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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며,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 - E.Kant
by Ko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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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자도생 사회란 무엇이고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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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아시안게임 축구 중국전이 펼쳐지던 중



어느 유저가 다음에 중국 응원 숫자가 훨씬 많은 것을 발견함


이에 대해 XX 유저들은 다음을 중국이 먹었다



중국 본거지다, 원래 다음은 중국인 소굴이었다는 식으로



근거없는 원색적인 비난을 쏟아내기 시작함

다음은 한국 포털이 아니냐고 기사가 나오는 지경에 이르고



어느 유저는 다음을 중국인이 먹은 이유에 대해



무려 수천만의 중국 일용직들이 중국 정부의 지원을 받고



한국 인터넷을 먹었다(!)는 음모론을 주장하기에 이름




 

 

띠용?



바로 전 경기때는 키르기스스탄이 훨씬 응원이 더 많았네?



그럼 한국 인터넷은 키르기스스탄이 차지한건가?


어? 이때는 사우디가 더 많았네?



사우디가 오일머니로 인터넷을 장악한건가?


????????



롯데랑 기아가 팬이 많다고는 하는데



대한민국 인구 숫자를 넘겨버렸어...???















그렇다



뒤의 사진들을 보면 알겠지만



애초에 중국이 인터넷을 장악했다는건 실체가 없는 헛소리고



그냥 매크로 돌려서 트롤링하는거였음


경기가 있을때마다 다음의 취약한 사이트 구조를 이용해



매크로를 돌려서 중복 투표를 해서 규모를 늘릴 뿐인데



이에 전부 낚여버리고 추천수 1~2천을 찍으며



사이트 정비를 못했을 뿐(...)인 다음 사이트를



중국인이 먹고 차지했다며 근거 없이 욕한 것이다

 

차이나 게이트 시즌2

 

 

https://bbs.ruliweb.com/community/board/300143/read/63231532

 

 

대한민국의 사회불안과 혐오선동의 본진은 보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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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침 경고’ 황상무, 사퇴 대신 4줄 사과문…민주 “당장 경질해야”
https://www.hani.co.kr/arti/area/chungcheong/1132526.html
“농담이라는데 섬뜩” 기자·PD 현업단체도 ‘회칼 테러’ 황상무 사퇴 요구
https://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316668

 

 

 

 

본인 입으로는 정보사(웃음)이라며 있지도 않은  스펙과 권위에 기대고 있지만 실제론 방위병 6개월 상병 전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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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공천’ 보도 국힘보다 2.5배 많았다: 2024 총선 포털뉴스 분석 (2월 넷째 주)
https://slownews.kr/105028


더불어민주당 공천 보도가 국민의힘보다 2.5배가량 많으며 쏠림 현상 지속
선거보도 3건 중 1건이 민주당 ‘공천 논란’으로 부정적 이슈 비중 높음
국민의힘 공천 보도는 ‘공천 결과’ 단일 이슈로써 대부분 단순중계 방식임
더불어민주당에 가장 부정적 이슈인 ‘반발 탈당’은 TV조선이 가장 많이 보도
KBS는 선거-정당 보도량이 MBC, SBS보다 여전히 적어 총선회피 경향 지속


1. 총선보도 3건 중 1건은 민주당 공천 논란
2. 민주당 공천보도, 노출시간 보도건수 앞질러
3. 민주당 ‘공천 파동’ 프레임
4. 국민의힘 공천 결과 단순중계 방식
5. 윤석열 대통령 총선용 활동 부각

(중략)

 

2찍, 중도병 환자들이 흔히 말하는 것처럼 언론은 민주당에게 적대적인 게 아니라 민주당과 지지자들의 정신병이다, 보수에게 불리한 언론 환경이다는 사실이 아니며, 이처럼 민주당에만 유독 불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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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리뷰는 작품에 대한 내용누설이 있습니다. 

 

장 바티스트 그르누이의 첫 살인은 태어난 직후였고, 피해자는 어머니였습니다.

 

물론 그것이 그르누이의 의도나 목적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어머니의 무책임한 존속살해를 거꾸로 돌려버렸죠. 그러나 부모가 없는 고아인 그르누이는 고아원에 가게 되었고, 두번째 살해 시도에서 또 살아남은 뒤 무두상에게 팔려가게 됐습니다.

 

그리고 그 직후, 유모는 강도에게 살해당했죠. 그리고 몇년 뒤, 무두상은 다년간 가혹한 작업 환경에서 살아남은 그르누이를 인정하고 좀 더 나은 일을 시킵니다. 그리고 그르누이는 자신의 재능, 냄새에 극히 민감한 것이 찾은 진짜 첫번째 갈망을 마주하게 됩니다.

 

바로 미녀의 향기였죠. 본래 무두된 가죽을 파는 것을 도와주기 위해 따라갔지만, 그는 홀로 처녀를 따라갔고, 그 향기에 취해 우발적으로 그녀를 죽이게 됩니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게 그의 손으로 이루어진 진짜 첫 살인이었죠. 그리고 그르누이는 죽은 그녀의 옷을 찢고 자기가 갈망하는 향기에 흠뻑 취하게 됐죠.

 

처녀의 아름다운 알몸을 탐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르누이에게 여성이란 향기를 담은 매개채일 뿐 여체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습니다. 죽은 처녀의 몸 구석구석 코를 박고 향기를 맡았지만, 죽은 자는 썩기 마련이고 생기를 잃으며 향기 또한 떠나가게 되는 법, 그르누이는 사라져가는 향기를 어떻게든 챙기기 위해 손으로 퍼담으며 콧속에 밀어넣지만 시체는 시체였습니다.

 

돌아온 그르누이는 개처럼 얻어맞지만 육체의 고통은 지난 저녁 겪었던 환상적인 경험에 더더욱 강력한 갈망에 빠지게 됐습니다. 그러다 지난 날 보게 되었던 향수 가게에서 알게된 것처럼, 그는 여인의 향기를 담고 싶어 했습니다.

 

그르누이는 가죽을 퍼퓸 마스터 주세페 발디니의 가게에 배달하러 갔고, 그가 향수 제조사인 걸 알고, 무엇을 만들고 싶어하는지 아는 그르누이는 자신의 재능을 뽐내며 그가 원하는 것, 시장에 풀린 경쟁자의 최고 상품을 즉석에서 만들어 냅니다. 그리고 발디니는 그르누이를 필요로 하여 무두상에게 은화 50개를 값으로 치르고 자신의 제자로 삼죠.

 

그러나 무두상은 사고를 당해 곧바로 죽게 됩니다. 마치 이전 유모처럼요.

 

그 뒤로 그르누이는 뛰어난 향수를 만들어내며 엄청난 성공을 안겨줍니다. 그러나 그의 갈망은 단순히 좋은 향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향기를 담는 것이었죠. 처음 발디니에게 찾아갔을 때, 그는 향기를 온전히 담는 것을 원했습니다. 그리고 그건 모든 사물에 해당되는 말이었죠. 그리고 그 중 최고는 그의 갈망. 아름다운 여인의 채취였습니다.

 

발디니는 향수 제조법을 그르누이에게 가르쳤고, 그 중에서 12개의 향수 조합을 알려주며 전설 속의 13번째 재료를 이야기해줍니다.

 

그르누이는 발디니에게 배운 향수 제조법에 따라 사물의 냄새를 담아내려 했지만 그건 오직 꽃의 향기 뿐, 구리나 돌, 심지어 고양이의 냄새조차 담지 못합니다. 결국 그는 자신의 갈망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죽어갔고 발디니에게 들은, 그라스의 향수 제조법을 알게 되며 그곳으로 떠납니다.

 

그리고 그날 밤, 수백개의 향수 제조법을 남기며 떠난 그날 성공의 꿈을 꾸던 발디니는 이전부터 흔들리던 건물이 마침내 무너져 죽게 됩니다. 유모, 무두상과 마찬가지로요.

 

그라스로 떠나는 그르누이는 산, 정확히는 동굴 속을 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곳은 돌 냄새를 제외하면 그 어떤 냄새도 없는 특별한 곳이었죠. 그곳에서 거지꼴이 될 때까지 지낸 그르누이는 어느날 한가지 사실을 자각하게 됩니다. 바로 자신에게는 채취가 없었다는 걸요. 

 

그르누이는 그곳에서 일을 하며 천천히 준비하게 됩니다. 그라스의 향수 제조업자의 제자가 되어 냉침법을 공부하면서요. 그리고 그곳으로 가던 중 보게 된 로라라는 아름다운 여성을 보았고, 그녀를 찾게 됩니다. 어렵진 않죠. 냄새를 따라가면 되니까요.

 

충분한 실험과 준비 끝에, 그는 사회에서는 범죄라고 부르는 행위를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냉침법으로 향기를 뽑아내려 했지만, 실패했고 기름을 먹여 향기를 빼내는 방법을 시도했고, 성공하게 되었죠.

 

그리고 그의 범행은 꾸준히 성공했습니다. 천재적인 후각을 가지고 있는 그르누이는 남들의 시선을 피할 수 있었고, 개와 같은 뛰어난 후각을 가진 동물에게도 감지되지 않는 최고의 자객이었죠.

 

앙투안 리시는 아주 뛰어난 인물이었고, 그르누이의 범죄를 추적했고, 그의 마수를 피해 도망가며 거의 성공할 뻔 하지만 결국 그르누이는 마침내 로라의 여관 침실에 침투해 그녀를 살해하고 로라의 향기를 훔치는 데 성공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13번째 전설 속 향기 역시 손에 넣었지요.

 

그리고 감옥 속에서 그르누이는 자신의 몸에 향수 한 방울을 묻힙니다. 그리고 자신의 사형집행장에 도착하죠. 그러나 뭔가 이상했습니다. 마치 고관대작을 다루는 것처럼 조심스럽고 예의를 다하는 이들과, 마차를 타고 온 그르누이는 자신의 데리러온 남자의 화려하고 멋진 푸른 옷을 입고 있었죠.

 

그런 뒤 집행장에서 서자 방금 전까지 집행 연습을 하며 환호를 받던 집행인이 향을 맡은 뒤 무릎을 꿇고, "이자는 결백하다."는 말을 외칩니다.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사람들 앞에서 그르누이는 손수건에 향수를 묻힌 뒤 휘두르자 사람들은 활홀 속에 빠지게 되고, "주교는 이 자는 사람이 아니다. 천사다!"(He's no man. He's an Angel!)이라 외칩니다.

 

그리고 향수를 휘두를 때마다 사람들은 쓰러지고 갈망하고 환호하죠. 그러다 손수건을 놓치자 사람들은 그르누이가 아닌, 향수에 팔을 뻗으며 그것을 가지기 위해 몸을 던져댔습니다. 그런 뒤 극단적 활홀경 속에서 그라스의 시민들은 갑자기 집단 난교를 시작하게 되죠.

 

그럼에도 로라의 아버지, 리시는 검을 빼들고 그르누이 앞에 서서 나는 속지 않는다 하였지만, 코앞에서 느껴지는 향수에 결국 검을 떨어뜨리고 흐느끼며 도리어 사죄하고는, 그를 아들로 칭합니다.

 

그 뒤, 본능적으로 자신이 태어난 어시장을 찾은 그는 자신의 머리 위에 자신이 만든 향수를 들이 붓습니다. 거리의 부랑자들은 그의 몸에서 나는 향기에 매혹되어 달려들어 살점 하나, 피 한방울 남기지 않고 그를 없애버립니다.

 

 

자, 먼저. 그르누이는 몸에 채취가 없습니다. 그러면서 평생을 향기를 갈망하고, 그것을 손에 넣기 위한 목적으로 살아갑니다. 천재적인 후각은 그를 특별하게 만들어줬지만, 그 재능을 추악한 범죄에 사용했죠.

 

그르누이는 탄생부터 운명적 파멸과 함께 했습니다. 자신을 태어나게 한, 그리고 살해하려한 어미를 죽게 만들었고, 그를 길러 준 유모 역시 그가 떠나자마자 죽었으며, 무두장 또한 그르누이를 팔아서 떠나게 끔 한 직후 죽었으며, 발디니 역시 그르누이가 떠난 그날 밤 붕괴된 건물에 깔려 죽었습니다.

 

이는 아주 의미심장한데, 그에겐 돌아갈 곳이 없었습니다. 즉, 고향이 없고 보금자리가 없습니다. 그때그때 자신이 머무는 곳은 있었지만 그 어떤 곳이 그르누이가 소유한 곳이 없었고, 집으로 삼을 만한 곳도 아니었습니다. 직업이 있었고 머무는 곳은 있었지만 언제든, 또 언젠가 떠날 곳이었죠. 그는 진실로 태어난 이후 그 어디에도 속한 적 없는 존재입니다. 가족, 직업, 사회 속에서 철저히 유리된 아웃사이더였습니다. 마치 없는 사람처럼요. 그가 채취를 가지지 못한 것처럼.

 

채취가 없다는 것은 자기만의 고유한 무언가가 없다는 것입니다. 향기와 냄새를 메인 텍스트로 삼는 영화답게 그것은 매혹적이거나 필수적인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장바티스트 그르누이는 그런 게 전혀 없죠. 태어날 때부터 채취 없이, 냄새 없이 태어났습니다. 모두가 가지고 있으니 오직 장바티스트 그르누이 단 혼자서만 없는 것.

 

그는 세상 모든 사물이라면 가지고 있는 것을 잃은 채 태어난, 냄새로 작성된 세계 속에서 유일하게 세상에 없는 사람입니다.

 

천채적인 후각은 그에게 감미롭고 황홀한 향기에 대한 갈망을 낳았고 그것에 대한 강력한 소유욕을 낳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냄새를 가지고 싶어 했고, 그걸 독점하고 싶어 했습니다. 영원히 타인의 향기를 가지고 싶어 했죠. 스스로의 손으로 저지른 첫 살인 당시 그는 죽어가는 여인의 시신에서 사라져가는 향기를 그러모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사라져가는 향기에 절망하고 말았죠.

 

그러한 갈망이 더 뛰어난 향수 제조법을 추구하게 만들었고, 그것을 실험하기 위해 윤리나 도덕 같은 것은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못했습니다. 그건 사회에 속해 있는 사람에게나 적용되는 것이지 그르누이는 사회에 속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가 직업을 가지고 누군가의 밑에서 일한다 하여 사회에 속한 게 아닙니다. 본질적으로 인간으로서의 고유한 것을 가지지 모했고, 단 한번도 자기만의 적을 둔 적도, 뿌리를 내린 적도 없으며, 돌아갈 곳도 없는 그는 사회 속 무적자(無迹子)이기 때문이죠.

 

그렇게 스스로 사회 속 사람이 아닌 그르누이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만들기 위해 어떤 짓이든 할 수 있었고, 해야만 했습니다. 그것이 그가 태어난 이유이니까요.

 

그는 은밀하고 비밀스럽게 사람을 죽이며 그녀들의 향을 훔쳐갑니다. 모두 아름다운 처녀들 뿐이었죠. 오직 그들에게서만 채취할 수 있는 향을 모았습니다. 그라스는 그르누이의 희생자들이 발견되며 공포와 공황으로 빠져들었습니다. 위태롭고 속도감 있는 연출이 일품으로, 위기감이 고조되는 것을 잘 연출했죠.

 

그리고 리시가 로라와 함께 도망간 이후의 주인공 역시 오직 냄새로만 추적했고, 은밀하게 로라의 침실에 침입하는데 성공합니다. 여기에서 개조차 그의 채취를 느끼지 못합니다. 또한 리시가 꿈을 꾸고 일어나며 로라의 안위를 확인하는 것으로 한번 관객의 긴장감을 희석시킵니다. 그런 뒤에 로라의 침실에 다시 한번 침입한 그르누이를 쳐다보는 로라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아침이 되고, 리시는 로라의 방문을 열고 안위를 확인합니다.

 

이때의 연출이 좀 유치하긴 한데, 07년도 영화임을 감안하면 넘어갈 수 있는데, 나체로 사망한 로라의 모습은 작중 내내 아름다움이 강조되는 것과 대비되는 비참한 모습으로 관객에게 충격을 주는 완급 조절이 이루어집니다. 그르누이는 피해자의 향을 훔치기 위해 머리카락마저 깍아냈는데, 로라의 아름다운 적발이 깍인 채 나체로 침대 위에 쓰러진 모습은 어떤 면에서는 예술적이었지만, 그 그림이 아름다웠다기 보단 그 대비가 강렬하게 다가왔습니다.

 

체포된 이후의 그르누이에게 리시가 다가와 강렬한 증오를 통보하지만 그르누이는 13번째 재료를 이용해 전설적인, 또는 악마적인 향수를 만들어냈고, 사형 집행 당일 그것을 단 한 방울 뿌림으로서 자신을 데리러온 자들을 자신에게 매혹시킵니다. 심지어 자신이 입고 있던 옷까지 내주면서요.

 

이 지점이 꽤 중요한데, 그는 자신이 입은 옷마저도 벗고 타인의 옷을 입었습니다. 이제 진정 그의 모습은 존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옷을 버리고 타인의 옷을 뒤집어 쓴 그는 그저 가죽을 뒤집어 쓴 그림자와 다를 게 없었죠. 자신의 향수를 몇 방울 써 현장을 황홀경의 광란으로 만들어버렸지만, 정작 그는 그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하고 관심 받지 못하는 자임을 알게 됐습니다.

 

향수를 묻힌 손수건을 놓쳤을 때, 사람들은 그에게 매혹된 게 아니고, 그에게 사랑과 관심을 보낸 게 아니었으며, 그를 갈망한 게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난교의 현장으로 변한 곳에서도 강렬한 증오로 칼을 빼든 채 다가오는 리시에게 저항 없이 몸을 열어주었으나 리시조차 그의 향에 매료되어 도리어 자신의 딸을 죽이고 빼앗은 범인에게 무릎 꿇고 사죄한 뒤, 그를 아들이라 칭합니다.

 

그러나 이미 그는 알고 있죠. 그가 사랑한 것은 자신이 아니라 자신의 몸에 남아 있는 향수의 잔향이라는 것을.

 

그렇게 그르누이는 이 세상에 자신이 있을 곳도, 뿌리 내릴 곳도, 자신을 자신 그대로 알아봐줄 곳이 없다는 걸 깨닫고 마치 본능처럼 자신이 태어난 곳으로 돌아갑니다. 그곳에서 머리에 모든 향수를 쏟고는 달려드는 사람들에게 찢겨 죽죠. 그야말로 그 어떤 것도 남기지 않은 채.

 

그저, 자신이 뒤집어 입은 타인의 옷가지만 남긴 채 이 세상에 단 한번도 존재한 적 없었던 것처럼요. 그가 남긴 족적은 있을지언정, 그 주인이 누구인지는 이 세상 누구도 모를 일이 되었습니다. 채취 없이 태어나 냄새를 남기지 못한 그가 세상에서 가장 향기로운 향을 입었으나 그것은 자신의 것이 아니었고, 사람들이 원한 것은, 사람들이 바라본 것은 자신이 아니라 그저 향기 뿐이었으니까요.

 

다시 한번, 장바티스트 그르누이는 뿌리를 내린 적 없고, 내릴 수 없는 파멸적인 운명을 타고 났습니다. 보금자리가 없고 적迹이 없죠. 그런 의미에서, 그는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태어난 것 같은 인상을 줍니다. 마치, 시대의 어느 순간 어떤 것을 단 한번 만들기 위한 목적으로 태어나 목적이 다 하면 사라지는 그런 도구적 존재로요.

 

그는 향수 산업이 태동하고 발전하던 시기에 태어나 어떠한 물건, 세계에서 가장 치명적이고 매혹적인 향수를 단 한번 만들어보기 위해, 우주에 그러한 것이 있었음을 단 한번만이라도 기록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에 불과한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그는 세상에 무언가를 남길 필요 없었고, 머물 곳이 있어서도 안 됐습니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천재적인 후각을 타고 났고, 그것에 순수해야만 했죠.

 

향기를 담기 위해 불순물인 자신의 냄새마저 있어서는 안 됐고, 돌아갈 곳도, 뿌리 내릴 곳도 있어선 안 됩니다. 그가 운명을 달성하기 위해선 어떤 위협과 위기가 있어도 반드시 이겨낼 수 있었고, 이런 면에서 영웅 서사와 유사한 흐름이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마침내 달성하고, 그것을 세상 앞에서 증명한 뒤에 그의 모든 쓸모가 다하고 나서 그는 마치 이 세상에 단 한번이라도 존재한 적 없는 것처럼 뼛조각, 피 한방울 남기지 않고 세상에서 사라지면서 끝나죠.

 

 

그러한 쓸모를 '신의 사역'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꽤 재밌는 점이 있습니다. 신의  사역하심으로 인해 죽어야할 자가 결코 죽지 않았고, 그를 학대하거나 착취하려던 악인들은 모두 벌을 받고 죽었습니다. 주인공인 그르누이에 의해 살해 당한 사람들은 있지만, 그가 직접 죽인 사람은 그의 모친을 포함해서 모두 여자였죠.

 

성경에서 롯은 신과 악마의 내기로 인해 가족과 가축을 잃고 고난을  겪어야 했죠. 이처럼 신의 사역에 무고한 주변인의 죽음은 억울한 게 아닌 제나름의 가치를 지닙니다. 물론 현대인의 관점과는 좀 거리가 있죠. 그렇기 때문에 사회 속에 속하지 않은 아웃사이더 그르누이의 살인은 인세의 관점으로 평가할 수 없게 됩니다.

 

또한 사형 집행 당일 사형 집행자는 그를 보고 결백하다(He's an inocent!)고 했고 추기경은 그를 보고 천사라고 합니다. 가장 비천하고 천시 되는, 사람의 목숨을 끊는 자가 결백을 증언했고, 신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 중 하나인 추기경이 직접 천사임을 선언합니다. 그르누이가 신의 사역을 받는 자이기 때문에, 인세의 법률에 구속받지 않으며, 신의 역할을 수행하는 선택된 도구라면 그는 결백한 것이 맞고 천사와 같은 신성한 권위를 지닌 존재로 해석될 수 있다는 거죠.

 

 

스토리를 벗어나서 바라보면, 주인공 역할을 맡은 벤 위쇼의 위태로운 연기는 상당히 좋았습니다. 조용하고 조심스러우나 악마적으로 과감하기까지 한 행동과 표정 연기는 그의 과묵한 모습과 함께 관객을 몰입시킵니다.

 

이제는 고인이 된 알란 릭맨의 엄격한 귀족적 모습의 연기 또한 무게의 한 축을 담당했고요.

 

그러나 향수라는 주제를 가지고 향기라는 매체를 중심으로 풀어가면서도 그것에 대한 시각적 연출은 매우 부족했다는 점에서 많이 아쉬운데, 원작을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향기, 혹은 맛과 같은 감각을 시각적으로 풀어내는 작품들이 꽤 있었고 연출에 따라 매우 강렬한 경험을 간접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영화는 서사적 측면을 강조했을 뿐 향기 그 자체에 대한 미학은 기억에 거의 남지 않습니다.

 

그저 후반부, 향기에 따른 반응이 너무 강력해서 의도적인 게 아닐까 싶은 점도 있고요. 도리어 주인공의 천재적인 후각을 강조하는 모습을 더 중점적으로 보여주는 경향을 보여줍니다. 의도적인 거라면 다소 아쉽지만 후반부의 클라이막스를 위해 연출을 아낀 거라고도 해석해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아쉬운 건 아쉬울 수밖에 없는 연출적 한계를 지닙니다.

 

원작에서는 향기에 대한 묘사가 매우 충실하고 풍부하다고 하는데, 원작을 아는 사람이라면 매우 아쉬울 수 있겠지만, 단순 영화만 감상하겠다면, 연출적 부분보다는 서사적 지점에 집중한다면 원작이 있다는 점을 감안해도 상당한 짜임새가 있는 영화로 재밌게 볼 수 있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살짝 높은 점수를 주기엔 다소 아쉽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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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은 쓰는 것에 의미가 있고 지키는 것에 의미를 둬선 안 된다. 쓰이지 못하는 권력은 그 자체로 도덕적이지 못하고 문제적이다. 권력을 가진 자는 그것을 행사해야 할 필요를 요구 받고, 어떠한 결정, 판단, 결재, 거부, 임명 등 다양한 부분에 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조직은 필요한 조치들이 작동하지 않게 되고 이는 그 조직의 발전과 역량을 저해하는 것을 넘어 생존에 위협이 될 수 있다. 

그것을 적극적으로 행사해야 할 필요까진 없지만 필요한 권력을 적합하게 행사하는 것은 권력을 가진 자가 해야 할 필수적인 덕목이다. 앞서 권력을 지키는 것에 의미를 둬선 안 된다고 했지만 이는 권력을 그 자체로 지키기 위한 목적으로 쓰는 것을 의미한다. 어떠한 적합한 행사를 하는 것을 거부한 채, 그 권력자의 부덕함과 필요성을 부정한 뒤 새로운 사람을 그 자리에 올려 그러한 권력을 행사하게 해야 한다는 움직임을 방해하는 것은 역시 비도덕하고 문제적이다. 즉, 의무나 책임보다 감투를 지키는 자의 권력을 말하는 것이다. 

권력은 적합한 사람이 적절하게 행사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잘못 행사되거나 행사되지 않을 것이다. 권력을 가지고 행사할 의지도 있으나 무엇을 어떻게 행사해야할 지 모르는 사람도 있다. 부적절한 인사인 셈이다. 권력도 써본 사람이 잘 쓰는 것이고 써본 경험이 있어야 더 큰 권력을 다루는 법을 알게 된다. 능력과 경험에 비해 지나치게 큰 권력을 위임하는 것 역시 문제적이고 능력 있는 자에게 아무런 권력도 주지 않는 것 역시 문제적이다.

모든 사람들은 제각기 크고 작은 권력을 지닌다. 작게는 학급에서 주먹과 카리스마, 리더쉽으로 얻는 권력이나 반려동물간의 수직적 관계가 있을 수 있고, 가정에서 부모가 가지는 권력이 있다. 판매자와 구매자의 관계도 있으며 대통령과 각 부 장관의 관계나 사장, 혹은 대표와 직원들의 관계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것들 중 어떠한 관계는 권력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것들이 있다. 그것은 권력이라기 보단 의무에 가깝기도 하고 어떠한 사회적 관계와 다른 자격과 소양을 요구하는 관계도 있다.


사회구조적 관점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떠한 권력도 얻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이는 구매자-판매자의 관계나 고용주-직원의 관계와도 다르다. 후자의 경우 어느 정도 관계가 있을 수는 있다. 그러나 지금 말하고자 하는 것은 좀 더 큰 층위에서의 이야기이다. 가령, 인종차별이나 성차별적 관념에서 이루어지고 형성되는 것을 말한다. 진짜 권력을 가져본 적 없고 그런 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의 경우 내세울 수 있는 자부심이나 정체성이 부족하다. 


그렇기 때문에 생득적으로 부여되는 정체성으로 자신의 권력 구조를 형성시키길 바라는데, 피부색에 따른 우열로 인종차별을 가하며 권력 관계를 형성시키는 경우나 성별을 근거로 이성을 열등하고 나약하며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 존재로 격하시키는 경우가 그러하고, 민족에 따라 우열을 설정하는 경우가 그러하다. 이것은 실질적 권력 관계는 아니지만, 그것을 추구하는 성향 내지는 믿음에 따른 행사이다.

대부분의 인종차별주의자, 성차별주의자와 같은 이들이 대부분 저학력, 저소득자인 이유는 그들이 단순히 못 배웠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들보다 더 열등한 자들을 멸시하고 공격하며 자신의 사회적 층위에서 가해지는 스트레스를 해소하고자 함에 가깝다.

이는 노비가 해방될 때 양반이 아니라 양민들이 반발했던 것과 유사한 이유이다. 물론 그들에게 노비가 자신들과 맞먹으려 든다는 계급 반역적 현상을 거부하는 것 역시 결코 작지 않은 이유일 테지만, 아래로 가해지는 계급적 스트레스를 해소할 창구로 최하층민의 존재는 어떤 면에선 위안적일 지경이다. 또한 전근대적 사회엔 대체로 이러한 역할을 담당하는 받이용 계급이 존재하곤 한다.

그러나 현재 대부분의 사회엔 명시적 계급이 존재하지 않고, 다양한 이해관계와 이데올로기가 만들어져 있으며 더 다각적이고 복합적인 사회가 되었다. 전근대적 관념은 사멸하지 않았으나 다른 형태와 밀도를 가지고 있고 다양한 이유로 차별과 혐오가 발생한다. 저소득 하층민들에게 그들이 가장 밑바닥이 아니며 가장 쓸모 없고 무가치하지 않은, 자존감과 정체성을 무너뜨리지 않는 무언가가 필요하다. 

그들이 표심으로서 정치적 향방을 흔들 수 있는 존재가 되었을 때, 그것이 미디어와 진짜 권력자에 의해 유도되고 조장되었다곤 해도, 그들은 비로소 권력을 가지게 된 것과 다름이 없으며, 적어도 그들의 요구나 한 표가 실제 결과로 증명되었을 때 그들은 그렇게 믿을 것이다.

 


문제는 이것이다. 그들은 권력을 가져본 적도 없고, 행사해본 경험이 적다. 그들은 권력이 무엇이고 어떻게 써야 하며, 누구에게 줘야 하는지 등을 알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권력을 가지고 있을 뿐 그것을 쓰는 방법은 지나치게 원초적이다. 그들은 장기적이거나 생산적인 비전을 가진 게 아니고 그런 것을 구체적으로 요구하지도 않고 할 수도 없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보다 더 우월했으면 하는 것이고, 그들이 낙인 찍은 적을 몰아내거나 싸워서 물리치거나, 죽여 없애는 것이다. 

즉, 그들이 진짜 권력을 가지고도 그것을 어떻게 써야 하는 줄 몰라 써선 안 될 방식과 방향으로 그것을 휘두르는 것이고, 그렇게 하라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그들이 선거에서 행사하는 권력, 민주적 요구는 차별적이고 혐오에 근거하고 있는 셈이다. 좌파 빨갱이를 몰아내야 한다는 둥, 흑인들이 권력을 잡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둥, 이민자를 쫓아내야 한다는 둥, 여성의 사회적 진출보다 가정에 충실할 것을 요구하는 등의 것 말이다.


민주주의에서 모든 국민은 국가의 권력을 가진 자들임에도 왜 그들은 권력을 가진 적 없으며, 그렇게 느낄까? 바로 실제로 그렇기 때문이다. 정치인들에게 요구하는 이들 중 월 180만원을 벌며 대출 빚이 1억이 있는 가정의 고졸의 말보다 대기업 회장의 말이 더 강력하게 작용할 것이고, 지방 전문대 출신 직장인보다 인서울 재학생의 발언이 더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돈이 있고 권력이 있는 자들, 엘리트들은 그들의 돈과 권한, 인맥을 통해 사회적 분위기를 움직일 수 있다. 

특정한 의제를 공론화 시킬 수도 있고, 묻을 수도 있고 물타기를 하며 바꿔치기를 감행할 수도 있다. 특정 직종의 이권을 보호할 수도 있고 위협할 수도 있다. 그들의 규모는 국가에서 n%에 불과하거나 그 이하일 것임에도 그들의 힘은 국가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위 층위자는 언제나 권력 관계에서 을의 입장이었다. 누군가에 의해 고용이 되었고, 결코 높은 자리라 할 수 없는 위치에 있다. 그들은 사회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타인의 존경과 존중을 받기에 어려운 위치에 있다. 설령 겉으로 그러한 대우를 요구하고, 그렇게 보인다 해도 스스로가 가장 잘 아는 법이다. 그 자신 또한 그랬을 테니까.

그렇기에 그들은 스스로 우월할만한 것을 찾아야만 한다. 그들은 어떠한 이유로든 사회적 성취와 성공에 실패 했으니, 내세울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을 것이기에 가진 것이라곤 태생적으로 가지고 태어난 것. 스스로 노력하거나 얻어내지 않아도 가질 수 있는 생득적인 것이 공통적으로 선택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데, 인종, 민족, 그리고 성별이 그러하다.

왜 어떤 이들은 여혐 일베나 하고 어떤 이들은 남혐 페미나 하고 있을까? 그들의 사회적 신분과 경제 상황은 어떠할까? 일베는 그나마 더 넓은 범위의 사상을 다룬다.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외교안보적 영역에서 제나름의 세계관을 가진다. 그 세계관의 완성도와 논리성, 합리성이 어떠한지와 별개로 더 다양한 층위와 계층을 포함할 여지와 역량이 있다. 그러한 이유로 일베 류 가치관은 엘리트에게도 입맛에 맞는 논리와 주장을 형성하고, 사회 하층민에게는 더더욱 특별한 사상이 되어줄 수 있다. 

엘리트들은 그들이 우월하며 더 많은 특혜를 받아야할 이유를 말하고, 보수진영엔 진보좌파를 탄압하고 권력을 확보해야할 정당성을 제공해주며, 하위 층위에겐 증오하고 혐오하여 우월한 기분을 느끼게 해줄 것 내지는 공격해도 좋을 적을 제공한다.

 


반면 페미에겐 성차별에서 기인하는 남성 혐오적 정서와 논리만을 제공한다. 그리고 그것은 너무나도 처참할 정도로 부족하고 비합리적이기에 정신병적 증상과 구분되지도 않는다. 그들의 소아병적 펨셀꼴값병은 그들의 사회적 위치와 경제적 상황에서 기인하는 바가 크고, 설령 그렇지 않은 자들에게서조차 기묘한 사상적 중독을 제공한다. 

이는 여성 특유의 여성 편향적 태도의 끼리끼리 문화에서 근거하는 바가 어느 정도 있을 것이다. 여성의 잘못이나 비난에는 같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편을 들어주고 맞서 싸워주는 것, 총체적으로는 여성들 사이에서만 작동하는 공감 능력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이 여성들이 겪어온 차별과 핍박에 따른 약자들의 단합이라고도 할 수 있을지 모르나 그것은 40대 이상 세대에게나 통용될 것이고, 30대 초반 이전의 여성 세대에겐 정당성 없는 주장에 가깝다.

여튼, 이러한 맥락 속에서 사회적 지위나 경제적 상황에 모자람이 없다 하여도 남혐 하는 꼴페미가 될 수 있다. 혐오가 비합리적인 이유에서 기인한다 하더라도 기꺼이 혐오하는 자들은 언제든 어디든 존재할 수 있고, 뻔뻔한 가해자보다 모든 도덕적 정당성을 독점한 선한 피해자가 되고 싶어 하는 졸렬한 피해자도 있는 법이다. 

그들은 남성에게 피해를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피해를 받는 기분이 들기에 피해 망상에 빠진 것이고 누군지도 모를 여성이 남성에게 피해를 받았다고 그것이 자신인 것처럼 이입하여 타자와 자아의 구분을 하지 못한 채 가해자 전체 집단을 사악한 집단으로 매도하기를 즐긴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남성을 증오하고 혐오할 이유이고 명분일 뿐이지 실제로 그들 전체가 사악한 집단인지 아닌지가 중요한 게 아니다. 도리어, 그들이 사악해야할 필요가 있고 그렇게 만들어서라도 공격하고 싶어 한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피해자로서 모든 도덕적 정당성을 독점하고 싶어서 말이다.

그렇게 PC, 페미 진영은 사회적 신분도, 경제 상황도 좋지 못하기에 적을 찾고 낙인 찍어서 혐오한다. 일베 류 가치관보다 더 좁은 범위의 사상을 다루기에 확장성은 떨어지고 합리성은 더더욱 부족하지만 크게 보아 단 두개 뿐인 성별을 기준으로 했기에 단순하고, 단순한 만큼 다른 이해관계를 떠나 이분법적인 구성을 가능하게 해준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PC충 페미 세력은 일베보다 규모가 적다. 단지 더 시끄럽고 노골적으로 문제적일 뿐이다.

페미 진영이 가진 것도 없고 이룬 것도 없기에 그들이 (도덕적으로) 우월하고자 한 근거가 바로 생득적으로 부여되는 성별이다. 여성 혐오적인 남자들의 성차별이 그들이 성취한 것도, 가진 것도 없는 것에서 기인하는 태도였다면 페미 진영의 남성 혐오적 성차별 역시 같은 이유에서 근거한다고 볼 수 있는 셈이다. 

이성 관계에서도 못생기고 뚱뚱한 자신의 모습에 있어 관리를 하거나 다른 매력을 만들고 찾으려는 노력보단 먹고 자는 것만을 즐기던 이들이 자신의 못난 외모를 Do not need a prince라는 표어와 탈코르셋이라는 용어로 일부러 꾸미지 않는다는 둥 자기들 입맛에 맞는 명분을 찾은 것 뿐이지 본질은 게으르고 못생긴 것 뿐이다. 뛰어난 외모를 가진 자들은 타고난 만큼 대단한 노력을 평생 동안 하고 있다는 걸 고려하면 페미 진영은 소아병적인 궤변을 일삼는 것 뿐이다. 그들이 연애 시장에서 왜 선택 받지 못하는 Femsel이 되었겠는가? 그들이 선택 받을만한 매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이 왜 더 나은 경제적 위치에 서지 못했을까? 군대를 가지 않아 최대 2년의 시간에 특혜를 받는데도 말이다. 다른 여자들에 비해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 못했서라도 보는 것이 맞다.

모든 여성이 페미가 아닌 이유는 다른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서도 그들은 노력한만큼 성과를 얻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공부한만큼 성적이 나와 대학을 가고, 노력한만큼 직장을 가져 일하며 돈을 번다. 그들은 사회 생활과 무난한 인간 관계를 유지하는데 에너지를 쏟지 혐오와 차별에 힘을 쏟지 않는다. 수동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차별 정서나 공감대가 있을지언정, 페미라고 하긴 어렵다. 평범한 남성들도 어떤 영역이나 분야에 있어서 성별에 따른 차별적인 피해를 받거나 불합리하다는 생각을 가지곤 있지만 그렇다 해서 여혐 일베충이 아닌 경우가 있듯이 말이다.

그러나 페미들은 그렇지 않다. 사회적으로 성취가 낮고, 경제적으로 성공하지 못한 이들이 많다. 단지 방송국, 유튜브, 기자 등 눈에 크게 띄는 이들이 많아서 착시 효과가 유독 크게 느껴지는 것일 가능성도 있다. 그들이 직장이 있어야 하는 블라인드, 메이플 환불 및 탈퇴 등에서 보여주는 화력을 보면 간접적으로 그들의 수준이 드러난다. 하위에 속하는 자들이 생득적인 요소로 우월감을 얻고 싶어 하는 것이다. 일베가 가해자 내지는 행사자로서의 권력을 추구한다면 페미는 피해자로서 가해의 정당성을 독점하는 것을 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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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위와 같이 알려진 이야기. 한국 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유명하지만.

 

 

[박재항의 反轉 커뮤니케이션] 썌클턴의 전설적 구인광고의 진실
https://www.madtimes.org/news/articleView.html?idxno=4204

'인간은 위대한 여행을 원한다'라는 첫 구절을 보고, 미안한데 웃음이 나왔다. 'Men Wanted'라고 '사람 구함', 곧 '구인'이라고 제목 써 붙인 것을 저렇게 철학적으로 옮겨 놓았다. 그리고 아래에 보니 '헌정된 신문광고'라고 했다. '헌정'이라면 섀클턴을 기리기 위하여 누가 광고를 집행했다는 것인데 이상하지 않은가. 번역된 책의 원저의 원문을 찾아보니 'attributed to Ernest Shackleton'이라고 되어 있다. 섀클턴에 의하여 집행되었다든지 만들어졌다고 'implemented by', ' run by', 'created by' 등의 동사를 쓰면 되었을 것 같은데 왜 굳이 'attributed to'라고 '결부된', '연관된' 식의 모호하게 해석될 수 있는 표현을 썼을까. 

(중략)


광고 자체를 언급한 사례를 찾아서 자료를 뒤진 결과는 놀랍다. 섀클턴이 죽고 거의 30년 가까이가 지난 1944년에 어느 자기계발서 같은 책에서 저 광고가 처음 공개적으로 언급이 되었다. 그를 근거로 1949년에 위대한 광고물 100선을 담았다는 책에서, 그 중의 하나로 저 광고를 선정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1985년 발간된 섀클턴의 전기에 저 광고가 다시 드러나면서 숱한 책들이나 글에 봇물 터지듯 인용이 되어 나타났다고 한다. 그러면 뭐 '헌정'이라고 한 게 'attributed to'를 잘못 번역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 말 자체로는 딱히 틀린 것은 아니라 할 수 있다. 그의 위대함을 기려서 '헌정'한 가짜 광고인 것 같으니까 말이다.

(중략)

"인생은 B와 D 사이의 C이다. 탄생(Birth)과 죽음(Death) 사이 선택(Choice)의 연속이다." (장 폴 사르트르)

"큰 배를 만들게 하고 싶다면 나무와 연장을 주고 배 만드는 법을 가르치기 전에 먼저 바다에 대한 동경을 심어줘라. 그러면 그 사람 스스로 배를 만드는 법을 찾아낼 것이다." (생텍쥐페리 <어린 왕자>중에서)

사르트르나 생텍쥐페리나 저런 말 한 적 없다. 생텍쥐페리 다른 작품에서 억지로 조금 비슷하지 않냐고 막무가내 우길 수 있는 부분은 있지만, <어린 왕자>에는 그럴 만한 구절도 없다.

 

 

사후 30년 쯤 지난 뒤 누군가 헌정하는 글이 사실인 것처럼 알려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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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사회가 형성되면 기준적 윤리 역시 형성된다. 그렇지 않으면 집단을 유지시킬 일정한 규칙이 마련되지 않기 때문이며, 규칙이 마련되지 않은 집단이란 언제든 해체될 수 있는, 혹은 애초에 집단 자체가 환상에 불과한 현상이 된다. 이러한 기준은 반드시 윤리일 필요가 없다. 그저 일정한 규칙이 존재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그러한 기준은 대개 윤리적 기준으로 형성되고, 그것을 요구하게 된다. 2023년 조사 기준, 천사가 실제로 있다고 믿는 성인의 수가 가장 많은 나라는 10명 중 7명으로 미국이다. 이는 미국인들이 그만큼 무식하거나 종교적이라는 의미도 되겠지만, 후자에 조금 더 집중할 경우 그것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미국인들의 신앙심이 투철하다는 것이라기보다는 그것이 자신의 생각을 통제하는 자기검열의 수단으로서 작동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봐야 한다.

기실 윤리적 기준은 스스로를 검열하게끔 하는 도덕적 지침이 되지만 도덕과 윤리는 같은 이름과 믿음으로 비도덕적이고 비윤리적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신앙에는 방향이 없이 깊이와 밀도만 존재하기 때문에 신앙심이 깊다는 것이 그 사람이 선하다는 의미 역시 아니다.

그런 관점을 수용한 후에 진행하건데, 미국인들에게 종교는 삶과 삶의 방식에 있어 아주 밀접한 것이고 종교적 믿음이 윤리에 작용하는 바는 아주 강력하다는 것이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종교적 신앙은 미국인들을 아주 강하게 검열하고 있으며, 그것은 본질적인 것이라기보다 피상적으로 요구된다. 즉, 자기 희생이나 약자에 대한 실천적 보호, 지원보다는 누군가 천사를 믿느냐는 비현실적인 것의 존재를 묻는 질문에 그렇다라고 말해야 하는 방식이다.

미국인들이 실제로 천사를 믿느냐 아니냐, 혹은 그것이 진짜로 있느냐 아니냐와 같은 것은 중요한 게 아니다. 그들이 그렇게 말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자신의 신앙심을 지키는 행위이기도 할 뿐더러, 그렇게 요구 받는 윤리적 기준의 존재 때문이다. 그들이 천사의 존재를 믿느냐는 질문에 아니다. 라고 답한다면 그들은 스스로를 규율하는 윤리적 기준에 위반하는 행동을 하는 것으로, 양심에 어긋나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일반적이거나 보편적인, 혹은 과반에 가까운 기준으로 작동하는 사회의 경우, 이것은 하나의 사회적 요구처럼 동작한다.

이것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소아성애와 결부시켜 생각해보자. 어떤 사람이 실제로 어떤 성향을 가지고 있든, 사실이든 그렇지 않든 소아성애적 표현을 하거나 그것을 드러낼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지금 기준으로 소아성애는 끔찍한 범죄가 되고 그 어떤 사회에서도, 특히 서구 사회에서는 가장 끔찍하고 비인간적인 범죄로 인정 받고 멸시, 차별, 배척 받는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소아성애에 속하는 행위나 가치관은 그리 드문 것이 아니었고, 10대 초중반의 아이들에 대한 성애, 결혼, 약혼, 성교나 성적 요구는 꽤 흔한 것이었으며, 그것은 그 시대의 사회적, 관습적, 문화적 사유로 인해 요구되는 형식이었다. 물론 지나치게 어린 아이에 대한 나이 차이가 나는 성인의 그것은 그 시대 기준으로도 지탄 받은 행위 였음은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물론 윤리적 기준은 시대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 중 하나이고 소아성애를 긍정하자는 말은 아니다. 다만 실제로 어떻게 생각하든, 심지어 별 의견조차 없든 그렇게 요구 받는 윤리적 기준, 도덕적 잣대가 존재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증명을 요구받을 때 일정한 답변이 정형화되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즉, 이렇게 말하지 않으면(자신의 신앙을 증명하지 않으면/자신의 혐오나 증오를 증명하지 않으면) 그 자체로 의심 내지는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것을 피해야만 하는 사회적 요구가 되는 것이다. 신을 믿고 신앙을 가진 자신은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천사를 믿느냐는 질문에 그렇다라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되고, 소아성애에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든, 심지어 그 본인이 소아성애자라 하더라도 그에 대한 증오나 혐오를 보여줘야만 한다.

서구의 범죄자나 갱, 혹은 그와 유사한 폭력 집단이 자신들의 소아성애에 대한 혐오와 증오를 증명하기 위해 소아성애자(혹은 동성애자)를 공격하여 폭행하거나 살해하는 것은 그러한 요구의 극단적 표현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스스로 그러한 것에 강렬한 적대감을 증명하기 위해 굳이 그러한 행위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행위는 심지어 범죄적인 것이라 하여도 사회적 윤리 기준에 편승하여 정의로운 것으로 여겨지거나 그에 준하는 행동으로 평가 받는다.

한국 사회에서도 그러한 기준이 있다. 반공이 국시이던 시절에 좌파적 사상에 대해서는 공공연하게 혐오와 증오, 적대감을 강렬하게 표현할 수록 그것은 바람직하고 정의로운 것처럼 평가 받는다. 심지어 그것이 당연히 실현 불가능한 말 뿐인 것이라 하여도 도리어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훌륭한 것이 된다. 가령 북괴 빨갱이에 대한 무제한적 살상과 학살을 통해 지구상에서 북괴 빨갱이를 절멸 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강력하고 폭력적 어조로 웅변한다면 모든 경우에 그렇지만은 않겠지만 어떠한 경우, 꽤 많은 경우 바람직하고 훌륭하며 애국적인 것이 될 것이다.

그것은 사회적 윤리/도덕적 기준이 그렇게 평가하도록 한 사회에 영향을 받는 모든 이에게 요구한다. 이러한 사회적 요구는 거대한 흐름으로서 존재하기에 개인의 사상이나 지성, 양심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모든 개인은 사회 속에서 진영논리에 종속될 수밖에 없고 영향을 받는다. 설령 본인은 어떠한 진영에 속하지 않는 팩트만 본인의 양심과 지성에 따라 공정하고 정확하게 말한다 해도, 그러한 언어는 특정 진영, 집단에 유익하게 될 수밖에 없다.

북한 문제에 관해 진보, 보수, 좌파, 우파적 기준에서 완전히 탈피된 새로운 의견이 나올 수 있을까? 불가능할 것이다. 반공이 국시인 시절에서 벗어났지만 아직도 한국 사회는 여전히 반공적 가치관을 정의롭고 바람직한 것으로 인정하는 사람들이 많고, 적어도 인구 절반에 가깝게 그러하기에 이를 보편적이라고 할 수 있거나, 최소 그에 준한다고 말해도 이상할 게 전혀 없다. 그리고 그들은 그 반대 절반에게 자신들의 윤리 기준을 요구한다.

북한에 대한 강렬한 적대감을 언어와 행동으로 증명하라고, 그러나 결코 북한에 대한 직접적 적대 행위, 공격 행위로 증명하지는 말하는 것이다. 소아성애를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자들이 직접적인 살해를 저지르는 경우는 극히 적은 것처럼, 그러한 범죄적 행위를 행하는 자들은 한국 내에서도 매우 특정할 수 있는 소수에 불과한 것과 같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에게 향해질 비난과 의심을 피하기 위해 그러한 상황이나 요구에 검증적 반응을 요구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바람직한 것일까? 자유주의적 관점 내에서 이러한 사회적 요구가 특정 답변, 태도의 강요로 작동하는 것은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모든 개인은 자신의 지성과 양심에 따라 자유롭게 생각하고 행동하며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며, 본인의 판단에 따라 결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사회 내에서 일정한 윤리적 기준이 형성되는 것은 아주 흔한 일이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자연스러운 일을 비윤리적이라 비난하는 것은 자연스럽지 못한 일이다.

소아성애에 관한 개인의 생각이나 관점이 어떠하든 그것은 자유로운 지성의 결과이겠지만 모든 개인은 오롯이 독립적일 수 없고 사회라는 집단의 흐름에 영향을 받는다. 어떠한 윤리, 도덕적 기준은 그 근간 논리와 사례가 존재해야 구성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생각이나 관점은 진실로 자유로운 사유의 결과일 수 없고, 설령 그러하다 치더라도 개인은 사회 속에 존재하는 객체이기 때문에 사회적 요구에 순응해야 한다는 판단을 내리는 것도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이는 자유가 합리성과 유리될 수 없으며, 외부적 조건에 배율적일 수도 없음을 이유로 한다.

사회도 국가도 타인도 없는 자연 속에서 어떠한 윤리적, 도덕적 요구도 받지 않는 자가 눈앞의 포식자를 두고도 자유로운 사고의 결과 그것을 피하지 않겠다는 판단을 내리는 것은 지적 능력을 자유롭게 활용한 것이겠지만 그 결과는 피식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한 사회 내에 존재하는 사람은 자유롭게 사고할 수 있으나 그 결과에 대해 공개적으로 표현할 경우 그에 대한 대가, 혹은 책임이라는 이유로 타인의 평가를 피할 수 없다.

이것은 자유에 따라야할 것이 책임이기 때문이며 나의 자유를 타인이 인정하는 것과 그 자유에 대한 결과로 따라오는 책임을 받아들이는 것은 서로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대저 자유를 근거로 특정한 표현에 대해 일반의 비난과 비판을 받는 경우 그 자유로운 표현의 결과 따라오는 책임을 자유와 혼동하는 경우가 존재한다.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지만 그에 책임이 부여되는 것은 응당한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그러한 책임을 부여 받는 것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본심이나 판단을 공개적으로 표현하지 않는 것은 흔한 일이면서도, 그 요구가 비이성적이거나 극단적일 수 있다. 사회의 보편적 윤리 기준은 그 사회 구성원의 윤리 기준의 평균에 기인한다.

그러나 특정한 가치에 있어서 유독 극단적인 요구가 이루어지는 경우와 합리적이지 않은, 때때로 감정적이거나 비합리적일 수 있음에도 그것이 도덕적인 기준을 충족하는 경우는 구분되어야 할 것이다. 전자의 경우 내국인에게 좌파적이거나 온건한 형식에 사상검증을 요구하며 그 기준을 충족시키기 못할 경우 비난하는 것이 그럴 것이고, 후자의 경우 적에게서 국가와 민족 등 사회 구성원을 지키기 위한 투쟁이나 행위, 사상을 비난하거나 폄하할 때가 그러하다.

특히 후자가 역사적 문제로 분노할 이유는 충분하나 현실적 필요로 그들과 무조건적으로 적대하거나 책임을 요구하지 못하는 경우가 그러할 것인데, 그러나 인간/집단의 감정 문제 역시 합리적으로 다뤄야할 문제인 고로, 합리적이지 못하거나 비이성적인 것 그 자체가 반드시 틀림의 영역에 속한다고 하는 것은 특정한 목적성을 가진 교조적인 태도일 것이다. 합리성을 어떠한 주장이나 가치에 합치시키기 위한 도구적 활용으로 말이다.

현실에서 찾아볼 수 있는 다양한 구체적 사례에 관해 어떤 것이 옳고 그르고, 그것이 어째서 그렇게 구분되어지는가에 대해서는 이 글에서 굳이 다루지 않겠다. 그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고 개별적으로 많은 근거와 논리, 사례를 열거하며 비교해야 하는 일이 될 것이기에 지리한 일이기도 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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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피습 당했다“에 환호 나온 與 대전 신년인사회..한동훈도 당혹
https://amn.kr/46441

 

 

이재명 피습 사건 이후, 언론과 대중들의 반응은 아주 흥미로운, 한편으로는 역겹기 그지 없는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보수엔 사람이 없고, 야만적인 짐승 뿐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했습니다. 그러면서 사람의 탈을 쓰고 있으니 보수는 인두겁을 쓴 자들밖에 없다는 거죠.

 

이재명이 피습을 당했을 때, 보수 진영의 반응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1.만세를 외치고 잘 됐다며 환호한다.

2.즉각적으로 음모론과 가짜 뉴스를 유포한다.

 

이런 반응이 참으로 보수다우면서도 비인간적인데, 언제나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에 있어서 정치적 기준을 두고 인의와 도덕, 윤리를 확실하게 내다 버린 태도를 보여주는 게 바로 보수 진영입니다.

 

사람이 목에 칼이 찔렸는데 거기에 대고 만세를 부른다는 건 그 사람이 죽기를 바란다는 거고, 잘 죽었다고 말하는 겁니다. 한 나라의 야당 대표인데 죽기를 바란다는 것부터가 민주주의적인 시민의 태도가 아니측은지심이 없는 인간으로서의 함량에 미달되는 것입니다.

 

심지어 현장의 한동훈을 비롯한 인물들도 당황스럽게 여겼죠. 정치적으로 당연히 좋게 보이지 않는다는 건 최소한의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알 것이고, 그걸 떠나 그런 반응 자체가 상식을 갖춘 주변인의 시선을 생각한다면 함부로 할 수 없는 행동입니다. 사회성이라는 게 괜히 있는 게 아니거든요.

 

이건 정치 테러이고 극우의 백색테러입니다. 민주주의에서 가장 핵심적인 진보적 측면은 정치적 패배가 실존하는 개인, 혹은 가계, 집단의 목숨을 앗아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군부 독재나 특히 공산주의 독재, 왕정이나 과두정 같은 체제에서 정치적 패배로 인해 집단의 수장이나 구성원이 실제로 숙청 되는 경우는 흔합니다. 당장 북한이나 중국만 봐도 심심찮게 발생하는 일이죠.

 

민주주의에서 정치적 패배는 그저 정치적으로 패배한 것이고 그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지 않습니다. 민주정에서 정치란 의사결정을 위한 고도화된 최상위 행위이고 무언가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란 의사 결정으로 누군가의 생사를 가를만한 일이 아닙니다. 즉, 민주주의에서 정치란 독재 등에서의 정치와 같이 생존이 걸린 게 아닙니다. 설령 다신 정치를 하지 못하더라도 그 사람의 생명과는 아무런 관계 없이 먹고 살 수 있죠.

 

그런데 이러한 백색테러는 그러한 민주주의의 원리를 정면으로 위반합니다. 이러한 테러가 허용된다면 정치란 야만적인 시절의 죽고 사는 문제가 되어 내가 살기 위해 적을 죽여야 하고, 적을 죽임으로서 본인과 진영의 이익과 생존을 도모하는 과정이 됩니다. 당연히 국민 일반의 행복이나 효용과 아무런 관계 없는 권력다툼으로 변질이 됩니다.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은 구분되는 게 아니게 될 것이고요.

 

이번 테러는 명백히 극우주의자의 의도적인 살인 미수이고, 민주 정치에 대한 테러입니다. 야당 대표는 국가 의전 서열 8위로, 부총리급 대우를 받습니다. 즉, 국가의 최상위 인물 중 하나인 것이고, 개개인이 입법 기관인 국회의원의 대표라는 점에서 더더욱 위협적인 시도입니다. 안보를 위협하는 행위라는 점에서 더더욱 반국가적이고 비애국적 행위입니다. 저런 건 박정희에 총질하던 빨갱이나 할 법한 시도라는 거죠.

 

그런 사건에 만세를 외친다는 것은 그들 자신이 민주주의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고, 민주주의를 유지하고 지속해나가야 한다는 믿음 자체가 없다는 겁니다. 반대로 진보 진영에서 보수 진영의 대통령이나 여당 대표, 보수 진영의 장관이나 국무총리를 암살하는 테러가 빈번히 일어난다면 그것은 민주주의를 위한 것이고 국가와 안보를 위한 것일까요? 당연히 아니죠. 보수 진영은 그런 일이 벌어지면 당장 계엄령 내리고 관련자들과 진보, 좌파 진영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해야 한다고 부르짖을 겁니다. 평소에도 그런 이들이 있을 정도니까요.

 

 

테러에 사용된 칼. 실제 찌르는 영상은 올리지 않겠음.

 

 

두번째는 더더욱 정치적인 행동인데, 사건 이후 즉각적으로 가짜뉴스와 음모론을 유포하고 있습니다.

 

이게 처음부터 즉각적인 지령이 있었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소식이 당도하자마자 쇼입이다! 쇼! 라고 짖어대는 것만 봐도 정치병 환자들이 많고 거기에 진심으로, 혹은 의도적으로 호응하는 정치병, 혹은 정신병자들이 많은 것이 보수 진영입니다. 이러한 거대한 사건에서 그런 패턴은 보수 진영에서 흔하게 볼 수 있었죠.

 

그들은 유튜브 등지에서 즉각적으로 가짜 뉴스를 만들기 시작했는데, 이는 진영에 피해가 오기 전에 즉각적으로, 비판이 돌아오기 전에 선제적으로 대응하는 자발적인 행위라고 보고 있습니다. 다만 그 이후 어떠한 지침이 내려지거나 공유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고 봅니다. 이러한 주장이 음모론이라고 비판할 수는 있겠지만, 보수 진영에서 지령, 지침이 공유되는 경우가 있었으니까 하는 소립니다. 당장 국정원부터가 그러했던 주범이었고요.

 

이재명 대표 피습 음모론 살포하는 수구 유튜버들
처음부터 '자작극' 단정 후 이 대표 주변 상황 끼워맞춘 음모론
https://www.goodmorningcc.com/news/articleView.html?idxno=302330
이재명 서울 이송은 가족 요청… 부산대병원 “유감 표명은 사실무근”
https://n.news.naver.com/article/658/0000062260?lfrom=twitter
"이재명 피습 쇼" 돌출발언…온라인선 "자작극" 황당 주장도
https://news.jtbc.co.kr/article/article.aspx?news_id=NB12158864

 

 

보수 진영은 언제나 팩트와 진실이 중요한 진영이 아니었습니다. 유리하다면 거짓이라도 사실로 믿고, 불리하다면 모든 것을 거짓으로 만들고 유리한 가짜 뉴스를 만들어서 선동하며 음모론을 만들고 핵심에서 벗어나 물을 흐립니다. 지금 당장 떠도는 음모론부터가 나무젓가락이었다, 손가락으로 찔렀다, 종이로 찔렀다, 기절한 척을 했다, 부산대병원 거부하고 서울대변원으로 갔다, 그래서 부산대병원이 유감을 표명했다 등등 음모론을 만들어 유포하고 있으며, 야당 대표가 응급 의료를 위해 헬기를 타는 걸 특혜라고 욕하는 것까지 다양합니다.

 

정상적인 판단력과 상식적인 지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멍청한 소리는 하지 않죠. 실제 영상이 있고 병원과 경찰, 당의 발표가 있었는데 이걸 다 가짜, 조작이라고 의심할 거라면 이미 이재명은 대통령이 되어 있어야지 야당 대표를 하지 않습니다. 병원 측과도 논의한 결과로 서울로 올라간 것이고, 서울에서 활동하는 사람이 가족과 주변 지인 다 있는 서울로 가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며, 이를 문제삼는 것은 사태의 핵심을 벗어난 물타기 선동입니다. 사람이 다쳤는데 왜 저런 비판을 가하겠습니까? 생각해보면 이상한 비판이죠. 그러면서 유감 표명을 했다는 가짜뉴스를 만들어 명분을 조작하기까지 하죠.

 

음모론은 정신병이고 현재 이재명 관련 음모론을 구분하지 못하거나 주워 삼키는 이들은 속은 게 아니라 그냥 머리가 나쁜 겁니다.

 

이러한 활동은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행해지는 스피커 싸움이고, 진실과 팩트는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저 정치 진영에 돌아올 비판과 손실을 최소화하는 정치적 행위이며 공정하거나 정의로운 행동인 것도 아닙니다. 도리어 사악한 행동이죠. 박근혜 커터칼 사건에 대해 음모론을 주장하던 이들을 비판할 거라면 이것도 문제가 되는 거라 인정해야 합니다.

 

[단독]이웃들 "이재명 습격범, 법 없이도 살 분…깜짝 놀라"
https://v.daum.net/v/20240102185030694
"이재명 죽이려고"…충남서 부산까지 온 60대男, '민주당원'?(종합)  <- 현재 기사 제목에서 '민주당원?' 부분 삭제됨.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8/0004981104?sid=102

 

 

이재명 피습범에 관해 가장 먼저 올라온 것 중 하나입니다. 왜 직후부터 좋은 소리를 해주는 말들을 담아서 서사화하여 기사화 했는지도 의심스러울 수 있지만 그러한 추정은 일단 넘어가고, 곧바로 민주당원이라는 기사들이 올라왔습니다. 일단 제대로 조사를 했는지도 모를 일이지만, 범인이 위장 잠입한 건 사실이니 표면적인 것만 바로 기사화 했다고 참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기사로 보수들은  신이 나서 민주당을 공격했고요. 하지만 당연히, 곧바로 진실이 따라왔습니다.

[단독] 이재명 습격범 ‘태극기집회’ 조카 증언…“유튜브 계속 봐”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28/0002671216?sid=100
“맨날 컴퓨터 앞에 혼자 앉아 있어
4~5년 전 태극기집회…보수였다”
국힘 "4년전 탈당한 동명인물 있을 뿐"…피의자 당적 논란 '유감'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421/0007269022?sid=100
2024.01.03. 오후 12:53
이재명 피습, 60대 오랫동안 국힘 당적 보유…국힘은 ‘침묵’
https://v.daum.net/v/20240103140152126
2024. 1. 3. 14:01
[단독] “이재명 싫어 범행”…피의자, 습격 전 민주당 입당해 일정 파악한 듯
https://n.news.naver.com/article/021/0002614014

 

 

국힘당은 언제나처럼 발뺌하며 유감을 표했지만 약 1시간 뒤 당적 보유가 분명하게 확인되자 침묵을 했습니다.

 

즉, 국힘당 소속, 혹은 출신 극우보수에 의한 야당 대표 살인미수 테러 행위가 사실이라는 것이죠. 대한민국에서 3차례 이상 헌법을 파괴하고 독재를 했으며, 쿠데타를 2번 이상 시도 했으며 불법적으로 가장 많은 한국인을 죽인 국내 정치 진영의 전통에 따라 또 한번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정치인에 대한 살인 의도를 가진 테러를 저지르는 게 바로 보수 진영입니다.

 

그리고 보수 진영은 그러한 사건에 대해 비판이 아니라 음모론과 발뺌, 가짜 뉴스 유포로 극단적인 정치 행위를 전방위적으로 가하고 있는 상황이고요.

 

 

정상적인, 사회 일반이 요구하는 도덕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번 사건에 대해 좋아할 수 없고, 만세를 외칠 수도 없습니다. 기분이 좋을 수도 없고요. 정상적인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를 최소한이나마 가지고 있고, 우리의 자유민주주의를 긍정하는 시민이라면 민주주의에 대한 심대한 테러에 대해 정치적 피해를 막기 위한, 가짜뉴스와 음모론 살포, 선동과 조작을 가하는 정치적 행위를 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나 보수 진영은 그러고 있습니다. 정치적 관점을 떠나서 사람이 할 행동이 아닙니다. 사람이 다쳤는데 기분이 좋은가, 환호할 수 있는가와 별개로 그것을 공개적으로 표현한다는 점에서 사람이 할 행동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 행동은 사회성을 학습하지 못하고 타인을 이해하거나 공감할 능력이 없는 짐승들이나 하는 것이고 사람의 꼴을 하면서 짐승의 태를 하니 인두겁을 뒤집어 썼다고 하는 겁니다.

 

박근혜 테러 사건 때도, 박원순 폭행 사건 때도, 마크 리퍼트 테러 사건 때도 그렇고 정치인에 대한 테러를 자행하는 자들은 하나 같이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사람이거나 극단주의적 위험분자거나 인생 말아먹은 밑바닥 병신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행위는 그러한 비정상성에서 기인한만큼, 그들의 행위에 동조하거나 찬양, 환호하는 것은 행위자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사상 내지는 비정상성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에 가깝습니다.

 

즉, 정신병자의 행위에 동조하는 건 정신병자나 한다는 소리입니다.

 

유독, 이상할 정도로 보수 진영에서만 이러한 행위들이 광범위하고 보편적으로 관찰됩니다. 유독 보수 진영에서만 이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짐승들이나 보수가 되는 것이고, 보수인 사람들이 야만적인 짐승 수준이라는 겁니다. 물론 아닌 사람들도 있겠죠.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많으니 현 보수 진영의 수준이 이토록 낮아진 겁니다.

 

유독 보수만 이렇습니다. 그들은 이 나라 민주주의의 구체적인 위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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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선 출처도 없고 근거도 없는 이런 글이 나돌아 다니지만.

 

 

김혜자 도시락,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다르게…‘진실은’
https://www.iworldtoday.com/news/articleView.html?idxno=182546

김혜자 도시락은 김헤자의 아들이 운영한다는 소문에 대해 관계자는 ‘아니다. 김혜자씨와 도시락 제조에 대해 계약을 했을 뿐이고, 아드님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고 밝혔다.

이어 왜 이런 소문이 났는지에 대해서는 ‘저희도 왜 그런지 이유를 모르겠다. 김치공장 쪽에 일을 하셨다고 들었는데 그게 와전된 것 같다. 지금은 뭐하시는지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아무 근거도 없는 거짓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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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 퍼진 ‘폐렴’ 한국서도 확산 中… 지난해보다 3배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231111500035

최근 중국에서 급속도로 퍼지고 있는 호흡기 감염병인 마이코플라즈마 폐렴이 국내에서도 확산 중이다.

11일 질병관리청에 따르면 마이코플라즈마 폐렴균에 감염돼 입원한 환자는 44주 차(10월 29일~11월 4일) 168명을 기록했다.

한 달 전인 41주 차에 90명이던 것에서 42주 102명, 43주 126명 등으로 4주째 증가했다.

지난해 같은 기간(2022년 44주) 55명과 비교하면 환자가 3배로 늘어난 것이다.
(중략)

 

 

2023년 10월 말부터 11월까지 중국발 폐렴의 감염 확산이 발생하고 있는 상황.

 

 

중국 덮친 '그 폐렴'에…"9세 남아 사망" 한국도 유행 조짐
https://news.mt.co.kr/mtview.php?no=2023110915054592559

중국에서 유행 중인 마이코플라스마 폐렴이 한국에서도 유행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감염 환자가 증가하는 가운데 최근 마이코플라스마 폐렴에 감염된 9살 남아가 감염 후 단기간 내 사망하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의료계에선 의약품 수급을 포함한 선제적 치료 대책을 조속히 세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코로나, 아데노 바이러스 역시 감염되었으나 마이코플라스마 폐렴에도 감염된 9살 남자 아이가 사망하는 사례까지 발생. 그러나 문재인 정권 시절부터 방역을 비판하던 언론과 정부 등 보수 진영은 이에 대해 제대로된 대응이나 반응을 보여주지 않고 있음.

 

이슈를 점화시키지 않기 위해 모두 입을 다물고 별 거 아닌 것처럼 여기는 중.

 

정부, 요양병원 환기시설 지원하겠다더니 예산 '0원'
http://www.mediwelfare.com/news/articleView.html?idxno=3230
2022.10.06 07:57

윤석열 정부가 '과학방역'의 일환으로 요양병원·요양시설 내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환기시설 개선 재정 지원을 약속해 놓고, 내년도 예산안에 한 푼도 배정하지 않았다는 지적이 나왔다. 

5일 더불어민주당 강선우 의원은 보건복지부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요양병원, 요양시설의 환기시설 개선을 위한 예산 배정 문제를 집중 질의했다. 

이날 강 의원은 "윤석열 정부가 요양병원, 요양시설의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한 환기시설 개선이 구호에 그치고 있다"면서 "올해 8월까지 실태조사를 마치고 내년부터 재정지원을 하겠다고 약속했지만 내년도 예산안에는 해당 예산이 전무한 것으로 확인됐다"고 질타했다. 

 

 

22년 10월 뉴스. 과학방역을 운운하고 문재인 정부 시절 방역을 비판했던 것과 다르게 방역 예산을 크게 늘리거나 관리를 하고 있지 않으며, 이전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재정 지원 약속은 어디까지나 포퓰리즘적 선동에 불과한 거짓말에 불과했고, 막상 행동에 옮길 때 10원 한푼도 배정하지 않았음.

 

윤석열 정권과 보수 진영의 과학방역은 애초에 속 빈 거짓선동이었으며 국민의 생명과 재산, 사회적 비용 증대를 막기 위한 방역에 관심이 없었음이 드러남.

 

2023년도 질병청 예산, 2조9470억원…정부안比 7515억원↓
https://www.medifonews.com/mobile/article.html?no=173892

2023년도 질병관리청 소관 예산이 2조 9470억 원으로 최종 확정됐다.

질병관리청은 24일 국회 본회의에서 의결된 2023년도 질병관리청 소관 예산이 국회 심사 과정에서 정부안 대비 473억 원이 증액됐고, 7988억 원이 감액되면서 최종적으로 총 7515억 원이 감액됐다고 밝혔다.

(중략)

 

 

과학방역을 운운하며 일 잘하던 정은경 청장을 밀어내기까지 했으나 실질적인 과학 방역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언론은 기를 쓰고 입을 다물고 있으며 일일 평균 만 단위의 확진자에 대한 보도와 비판은 찾아보기 어려움.

 

위드 코로나가 되었고 문재인 정부 시기부터 가짜뉴스와 백신 음모론, 공포 선동까지 있었음에도 전국민 백신 접종을 추진, 성공했기 때문에 위험성은 초기에 비해 크게 줄었다는 걸 감안해도 정치적 편향성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음.

 

그러면서 과학 방역을 운운하던 정부가 정작 과학적 방역을 제시하거나 행동하지도 않으며, 외려 예산을 깍는 행보를 보이고 있음.

 

보수 진영은 방역을 어떻게 해야하는지 알지 못하고, 과학을 이해하고 있지 못함.

 

 

1.중국발 폐렴이 새로 확산 중.

2.윤석열 정권은 전 정권의 과학방역을 정치방역이라 폄하하고 자신들이 과학방역을 한다고 주장하며 집권함.

3.윤석열 정부는 방역 관련 예산을 배정하지 않거나 도리어 감액시켰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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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는 두가지로 구분된다. 하나는 개인적 권위, 사적 권위이고, 다른 하나는 공적 권위이다.

 

개인적 권위, 혹은 사적 권위라 부르는 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에게 귀속되는 것으로, 그것은 개인의 카리스마, 리더쉽, 능력 등 개인의 타고난 요소나 역량에 의해 형성된다. 어느 무리에서 자연스럽게 리더 역할을 맡게 되거나 뛰어난 지성을 인정 받는 경우, 단순히 싸움 실력이나 잘생긴 외모조차 개인의 권위를 형성시키기도 하며, 더 직관적이고 일반적인 예시는 일을 아주 잘하는 것이 그러하다.

 

이러한 개인적 권위는 어디까지나 개인의 타고난 요소나 노력을 통한 성과로 만들어지는 만큼, 어디까지나 개인의 사적인 영역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 권위는 자기 영역을 벗어나면 영향력을 상실한다는 것이다. 즉, 아무리 일을 잘해도 그것이 적용될 수 없는 다른 영역, 집단에 소속된다면 그의 권위는 어디까지나 그가 그러한 사람이었다는 것 이상이 되지 못한다. 가령 수능 전국 1등에 서울대생조차도 군대에 입대하여 훈련병, 이등병이 되면 그냥 짬찌 1일 뿐이다.

 

이러한 권위는 개인의 능력이나 재능 여하에 따라 얻을 수도 있고 잃을 수도 있다. 권위는 발언권과 동일한 의미가 되기도 하여 어느 집단 내의 의사 결정이나 향방, 지시에 있어서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때도 있다. 일을 잘하는 에이스의 말은 모두가 귀담아 듣지만 그렇지 못한 자는 아무리 훌륭한 사상과 대의를 품은 웅대한 영웅의 뜻을 품고 있다 할듯 일 못하는 아무개일 뿐 누구도 그가 하는 맞는 말에 귀기울이거나 의미를 담지 않는다.

 

이러한 권위는 마찬가지로 상실하기도 쉬운데, 그것은 일을 잘 못하거나, 신뢰를 잃는 경우가 그러하다. 몇가지 예시를 들자면 회사의 에이스가 연달아 실수/실패를 하게 되면 처음 몇번은 그래도 해놓은 게 있기 때문에 크게 책임추궁을 하진 않지만 반복될 경우 빠르게 권위를 잃어버린다.

 

이러한 잃어버리는 권위는 발언권보다는 신뢰라 부르는 게 나을 것이다. 더 이상 이 사람을 믿고 큰 일을 맡길 수 없다거나, 회사의 대표가 어떠한 조직적 갈등 상황, 내외적 위험 상황을 제대로 관리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면 회사 대표는 직원들에게 신뢰를 잃는다. 부서간 갈등 상황에서 대표가 교통정리를 하고 적절한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하거나, 하지 않는 경우, 이러한 보고가 올라왔음에도 문제 해결 의지는커녕 상황에 대한 이해조차 제대로 되지 않는 경우 대표에 대한 책임은 명시적인 제재가 아닌 신뢰에 대한 책임으로 이루어진다.

 

대표가 일을 제대로 못하기 때문에 믿을 수 없게 되고, 조직 내 갈등 상황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할 때 중간 관리자이자 현장 책임자인 자신은 어떻게 행동하고 처신하는 것이 올바른가 등등. 이는 조직적 리스크가 된다.

 

이것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 뿐이다. 비슷하거나 같은 상황이 벌어졌을 때 달라진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기다릴 것이 아니라, 그냥 평소에 일을 잘하면 된다. 즉, 에이스가 권위를 형성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평소에 일을 잘해서 한두 번의 실수나 실패를 용인 받고 재평가의 여지를 크게 주지 않는 것이 그러하다. 평소에 하는 일을 잘 하기만 해도 이러한 권위 상실은 충분히 복구 가능하며 일반적인 경우 권위에 큰 타격을 주지도 않는다.

 

 

공적 권위는 이것과 다르다. 공적 권위는 사람이 아니라 자리에 부여되는 성질의 것이다. 예컨데 대통령의 자리가 그러하다. 대통령의 자리는 그 자리에 오르는 사람이 물론 그만한 제도적 자격과 개인적 능력을 보였기 때문에 오르는 것이겠지만, 설령 그렇지 않다 해도 자리 그 자체가 권위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막연하게 생각할 수 있는 부적격자가 대통령의 자리에 오른다 하여 그 자체로 권위에 실추가 발생하지는 않는다.

 

물론 아예 그렇지 않다는 것은 아니고 부적격자나 부정한 방법으로 대통령과 같은 자리에 오르게 된다면 당연히 그 자리의 권위와 가치 역시 추락하지만 이것은 도리어 대통령이라는 자리가 가지는 권위가 높고 강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이기도 하다.

 

이러한 권위는 민주적 권위 역시 부여되겠지만, 민주주의적 선택과 아무 상관 없는 사기업 대표, 팀장, 군 장교나 장군 등의 자리 역시 마찬가지로 가지고 있다. 이러한 자리가 권위를 가지는 까닭은 단지 그 자리가 보장하는, 혹은 그 자리로부터 얻을 수 있는 권한 때문이다. 즉, 어떠한 자리가 가지고 있는 권한이 바로 권력을 형성시키고, 권위를 만들어낸다.

 

대통령의 막대한 인사권과 정책 결정권, 정치, 사회, 문화, 외교적 영향력은 그 자리가 가진 막대한 권한 때문이고, 이러한 권한을 가지고 있으며 그 권한 자체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형성되고 또 부여되는 것이 바로 권위이다.

 

이러한 자리, 혹은 직책은 그 자체로 권한을 가지기 때문에 권위를 지니며, 이것은 그 자리에 아무 사람이 앉아 있지 않는다 하더라도 빛바래지 않는 종류의 것이다. 거꾸로 말하자면 그 자리에 올라선 사람은 그가 어떤 사람이고 어떠한 능력이 있는지와 무관하게 그 자리의 권위를 입을 뿐 그 자리 자체와 동일시되지 않는 것이다.

 

직책/직위의 주권과 그 주권에 편승하는 개인의 인격은 분리되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러한 공적 권위는 그 자리가 소유하는 권한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권한을 빼앗거나 없어진다면 자연스럽게 추락하는 종류의 것이다. 또한 자리가 사람을 만들듯, 사람이 자리를 훼손시키는 경우도 있는데, 이것은 개인의 실패와 실패의 누적이 그 자리의 공적 권위, 신뢰를 훼손시키는 경우이다.

 

예컨데, 경찰이 법을 제대로 모르고 무고한 사람을 부정하게 체포하여 부당한 수사를 벌이며 실질적인 피해를 주는 것이 반복되거나, 검찰이 무고한 사람을 기소하고 수개월간 의미 없이 수사하며 범죄를 창작하여 처벌하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실질 생계에 위협을 가하는 일이 여럿 발생하거나, 회사의 대표가 일을 제대로 처리하거나 관리하지 못하며 직원들에게 돈을 제대로 주지 못하는 등 실패를 반복하고 의무를 방기할 경우를 생각해볼 수 있다.

 

이럴 경우 사람들은 그들의 권한에 권위를 느끼지 못한다. 이것은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이 자신의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이지만, 그 자리가 부여하는 권한을 휘두르다 발생한 실패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실패의 누적은 직원이 직장 상사, 혹은 대표의 능력을 의심하고 판단을 신뢰하지 못하게 만들고, 특정 권한을 가진 집단에 대한 공적 신뢰를 상실하게 만든다.

 

검찰과 경찰을 믿지 못해 공권력의 권위가 실추되고 법을 신뢰하기보다 법을 조작할 수 있는 수단--전관 변호사, 인맥--을 적극적으로 구매하거나 사적으로 해결하려는 생각을 공공연히 퍼뜨리게 한다.

 

또한 부정한 방법으로 해당 자리를 차지하는 경우에도 자리의 공적 신뢰가 훼손되기도 하다. 돈을 주고 자리를 사거나, 인맥으로 추천받아 다른 경쟁자보다 우위를 차지하거나, 낙하산으로 들어오는 경우 그 사람의 능력과 자격이 부적절하기에 도리어 자리의 권한이 무시 받는다. 권한 그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 자리가 가진 권위에 맞는 대우를 받기는 어렵다. 그리고 권한이 형해화되거나 무력화되지 않는다 해도 권위는 훼손된다.

 

이러한 설명은 앞서 이야기한 부정한 방법이든 충분한 능력, 실력, 자격을 가지지 못한 부적격자가 어떤 자리에 오른다 하여도 자리그 자체의 권위에 실추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말과 다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그 자리에 부적격자가 있을 때만 발생하는 현상으로, 자리가 가지는 공적 권위를 복구하고 싶다면 방법은 간단하다.

 

바로 그 자리의 권한을 입은 부적절한 인사를 그 자리에서 쫓아내는 것이다. 그러한 경우 그 자리는 다시금 권위를 회복하고, 자격과 능력 모두 적절한 사람을 올려 권한을 정상적으로 행사할 수 있게 하면 증명되는 문제이다.

 

 

권위와 권위주의가 서로 다른 함의를 품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인데, 권위를 지닌 이는 그것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을 자신의 권한과 권위 내에서 올바른 방식으로 행사하지만 그렇지 못한 권위주의적 개인은 사적 권위와 공적 권위를 일체화하여 인식하고, 개인의 실패를 자신의 실패로 인식하지 않고 결코 훼손될 수 없는 자리(직위, 직책, 계급, 직급 등)의 공적 권위의 실패로 인식한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 그 자체로 훼손되는 것이 아니고, 훼손되지 않는 권위를 자신의 사적 권위와 동일시 했기 때문에 자신의 실패로 인해 발생한 사적 권위의 실추와 훼손의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즉, 스스로 우월한 권력을 지닌 무오한 개인이 탄생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집단적 입장과 사상이 되면 그 집단은 어떠한 결정과 행사에 있어 실수나 실패가 없는 무오하고 전선한 집단이 되어야 하는 당위가 만들어진다. 검사와 판사는 잘못 판단하지 않고, 경찰은 적절한 증거만 수집하여 범인을 만들어 내서라도 치안을 지키고, 행정부나 국가는 죄를 짓지 않는다 믿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실수나 실패에 대한 책임추궁은 공적인 신뢰에 대한 검증이나 복구를 위한 것이 아닌 그들 자신에 대한 위협적인 도전이 되는 셈이다. 민주주의에서 정치인의 권위와 권한은 국민의 선택에 의해 권한을 위임 받은 한시적인 것일 뿐임에도 공적인 권위와 사적인 권위를 구분하지 못하고 동일시 하여 어떠한 사건이나 범죄 등에 관한 책임추궁을 국가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이며 반발하고 없는 것으로 만들거나 조작하여서라도 축소하고자 하는 이유가 된다.

 

그렇게 책임을 묻는 자들이나, 반발하는 집단은 반국가집단으로 규정되어 탄압과 차별의 대상이 되는 경우 역시 흔하다. 공과 사의 구분을 못하는 자들이 권력을 소유했을 때 발생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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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심은 사악한 자의 미덕이다.

- 오스카 와일드

False Patriot 틀린 애국심.

애국자는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긍정적인 미덕으로 여겨지며 공통된 지향점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애국에 대한 비판과 금언들이 그것을 경계하는 것은 그것을 내세우는 것이 실질적 긍정성에 도움이 되느냐와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가령, 입으로 애국을 말하는 자가 단기적으로, 그 이상으로 장기적인 관점에서 사회적 신뢰를 깎고 제도적 불공정과 경제적 불평등에 조력을 가하며, 정치적 경쟁을 자극하고 자의적인 기준에 따라 애국자와 비애국자를 가르며 비애국자로 구분된 자에 대한 공격성을 보인다. 그러한 행위는 공동체가 지켜야 할 공통된 도덕과 유리된 경우가 많으며 애국의 기준이 자신이 믿고 지지하는 정치적/사회적/경제적, 총체적으로 국가적 이념에 부합하지 않았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즉, 애국자는 적을 찾으며 자신의 애국심을 증명하려 한다.

그것은 자신의 국가를 이롭게 하기 위한 공통된 선행, 봉사, 발전이 아닌 자신이 구분 지은 적에 대한 배격, 차별, 증오, 혐오, 공격 등 배타적 성질의 행위로 나타난다. 그러한 활동에서 성취감과 충만함, 그만큼의 위기감을 느끼며 자신의 애국심을 강화한다. 

만약 그 적이 진짜 적이라면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구체적인 구분을 어떻게 할 것인가? 미래에 대한 평가와 판단은 관점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누군가 그것을 옳은 것, 해야 하는 것, 국가가 나아갈 길이라고 생각할 지라도, 누군가는 그것을 국가적 손실, 체제에 대한 위협, 안보의 파괴, 경제적 불평등 심화, 매국적 외교 등으로 상이하게 판단할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우리가 역사적 사건에 관해 판단할 때 일반적으로 해석되는 경향이 있고 어떤 것은 그러한 해석이 옳은 해석이 되는 것처럼, 현재 이루어지는 정치적 향방에 대한 해석은 사람마다 다를지언정, 역사적 관점에서 그것은 하나의 주류 해석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다.


다시 말해, 지금 우리는 확언 할 수 없다고 해도, 미래의 후손들은 현 정치적 상황에 있어 누가 애국을 했는지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가령 나치 시대 대부분의 대중들은 스스로를 애국자라 여겼겠지만 현재에 와서 나치에 반대하고 자유와 인권을 위해 투쟁한 이들에게나 애국자라는 평가를 붙힐 수 있을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모든 가치의 최상위에는 인권과 도덕이 존재한다.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행위는 애국적일 수 없다. 모든 공동체는 집단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 존재하고, 그것을 이룩하지 못한다면 존재 가치가 없다. 헌법에서 스스로 규정하는 국가 최고 규범적 가치를 실행에 옮기지 못하는 행정부와 정권은 집권 자격에 흠결이 존재할 수밖에 없고 인권과 그것을 기반으로 하는, 혹은 인권의 기반이 되는 범도덕적 원리에 단호히 반대하는 세력은 전체 집단의 생존과 번영이 아닌 특정 집단의 생존과 번영만을 추구하는 위험성을 내포한다.

문제는 그것이 민주주의적 원리, 혹은 자본적 우위, 무력의 독점을 통해 사회적 질서를 형성하는 경우를 생각해볼 수 있다. 자본주의에서 윤리란 자본의 축적을 의미하고, 독재에서 윤리란 독재자, 혹은 독재 정당의 절대 권력을 지키는 것이다. 이것이 말하는 윤리와 도덕은 우리가 인권을 기반으로 하여 인식하는 규범과 큰 차이가 있다. 그것은 타인, 혹은 대중, 국민, 시민이라 불려지는 자들의 권리를 인정치 않고, 그들 삶의 풍요와 행복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즉, 인권을 존중하지 않는 가치 체계이다.

인권을 존중해야 하는 이유는 당연하다. 그것이 다수의 행복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인간의 집단에서 행복은 매우 중요한 가치이며, 한 개인이 생명으로서 살아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절대 다수가 불행한 사회가 장기적으로 생존 가능하며 항구적 발전과 평화를 이행할 수는 없는 법이다. 불행과 불만은 충돌과 갈등을 빚고, 시간에 따라 증대하는 사회 비용의 엔트로피는 그 사회의 여력과 자산을 갈등과 분쟁의 해결에 투입하게 될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그 사회는 스스로 붕괴한다. 즉, 집단의 구조적 모순이 집단의 생존 가능성을 스스로 불능 상태로 만든다는 것이다.


물론 인권을 존중하지 않는다면 모든 집단이 붕괴하는 것은 아니다. 역사상 수많은 왕조와 국가들은 구조적 이유만으로 붕괴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역사상 대부분의, 혹은 적지 않은 집단은 내부 구조적 모순을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에 멸망하거나, 그 원인이 된 경우는 무수히 많다.

또한 인권에 대한 보장이 어느 수준이냐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민중 대다수가 비참하게 살아간다 하더라도 국가는 존립할 수 있다. 그들이 생존이 가능한 상태이기에 생존에 몰두하며 협력과 연대보다 상호 경쟁하는 것에 몰두하는 상태, 혹은 아예 생존만을 위해 남은 여력을 모두 투입해야 하기 때문에 그 이상을 추구하는 것이 불가능한 빈사의 상태. 전근대의 경우, 민주와 국민주권을 상상할 수 없는 체계 속 개인.

이러한 상태에서 첫번째의 경우 일정 정도의 권리는 보장이 되지만, 구조적 모순을 사회적 규칙으로 받아들이길 요구하고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인 이들에 의해 유지되는 경향이 크다. 극소수의 기득권이 어떠한 이유로든 막대한 특권과 자본을 독점하며 그것을 제도적으로, 사회적으로 인정 받아야 한다 믿는 경우 그러한 기득권에 도달하고 싶거나, 그들에 의해 사회의 안정과 발전이 이루어진다 믿는 그렇지 못하는 자들에 의해서 구조적 모순은 해소될 수 없다. 아니, 애초에 인식되거나 인정받지도 못한다.

지구상 대부분의 국가를 구성하는 민주주의 체계는 근본적으로 국민주권을 인정해야 하고, 그러한 국민주권은 본질적으로 인권을 보장하기 위함이다. 국민 스스로가 결정하고 책임지는 것으로 인해 소수의 집권 기득권에 의해 다수가 피해를 입는 상황을 방지하고 다수의 의견과 주장을 모아 더 나은 결론을 낼 수 있는 토론의 장을 만들기 위해서이다. 결정권자는 스스로 생각하여 선택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애국자라고 하는 이들은 자신이 믿는 어떠한 가치를 위해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고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것이 민주주의의 원리와 체계를 위협하는 것이 아님에도 그들에게 다양한 낙인을 찍고 국가의 적으로 규정한다. 그들의 적은 외부에 있지 아니하고 언제나 내부에 존재하며, 외부의 적과 싸우는 것보다, 외부의 적에게 비난하되, 싸우는 건 내부의 동조자를 향한다. 그들이 상상하는 국가에는 모종의 순수성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해치는 것에 병리적인 면역 반응을 일으켜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알러지 반응이지 병원균 반응이 아니다.

물론 내부의 적과 싸워야 할 것이다. 국가 정체성을 거부하고 외부 정체성을 받아들인 채 그것을 주류로 만들고자 하는 이들, 직간접적으로 잠재적 적국이나 경쟁국에 이익을 가져다주는 자, 국가의 원리와 규범을 형해화하고 파괴하려는 자들.

말은 언제나 옳다. 어떻게 규정하고 인식하는가의 문제에 있어 평범한 국민은 국가의 적으로 규정되어 사냥을 당할 때도 있고, 사회 개혁을 위해 노력하거나, 소수자의 권리를 요구하는 것이 국가의 적으로 공격 당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다시 돌아와서, 누군가의 애국이 누군가의 비애국이 될 수 있는가? 그렇게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스스로 애국을 한다 믿는 자들도 순수한 활동이 오판에 따른 비애국적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러한 가치판단의 문제에 있어 모든 이들의 행동이 결과적으로 애국심에서 출발한 것이라 할 수 있을까? 정녕 비애국적 행동은 없는가? 끝 없는 충돌과 논쟁을 발생시키며, 서로가 서로를 공화국의 적성 행위라 규정 짓기도 하는, 진보의 애국도, 보수의 애국도 모두 똑같은 애국일까?

나는 과감히 그렇지 않다고 말할 것이다. 나치 시대의 애국이 진정 애국이 아니었고, PATRIOT Act가 글자 그대로 애국적이지 않으며, 노동자의 안전과 권익을 위해 투쟁하는 것이 적성 행위가 될 수 없고, 노인에게 더 윤택한 삶과 청소년, 어린이에게 더 안전하고 부당치 않은 경험을 하게 해주는 것이 비애국적이라 할 수 없다. 사회적 안전망을 구성하여 취약한 이들이 한번의 실패만으로 그들의 삶이 복구 불가능한 상태로 남는 것을 방지하는 게 비애국적일 수 없다. 부정부패와 비윤리적 차별을 정당하게 처벌하고 방지하자는 것이 나라를 위한 일이 아닐 수는 없다.

그것이 국가 최고 규범이 규정한 인권을 지키는 행위이고, 민주국가의 주권자를 보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국민이 주권을 가졌다면 당연히 국민 한 사람 한 사람보다 다른 누군가가 더 우월할 수는 없다. 민주주의 사회에선 역할이 존재할 뿐 계급적 우열이 존재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단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것을 넘어 기회의 균등과 정당한 권리를 보장하고, 법적, 제도적 정의를 지켜 사회의 혼란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 역시 국민을 지키고 그들의 행복을 보장할 수 있는 것이다.

필요에 의해 자연스럽게 형성된 모든 집단은 목표를 가진다. 적과 싸우고 구성원을 지키기 위해 형성된 것이 전사 집단/군대이듯이, 국가란 모든 사람들이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되어야 하지 특정할 수 있는 소수 특권 계급을 위해 존재할 수 없고, 존재해서도 안 된다. 최소한 우리의 헌법은 그렇게 규정했다. 그렇다면 애국과 비애국을 구분 짓는 기준은 이미 준비된 것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부정부패의 처벌과 방지를 요구하는 것이 어떻게 비애국적인가? 당파와 진영의 소속에 근거하지 않는 한 부정한 자의 권력 행사는 보호 받아선 안 된다.

차별받는 소수자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운동이 어떻게 비애국적인가? 그들에게 투입되어야할 세금이 다른 곳에 쓰여야 한다는 목적이 있지 않고서야, 또한 그들의 표 행사보다 더 많은 이들에게서 받을 표가 계산된다면 그렇게 말할 것이다.

개인적 이익 내지는 부당한 보복을 우려하여 특정 정당이나 정치인에게 유리한 기소와 판결을 내리는 판검사를 비판하는 것이 어떻게 비애국적인가? 그것을 통해 이익을 얻는 자들과 그들의 권력을 지지하는 자들이 아닌 이상에야 비애국적이라 할 수 없다.

정치적 승리를 위해, 또는 정치적 책임을 피하기 위해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지 못한 사건을 정치화하는 이들에게 책임을 요구하는 것이 어떻게 비애국적인가? 그러한 책임이 특정 진영으로 향해 정치적 불리함을 만드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다수의 정의와 소수 이익의 대립 속에서 정의를 추구하는 것이 어떻게 비애국적인가? 그러한 대립에서 정의가 훼손되어도 이익을 원하는 자들은 비애국적이라 할 것이다.

군납비리를 저지른 지휘관을 해임하거나 처벌하라는 요구가 어떻게 비애국적인가? 스스로 군대를 약화시킨 지휘관이 병력의 전투력을 온존시키고 전쟁을 제대로 수행하리라 믿지 않는 한에야.


어떤 애국이 진짜 국가와 사회, 그리고 국민에게 도움이 되는 애국인지에 대해서는 그 사람이 얼마나 온전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느냐와, 그 가치관이 어디에 기인하여 형성되었는지로 알 수 있다. 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해 자본주의적 시장에 혼란을 가져와 경제를 왜곡시킨 경제사범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 올바른 가치관으로 나올 수 있는 결론인가? 더 나쁜 사람이 그 자리를 차지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은 처벌과 책임추궁이 제대로 이루어지는 사회에서는 나오기 어렵다. 일정 규모와 수준의 사회에서 대체하지 못할 것은 드물다. 그것은 CEO나 대통령이라 해서 다를 게 없다.

이 나라의 최고 규범은 인권과 자유, 민주를 기치로 삼았고, 그것을 단호히 거부하는 자들이 바로 비애국자이다. 말은 행동보다 강력하지 못한지라, 그들이 말하는 자유, 인권, 민주, 애국, 정의란 단어는 그들의 가치관에 맞는 의도를 내포한다. 그것은 단어 그대로의 뜻이 아니다. 목적에 따라 가공된 단어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너와 나의 구분으로 이루어지며, 여기서 말하는 너는 우리의 적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러한 사상에서 촉발되는 그들의 행동은 적에 대한 적개심과 증오, 폭력과 차별로 발현된다.

그렇다면 누가 애국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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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오에는 계획이 없습니다. 더 큰 증오를 증명하기 위한 계획이 있을 뿐이죠. 우리네 독립운동가와 비교하긴 꺼림칙하나, 모든 우리 독립운동가들이 진정 자신들의 활동으로 나라를 되찾을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을 강력하고 진지하게 가지진 않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특히 30, 40년대에는 더더욱이요.

 

그럼에도 독립운동을 해야 했던 이유는 그게 민족의 대의인 동시에, 적지 않은 부분이 바로 침략자 일제에 대한 증오일 겁니다. 침략하여 빼앗고 죽인 자들을 상대로 우리가 이길 수 있고 현 상황을 뒤집을 수 있을 거라는 믿음 대신 하나라도 더 많은 적들을 죽이는 것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경우 역시 있었을 겁니다.

 

물론 독립운동가와 그대로 비교할 수는 없을 겁니다. 한국 독립운동가 정도면 그나마 꽤 온건하게 한 편인가 싶을 정도이기도 하고요. 최소한 무차별 민간인 테러를 하는 경우가 거의 없거나 극히 없다고 봐도 될 정도였으니까요. 이 경우엔 그 테러, 보복의 장소가 국내이고 피해자로 같은 조선인들이 많을 거라는 것도 이유이긴 합니다만.

 

요는 독립운동이든 하마스의 활동이든 IRA의 활동이든, 그들의 활동 기저에는 정의와 자유만큼이나 분노와 증오가 크다는 거고, 사람에 따라, 조직에 따라 그 비중은 크게 차이를 보일 수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너무 오래, 너무 많은 사람에게 지나치게 분노를 응축시켜놓으면 그 반발 역시 클 수밖에 없습니다. 심지어 통제와 관리를 할 머리들을 죄다 잘라놓으면 더더욱 터질 때 폭주할 수밖에 없죠. 분노 역시 방향을 잡아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데나 튀거든요. 임정에서 일본인이면 민간인 무차별 씨몰살하자, 왜놈 유충들 참수하자고 하는 놈은 없었습니다.

 


하마스는 추악한 행위를 저지른 테러리스트지만 그런 테러리스트들은 어디 땅 속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게 아니라 이스라엘이 만든 괴물이기도 합니다. 그들의 테러와 잔악 행위가 역겹다 한들 그들이 그렇게 된 이유, 그렇게 만든 이들이 있는 한 단순 사악한 괴물 테러리스트라고만은 할 수가 없죠.

 

약자가 항상 정의는 아니고, 싸우면서 정의를 챙기는 것도 여유가 있어야 가능하며, 당하면 당할 수록, 잃으면 잃을 수록, 억압 받고 차별 받고 죽기를 바랄수록 악에 받힐 수밖에 없게 됩니다. 가진 게 없고 약하기 때문에 더 비도덕적인 집단이 되기도 쉽고요. 홀로코스트를 피해 도망 온 사람들에게 자기 집에서 머물 수 있도록 해줬는데 그 대가가 은인에 대한 침략과 학살이며 말살을 목적으로 하는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감옥이라면 당연히 증오와 혐오는 이루 말할 수 없게 되겠죠. 

 

애 어른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모두 죽이고 싶을 정도로요. 사람이 괴물이 되는 건 대단찮은 이유가 아니죠. 당했는데 갚아줄 힘이 없을 때 괴물이 되는 겁니다. 조금이라도 더 갚아주기 위해 지켜야 할 선을 하나하나 포기하다보면 그렇게 되죠. 가끔은, 한번에 여러 단계를 추월하기도 합니다. 팔레스타인의 어느 소년은 자폭 테러를 한 자기 누이를 자랑스럽게 여기며, 같은 길을 갈 거라고 하더군요. 그게 자신의 운명이라고. 다른 선택지들도 있겠지만, 어떤 이들에겐 정해진 선택지가 있는 법일 겁니다. 사람 마음이라는 게 그렇게 만드니까요.

이기고 싶어서 싸우는 게 아닙니다. 죽이고 싶어서 싸우는거죠.

 

하마스가 갑자기 생겨났을까요? 그들의 잔악 행위가 그들이 원래부터 사악한 괴물들이라 그럴까요? 중국군이 한국을 장악하고 지역별로 게토를 만들어서 감옥화 시키고 재미 삼아 쏴죽이고 물도, 전기도 제대로 공급 안 해주며 신나게 죽이고 고문해대면 한국인 중에 증오에 머리가 터지고 악에 받혀 중국인이기만 하면 한명이라도 더 죽여버리겠다며 몸뚱이에 폭탄 묶고 자폭할 사람 없을까요? 다 같이 총에 칼차고 기습 공격해서 중국인 민간인 잡아다 신나는 보복을 하고 싶은 사람 하나도 없겠습니까?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잔혹하고 끔찍하며 반인륜적인 행위가 보복, 되갚음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한 쾌락이 될텐데요.

 

멀리 갈 필요도 없이 북한군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사람, 중국인에게 강간 살해 고문을 현재 진행형으로 당하고 있는 위구르인들은 그들에게 잔혹한 보복을 상상하지 않을까요? 당연히 하죠. 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일 뿐이지.

 

하마스가 딱 그런 상황입니다. 온갖 개짓거리란 개짓거리는 수십년 동안 죄다 당했는데 증오와 혐오, 분노가 뼛속 깊숙하게 자리잡지 않으면 죄다 성불해서 부처가 되어야지 테러를 하겠습니까. 우리 사회의 일개인의 잔인하고 반인륜적인 범죄를 보고 가죽을 벗겨야 하네 팔다리를 포떠야 하네 산 채로 불태워야 하네 하는 건 잔인하다 축에도 못 낄 온갖 기발한 고문과 살해 방식으로 분노하는 이들이 실제로 그보다 더 한 피해를 입은 자들의 분노에 공감하지 못한다면 그거야 말로 위선입니다.

 

 

하마스가 잔혹한 테러를 저지른 건 맞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만든 건 이스라엘이죠. 가해자는 신나게 가해하는데 악에 받힌 피해자의 보복에는 비난한다니, 같잖기도 해라.

 

아 물론 하마스가 저지른, 이스라엘에 비해 특별할 것도 없는 행위가 잔혹한 건 맞고 미디어에서 부정적으로 다뤄지며 세계인에게 부정적인 인식이 씌워지는 건 맞는데, 그게 그토록 잘못이라면 다 같이 손잡고 팔레스타인에 쳐들어가서 팔레스타인 사람이라면 노인부터 신생아까지 쏴죽이고 찔러 죽이고 묻어 죽이고 태워죽이고 목졸라 죽여서 지구상에 팔레스타인인이라는 단어는 역사책에서나 찾아볼 수 있도록 멸절시켜야죠. 마찬가지로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면 무제한 인종멸절권 부여하고요. 힘 센 가해자는 무조건 무죄고.

 

이스라엘이 억울할 게 뭐가 있습니까. 자기 업보인데. 이런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하마스의 개새끼짓에만 분노하는 게 바로 위선입니다. 선비짓도 그런 선비짓도 없죠.

 

 

참고로 전 하마스의 행위 자체를 옹호하는 게 아닙니다. 당할 짓을 했으니 당하는 거고, 그게 잔혹하든 그렇지 않든 혈채를 갚은 거라는 걸 인정하는 것 뿐이죠. 애들 참수하고 외국인 시체 조리돌리는 거? 물론 통제되지 않은 죄악이고 무분별한 공격입니다.

 

근데 미쳐서 눈깔 돈 놈들이 사리분별 못하고 총들고 브레이크 댄스 추는 걸 누가 말리겠습니까. 그걸 통제하고 관리할 팔레스타인, 하마스 측 인물들 단 한번도 멈춘 적 없이 암살해댄 건 이스라엘인데. 그래서 업보라는 겁니다. 약자가 정의롭지만은 않듯이, 그 약자들의 분노가 광기가 되어 대상을 가리지 않고 분출되는 것 역시 있을 수 있는 현상입니다. 

 

그걸 이해해야 일차원적 하마스 개새끼 소리가 얼마나 유치한 줄 아는 거죠. 개빡쳐서 눈깔 돈 놈이 자기 말리는 사람한테도 주먹질 하는 게 드문 일입니까? 하도 조롱 받고 괴롭힘 받은 사람이 피해망상에 빠져 중립적인 사람의 평범한 행동에도 너도 나 놀리냐며 쌍욕 박는 게 그리 신기한 일인가요? 똑같아요. 거기에 피와 시체만 추가 된 것 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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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리뷰는 작품에 대한 내용누설이 있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쓰는 리뷰네요. 그동안 본 작품들이야 많았지만 게으른 것도 있고, 쓸 정도는 아닌 작품들도 있고 해서 안 썼다, 최근 완결까지 본 바바리안 퀘스트는 좀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먼저, 이 소설의 초반부는 큰 흥미를 끌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모든 교과서적인 서사를 지닌 작품들의 초반부는 중후반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밋밋하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고요. 이는 심지어 무한의 마법사의 극초반부에 있어서 큰 흥미를 끌지 못하거나 심지어 작품 특유의 의도적인 불쾌감을 주는 부분 때문에 더더욱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부분을 지나간다면 작품은 독자를 끌고 갑니다. 주인공 유릭과 그 주변인들은 살아 있는 욕구와 감성을 가지고 움직이며, 그것은 상당한 설득력을 지니죠. 백수귀족 작가의 전작이었던 킬 더 드래곤에서처럼 담담하면서도 진한 인간미가 드러나는 필체는 상당히 매력적이기도 하고요.

 

 

주인공 유릭은 서부의 야만인입니다. 하지만 그 어떤 사람과도 달랐죠. 괴력을 타고난 강력하고 뛰어난 전사이자 사냥꾼이라는 점부터 시작해서 상당한 지성을 지닌, 타고난 영웅의 기재입니다. 그러나 그의 기질은 탐험가에 있지 전사에 있지 않았죠. 이 부분은 조금 엄밀하게 이야기해야 할텐데, 모든 뛰어난 탐험가는 뛰어난 전사적 기질을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전사는 적과 싸우는 존재이고, 적과 대적하여 이겨내는 자를 말합니다. 대개의 경우 전사라 함은 다른 전사, 병사, 집단 등 사람과 싸우는 자를 상정하지만, 탐험가에게 적이란 자기 앞을 가로막는 모든 장애물을 말합니다. 때로 그것은 칼과 창을 든 사람일 수도 있고, 귀족일 수도 있고, 제국이나 문명사회 그 자체일 수도 있으며, 심지어 동료와 친구, 은인, 자식이 될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미지의 자연 그 자체가 적이 되어야 하죠. 탐험가란 알지 못하는 새로운 곳을 알고자 하는 이들이며, 그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세계는 언제나 위협적인 무언가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그것에 겁먹지 않고 마땅히 한 발자국을 내딛을 수 있는 용기와, 그러한 미지의 존재와의 싸움에서 살아남고 이겨나가는 강인한 육체와 정신을 필요로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어떤 상처를 입어도 살아남고, 어떠한 적과 맞서도 이겨내며, 끝끝내 제국을 무너뜨리고 문명사회에 거대한 충격과 새로운 세계관을 이끌어낸 유릭은 세계관 최강의 전사이자, 그러한 기풍을 인간에게 돌리지 않고 죽을 때까지 자신이 알지 못하는 새로운 것, 미지의 장막 너머, 낯선 세계에 쏟으며 어린 시절에 그랬듯, 가슴이 뛸 줄 아는 사내입니다.

 

만약 그가 전사이기만 했다면 문명 사회는 끔찍한 꼴을 당했겠죠. 문명 사회를 크게 퇴보시키는 멸망의 존재가 될 것이고, 악마의 이름으로 전승이 될 것이며, 뛰어난 지성과 예술, 기술과 인격이 존재했던 아름다운 세상을 스스로의 손으로 멸하는 자가 되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죠. 그는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즐거워 했고, 타고난 호기심으로 모르는 것을 알고자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을 배우고, 또 글을 배우며 익히고 받아들였죠. 익히고 배우는 것. 지성인의 가장 기본적인 태도이자 가장 중요한 핵심. 유릭의 지성에 대해서는 작중 캐릭터들이 수 차례 놀라고 인정한 요소이죠.

 

그렇기 때문에 유릭은 문명인들이 이룩한 위업을 진심으로 경탄할 줄 알았습니다. 그저 빼앗고 부수고 약탈하기만을 즐겼던 그 어떤 서부의 야만인과는 다르게요. 그리고 그의 선택 덕에 문명은 자신이 이끌고온 서부의 약탈자들, 연맹에게 파괴 되었지만, 동시에 보호될 수 있었습니다.

 

예술에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는 자에게 모나리자나 최후의 만찬, 아테네 학당을 보여준다 해도 그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그저 땔감으로 쓰면 족할 화려한 장작일 뿐이죠. 하지만 그것을 보고 아름답다는 감각을 느끼고, 그 미학에 인간 예술의 거대한 위대함을 느낀다면 그것은 지고의 예술이 됩니다.

 

유릭은 그것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었지요. 제국 수도 하멜의 위대한 건축물과 예술에 진정 감탄할 줄 알았기에 하멜을 공격하면서도 약탈을 제약하고, 다시 적극적으로 재건하는 것은 민심이 아닌 자신의 욕구에 따르는 일이었습니다. 천 위에 얼룩진 색채에 의미는 담고, 감정의 움직임을 느끼는 사람에게 그것은 중요하고 소중한 무언가가 되기 마련이니까요. 설령 그것이 단순히 모래를 쌓아 만든 모래탑이라 할 지라도, 그것에 만족한다면 그것이 부숴지지 않고 훼손되지 않기를 바라는 것처럼.

 

그럼에도 그는 탐험가였고, 의도적으로 연맹을 약화시킨 후 사라졌습니다. 마치 이야기 속 영웅처럼. 전설처럼, 또 신화처럼.

 

탐험가. 모험가. 그것이 유릭의 정체성이었기에 자신의 생존이 어떠한 의미를 지닐 지 알면서도 그것을 감추며 남부를 여행하고, 또 다시 동부로 가게 됐습니다. 친우를 만날 겸, 자식도 보게 될지 몰라서, 무엇보다 바다 너머를 가기 위해. 동대륙이란 이름은 20년 전부터 그의 마음 속에 새겨진 미래의 계획, 혹은 추구였죠. 그에게 세상은 여전히 넓었고, 여전히 가슴 뛰는 모험이 존재한다는 것을 새겨준.

 

 

유릭은 금기는 범한 자입니다. 하늘산맥은 서부인에게 금기였죠. 감히 그것을 넘지 말라는 공통된 인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태생적인 탐험가인 유릭은 그 너머를 원했습니다. 비록 스스로의 의지만으로 했던 것은 아니지만 제국의 탐험가이자 기사에 의해 하늘산맥을 넘는 지점에서 유릭은 그들을 죽이고 바라봤습니다.

 

고향의 땅. 그리고 금기 너머 미지의 땅. 서부의 어떤 자라도, 심지어 지즐조차도 전통과 금기를 함부로 범할 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유릭은 과감히 그것을 넘어버렸죠. 호기심이라는 천성을 그가 하늘산맥이라는 금기를 아무렇지 않게 넘는 이유가 됩니다. 그에게 미지란 도전의 대상이지 두려움의 대상은 아니었으니까. 그가 가장 위대한 이유는 시작과 동시에 제시되죠. 절대와 같은 금기를 자신의 의지로 극복하는 것. 새로운 것에 대한 욕구를 제시하는 것. 더 나아가 그것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가에 대해서까지.

 

 

유릭의 주변 사람들도 생동감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기실 대부분의 캐릭터들이 그렇죠. 주인공의 동료들이 잘못되길 바라는 사람은 없겠지만, 이 작품에서 동료들이란 그저 잠시 함께 하는 자들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작품의 정체성 그 자체를 드러내는 서술이기 때문인데, 유릭이라는 주인공 자체가 이방인입니다. 서부의 야만인으로 금기로 여겨진 하늘 산맥을 넘고 문명 사회에 진입한 이방인이죠.

 

이방인은 그 이름이 바뀌지 않는 한 언제나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뿌리 내릴 수 없죠. 부평초처럼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듯, 그는 이런 저런 사람들을 만나고, 함께하며, 또 이별합니다. 유릭의 형제들과 지낸 시기는 결코 짧지 않을 테지만 그는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위해 기꺼이 형제들을 떠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에게 주어진 많은 것들, 작위나 땅. 부귀영화조차도 그가 원하는 게 아니었으니까요.

 

그것이 얼마나 삶을 풍요롭게 하고 안전하게 하며, 안락하게 할 수 있다 하여도 유릭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더 추구했기에 미련 없이 버릴 수 있었습니다. 자신이 얻은 것이되, 자신의 것이 아니었기에 미련을 가질 이유가 없었죠. 자기 자신에 순수한 자. 천성이죠.

 

탐험가는 언제나 새로운 곳을 보기 위해 떠나는 사람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더더욱 설득력을 얻습니다. 서부를 떠나고, 포를카나와 용병단을 떠나고, 제국을 떠나고, 북부를 떠나고, 다시 서부로 돌아와 제국을 멸망시켰음에도 다시 떠났죠. 그렇게 떠나고 또 떠나오는 삶은 힘겨울만도 하지만 오히려 즐거웠을 겁니다. 새로운 것을 보고 배우고 익히고 접하는 것에 즐거움을 느끼는 종류의 인간이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피붙이와 친우를 두고도 죽을 지 모르는 바다로 나갔습니다. 전혀 모르는 새로운 것. 동대륙을 향해서.

 

그는 진정 뿌리 내릴 수 없는 사람입니다. 태생이 그러했죠. 부모 없이 들판에서 주워진 아이. 부모라는 뿌리부터 없었습니다.

 

 

작품 내에선 여러 영웅적인 인물들이 나옵니다. 유릭을 제외하고도 바르카, 다미아, 얀키누스, 사미칸, 벨루아, 페르젠.

 

이 중에서 벨루아나 다이마는 조금 쳐진다 해도 나머지 인물들은 꽤 영웅적인 인물입니다. 그들의 성과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천성이 그러합니다. 바르카는 왕실에서 오냐오냐 하며 컸기 때문에 건방지고 우둔했지만 유릭과 만나고 필리온 경의 죽음을 겪으며 어린 모습을 버리게 되며 왕의 자질을 얻습니다.

 

사실 바르카는 꽤 비판을 받을만한 캐릭터이긴 합니다. 다미아와 함께 일단 넘어가고..

 

얀키누스는 황제로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러나 황제로 태어났기에 수많은 사람들의 당연한 기대를 받아야만 했죠. 나는 그걸 할 수 없는데 당연히 할 줄 알아야 했고,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할 수 있게 되어야 했습니다. 그건 단순히 노력을 하느냐와 다르게, 그냥 그렇게 해야 했기에 하게 되어야 하는 것에 가까웠을 겁니다.

 

모든 것은 상속 받은 채 태어났기에 부족함도, 모자람도 없는 세계의 지배자였으나 바로 그것이 얀키누스의 갈증을 만들었습니다. 내가 스스로 얻은 게 없다는 것. 모든 것이 상속 받은 것이지 내 손으로 이룬 것이 없다는 잔혹한 갈증. 그는 정복자의 핏줄을 타고났고, 정복할 것이 필요한 침략자의 자질과 그것을 다루는 통치자의 자질을 물려 받았습니다. 그의 정치력과 판단력은 부족한 편이 아닙니다. 오히려 뛰어난 편이죠.

 

그러나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그는 서부를, 그리고 동대륙을 정복하고자 했습니다. 단순히 교류를 하는 게 아니라 필요 없는 싸움을 벌이고, 무가치한 땅을 정복하며, 죽을 이유 없이 피를 흘리게끔 하며 자신의 위업을 만들어내고 싶어 했습니다. 모든 걸 다 가졌으나 업적에 목마른 자. 그게 얀키누스였죠.

 

그런 그를 역겹다고도 할 수 있고 멍청하다고도 할 수 있으며, 애처럼 군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게 그의 본질인 것은 어쩔 수 없죠. 탐험가에게 언제나 새로운 곳을 필요로 하듯, 정복자는 언제나 장복할 것을 필요로 했습니다. 유릭과 얀키누스는 이러한 면에서 비슷한 사람이었죠. 단지 탐험가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미지를 대하는 지, 아니면 정복자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미지를 대하는 지에 대한 태도 차이일 뿐입니다.

 

만약 유릭이 얀키누스로 태어났다면 그는 군사력이 아닌 탐험가를 동원하여, 어쩌면 스스로 탐험가가 되어 하늘산맥을 넘고 그곳에서 서부의 야만인들과 같은 방식으로 살며 그들의 삶을 이해하고 익히려 했을지 모를 일입니다. 얀키누스가 서부에서 태어났다면 사미칸의 이름을 대신 했을 것이고요.

 

그럼에도 그는 황제였습니다. 자신이 실패하고 모든 것이 영락하며, 가장 추잡하고 수치스러운 꼴을 당하고서도 생을 갈구하며 승자의 권리를 충실히 지켰죠. 승자로서 자신에 대한 생사여탈권은 물론, 어떻게 망가뜨리고 수치를 주고 조롱하는 것조차 패자가 살아 있을 때나 의미가 있으니까요. 그는 생존으로서 유릭의 권리를 지켜냈습니다. 계약을 중요시 하는 문명사회의 푸른 피다운 태도라면 태도였죠.

 

그렇다고 증오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실패는 자신에게 있지 승자에게 있지 않으니까요. 그들은 싸웠고, 생존의 문제에 있어 규칙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중요한 건 이기느냐 지느냐, 누가 이겼는가. 얀키누스는 패배자였고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였습니다. 그건 감정의 영역이 아니라 사실의 영역이었죠. 그렇기에 그는 최후의 식사에서도 유릭을 증오하거나 분노하지 않고 도리어 당당하게 식사를 하고 오랜만에 제대로된 식사였음이라 감사를 전합니다.

 

실패하였고, 인격적 결함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그는 실로 지배자였습니다.

 

 

페르젠은 재밌는 캐릭터입니다. 문명 사회를 대표하는 전사이자 기사인 동시에, 전설 그 자체가 된 사람입니다. 평생을 루의 품에서 살아왔음에도, 스스로 전사였기에 전사를 좋아하지 않는 루의 품을 떠나 자신이 무수히 죽이고 정복했던 북부의 울가로를 믿었습니다. 유릭과 비슷한 면이 있죠. 단지 기사적인 인물이었을 뿐.

 

뛰어난 통찰력, 늙었지만 날카로운 검술과 실전적인 수법들. 살아온 세월만큼 그의 인생에 새겨진 것들은 모두 그의 무기이자 명성이었습니다. 그러나 루는 전사를 좋아하지 않고, 그는 오래 사는 것으로 형벌을 받고 있었죠. 이미 죽어야 할 나이였음에도 그저 늙고 병들고 기량이 쇠해지면서 전사로서도, 기사로서도 추락해가는 삶을 사는 것으로요.

 

그는 마지막 전장에서 전사로서 죽고 싶어했지만 그의 위치가 감히 그러지 못하게끔 했습니다. 그와 싸워서 이길 적도 없었고, 하찮은 화살에 맞아 죽기에 그는 너무 거물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을 죽일 사람을 골라야 했죠. 인정 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하면서도, 자신을 죽이는데 거리낌이 없어야 하며, 무엇보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법한 사람.

 

유릭이었습니다. 북부에서의 많은 경험을 가진 페르젠은 자연스럽게 유릭이 북부 출신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챕니다. 남부의 인종과도 다르다면 남는 건 서부일 수밖에 없죠. 그리고 페르젠은 과감히 그가 서부 출신일 것이라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음을 유릭에게 넌지시 알리며 죽이기 위한 이유를 만들어주죠.

 

그리고 싸웁니다. 당연히 늙고 쇠한 페르젠은 유릭을 감히 감당할 수 없고, 죽게 됩니다. 그의 유언은 울가로여..

 

유릭은 크게 놀랍니다. 평생을 북부와 싸워온 기사이자 영웅이 정작 루가 아닌 울가로를 믿었다고요. 하늘 산맥을 넘어 조상의 영혼이, 자신의 영혼이 어디로 가야 하는가에 대한 번뇌를 가진 유릭은 그때 페르젠의 개종 사실을 알게 되고 루에게 의탁한 자신의 영혼을 되돌려 받습니다. 그저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그 두려움에 믿었던 루였고, 그것은 나약한 도피에 불과했으니까요.

 

울가로의 환영은 단지 그러한 번뇌의 발로였을 뿐..

 

 

사미칸과 벨루아는 서부의 영웅이라 칭해도 부족함 없는 사람입니다. 물론 벨루아가 조금 쳐지죠. 여성이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지만 애초에 기질 자체가 지배자나 통치자가 아닌 대장장이에 가깝습니다. 유릭과 얀키누스, 페르젠, 사미칸과 벨루아는 비슷한 특성을 가지고 있지만 공유하는 교집합과 서로 다른 곳에 방점이 찍혀 있죠.

 

사미칸은 타고난 정치가였습니다. 통치자라고 하기엔 조금 부족하지만 그의 정치력은 타고난 영역에 가깝고, 수많은 사람과 부족들을 파악하고 조율하는데 능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누군가를 견제하고 밀어낼 수 있고, 자신의 품에 담을 수 있는지. 한번도 거대한 체계를 이룩한 적 없는 서부에서 구전으로만 남는 역사를 지니는 지역의 출신이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운 역량이었죠.

 

하지만 바로 그런 정치가로서의 기질이 그를 실패하게끔 만들었습니다. 그 역시 약한 자는 아니었지만 유릭이었다면 죽지 않을만한 상처와 싸움 속에서 그는 상처 입고 약해졌으며, 무엇보다 거대한 욕심이 그를 죽게 만들었죠. 모든 정치인들이 그렇듯이 그 역시 자신만의 업적, 성과를 위해 타인의 목숨을 희생시킬 줄 알았습니다.

 

그는 전설이 되고 싶어했고 그것을 위해 승산 없는, 혹은 도박에 가까운 공격을 실행하려 했습니다. 유릭은 언제나 부족과 동포만을 생각했고, 그 이상으로 권력이나 지배자를 원하지 않았으며, 탐험과 모험에 더 타오르는 남자였음에도 사미칸은 단지 그가 그럴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견제했죠. 형제의 맹세를 했음에도 그는 유릭을 형제로 대하지 않았습니다. 정치인에게 쇼맨쉽을 중요하고 말은 어디까지나 말 뿐이었으니까요.

 

만약 그가 유릭을 죽여도 됐다면 죽였을 겁니다. 그러기에 너무 아까웠을 뿐이지. 그럴 수 없었기에 죽이지 못했을 따름입니다.

 

스스로 병 들어 죽기 전에 제국을 친다는 도박을 할 때에도, 유릭과 정당하게 싸우는 대신 그에게 치사량에 가까운 독을 쓰고 유릭이 자신을 먼저 공격하지 못해도 자신은 그럴 수 있다는 걸 알았죠. 그의 정치적 역량과 사고의 유연성은 확실히 여느 문명인 귀족, 왕족과 비교해서도 부족함은 없었다고 평가합니다. 단지 그 정치적 기질, 집단의 생존과 번영보다 자신의 명예와 영광, 업적을 탐하는 자세 역시 부족함이 없었을 뿐이죠.

 

그가 더 오래 살았다면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었겠지만, 단일화되지 못한 권위(유릭-사미칸)으로 꾸준한 분열과 갈등이 있었을 것이고, 만약 정말 하멜을 치겠다고 했다면 그건 성공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컸습니다. 장창부대는 중기병에게 상당한 피해를 강요하는 새로운 전술이었지만 그럼에도 수적 차이와 전략 전술의 격차, 강력한 성벽을 지닌 공성전이라는 열세를 넘기는 어렵죠.

 

그래서 사미칸 본인부터가 하멜을 정복한다가 아니라, 제국의 심장을 친 야만인이라는 명성을 상상했던 것이고요. 이는 모든 동포를 위해 다시 하늘산맥을 넘고, 전쟁을 준비했으며, 가장 중요한 순간들을 이끌었던 유릭의 방향성과 차이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동포를 위해 하는 짓인데 그 동포들을 다 죽여버릴 셈이냐며.

 

 

구조적으로 봤을 때 사미칸과 벨루아의 역할은 명확합니다. 처음 서부를 통합할 때는 3강 구도를 만들어 바위도끼 부족과 푸른안개 부족의 충돌을 방지하는 세력 구도를 만들고, 이후엔 벨루아의 약점인 여성이라는 점을 강조하여 사미칸과 유릭의 1:1:0.5의 구도를 만들었습니다. 여기서 벨루아는 자신의 주도권을 잃는 상황에 몰아넣어 그것을 타개할만한 계책을 발휘해야 했고, 처음에는 유릭에게, 그 이후에는 사미칸에게 붙었습니다.

 

결혼 동맹을 통해서요. 이건 단지 작품적으로 필요하기 때문 어거지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럴 수밖에 없게끔 상황을 이끌어간 겁니다. 자연스럽고 당연하게요. 작품적 필요로 이러한 캐릭터를 만들고 구도를 만들었지만, 캐릭터의 필요와 합치되게끔 하여 설득력을 확보한 셈입니다. 뛰어난 작가는 이러한 서술이 아주 매끄럽고 자연스럽죠.

 

반면 사미칸은 유릭과의 경쟁 구도에서 반드시 탈락할 수밖에 없는 작품적 운명을 부여 받았으나 벨루아는 살짝 밀려 있었고, 임신을 이유로 중간에 이탈하게 되면서 끝까지 남을 수 있었습니다. 작품적으로는 벨루아를 이탈시켜 양강의 구도를 강화 및 집중시킬 수 있고 더 단순하게 만들어 필요 이상의 복잡함을 덜어낼 수도 있었죠. 여성이라는 특징을 적절할 때 적절하게 사용한 셈입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바르카와 다미아, 그리고 얀키누스를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개인적으로 바르카는 좋아할 수가 없는 캐릭터인데, 저는 단순히 운이 좋아서 횡재하는 캐릭터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그건 주인공이라 해도 마찬가지고요. 단순한 운으로 죽을 뻔 했는데 살아났다 같은 게 아니라 단순 운으로 운명이 바뀔 정도로 거대한 무언가를 손에 넣는다는 걸 싫어합니다.

 

바르카와 유릭의 만남은 있을 수 있는 만남이지만, 그 결과 여러모로 모자랐던 바르카가 왕으로 각성하는 것은 어떤 면에선 다소 어색한 면이 있습니다. 물론 어색하다는 게 개인적인 감상일 뿐이지 작품적으로 용인이 가능하고, 그러한 과정이나 특성을 지니는 캐릭터들이야 수많은 작품에 엄청나게 많죠.

 

다만 그건 다미아라는 캐릭터가 없었다면 더 그랬을 겁니다. 바르카(파헬)의 성공은 단순히 유릭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겁니다. 그 스스로의 능력만으로는 거의 한 게 없죠.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건 어느 정도 철이 들고난 뒤에나 가능했던 거고 그 이전까지 파헬은 너무나도 한심한 애송이였습니다. 필리온이 사후세계를 포기 하면서까지 그를 지키려 했던 충성 덕분에 가능했다는 게 더 말이 될 거고요.

 

주인공과 만나서 그의 보호를 받았기 때문에 왕까지 될 수 있었다는 건 그 본인에게 있어서 글자 그대로 운으로 왕이 된 것과 다름이 없다고 봅니다. 그가 숙부와의 싸움에서 어떤 모습을 보여줬고 승리 후 그를 어떻게 추락시켰는지는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건 그냥 뛰어난 왕의 재목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였을 뿐이지 사실 그런 거 없이 여전히 애송이라도 왕은 될 수 있었습니다. 유릭이 이겼으니까요.

 

단지 여전히 애송이였다면 룽겔 공작의 견제를 감히 버텨내지 못했을 거고 그 이전에 다미아에게 살해 되었을 것 뿐이죠.

 

바로 이 지점에서 전 다미아에게 더 마음이 끌렸습니다. 다미아나 얀키누스나 비슷하게 말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다미아는 단지 여자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할 수 있음에도 가지지 못하는 게 있으며, 지금 상태에 만족하는 대신, 가질 수 있는 것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게 뭐냐 문제냐는 태도를 지닌 캐릭터입니다.

 

얀키누스는 모든 것을 가졌지만 그것은 상속받은 것일 뿐, 스스로의 손으로 얻은 건 아무 것도 없기에 자신의 것으로 얻을 수 있는 업적을 갈구하고자 하는 캐릭터였고요.

 

저는 이들의 욕구를 긍정합니다. 제가 현대인이기 때문에 그러한 감성을 버릴 수 없는 것도 있겠지만 안분지족 대신 더 나은 상태를 추구하는 향상심을 부정하는 건 바람직하지 못한 것도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왜 가진 것에 만족하지 않았느냐고 바르카는 자신의 누이에게 말합니다. 하지만 그건 자기 자신에게도 할 수 있는 말이죠. 왜 하멜에서 망명한 손님 대우를 받으며 안락하게 살지 않고 사람이 죽고 혼란에 빠질 수 있는 내전을 벌였느냐고.

 

왕위가 애초에 자신의 것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왕위를 빼앗길 당시 자신이 왕의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었느냐고 되돌아 봤을 때, 오히려 왕의 자격은 숙부에 더 가까웠을 겁니다.

 

다미아는 단지 여성으로 태어났을 뿐, 모두가 그녀에게 남자 였다면 뛰어난 왕이 되었을 것이라 평했습니다. 많은 것을 보고 읽었고, 익혔기에 대단히 뛰어난 지성을 갖추고 있었고, 결코 꺽이지 않는 정신과 강자의 기질을 타고났으며, 잃거나 희생하는 것에 나약해지지도 않습니다.

 

단지 여성이기 때문에, 남자가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그저 어느 남자의 소유가 되는 것과 비교하기에 그녀는 지나치게 뛰어납니다. 왕이 되어서 이상할 것도, 모자랄 것도 없을 정도로요. 벨루아는 여성임에도 부족장의 자리를 거머쥐었지만 여성이기 때문에 연맹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었습니다. 그곳이 야만적인 곳이었기에 가능했지만, 그렇기 때문에 직접적인 한계가 있었죠.

 

하지만 다미아는 문명인입니다. 왕위는 힘이 세거나 특정 기술이 뛰어나다고 인정 받는 게 아니죠. 숙부가 죽고 바르카가 죽는다면 남은 건 다미아가 최적격자입니다. 또한 다미아의 뛰어난 정치력과 지성, 음모를 꾸미는 솜씨를 고려한다면 몇년 안에 왕권을 확보하고 강력하게 만들었을 지도 모를 일이죠. 그리고 그 모든 것은 결국 자신의 능력을 기반으로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르카는? 자신의 생존조차도 자신의 기사인 필리온이 개고생을 하면서, 그리고 유릭과 형제들을 끌어들이면서 가능했고, 제국까지 갔을 때조차 얀키누스는 거의 가벼운 마음으로 그에게 병력을 빌려 줬습니다. 페르젠은 자신의 욕구와 일치하기에 같이 갔던 거였고요. 결과적으로 그는 스스로 얻은 게 없습니다. 남에게 기댔거나, 빌린 것 뿐이죠.

 

전쟁조차 페르젠이 이끄는 병력으로 세력 하나를 평정했고, 유릭과 페르젠, 제국 중장보병으로 승리를 거머쥔 것이며, 다미아를 빼돌리고 성문을 열어 젖힌 것도 유릭입니다. 그 스스로 한 것은 말 몇마디에 불과할 정도죠. 그 몇 마디가 중요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평가하진 못하겠습니다. 얀키누스에게 병력을 빌려온 것은 분명 중요한 일이지만 그게 그토록 어려운 일이었느냐 하면 꼭 그렇게까진 아닌 거 같고, 그마저도 동대륙 떡밥은 유릭에게 받은 거죠.

 

그런 의미에서 바르카는 왕위를 얻을 자격이 없었습니다. 다미아가 더 어울렸죠. 그가 왕이 된 것은 순전히 운에 가까웠고, 그 이후 각성한 그가 훌륭한 왕이자 정치력을 가지는 것은 어디까지나 내전에서 승리하고 난 이후, 혹은 직전이었으니 스스로 얻은 게 아닌 남의 힘으로 얻고 그걸 잘 유지시킨 것에 불과합니다. 그가 가진 자격이란 그저 선왕의 적자라는 것 하나 뿐이죠. 왕조 사회에서 그건 아주 중요한 명분이지만, 인간적으로 바르카는 자격 미달의 인간이었습니다. 운이 좋았을 뿐이지.

 

그렇기 때문에 바르카를 좋아하기가 어렵습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 남의 힘으로 얻은 것 왕좌에 올라섰고, 제국의 후원 덕분에 보호 받고 성장할 수 있었으면서 제국을 치는데 앞장서며 가장 많은 것을 얻었죠. 그것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왕이란 그래야 하고 정치라는 게 그러하니까요. 하지만 카르니우스와의 전투나 하멜 침공에 있어서도 서부의 야만인만큼의 성과를 냈고 그만한 희생을 했느냐 하면.. 바르카와 포를카나는 흘린 피와 자격에 비해 너무 많은 걸 얻었습니다.

 

결국 모든 건 유릭 덕분에 얻은 것이었을 뿐이죠. 자격에 있어서 부적격이라는 겁니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개인의 평가일 뿐이고, 자격이 있고 없고에 따라 삼키고 뱉는 게 정해진 세상이 아니니 그저 운으로 주운 금화가 훗날 황제로 만들어 주었다 해서 이상할 건 없습니다. 그냥 꼬울 뿐이죠.

 

다미아가 아쉬운 점이 바로 그겁니다. 그녀는 아버지인 왕을 죽였고, 숙부를 충동질했으며, 동생인 바르카를 죽이려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여왕이 되려고 했죠. 그게 잔혹하고 비인간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 또한 능력이라면 능력이고,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일이었습니다. 실로 성공할 뻔 했죠. 유릭의 존재가 아니었다면.

 

다시 말하지만 전 다미아의 욕구를 긍정합니다. 그 방식이 잔혹하고 비인간적이라 실패하면 벌 받을 수 있다는 건 인정하지만, 그녀를 얀키누스에 보내 성노예로 살게끔 하는 건 오히려 지나쳤다고 봅니다. 대가로서는 손색은 없죠. 조금 지나쳤을 뿐. 죽음은 그냥 죽음입니다. 다미아는 그냥 죽을 수도 있었죠. 실제로 자결하려고 했고요. 실패했을 뿐. 그런 그녀는 단지 자신의 한계를 넘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얻을 수 있는 것을 얻고자 벌인 일의 대가 치고는 좀 지나쳤다고 봅니다.

 

여자가 누군가의 좆집이 되는 게 불쾌하다기보단 그녀를 얻는 자에 대한 거부감과 불쾌감이 더 컸을 수도 있지만, 그걸 감안해도 다미아의 목적은 정당하다고 보며, 귀족 사회에서 암살과 음모는 흔한 일이니 그게 비인간적이라 하더라도 바르카와 포를카나가 제국을 배신하고 하멜을 공격한 것과 비교해서 대단찮은 일인가 싶습니다. 하멜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고 강간 당하고 약탈 당하고 고문 당했죠? 하멜까지 가고 봉쇄를 진행하던 그 과정에서는? 그 이전에는?

 

다미아의 욕구는 정당했으되, 그저 유릭이라는 주인공 때문에 실패한 거고, 실패한 거 치고는 비참한 대가를 치뤘습니다. 음모의 이유가 별 거 아니었다면 어떻게 되든 상관 없었겠지만 너무 정당하다 느낀 게 문제였죠. 다만 그게 작품적 비판점이라고 생각지는 않고, 캐릭터에 대한 비평일 뿐입니다.

 

 

마지막으로 세계관에 대한 이야기를 짤막하게 하겠습니다. 작품적 세계관이 아니라, 세계관의 충돌에 관해서요.

 

서부는 중앙와 연고가 없었고, 황제 얀키누스의 욕망에 의해 개척됩니다. 유릭은 그 욕망에 의해 산맥을 넘을 계기를 얻었고, 자신의 천성에 따라 금기를 범하고 새로운 세계로 진입합니다. 세계관의 확장이지요. 그리고 훗날 서부에 군대를 보내고, 연맹군이 도로 넘어오며 두 세계관은 충돌하게 됩니다.

 

이는 단순히 북부와의 전쟁에서 제국이 어떤 피해를 입었느냐와 달랐습니다. 그들이 패배했으니까요. 제국의 중심까지 침탈 당하고 숱한 문명인과 문명국, 지역이 피해를 입고 정복이 되었습니다. 이제 어쩔 수 없이 그들은 같이 할 수밖에 없게 되었죠. 그렇게 귀족 사회에서도 야만인 출신이 연회에 나타나고, 거래하고, 작위와 땅을 주는 경우도 생겼습니다.

 

이 세계관의 충돌은 언제나 거대한 변화를 야기합니다. 그 변화는 강제적인 게 아니고 자연스러운 것이며, 그 과정에서 우리는 적절한 균형점을 찾아가기 마련이고요. 물론 그 과정에서 피가 흐를 수도 있고, 비극이 생길 수도 있으며, 누군가가 무엇은 얻는 만큼, 누군가는 모든 것을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변화라는 건 언제나 좋은 것만을 이끌어내는 게 아니니까요. 하지만 일단 발생하면 막을 수 없습니다. 그 상황에서 어떻게 헤야 하느냐가 아니라,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일 뿐입니다. 모든 것이 새로운 세계를 보고도 당당하게 그것을 탐구하며 익히고 배워 탐험했던 유릭처럼 스스로 미지를 향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지 않아도 충분할 겁니다. 그들 문명인이, 그리고 서부인이 결국 세계관의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처럼요.

 

 

백수귀족 작가의 작품 중 두번째로 본 작품입니다. 애초에 킬 더 드래곤을 재밌게 본 입장에서 이번 작품은 하나의 보증이 있었죠. 백수귀족이라는 넉자로요. 강력한 힘을 지닌 주인공이 견인하는 작품이었기도 했지만 너무 자연스러운 전개와 훌륭하게 사용한 열린 결말까지.

 

누구에게든 무난하게 추천할 수 있을만한 수작입니다. 밀도 있는 작품이었고 재밌는 작품이며, 중간 중간 작가의 통찰이 보이는 문장들 역시 볼만한 부분들이기도 했습니다. 으레 나올 수 있는 억지나 캐릭터성의 붕괴, 모순이나 설정붕괴 같은 것도 없었고 모든 캐릭터들이 선역이거나 악역으로 이분화된 것도 아니며, 개인이 가질 수 있는 당연한 욕구와 추구, 입장이 잘 드러나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앞서 말했듯이, 작품의 전개를 위해 필요한 사건이나 캐릭터의 입장, 이유를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작품의 흐름에 맞게 캐릭터의 입장과 욕구, 추구를 합치시키는 데 있어서 아주 능숙하고 그건 실력 있는 작가일수록 자연스럽게 다루는 방식이죠. 그만큼 백수귀족 작가의 필력은 상당히 뛰어나다는 거고 어떤 작품이든 무난하게 볼 수 있는 수작급은 될 거라는 기대를 줍니다. 아마 그 기대를 쉽게 배신할 거 같지는 않네요.

 

또 몇가지 요소를 짚어보자면, 작품 내에서 영혼, 신, 사후세계에 관한 이야기들이 나오고 이것은 곁다리처럼 지나가는 것처럼 보여도 실은 작품 시작부터 끝까지 함께하는 줄기가 됩니다. 마치 현실에서의 우리네 삶과 종교적, 혹은 내세적 세계가 이분화되어 존재하는 것처럼 현실적인 전개 속에서 사후세계와 영혼은 어디로 가는가, 누구의 품으로 가는가에 대한 논의는 꾸준히 이끌어가집니다.

 

유릭이 하늘산맥을 넘고 선조들의 영혼이 하늘산맥 너머 영혼의 세계로 간다는 말을 믿었는데, 똑같이 사람이 사는 세상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번뇌하는 순간들이 나옵니다. 그러한 두려움과 불안감에서 그는 검은 그림자 환상을 보게 되기도 하고, 루를 믿기도 하죠. 그러다 자신의 정체성이 사랑과 자비가 아닌 전사적 기풍에 있다는 것을 재확인하고서는 루의 펜던트를 버립니다.

 

그리고 울가로 쪽에 관심을 가지게 되죠. 스벤과 함께 하는 여정에서 스벤의 실수와 실패를 보기도 하고 결국 그는 아주 오랫동안 무엇을 믿어야 할지,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라는 질문 속에서 정신적 방황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결국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새로운 질문 속에서 번개를 맞고도 살아 남은 그는 자신의 의지만을 확신하게 되며 모든 신성을 거부하게 되죠.

 

이제 자신이 죽어 영혼이 어디로 가느냐보다 내가 살아서 무엇을 하느냐가 더 중요한 세계관을 형성한 것입니다. 그게 단지 유릭이라는 개인 단 한 사람의 것이라고 해도. 고트발은 꾸준히 그를 루의 품으로 돌려 놓고 싶어 했으나, 늑대는 매어둘 수 없는 것처럼 탐험가는 어딘가에 뿌리 내리는 사람이 아니죠. 설령 그가 서부인이고 서부의 야만인으로 살았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 해도요.

 

그가 진정 위대한 이유는 자신의 의지로 선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금기와 신에 의해 제약 받는 뭇 사람들과는 다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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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트체크] 사형 집행하면 한·EU FTA 파기되나
https://www.yna.co.kr/view/AKR20210902054700502

(중략)

◇ FTA 협정문 '사형 금지' 내용 없어…유럽의회, 사형 중단 권고

한·EU FTA 협정문을 보면 한국이 사형을 집행하면 협정이 취소된다는 내용은 없다. 인터넷상 주장처럼 사형 집행 중단이 한국과 EU간 FTA 체결의 전제 조건은 아니었던 셈이다.

협정문 서문엔 "1945년 6월 26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서명된 유엔헌장과 1948년 12월 10일 유엔 총회에서 채택된 세계인권선언에 대한 약속을 재확인한다"라는 인권 문제와 관련해 포괄적으로 합의한 내용이 포함됐을 뿐이다.

산업통상자원부 관계자는 2일 연합뉴스에 "우리나라가 사형을 집행하면 FTA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취지의 내용은 한·EU FTA 협정문 어디에도 없다"며 "협정문에 없는 내용을 근거로 FTA를 취소할 수는 없다"고 설명했다.

협정문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우리 정부가 사형 집행이 EU와 FTA를 체결하는 데 도움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것으로는 보인다.

(중략)


"법무부, EU에 사형집행 안한다는 서약서를 제출" 보도내용은 사실과 다름
https://www.yna.co.kr/view/RPR20100319021000353

(중략)


외교통상부는 2008. 9. 법무부의 동의하에 프랑스에 있는 유럽평의회(Council of Europe, EU가 아님)에 외교 서한을 송부, 사형不집행을 조건으로 협약에 가입하겠다는 내용을 전달하였음

유럽평의회의 '범죄인인도에 관한 유럽협약'(회원국 47개) 가입시 동 협약에 의하여 인도되어 오는 범죄인에 대하여는 사형집행을 하지 않겠다는 내용임

이는 우리나라가 사형을 일반적으로 집행하지 않겠다는 내용이 아니라, 위 협약 가입국가들이 사형집행을 하지 않으므로 상호주의 원칙상 동 협약에 의하여 인도되는 범죄인에 대하여는 사형을 집행하지 않겠다는 것임

이러한 내용은 범죄인인도조약 체결시 일반적으로 포함되는 내용이며, 우리나라와 조약이 체결된 30개 국가중 미국, 프랑스 등 16개 국가과도 같은 내용의 조항이 들어 있음

(중략)

 

 

1.해당 조약은 존재하지 않음.

2.당시 한국 정부 스스로 EU와의 FTA 협정에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고 판단 한 것 뿐.

3.일본 등 사형을 실행하고 있는 국가는 있지만 외교, 무역 등 국제적으로 문제가 되지는 않음.

4.김영상 정부 후기, 사형제 폐지는 민주진보 진영의 숙원이었기에 실질적 폐지, 미집행은 민주화 이후의 영향이 더 큰 것으로 필자는 추측.

5.한 때 퍼졌던 서약서 제출 역시 해당 사실이 아님.

6.서약서 관련 팩트는 범죄인 인도와 관련된 것으로, 협약 가입국이 사형집행을 하지 않기에 상호주의 원칙에 따라 인도되는 범죄인에 대하여 사형을 집행하지 않겠다는 것.

7.한국이 사형을 재집행 한다고 해서 국제적인 비판은 있을 수 있으나 유의미한 외교적 불이익은 없을 것으로 예상.

8.사형 집행 시 EU FTA 파기는 이러한 맥락이 와전된 것으로 추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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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때는 말이야."

 

사람은 자신의 정체성을 이루는 것에 기대 살아간다. 그것은 자신이 어떤 사람이며, 어떠했던 사람이었는지를 규정하기 때문이다. 그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들은 정말 많이 있다. 개인에게 있어 그것은 민족, 역사, 종교, 직업, 출신, 지역 등등 다양한 것이 있을 것이고 그것들은 개인의 정체성을 이루는 재료가 되어 비중의 차이만을 가질 뿐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자신이 어떤 가치를 중요시 여기고, 그것에 자부심을 느끼는지가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이기 때문인데, 한국인이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지는 것은 한국인을 규정하고, 한국을 이루는 요소들에 자부심을 느끼기도 하다. 예컨데,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자신의 역사에 자부심을 느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자부심. 이것은 아주 중요하다. 어떠한 가치를 중요시 여기느냐 하는 것이 첫번째고,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삼아 동치 시킨다는 점이 두번째이다. 이순신의 업적은 그 본인의 업적이지 21세기를 살아가는 나 자신의 업적이 아니다. 그럼에도 이순신의 위업을 위대하다 여기고 자부심을 느낀다. 이순신의 승리는 그 당시 조선과 조선인의 승리일 뿐이다. 일본인은 이순신의 승리에 자부심을 느낄 수 없다.

 

 

어떤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훌륭하고 위대한 사람일 수는 없다. 그 사람이 가장 고점일 때가 있고 가장 저점일 때가 있을 것이며, 가장 화려했던 순간과 그렇지 못한 순간이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훗날 과거에 천착해 살아갈 때가 있다. 그것은 고점을 찍은 이후 꾸준히 추락하여 비참해지거나, 스스로 그렇다 여기는 사람들이 주로 그렇다. 한 때 모든 이들의 우상이 되어 최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연예인이 퇴물이 되어 뒷골목 술집 가수가 되며 무대 뒷편에서 약에 취해 있으면서도 약이 아닌 화려했던 순간에 중독 되어 있는 것처럼 말이다.

 

자신이 가장 열심이었고, 가장 가치를 인정 받았던 젊은 시절과 다 늙어 시대를 따라가지 못하고 언제 짤릴 지, 은퇴할 지 눈치만 보던 이들이 자신의 젊은 시절에 향수를 느끼고 자부심을 느끼는 것은 지금 자신의 비참함을 견디기 위한 정신작용이다.

 

사회성은 물론 성격, 성적, 운동능력 등 잘난 게 없어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는 학생 역시도 어떠한 가치를 추종하며 자신의 것으로 삼아야 한다. 그것이 일반적인 것은 아닐 경우도 많다. 어떠한 경우 범죄적인 것이거나 반사회적인 것일 수도 있고, 그보다 나은 것은 마이너한 장르에 집착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좀 더 일반적인 경우를 보자면, 대부분은 SNS를 비롯한 커뮤니티에서 자신의 정체성과 자부심을 찾는다.

 

커뮤니티에서 유명하고 인정 받는 자신이라는 정체성을 현실에서의 비참하고 아무 것도 아닌 자신보다 우선하고 그것을 본질이라 여기며, 현실에선 누구와도 대화하지 못하는 대신 커뮤니티와 SNS에서는 수많은 사람들과 많은 대화를 주고 받을 수 있다. 흔히 말하는 커뮤니티 중독자들의 현실은 사회적 교류가 사실상 단절된 이들일 가능성이 높다. 이들은 현실이 아닌 가상에서 자신의 정체성과 자부심을 찾는다.

 

 

한국인들은 한국에 자부심을 느끼고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받아들이고 한국인으로서 산다. 민족주의의 배타성을 비판하며 민족주의에서 탈피할 것을 요구하는 이들이 있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사람이 자신이 어떤 사람이고 어느 집단에 속하느냐는 본능의 영역에서 발현되는 현상인지라, 자신의 정체성을 소속된 사회에서 찾는 것은 이상한 일도 아니고, 부덕한 일도 아니다.

 

따라서 이러한 자연스러운 구분법은 그 옛날 부족 사회에서조차 우리 부족과 다른 부족을 구분했던 본능 단계의 인지적 작업이었기에 민족주의나 그와 유사한 개념, 그리고 거기에서 기인하는 현상들은 막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단지 지나치면 무엇이든 독이 되는 것처럼, 민족에 대한 자부심과 자긍심, 정체성과 별개로 지나친 배타성과 공격성만 통제할 수 있다면 큰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민족주의가 등장한 이후, 유럽인들이 자기 집단과 민족이라는 정체성에서 탈피한 적이 단 한번이라도 있던가? 그저 조절되었을 뿐이다.

 

 

한국인이 한국에서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받아들이는 것은 흔한 일이지만, 반드시 그와 같은 일이 벌어지지는 않는다. 직관적인 예시로 유럽의 중동 이민자들을 한번 살펴보자. 그들은 중동에서 유럽으로 왔다. 이민자 1세대야 자신들의 뿌리를 잊을 수 없고 자신들의 정체성은 완전하게 세탁할 수는 없겠지만, 이민자 2세대와 3세대는 이야기가 다르다.

 

그들은 유럽에서 태어나 유럽 환경을 겪은 이들이다. 그들에게 고향은 유럽이고 태어나 자란 모국과 사회 역시도 유럽이다. 그러나 유럽인들은 그들은 같은 유럽인이라고 받아들이지 않는다. 2세대고 3세대고 그들은 여전히 중동인이고 아랍인이며 무슬림이다. 그들은 유럽 사회의 메인 스트림, 주류에 편입되지 못했고 그러한 혼란과 불만이 그들을 테러로 이끌게 되었다.

 

유럽인으로서의 자신으로 살아가고 있는데 유럽인들이 같은 유럽인이라고 하지 않으니 그들은 유럽인일 수 없게 되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어떻게 규정해야 하는가? 그들은 자신의 뿌리를 되돌아 볼 수밖에 없다. 그것도 아주 극단적인 시각으로. ISIS가 발흥할 당시 적지 않은 유럽 이민자 2세대, 3세대들은 ISIS에 동조했다.

 

그것은 그들이 유럽인이 아니라고 배척하던 유럽에 대한 반동에 불과하다. 유럽인으로서의 정체성이 부정당한 결과 외부 정체성인 이슬람, 그것도 분노의 표출을 정당화해줄 극단주의 이슬람은 너무나도 적절했다. 그렇게 자신의 정체성을 이슬람, ISIS의 이름과 함께 찾았고, 그 표현은 테러였다.

 

 

"내가 어떤 사람인 줄 알아?"

 

 

한국은 일제강점기 이후 상당한 정체성의 위기를 겪어야 했다. 이는 일제의 문화통치와 분열책, 식민적 교육의 성과이지만 그 이후 한국의 권력을 차지하고자 한 이들이 외부 정체성을 확실하게 몰아내지 못했거나, 그러지 않았던 것에서 기인하기도 한다.

 

그러나 문제는 지금 이 순간에도 그러한 외부 정체성이 본토 정체성을 위협하고 있고, 실제로 정도의 차이일 뿐 외부 정체성,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보다 일본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우선하거나 큰 영향을 받는 이들이 적지 않게 했으며, 심지어 사회 고위층에서 막대한 권력과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한다는 점이다.

 

국가를 지켜야할 국방부장관 지명자가 매국노 이완용에게 어쩔 수 없었다라는 평가를 내리기도 하고, 기이할 정도로 한국의 국익보다 일본의 국익을 우선하는 정부들이 있었으며, 한국과 조선의 역사를 일본보다 열등하다 여기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스스로를 한국인이라 말하고 심지어 애국자라 말하겠지만, 그것은 하나의 착란 증세이다. 말은 행동보다 강력하지 못한 고로, 그들의 행동은 스스로의 말과 상반되며 그러한 이유로 말보다 실질적인 행동이 더 크게 평가 받아야할 것이다. 어째서 한국이 일본의 오염수 방류를 찬성해야 하는가? 어째서 100년전 적극적으로 일신의 영달을 위해 노력한 매국노에게 어쩔 수 없었다는 평가를 내려도 되는가?

 

 

일제는 조선의 사회와 문화를 깍아내렸고,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것이 바로 역사에 대한 공정이었다. 조선에서 태어나 조선에서 자란 조선인들이 조선인으로서 자부심을 느끼는 것은 당연히 조선의 역사이고, 자신의 뿌리가 된다. 따라서 이것을 먼저 무너뜨리면 조선인들은 스스로에게 부끄러움을 느끼거나, 열등함에서 벗어나고자 할 것이라는 점이다.

 

내 뿌리가 지독하게 부끄러운 것이라면 그것을 적극적으로 부정하고자 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겠는가. 열등한 조선인에서 우월한 일본인이 되고자 하는 이들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일본인들은 조선의 역사를 조작했고, 부정적이게 해석했다. 그리고 그것을 조선인들에게 교육했고 그것들은 식민사학, 식민지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해방 이후 한국 사회의 교육계에서 이러한 식민사관은 반세기 넘게, 지금까지도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게 되었다. 최근에야 그러한 요소들에 대한 부정과 교정이 이루어지고 정보가 알려졌지만, 당연히 그보다 이전 시대에 식민사관의 영향을 받은 이들의 지식 업데이트는 거의 없거나 사실상 이루어지지 않는다 봐도 될 정도이다.

 

그외에 다양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단지 주류 정체성에 거부감을 느낀 이들이나, 과거의 식민지배국이자 강대국, 선진국인 일본을 동경하다못해 친일적 정체성이 만들어진 사람도 있을 것이고, 한국인과 한국 사회의 전근대적인 면모들에 비판적이기에 비슷한 조건의 더 나은 국가인 일본을 우월하게 여긴 사람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이유는 정말 많을테지만, 중요한 건 그들이 한국인으로서 한국의 정체성보다 일본의 정체성을 더 우선시하거나, 우월하다 여긴다는 점이다. 그들이 한국에 자부심을 느끼는 것은 취사적이고 정치적이며 이념적인 경우가 많다. 한국 우파가 유독 친일적이거나 그에 가까운 태도를 보여주는 것처럼 우파적인 가치관과 일치하거나 부합하는 사건/현상일 경우가 그러하다. 한국 우파의 뿌리가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알면 특이한 일은 아닐지도 모를 일이다.

 

한국인임에도 한국보다 일본의 국익에 복무하며, 한국의 정체성을 열등하며 미개한 것으로 규정하는 이들, 그들은 어떤 사람인가?

 

 

"배를 버려라!"

 

 

침몰하는 배에서 가장 영리한 것은 가장 귀중한 물건을 가지고 가장 먼저 탈출하는 자들이다. 이완용은 그 자체로 욕설이나 다름 없는 이름이 되었지만 그가 대단히 영특하고 뛰어난 인재였던 것은 사실이다. 대단히 똑똑하고 통찰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는 그러한 능력을 국가와 민족을 위해 쓰기보단 다 포기하고 가장 먼저, 가장 적극적으로 나라를 팔아먹는데 일조한 한 사람이 되었다.

 

그렇게 그 본인과 가족은 가장 대단한 특혜를 받은 친일파로서 부귀영화를 누렸다. 만약 그가 이재명 의사에게 저격 당하지 않고 일본이 태평양 전쟁에서 패전하지 않았다면, 혹은 애초에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그의 선택은 역사적 공로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것은 실패한 것이 되었고, 그 실패의 원인은 조선인의 성공이 아니라 미국의 성공이었다. 물론 우리는 조선인들의 독립 운동이 어떠한 성과를 냈고 어떻게 인정 받았는지 역시 알고 있다. 그러나 때로는 이념적으로, 사상적으로, 또 한편으로는 필요에 의해서 부정하거나 긍정하는 것이 있다는 걸 안다. 친일파, 혹은 토착왜구라 불리는 이들에게 조선인들의 노력은 무의미한 것이어야 한다.

 

그러한 이유로 토착왜구들에게 있어 독립운동은 폄하의 대상이다. 역사를 왜곡하거나, 자료나 해석을 왜곡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공정이 이루어진다. 한국인이 어째서 한국의 역사와 독립운동을 폄하하느냐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겠다면, 그들의 정체성을 한국이 아닌 일본으로 설정해본다면 설명이 된다.

 

그들은 한국이 아니라 일본의 국익에 복무하는 것이며, 스스로의 정체성으로서도 한국에 자부심을 느끼지 못하기에 그것을 깍아내리고, 더 우월한 정체성으로 덧칠하려 한다. 1919년 임시정부 수립일은 부정하고, 1948년 건국일을 긍정하며 일제 시기를 마치 나라가 없었던 것처럼, 친일을 했던 사람은 떵떵 거리며 사는 세상을 만들고, 독립운동 한 사람들은 돈도 힘도 없는 사회를 만든 것처럼, 한국인은 미개한 조센징이고 일본은 갓본이라 칭하는 것처럼.

 

더 나아가 한국 여성은 김치녀고 일본 여성은 갓본녀라 부르고, 한국은 스스로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국방을 비롯한 다양한 분야에 있어서 더 강한 강대국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끔 여기는 것 역시 그러하다. 그들이 생각하는 한국은 그러한 나라이고, 그러한 나라여야 한다. 그들은 그것을 애국이라 말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한국이 아닌 다른 나라의 국익을 위한 일이다. 스스로 자각하지 못할 뿐.

 

그렇게 한국은 한국의 역사가 자랑스러운 나라가 되지 못하고, 한민족의 정체성을 가지고 한민족을 위해 투쟁하던 독립운동가를 부정하며, 반공을 국시로 삼아 건국되고 작동했던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건국을 긍정한다. 한민족은 본래부터 열등한 민족이었기에 스스로 자강한 게 아니며, 일본에 의해 선도되어 근대화를 이룬 나라여야 한다. 한국은 공산주의에 스스로를 방어할 수 없기에 강대국의 보호를 받아야 하며, 한국 스스로 공산주의 적들과 싸워 이길 수도, 스스로를 충분히 보호할 수도 없는 약한 국가이기에 필연성을 부여한다. 그리고 그 보호국은 미국과 일본이다.

 

즉, 이는 하나의 바꿔치기이다. 한 사회에 나누어진 두가지 정체성은 여전히 대립 중이고 그 중에서 반국가적이고 반민족적인 가치관이 우파 정체성이라는 이름으로 공공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 뿐이다.

 

어째서 보수 정부가 나타날 때마다 한국은 나약하고 위태로운 국가가 되는가? 어째서 자국과 자민족과 자국 역사에 자부심을 가질 수 없는 국가가 되는가? 언제 킹찍탈이라는 말이 나왔고 언제 헬조선이라는 말이 나왔으며, 그 단어는 언제를 기점으로 사라졌는가? 언제 갑자기 각자도생이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왔는가?

 

진보와 보수라는 구분에 의해 나눠진 것은 결과적인 것이다. 본질은 그들이 어떠한 정신을 가진 어떤 인간인가에서부터 시작한다. 왜 어떤 사람은 식민지 시절 적극적으로 친일을 했고, 어떤 사람은 적극적으로 독립 운동을 했는가. 왜 어떤 사람은 일신의 영달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을 도덕과 윤리, 법과 원칙의 준수보다 더 유의미한 현실적 가치로 보는가. 왜 어떤 사람은 당장의 이익보다 사회적 자본을 더 중요시 여기는가.

 

왜 어떤 사람은 타인의, 사회의 손해보다 내 이익을 더 중요시 여기고, 어떤 사람은 그렇지 않은가.

 

이 본질에서 다양한 표현형이 나뉘어질 뿐이다. 부정부패한 기업인과 관료도, 친일 매국 토착왜구도, 사적 이익과 정치적 승리를 더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정치인도 다 그러하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도덕과 윤리, 혹은 논리와 같은 명분을 필요로 하고, 그러한 이유로 역사는 왜곡되고 특정 가치는 부정된다. 일신의 영달을 위해 사회적 자본을 훼손할 수 있는 이들에게 매국은 어쩔 수 없는 것이어야만 하고, 그래야 자신의 사적 이익 추구를 정당화 할 수 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때로는 생계형 범죄라고. 그들 자신에겐 그게 사실일 것이다. 나라를 팔고 국익을 팔아서 자신의 생계를 풍요롭게 하기 위함일 뿐일테니.

 

이러한 본질은 아주 위험하지만, 그 표현형이 별 거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 더 나쁜 표현형이 있을 것이고, 그것이 우리 사회를 위협하며, 우리의 정체성을 무력화시키려 한다. 만약 그들이 성공하고, 승리한다면, 가장 먼저 배를 버리는 것은 우리가 아닐 것이다.

 

배에 구멍을 낸 그들 자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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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당선 이후 진보계엔 체념과 포기의 분위기가 은근히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윤석열이라는 인간이 어떤 지는 대선 이전부터 꾸준히 알려져 있었고 이건 정치에 관심을 조금이라도 둔 '제정신을 가진 사람'과 '상식적 가치를 으뜸 삼는 사람'은 사리분별을 통해 어떻게 될 지 너무나도 뻔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하면 더 했지 덜하진 않았고, 그 더 하는 것조차 예상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는 건 아니었다는 점이 놀랍다면 놀랄 일이었고요.

 

그래서 결국은 체념입니다. 이렇게 되겠지, 그리고 딱 그렇게 됐네. 어떻게 될지 뻔한데, 막을 방법은 없으니.

 

그렇다고 그런 기색은 의외로 또 잘 안 보였습니다. 비판과 비난은 여전히 하긴 했으니까요. 보수 진영 입장에서 여전히 진보는 입만 살아서 시끄럽게 하는 놈들이니 안 그래 보였을 수도 있습니다. 완전히 포기해버린 상태까진 아니고, 체념한 상태로 지켜보자는 입장에 가까웠죠. 비판할 건 하면서요. 자연스럽게 나올 소리 하는 것 뿐이지만.

 

이렇다보니 진보 진영은 체념은 자연스럽게 지켜보기로 귀결되는 거고, 예전 디씨-일베가 지배적인 분위기까지 인터넷 문화와 분위기를 장악하지 못한 시대에서 인터넷과 별개로 여전히 진보적 분위기의 관성이 남아 있었던, 정확히는 보수의 극단적인 발언들이 본심과 무관하게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고 눈치를 받아온 시대에서 나온 말이 샤이 보수였죠.

 

보수의 '본심'이 보편적 상식, 정의와 도덕과 거리가 멀었기 때문입니다.

 

즉, 보수의 본심은 곧 사회적 정의와 상식과 거리가 멀었던, 욕 먹을 개소리들이었고, 그러한 사상을 함부로 하기에 아직 한국 사회의 도덕성과 상식은 심각하게 추락하지도, 역전되지도 않았던 셈이라고나 할까요. 사실 그 당시의 도덕성이 학폭이나 다양한 도덕적 문제에 대한 반응, 대응과 비교해 더 낫다고는 하지 못해도, 다른 쪽에선 극단적인 소리를 할 경우 공개적인 비판이 있었고, 그게 통하던 시절이긴 했습니다.

 

그러나 더 나은 선택의 반복이 더 나은 상태들의 합이라면, 더 나쁜 선택의 반복은 당연히 더 나쁜 상태의 합이 되겠죠. 그리고 전체는 언제나 부분의 합보다 크고요.

 

한국 사회는, 적어도 정치적인 면에 있어서만큼은 더 나쁜 선택의 반복이 있었던 셈에 가깝다고 봅니다. 그 결과이자 증거가 바로 윤석열 정권과 그 내각이고요.

 

 

사실, 보수 진영 그 자체는 전혀 변하지 않았습니다. 60년대 수꼴 극우보수들의 미친 소리와 정신이 2020년대 수꼴 극우보수의 미친 소리와 정신보다 더 저열하진 않아요. 다만 세련되지 못했을 뿐이지. 60년대, 70년대, 80년대, 심지어 90년대와 그 이후 지금 이 순간까지, 한국 극우보수들은 그저 그 시대에 얼마나 어울렸는가의 차이만 있었을 뿐입니다. 그것조차 어디까지나 형태적 차이일 뿐이지 그 정신과 가치관은 전혀 다를 게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면, 그들의 행동을 살펴보면 60년대의 그것과 향수마저도 느껴질 정도의 유사성이 보이는 거죠. 실은 그보다 더 이전과도 크게 다를 것도 없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극우보수는 더 저열해지는 쪽으로 발전했습니다. 앞에서도 말했죠? 이전에는 대놓고 본심을 꺼내면 사회적 지탄을 받는다고. 그러나 지금 시점에서 한국 극우는 장관 내정자가 공개적으로 반대 진영 전 대통령의 목을 따는 건 시간 문제이며, 이순신과 세종대왕 동상을 공격하고 우파라면 그래야 한다고까지 말합니다.

 

병사 하나 죽은 거 가지고 사단장을 날리냐는 말을 대통령이 했다면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그런 말이 새어나왔다는 사실 그 자체라 큰 논란이 되어야 함에도 지금은 그렇지도 않고 별 타격도 없습니다. 일본의 심기를 거스르고 일본에게 공격적인 것이라면 그것이 어떤 것이든 사라지고 없어져야 한다는 새로운 성역이 만들어지고 있고요.

 

수십년 전부터 존재했고, 일베 시기와 함께 보편화, 의식화된 '내지와 본국'의 당위적 우열은 하나의 팩트가 되어버렸고 수많은 지지자를 동반한 세계관의 한 축을 이루기도 했습니다.

 

 

이제 자유민주주의라는 대한민국의 국체는 이전과 크게 달라졌다는 걸 인정해야 합니다. 좀 보수적으로 보자면, 다음 정권 때 확실히 결정나겠지만, 전 이미 상당한 타격을 받았다고 진단합니다. 이는 윤석열 정권이 임기 내 탄핵, 하야라는 폭탄과 함께 침몰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서의 이야기지만 아마 그럴 일 없지 끝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고요.

 

보수의 저열하고 비인간적이며, 소아병적이고 정신병적인 본색이 대놓고 드러나고 있는데 이에 대한 저지력이 없습니다. 체념 상태의 진보는 화력도 부족하지만 그럴만한 의지나 전략이 없거든요. 어떤 것이든 처음의 충격이 강력할 뿐이지 그것이 반복되면 단 두번째부터 화력도, 대응력도 약해집니다. 두번째 세월호는 박근혜 정부 당시보다 충격도, 화력도 약할 겁니다. 본질적으로, 형태적으로도 꽤 유사한 사건이 바로 이태원이었고요.

 

탄핵이든, 하야든 똑같을 겁니다. 박근혜 탄핵 사건만큼의 화력도, 타격도 주지 못할 겁니다. 단지 미국식 중간선거에서 졌네 같은 분위기 정도면 차라리 다행일 정도로.

 

윤석열과 그 정부의 인사들이 무식하고 거침이 없어서 더욱 그런 것처럼 보이는 것도 있지만, 동시에 그들의 무식하고 거침 없는 망언, 아니. 본심이 충분한 비판을 통해 저지되지 않고 그들의 발언이 정치적 책임으로 돌아오는 걸 보기도 어려워진 건 사실입니다. 예컨데, 박근혜 정부 당시 문창극 국무총리 후보자는 과거사 망언으로 비판을 받으며 후보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죠.

 

다만 문창극의 발언이 '진짜 문제' 였는 지에 대해서 대부분의, 최소한 적지 않은 보수들은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했을 겁니다. 그들이 느꼈던 문제의식은 이건데, '그걸 공개적으로 말한 게 문제'였다는 점입니다. 즉, 그들 스스로도 그게 문제가 될 거라는 건 알았는데, 그건 단지 자신들이 믿는 것, 지지하는 가치관과 세계관이 잘못되었다는 걸 스스로도 알기 때문이라기보단, 그게 남들에게 어떻게 들릴지 정도는 알았다는 쪽에 가깝죠.

 

마치 나치가 자기들끼리는 유대인 가스실을 지지하고 그래야 한다고 믿으면서도 그런 발언을 공개적으로 할 경우 어떤 반응과 반발이 일어날지는 알고 있다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결국 한국에서 보수 진영은 본색을 드러내며 그런 말을 공개적으로 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 사회가 될 수 있습니다. 그저 한쪽 진영 대깨X 깨시민 들 사이에서 호들갑 떨고 지랄하는 정도로 받아들여질 거고요. 

 

그런 사회가 오지 않을 수도 있고, 오지 않는 게 가장 좋겠지만, 우리가 일베가 처음 등장했을 때 호들갑 떨며 예견한 것들이 일부라도 현실이 된 이 현실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윤석열 정부가 남길 유산과 씨앗들이 어떻게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을지 어느 정도 예견이 될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 바로 다음 총선인데, 지금의 샤이 진보들이, 그리고 극우보수의 개짓거리에 진절을 느끼거나 거부감을 느끼는 중도층이 보수층의 신나는 드라이브에 역충격을 가해줘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이전 시대의 보수 강세의 사회보다 더 비인간적이고 비상식적인 나라가 될 겁니다. 이제 한국은 후진국이 아니거든요. 옛 보수의 부정부패는 그들의 도덕성과 가치관, 탐욕 문제도 있었지만 후진국이었기 때문에 가능했고 흔하게 발생할 수 있는 것들이기도 했지만, 지금의 것은 그 성질이 조금은 다릅니다.

 

옛날엔 더러운 거 알면서도 무시했지만, 지금은 그 더럽고 비인간적인 것에 정의의 거죽을 덮어 씌우며 정당하고 정의로운 것으로 포장하기 때문입니다. 더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궤변과 말장난으로 가득찬 개소리거든요. 단지 그 개소리에 완성도가 있기 때문에 좀 모르는 사람들, 못 배운 사람들, 그냥 멍청한 놈들이나 평범한 어린애들은 아리까리 하면서 맞는 말인 줄 알게 됩니다.

 

이를테면 ㅇㅅㅇ식 개논리인데, 말 그 자체로만 보면 맞는 말처럼 보이지만 그 모든 논리와 주장, 표현은 그저 특정한 한 사건과 사례에 허수아비식 공격을 모아 딱 그 사례에만 적용되는 활자들을 붙일 뿐입니다. 그래서 ㅇ적ㅇ이 나온 이유가 바로 논리가 일관적이지 못해서 똑같은, 그러나 다른 사람이나 진영에게는 또 다른 논리를 가져와서 그렇거든요.

 

이처럼 실은 허술하기 짝이 없는 피상적 완성도의 일개 사례들만 분리적으로 보며 요즘 시대 보수적 세계관, 보수의 논리가 형성되는 거고요. 인국공 사건 당시 보수의 논리는 조악하고 저열했으며 논리적 허점마저도 있었지만 엘리트주의, 공정 담론과 결합하고 그것을 축으로 삼아 마치 그럴듯해 보이는 것으로 짜맞추었습니다. 그걸 부추기고 좀 더 세련된 활자로 정리한 것이 바로 언론이었으며, 그것에 대한 비판 여론을 마녀사냥식 물량의 폭력으로 찍어누르던 게 보수센징들이었고요.

 

그런 식인 거죠. 이미 2000년대 중후반부터 그런 식으로 변화해왔고 지금은 그 완성도가 그 당시보다 더 나아졌을 뿐이지.

 

 

진보 진영이 지금은 체념해 있지만 다음 총선 때 어떻게 집결할지가 관건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심지어 다음 대선 때 진보좌파 진영이 승리한다 해도 보수 드라이브에 충분한 제동을 주긴 어려울 겁니다. 이미 관성은 10년도 더 전부터 붙어왔고, 문재인 정부의 시도는 제동이 아닌 탄성을 준 셈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거든요.

 

솔직히 말하자면, 좀 비관적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냥 미친놈 세상 속 우리 정상인들은 좆됐다는 걸 인정하는 게 나을지도 모를 일이죠.

 

뭐가 낫냐고요?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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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부장관이라는 인간이 일뽕 짓거리나 하고 있는 걸 보면 한숨만 나옵니다.

 

이런 국까일뽕 종자들은 친일과 애국을 구분하지 못하고, 대개의 경우 애국은 하지만 그게 한국에 대한 애국은 아닌 경우가 많은데, 스스로는 그걸 전혀 자각하지 못하고 친일과 일본에 대한 애국을 한국에 대한 애국으로 착각하는 증상도 매우 흔하죠.

 

같은 맥락에서 미국에 관해서도 비슷한 입장인데, 이전처럼 국기기밀을 유출시켜도 그 대상이 미국이면 괜찮다는 입장이라던가요.

 

정상적인 사리분별이 가능한 사람이라면 복장이 터질 일인데, 이런 류의 저능아들은 스스로 뭐가 옳고 그른지에 대한 기준이 없고 그냥 사안에 따라 그 주체가 누구이며 그 대상이 어디인가를 기준으로 가변적인 판단을 내립니다. 그래서 진보좌파의 북한이나 중국과의 대화, 협상, 교류는 나라를 팔아먹는 매국노 빨갱이 레드팀 짓거리지만 극우보수의 친일친미 국가기밀 유출, 자가 사보타주를 통한 국익상실에 관해서는 일본이라 괜찮고 미국이라 괜찮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그것이 애국이라고 착각하거나 외교라고 하기까지 합니다. 일종의 거래라는 거죠.

 

하지만 아닙니다.

 

 

매국은 나라를 파는 일이지만 국익을 팔아넘기는 일이기도 합니다. 가령 KT에서 위성 팔아먹은 게 대표적인 예시라고 할 수 있죠.

 

미국은 동맹국이고 일본은 대충 우방이니 괜찮다는 겁니다. 국익을 팔아먹어도 경제 활동이라고 하고요. 하지만 정상적인 국가라면 동맹이고 우방이고 아무런 관계 없이 자국의 국익을 지켜야 합니다. 국가 기밀이 털리고, 스스로 팔아먹어도 동맹국이니까 괜찮다? 미국은 한국의 부모가 아니고 이해관계에 따라 외교 관계를 형성한 겁니다.

 

한국인이 지난 세기 원조, 지원 등 미국에 대해 얼마나 고마움을 느끼고 든든함을 느끼든 그건 그 개인의 감상에 불과하고, 공적인 영역에서 작동해서는 안 되는 거고요. 미국은 언제나 국익을 우선시하는 국가이고, 이건 모든 정상적인 국가가 그렇게 합니다. 한국이 국익에 해가 된다면 한국에 피해를 입히는 건 고려할 가치도 없이 하는 일이죠.

 

지금까지는 한국이 미국의 국익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한국과의 관계가 긴밀했던 거지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게 국제사회입니다. 막말로 한국에 전쟁이 터졌는데 미국이 개입하려니 아주 높은 확률로 핵전쟁이 터진다면 미국은 한국을 포기하는 것도 합리적인 선택지 안으로 놓고 진지하게 고려할 겁니다. 그래야 하고요.

 

미국이니까 괜찮고 일본이니까 괜찮다. 그건 사리분별 못하는 놈들이라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해서는 안 되는 저능아나 다름 없는 소리입니다. 미국이나 일본의 국익이 반드시 한국의 국익으로 돌아오는 게 아니고 그들에게 무언가를 양보 한다고 반드시 되갚아주는 것도 없어요. 그럴 이유가 없으니까요. 할 수는 있는데, 할 이유가 없으면 안 해도 됩니다.

 

반도체와 같은 산업의 문제에서도 미국의 국익을 위해 한국의 국익을 침해하는 것에 매우 적극적인 태도로 정책을 밀고 있고, 일본 역시 자국의 이익을 위해 한국의 국익을 침해하는 일을 할 수 있고 했던 거죠.

 

 

무엇보다 나라를 팔고 국익을 파는 일에 있어서 국가적 이익으로 돌아오는 일이 없습니다. 즉, 국익을 팔아 국익을 얻는 거 자체가 언어도단에 가까운 말이죠.

 

나라를 팔고 국가 기밀을 팔고 국익을 타국에 넘기는 것에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은 철저히 개인, 극히 소규모 집단의 것에 불과합니다. 이완용이 조선을 팔아서 그 본인과 가족 수준에서나 막대한 이익을 얻었지 조선과 조선 민중 대부분은 손해를 봤죠. 한국이 열심히 자발적으로 국익을 상실하고 일본에게 이익이 될 행위를 하고, 미국의 침해에 적극적으로 순종하는 것도 다르지 않습니다. 문제는 이 경우 이익을 얻는 자 역시 없다는 것 뿐이죠.

 

차라리 적극적으로 거래를 한다면 매국노 본인과 그 집단은 이익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기밀을 팔아먹는 장교는 적어도 그 대가를 받기는 하죠. 그게 공무원, 정치인, 기업인, 기술자, 연구자라 하더라도 마찬가지고요.

 

 

그런 맥락에서 미국과 일본에 매국을 하고 국익을 팔아 돈을 벌겠다면 북한과 중국에도 파는 걸 뭐라고 해선 안 됩니다. 결국 그 행위를 통해 개인은 이익을 얻는 건데, 여기서 중요한 건 대상이 아니라 이익을 본다는 것 그 자체에 있거든요. 즉, 문제의 핵심은 어디에 파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파느냐입니다. 어떤 나라에는 팔아도 되는데 어떤 나라에는 안 된다? 그런 기준 자체가 이상한 겁니다. 그건 주관적인 호오에 불과한 것이지 대한민국이 얻는 이익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거든요. 애당초 매국 자체가 국가에 손해를 입히는 일인데 사는 쪽이 동맹이든 우방이든 적국이든 아무런 관계가 없어요.

 

물론 다소간의 위험 수준에는 차이가 있겠죠. K9 자주포 설계도, 기술이 미국에게 넘어가도 그 기술이 한국을 향할 가능성은 낮지만 중국에 넘어간다면 그 기술을 도입한 무기를 만들어 한국을 향하게 하거나 약점을 분석해서 카운터 전술을 만들어낼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것도 결국 정도의 차이일 뿐이지 한국에 도움이 되거나 한국의 국익에 도움이 되는 게 아닙니다. 그걸 팔아먹은 개인의 이익에 귀속될 뿐이죠. 미국이 K9 자주포 기술로 비슷한 거 만들어서 팔겠다고 한다면 한국의 방산업은 적잖은 타격을 받을 겁니다. 이게 날지 안 날지 모르는 전쟁보다 더 확실하고 눈에 보이는 구체적인 손해죠. 미국이 새 자주포 팔아서 얻는 금액만큼이나 정확한.

 

 

그래서 미국과 일본에 국익을 팔고 넘겨서 이익을 얻는 게 문제가 안 된다면 삼성, 하이닉스 반도체 기술자가 중국 넘어가서 고연봉 받고 기술, 노하우 넘기는 것도 문제가 되어선 안 됩니다. 그것도 결국 국익이 넘어가는 거지만 그 국익을 넘겨서라도 돈을 버는 개인은 있거든요. 똑같이 팔아서 돈을 버는데 중국, 북한, 러시아와의 거래는 개새끼다? 개소리죠. 정상적인 사리분별을 할 줄 아는 사람들 눈에는 둘 다 좋게 보이지 않거든요.

 

심지어 대개의 경우 중국에 넘어가는 건 범죄조차 아닙니다. 대놓고 기술을 빼돌리는 게 아니라면 고연봉 받고 고급 기술자 모셔가는 건 흔한 일이니까요. 단지 몇년 뒤 팽 당할 뿐인데, 그것도 결국 그거 감안하고 가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어차피 받는 돈이 중요하지 나라가 중요한 건 아니니까요.

 

 

매국에서 중요한 건 어떤 나라가 나에게 더 큰 이익을 안겨줄 수 있느냐이지 그 나라가 자국을 위협할 수 있는 적국이냐 아니냐가 아닙니다. 어차피 이익을 얻는 건 나지 내 국가가 아니에요. 이완용이 나라를 위해 매국을 한 게 아님에도 쉴드, 재평가, 어쩔 수 없었다는 소리를 듣는 것처럼, 그리고 그런 말을 할 수 있다면,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에겐 북한과 중국에 국가 기밀을 팔아넘기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 될 수 있다는 것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러지 못하겠다면, 매국노가 그래서 욕을 먹는 거고, 자기가 친일을 하는지도 모르고 적극적으로 친일을 하는 놈들이 그래서 욕을 먹으며, 또한 위험한 이유가 이건데 욕을 먹는 놈들은 그 행위의 본질이 아니라 일본, 중국, 미국, 북한이라는 국가 타이틀에 따라 기준을 지 ㅈ대로 삼으니 못 배운 놈들이 권력을 가져서는 안 되고 목소리를 키워서도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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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현재 대한민국의 출산율은 1.0 미만을 크게 밑돌며 0.7대까지 추락하였다. 이는 대한민국 국군의 규모를 심각하기 위협하는 현실이며,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많지 않고 그 실효와 질적 유지에 의심이 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즉, 대한민국 국군은 시간이 지날수록 병력을 유지할 수 없게 되고, 편제와 전투력에 큰 하락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지금보다 더 약해질 대한민국의 국방력을 고려했을 때, 지금이 상대적으로 더 고점이라는 사실에서 북진통일의 필요성은 역설된다.

 

1.

북진통일은 왜 필요한가? 그것이 대한민국의 안보와 위상, 가능성을 혁신적으로 증대시킬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에 관해 발생하는 현실적이고 법적인 다양한 난점과 제약은 존재한다. 그리고 필자 또한 그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진통일을 주장하는 것이다.

 

 

2.

먼저, 북진통일을 해야하는 첫번째 이유는 아직 북한의 미사일 기술이 핵무기를 탑재할 정도가 아닐 것으로 추측되기 때문이다. 이를 거꾸로 말하자면, 핵미사일 투발 능력을 갖추게 되는 순간 북진통일은 극도로 위험한 도박이 된다. 압도적인 재래식으로 북한 전역을 평탄화 하는 것은 가능하나, 그것은 대한민국의 군사력이 북한을 지극히 압도하고 있는 현 상황에서 실현 가능성은 확실하고 발생 가능한 피해를 최소화 할 수 있는 군사적 선택이 바로 북진이지만, THAAD를 가지고 있음에도 핵무기의 대한민국 전역에 대한 타격 가능성을 완벽하게 방어하리라는 확실한 보장이 없는 한 그 위협 역시 현실적이다.

 

따라서, 수동적인 국방전략으로 북한의 남침만을 방어해내는 작계를 채택하기보다 적극적으로 북한을 타격하여 그 군사적 위협을 거세하는 것은 북한이라는 현실적인 위협을 제거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인 동시에, 대한민국 실질 점유 영역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선택지이다.

 

 

두번째 이유는 앞서 이야기한 인구 문제이다. 저출산으로 인하여 대한민국의 국방 인적 자원은 갈수록 줄어들 것이며, 여성 징병은 필자가 자주 주장하였듯 전투력을 보장할 가능성이 낮다고 본다. 그렇다고 이민자를 국방 인력으로 들이는 것 역시 대한민국에 대한 충성과 애국심을 가지지 않은 병력에 의한 안보 위협을 초래하는 상황을 연출할 개연성이 더 크다. 그들이 정말 위기의 순간 목숨을 걸고 자신이 살아오지도 않고 지켜야할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않는 땅을 위해 싸울 것으로 보는가? 한국은 미국이 아니다. 이민자나 이민 희망자로 일반 군대를 꾸리는 것은 아주 위험하고 무용하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줄어들 대한민국 국군의 질적/양적 수준을 유지할 방법이 있는가? 여성 징병? 앞서 말했듯 그들의 신체적, 정신적 스트레스 부담 능력은 평균적인 남성보다 낮고 그들에 의한 전투력은 그들은 군 병력으로 징병하고 관리하고 시설을 만들고 하는 모든 비용에 비해 효용이 낮을 것이다.

 

저출산으로 인한 군 약체화는 필연적이고 이를 막을 방법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현 국방 상황을 크게 개선할 수 있는 방법은 북진통일, 전쟁이다. 즉, 전투병력이 더 줄어들기 전에 그나마 앞으로 십수년 동안 부족한 국방 자원이 가장 강력한 지금 이 시점이 북진 통일에 있어 가장 효과적인 시점이 된다.

 

 

세번째 이유는 그것이 대한민국의 위상과 국력을 신장시킬 기회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영토는 더 넓어져야할 필요가 있고, 이는 실질 점유 지역의 확장을 필요로 한다. 즉, 이북 지역의 탈환 및 수복은 대한민국의 인구, 노동력, 군사적 가능성의 확장을 가져온다. 북한 지역의 자원 이득이지만 실질적인 채산성을 이유로 큰 의미가 없다 해도 상관 없다. 가지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할 때도 있고, 무엇보다 땅은 그 자체로 대단한 자원이 된다. 부동산에서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인가? 땅 그 자체다. 북한에 의해 형성될 전선이 수백km 북상한다는 것부터가 대한민국의 안보에 가장 유효한 요소가 될 수 있다.

 

전쟁의 승리란 승전국에 대단한 위상과 권위를 가져온다. 한국의 국제적 위상과 위치를 변혁시키는 사건이 될 것이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양적, 질적 팽창을 해왔다지만 실질적으로 눈에 보이는 게 아니라면 그것을 근거하는 숫자와 수치는 직관적이지 못하다. 미국과 같이 압도적인 숫자의 차이가 아닌 이상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얼마나 강한 국가인지, 혹은 그런국가가 됐는지 알지 못할 것이다.

 

대한민국의 압도적인 전쟁 수행 결과는 주변국은 물론 전 세계 국가로 하여금 대한민국이 어떠한 국가인지 보여줄 것이다. 북한이 실질적으로 나약한 국가라는 걸 모르는 건 아니겠지만 실제로 힘을 보여주는 건 다른 이야기다.

 

 

네번째 이유는 추가적인 안보적 위협에서 대한민국의 전략적 거리를 확장시키는 일이다. 가령, 중국이 공격해올 때 서해안과 남해안, 공중만 방어하면 된다는 건 순진한 착각이다. 북한을 이용하건 그 북한을 점령하며 남진하든 중국 북부전구의 목적은 한반도 전체에 대한 영향력 행사이다. 전쟁이 벌어질 경우 대한민국은 북진이라는 가능성에 대한 새로운 판단을 해야할 것이고 그 결정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고 필요한 시간과 자원을 잡아먹을 것이다.

 

그러한 상황을 연출하며 어떠한 선택지를 고르든 둘 다 전략적 불리함을 안을 수밖에 없다. 만약 북진하게 된다면 너무 늦었고, 북진하지 않는다면 휴전선에서 밀고 내려오는 중국군, 혹은 북중 연합군을 맞딱뜨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북진통일을 실현했다면 전선은 수백km 북쪽에서 형성될 것이고 얼마나 잘 방어하느냐와 별개로 거리로 산출되는 시간을 벌 수 있다.

 

전쟁 발발 시 대한민국이 남진하는 병력을 파주나 고양에서 방어하는 것이 낫겠는가, 평양이나 하다못해 개성에서 방어 하는 게 낫겠는가?

 

한국인들의 대북정책에 관한 생각은 아무런 생각이 없거나 북한이 자연스럽게 무너지면 자연스럽게 모든 땅과 인민과 자원이 평화적이고 당연하게 한국의 것이 되는 것을 생각한다. 그러나 그러한 믿음에는 별 근거가 없다. 북한이 어떤 식으로든 붕괴하든 그것은 중국의 개입을 불러 일으킬 것이고, 근미래 한국의 전망이 건강하거나 부강할 것으로 예상되진 않기 때문에 그나마 더 나은 상태와 명확하게 더 나쁜 시기가 오기 전에 군사적 결단을 내리는 것은 어떤 면에선 합리적인 전략이 될 수 있다.

 

무엇보다 한국이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북한이 스스로 리스크를 불러 일으키거나 중국 스스로의 필요와 논리에 따라 한반도에 전화를 불러 일으키거나 조장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때는 높은 확률로 중국이 적절한 준비와 근거를 갖추고 행동에 나설 것이나 그러한 준비가 이루어지지 않은 시기에 북진통일이 이루어지고, 중국 입장에서 필요 이상의 손해와 예상 밖의 전개가 이루어진다면 소극적인 판단으로 흐를 가능성 역시 존재한다. 

 

 

다섯번째 이유는 북한의 군사력과 정신력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북한이 군사 강국인가? 북한의 군대는 강한 군대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바로 그 점을 믿기 때문이다. 북한의 군대는 나약한 군대이고 전투력을 기대하기 어렵다. 그들의 정신력에 대한 대한민국 보수 진영의 별 근거 없는, 북한의 선전적인 정보와 90년대 이전에서나 볼 수 있는 고르고 고른 고급 인력의 파편적 사례를 일반화하는 착각 내지는 망상에 불과하고, 실제 북한군의 정신력은 극도로 나약하다.

 

심지어 이것은 군사적 훈련과 교육도 거의 받지 못한 이슬람 테러리스트와 비교해도 그렇다. 이들은 종교적 광신 때문에라도 죽을 전투를 수행하는 경우가 있겠으나 북한군에겐 그러한 믿음과 필요가 부족하다. 그들이 죽어서 수십명의 아름다운 처녀가 준비된 천국에 가는 것도 아니고 북한 정권에 충성하며 목술 걸고 싸워봤자 어차피 질 수밖에 없는 전쟁에서 그들이 기대할 수 있는 건 없다.

 

반대로 압도적인 전력과 화력, 고급 장교들에 의해 수립된 작전 계획을 기반으로 말살전에 가까운 고화력전을 수행하는 동시에 핀포인트로 공개된 주요 지역 및 첩보로 알게 된 군부대 와 중요 시설에 대한 타격이 전개되며 북한의 전략적 선택지는 빠르게 제거될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보이지도 않는 곳에서 날아오는 수백만발의 포탄과 폭격은 그들의 정신력을 빠르게 파괴할 것이며 이는 즉각적인 항복과 죽음의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상황은 연출한다. 다르게 말하자면, 전쟁 시작과 동시에 생각보다 빠르게 북한군은 항복할 것이다. 싸울 이유보다 항복하여 얻어먹을 식사가 그들의 항복에 더 유효한 동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즉, 화력에서 밀리고 정신력도 빠르게 붕괴할 군대는 금세 와해될 것이며 북한 전역에 대한 점령보다 이들에 대한 관리가 더 중요한 임무가 될 것이다.

 

물론 그들의 반항이나 그럼에도 제정신 못 차리고 공격할 부대는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럴만한 동인은 부족하다. 북한이 진짜 완전히 폐쇄되어 외부에 대한 어떠한 정보도 갖추지 못한 외행성 국가가 아닌 이상 얼추 알 것은 다 알고 있고 실제로 목도하게 된 한국의 강력한 화력은 어마어마한 충격을 줄 것이다. 강력한 힘은 자국의 군사력을 얼마나 잘 알고 있느냐만큼이나 빠른 포기와 체념을 불러올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의견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북한이 자기네 정권에 정말로 충성하고 사랑할 것이며 자부심을 느낄 것이라 생각하는가? 한국인조차도 꼭 그러하진 않을진데 북한의 저열한 환경 속에서 얼마나 강력한 애국심과 충성을 가질 수 있을 것인지는 본인의 상상력 만큼을 기대할 수밖에 없겠다. 내 상상력이 말하는 바는, 충격적인 무력은 충성할 이유가 없는 상관과 정권을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항복과 도주(탈영 등)를 더 현실적인 선택지로 강요할 것이라는 점이다.

 

도리어 일부 한국인이 생각하는, 강력한 정신력으로 무장된 북한군이 역사적 유물 병기로 대한민국을 상대로 용맹하고 강력하게 저항하며 전쟁을 지속할 것이라는 믿음이 어디에서 기인했는지 의아할 뿐이다. 북한의 위협을 과장하여 국군의 군사력 증강을 추구하는 바는 국방부/국군 조직의 합리적인 전략적 행동이지만 시민 하나하나가 그걸 진심으로 믿을 이유는 없다.

 

그러한 믿음이 바로 북진통일을 방해하는 가장 강력한 내부적 장애가 될 것이다.

 

 

3.

그러나 이러한 북진통일론은 현실적인 난점과 제약들이 존재한다. 가장 먼저 헌법이 그러하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중략)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정의·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 (후략)

-대한민국 헌법 전문.-

헌법 제 4조 대한민국은 통일을 지향하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한다.

헌법 제66조③
 대통령은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성실한 의무를 진다.

헌법 제69조 대통령은 취임에 즈음하여 다음의 선서를 한다.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 국가를 보위하며 조국의 평화적 통일과 국민의 자유와 복리의 증진 및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 대통령으로서의 직책을 성실히 수행할 것을 국민 앞에 엄숙히 선서합니다."

 

헌법은 평화적 통일을 추구한다. 정확히는, 그러할 것을 규정해놓았다. 즉, 북진통일이 전쟁인 이상 평화통일을 수행해야할 민주국가의 대통령은 헌법을 위반하는 셈이 된다. 그리고 이 헌법적 규정은 3개 조항에 걸쳐서 강조되어 있고, 대한민국 헌법 3조인 대한민국의 영토 규정과 연관하여 생각할 경우 통일은 무력이 아닌 평화적 방식으로 한정될 수밖에 없다.

 

물론 그것이 북한의 선제공격으로 발생한다면 당연히 무력을 통한 통일을 수행해야겠지만 일부 국민들이 망상하는 것처럼 북한이 먼저 대한민국에 전쟁을 거는, 침략을 발생시킬 상황은 0%에 달한다 할 수 있다. 이에 관해서는 여러번 이야기한 바가 있다.

 

또한 중요한 것 중 하나, 전시작전통제권에 대해서 조금만 이야기해보자면, 전작권은 엄밀히 말해 한미연합사에 있다. 그러나 한미연합사의 사령관이 미군이기에 실질적으로 미군에게 있는 것과 같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건, 이 한미연합사에 의한 전작권이란 한미가 함께 싸우는 연합 작전에서 행사되는 것이기 때문에, 한국이 미국의 도움 없는 전쟁이나 도움을 받지 못하는 분쟁에 대해서까지 간섭하는 일은 없다. 미국이 개입하지 않는 한 한국은 어떤 나라와 전쟁을 해도 전작권은 한국이 행사한다.

 

무엇보다 수도방위사령부, 제2작전사령부, 특수전사령부는 전작권과 별개로 한국이 지휘권을 가지는 곳이다. 당연히 이들만으로 북한 전역을 점령하거나 작전을 수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양적으로도 문제지만 수방사 같은 경우 목적성에도 위배된다.

 

이렇듯, 법적인 규약이 바로 첫번째 이유이다.

 

 

두번째 이유는 더욱 더 현실적이다. 현대엔 예방전쟁을 비롯해 공세적인 작계 역시 국방부는 보유하고 있고 현실적인 고려 대상이기도 하다. 그러나 실제 채택될 가능성은 매우 낮기 때문에 적극적인 고려가 잘 되지 않는 것 뿐이다. 그렇다면 북진통일에 문제가 되는 두번째 이유는 무엇일까? 첫번째 이유의 연장을 말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답은 바로 주변국의 반발이다.

 

북중동맹조약은 북한의 급변 사태에 중국이 개입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명분 중 하나이다. 기본적으로 북한이 공격을 받는다면 중국은 자동적으로 참전하게 된다.

 

제2조
체약 쌍방은 체약 쌍방 중 어느 일방에 대한 어떠한 국가로부터의 침략이라도 이를 방지하기 위하여 모든 조치를 공동으로 취할 의무를 지닌다. 체약 일방이 어떠한 한개의 국가 또는 몇개 국가들의 련합으로부터 무력 침공을 당함으로써 전쟁 상태에 처하게 되는 경우에 체약 상대방은 모든 힘을 다하여 지체없이 군사적 및 기타 원조를 제공한다.

제6조
체약 쌍방은 조선의 통일이 반드시 평화적이며 민주주의적인 기초 우에서 실현되여야 하며 그리고 이와 같은 해결이 곧 조선 인민의 민족적리익과 극동에서의 평화 유지에 부합된다고 인정한다.

 

조약 제2조가 말하는 바와 같이, 북한을 공격하는 것은 중국의 참전 명분을 주는 동시에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먼저 말하건데, 바로 그러한 위협을 막기 위해 대한민국 정부와 외교부는 먼저 중국이 북진통일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과 협상을 먼저 전개해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그들이 참전하는 것보다 더 빠르게 북한 전역을 점령해야 하는데, 후자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여튼, 이러한 이유로 주변국, 그 중에서도 중국의 동의 내지는 묵인 없이 북진통일을 추진하는 것은 이북지역 뿐 아니라 한반도 전역을 전쟁터로 만드는 위협을 감수해야하며, 미국과 중국의 참전을 강제하는 조건이 될 것이다. 심지어 미국이 동의하지 않았다면 미국은 참전할 이유조차 없다.

 

현실적인 이유로 미국은 참전할 것이지만 그에 대한 대가는 극도로 비쌀 것이다. 북중동맹조약이 실질적으로 북한의 모험주의적 행보를 통제하기 위해 체결된 것을 고려하면 한국 역시 그러한 제약이 아주 강력하게 가해질 것이다. 실질적으로 북한이 멸망하거나 통일된다면 그러한 군사적 모험을 할 대상 역시 없어지겠지만, 보복적 조건들로 한국의 향후 행방을 좌우할 것이다.

 

예컨데, 중국을 달래기 위해 통일 한국의 군사력은 전쟁 전보다 약해질 것마저도 감안해야 할 것이다.

 

북중동맹조약을 떠나 중국은 한반도의 통일을 원하지 않는다. 그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고 중국은 민주주의 국가와 국경을 접하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며, 이미 세계 10위권의 군사 강국인 대한민국과 전선을 만들게 될 지 모른다는 가능성 역시 강력한 안보 위협이 될 것이다.

 

전후 중국이 한국군의 북상을 극히 경계할 것이라면, 마찬가지로 한국 역시 만주에 전개되어 있는 북부전구의 존재를 불편하게 여길 것이다. 이러한 군사적 갈등을 어떻게 봉합하고 합의할 것인지는 양국 정상들의 협상력에 달렸지만, 결코 만족스러운 결과를 만드는 것이 쉬울 수는 없다. 심지어 미군마저도 이북 영토에 배치 되는 것은 통일 자체를 침략주의적으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북한이라는 완충지는 중국의 전략 자산이나 다름 없다.

 

또 하나의 이유는 휴전협상 문제다.

 

국제련합군 총사령관을 일방으로하고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및 중국인민지원군 사령원을 다른 일방으로하는 하기의 서명자들은 쌍방에 막대한 고통과 류혈을 초래한 한국 충돌을 정지시키기 위하여서와 최후적인 평화적 해결이 달성될 때까지 한국에서의 적대행위와 일체 무장행동의 완전한 정지를 보장하는 정전을 확립할 목적으로 하기 조항에 기재된 정전 조건과 규정을 접수하며 또 그 제약과 통제를 받는 데 각자 공동 호상 동의한다. 이 조건과 규정들의 의도는 순전히 군사적 성질에 속하는 것이며 이는 오직 한국에서의 교전 쌍방에만 적용한다.

정전협정 서언(한국어)

본 정전협정의 각 조항은 쌍방이 공동으로 접수하는 수정 및 증보 또는 쌍방의 정치적 수준에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적당한 협정 중의 규정에 의하여 명확히 대체될 때까지는 계속 효력을 가진다.

정전협정 제62조

 

한국은 협정 당사국이냐 아니냐에 대한 논란이 있는 국가이고, 이는 심지어 중국 역시도 실상이 그러하다. 바로 그런 이유로 정전협정/종전협정은 국제적으로 복잡한 문제가 되는 주제이다. 가령, 한국은 정전협정의 당사국이 아니라던가, 인민지원군 해산으로 협정 당사국 지위가 다소 모호해진 중국이라든가. 마찬가지로 중국이 참여하지 않은 종전협정은 성립될 수도 있지만, 마찬가지로 뒤집어질 수 있다던가 하는 등.

 

여튼, 정전협정 역시 목표하는 바는 평화통일이다. 그리고 이 당사국은 보수적으로 잡는다 해도 중국, 북한, 미국인데, 이러한 이유로 중국이든 미국이든 이러한 협정을 존중한다는 전제 하에 한국 단독의 북진통일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최소한 중국은 그러할 것이다.

 

정전협정 이후 한국이 30여개의 섬을 점령했을 때 이 협정을 근거로 다시 북한에 되돌려 줘야 했던 것처럼 불법적 침략을 그만두고 아마 죽거나 사로잡혔거나 무력화 됐을 김씨 일가를 대신하여 중국이 추천한 사람을 이북 지역의 새로운 대표로 삼아야 한다고 할 것이다. 당연히 극도의 친중인사일 것이며, 한국이 점령한 땅을 다시 북한에 돌려 줘야 한다 주장할 것이기도 하다.

 

당연히 한국이 중국의 말을 그대로 따를 이유는 없으나, 중국이 실력을 발휘하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북한의 위협과는 차원이 다를 것이고 그러한 확전 내지는 핵전쟁에 준하는 상황을 막기 위해서라도 미국은 한국에 양보를 강요할 것이다. 최소한 북진통일은 원하는 만큼의 성과를 내지 못할 것이며 이는 또 다른, 더 위험하고 현실적인 위협들로 뒤바뀔 것이다. 제대로된 권위와 통제력을 갖추지 못한만큼 일부 지역을 얻어냈다 해도 한국은 그것에 대한 관리 문제가 발생할 것 역시 우려되는 부분이다.

 

 

결과적으로, 중국은 북중동맹이라는 조약으로 참전 명분을 가지고 있고, 민주주의 국가와 국경을 접하고 싶어하지 않아하며, 미군과 한국군의 북상 배치를 원하지 않는다. 한반도에 북한이라는 완충지의 존재는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자산이며, 이것을 잃는 것은 동아시아 역학에서 중국의 영역을 제거해나가는 일이며 중국은 그에 대해 아주 민감하게 반응할 것이다.

 

북한의 존재를 지키기 위해 중국이 할 수 있는 선택지는 많으며, 그것은 한반도 전역을 전쟁터로 만드는 것일 수도 있고, 이북 지역을 점령하거나 지금보다 더 적극적인 북조선 친중 정부를 구성할 가능성 역시 존재한다. 그리고 그 국가는 중국의 입김과 지원 하에 이전보다 더 위험하고 껄끄러운 적이 될 가능성 역시 크다.

 

중국이 장악한 한반도 북부 지역을 얻기 위해 한국 정부는 중국군에게 발포할 수 있겠는가? 한국 지도부가 어지간히 미친 게 아닌 이상, 그리고 중국이 먼저 한국과 한국군을 공격하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

 

모든 가능성 중 최악의 결과는 중국은 핵무기를 사용하거나 사용을 매우 강력하게 경고할 것이라는 점인데, 이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핵 사용 가능성을 언급하는 것보다 더 현실적일 가능성조차 있다.

 

따라서, 중국은 한국의 북진통일은 물론 평화적 통일조차 원하지 않는다. 요는, 중국에게 북한이 필요하다는 점과, 통일 한국의 존재를 원하지 않는다는 필요에 따른 결론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일본 역시 한국의 통일을 바라지 않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한국이 강해져봤자 일본의 경쟁력에 도움이 될 일이 전혀 없고, 한국을 일본의 하위 구조로 편입시키고 그것을 확정시키고 싶어하는 일본에게 한국이 벌이는 전쟁에 이익을 얻고 싶어하지만 그렇다고 한국의 이익을 바라지는 않으며, 도리어 더 큰 피해를 입기를 바랄 것이다.

 

한국이 압도적인 무력과 외교력으로 일을 잘 처리한다면 일본은 어떻게든 승전에서 이익을 얻고자 할 것이지만 그게 아닌 이상 일본은 한국의 전쟁 수행을 지속적으로, 그리고 적극적으로 방해할 개연성이 크다. 한국의 성공적인 승전으로 일본이 얻는 건 그다지 없고 한국이 얻을 것은 너무 많기 때문이다. 심지어 한국의 성장과 성공이 일본에 강력한 경쟁력이 될 것을 고려하면 일이 잘못될 경우, 일본의 방해는 합리적인 선택이다.

 

 

미국은 어떠한가? 미국 역시 동아시아에서 전쟁이라는 통제하기 어렵고 관리하기 어려운 리스크를 발생시키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만약 무언가 잘못되어 확전이 되거나 중국의 적극적인 참전이 한반도 전체는 물론 일본 열도와 대만 섬까지 위협하는 상황이 발생한다면? 그 이상으로 남중국해의 동남아 국가의 안보 위협까지 불러온다면 미국은 어떻게 해야하는가?

 

마찬가지로, 그것이 미국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미국이 원하지 않는 전쟁에 참여해야 하는 이유로 충분할까? 미국이 전쟁에 참여한다면 얼마나 비용을 지불해야할 것이며, 그에 대한 대가는 누구에게 받아내야 하는가? 확실한 것은, 어떠한 결과가 나오든 미국의 동의와 승인 없는 북진통일에 대한 대가로 한국은 많은 것을 지불해야 한다는 것이다.

 

중국의 참전이라는 어마어마한 리스크와 북한의 핵 사용이라는 국제적, 안보적 리스크를 고려하면 미국은 대통령이 미친놈이거나 그럴만한 상당한 합리적, 현실적 필요성이 있지 않는 한 북진통일은 한국만의 불편한 광기로 치부될 가능성이 높다. 만약 미국의 의사를 무시하고 북진을 감행한다면 한국은 얻은 것만큼이나 내야할 것이 많게 될 것은 자명하다. 설령 북진통일이 매우 성공적이라 하더라도.

 

 

또 한가지를 고려해보자. 북한의 군사력은 한국과 비교하자면 보잘 것 없는 수준이거나 그보다 조금 나은 수준이지만, 핵무기라는 실존하는 병기는 북한의 재래식 군사력과 별개로 아주 위험한 것이 사실이다. 현재로선 그것을 미사일에 탑재하지 못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것이 북한이 미국을 지나치게 자극하기 않기 위해 의도적으로 억제하는 기술적 제약인지는 알 수 없으나 현재로서 미사일에 탑재하지 못한다는 점은 핵무기의 실사용에 크나큰 제약이 된다.

 

북한이 핵무기를 사용한다면 그것은 십중팔구 핵지뢰일 수밖에 없다. 그것이 한국 정부의 실질 점유 지역에서 폭발하지 않는다는 점은 위안이 될 지 모르겠으나, 우리가 충분한 정보력으로 모든 핵무기의 향방과 포격, 항공폭격, 미사일 타격, 특수부대 전개 등을 비롯한 방식으로 완전히 통제하거나 선제타격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지 못한다면 최악의 결과 대한민국 국군 중 적지 않은 숫자, 최소 수천에서 수만 명이 핵지뢰의 폭발로 목숨을 잃을 것이다.

 

그렇다면 향후 작전 수행은 물론 전쟁 자체에 대한 비판과 전쟁 이후의 책임 문제는 극도로 위험할 것이며, 그러한 모든 문제를 떠나 수천~수만명의 청년이 사망한다면 대한민국의 국력 역시 거대한 피해를 입게 된다. 그러한 군사적 모험은 아주 위험한 도박이 될 것이다. 어떤 대한민국 정부가 그러한 리스크를 감당할 것인가?

 

 

4.

그렇다면 왜 북진통일을 해야 하는가? 애초에 불가능하다면 왜 추구한단 말인가? 법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실질적으로도 매우 어려운 과자가 될 것이다.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도 좋다. 심지어 위험하기까지 하고 사람 목숨마저도 달렸다. 모든 군사적 충돌이 목숨을 전제로 이루어진다고 하지만 북진통일은 얻는 것에 비해 너무 위험할 수 있는 과제이다.

 

그러나 모든 불가능해 보이는 과제들은 현실적인 가능성을 맞춰나가는 과정을 필요로 하기 마련이다. 일단 법적인 문제를 생각해보자.

 

분명 대한민국의 헌법은 평화통일을 규정하고 있다. 이것을 무시할 수 있겠는가? 일단 이것은 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가능하다. 바로 예방전쟁 개념이다. 예방전쟁은 선제타격과 다르게, 발생 가능한 위험이 임박해있지는 않지만 불가피하고, 대응을 지체할 경우 지나치게 심대한 위협의 가능성을 피하기 위한 공격이다.

 

가령, 북한이 핵무기를 미사일에 탑재하게 될 경우나 쿠데타 및 지도자급의 급사에서 비롯된 지도력의 상실과 그에 따른 혼란 등의 급변 사태로 한반도 전체에 심대한 위기를 초래할 경우, 반복적인 핵실험으로 안보적 위협을 지속하는 경우 등이 그러하다.

 

이는 북한이 어떠한 의지와 의도를 가지고 있든 한국에겐 모두 실존하는 위험이고 그것을 제거하는 것은 합리적인 선택지로 기능함이 옳다. 따라서 한국은 평화를 위해 예방전쟁을 선택지로 둘 수 있고, 둬야만 한다.

 

물론 이는 한국의 내적인 논리가 될 것이고, 중국을 비롯한 몇몇 국가들은 한국의 침략 행위라고 규정하고 대응할 것이다. 중국은 어떠한 경우에서든 한국의 통일을 바라지 않기 때문에, 만약 한국이 북진통일을 시도할 것이라면 가장 먼저 중국과 미국에 협상을 시도해야 한다.

 

 

미국은 이미 수차례 한국의 핵무장 가능성을 부정했듯이, 그 의도는 명확하다. 군사적인 영역에서만큼은 핵무기 없이, 재래식 전력만으로 북한을 다뤄야 한다는 점이다. 이것이 북진통일을 허락하는 것은 아니지만 트럼프 정부 당시 북폭이 실제 의제로 떠올랐던 것처럼 미국의 특정 정권은 북진통일 내지는 북폭에 긍정적인 입장을 취할 가능성은 존재한다.

 

어떠한 방식과 논의 과정이든, 어떠한 결과를 도출해내든 미국은 이미 한 차례 가능성을 보였다. 그것이 반복되리라는 보장은 없지만 과거 북한이 소련에 50여 차례나 전쟁을 요구했던 것처럼 한국 역시 비공식적으로, 비밀리에 북진통일을 주장해야 하고 그것에 대한 확신을 주어야 한다. 관리될 수 있는 리스크를 주장해야 할 것이고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미국의 안전과 중국의 향방이다.

 

만약 한국 정부가 중국을 설득해낸다면 미국에게 꽤 전향적인 태도를 이끌어낼 가능성은 존재한다.

 

 

그렇다면 중국은 어찌해야 하는가. 중국에게 북한이라는 완충지는 매우 중요한 전략적 자산이고 한국의 성장은 달갑지 않은 안보적 위협이기도 하다. 전쟁 승전국이 된 한국을 얌전히 두고 보는 것도 불쾌하고 불만이 있다. 심지어 중국 지도부와 별개로 중국인들의 불만 역시 컨트롤하거나 하는 것에 조력해줘야할 가능성 역시 존재한다는 점에서 한국이 중국에 지불해야할 비용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한국이 중국에 제안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영토? 그것은 불가능하다. 일부 지역을 조차하는 것조차 정서상 가능한 선택지라 보긴 어렵다. 다만 한시적으로 중국군을 미군과 함께 점령지의 치안 유지에 투입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들이 치안 유지를 명분으로 어떤 정보원을 얼마나 많이 심고 정보 조직을 얼마나 구성할 지와 같은 위험은 존재하겠지만 말이다.

 

경제적 이권? 재건하는 이북 지역의 건물이나 인프라 건설에 중국 업체를 대거 선발하거나 일부 비중을 넘겨야 할 수 있다. 심지어 황해에서 어업권을 보장 받거나 일정 거리까지 양국이 공유하는 수역으로 공동 관리하는 것조차 협상 테이블에 낼 수 있는 아이템이 될 것이다. 이러한 요소들은 승전을 했음에도 한국의 경제적 이익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점에서 내부 불만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까진 감당할 수 있다.

 

문제는 고작 그런 경제적 이권 때문에 중국이 북진통일을 묵인하거나 동의할 리가 없다는 것이다. 만약 가능하다면 그것은 중국의 경제 문제가 지나치게 심각해서 그 정도 이익마저도 필요로 하는 급박한 상황이어야 할 것이다. 한국이 IMF 당시 극약처방마저도 받아들였던 것처럼 말이다.

 

모든 조건은 한 두가지로 결정되는 게 아닌만큼 경제적 이권을 챙겨주는 것은 당연히 한국이 내밀 수 있는 조건일 것이다. 그럼 또 다른 조건들은 무엇이 되어야 적절할까.

 

아마 그것은 한국의 군사적 확장을 중단하고 일정 정도 군축을 감행하는 것과, 주한미군의 축소 내지는 철수까지는 될 수 있을 것이다. 명분 역시 단순하고 효과적이다. 북한이 사라졌으니 명시적이고 명백한 군사 위협이 제거되었고, 따라서 군축은 물론 주한미군 철수나 축소 역시 가능한 주장이다. 한국인들은 거부감을 느끼겠지만 북진통일은 그만큼 내줘야 할 게 많은 과업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욕심만 부릴 수는 없는 게 현실이다.

 

그러나 중국이 가장 껄끄럽게 여기는 것은 어찌됐든 한국이 친미국가라는 점이고 중국의 이익과 전략에 부합할만한 국가이냐에 관해 의문점이 남는 지점이 많다는 것이다. 당장 한국이 중국에 이런저런 이권을 내주고 여러 약속들을 이행한다 쳐도 그것은 결국 한시적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한국이 다시 전후의 비용들을 재건하고 나면 주한미군은 언제든 다시 돌아오거나 돌아오려고 할 것이다. 중국은 당연히 그것을 원하지 않고 아주 장기적이거나, 불가역적인 관계를 바랄 가능성이 높다. 즉, 미군의 영구 주둔 금지 같은 것이라든가, 중국제 무기를 일정 비율, 일정 기간 동안 사야 한다거나, 양국간의 합동 훈련이나 반도체 등 전략 자산 거래 관련 조약이나 합의가 있을 수도 있다. 청진이나 라선시의 항구 이용권조차 조건으로 나올 수 있다.

 

이 정도로도 부족할 수 있다. 중국의 욕심은 상식적이지 않고 그 정도로 과할 정도의 조건을 내지 않는 한 중국은 북진통일을 허가하거나 묵인하지 않을 것이다. 

 

 

일본의 반응은 어느 정도 무시해도 좋다. 일본은 한반도 문제에 행사할 수 있는 영향력이 제한적이고, 전쟁 가능한 군대를 만들지 못한 지금은 더더욱 그러하다. 그들은 북진통일/2차 한국전쟁 때 한반도에 물자를 팔아먹는 것 이상으로 병력을 상륙시키길 바라겠지만 전쟁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다면 그럴 가능성은 없다.

 

 

5.

북한이 도움을 구할 수 있는 나라는 없다. 무엇보다 출혈을 감수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유일하게 그걸 감당할 수 있고 해야할 필요가 있는 나라는 중국이지만 그마저도 한국이 충분한 조건을 제안하고 낮은 가능성이지만 중국이 그것을 받아들인다면 묵인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북한에게 남은 수는 핵 뿐인데, 그것조차 미사일에 탑재하지 못한다면 전략적 가능성은 크게 제약된다. 설령 시설이나 무기 담당자의 배신이나 항복, 한국과 미국의 전략적 공격으로 핵무기를 사전에 제압해버린다면(그리고 그것은 실제 전쟁 선포나 북진보다 선행될 것이며 그래야 한다.) 김씨 일가에 남은 것은 비밀통로로 탈출하거나 비밀 지하 벙커에 숨는 것 뿐이다. 둘 다 큰 의미는 없다.

 

당연히 이러한 가능성의 열거는 희망적인 전개일 뿐이지 실제 발생할 현실은 더더욱 어렵고 위험할 것이다. 중국은 한국이 어떤 약속을 하고 어떤 제안을 하든 북진통일에 찬성할 가능성은 극히 낮다. 그렇다고 중국을 무시하고 한국 단독으로 북진을 감행할 경우 피를 포함하는 막대한 비용을 지불해야할 것이고 북진은커녕 잃는 것만 남을 가능성은 너무 높다.

 

미국부터가 그것을 바라지 않을 것이기에 실현 가능성은 극히 낮다고 해도 무방하다. 무엇보다 어떠한 한국의 정치 세력도, 정권도 단순 선동용으로 북폭, 북진통일을 꺼낼 뿐이지 그것을 실현시킬 의지를 가진 집단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국힘당 같은 보수당도 대북정책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가 골자인 것을 보라.

 

대북 강경발언을 아무리 쏟아내도 실질적으로 북한에 무언가를 행사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다. 기껏해야 별 의미도 없는 경제제재를 하거나 그마저도 미국과 함께 하는 정도이다. 그들이 가장 적극적으로 싸우는 것은 국내의 정치세력과 반대진영이지 북한이나 중국이 아니다.

 

 

6.

이러한 이유로 북진통일은 물리적으로 가능하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그럼에도 나는 북진통일을 지지하는 편이다. 단지 현실적인 제약들을 어느 정도 해결했다는 전제 아래이긴 하지만, 만약 그런 난점들을 해결했다면 어느 정도의 피가 흐르더라도 난 북진통일에 찬성하고 지지를 보낸다.

 

평화통일이 불가능하다면, 적극적인 북진통일 내지는 북한에 대한 무력 공격 역시 충분히 고려해볼만한 선택지가 되어야 한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 필요하기까지 한 일이다.

 

나는 평화를 사랑하지만 평화만이 유일한 선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최선의 전쟁보다 최악의 평화가 낫다고 말하지만 내 의견은 다르다. 최선의 전쟁이 최악의 평화보다 나을 수 있고 최선의 전쟁이란 새로 발생하는 문제보다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이 더 많으며, 무엇보다 빨리 끝나는 전쟁이다. 윌리엄 테쿰셰 셔먼 장군은 전쟁의 잔혹성을 부정하지 않을 뿐더러 심지어 필요하다고 여겼다. 나 또한 동의한다. 전쟁을 빨리 끝낼 수만 있다면 많은 피가 흐르는 것에 찬성한다. 때때로 더 많은 피가 필요할 때조차 있는 법이다.

 

전쟁은 합리적으로 발생해야 하며, 마찬가지로 합리적으로 이익을 얻을 수 있다면 전쟁 역시 합리적으로 선택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입으로만 북한을 욕하고 막상 싸우길 두려워하는 이들은 그들이 북한을 혐오하는 만큼 전쟁에 관해서도 찬성할 줄 알아야 한다. 만약 그렇지 못하겠다면 아가리를 닫아야 할 것이다. 전쟁은 광기로 치닫는 결과가 아니라 합리성 아래에서도 벌어질 수 있다. 짖어대며 위협하는 건 개들이나 하는 짓이고, 성벽 뒤에서만 용감한 자들이 너무 많다. 전쟁은 비극이겠지만 한편으론 그 결과마저도 비극이라고만은 할 수 없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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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이명박 정부 시절부터 각자도생 사회 분위기가 강화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문재인 정부 5년은 진보 정권이었지만 그렇다고 사회 분위기를 크게 변화 시켰는지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부정적입니다. 이명박근혜 9년의 관성은 결코 줄어들지도 않고, 경제가 크게 더 나아진 것도 아니며, 사회적으로 보수 분위기는 진보 정권 아래에서도 전혀 약해지지 않았다고 보는 편이며, 디씨-일베 문화 역시 여전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윤석열 정부. 이전 정권에 억눌린 게 많았는지 강력한 반동적 현상이 이루어지며 너무나도 빠르게 사회의 역행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대놓고 과거로 회귀하자는 스탠스와 입장, 철학을 피력하고 있는 상황이고 그만큼 사회 안전망 역시 해체되고 있습니다. 청년, 소상공인, 중소기업 지원과 복지는 점점 줄어들고 있고요.

 


하지만 이런 것들은 다 부차적인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은 각자도생이라는 게 뭘 의미한다고 보십니까? 흔히 생각하는 건, 그냥 '알아서 잘 하는 것.', '스스로 챙겨야 하는 것.' 따위를 생각할 겁니다. 근데 생각해보면, 원래 사회는 그랬어요. 남을 도와주지도 않고 남의 도움을 기대하지도 않는 건 원래 그랬어요. 물론 그런 경우도 있을 수 있겠죠. 특히 넉넉하고 인심 후하던 시기엔 조금이라도 남을 도와주려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근데 각자도생이 함의하는 바는 그런 게 아닙니다.

각자도생이 함의하는 바는, 부정하고 부패한 사회에서 가진 바 재산과 신분에 따라 불공정하고 불공평한 처우가 공공연하게 발생하고 누군가 피해를 보더라도 공정한 판단과 집행을 기대할 수 없는 사회에서 발생하는 현상입니다. 사회적 신뢰와 공적 신뢰 역시 바닥에 추락하고 당연히 믿어야 할 것들을 믿지 못하는 사회를 말하는 거죠.

좀 더 구체적이고 쉽게 말하자면, 내가 범죄 피해를 보더라도 상대가 돈 많은 좋은 집안 자식이라면 제대로된 수사와 기소도 이루어지지 않고 법정까지 가도 공정한 재판과 판결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심지어 그럴 것도 없이, 단순히 길가다 사고가 나거나 미친놈에 의해 피해를 입더라도 경찰은 귀찮다는 이유로 CCTV 하나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현장 탐문 따위도 하지 않으며 그거 못 잡는다 증거가 없다느니 법정까지 가봐야 오히려 손해라는 둥 수사조차 시작할 생각이 없는 상황에서 피해자나 그 가족 스스로가 직접 증거를 찾고 변호사를 고용하거나 직접 관계 법령 및 판례를 찾아가며 공부하여 법정까지 끌고가든 말든 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게 각자도생 사회죠.

 

정부, 제도의 작동을 기대하지 못해 개인이 알아서 해야 하는 사회. 직접 범인을 잡아와야 하고 직접 증거를 채집해야 하며, 직접 필요한 서류를 찾아서 발급 받고, 제출하며, 때에 따라서 변호까지 해야 하는. 그리고 그 외의 영역에서도 크게 다를 건 없는 사회.

 



그럼 왜 이런 각자도생 사회가 만들어졌는가 하면, 쉽게 말해 사회적 신뢰, 그 중에서도 공적 신뢰가 고갈되었기 때문입니다.

 누구는 표창장 위조했다며 자살하라는 듯 수백 곳을 압수수색하고 몇년 째 재판을 끌고가며 어떻게든 깜빵 속에 쳐넣어 집안을 풍비박산을 내는데 누구는 똑같거나 더 심한 범죄임에도 언론은 잠깐 반짝하고 열심히 입을 다물고 있으며, 경찰과 검찰은 사건 그 자체는 물론 그 과정에서 발생한 추가 범죄에 관해서도 너무나도 관대한 처우를 해주고 있습니다. 그 어미아비는 여전히 국회의원, 당직자 신분을 유지하고 있고요.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 그 중에서도 부정부패한 이들이야말로 제대로된 처벌은커녕 수사도 잘 되지 않는데 믿을 수 있겠느냐는 공통된 인식, 그리고 실제로 발생하는 경찰과 검찰의 무능하고 무책임한 수사의 실제 사례들. 누구는 롤스로이스로 사람을 박아놓고 멀쩡히 돌아다니다 여론 의식해서 며칠이나 더 주면서 뒤늦게 체포하네 어쩌네 하는 사례까지.

 내가 피해를 봤을 때 공권력과 수사기관을 믿을 수 있을까? 경찰에 신고한다고 죄인이 벌을 받을 수 있을까? 이걸 믿을 수 없게 되는 순간 사회적 신뢰 중 공적 신뢰는 박살나고 그때부터 각자도생 사회가 만들어지는 겁니다.
 

정부가 복지를 줄여서 내 힘든 삶을 알아서 관리해야 하고, 정부가 투자를 줄여서 내 직장과 경제적 상황을 알아서 해결해야 하며, 정부가 경찰 인력을 줄여서 우리 동네 치안은 스스로 조심해야 하고, 정부가 의료보험을 개편해 미리미리 검사도 받고 치료도 받고, 약도 받아놓아야 하며, 정부가 서민 증세를 한다고 자기 재정 상황을 미리 계획해야 하기도, 정부가 실업급여 줄이기 때문에 실업 이후 여유가 줄어들 것까지 고려 해야 하는 사람들까지.

 

다종 다양한 분야와 사람들을 조금이나마 보호해줬던 사회적 안정망이 해체되고 지금껏 신뢰해왔던 시스템과 제도적 장치들이 사라지며, 그 시스템을 다뤄왔던 이들의 평향적이고 불공정한 차별, 공공연하게 보도되는 실제 사례들까지.

 

각자도생 사회는 그 사회가 얼마나 해체되어 가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표현입니다. 정부가, 국가가 자기 역할을 하지 못하고 하지 않으니 각자 알아서 생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말이 나오는 거죠.

 

즉, 우리 사회가 견고하지 못하여 무너질 때나 나오는 말입니다. 그 극단은 정부가 사라지거나, 권위가 무너진 사실상의 무정부상황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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