감정의 작용에 따른 논리구성과 별개로 그것을 객관적으로 입증해낼 수 있기 때문에 사실인 것이고요.



물론, 이러한 기준이 되는 인권 같은 보편적 정의나 기준은 시대에 따라 달라집니다. 중세 시대에는 기독교적 원리와 신앙을 기반으로 하는 원칙으로 사회가 규율되었고, 중국에선 천자를 기준으로 사회를 규율하였으며, 중국과 조선 같은 국가에선 유교적 질서를 기본으로 하여 사회를 규율하였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현대에 와서 전근대적이라 폄하하고 이성적이지 못하다고 하지만, 실상 이성의 기준은 시대에 따라 변해가는 것이 사실인 바, 이치에 맞다는 합리는 그 이치가 무엇에 근거를 두고 있느냐에 따라 변화합니다. 일베의 가치관과 이성이 자기들 내의 내부논리에 의존하며 (비단 일베가 아니라도)그 집단 내에서는 합리적일 수 있는 이유는 여기에 있고, 그보다 넓은 보편적 정의와 같은 이성의 기준에 의해서는 틀린 이유 또한 여기에 있습니다.


이성의 기준이 어떻게 변할 지는 몰라도 현재의 기준으로서 이성과 합리, 논리는 관점과 가치관들에 대한 객관적 판단을 할 수 있게 되었고, 만약 이게 어렵거나 잘 되지 않다면 그것이 그만큼 난해하거나, 반대로 그러한 시도를 하는 본인이 그러한 논리적 훈련이 충분히 되어있지 않기 때문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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