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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며,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 - E.Kant
by Ko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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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리뷰는 작품에 대한 내용누설이 있습니다. 

 

장 바티스트 그르누이의 첫 살인은 태어난 직후였고, 피해자는 어머니였습니다.

 

물론 그것이 그르누이의 의도나 목적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어머니의 무책임한 존속살해를 거꾸로 돌려버렸죠. 그러나 부모가 없는 고아인 그르누이는 고아원에 가게 되었고, 두번째 살해 시도에서 또 살아남은 뒤 무두상에게 팔려가게 됐습니다.

 

그리고 그 직후, 유모는 강도에게 살해당했죠. 그리고 몇년 뒤, 무두상은 다년간 가혹한 작업 환경에서 살아남은 그르누이를 인정하고 좀 더 나은 일을 시킵니다. 그리고 그르누이는 자신의 재능, 냄새에 극히 민감한 것이 찾은 진짜 첫번째 갈망을 마주하게 됩니다.

 

바로 미녀의 향기였죠. 본래 무두된 가죽을 파는 것을 도와주기 위해 따라갔지만, 그는 홀로 처녀를 따라갔고, 그 향기에 취해 우발적으로 그녀를 죽이게 됩니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게 그의 손으로 이루어진 진짜 첫 살인이었죠. 그리고 그르누이는 죽은 그녀의 옷을 찢고 자기가 갈망하는 향기에 흠뻑 취하게 됐죠.

 

처녀의 아름다운 알몸을 탐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르누이에게 여성이란 향기를 담은 매개채일 뿐 여체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습니다. 죽은 처녀의 몸 구석구석 코를 박고 향기를 맡았지만, 죽은 자는 썩기 마련이고 생기를 잃으며 향기 또한 떠나가게 되는 법, 그르누이는 사라져가는 향기를 어떻게든 챙기기 위해 손으로 퍼담으며 콧속에 밀어넣지만 시체는 시체였습니다.

 

돌아온 그르누이는 개처럼 얻어맞지만 육체의 고통은 지난 저녁 겪었던 환상적인 경험에 더더욱 강력한 갈망에 빠지게 됐습니다. 그러다 지난 날 보게 되었던 향수 가게에서 알게된 것처럼, 그는 여인의 향기를 담고 싶어 했습니다.

 

그르누이는 가죽을 퍼퓸 마스터 주세페 발디니의 가게에 배달하러 갔고, 그가 향수 제조사인 걸 알고, 무엇을 만들고 싶어하는지 아는 그르누이는 자신의 재능을 뽐내며 그가 원하는 것, 시장에 풀린 경쟁자의 최고 상품을 즉석에서 만들어 냅니다. 그리고 발디니는 그르누이를 필요로 하여 무두상에게 은화 50개를 값으로 치르고 자신의 제자로 삼죠.

 

그러나 무두상은 사고를 당해 곧바로 죽게 됩니다. 마치 이전 유모처럼요.

 

그 뒤로 그르누이는 뛰어난 향수를 만들어내며 엄청난 성공을 안겨줍니다. 그러나 그의 갈망은 단순히 좋은 향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향기를 담는 것이었죠. 처음 발디니에게 찾아갔을 때, 그는 향기를 온전히 담는 것을 원했습니다. 그리고 그건 모든 사물에 해당되는 말이었죠. 그리고 그 중 최고는 그의 갈망. 아름다운 여인의 채취였습니다.

 

발디니는 향수 제조법을 그르누이에게 가르쳤고, 그 중에서 12개의 향수 조합을 알려주며 전설 속의 13번째 재료를 이야기해줍니다.

 

그르누이는 발디니에게 배운 향수 제조법에 따라 사물의 냄새를 담아내려 했지만 그건 오직 꽃의 향기 뿐, 구리나 돌, 심지어 고양이의 냄새조차 담지 못합니다. 결국 그는 자신의 갈망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죽어갔고 발디니에게 들은, 그라스의 향수 제조법을 알게 되며 그곳으로 떠납니다.

 

그리고 그날 밤, 수백개의 향수 제조법을 남기며 떠난 그날 성공의 꿈을 꾸던 발디니는 이전부터 흔들리던 건물이 마침내 무너져 죽게 됩니다. 유모, 무두상과 마찬가지로요.

 

그라스로 떠나는 그르누이는 산, 정확히는 동굴 속을 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곳은 돌 냄새를 제외하면 그 어떤 냄새도 없는 특별한 곳이었죠. 그곳에서 거지꼴이 될 때까지 지낸 그르누이는 어느날 한가지 사실을 자각하게 됩니다. 바로 자신에게는 채취가 없었다는 걸요. 

 

그르누이는 그곳에서 일을 하며 천천히 준비하게 됩니다. 그라스의 향수 제조업자의 제자가 되어 냉침법을 공부하면서요. 그리고 그곳으로 가던 중 보게 된 로라라는 아름다운 여성을 보았고, 그녀를 찾게 됩니다. 어렵진 않죠. 냄새를 따라가면 되니까요.

 

충분한 실험과 준비 끝에, 그는 사회에서는 범죄라고 부르는 행위를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냉침법으로 향기를 뽑아내려 했지만, 실패했고 기름을 먹여 향기를 빼내는 방법을 시도했고, 성공하게 되었죠.

 

그리고 그의 범행은 꾸준히 성공했습니다. 천재적인 후각을 가지고 있는 그르누이는 남들의 시선을 피할 수 있었고, 개와 같은 뛰어난 후각을 가진 동물에게도 감지되지 않는 최고의 자객이었죠.

 

앙투안 리시는 아주 뛰어난 인물이었고, 그르누이의 범죄를 추적했고, 그의 마수를 피해 도망가며 거의 성공할 뻔 하지만 결국 그르누이는 마침내 로라의 여관 침실에 침투해 그녀를 살해하고 로라의 향기를 훔치는 데 성공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13번째 전설 속 향기 역시 손에 넣었지요.

 

그리고 감옥 속에서 그르누이는 자신의 몸에 향수 한 방울을 묻힙니다. 그리고 자신의 사형집행장에 도착하죠. 그러나 뭔가 이상했습니다. 마치 고관대작을 다루는 것처럼 조심스럽고 예의를 다하는 이들과, 마차를 타고 온 그르누이는 자신의 데리러온 남자의 화려하고 멋진 푸른 옷을 입고 있었죠.

 

그런 뒤 집행장에서 서자 방금 전까지 집행 연습을 하며 환호를 받던 집행인이 향을 맡은 뒤 무릎을 꿇고, "이자는 결백하다."는 말을 외칩니다.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사람들 앞에서 그르누이는 손수건에 향수를 묻힌 뒤 휘두르자 사람들은 활홀 속에 빠지게 되고, "주교는 이 자는 사람이 아니다. 천사다!"(He's no man. He's an Angel!)이라 외칩니다.

 

그리고 향수를 휘두를 때마다 사람들은 쓰러지고 갈망하고 환호하죠. 그러다 손수건을 놓치자 사람들은 그르누이가 아닌, 향수에 팔을 뻗으며 그것을 가지기 위해 몸을 던져댔습니다. 그런 뒤 극단적 활홀경 속에서 그라스의 시민들은 갑자기 집단 난교를 시작하게 되죠.

 

그럼에도 로라의 아버지, 리시는 검을 빼들고 그르누이 앞에 서서 나는 속지 않는다 하였지만, 코앞에서 느껴지는 향수에 결국 검을 떨어뜨리고 흐느끼며 도리어 사죄하고는, 그를 아들로 칭합니다.

 

그 뒤, 본능적으로 자신이 태어난 어시장을 찾은 그는 자신의 머리 위에 자신이 만든 향수를 들이 붓습니다. 거리의 부랑자들은 그의 몸에서 나는 향기에 매혹되어 달려들어 살점 하나, 피 한방울 남기지 않고 그를 없애버립니다.

 

 

자, 먼저. 그르누이는 몸에 채취가 없습니다. 그러면서 평생을 향기를 갈망하고, 그것을 손에 넣기 위한 목적으로 살아갑니다. 천재적인 후각은 그를 특별하게 만들어줬지만, 그 재능을 추악한 범죄에 사용했죠.

 

그르누이는 탄생부터 운명적 파멸과 함께 했습니다. 자신을 태어나게 한, 그리고 살해하려한 어미를 죽게 만들었고, 그를 길러 준 유모 역시 그가 떠나자마자 죽었으며, 무두장 또한 그르누이를 팔아서 떠나게 끔 한 직후 죽었으며, 발디니 역시 그르누이가 떠난 그날 밤 붕괴된 건물에 깔려 죽었습니다.

 

이는 아주 의미심장한데, 그에겐 돌아갈 곳이 없었습니다. 즉, 고향이 없고 보금자리가 없습니다. 그때그때 자신이 머무는 곳은 있었지만 그 어떤 곳이 그르누이가 소유한 곳이 없었고, 집으로 삼을 만한 곳도 아니었습니다. 직업이 있었고 머무는 곳은 있었지만 언제든, 또 언젠가 떠날 곳이었죠. 그는 진실로 태어난 이후 그 어디에도 속한 적 없는 존재입니다. 가족, 직업, 사회 속에서 철저히 유리된 아웃사이더였습니다. 마치 없는 사람처럼요. 그가 채취를 가지지 못한 것처럼.

 

채취가 없다는 것은 자기만의 고유한 무언가가 없다는 것입니다. 향기와 냄새를 메인 텍스트로 삼는 영화답게 그것은 매혹적이거나 필수적인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장바티스트 그르누이는 그런 게 전혀 없죠. 태어날 때부터 채취 없이, 냄새 없이 태어났습니다. 모두가 가지고 있으니 오직 장바티스트 그르누이 단 혼자서만 없는 것.

 

그는 세상 모든 사물이라면 가지고 있는 것을 잃은 채 태어난, 냄새로 작성된 세계 속에서 유일하게 세상에 없는 사람입니다.

 

천채적인 후각은 그에게 감미롭고 황홀한 향기에 대한 갈망을 낳았고 그것에 대한 강력한 소유욕을 낳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냄새를 가지고 싶어 했고, 그걸 독점하고 싶어 했습니다. 영원히 타인의 향기를 가지고 싶어 했죠. 스스로의 손으로 저지른 첫 살인 당시 그는 죽어가는 여인의 시신에서 사라져가는 향기를 그러모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사라져가는 향기에 절망하고 말았죠.

 

그러한 갈망이 더 뛰어난 향수 제조법을 추구하게 만들었고, 그것을 실험하기 위해 윤리나 도덕 같은 것은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못했습니다. 그건 사회에 속해 있는 사람에게나 적용되는 것이지 그르누이는 사회에 속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가 직업을 가지고 누군가의 밑에서 일한다 하여 사회에 속한 게 아닙니다. 본질적으로 인간으로서의 고유한 것을 가지지 모했고, 단 한번도 자기만의 적을 둔 적도, 뿌리를 내린 적도 없으며, 돌아갈 곳도 없는 그는 사회 속 무적자(無迹子)이기 때문이죠.

 

그렇게 스스로 사회 속 사람이 아닌 그르누이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만들기 위해 어떤 짓이든 할 수 있었고, 해야만 했습니다. 그것이 그가 태어난 이유이니까요.

 

그는 은밀하고 비밀스럽게 사람을 죽이며 그녀들의 향을 훔쳐갑니다. 모두 아름다운 처녀들 뿐이었죠. 오직 그들에게서만 채취할 수 있는 향을 모았습니다. 그라스는 그르누이의 희생자들이 발견되며 공포와 공황으로 빠져들었습니다. 위태롭고 속도감 있는 연출이 일품으로, 위기감이 고조되는 것을 잘 연출했죠.

 

그리고 리시가 로라와 함께 도망간 이후의 주인공 역시 오직 냄새로만 추적했고, 은밀하게 로라의 침실에 침입하는데 성공합니다. 여기에서 개조차 그의 채취를 느끼지 못합니다. 또한 리시가 꿈을 꾸고 일어나며 로라의 안위를 확인하는 것으로 한번 관객의 긴장감을 희석시킵니다. 그런 뒤에 로라의 침실에 다시 한번 침입한 그르누이를 쳐다보는 로라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아침이 되고, 리시는 로라의 방문을 열고 안위를 확인합니다.

 

이때의 연출이 좀 유치하긴 한데, 07년도 영화임을 감안하면 넘어갈 수 있는데, 나체로 사망한 로라의 모습은 작중 내내 아름다움이 강조되는 것과 대비되는 비참한 모습으로 관객에게 충격을 주는 완급 조절이 이루어집니다. 그르누이는 피해자의 향을 훔치기 위해 머리카락마저 깍아냈는데, 로라의 아름다운 적발이 깍인 채 나체로 침대 위에 쓰러진 모습은 어떤 면에서는 예술적이었지만, 그 그림이 아름다웠다기 보단 그 대비가 강렬하게 다가왔습니다.

 

체포된 이후의 그르누이에게 리시가 다가와 강렬한 증오를 통보하지만 그르누이는 13번째 재료를 이용해 전설적인, 또는 악마적인 향수를 만들어냈고, 사형 집행 당일 그것을 단 한 방울 뿌림으로서 자신을 데리러온 자들을 자신에게 매혹시킵니다. 심지어 자신이 입고 있던 옷까지 내주면서요.

 

이 지점이 꽤 중요한데, 그는 자신이 입은 옷마저도 벗고 타인의 옷을 입었습니다. 이제 진정 그의 모습은 존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옷을 버리고 타인의 옷을 뒤집어 쓴 그는 그저 가죽을 뒤집어 쓴 그림자와 다를 게 없었죠. 자신의 향수를 몇 방울 써 현장을 황홀경의 광란으로 만들어버렸지만, 정작 그는 그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하고 관심 받지 못하는 자임을 알게 됐습니다.

 

향수를 묻힌 손수건을 놓쳤을 때, 사람들은 그에게 매혹된 게 아니고, 그에게 사랑과 관심을 보낸 게 아니었으며, 그를 갈망한 게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난교의 현장으로 변한 곳에서도 강렬한 증오로 칼을 빼든 채 다가오는 리시에게 저항 없이 몸을 열어주었으나 리시조차 그의 향에 매료되어 도리어 자신의 딸을 죽이고 빼앗은 범인에게 무릎 꿇고 사죄한 뒤, 그를 아들이라 칭합니다.

 

그러나 이미 그는 알고 있죠. 그가 사랑한 것은 자신이 아니라 자신의 몸에 남아 있는 향수의 잔향이라는 것을.

 

그렇게 그르누이는 이 세상에 자신이 있을 곳도, 뿌리 내릴 곳도, 자신을 자신 그대로 알아봐줄 곳이 없다는 걸 깨닫고 마치 본능처럼 자신이 태어난 곳으로 돌아갑니다. 그곳에서 머리에 모든 향수를 쏟고는 달려드는 사람들에게 찢겨 죽죠. 그야말로 그 어떤 것도 남기지 않은 채.

 

그저, 자신이 뒤집어 입은 타인의 옷가지만 남긴 채 이 세상에 단 한번도 존재한 적 없었던 것처럼요. 그가 남긴 족적은 있을지언정, 그 주인이 누구인지는 이 세상 누구도 모를 일이 되었습니다. 채취 없이 태어나 냄새를 남기지 못한 그가 세상에서 가장 향기로운 향을 입었으나 그것은 자신의 것이 아니었고, 사람들이 원한 것은, 사람들이 바라본 것은 자신이 아니라 그저 향기 뿐이었으니까요.

 

다시 한번, 장바티스트 그르누이는 뿌리를 내린 적 없고, 내릴 수 없는 파멸적인 운명을 타고 났습니다. 보금자리가 없고 적迹이 없죠. 그런 의미에서, 그는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태어난 것 같은 인상을 줍니다. 마치, 시대의 어느 순간 어떤 것을 단 한번 만들기 위한 목적으로 태어나 목적이 다 하면 사라지는 그런 도구적 존재로요.

 

그는 향수 산업이 태동하고 발전하던 시기에 태어나 어떠한 물건, 세계에서 가장 치명적이고 매혹적인 향수를 단 한번 만들어보기 위해, 우주에 그러한 것이 있었음을 단 한번만이라도 기록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에 불과한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그는 세상에 무언가를 남길 필요 없었고, 머물 곳이 있어서도 안 됐습니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천재적인 후각을 타고 났고, 그것에 순수해야만 했죠.

 

향기를 담기 위해 불순물인 자신의 냄새마저 있어서는 안 됐고, 돌아갈 곳도, 뿌리 내릴 곳도 있어선 안 됩니다. 그가 운명을 달성하기 위해선 어떤 위협과 위기가 있어도 반드시 이겨낼 수 있었고, 이런 면에서 영웅 서사와 유사한 흐름이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마침내 달성하고, 그것을 세상 앞에서 증명한 뒤에 그의 모든 쓸모가 다하고 나서 그는 마치 이 세상에 단 한번이라도 존재한 적 없는 것처럼 뼛조각, 피 한방울 남기지 않고 세상에서 사라지면서 끝나죠.

 

 

그러한 쓸모를 '신의 사역'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꽤 재밌는 점이 있습니다. 신의  사역하심으로 인해 죽어야할 자가 결코 죽지 않았고, 그를 학대하거나 착취하려던 악인들은 모두 벌을 받고 죽었습니다. 주인공인 그르누이에 의해 살해 당한 사람들은 있지만, 그가 직접 죽인 사람은 그의 모친을 포함해서 모두 여자였죠.

 

성경에서 롯은 신과 악마의 내기로 인해 가족과 가축을 잃고 고난을  겪어야 했죠. 이처럼 신의 사역에 무고한 주변인의 죽음은 억울한 게 아닌 제나름의 가치를 지닙니다. 물론 현대인의 관점과는 좀 거리가 있죠. 그렇기 때문에 사회 속에 속하지 않은 아웃사이더 그르누이의 살인은 인세의 관점으로 평가할 수 없게 됩니다.

 

또한 사형 집행 당일 사형 집행자는 그를 보고 결백하다(He's an inocent!)고 했고 추기경은 그를 보고 천사라고 합니다. 가장 비천하고 천시 되는, 사람의 목숨을 끊는 자가 결백을 증언했고, 신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 중 하나인 추기경이 직접 천사임을 선언합니다. 그르누이가 신의 사역을 받는 자이기 때문에, 인세의 법률에 구속받지 않으며, 신의 역할을 수행하는 선택된 도구라면 그는 결백한 것이 맞고 천사와 같은 신성한 권위를 지닌 존재로 해석될 수 있다는 거죠.

 

 

스토리를 벗어나서 바라보면, 주인공 역할을 맡은 벤 위쇼의 위태로운 연기는 상당히 좋았습니다. 조용하고 조심스러우나 악마적으로 과감하기까지 한 행동과 표정 연기는 그의 과묵한 모습과 함께 관객을 몰입시킵니다.

 

이제는 고인이 된 알란 릭맨의 엄격한 귀족적 모습의 연기 또한 무게의 한 축을 담당했고요.

 

그러나 향수라는 주제를 가지고 향기라는 매체를 중심으로 풀어가면서도 그것에 대한 시각적 연출은 매우 부족했다는 점에서 많이 아쉬운데, 원작을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향기, 혹은 맛과 같은 감각을 시각적으로 풀어내는 작품들이 꽤 있었고 연출에 따라 매우 강렬한 경험을 간접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영화는 서사적 측면을 강조했을 뿐 향기 그 자체에 대한 미학은 기억에 거의 남지 않습니다.

 

그저 후반부, 향기에 따른 반응이 너무 강력해서 의도적인 게 아닐까 싶은 점도 있고요. 도리어 주인공의 천재적인 후각을 강조하는 모습을 더 중점적으로 보여주는 경향을 보여줍니다. 의도적인 거라면 다소 아쉽지만 후반부의 클라이막스를 위해 연출을 아낀 거라고도 해석해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아쉬운 건 아쉬울 수밖에 없는 연출적 한계를 지닙니다.

 

원작에서는 향기에 대한 묘사가 매우 충실하고 풍부하다고 하는데, 원작을 아는 사람이라면 매우 아쉬울 수 있겠지만, 단순 영화만 감상하겠다면, 연출적 부분보다는 서사적 지점에 집중한다면 원작이 있다는 점을 감안해도 상당한 짜임새가 있는 영화로 재밌게 볼 수 있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살짝 높은 점수를 주기엔 다소 아쉽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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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리뷰는 작품에 대한 내용누설이 있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쓰는 리뷰네요. 그동안 본 작품들이야 많았지만 게으른 것도 있고, 쓸 정도는 아닌 작품들도 있고 해서 안 썼다, 최근 완결까지 본 바바리안 퀘스트는 좀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먼저, 이 소설의 초반부는 큰 흥미를 끌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모든 교과서적인 서사를 지닌 작품들의 초반부는 중후반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밋밋하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고요. 이는 심지어 무한의 마법사의 극초반부에 있어서 큰 흥미를 끌지 못하거나 심지어 작품 특유의 의도적인 불쾌감을 주는 부분 때문에 더더욱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부분을 지나간다면 작품은 독자를 끌고 갑니다. 주인공 유릭과 그 주변인들은 살아 있는 욕구와 감성을 가지고 움직이며, 그것은 상당한 설득력을 지니죠. 백수귀족 작가의 전작이었던 킬 더 드래곤에서처럼 담담하면서도 진한 인간미가 드러나는 필체는 상당히 매력적이기도 하고요.

 

 

주인공 유릭은 서부의 야만인입니다. 하지만 그 어떤 사람과도 달랐죠. 괴력을 타고난 강력하고 뛰어난 전사이자 사냥꾼이라는 점부터 시작해서 상당한 지성을 지닌, 타고난 영웅의 기재입니다. 그러나 그의 기질은 탐험가에 있지 전사에 있지 않았죠. 이 부분은 조금 엄밀하게 이야기해야 할텐데, 모든 뛰어난 탐험가는 뛰어난 전사적 기질을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전사는 적과 싸우는 존재이고, 적과 대적하여 이겨내는 자를 말합니다. 대개의 경우 전사라 함은 다른 전사, 병사, 집단 등 사람과 싸우는 자를 상정하지만, 탐험가에게 적이란 자기 앞을 가로막는 모든 장애물을 말합니다. 때로 그것은 칼과 창을 든 사람일 수도 있고, 귀족일 수도 있고, 제국이나 문명사회 그 자체일 수도 있으며, 심지어 동료와 친구, 은인, 자식이 될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미지의 자연 그 자체가 적이 되어야 하죠. 탐험가란 알지 못하는 새로운 곳을 알고자 하는 이들이며, 그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세계는 언제나 위협적인 무언가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그것에 겁먹지 않고 마땅히 한 발자국을 내딛을 수 있는 용기와, 그러한 미지의 존재와의 싸움에서 살아남고 이겨나가는 강인한 육체와 정신을 필요로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어떤 상처를 입어도 살아남고, 어떠한 적과 맞서도 이겨내며, 끝끝내 제국을 무너뜨리고 문명사회에 거대한 충격과 새로운 세계관을 이끌어낸 유릭은 세계관 최강의 전사이자, 그러한 기풍을 인간에게 돌리지 않고 죽을 때까지 자신이 알지 못하는 새로운 것, 미지의 장막 너머, 낯선 세계에 쏟으며 어린 시절에 그랬듯, 가슴이 뛸 줄 아는 사내입니다.

 

만약 그가 전사이기만 했다면 문명 사회는 끔찍한 꼴을 당했겠죠. 문명 사회를 크게 퇴보시키는 멸망의 존재가 될 것이고, 악마의 이름으로 전승이 될 것이며, 뛰어난 지성과 예술, 기술과 인격이 존재했던 아름다운 세상을 스스로의 손으로 멸하는 자가 되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죠. 그는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즐거워 했고, 타고난 호기심으로 모르는 것을 알고자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을 배우고, 또 글을 배우며 익히고 받아들였죠. 익히고 배우는 것. 지성인의 가장 기본적인 태도이자 가장 중요한 핵심. 유릭의 지성에 대해서는 작중 캐릭터들이 수 차례 놀라고 인정한 요소이죠.

 

그렇기 때문에 유릭은 문명인들이 이룩한 위업을 진심으로 경탄할 줄 알았습니다. 그저 빼앗고 부수고 약탈하기만을 즐겼던 그 어떤 서부의 야만인과는 다르게요. 그리고 그의 선택 덕에 문명은 자신이 이끌고온 서부의 약탈자들, 연맹에게 파괴 되었지만, 동시에 보호될 수 있었습니다.

 

예술에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는 자에게 모나리자나 최후의 만찬, 아테네 학당을 보여준다 해도 그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그저 땔감으로 쓰면 족할 화려한 장작일 뿐이죠. 하지만 그것을 보고 아름답다는 감각을 느끼고, 그 미학에 인간 예술의 거대한 위대함을 느낀다면 그것은 지고의 예술이 됩니다.

 

유릭은 그것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었지요. 제국 수도 하멜의 위대한 건축물과 예술에 진정 감탄할 줄 알았기에 하멜을 공격하면서도 약탈을 제약하고, 다시 적극적으로 재건하는 것은 민심이 아닌 자신의 욕구에 따르는 일이었습니다. 천 위에 얼룩진 색채에 의미는 담고, 감정의 움직임을 느끼는 사람에게 그것은 중요하고 소중한 무언가가 되기 마련이니까요. 설령 그것이 단순히 모래를 쌓아 만든 모래탑이라 할 지라도, 그것에 만족한다면 그것이 부숴지지 않고 훼손되지 않기를 바라는 것처럼.

 

그럼에도 그는 탐험가였고, 의도적으로 연맹을 약화시킨 후 사라졌습니다. 마치 이야기 속 영웅처럼. 전설처럼, 또 신화처럼.

 

탐험가. 모험가. 그것이 유릭의 정체성이었기에 자신의 생존이 어떠한 의미를 지닐 지 알면서도 그것을 감추며 남부를 여행하고, 또 다시 동부로 가게 됐습니다. 친우를 만날 겸, 자식도 보게 될지 몰라서, 무엇보다 바다 너머를 가기 위해. 동대륙이란 이름은 20년 전부터 그의 마음 속에 새겨진 미래의 계획, 혹은 추구였죠. 그에게 세상은 여전히 넓었고, 여전히 가슴 뛰는 모험이 존재한다는 것을 새겨준.

 

 

유릭은 금기는 범한 자입니다. 하늘산맥은 서부인에게 금기였죠. 감히 그것을 넘지 말라는 공통된 인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태생적인 탐험가인 유릭은 그 너머를 원했습니다. 비록 스스로의 의지만으로 했던 것은 아니지만 제국의 탐험가이자 기사에 의해 하늘산맥을 넘는 지점에서 유릭은 그들을 죽이고 바라봤습니다.

 

고향의 땅. 그리고 금기 너머 미지의 땅. 서부의 어떤 자라도, 심지어 지즐조차도 전통과 금기를 함부로 범할 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유릭은 과감히 그것을 넘어버렸죠. 호기심이라는 천성을 그가 하늘산맥이라는 금기를 아무렇지 않게 넘는 이유가 됩니다. 그에게 미지란 도전의 대상이지 두려움의 대상은 아니었으니까. 그가 가장 위대한 이유는 시작과 동시에 제시되죠. 절대와 같은 금기를 자신의 의지로 극복하는 것. 새로운 것에 대한 욕구를 제시하는 것. 더 나아가 그것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가에 대해서까지.

 

 

유릭의 주변 사람들도 생동감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기실 대부분의 캐릭터들이 그렇죠. 주인공의 동료들이 잘못되길 바라는 사람은 없겠지만, 이 작품에서 동료들이란 그저 잠시 함께 하는 자들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작품의 정체성 그 자체를 드러내는 서술이기 때문인데, 유릭이라는 주인공 자체가 이방인입니다. 서부의 야만인으로 금기로 여겨진 하늘 산맥을 넘고 문명 사회에 진입한 이방인이죠.

 

이방인은 그 이름이 바뀌지 않는 한 언제나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뿌리 내릴 수 없죠. 부평초처럼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듯, 그는 이런 저런 사람들을 만나고, 함께하며, 또 이별합니다. 유릭의 형제들과 지낸 시기는 결코 짧지 않을 테지만 그는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위해 기꺼이 형제들을 떠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에게 주어진 많은 것들, 작위나 땅. 부귀영화조차도 그가 원하는 게 아니었으니까요.

 

그것이 얼마나 삶을 풍요롭게 하고 안전하게 하며, 안락하게 할 수 있다 하여도 유릭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더 추구했기에 미련 없이 버릴 수 있었습니다. 자신이 얻은 것이되, 자신의 것이 아니었기에 미련을 가질 이유가 없었죠. 자기 자신에 순수한 자. 천성이죠.

 

탐험가는 언제나 새로운 곳을 보기 위해 떠나는 사람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더더욱 설득력을 얻습니다. 서부를 떠나고, 포를카나와 용병단을 떠나고, 제국을 떠나고, 북부를 떠나고, 다시 서부로 돌아와 제국을 멸망시켰음에도 다시 떠났죠. 그렇게 떠나고 또 떠나오는 삶은 힘겨울만도 하지만 오히려 즐거웠을 겁니다. 새로운 것을 보고 배우고 익히고 접하는 것에 즐거움을 느끼는 종류의 인간이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피붙이와 친우를 두고도 죽을 지 모르는 바다로 나갔습니다. 전혀 모르는 새로운 것. 동대륙을 향해서.

 

그는 진정 뿌리 내릴 수 없는 사람입니다. 태생이 그러했죠. 부모 없이 들판에서 주워진 아이. 부모라는 뿌리부터 없었습니다.

 

 

작품 내에선 여러 영웅적인 인물들이 나옵니다. 유릭을 제외하고도 바르카, 다미아, 얀키누스, 사미칸, 벨루아, 페르젠.

 

이 중에서 벨루아나 다이마는 조금 쳐진다 해도 나머지 인물들은 꽤 영웅적인 인물입니다. 그들의 성과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천성이 그러합니다. 바르카는 왕실에서 오냐오냐 하며 컸기 때문에 건방지고 우둔했지만 유릭과 만나고 필리온 경의 죽음을 겪으며 어린 모습을 버리게 되며 왕의 자질을 얻습니다.

 

사실 바르카는 꽤 비판을 받을만한 캐릭터이긴 합니다. 다미아와 함께 일단 넘어가고..

 

얀키누스는 황제로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러나 황제로 태어났기에 수많은 사람들의 당연한 기대를 받아야만 했죠. 나는 그걸 할 수 없는데 당연히 할 줄 알아야 했고,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할 수 있게 되어야 했습니다. 그건 단순히 노력을 하느냐와 다르게, 그냥 그렇게 해야 했기에 하게 되어야 하는 것에 가까웠을 겁니다.

 

모든 것은 상속 받은 채 태어났기에 부족함도, 모자람도 없는 세계의 지배자였으나 바로 그것이 얀키누스의 갈증을 만들었습니다. 내가 스스로 얻은 게 없다는 것. 모든 것이 상속 받은 것이지 내 손으로 이룬 것이 없다는 잔혹한 갈증. 그는 정복자의 핏줄을 타고났고, 정복할 것이 필요한 침략자의 자질과 그것을 다루는 통치자의 자질을 물려 받았습니다. 그의 정치력과 판단력은 부족한 편이 아닙니다. 오히려 뛰어난 편이죠.

 

그러나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그는 서부를, 그리고 동대륙을 정복하고자 했습니다. 단순히 교류를 하는 게 아니라 필요 없는 싸움을 벌이고, 무가치한 땅을 정복하며, 죽을 이유 없이 피를 흘리게끔 하며 자신의 위업을 만들어내고 싶어 했습니다. 모든 걸 다 가졌으나 업적에 목마른 자. 그게 얀키누스였죠.

 

그런 그를 역겹다고도 할 수 있고 멍청하다고도 할 수 있으며, 애처럼 군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게 그의 본질인 것은 어쩔 수 없죠. 탐험가에게 언제나 새로운 곳을 필요로 하듯, 정복자는 언제나 장복할 것을 필요로 했습니다. 유릭과 얀키누스는 이러한 면에서 비슷한 사람이었죠. 단지 탐험가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미지를 대하는 지, 아니면 정복자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미지를 대하는 지에 대한 태도 차이일 뿐입니다.

 

만약 유릭이 얀키누스로 태어났다면 그는 군사력이 아닌 탐험가를 동원하여, 어쩌면 스스로 탐험가가 되어 하늘산맥을 넘고 그곳에서 서부의 야만인들과 같은 방식으로 살며 그들의 삶을 이해하고 익히려 했을지 모를 일입니다. 얀키누스가 서부에서 태어났다면 사미칸의 이름을 대신 했을 것이고요.

 

그럼에도 그는 황제였습니다. 자신이 실패하고 모든 것이 영락하며, 가장 추잡하고 수치스러운 꼴을 당하고서도 생을 갈구하며 승자의 권리를 충실히 지켰죠. 승자로서 자신에 대한 생사여탈권은 물론, 어떻게 망가뜨리고 수치를 주고 조롱하는 것조차 패자가 살아 있을 때나 의미가 있으니까요. 그는 생존으로서 유릭의 권리를 지켜냈습니다. 계약을 중요시 하는 문명사회의 푸른 피다운 태도라면 태도였죠.

 

그렇다고 증오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실패는 자신에게 있지 승자에게 있지 않으니까요. 그들은 싸웠고, 생존의 문제에 있어 규칙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중요한 건 이기느냐 지느냐, 누가 이겼는가. 얀키누스는 패배자였고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였습니다. 그건 감정의 영역이 아니라 사실의 영역이었죠. 그렇기에 그는 최후의 식사에서도 유릭을 증오하거나 분노하지 않고 도리어 당당하게 식사를 하고 오랜만에 제대로된 식사였음이라 감사를 전합니다.

 

실패하였고, 인격적 결함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그는 실로 지배자였습니다.

 

 

페르젠은 재밌는 캐릭터입니다. 문명 사회를 대표하는 전사이자 기사인 동시에, 전설 그 자체가 된 사람입니다. 평생을 루의 품에서 살아왔음에도, 스스로 전사였기에 전사를 좋아하지 않는 루의 품을 떠나 자신이 무수히 죽이고 정복했던 북부의 울가로를 믿었습니다. 유릭과 비슷한 면이 있죠. 단지 기사적인 인물이었을 뿐.

 

뛰어난 통찰력, 늙었지만 날카로운 검술과 실전적인 수법들. 살아온 세월만큼 그의 인생에 새겨진 것들은 모두 그의 무기이자 명성이었습니다. 그러나 루는 전사를 좋아하지 않고, 그는 오래 사는 것으로 형벌을 받고 있었죠. 이미 죽어야 할 나이였음에도 그저 늙고 병들고 기량이 쇠해지면서 전사로서도, 기사로서도 추락해가는 삶을 사는 것으로요.

 

그는 마지막 전장에서 전사로서 죽고 싶어했지만 그의 위치가 감히 그러지 못하게끔 했습니다. 그와 싸워서 이길 적도 없었고, 하찮은 화살에 맞아 죽기에 그는 너무 거물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을 죽일 사람을 골라야 했죠. 인정 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하면서도, 자신을 죽이는데 거리낌이 없어야 하며, 무엇보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법한 사람.

 

유릭이었습니다. 북부에서의 많은 경험을 가진 페르젠은 자연스럽게 유릭이 북부 출신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챕니다. 남부의 인종과도 다르다면 남는 건 서부일 수밖에 없죠. 그리고 페르젠은 과감히 그가 서부 출신일 것이라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음을 유릭에게 넌지시 알리며 죽이기 위한 이유를 만들어주죠.

 

그리고 싸웁니다. 당연히 늙고 쇠한 페르젠은 유릭을 감히 감당할 수 없고, 죽게 됩니다. 그의 유언은 울가로여..

 

유릭은 크게 놀랍니다. 평생을 북부와 싸워온 기사이자 영웅이 정작 루가 아닌 울가로를 믿었다고요. 하늘 산맥을 넘어 조상의 영혼이, 자신의 영혼이 어디로 가야 하는가에 대한 번뇌를 가진 유릭은 그때 페르젠의 개종 사실을 알게 되고 루에게 의탁한 자신의 영혼을 되돌려 받습니다. 그저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그 두려움에 믿었던 루였고, 그것은 나약한 도피에 불과했으니까요.

 

울가로의 환영은 단지 그러한 번뇌의 발로였을 뿐..

 

 

사미칸과 벨루아는 서부의 영웅이라 칭해도 부족함 없는 사람입니다. 물론 벨루아가 조금 쳐지죠. 여성이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지만 애초에 기질 자체가 지배자나 통치자가 아닌 대장장이에 가깝습니다. 유릭과 얀키누스, 페르젠, 사미칸과 벨루아는 비슷한 특성을 가지고 있지만 공유하는 교집합과 서로 다른 곳에 방점이 찍혀 있죠.

 

사미칸은 타고난 정치가였습니다. 통치자라고 하기엔 조금 부족하지만 그의 정치력은 타고난 영역에 가깝고, 수많은 사람과 부족들을 파악하고 조율하는데 능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누군가를 견제하고 밀어낼 수 있고, 자신의 품에 담을 수 있는지. 한번도 거대한 체계를 이룩한 적 없는 서부에서 구전으로만 남는 역사를 지니는 지역의 출신이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운 역량이었죠.

 

하지만 바로 그런 정치가로서의 기질이 그를 실패하게끔 만들었습니다. 그 역시 약한 자는 아니었지만 유릭이었다면 죽지 않을만한 상처와 싸움 속에서 그는 상처 입고 약해졌으며, 무엇보다 거대한 욕심이 그를 죽게 만들었죠. 모든 정치인들이 그렇듯이 그 역시 자신만의 업적, 성과를 위해 타인의 목숨을 희생시킬 줄 알았습니다.

 

그는 전설이 되고 싶어했고 그것을 위해 승산 없는, 혹은 도박에 가까운 공격을 실행하려 했습니다. 유릭은 언제나 부족과 동포만을 생각했고, 그 이상으로 권력이나 지배자를 원하지 않았으며, 탐험과 모험에 더 타오르는 남자였음에도 사미칸은 단지 그가 그럴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견제했죠. 형제의 맹세를 했음에도 그는 유릭을 형제로 대하지 않았습니다. 정치인에게 쇼맨쉽을 중요하고 말은 어디까지나 말 뿐이었으니까요.

 

만약 그가 유릭을 죽여도 됐다면 죽였을 겁니다. 그러기에 너무 아까웠을 뿐이지. 그럴 수 없었기에 죽이지 못했을 따름입니다.

 

스스로 병 들어 죽기 전에 제국을 친다는 도박을 할 때에도, 유릭과 정당하게 싸우는 대신 그에게 치사량에 가까운 독을 쓰고 유릭이 자신을 먼저 공격하지 못해도 자신은 그럴 수 있다는 걸 알았죠. 그의 정치적 역량과 사고의 유연성은 확실히 여느 문명인 귀족, 왕족과 비교해서도 부족함은 없었다고 평가합니다. 단지 그 정치적 기질, 집단의 생존과 번영보다 자신의 명예와 영광, 업적을 탐하는 자세 역시 부족함이 없었을 뿐이죠.

 

그가 더 오래 살았다면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었겠지만, 단일화되지 못한 권위(유릭-사미칸)으로 꾸준한 분열과 갈등이 있었을 것이고, 만약 정말 하멜을 치겠다고 했다면 그건 성공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컸습니다. 장창부대는 중기병에게 상당한 피해를 강요하는 새로운 전술이었지만 그럼에도 수적 차이와 전략 전술의 격차, 강력한 성벽을 지닌 공성전이라는 열세를 넘기는 어렵죠.

 

그래서 사미칸 본인부터가 하멜을 정복한다가 아니라, 제국의 심장을 친 야만인이라는 명성을 상상했던 것이고요. 이는 모든 동포를 위해 다시 하늘산맥을 넘고, 전쟁을 준비했으며, 가장 중요한 순간들을 이끌었던 유릭의 방향성과 차이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동포를 위해 하는 짓인데 그 동포들을 다 죽여버릴 셈이냐며.

 

 

구조적으로 봤을 때 사미칸과 벨루아의 역할은 명확합니다. 처음 서부를 통합할 때는 3강 구도를 만들어 바위도끼 부족과 푸른안개 부족의 충돌을 방지하는 세력 구도를 만들고, 이후엔 벨루아의 약점인 여성이라는 점을 강조하여 사미칸과 유릭의 1:1:0.5의 구도를 만들었습니다. 여기서 벨루아는 자신의 주도권을 잃는 상황에 몰아넣어 그것을 타개할만한 계책을 발휘해야 했고, 처음에는 유릭에게, 그 이후에는 사미칸에게 붙었습니다.

 

결혼 동맹을 통해서요. 이건 단지 작품적으로 필요하기 때문 어거지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럴 수밖에 없게끔 상황을 이끌어간 겁니다. 자연스럽고 당연하게요. 작품적 필요로 이러한 캐릭터를 만들고 구도를 만들었지만, 캐릭터의 필요와 합치되게끔 하여 설득력을 확보한 셈입니다. 뛰어난 작가는 이러한 서술이 아주 매끄럽고 자연스럽죠.

 

반면 사미칸은 유릭과의 경쟁 구도에서 반드시 탈락할 수밖에 없는 작품적 운명을 부여 받았으나 벨루아는 살짝 밀려 있었고, 임신을 이유로 중간에 이탈하게 되면서 끝까지 남을 수 있었습니다. 작품적으로는 벨루아를 이탈시켜 양강의 구도를 강화 및 집중시킬 수 있고 더 단순하게 만들어 필요 이상의 복잡함을 덜어낼 수도 있었죠. 여성이라는 특징을 적절할 때 적절하게 사용한 셈입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바르카와 다미아, 그리고 얀키누스를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개인적으로 바르카는 좋아할 수가 없는 캐릭터인데, 저는 단순히 운이 좋아서 횡재하는 캐릭터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그건 주인공이라 해도 마찬가지고요. 단순한 운으로 죽을 뻔 했는데 살아났다 같은 게 아니라 단순 운으로 운명이 바뀔 정도로 거대한 무언가를 손에 넣는다는 걸 싫어합니다.

 

바르카와 유릭의 만남은 있을 수 있는 만남이지만, 그 결과 여러모로 모자랐던 바르카가 왕으로 각성하는 것은 어떤 면에선 다소 어색한 면이 있습니다. 물론 어색하다는 게 개인적인 감상일 뿐이지 작품적으로 용인이 가능하고, 그러한 과정이나 특성을 지니는 캐릭터들이야 수많은 작품에 엄청나게 많죠.

 

다만 그건 다미아라는 캐릭터가 없었다면 더 그랬을 겁니다. 바르카(파헬)의 성공은 단순히 유릭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겁니다. 그 스스로의 능력만으로는 거의 한 게 없죠.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건 어느 정도 철이 들고난 뒤에나 가능했던 거고 그 이전까지 파헬은 너무나도 한심한 애송이였습니다. 필리온이 사후세계를 포기 하면서까지 그를 지키려 했던 충성 덕분에 가능했다는 게 더 말이 될 거고요.

 

주인공과 만나서 그의 보호를 받았기 때문에 왕까지 될 수 있었다는 건 그 본인에게 있어서 글자 그대로 운으로 왕이 된 것과 다름이 없다고 봅니다. 그가 숙부와의 싸움에서 어떤 모습을 보여줬고 승리 후 그를 어떻게 추락시켰는지는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건 그냥 뛰어난 왕의 재목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였을 뿐이지 사실 그런 거 없이 여전히 애송이라도 왕은 될 수 있었습니다. 유릭이 이겼으니까요.

 

단지 여전히 애송이였다면 룽겔 공작의 견제를 감히 버텨내지 못했을 거고 그 이전에 다미아에게 살해 되었을 것 뿐이죠.

 

바로 이 지점에서 전 다미아에게 더 마음이 끌렸습니다. 다미아나 얀키누스나 비슷하게 말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다미아는 단지 여자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할 수 있음에도 가지지 못하는 게 있으며, 지금 상태에 만족하는 대신, 가질 수 있는 것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게 뭐냐 문제냐는 태도를 지닌 캐릭터입니다.

 

얀키누스는 모든 것을 가졌지만 그것은 상속받은 것일 뿐, 스스로의 손으로 얻은 건 아무 것도 없기에 자신의 것으로 얻을 수 있는 업적을 갈구하고자 하는 캐릭터였고요.

 

저는 이들의 욕구를 긍정합니다. 제가 현대인이기 때문에 그러한 감성을 버릴 수 없는 것도 있겠지만 안분지족 대신 더 나은 상태를 추구하는 향상심을 부정하는 건 바람직하지 못한 것도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왜 가진 것에 만족하지 않았느냐고 바르카는 자신의 누이에게 말합니다. 하지만 그건 자기 자신에게도 할 수 있는 말이죠. 왜 하멜에서 망명한 손님 대우를 받으며 안락하게 살지 않고 사람이 죽고 혼란에 빠질 수 있는 내전을 벌였느냐고.

 

왕위가 애초에 자신의 것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왕위를 빼앗길 당시 자신이 왕의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었느냐고 되돌아 봤을 때, 오히려 왕의 자격은 숙부에 더 가까웠을 겁니다.

 

다미아는 단지 여성으로 태어났을 뿐, 모두가 그녀에게 남자 였다면 뛰어난 왕이 되었을 것이라 평했습니다. 많은 것을 보고 읽었고, 익혔기에 대단히 뛰어난 지성을 갖추고 있었고, 결코 꺽이지 않는 정신과 강자의 기질을 타고났으며, 잃거나 희생하는 것에 나약해지지도 않습니다.

 

단지 여성이기 때문에, 남자가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그저 어느 남자의 소유가 되는 것과 비교하기에 그녀는 지나치게 뛰어납니다. 왕이 되어서 이상할 것도, 모자랄 것도 없을 정도로요. 벨루아는 여성임에도 부족장의 자리를 거머쥐었지만 여성이기 때문에 연맹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었습니다. 그곳이 야만적인 곳이었기에 가능했지만, 그렇기 때문에 직접적인 한계가 있었죠.

 

하지만 다미아는 문명인입니다. 왕위는 힘이 세거나 특정 기술이 뛰어나다고 인정 받는 게 아니죠. 숙부가 죽고 바르카가 죽는다면 남은 건 다미아가 최적격자입니다. 또한 다미아의 뛰어난 정치력과 지성, 음모를 꾸미는 솜씨를 고려한다면 몇년 안에 왕권을 확보하고 강력하게 만들었을 지도 모를 일이죠. 그리고 그 모든 것은 결국 자신의 능력을 기반으로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르카는? 자신의 생존조차도 자신의 기사인 필리온이 개고생을 하면서, 그리고 유릭과 형제들을 끌어들이면서 가능했고, 제국까지 갔을 때조차 얀키누스는 거의 가벼운 마음으로 그에게 병력을 빌려 줬습니다. 페르젠은 자신의 욕구와 일치하기에 같이 갔던 거였고요. 결과적으로 그는 스스로 얻은 게 없습니다. 남에게 기댔거나, 빌린 것 뿐이죠.

 

전쟁조차 페르젠이 이끄는 병력으로 세력 하나를 평정했고, 유릭과 페르젠, 제국 중장보병으로 승리를 거머쥔 것이며, 다미아를 빼돌리고 성문을 열어 젖힌 것도 유릭입니다. 그 스스로 한 것은 말 몇마디에 불과할 정도죠. 그 몇 마디가 중요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평가하진 못하겠습니다. 얀키누스에게 병력을 빌려온 것은 분명 중요한 일이지만 그게 그토록 어려운 일이었느냐 하면 꼭 그렇게까진 아닌 거 같고, 그마저도 동대륙 떡밥은 유릭에게 받은 거죠.

 

그런 의미에서 바르카는 왕위를 얻을 자격이 없었습니다. 다미아가 더 어울렸죠. 그가 왕이 된 것은 순전히 운에 가까웠고, 그 이후 각성한 그가 훌륭한 왕이자 정치력을 가지는 것은 어디까지나 내전에서 승리하고 난 이후, 혹은 직전이었으니 스스로 얻은 게 아닌 남의 힘으로 얻고 그걸 잘 유지시킨 것에 불과합니다. 그가 가진 자격이란 그저 선왕의 적자라는 것 하나 뿐이죠. 왕조 사회에서 그건 아주 중요한 명분이지만, 인간적으로 바르카는 자격 미달의 인간이었습니다. 운이 좋았을 뿐이지.

 

그렇기 때문에 바르카를 좋아하기가 어렵습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 남의 힘으로 얻은 것 왕좌에 올라섰고, 제국의 후원 덕분에 보호 받고 성장할 수 있었으면서 제국을 치는데 앞장서며 가장 많은 것을 얻었죠. 그것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왕이란 그래야 하고 정치라는 게 그러하니까요. 하지만 카르니우스와의 전투나 하멜 침공에 있어서도 서부의 야만인만큼의 성과를 냈고 그만한 희생을 했느냐 하면.. 바르카와 포를카나는 흘린 피와 자격에 비해 너무 많은 걸 얻었습니다.

 

결국 모든 건 유릭 덕분에 얻은 것이었을 뿐이죠. 자격에 있어서 부적격이라는 겁니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개인의 평가일 뿐이고, 자격이 있고 없고에 따라 삼키고 뱉는 게 정해진 세상이 아니니 그저 운으로 주운 금화가 훗날 황제로 만들어 주었다 해서 이상할 건 없습니다. 그냥 꼬울 뿐이죠.

 

다미아가 아쉬운 점이 바로 그겁니다. 그녀는 아버지인 왕을 죽였고, 숙부를 충동질했으며, 동생인 바르카를 죽이려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여왕이 되려고 했죠. 그게 잔혹하고 비인간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 또한 능력이라면 능력이고,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일이었습니다. 실로 성공할 뻔 했죠. 유릭의 존재가 아니었다면.

 

다시 말하지만 전 다미아의 욕구를 긍정합니다. 그 방식이 잔혹하고 비인간적이라 실패하면 벌 받을 수 있다는 건 인정하지만, 그녀를 얀키누스에 보내 성노예로 살게끔 하는 건 오히려 지나쳤다고 봅니다. 대가로서는 손색은 없죠. 조금 지나쳤을 뿐. 죽음은 그냥 죽음입니다. 다미아는 그냥 죽을 수도 있었죠. 실제로 자결하려고 했고요. 실패했을 뿐. 그런 그녀는 단지 자신의 한계를 넘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얻을 수 있는 것을 얻고자 벌인 일의 대가 치고는 좀 지나쳤다고 봅니다.

 

여자가 누군가의 좆집이 되는 게 불쾌하다기보단 그녀를 얻는 자에 대한 거부감과 불쾌감이 더 컸을 수도 있지만, 그걸 감안해도 다미아의 목적은 정당하다고 보며, 귀족 사회에서 암살과 음모는 흔한 일이니 그게 비인간적이라 하더라도 바르카와 포를카나가 제국을 배신하고 하멜을 공격한 것과 비교해서 대단찮은 일인가 싶습니다. 하멜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고 강간 당하고 약탈 당하고 고문 당했죠? 하멜까지 가고 봉쇄를 진행하던 그 과정에서는? 그 이전에는?

 

다미아의 욕구는 정당했으되, 그저 유릭이라는 주인공 때문에 실패한 거고, 실패한 거 치고는 비참한 대가를 치뤘습니다. 음모의 이유가 별 거 아니었다면 어떻게 되든 상관 없었겠지만 너무 정당하다 느낀 게 문제였죠. 다만 그게 작품적 비판점이라고 생각지는 않고, 캐릭터에 대한 비평일 뿐입니다.

 

 

마지막으로 세계관에 대한 이야기를 짤막하게 하겠습니다. 작품적 세계관이 아니라, 세계관의 충돌에 관해서요.

 

서부는 중앙와 연고가 없었고, 황제 얀키누스의 욕망에 의해 개척됩니다. 유릭은 그 욕망에 의해 산맥을 넘을 계기를 얻었고, 자신의 천성에 따라 금기를 범하고 새로운 세계로 진입합니다. 세계관의 확장이지요. 그리고 훗날 서부에 군대를 보내고, 연맹군이 도로 넘어오며 두 세계관은 충돌하게 됩니다.

 

이는 단순히 북부와의 전쟁에서 제국이 어떤 피해를 입었느냐와 달랐습니다. 그들이 패배했으니까요. 제국의 중심까지 침탈 당하고 숱한 문명인과 문명국, 지역이 피해를 입고 정복이 되었습니다. 이제 어쩔 수 없이 그들은 같이 할 수밖에 없게 되었죠. 그렇게 귀족 사회에서도 야만인 출신이 연회에 나타나고, 거래하고, 작위와 땅을 주는 경우도 생겼습니다.

 

이 세계관의 충돌은 언제나 거대한 변화를 야기합니다. 그 변화는 강제적인 게 아니고 자연스러운 것이며, 그 과정에서 우리는 적절한 균형점을 찾아가기 마련이고요. 물론 그 과정에서 피가 흐를 수도 있고, 비극이 생길 수도 있으며, 누군가가 무엇은 얻는 만큼, 누군가는 모든 것을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변화라는 건 언제나 좋은 것만을 이끌어내는 게 아니니까요. 하지만 일단 발생하면 막을 수 없습니다. 그 상황에서 어떻게 헤야 하느냐가 아니라,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일 뿐입니다. 모든 것이 새로운 세계를 보고도 당당하게 그것을 탐구하며 익히고 배워 탐험했던 유릭처럼 스스로 미지를 향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지 않아도 충분할 겁니다. 그들 문명인이, 그리고 서부인이 결국 세계관의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처럼요.

 

 

백수귀족 작가의 작품 중 두번째로 본 작품입니다. 애초에 킬 더 드래곤을 재밌게 본 입장에서 이번 작품은 하나의 보증이 있었죠. 백수귀족이라는 넉자로요. 강력한 힘을 지닌 주인공이 견인하는 작품이었기도 했지만 너무 자연스러운 전개와 훌륭하게 사용한 열린 결말까지.

 

누구에게든 무난하게 추천할 수 있을만한 수작입니다. 밀도 있는 작품이었고 재밌는 작품이며, 중간 중간 작가의 통찰이 보이는 문장들 역시 볼만한 부분들이기도 했습니다. 으레 나올 수 있는 억지나 캐릭터성의 붕괴, 모순이나 설정붕괴 같은 것도 없었고 모든 캐릭터들이 선역이거나 악역으로 이분화된 것도 아니며, 개인이 가질 수 있는 당연한 욕구와 추구, 입장이 잘 드러나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앞서 말했듯이, 작품의 전개를 위해 필요한 사건이나 캐릭터의 입장, 이유를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작품의 흐름에 맞게 캐릭터의 입장과 욕구, 추구를 합치시키는 데 있어서 아주 능숙하고 그건 실력 있는 작가일수록 자연스럽게 다루는 방식이죠. 그만큼 백수귀족 작가의 필력은 상당히 뛰어나다는 거고 어떤 작품이든 무난하게 볼 수 있는 수작급은 될 거라는 기대를 줍니다. 아마 그 기대를 쉽게 배신할 거 같지는 않네요.

 

또 몇가지 요소를 짚어보자면, 작품 내에서 영혼, 신, 사후세계에 관한 이야기들이 나오고 이것은 곁다리처럼 지나가는 것처럼 보여도 실은 작품 시작부터 끝까지 함께하는 줄기가 됩니다. 마치 현실에서의 우리네 삶과 종교적, 혹은 내세적 세계가 이분화되어 존재하는 것처럼 현실적인 전개 속에서 사후세계와 영혼은 어디로 가는가, 누구의 품으로 가는가에 대한 논의는 꾸준히 이끌어가집니다.

 

유릭이 하늘산맥을 넘고 선조들의 영혼이 하늘산맥 너머 영혼의 세계로 간다는 말을 믿었는데, 똑같이 사람이 사는 세상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번뇌하는 순간들이 나옵니다. 그러한 두려움과 불안감에서 그는 검은 그림자 환상을 보게 되기도 하고, 루를 믿기도 하죠. 그러다 자신의 정체성이 사랑과 자비가 아닌 전사적 기풍에 있다는 것을 재확인하고서는 루의 펜던트를 버립니다.

 

그리고 울가로 쪽에 관심을 가지게 되죠. 스벤과 함께 하는 여정에서 스벤의 실수와 실패를 보기도 하고 결국 그는 아주 오랫동안 무엇을 믿어야 할지,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라는 질문 속에서 정신적 방황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결국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새로운 질문 속에서 번개를 맞고도 살아 남은 그는 자신의 의지만을 확신하게 되며 모든 신성을 거부하게 되죠.

 

이제 자신이 죽어 영혼이 어디로 가느냐보다 내가 살아서 무엇을 하느냐가 더 중요한 세계관을 형성한 것입니다. 그게 단지 유릭이라는 개인 단 한 사람의 것이라고 해도. 고트발은 꾸준히 그를 루의 품으로 돌려 놓고 싶어 했으나, 늑대는 매어둘 수 없는 것처럼 탐험가는 어딘가에 뿌리 내리는 사람이 아니죠. 설령 그가 서부인이고 서부의 야만인으로 살았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 해도요.

 

그가 진정 위대한 이유는 자신의 의지로 선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금기와 신에 의해 제약 받는 뭇 사람들과는 다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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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리뷰는 작품에 대한 내용누설이 있습니다. 

오랜만에 쓰는 리뷰네요. 그동안 본 드라마, 영화, 소설, 웹툰 등은 다양하지만 귀찮아서 안 쓰고 있다가 어쩐지 짧게나마 쓰자는 마음이 들어서 쓰게 되었습니다.

 

 

뭐.. 사실 그렇게 길게 쓸 생각은 없습니다. 이번 작품이 그만한 가치나 작품성이 있는 건 아니거든요. 그냥 오랜만에 쓴 글이니만큼 가볍게 다루려고 합니다.

 

먼저 내용 자체는 굉장히 평이합니다. 유치하다고 해도 될 만큼 클리셰적인 전개로 나아가죠. 친구이자 황제에게 배신 -> 회귀 -> 깽판.

 

대충 이 루트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물론 몇가지 차별점을 두려는 부분들도 있고 그게 전개의 핵심으로 작동하기는 하지만, 그런 거야 뭐 양판소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거기 때문에 특별히 주목할만한 건 아닙니다. 그냥 이런 내용도 있다 정도.

 

주인공의 성격도 그다지 특출나거나 개성있는 캐릭터성은 아닙니다. 그냥 가진 힘만큼 고고한 편이죠. 이 역시 다른 곳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거고요. 특히 근 몇년 동안은 이런 성격의 캐릭터를 선호하는 경향성이 있습니다. 열혈까진 아니더라도 좆도 아닌 걸로 나대고 감정 드러내면서 속내를 뻔히 보여주는 캐릭터보다는 좀 더 진중하거나 그런 '척'을 하는 캐릭터를 선호하죠.

 

혼자서 차원이 다른 세계에서 굽어보는듯한, 왠만한 일로는 흔들리지 않고 냉철하고 준비된 것처럼 곧바로 처리해버리며 우월감에 도취될 수 있는 그런 캐릭터 말입니다. 어떻게 보면 좀 유치하긴 합니다만, 정말 잘 만들어진 캐릭터는 반해버릴 수밖에 없는 매력이 있는 캐릭터성이죠. 이 작품에선 그 정도까진 아닙니다. 그냥 평범해요. 있어보이려고 하는 건 좀 심한 편인데, 그다지 있어 보이진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을 다루는 이유는 굉장히 눈에 거슬리는 서술 방식 때문인데,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대사 처리 부분입니다. 이 대사 처리 부분이 그냥 한마디로 말해서 개병신같아요. 한두 번 정도 쓰는 거라면 괜찮은 대사 연출이었을 겁니다.

 

근데 이 작품 주인공은 말을 할 때마다 똑같은 방식으로 대사가 처리되거든요. 이게 계속 반복되니까 캐릭터는 애자 같아보입니다. 작가는 글을 못 써보인다는 수준으로요. 안 그래도 양판소인데 허세뽕 차서 요상한 작법으로 대사를 처리하고 있으니 볼 때마다 거슬립니다.

 

그 방식이 뭐냐면, 대충 이런 겁니다.

 

"그러니까.."

 

그는 이 작품 작가의 대사 처리에 대해 설명하려고 했다. 그 방식이 나쁜 것만은 아니지만 중요한 시점에서 임팩트를 주기 위한 강조 목적으로 써야 하는 방식을 입을 열 때마다 반복하고 있으니 주인공이 멋있어 보이거나 무게감이 있어 보이기보단.

 

"대사 처리를.."

 

말 한마디도 제대로 끝내지 못하는 병신 애자새끼처럼 보이게 된다는 것이다. 작가가 작품의 흐름에 어떤 생각과 호흡을 가지고 쓰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작품의 큰 스토리 흐름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정해지긴 했지만 그것 써가는 것은 웹소설 특유의 짧은 호흡에 전체 작품의 기승전결을 요약해서 담아내려고 하는 방식을 좀 과하게 쓴다는 것이다.

 

가급적 결 부분을 보여주지 않고 다음 화로 넘기거나, 절반 정도로 보여줘 독자의 다음화 욕구를 자극하는 방식도 있지만, 마찬가지로 어떠한 충격, 임팩트를 줄만한 대사 처리나 상황 설명으로 끝을 내는 경우가 있다. 이 경우 후자의 경우에 가까운데, 문제는 그다지 임팩트를 주진 못한다는 것이다. 그저 겉멋이라는 유치한 정서로 설명이 가능하다.

 

"이따위로 한다는 거지."

 

따라서 한 문장, 길어봐야 두 문장에 불과한 캐릭터의 한 마디, 두 마디를 2, 3개로 쪼개면서 그 사이사이 한두 문장으로 상황이나 심리 묘사를 넣으면서 대사를 처리한다는 것이다. 말했듯, 적절한 순간에 쓴다면 효과적인 연출이지만 아무 때마 마구잡이로 쓰면 무게감은 줄어들고 힘을 줘야할 부분과 아닌 부분이 분간되지 않으며 캐릭터성 또한 제한되는 역효과만 발생한다.

 

심지어 독자로 하여금 무슨 글, 대사를 이따위로 써먹냐는 비판이 나올 것도 감당해야 한다. 지금처럼.

 

 

...이렇듯 대사 처리가 굉장히 유치하고 겉멋만 들었습니다. 꼴랑 한마디 하는데 무슨 잡스러운 설명이 한 문장, 두 문장 수준으로 나오면 당연히 지치게 되죠. 웹소설이 매일 나오긴 하더라도 어느 정도 쌓인 채로 읽게되면 여러 화를 연속으로 읽게 됩니다. 쓰는 사람이 읽는 사람의 흐름을 생각 안 하고 쓴 겁니다. 그냥 자기가 쓰는 흐름만 생각하고 쓴 거죠.

 

무엇보다 이런 식으로 대사 처리를 하게 되면 안 좋은 문제가 발생하는데, 아무리 글을 정독하면서 성실히 읽는 사람이라도 이런 대사 처리가 계속 반복되면 결국 깨닫는 게 있습니다.

 

대사와 대사 사이의 설명 문장을 넘기고 대사만 읽으면서 넘기거나, 대사는 넘기고 대사 사이의 설명 문장만 읽으면서 넘기는 겁니다.

 

결국 작가의 글 낭비가 되어버리는 거고, 어느 쪽이 되었든 주인공 등 캐릭터의 심리나 드러나는 표면적 사유를 독자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합니다. 사실, 그런 게 굳이 필요 없을 정도의 양판소인 것도 사실이긴 한데, 작품이라는 측면에서 작가는 아쉬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는 거죠.

 

뭐, 돈만 벌면 된다고 생각한다면 상관이야 없겠지만 내용적으로는 좋지 않습니다.

 

 

분량으로 따지면 절반 정도 봤는데, 전체적으로 주인공의 대사 처리로 대표되는 작가의 겉멋든 대사 처리가 너무나도 거슬립니다. 다른 캐릭터들은 그닥 안 그러는데 유독 주인공 대사에만 힘을 넣겠다고 저런 대사 처리를 하는데, 보기 불편할 정도더군요. 주인공이 병신 애자새끼마냥 말 한마디를 제대로 못하고 2개, 3개씩 쪼개서 말하는데 그게 병신이죠. 누군가에겐 그렇게 보인다는 겁니다.

 

 

이외에 내용적으로 크게 지적할만한 건 아니지만, 드래곤들이 주인공 이안을 너무 쉽게 믿는다는 부분도 있는데, 드래곤들은 아버지인 프란을 겪었고 수천년, 혹은 그 이상 봉인해오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새로 태어난 녀석들이 있다지만 드래곤들의 수장이 이안을 그리 쉽게 믿는다는 건 개연성이 부족합니다.

 

그러니 이 부분에 좀 더 힘을 싣고 상호간의 믿음을 주거나, 혹은 최소한 힘을 기반으로 나까지 적으로 돌리면 개판날 거 각오하라는 등 아슬아슬하게 뒤통수를 못치게 하며 아비와의 전투 때 크고 작은 희생과 도움을 줘야 합니다. 거의 대마왕과 싸우면서 의심하던 둘에게 전우애가 싹틀 정도로 치열하게 묘사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게 아니라 프란의 사상이 가장 큰 문제이긴 하지만 그만큼 그런 사상을 실현할 수 있는 힘을 가진 프란과 거의 맞먹는 힘을 가진 게 이안이기 때문인데, 무슨 말을 하고 어떤 사유와 명분을 가져오든 자기보다 강한 누군가의 존재는 필연적으로 두려움을 가져옵니다. 두려움은 불편함이죠.

 

물론 존중은 두려움에서 나오고, 힘이 없으면 드래곤에게 휘둘리거나 지금까지 쌓아온 빌드업이 다 부숴지는 걸 막을 수도 없다는 것도 사실이지만 믿음의 관점에서 힘이 강하기 때문에 믿을 수밖에 없는 것과 신뢰를 기반으로 믿음을 주는 건 완전히 다른 맥락입니다.

 

그러니 프란과의 전투 직전에 이번만큼은 전적으로 믿어보겠다가 아니라, 서로 앞둔 게 있으니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든 일단 미뤄두고 이 전투에서만큼은 전우로 대하겠다고 해야 합니다. 더불어 여기서 딴 생각 품다 일을 그르치면 세상은 끝장난다는 마음으로 대해야 한다고까지 해주면 더 좋겠군요.

 

그리고 전투가 끝난 뒤 사실 이안을 통수칠 준비를 했다거나, 사전에 극소수의 젊은 드래곤과 어느 정도 나이 있는 드래곤을 뽑아 다른 곳에 숨겨두었다던가 하는 식으로 최악을 대비했다고 밝히는 것도 괜찮았을 겁니다.

 

아무리 드래곤과 이안 사이의 사전에 만들어질만한 악연이 없었고, 어쩌다보니 그렇게 된 부분도 있었기 때문에 넘어갈 수 있는 일 정도라고는 해도 이안과의 신뢰는 형성된 적 없었고 힘은 프란만큼 강합니다. 그런 이안이 속내를 숨기고 있었다면? 혹은 이후 프란처럼까진 아니더라도 드래곤과의 갈등이 충돌 수준으로 발전할 정도가 된다면?

 

이안이 어떤 인생 계획을 가지고 있든 경지 높은 마법사가 꼴랑 인간 수명만큼, 혹은 조금 더 넘게 산다는 보장도 없고 당장 괜찮은 관계라 하더라도 이후에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게 인간입니다. 프란을 겪어본 드래곤, 특히 리시스는 그런 이안에 대해 극도의 경계와 시선을 두는 게 정상입니다.

 

만약 이안이 프란만큼 오래 살아가면서 천천히든, 극적이든 변하게 되었고 그게 드래곤들과 마찰로 이어질만한 것이라면 드래곤들은 훗날 프란만큼, 어쩌면 그 이상으로 위험한 적을 상대해야 합니다. 그런 위험은 함부로 감수할 수 없죠.

 

차라리 힘이 없어서 이안을 건드리지 못하는 걸 선의로 포장해서 좋은 관계를 형성하는 게 말이 될 겁니다. 전투 끝에 통수치려나 아직 힘이 남은 걸 보고 계산 좀 하다 안 되겠다 싶어서 적은 친구보다 가까이 둔다는 격언처럼 친우처럼 대하겠다고 하는 것도 말이 될 거고요.

 

그게 더욱 입체적이고 말이 되는 전개일 겁니다.

 

 

이런 거 하나하나 문제라고 하는 건 지나칠 거고 전개야 양판소에서 이 정도면 그냥 평범하게 무난한 수준이다보니 굳이 지적할 필요까지도 없는 부분인 것도 사실이라면 사실이겠죠. 까놓고 말해서 이것보다 더 한심하고 똥멍청한 전개로 쓰는 사람도 많은데.

 

다만 너무 편의적으로 전개를 이끌어갔다는 생각은 버리기 어렵습니다. 어느 정도 필요한 방식일 수는 있겠으나, 중요한 부분이라면 당연히 그 관계성을 구축하는데 그만큼 공을 들여야 하는 것도 필요한 거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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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리뷰는 작품에 대한 내용누설이 있습니다. 



외국 소설인지라 처음엔 조금 기대도 했습니다. 그것도 겜판인지라 한국 쪽의 양판겜소랑은 다를 거라 생각했죠.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본 사람들이 꽤 많았습니다.


결과적으로, 다르긴 달랐으나, 그리 기대한 가치가 있지는 않았다.. 정도의 결론을 내릴 수 있겠네요.



한국 겜판과의 차이점은, 현실에서 발생할 수 있는 일에 대한 개연성을 어느 정도 확보했다는 겁니다. 가령 현피 같은 경우 한국 겜판소에서 찾아보기 어렵고, 잘 고려되지도 않죠. 현실의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주인공이나 주인공 주변 사람, 동료, 가족, 라이벌이나 일부 악역 정도에 한정되어 있고 그들과의 관계는 사실상 별 거 없죠. 


반면 주술사의 길에서는 실제로 사람을 죽일 수 있거나 죽이거나 현피를 뜨거나 불이익을 주는 등의 개연성이 있습니다. 주인공 머핸 또한 현피를 두려워하거나, 살해 당할 수 있음을 인지하고 있죠. 더욱이 게임 자체가 현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고, 범죄 형량이나 경제활동 그 자체를 게임에서 처리할 수도 있다보니 게임이 단순한 게임 그 자체가 아니게 되었죠.


이는 아무리 뛰어난 게임이어도 기껏해야 돈벌이 수단이나 국가적 이벤트, 산업 정도로 여기며 그냥 대단한 영향력을 가진 게임 정도로 보지만, 주술사의 길에선 그 이상입니다. 글자 그대로 사회의 한 요소이자 일부죠. 다만 그런 만큼 게임사의 권한과 권력이 돋보이는 부분은 많지 않습니다.


소설 내에서도 어마어마한 돈과 수수료를 받지만 그걸 가져가는 게임사의 거대할 수밖에 없는 권력에 대해선 별 다른 이야기가 없더군요. 



이외에도 가장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은, 이게 서로간의 문화 차이라고는 해도, 주인공의 성장에 관한 문제입니다. 한국 겜판소에서는 아무리 이고깽스타일로 무슨 재능이든 기능이든 말도 안 되는 것들을 혼자 독점하고 짱짱맨 되는 게 클리셰이지만 적어도 본인 스스로 어떠한 노력과 성과를 이루는 쪽이라면, 주술사의 길에서는 본인이 스스로 노력하거나 성과를 이뤘다기 보단 운빨에 얻어걸리는 것들이 대부분이라는 점입니다.


까놓고 말해서 주인공 스스로 능력껏 얻은 것들은 많이 안 됩니다. 그냥 본인도 의식하지 못하고, 의도한 게 아닌데도 이상할 정도로 뛰어난 성과와 예상치 못한 결과들이 '얻어 걸리는' 것 뿐이죠. 전체적으로 봤을 때 거의 버그나 사기 수준일 정도죠.


머핸 스스로도 자기가 뭘 한 건지도 모르고 결과만 그냥 받아들이는 게 거의 처음부터 끝까지 이루어집니다. 까놓고 말해서 머핸이라는 캐릭터가 주인공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그저 직감과 운빨이 뛰어난 걸 제외하면 머핸이라는 캐릭터의 캐릭터성은.. 글쎄.. 좀 선량하고 머리는 좋지만 적당히 멍청한데다 평범하다는 거?


그런 캐릭터는 어디에든 널려 있고, 머핸의 캐릭터성은 특별한 게 못 된다고 봅니다. 더욱이 이해가 안 되는 건 그런 머핸과 아나스타리아가 사랑에 빠지는 거죠. 정확히는 스테이시(아나스타리아의 애칭)가 머핸을 사랑하게 된 것이.


얘 옆에 있으면 온갖 게임 시나리오가 터지고 재미 좀 볼 수 있겠지만 까놓고 말해서 머핸이라는 캐릭터가 보여준 거 자체는 별 거 없고, 오히려 사고를 치는 경우도 있는데다, 머리도 엄청 잘 돌아가는 게 아니라 스테이시 같은 베테랑이 옆에 없으면 통수 맞고 사기 당하고 뜯어먹히기 딱 좋은 호구인데 말이죠. 실제로 그렇게 당한 게 한 두번이 아닙니다.


이런 면에서 머핸이라는 캐릭터는 특기할 장점이 몇 없습니다. 



이외엔.. 머핸이 음모자들에게 당하면서 범죄를 저지르고 갇히고 게임 내에서 빠져나가지 못한 채 현실이라 믿게 되는 모든 과정이 솔직히 말이 안 되지 않나 싶습니다. 제가 이런 류의 음모에 대해서 그 현실성과 실행 가능성을 매우 부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기는 합니다만... 범죄를 저지르게 유도하는 거? 그렇다 칠 수 있습니다. 가상현실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고 현실이라 믿은 채 다른 가상현실 속에 가두는 거? 기술적으로 그럴 수 있다 칩시다.


근데 그런 과정이 모두 개연적으로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그들이 얻을만한 것에 비해 리스크는 너무 크고, 그 계획에 가담한 사람들은 너무 많으며, 그러한 계획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시행하고 성공하려는 것 자체가 그닥 설득력이 부족하지 않나 싶네요.


물론 작품적 허용이라는 면에서 넘어갈 수 있는 거긴 하죠. 종신형, 혹은 살해 당할 수 있다는 리스크를 고려하지 않을 때 얻는 것이 거대한 건 사실이고, 계획에 가담한 사람들이 적으면 오히려 실행 자체가 불가능하게 될테니 그것도 이해할 수 있는 요소이며, 계획을 단계적으로 나눴을 때 각각의 파트가 성공하기만 하면 되는 거니 아예 불가능한 것만은 아닐 수 있다만.. 아무리 그래도 그 음모 자체는 너무 작위적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그러나 해외 소설답게 한국 겜판소에서 볼 수 있는 온갖 클리셰는 거의 없다고 봐도 되고, 너무 주인공에 대한 푸쉬가 심할 정도이긴 하지만 캐릭터 자체는 무난무난합니다. 또 현실(주로 제도나 법률)과 연계되는 부분은 개연성이 있다고 봅니다. 그걸 위해 게임사와 정부간의 관계와 법률이 있다는 서술이 있었고요.


또 한국에선 게임 자체를 하나의 다른 세계 정도로 인식하고, 데이터 쪼가리라곤 하지만 그걸 제대로 의식하지 않는 경우도 많고 그렇게 묘사되기도 합니다. 심지어 나에겐 또 하나의 진짜다. 라는 느낌으로 이입하고 데이터 쪼가리를 위해 몸과 마음을 던진다고 해야 하나 희생하거나 불필요한 리스크를 감당하려는 경우도 자주 나오죠.


하지만 여기선 꾸준히, 그리고 분명하게 데이터 쪼가리라는 선을 그어 놓습니다. 물론 감정이입이나 그런 걸 하기도 하지만, 좀 박하게 말해서 한국 겜판소처럼 현실과 가상을 구분 못하는 수준까진 아니죠. 오히려 감탄하는 게 대부분의 반응입니다.


그런 면에서 이쪽이 더 개연성이 있고 말이 되는 서술이라고 할 수 있겠죠. 


하여간.. 볼만은 했지만, 굳이 누군가에게 추천할만한 작품까진 아니다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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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해서, 이게 10년도 넘은, 나름 오래된 소설이고 그에 따른 팬층이나 추억이 깊은 작품이라곤 하지만 작품의 수준을 평가하자면.. 다른 양판소와 다를 바 없는 그런 소설입니다. 


이드가 마법을 쓰는 판타지 세계로 차원이동을 했고, 다시 돌아가려고 한다. 라는 설정은 흔해 빠졌지만 나름의 작품적 목표가 된다는 면에서 나쁠 거 없는 설정입니다. 이거 가지고 뭐라고 할 건 없죠. 문제는 그 이드(예천화)가 무림에서 왔기 때문에 무공에 대해서 그 가치를 상당히 잘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근데 문제는 자기 동료가 되자마자 오래 지나지 않아서 간단한 무공이라곤 하지만, 보법 등 무공을 뿌리기 시작했다는 거죠. 초반에 동료 몇에게 전수해주는 것도 너무 쉽게 전수했다는 게 사실입니다. 아무리 별 거 없는 무공, 보법이라곤 해도 그 세계에서 무공의 수준을 모르지 않는 이드가 동료에게 '아직 세상에 없는' 무공을 너무 쉽게 줘버린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죠.


심지어 혼돈의 파편과 싸울 때는 제국 기사들에게 아예 나름 높은 수준의 보법을 뿌려버리는데, 당연히 이게 어떠한 영향으로 이어질지는 애들도 알 수 있을 정도로 간단합니다. 근데 그걸 당장 혼돈의 파편과 싸워야 하는데 그에 대한 힘이 되어야 한다는 이유로 그냥 뿌려버리죠.


그 결과 혼돈의 파편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된 이후 그레센 제국의 국력은 너무 높아져버렸고, 그에 따른 결과는 주변국들이 감내하게 되었죠.



무공의 가치와 무게감, 중요성을 잘 안다는 이드가 그런 무공을, 아무리 자기 수준에서 낮다고 생각되어도 그런 세계에 뿌려버리듯 퍼뜨려버리고, 그게 어떻게 작용할지 고려하지 않았다는 건 어떻게 생각해도 작가의 무리수입니다. 한두 명에게 전수하는 것도 나름의 명분이 필요하고 집단이 된다면 그에 대한 제약이나 목줄을 달아놨어야 하는데, 그런 게 전혀 없습니다.


그러니 나중에 돌아와서 개판이 된 꼬라지를 보는 거죠. 



또, 팔찌 문제, 혼돈의 파편에 의한 사건 등 대륙 이동을 겪었을 때 이미 동료가 있었던 이드는 대륙을 이동해버린 이후 새롭게 동료를 만나죠. 그리고 여기에서 가즈나이트 등의 소설과 같은 문제를 가집니다. 동료도 만들고, 일도 벌여놨는데, 갑자기 정리도 안 하고 훅 떠나버린다는 거죠. 그나마 가즈나이트는 어느 정도 정리를 한 뒤에 다음 스토리가 이어진다면, 이쪽은 그냥 뚝 끊어버리고 진행합니다. 그냥 존내 무책임하게요.


그나마 나은 점은 나중에 서로 만나긴 한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갑자기 훅 떠나버리면서 기존의 동료들간의 유대감, 선형적으로 이어지는 사건의 줄기가 중간에 끊기고, 큰 흐름 내에서 다른 줄기를 만들어 탄다는 건 사실이죠. 이런 식으로 몇번이나 반복됩니다. 더 문제는, 이드가 그걸 해결하거나 커버할 생각도, 의지도 별로 없다는 겁니다. 그냥 별 생각 없이 언젠가 만나겠지~ 수준에서 다시 새로운 동료를 만나 걱정도, 감정적 불편함도 없이 그냥 여행을 계속 한다는 거죠.


이건 그냥 작가가 작품의 전개와 발상에 대한 이해가 떨어지거나, 캐릭터 자체를 자폐아 병신새끼로 만들어 놓은 겁니다.



나중엔 아예 현대 한국으로 떠나는데, 거기에서 발생하고 이어지는 사건과 설정 자체도 유치하다 싶을 정도이고요. 여기에서도 이해 못할 설정이 몇개 있는데, 이런 수준의 작품들이 항상 그렇듯이 쓸데 없이 자신의 힘을 숨깁니다. 아니, 숨기려는 거 자체는 이해를 하겠는데 그 이유가 이해가 안 됩니다.


자신의 강함이 혼란과 불편함을 낳을 수 있다는 건 이해 합니다. 그러면서 그걸 적당히 숨길 생각을 안 합니다. 그냥 주변 몇몇 사람들에게 보여주거나, 보이게 되는 상황이 만들어지죠. 이런 설정과 전개는 90~2000년대 초반의 중2병적 양판소에서나 주로 볼 수 있는 쿨병 걸린 은거고수 코스프레 딸딸이질과 질적으로 다를 바 없고, 이드가 2000년대 초중반 쯤에 나왔던 걸로 알고 있으니 시기적으로도 맞네요.


쉽게 말해서 작가가, 그리고 보는 사람이 존나 쎄고 언제든지 판을 뒤엎어버릴 수 있는 굇수지만, 존나 쿨하고 대인배라서 대놓고 깽판은 안 부리고 다니는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적극적으로 힘을 숨겨서 알아야할 사람이나 진짜 믿을만한 면모를 보여주는 캐릭터가 아닌 이상 보여주지 않는 것도 아닌, 그냥 (캐릭터가 아니라 작가나 독자가) 자랑질 허세 부리는 거랑 다를 게 없죠.



언제가 됐든 주인공 이드는 어떤 문제가 됐든 그 문제에 대한 적극적 해결의지가 없습니다. 그냥 있다보면 어떻게 되겠지 수준에서 움직이는 거죠. 자기 스스로는 그걸 우유부단하다고 생각하고, 작가도 그런 유하고 여유로운 성향을 묘사하려고 하는 거 같은데, 그게 아니라 그냥 진도 질질 끄는 수작질 정도가 아닐까 싶더군요.


현대 한국으로의 차원 이동 때도 자기 주변 사람들은 지키겠다. 라는 입장을 내비쳤는데, 실제 전후관계를 이해하기 전에도 할 수 있음에도 해결 의지 없이 놀러다니는 수준으로 돌아다녔죠. 전후관계를 안 이후에도 혼돈의 파편 흔적을 찾는 일에 굉장히 적극적이지 않았고요.


아니, 이 때는 그나마 가장 적극적인 편이었습니다.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몰랐다고는 하지만, 애초에 이드와 라미아의 능력 정도면 찾고자 하면 찾았습니다. 약간의 노가다가 필요했을 뿐이지, 찾고자 한다면 오래 잡아도 한달 내에 찾을 수 있는 능력을 가졌죠.


그리고 그 강대한 힘으로 하고자 하는 바를 이룩하는 것 정도야 해볼만 했을 거고요. 자꾸 질질 끄느라 그 흔적의 수작질에 넘어가는 것도 등신 같고.



무엇보다 이해가 안 되는 건, 드래곤의 힘과 지식을 흡수했다고 하면서 정작 그 힘과 지식을 제대로 쓰질 않습니다. 그냥 시간 나는 때마다 드래곤의 지식을 훝어보기만 해도 되는데, 이드는 그 짓을 절대 안 합니다. 정령, 정령왕을 쓸 수 있을 때도 안 하고 쓸 때에도 남들이 멋대로 오해하게 두고 그걸 교정해주지 않죠. 물론 그걸 하나하나 교정해줄 필요도 없고, 자기 밑천을 드러낼 필요도 없지만, 소설 내에선 근본도 없고 택도 없는 쿨병 걸린 태도로 일관하니 독자들 속이 터지는 겁니다.



다시 판타지 세계로 돌아갔을 때도 앞서 언급한 문제가 다시 등장하죠. 기존의 그레센 제국이 있던 세계에서 수 십년이나 지난 미래에 떨어졌다는 건데, 여기에서도 개버릇 남 못 준다고 자기 정체를 밝히질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가 어그로라는 어그로는 다 끌고 다니면서 각국의 기사들이 쫓아다니게 만들죠.


1부는 그럭저럭 평범한 수준 낮은 양판소 수준이었다면, 2부는 처참한 쓰레기나 다름 없다고 평가합니다. 진도는 진도대로 안 나가고, 이드의 태도 또한 이해할 수가 없는데다, 2부 내에 존재하는 모든 문제에 대해 적극적인 해결의지는 일리나를 찾아갈 때 빼고는 없습니다. 그나마도 개삽질하면서 다니던 건 여전하고, 채이나라는 캐릭터가 자기 아들내미 경험 쌓는답시고 발로 걸어가면서 쓰잘데기 없는 어그로, 싸움질이나 하게 만드는 건 채이나라는 캐릭터를 명분으로 이드 싸움 존나 잘해요 하면서 자랑질하는 거에 불과하죠.


근데 그게 근본도 없는 쿨병과 엮여서 뭐 하나 제대로 해결하는 것도 없이 사람 암 걸리게 만들다 결국 발로 이동하는 거 때려치게 만들었는데, 채이나라는 캐릭터의 역할이 그런 목적이었다는 겁니다. 이드가 어그로 존나 끌게 만들고 보는 사람 속터지게 만드는 거.


독자가 이해가 되는 설정이나 사유가 아니라 필요 없는 이유와 명분을 만들어서 일을 이상하게 진행하며 질질 끌어대는 게 김대우 작가의 가장 큰 문제입니다. 이건 작가적 성향이나 어떤 생각이 있어서 하는 게 아니라, 걍 작가적 역량이 처참하게 부족한 거고요.


일리나 만나러 갈 때 한번 (그나마) 제대로 싸움 붙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도 카카오 페이지 기준으로 한 3화 정도 질질 끌다 싸움에 들어가는 거 보고 이건 작가가 제정신이 아니거나 작가질 하면 안 될 수준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더군요. 싸우기 전에 뜸을 들이는 것도 전투씬을 묘사할 때 작품에서 느낄 수 있는 묘미라면 묘미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지 김대우 작가는 그게 얼마 정도인지 모르는 겁니다. 이건 그냥 작가적 역량이 부족한 거죠.


그냥 글을 쓸 때 필력이 떨어진다거나, 소재는 재밌는데 전개가 재미가 없다던가. 스토리가 산으로 간다던가 하는 이전의 문제입니다. 걍 어디에서 빠르게 흘리고 어디에서 끌어보고 어디에서 뜸을 들이고 어디에서 터뜨리고 어떤 요소를 어떻게 쓰고.. 이런 걸 걍 다 못합니다.



소드팰러스에 들어가고 나서는 걍 거기 밖으로 나가는 일이 거의 있지도 않았죠. 심지어 그 내부에서도 '아무 것도 안 하고' 있다가 은색 기사단과 만나는 즈음해서 제자 둘 들이고 삼검왕 하나 꺽으며 세력을 늘리네 유명세가 더 높아졌네 어쩌네 하고 있죠.


그 제자마저도 당돌한 게 아니라 걍 미친 거 아닌가 싶은 수준으로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라고 알고 있는)인 이드에게 무공을 가르쳐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병신 새끼가 지 무공 때문에 무슨 꼬라지 났는지 뻔히 알면서 퍼주죠. 심지어 그마저도 걔 소개로 은색 기사단 중 하나와 만나고 대화하는 게 조건입니다. 걔 없었어도 충분히 할 수 있었고, 그게 아니더라도 절대 공정한 거래는 아니죠.


무공에 대한 가치는 상대적이고, 대단한 수준으로 가르치며 특별한 무공을 전수하는 건 아니더라도, 자기 스스로 링스피어를 사용하는 제2의 시르피가 될 거라고 생각한다면, 자기가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 지 알면서 그런다는 겁니다. 아무리 케마란의 재능이 뛰어나고 조금 밀어주는 수준이라곤 하지만, 그것도 거래의 대가에 따라 정도껏이죠. 금강선도 뿌려서 그레센 대륙이 어떤 꼴이 됐는지 아는 새끼가 또 세상에 불지르려는 개미친 새끼입니다.



또한 소드팰러스에서도 자기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원하는 걸 할 수 있었습니다. 검궁에 들어가는 것도, 그곳에서 시르피의 흔적을 보는 것도, 그것을 통해 추적을 하거나 하는 것도. (단지 시간이 좀 걸릴 뿐이라는 거지만.)


근데 아무 것도 안 합니다. 앞서 이야기한 게 다죠. 스스로는 굳이 세력을 가지고 싶지도 않고, 소드팰러스를 가지고 싶지도 않지만 믿어주지 않을 것 정도는 안다고 하고, 은색기사단 등과 협력해서 시르피를 찾아야 하기 위해서라도 거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도 하고 등등의 이유를 대는데, 걍 작가가 씨부려놓은 명분이고 실제로는 걍 의지가 없는 겁니다.


어차피 시르피가 실종된지 꽤 됐으니 굳이 서두를 거 없다는 것도 나중에 시르피의 흔적과 그 흔적을 추적할 수 있는 집단에 대해서 밝혀졌으며, 심지어 은색기사단의 단장마저도 납치하려는 사건이 벌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이 새끼는 적극적으로 나설 생각이 존나게 없어요. 걍 시르피에 대한 걱정 자체가 없는 수준이고, 지가 뭘 할 수 있고 뭘 해야 되는지도 모르는 자폐아 새끼나 다름 없죠. 이딴 걸 캐릭터라고 만들고 전개랍시고 하니까 작가 수준이 다른 애새끼들이나 보는 양판소 작가와 다를 바 없거나 오히려 그보다 수준이 낮다고 제가 까는 겁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벌어지는 가운데 가장 이해가 안 되는 건, 자기가 마인드 마스터 본인이라는 걸 결코 밝히지 않는다는 겁니다. 자기 스스로는 적극적으로 숨긴 것도 아니고 남들이 잘못 오해하고 있는 것 뿐이라곤 하며, 밝히든 말든 상관 없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비밀은 꾸준히 유지가 됩니다. 그리고 은색 기사단장에게도 자신의 비밀을 밝히고 어차피 숨길 생각 딱히 없으니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겐 이야기해도 된다고 하면서 결국 비밀을 유지하게 하죠.


물론 마인드 마스터 본인이라는 걸 증명해야 하겠지만, 까놓고 말해서 본래 자신의 압도적으로 높은 무공 수준 + 드래곤의 힘, 드래곤의 지식, 하이엘프인 일리나의 존재 등 증명하라면 못할 것도 없는 주제에 그걸 참 오랫 동안 감추고 있습니다. 당장 현대 배경에 떨어졌을 때 프랑스 였나, 거기에서 자기 지인 구하겠다고 어마어마하게 많은 몬스터를 상대로 어마어마한 힘을 끌어내서 거대한 검강으로 박살냈던 것처럼 말도 안 되는 막대한 힘만 보여줘도 대부분은 마인드 마스터 본인이겠구나 할 거고, 거기에 하이엘프 일리나가 직접적으로 인증해주면 누구든 믿을 수밖에 없을 거 뻔한데 말입니다. 심지어 자기 정체를 증명할 때도 엘프인 일리나가 직접 인증해줘서 믿게 해주는 패턴도 썻으면서요.


근데 그러질 않습니다. 아니, 애초에 그렇게 숨기고 살 이유가 전혀 없거든요. 그게 다른 게 아니라, 전형적인 나는 딱히 정체가 밝혀져도 상관은 없지만 니들이 마음껏 오해하고 삽질하며 그에 따라 나도 개삽질이나 하게 계속 모르고 있어라~ 이거거든요. 근데 이런 짓거리도 다른 작품에선 나 특급 요리사요! 하고 자랑질 하는 요리왕마냥 좀 지나면 금방 밝히거나 밝혀지면서 독자들에게 유치한 카타르시스라도 느끼게 하는데, 이 작품에선 죽어라 안 밝히고 아주아주아주아주 오랫 동안 비밀로 하고 있습니다.


걍 병신짓이죠. 지 때문에 어떤 문제가 벌어지고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뻐언히 아는 새끼가 일부로 그러는 거 보면 걍 자폐아 새끼가 맞습니다.



질질 끄는 전개, 이해할 수 없는 행동, 설정 무시하는 능력, 제대로 해결하는 거 없이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버리기, 그마저도 제대로 정리 안 하고, 어떤 일이든 질질 끌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해결할 의지도 없고, 설령 해결할 일이 발생해도 제대로 처리를 안 하거나, 처리를 해도 중간 과정일 뿐이지 결코 해결은 아닌 스토리 등등..


걍 근본도 없는 소설인데, 과거 추억에 의해 고평가를 받을 뿐이지, 작품적으로는 다른 수준 떨어지는 양판소랑 다를 게 전혀 없거나, 오히려 그 이하로 수준이 낮습니다. 2000년대 초기에 타이밍 좋게 나와서 일부 팬층 만들고 추억 보정 받은 게 신의 한수였지, 요즘 나왔으면 불쏘시개 소리 들으면서 보는 애새끼들만 봤을 겁니다.


비슷한 1세대 판타지 소설인 데로드 앤 데블랑은 아르트레스, 아르헬까지 이어지면서 기존의 판타지적 세계관을 붕괴라기 보단 개편, 확장시키는 식으로 작품을 이어가면서 나름의 필력과 팬들의 애정이 있는 캐릭터의 존재, 무리 없는 전개로 나름 괜찮은 완결을 맺었지만 이드는 점점 처참할 정도로 질적 하락으로 이어지고, 심지어 작가 본인조차 자기 작품에 애정이 없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망가졌습니다. 걍 카카오페이지에 연재하면서 돈 빨아먹으려고 일부러 저러는 거라고 봐도 무방한 수준으로요.


애초에 1부도 특별할 거 없고, 비판점이 많은데, 2부는 의미 그대로 작품을 조져버렸죠. 이딴 걸 보는 건 인생의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고, 돈을 쓴다면 길가에 버리는 게 낫습니다. 누군가 필요한 사람이 주워갈 수 있다는 기대 가능성이라도 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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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악 작가의 작품은 독자들에게 호불호가 크게 갈리는 만큼 그에 대한 팬층의 팬심도 강한 편입니다. 광악 작가의 지식적 깊이와 뛰어난 필력이 아주 높은 평가를 받는데, 솔직히 요즘 나오는 작품 중에 이만한 작품 거의 없다고 볼 정도죠. 그리고 실제로 제 평가 또한 요즘 나오는 많은 소설 작품 중에서 광악만큼 뽑아내는 작가는 별로 없습니다.


심지어 무한전생이라는 아이템부터가 상당히 독특하고 흥미로운 캐릭터성을 부여하기도 하죠. 흔해 빠진 이고깽 비슷한 작품이나 먼치킨적인 작품이 아니라, 어느 정도 현실성이 느껴지는 개연성과 설득력 높은 인물상을 만들고, 그에 따라 발생하는 사건과 줄거리가 논리적인 흐름을 갖추고 있죠. 이러한 캐릭터성과 구조적 개연성은 작품의 몰입도를 높히는 요소죠.



무한전생 시리즈의 특징 중 하나는, 차기작일수록 전생 횟수가 적은 편이라는 겁니다. 현재 연재되고 있는(아직 카카오 페이지엔 안 올라옴) 나중에 몰아보기 위해 작품은 아직 안 봤기 때문에 어떤진 몰라도, 무림의 사부에서 망나니 쪽으로 갈수록 주인공이 부지런하죠.


이는 지나친 전생횟수를 가진 캐릭터는 너무 맛이 가버렸기 때문에 스토리를 주도적으로 흐르게 하거나 하는 것에 한계를 느꼈기 때문인지, 능력을 부지런히 발휘하는 주인공이 보고 싶은 팬들의 성원을 따르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원래 그렇게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는 시리즈 개성을 생각하고 작품을 만드는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어찌됐든 망나니로 갈수록 발암도가 줄어들고 주인공이 부지런해지는 것에 더해, 작가의 필력이 점점 더 안정되어 간다는 느낌도 받습니다. 아무래도 무림의 사부 쪽이 워낙 스토리가 중구난방이다. 산으로 간다. 하는 이야기를 듣기도 하는 작품이다보니 그런 분들에게는 망나니 편이 가장 안정적으로 굴러가는 작품일 겁니다. 실제로 전작들처럼 어디로 튀거나 하는 거 없이 정석적일 정도로 잘 전개된 편이기도 하고요. 물론 이전작이라도 나름의 논리적으로 이어지는 개연성 자체는 있었다고 보는 편입니다만.



이 작품에 높은 평가를 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작가의 조선 역사와 성리학에 대한 이해도와, 유교 국가로서의 조선의 구조에 대한 이해 또한 높았기 때문입니다. 한계가 있다면 유교 그 자체를 조선을 망친 사상 정도로 이해하는 부분인데, 필력이 워낙 뛰어나서, 또한 작품적 허용을 위해 과장되거나 보편적으로 구성하거나 하는 등의 부분들이 있다는 점을 고려해도, 그러한 요소는 되려 조선과 성리학에 대해 독자들에게 호도하는 면이 있다고 보는 편입니다.


소설 같은 작품이 아니라 그냥 역사라는 분야에 있어서 조선, 특히 유교(성리학)은 필요 이상의 욕을 먹고 있고, 억울할 정도로 오해는 받는 면도 있기 때문에, 조선은 유교 때문에 망했다라는 소리를 엄청나게 들어오고 때로는 논쟁을 하기도, 논파하기도 한 적도 있는 본인 입장에서 그러한 요소는 사실 좀 불편할 수밖에 없거든요.


성리학의 구조적인 문제점도 있고, 유교가 조선을 망친 면도 분명하게 있지만, 사실 그건 유교라는 사상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운용한 사람의 문제이고, 그것을 견제하거나 올바르게 세우지 못한 것은 되려 사상보다는 현실정치의 문제라고 봅니다.


성리학이 아니더라도 조선의 문제들은 이전 시대나 동시대의 다른 국가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었고, 그러한 문제가 심화되어 멸망된 국가들도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유교, 성리학이 유교를 망쳤다고 하지만 반대로 유교 대신 기독교가 그 자리에 있었어도 조선은 똑같이, 비슷한 문제로 망해갔을 겁니다. 그러한 문제는 사상이나 종교,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그 자체와 집단으로서의 국가체가 가질 수밖에 없는 구조적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까놓고 말해서 현 시대의 국가들조차 그러한 문제점에 대해 더 높은 수준의 시스템으로 견제 받고 억제 받는 것일 뿐이지, 아직도 그러한 문제에서 탈피한 것이 아니고, 어떤 면에선 과거보다 더 노골적으로 더 많은 욕망을 가질 수 있게 하기까지 하죠. 그만큼 고도화된 시스템과 방대한 자본에 의해 할 수 있는 게 더 많고, 그러한 것에서 얻을 수 있는 권력이 더 강력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조선이라는 국가(작중에선 호선)를 망하게 한 것은 유교라고 보기엔 호도되는 면이 작지 않습니다. 물론 본 작품에선 현실에서 모티브를 따온 세계관의, 호선이라는 가상의 국가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이고, 위에서 말했듯이 작품의 전개를 위해 과장되거나 보편화시켜야 하는 면도 있기 때문에, 그러한 것들을 작품적 허용으로 본다면 아무런 문제는 없겠죠.


오히려 그러한 것이 더 이해하기 쉽고 전개하기에도 수월하며, 불필요한 설명과 서술을 줄일 수 있기 때문에 그러한 단순화가 작품의 재미를 보장하는 것도 물론 기법이라는 건 납득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비판을 하는 이유는 조선, 역사에 대한 오해가 발생할 수 있음을 여러곳의 많은 이들에게서 경험해봤기 때문에 하는 거죠.



어찌됐든, 그러한 요소들을 감안해도, 무한전생-망나니라는 작품에서 서술하고 설명하는 조선(작중 호선)의 구조와 성리학적 구조를 이용하고 오남용하는 사대부의 행태, 붕당 등의 파벌정치의 문제, 왕권과 신권의 대립 등을 상당히 쉽고 깔끔하게 정리했다는 점은 굉장히 높은 평가를 줄 수 있는 부분인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한 조선의 정치와 계급과 사상을 기반으로 이루어지는 부패의 구조는 공부한 사람이 아니라면 알 수 없고, 묘사하기 난해해지는 것들이기 때문이죠. 숱한 작가들이 이러한 조선을 모티브로 한 국가나 가상의 배경의 가상의 국가를 묘사하면서 그 정치구조나 계급이나 파벌, 진영간의 관계 구조가 현실성이 없거나 수준 자체가 너무 낮은 이유는, 양판소 수준의 낮은 이해를 가지고 섣불리 시도하기 때문이죠.


거의 딱 중학생, 잘해봐야 고등학생 수준의 이해를 가지고 잘 모르는 것을 묘사하려니 현실성이나 개연성의 수준이 팍 떨어지는 겁니다. 그런 면에서 광악 작가는 상당한 공부를 한 것이 보이고, 그에 대한 이해 또한 상당히 높은 수준이죠. 어느 면에선 배울 정도이고, 사실 이 작품에서 조선과 사대부에 의해 만들어진 구조에 대해 '공부'하게 된 사람들 많을 겁니다.


심지어 광악 작가는 전투나 전쟁 묘사에 대해서도 상당한 필력을 보여주는데, 그 정도 지식과 이해도를 가지고 전투씬을 서술하지 못하는 것도 이상할 정도겠죠. 초반부터 후반까지, 처음 어머니가 죽고 윗대가리 털러갈 때부터의 개인의 무력이나 이후 야차대를 운용할 때나, 그 이후 수 차례의 반역을 진압하고 북방에서 날뛰고 왜군과 싸우는 때까지 상당히 설득력 있고 유효한 전술과 전략으로 묘사를 합니다.


현실적 개연성이 있는 조건들을 가지고 잘 버무린다고 할까요? 개인의 무력 부분이야 전생의 짬밥이라는 면에서 넘어가는 면도 있지만, 사람 잡을 때의 능력 또한 통할 법한 수법을 사용하는 묘사를 하고 있고, 군대를 동원한 전쟁에서 또한 징집병의 떨어지는 사기+훈련도, 실전 경험이 거의 없는 사대부의 한계를 절묘하게 노리는 전략과 전술을 동원하죠. 


개인이나 극소수의 깽판질이 아니라 사보타주와 암살 등의 군사적 테러에 가까운 전술로 전략적 이득을 가져오고, 군대간의 전투에 있어서도 용양군이 제대로 운용되기 전까지는 비정상적인 정예도나 단지 지휘관이 지휘를 잘해서 높은 전과를 낸다 수준의 양판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편한 전개보다는, 도성 내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적의 행동을 강제 및 통제하고, 유효한 타격을 낼 수 있는 방식으로 공격하며, 기름통+불의 화공 및 화약통 폭발로 인한 급격한 모랄빵을 이용한 전술들은 광악의 필력과 함께 상당히 견실이 묘사되었습니다.


다르게 말하자면 결코 유치하거나 억지스럽지 않게 묘사가 되고, 물흐르듯 자연스럽고 개연성에 있어서도 납득이 될 정도로 잘 썼다는 겁니다. 이런 면에서 특히나 양판소들과는 다르다는 평가를 줄 수밖에 없고, 작품 내에 필요한 부분들에 대한 요소들에 대한 이해도가 상당히 높다는 거죠. 이전작들에서도 마찬가지로.



사실 이런 장르를 가지고 양판소 작가들은 현대인 천재론을 위시해서 이세계물 비슷하게 이고깽 소설을 써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다른 일본산 이세계물에서 볼 수 있는 웃기지도 않을 몰이해와 지식 수준으로 깝치는 것들은 어디까지나 소설이기 때문이고, 작가의 수준이 낮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겁니다.


특히 역사와 관련된 이고깽질은 더 유치하기도 하고 역사적 열등감이 묻어 나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비슷한 장르의 다른 웹툰이나 소설들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죠. 어떻게 보면 역사적 열등감에 따른 자위질이라고도 볼 수 있을 정도로요.


근데 망나니는 그러한 유치함이나 저열함으로 흐르기 쉬운 장르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의 독특한 캐릭터성을 기준으로 그러한 맥락이 형성될 수 없도록 틀을 잡아 놓고, 작가의 지식과 이해도를 기반으로 구체적인 묘사와 서술을 통해 오히려 조선(작중 호선)이 가지는 문제의 본질을 지적하고 비판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고 김찬석이라는 무한전생자의 깽판과 대책으로 가상의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죠.


이러한 구조와 전개는 앞서 지적하는 역사 자위물들과 다른 인식을 만들죠. 솔까 호선이 앙국보다 국력이 2배 이상이라는 부분에선 그게 될 수 있는 것인가와 이건 좀 국뽕이다 싶을 정도의 거부감이 느껴지는 무리함이 발생했다고 보지만, 그런거 제외하면야 뭐.. 쉽게 말해 유치하지 않았다는 거죠.


이고깽질하고 되도 않는 이해도로 개떡 같은 걸 해결책, 대응책이랍시고 제시하면서 양판소 만드는 것보다, 현대적 지식을 갖추고 있는 우리가 생각하기에도 유효한 해결책이나 대책을 보는 사람(또는 작가 본인)이 역사적 열등감에서 기인하는 오르가즘을 느끼기 위해 쓰는 게 아닌, 주인공이 양반 사대부를 존나게 엿을 먹이겠다는 목적으로 목적성을 부여하면서 개연성을 만들죠. 


물론 그러한 양반을 조지겠다는 목적성 자체가 어떤 면에선 개연성이 부족하기도 하고, 너무 성의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비판은 피할 수 없다고 봅니다. 다만 어느 정도 쉴드를 쳐주자면 지난 몇만년 정도였나, 그 정도를 밑바닥 인간으로 전생을 해온데다 마침 빡치는 좆같은 일이 터진 김에 양반에게 자기 속풀이 존나게 하는 거라고도 볼 수 있기 때문에 개연성에 있어서 근거는 확보해놓은 거죠. 그리고 이 정도 개연성도 제대로 구성해놓지 않은 작가나 작품들을 생각해보면 뭐.. 이 정도면 (아이러니한 표현이다만) 양반인 셈이죠.



하여간 무한전생-망나니는 작가의 필력과 여러 분야에 대한 높은 수준의 이해, 지식, 작품을 이끌어가는 구조적 흐름 등 유치하거나 국뽕 쩔게 자극하는 물건으로 저열화되지 않으면서도 흥미와 재미, 심지어 어떤 면에선 독자로 하여금 역사적 지식을 얻게 하는데에 성공한 작품이라고 봅니다.


확실히 작가가 아는 게 많고 필력이 좋으니 작품이 잘 나온다 싶습니다. 심지어 그 두개를 다 가지고 있으면서도 전개나 완결에서 실패하는 이들도 있다는 걸 생각해보면 광악 작가는 상당히 뛰어난 작가라고 할 수 있지 않나 싶습니다. 망나니 편은 발암이 거의 없었고, 전개도 시원하게 잘 나갔기 때문에 광악 작가의 무한전생 시리즈에 입문하기엔 가장 좋은 작품이라 보기도 하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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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난 작가는 뛰어난 철학자이기도 하다. 저는 예전부터 뛰어난 작품을 창작해내고 가공해내는 작가들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뛰어난 작가는 정식으로 철학을 공부한 것은 아니나, 철학자와 같은 것을 작가의 관점으로 관찰하고 통찰하기에, 뛰어난 작가일수록 그 작품에 담긴 지성과 나타나는 통찰은 깊고도 진하다고요. 

 

그런 의미에서 랑또 작가는 뛰어난 작가인 것이 사실입니다. 가담항설은 길 위의 소문, 항간의 뜬소문을 의미하는 사자성어로서, 넓은 의미에서 보자면 민중 그 자체를 의미하기도 한다고 생각하는데, 신룡이라는 철혈의 독재자라는 절대통치자, 절대무력을 무너뜨리고 인간의 주제성을 살리기 위한 목적의 플롯으로 이야기가 돌아가는 것으로 보고 있는데, 제목이 작품의 정체성을 나타낸다는 점을 생각하면 상당히 감각적인 네이밍 센스가 아닐까 싶습니다. 

 

 

개인적으로 가담항설의 1화는 참으로 마음에 드는 것이, 단지 관심과 임팩트를 주기 위해 1화를 일부러 자극적으로 연출해내고 시작해내는 일부 작품들--주로 라노벨 등에서--과는 다르게, 1화에서 보여주는 작품 속 중요 캐릭터와 전체 극의 중심을 꿰뚫을 요소를 배치해내 그 성격을 너무 자연스럽게 드러냈다는 점에서 가담항설 1화를 처음 보자마자 확 꽂혀버렸거든요.

 

1화에 등장하는 작품 속 최중요 주, 조연은 4명입니다. 세력으로 구분지었을 때는 신룡, 동죽과 복아와 한설이죠. 그리고 신룡은 얼핏 가벼워 보이지만 처음부터 인간에게 기대하지 않았다는, 어떻게 보면 싸이코처럼 보일 법한 캐릭터성을 드러내고, 신룡이 무엇을 명령하든 절대 복종하는 동죽의 캐릭터성을 보여줍니다. 

 

동시에 유약해보이고 걱정 많아 보이나 무언가를 진심으로 바라고 간절히 소망하는 복아와 천진하면서도 깨끗한 한설이가 나타나죠. 복아는 진심의 힘과 간절함을 분명하게 아는 캐릭터이고, 명영과의 과거에서 크게 변화한 인물이죠.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 그리고 제가 확 꽂혔다는 부분은 바로 한설의 등장입니다.

 

한설의 등장은 매우 상징성이 깊습니다. 복아는 천지신명께 무언가를 진심으로 간절히 빌었고, 그 직후 한설이가 등장하죠. 가담항설의 세계관에서 신룡은 철혈의 절대자, 독재자이고, 그 밑에서 만백성이 복종하게 되는 구조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다른 무엇도 아닌 사람의 형상으로 나타난 존재가 바로 한설이지요. 이는 마치 한설을 이 세상에 내려 무언가를 이룩하고자 하는 천지신명의 의중으로 해석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로 뒤에 한설은 왕을 만나러 간다고 했습니다. 중요한 건, 왕을 만나러 간다는 점과, 만나러 가는 것이 신룡이 아니라는 점이지요. 즉, 한설은 왕에게 무언가를 말해줘야 할 임무를 가지고 만들어졌으며, 그 시작은 복아의 기도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겁니다. 복아의 기원은 도련님(강명영)이 과거에 급제해서 익히고 깨달은 것을 왕에게 말하게 해달라는 것이었고요.

 

한설이 사람의 형상인 이유는, 단지 그게 기능적으로 편하고 오해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이 아니라면 알 수 없고, 사람의 형태가 아니라면 겪을 수 없는 여러 관계를 경험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더불어 자신이 깨달은 것을 왕에게 말하러 가기 위해선 먼 거리를 이동해야할 것이고, 많은 사람들과 여러 관계를 경험하게 될 것이죠. 한설이는 돌이었기에 태어나 자라 여러 경험을 하고 성장한 다른 이들과 다르게 깨끗한 하나의 백지 상태와 같습니다.

 

천동지가 글을 적어 소원을 실현시키는 보물이라면, 한설이는 사람의 형태로 복아의 소원을 실현시키는 보물이겠죠. 한설이가 백지이기 때문에 그 위에 적히고 그려질 것은 좋은 것들이어야 하겠죠. 하지만 글과 그림엔 안 좋은 것이 끼어 있다면 튈 것이고 완성도가 떨어지게 되겠지만, 사람에겐 그러한 안 좋은 것 또한 하나의 경험이고 성장의 양분이 됩니다.

 

종이는 성장할 수 없죠. 하지만 사람이 된 한설이는 성장할 수 있게 됩니다. 순수하기에 명확하고, 명확하기에 정확하죠. 한설이가 모험을 통해 보고 듣고 배운 것. 깨달음을 왕에게 말한다면, 무언가 변하게 될 것입니다. 왕은 인간 중 가장 높은 존재로서, 신룡이라는 비현실적인 요소를 제외하고 보면 만인지상의 위치에 있는 자입니다. 신룡이 아닌 왕에게 가서 말을 해줘야 한다는 점은 천지신명이 신룡이라는 존재를 거부하거나, 거부하고자 하는 인간의 의지를 돕기 위함이지 싶더군요.

 

 

가담항설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다 각자의 사정이 있었고, 그 삶에서 얻어진 깊이가 깊습니다. 보고 배워서 얻어진 지성이 아니라, 삶을 살아서 겪고 다치며 생각하고 이입하면서 얻어진 감성이기에 그들이 하는 말들은 사람의 마음 속 깊은 곳을 자극하고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지 명확하게 알 수 있게 하죠.

 

이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마음입니다. 주체성은 마음에서 시작되는 거죠. 누군가를 사모하고, 아끼고, 걱정하고 슬퍼하는 모든 것은 주체적이기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이고, 도구나 장치였다면 할 수 없는 것이죠. 설령 그것이 노비이고 백정이라도 그들이 주체적으로 살아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것이 마음이지요. 혹은 마음이 있기 때문에 주체적일 수 있는 것일 겁니다.

 

백정인 태하가 장님 아가씨를 사모하고, 그 장님 아가씨 또한 태하를 사모했던 것처럼 마음, 진심이라는 것엔 장벽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죠. 신분이나 상황이 어떠하든 의지를 가지고 진심을 드러내며 인간 개개인의 주체성을 직접적으로 보여주죠. 

 

 

랑또라는 작가의 실력이 다른 어중이떠중이들에 비해 격이 몇 단계는 높다고 여겨지는 부분은 바로 사람의 마음을 정확하게 통찰해내고, 그것을 부족함 없고 차고도 넘치지 않는 문장으로 정리해냈다는 점입니다.

 

가슴으로만 하는 이해는 문장이 부족하기에 설명할 수 없어 아쉽고, 말만으로 설명하는 사실은 감정이 깃들어 있지 않아 사람을 움직일 수 없습니다. 사람이 분노하든 행복하든 자신의 상태를 정확히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은 나름의 지적능력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타인에게 설명할 수 있다면 공감할 수 있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인연인 것이며 관계인 것이지요.

 

책을 읽고 풍부한 단어를 알게된 다는 건, 슬픔의 저 끝에서부터 기쁨의 저 끝까지. 자신이 알고 있는 수많은 감정의 결들을 하나하나 구분해내는 거에요. 정확히 그만큼의 감정을 정확히 그만큼의 단어로 집어내어 자신의 마음을 선명하게 들여다보는 거죠.  

 

(중략)

 

같은 단어를 알고 있다면 감정의 의미를 공유할 수 있고 같은 문장을 이해할 수 있다면, 감정의 흐름을 공유할 수있어요. 그리고 그건 서로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게 만들죠. 정기씨가 저에게, 제가 정기 씨에게. 그런 사람이면 좋겠어요.

 

앞으로의 많은 고난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와 위로가 되도록.

- 가담항설 90화 中 홍화

 

감정을 정확히 이해하고, 무엇인지 설명해낼 수 있다는 것은 동시에 자기 자신의 상태를 정확히 파악한다는 것이며, 자신을 정확히 파악한다는 것은 자신이 누구이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게 해줍니다. 나는 누구이며,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자신을 파악하고 재정의해낸다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재정립해내는 과정이기도 하죠.

 

언어란 바로 그런 것이며, 그런 힘을 가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의 힘. 거리를 떠도는 말들엔 무언가 담겨 있을 것이고, 한설의 임무가 바로 그것을 왕에게 전달하는 것입니다.

 

 

다른 캐릭터들은 어떤가요? 명영과 복아는 서로 살아온 삶이 달랐으면서도 서로를 이해할 수 있었고,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공부하던 명영이 달을 벗삼아 지냈던 시기에 복아라는 첫 친구, 나눌 수 있는 첫 타인이라는 관계를 겪으며 생소했을 복아와의 관계에서 올바른 길을 찾아 소중한 관계를 만들어가는 현명함과 조심스러움을 보았고, 그렇게 태어났기에 평생 불행할 거란 복아가 명영이라는 빛을 보고 올바른 길을 뒤따라갔으나, 그것은 온전히 명영 혼자만의 힘이 아니었고, 자신이 있었기에 그럴 수 있었음을 깨닫게 되죠.

 

명영은 복아를 아꼈고, 복아는 그 이상으로 명영을 아끼고 소중히 여겼습니다. 자신은 불행하게 태어났으니, 불행하게 될 것이라 여겼지만 그 지독한 밤 하늘 속 커다란 벗, 달을 보고 가르쳐준 지성을 통해 자신 또한 올바른 길을 걸을 수 있는 안목이 생겼죠. 

 

그렇지만 사람의 마음은 결코 강할수만은 없기에 서로가 서로를 아끼는 마음에 약점이 되기도 합니다. 명영은 과거를 보러 가지만 복아는 놔두고 가려 했고, 복아는 위험하니 보낼 수 없다고 했지만, 실은 서로가 서로를 걱정하기 때문에 명영은 자신의 신념을 위해 복아를 그런 위험한 책임 속에 같이 데려갈 수 없었고, 단지 자신이 없이도 현명히 살 수 있도록 안배해왔던 것이죠. 복아는 그런 명영을 그런 위험에 가게 둘 수 없었지만, 사실은 명영이 자신의 곁에 있어줬으면 한다는 소망이 더 강했기에 그저 보내지 못한 것일 뿐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약하기 때문에.

 

하지만.

 

복아야. 우린 오랜 시간 서로에게 둘 뿐이었지. 그동안 나의 세상이 훌륭했다면 그건 네가 훌륭했기 때문이야. 너는 나의 세상이고 나는 너의 세상이니까. 우린 세상의 일원이자 그 자체야. 하지만 같은 고통도 사람에 따라 견뎌낼 수 있는 정도가 다르고 어떤 고통은 개인이 도저히 극복해낼 수 없어. 

 

그때 우리가 서로의 약한 순간을 위해 손을 잡아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누구나, 언젠가 약할 수밖에 없는데도, 평생 약해지는 걸 두려워하며 살아야만 해.  

 

그래서 나는 더 많은 사람의 손을 잡으러 가려해. 과거시험은 그 길의 과정일 뿐이야. 그래서 과거를 보러 가는 거야. 하지만 그건 너의 신념이 아니니까 너를 데려갈 순 없어. 나는 나의 신념을 내가 이루기 위해 궁으로 가는 거니까.

 

(복아) 하지만... 그건 너무 위험하고 불가능한 일이에요. 

 

나의 신념은 그런 세상을 만들어내는 게 아니야. 그 길을 향해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는 내가 되는 것. 그게 나의 신념이야. 

 

 

명영은 복아에게 자신의 신념을 말하며 자신이 혼자 가야하는 당위를 설명합니다. 힘들어하는 이들, 약한 순간에 빠진 사람들의 손을 잡아주기 위해서 자신의 길을 가는 것이라고 하죠. 그리고 그것은 그런 세상을 만들기 위한 원대한 무언가. 어쩔 수 없이 손이 가닿지 않는 외부의 세계가 아니라 언제나 살펴보고 가다듬을 수 있는 내부의 세계, 자기 자신을 위해서라면서요.

 

복아야 괜찮아?!! 괜찮은 거 맞지?!!

나 지금...

앞이 안 보여서 잘 모르겠어. 

 

그 뒤 바로 현재 시점으로 돌아와 머리 위쪽이 날아가 앞을 볼 수 없는 한설이가 절벽에서 떨어지는 복아의 손을 잡아 줍니다. 정말 상징적인 컷이자 예술적인 구성이죠. 자신의 상태가 말이 아님에고 복아를 걱정하고 결코 놓지 않으려는, 자신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한설과, 앞이 보이지 않는 한설에게 눈이 되어주고, 길이 되어주며, 더불어 올바른 길을 볼 수 있게 해줄 수 있는 복아의 구조를 고작 몇 컷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명영이 복아 자신에게 그랬던 것처럼, 복아는 한설이에게 밤 길 위의 밝은 볓이, 달이 되어줄 수 있는 것입니다. 

 

 

복아야, 복아야!! 복아야!!

나... 과거 시험 봐야해. 알잖아, 넌.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나도 알아. 네가 날 위해 얼마나 헌신했는지!! 그러니까 제발... 너의 헌신이, 나의 노력이, 우리의 지난 모든 날이,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말하지 마... 

 

명영이 약하고 힘들어하는 시기.

 

그리고 바로 이어지는 복아의 자조어린 독백.

 

나는 반드시 불행해질 거야. 불행해질 수밖에 없게 태어났으니까. 

절대로 벗어날 수 없는 완벽한 불행을 가졌으니까.

이 사람은 왜 날 데려가는 걸까? 어르신은 날 왜 데려왔을까?

어차피 난 반드시 불행해질 텐데...

대체 왜 나를 데려온 거야!

나는... 어차피...

반드시 불행해질 텐데.

왜 나를 더 비참하게 만든 거야. 

 

복아는 노비입니다. 노비로 태어났기 때문에 노비인 것이죠. 그러니 반드시 불행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약자의 권리는 고통받는 것 뿐이니까요. 어차피 고통 받을 거라면 계속 고통을 받는 것이 낫지, 잠시라도 편안하고 행복하고, 미래를 꿈꿀 수 있으며, 그 상태에 젖어버리면 곧이어 뒤찾아올 채찍은 가시가 달린 듯 더 고통스럽고 아프게 하겠죠. 오히려 행복했기 때문에 앞으로 평생을 행복했던 때를 떠올리며 더 고통스럽게 될 것입니다.

 

잘해주지 말지.

다정하게 말하지 말지.

어쩌면...

어쩌면...

행복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만들지 말지.

 

사실은 여자라는 걸 알아챘음에도 모른 척하고, 이제는 키도 더 크고 힘도 더 세져 이길 수 있게 된 가슴 속 거대했던 명영이 자신보다 작고 약해져 지켜주고 싶은 사람이 되어버려, 속으로 몰래 사모하지만, 결코 같은 자리에 있을 수 없는 분명한 신분의 틀 속에서 자신은 더 비참해질 텐데.

 

 

복아야..!! 복아야...!!

 

(복아) 괜찮아요, 울지 마세요 도련님. 울지 마세요. 

 

복아야... 나는 왜... 나는.. 왜!!!

이렇게 태어났을까...!!

 

태생적 한계와 절망. 복아는 노비로 태어났기 때문에 스스로 불행해질 거라고 태생을 저주하고 자조했지만, 이는 자기 혼자만의 고민과 고통이 아니었죠. 명영은 여자로 태어났기에 사실은 과거를 볼 수 없었고, 때때로 그러한 사실은 칼날처럼 마음을 비집고 들어와 너는 여자야. 과거를 볼 수 없어. 여자이기 때문이야. 라는 현실을 끌어올리죠. 나는 왜 이렇게 태어났을까.

 

그 날

나는 왜

이곳에 따라온 걸까.

평생을 불행에 시달려놓고.

그게 얼마나 커다란 고통인지 누구보다 잘 알면서.

왜 똑같은 고통을 겪게 만든 거야!!

그 날

나는 왜

이곳에 따라온 걸까.

나는 왜...

나는 왜...!!

 

제가 대신 볼게요. 도련님이 글을 알려주시면, 제가 도련님 이름으로 시험을 볼테니까, 같이, 계속 공부해서-

궁으로 함께 들어가요. 

 

당신을 떠날 수가 없을까.

 

같은 날, 같은 고민과 후회. 자신은 행복할 수 없고, 비참해질 뿐이며, 명영은 과거를 보러 떠나게 되어 혼자가 될 것이니, 이제 그만 떠나자고 마음 먹었지만 그 고통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자신이 그러한 경험을 해본 적 없는 명영에게 같은 고통을 주게 될 것이라는 남을 생각하는 마음은 되려 그 자신을 더더욱 아프게 했습니다.

 

그래서 복아는 다시 돌아왔죠. 마음은 한가지 면만 있는 것이 아니므로, 하나는 후회와 미안함으로, 하나는 사랑과 미련의 마음으로. 같이 있고 싶어서 도련님의 이름으로 시험을 보고자 같이, 그리고 계속 공부해서 함께 궁에 들어가고 싶고, 그런 마음 때문에 떠나고자 해도 달 밝은 밤 환히 빛나는 밤 하늘과 그 별빛 아래 훤히 보이는 내가 갈 수 있는 길을 보고 내가 가야할 길을 가서 명영에게 돌아왔던 거죠. 

 

이걸 미련이라고 부르면 미련이 되겠지만, 난 이걸 희망이라고 불러. 

별들은 작고 멀리에 있지만 반드시 그 자리에 존재해. 그리고 그건 우리에게 길을 안내하지. 

 

(복아) 별은 하늘에 있고 제 발은 땅에 있어요. 눈앞은 어둡고 길은 너무 험해요.

 

걱정마, 복아야.

우리가 배운 모든 것이 네 길을 밝힐 테니.

넌 이미 많은 걸 알고 있어, 네가 안다는 걸 모를 뿐이지. 네가 정말 아무 것도 모른다면, 내가 널 혼자 돌려보낼 리 없잖아. 

날 믿지, 복아야? 나도 널 믿어. 네가-

다른 사람들에게 훌륭한 세상이 되어줄 거라는걸.

 

아무리 많은 것을 알아도 안다는 것을 모른다면 알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명영은 복아에게 자신이 어디에 있고 어디로 가야할지 알려주는 별이었지만 그 명영이 떠난다면 자신은 다시 어두운 세상 속에 내던져져 돌아가게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하지만 명영은 복아를 새로운 별로 만들었고 복아는 그걸 몰랐을 뿐이죠.

 

별은 타인에게 길을 알려주고, 별이 되어 누군가에게 훌륭한 세상이 되어줄 수 있습니다. 저 위에 복아가 앞이 보이지 않는 한설에게 별, 세상이 되어 가야할 길을 정확히 알려주게 되는 것은 명영의 이러한 가르침을 이어 받았기 때문입니다.

 

(복아) 이제 겨우 글자 배웠는데 벌써 이렇게 비단옷을 입어야 하는 이유가 있나요? 지금 당장 시험 보러 가는 것도 아닌데... 으이 어색해.

 

복아야, 옷차림은 단순히 신분을 드러내는 수단이 아니야. 그저 비단옷을 입었다고 남들이 널 양반으로 볼 거라고 생각하면 안 돼. 옷에 어울리는 자세를 갖춰야지!

 

(복아) 근데 뭐 대충 비단 옷 입으면 양반으로 보지 않나요? 양반이라고 다 품행이 바른 것도 아닌데.

 

그런 사람이 되지 않으려고 배우는 거니까. 네가 입은 옷을 통해서 예절, 기품, 자세, 몸가짐, 행동가지를 익히는 거야. 삶은 항상 그 자체로 우리에게 많은 걸 배우게 하잖아?

 

(복아) 뭐...뭔 소린지 모르겠어요.

 

후후 지금은 어색하겠지만, 언젠가는 이 옷에 잘 어울리는 네가 될 거라 믿어.

 

도련님은... 분명히 해낼 수 있을 거예요. 저는 도련님을 믿어요.

 

고마워 복아야. 이젠 그 옷이 아주 잘 어울리는구나.

 

벼는 익을 수록 고개를 숙이고, 기품과 품위는 행동가지에서 나타나죠. 단지 어떻게 입고 어떤 모양새를 하느냐가 아니라, 그 안에 든 것이 자연스럽게 밖으로 보여지는 것에서 우리는 그 사람의 품위를 느끼는 겁니다. 복아는 노비로 태어나 노비로 살아왔지만, 명영과 함께 공부하고 보고 배우면서 지성인의 품격을 갖춘 것입니다. 믿어주고 이끌어주는 훌륭한 스승을 두었으니.

 

인간은 누구나 약해. 어느 부분이, 어느 순간이, 단드시 약해. 인간은.

완벽한 인간이란 건 없어.

하지만 나의 약점은, 나의 불행은, 나와 같은 고통을 겪는 타인을 이해할 수 있게 하고, 너의 불행이 나의 불행이 되게 만들지.

그리고 그건 날 강하게 만들어.

네가 소중하니까.

너를 위한 강한 내가 되는 거야.

 

명영에게 복아는 이토록 소중한 존재입니다. 복아를 위해서 강해질 수 있었던 것이죠. 사람의 마음은 결코 갈할수만은 없기에 서로가 서로를 아끼는 마음에 약점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서로 헤어져 명영은 과거를 보러갔고, 복아 또한 결국 명영을 찾아 나서기 위해 길을 떠나게 된 것이죠.

 

서로가 서로의 약점이 되었지만, 그러한 약점이, 상대를 소중하게 여기기 때문에 더 강한 자신이 되는 겁니다. 복아가 힘들 때 명영이 손을 내밀어줬고, 명영이 힘들 때 복아가 희망이 되어주었죠. 서로가 서로를 붙잡고 넘어지지 않게, 떨어지지 않게 해줬다는 것이 그들은 성장하고 강해졌다는 증명입니다. 

 

 

이러한 명영과 복아의 관계 뿐 아니라 작품 속에 등장하는 명영-암주, 갑연-갑희, 영호-이청, 이청-춘복, 홍화-정기, 동죽-하난 등의 대비되며 입체성을 더더욱 부각시키고 극대화시키는 조합들에 대해서도 나름의 해석과 설명을 하면서 의미를 서술하고 싶지만, 명영과 복아만으로도 이렇게 길어질줄 몰랐던지라 엄두가 나지 않는군요.

 

어찌됐든 가담항설에서 주요하게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각기 다른 신분과 상황에서 서로간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간극을 어떤 이들은 진심과 배려를 통해 좁히고 이해하는 과정과, 어떤 이들은 반복과 갈등으로 그저 이기려 하는 싸움이 되는 또 하나의 대비가 발생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두가지 규모 다른 대비양상은 작품의 활동성을 구조적으로 보이게 하는 동시에 더더욱 입체적이고 간결하게 이해된다는 점에서 작품 구성의 뛰어남을 되새겨보게 됩니다. 만들기는 쉽지만 그게 입체적으로 보이게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고, 자연스럽게 배치하고 구성한다는 점에서 더더욱 작가의 역량에 놀라울 따름입니다.

 

심지어 그 뿐만이 아니라 컷 구성과 그림의 연출은 거의 예술적이라 여겨질 정도인 씬들이 있고, 그것을 수식하게 되는 문장들은 하나하나 버릴 게 없고 더할 것 없는 것들이니, 단지 경제적이라고 할 수도 없을 정도이죠.

 

 

정말이지, 이 작품 가담항설에선 그러한 보석 같이 빛나는 문장들이 사람의 마음을 정확히 짚어내고,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명확히 이해시킵니다. 그러한 통찰력은 아무나 가질 수 없기에 뛰어난 철학자인 것이고 그러한 문장력은 아무나 가질 수 없기에 뛰어난 작가인 것입니다. 이게 그 랑또라이로 불렸던 그 작가가 맞을까 싶을 정도로 대단한 역량입니다.

 

 

각기 다른 입장과 위치에서 세상을 보고 해석하는 것은 그만큼 세상의 복잡성을 보여주는 것이고, 사람의 마음은 같은 것을 보고 같은 세상에 있어도 서로 다를 수밖에 없음을 극명하게 드러내어 묘사하고 있죠. 명영과 암주가 달랐고, 갑연-갑희와 명영-복아와 달랐습니다. 세상 자체가 완전히 다른 세계였어요.

 

이들이 아니라도, 누군가는 축복 받으며 태어나 행복 속에서 자랐지만, 누군가는 축복 없이 태어나 고통과 두려움 속에서 아득바득 살아오며 자란 사람도 있는 법이죠. 이들의 세상은 같은 세상이지만, 사는 세계는 완전히 다릅니다. 그렇기에 선의의 신념을 담은 명영의 세상과 갑희의 세상이 다른 겁니다. 

 

인간에게 배신 당하고 춘매를 잃은 신룡의 세상 또한 그렇습니다. 겪기 전에는 전혀 알 수 없고, 될 수도 없었던 내가 하루 아침에 되는 경험은 누구도 겪고 싶지 않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는 그런 경험이죠. 상실喪失은 잃어버리는 것이라면, 상심傷心은 마음을 다치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룡은 마음喪心을 잃었습니다.

 

그런 마음을 잃어버린 사이코패스가 가진 유일한 감정이 바로 분노죠. 추국이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고 단지 기억만 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마을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마음 없는 지성은 분노와 광기에 빠진 괴물보다 더 잔혹한 괴물입니다.

 

인간이 아닌 신룡은, 마음 없는 신룡은 괴물인 셈이죠. 그런 괴물이 통치하는 세상이 어떻겠습니까? 그곳이 곳 지옥인 셈입니다. 그러한 지옥. 신룡이 그리는 인세의 지옥은 매우 소름끼치는 곳이죠. 

 

 

아주 예전에 들었던 말인데, 정확히는 기억이 나지 않아 개략적으로 서술하자면, 예술은 시대에 따라 변화했고, 과거 그리스적 기승전결에 따라 카타르시스, 감정적 전율을 느끼게 하는 작품과, 사회비판적 불편함을 느끼게 하여 시대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예술로 구분을 지은 내용인데, 저는 신룡이 그리는 인간세상에 대해 그러한 것을 떠올렸습니다.

 

너는 숱한 인간들이 어째서 나를 죽이려고 하는지 알고 있느냐.

내가 폭정을 휘두르고, 수많은 이들을 죽였기 때문에?

내가 죽인 자의 측근이 나를 향한 복수를 하려고?

아니면 새로운 권력을 잡기 위해서?

정의를 외치고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해?

아니, 날 죽이려고 하는 모든 이유는 오로지-

내가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내가 영생의 삶을 가진 불로불사의 몸이었다면 그 누구도 날 죽이러 오지 않았을 거다.

인간은 오로지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만 움직인다. 나라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든, 반드시 그 제도 하에 이득을 보는 자가 있고, 그렇지 않은 자가 세상을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바꾸기 위한 싸움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어떤 방식의 태도를 취하든, 누군가는 반드시 나를 죽이려 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공포와 절망으로 통제하려 한다.

어떤 명분을 가진 인간이든, 한치 앞이 보이지 않는 끝없는 어둠 속에선 절대로 섣불리 움직일 수 없다.

깊고 고요한 어둠은 인간의 두려움과 상상력을 자극하고 스스로를 공포에 몰아넣으며 생각과 행동을 위축되게 만들기 때문이다.

백매야.

과거의 나는...

춘매를 한없이 사랑하였으나, 그것은 그때의 춘매를 그때의 내가 사랑한 것이며, 내가 그리워하는 것은 그때의 그 순간임을.

하지만 다시는 그때로 돌아갈 수 없음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춘매의 시간은 그날로 멈추었지만, 나는 그 후로 9년을 더 살았고, 나는 춘매에게 그때의 내가 아니며, 나 또한 그때와 같은 마음으로 춘매를 대할 수 없다.

춘매가 알고 있던 세상과 내가 알게 된 세상은 완전히 다른 것이고, 춘매의 이상과 나의 이상은 더 이상 동시에 공존할 수가 없는 것이 되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것은 내게 춘매를 다시 살려내길 간절히 바라면서도 바랄 수 없게 만들었다.

하지만 나와 사군자는 오백 년을 넘긴 기도로 영원히 늙지 않고 병들지 않는 불로의 몸을 가졌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육신일 뿐이며, 무엇으로도 죽지 않는 불사의 몸인 것은 아니다.

오직 춘매만이 나와 사군자를 불사와 다름이 없는 몸으로 만들 수 있다.

춘매는 생명을 만들어내는 봄의 화신으로 춘매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우릴 죽음에서 부활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나의 천명은-

백성을 위한 완벽한 신이 되는 것이다.

춘매는 언제나 나에게 완벽한 신으로서의 용서와 자비를 말했지만, 용서와 자비는 비열한 자들을 위한 기회이고 구실이며, 오히려 압도적인 공포야말로 어리석은 인간들이 저지를 잘못을 사전에 차단하는 것이다.

애초에 이 나라의 평안을 나라는 단 한 사람의 선의에 의존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느냐?

인간이란, 다른 이의 잘못은 용서없는 처벌을 받길 원하면서 자신의 잘못에는 자비와 관용을 바란다.

자신의 비열함은 삶의 요령으로 포장하면서 타인은 원칙을 지키길 바라며 배신하면서도 배신당하고 싶지 않아하고, 악습인 걸 알면서도 자신이 이득을 보는 순간에는 그대로 답습하며, 공정한 기회보다 공평한 불행을 바라는게

바로 인간이다.

인간 본연의 성품이 저열하고 추악하기 그지없는, 지옥에나 걸맞는 것이라면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어주는 것이야말로, 완벽한 신이 해야 할 일이다.

그러므로 나는 인간들에게 지켜지지 않는 원칙과 명확하지 않은 규칙으로 어둠 속에서 눈을 멀게 하고,

단 한 번의 실수도 용서하지 않는 처절한 처벌로 한 걸음도 섣불리 내딛지 못하게 하며

불공정한 기회와 불공평한 결과로 포기와 체념에 익숙해지게 하겠다. 

그런 세상이 삶이 되고, 그 삶에서 얻은 경험이 자식에게 '삶이 준 교훈'이란 이름으로 대물림되며,

그것을 익혀 자란 모두가 그 삶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순응하지 않는 자를 배척하게 만들어

모두가 자발적으로 틀 안을 벗어나지 않는 영원한 통제의 굴레를 만들려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춘매를 되살려

나의 불사로 하여금 인간들에게 완벽한 절망을 안겨주고,

스스로를 끝없는 어둠 속에 가두게 하겠다.

 

... 정말 공포스럽기 그지 없는 말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장면 중 하나가 바로 명영과 복아의 진심이 드러나는 장면과, 춘복이 아들을 잃고 깨닫게 되며 다시 청이를 구하러 가는 장면과 더불어 신룡이 진심을 드러내며 세상을 어떻게 만들 것인지 '천명'하는 이 장면이죠.

 

이 말들은 어느 시대든 그럴 것이지만, 분명한 인간과 사회의 원리, 원칙을 이해하고 그 핵심을 정확하게 꿰뚫으며, 초인 독재자가 존재한다면, 그리고 그가 악하다면(혹은 악한 신념을 가졌다면) 어떻게 통치될 것인가를 묘사한 것과 다름 없다고 봅니다. 더불어 이러한 서술로 그 핵심적 요소들을 나열한 것은 독자로 하여금 그러한 사회를 상상하게 만들고, 자연히 현 사회와 비교하게 만들거나 연상하게끔 합니다.

 

이는 동양 판타지라는 작품임에도 사회적 비판이 가장 날카롭고 차갑고도 뜨겁게 벼려진 송곳. 아니, 작두처럼 휘둘러지는 장면이 아닌가 싶을 정도죠. 어지간한 사회비판 작품보다도 더 날카로웠습니다. 

 

그러한 사회를 바라는 집단이 현실에도 존재했고, 지금도 존재하고 있으며, 그러한 원칙 아래 정치와 통치가 작동한다는 점은 이 작품에서 말하는 지옥 같은 세상이 단지 작품 속 세상, 말 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그리스적 기승전결을 정석적으로 따라가는 판타지소년 만화인 동시에, 날선 비판성이 뚫고 나오는 현대적 문학작품이기도 하다는 평가를 주고 싶습니다.

 

물론 이런 작품이 한 두개도 아니지만, 사람의 감정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면서도 단지 감정만을 건드리지도, 어중간한 비판만을 하며 사실, 혹은 해석만을 나열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작품성을 거대하게 팽창시키고 있죠.

 

 

그리고 꼭 이야기하고 지나가야만 하는 요소가 있는데, 바로 판타지 장르답게 여러 마법 같은 능력을 사용하는 데 있어서 작가가 구축해대고 창조해낸 능력의 설정입니다.

 

이게 왜 꼭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냐면, 기본적으로 가담항설은 문학이라는 것을 근간으로 세계관의 능력을 만들어낸 작품입니다. 따라서 작품 내에서 사용되는 여러 능력들은 그러한 문학의 구성요소, 말과 글의 구성요소를 모티브로 따와서 만들어낸 것들이거든요.

 

능력의 수준은 지식의 깊음에서 나오고, 각인과 같은 능력을 사용하기 위해선 그에 대한 지식과 이해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하죠. 또한 결계 같은 능력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랑또가 정말 대단한게 다른 양판소나 일본산 라노벨 같은 곳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유치한 능력이 아니라 현실에 존재하는 개념을 설득력 있고 개연성 있는 능력으로 가공해내서 이용한다는 겁니다. 각인, 결계, 독안과 같은 능력을 문학과 접목시켜. 아니, 문학의 개념을 통해 각각을 구체적인 능력으로 만들어냈는데, 그러한 것들이 어떻게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설득력 있게 서술해냅니다. 

 

결계와 같은 것을 만들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묘사력인데, 무언가를 정확히 묘사할 수 없다면 그것을 타인에게 전달할 수 없죠. 그렇기 때문에 결계와 같은 자신의 의지, 상상을 타인에게 전달하기 위해선 그만큼 구체적이고 와닿는 묘사력이 필요하게 됩니다. 그리고 묘사를 더 정확하게 하기 위해선 많은 것을 알아야 하는데, 단순히 단어를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독서를 통해지식을 쌓고, 직접 보고 들어 견문을 넓혀 식견을 만들어야 한다고 하죠.

 

독서를 통해 지식과 통찰력을 기르고, 직접 보고 겪는 현실을 통해 자신이 아는 것을 단지 지식으로서 아는 것이 아닌, 몸으로 직접 느끼며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글쓰기, 문학 또한 그러한 맥락에서 좋은 묘사력이라는 것은 여러 종류의 경험에서 나오는 법이죠.

 

많은 글을 읽어봐야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고, 직접 겪어본 것을 더 정확히 묘사하며, 직접 많이 써봐야 그러한 시행착오를 통해 더 좋은 글, 더 훌륭한 글, 뛰어난 문장력이 만들어지죠. 작품 내에서도 시 짓기 또한 결계사들의 중요한 수련이라고 합니다. 

 

능력 중에서 개인적으로 독안이라는 개념을 참 좋아하는데, 독안으로 결계를 읽는 것을 독력, 이를 풀어내는 것을 해력이라고 합니다. 합쳐서 독해력이라고 하죠. 독해력은 현실에서도 글을 읽고 해석하고 이해하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단지 읽기만 해서는 무슨 의미인지 모르고, 이해하기 위해선 해석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읽을 수 있어야 하죠.

 

뛰어난 독해력을 가졌다는 것은 문장의 기본 단위를 논리적으로 분해해서 파악하고 그 구성과 성분을 이해하는 지적과정을 잘 해낸다는 것입니다. 마땅히 뛰어난 독해력을 갖추기 위해선 그만큼 뛰어난 지성을 필요로 하고요. 그러한 것을 갖추어 많은 것을 알고 잘 쓴 글을 쓰며, 잘 이해하는 사람을 보고 우리는 뛰어난 식견을 갖췄다고도 합니다. 

 

가담항설에 나오는 비현실적인 능력이 말의 힘, 글의 힘에서 나온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독해력이라는 현실에 존재하는 문학적 개념을 판타지적으로 해석하여 독력과 해력이라는 개념으로 재가공하는(비단 독안 뿐만 아니라 다른 능력들도.) 랑또의 창의력은 정말 참신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무엇보다 대단한 점은, 그것들이 결코 유치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전혀 있어보이기만 하지도 않다는 것 또한이요. 넘치치도, 부족하지도 않은 그 상태에서 발휘되는 작품 완성도의 완전성은 독자로 하여금 압도되게 하지 않나 싶습니다.

 

 

더불어 랑또 작가, 가담항설의 특기할만한 점은, 문학성에 있어서 일본 작품들과의 차이점인데, 일본 작품들의 경우 작가의 사색이나 통찰이 뛰어나도 철학적 정리가 잘 되어 있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대신 감정을 잡아내는데에는 꽤 일품인 경우가 적지 않죠. 다르게 말하자면 말로 정리하는 건 잘 못해도, 감각적으로 이해시키는 건 나름 잘하는 편이라는 겁니다. 물론 그것도 잘 하는 작가들이 그런 거긴 합니다만..

 

반면 랑또 작가는 그러한 사색을 말로써 아주 잘 정리해서 우리에게 제시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글(말)로 정리해서 소개할 수 없다면 그것은 진짜 자신의 지식이 아니고, 자기가 진짜 알고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하는 편인지라, 단지 일본 작가들의 문학적 이해도, 철학적 정립성이 떨어졌기 때문에 자신이 느끼고 상상하고 직간접적으로 감각하는 그 감정과 감성들을 글로 잘 표현해내지 못해서 어떤 면에선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느낌에 답답하기도 할 때가 있더군요.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랑또 작가의 가담항설은 그러한 감각을 정확하게 글로 표현하고,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문학적 표현의 형식으로서 아주 정확하게 정리해서 대사를 뽑아낸다는 점에서 굉장한 철학가인 셈이죠. 그렇다고 독자의 감정과 감성을 잘 못잡아내느냐? 그것도 결코 아닙니다. 아주 능수능란하게 가지고 논다는 점에서 괴물 같은 작가이기까지 하죠. 일본식 신파와 심각한 척 분위기 잡는 것은 전혀 없고, 그 인물들의 깊은 캐릭터성을 통해 우려내기에 어색함도, 작위성도 느껴지지 않죠. 결코 말을 늘이지도, 줄이지도 않기 때문에 각각의 대사를 음미할 수 있고, 음미하면할 수록 캐릭터성의 깊은 맛에 큰 매력을 느끼며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대사를 허투루 쓰질 않더군요.

 

 

가담항설이라는 작품처럼 훌륭한 작품은 참으로 욕심이 납니다. 정말 각각의 캐릭터와 구성, 인물관계가 흥미롭고 재미있어서 하나도 빠짐없이 설명하고 이야기하고 싶어지게 된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갑연, 갑희나 암주, 홍화, 정기, 이청, 영호, 춘복 등.. 설명하고 해석해보고 싶은 캐릭터들이 너무 많습니다. 하지만 그러기 너무 힘들죠. 글도 길어지고. 보는 이에게 욕심이 나게 만드는 작품이 좋은 작품이겠죠. 전 이 작품을 현재 연재되는 작품 중 가장 수준이 높고 뛰어난 작품이라고 평가합니다. 당연히 그런 창작물을 만드는 랑또 작가에 대한 평가는 더더욱 높아야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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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리뷰는 작품에 대한 내용누설이 있습니다. 

 

 

작품은 살리에리의 고백으로 시작합니다. 자신의 죄악에 대한 죄책감으로 절규하듯 뱉어나다 끝내 자신의 목을 그어 자결하려고 하죠. 그러나 하인들에 의해 구조 당하고 정신병원에 갇히게 됩니다. 그리고 신부가 찾아와 자신의 이야기를 고백하라고 권하죠.

 

작품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천재성이 곳곳에서 부각되곤 하는데, 여기서부터 모차르트의 천재성은 부각됩니다. 신부에게 자신의 음악을 들려주었으나, 알지 못하고, 모짜르트의 곡을 들려주자 너무나도 쉽고 열정적으로 칭찬하죠. 유력한 궁정악장이자 작곡가였던 살리에리의 곡을 기억하는 사람은 이제 없고, 오직 천재의 곡만이 수 십년이 지나서도 기억되고 있음을 묘사합니다.

 

그렇게 자신의 고백을 통해 과거의 이야기가 시작되죠.

 

 

실제 역사가 어떠했든, 작품이 수 십년이 지난 지금까지 명작이라 여겨지는 이유는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정할 것입니다. 그만큼 잘 만들어졌기 때문이겠죠. 특히 작품이 끝날 때까지 살리에리의 질투라는 속성은 아주 높은 수준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질투라는 건 사람을 망치죠. 자신을 더 낮은 수준으로 끌어내리고, 더 추하게 만들죠. 살리에리는 궁정악장으로 왕정의 예법과 정치에 박식한 모습을 보입니다. 그러나 그런 격 있고 귀족적, 신사적인 태도의 모습과 대조되게, 아마데우스의 모습은 천박하고 방정맞죠.

 

그리고 그의 음악을 들은 살리에리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신의 범속함을, 평범함을. 그리고 질투는 거기에서 시작하죠. 자신의 노력과 열정이 부정당하는 현실 속에서 진정한 천재에 대해 절대 넘을 수 없는 벽임을 알았을 때, 열등감이 발생하고, 질투가 생깁니다. 그가 없었다면, 그만 없었다면. 자신이 그와 같고 싶고, 그 재능을 빼앗고 싶지만, 결코 그럴 수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됨을 압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자신을 끌어내리는 것이 질투이고, 추하게 만드는 것이 질투이니, 그러면 안 됨을 알면서도 결국 그렇게 하게 되고, 그러기 위해 변해가는 자신의 모습은 역겹기 짝이 없죠.

 

살리에리는 그러한 열등감과 질투를 이겨내지 못했고, 모차르트의 성장과 성공을 의도적으로 막았습니다. 심지어 한 순간의 충동이었으나, 볼프강의 아내에게 몸을 요구하기도 했죠. 물론 바로 내보내긴 했지만, 모차르트의 아내인 콘스탄체의 수치심은 돌이킬 수 없습니다.

 

 

내가 오직 원했던건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이었소. 하느님은 내게 그 열망을 주셨지만... 날 또한 벙어리로 만드셨소. 어째서? 말해 보시오. 하느님께서 내가 주님을 음악으로 찬미하는걸 원하지 않으셨다면 왜 내 몸을 좀먹는 그런 열망을 심으셨는지... 그러면서 왜 재능은 주시지 않으셨는지 말이오.

 

영화 『아마데우스』 중에서 -

 

 

모차르트의 행동은 오만하지만 자기 영역에 있어서만큼은 그것이 허용될 정도의 능력이 있었고, 그에 대해 자신만만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오만함은 사람들의 반감을 불렀죠. 너무 경박하고 방종하여 높은 사람들이 그의 태도를 싫어했지만, 천재 모차르트는 자유로웠던 것이고, 자유롭고 했던 겁니다. 그는 음악을 제외하면 생활과 인간관계에 있어서 어색하고 뻔뻔했지만, 그만큼 순수했죠. 

 

그는 진정 음악사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하나였습니다. 이러한 작품에서 묘사되는 모차르트의 특이성은 그가 범속하지 않은 천재임을 드러내는 장치이기도 하죠. 그러한 재능은 더 높은 수준의 음악 작품을 추구했고, 그러한 추구는 법, 통속에서 벗어나고자 했으며, 이러한 성향과 추구는 왕실과 다른 인물들간의 충돌이 벌어지는 이유이기도 했었습니다.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묘사하는 여러 장치들이 작품 속에서 많다고 했는데, 살리에리와 첫 대면을 할 때, 처음 들은 음악을 듣자 마자 똑같이 연주하고, 그 이상으로 편곡하여 더 다채롭고 아름다운 음악으로 진화시켜버리는 모습도 그렇고, 특히 인상적인 것들은 술집에서 거꾸로 피아노를 연주한 부분에서, 그리고 이러한 사소한 것보다 인상적인 부분은 마치 일상 그 자체가 음악의 영감이 된다는 듯, 장모님의 비난에서 음악적 영감을 받고 승화시켜 그 유명한 마술피리의 아리아 중 하나인 밤의 여왕의 아리아가 나왔죠.

 

그리고 중간 중간 곡 작업 중 단지 악보를 쓸 때에도, 보기만 함에도 머리속에서 음악이 완벽하고 충실하게 연주되죠. 이 부분이 정말 예술적이고 천재성을 부각시키는 연출로 여겨지는데, 그의 말처럼 머리 속에 곡이 있다. 그리고 난 그것을 옮겨 적는 것일 뿐이다. 하는 것처럼 그에게 있어서 음악이란 이미 완성된 것이고, 완전하게 창조되는 것이었습니다.

 

재밌는 점은 그러한 것을 살리에리는 통찰해냈죠. 단지 악보만 보고, 수정한 부분이 없다. 그저 처음부터 완성되어 있었다. 라고요. 그만큼 그의 음악적 실력이 출중하다는 점인데 말이죠.

 

 

그러한 천재성은 살리에리로 하여금 극도의 열등감을 발생시켰고, 심화되어 질투로 이어졌으며, 그의 삶을 파괴하게 되었습니다. 천재성이 천재를 죽인 거죠. 모차르트의 형편이 좋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밥줄을 끊으려 했고, 아버지의 죽음이 그를 괴롭게 한다는 것을 알고 정신적으로 괴롭히며, 종래엔 모차르트의 심력이 다해 죽음에 이르게 하죠.

 

하지만 살리에리의 수작에 의해 그렇게 되었음에도 그의 천재성과 음악성만큼은 누구보다 깊게 이해하고 인정하고 있었던 것 또한 살리에리였습니다. 본인이 회고하듯, 자신의 수작에 의해 공연은 몇 차례 할 수 없었지만, 그때마다 자신은 가서 관람을 했다고 하죠. 마치 자신만 그것을 독점하여 즐기고자 하고 싶기에.

 

그것이 질투의 속성입니다. 자신이 가질 수 없기에, 가지고 있지 않기에 생기는 복잡함. 가질 수 없기에 고통스럽고, 가질 수 없기에 그것에서 해방되기 위해 없애버리고 싶지만, 그것을 즐길 수 있다면 환희마저 느끼는 그러한 것. 살리에리는 모차르트의 재능을 가질 수 없기에 모차르트를 싫어했고, 싫어하기에 죽이고 싶어했으며, 그러면서도 그의 작품을 사랑했습니다. 눈앞에 보이는 모차르트는 음악에선 결코 가닿을 수 없었지만, 손에 닿는 인간이었고, 그렇기에 존재를 보는 것 자체로 자신을 괴롭게 했으니까요. 그럼에도 작품만큼은 음악인으로서 황홀했고.

 

결국 살리에리는 자신의 질투에 굴복했죠. 자신의 열정, 노력을 바쳤으며 기도를 통해 자신의 소원이 이루어졌다고 믿었고, 충실히 독실했던 살리에리가 그렇게 망가졌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기독교의 7대 죄악 중 하나가 질투라는 점이죠. 질투가 사람을 망치고, 사람을 죽이기 때문입니다. 독실했지만 천재를 옆에서 지켜봐야 했던, 그것도 방종하기 짝이 없는 자의 절대로 따라갈 수 없는 재능을 보아야 했던 범재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부담이었을지도 모르겠군요.

 

그렇게 살리에리는 신을 부정하고자 했습니다. 신이 자신을 버렸다면, 신의 거룩함을 노래할 수 있는 도구로 자신이 선택되지 않았다면 신을 조롱하고자 했습니다. 신의 아름다움을 음악으로 표현해주는 진짜 천재인 모차르트를 죽임으로써!

 

 

모차르트는 뛰어난 천재이자 음악가였지만 인간적으로 부족한 면이 많았습니다. 예의, 예절, 인격, 생활.. 아내를 사랑했지만 가장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하진 못했습니다. 자유로운 천재에게 그러한 것은 너무나 중요한 일이 아니었으니까요. 그래도 다른 것들에 비해선 중요했으니 그가 괴물이 아니라는 증거였지요.

 

앞서 말했듯, 그의 예의와 예절, 금기에 대한 도전은 그가 천재로서 자유로웠고, 창조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더 많은 시도와 더 많은 도전이 자신의 음악을 더 다채롭게 해주는 도구이며, 그러한 것을 통해 더 높은 수준의 음악을, 더 완벽한 예술을 펼칠 수 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오만한 천재는 반감을 사기 쉽고, 뛰어난 천재는 시대를 앞서 나가기에, 빈의 사람들은 그에게서 등을 돌리게 되기까지 합니다. 이해할 수 없었거든요.

 

아버지의 죽음은 그에게 크나큰 음악적 변화를 이끌어냈죠. 음악은 자신의 감성에서 창조되는 바, 그만큼 힘들고 괴로웠음을 보여주는 일면입니다. 살리에리는 그의 음악을 통해 그의 심경과 변화를 읽어냈고, 그를 죽이고자 하는 계획이 실행됩니다.

 

아버지가 썼던 가면을 하인에게 뒤집어 씌우고 진혼곡을 작곡하게 하죠. 바로 자기 자신의 진혼곡이 될 그 곡을.

 

인정 받지 못하는 모차르트는 점점 망가져갔고, 가정형편의 어려움은 아내와의 신뢰마저도 갈라지게 합니다. 아내를 배신하고 친구와 술마시고 놀 때 아내는 떠나갔고, 가정에서 한번 더 실패한 모차르트는 점점 더 힘들어져가죠. 공포스러운 아버지의 가면을 입은 자는 독촉하고, 불길한 곡을 쓰면서도 친구의 공연에서 연주하다 결국 쓰러집니다. 살리에리가 그의 집까지 옮겨주었으나, 결국 작업 도중 사망하게 됩니다. 그의 심력이 다해버린 것처럼 묘사되죠. 다만 진혼곡은 완성하지 못한 채 죽었고요.

 

 

살리에리의 회고는 모차르트의 장례식과 함께 끝났습니다. 살리에리는 그의 죽음에 죄책감을 느꼈습니다. 자신의 아이돌을 자신의 손으로 죽였으니까요. 추악한 죄인으로서. 그의 계획은 성공했고, 신을 조롱하고 욕보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거기에 즐거워했죠. 광오하게도, 자신이 신에게 한방 먹였음을 그는 믿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마치 자신이 신이라도 된 듯, 혹은 신과 같은 권위를 가진 자인양 다른 환자들에게 너의 죄를 사하노라며 웃으며 퇴장합니다. 그것은 모든 범속한 자를 대표하는 범인의 대표자로서의 권위이겠지요.

 

 

작품이 오랜 시간 동안 인정 받고 사랑 받는 이유는 그것이 시대를 초월한 감성과 심미성을 가지기 때문이겠죠. 그림과 음악이란 그런 것이죠. 영화에서도 그러한 예술성이 시대를 초월해 존재한다면, 아마데우스 또한 그러한 조건에 부합되는 작품이 아닐까 싶습니다.

 

고전적 미를 잘 살렸으며, 예술적인 감각과 감성으로 작품의 연출과 묘사를 이끌어낸 영화 아마데우스는 예술가의 일생과 인간의 감성을 섬세하게 작품에 담았죠. 그 구성, 연출, 묘사. 

 

앞서에서도 서술했듯이, 작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부각하고, 그러한 천재로서 사회와 규범에서 돌출되는 자유분방함을 보여줍니다. 심지어 그게 사치와 철 없음을 묘사하면서 그의 인격의 성숙을 비판하고 있음에도요.

 

처음 듣는 곡을 완벽하게 연주하는 것도, 그러한 것을 원작보다 더 다채롭고 더 아름답게 편곡하는 능력도, 모든 음악과 곡은 머리 속에 다 있어서 단지 옮겨적기만 하면 되는 비상함도, 작곡을 할 때 울리는 음악의 연출과, 악보를 보면 역시 연주되는 곡의 연출 등 그에게 음악은 최고의 음악가들에 비해 더 다양하고 다채롭고 황홀한 것이었습니다. 음악을 통해 신을 찬미하고자 했던 살리에리의 말처럼, 그것은 단연 신의 음성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안토니오 살리에리의 됨됨이와 성숙함, 사회적 존경에 대한 자격이 있음을 보여줬으나, 질투와 열등감에 빠져 파괴되고 몰락해가는 인격의 인간상은 더더욱 잘 묘사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찬미와 경외를 가지고 있으며 신실한 신자로서 자신의 소원을 들어준 하나님과의 약속을 충실히 이행했으며, 덕을 베푼 기독교인이었지만, 자신의 생활태도와는 전혀 다른 방탕하고 방종한 모차르트의 모습과 그러한 모습과는 전혀 걸맞지 않는 재능은 그에게 하여금 모차르트는 그의 재능에 자격이 없다는 생각도 들었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그의 음악을 동경하고 경배했으나, 그러한 작품이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라는 인간에게서 나왔음을 저주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저주는 그러한 찬미와 신의 음성을 대변할 도구로 신실하고 노력하는 자신이 아니라 범재에겐 불허되는 재능을 가진 천재 모차르트를 선택한 신에게까지 이르죠. 질투는 가속화되기에.

 

결국 범인의 한계를 넘지 못하고, 가져선 안 될 질투는 모차르트라는 천재를 죽이게 되었고, 자신 또한 32년간 죄책감 속에 갇혀 살다 정신병원에서 폐인이 되죠.

 

 

실제 역사와 차이가 꽤 있는 작품이지만, 단순한 작품으로서, 이만한 완성도와 예술성을 갖춘 음악 영화가 또 얼마나 있을까요. 단지 이야기로서, 작품으로서만 본다면 굉장한 걸작인 셈입니다. 고전 명작이라 이름 붙을만한 작품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죠. 

 

완성도 있는 짜임새의 극과, 섬세하면서도 도전적인 묘사와 직관적인 연출, 그것을 완벽하게 살리는 배우들의 정확한 연기. 감독판의 경우 3시간이라는 길이가 단점이라면 단점이지만, 너무 재밌어서 시간가는 줄 모르고 볼 정도의 영화죠. 도대체 이 작품에서 어디가 빠질만한 부분이 있었는가가 의문일 정도로.

 

마지막으로 범인의 대표자로서, 모든 범속한 자들의 평범함을 용서하는 살리에리의 판결로 글을 마칩니다.

 

 

난 세상의 모든 범인(凡人)을 대변한다오. 내가 그들의 대변자이지. 난 그들의 수호성인이야. 세상의 범인들이여! 내가 너를 용서하노라. 내가 너를 용서하노라. 내가 너를 용서하노라. 내가 너를 용서하노라. 내가 너희 모두를 용서하노라.

 

영화 『아마데우스』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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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리뷰는 작품에 대한 내용누설이 있습니다. 


오만과 편견을 읽은지 꽤 되서 내용이 아주 선명하게 기억나는 건 아니지만, 과연 걸작이라 칭송 받는 고전 연애소설이라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만큼은 기억에 남습니다. 


개인적으로 흥미롭게 여겨졌던 것은 작품 내의 등장인물과 사건보다는, 그것을 쓰는 필체에 있었습니다. 산문이기에 자유롭게 쓰여진 오만과 편견은, 개인적으로 어떤 면에선 감춤 없이 서술되는 표현에서 고전적인 맛을 느꼈습니다. 그러면서도 세련되었고 내용적으로는 그런 필체이기에 정확하고 잘 짚어낸 심리와 행동을 독자로 하여금 쉽게 이해토록 하며, 잘 구성된 짜임새의 작품으로서 어째서 200년도 전의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오랜 기간 전세계 다양한 독자들에게 후한 평가를 받을 수 있었는지 알만하게 했죠.


가장 구체적으로 그러한 고전적인 맛을 느끼게 해주는 부분은, 뭐 이건 번역의 차이이긴 하지만 ~~의 좋은 점을 나열했다. 같은 식의, 허례적인 표현들은 읽으면서 당시 사회 상류층과 젠트리들의 허례적인 태도를 느끼게 해주는 아주 좋은 요소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비단 번역(Good Thing; 좋은 점)이 저랬기 때문만은 아니지만, 뭔가 초등학생 애들이나 할 법한 표현 같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그게 그들의 허례적인 가치관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듯한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지요.



뭐 어찌됐든, 소설을 읽으면서 그래도 고전 소설은 고전 소설이기 때문에 현대적 가치관과 맞지 않는 부분들이 꽤 보였습니다. 결혼에 대한 의식과 가치관이 그렇지요. 다만 그렇기 때문에 제인 오스틴이 얼마나 선진적인 작품을 썼는지, 그러한 여성을 묘사했는지 잘 보여준 작품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남성들에게도 마찬가지였지만, 여성들에게도 결혼이란 전통적인 그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여자는 좋은 남자 잡아서 결혼해야만 하는 것이며, 여기에 있어서 정조나 처녀성과 같은 위신과 명예는 굉장히 중요한 요소이자 하나의 자산가치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작품 속 샬럿 루카스와 같은 여성은, 나름 현명한 편일진 몰라도, 자신의 못난 외모 때문인지 결혼에 대한 가능성이 높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 때문에 윌리엄 콜린스와 결혼해버립니다.


이는 그 당시의 좋은 결혼상대의 조건인 재산과 지위, 평판을 기준으로 하였고, 교구목사로서 높은 사회적 지위와 많은 재산, 더욱이 앞으로도 많은 돈을 상속 받을 가능성 등을 조건으로 하여, 루카스양에겐 최고의 결혼 대상으로 보였고, 그것을 이유로 그와 결혼하게 됩니다.


이에 대해 작품의 주인공인 엘리자베스 베넷은 샬럿에게 실망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고--물론 그 이전에 콜린스가 자신에게 청혼했다는 점과 더불어 나름 충격을 받았지만-- 현명한 대화상대를 잃고 싶지도 않으며, 좋은 친구와 데면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샬럿에 대한 감정을 금방 털어냅니다. 사실, 객관적으로 본인이 그에 대해 나쁘게 생각할 이유는 없었기 때문이죠. 본인 스스로도 그런 남자와 결혼을 했다는 사실에 대해 실망한 것이지 그 외의 조건은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것들이었으니까요.


이는 주인공 리지 베넷의 현명하고 주체적인 균형의식과 높은 판단력을 드러내는 장면입니다. 


뭐 각각의 등장인물에 대해 논하자고 한다면 너무 무의미한 지면을 할애해야되고 별로 중요한 게 아니니 넘어가도록 하고, 작품의 제목이 되는 오만과 편견은 참으로 중심적이다 싶은데, 애초에 그렇게 쓴 것이지만 엘리자베스 베넷의 편견과 피츠윌리엄 다아시의 오만으로 대표되는 그들의 결점과 특성을 그대로 서술한 것이 작품의 제목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진부한 제목이지만, 반대로 작품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훌륭한 제목이지 싶기도 하네요.



리지와 다아시가 처음 만나는 빙리의 파티에서 다아시의 첫인상은 정말 안 좋았죠. 오만하고 재수없는 태도는 마치 속 좁고 찌질하다는 듯한 인상마저도 줍니다. 상류층으로서 오만하고 자신과 격이 맞지 않는 이들을 깔보고 폄하하는 듯한 그의 태도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래도 굉장히 누구에게든 안 좋은 첫인상으로 시작하게 되죠.


하지만 이는 사실인 동시에 첫인상의 오류를 내포하는 시작이기도 합니다. 리지 베넷은 그런 다아시의 모습을 보고 거기에서 편견이 시작되거든요. 그런 편견은 다아시가 고백을 하는 시점까지 꾸준히 이어졌고, 다아시의 오만함이 리지를 평가절하하기 위해 관찰하면서 점점 무뎌지고 깍여나가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어버리는 과정에서 오만함이라는 단점 요소가 사라지는 원인이 될 때에도, 그러한 다아시의 관심과 관찰이 역으로 리지에겐 자신의 편견을 강화하며 다아시의 모든 행동이 타인을 깍아내리고 비난하기 위한 행동일 것이다. 라고 여기며 다아시를 공격합니다.


원래라면 기분 나쁠 법도한 태도이지만, 사랑이라는 것은 그것마저도 받아주는 이유가 되죠. 캐롤라인이 옆에서 다아시의 관심과 사랑을 끌어오기 위해 뻘짓거리를 할 때에도 그녀를 무시했지만 리지에겐 꾸준한 관심과 관용, 인내를 발휘했습니다.



그러다 다아시가 자신의 타는 듯한 감정을 참지 못하고 리지에게 고백하는 장면은 전기 부분과 후기 부분의 전개를 뒤바꾸는 작품의 중심적인 시점 역할을 하게 되는데, 이때의 대화도 참 재미있죠. 다아시는 자신의 고백을 리지가 당연히 받아들일 것이라는 오만함을 버리지 못했고, 리지는 기존의 편견대로 다아시를 공격합니다.


왜 이 부분이 재밌냐면, 이러한 서로간의 태도에 오만과 편견이 묻어 있기 때문인 동시에, 그러한 가혹한 경험에 감정적으로 매몰되지 않고 현명하고 침착한 지성을 발휘하여 스스로와 타인을 성찰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정말로 배울 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리지의 감정적 우월감에 도취되는 비난 행위에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도, 다아시 또한 그러한 가멸찬 비난에도 분노와 수치를 느끼지 않고 차분한 상태에서 신사로서의 의무를 발휘하여 자신의 생각과 사실을 적어 설명하고 설득하고자 하는 편지를 보냈다는 것이 말입니다.


리지는 이에 자신의 생각이 틀렸고 다아시가 생각보다 뛰어난 인품과 지성을 겸비한 사람임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사랑은 시작되어 버리죠. 그 동안 가진 편견에 따른 반감의 반동으로 그에 대한 진심과 가치를 깨닫게 된 엘리자베스는 다아시에 대한 조심스럽고도 뜨거운 감정을 가집니다. 다아시 역시도 그러한 경험을 겪었음에도 리지에 대한 감정이 변치 않고, 되려 할 수 있는 지원과 희생을 스스로 감수하면서까지 다가가려고 하고요.


제인-빙리의 결혼은 전통적 결혼관의 가장 훌륭하고 아름다운 예시라면, 위컴-리디아의 결혼은 전통적 결혼관의 가장 저열하고 천박한 예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리지-다아시의 결혼은 이러한 각기 다른 방향의, 그러나 같은 전통적 가치관의 결혼 사례를 앞에 두고 이루어지는 새로운 사례입니다.


결혼 대상의 외면적 가치인 재산과 외모, 평판, 지위보다는 애정과 존중, 신뢰와 공감이라는 내면적 가치를 중시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서로를 사모하고 결혼하게 되었으니까요. 당시 기준으로, 그러한 외면적 가치가 중심적인 이유로 기능하고, 내면적 가치는 서로 결혼한 뒤 저절로 생기고 가지게 되는 것으로 여겨지는 만큼, 리지와 다아시의 관계를 그만큼 선진적이고 진보적인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다아시의 오만이었던, 귀족 상류층으로서 자신과 격이 맞지 않고, 그 가족들의 천박함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이로선 과감한 결정이었고, 젠트리 계급으로서 내면적 지성과 통찰을 최고 규범으로 여기는 엘리자베스의 반지성적 편견이 깨지고 저열하다 여겼던 다아시의 진면목을 보며 선택한 달성적 결정은 그 당시 보편적 결혼관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것이었습니다.


다아시의 그러한 떨어지는 집안의 여식을 배우자로 삼는 것도 파격적이었고, 높은 사회적 지위와 평판, 재산을 보유하여 자신의 미래를 보장해줄 수 있는 남편감에 대해서도, 실리적이었던 루카스양과는 다른, 가치관이 맞지 않아 존경할 수 없다는 이유로 거부한 것은 역시 굉장히 파격적이었습니다. 


사회가 중요시하고 인정하는 조건을 거부하고 자신의 내면적 가치에 걸맞는 이를 인정하고자 하는 태도, 그리고 그러한 태도를 논리적이고 합리적으로 설명하며 납득시키고자 하는 여 주인공은 200년전 그 시대를 기준으로 과감한 것을 넘은 파격 그 자체였으며, 흔치 않은 캐릭터성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캐릭터성과 전개는 흔해 빠진 두 남녀의 갈등과 성장, 반성과 사랑으로 이어지는 틀과는 또 다른 내면적 가치의 교훈을 남기며, 당시 뭇 여성들에게 제시한 새로운 가치관의 전달이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지금도 흔해 빠진 남녀간의 사랑 이야기는 많지만, 이렇게 주체적이고 발전적인 여성상을 그린 작품은 의외로 많지 않다는 점을 본다면 이 작품이 가지는 가치과, 품는 가치는 20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전세계적으로 많은 인정을 받은 이유가 있다는 것을 납득하게 해줄 수 밖에 없죠.


사랑이라는 만고의 보편성을 지닌 진리를 장르로 하였지만, 그 이상의 가치를 담았기 때문에 명작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시대를 뛰어넘는 재미는 그것이 시대를 뛰어넘는 가치를 담았기 때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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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간 개발한 3세대 MMORPG 게임으로서 많은 기대를 받아왔던 게임치고는 너무나도 아쉽고 그 이상으로 아까운 게임입니다. 저도 해보기 전까지는 굉장히 많은 기대와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실제로 발매한 이후 하다보니 정말이지, 흔한 한국 게임의 문제점들을 계승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문제들이 발생했죠.



일단 먼저 장점을 이야기해보자면, 3세대 MMORPG로서 HnH와 같은 게임에서 제시되었던 개념과 요소들을 적용했습니다. 특히 듀랑고 시스템 중 가장 많은 관심과 호평을 받았던 것은 제작 시스템인데, 마인크래프트와 같은, 정해진 재료 아이템과 정해진 결과물이라는 틀에서 벗어나 각 아이템들에 특성이라는 성질 개념을 부여한 뒤, 그 특성이 맞기만 한다면 아무리 말이 안 되는 결과물이라도 제작이 가능하다는 한 차원 진보한 제작 개념을 만들어냈습니다.


이는 앞으로의 MMORPG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게임사적 획을 그었다고 평가하는데, 기존의 한정적이고 한계가 뚜렷한 제작과 재료라는 개념에서 벗어나, 더 현실적이고 넓은 가능성이 존재하는 게임을 만들어낼 수 있는 비전을 보여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구라도 이런 제작 시스템에 대해서는, 그 개념 자체로서는 호평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봅니다.


그 외에 불안정섬이라는 개념도 굉장히 흥미로운데, 많은 사람들이 우려할 수 밖에 없는 한정적인 자원과 맵의 크기와 거리 문제를 해소한 훌륭한 구조적 설계라고 봅니다. 시간을 제한한 채 그 기간 내에 그 섬에 있는 모든 것은 채집, 설치 가능한 것들이고 이는 이런 류의 게임에 고질적으로 존재하는 자원과 맵의 문제를 해소할 수 있는 기획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냥터나 채집터 통제의 문제도 없어지고 희소한 자원을 특정인들만 독점적으로 얻거나 사실상 무의미하게 없어지는 일이 줄어들고 우려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죠. 아예 없는 건 아닙니다만..


게임 자체가 쉽다는 것도 장점이라면 장점입니다. 시스템 자체가 복잡하지 않고 몇몇 개념과 요소만 알면 되기 때문에 특별히 더 배우거나 연구할만한 부분이 많지는 않죠. 이는 폰게임으로서 많은 시간과 정신을 할애할 수 없는 이들에게 쉬운 접근성과 빠른 적응력을 가지게 하는 부분이죠. 



근데 솔까 장점이라고 꼽을만한 건 이런 것들 밖에 없는 거 같습니다. 솔직히 문제는 너무 많아요. 6년 동안 개발한 게임 치고는 정말이지 아쉽고 아까울 수 밖에 없다고 봅니다. 소재도, 게임의 설계도 괜찮았지만, 구조적인 문제점과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버렸습니다.


먼저, 땅이 부족합니다. 불안정섬은 잘 만든 시스템이지만, 안정섬은 그야말로 구조적 게임 설계 실패의 시작이자 끝입니다.


사람들이 원했던 것은 마인크래프트와 같은 무한하고 범용성이 넓은 활동을 보장 받는 플레이였다고 봅니다. 즉, 자기가 원하는 때 자기가 원하는 행위를 하고 원하는 것들을 얻어서 원하는 결과를 만드는 겁니다. 마인크래프트가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샌드박스로서 게이머가 원하는 요소를 잘 충족시켰기 때문이죠. 다소간의 한계는 있었지만 게임에 큰 문제가 되는 한계를 발생시키는 건 아니었죠.


하지만 듀랑고의 안정섬은, 그 좁아터진 섬에 수 많은 사람들이 다닥다닥 붙어서 서로 땅따먹기를 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바로 옆에 사람들 땅이 존재하고, 답답해 터진 섬에서 만들고 어쩌고 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는 생존게임으로서(혹은 그러한 컨셉을 잡은 게임으로서) 존재 의의 자체를 말소시켜버린 기획입니다.


누구도 그런 답답하고 불쾌한 사유지 시스템을 원하지 않을 겁니다. 심지어 안정섬도 좁고 지형에 따라 유리와 불리가 어느 정도 결정된다는 점에서 더더욱이요. 사람들은 넓은 땅에서 자기가 원하는 만큼, 능력껏 땅을 넓히고 자신이 발전해나가는 모습을 보고 느끼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듀랑고의 시스템은 그딴 거 없고 좁아터진 한정적인 땅 내에서 느그 혼자 알아서 해봐라 하는 건데.. 참...


더불어, 게임 자체가 별로 재미가 없습니다. 볼륨이 적고, 할만한 게 적습니다. 애초에 소유지를 크게 발전시킬 방법이 부족 시스템 말고는 없는데, 이는 필연적으로 다른 사람들간의 커뮤니티 활동과 사회적 활동이 강요받는데, 먼저 폰 게임으로서 그러한 소통의 필요성은 태생적인 불리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떄문에 보이스 채팅도 있지만, 까놓고 말해서 그리 잘 쓰인다곤 생각 안 합니다. 적어도 라이트 유저들에게 있어선 더더욱이요. 


더불어 이런 류의 생존 게임은 불특정한 사람들끼리 노는 것보다는 자기 혼자 어떠한 장소에서 자원을 채취하고 건물과 사물을 만들어 설치하고 정비하고 방비하고 발전시켜나가는 것에서 재미를 얻습니다. 근데 듀랑고는 그러한 점에 있어서 뚜렷한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즉, 발전의 한계는 뚜렷하고, 그 틀은 좁습니다.


근데 심지어 거기에 사냥, 채집, 제작의 반복이고, 퀘스트 내용도 거기서 거기인데다, 그 퀘스트 또한 그저 레벨업을 위한 행위에 불과한 게 사실입니다. 그냥 경험치를 많이 주니까. 이런 반복적인 활동은 기존의 RPG 게임, 특히 한국형 RPG 게임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재미 없는 뻘짓거리의 루틴 퀘스트로 여겨지고, 여기서 재미는 반감됩니다. 뭐 이런 퀘스트 없는 RPG 거의 없지만 한국형 RPG에서 이런 퀘스트의 남용은 많은 이들이 귀찮아하는 방식이죠. 만들긴 쉬워도.


솔까 이런 퀘스트 자체는 그럴 수 있습니다. 말했듯이 그런 퀘스트야 엄청 많고 당연한 거기도 하니까요. 하지만 문제는 그거 말고 할 게 거의 없습니다. 폰 게임이다보니 게임의 볼륨이 적은 것도 이해는 되지만, 이러한 요소들과 결합해서 보면 그냥 게임을 계속 하고자 하는 생각이 안 드는, 재미 없고 지루한 게임이 되어 버립니다.



제작자들도 그걸 알기 때문에 최대한 오래 붙어놓게 만드는 시스템들을 설계해서 넣은 의도가 보이긴 합니다. 아이템들의 내구도 수명과 사유지의 유지기간 같은. 아이템의 내구도는 시간이 지날수록 낮아지고, 이는 설치물도 마찬가지죠. 그에 따라 그런 아이템을 통해 충분히 뽕을 뽑기 위해선 오래 게임을 하는 게 경제적이며, 이는 소모품에 있어서 특히 그런 의도가 강하게 느껴지죠.


설치 아이템이나 장비 아이템도 수명이 줄어들기 때문에 수리 아이템으로 수리할 수 있지만, 최대 내구도가 줄어들기 때문에 결국 다시 만들어야 하고요. 이런 식의 설계는 최대한 게임을 오래 하게 만들고, 계속 하게 만드는 요소로 작용합니다. 지금까지 한 게 아까우면, 지금들고 있는 아이템들 다 날려먹는 게 아까우면 계속 하라는 거죠. 


이런 시스템 자체가 나쁜 건 아닙니다. 제작자와 게임사로서 많은 유저들이 오래 하는 건 그만큼 많은 돈을 보장해주죠. 근데 문제는 이런 시스템이 게임 전반적으로 존재하고, 사유지와 같은 근본적인 요소에도 적용되며, 게임 자체가 재미가 없어서 이러한 시스템에 개연적 납득(오래된 아이템이 삭는 게 현실적이지. 같은.)보다는 그냥 접지 않으려고 만든 시스템이구나 라고 여겨지게 된다는 점이죠.



스킬 시스템에 대해선 그럭저럭 괜찮다고 볼 수도 있는데, 스킬 레벨을 높히기 위해 해당 제작이나 활동을 많이 하게 만드는 건 훌륭한 설계이긴 하다고 봅니다. 귀찮아서 그렇지. 더불어 일부러 스킬 포인트를 부족하게 만들어 더 많은 레벨을 올리게 해야 하는 것도 나름 괜찮다고 보고요.


하지만 이러한 요소들은 앞서 말한 최대한 오래 하게 만드는 수작질이라는 의심과 더불어 최대한 오래, 많이 하게 만드는 설계 의도로도 여겨집니다. 더불어 이런 시스템에 대해 호불호도 있을 수 있죠.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은데 이것들은 할 수 있어도 저것들은 못한다고. 



이러한 요소들은 결국 게임의 커뮤니티성을 통해 극복하라는 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땅이 부족하고 채집과 제작에 한계가 있다면 부족을 만들고 가입해서 커뮤니티 활동을 하라는 겁니다. 듀랑고 기획자가 마영전 기획자와 동일인물이죠. 그에 따라 커뮤니티성에 주안점을 둔 거 같은데, 대다수의 라이트 유저들은 그런 걸 원하지 않습니다. 더불어 폰 게임이라는 태생적 한계는 그러한 활동을 잘 할 수 없게 만들죠.


까놓고 말해서 많은 이들이 집에서 녹스, 블루스택 같은 걸로 돌리게 되는데, 그렇게 된다면 폰 게임으로 만들 이유가 있었을 지 모르겠습니다. 차라리 PC게임으로 만들고 구조적 문제나 볼륨의 문제를 다소 해소해서 출시했다면 차라리 더 나았을 겁니다.



하지만 결국 구조적인 문제는 존재하고 게임으로 하여금 게임성을 통해 계속 해야할 이유를 만들기 못하고 시스템적 제약을 통해 계속하게 만드는 만큼 이러한 비판은 나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차라리 마인크처럼 싱글, 멀티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고, 멀티 또한 마인크래프트처럼하는 게 나았다고 봅니다. 전세계 단일 서버나 다수의 인원을 수용하는 게임사에서 제공 서버를 만들겠다면 HnH와 비슷하게 만드는 게 나았죠.


광활한 맵을 주고 랜덤하게 사람을 뿌린 뒤 스킬과 레벨, 자원 등에 따라 사유지를 더 넓힐 수 있고 원한다면 그러한 멀티 서버에서 타인과 하나의 부족을 일굴 수 있게 만들어야 합니다. 불안정섬은 여전히 존재하고 그걸 통해 자원을 얻는 것은 그대로 두고요.


사유지를 얻기 위해선 돈을 벌어야 하는데, 이걸 훨씬 어렵게 만들어야 했고요. 그래야 사유지를 늘려야 한다(=발전에 대한 게임성)는 비전을 주고 더 많은 노력과 활동을 발생시킬 수 있고, 실제로 늘리면서 성취감 등을 느낄 수 있죠. 또 섬 장터 같은 기능은 없애거나 최소화 해야 했습니다. 섬 장터에 대한 문제도 꽤 있죠.


싱글 플레이라면 여기의 요소 몇개를 도입한 채 마인크래프트와 비슷한 포맷으로 가는 게 나을 겁니다. 거기에 듀랑고만의 특색과 시스템을 설계해서 넣었다면 진짜 갓겜 하나 만들어졌겠죠. 가령 펫 같은 걸 전투 때의 고기방패나 짐꾼으로 쓰는데, 이걸 통해 격투나 경주 같은 스포츠를 즐길 수도 있고 아예 건설이나 농사에 쓸 수도 있으며, 일종의 군대나 사냥부대 같은 걸 만드는 등 RTS적 요소를 적용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물론 이런 펫에 대한 건 멀티에서도 적용해야겠죠. 군대 같은 RTS적 요소는 좀 제한해서. 물론 싱글에선 좀 풀고..


더불어 싱글이니까 더 많은 가능성을 열어둘 수도 있겠죠. 림월드에서처럼 조난자 같은 이들이 어디에서 발생하거나 발견되어 노예나 일꾼 비슷한 것으로 쓸 수도 있고, 그런 구조해준 인간 조난자들끼리 자식을 낳아서 아예 마을이나 왕국까지 발전시킬 수 있는 비범한 확장성과 발전성을 구조적으로 설계했다면, 물론 MMORPG라기 보단 생존 시뮬레이션에 더 가까워지긴 하겠다만, 말할 것도 없는 샌드박스 게임사에 큰 획을 그어 놓는 갓겜으로 세계적인 인정을 받을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듀랑고는 개발 기간에 비해 그러한 볼륨과 게임성을 갖추지 못했고, 이 때문에 많은 이들이 실망하고 비판하는 것이죠. 솔직히 많은 이들의 기대에 비해 실망스럽고 아쉬운 게임입니다. 고작 이렇게 밖에 못 만들었냐. 라는 말이 나올 수 밖에 없을 정도로요. 괜히 라스트 데이 온 어스 하다 듀랑고 해보고 다시 LDOE로 돌아가는 게 아닌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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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리뷰는 작품에 대한 내용누설이 있습니다. 

김형준 작가의 일곱 번째 기사라는 소설과 알바트로스, 백룡공작 팬드래건 등 다른 여러 근대, 중세적 배경의 작품에 대해서 쓴 작품을 보면서 느낀 것은, 이 작가는 확실히 중세라는 배경에 대해, 그리고 근대라는 배경에 대해 역사 공부만큼은 다른 양판소 작가들이나 어중이 떠중이들에 비하면 확실히 탄탄한 편이구나 하는 점입니다.


저도 나름 한때 역덕후를 자칭했고, 지금도 남들보다 역사에 대한 지식이나 상식은 더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편인데, 그런 지식을 갖춘 제가 보기에도 상당히 설득력 있고 개연성 있는 전개를 이끌어나가죠.


더욱이 김형준 작가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그래도 판타지 소설이라고 느끼는 부분은 마법이나 다른 판타지적 요소가 아니라 한 인간 개인이 역사에 거대한 족적을 남기며 세계를 바꾸고 변혁시키는 하나의 신화적 행보입니다.



월광의 알바트로스에서 특히 강하게 드러나는 바이지만, 본 리뷰에서 대상하는 일곱 번째 기사에서는 한지운이라는 20대 예비군이 차원이동 후 겪는 일, 행보, 안배는 확실히 신화적인 면이 있죠. 


또, 개인적으로 다른 중고딩 수준에서 지식이 더 늘어나지 않고서 판타지니 중세적 배경이니 써갈기고 이세계로 이동한 주인공이 깽판을 치는, 한마디로 이고깽질이나 하는 잡스럽고 꼴사나운 전개가 아니라, 어느 정도 현실적인 면모를 가지고 작품을 시작했다는 점이 특기할만한 점인데, 현대인은 천재가 아니고 현대인이 중세, 고대로 간다고 해서 그 시대의 최고급 지성이 될 수는 없습니다.


뭐 이에 대해서 이야기할 것은 진짜 엄청나게 많지만, 현대인이 공교육을 통해 배우고 얻어낸 지식은 가공된 지식이고, 까놓고 말해서 그 자체로는 어디 써먹을 곳 없는 비실용적 지식입니다. 중고딩 애들이 중세로 간다고 해봐야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컴퓨터와 스마트폰을 잘 다루고 수능 공부 열심히 해봐야 금속을 주조하는 법도 모르고 가죽을 다루는 법도, 칼을 다루거나 말을 타거나 활을 쏘거나 짐승을 해체, 발골하거나 그걸 제대로 조리해내거나 하는 법 아무 것도 모르고, 그 이상으로 그 당시의 시대적 질서를 인식하거나 인지한 경우는 더더욱 없죠.


하지만 일곱 번째 기사에서 작가는 이러한 현실적 불가능성에 대해 나름 고심한 것이 보이고, 그 시대적 배경에서 나타나는 질서를 이용해 잘 이빨을 까면서 살아 남습니다. 


현대인이 가지는 현대적 지식은 중세와 같은 시기엔 그리 잘 사용할 수 없는 비실용적이라는 면 때문에 주인공인 한지운, 한 데 지운은 그러한 기술, 실용적 지식을 이용해 살아남는 게 아니라, 그 시기에도 먹힐 수 있는 비실용적 지식인 문화를 이용해 살아남고 명성을 얻게 되죠.


바로 시라는 요소인데, 중세에 시 따위로 허세부리려는 놈들이 적지 않기도 했고, 그러한 문학, 시라는 요소가 나름 고평가 받기도 한다는 건 사실이죠. 칼밥먹던 놈들이 이제 칼질 안 하려니 그런 노는 문화가 발달하게 되고 그 중 하나가 시인데, 고상하다는 귀족들이, 또는 귀족화되는 기사들이 그런 거에 뻑가던 점에서 착안하여 근대, 현대에 가까워져서야 등장하는 명시를 모아놓은 시집으로 명성을 얻습니다.


또한 초반부의 이웃 영지와의 결투는 정치적인 관계도 얽혀있지만, 그에 못지 않게 중세의 명예라는 가치를 나름 잘 표현해냈기도 하고요. 또한 영지를 발전시키는 영지물적 전개와 전투씬, 행정에 대한 전개는 상당히 출중하기도 하고요. 그만큼 중세라는 시기에 대한 역사적 지식과 통찰이 없다면 제대로 묘사할 수 없는 것들이 많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작가가 중세라는 배경에 대한 이해가 높은 편입니다. 이 부분은 일곱 번째 기사보다는 백룡공작 팬드래건에서 더더욱 드러나는 점이죠.


작가가 작품의 개연성을 위해 열심히 고민했고 잘 설명해냈다라고 여겨지는 부분은 문화와 언어라는 점인데, 작품의 근간이 되는 요소인 차원이동이라는 점을 이용해 어째서 언어가 비슷하고 문화나 종교가 비슷할 수 있느냐를 아주 잘 설명해냅니다.


지구도 시대에 따라 같은 영어라도 다른 언어 수준으로 차이가 나고 이는 전세계 모든 언어가 다 그런데, 차원이 다른 세계의 언어와 문화가 비슷하다는 건 말이 되지 않죠. 그러나 이는 기존에 왔던 이세계의 기사들이라는 설정으로 개연성을 맞추고 작품적 근간의 요소와 흥미로운 설정으로 만들어 사용합니다. 상당히 짜임새 있는 면면이죠.



이고깽 작품에서 나타나는 가장 큰 문제점은 이고깽이라는 용어에서 나타나듯 이세계로 이동한 고딩이 깽판을 치면서 노는 꼬라지 그 자체인데, 흔히 일본산 이고깽에서 자주 찾아볼 수 있는 쓸만한 지식은 하나도 없는 잡놈이 이세계 간다고 해서 뭐 잘나갈 이유가 있겠냐 싶은 바로 그런 점입니다.


까놓고 말해서, 논리와, 특히 합리라는 건 근대에 와서나 발명되는 겁니다. 그 이전 시대에 합리성이 없었다는 건 아니지만, 그러한 합리는 그 시대의 이치에 기준된 것입니다. 가령 중세의 합리란 중세의 신학, 종교관 그 자체에 기반되어 있었죠. 현대적 합리와는 전혀 다릅니다.


논리라는 것도, 제대로 교육 받지 못한 인간은 근대가 됐든 현대가 됐든 논리적 사고가 잘 안 됩니다. 논리라는 것도 인간 본연의 본능 같은 지성이 아니라, 그러한 논리적 사고를 훈련시켜부는 교육을 통해 만들어지는 능력이고 성장할 수 있는 겁니다. 근데 중세인들, 그것도 어느 정도 교육 받은 귀족이나 기사도 아닌 일반 평민이나 일개 용병 수준에서 그러한 논리와 합리성을 가진다는 거 자체가 역사에 대해 굉장히 무지한 서술이거든요.


그런 면에서 귀족과 평민의 차이를 어느 정도 잘 묘사해내고 있고 그러한 논리력과 합리성을 로젤리아가 갖춘 것은 수도의 아카데미에서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건 올바른 설정입니다. 


마찬가지로 한지운이 이세계로 와서 쉽게 인정 받을 수도 없고 믿음을 받을 수도 없으며 중점적인 역할을 하며 무언가를(주로 발전을) 진두지휘하며, 흔히 말하는 남의 나와바리 접수해먹고 주변 사람들이 무조건 믿고 따르는 식의 쌈마이식 전개와는 다르게 조심스럽고 계획적이며 나름대로 설득력 있는 주장을 통해 귀족이라 인정을 받고, 특히 로렌스와의 대담과 로젤리아와의 대담에서 나타난 정치, 종교에 대한 식견과 에드가 앨런 포의 명시에 대한 사기극 덕분에 뛰어난 인재라 인정 받게 되고 이러한 점은 수도와 왕국 전체로 퍼지게 되죠.


더불어 그 본인이 무언가를 진두지휘하는 건 나중에, 제한적으로 나오고 그 이전까진 헬포드, 로딕과 같은 이에게 굴려지며 훈련 받는 것은 그러한 인정 받고 그 집단에 녹아들 수 있는 요소로서 기능하기도 하며, 이후 발생하는 자기 생각과 계획되로 되지 않는 위기인 이웃 영지인 엥겔만 자작가와의 결투 같은 요소 등 이고깽 치고는 굉장히 겸손하고 계획적이며 개연성 있는 전개를 발생시키는 요소로서 크게 인정해야할 부분입니다.



웨이크필드 영지에서의 기사시합, 포를란의 성을 받는 점, 볼튼과의 인연, 루시엘과의 만남 등 작품 전체적으로 큰 줄기를 이루는 요소들이 등장한 챕터에서는 작품의 짜임새가 처음부터 잘 짜여져 있다는 평가를 줄 수 있고, 압실리언과의 영지전은 초반 전투씬과 프레드릭 영지와 그 기사들이 빠르게 명성을 얻고 정치적, 종교적 정당성을 얻으며 발전할 수 있는 요소가 된다는 점에서도 그렇고요. 특히 제대로된 전투씬이라는 점에서도 굉장히 특기할만한데 어줍잖게 머리속으로 헛발질 해대며 있어 보이는 전투씬을 그리고자 하는 양판소 작가들과는 다르게 중세라는, 역사라는 것을 공부한 이 답게 전쟁이나 전술에 대한 이해도가 얼핏 엿보이는데, 흔해 빠진 신박한 기책이니 개멍청한 적군이니 하는 클리셰에만 의존하는 게 아니라, 그러한 기책이나 멍청한 적군이라는 점에 대해서 정당한 개연성을 부여하고, 무엇보다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병사들의 훈련도와 뛰어난 지휘관의 요소를 분명하게 드러낸다는 점에서 정직하다고도 할 수 있을 정도고요.


이후에도 수도로 가서 생활하고 교수 역할을 하는 것도 상당히 재미가 있고 흥미로운 면면들이 많은데, 중세의 봉건적 질서와 교육방식, 정치에 대한 묘사가 꽤 뛰어나다는 점입니다. 특히 기억이 남는 막스 베버를 따오며 강의하는 부분은 독자가 보기에도 살당히 훌륭했으며 소설과 무관하게 그러한 개념과 철학에 대해서도 굉장히 잘 설명했다고 평가 할 수 있다고 보고요. 이 부분만큼은 소설과는 별개로 다른 이들이 철학을 공부하기에 자극이 될 수 있는 적절한 겉핥기로 써먹어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더군요.


더불어 이 강의 부분은 작가가 한지운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자신의 지적 욕구를 발산하고 시대를 바꾸고자 하는 욕망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역덕후라는 한번쯤 해봤을 더 나은 세상으로의 if와 마찬가지로, 작가는 한지운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일곱 번째 기사라는 소설 속 배경을 대상으로 그러한 활동을 하는 것이지요.


중세에서 근대로, 근대에서 현대로 이어지는 역사적 발전상 속에서 발생하는 수 많은 불의와 사건, 인류를 비탄과 절망으로 이끌고 피를 통해 발전해야했던 것을 더 나은 사상과 가치관으로서 교정할 수 있는 기회란 흔치 않았고, 작가는 한지운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그러한 것을 소설에서 실현시키는 것입니다.


강의를 시작하기 전에, 그리고 그보다 더 이전에 압실리언에서, 지스카드와의 대담에서처럼 자신이 이 세계에 와서 어떻게 해야할지, 무엇을 해야할지 충분히 고민하고 마음을 먹은 것처럼, 자신이 살아온 역사와는 다른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그가 그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할 수 있는가를 고찰하며 나온 것이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의 개념을 가져와 설명한 것입니다.


한 포를란 데 지운의 말처럼, 자신의 이상을 강요할 수 없으며, 아무 책임을 질 수 없는 행위를 할 수 없고, 반대로 자신이 영향을 준 것에 대해선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하죠. 자신에 의해 발생할 수 있는 혼란을 막아야 한다는 목적으로요. 그렇기 때문에 그 강의에서 한 포를란 데 지운은 학생들에게 막스 베버와 문학이라는 개념을 끌어와 자신들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개념을 설명하고, 갈림길과 표지판이라는 요소로 그것을 구체화시켜주죠. 그들로 하여금 더 정의롭고 더 현명한 미래를 만들라는 의도로 말입니다.


이는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요소이고, 한지운이라는 개인이 이세계로 건너와 하는 가장 중점적이고 그 세계에서의 인생을 바쳐가며 이루는 가장 훌륭한 행동이기도 합니다. 지운의 안배가 있었기 때문에 훗날 알바스토스 시대까지 큰 문제 없이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체제가 변화할 수 있었고, 사실 그 이상으로 알바트로스 시대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결과를 낳죠. 뭐, 그 이전에 맥시밀리언과 만나는 게 어느 의미론 더 컸다면 컸다고 할 수 있는 거지만..



하여간, 그렇기 때문에 한 포를란 지스카드 데 지운은 정치적, 종교적인 이유와 더불어 사랑하는 여인과 제대로 만나지도 못하고 수 년간 떨어져 지내고, 대부분의 소중한 동료들과도 떨어져 지내며 동방으로 떠나게 됩니다. 그곳에서 발생할, 현실에서의 십자군 전쟁에서 발생할 수 있는 온갖 불의와 절망, 죽음과 광기를 막기 위해서 말입니다. 십자군이 근 200년간 이루어진 지리하고 깊은 갈등을 만들어내는 사건이었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한지운의 행보와 목표는 위대하다고 해도 될 법합니다.


수도와 베넨시아 등에서 겪고 갈고 닦은 정치능력(사실 이 부분이 가장 이고깽스럽다고 봅니다만 작품적으로 용납 가능하죠.)과 전투 능력을 통해 동방에서 나름 세력을 만들고 그보다 더 거대한 역할을 해내게 됩니다. 마야 유스란은 뭐 알폰소랑 이어지니 뭐 별로 중요한 거 아니고, 진짜 중요한 선 제르 유스란이라는 인물인데, 그는 정말 시대의 거인이라는 말이 맞지 않을까 싶은 인물 중 하나죠. 정치적 식견도, 개인의 인격도, 군사 전문가, 지휘관으로서도 훌륭한 인물입니다. 서대륙인들도 제르 유스란은 어려워할 정도로요.


뭐 그런 인물이 어디에든 있는 거야 이상한 건 아니고요. 다만 진짜 중요한 점은 그러한 인물이 훗날 제롬을 데리고 여행을 떠나게 되는 한지운과의 대담을 통해 새로운 체제를 구상하고 구축하게 만들었다는 점입니다. 정확히는 구상은 지운이 하고 구축을 제르가 하게 되죠. 정말 아쉬운 점은 그것도 그렇지만 훗날 대부분의 역사적 영향력을 미치게 되는 체제와 시대를 만드는 거국적 구상을 한지운이 했는데, 그게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너무 심한 저평가를 받는다는 점입니다. 뭐, 배아픈 점이지만 현실적이라면 현실적이죠. 너무 비현실적으로 신화적이니까요.



이외에도 특기할만한 캐릭터가 있다면 역시 볼튼 백작인데, 어느 정도 의도적인 악역의 역할을 맡게 했다는 점에서 작위적이면이 약간 느껴지지만서도, 작품의 맥락상에서 발생할 수 있다는 개연성을 잘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그러한 평가를 일견 무색케하는 면이 있는 캐릭터입니다.


캐릭터 자체는 귀족으로서의 선민사상과 엘리트주의를 가진, 중세적 초고급 엘리트적인 면모를 가진 인물인데, 이는 한지운과 대비되는 캐릭터성이기도 하죠. 굉장한 정치적 능력을 지닌 인물이기 때문에 진짜 적이 되기 전까진 서로 웃으면서 자기 집에서 머물게 하기도 하고(사실 이건 루시엘의 충고와 본인의 판단 때문이긴 합니다만.), 아예 그 제르 유스란마저도 인정하는 거물이기도 하죠.


하지만 그가 너무 찌질하게 되어버렸는데, 솔직히 저는 그런 게일 볼튼이 좀 불쌍하다는 생각마저도 듭니다. 루시엘과의 계약을 통해 가문에 머무르게 했고 그러한 루시엘을 사랑했던 역대 볼튼과 마찬가지로, 게일 볼튼 또한 루시엘을 사랑하게 됩니다. 물론 이루어질 수 없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내주고 싶지 않고, 그런 여자가 다른 남자를 좋아하고 관심을 보이는 듯한 것을 보는 건 그 자체로 고통스럽죠.


자신은 해줄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주고, 해줄 수 있지만 당연히 그것을 원하지 않는 루시엘이고 마음조차 없으며 함부로 그럴 수도 없다곤 해도 볼튼은 루시엘을 그만큼 사랑하고 마음 속 깊은 곳에 소중한 것으로 두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운에게 관심을 보이는 루시엘을 보면서 가슴 아프고 그만큼 커다란 질투를 가질 수 밖에 없게 된 것이죠.


그런 이유로 볼튼은 괴물이 되어 버렸고, 어떻게든 공격하고 끌어내리고 박살내고자 했으나 그러한 모든 시도는 결국 실패하게 되었으며, 아예 동방에 건너가며 망가질대로 망가지게 되면서도 끝까지 지운에게 집착하며 그를 죽이고 파멸시키려고 하죠. 뛰어난 통찰과 무서운 흉계를 꾸몄으나, 결국 죽은 것은 지운이 아닌 알폰소. 이 부분이 가장 슬픈 장면인데, 굳이 비교하자면 은하영웅전설에서 키르히가 죽었을 때와 같은 상실감이 느껴지게 되죠.


물론 캐릭터의 성격은 정반대이고 키르히가 독자들에게 다가오는 중요성과 자리감과는 완전히 또 다르지만, 상실감과 슬픔이 주는 크기는 대충 맞먹지 않나 싶습니다. 초반부터 지운과 함께하며 거의 형제와 같은 수준으로 교분을 나누던 뛰어난 환상기사이자 분위기 메이커가 그렇게 희생하여 죽었다는 것, 프레드릭 영지에서 시작했으며 함께 했던 초기 멤버의 죽음이라는 점은 정말이지..


그 탓에 지운과 헬포드. 특히 지운의 상실감과 절망은 거대했고, 그만큼 웨인 프레드릭의 상실감 또한 결고 작지 않았죠. 그가 죽기 전의 상황과 대사들 또한 인상 깊습니다. 마야 유스란과 사랑에 빠져버리게 되자 자신의 목숨을 지운에게 줘야 하니 팔 하나 정도는 줄 수 있다고 하는 부분은 일곱 번째 기사라는 작품에서 등장하는 명장면 중 하나죠. 다른 말 뿐인 남자들과는 다르게 진심으로 자신에게 희생해줄 수 있으며, 비록 목숨을 내놓겠다곤 하지 않지만 그만큼 자신 또한 인정하고 사랑했던 남자인 한지운에게 바칠 수 있다고 하는 기사다운 전우애와 의로움은 그녀에게도 결코 마음 상하지 않고 오히려 그를 진정한 기사로서, 진심으로 인정할 수 있는 명대사가 아니었을지.


체스테인 J. 알폰소. 그는 타고난 기사였으나 기사로 살기보단 시인이고자 했던 인물로, 수준 낮은 시를 만들어내긴 했으나 시에 대한 열정만큼은 분명하게 진심이었던 이로, 아카데미에서도 그 때문에 비웃음을 당했지만 결코 실망하지 않고 절망하지 않은 채 시에 대한 열정 하나만은 우직하게 지켜나갔던 기사였죠.


그 때문에 지운이 귀찮고 고생하게 되었지만 그만큼 밝고 진심 어린 태도는 꾸며낼 수 없는 것인즉 지운 또한 그와 깊게 교분을 나눴던 것이고요. 어떻게 보면 어린아이 같지만 그만큼 시와 삶에 대해 순수했던 기사였던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죽어가면서 나는 훌륭한 기사였는가. 나는 훌륭한 시인이었는가. 나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하고 물어보는 장면은 그토록 슬프고 시릴 수 없었던 것입니다.


기사로서는 최고였지만, 그것은 단순한 검술의 재능이었고,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니었으며, 시인으로서는 낙제점을 받아왔던 이로 노력해도 성과를 보기 어려웠지만 그는 순수했습니다. 단순한 검술이 아닌 기사로서 그는 부러지지 않는 검이었고, 시에 대한 순수함으로서 그는 영원한 소년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지운은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물어보자 내가 본 최고의 기사, 그 누구보다 아름답고 순수한 노랫말을 지은 최고의 시인, 생애 최고의 친구, 영원한 우정, 나의 형제라고 답해주죠.


그의 마지막 유언은 이겁니다. '언젠가 꼭 지운경과 함께 달에 가고 싶었는데. 나 혼자 가게...' 그의 순수함을 문장으로 녹여냈다고 평가합니다.


알폰소의 죽음 이후 지운은 거의 제정신이 아닌 상태까지 무너지게 되고, 그의 유골은 함과 함께 고향인 프레드릭 영지로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웨인 프레드릭은 친히 함을 들고 눈물을 흘리며 거리를 걸었으며, 그 거리는 그의 이름을 따 알폰소 거리가 되었죠. 이 부분도 정말 감동적인 부분입니다. 기사 중의 기사인 웨인의 측근에 대한 사랑을 엿볼 수 있고, 그만큼 많은 우정과 신뢰를 나누었다는 것이니까..


훗날 돌아온 지운은 그의 묘비에서 가슴 먹먹함을 누르고 최고의 시인으로서 명문을 쓰고자 했으나, 쓸 수 있었던 건 나의 친구 나의 형제 체스테인 알폰소. 이곳에 머물다. 한 문장 뿐이었죠. 하지만 그것이 진정 지운이 가진 그에 대한 모든 것을 담은 진정한, 한지운으로서 그에게 바칠 수 있는 진심이었던 것입니다. 



에.. 좀 글이 무거워졌는데, 사실 위에서 썼어야 했는데 어쩌다보니 쓸 기회가 없어져서 문맥 중간에 추가하기에 어색해져서 그냥 이 뒤에 쓰는 거긴 합니다만, 이 작품에서 칭찬 받아야할 부분이 좀 더 있습니다. 짜임새야 좀 더 정리해주고 싶지만 글이 정말 너무 길어질까봐 줄이고, 중요한 건 정치라는 면입니다. 나중에 웨인 일행과 로렌스가 같이 오면서 웨인 프레드릭, 프림 왕, 지운이 같이 걸어가면서 은연 중 웨인과 지운을 자신의 아래, 자신의 인물로서 두는 듯한 은근하고도 교묘한 말을 할 때 지운이 역시 은근하고 교묘하게 잘 받아친다던가 하는 등의 정치적 수사와 정치성 그 자체에도 상당한 묘사를 보여줍니다.


전략전인 면에서 등장하는 정치적, 관계적 측면에서 이는 어지간히 큰 그림을 그려내지 않고선 나올 수 없는 설계이기도 하고 개인과의 대화에서 나타나는 정치적 수 싸움 또한 그러한 논리적이고 외교적 수사에 가까운 정치적 대화를 나누는 것도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전자야 공부 좀 한다면 누구든 해낼 수 있는 거지만 후자의 경우 경험이 없거나 그에 대한 기반 지식이 없다면 묘사하기 굉장히 어려운 거거든요. 굳이 찾아보자면 하얀늑대들의 윤현승 작가나 이차원용병의 탱알(금호) 작가 정도? 뭐 제가 아는 선에선 몇 안 되는 거 같네요.



뭐.. 일단 여기까진 칭찬이었고, 비판 비스무리한 것 좀 해보자면, 먼저 김형준 작가의 필체는 뭔가 구수하다는 겁니다. 무슨 향토적인 그런 게 아니라, 그냥 뭔가 되게 아재같다는 느낌이 든다는 겁니다. 중세 배경의 작품이기 때문에 그런 필체를 의도하고 쓴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뭔가 중세적인 분위기의 서술을 쓰고자 하는 그런게 보이긴 하거든요. 하지만 그런 부분이 어떤 면에선 읽을 때 지루함을 느껴지게도 합니다. 가령 제가 진짜 술술 읽힌다고 느끼는 글들은 앞서 말했던 하얀늑대들이나 특히 굉장히 잘 읽힌다고 느끼는 글이, 무한전쟁 시리즈의 광악 작가의 글입니다.


광악 작가의 글은 제 취향이 완전 저격되는 거라서 더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너무 술술 읽힙니다. 그래서 카카오 페이지에 연재되는 작품 중 평균 길이가 40페이지 가까이 되는 스페이스 니트라는 작품은 진짜 한 면 한 면 아까워하면서 봤을 정도였죠. 뭐 다른 엄청 잘 안 읽히고 읽는게 뭔가 고되다는 느낌을 주는 몇몇 작품들에 비해서 김형준 작가의 시리즈는 그런 문제가 덜하긴 해도, 뭔가 지루하다고 여겨지는 게 있습니다. 좋게 표현하자면 여유롭게 서술하고 묘사하는 거지만 말이죠.


그리고 또 캐릭터들의 포맷이 굉장히 고전적입니다. 뭐 사실 일곱 번째 기사는 나온지 10년 가까이 되는 작품이기 때문에 지금 와서 고전적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을 진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포맷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의 성격이 너무 진부할 정도로 정형화된 유형입니다. 가령 일곱 번째 기사의 헬포드 경과 백룡공작 팬드래건의 킬라이언 경은 성격이 완전히 같은 캐릭터성을 가지고 있고(그나마 킬라이언이 더 점잖은 정도?.. 단지 카르타와 나누었을 뿐이지만;) 로렌스와 빈센트 론은 대응되며 에인세와 로딕의 성격과 알폰소의 전투능력을 좀 비벼놓으면 엘킨과 비슷하기도 하죠. 여성 중에서 로젤리아와 가장 비슷한 건 루나 세이로드 정도?


뭐 사실 캐릭터라는 게 성격이 거기서 거기인 게 이상한 것도 아니고 독창적이고 비범한 포맷을 짜는 것도 어렵고 자연스러운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특히나 부각되는 점이 킬라이언과 헬포드의 캐릭터성이 너무나 유사하다는 점인데, 이는 솔직히 좀 아쉽기도 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렇다고 해서 포맷이 완전히 같은 것도 아니고 성격이 비슷한 게 이상한 것도 아니며 아예 다르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기 때문에 비판의 여지는 상당히 줄어들지만 이런 우직하고 우악스러운 성격의 근육돼지 기사 캐릭터의 캐릭터성이 너무 흔하다는 점은 일정 정도 비판의 요소가 되는 건 사실이기도 하죠.


더불어 몇몇 클리셰가 너무 흔한 것들을 쓴다는 점도 있는데, 백룡공작 팬드래건이나 월광의 알바트로스에서 나타나는 하렘적 요소나 마법, 능력자적 요소, 오크 같은 괴물 같은 것들도 흔한 클리셰적 요소들이죠. 물론 백룡공작 팬드래건에선 그걸 필력으로 버무려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게 사용했고, 월광의 알바트로스에서는 그냥 그럴 수도 있겠지 하고 넘어갈 수 있는 수준일 뿐입니다.


하지만 그보다 문제는 주인공이나 주변인의 무책임성과 시대상에 맞지 않는 아집적 연애관 같은 게 있긴 합니다. 가령 월광의 알바트로스 초반부의 주인공 어머니와 남편의 무책임성은 위선적이다 못해 역겨울 수준이라는 비판을 결코 피할 수 없고, 그런 문제 때문에 당 작품은 시작하기에 불편한 감이 크죠. 솔직히 저도 완결이 다 되가는 수준까지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에게 이입하기 어려울 정도의 감각을 줘버렸으니.. 뭐 이건 주인공의 문제라기 보단 주인공 주변인의 문제지만;


백룡공작 팬드래건에선 되도 않는 일편단심을 가지는 것도 있으며 좋다는 여자들은 많지만 그걸 죄다 무시하고 내치는 등 연애권력에서의 우위와 린제 콘라트라는 일편단심의 요소 하나만 가지고 남에게 열등감을 주고 자신을 우월감을 주는 식의 감각을 유도하는 구조적 연출은 역시 고전적이고 말초적인 쾌감을 주는 식으로 전개를 하는데, 뭐 고전적 연애관과 하렘식 연출이 딱 그런 모양새였죠.


좋다는 여자들은 많고 등 떠미는 사람은 많은데 정작 눈치는 못채고, 나중에 챈다고 해도 혼자 끙끙 앓거나 반대로 한명만 좋다고 대놓고 못 박아서 가슴앓이 만들고 그런 모습 독자들에게 보여주며 연애권력의 쾌감을 주기도 하는. 다르게 말하자면 언제든지 따려면 딸 수 있는 열매 같은 연출 말입니다. 


백룡공작 팬드래건은 2014년에 연재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고전적 구조를 사용했다는 점에서 비판의 껀덕지가 있습니다. 독자들도 그에 대해 답답해하거나 비판을 하곤 하죠. 물론 작품적으로 그렇게 작용할 수 있는 캐릭터성과 전개가 이어지긴 합니다. 다시 깨어난 앨런 팬드래건의 가치가 막대해졌다는 점과 여성으로서도 매력적으로 보이는 남성성을 가졌다는 것. 그 모습을 보고 사랑에 빠질 수 있으며 복수와 대의를 위해 여자에 눈 돌릴 시간이 없다는 점은 분명 비판을 막을 수 있는 정당한 전개였죠. 하지만 백룡공작 팬드래건이 워낙 많고 흔한 양판소적 클리셰를 모아놓다보니 근본적인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나마 필력 있고 실력 있는 작가가 쓴 글이기 때문에 그러한 비판점이 줄어들 수 밖에 없는 겁니다만.


사실 이렇게 길게 다른 작품 이야기할 생각이 없었는데 어쩌다보니 이렇게 나온 거고, 마찬가지로 일곱 번째 기사에서도 주인공 한지운은 로젤리아와 하룻밤을 보내고 자기 세계로 돌아가버리죠. 그 때문에 로젤리아는 임신을 하게 되었고 자식을 낳았으나, 본인이 키우는 게 아니라 루시엘에게 넘친 채 건국공을 도와 훗날 단풍 부인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되는 업적을 쌓았고요.


음.. 어.. 사실 앞서 자주 이야기했던 고전적이다. 라는 면에서 이 부분이 정점을 찍었다고 보는데, 과거라면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떠나야 하는 슬픔과 그래도 슬픔과 외로움을 달랠 자식을 세상에 남기게 해줬다는 선물이라는 면에서 과거라면. 과거라면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작품의 결말로서 작용할 수 있었겠지만, 시대는 변했고 그러한 고전적 가치관에서 벗어난 독자들에게 이는 무책임하게 싸질러 놓고 튄 놈 비슷하게 여겨질 수 밖에 없습니다.


뭐 본인이 임신을 시킬 것이라는 걸 모를 수도 있었고 남을 수 없다는 것도 개연성을 가지는 일이기 때문에 계속 이야기해왔듯 어쩔 수 없다지만 작품에서 전반적으로 보여줬던 자신의 행위에 대한 책임, 시대와 세계에 대한 책임이라는 것과는 대비되게 개인적으로 무책임하게 떠나버렸다는 점에서 위선적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고, 결국 로젤리아만 불쌍하게 되었죠. 심지어 이후를 살펴보면 자식을 직접 키우지도 못했고 그리 자주 만난 것처럼 보이지도 않은데. 로젤리아에게도, 자식에게도 죄 짓는 일입니다. 


이것도 작품을 쓴 시점과 현 시점의 가치관 차이라는 것으로 어느 정도 옹호를 받을 수 있다곤 해도, 그러기엔 작가 스스로 고전적 작품상의 느낌을 넣어주기 위해서 일부러 그렇게 결말을 만든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그러한 구조와 전개를 설정하여 이끌어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작위성이 겉으로 드어나보이지 않고 그거 말고 어떻게 할 수 있는 방향성이 없다라는 생각이 들게 했기 때문에 비판하기 어려울 뿐이죠.



하여간, 전체적인 작품은 저에게 믿고 보는 김형준이라는 믿음을 주게 만든 작품이었고, 객관적으로도 재밌으며, 일부 부분에선 얻을 것도 있는 훌륭한 수작이었다고 봅니다. 아무리 역사적인 배경의 분위기를 느껴지게 하는 필체와 고전적인 작품상의 느낌을 이끌어내는 서술은 반대로 현실적인 느낌을 주기 때문에 다른 판소에서 쉽게 느껴지거나 연출하고 의도되는 거창하고 어마어마한, 압도적 무언가를 만들어내기 어렵다는 점이 호불호가 갈릴 수 있지만 저는 도리어 그것에 고평가를 주고 싶고, 큰 틀에서 정확하게 짜인 스토리와 부담 없는 전개, 시각적으로 힘을 주는 연출 묘사 등 이 작품은 객관적으로 좋은 작품입니다.


그래도 판타지 소설이라는 점 답게 작품의 주인공은 그 시대에 있어서 신화적인 역할과 행보를 보인다는 점이 흥미롭게 여겨지는 점이기도 하고요. 작가의 이상을 너무 진하게 담아내서 전체적인 그림에서 개인 단위로 투영해나감에 따라 뭔가 불편함을 느끼는 부분도 솔직히 없다곤 못하겠습니다. 이는 월광의 알바트로스에서 특히 그렇게 느껴지고요.


하지만 그러한 역할과 변혁에 있어서 설득력 있는 전개와 역할을 개연성 있게 풀어냈다는 점은 김형준 작가가 어째서 필력 있는 작가인가에 대한 물음에 답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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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리뷰는 작품에 대한 내용누설이 있습니다. 
 

레진코믹스의 관절 작가가 그리는 레드 후드. 이 작품은 정말 너무 늦게 봐서 정말정말 너무너무 아쉬운 작품입니다. 예전에 흔해 빠진 세계관 만화와 그림체가 비슷해서 보려고 했다가, 아직은 많이 올라오지 않았던 때라서 일단 기다렸다 보자고 마음 먹고는 게으름뱅이답게 그냥 까먹어버렸죠.

 

그래서 제대로 볼 수 없이 유료화가 되어버렸고, 저는 아주 나중에나 어쩌다 생긴 꽁돈으로 코인을 질러서 보았습니다. 그마저도 부족하게 되어서, 그리고 아직 완결까지 나오지 않아서 더 나중에야 다 볼 수 있었지만요.

 

 

제가 이 작품을 정말이지 사랑하는 이유 중 하나는, 작가의 그림 실력, 연출, 액션씬, 스토리와 그 짜임새, 매력적인 캐릭터라는 흔해 빠진 이유이자 명작의 구성요소들 때문만이 아니라, 이 작품을 보면 베르세르크가 떠오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사실, 꽤 비슷한 구석도 많죠. 물론 베르세르크의 거대함과 중후함, 깊이와 분량이 있는 건 아니고 그 처절함의 농도와 밀도가 부족한 것도 사실입니다만, 솔직히 예전에 봤던 창위의 일루전에서 담당자가 연재 할 수 있게 약 팔았던 한국의 베르세르크다! 라는 주장은 오히려 이 작품에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죽음 속에서 태어난 주인공, 세계관 내에서 저주의 낙인으로 상징되는 유전병을 타고난채 태어난 주인공

용병으로 살아가던 초반부

칼을 휘두르지 않았던 행복하고 여유롭던 시기

괴물들에 의해 유린 당하며 죽어가던 사랑하는 가족과 동료들.

그 지옥 속에서 다시 태어난 주인공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처절한 복수극의 인생

강대한 괴물들과의 사투

새로운 동료들

또 다른 싸움, 믿었던 이의 배신

 

등등.. 사실 이런 클리셰들은 어느 작품에서든 비슷하지만, 그 연출과 작품의 문법이 적지 않게 베르세르크와 유사하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그림체 또한 정밀하게 묘사되고 선이 많은 것까지. 테러맨에서 잘 사용되는 특정 컷, 사물에만 컬러를 넣어서 강조하는 연출은 레드 후드에서도 사용되는데, 테러맨이 현대 배경에서 사용되는 세련된 연출이라면 레드 후드에선 중세 배경으로 하는 중세적인 투박함의 연출이라는 느낌이죠.

 

더불어 검술에 있어서는 그 역동성과 드라마틱함이 약간 소설 하얀늑대들이 연상되기도 했습니다. 특히 칸나가 법황청의 수용소에서 수 십, 수 백 가까이 베어 죽이며 로즈벡을 기다리는 건 정말이지 무서울 정도였죠.

 

 

칸나의 경우 정말 박복한 인생이었는데, 유전병 때문에 백발에 붉은 눈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그 때문에 마녀로 몰릴 것을 우려한 아버지 펠릭스가 집 밖에 함부로 내보내지도 않고 훗날 겪을 위험하고 생명이 위협 받을 수 있는 상황에 대비해 강인하게 키우고자 검을 가르쳤죠. 정작 가장 잘 쓰이는 무기는 워피크지만..

 

그리고 기사로 키웁니다. 전장의 오리기사가 되면서 수 많은 실전을 겪고 그 검은 날로 예리해졌고요. 그러한 검술 덕에 칸나는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글자 그대로, 생존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작품이 끝날 때까지 칸나가 싸울 수 밖에 없고, 살아남게 되는 밑천이었죠. 아버지가 나름 혜안이 있었던 거랄까요..

 

뭐 그렇다고 해서 가족들과의 관계가 그리 살가웠던 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는 가정에 충실했지만 칸나에게 있어서 더 아버지 같고 의지할 수 있었던 인물을 바드엘 파레스였으니. 어머니는 뭐.. 외부의 시선을 중요시했고, 또 두려워 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오린이 찾아와 그녀를 잡으러 갈 때, 그래도 자기 배 아파서 낳은 딸이라 그런 것인지 결국 딸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살리고자 했죠. 

 

그리몰디의 정치질 때문에 오린이 플랑들롱가를 수색했고, 오린에 쫓겨 도망쳤으나, 가족은 잡혔습니다. 그리고 그 가족을 구하기 위해 그 학살을 벌였고요. 그리고 도망가면서 더스틴 스미스를 만납니다. 이놈도 참.. 인간적인 놈이죠. 나쁜 의미로 말입니다.

 

하여간 진짜 중요한 사건은 바로 뒤에 찾아오는데, 오린에 쫓겨 정착하게 된 마을에서의 일이죠. 평생 검과 싸움, 전투 밖에 모르던 칸나가 그 곳 생활에 익숙해지고 마녀라 욕하던 사람들 또한 칸나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평범한 인간, 평범한 여성으로서의 삶을 겪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삶은 너무도 달콤해서 그냥 그렇게 검을 내려 놓고 살고 싶어했을 겁니다.

 

하지만 늑대가 찾아왔죠. 사람을 죽이고, 가족을 죽이고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칸나를 늑대의 새로운 일원으로 선택합니다. 마치 가츠가 그 살육제에서 동료를 잃고 미쳐버릴 듯한 광란 속에서 광기에 휩쌓인 채 싸우다 반시체 상태에서 낙인이 찍히고 살아남은 것처럼, 그녀는 그 지옥도 속에서 놓으려면 무기를 붙잡고 싸웠습니다. 전사답게요.

 

그러나 그녀는 패배했고, 늑대가 됩니다. 하지만 반쪽짜리 늑대가 되어버렸죠. 그때 스스로를 여라 부르는 존재와 만났고요.

 

그 이후 그녀는 다시 태어난 겁니다. 반쪽짜리 늑대로. 자신의 모든 것을 재차 앗아간, 진짜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모든 것을 앗아간 늑대들에게 복수를 맹세합니다. 복수.. 정말 좋은 소재죠. 인간을 미치게 하는 것도 복수이고, 제정신으로 잔혹하게 만드는 것도 복수니까요. 인간이 어떻게 그렇게 미쳐서 살 수 있겠습니까? 미칠듯한 계기가 있어야죠. 그렇지 않고 단지 미치기만 했으면 미친채 금방 죽을테니까요.

 

작품에서 말하듯, 복수는 달콤합니다. 그래서 취하기 쉽죠. 너무 오래 취하면 칸나와 같은 존재가 됩니다. 꽤 오랫동안 성장하지 않은 채 그대로, 그러나 인간의 모습이고 늑대들을 사냥하고 다니면서 작품은 시작합니다. 인간같지 않은 강함, 인정 받지 못한 채 배척 받는 영웅. 정말 좋은 소재이기도 하죠. 그 인생은 결코 그렇지 않지만.

 

 

그래도 칸나의 주변 사람들은 괜찮은 이들이 많습니다. 바드엘만 봐도 정말 충직하고 유능하고 훌륭한 인물이죠. 진짜 아버지와 같았던 인물이고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가장 뛰어난 인물이었습니다. 그 충직함은 주인이 인륜을 저버렸을 때 본인이 목을 쳐서라도 명예와 인간성을 지켜줄 수 있을 정도라고 할 정도로요. 

 

 

이외에도 특기할만한 인물은 로즈벡 주교입니다. 단순해 보이면서도 나름 복잡한 면이 있는 캐릭터인데, 솔직히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캐릭터 중 하나입니다. 얜 정말 미친놈이거든요. 그러니까, 싸움에 미쳐있습니다. 스스로 깨닫게 되지만 로즈벡과 오린들은 검을 정말 잘 씁니다. 수 십년 동안 검만을 단련하면서 성장해온 검의 귀신들이죠. 초반부의 오린들의 추격은 독자로 하여금 심장 졸이며 몰입하게 만드는 훌륭한 요소이기도 하고, 라이벌이기도 합니다.

 

강한 추적자들의 끈질긴 집념. 로즈벡은 그 중 최고였죠. 신실하다지만, 싸움만이 삶의 전부이고 검만이 가치의 증명인 인물입니다. 그에게 하는 독설들도 그런 맥락에서 나오는 말이죠. 신을 섬기는 것이 아닌 신의 힘을 섬긴다고도 할 정도로.

 

이런 류의 캐릭터들이 늘 그렇듯, 강직하고 이도 들어가지 않을 신념을 가집니다. 목표가 같지 않다면 어떤 말로도 설득이 불가능하고 맹신에 가까운 정신은 싸움을 위한 다른 요소를 배제하죠. 로스벡은 엠마가 살던 지역의 사냥꾼들과 함께 늑대들과 격전을 벌이기 직전까진 결코 흔들리지 않았던 인물입니다.

 

하지만 그는 결국 다른 오린이 죽어갈 때 늑대가 되었고. 강한 힘 대신 강력한 마술의 능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칸나라는, 자기 일생의 넘을 수 없는 벽이자 숙적과의 싸움을 기다렸죠. 그러나 칸나는 그를 이길 수 없다고 공인하고 로즈벡은 허무에 빠집니다.

 

이게 복수라는 열망의 끝이죠. 고작 이것 뿐이었냐고. 복수의 과정은 달콤하지만, 그 끝은 결코 달콤하지 않으니까요. 멈춰서야 할 선이라는 건 없습니다. 그러니 한번 맞아도 열 배 스무 배  갚으려는 것이 복수자들이고 그러고도 충분치 않다고 여기죠. 그러니 복수해야할 대상이, 복수해야만 하는 이유가 사라지면 더 이상 남은 것이 없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칸나를 죽이지 않고, 죽일 수 없었던 겁니다. 단지 세상이 이렇게 된 원흉을 죽이고자 목숨을 소모할 뿐이죠. 단지 끝을 보기 위해, 어떠한 신념이나 이익, 증명이 아닌 덧 없는 삶을 끝마치기 위한..

 

그리고 그때야말로 다시 깨닫게 됩니다. 자신은 살인에 미친 것도, 검에 미친 것도 아닌, 격전에 목말라 있었다고 말이죠. 칸나라는 숙적, 심장을 뛰게 만드는 그 짜릿한 전투 그 자체를 원하고 있었던 겁니다. 네, 혈관 속에 남의 피가 흐르는 전투광 캐릭터입니다. 그리고 전투광의 본질은 어떠한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닌 그러한 싸움 그 자체죠. 자신의 본질, 역할을 잊었기에 허무할 수 밖에 없고, 삶의 의지를 잃어버린 겁니다.

 

 

마리아라는 캐릭터만큼 할 이야기가 많고 인상적인 캐릭터는 없습니다. 처음엔 꽤 귀여운, 그렇지만 뭔가 석연찮고 찝찝한 캐릭터라는 건 느꼈지만 그만큼 독할 줄은 몰랐네요. 마리아는 원래 공주였죠. 사랑 받고 귀여운 받는 그런 순진한 공주. 그런 그녀가 사랑에 빠진 건 더스틴 스미스라는 녀석입니다. 그러나 그는 마리아를 사랑하지 않았죠. 그저 출세의 발판으로만 여겼고 결국 급변사태 때 그는 공주를 팔아넘깁니다.

 

그리고 공주를 집단강간을 당하고 버려지죠. 다행히도 연금술사 노파에 의해 구해졌고요.

 

단순히 버려지고 겁간을 당한 것만으로 훗날 벌일 그 모든 일이 발생하진 않았죠. 문제는 그 노파와의 만남이 그럴 계기를 만들었다는 겁니다. 믿음은 배신 당했을 때 가장 크게 추락하는 가치입니다. 그 연금술사인 오필리아와의 만남은 그 자체로선 마리아에게 하나의 빛이었습니다. 다시 살 수 있게 해주고, 다시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그런 빛. 돌봐주고 책임져주고 감당해주는, 그리고 가르침을 주는 진짜 가족 같은 인물이고 스승이었습니다.

 

오필리아의 과거 또한 순탄치 않았고, 그 때문에 낙인도 찍혔으며, 그에 대한 속죄로 삶을 살아가지만 그것만으로 사람들이 인정해줄거라 믿는 것은 너무 순진했던 걸까요? 그녀를 겪은 주변 사람들은 그녀가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고 여겼고 도움도 받고 고마움을 느끼기도 합니다.

 

하지만 휘발적인 감정은 상황이 만들어내는 것일 뿐이죠. 칼이 사람을 죽이는 게 아닙니다. 상황이 사람을 죽이는 거죠. 이익과 명분이 걸린 높으신 분들이야 그렇다쳐도, 흑사병이 발생하면서 외곽으로 이사해온 오필리아와 마리아, 그리고 그녀가 강간 당해 임신하고 낳은 아이 로벨리아. 이렇게 3사람의 비극은 공포의 광기 속에서 제대로 시작했지요.

 

평소 그녀들을 인정해주고 같은 편이 되어줄거라 말하는 이들의 말에 신뢰를 느끼고 믿음을 가진 것은 멍청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던 셈이죠. 당신들 편이라던 놈은 가장 먼저 오필리아와 마리아를 팔아넘겼고, 협상을 통해 50일 내로 오필리아를 구하려 흑사병의 치료제를 만들었던 마리아는 결국 인간 자체에 실망하게 됩니다.

 

자신이 흑사병에 걸린 이를 살려줬고, 그 사람이 자신을 알아보며 감사하다고 전했지만.. 결국 50일이 되는 날. 정치꾼들은 민중의 광기를 통제하기 위해 다른 광기를 제시해줬던 겁니다. 자신의 가족, 자신의 스승, 자신의 빛. 오필리아를 목매달아 죽인 겁니다. 마녀라는 허명을 뒤집어 씌워서.

 

처음부터 살려줄 생각이 없었던 겁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하니까요. 오필리아의 죽음과 함께 마리아는 개안하게 됩니다. 인간 전체, 모든 인류에게 실망하고 만겁니다. 공주시절 자신을 떠받들고 예뻐해주던 놈들에게, 그런 자신을 팔아넘긴 더스틴 스미스라는 개자식에게, 몇 푼 돈에 자신과 스승을 팔아넘긴 잡놈새끼에게, 그리고 더 편해졌다며, 고맙다던 인간들에게.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평소엔 그렇게 고맙다고 말하고 웃어주던 인간들이, 쓸모와 가치를 인정해주던 인간들이 상황이 변했다고 죽이라 소리치는 낯선 모습. 그 소름 돋는 광기. 배신 당하고 버림 받으면서도 계속 인간을 신뢰하던 고통 받는 공주는 더 이상 없어졌고, 인간에게 실망한 연금술사 마리아가 새로 태어난 겁니다.

 

그 이후 마리아는 떠납니다. 연금술사들의 탑으로 떠나 연구를 계속하죠. 하지만 인간 개인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마도서를 펼쳤죠. 이때 연금술사 마리아는 또 다시 마녀 마리아가 됩니다. 그리고 거기서 스스로를 여라고 부르는 존재를 만납니다. 일단 여기서부턴 이름이 따로 나오지 않게 때문에 여라는 인칭대명사를 고유명사처럼 사용하겠습니다. 불사의 저주를 받고, 죽지 않은 채 200년을 살아오면서, 인간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계획을 세웁니다. 더스틴 스미스. 그 개새끼를 호문쿨루스로 만들면서. 자신의 딸을 도구로서.. 마찬가지로 호문쿨루스로 만들면서요.

 

마리아가 바랬던 건 자신이 실망한 인간 모두가 영원히 고통 받는 것이었습니다. 죽지도 살지도 못한 채 영원히. 글자 그대로. 영원토록. 자신이 배신 당해 추락한 인간에 대한 믿음과 신뢰 만큼이나.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고 할 정도로 여자의 감정은 독하디 독하죠. 그 어떤 독극물보다도 유독하고, 진하고 예리합니다. 200년입니다. 인간에 대해 실망하고도 200년간을 살아오면서 계획을 세우고, 준비를 하고, 늑대를 만들어 실행합니다. 

 

그 과정에서 칸나라는 존재를 알게 되었고, 칼을 든 순간부터 올빼미로 지켜봐왔죠. 자신과 같은 동류의 인간이기에. 자신처럼 버려지고 배신 당하고 배척 당하는 존재이니, 자신을 이해해줄 수 있을 거라 여겼죠. 그래서 정체를 감추고 동행하게 됩니다. 물론 목적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결국 칸나와 일행들은 모든 진실을 알게 되고, 그 계획을 막기 위해 움직입니다. 법황청에도 가게 되죠. 그리고 거기서 인상적인 인물을 만납니다. 교황. 자신과 같은 백발의 존재. 그러나 푸른 눈의. 미신이라는 게 참 잔혹하죠. 인간 이성이 언제나 올바른 것도, 선을 향해 나아가는 건 아니지만, 대부분의 미신은 언제나 그 악성을 조금이라도 띄곤 합니다. 눈 색깔이 다르다고 누군 성녀고 누군 마녀라니..

 

 

마지막 전투는 정말 인상적이죠. 로리카, 더그, 엠마, 바드엘, 그리몰디 등이 모여서 세상을 구하기 위해 싸웁니다. 뭐, 그들이 스스로 그런 의식을 가지고 있는 진 또 모르겠지만..

 

바드엘과 그리몰디의 검 실력은 작중 최고 수준이죠. 하지만 마리아의 딸이자 호문쿨루스인 로벨리아는 인간이 아니기에 더 무섭습니다. 심지어 배운 적도 없으면서도 그 정도 재능이라니. 바드엘과 그리몰디라는 강자들의 합공을 이겨내는 괴물급 실력자입니다. 여기서 참 재밌는 연출이 나오는데, 그리몰디는 이전까지 보여줬던 정치꾼적인 면모와는 다른, 순수한 검사로서의 면모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리몰디는 부대에 도는 칸나에 대한 소문을 법황청에 찔러 오린이 출동하게 만들고, 정치적 숙적이었던 플랑들롱 가문을 몰락시키는 개새끼였거든요. 그러면서도 보석으로 치장한 다른 귀족을 비웃는 실전의 기사 다운 입체성을 가지곤 있었지만, 경제적인 마인드로 정치적 계산을 하는 면모는 아무리 객관적으로 괜찮은, 올바른 판단이라고 해도 누군가에겐 욕 먹고 증오 받을 수 밖에 없는 행동이었지요.

 

그러나 로벨리아의 싸움에선 라이벌인 바드엘과 함께 훌륭한 전투를 벌입니다. 여기서 이러고 있으면 안 된다는 겁쟁이스러운, 그러나 합리적인 판단과는 다르게 결코 놓지 못하는 생각들. 어떻게 전투를 이끌어나가야 하는가에 대한 순수한 검사적 판단을 말입니다. 라이벌로 여기긴 하지만 그래도 그렇기에 가장 실력을 잘 알고 있기도 하죠. 상단 방어를 강제하고 자신은 발목을 벨까? 하는 등의 계산을 하는 부분은 꽤 인상적이었습니다. 역시 칼밥 먹고 사는 놈들은 칼들고 휘두를 때 가장 순수한 법이죠.

 

마찬가지로 바드엘 파레스의 독백도 기억에 남는군요. 앞서 말했다시피, 로벨리아에게 자신의 어머니에 대해 미련이 없냐고 물으며 자신은 그렇지 않다고 하죠. 주인이 잘못나간다면 관계가 박살나는 한이 있어도, 심지어 인륜을 저버리는 길을 가겠다면 손수 목을 쳐 베어 버릴 각오로 말려야 한다고 말입니다.

 

로벨리아가 그 둘을 베어 넘기고 바드엘에게 말하죠. 강직함이 눈에 있다고. 그리고 그렇지 못하는 자신에게 분노한다고..

 

솔직히 로벨리아라는 캐릭터가 되게 뜬금없이 등장하는 면도 있죠. 물론 전개상 나올 수 있는 캐릭터이긴 하지만, 이전에 떡밥으로라도 등장하지 않은 급조된 캐릭터로 기억이 남습니다. 너무 띄엄띄엄봐서 기억을 못하는 것인진 몰라도.. 전개상 강제 임신을 당하고 자식을 낳는 거야 있을 수 있지만 그렇게 강한 이가 나온다는 건.. 뭐 이건 그 무력이 뜬금없기 때문이지 그 캐릭터 자체가 이상한 건 아닙니다. 자식을 사랑하지 않겠다고, 심부름꾼으로 쓰겠다고 말하던 것도 있고.. 호문쿨루스로 만드는 것도 납득 가능하고.

 

 

마리아는.. 정말. 증오에 몸을 맡긴 인물이었죠. 인간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가진 순진한 공주가 그들에게 배신 당하고 버려져 범인류에게 실망하고 그들을 죽이고자 하는 강렬한 증오에 몸을 던져버렸으니. 광기죠. 미친 겁니다. 하지만 정말 재밌는 건, 그러한 신뢰와 믿음이 태생적인 거라는 겁니다. 아직 인간 모두를 영원히 고통 받게 만들겠다는 마음을 먹기 전에 자신의 자식에게 했던 태도와 말들만 봐도 그럽니다.

 

자신의 뱃속 아기를 죽이고자 했지만 그러지 못했고, 자식에 대한 양육을 포기하고 사랑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결국 우는 아이에게 젖을 물려주었으며, 죽이고 버리지도 않고 심부름꾼으로 써먹겠다는 이유로라도 곁에 두고 키웠죠. 또 최후에는 칸나에게 설득 당하고, 복수 이외 또 다른 길이 있음을 인정하며 복수는 포기. 스스로 자멸하면서 칸나를 믿습니다. 비록 딸을 사랑하진 않았지만 혈연의 정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무시될 수 있는 것도 아니죠.

 

모든 인간에게 병을 주어 죽이고자 했으나, 그녀를 죽이지 못할 것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던 칸나는 그녀에게 무기를 휘두르는 대신 따스하게 안아줍니다. 그리고 복수할 대상이 없어져 그저 부당한 화풀이에 불과하게 된 자신의 행동을 내려 놓습니다. 다만 그것이 증오를 내려 놓는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 증오 덕분에 칸나와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죠. 또한 그런 칸나에게 보여줬던 환상 속에서, 말로는 좋아한 적 없었다고 말하는, 사실은 소중하게 여겼던 인물. 자신의 딸을 곱찝어 주죠.

 

 

사실 마리아는 더 이상 복수할 대상이 없어졌고, 그 때문에 복수는 허무해졌으며, 목적을 잃어버린 겁니다. 그래서 술식을 끝마치든 그렇지 않든 그저 허무할 수 밖에 없었죠. 여가 내린 불사의 저주는 글자 그대로 저주임을 알게 될 겁니다. 여는 처음부터 그럴 것을 알고 있었죠. 그러니 인간들은 왜 운운했겠습니까. 하지만 그런 증오와 광기는 언제나 가속되기만 할 뿐 멈추지는 않죠. 그렇기 때문에 필요한 것이 믿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네, 신뢰, 믿음.

 

바로 칸나와 로벨리아 같은 사람 말이죠. 칸나는 믿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로벨리아는 소중한 자식이죠. 증오와 광기 속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잡아주고 메어주는 역할을 하는 두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칸나는 눈물 흘리며 복수를 포기하고 돌아설 수 있었던 겁니다. 마리아의 믿음에 대한 태도는 태생적인 겁니다. 그냥 타고난 거에요. 

 

스스로는 로벨리아를 좋아한 적 없다고 했죠. 그럴 수도 있습니다. 의식적으로,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강간 당해 태어난 자식이라고, 그래서 사랑할 수 없었을테니까요. 하지만 그래도 혈연의 정이 어디 가는 건 아닙니다. 사랑하고 좋아하진 못해도 소중할 수는 있었죠. 이는 마치 개판의 레아 바스커빌과 사라 바스커빌과의 관계를 또 연상하게 만들더군요.

 

마리아에게 필요했던 건 복수가 아니라 그러한 복수와 증오에 빠져 길을 잃고 광기로 치닫지 않게 꽉 잡아줄, 따듯하게 끌어 알아줄, 사랑하고 사랑해줄 수 있는 소중한 누군가였습니다. 마리아를 소중하게 여겨줄, 그리고 잘못되지 않게끔 이끌어줄 수 있는. 칸나 같은 사람이.

 

 

 

레드 후드는 정말 걸작입니다. 명작이죠. 정말 하고 싶은 말이 많습니다. 초반의 압도적인 규모의 전쟁씬과 노련한 검술 전투 장면, 중세적 느낌을 새겨 넣은 그림체와 정교하고 손이 많이 가는 작업. 오랜 준비 기간 동안 다듬어지고 만들어진 전개의 완성도와 짜임새는 정말 논리적으로 최고입니다.

 

잘 만들어진 한국적 판타지는 현실적인 면과 뛰어난 짜임새가 특징이죠. 그판세, 흔세만 세계관 작품들 등등.. 이 작품에서도 그러한 요소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 아끼지 않을 수 없는 작품이고요. 한국의 다크 판타지 만화 중에 이만한 퀄리티의 작품이 얼마나 있을 지 모르겠습니다. 훌륭한 몰입도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다음화를 누르게 만들죠. 주변에 이런 장르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반드시 추천해야하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작품 내적인 내용과는 좀 별개로 그림이나 캐릭터 디자인 이야기를 좀 하자면, 워낙 그림을 잘 그리는 작가라보니 캐릭터가 정말 예쁘고 멋있게 나옵니다. 엄청 미형으로 잘 그린다 같은 건 아니지만, 그 그림체에서 나올 수 있는 미형의 캐릭터로 그린달까요? 가령 바드엘은 나이든 중년이지만 굉장히 멋진 사내다운 디자인이고, 더그 같은 경우도 나름 남자 답게 생긴 모습이죠.

 

여케들은 뭐 거의 다 예쁘다는 느낌입니다. 칸나야 뭐 말할 것도 없고, 마리아나 로리카, 심지어 로벨리아도 꽤 귀엽고 예쁜 편이죠. 칸나, 로리카 같은 경우는 어리다는 느낌에 가깝게 그려졌는데, 작가 특유의 아담한 체형의 그림체 덕분에 굉장히 꼬맹이 같은 느낌도 들죠. 아주 소녀 같은. 요즘의 나이트폴 이후에 그려지는 나이트런에 나오는 육덕진 몸매랑은 정반대죠.

 

그나마 로벨리아는 키도 크고 어느 정도 체격도 있게끔(여자치고는) 그려졌지만 다른 여케들은 귀엽죠. 개인적으로 굉장히 좋아하는 부분은 이마가 정말 예쁘게 그려졌다는 거고, 직선적이고 유려하게 각진 눈과 그 눈 옆아래 쪽에 그려진 눈물 자국 같은 부분입니다. 그 눈물 자국 비슷하게 작게 그려진 선들이 뭔가 분위기 있고 심지어 우수에 차있는 듯한 느낌이라 오히려 살짝 퇴폐적인 느낌마저도 드는데, 그게 괴앵장히 매력적입니다.

 

그 모든 요소를 가지고 있는 게 마리아인데, 얘는 진짜 너무 예쁘고 매력적이더군요. 칸나는 자신의 증오와 복수심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니 오히려 더 독해보이고 거칠어 보이지만 마리아는 그걸 감추려던 편이었다보니 그런 거친 느낌이 들지 않고 굉장히 부드럽고 소녀같아서 너무 예쁩니다. 이 작가는 여케 이마랑 눈, 입술을 굉장히 잘그려요..

 

하고 싶은 말도 많고 설명하고 분석한 것들도 많지만, 욕심이 과하면 넘치는 법이라죠. 여기서 줄여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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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리뷰는 작품에 대한 내용누설이 있습니다. 


아이소포스는 언젠가 꼭 리뷰를 작성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하는 명작인데, 제가 엄청 게으르다보니 많은 부분을 잊어버린 지금에서야 작성하게 됐습니다. 사실 이런 버릇 고쳐야 하는데 말이죠..


김양수, 도가도 콤비의 작품입나다만 먼저 도가도의 그림 실력부터 칭찬하고 넘어가고 싶습니다. 이전부터 도가도 작가의 그림 실력이야 익히 알려진 사실이지만 고대 시대를 배경으로 자기 스타일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충분히 어울리고 수준 높은 작화와 드라마틱한 연출을 뽑아낼 수 있는 건 정말이지 몇 안 되는 그림작가만의 역량이죠.


초반부터 후반까지 도가도의 드라마틱한 연출은 가히 괴물급이다 싶을 정도의 장면들이 있었는 데, 후반부의 이솝 처형장면이나 초반이나 중간중간 나타나던 야드몬의 압도적 지배자로서의 위엄, 카리스마를 꼽을 수가 있죠. 그 장면들은 정말이지 컷 방식이나 크기 등 연출부터 압도적으로 웅장할 정도로 보는 이름 위압하는 그런 게 있습니다. 야드몬은 그러한 연출을 통해 최종보스의 풍모를 가감없이 보여줬고, 그러한 역할에 충실했죠.


특히 마지막 회에서의 종교적 광기와 희생, 죽음과 혼돈을 연출해낸 것은 정말이지 그 누가 그러한 고대적이고 종교적인 수준의 연출을 해낼 수 있을지 한번쯤 생각해보게 만들 정도로 압도적이고 파괴적인 씬들이었습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완벽히 매료되고 이입시켜버리는 힘을 지닌 그림과 연출이었지요. 최고였습니다.



아이소포스라는 작품은 그 원작이 되는 이솝 우화와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하는 작품입니다. 개인적으로 이런 작품들 정말 좋아하는 데, 특히 작가의 역량과 캐릭터의 매력이 돋보이는 지혜와 철학적 사유가 담긴 작품들을 굉장히 좋아하죠. 김양수 작가의 역량은 정말이지 엄청났는 데, 아이소포스의 스토리텔링은 그 유명한 폴빠 작가와 비교해도 절대 꿀리지 않을 정도로 굉장한 몰입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거기에 도가도 작가의 프로다운 그림실력을 깔고 들어가니 하나의 살아 있는 작품이 되어버리더군요. 초반부터 중간중간 캐릭터로서도, 독자들에게도 무언가를 전달하기 위해 이솝과 캐릭터들은 설화를 매개로 이야기를 풀어나갑니다. 그러한 액제식 구성은 작품의 매력과 작품성을 풍부하게 만드는 요소이지만 아주 자연스럽고 흥미롭게 이끌어나가죠. 사실 남들도 대부분 알고 있을만한 이야기를 이용해 스토리를 풀어나가는 것은 하나의 장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애초에 이솝 우화라는 거 자체가 그러한 설화와 이야기의 모음이기 때문에 작품적으로 그러한 이야기들이 나오고 연출되는 것은 아주 당연한 거고 재미의 요소인 것도 맞고 당연한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작품 구조를 아주 잘 짰다고 생각합니다. 독자에게 생각을 하게 해주는 작품은 그 자체로 명작의 요소를 담고 있는 셈이죠.



작품의 중심이 되는 주제는 자유와 복수입니다. 이솝은 태생부터가 야드몬의 것이었던 부모의 자식이었고, 그 부모가 야드몬이 원치 않는 방식으로 죽게 되자 그 대신 자식인 이솝이 야드몬의 노예가 됩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부모에게서 자랐던 이솝은 그러한 통제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으나 부모의 장례를 이유로 결국 노예가 되어 버리죠. 그렇게 부모에게서 받은 지혜와 명석한 지성을 갖추고 있었던(어렸을 시점에선 아직 멀었지만..) 이솝은 자유를 꿈꾸고 추구하게 되었죠.


이솝에게 있어서 자유란 삶의 존재 가치이기도 합니다. 또한 부모를 그렇게 만든 야드몬에 대한 복수 또한 그의 삶을 관통하는 족쇄이기도 하고요.


그는 자유를 추구하지만, 과거의 일에 족쇄가 채여진 노예이기도 합니다. 이솝이 결국 그 족쇄를 벗어던지지 못했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야드몬이 그 족쇄를 풀어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결국 자유를 손에 넣었으나 사랑을 잃고 말게 돼죠. 복수를 하기 위해선 2개의 묘를 파놔야 한다는 말처럼 그 대가를 치루게 된 겁니다. 그 대가가 온전히 자신의 의지에 따른 것만은 아닐 뿐이죠.



이솝은 성실하고 지혜로웠기 때문에 인덕이 있는 편이었습니다. 나름의 매력을 갖추고 그러한 진심을 보였기 때문에 브리와 테오, 알카노스, 야만인 아저씨 등 굵직한 인물들이 그의 곁에 모일 수 있었고 그와 함께할 수 있었죠.


브리는 그 중 이솝에게 반드시 있어야 했고, 가장 큰 도움이 되었던 인물이기도 합니다. 훗날 목숨을 바칠 정도로. 어렸을 때부터 서로 도왔고, 이솝 또한 그녀에게 도움을 받으면서 나중엔 아예 애정과 우정이 사랑이 되기도 했죠. 서로 오랜 시간을 떨어져 지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알아보고 사랑과 비슷한.. 혹은 사랑의 감정을 품고 있었으나 그걸 표현할 수 없었고요. 그럴 수 밖에 없었으니까.. 


이솝의 어린 시절은 가혹했고 그만큼 타인에게 진심으로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절박했기 때문일 수도 있었죠. 야드몬의 밑에서, 임무를 위해 갔었던 스파르타에서도, 그 이후에서도 말입니다. 진심으로, 선의를 기반으로 남을 도왔고 그 행동은 인과가 되어 자신을 돕는 방향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는 자신 뿐만 아니라 주변인에게도 마찬가지인데, 단적으로 이솝이 이데스에게 받은 반지를 브리세우스에게 주면서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죠. 그 덕에 노예로 팔려나갔던 브리를 이데스가 알아보고 사오며 전사로 성장할 수 있게 됩니다. 


이솝이 진심을 다하며 남들과 대하며 그 선의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받은 결과, 그는 자유를 되찾기 위한 여정을 떠날 수 있었습니다. 겉으로나마 자유로울 수 있었죠. 알카노스를 도와 말레우스로 갈 수 있었던 건 그에게 있어서 가장 큰 전환점이었고요. 그 알카노스가 이솝에게 물어본 적 있습니다. 너의 소원이 무엇이냐고. 이솝은 대답했죠. 나의 소원은 나 자신을 나 스스로가 소유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 이름 자유. 이솝이 추구하는 삶의 목적이자 모든 것이죠.



그러나 모든 일이 잘 돌아가기만 할 순 없었죠. 야드몬은 결코 이솝을 포기하지 않았고, 나이든 야드몬과 아르키우스의 추적을 받습니다. 그에 따라 이솝은 일행과 함께 코린토스로 도망을 가면서 브리와 재회하게 되죠. 그 재회가 그리 감동적이지 않고 아주 담담했지만 브리의 바뀐 모습이 정말 여신 of 여신이었죠. 이후에도 꾸준히 작화 깡패 여신님으로 나오는 데 역시 여캐는 정말 잘 그립니다..


하여간, 그렇게 도망을 갔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이솝에겐 불행이 찾아왔죠. 브리는 신병을 앓으며 무녀로서의 삶을 살아야 하는 운명을 가지게 되었고, 결국 브리를 살리기 위해 과거의 연을 끊어야 하기 때문에 브리의 주인인 삽포와 야드몬을 데려오려고 했죠. 야드몬에게 복수하기 위해 이전부터 계획을 진행해왔고, 브리를 살리기 위해 아예 납치라는 계획을 세우려 했지만.. 결국 실패하게 됐습니다. 심지어 구상하던 사업조차도 재기 불가능할 정도로 처참하게 박살나버리죠.


결국 이솝은 희생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야드몬에게 가서 동료들의 안전을 보장하고 브리가 무녀가 될 수 있게 도와달라는 조건으로 다시 한번 야드몬의 노예가 되죠. 아니, 보이지 않게 감추어 두었던 족쇄를 드러냅니다. 그는 원래 야드몬의 노예였기에.


그 장면이 참으로 슬픈 비극인데, 서로 사랑하고 아끼던 사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은인이었던 이솝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은인인 브리를 서로가 포기할 수 밖에 없었죠. 브리가 무녀가 된 밤, 브리와 함께 깨어난 이솝은 서로 밤을 보냅니다. 이때 이솝이 브리에게 깨어났냐고 묻자 브리는 아니라고 대답하죠. 깨어났다면 브리는 무녀가 되어야 했기 때문에 깨어나지 않았다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이솝과의 인연을 끊고 싶지 않아서, 그를 사랑하고 싶어서. 


그 이후.. 다음날이 오자 이솝은 홀로 꺠어나 무녀가 된 브리를 만나지만 브리는 차갑게 무녀의 거처이니 이방인은 떠날 것을 차갑게 말하죠. 이솝은 말업이 브리를 지나쳤으며, 브리는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립니다. 사랑의 감정은 그렇게 감추어둘 수 있는 것이 아니죠. 말은 그렇게 하지만 서로 찢어지는 가슴을 감추어둘 수 밖에 없었던 겁니다.



그렇기 브리는 지나친 이솝은 다시금 노예가 되었습니다. 야드몬에게 족쇄가 채워진 채 끌려가죠. 처음부터 노예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원래 상태로 돌아온 것이죠. 그는 도망간 것이지 자유를 찾은 것도, 해방된 것도 아니었습니다.



3부의 시작은 그 시점으로부터 20년이 지난 뒤입니다. 아주 긴 시간대를 건너 뛰었지만 원래부터 잘 짜여진 작품이니 독자들은 놀랐지만 뭐.. 명작이라는 것이 그런 것이죠.


이솝의 지혜는 여전했고, 스토리텔링을 통해 수려하게 이끌어나가며 극을 시작합니다. 여전히 이솝은 노예 신분이죠. 다만 직책이 조금 높은 편인 것으로 보이고요. 야드몬은 나이 들었지만 여전히 살아서 이솝의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었고, 이 시기 이솝은 정신마저 굴복한 상태인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야드몬은 아들을 낳았죠. 리케스라는 아들을.


리케스라는 캐릭터는 기실 무언가를 떠올리게 만드는데, 야드몬의 아버지가 그랬죠. 아들을 지배하고 통제하려고 했던 아버지. 그런 아버지가 자식을 왜 낳았을 것이냐는 질문과 대답을 말입니다. 그러나 리케스는 야드몬의 수준이 미치지 못했고, 야드몬 또한 리케스에게 그러한 무언가를 느끼거나 지배하려는 그런 면도 그리 부각되진 않았습니다만.. 솔직히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3부의 구체적인 스토리는 생략하고 본다면, 이솝은 수 십년을 야드몬의 노예로 살아갈 수 밖에 없었고, 자유를 추구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정신적인 굴복. 야드몬을 싫어하는 건 사실이지만 리케스에게마저 증오할 순 없었고 야드몬과 리케스가 다름을 그는 알고 있었죠. 그가 벗어날 방법 또한 없었고 시도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3부 시점에서 그는 시도를 했고, 리케스를 돌봐주었으며, 야드몬의 정치 등 그러한 여러 사정이 겹쳐 야드몬의 눈 밖에 나며 인민재판과 돌팔매질을 당하며 죽어갑니다. 그것도 자신의 사랑, 브리세우스 앞에서요.



아이소포스는 그리스 시대를 기반으로 하는 작품이고, 그리스 시대의 작품은 그리스 비극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정형화되고 유명한 장르가 있기도 하죠. 아이소포스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작품은 비극적으로 끝맺음을 이뤘죠. 이솝은 인민재판을 받으며 십자가에 묶여 처형되는 상황까지 가고, 브리는 자신을 바쳐서 주술을 시행했으며, 결국 브리의 목숨을 대가로 이솝은 자신의 적인 야드몬의 아들인 리케스의 몸과 바뀌게 되었습니다.


결국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과 사모하는 이의 죽음이라는 비극과 함께 끝맺게 되었죠. 이솝은 복수를 원했으며, 그것을 포기하고자 했으나 포기할 수 없었고, 결과적으로 그 복수는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실현되었습니다. 그 결과 그는 공허함만을 안고 살아가게 되었죠. 자유란 허망한 것이었을까요? 복수라는 족쇄에서 벗어난 이후에서나 자유를 얻었고, 그 자유를 대가로 삶의 영혼을 잃게 되었으니, 자유란 이토록 잔혹한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야드몬과 이솝, 브리세우스라는 캐릭터에 대해서 할 말도 많고, 그 캐릭터들에 대한 분석을 하고 싶은 것도 사실입니다. 특히, 야드몬이라는 캐릭터는 그 캐릭터성과 작품 내에서의 행적을 보면 정말이지 할 말이 많고 이야기하고 싶은 것도 많습니다. 그만큼 매력적인 캐릭터이기도 하고 뛰어난 캐릭터성을 지닌 캐릭터이기도 하다는 겁니다. 작품 내에선 결코 정을 줄 수 없는 정형화된 악역이긴 하지만, 작품적으로는 굉장히 매력적으로 재창조된 캐릭터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제 기억력의 한계와 유료화된 작품이기 때문에 이 캐릭터들에 대한 모든 것을 분석하고 이야기할 수 없음이 아쉽고 안타까울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주 약간, 약간의 편린만을 꺼내어 설명하고자 합니다.



이솝


말했듯이, 이솝의 삶을 관통하는 두가지 기둥이 있다면 그것은 자유와 복수입니다. 그는 아무런 사실도 몰랐던 야드몬에게 그의 양친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부모의 썩어가는 시체를 밖에 내다 버리는 것을 대가로 자유인으로 살 것인가, 장례를 치뤄주는 대가로 노예가 될 것이라는 선택지를 놓고 후자를 선택했습니다. 아주 잔혹한 선택지였죠.


그런 그는 야드몬의 밑에 들어가 노예로서 일해야 했습니다. 당연히 다른 노예들에게도 따돌림 당하고 핍박 받으면서 지내야 했죠. 야드몬 또한 그를 좋아하진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부모님은 지혜로웠고 현명했죠. 그 부모 밑에서 태어나고 자란 이솝에게도 지재가 있었습니다. 그 어린 나이에 가혹하고 열악한 조건 속에서 그는 그 스스로를 소유하기 위한 불꽃을 언제나 가슴 속에 지니고 있었고 노예로 살면서도 그러한 욕구를 위해 노력했습니다.


시험 받고, 성취하며, 남을 돕고, 도움을 되돌려 받으며 신뢰 받고 은혜를 주고 받으며 인망을 쌓았죠. 그렇게 그는 그들의 도움을 받아 자유를 손에 넣었고, 먼 이국의 땅으로 도망갑니다. 하지만 이런 말이 있죠.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고. 그는 도망나온 것이지 진정한 자유를 손에 넣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었던 것이고 언제나 떠돌아 다녀야만 했던 것이죠. 물론 복수라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지만요. 


복수.. 복수란 언제나 과정을 음미하는 것이고, 결과에서 성취를 느끼고 행복을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의 복수는 과정을 음미할 수 조차 없었습니다. 그의 복수는 또한 그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죠. 그가 복수를 해야만 하는 이유는 그가 복수를 원하기 때문이라기 보단, 그가 복수를 하게끔 만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야드몬이 이솝을 결코 놔주지 않았거든요. 그가 복수를 포기하고 싶다고 생각해도 야드몬은 결코 그러한 결정을 허락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든 이솝을 소유하고 통제하려고 했고, 이솝은 자유를 갈망하기에 반드시 야드몬을 죽여야만 했던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유가 될 수 없었으니.


그 결과 이솝은 원래의 노예 상태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간의 노력과 인망, 성공과 성취가 무의미하게 변해버린 것입니다. 지재가 있어 나름의 성공과 성취를 하며 살았지만 처음부터 그는 자유롭지 못했으니까요. 그로서는 동료를 버릴 수 없었고, 그러한 모든 것은 그에게 족쇄가 되었습니다. 동료에게 죄가 있거나 한 건 아니었지만 진정한 자유를 얻기 위해선 자신이 쓰고 있던 족쇄를 벗어야만 했죠. 야드몬에게서 말입니다. 그런 겁니다.


사실, 이전에도 이솝은 두차례 가량 야드몬을 죽일 수 있었습니다. 칼로 찔러 죽일 수도 있었고 불에 타죽게 놔둘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솝은 그러지 않았죠. 나름의 정의와 추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쩌면, 어쩌면 이솝은 단지 그러한 복수를 벗어나고 싶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런 복수 같은 것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를 찾고 싶었던 것이죠. 결과적으로 그 복수라는 족쇄 때문에 이솝의 결말이 파탄으로 이끌렸던 것을 생각해보면 말입니다.


자유란 단순 물리적, 신분의 구속이 아닌 정신의 구속에서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이죠. 그렇기 때문에 이솝은 복수를 포기한 듯한 결단을 내린 것이고, 그것을 나름의 논리로 포장했던 것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혹은 복수를 행한 이후를 두려워 해서 일 수도 있죠. 정말 모든 것이 끝날까봐. 모든 좋은 것과 나쁜 것이 다 끝날까봐 말입니다. 복수의 끝은 언제나 공허하기에.


야드몬의 노예가 된 이솝은 결국 자유를 포기하게 됩니다. 포기하고 살게 되었죠. 야드몬이 자식을 보며 성공한 삶을 보낼 때, 그의 성공을 이끌어줬던 것은 이솝이었습니다. 증오해 마지않을 원수이자 집요한 지배자인 야드몬을 말이죠. 그러나 이솝인 결국 그의 눈 밖에 나게 되었고, 죽임 당하게 되었습니다. 단지 여기까지만 본다면 야드몬은 이솝이라는 인간의 인생과 정신 모두를 소유하고 지배하고자 했던 놈이었고, 실제로도 그러한 시도가 성공하기도 했죠.


...이솝이 만들었던 인연이 이솝을 구해주지 않았더라면 말입니다.



브리세우스


노예가 된 이솝에게 먼저 다가갔던 아이이자, 우정을 나누고, 동경을 주었던 캐릭터죠. 이솝을 동경하고 이솝에게 은혜를 갚고자 했던 아이였습니다. 결국 노예로 팔려나가게 됐지만, 이솝이 준 반지 덕분에 전사로 성장할 수 있게 되었죠. 그 덕에 당차고 강한 여성이 되어 돌아왔고요.


이솝의 인생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커다란 조각이 브리세우스 였나면, 브리세우스의 인생 대부분을 차지하는 조각은 이솝이었습니다. 그를 위해 성장했고 그를 위해 살고자 했기 때문이죠. 하지만 운명의 장난이란 이럴 때 쓰는 말입니다. 신병을 앓기 시작하면서 브리는 이솝과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죠. 어렸을 때의 그 감정은 점차 사랑이 되어 나타났는데, 이젠 더 이상 같이 있을 수도 없게 되고, 다시 노예가 됨을 아는 그녀에게 운명이란 신들의 짖꿎은, 잔인한 놀음판이었죠.


이솝 또한 자신이 완전한 자유를 가진 이가 아니었음을 알았기에 브리의 감정을 받아줄 수 없었던 거고요. 지재가 있으며 사기도 치고 다니던 녀석인데 설마 브리의 감정을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있겠습니까? 알았겠죠. 알았죠. 그러나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겁니다. 자신도 어떻게 될 것인지 어렴풋이 알았고 그 위험성 또한 알고 있었으니까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그 진부하고 진부한 만큼 애닳는 관계를 어떻게 견딜 수 있을는지..


결국 이솝은 자신을 버리며 브리를 무녀로 만듭니다. 그리고 그날 밤 잠에서 깨어난 브리는 깨어났냐는 이솝을 물음에 아니라고 대답하죠. 깨어나면 자신은 이제 무녀이고, 이솝과의 관계와, 이솝에 대한 감정을 버릴 수 밖에 없음을 알기 때문이죠. 그러니 깨어난 게 아닌 겁니다. 그러니 서로의 감정을 더 이상 감추지도, 숨기지도 않아도 되는 마지막 날인 것이고요.


그러나 밤이 지나고 아침이 오자, 새로운 관계로 정립됩니다. 브리는 이솝을 냉담하게 대하죠. 그 속은 썩어들어갔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이솝은 노예가 됩니다.


20년 동안 브리는 무녀로서 충실히 봉사해왔습니다. 좋은 대우를 받았고, 남들의 떠받듬을 받았죠. 그러나 사랑이라는 강렬한 감정은 그 시간 속에서 무뎌지지 않았고, 단지 감춰지기만 했습니다. 극의 마지막. 이솝이 십자가에 묶여 죽을 것을 알게 된 브리는 무녀로서의 자신을 버리게 됩니다. 주종관계는 끓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랑은 외압에 끊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죠. 아직 남아 있다면, 그것은 존재하는 겁니다.


브리는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여, 자신의 사랑에게, 자신의 인생을 차지했던 그에게 자신의 목숨을 바치기로 했습니다. 자신의 목숨을 희생해 자신의 사랑을 구하고자 한 것이죠.


결국 브리는 죽게 되었고, 이솝은 살아남습니다. 리케스의 몸으로요. 그리고 그 이후에나 복수는 끝마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복수란 그토록 어렵고, 이토록 허망한 것이죠. 이솝이 그리도 바래왔으나 실패하고, 포기한 시점에서나 성공하게 되었으며, 그 또한 자신의 손이 아니었고, 자신이 자신을 버림으로서 살렸던 여자가 죽어 잃고난 뒤에 모든 것이 끝나게 되었으니..



야드몬


야드몬은 아이소포스에서 가장 매력적이고 다채로운 인물입니다. 그의 태도가 크게 변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지만 심리적, 정신적 방황과 충동은 가장 완성도 있고 복잡한 캐릭터죠. 그는 헤파이스토폴리스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헤파이스토폴리스는 권력자이고, 지배자입니다. 왕이었죠. 권력을 얻기 위해선 자신의 아내라도 팔아넘길 수 있는 냉혈한 인물이었고, 자신의 자식을 사랑이나 애정의 대상이 아닌 지배와 통제, 소유의 대상이었습니다. 자신을 두려워 하라. 그게 자신의 아들에게 원했던 것입니다.


헤파이스토폴리스는 야심만만하고 패기 넘치는 인물이었지만 독하지 못했고, 잔혹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야드몬에게 살해당한 것이었죠.


야드몬은 엘리오스를 보고 사랑에 빠졌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라더니, 그말이 사실이었으며 그녀를 사랑하여 결혼하고자 했죠. 그러나 엘리는 자유를 원했습니다. 강제로 누군가의 여자가 되는 것이 아닌 자유롭게 자신이 남과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랬죠. 아마 이솝의 그 자유를 갈망하는 선청은 어머니에게 물려 받은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 그녀가 슬픔에 빠져 웃지 않으니, 야드몬은 그녀를 위해 뭐든 하겠다는 일념으로, 프론티스라는 광대를 소개해줍니다. 그리고 그의 광대짓에 엘리가 웃죠. 야드몬은 만족했습니다. 그녀가 웃었으니까요. 사랑하는 그녀가 웃었으니 말이죠. 하지만 사람의 감정은 통제하고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그녀는 땅딸보인 프론티스와 함께 도망을 가게 됩니다. 프론티스는 남들이 알아보지 못하게 얼굴을 황산으로 뭉갰지만, 그녀가 사랑한 그는 외모가 아닌 그의 지성과 내면을 사랑했었죠.


그렇게 사랑하는 여인을 잃게 된 야드몬은 자신의 사랑을 찾기 위해 추격자들을 보냅니다. 그 과정은 10년이나 이어졌죠. 10년 동안 한 여자를 찾고자 했던 겁니다. 순정이라면 순정이고, 징그러운 집착과 집요한 강박이기도 한 그의 정신을 옅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사고로 프론티스와 엘리가 모두 죽어버리고, 남은 것은 그들의 자식인 이솝 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이솝을 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사랑하는 여인과 증오하는 남자 사이에서 태어난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 아이를.. 그 복잡하고 끔찍스러운 감정을 어떻게 받아들여야만 했을까요?


결국 그는 꾀를 써 그를 자신의 노예로 삼습니다. 사랑하는 여인의 자식이자 증오하는 남자의 자식인 이솝을 어떻게 해야할지 몰랐기에, 어쩌면 가장 적절한 결정을 내렸던 거라고 봅니다. 사랑할 순 없으나 마냥 증오할 순 없는 그런 아이..


어느날, 야드몬의 아버지 헤파이스토폴리스가 돌아와 엘리를 찾기 위해 10년을 낭비한 야드몬을 꾸짖으며, 그렇게 낭비한 병력을 자신에게 원군으로 보내라고 합니다. 그러나 야드몬은 그 원병을 돌려 아버지를 공격하고 살해하죠. 야드몬은 자신이 아버지의 소유물이 아니라며 항변했습니다. 그의 삶에서 처음으로 있었던 반항이었죠. 어떻게 보면 이중적이기도 하죠. 하지만 그 답기도 합니다. 아버지에게 소유 당하고 통제 당했으나, 자신의 사랑과 원수의 자식인 이솝을 소유하고 통제하려는 면모.. 그만큼 복잡한 캐릭터죠.


이솝에겐 나름대로의 정의와 추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살해하려고 했을 때도, 훗날 배에 불이 타 죽을 수도 있었을 때도 이솝은 그를 죽이지 않았죠. 그가 추구하는 복수의 방식이 아니었기 때문이기도 했거든요. 처음 이솝이 그를 죽이려 할 수 있었을 때 야드몬과의 대화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너에게서는 네 어머니의 어떤 것도 볼 수 없구나. 내게서 내 아버지의 어떤 것도 볼 수 없듯이... 라고 말입니다.


이솝은 아버지의 외모를 더 닮았고, 야드몬은 아버지의 내면을 닮지 못했습니다. 이솝은 어머니의 내면을 닮았꼬, 야드몬은 아버지와 비슷하게 소유와 통제를 추구했지만, 그 방식이 전혀 달랐듯이요. 야드몬은 그의 아버지와는 다르게 독하고 집요했으며 집착적이고 강박적이었습니다. 수 십년 동안 한 여자만을 사랑하고, 그 자식을 통제하고 소유하고자 했으니. 왕이자 전사였던 아버지와는 다르게 뱀과 같은 정치인인 야드몬이었습니다.


어째서 야드몬은 이솝에게 그토록 집착했을까요? 분명 자신의 영원한 사랑이나 신전이었던 엘리의 자식이었기 때문일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코 죽이지 못하고 잡아 소유하고자 했던 거죠. 다신 도망가지 못하게 말입니다. 뒤틀리고 비뚤어진 겁니다. 아버지의 소유와 통제에 대한 트라우마 같은 거랄까요? 살면서 겪고 배워온 것이 그것이니 그 성향을 받은 것도 있으며, 강렬한 사랑의 감정이 수 십년 동안 그를 통제하고 있었던 것이죠.


이솝에게 채워진 노예와 복수라는 족쇄처럼 사랑과 소유라는 족쇄가 그를 감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솝 또한 브리와의 사랑이라는 감정과 인연에 의해 인생이 변하게 되었는 데, 야드몬 또한 그랬다니.. 자유란 무엇일까요? 사랑을 위해, 사랑에 의해 자신의 아버지에게 반항하고 살해한 그 또한 자유를 추구했을 것인데.


비록 이솝에게서 엘리의 무엇도 찾아볼 수는 없었지만 이솝의 내면은 엘리와 닮은 면이 있었죠. 아니면 단지 과거를 추억하고 회생하게 해줄 매개체로서 그가 필요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엘리의 자식이라는 사실 그 자체가 노예 이상이나 그 이하로 만들 수 없는 장치가 되었을 수도 있고요.


야드몬이라는 캐릭터를 피상적으로 바라복 되면 평면적인 변태적 집착과 소유욕을 지닌 남자라고 보일 수도 있지만, 실은 가장 복잡하고 입체적인 캐릭터이기도 합니다. 겉으로 드러나진 않고 내면이 글로 표현되는 것도 아니지만 그 내면은 복잡하고 혼란스럽기 때문입니다. 정치인답게 표정을 다스릴 줄 알고 태도를 갈무리할 줄 알기에 그것을 알기 어렵지만, 그에게 같은 목적을 위한 내면적 상태는 시점에 따라 지속해서 변해간다고 전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복잡한 것은 사실이고 그에 대한 수 많은 해석을 낳을 수도 있지요.


그렇기 때문에 가장 훌륭하고 완성도 있는 캐릭터를 야드몬으로 꼽는 것이고, 매력적인 캐릭터라고 단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캐릭터를 만들고 연출해낸 김양수, 도가도 콤비의 작가적 능력과 작품성은 그야말로 신화적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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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리뷰는 작품에 대한 내용누설이 있습니다. 


이런 류의 작품들이 다 그렇듯, 솔직히 별 기대는 안 했지만 상당히 괜찮게 본 작품입니다. 흔해 빠진 회귀물, 헌터물, 주인공 짱짱맨 작품인가 했더니 딱 그 정도까진 아니었다 정도랄까요? 가장 마음에 드는 건 작품에 등장하는 여러 종족이나 존재에 대한 배경 설정들이었습니다. 제 취향에 맞는 설정들이더군요.


솔까 초반에는 일반적인 헌터 어쩌고 우물(던전), 아이템 어쩌고 하는 나부랭이 같은 건 줄 알았습니다. 대개 이런 류의 소설들이 그렇듯이 뭣도 없이 그런 어째서인진 몰라도 어느 시점부터 던전 같은 게 생기고 괴물들이 나오고 일반인들 중에 능력자가 생기고 아이템도 뜨고 마정석 같은 것도 뜨고 어쩌고 그러는 것들이 그러한 것들의 존재 이유, 당위성이나 개연성 따위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단순한 재미를 위해 일단 냅다 설정해서 시작하는 것들이 너무 많다보니 말입니다.


하지만 이 소설은 읽다보면 그런 것들에 대한 당위성을 부여했습니다. 이런 류의 작품의 바탕이 되고 기본이 되어주는 현상에 대한 당위성은 있어줘야 한다고 보거든요. 가령 백룡공작 팬드래건에서는 드래곤과 다른 이들에 의한 계획 등에 의해 주인공이 앨런 팬드래건으로 전이(라고 해야하나..), 회귀해서 다시 시작하고, 시그리드는 폭주하는 황제에 반발한 아르카나와 베라무드의 합의에 의해 시간을 되돌리고 그 여파로 시그리드가 부활한 거죠.


이러한 배경이 되고 시작이 될 수 있는 요소들에 대한 당위나 설명이 없이 단순히 그냥 그랬다, 왜 그랬는 지는 모르겠고. 같은 식으로, 아예 무시하거나 맥거핀으로 만들어버리는 건 작품의 수준은 한 단계 낮추는 행위라고 봅니다. 


그런 면에서 언령마술사에서는 우물의 존재와 아티팩트, 마정석 등에 대한 존재 이유를 적절한 당위와 개연성을 설정하면서 납득할 수 있는 스토리로 엮어냈죠. 


회귀에 대한 이유 또한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여자 때문에, 혹은 사랑하는 가족 때문에라는 흔하지만 그만큼 있을 수 있는 이유를 바탕으로 합니다. 회귀를 한 뒤 어찌저찌 살겠다 같은 다짐이나 계획이 아닌 처음부터 사유가 충분히 있었고 단지 기억을 하지 못하는 경우였었죠. 그 점이 차이점이기도 하고요. 물론 나중엔 기억을 되찾게 되지만.



또 앞서 말했듯 각각의 존재나 종족의 배경 스토리도 굉장히 취향 저격이었는 데, 영웅왕이나 도깨비 군주, 용족, 나람천이나 랑다미르, 다른 신적 존재나 종족, 혹은 무기 등에 대한 배경 스토리가 굉장히 특색있고 멋진 면이 있거든요. 상당히 신화적이고, 그래서 저에게 취향저격 요소로 여겨졌습니다.


반복되어 묘사되고 설명되는 이스케천의 압도적인 존재감과 힘 또한 매력적이기도 하고, 영웅왕이나 거인족, 나람천에 대한 설정이나 묘사 또한 상당히 매력적이었습니다. 라반궁을 얻을 때의 이야기도 꽤 괜찮았고요.



그 외엔 50화가 넘고 또 수십화는 더 지나야 한번 더 배경이나 스토리의 갈래가 바뀌어버리는 반전이라고나 할까.. 57화 였던가요? 거기서 다시 회귀해버리고 프롤로그 끝났다고 했을 땐 그냥 그럴 수도 있지 정도였지만 이후에 한번 더 반전으로 프롤로그가 2개다 같은 소리를 할 상황이 나올 땐 좀 뭔가 싶긴 했습니다. 그래도 뭐 문제 있는 건 아니고 스토리가 어떻게 가려나 싶은 정도?..


그래도 나름 스토리를 잘 풀어간 건 사실입니다. 약간 아슬아슬해보이는 지점도 있긴 했지만, 큰 문제 없이 잘 풀어간 건 맞다고 봐요. 그래서 완결 부분은 충공깽이긴 했습니다. 외전 안 나왔으면 씨발 이게 뭐야 였을 걸요. 진짜 씨발 아무리 작품의 완결에 여러 방법과 종류가 있다곤 하지만 그래도 씨발 그건 좀 너무했다 싶었습니다.


슈ㅣ발 무한 츠쿠요미식이라니. 최악의 상황, 사태에서 죄다 원하는 꿈을 꾸게 하면서 종말을 기다리게 되는 건 좀 심하긴 했죠. 근데 그 부분이 상당히 희망적이고 진짜 모두가 원하는 행복한 상황이며 그 틀이 적당히 들어먹기도 하고 또한 그런 묘사로 이어지는 부분이 꽤나 스무스 하다보니 나중에 완결화의 끝 부분까지 가기까지 누구도 눈치 못챘을 겁니다.


그러면서 뒤통수를 빵 후려까는 건 좀 통렬했습니다. 앵간한 작품에선 이런 거 안 느끼고 그냥 스토리의 큰 흐름을 이해하면서 넘어가는 데 마지막에 와서 이러는 건 씨발.


그래도 참 다행인 건 외전편에서 제대로 완결을 냈다는 거죠. 좀 무리수가 있고 주인공 버프가 너무 심하게 먹은 것도 있긴 하지만, 그래도 쩔어주긴 했습니다. 블랙 작가 특유의 거대한 힘이나 압도적 규모의 묘사를 이스케천과 반신적 존재가 되버린 이현우를 통해 잘 이끌어냈고, 마찬가지로 수 백년의 시간적 차이와 그러한 시간 속에서 일종의 족쇄가 되어버린 이현우에 대한 그리움과 버릴 수 없는 감정들에 의해 고통 받고 고민 하고 번민하게 되는 묘사, 그리고 끝끝내 이스케천이 부활해버릴 상황에서 등장해 걍 다 쓸어버리고 주인공의 지인들과 재회하는 장면은 제대로 끝 맺는 완결로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상당히 훌륭한 결말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다만 역시 아쉬운 부분은 중간 중간 설정이나 앞뒤 묘사에 오류가 있다는 점입니다. 물론 그런 것들이야 대부분 커버할 수 있는 내용이고, 그리 크게 중요한 것도 아니니 신경 안 써도 될만한 것들이긴 하지만, 그래도 아쉬운 건 아쉬운 거고, 작품의 완성도에 흠을 주는 것들인 건 사실이죠. 지레이가 원래는 러시아인이었지만 나중에 독일인으로 바뀌는 데, 그게 뭐 딱히 중요한 것도 아니고 대단한 것도 아니지만 비판의 요소가 되긴 충분한 설정오류죠.


이외에도 일부 인물에 대한 중요성이 무시되거나 너무 중요하게 다뤄졌던 것도 있습니다. 하나의 떡밥으로 뿌려졌고 그 중요성이 초반에 많이 부각되었던 이설이 나중에 되어선 전생들에선 그랬지만 이번 생에선 아무런 감정도 느낄 수 없었다고 무시되고 용대운의 검술 스승 또한 어느 순간부터 안 나오게 됐습니다. 그 인물 자체가 원래 그런 용도인 건 인정하고, 뭐 복수 자체야 간접적으로 이루어지긴 했지만 너무 대충 넘어가버린 것도 사실이고요. 


그래도 이설이 후반부에 어떻게 지내는지도 찾아가보고 하는 걸 보면 아예 무시할 생각은 없었던 거 같지만, 초반에 너무 부각되었거나 그렇게 부각된 이설의 가치를 다시 무난하게 낮추어 중요성을 떨어뜨리는 작업이 신중치 못했고 납득할만한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이설이 별 중요한 인물이 아니게 되었다는 건 알았지만 너무 아쉽게 작업되었고, 독자들도 납득하지 못해서 이설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 나왔던 거죠.


아마 그렇기 때문에 작가도 나중에 하필이면 가장 처음의 생 때의 원수가 통치하는 곳에 이설이 살고 있고 전쟁이나 전투도 없는 누군가의 아내로 행복하게 만족하며 사는 걸 보여주고, 주인공도 거기서 그냥 멀리서 얼굴만 보고 가는 것으로 확실하게 끝맺으려 했던 거 같긴 했습니다만.. 그래도 그 이전까지 시원찮았던 게 사실이죠. 뭐 이건 작가에게서도 어떻게 처리해야할 지 까다로웠을 겁니다. 저라도 뭐 더 좋은 아이디어를 제시하기 어려우니..



하여간 몇몇 요소를 제외하면 상당히 재밌었고, 괜찮은 수작이었습니다. 특히 완결과 외전의 임팩트는 존나게 존나 쩔었고요. 외전까지의 완결도 상당히 좋았습니다. 아쉬운 면이 없진 않았지만 충분히 무시하거나 이해할 수 있는 정도의 것들이 대부분이었다고 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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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리뷰는 작품에 대한 내용누설이 있습니다. 



원래 카카오페이지의 요일별 소설 중 하나였는 데 완결 이후 기무로 바뀌었죠. 이 소설에 대한 리뷰도 예전에 쓰려고 했는 데 제 게으름 때문에 결국 지금에 와서야 쓰게 됐습니다.. 그 덕에 잊어버린 것도 너무 많네요;



뭐 하여간.. 개인적으로 이런 류의 액자식 구성을 좋아하는 편이기도 하고, 그만큼 연결시키는 것이 어렵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연 작가의 반월당의 기묘한 이야기는 꽤나 성공적이고 나름의 잘 짜인 짜임새를 가진 작품이었습니다.


또한 이 작품을 좋아했던 이유 중 하나가 제가 역사 쪽은 꽤 좋아하다보니 과거의 기록을 토대로 서술된 이야기를 상당히 좋아하는 데, 더불어 그것이 잘 알려지지 않은 여러 설화, 전설 속의 괴담에 대한 기록들이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작가가 이런 정보를 많이 찾고 공부했다는 게 느껴지더군요. 자료조사를 잘 했습니다.


각각의 에피소드가 시작할 때마다 주제가 되는 기록을 먼저 제시하고, 그 기록을 토대로 창작된 이야기를 서술하며 진행시키는 것이 작품 전체적으로도 상당한 짜임새가 있었습니다. 어느 주제나 단편 하나에 파묻히는 게 아니라 그것들이 모이고 모여서 거시적 복선을 이루어 나중에 회수되거나 어떠한 행동이나 발언, 사건의 근거가 되는 것을 연출하더군요.


이런 구성은 처음부터 전체적인 짜임새를 잘 짜야하기 때문에 어려운 작업이 되곤 합니다. 하지만 개연성 있고 짜임새 있게 잘 만들더군요. 그래서 더욱 괜찮은 작품이라고 평가하는 거고요.



또한 특유의 캐릭터성과 각 캐릭터들의 과거에 대한 이야기도 굉장히 좋았습니다. 까칠하지만 살짝 모자란 초짜 느낌의 유단과 까칠하지만 뭐든 다 잘 할 수 있을 거 같은 듬직한 백란, 귀엽고 매력적인 서브 캐릭터 식구들도 그렇고요. 단이와 란이의 만담은 언제 봐도 귀엽죠. 채우 채설도 상반된 성격에 뭔가 어른스러우려 하는 것도 귀엽고.. 무엇보다 흑요가 가장 매력적이었습니다. 누님 같으면서도 귀엽고 덜렁대는 모습이 귀여워해주고 싶달까..ㄲㄲ 도깨비 아재는 그냥 흑요랑 잘 꽁냥댄다는 느낌? 싫진 않지만 뭔가 특별히 와닿는 느낌은 개인적으로 없더군요. 이건 그냥 제 취향에 안 맞아서 그런 거고..



처음엔 그냥 옛날 이야기와 현대적 재창작에 대한 재미로 봤다면 끝나갈 때쯤 회수되는 복선들은 상당히 매력적이고 애닳게 와닿았습니다. 가장 친했던 친구가 자신을 죽였고, 그에 대한 실망과 슬픔을 가슴속에 숨기고, 그게 천년이 넘는 시간 시간 속에서 닳고 닳아 원한조차 느껴지지 않는데 정작 천벌을 받고 부활과 죽음을 반복하는 자신의 원수를 지켜보고, 지켜주려고 했던 모습은 말입니다.


그러나 항상 실패해왔고 그건 또 다른 고통으로 다가왔죠. 그래서 이번엔 다른 방식으로 지켜봤습니다. 모른 척 하기로요. 에전의 강력함은 잃었지만 그 잔재는 남아 있었고, 아무 것도 모른 채 어처구니 없는 걸 달고 오는 모습은 얼마나 한심해보이고 황당했을까요..


그렇지만 곁에서 지켜보고, 지켜주었죠. 그리고 언젠간 다시 만날 그 날에, 다시 기억을 되찾았을 때 물어보고자 했던 겁니다. 왜 나를 죽였느냐. 형제와도 같았던 나를 네가 어째서, 어떻게. 하지만 천벌이란 오묘한 것. 결국 죄인을 찾아내 벌을 주고자 할 것이니 모른 척하며 하늘의 뜻에 감추어줬던 겁니다.


그러나 결국 찾아낸 진실은 실제로 자신을 죽인 것은 다른 존재고, 그 귀신이, 그 괴이가 자신의 죄를 자신의 가장 가까웠던 친구에게 누명을 씌운 것이었던 거죠. 천계의 존재들도 그걸 모르고 억울한 단이의 전생들만 벌하고 죽여댔던 겁니다.


물론 주인공들 답게 천년이 지나서야 겨우 진실을 밝혀내고 죄를 벗겨내죠. 


이 서사적 스토리는 저에게 상당히 애닳게 느껴졌습니다. 가장 친했고 사랑했던 가족이나 다름 없던 이에게 영문도 모른 채 배신 당한 걸로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왜 그랬느냐는 물음을 하기 위해 하늘로 올라가지 않고 지상에 남아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며 갈 때가 되지 않았다고 뻗팅겼던 것도, 그러면서 감정이 풍화되어 증오도 원망도 없어진 것도, 친우의 환생들이 영문도 모른채 천벌을 받아 요절하며 죽어가는 고통과 슬픔도, 그런 꼴을 보고 싶지 않아 모른 척 하는 것도, 그러면서 나름 잘 돌봐준 것도 모두 말입니다.


유단이라는 캐릭터도 매력적이고, 다른 캐릭터들도 매력적이지만, 백란만큼의 깊이를 가진 캐릭터는 없었죠. 그래서 백란의 과거 스토리를 가장 좋아하는 거고요. 까칠하게만 보였지만서도 속 깊은 무언가가 또 있으니 얼마나 입체적이고 매력적이겠습니까..



이런 캐릭터성과 스토리도 그렇지만, 또 하나 호평 받을 만한 것은 필체입니다. 가장 분위기로 기억이 남는 것이 어느 사건 하나 끝내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묘사되는 계절이 지나고 해가 져가는 무렵의 분위기 묘사였습니다. 정말 서정적이고 부드러우며 섬세한 묘사는 에피소드 하나가 끝나며, 이번 사건도 다 끝났다는 여운을 주며 막을 내리기에 훌륭한 연출과 묘사였죠. 그 부분에서 감탄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서정적인 연출과 묘사도 그렇고, 위험할 땐 마치 어두운 먹이 뿌려지고 위험한 독이 스멀거릴 것만 같은 아찔함을 묘사하는 것도 상당히 좋았습니다. 스토리도, 캐릭터성도, 연출과 묘사도 나름 잘 어울리며 작품을 구성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고 봅니다.


개인적으로 명작이라고 평하기엔 모자라도, 수작이라는 평가를 아낄 이유는 없다고 보는 그런 작품이죠. 추천할 수 있냐면 당연히 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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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리뷰는 작품에 대한 내용누설이 있습니다. 


사실 맨 처음 작품 설명을 봤을 땐 뻔한 천재의 먼치킨 작품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작품 설명만으로는 작품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다보니 정확히 판단을 할 수 없었고 그러다보니 이 작품을 볼까 말까를 망설였거든요. 하지만 댓글 평을 보면서 일단 한번 보기는 해보자고 마음 먹고 봤습니다.


생각보다 꽤 괜찮더군요. 개인적인 평입니다만, 신룡의 주인보다는 훠얼씬 나은 소년작품? 신룡의 주인은 오그라들 정도였고 개연성이나 캐릭터성도 많이 부족하며, 그걸 이끌어내고 묘사하는 것도 겉멋만 들었지 필력이 상당히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무한의 마법사는 크게 뛰어나거나 수려한 편은 아니더라도 무난한 정도에 속하는 정도라 부담이나 아니다 싶은 느낌은 그닥 들진 않았습니다.


추가 : 그냥 괜찮은 편이 아니라, 후반까지 가보면 매우 훌륭한 수준의 작품입니다. 몇몇 아쉬운 면도 없지 않아 있지만, 그럭저럭 납득할 수 있는 수준이고, 그 이상으로 연출, 스토리, 떡밥 등 이런 류의 판타지 소년작품 중에선 아마 최고 수준의 작품이 아닌가 싶습니다.



개인적으로 이런 작품 꽤나 좋게 보는데, 이전부터 이런 류의 능력 따위를 생각하면서 어떠한 현상을 일으키는 것이라면 반드시 그에 대한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방법론과 이론이 존재해야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고전적 판타지에선 마법을 그저 이해하지 못하는 신비하고 알 수 없는, 경이적이거나 두려운 무언가로 묘사하곤 했죠. 어떠한 방식이나 형태, 형식 따위보다는 그저 신비한 권능으로 불가능한 일이 이루어진다는 느낌으로요.


뭐, 현대에 접어들면서 그러한 마법에 어떤 논리나 합리성, 작동함에 대한 묘사를 하는 편이긴 하지만, 사실 그리 구체적이지도 않고 그저 이렇게 해서 저렇게 했다 정도로만 묘사하는 경우가 많죠. 사실 그런 것이 특별히 이상한 것이 아닌 게, 그걸 구체적으로 묘사해봐야 쓸데없이 길어지기도 하고 굳이 알아야할 필요도 없으며, 무엇보다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니 어떻게 설정을 짜고 묘사를 하든 그거야 본인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잘못했다느니 아니니를 떠나서 그게 이상한 게 아니고 기실 당연하기도 합니다.


그저 저 혼자만의 상상에 불과하지만 저는 그런 것들에 대해 생각하면서 일종의 프로그래밍과 비슷한 작동, 구현의 원리를 상상해본 적 있곤 하죠. 또한 어떠한 현상을 일으킨다면 그건 단순히 마법만을 생각하기 보다 과학의 영역과 접목시켜서 묘사하거나 설명하는 것도 상당히 개연성 있고 합리적인 묘사라고 할 수 있다고도 생각합니다.


마나라는 게 있다면 그것의 본질은 무엇이고 어떻게 인간이 의지나 의지 비슷한 것만으로도 다룰 수 있는 지, 또한 그것이 어떻게 사용되고 활용되어 마법이라 불릴 수 있는 효과, 혹은 현상을 발생시키는 지에 대해서 말이죠. 마나라는 것은 물질로 따지자면 개별적 원자나 초끈이론의 끈, 에너지로 쳤을 땐 그 자체로 어떠한 에너지로도 변용 가능한 것이라든가.. 마나를 다룬다는 것은 애초에 인간에게 없는 감각이니, 추상적이고 비물리적일 순 있지만 동양사상 등에 나오는 기와 같은 개념으로 접근을 한다던가.. 마법의 발현이라면, 불 같은 경우 마나를 이용해 특정 좌표나 물질 표면, 혹은 내부에서 열에너지를 상승시키거나, 플라즈마를 발생시키거나 불이 발생할 수 있는 물질로 변환시켜 그것들을 서로 작용케 한다던가 하는 식으로 발생시킬 수 있다던가 말입니다.


실제 작품에서 묘사된 비슷한 사례로는, 가령 일본 작품이긴 하지만 무직전생에선 마법적 능력과 과학적 원리를 활용하여 스승 앞에서 오래 걸리고 (상대적으로) 난이도 높은 편인 넓은 범위에서 비가 오래 쏟아져 내리게 하는 마법을 실현했고, 카카오페이지의 다른 소설인 나는 히어로인데 형은 무한전생자? 에선 초능력과 과학적 원리를 통해 토카막 핵융합포나 장거리 비행, 전자기 능력이나 그걸 플라즈마로 되돌려 반격하는 등의 여러 활용성을 묘사한 적 있죠.



마찬가지로 무한의 마법사에서도 그런 과학적 원리와 법칙에 대한 지식을 기반으로 꽤나 마음에 드는 설명을 무리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개연성 있게 이끌어내고 묘사한다는 점이 굉장히 취향저격 하는 부분이었습니다. 특히 초반부의 힉스 입자가 등장하는 부분에선 상당히 흥미를 이끌어내었죠. 아주 잘 설명해낸 부분이었거든요. 소년만화(여기선 소설이라고 해야겠죠?..)에서 무언가 떡밥이 던져지고, 그거에 고민하거나 어려움을 느끼다 그 문제를 해결하고 진일보하는 성장의 모습을 짧고 무겁지 않게, 정석적이고 무난하게 서술한 점은 꽤나 교과서적이다 싶었습니다.


추가 : 물론 유사과학인 건 사실이긴 합니다. 특히 미토콘드리아 이브 개념은 아예 그 개념을 왜곡시킨 수준인데, 다른 것보다는 좀 더 왜곡의 폭이 크다고 봅니다. 이건 작가가 잘 몰라서 그런 건지, 아니념 개념만 따온 채 작품에 써먹기 위해 크게 변용시킨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전자라고 해도 어차피 소설이니 큰 문제는 안 되고, 후자라면 괜찮은 판타지적 상상력인 셈이죠.


또한 설정에 있어서 더욱 매력적인 것은 기독교, 불교적 개념을 섞어서 쓰지만, 결코 우습진 않다는 겁니다. 오히려 멋있을 수준이고, 경지나 수준, 개념에 대한 다채롭고도 다양한 설명들은 충분히 매력적입니다. 마법에 대한 능력도 작가의 판타지적 상상력이 뛰어났지만, 나중에 등장하는 파르카 쿠안이나 풍장, 리안의 검술 등은 마법에 대한 것 못지 않게 흥미롭고 상상력을 자극하는 발상들이고요. 



똑같은 소년소설 장르인 신룡의 주인과 가장 비교가 되는 장면은 절친이 되는 친구들과의 만남과 친해지는 계기들인데, 신룡의 주인에선 너무 개연성이 부족했고, 설령 개연성이 어느 정도 있다고 해도 그걸 독자들이 납득하기 어렵게 묘사를 해버렸습니다. 그래서 작위성이 더 크게 느껴졌고요. 이것만은 아니지만, 그런 이유들 때문에 결국 얼마 안 가서 하차한 작품이었죠.


하지만 무한의 마법사에선 친화력 쩔어주는 네이드와 반대 성향이지만 똑같은 천재형 캐릭터인 이루키가 경쟁과 협력을 통해 친해지게 되는 건 상당히 개연성 있고 합리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부분이죠. 작가의 필력이 아쉬운 부분도 있긴 하지만 무난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의 묘사와 서술인지라 무리함이나 작위성 따위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작품 내적으로 좀 크게 아쉽다고 생각하는 점은 잘못을 저지른 이들의 반성에만 너무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에 속죄를 하거나 책임을 지는 모습이 거의 없다 싶을 정도로 묘사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알페아스도, 아케인의 두 제자도, 마르샤도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주긴 하지만 실질적으로 속죄한 건 없고, 자신의 죄에 걸맞는 처벌이나 납득할 수 있는 책임을 보여준 적이 전혀 없죠. 작가가 워낙 반성에만 초점을 맞추다보니 답답해보일 수 있습니다. 이 점은 상당히 아쉽더군요. 뭐 죽이거나 고문 받거나 절망 속에서 망가지는 걸 원하는 건 아니지만, 죄에는 책임이 따라야 합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제 주관적인 기준에선 살짝 아슬아슬 하지만 괜찮은 작품이라고 평가하고 재밌게 보고 있는 작품이죠. 설정덕후 적인 면모가 있다거나 이런 종류의 원리와 묘사가 취향이라면 재밌게 볼 수 있는 작품이라고 봅니다. 추천할만하죠.



추가 : 후반으로 갈수록 연출, 전개, 묘사, 해석 등 상당한 수준으로 특히 가올드의 스토리와 가올드 파티가 천국에서 분탕칠 때, 그 중에서도 천국의 모두(전에 시로네가 천국에서 만났던 신민들마저도) 한계와 역할, 혹은 삶의 끝에서 모든 걸 쏟아내거나, 모든 감정에 먹혀버리는 시기에 시로네의 신의 징벌이 떨어지며 각각의 인물의 모습과 감정, 시간이 교차되며 서술되는 연출은 가히 영화적 연출이라 봐도 될 정도로 수려했고, 독자로서도 그 처절함을 절절하게 느낄 수 있게 했죠.


이는 가올드가 20년전의 과거에서도, 그리고 천국에 와서도 미로를 찾으며 울부짖는 정신나간 광인의 처절함을 느끼게 하는 것과는 다른 처절함과 처연함이었습니다.


가올드 파티와 천국행의 스토리는 무한의 마법사에서도 가장 재밌고 훌륭한 스토리라인과 감정선들을 보여주며, 복합적이고 다각적인 관계와 감정들이 얽히고 섥히는 작품적 매력을 보여줬죠. 또한 시로네에겐 마법사란 어떠해야 하는가. 라는 것을 가깝게는 왕국 수석 졸업생이자 공인 8급의 협회 정직원 플루, 멀게는 세인과 가올드, 줄루라는 1급 대마법사에게, 심지어 교사인 시이나와 에텔라, 아예 검사인 쿠안에게 배울 수 있었습니다. 이는 그 이상으로 무엇이 프로인가.를 시로네에게 알려주기도 했죠.


작품적으로 시로네라는 캐릭터에게 가르치는 동시에, 독자들에게 납득을 시킬 수 있었고요. 이러한 마법사. 프로에 대한 기준과 묘사, 서술은 이전부터 있었지만, 가장 와닿게 서술한 것은 천국행 스토리라고 봅니다.


더불어 시로네에 대한 캐릭터 그 자체에 대한 떡밥들이 뿌려졌고, 이는 훗날 스크럼블 로열 이후 겪는 시불상폭매를 통한 과거 사건의 개입에서 밝혀지는 사실이죠. 그리고 이 부분이 굉장히 중요한데, 별 다른 임팩트가 없을 순 있어도, 시로네라는 인물의 근본을 독자에게 납득시키는 동시에, 훗날 이어질 스토리를 위한 떡밥으로 작용합니다.


초반 무한의 마법사라는 작품에서 발암, 고구마라는 평가를 받는 이유가 시로네가 너무 나이브하게 적을 대한다는 겁니다. 바로 위에서 비판하고 있듯이, 너무 반성에만 초점이 맞춰지고 책임을 지는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합니다. 이는 시로네를 제외한 이들에게 대한 거고 여전히 유효하는 비판입니다만, 시로네가 타인, 적에 대해서 대하는 태도 또한 크게 다를 게 없었죠.


근데 사실 그런 이유가, 시로네는 (에이미의 평가처럼) 자신을 전지적 시점으로 바라본다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초반에 나오는 이야기지만 쉽게 이해하기 어렵고 와닿지도 않았죠. 하지만 이는 사실 시로네라는 인물이 그만큼 완벽함에 가까운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시로네는 화이트 라인 후보생이 되는데, 그때 화이트라인에서 온 별이 말합니다. 카르라는 개념을 말하면서, 시로네는 약 90%의 전지적 합리성을 가지고 있고, 10%만의 주관을 가지고 있다. (정확한 건 아니지만, 대충 이런 개념으로..) 이것으로 시로네의 과거 태도들이 모조리 설명이 됩니다. 즉, 과거의 고구마스럽고 답답하던 태도와 판단이 어째서 그랬는가를 알 수 있으며, 더불어 그러한 것들은 초반부터 지금까지 쭉 떡밥으로 이어져서, 나중엔 아예 졸업시험-화이트라인 후보 테스트로 이어지는 스토리로 연계가 되버리는 거죠. 그리고 이건 시로네의 혈통과 밀접한 연관이 없다고 할 수 없고요. 


아예 라 에너미와의 관계에선 앞서 말하는 스크럼블 로얄 이후에서 겪게 되는 이스타스에 숨겨진 사건에서 자신의 시작을 확인하며, 자신은 뿌리가 없다. 라는 걸 알게 되는데, 이 역시 라 에너미가 과거가 없는 시로네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는 천적관계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이 초반부터 설정된 캐릭터성이고 스토리이니 작가의 역량이 처음 리뷰를 쓸 때보다 상상 이상이라고 밖에 평가할 수 없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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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리뷰는 작품에 대한 내용누설이 있습니다. 


사람은 얼마나 변할 수 있을까요? 개인이 가진 기질과 환경은 쉽게 변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고, 한번 정착되고 만들어진 인격은 거의 죽을 때까지 성숙되거나 그렇지 못한 채 살아갈 뿐 변화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만약 그런 인격을 한 순간에 부술 수 있는 경험을 했다면? 당연하지만, 그 사람은 그 이전과 그 이후가 전혀 다른 사람이 될 겁니다. 



주인공 키릴로차 르 반은 행복하게 살아왔습니다. 부유하진 못해도 사려 깊은 할아버지 밑에서 구김살 없이 살았죠. 그에겐 재능이 있었고, 마법을 쓸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살면서 두번째로 마법을 쓴 날, 인생에서 가장 큰 존재들을 만나게 되었죠. 일츠 브릴모. 그리고 그의 가족을요.


가난하고, 귀족도 아니었던 아이는 성장해서 귀족, 왕족, 상인, 사제 집안의 고귀한 자식들을 친구로 둡니다. 정말 형제처럼 지내죠. 누구보다 가까웠고 누구하나 잃을 수 없는 그런 자신의 팔과 다리보다 더 소중한 존재들을 말입니다. 그게 어찌나 보기 좋았는 지, 누구나 이런 사람을 본다면 부러워할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너무나도 행복하고 너무나도 즐겁게 살았어요. 행복한 삶이란 무엇인가를 묻는다면 그의 인생을 이야기해야할 정도로.


게다가 누구나 돌아보게 만들고 가슴 뛰게 만드는 사랑스러운 여자친구도 생겼죠. 클라리몽드..


키릴과 그 친구들은 마법 학교에서 배우며 여러 경험을 하게 됩니다. 클라리도 이 시기에 이어졌죠. 동시에 약간의 분란의 씨앗이 되기도 했고, 슬픔의 기반이 되기도 했죠.



그러나 그런 행복한 삶과 구김 없는 환경은 언제까지고 이어질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꿈처럼요. 주드마린 아미냑이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고작 13살짜리 여자애가 자기 세력을 끌고가 왕 앞에서 시위를 벌였죠. 그리고 거래를 했습니다. 자기와 반대파벌에 있는 자들에 대한 살생부에 대한 서명을 요구했죠.


그런 정치적 이변은 먼 타국 땅의 형제 같은 친구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쳤습니다. 아이러니하지만, 사실 평민이었던 키릴츠는 이 문제에서 무관할 수 있었죠. 왕실의 문제 때문에 어제까지만 해도 형제 같은 친구들이 반으로 쪼개져 대립하고 속이고 생명을 위협하는 상황을 만들었습니다.


전 이 부분이 이 소설에서 가장 강렬하고 흡입력 있으며 공포, 두려움, 슬픔, 불안, 불쾌, 혼란을 이끌어내는 부분이었다고 봅니다. 흔히 정치는 비인간적이라고도 평가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영화가 됐든 소설이 됐든 만화나 웹툰이 됐든 그런 정치의 비인간성과 잔혹함, 공포심을 제대로 묘사하는 소설은 거의 없었습니다. 적어도, 제가 아는 작품 중에선 전민희 작가의 태양의 탑 외에 이 정도 수준의 정치의 공포와 비인간성을 묘사한 작픔은 없었죠.


어제까지만 해도 웃고 지내던 친구들이 서로 데면데면해지며 서로를 속이고 칼을 겨누어 죽여야 하며, 패배자가 된 입장에 속하는 이들은 자신의 사태에서 어느 위치에 있는 지도 파악할 수 없고, 자신은 물론 자신의 가족들의 생사를 확인할 수도 없고, 무조건 도망쳐야만 하는 상황에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거부할 수 없고 이겨낼 수도 없는 절대적 무력이 국가의 의지 그 자체가 된 승자에 따라 자신을 전방위적으로 압박해오죠.


상황이 정확히 어떻게 돌아가는 지도 모르고, 그 상황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인할 수도 없으며, 자신의 가족 또한 사냥 당하는 입장에 있어 걱정해도 찾아볼 수도 없고, 그렇게 잡혀서 죽는 것을 방관할 수 밖에 없는 무력함.. 뭐든 해야 했지만, 해야하는 게 뭔지도 모르고 사실 할 수 있는 것도 없으며, 그럴 시간도 없었습니다. 어디로 가야 하고, 누굴 만나야 하며, 무엇을 해야 하는 지 알 수 없는 혼란.. 그 자체로 두려움이죠. 사람은 자신의 상황을 통제할 수 없으면 불안함을 느낍니다. 그 상황이 자신의 목숨과 직결되면 공포를 느끼죠. 그들이 느꼈을 공포와 절망은 얼마나 거대했을까요?


우리가 키릴을 통해 느끼는 불안과 공포, 슬픔과 절망만으로 그것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요? 우린 단지 그 편린만을 느낀 건지 모릅니다. 우린 당사자가 아닌 당사자의 경험을 텍스트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독자이기 때문이죠. 왕도 정치의 비인간성이란 이렇게 잔혹합니다. 저 멀리 누군가의 이기적인 의지에 따라 너무 쉽게 죽음과 삶이 결정되어버리는, 인생과 가치가 놀아나버리는 권력. 마치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닌 장기말, 물건 따위가 되어버린 무력감..


이게 단 13살 짜리 여자애가 쓴 명단의 살생부 한 장으로 이루어진 일입니다. 단지 그 종이 한 장의 결제로 이루어진 일이죠. 너무나도 간단하게, 너무나도 쉽게, 너무나도 무가치하게.


그 뿐만 아닙니다. 자신의 친족에 대한 살해(의혹이지만, 거의 확실하죠.)와, 죽음을 의도한 유폐 또한 그렇습니다. 자신의 부모와 동생마저도 정치적 위험으로 분류하고 그들에 대한 죽음을 이끌어내고, 그에 대해 느끼는 바도 적죠. 마치 왕이라면 그래야 한다는 것처럼.


이 모든 일을 고작 13살짜리 여자애가 계획하고 완성했습니다. 수 많은 이들에 대한 죽음과 파멸, 고통을 만들어냈고, 그만큼 큰 원한과 증오를, 그리고 그만큼 거대한 공포를.


이런 정치 살인극은 전근대 정치의 비인간적 잔혹함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부분이었습니다. 다른 부분 다 떼고나서도, 단지 이 부분만으로도 이 작품은 그 나름의 가치가 있을 정도라고 봅니다. 전근대 정치의 비인간적 잔혹함을 이 정도 수준으로 간결하고 정확하게, 그리고 독자들에게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게 하는 건 전민희 작가 정도가 아니라면 할 수 없었던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자신의 친구를 가만히 내버려 둘 수 없었던 키릴의 분투는 무의미한 것이었고, 그 노력은 결국 친구의 배신과 죽음, 망가짐으로 귀결되었죠. 자기 자신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가족 같이 지냈던 친구의 가족들은 어느새 가해자와 피해자로 나뉘었었고, 주인공과 그들의 가슴 속에서 결코 작지 않았던 이들이, 서로 사랑하는 사이마저도 너무나도 쉽게 죽임 당하여 부서지는 절망과 상실감은 독자들마저 지치게 하죠. 그들의 죽음이 어떤 가치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마치, 정말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너무 쉽게 죽어버렸어요.


결국 친구의 도주를 돕던 키릴츠 또한 이 날 망가지게 됩니다.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가장 처음의 가족이었던, 그의 반쪽과도 같았던 형제 일츠는 아무런 죄책감도 후회도 슬픔도 분노도 없이 그 상황에서 승리와 생존만을 목표로 하여 그들의 친구와 형제, 가족과도 같은 이들을 파멸로 이끌었습니다. 아주 능동적으로요. 그리고 다른 한 친구였다 믿었던 놈은 자신의 추악한 욕망을 위해 그런 친구들을 팔아넘겼고. 그의 스승이었던 놈도 악마적 본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줬습니다.


키릴츠은 이 날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마법도, 친구도, 가족도, 행복도, 사랑도. 그렇게 잃게 된 이후 남은 것은 과거의 잔재들일 뿐이었죠. 망가진 친구들과, 죽여도 시원찮을 친구였던 것.



특히 키릴은 알지 못했던 이야기도 있었죠. 독자들이 가장 멘붕하고, 웬만한 일로는 멘붕 안 하는 저조차 며칠 동안 후유증을 느끼게 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일츠와 클라리몽드의 거래 부분이죠. 클라리몽드가 결코 만만치 않은 여자라는 건 누구나 알만한 것이었죠. 자기 스스로도 그렇게 말했고요. 하지만 그런 다른 모습을 가진 클라리였지만, 키릴만큼은 진심으로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거래를 했죠. 그 거래 내용은 정확히 모릅니다. 하지만.. 마지막 사죄하듯, 그리고 후회하듯 내뱉는 한 마디는 모두를 충격에 빠뜨렸습니다. "미안해.." 이게 일츠와의.. 성관계, 성상납을 의미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장면에서 보이는 그 대사는 충분히 그런 것을 연상할 수 있었고, 너무나 충격적인 한 마디였습니다.



모든 걸 잃고 그 나락 속에서 지내며, 또한 그 나락 속에서 노틀칸에게 마법을 배운 이후의 키릴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마음을 열지 않고, 그 누구도 안에 들여놓지 않으며, 대화나 다른 인간관계조차 유지하려 들지 않는 차갑고 냉소적인 인간이. 인간의 감정을 잃고 삶의 목적이 복수에 놓여있는 걸어다니는 고통과 후회나 마찬가지가 되었습니다.


모두에게 사랑 받고, 사랑할 수 있으며, 호의를 호의로 받아들이고, 자신 또한 남에게 호의적인 소년은 죽었습니다. 그 날, 그가 잃은 모든 것과 함께 죽었죠. 그리고 그는 다른 인간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라는 것을 미리 알지 못했다면 그 누구도 그가 같은 사람일 거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변했죠. 사람이 미치기 위해선 미칠듯한 하루면 충분하다는 말이 있죠. 그에겐 그게 미칠듯한 하루였습니다. 그래서 망가졌죠. 다신 전과 같을 순 없습니다. 부서진 알은 다신 원래대로 돌아올 수 없듯이..


그래서 그는 복수를 삶의 목적으로 삼았습니다. 그것만이 키릴이 살아있을 수 있게 하는 모든 것이었죠. 다신 키릴를 못 볼 것 알면서도 거래를 하고 십년 가까이 그를 여전히 사랑하는 클라리몽드가 남아있었고, 기억을 잃은 채 망가져 제대로 살 수 없는 앙리오트도 있지만, 그에게 남은 것은 복수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자기 친구의 모든 것을 앗아간 당사자들. 주드마린 공주와 일츠 브릴모. 그 외 자잘한 부역자들..



주드마린이라는 캐릭터도 그렇지만, 일츠 브릴모라는 캐릭터 또한 특기할만한 캐릭터입니다. 주드마린이라는 캐릭터는 뛰어난 지성과 카리스마, 결단력을 지닌 패왕에 가까운 공주이자 여왕이었습니다. 11살 때 발생한 우습지도 않은 사고 덕에, 주드마린은 자신의 세력을 기를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이전부터 생각해오고 있었을 지도 모르죠. 고작 11살 짜리 어린애가, 정치와 사상 등 많은 분야에 대해 높은 수준으로 공부하고, 자신의 카리스마를 통해 자기 세력을 만들고 규합해 고작 13살 때 수 많은 이들을 파멸로 이끌고 피를 쏟게 만들 살생부를 작성해 서명, 결제를 강요했던 걸 보면 주드마린 또한 철혈의 패왕적 면모를 가진 종자였다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닐 겁니다.


재밌는 건, 그런 공주가 키릴을 사랑했다는 거죠. 그래서 클라리를 파티에 데려왔을 때 질투도 느꼈고요. 또한 키릴이 그 날 그녀를 찾아와 빌었을 때 정치적 이유로 그의 간청을 내쳤습니다. 그걸 이유로 증오와 원한을 샀죠. 이후에 그가 찾아왔을 땐 당돌하게도, 어쩌면 뻔뻔하게도 자신을 도와달라고 회유하죠. 아니, 자신에게 마음을 바치라고 했습니다. 마치 사랑해달라고. 미친년 같으니..


정치에 있어서 개인적 감성과 감정을 통제하는 것은 올바른 일이고, 단순한 정치적 결단과 계산으로 따진다면 주드마린은 최고이자 최강의 군주였던 것도 사실입니다. 어떻게 보면 대단한 인물이고, 보고 배울만한 부분도 있을 정도로 뛰어난 군주죠. 단순히 다른 모든 관계를 제외하고 인물 그 자체로만 본다면 말입니다.


하지만 우린 주인공의 입장에서 그녀를 판단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쳐죽일 년이 되는 거죠. 정치적으론 옳습니다. 그게 권력을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바람직하고 효과적인 방법이었죠. 그 덕에 모든 걸 잃고 고통과 슬픔을 받은 키릴에겐 누구보다 찢어죽이고 싶은 인간이지만..



일츠 브릴모 또한 특기할만한 캐릭터입니다. 이 새끼 소시오패스거든요. 사실 어렸을 때부터 그 면모가 보였습니다. 어린애 답지 않게 조용하고 어른스러웠다고 했었습니다. 일츠는 사실 굉장히 유능한 인물입니다. 주드마린처럼요. 너무 뛰어나서, 그 재능이 정치적 악의, 혹은 그와 비슷한 욕구나 관심과 만나서 이루어진 화학적 작용이 너무나 파격적이었던 거죠.


일츠는 키릴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친구이자 가족이었고, 자신의 반 쪽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는 일츠에게서도 마찬가지였고요. 일츠도 이 부분에 대해서 스스로 밝혔고, 어렸을 때 받은 장난감 인형을 통해서도 작품 내에서 은유되기도 했습니다. 그런 키릴을 일츠는 가차없이 부수어버립니다. 물론 자신 또한 그에 대해 감정을 느끼긴 합니다. 하지만 죄책감을 느끼진 않죠. 키릴이 순탄하고 행복하며, 뭐든 잘 되는 인생을 살았던 것은 일츠의 보이지 않는 조력이 있었기 때문이었죠.


하지만 일츠는 자신이 세운 울타리를 넘은 키릴을 가차없이 벌합니다. 네, 벌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모든 선택에 틀리지 않은 정론을 말하며 정당화 합니다. 뭐, 어쩌면 틀린 말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굳이 그런 판단을 내릴 필요도 없었고, 그런 판단을 키릴에게 이야기하며 정당화할 필요도 없었다고 봅니다.


중요한 점은, 일츠는 이 모든 짓을 적극적으로 벌였고, 그 이후에도 어떤 죄책감도 느끼지 못했다는 겁니다. 인간적 감정을 느끼기도 하고, 그에 대해 이해하기도 하지만, 타인에 대한 감정적 공감능력은 결여되어 있습니다. 이는 소시오패스의 전형적인 모습이죠. 아니, 일츠 정도면 아주 잘 숨기고 잘 계산하며, 행동하죠. 그런 일츠의 그 날 보였던 일 때문에, 일츠의 여동생 안 브릴모는 크게 실망하고 상심하죠. 안 하겠다는 사제가 된 것도 그렇고.. 


일츠의 재능과 능력은 너무나도 뛰어납니다. 정치적, 외교적, 군사적 판단 모두 뛰어나죠. 국가를 위해 더 큰 그림을 그리고 실천할 수 있는 대단한 인재입니다. 그 아버지마저도 두려워할 정도로 뛰어난 인물이죠. 그런 놈이 적이 되었으니, 과거의 인연과 더불어 키릴에게 결코 쉽지 않은 인생이 남아 있을 거라고 해야겠죠..


그 이전에 그의 예언된 인생을 생각해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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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lezhin.com/ko/comic/phantom_school/p0

 

많은 명작들이 그렇듯, 별 생각 없이 재미삼아 봤는 데 너무 훌륭한 작품이라 평할 수 있는 작품이었습니다. 많은 한국 웹툰이 그렇듯, 처음엔 가볍고, 일견 재미있어 보이는 개그만화라고 해도, 작품이 진행되다보면 어쩐지 감동과 무게감을 주며 반전의 매력을 보여주는 작품이 많은 데, 저승고도 그런 작품 중 하나였죠.

 

다만 차이가 있다면 그 수준이 굉장히 높다는 것 정도? 캐릭터 하나하나 모두 매력적이고 스토리와 연출은 굉장한 수준입니다.

 

사연 없는 무덤 없다는 말처럼, 무덤은 아니지만 사연 없는 영혼들은 없었습니다. 학생들도, 교사들도 모두 자기만의 스토리가 있고 그 절절한 이야기들은 그들의 쾌활하고 대책 없는 유쾌한 모습들과는 또 달랐죠. 그들에게 생의 삶이란 고통과 후회, 혹은 미련일 수 있지만, 죽은 뒤에는 그저 뒤돌아보고 쓴웃음 지을 것들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저 과거로 묻어둘 수 있는 것도 아니죠. 과거는 과거지만 산 자들은 과거를 기반으로 성장하니까요. 그것은 삶의로서의 종착지인 죽음 이후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학생들은 성장하는 존재입니다. 교사는 그들을 이끌어주고 올바르게 자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이들이죠. 그런 면에서 학교라는 배경 설정은 절묘하다고 봅니다.

 

학생인 영혼들이 죽음 이후에도 성장하고 더 나은 존재로서 가치를 가질 수 있게 해주었으니까요. 비단 죽음 이후에도 살아있을 때처럼 고통과 시련이 주어질 지언정, 이번엔 답습하여 그것을 극복하고 더 나아갈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모두에겐 두번째 기회가 있다는 말이 있죠. 그들에겐 죽음 이후의 삶이 두번째 기회였던 셈입니다.

 

이는 교사들에게도 마찬가지였을 지도 모릅니다. 배움엔 끝이 없다고 하죠? 어쩌면 교사들에게도 학생들과의 관계는 나아갈 요소가 되었을 수도 있겠습니다. 다만 그들은 스스로가 스승이기 때문에, 자기 스스로 나아갈 수 있었던 거겠죠. 좀 더 심지 굳은, 어른으로 말입니다.

 

 

김인간이라는 캐릭터는 정말 흥미로운 캐릭터입니다. 인간으로서 저승에 와서 귀신들을 가르치고, 알 수 없는 강한 부정적 감정을 내뿜어대는 듯한 연출을 보여주죠. 과거 수학여행 때 사고로 인해 학생들을 모두 잃은 듯한 묘사를 보여주며 심각한 트라우마를 가진 캐릭터입니다. 원래부터 학생들에 대한 애착이 강한 책임감 있는 교사였는데, 그런 사건 때문에 이번엔 무섭지만 사랑스런, 정말 소중한 학생들을 잃고자 하지 않는 인간이기도 하죠.

 

무섭지만 책임감 때문에 스스로 몸을 던질 수도 있는 훌륭한 교사의 모범을 보여주는 인물이죠. 그런 의미에서 가장 용감한 캐릭터라고 할 수도 있을 겁니다. 겁도 많고 두려움도 많이 타지만, 자기 책임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고 학생들을 가장 우선시하는 인물이죠.

 

이 인물에는 그 큰 반전이 있는 데, 뭐.. 이건 중심적 스포가 되니까 직접 보시길..

 

 

제가 저승고라는 작품에서 가장 훌륭하다 여기는 것은, 각각의 분량 아래에 작게 추가되는 뒷이야기 같은 내용들인데, 그 부분들의 여운이 굉장히 강하게 남습니다. 특히 기억에 남는 부분은 형이 감자를 강에서 버리고 나중에 후회하며 다시 찾는 부분인데, 정말 굉장한 여운을 남겼습니다. 그만큼 깊은 인상을 남겼죠. 그런데 이런 연출들이 여러번 나오며 감초 역할을 해주니 감성을 자극하는 거에 아주 도가 텄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 뿐만 아니라 작품 내적으로도 연출이 굉장히 훌륭한 편입니다. 여러 연출들이 압도적이기도 하고 감성폭발을 일으키기도 하는 데, 개인적으로 역시 기억에 남는 연출이라면 자유로의 각성 부분이죠. 거의 여신님 등장 급으로 멋있었습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내용이지만 각각의 학생들에 대한 과거를 스토리적으로나 내용적으로나 분량적으로나 어색하지 않고, 작위적인 편집이나 의도적인 완급조절 없이 자연스럽게 만들고 연출한다는 건 정말 쉬운 게 아니거든요. 중간 중간 나오는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과거와 현재를 이어지게, 그러나 연속적으로 보여주듯이 연출하면서 과거의 고통과 슬픔과 현재의 웃을 수 있는 모습은 지난일로서, 그리고 극복의 여운을 주기에 너무 효과적인 장치라고 봅니다. 가슴 속에 담은 과거지만 현재는 모두가 함께 친구이자 학생으로서 웃고 이야기할 수 있으니까요.

 

이외에 할 말이 있다면 캐릭터의 설정의 뛰어남은 이미 이야기 했고.. 캐릭터의 디자인이 좋다는 점인데, 나름대로의 특색과 개성을 잘 표현했다고 봅니다. 여러 캐릭터들의 특성과 설정을 아주 잘 살렸다는 점이요. 그것도 이상하지 않고 보기 좋게 말입니다. 

 

특히 교장과 사장의 캐릭터는 굉장히 재밌는 외형 설정인데, 힘을 담아둘 때는 나이든 중년의 모습이지만 쓰면 쓸 수록 어려지며, 교장이 입은 옷도 화단을 관리하는 듯한 모자에 장화, 장갑을 끼고 있다는 점은 꽤 개성이 강한 편이라고 봅니다. 또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인 백도 그런데, 걍 너무 이쁩니다. 매력 터져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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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리뷰는 작품에 대한 내용누설이 있습니다. 



언젠가 광악 작가의 다른 무한전생 시리즈도 쓰게 될 거 같지만, 일단 이 글에선 '무한전생-무림의 사부'를 리뷰하도록 하겠습니다. 무림의 사부만을 리뷰하는 건 아니고, 약간 다른 무한전생 시리즈에 대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솔직히 이 소설은 굉장히 재밌었습니다. 굉장히 독특했고, 작가가 아는 것도 그럭저럭 많다는 게 느껴지더군요. 이는 다른 무한전생 시리즈를 보면 그 지식이나 식견이 꽤 넓다는 것을 더 알 수 있어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많은 독자들의 반응이 좋진 않았는 데, 솔직히 그건 독자의 수준이 낮기 때문이지 작가나 작품의 수준 문제는 아니라고 봅니다.


그에 대해 변호하자면, 주인공에 이입한 본인들이 말초적 쾌감을 얻지 못해서 발생하는 반발심이지, 작품적으로 문제될 것은 아닙니다. 가령 마땅히 자신이 느껴야할 우월감이나 쾌감을 장천후나 사흑린, 특히 정천 같은 다른 캐릭터들이 느껴버린 것에 대한 반발인 셈이죠.


가장 강하고 뛰어나고 대단한 소광이라는 주인공, 그리고 그 주인공에 이입한 자신이 모든 것을 가져야 하는 데, 수행도중 눈맞아서 떡치러 도망간 천후나 흑린이었죠. 그 동안 그 여자 때문에 사부는 내다 버리고 자기들끼리 좋은 경험하면서 뛰쳐나간 겁니다. 소광에 이입한 독자들 입장에서는 마땅히 떠받들여져야 하고 자기 마음대로 돌아가야할 것이고 얻어야할 것인데, 정작 무공을 전수해주곤 그대로 뛰쳐나간 제자놈들이 배은망덕한 놈들에 배알이 꼴릴 상황인 셈이죠.


특히 이는 정천에 압권이었는 데, 어쩌다 재수 없이 만난 이후 무공의 극의를 죄다 빼먹어버리고(물론 그걸 준 것도 사실입니다. 우화등선 시켜버리려고...) 우화등선한 것도 모자라 자기는 등선하고 싶지 않아서 원영신 뱉어냈을 때 그걸 낼름 받아먹고 여전히 현세에 남아서 결국 정천 좋은 일만 해줘버렸죠.


그러다 너무 강해진(...) 정천 때문에 계획이 살짝 틀어지려고 하자 자기가 세운 문파를 통해 천후, 흑린에게 더 강해질 수 있게 거의 십 년 넘게 잊은 사부보러 만들게 했는 데, 이 과정에서 주변 여자들의 닦달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죠. 결국  그 여자들은 소광 덕을 본 제자, 남자 잘 만나서 영화와 권세를 누리는 것인데 거기서 더 욕심 부리는 게 독자들 배알 꼴리는 상황이었던 거고요.


결국은 깜도 안 될 ㅈ밥들이 너무 잘 나가고 덕을 너무 잘 보면서 은혜 갚을 생각은 안하고 욕심만 부리는 꼴이 되는 마당이니 정작 (비록 반쯤 불순한 의도였다곤 하나) 그 은혜를 입힌 소광이 받아야할 것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고 느끼게 되며 결국 배알이 꼴리게 되는 거거든요. 비무대전 때도 잡것들이 서로 싸워대봤자 소광이 뜨면 무림 하나 쓸어버리는 건 일도 아닐 정도로 강했지만 결국 알아보는 사람은 독자들과 제자들 밖에 없었고요.


이런 배알 꼴리는 상황은 정천 때와 선계 때가 절정이긴 했다고 봅니다. 제자들은 사부 잘 만난 덕에 강대한 무공도, 명예도, 심지어 여자도 다 가진 상황이었지만 정작 사부는 그런 놈들 일시켰다 죄다 날려먹은 셈이었고 정천은 아주 짧게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가질 건 다 가지고 얻을 건 다 얻어버리는 상황에 선계에 갔을 때 쉬지도 못하고 엿만 먹게 되는 상황이었으니까요.


쉽게 말해서 독자들은 자신이 이입한 소광이라는 캐릭터가 마땅히 얻어야 하고 대우 받아야할 것을 받지 못하고 대신 다른 놈들이 그 과실을 좋다고 먹고 꿀빨아대니 배알이 꼴린 겁니다. 이입한 주인공을 통해 자기들이 느껴야할 대리만족을 느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다른 놈들만 이득보니까요.



이걸 보고 작가가 그렇게 쓰지 말고 좋게 쓰면 되잖느냐. 할 수 있지만, 그럴 꺼면 걍 나루토나 블리치를 봐야되는 거고, 이건 흔해 빠진 주인공 깽판물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에 대해선, 이 무한전생 시리즈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이해해야할 것이 바로 주인공이라는 겁니다. 이 주인공의 캐릭터성에 대해 이해를 해야 설명할 수 있는 거죠. 무한전쟁 시리즈의 주인공은 특기할만한 독특한 캐릭터성을 지닌 존재로, 그의 대전제이자 목적은 바로 게으름이라는 겁니다.


이 게으르다는 성질은 무한전생자이기 때문에 반드시 가질 수 밖에 없는 결과론적인 현상이고, 작가가 이 캐릭터를 창조하면서 그 캐릭터성에 대한 고민과 고찰을 뛰어난 수준으로 했다는 걸 알 수 있게 해줍니다. 다른 무한전생 시리즈에서도 나오듯, 처음 전생할 땐 혼란도 겪었고, 계속 전생이 거듭되면서 여러 삶을 살았습니다. 아마 할 수 있는 직업은 죄다 겪어봤을 것이고, 살면서 한 모든 경험도 다 겪어 봤겠죠. 그렇기 때문에 노력도 해보고 신념에 따라 살아도 보고, 미쳐도 보고, 폭군, 광인, 군주, 황제, 신선, 신, 악마 등등 많은 것도 되보았습니다.


이런 모든 경험들을 결국 언젠가 끝나야만 하는 개체로서의 삶을 수 백, 수 천번이나 겪었다는 소리죠. 따라서 해볼 거 다 해보고, 그에 대한 철학적, 비철학적 사색 또한 많았다는 겁니다. 그 결과 남는 것은 본인이 말하듯이 풍화되고 말아버린 감성이죠. 즉, 허무함입니다. 인생 별 거 없다는 생각을 가질 수 밖에 없고, 모든 것은 다 해봤고 경험해본 일이기 때문에, 굳이 똑같은 짓을 계속해서 반복하고 싶지 않은 겁니다.


남은 것은 아무 것도 하기 싫다는 극도의 무력함이죠. 어차피 반복될 삶이고 다 해본 것이고, 그마저도 한 두번해본 것도 아닙니다. 어렵고 힘든 것을, 똑같은 걸 계속 반복해서 하라고 하면 누구든 귀찮을 수 밖에 없죠. 엄청난 노력을 통해 한번 성취했으나, 다시 하라고 하면 못한다는 그런 거. 그런 걸 무한번 반복한 겁니다. 그런 수 억년, 혹은 그 이상의 삶을 반복한 인격은 이후의 모든 삶들을 어떻게 여길까요?


귀찮은 거죠. 다 해봤는 데 뭘 더 해보고 싶은 게 있겠습니까. 자연스레 끝나지 않는 무한번의 전생을 아무런 고뇌도 고생도 없이 살고 싶은 겁니다. 자신을 자극하는 거의 모든 삶의 요소들은 그저 귀찮은 것들일 뿐이죠. 남들은 그에 대해 고뇌고 하고 고민도 하고 고통도, 슬픔도 느끼고 어떤 목적을 위해 노력도 하고 신념도 걸고 하지만, 자신에게 있어서 그런 것들은 그저 귀찮은 요소들이지 대단한 것도 뭣도 아닙니다. 


따라서 무한전생 시리즈 주인공의 귀찮음은 그 무한번의 삶의 결과로 만들어진 고유한 스테이터스이고, 그 자체로 하나의 완성된 캐릭터성입니다. 끝 없는 능력은 그 끝 없는 삶을 통해 주어진 경험들일 뿐이고요.


그런 능력을 통해 독자가 원하는 주인공 깽판물로서의 쾌감이란 쾌감은 다 느낄 수 있지만, 그렇게 되면 솔까 무슨 재미입니까. 그냥 자기 상상대로 뭐든 지 되고 뭐든 지 얻는 상상속 주인공과 다를 바가 없는데.


그런 캐릭터이기 때문에 그는 항상 귀찮음을 호소하고 문제와 엮이고 싶어하지 않으며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기만을 바라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은 자기 맘대로 되는 게 아니며, 그에 따라 무언가 일이 벌어지면 그걸 쉽고 무탈히 넘어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과 정신만을 소모할 뿐이죠. 뭐, 잘 되는 건 아니지만..


물론 그런 캐릭터가 그런 목적을 다 이루면 소설을 진행할 것이 없죠. 그렇기 때문에 주변에 천후든, 흑린이든, 정천이든, 혁이든, 난희든, 준경이든, 마리든, 오거든, 닥터 포이즌이든 문제거리를 몰고오는 캐릭터를 만들어두는 것이고, 그들에게 발암이니 뭐니 하지만 그건 주인공의 시각으로 바라본 것을 독자의 시선에 따라 판단하기에 발생하는 문제일 뿐입니다.


실제론 그들이 겪는 일이나 갈등, 사건, 캐릭터성은 전혀 문제 없어요. 단지 그걸 주인공의 시각으로 보고 그에 따라 독자의 시선으로 재가공되어 판단을 내리기 때문에 발암으로 보이는 거죠. 가령 발암의 대표주자인 척준경의 경우, 그 자체로만 보면 큰 문제 없습니다. 2남 중 막내로 태어나 존나 우월한 형 밑에서 어수룩하게 살다 성장해서 초능력을 발현할 수 있게 되었고 히어로가 되었죠.


준경의 삶에서 주인공(척준현)의 시각이나 요소를 제외하고 판단해보면, 자기 신념에 따라 히어로 활동을 하며 자신의 한계에 따라 더 강해지려고 노력하며, 쌩판 모르는 남을 위해 자기 몸을 던져가며 지키다 크게 다치는 경험도 했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그녀를 지키기 위해 강해지려고 했고,  정말 위험하고 안 해도 될 폭동, 내전에도 못 본 척하고 넘어갈 수 없어, 스스로 자원해서 남아 타인을 지키고자 했죠.


그러다 사람을 수 십명을 죽이기도 했지만, 그는 자기 신념을 위해 노력하고 몸을 던질 줄 아는 번듯한 청년인 것도 사실입니다. 단지 그 과정 속에서 주인공을 귀찮게 했고 빡치게 했다는 점이 독자들이 발암요소로 보는 이유죠. 척준현이라는 요소를 제외하고 척준경이라는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설정한 뒤 본다면, 자기 신념을 가지고 노력하고 몸을 던질 줄 아는 아직 어설프고 성장해야할 존재이지만 훌륭한 주인공으로도 묘사해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역시 주인공의 눈에는 그냥 애새끼가 나대는 걸로 보이고 문제만 계속 발생하는 멍청이, 호구로 보일 뿐이죠. 마찬가지로 그 시각을 통해 보고 판단하는 독자들도 주인공의 시각(혹은 사상...)을 따라가기 때문에 준경이가 괜히 문제만 일으키는 놈으로 보이는 겁니다. 척준경 뿐만 아니라 다른 놈들도 그렇긴 합니다. 다만 가장 적절한 예시가 준경이일 뿐이죠.


그러나 그렇게 준경이 말을 잘 듣고, 천후가 여자랑 눈만 안 맞고 그대로 살았으면 작품은 십 수화도 못가고 끝날 뿐입니다. 그러니 그런 사건을 일으키는 문제적 요소는 반드시 필요하고, 그 존재에 의해 작품이 계속 가는 거죠. 귀찮음은 다르게 말하자면 타성적이고 타율적임을 의미하는 겁니다.


이유가 없으면 스스로 일을 안 만들고 뭘 안 해요. 따라서 다른 문제가 없다면 주인공은 아무 문제도 만들지 않을 것이고, 그에 따라 작품은 그대로 끝납니다. 능동적으로 뭔가 하거나 무언가 발생시키거나 작품을 이끌어갈 목표 같은 게 없죠. 그가 무언가 하려고 한다면 그건 필시 자신이 귀찮지 않기 위함이며 그에 따라 투자하는 시간일 뿐입니다. 혹은 복수와 같은 것일 뿐인데, 이 또한 자기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라 어쩌다보니 발생한 일에 따라 타성적으로 행동한 결과일 뿐이죠.



이런 캐릭터임을 이해해야 작품이 돌아가는 걸 제대로 이해하고 그 인물들간의 관계와 그 관계에서 발생하는 사건과 그 사건과 사건 당사자들, 그리고 주인공의 행보를 지켜보는 독자들이 답답함을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그냥 답답하다 발암이다 할 게 아니라, 그냥 그럴 수 밖에 없는 게 주인공과 주변인물인 셈이죠. 이는 주변인물이 노답인 게 아니라 주인공이 노답인 겁니다. 뛰어나고 대단한 지성과 능력을 가지고 있어도 결국 지 귀찮으면 승질내는 개또라이죠. 목표가 귀찮지 않음에 있다는 건 반대로 귀찮을 일은 모두 노답 발암으로 느껴질 수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주변인은 모두 정상인(이거나 정상인에 가까운... 인물)들이니 인간적 고뇌와 고민, 신념과 행동을 보일 수 밖에 없고, 이는 개별 인물에 대해 주인공의 요소를 배제하고 봤을 때 지극히 합리적인 현상이자 결과입니다. 히어로인 준경이가 남을 위해 위험에 몸을 던지고, 어쩌다 만난 예쁜 여자랑 능력 있고 몸 좋은 제자가 찐덕하게 몸을 섞고 떡정 붙듯이, 혁이나 난희에게 생명의 은인이자 키워준 엄마이자 돌봐준 누나이며 사랑하는 아내이기 때문에 끊어질 수 없는 정과 사랑을 느끼는 것.


이 모든 게 다 정상적인 겁니다. 주인공의 삭막하고 그에 따른 작가의 필체가 어우러져 노답 씹새끼들도 느껴지는 것 뿐이죠. 



그런 요소들을 이해하고 본다면 무한전생 시리즈, 그리고 무림의 사부편은 이상할 게 없는 작품이고, 더불어 상당히 재미도 있는 작품입니다. 어쩔 수 없이 배알이 꼴린 건 그렇다치고 넘어가야 합니다.


또 특기할만한 점은, 뭐.. 글을 쓰는 저 본인이 무협에 큰 관심이 없어서 잘 모르는 것 뿐이지만 작가가 무공에 대한 이해도도 높긴 하다는 겁니다. 무공이나 검의 묘리, 이치, 무공에 대한 설명이 상당히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설명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요. 무한한 인생을 살아오며 겪은 게 많아서 그런 지 모든 것에 대해 마스터 했다 할만한 소광의 무공에 대한 능력은 정말 끝이 없다는 게 느껴질 정도였죠. 그러다보니 무공 그 자체에 대해 상당히 설득력 있는 설명들이 많았습니다. 주로 응용에 대한 이해도가 특히 재밌더군요.



그리고 선계와 관계된 서술도 꽤 재밌었습니다. 역시 이 부분에서도 배알 존나 꼴릴 부분이 있긴 하지만 여러 캐릭터성을 따져본다면 존나 당연한 겁니다. 수 억년, 혹은 그 이상 함께하며 서로 겪을 거 다 겪고 알 거 다 알만한 상제나 신선들이라 그런지 천무대선인 소광을 존나게 잘 알죠. 그래서 부려먹고 엿먹이는 실력 또한 수준급입니다. 소광의 궤변도 잘 안 통하고 무조건적일 수 밖에 없는 깡패권력질(사실 정당한 짓이지만...ㅋㅋ)에 무력한 소광의 지랄발광도 재밌었습니다.


물론 주인공에 무조건 이입하게 된다면 자기 맘대로 안 되는 상황에 좆같고 배알이 꼴릴 수 밖에 없고 뭐 그건 저도 인정합니다. 작품에서 동일하게 내 맘대로 안 되고 답답한 상황이 벌어지면 배알 꼴리고 좆같은 건 저도 같긴 하니까요. 하지만 계속 말해왔듯이 그건 욕먹을 게 아니고, 작품의 전개 상 벌어지는 게 이상한 게 아닌 겁니다. 상황을 잘 짜고 캐릭터의 구성과 역할과 위치를 적절하게 배치시키는 작가의 솜씨 덕에 작위성이 느껴지지 않고 전개상의 설득력, 개연성이 있는 작품이라고 평할 수 있거든요.


즉, 작가의 필력이 의외로 뛰어나서, 일견 개판으로 보이는 작품 구성이지만 천천히 뜯어보면 의외로 꽤 그럴듯하다는 겁니다. 설득력 있는 인물들의 행동과 생각, 그에 따라 발생하는 사건의 개연성. 독자들이 잘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것일 뿐이지, 작품 자체는 평균보다 분명 위에 있는 잘 쓴 작품 맞다고 봐요. 항상 산으로 간다느니 원래부터 산에서 시작했느니 하지만 전 그렇게 생각 안 합니다. 물론 좀 개판처럼 돌아가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작위성이나 말도 안 되는 설정 같은 건 없었어요.



이런 요소들 때문에 광악 작가의 작품이 굉장히 취향 저격인 거고, 재밌다고 느끼는 겁니다. 독특한 주인공의 캐릭터성, 전개나 묘사의 위트, 미묘하게 주인공 엿먹일 줄 아는 전개 등등.. 단점이 없다곤 말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가치 있는 작품이라고 봅니다. 이런 특이하고 재밌는 작품이 흔한 건 아니거든요. 필력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말도 안 되는 설정이나 손발 오그라드는 요소랄 것도 없고.. 오히려 신랄하고 직설적인 면에 더 재미를 느끼죠.


주인공이 제대로 각잡고 나서면 사이다 드링킹이겠지만 그랬으면 애초에 설정된 캐릭터성의 붕괴이고, 역시 그랬으면 작품이 진행될 리 없이 시작하고 얼마 안 가서 끝났겠죠. 백수나 니트의 게으름뱅이질에서 볼 게 뭐가 있겠습니까. 주변인들이 사건을 만들고 거기에 엮여야 재밌는 거지..



뭐, 하여간 말했듯 단점이 없는 건 아닙니다. 클라이막스의 애매함. 사실상 없다고 봐도 될 수 있을 정도죠. 오히려 중간에 애매하게 배치된다고 할 정도이고, 역시 배알이 꼴리는 게 좆같은 건 어쩔 수 없습니다. 남 좋은 일 해주고 자긴 아무 것도 얻는 게 없는 거죠. 물론 그거 가지고 뭐라고 하거나 찌질댈 주인공은 아닙니다. 그런 캐릭터니까요. 이미 해볼 거 다 해봤고 심지어 맘만 먹으면 언제든 할 수 있고 얻을 수 있는 건데 그런 걸로 배알이 꼴려서 지랄댈 건 아닙니다. 무림의 사부에서도 두 제자가 사부 보러 왔을 때 배알이 조금 꼴리긴 하겠지만 그거 가지고 뭐라고 하진 않았을 거라고 했죠. 대신 다른 이유(사람 끌고와서 귀찮게 할 일을 만듬)로 개처럼 쳐맞았지..


배알이 꼴리는 데 사이다가 거의 없습니다. 웃길만한 상황 같은 건 많고 주인공 엿먹게 되는 상황에서 웃음을 찾아야죠. 그냥 보면서 좀 그런 거에 집착을 안 하면 됩니다. 좀 박하게 말하자면 주인공 엿먹이는 꼴보고 재미를 찾으면 됩니다.


앞서 말했던 하이라이트는, 히어로 쪽에선 김현 조지는 것과 무림의 사부에선 두 제자를 존나게 패대는 부분에서가 오히려 클라이막스에 더 가까웠다고 봅니다. 뭐, 그렇다고 작품 구성에 큰 문제는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어차피 닳고 닳은 존재가 무한전생자 캐릭터이기 때문에 글도 그만큼 신랄하고 직설적이고 그에 따라 작품의 구성이나 전개로 비슷하게 돌아가죠.


특히 좆같이 선계에 끌려와(사실 지 잘못이었지만) 선계에서 좆같이 일만 하다 좆같은 제자새끼들이 상제한테 자기 썰 풀고 감동시켜 환생하는 좆같은 경험을 겪는다던가.. 주인공 엿먹는 꼴보면서 우스웠는 데, 결국 상제 또한 주인공인 천무대선에게 마음이 있었던 건 사실이고 그래서 좋다고 자살할 때 주인공이 속으로 쓴웃음을 짓던가, 상제가 두번째로 눈물을 흘렸다는 걸 보면 의외로 담담하게 여운을 조금 주는 것도 있었습니다. 오히려 이런 전개이자 필체, 묘사였기 때문에 더 이 소설답다는 느낌을 받았죠. 무한번의 죽음과 무한번의 삶 속에서 죽음은 두려운 것이 아니었고, 사랑하거나, 정이 붙은 사람과 죽거나 떠나 헤어지게 되는 것에 어떤 감정도 느끼지 않는 건 아니지만, 그 또한 수 없이 겪어온 것들이라 그저 쓴웃음 짓고 담담하게 떠날 수 있는 주인공의 모습은 그 캐릭터성에 정확하게 부합하는 모습이었거든요.



솔직히 작품이 엄청나게 대단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평타 이상을 치는 작품이라고 보고, 독자들이 이런 종류의 소설을 받아들이기 좀 어려워하는 면도 있다는 건 맞다고 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재미가 없거나 구성이나 전개, 개연성, 캐릭터성과 같은 총체적인 작품성의 면에서 욕을 먹을만한 건 아니라고 봅니다. 뭐 비판할 점이 없는 건 아니지만, 솔까 재밌는 건 사실이에요. 기본기 부분에서 꼬투리 잡을 부분은 많지 않고요.




덤으로, 외전 이야기를 좀 하자면 장천후와 사흑린보다 이혁과 난희의 관계가 좀 더 재밌고 흥미롭긴 했죠. 앞서 말했듯, 그리고 소설상에서도 나오든 이혁과 난희의 관계는 일반적인 남녀관계나 부부관계가 아니라 좀 더 깊고 진지한 것이었습니다. 혁에게 난희는 모든 것이었고, 난희에게 있어서 혁 또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무겁고 커다란 존재였어요.


그런 혁이 자신만 등선하고 먼저 죽은 난희에게 깊은 집착의 감정을 느끼는 건 매우 당연한 겁니다. 그래서 신선이 되고도 잊지 못해 진지하게 상제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했고 상제의 호의로 한번 환생시켜줬죠. 그리고 환생한 것은 현대의 배경에 무림이 존재하는 원래 살았던 세계의 미래세계였습니다.


그 이전에, 솔직히 왜 서양 쪽 이야기가 갑자기 나왔는 지 잘 이해는 안 갔습니다. 볼 때는 언젠가 관련 이야기가 나오겠구나 했을 뿐이죠. 하지만 안 나오고 본편의 이야기가 끝나더군요. 그래도 뭐.. 세계관의 완전성을 높혀주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에 그에 대해 뭐라고 할 생각은 없습니다. 굳이 뭐라고 한다면 묘사에 큰 필요성이 없었던 내용이었다고 비판할 순 있겠죠. 설득력 있는 비판이고요.


하지만 외전에서 등장하긴 했습니다. 진짜 존나 짤막하게요. 심지어 거의 별로 중요하지도 않게; 뭐, 이런 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니고.. 그렇게 환생한 난희와 혁의 만남과 지속되는 사랑은 그 자체로 봤을 때 꽤 감동적인 면이 있었죠. 이 또한 소광의 시점을 통한 독자의 시각으로 판단하면 좆같긴 하겠지만요. 사부 냅두고 지 혼자 홀라당 내려가서 지 좆대로 놀아나는 꼬라지를 생각하면 소광 입장에서(정확히는 그걸 보는 독자의 입장에서) 배알 꼴리고 분통 터지는 거죠. 다른 제자들이 이전에도, 그리고 이후에도 따라서 하는 꼬라지 보면 진짜 배은망덕한 새끼들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ㅋㅋ


하여튼, 그런 혁과 난희의 사랑은 정말 예쁘긴 했습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 아내를 찾기 위해 길거리에서 애절하게 노래를 했다는 혁과, 그러다 아이돌이 되어서 인기를 구사하다 어떻게든 사랑하는 자기 아내를 찾기 위해 돌다 결국 마침내 찾은 난희. 그런 난희를 발견하자 별안간 껴안고 누나라고 부르죠.


자신을 위해 등선 이후 그걸 잠시 내려놓고 자길 찾으로 환생한 남자라는 점은 감동적이었습니다. 그렇게 찾아내 다른 거 다 필요 없고 서로만을 위한다는 태도는 상당히 멋있었고 생을 초월한 사랑에 대한 그 둘의 끈끈한 태도는 볼만 했죠. 역시 소광을 배재하고 단지 단 둘만을 봤을 때 그 자체로 하나의 작품이고 전후관계, 서로간의 관계를 잘 아는 독자 입장에서 생각하면 더 애틋한 거죠.


자기가 너무 유명하다보니 본의아니게 난희에게 피해를 주게 되었고, 그거 때문에 결국 서로 강수를 둬가는 모습도 귀여웠고, 선녀옥공으로 너무 예뻐진 난희에게 추파를 던지는 놈을 좀 패주고, 아예 비무로 가문 하나를 박살내는 모습을 보면 사랑하는 아내이자 자신의 모든 것인 난희를 위한 남자다운 혁의 모습도 꽤 멋있었죠. 그 뒤에 이어지는 SSSS급 무인이자 많은 이들을 상사병에 앓게 한 걸 보면 역시 그것도 결국 소광 덕이라는 사실을 깨닫으며 배알이 좀 꼴릴 순 있다지만, 외전도 볼만한 이야기였습니다. 두 연인의 전생을 초월한 사랑이야기였죠.


뭐, 소광의 전생 후 졸부집 자식 이야기는 과연 소광답다는 말이 아깝지 않았고요. 역시 말빨과 판단력 하나는 지리는 놈이라는 겁니다. 역시 그 경험치 어디 안 간다는 거죠 ㅋㅋ




마지막으로, 소광의 선택은 결과적으로 언제나 자기 발목을 잡는 자충수가 됐다는 게 재밌는 부분입니다. 초반부 어린 애 살려주고 그 집안에 식객으로 살았던 것도 그렇고, 정사간의 충돌에서 아는 애 죽었다고 눈깔 뒤집어져서 환골탈태해버리고 시산마협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이후도 그렇죠. 일반 생활이 귀찮아서, 그리고 재미삼아 천후를 제자로 데려오고 여자랑 눈 맞아서 뛰쳐나갔을 때도 나중에 쭉 귀찮을 기연이 발생하게 되었고, 그렇게 뛰쳐나간 거 때문에 술 못 마셔 직접 갈 때 하필 재수 없게 정사간의 싸움질이었고 그러다 사흑린을 주웠죠. 그 사흑린도 천후랑 똑같이 여자 때문에 나갔고 말이죠.


그러다 잠깐 낚시좀 하러 갈 땐 이난희를 주워버리고.. 그 이난희는 혁이를 주워버리고.. 나중엔 그렇게 눈 맞아 나간 놈들이 나중에 비무대전 때 한계를 느끼고 스승님 찾아오게 되었고 그 결과 같이 끌고온 애들 때문에 이사하게 되었죠. 그렇게 이사한 결과 좀 잘 사나 했더니 결국 일월신교 장로와 엮이게 되었고, 난희와 혁이가 결혼하고 애 때문에 기저귀 훔쳐올 때 정천과 만나 진짜 귀찮은 일이 발생해버렸죠. 


여기까지, 따지고 보면 웬 세가의 여식을 구했다 식객이 되어버리고, 그 식객으로 살다 그 집안 높으신 분과 귀찮게 엮기게 되었고 그러다 뛰쳐나와버린 데다, 그렇게 뛰쳐나와 자리 잡게 된 곳에서 하필 재수 없게 사건 터져 눈깔 뒤집어져 환골탈태, 그 사실 때문에 귀찮아져 은거해버렸고, 그러다 제자들 주워다 키우고 그 제자들이 귀찮은 놈들 끌고와 이사해버렸고, 이사한 뒤 정천과 만나서 원영신 내다 버리게 되는 등 결과적으로 자신의 선택은 죄다 결과적으로 귀찮은 일로 귀결되버렸습니다. 그 정천은 등선해버리고 남은 후회는 소광의 원영신 덕에 너무 강해져버렸고.. 그 결과 다시 제자들이 찾아오게 되었죠.


이후로 더 점입가경인데, 그 소광이 내다 버린 원영신은 결국 알툴라에게 가게 되었고, 그 결과 정천은 사념은 흩어지고 알툴라가 왕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다 지 혼자 뻘짓하다 주화입마에 빠져 소광의 은거지로 향하게 되었고, 그러다 다시 원영신을 만들고 알툴라를 개패게 되었죠. 그러다 등선하기 싫어서 덜 만들어진 원영신을 조온나게 뿌려내느라 전세계에 원영신의 기연을 얻은 이들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원영신을 처음 버렸을 때 정천의 등선과 알툴라의 기연을 만들어냈으니, 이 또한 결국 자기탓.. 그러다 결국 정천이 강림하고 상제까지 내려와 납치(?)해서 강제 등선해버리니 이렇게 된 건 결국 다 자기탓입니다 ㅋㅋ 뭐 그러다 다시 딜을 보고 내려오긴 했지만 기연을 얻은 남방의 식인종이 개꺵판을 치게 되었고, 그러다 사흑린과 이란난의 자식에게 까지 마수를 미치게 되었으니 그에 따라 스승인 소광의 은거지까지 오게 되었고, 소광이 그 식인종을 죽이게 되었는 데, 결국 이것도 자기가 뿌린 원영신 조각 때문에 발생한 난리였고, 그렇게 저승에 가게 된 그 오염된 영혼 때문에 난리가 벌어져 결국 또 강제 등선으로 이어지는 결과가 발생합니다. 네, 자기 탓이죠.ㅋ


심지어 선계에서도 좀 게을러볼까 해는 모든 수작은 결과적으로 다 자기에게 돌아와서 귀찮은 일로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세계 하나 재부팅 하자 바로 보고 올려버려서 역시 일 잘한다고 일시키고, 제자들 등선하자 일 부려먹으려는 데 제자끼리 이어줬던 거 때문에 등선 못한 난희 보러 환생하고, 그거본 다른 놈들도 환생해버리고.. 결국 자기 혼자 일 다하게 되었고, 다시 등선하자 그래도 이제 좀 편하게 지낼까 하면서 이런저런 핑계를 만들어놓고 그 중 하나인 선도 복숭아 셔틀을 상제에게 들켜버리니 결국 변명은 안 통하고 자기는 못 놀고 일하게 됐습니다. 저승해서 영혼 세탁한 것도 빨리 끝내버리니 또 다른 일 터져버리고 그것도 소소하게 자기 탓.. 


결과적으로 스토리 내내 발생한 사건들 대부분은 따져보면 자신의 선택들이 이리저리 엮이고 섥혀 발생하는 일들이었죠. 좁게 봤을 땐 그럭저럭 현명한 선택이었을 진 몰라도 크게 본 그림에선 그게 다 자기에게 돌아오는 귀찮은 일들이었으니..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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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11 - [취미/ㄴ리뷰] - 개판(박현욱 작가) 작품 심층 해석 1편.

2014/05/05 - [취미/ㄴ리뷰] - 사이트별 웹툰 리뷰 및 추천


※ 본 리뷰는 작품에 대한 내용누설이 있습니다. 



이전에도 심층 해석을 올렸고, 다른 웹툰들 리뷰하면서 같이 리뷰한 적 있었죠. 이번 리뷰는 좀 제대로 파볼 생각입니다.



작품의 전체적인 메시지.


작품의 주제를 관통하는 메시지는 시작 부분의 판 영감의 말에 다 드러나 있습니다. 충동과 의지, 그 사이의 판단. 판 영감은 정의를 주장하는 아마란스가 변질되어 가는 걸 보며 은퇴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새롭게 들어오는 신입인 바울에게 노인네의 조언 정도로 충동과 의지의 구분과 중요성을 이야기해주죠. 이러한 말은 그저 시작 부분에서 흘러가듯이 딱 한번 나올 뿐입니다. 조언은 그저 조언이라는 듯이요.


작품 속 캐릭터들은 다들 이런 충동적 행동을 경험해본 적 있습니다. 바울도, 알레사도, 토드도, 더크도, 도리안도, 허쉬 영감도, 크롬도.. 모두 그런 충동적 행동을 해본 적 있죠.


그리고 모두 다시 한번 충동과 의지 사이의 기회를 얻습니다. 그리고 그들 중 의지를 가지고 선택하는 자들도, 그 기회를 놓치고 다시 충동을 몸을 맡기는 이들도 있죠. 재미있게도, 의지를 선택한 이들은 살아남고, 충동을 선택한 자들은 죽게 됩니다.


충동과 의지란 무엇일까요? 스스로의 의지로 무엇을 한다고 한다 했을 때, 의지란 그렇게 가벼운 단어가 아닙니다. 판 영감이 이에 대해 훌륭한 설명을 했지만, 덧하여 설명해보자면.. 충동이란 어떠한 밀림입니다. 충동에 등떠밀린다는 표현이 있듯이, 어떠한 일을 할 때 충분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이나 결심이 없는 그저 자신의 감정적 해소를 위한 등떠밀림이죠.


이러한 감정적 문제는 자신이 타자에게 가지는 분노나 복수심 따위가 될 수도 있고, 상황 자체에 의한 강박적 반응이기도 합니다. 가령 투견인 바울은 투견이기 때문에, 남들이 투견을 그렇게 보기 때문에 다른 길 갈 기회 없이 싸웠었고, 남들 또한 그걸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심지어 바울 조차도요. 하지만 이는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싸운 게 아니라 남들의 시각에 따라 움직여준 것에 불과합니다. 싸우고 싶어서 싸운 게 아니라, 싸워야 하기 때문에 싸웠던 것, 혹은 싸우는 게 정상적이기 때문에 싸운 것에 불과합니다. 하고 싶든 하기 싫든 해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상황이 본심을 속이게 된다면 그것이 곧 충동이 되는 거죠.


의지는 이와 다릅니다. 밀림이 아니라 끌림이거든요.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 그것입니다. 충분히 생각하고, 고민해서 얻어낸 결론을 신념과 확신에 따라 실천하는 것, 그것이 의지이죠. 감정적 불만이나 고통마저도 극복해내고 얻어낸 결론과 실천이 곧 의지입니다. 그런 감정적 불만이나 고통, 자신을 어떤 상황이나 상태로 밀어넣는 상황을 이겨내고 극복해내야 그것이 의지라고 할 수 있다는 거죠. 그러한 과정 속에 끊임 없는 고민과 생각을 할 수 밖에 없고요.



물론 모두들 실수할 때가 있습니다. 모두 실수 한번 쯤을 할 수 있는 법이죠. 바울도, 토드도, 크롬도, 알레사도, 더크, 도리안, 모두 실수했던 전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두번째 기회가 있다는 말이 있죠. 모두 두번째 기회를 가질 자격이 있고, 모두 그런 자격에 따라 기회를 받았습니다. 바울은 그 기회에서 롤프와 싸워서 죽이지 않고, 도리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레아를 구한다는 선택을 했습니다. 롤프는 다시 제국으로 돌아와 아버지를 구하고 친구들이 다치지 않게 전쟁을 막고자 했으며, 이후에도 자신의 친구를 구하기 위해 제국의 총수 자리를 내던지기도 했습니다.


허쉬는 다시 한번 떠나겠다는 아들에게 해야 했던 말을 해주며 후회 없이 보내줬으며, 더크는 진작 했어야 했던 일을 하기 위해 후버와 싸우고 도리안은 진작 했어야 했던 사과를 했죠. 아론 또한 과거의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받습니다. 모두 기회가 왔을 때 충동이 아닌 의지를 가지고 새롭게 선택했던 거죠. 그리고 이들을 작품이 끝날 때까지 모두 살아남습니다. 허쉬는 이런저런 이유들로 인해 죽긴 하지만요;


하지만 반대로, 그 두번째 기회를 보지 못하고 다시 한번 충동에 빠진 채 움직였던 토드와 알레사(나오미)는 죽게 되었습니다. 10번째 생일 날 장로와 참석자를 죽이고 제국의 거처에서 15년의 계약을 승낙했죠. 하지만 알레사를 죽이고 나오미의 함께 제국을 무너뜨리겠다고 마음 먹습니다. 나오미도 마찬가지죠. 알레사가 죽은 뒤 토드에게 제국을 무너뜨리겠다고 엄포를 놓았고, 이후에도 꾸준히 그것을 위해 활동합니다. 자기 스스로 말하죠. 기회를 놓친 건 자신이었다고.


결국 의지에 따라 선택했던 이들은 살고, 충동에 휩쌓였던 자들은 죽었습니다.



이러한 의지를 가진 결정은 모두 그들 나름에게 굉장히 중요한 선택지였습니다. 그저 선택에 불과하지만, 그게 정반대의 결말로 이끌 상황이었으니까요. 누군가는 친구를 잃게 될 상황이었고, 누군가는 삼촌과의 신뢰를 잃었을 것이었으며, 누군가는 친구도, 자신의 신념도 모두 잃어버릴 수도 있었고 그 중 한명은 그 상황에서 괴물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모두 의지를 가지고 선택했죠. 자존심은 잠깐 접고, 부담은 감당하며, 충분히 생각하고, 충분히 고민하고, 다시 후회없을 그런 선택을요. 그렇기 때문에 의지를 가지고 무언가를 한다 했을 때, 의지란 그렇게 가벼운 단어가 아닌 셈이죠.



각자의 인생.


바울의 경우.


주연급 인물 중에 누가 고통과 후회 없는 삶을 살았겠냐만, 바울은 그 중에서도 가장 비참했던 편이었죠. 태어나 투견이 되고 싶다고 했을 때도 그의 아버지는 자신의 아들이 어떤 대우를 받고 어떻게 살지 눈에 훤했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처럼 되고 싶다는 아들이 얼마나 기특하고 고마웠을까요. 그래서 많이 용기를 주고 위로도 해줬을 겁니다. 그렇게 희망을 가지고 열심히 했지만 결국 반푼어치 잡종 투견이라는 혈통에 얽매여 자신의 실력도 제대로 발휘할 수 없게 되며 물어 뜯기는 개로 살다 차별 받고, 결국 버려지게 되죠. 그것도 진작에 도태 당했어야 했다는 말마저 들으며..


바울의 과거편은 그런 비참함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는 데, 평소처럼 차별 받고 자신의 가치를 의심하는 우울한 일상을 보내며 자신과 자신의 길에 회의를 느낍니다. 그래서 도망가려고도 했고요. 하지만 부모님이 도망치지 않게 바로잡아줍니다. 무엇을 하든 끝은 보라고. 끝을 보지 않고 도망가지 말라고.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솔직히 하고 싶지도 않았을 겁니다. 아니, 하고는 싶지만 자기가 원한 방식이, 원하는 싸움이 있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 것도 할 수 없었고, 그렇게 밑바닥 투기장에서 굴러야 했습니다. 그렇지만 이겨도 시원하지 않고, 답답함만 느끼죠. 그러다 아버지가 자신을 찾아오고, 똑같이 도태되어야할 것들 취급 당하며 버려집니다.


비참했죠. 자신은 그렇다쳐도 아버지마저 퇴물 취급 당하며, 도태될 거라 낙인을 찍듯 치워버렸으니. 이런 상황 속에서 바울의 심리 상태는 매우 위험할 수준으로 무너집니다. 눈은 검게 나오고 혼돈과 같은 느낌의 그림체로 그려지며 암울하고 위험한 분위기를 내면서요.


그러다 아버지가 정신차리고 바울에게 제대로된 길을 선택할 기회를 줍니다. 그 동안 자신의 희망을 바울에게 투사했던 걸 깨달았던 거죠. 자신은 아들을 위해 용기를 복돋아주고 희망을 주고 노력하면 성과가 나올 거라고 믿게 해줬지만, 사실은 반쯤은 자기만족이었던 겁니다. 그렇게 바울은 새로운 마음 정리를 할 기회를 받게 되죠.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건달들과의 시비에 아버지가 죽게 되고, 바울은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마음정리를 끝내고 진짜 자신만의 길을 선택합니다. 자기 의지로요. 그래도 역시 아버지처럼 되고 싶다며. 이전과 똑같은 길이지만, 그 길에 담긴 의미는 다릅니다. 이번엔 자신의 의지로 선택한 길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자신의 처지는 변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누가 되었든, 자신이 어떤 것인지로만 보는 세상 속에서 여전히 그는 반푼어치 잡종 투견에 불과합니다. 여전히 물어 뜯기는 개로 취급되다 사고치고 결국 쫓겨나 스스로를 정의라 부르는 아마란스라는 조직과 만나죠.


이때 바울은 스스로의 의지로 아마란스에 갔을 지, 충동에 의해 갔을 지에 대해선 잘 모르겠습니다. 반쪽짜리 투견은 투견도 아니라더니, 사회에선 반쪽짜리 투견이라도 투견이라며 무서워하죠. 결국 남은 선택지는 하나 뿐이었던 겁니다. 아마란스..


아마란스에서 바울은 최선을 다합니다. 다하고자 했고요. 헤스터를 지키려 했고, 후버와도 싸웠고, 플루토를 쓰러 뜨렸습니다. 아론도 영입하고, 심지어 바스커빌을 때려눕히기도 했습니다. 이후에도 알레사를 지키고 전쟁을 막기 위해 분투했죠. 하지만 돌아온 건? 헤스터는 결국 죽었고 크롬은 제국으로 돌아갔으며, 토드를 잡기 위해 싸우다 코스타를 잃기도 한데다, 토드의 탈출과 이어지는 허쉬의 죽음과 함께 제국과 아마란스는 전쟁이 벌어졌고, 사라 바스커빌의 집에 가서는 친구에게마저 잡종 소리를 들었으며 자신이 목숨을 걸듯이 싸웠음에도 불구하고 알레사를 빼앗깁니다.


제국에 가서도 친구에게 제대로 도움도 못 받고 갇혀 있었으며 모든 것을 되찾기 위해 모든 걸 걸고 싸웠지만 결국 레아의 말대로 이겨도, 져도 후회할 수 밖에 없는 결과만 발생했죠. 전쟁은 막을 수 없었고 아마란스와 제국은 공멸로 향해 치닫습니다.


마지막엔 자신이 믿었던 모든 것이 그저 거짓에 불과하다는 진실마저도 감당해야 했습니다. 바울에게 아마란스는 의지에 따른 선택이든, 충동에 따른 선택이든, 어느 쪽이든 진심이었습니다. 비참한 인생을 살며 비루하게 살아온 투견 한 마리의 인생 제대로 바꿔줄 수 있냐고 물었을 때의 그 대답은 그에게 아무런 가치도 지나지 않는 그저 기만에 불과했던 거였죠. 정의는 없었고, 그의 노력은 무가치한 것이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했던 말과는 다르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다시, 최후의 순간 두번째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레아를 구하는 거죠. 레아를 구할 수 있다면 자신이 원했고 추구했던 모든 진심과 모든 것을 되찾을 수 있었던 겁니다. 영웅이 될 수 있고 가치 있는 싸움도 할 수 있게 되었죠. 그리고 결국 토드를 쓰러뜨리고 레아를 구해내는 데 성공하죠. 단지 문 밖을 나간다고 세상이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았을 뿐.. 그는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낸 겁니다.


어려서부터 태생적으로 가지는 한계와, 그 한계 속에서 아무리 노력해도 보이는 성과는 없고, 잡종이기 때문인지, 다른 투견들은 가지지 않는 싸움에 대한 모종의 가치와 그에 대한 갈증을 느끼며 많은 고민을 했던 바울입니다. 아무리 비참하고 속상한 상황에서도 근성 있게 버티고 버텨 계속 노력하며 언젠가 찾아올 희망, 혹은 기회를 바라지만, 결국 그 누구도 자신을 가능성 있는 투견으로 봐주지 않고, 그저 잡종으로만 바라보았습니다. 그가 누구인가보다 무엇인가만을 바라보는 세상이었죠.


바울이 투견이 되고 싶었던 이유는 투견인 아버지가 멋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같이 되고 싶어했죠. 그래서 말했듯, 죽어라 노력하고 근성있게 버텼죠. 차별 받고 괴롭힘을 당해도 견디고 버텨서 언젠가 경기 한번 나가기를 소망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관장의 노골적인 차별과 폭언은 그로 하여금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만들었죠. 실력도 변변찮은 후배의 도발에 넘어가 결국 싸우고 쫓겨납니다.


아마란스에 들어간 이유는, 그럴 수 밖에 없었기도 하지만 그러고 싶었던 것도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아버지처럼 되고 싶었다고 했죠. 아들을 위해 투기장에서 싸웠고,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건달들과 싸우다 죽었습니다. 아버지는 영웅이었죠. 그리고 아마란스는 스스로를 정의라고 했습니다. 밑바닥에서 다시금 비참함을 느끼던 바울에게 그 말은 하나의 희망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그의 앞날은 그의 의욕만큼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새 친구와 새 식구를 만났지만, 첫 임무에서부터 헤스터는 죽음을 맞았고, 그는 아무 것도 못했습니다. 그 날 죄책감을 가지게 됐죠. 오른손의 흉터는 낙인이 되었고요. 그래서 다짐했습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게 하자고. 그래서 바스커빌을 잡으려 했을 때 그렇게 적극적이었죠. 토드를 잡음으로써 보상을 받고 속죄를 바랬을 겁니다. 죄책감과 절박함에 떠밀리면서요.


하지만 토드를 잡았지만 반대로 잃은 것도 컸습니다. 코스타가 죽었거든요. 바울은 나중에 말합니다. 싸우지 못해 잃어도 봤고, 이겼는 데도 지키지 못한 것도 있으며, 죽을 각오로 싸웠음에도 불구하고 빼앗긴 것도 있었죠. 싸우지 못해 헤스터를 잃었고, 이겼음에도 불구하고 코스타를 잃었어야 했습니다. 훗날 발생하는 전쟁에서 한스가 알레사를 데려가려고 왔을 땐 죽을 각오로 한스에 맞섰지만 결국 일어나지도 못할 정도로 처참하게 얻어맞고 쓰러져야만 했죠. 알레사를 빼앗기면서요.


그의 모든 노력이 배신 당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원망했죠. 잡종 투견으로 태어났다는 걸, 자신의 혈통을 원망하면서요. 맹수였으면 덜 노력했어도 지금보다는 더 나았을 거라면서요. 다시 한번 느끼는 비참함이었을 겁니다. 스스로도 아론에게 화내면서 말이죠.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때 한스는 쿠퍼 패거리에게 쓰러진 다른 맹수 부하들에게 타고난 혈통만 믿고 노력은 안 했다며 평했죠. 가장 맹수 다운 맹수는 바울을 인정했던 겁니다. 비록 패배했지만..


하지만 바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제국으로 가고자 합니다. 모든 것을 되찾기 위해. 그 판돈으로 잃어버린 모든 것을 걸었지만.. 그러나 전쟁을 막기 위해 롤프를 쓰러뜨렸음에도 결국 롤프는 총수의 자리를 내던지고 전쟁은 막을 수 없게 됩니다. 여전히 노력했지만 아무 의미가 없었죠. 그리고 마침내 전쟁이 본격화되고 르넨은 토드에게 살해 당하며 바울은 스스로 감옥 문을 부수고 나옵니다. 그리고 토드와 알레사, 나오미에 대한 진실을 듣게 되죠.


바울은 정말 충성을 다했습니다. 개들은 원래 그런다고. 그래서 충성을 다했다고. 하지만 그 결과가 고작 이따위 기만과 위선, 배신이었다는 걸 깨달은 거죠. 알레사를 구하기 위해 죽을 각오를 해서 싸웠고, 죽을 각오로 왔으며, 죽을 각오로 구하러 갔지만 그 모든 가치는, 아마란스에서의 모든 노력은 아무런 의미도 없고 가치도 없는 장기말로서의 행동에 불과했던 겁니다. 그저 이용만 당하고 배신 당하는 그런 말. 충견. 투견, 사냥개.


토드와 싸우면서 다시 한번 오른손에 송곳이 꽂히며 죽을 뻔하기도 했지만, 결국 진실을 알고자 했고, 진실을 알게 된 바울은 크나큰 환멸과 배신감을 느끼게 됩니다. 롤프 또한 흔들리죠. 그렇지만 바울은 근본적으로 정의롭고 착한 녀석이죠. 그래도 죽게 둘 순 없다고, 이용만 당하는 건 익숙하다고, 그래서 이번엔 진짜 실망했다고 하죠. 그러면서 죽진 않게 지켜주면서요. 그래도 마지막 순간 모든 가치와 의미를 걸고 토드와 싸운 바울은 결국 기회를 잡고 자신의 모든 것을 되찾습니다. 토드를 쓰러뜨리고 삶을 막 포기하려던 레아를 구해냈거든요.



충동에 따라 다른 체육관 녀석들과 싸우기도 했고, 충동에 따라 지하 투기장에서 구르기도 했지만, 결국 마지막 순간을 위해, 그리고 그 순간에서도 충동이 아니라 의지를 통해 무엇을 하고자 했고, 그것을 위해 노력을 한 결과 바울은 그 의지에 보답을 받은 것이죠. 비록 전쟁을 막지는 못했고, 나오미의 죽음 또한 막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롤프와 레아를 구해내며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냈습니다. 도태되어야 하는 잡종이 아닌 누군가를 구해낸 영웅이었고, 사랑 받아 도태되지 않을 수 있게 되었죠. 작품의 시작과 끝은 그의 인생과 추구하는 가치와 함께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버려진 비루한 투견에서, 영웅으로.




크롬, 롤프의 경우.


크롬.. 롤프도 결코 쉬운 인생을 살았던 건 아닙니다. 보육원에서 버려진 아이로 키워지다 자식(아들)을 낳지 못했던 제국 총수의 눈에 띄어 제국에서 살게 되죠. 그 이전엔 토끼 헤스터와 친구로 지내며 다른 녀석들에게 괴롭힘 당하는 헤스터 대신 싸워주기도 했죠. 맹수와 토끼의 친우관계였습니다. 그런 관계도 제국에 입양되면서 거의 끊겼는 데, 그래도 몰래 찾아가 놀기도 하고 또 대신 싸워주기도 했죠. 그러다 들키기도 했고..


하지만 결국 자신의 맹수로서의 본성에 의해 멧돼지 녀석의 얼굴을 그어버리고 피 묻은 손톱을 자신에게 뻗는 걸 본 헤스터는 그대로 도망가게 됩니다. 어린 롤프에게 그건 굉장히 큰 슬픔이었겠죠. 자신의 유일한 친구가 자기를 맹수로 보고 두려워서 도망간다는 사실이.. 그리고 그대로 맹수로서 자라납니다. 그리고 허쉬의 기대에 들어맞는 촉망 받는 차기 총수로서 잘 활동해오죠.


그러다 과거의 잔재인 보육원 친구를 다시 만나게 되고, 친구를 위해 대신 싸워줬던 때처럼, 다시 싸우게 됩니다. 이번엔 자기 형제와. 친했던 사이는 아니지만, 그 날의 경험은 그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던 겁니다. 그래서 생각하고 고민한 결과 제국을 나가겠다는 선택을 하게 되죠. 제국의 차기 총수이자, 맹수가 아닌, 개인 롤프의 의지에 따른 판단으로써.


그러나 그레이 본즈 허쉬는 그걸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하고 큰 충격을 받게 됩니다. 분노하고 심지어 빌기까지 했습니다. 그래도 자신의 의지대로 선택한 이상 굽히지 않았고, 이미 말을 꺼낸 이상 되담을 수도 없었죠. 그건 허쉬 영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손톱을 뽑으라. 총수로서 한 말은 번복하기 어렵죠. 그래서 뽑았습니다. 그래서 뽑혔고요. 체면도 잊고 용서해달라 울부짖고 결국 맹수로서는 불구, 반폐인이된 몸으로 아마란스에 들어가게 됩니다.


롤프는 이때의 선택에 대해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의지대로 선택한 거니까요. 그 선택에 의해 상처 받고 고통받을 순 있지만, 그것도 결국 한 때, 자신의 의지대로의 선택은 자신을 배신하지 않습니다. 잃은 만큼 얻은 것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레이 허쉬는 후회합니다. 의지가 아니라 충동대로 선택한 결과니까요. 그 충동은 결곡 잊혀지지 않고 아물지도 않습니다. 그 선택 또한 자신을 배신하지 않죠. 정직하게 후회와 고통이 찾아오니까요. 잃은 것만 있고 얻은 것은 없는 것이 충동적 선택의 결과인 겁니다.


제국을 등진 롤프는 크롬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받고, 자신의 보육원 시절 유일했던 옛 친구를 만납니다. 헤스터를요. 보육원 친구들이 맡긴 유일했던 친구 헤스터. 헤스터는 알아보지 못하지만 크롬은 헤스터를 기억합니다. 그리고 그게 중요한 거죠. 다시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것 말입니다. 새로 얻은 친구인 셈이지요. 헤스터가 무서워 할까봐 알아보지 못하도록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다른 모두가 다 자신의 정체를 알아도, 단지 그 친구만 알지 못하면 된다고요. 다 커서 다시 만난 친구지만 자신의 이름도 정체로 감추고 지냈어야 했다는 겁니다. 그만큼 소중한 친구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기대고 싶은 누군가가 필요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걸 표현하고 내색하진 않지만 그 자체로 안심이 되는 그런 존재로서요.


알레사에 의해 거두어지고 그녀에게 큰 은혜를 입은 크롬은 아마란스에서 열심히 노력합니다. 그래서 징벌가라는 별명도 얻게 되었고요.



롤프, 크롬은 맹수 치고 유약하고 정이 많은 성품을 가졌습니다. 어렸을 때 헤스터라는 토끼와 친구가 되어 놀기도 했고, 보육원을 폐쇄하고 그곳 식구를 내쫓았다는 말 때문에 가족과 싸우기도 하죠. 맹수들은 같은 맹수가 아닌 다른 녀석들에 대해 그런 태도를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맹수 다운 것은 한스나 르넨이 더 맹수 답죠. 아니, 다른 부하들도 롤프보단 맹수답습니다.


결국 그런 본성 때문에 제국을 나오게 되었고, 아마란스에 몸 담게 되는 계기가 되죠. 하지만 맹수는 맹수라고, 어울리지 못하고 고독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모두와 정을 주고 받으며 한 식구로 지냈지만, 딱딱한 아저씨라는 말을 들을 정도는 되죠. 그런 애매한 성질은 판에게 여전히 고독함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는 평을 듣습니다. 그만큼 겉으론 맹수처럼 보이고, 딱딱하고 무너지지 않는 것처럼 보여도 실은 유약한 성품을 가지고 있고 위태롭다는 겁니다.


맹수에게 자비를 구하지 마라. 맹수를 이야기할 때 자주 나오는 표현이죠. 맹수들은 봐주지 않습니다. 그저 담담하게 가차 없이 처리해버리죠. 하지만 크롬은 그런 말을 하면서도 무언가 보여주기 위한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그가 맹수다운 맹수가 아니기 때문이죠. 마치 맹수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워너비인 것처럼, 맹수인 척 하는 듯한 느낌.. 그렇게 말하면서도 결국 친구를 위해 쓰러진 상태에서도 손을 뻗는 후버를 보고 도리안을 놔주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정에 약해요. 이 점은 알레사도 밝힌 적 있죠.


그렇기 때문에, 롤프는 제국의 후계자이자 총수로 어울리지 않는 겁니다. 정치적 판단, 제스쳐는 분명 뛰어나고 상황 판단과 명분 따위를 내세워 상황을 모면하거나 조절하는 일에 매우 능숙하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하들 성에 차는 결단을 내리는 건 절대 아닙니다. 친구들 다칠까봐, 자신이 사랑하는 알레사가 다칠가봐 아마란스와의 전쟁을 미루고 막으려 들죠.


그 탓에 인망도 줄어들고 불만은 더더운 커져가는 와중에 대놓고 조롱을 듣기도 합니다. 그러다 바울에게 패배했을 때 바울을 살리기 위해, 그리고 자신의 실수와 부족함을 인정하고 총수의 자리를 내려놓습니다. 그리고 그 상황 전후로도 계속해서 총수로서의 자신, 그리고 자신을 총수로 만들려 했던 아버지의 심정을 헤아리기 위해 고뇌하고 고민하죠. 어째서 이렇게 부족한 나를 총수로 만들려 하셨을까.


그리고 총수의 자리에 올라서서야 비로소 아버지의 시야로 보던 세상을 알게 됩니다. 어째서 자신의 손톱을 뽑았어야만 했는 지, 어째서 자신을 총수로 올리려 했는지 등등을..


속속히 밝혀지는 과거의 사실들과 새로운 사실들은 자신이 처한 모든 상황에 염증을 느끼게 합니다. 그래서 모든 걸 등졌죠. 오직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와 자신의 친구만 빼고요. 제국도, 총수도 다 필요 없고 자신이 원하는 것들만 무사하면 되는.. 그래서 총수의 자리를 내던지면서 조롱을 들어도, 르넨에게 무릎을 꿇는 굴욕을 당하면서도 감내할 수 있었던 것이고 다시 발톱이 뽑힐 것이라는 걸 알아도 견디고자 마음 먹었죠. 한번 해봤으니.. 그러나 그런 희망과는 다르게 일이 흘러갔죠. 그 중 그가 받아들이기 가장 어려웠고 믿고 싶지 않았던 사실이 바로 알레사는 사실 나오미라는 쌍둥이 자매였고, 목적은 제국과 아마란스의 공멸, 그리고 자신의 죽음. 처음부터 진심이 아니었을 수 있다는 사실..


크롬.. 롤프는 정에 약해요. 그래서 사랑에도 약하죠. 알레사-나오미의 가장 위험한 점이 믿음을 받는 것이고, 그래서 치명적이라곤 하지만 롤프는 끝까지 믿음을 버리지 않으려 했죠. 하지만 결국 사실은 사실이고, 그는 그저 받아들여야만 했습니다. 그녀의 죽음 또한 말이죠. 토드가 말합니다. 통곡이라도 할 줄 알았다고.. 하지만 그러지 않았죠. 이미 9년적 죽은 것이니까. 다시 토드가 말합니다. 이제야 맹수다워 졌다고..




토드의 경우.


바울도, 롤프도 모두 자기 인생을 살아오면서 자기 의지라는 게 조금이라는 게 개입되긴 했다는 점과는 다르게, 토드의 경우는 처음부터 자신의 의지 없이 암살자로 만들어졌습니다. 태생도, 성장도 모두요. 그렇다고 그의 모든 행동과 선택들이 정당하는 건 아니지만, 가장 끔찍한 삶이기도 했습니다.


태어나서 자랄 때까지 엄격한 교육과 환경 속에서 자라야만 했습니다. 애초에 태어난 거 자체가 어떠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만들어진 생명에 가까운 존재이기도 하고요. 그 자체로 의지와 인격이 있는 존재라기 보단, 하나의 도구로서, 도구적 목적을 위해 태어난 개체에 가깝습니다. 그런 토드에게 엄격한 교육을 시키긴 하지만, 토드의 부모 또한 그의 존재와 삶에 연민과 슬픔을 가지고 있었죠. 그래서 그걸 고쳐보려고도 했고요.


목적에 맞게 만들어진 도구이긴 해도, 생명은 생명이고 아이는 아이죠. 감정이나 욕망을 제어하기 위해 삭막한 존재로 키우긴 했지만, 그래도 초콜렛은 맛있었던 모양입니다. 주니까 받고, 나중에 그게 기억이 남아 생일 선물로 달라고도 하니까요. 또한 자신이 무언가를 키운다는 것에도 느끼는 바가 있었습니다.


앵무새를 키우면서요. 이 앵무새는 토드 바스커빌을 설명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상징이자, 하나의 아이덴티티입니다. 작품 내에서도 나오듯이, 토드는 이 앵무새라는 존재를 보았을 때 사냥도 못하고 알도 낳지 못한다며 마치 살아 있지 말아야할 것으로 보았죠. 그게 질투심 때문이든, 아니면 태어나 자라고 교육 받은 데로의 효율성과 목적을 따지는 하나의 사상 때문이었든 어린 아이가 할 만한 말은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토드는 그 앵무새에게 어떠한 성취, 애정 따위를 느꼈고, 긍정적 감정을 얻었으며 그걸 표현하기도 했지요. 자신이 말을 가르쳤고 그걸 어머니께 보여주며 자랑스러워 했어요. 성취감을 느꼈고요. 즐거워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앵무새도, 가문의 장로가 앵무새를 죽여봐. 라는 말 한마디에 굳어버렸죠. 그리고 실패작 취급을 받았습니다. 고작 10살 어린애에게 있어선 가혹한 일이었죠.


앵무새는 토드의 어린 시절에 가질 수 있었던 어린아이다운 요소들이자, 하나의 가능성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런 상징이 되는 앵무새를 토드는 본인의 손으로 죽이고 맙니다. 실패작이라는 말에 충격을 받아서, 자신의 가치를 확인하기 위한 행동이었죠. 똑같이 자신의 가치를 찾고자 했던 바울은 방황했고, 토드는 하루도 지나지 않아 증명하고자 했던 겁니다.


강박적으로요. 그리고 충동적이기도 했고요. 고작 10살짜리 어린애입니다. 그냥 어린애도 아니고 가문을 되살리기 위해 만들어지고, 교육받아온 도구적 목적을 위한 존재였죠. 즉, 자신이 해야할 일을 잘 알고 있었고, 본인 또한 그 환경과 압박에 순응하며 살았습니다. 장로가 했던 앵무새 하나 죽이지 못하는 암살자? 실패작이다. 라는 말은 토드라는 존재 그 자체를 부정하는 말이었습니다. 하루 아침에 자신의 존재가 부정당하는 건 굉장히 무서운 일이고 슬프고 위험천만한 일이죠. 그렇기 때문에 토드는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내야만 했고,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존재 자체를 스스로도 납득하지 못하는 위태로운 상황이었던 겁니다.


그래서 죽였지요. 역대 최고의 재능을 가지고 부모보다 뛰어난 실력으로. 그리고 그 순간 토드는 어린 시절에 가지고 있었던 좋은 것들을 모두 잃었습니다. 즐거움도, 애정도, 뭐가 됐든. 그 영향은 부모마저도 두렵게 할 정도였고요. 이때 토드는 이미 한번 자신의 가능성을 죽인 겁니다. 어쩌면 미래엔 남들처럼 살 수 있었던 기회를 스스로의 손으로 망가뜨린 거죠.


그리고 이어지는 그 사건에서 괴물이라 불릴만한 자신조차 자식이라고 살리고 대신 죽어간 아버지의 희생에 분노와 슬픔을 느꼈습니다. 자신이 저지른 복수라는, 그리고 존재 가치의 증명이라는 충동적 선택으로 또 하나 잃어버린 겁니다. 


어머니는 나름의 자식에 대한 정 때문에, 그리고 그보다 더 큰 두려움에 떨면서 허쉬와 거래를 하고 계약을 맺습니다. 그리고 토드를 버리고 숨어살게 되죠. 토드는 그 점에 분노하고 웃을 수도 있었고, 울 수도 있었다고 말하며 자기만 괴물이 아닐 거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걸 증명하겠다고 하죠. 그렇게 15년 뒤에 당당히 찾아 뵙겠다고 마음을 먹습니다.


이는 마치 바울이 아마란스에 들어가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미 상황 자체가 그럴 수 밖에 없는, 선택지라곤 없는 상황에서 찾아오는 유일한 길이죠. 그리고 그걸 의지인지 충동인지 알 수 없는 결심과 함께 선택하는 모습과요. 하지만 어찌됐든 선택은 선택이고, 모든 선택은 결과를 낳습니다.


그렇게 살아온 14년이지만, 마지막 15년째에 문제가 생깁니다. 제국의 비밀요원이었던 알레사를 죽이고 나오미와 만났던 거죠. 그 문제 때문에 허쉬와 만나지만 허쉬는 실수라고 여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칙은 원칙이기 때문에 어머니와의 만남을 파토내버립니다. 그 때문에 토드는 복수심에 나오미의 계획에 동참해버리죠. 그 이후 나오미와 함께 아마란스와 제국의 공멸을 위해 움직입니다. 


토드는 개판에서 가장 강한 캐릭터 중 하나입니다. 싸움이 아니라 살인을 목적으로 한다면 토드 이상의 존재는 없을 정도죠. 15년이 넘는 동안의 암살 경험, 격투 능력, 심지어 지적 능력과 통찰력마저 뛰어납니다. 혼자서 2진이라곤 해도 제국의 맹수우리 속에서 수 십이 넘는 제국의 패밀리를 참살하고 체력이 빠진 상태에서도 바울, 롤프와 연달아 싸우면서도 지치는 기색 없이 계속 싸우는 체력과 근성, 격투 능력은 말이 안 나올 정도입니다. 심지어 몇번은 죽일 기회까지 있었죠.


이런 격투, 암살능력보다 주목해야할 점은 토드의 지적인 능력인데, 롤프에 대해 허쉬와 같은 결론을 내리는 것부터가 상당한 통찰력을 지녔다는 걸 보여주죠. 한스는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것 앞에선 포기하게 되지만 롤프는 자기 한계를 모르기 때문에 계속 덤벼든다고 했던 허쉬의 말과 궤를 같이 하는 판단을 했습니다. 결국 한스가 롤프에게 지고 제국의 총수 자리를 넘길 것이라고요. 이외에도 얽히고 섥힌 알레사, 나오미, 허쉬, 제국, 바스커빌 가문, 아마란스, 롤프에 대한 진실과 본질을 꿰뚫어 보고 롤프, 바울에게 이야기하기도 하죠.


당연 일류 암살자 정도 되면 그만큼 머리도 좋아야 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토드라는 캐릭터는 무력도, 지력도 모두 최고의 캐릭터입니다. 하지만 그런 완성형 캐릭터조차도 자신의 한계를 넘지 못했고, 자신을 얽매는 괴물이라는 과거, 기회를 놓치고 충동적으로 행동했던 사실은 그런 존재조차도 발목을 잡고 결국은 승리, 증명이 아닌 실패와 죽음이라는 결말을 맺게 만듭니다.


그 죽음의 모양이 비참하진 않았으나, 그가 살아온 인생이 비참해진 셈이죠. 단지 어머니를 만나뵙겠다는 일념으로 십 수년이 넘게 남을 죽이고 살아왔지만 돌아오는 건 제국의 패밀리를 죽였다는 낙인이자, 만나고 싶지 않다는 어머니의 본심이었죠. 이미 한번 기회를 놓쳤고, 알레사를 죽인 이후에도 기회를 놓쳤죠. 이번엔 복수심에 자신을 던졌습니다. 의지가 아닌 충동으로.


그 결과 충동과 의지 사이에서 의지를 택한 바울은 모든 것이 불타는 와중에서도 모든 것을 되찾고 영웅이 되며 살아남았지만 토드는 충동과 의지 사이에서 충동을 택했고 모든 것이 불타는 와중에 자신의 증명이 실패로 돌아가며, 그저 악당이 된 채 재가 되어 사라지게 됩니다. 그도 이렇게 될 걸 알았을까요? 아니면 자신의 죽음을 직감했을 때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내려놓았을까요. 그의 죽음은 너무나도 담담했죠. 단지 현실인식이 빠르고 정확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마치 이렇게 될 줄 알았거나, 이렇게 되자 자신도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었던 자신이 틀렸다는 사실을 곧바로, 그저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은 이제 무대 뒤로 싸늘히 사라지고, 이제 무대 밖 새로운 무대에 서게 될 바울에게 진심 어린 조언과 충고, 그리고 쓸쓸한 자조의 감정을 내비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선택하기에 가장 힘들었던 환경 속에 있었던 캐릭터였던 것도 사실이긴 하지만, 충동과 의지 사이에서 생각하지도, 고민하지도, 고뇌하지도 않고 그저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면서 충동적으로 선택해온 것도 사실입니다. 단순 도구적 암살자로서 살아올 땐 판단은 자기가 하는 게 아니라고 했지만, 복수를 마음먹고 키 플레이어 중 하나로 활동할 땐 자신이 판단한다고 태도가 변했듯이요. 그 판단의 밑바탕이 스스로의 의지가 아니었을 뿐이지. 바울은 노력했고 고민했으며 고뇌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방황도 했고 충동에 빠져본 적도 있죠. 그래도 두번째 기회에서 바울은 그 기회를 잡았습니다. 충동이 아니라 의지로. 다만 토드는 그러지 못했죠. 그저 절박함과 복수심에 충동적으로 기회를 내던졌을 뿐..




알레사, 나오미의 경우.


나중에 밝혀지는 큰 반전 중 하나지만, 알레사와 나오미는 쌍둥이었고, 둘이서 한 사람을 번갈아가며 연기했던 겁니다. 제국의 스파이로 아마란스 내에서 활동하며 오래 들키지 않았던 이유였죠. 제국의 비밀 멤버로서 허쉬의 지령을 받고 버려진 허쉬 자신의 아들, 롤프를 거두어줍니다. 이때 롤프는 알레사에게 큰 은혜를 입고 그걸 갚고자 했죠. 


하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서 알레사는 암살 대상에 오르게 됩니다. 같은 아마란스의 간부들이 알레사를 견제하기 위해 아예 암살해버리고자 하는 계획을 세웠고, 토드에 의해 실행되기 전에 토드는 허쉬의 재가를 얻어야 했습니다. 허쉬는 실수라고 여겼지만, 실은 딸인 르넨이 알고서 명단을 섞어 놓은 거였죠. 토드와 같은 판단을 내리면서요. 머물 곳이 없어지면 돌아올 거라고..


실제로 암살은 성공합니다. 비가 내리는 날, 헤스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갔다가 알레사는 암살 당하고 말죠. 그리고 살아남는 건 조금 뒤에 도착한 나오미였죠. 그걸 본 토드는 크게 당황하게 됩니다. 아마 처음으로 느끼는 죄책감이었을 겁니다. 자신이 죽인 사람을 다시 만나게 되는 상황. 알레사와 똑같은 얼굴을 한 나오미를 보고 말입니다. 결국 토드는 나오미 또한 처분하지 않고 허쉬를 만나러 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허쉬는 실수라고 밝힌 것에 실망하고 이제 이 짓은 그만두겠다고 말하며 돌아서려고 했지만, 같은 제국의 패밀리를 건드렸다는 이유로 어머니를 만나게 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또한 그 어머니인 사라가 만나고 싶지 않다는 것도 밝히면서요.


나오미는 토드에게 자신의 혈육이자 쌍둥이, 자신의 반쪽인 알레사를 죽게 만든 제국도, 아마란스도, 그리고 토드 또한 파멸시킬 거라고 공언하지만 혼자선 힘들죠. 물론 토드 또한 복수는 혼자서 힘듭니다. 그래서 나오미의 계획에 동참해버렸죠.


토드는 그걸 위해 간부 세명을 죽여줬고, 그 이후로 나오미와 함께 같은 목적을 지니고 행동하게 됩니다. 나오미는 여전히 알레사의 캐릭터를 연기하며, 혼자서 남들은 부르는 그 이름을 못 부른 채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며 지냅니다. 하지만 의외의 복병을 만났죠. 헤스터. 헤스터의 감각은 특별했고 그녀는 함부로 행동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8년을 기다렸죠. 


이 부분이 중요한 부분입니다. 나오미는 아주 간단한 함정으로 헤스터를 쓰러뜨리고 누명을 씌웠습니다. 그리고 바스커빌에 의해 죽게 만들었죠. 그렇다면, 나오미는 8년 동안 정말 헤스터를 넘지 못했기 때문에 대치 상태로 있었던 걸까요? 나오미는 토드가 롤프를 죽일 거라는 걸 알았습니다. 하지만 롤프가 죽길 바라진 않았죠. 그를 사랑했기 때문일지, 토드가 롤프를 죽일까 두려워 간부 셋이 죽은 다음날 허쉬와의 통화를 하며 롤프가 살 수 있는, 그리고 허쉬 자신이 죽을 수 밖에 없는 비책을 알려줍니다.


나오미는 그렇게 8년을 기다렸습니다. 검은개가 안달이 나기 전까지 계속이요. 어쩌면 나오미는 그런 생활을 즐겼을 수도 있습니다. 즐겼다는 표현이 맞는 진 모르겠지만, 롤프와의 생활이 좋았던 건 사실이라고 봐야겠죠. 그래서 떠날 때 되자 그를 안아준 거고요. 이게 그를 속이려는 행동이었을 지, 아니면 진심의 발로였을 지는 개개인의 판단에 따르겠지만, 전 후자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헤스터가 감각이 뛰어나고 나오미보다 몇 수 앞섰다곤 하지만, 어렵지 않게 처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러지 않고 8년 동안 지내왔죠. 그래서 정도 많이 들었고요. 그러다 결국 토드가 안달을 내자 그에 등 떠밀려 계획을 진행시킬 수 밖에 없었던 겁니다.


그렇게 등 떠밀리자 결국 모든 일이 시작된 거죠. 바울을 영입하고, 토드와 함께 발 맞추어 연기를 하고 제국과 아마란스를 공멸시킬 섬세한 계획을 진행합니다. 그 동안 모두들 진심으로 나오미를 위해 살았습니다. 그러다 죽기도 했죠. 코스타는 죽는 순간까지도 알레사를 의심하지 못했습니다. 다른 모두도 끝의 끝에 가서야 진실을 받아들였고요. 그게 진심을 알게 되었다는 것만은 아니지만..


그러면서도 중간에 나오미는 공멸 계획 도중 증발해야 하는 순간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검은개에 의해 다시 전쟁터로 밀어 넣었죠. 그 또한 자신의 업보라면 업보일 겁니다. 또 그 전쟁터에 밀어넣은 토드 또한 그럼에도 죽게 둘 수 없었던 둘과 맞붙게 되고, 그 중 바울에게 죽게 되니, 이 또한 토드의 업보일 수도요. 결국 어떻게 보면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죽음에 다다르게 했던 교두보가 되었던 셈입니다. 아이러니하죠. 제국과 아마란스를 공멸하고자 했던 그들이 서로의 목숨을 앗아가게 만드는 요소로 작용했다는 게.


르넨이 말하죠. 너 진짜 여우였구나? 그만큼 알레사-나오미의 연기는 굉장히 뛰어났습니다. 다 밝혀진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녀의 진심에 대해선 의혹이 없을 수가 없었으니까요. 언제나 중의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상황이 발생하는 개판이라는 작품 속에서, 나오미 그녀는 자신이 살기 위해 문을 열어달라고 했고 그 와중에 롤프의 이름을 대기도 했죠. 아예 그 이전엔 기다릴테니 돌아오라고도 했고요. 결국 나가고자 했으나 문이 잠겨 있어 나갈 수도 없었기 때문에 그녀의 진심은 끝까지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토드도 말했죠. 진실보다 진심이 중요하지 않냐고. 토드는 그렇게 믿었습니다. 진심 같은 건 없었다고. 그리고 그걸 뒷받침하는 상황도, 해석도, 진실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요소들은 역시 그녀의 진심을 알기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떠나는 롤프를 안는 것도, 걱정하는 것도, 기다린다는 것도, 롤프도 안에 있다며 어떻게든 열어달라는 것도, 그리고 눈물도. 개판에서 가장 복잡하고 입체적이며 높은 완성도를 지닌 캐릭터를 뽑자면 다름아닌 나오미라는 캐릭터가 아닐까 싶습니다.


여러번 정주행한 독자조차도 알듯말듯 알 수 없게 만드는 그녀의 행동과 심리를 묘사하는 것이란 굉장히 섬세하고 정교한 작업이고,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관을 짠 것이기도 할 정도로 어려운 난이도거든요. 완성된 작가 현욱이 아니었다면 이런 캐릭터 창조는 어려웠을 겁니다.



넷의 결말.


과거에 시간이 멈춘 나오미와 토드와는 다르게, 바울과 롤프의 시간은 계속 흘렀습니다. 이는 그들이 성장할 수 있었고, 성장했다는 말이 되죠. 바울은 노력의 결과와 추구하던 가치를 얻어냈으며, 자기 자신을 증명했습니다. 레아를 구해내며 영웅이 되었죠. 바울은 성장했습니다. 롤프, 크롬 또한 마찬가집니다. 유약하고 정이 많았던 반푼이 맹수였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조건과 책임을 겪고, 자신과 관계된 사실들을 받아들이며 성장하여 맹수다움을 얻었습니다. 나오미의 죽음에도 위태롭지 않고 굳건할 수 있음을 얻어내며 말이죠.


그러나 나오미와 토드는 그 어떤 진보도 없었습니다. 그저 과거의 복수에 침식되어 그것만을 위해 살아갔죠. 그런 그들이 복수에 성공한다고 해서 얻을 것이란 아무 것도 없었을 겁니다. 복수란 과정을 음미하는 것이지, 그 결과에 취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복수에 성공한 뒤 그들은 끝 없는 갈증과 방향도 목적도 알 수 없는 갈망, 그리고 최종적으로 허무만을 느낄 겁니다. 그것에 어떠한 발전도 진보도 없죠. 그러나 사랑과 증오의 싸움에서 사랑이 이긴다는 말처럼 그들의 복수심과 증오는 성공하지 못했고 패배했습니다.


그들은 궁극적인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목전에서 실패해버렸죠. 다름아닌 그 자신들의 한계 때문에요. 발전할 수 있는, 미래를 보고 살아갈 이들이 나오미에게 배신을 당했다는 과거에 침식되지 않고 극복하고자 했고, 최종적으로 자의든 타의든 극복하게 되었죠. 말했듯, 바울은 승리했고, 롤프는 맹수가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이 하루아침에 바뀐 건 아닙니다. 토드의 말처럼요. 세상이 걸린 전쟁이 아닌 자기들끼리의 싸움이었고, 자기 자신을 극복하고 인정하는 과정이었습니다. 변하는 것은 세상이 아닌 자기 자신들이었죠. 무언가 변했지만, 그것이 무엇인가를 확실하게 말할 순 없습니다. 그저 그것을 느끼며 받아들이고 인정하며 살아가는 거죠. 그렇다고 아무 의미 없었던 건 아닙니다. 오히려 누구보다 큰 의미와 가치를 손에 거머쥐었다고 해야 맞을 겁니다.


누가 이런 결말을 생각했을까요? 이렇게 되리라 누가 알았을까요. 독자도, 캐릭터들도 몰랐을 겁니다. 그러나 모두가 보았고, 느꼈으며,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런 결말이었습니다. 작품적으로도, 캐릭터들의 인생으로도 말입니다.



총평.


완성된 작가, 현욱이 만들어낸 최고의 완성도를 가진 작품. 이 문장으로도 다 담아내기 어렵겠네요. 하지만 이 말처럼입니다. 이런 엄청난 수준의 작품성을 지닌 작품을 이런 완성도와 완전성으로 만들어내는 것은 내노라할 작가들에게도 어려운 일입니다.


짜임새, 구성, 연출, 스토리, 캐릭터 디자인, 작화, 캐릭터성, 메시지, 대사, 인물관계.. 다른 말이 필요 없습니다. 모든 면에서 완벽했습니다. 그야말로 완전한 작품을 뽑으라면 개판 정도가 아닐까 싶은 수준의 작품이었고, 이는 국내외를 포함해 모두 따져봐도 굉장한 수준이라는 건 인정해야할 작품입니다.


현재와 과거, 스토리 진행의 짜임새는 그야말로 완벽했고, 캐릭터 디자인과 캐릭터성은 그 자체로 살아있는 객체이며, 그들간의 유기적이고 짜임새 있는 관계는 하나의 세계속 살아있는 인물들의 얽히고 섥힌 인생 그 자체였습니다.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전개였고, 인물들은 할 수 밖에 없는 반응을 보여줬습니다. 그들의 심리 묘사는 정교하게 그들의 모든 것을 보여줬고, 이는 심리를 알 수 없는 나오미라는 캐릭터에서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이런 살아있는 캐릭터를 만드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닌데, 자기 데뷔작으로(설사 그렇지 않다고 해도) 이런 작품을 만들어냈다는 건 완성된 작가라는 말 말고 뭐가 필요할까요. 다시 말합니다. 모든 면에서 완벽한 작품이었어요.



덧.


작품 중간에 토드의 생모인 사라 바스커빌이 아주 중요한 말을 해줍니다. "필요 없기 때문에 도태되는 것이 아니야.. 사랑 받지 못하기 때문에 도태 당하는 거야.." 우리가 키우는 애완견들은 실제 야생에서 생존하기 어려운 품종들이 많습니다. 너무 약하고, 너무 작기 때문에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도태되어 없어지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주인에게,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기 때문입니다.


잡종 투견이든 암살자이든 그들의 생존은 그들의 필요와 쓰임새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했던 것은 단지 사랑할 수 있는 사람과, 사랑 해줄 수 있는 사람이었던 것이죠. 토드는 암살자로서 종의 정점이었지만, 레아는 새롭다고 했습니다. 그녀가 새로운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레아는 사랑할 수 있고 사랑 받을 수 있는 새로운 존재였기 때문이죠. 바울이 사랑해줬고, 또한 바울을 사랑해줬으니 반푼어치 잡종 투견이든 암살자 가문의 바스커빌 혈통이든 서로 도태될 일은 없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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