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hrodin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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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며,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 - E.Kant
by Ko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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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에 해당되는 글 674건

  1. 2021.04.24
    여성이 군대를 비하하고 조롱하는 이유.
  2. 2021.04.19
    여성 징병을 반대하는 이유. 전투력 저하 등..
  3. 2021.04.19
    2030이 페미 이슈 때문에 민주당을 안 찍은 이유.
  4. 2021.04.10
    4.07 보궐선거, 민주당이 패배한 이유 중 하나.
  5. 2021.04.04
    중국이 한국 문화를 공략하는 이유.
  6. 2021.02.03
    한일해저터널의 경제성 문제와 민주당의 멍청한 대응.
  7. 2021.01.26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와 공해 문제.
  8. 2021.01.05
    정경유착이 빚어난 거대한 참사, 바이온트 댐 붕괴사고.
  9. 2020.12.16
    중독은 어디에서 오는가.
  10. 2020.11.13
    지적 자극과 정치사회의 관계.
  11. 2020.11.09
    어째서 현대에 접어들어도 종교에서 벗어날 수 없는가?
  12. 2020.10.23
    함정식 소통 태도.
  13. 2020.10.20
    극단주의와 반지성주의, 정의를 독점한 편협한 바보들.
  14. 2020.10.02
    북한에 대해서는 객관적 판단력이 정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15. 2020.09.25
    연평도 포격과 천안함 사건. 연평도 공무원 피살과의 차이점.
  16. 2020.09.03
    전라도 혐오와 한국 혐오. 가해자의 피해자 혐오.
  17. 2020.08.18
    한국의 사회방역 취약점. 고령자, 극우보수, 종교.
  18. 2020.08.16
    한국 교회와 지역 커뮤니티.
  19. 2020.08.13
    국가, 종교, 민족, 사회적 정체성 문제.
  20. 2020.08.06
    류호정 원피스 논란에 대한 단상.

 

 

 



걔네가 그러는 건 일부러 그러는 겁니다.
 
일단.


1.우리가 가서 고생하는 거 아니니까 완전 남일이고.
2.자기가 고생하고 힘들었다는거 알아봐달라는 것 같은데 관심 없어서 내 알바 아니고. 그래서 괜히 반발심 생기고.
3.관심이 없으니 주변에 남자가 있든 없든 모르겠고.

4.마지막으로, 이게 가장 중요한데, 여자 특유의 조직문화 때문입니다. 일단 분위기 형성되면 맞든 틀리든 그쪽으로 몰아가는 거. 그냥 몰아가는 게 아니라 그쪽으로 분위기와 인식, "사실 규정"을 심화시켜버립니다.

보이루 논란도 보겸 + 하이루인 걸 여초 쪽에선 보X 하이루라고 "사실을 규정"시켜놓고 팩트를 바꿔치기 하려던 거랑 크게 다를 바 없어요. 진실이 어떻고 사실이 어떻든, 일단 자기 입맛과 목적에 맞는 결론을 내려놓고 이쪽으로 분위기를 몰아가기 시작하면 보겸 하이루가 보X 하이루가 되는 거죠. 왜? 우리가 그렇게 믿고 우리가 그렇게 말하니까. 그 우리가 한두 사람이 아니라 수천, 수만명이니까.


군대가 힘든 거 쟤네도 모르는 거 아닙니다. 사실 다 알아요. 알고 그러는 거에요. 군대 뿐만이 아니라 자기네 이익, 특혜, 기득권이 걸린 문제에 있어서는 노골적일 정도로 뻔뻔하게 굽니다. 얼마나 노골적이고 뻔뻔한지, 말로는 이런 저런 이유를 대지만 실상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다 알 정도로 노골적이게 뻔뻔해요.  

군대가 힘든 건 아는데, 가본 적도 없고 갈 일도 없는 완전 다른 세계의 남일(거의 지구 반대편 나라 내전 이야기급으로 받아들입니다.)이고 관심도 없어서 뭐하는 지도, 왜 힘든지도 모릅니다. 굉장히 상투적인 이미지 뿐이에요. 군대 = 힘들다. 근데 왜인진 모르겠음. 힘들고 어렵다니 힘들고 어려운갑지. 하는 정도.
 

그렇게 애매하고 추상적인 인식 뿐이니까 안 힘들다고 몰아가는 분위기를 형성하고 편승하기 너무 쉬운 거죠. 뭔지도 모르고 왜 중요한지도 모르는데 뭐 어때 하는 거죠.
 

또 남자들이 군대 가지고 유세를 떠네 어쩌네 하는 것도 별로 공감 안 되는 게, 저도 남자지만 남자들이 군대 가지고 유세 떠는 거 본 적이 없습니다. 심지어 유세를 떨어도 같은 남자 대상 미필이나 공익에게 유세 떠는 걸 더 많이 봤으면 봤지 가지도 않는 여자에게 떠는 거 본 적 없습니다. 특히 청년 세대는 더더욱 그럴 겁니다.

근데 여자들이 말하는, 남자들이 군대 가지고 유세 떤다. 라고 하는 게 어떤 거냐면..

관심도 없고 공감도 안 되는데 지 혼자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하고 힘들었다고 뭐라뭐라 하는데 뭔 소린지도 모르겠고 이해도 안 가고 공감도 안 가고(공감 안 가는 게 가장 핵심입니다.) 그게 뭐 대단한지 와닿지도 않는다는 이유입니다.

남자는 그냥 나 힘들었음. 이라고 말하는 거 뿐이고, 괜히 약해 보이기 싫고 지난 일이니까 그냥 그땐 그랬지만 이제는 상관 없다는 태도가 그들 눈에는 내가 이렇게 힘들었고 고생했으니까 공감해주고 관심 가져주고 위로 좀 해주고 좀 떠받들어줘라. 처럼 읽힌다는 겁니다.

니들이 고생한 거 관심 없고 뭐 한지도 모르겠고 나랑 별 관계도 없는 일인데 어쩌라는 거죠. 이게 한국 사회에선 특히나 심각한 무관심인데, 다른 나라 사람들은(여자라도) 군대 이야기하면 그래도 오 나랑 완전히 다른 세상 이야기 하면서 관심 가지는 경우 많은 걸로 알고 있거든요. 물론 그거 가지고 내가 이렇게 대단하다 하면서 꼴값 떨면 비웃음 당하겠지만, 그냥 평범하게 이랬다 저랬다 이런 일이 있었다 여기선 이렇게 한다. 하는 이야기는 미필, 공익 남성들에게도 흥미와 관심을 끄는 재밌는 "썰"이거든요.

근데 여자들에겐 듣기 싫은 이야기인 겁니다. 왜? 내가 사는 세상과 완전히 다른 세계 이야기이고, 그래서 공감도, 이해도 안 되는 이야기들이거든요.

 
한국 여자들에게 군대는 이상할 정도로 기피되는 정서가 있습니다. 남자들만의 세계이고 여자들이 끼어들 수 없는 세계(라 여겨지기)이기 때문에 오히려 그러한 군대 경험, 군 문화, 군대 이야기 등 군대 관련 정서를 배제하고자 하는 정서가 있거든요. 우리가 낄 수 없으니 아예 꺼내지도 마라는 겁니다.


이 정도까진 아닌 경우가 그냥 관심이 전혀 없는 경우인데, 예전 여고생이 군필 남자랑 중고 거래를 하는 내용인 걸로 기억하는데, 거기서 남자가 예비군 가야 한다고 하니 여고생이 아, 좀 있으면 군대 가시는 구나. 하고 받아들인 거죠. 예비군을 군대 가기 전에 먼저 가서 훈련 받는, 훈련소 비슷한 걸로 이해한 거죠.

남자들은 심지어 군대 안 가본 초등학생조차도 군대와 관계된 적지 않은 사항들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왜냐면 자기들이 나중에 겪어야할 세상의 정보이기도 하고, 어쩔 수 없이 관심이 가는 분야이기도 하니까요. 어른들이 군대 이야기하면 재밌게 듣습니다. 미리 알아두려는 것도 있고 흥미도 있거든요. 그런 썰들이니까.

근데 여자들은 우리와 같은 나라를 사는 게 맞나 싶을 정도로 군대와 관계된 모든 정보와 정서를 피합니다. 접할 일도 많진 않겠지만, 접하려 하지도 않고 접하는 거 자체를 피하고 싫어하는 경우도 있어요.


흔히 여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이야기가 군대에서 축구하는 이야기라고 하는데, 그게 딱 그런 이유거든요. 나랑 아무런 관계 없는 완전 다른 세상의 이야기라서, 관심도 없고 이해도 안 되고 공감도 안 되는 이야기라서 그런 겁니다.

그러니 군대 뭐 대단한지도 모르겠고 뭔 고생을 하는지도 모르겠고 그거 가지고 힘들었다고 징징대는데 뭐 어떻게 위로라도 해줘? 떠받들어줘? 어쩌라고. 이러는 거고. 그런 반발심이 군대 ㅈ도 아닌 거 군캉스 좋겠네? 하는 거죠. 지들이 가게 되면, 그런 현실이 실제로 다가오면 죄다 패닉에 빠지면서 온갖 개지랄 다 떨 겁니다. 이제 자기 일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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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도 종종 나온 이야기이긴 하지만, 최근 여성 징병을 할 수밖에 없거나, 필요하다. 혹은 해야한다는 생각을 가지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근데, 좀 차별적으로 들릴진 몰라도 근본적으로 한국 여자들 대부분은 전투병으로 부적합하다고 봅니다.

일단 키와 체중부터가 남자에 비해 부족합니다. 더 작고 더 가볍죠. 그렇다고 해서 BMI로 따지면 현역으로 뛰지 못할 정도이냐 하면 아니지만, 근력과 체력까지 고려하게 되면 여성 다수는 현 남성에 비해서도 운동 부족인 경우가 많습니다. 평균적으로 남성에 비해 더 약합니다.

물론 평균적인 신체능력을 가지고 있어도 여자들이 남자보다 키도, 몸무게도, 체력도, 근력도 부족한 게 맞고 이건 차별이 아니라 다른 것이며 단지 신체적인 차이일 뿐이지만 전투병에 적합하느냐로 따진다면 못 쓸 것은 아니더라도 남자에 비해 부족할 수밖에 없죠.

실제 한국 여성들의 운동 부족이야 최근 헬스 문화와 몸 관리가 잘 퍼지고 있어서 많이 나아진 편이더라도 여전히 운동 할 사람은 해도 안 할 사람은 안 합니다.


게다가 이건 진짜 차별적으로 들릴 이야기인데, 여자들 대부분은 수직적 군대 문화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간호사의 태움 문화처럼 남자들보다 더한 똥군기 문화로 심화될 가능성이 큽니다. 심지어 남자들이나 가는 군대에 2년 동안 동일하게 갇혀 있으면서 20대의 1/5을 내다버린다는 스트레스는 수십년 동안 적응하고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게 된 남자들에 비해 더더욱 클 수밖에 없죠. 까놓고 말해서 여자들이 군대에 관심 ㅈ도 없는 거 다 알잖아요. 여자들에게 군대 문제는 거진 철저히 남 일입니다.

안 가봐서 모른다 같은 것도 웃긴 게, 거의 남자 초등학생보다도 지식이 부족한 경우 많습니다. 가족 중에 남자 형제가 있어서 알게 되거나 하는 경우가 아니면 모르는 거 많고, 관심 없으면 그래도 모릅니다. 옛날에는 더 심했죠.

더욱이 군대에서 하는 훈련이나 작업은 대체로 육체적인 것들이 대부분인데, 체력과 근력이 부족하면 남자들에 비해 더 힘들고 더 오래 걸리며 그 작업의 퀄 또한 부족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즉, 여자들은 남자들에 비해 군대 문화와 약 2년간의 내다버리는 인생, 거기서 가져오는 병 등 몸 망가지는 거까지 하면 더 싫어할 거고요. 까놓고 말해서 군대에서 피부 망가지는 일 많은데, 여자들에겐 그게 더 큰 스트레스가 될 겁니다. 군대에 가면서 발생하고 감당해야하는 많은 것들이 남자들에 비해 더 큰 스트레스로 다가올 거라는 이야기죠.


여자를 군대에 보내기 위해선 남자 사병과 분리가 필수적인데, 그러려면 생활관, 화장실 등 각종 시설부터 대대적으로 확충하고 개조해야 합니다. 당연히 많은 시간과 더 많은 돈이 들 겁니다. 생활관 침대 바꾸는데 수조 원을 꼴아박았는데도 잘 안 됐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인데 이거 새로 깔고 바꾸고 하는 시간과 돈이 예상되는 전투력, 보존되는 전투력과 효율성에 비해 아깝다고 봅니다.

그 돈이면 차라리 인력을 첨단무기와 자동화 장비로 때우고 있는 병력을 정예화하는 게 낫지 않나 싶군요.

더욱이 여자들까지 징병하면서 나가는 돈(월급부터 앞서 이야기한 시설 등등) 모아서 남자 병력들 최저임금이라도 맞춰주는 게 낫습니다. 전역하고나서 지금 기준 18개월에 약 3200만원 정도 모일텐데, 그 정도면 그 돈 모아서 창업할 때 쓸 수도 있고 단지 소비를 한다고 해도 경제 활성화에 큰 도움이 될 겁니다.

무엇보다 2년 가까이 내다버리는 20대의 시간을 최소한이나마 보상 받을 수 있을 거고요. 국가가 필요하다고 강제로 데려와서 입고 자고 먹이는 거 다 국민 세금으로, 국가가 해주는 거라고 최저임금 못 준다 하는 건 솔직히 공정하지 않죠. 원해서 가는 게 아닌데.


물론 이렇게 되면 여자들도 남자들은 군대가서 돈 벌어온다고 지랄해대겠지만, 그렇다고 여성 징병 어쩌고는 군의 전투력 측면에서 부적합하다고 봅니다.

이걸 장비로 때울 수 있지 않겠느냐 하겠지만, 드론과 같은 장비나 육체적 능력이 최소한으로 필요한 장비가 아니라면 결국 체력과 정신력, 근력이 필요한 경우가 대부분이죠. 가령 전차나 장갑차가 그리 쾌적한 환경에서 모는 건 아닌 것처럼요.


마지막으로, 이것도 차별적이겠지만, 극한의 환경에서 여성들의 정신력, 멘탈이 남성에 비해 덜 견고하고 탄력성도 떨어집니다. 영화에서 잔인한 장면만 봐도 긴장하고 시선을 피하거나 비명을 지르지만 남자들은 오히려 웃으면서 보는 경우도 있을 정도죠. 군대에서 겪을 수 있는 온갖 개ㅈ같은 상황과 훈련이나 실전에서까지 극한의 상황 및 환경이 다가오면 어떻게든 견디고 버티겠지만 남자들보다 허들이 낮을 가능성이 큽니다.

까놓고 말해서, 성인이 되기 전까지 대부분의 여자들은 남자들에 비해 더럽고 좆같은 꼴 덜 보고 육체적, 정신적인 부담을 덜 받는다고 보는 편입니다. 물론 여자애들도 나름의 고충과 부담이 있겠지만, 남자들과는 다르죠. 덜 거칠게 살거나 더 둥기둥기 해주기 때문이라기보단 그냥 인간관계의 종류나 방향성 따위가 다르다는 맥락에서요.

군대 환경에서 여자들이 더 쉽게 포기하고 더 쉽게 탈진하며, 더 쉽게 멘탈이 터질 가능성이 크지 싶습니다. 결국 여성 징병은 전투력의 하락 내지는 군 문화에 혼란을 가져올 가능성이 더 크다고 봐요. 군이 여자를 배려해주지 않고 군인이기 때문에 해야 한다고 밀어붙히고 강제하기만 하진 않을 겁니다. 현실적으로도 그럴 수 없을 거고. 결국 여성 징병은 얻을 것보단 잃을 게 더 많다고 봅니다.

그 돈 아껴서 무기와 병사들 월급이나 제대로 챙겨주는 게 낫다고 봐요. 이스라엘이나 미국과 한국의 여성 전투병력은 조건은 다르다고도 보고요.

 

 

그리고 이것도 좀 우려되는 건, 군 내 성폭력 문제. 이건 이미 발생하고 있는 문제이고, 심지어 미국에서도 상상 이상으로 많이, 심각하게 발생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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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익명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과 반응.

 

현 2030 세대에게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은 바로 공정과 평등입니다. 물론 그들이 공정하고 평등한 태도를 취하느냐와는 별개로, 그러한 가치를 중요시 여기고 있는 건 사실이라 봅니다.

 

현 청년 세대는 윗 장년 세대와는 다르게 차별을 거의 겪지 않았거나 비슷한 차별을 비슷하게 받아왔습니다. 여자들이 어렸을 때 받은 차별만큼 남자들은 비슷한 차별을 그 나이대에 당해왔죠. 따라서 두 성별의 차별을 없애자에는 동의하지만, 여자들의 차별만 없애자거나 남성의 차별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건 그 자체로 불평등한 겁니다.

 

근데 여시, 워마드, 메갈이 등장하면서 페미가 발흥하고 남성혐오와 역차별이 가속화되었죠. 이미 이 두 성별의 갈등은 통제 가능한 수준이 아닙니다. 둘 다 메갈과 일베로 위시되는 혐오로 맛탱이가 가버렸거든요. 일베나 메갈이 아닌 사람? 물론 많죠. 그런 사람? 있을 수밖에요.

 

 

정부여당의 페미 정책이 문제가 되는 부분이 바로 그런 부분인데, 장년층 세대의 공감대와 감성으로 접근하니까 자신들의 부채의식을 반발이나 반론 없는, 다시 말해 별 생각 없이 수용해주면서 무조건적인 수용과 인정적 태도를 취한 겁니다. 우리가 그 동안 특혜를 봤으니 그만큼 내놓는 것도 있어야 한다고. 현 시대의 세태와 구조적 공정성보단 일단 기울어진 운동장의 한쪽에 무게추를 쏟아주는 것으로. 그러다보니 현 세대 2030들에겐 정부여당이 청년 남자들을 버렸다. 우린 버림 받았다. 라는 생각이 안 들 수 없습니다.

 

위 경찰 커뮤니티에서의 반응을 보면, "왜"냐고 물어본 것 뿐인데 오히려 조롱과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정당한 사유가 있다면, 이해할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는 이유라면 엄밀히 따져 공정한 건 아니더라도 쌤쌤이라고 인정해줄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저런 건 이유가 없잖아요. 그 누구도 왜를 설명하지 않고 자신들의 특혜를 보호하기 위해 일단 몰아내자, 입다물게 만들자는 태도죠. 무조건적인 특정 집단의 이득과 특혜입니다. 그러니 남자들이 어떻게 생각할까요? 존나게 불평등하다. 왜 나만, 남자들만 개고생이지? 그렇다고 뭔가 얻는 게 있나? 보상이 있나? 없어요.

 

그래놓고 뉴스를 보면 허구언날 여성 어쩌고 남성이 어쩌고 그러고 있습니다. 여성에겐 호의적인데, 남자들에겐 잠재적 가해자라고 합니다.

 

이런 부분에서 받아들일 수가 없는 거죠. 얌전히 특혜만 받고 입 다물고 있으면 적어도 직전 시대까지는 뭐라고 안 하던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불편하지만 굳이 건드리진 않는 그런 거. 때때로 작은 것이라도 뭐라도 베풀면서 고마움을 표현한다면 공정한 관계는 아니더라도 그냥 묵묵히 하기도 합니다. 근데 지금 시대엔 페미니 뭐니 하면서 오히려 남자들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남성들이 가만히 있다면 그건 병신인 거죠. 길들여진 가축인 겁니다.

 

가만히 있으면 뭐라고 안 하는데, 아예 건드리기까지 하니 갈등이 안 생길 수가 없는 거죠. 뻔뻔하고 찌질한 여성들에 대해 남성의 여성혐오가 발생하거나 최소한 불평등함이 있다, 남자들이 손해를 보고 있다라는 인지가 나타나는 구간이 되죠.

 

 

이번 보궐선거에서 남자들 표가 오세훈에게 모인 건 민주당이 청년 남성들에게 가증스러워보였기 때문일 겁니다. 앞서 이야기한 이유들 때문에요. 남자들도 힘들고 고생하고 오히려 지금까지 남성에게 불리한 모든 것들에 대해서는 아가리 싹 다 쳐 다물고 있으면서 여자들에겐 왜이렇게 호의적이고 양보해주고 우리의 것마저 빼앗아가려고 하는가? 심지어 무고죄와 유죄추정으로 구체적인 생존의 위협마저도 받아가면서?

 

 

물론 이 모든 게 민주당과 정부의 책임은 아닐 수 있습니다. 하지만 페미당과 페미 대통령을 표방한 이상, 그리고 여성 정책을 펴나간 이상 모든 어그로가 정부여당에게 끌릴 수밖에 없죠. 이미 민주당은 페미당이고 문재인 정부는 페미 정부라는 인상이 박혀 있습니다.

 

그리고 2030들의 그러한 인상이 표심으로 나타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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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에서 지지를 받기 위해선 이미지가 정말 중요합니다. 아무리 일 잘하고 객관적으로 상대보다 뛰어나다고 해도 국민들이 받아들이는 이미지가 좋지 않으면 그냥 욕 먹는 거죠. 그리고 그게 선거 때 표심으로 갈리는 거고.


민주당은 그 이미지를 착실히 망쳐왔습니다. 정권 초기의 말도 안 되는 지지율과 나름 괜찮았던 쇼맨쉽, 이미지 빌드업은 좋았습니다. 심지어 조국조차도 키크고 잘생긴 수석이라고 문재인과 같이 있는 사진에 미남들이라며 여초에서도 칭찬하고 그랬죠.

근데 그걸 야당의 발목잡기로 아무 것도 못하는 답답한 상황이 연출되면서 무능하다는 인상을 주게 되었고, 이후로 공정, 평등이라는 기치가 전방위적으로 공격을 받는데 조국 정국이 가장 핵심적으로 치명적이었죠. 만들어진 불공정 프레임과 검찰의 사보타주로 이미지를 박살을 내고 공정, 평등이라는 가치를 무너뜨립니다.

페미는 이건 어쩔 수 없는 시대적 사명 비슷한 걸 수도 있다고는 봅니다. 다만 문제는 페미 중에 제대로된 사람이 없고, 그렇지 못한 이들이 절대다수인데다 그런 이들의 패악질이 일베보다 더 한 경우가 많았으면 많았지 덜 한 정도까진 아니라는 거죠. 더 추악해요.

근데 그런 페미에 편승하면서 10~30대 남성들의 감정을 확실히 건드려버렸습니다. 청년층 지지율이 박살난 건 솔직히 말해서 감정 문제입니다. 극혐하는 페미에 편승한 정권에 페미 정책과 페미적 발언을 하는 민주당이 곱게 보이지 않는 거죠. 심지어 이건 민주당 연성 지지자이지만 나름 꾸준히 지지하던 이들도 등을 돌리는 계기가 됐을 겁니다. 다시 말하지만, 감정 문제입니다.

진보좌파 쪽이 페미니즘을 안 할 수는 없을 거라는 점을 감안해도 민주당의 실책입니다. 젊은층을 포함해서 남성들의 심리적 반발과 페미 진영 자체의 혐성을 감지하고 적당히 거리를 두었어야 했어요. 친페미 발언 하나로도 중국몽처럼 꾸준히 물어 뜯길 수도 있을 정도로 위험한데 말입니다.
  

거기에 부동산 문제는 정말 큰 실책인데 이거야 뭐 더 말할 필요는 없으니 굳이 짚지 않는다해도 민주당은 이미지 관리와 여러 정치적 선택에서 실패한 겁니다. 특히 감정 문제를 건드렸으니 실제 더 큰 해악을 끼치는 쪽과 비교해서 더 미움을 받을 수밖에 없죠.

대중들에게 정치인과 정당에서 자기들끼리 벌이는 부정부패와 비리보다 자기들 감정을 건드리는 발언과 행동, 정책에 더 큰 마이너스를 줍니다. 전자는 걍 걔네가 더러운 놈들이지만 후자는 내 감정을 건드리는 거니까요. 그러니 사회에 얼마나 큰 해악을 미쳤고 법과 윤리를 기준으로 봤을 때 전자가 더 배제되어야할 이들이라고 해도 실제 표심은 후자에 더 불리하게 돌아가는 겁니다.

여당 인사보다 야당 인사가, 그리고 양적으로도 질적으로도 크게 모자람이 없고 오히려 더 심함에도 불구하고 실제 비판은 민주당이 더 많이 받았죠. 이건 민주당이 남들보다 더 가혹하고 엄격한 잣대를 받는 불평등하고 불공정한 경기장에서 싸운다는 걸 감안해도 민주당의 이미지 작업과 지지자들 감정 고려에 실책이 있는 것도 사실이라 봐요.

자기들끼리 묵묵히 자기 일 잘하면 남들이 알아봐줄 줄 아는 건 굉장히 순진한 거죠. 거의 구시대적 신화에 가까운. 민주당은 그 정도로 안일하게 손 놓고 있었던 겁니다. 전부터 꾸준히 말하는 거지만 꼴같잖게 고고한 도덕군자 이미지 깨부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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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어디까지나 제 생각일 뿐이고 공식적이거나 객관적으로 증명된 것은 아닙니다. 


1.
먼저, 중국은 천안문 사태를 겪으면서 중국 내 민주주의를 희망하는 이들의 거대한 움직임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중국 공산당은 민주주의와 완전히 배척되는 집단이고, 거의 세상에서 가장 엘리트주의적인 집단이니만큼 대중참여적인 민주주의에 대해선 거의 알러지 반응을 일으켰을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일정 이상의 피를 봐야 한다'며 잔혹하게 짓밟아버리고 민주주의 태동의 씨앗을 거세했습니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요. 사상을 막는 것은 매우 어렵고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지만, 적어도 그러한 사상이 겉으로 튀어나오지 않으면 나름 성공적이죠.

그래서 그 이후로 중국에서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집단적인 움직임은 사실상 종말을 고했습니다.

중국 공산당은 천안문 사건을 겪으며 이러한 일이 다시금 발생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을 내렸고, 그에 따라 애국주의를 심으며 국가와 중공을 동일시하게끔하여 애국을 한다는 건 곧 중공에 충성하는 것으로 유도했습니다.

그러한 작업의 결과 90년대 이후 중국에선 민족주의와 국수주의가 발흥하기 시작하고, 중국이 유의미하게 강한 국력을 가지게 되는 2010년대부터 이들의 영향력은 강성해지는 국가와 함께 성장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민족주의적 관성은 멈추고 싶다고 해서 멈출 수 있는 게 아니고, 제어하고 싶다고 제어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이전에도 한번 언급한 적이 있는데, 중국 정부는 때때로 자국민들의 민족주의적 요구를 제어하지 못하고 도리어 등떠밀릴 수도 있습니다. 가령 중국 정부가 (무력을 동원한) 외부적 영향력 확대를 꺼리거나 미국과의 군사적 충돌을 피하고 싶지만 대중들의 자만심에 의한 내부적 요구와 압박에 '어쩔 수 없이' 액션에 나서는 경우가 그러할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중국 정부가 그러한 민족주의를 통제하거나 제어에 완전히 실패한 건 아니고, 오히려 이용하는 경우도 있지만, 민족주의를 충동질 하는 건 쉬워도 제동을 거는 건 어려운 게 사실이죠.


2.
북한은 구조적으로 지속될 수 없는 체제입니다. 그저 최대한 버티고만 있을 뿐이지, 언젠가 무너질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체제의 한계는 언제든지 찾아올 수 있지만, 개인적으로 별다른 변수가 없다면 10년 이상은 더 지속될 수 있지 않을까 싶군요. 한 10년쯤 지나고 무너진다는 건 더더욱 아닙니다. 북한은 의외로 생존에 최적화된 체제이기도 하거든요. 애당초 생존이 목적이라.

반대로 말하자면 북한은 결국 언젠가는 무너질 것이고, 그렇게 실질적 행정력과 영향력이 상실된 무주공산을 누가 먹느냐는 문제가 남게 됩니다. 한국인들은 대체로 '당연히' 북한의 모든 영역이 자동적으로 한국의 것이 된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이는 사실 그리 현실적인 전망은 아닙니다.

역사적/민족적 당위성이야 당연히 한국이 가지고 있겠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수십년간의 유의미한 명분과 정당성을 확보했는가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습니다. 그걸 따져야 한다기보단, 그걸 따지려 드는 세력이 있을 겁니다.

가령 중국같은.

무엇보다 그런 걸 떠나서 혈맹이라는 타이틀을 걸고 있는 북중관계를 위시로 북한 북부 지역을 군사적으로 점령하려고 할 가능성은 충분히 높습니다. 될 수 있으면 더 많은, 가능하다면 조금 무리해서라도 북한 영토 전부를. 곤란해진다면 조금씩 양보하면서 내어주기만 해도 200%, 아니. 600, 800%는 이익이죠. 이에 대해서도 예전에 자주 이야기했던 것 같네요. 중국 입장에서 북한이라는 완충지와 미국의 국력과 시선을 분산시켜주는 트러블 메이커는 필수입니다. 민주주의 국가와 국경을 맞대는 것도 중국에겐 불편하고 불쾌한 일이될 거고요. 그래서 한국이 한반도 전체를 통일해도 육로, 만주를 통한 직접 교류 경로는 꽤 오랫동안 닫혀 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럼 당연히 중국은 북한 붕괴시 해당 지역을 직접적으로 점령하는 게 가장 좋은 선택지일 것이고, 그게 불가능하거나 곤란하다면 친중 괴뢰정부를 만들고 중국 공산당의 명령과 결재로 돌아가는 꼭두각시를 만들어 명목상의 북한 정부를 한반도 북부에 설립하고 완충지로 만드는 것이 차선일 것입니다.

후자의 경우는 충분히 가능성 있고 실제 실행 가능한 일이기도 합니다. 중국이 북한 수뇌부 일부나 정부를 구성할 수 있는 인재 몇을 가지고 북부에 새로운 정부를 만들고 국권을 인정한다는 발표를 하며 군사적으로 보호해주는 것은 타국의 시선과 비난 및 반발과 별개로 있을 수 있는 일이니가요.

하지만 전자는? 명분이 너무 부족하죠. 그건 그냥 불법 점령이고 정복이니까. 하지만 중국 공산당 속내에는 너무 달콤한 선택지이자 '차후의 계획'을 위해서도 필요한 조치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려면 단순히 동맹이니 어쩌니 하는 명분보다 더 강력한 이유가 필요한데, 그건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자국의 일부로 편입시키는 거죠.


3.
그게 가능하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미 20년, 30년전부터 동북공정을 시행해온 나라가 중국입니다. 동북공정의 가장 근본적인 명분이 되는 것은 중국 역사 및 문화와의 동질성이나 유사성 따위가 아니라 '현재 중국이라는 국가 내에 조선족이라고 하는 한민족의 일파가 소수민족으로써 존재한다는 사실 그 자체'거든요.

다시 말해서, 중국 내의 여러 민족들이 중국 역사와 문화를 이루는 요소들이라면, 조선족 또한 중국 역사와 문화의 일부 아니겠느냐는 겁니다. 그럼 이런 질문이 나올 수 있습니다. 중국의 소수민족은 조선족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의 민족과도 겹치는 민족도 많은데 어째서 한국에 대해서만 이렇게 강력하게 우기느냐고 말입니다.

그건 중국 정부의 필요성 때문입니다. 이유는 이미 앞서 말했고요. 북한을 점령할만한 역사적, 문화적 당위성의 확보. 나중에 조선족과 북한을 엮어서 북한에 대한 진공 명분을 확보하는 것. 이건 이미 러시아가 크림 반도를 가져가기 위해 사용했고 성공한 명분이기도 합니다. 유로마이단 사건 등으로 위험해진 우크라이나 내의 러시아계 집단을 보호하기 위한 군사적 조치.

북한이라는 지역을 차지하면서 확고한 중국 내 소수민족으로 만들 겁니다. 그걸 위해 일부 고위직을 중공 내의 고위직으로 임명하기도 할 거고요. 추후 이북 지역에 중국의 지방정부를 세우는 걸 당면한 목표로 세울 겁니다.


4.
그렇다면 그게 가능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단순히 우기기만을 해선 안 됩니다. 일단 적절한 근거와 논리를 세워야 하고, 그게 객관적으로 인정 받게끔 해야하죠. 물론 극도로 어렵고 기실 불가능한 일에 가까울 겁니다. 통할 가능성도 낮고 지금도 어렵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이 이를 진행하는 이유는 그게 필요한 일이고, 그들이 북한 정부의 붕괴 시점을 언제로 보는지는 알 수 없지만(어디선 10~15년 내로 본다고는 합니다만..) 적어도 북한 지역을 점령하고 지배할 때까지만 통하면 되는 일입니다.

이미 꿀꺽한 것을 다시 뱉어내라고 하는 건 애초에 먹히지 않게 하는 것보다 더 어렵죠. 그래도 중국의 욕심은 이를 포기하지 않았고, 여러 분야에서 다양하게 공정을 시도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 공정의 핵심은 최소한 중국 내에서 한국은 중국 역사와 문화의 일부 내지는 카피로 결론을 내려놓는 일이고, 애국주의 교육을 통해 길러낸 민족주의자들, 중국=중공에 충성하는 애국청년들을 이용하는 겁니다. 그들의 목소리로 하여금 공정에 힘을 싣는 지지와 추진력을 만들고 그들 스스로도 공정을 진실로 만들어내는 거죠.

중국인들이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중국의 것을 배낀 것이라 믿게 만드는 것만으로도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겁니다. 중국 정부는 이러한 충동을 부추기도 있을 거고요.

이러한 활동은 단순히 중국이 문혁으로 자기네 문화를 조져놨거나 한국의 소프트파워가 탐나고 샘나서 빼앗고 싶어하는 열등감의 표출인 것도 아닙니다. 물론 없지 않아 있겠지만, 그게 주목적은 아니라는 겁니다. 중국이 한국을 타겟으로 사고 있지만, 그 내용을 제대로 살펴보면 한국이 아니라 '한민족'을 대상으로 하는 겁니다. 좀 더 정확하게는 한민족의 역사적 요소와 문화적 요소를요.

조선시대 때는 남한과 북한이 없었잖아요? 그러니 한국을 타겟으로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근원은 남북한이 없던 시대의 것이니 어그로가 한국에 끌렸을 뿐이지 중국 공산당이 목적한 지점까지 도달하는 충분한 성과를 얻었을 때 군사력으로 북한 지역을 먹고자 한다면 역사적, 문화적 명분을 확보한 중국에게 지금까지 점령한 지역 싹 다 뱉고 꺼지라고 할 수가 없게 되는 겁니다.

한국이 아무리 떠들고 미국이 힘 좀 쓴다고 해도 말이죠. 알박고 좆까라고 하면 뭐.. 중국 입장에선 일부 지역을 내주거나 일부 북한 고위 인사를 던져주고 이 이상은 양보 못하겠소! 하겠죠. 중국이 다 내놓고 돌아가는 게 아니라 땅을 가지고 협상하게 되는 형세가 되는 거죠.


5.
그럼 그게 진짜 가능한 것인가? 현실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인가? 하면..

솔직히 좀 어려울 거 같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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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적으로, 정치의 기술 중 하나가 불리한 의제는 묻고 유리한 의제로 대체하는 것입니다. 유리한 의제가 어렵다면 논란이 많은 의제를 가져오는 것도 하나의 방법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가덕도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하는 시점에서 한일해저터널이라는 의제로 논란을 키워 불리한 정세를 흐리게 만든 김종인의 술수는 꽤 괜찮았지요.

 

어째서 굳이 한일해저터널이라는 주제였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누군가는 아예 경부선 지하화가 낫지 않겠냐는 말까지 꺼낼 정도인데, 아마 다른 모든 의제보다 논란을 일으킬 수 있는 민간함 주제였기 때문일 겁니다. 게다가 반격도 예상하기 쉽고 1차원적이라 대응하기도 어렵지 않을 거고요. 당장 민주당은 한일해저터널에 친일 딱지를 붙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부분이 전 문제라고 봅니다. 한일해저터널은 기본적으로 경제성이 안 나는 무의미한 사업입니다. 심지어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경제성이 약하고 무엇보다 들어가는 돈이 너무 많습니다. 수십 조, 많게는 100조까지도 추산할 정도인데, 그 정도 돈이면 차라리 국민 전부에게 1억씩 뿌리는 게 더 낫죠.

 

 

간단하게 몇가지만 지적하자면, 부산항은 세계 5위 항구입니다. 대한민국 경제력이 세계 순위권에 들고 무역대국으로 치자면 경제력보다 더 높은 순위를 매길 수 있을 겁니다. 이는 다시 말해 부산항이 일개 포구가 아니라는 점이고, 과거 100년 전처럼 일본에 쌀이나 옮기는 수준이 아니라는 것이기도 하죠. 

 

그런 규모만큼이나 물류의 집중도는 좁은 국토에서 더욱 효율적이게 됩니다. 부산항에서 대체로 처리해버릴 수 있다는 거니까요. 위치도 좋고, 물류에 있어서도 효율적입니다.

 

공사비가 수십 조 원이면 통행료도 결코 싸지 않을 겁니다. 물류는 터널로 옮기는 것보다 배로 옮기는 게 더 싸고 효율적일 겁니다. 가까운 곳이라면 속도가 빠르다는 점 정도나 이익일까요. 근데, 특히 대륙 물류와 연결되기 어려운 지리적 상황(북한의 존재) 때문에 한국에 물류를 육로로 옮겨봐야 큰 의미는 없죠. 일본 철도가 신칸센 같은 걸 빼면 협궤로 이루어져 호환이 안 되고 옮길 수 있는 양과 속도도 한계가 뚜렷하다는 점까지 생각하면 더더욱 무의미하죠.

 

설령 북한에 철도 깔리고 중국, 시베리아, 유럽까지 쭉쭉 이었다고 해봐야 안전한 경로가 아닙니다. 날씨, 치안 등등. 중앙아시아의 불안정한 정세야 말할 거 없고, 시베리아의 날씨는 더더욱 말썽이라 고려해야 하는 게 많아집니다. 그런 걸 떠나서 유럽이든 중동이든 육로 수송보단 해양 수송을 선호합니다. 더 싸고 빠르거든요. 중간에 여러 나라 거치면서 통행료 내고 싶진 않을 겁니다. 그냥 배로 직송으로 보내는 게 낫지.

 

아까 포구 이야기도 있었는데, 전우용 역사학자 말처럼 포구는 상대적으로 적은 물량만 처리하는 작은 항구입니다. 그래서 다리 놓이면 역할이 없어지며 사라지거나 쇠퇴하죠. 하지만 부산항이 작은 항구인가요? 부산에서 나가는 화물은 일본으로만 가는 게 아니라 한국 수출품이 가는 모든 곳, 심지어 외국 상품들끼리 환적해서 나가는 항입니다. 일본행 화물 빼도 세계 10위 안에 드는 무역대국의 수출입 물량을 받는 항구라는 거죠.

 

결론적으로 경제성이 매우 부족하다는 겁니다. 들어가는 공사비에 비해. 일본으로 빠지는 물량을 빼도 일거리 자체는 많다는 겁니다. 게다가 일본 쪽 수출은 무역갈등과 함께 줄었다는 점도요. 다만 코로나 19와 함께 이러한 현상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면 인천항 쪽에서 동남아 쪽 신규항로 물동량 증가와 함께 부산항 물동량이 좀 줄어들 수는 있습니다. 한일해저터널을 통해 일본 쪽 물류가 빠지겠지만 한일 양쪽에게 그다지 경제적이진 못할 겁니다.



이런 문제점들이 있는 게 한일해저터널의 경제성과 목적성 문제입니다. 근데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한일해저터널에 대한 반대 논리가 어떻죠? 민주당에선 친일로 몰고 있고, 전우용 학자 말대로 한국에 몰리는 경제성이 일본으로 빠진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전 거기에 동의할 수 없겠더군요. 이런 상황에서 민주당의 대응은 친일이라는 비판을 하고 있는데, 기실 국힘당과 그 지지자들 입장에서 친일 비판은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그들이 인정하지 않든 아니든 오랫동안 들어왔던 거고, 거기서 더 새로울 게 없을 지경일 겁니다.

 

심지어 진짜 친일이라고 간주할 수 있는 사항에서도 입을 다물고 모른 척 넘어가려고 했으면 했지 인정하거나 그게 지지 철회, 혹은 표를 안 주는 상황까지 가지도 않죠. 지지자들조차 국힘당 욕해도 결국 투표장 가면 국힘당 찍을 사람들이라 친일 비판은 지겹다거나 그 비판을 사실이라 인정하기 싫어서, 혹은 진짜 사실이라 짜증난다 정도의 인상을 줘도 표가 빠질 가능성은 낮습니다. 빠져도 충분히 감당 가능하다는 거죠.

 

 

전 아예 민주당이 이에 대해 별 다른 반응이 없길 바랬습니다. 상대방이 원하는 의제로 넘어가지 말고 가덕도 의제를 길게 끌고가서 국힘당을 분열시키고 국힘당 지지자들, 특히 부산 쪽 사람들의 지지층 이탈을 노렸어야 했습니다. 설령 이 떡밥을 물어도 가덕도를 꾸준히 계속 어거지로라도 끌고가면서 국힘당의 민감한 반응을 이끌어내는 게 좋습니다.

 

하지만 물었더군요. 그것도 굉장히 1차원적인 수준의 이해로. 민주당 지지자들에게 국힘당 친일 비판은 유효할 지는 몰라도, 국힘당 지지자들에게 친일 비판은 무의미합니다. 이게 그들의 친일적 행위나 사상에 대한 무감각함, 더 나아가 그들의 (인정하지 않는) 친일적 성향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큰 효과를 볼 수 없는 비판이라는 겁니다.

 

물론 민주당도 저걸 제대로 각잡고 물기는 부담스러웠을 수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경제성이 없다는 식으로 포퓰리즘적인 의제라고 비판할 수는 있었다고 봅니다. 그래서 민주당의 대응이 멍청한 거죠.

 

민주당이 헤게모니 정치를 못하는 게 이런 면 때문이죠. 지금 국힘당 쪽에선 뭐라고 하고 있죠? 한일해저터널 떡밥을 이용해 민주당의 친일 비판을 이끌어내고, 공론화가 필요하다면서 의제를 빼어온 뒤, 반일 감정에 편승하면 안 된다면서 오히려 민주당의 반일사상이 문제라고 비판하고 있으며, 그런 식으로 의제를 가덕도에서 한일해저터널, 친일과 반일 논란으로 바꿨습니다.

 

그러면서 여전히 원전게이트라는 시덥잖은 선동질을 하면서 정권을 공격하고 있고요.

 

최근 성범죄 프레임 선동 지령이 유출되었는데, 민주당과 청와대는 가덕도 떡밥으로 국힘당을 부산 시민과 분열시키고 원전 게이트라는 장난질을 성범죄 프레임 선동 지령 건으로 받아치며 아젠다 경쟁을 했어야 했습니다. 근데 아무 것도 못하고 있죠. 정치 못하는 놈들답게요. 참 답답하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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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스튜어트 밀은 벤담의 공리주의에 큰 영향을 받은 인물로서, 그의 자유론은 효용이라는 가치를 기반으로 주장을 전개해 나갑니다. 그는 국가와 사회, 더 나아가 인류 발전을 이끌 원동력으로 개개인의 개성을 꼽았습니다. 또한 밀은 다른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지 않는 모든 행위는 개인의 자유 영역으로 규정했지요.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영역은 사회적 행위에 속한다는 것이며, 사회나 정부는 그러한 개인의 행위에 개입할 수 있고 개입 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직접적인 영향만을 이야기하는 것이며, 간접적인 영향을 따져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의 행동이, 다른 사람의 언어가 다른 어떤 사람들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주진 않지만, 기분을 상하게 했다면 그것은 전자의 자유가 후자의 자유보다 우선한다고 본 것입니다.


밀이 개성을 중요시 여긴 것은, 그것이 인간 정신의 건전한 토론과 토론의 다양성을 통해 발전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사회나 국가는 일반적으로 옳다고 여기는 것을을 목표로 하여, 국민들이 일치단결하여 목표를 달성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모습은 아무리 좋고 옳은 것을 목표로 한다 하여도 독선의 요소가 있기 때문에 그 부작용과 역작용이 있을 것이며, 그것이 개인과 사회, 국가의 발전을 가로막게 될 것이라 하죠.


반면 개성은 사람들을 분열시키는 요소처럼 보이지만, 실은 자유로운 토론 속에서 개성이 극대화될 때 개인과 사회는 그런 부작용을 제거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국가와 사회 또한 결국 개개인에 의해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요.



밀의 자유론에서 말하는 자유와 그것을 건전히 유지시키기 위해 제시된 것들은 일견 이상적이기도 합니다. 그때와 지금이 크게 다르진 않을 것일테지만 여전히 대중은 자신의 자유를 통해 사회적 해악을 발생시키고, 개성과 자유로운 토론을 통해 그러한 해로운 주장과 목소리가 사그라들거나 나쁜 것으로 규정되어 힘을 잃기는커녕 오히려 그러한 악종에 열광하고 환호하며, 그것을 지지하는 세력이 형성되어 실질적인 힘을 갖추기까지 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러한 목소리는 자유가 주어졌기에 나오는 것이 아닌, 그러한 사상과 생각을 갖춘 개개인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며, 세대와 직종, 지역을 뛰어넘어 광범위한 집단이 공유하는 것은 그만한 경쟁력, 혹은 (아무리 어설프고 황당하다 하더라도 그들에게만큼은) 설득력을 지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상이 먼저고, 그 사상을 표현할 자유가 있기에 그러한 존재를 확인하고, 확대될 수 있는 것입니다. 가치판단의 영역에 속하는 윤리, 도덕은 남을 통해 확인하고 충돌하며 수정되면서 그 시대, 그 환경에서의 적절한 선을 찾아가려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 윤리와 도덕이라는 것은 개인이 따라가는 것이 아닌 윤리와 도덕이 사람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악한들의 모임에서 도덕과 윤리의 기준은 건전한 집단에 비해 매우 낮거나, 혹은 매우 색다를 것입니다. 그와 같이, 해악적인 함의를 담는 사상이 사회를 지배하거나, 우위에 설 때 도덕과 윤리의 기준도 그에 맞게 변화되는 것입니다. 밀은 이러한 안 좋게 나아가는 사회는 자유로운 토론과 개성을 통해 혁파되고 더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될 것임을 믿었을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그게 맞을 수도 있습니다. 또한 맞기를 바라고요. 대체로 안 좋은 것들은 아무리 거대하더라도 시간에 따라 사라지곤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것은 더 나은 것을 요구했던 사람들이 더 나은 논리와 주장을 통해 비판하고, 제시했기 때문이고요. 



그러나 우리 주변에는 여전히 해악스러운 악종들이 있고, 그것들은 여러 지점에서 다양한 피해를 입힙니다. 문제는 그것이 피해인지, 문제인지 알 수 없는 경우도 있으며, 그것에 영향을 받은 이들이 그것을 나쁘지 않다, 문제가 아니다. 라고 생각하게 만들기도 한다는 것이지요.


일베, 워마드, 최근의 ㅇㅅㅇ에 다다르기까지, 그들의 행동과 언어는 반사회적이고 일반 윤리와 도덕, 심지어 인권의 영역까지도 건드리는 민감하고 위험천만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밀의 주장에 따르면, 이것들은 직접적인 피해를 주지 않는 간접적인 것들이라는 것이지요.


서구사회에선 한국처럼 명예훼손, 모욕죄에 대해 인정이 훨씬 까다롭거나, 아예 그러한 죄를 인정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누군가에 대한 완전한 날조와 거짓선동조차 자유로써 보호 받는 미국 같은 곳에선 정말 이게 같은 인간의 지성을 공유하는 자인가를 의심하게 만드는 지적 실패작들을 보게 되는 경우도 있을 정도지요.



그러나 보기 싫은 건 보기 싫은 것입니다. 자유로운 토론과 논쟁을 통해 더 나은 답과 타협을 찾는 것은 아름다운 행동이지만 의외로 그러한 결과를 찾아보는 것은 매우 어렵기도 하죠. 특히 사람이 많아질 수록, 그 토론자가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지 않을 수록, 때때로(혹은 대체로;) 토론자의 지성이 부족할수록..


일베충이나 환빠와 같은 정신을 차리지 않는 이들이 어느 곳에서 완전한 논파를 당하거나 상당한 반격으로 자신의 주장과 논리에 힘을 잃더라도 그들은 자신의 사상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주장을 다른 곳에서 반복하거나, 자신의 생각을 바꾸지 않죠. 인지부조화, 자기합리화 등 여러 정신적 기제들이 상처받은 자아를 복구하면서 자신의 패배를 회피하게 됩니다.


그렇게 그 자신은 결코 변하지 않으면서, 무익한 토론과 논쟁을 만들어내고, 아무런 이익도 효용도 없는 활동을 발생시키죠. 그러한 활동은 매우 피곤스럽기 때문에 한두 번 하는 정도로도 힘들고 귀찮아집니다. 공연히 바뀌지 않는 이들을 상대로 싸우러다니거나, 토론으로 쫓아내기보다는 차라리 권위나 권한을 동원하여 공격하거나 내쫓아버리거나 혹은 그 본인이 최대한 무시하기도 하고, 아예 그 장소를 떠나는 경우도 발생하게 됩니다.


이는 결코 건전한 현상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건전하지 않은 것은 해악적 행위를 반복하는 당사자에게 있을 것입니다. 자신과 같은 사상을 공유하는 이들은 그것에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표현의 자유, 사상의 자유를 읊으며 용인하라고 요구하지만, 실상 그 반대에 선 이들에겐 하나의 공해(Polution)에 불과합니다.


집에서, 학교에서, 도서관에서, PC방에서, 직장에서, 심지어 인터넷 커뮤니티나 게임 속에서조차 그 내용의 해악성 때문에 듣기 싫은 소리를 강제로 반복해서 듣는 것을 선호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집에 있는데 밖에서 듣기 싫은 소음이 지속해서 들린다면 우리는 그것을 소음공해라고 합니다. 원하지 않는 해로운 성분이 공기나 물에 섞여서 건강을 해친다면 그 또한 환경오염, 공해라고 할 것입니다.


정신과 사상의 영역에서도 정신적 건강을 해치고 토론으로 교정되지 않는 사상을 반복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그 자체로 공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밀 또한 그러한 부정한 표현에 대해 좋진 않게 봤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또한 하나의 개성으로 토론을 통해 부딪히고 배울 수 있는 것이라 보겠지요.


그러나 우리는 그보다 더 좁고 짧은 세계를 보는 사람들입니다. 인류의 항구적인 발전보다 당장의 평온함을 선호하고, 토론과 같은 고차원적인 지적 활동을 즐기기보단 그런 경험은 때때로, 그리고 남이 하는 것을 보는 걸 더 좋아하죠. 우리는 밀처럼 관용적이고 이상적으로 바라볼 수만은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변명이지만, 동시에 어쩔 수 없이 인정하는 사실이기도 할 것입니다.



일베, 페미와 같은 정치병자들의 주장과 표현들이 공해라면 그것을 어떻게 다루어야할까요? 밀의 유지를 따라 직접적인 영향,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용인하고 최대한 토론을 통해 부딪히며 교정될 것을 희망해야할까요? 그러나 그것은 너무 힘들고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때때로 직접적인 영향을 줍니다. 아니, 이미 그 자체로 그러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밀 또한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사회적 해악으로 규정했습니다.


그러니 차라리 우리가 일상적인 공해를 다루는 방식이 더 나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역시 이는 자유를 억압하는 행위이며 개성을 짓밟는 것이기도 하죠. 윤리적이지 않고 도덕과 거리가 멀며 반사회적인 사상은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고 언제고 힘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당장의 짓밟음은 감정적인 쾌감을 줄 수 있고 깔끔함에 청량함을 느낄 수 있겠지만, 그러한 폭력적 방식은 그 자체로 해악일 수 있습니다.


악을 짓밟은 우리가 또 다른 해악이 되는 것이지요. 아무리 옳아 보이는 것에도 독선적 요소가 있어 발전을 저해한다는 밀의 주장처럼요.


사상이 환경에서 나온다면, 우리는 환경을 개선하는 것으로 대응해야 할 것입니다. 당연히 매우 어렵고 더 오래 걸릴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변화가 가능한지, 가능하다면 얼마나 가능한지, 그것에 반발하는 이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에 대한 새로운 질문과 난제들이 우릴 괴롭힐 겁니다. 또한 개개인이 어쩔 수 없는 영역에 속한 것들이 대부분일 것이고요.


단지 극소수의 머저리들이 자기들끼리 헛소리를 하는 것이라면 무시해줘도 큰 문제는 없겠지만 대중을 이룰 정도로 거대한 사상의 공유는 무시할 수 없겠지요. 무엇이 올바른지 판단하고 그러한 판단을 기반으로 어떻게 실현할 것인지, 그렇게 더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해야할 대화와 토론, 그 토론을 풍성하게 해줄 수많은 개성을 생각하면 지리할 정도로 아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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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근에서 바라본 바이온트 댐. STOP이라는 표지판이 눈에 띈다.>



이탈리아 베니스에서 북서쪽으로 올라가면 바이온트라는 지역이 나옵니다. 베니스보다 국경에 더 가까운 산간 지역이기도 하죠. 역사적으로는 오스트리아 대공국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를 받던 지역에 포함된 곳이었고, 1866년 이탈리아 통일 운동으로 우디네를 중심으로 한 지역이 이탈리아 왕국에 속하게 되었으며, 그 동쪽 지역은 오헝 제국에 넘어갔다, 다시 1차대전 때 이곳 전체가 이탈리아로 넘어오게 됩니다.



따지고 보면 오스트리아의 땅이었는데 아틸라아가 가져온 곳이 되는 거죠. 뭐, 이탈리아 왕국은 망했지만.



<딱 봐도 댐으로 만들기 좋은 지형.. 하지만 댐은 물을 막기만 한다고 되는 게 아니죠.>



보시다시피 높은 암석산이며 그 협곡이 좁고 길어서 군사적인 관점에선 방어하기 좋은 지형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골에는 피아베 강의 지류가 흐르는 강이 있죠.


모든 문제는 이러한 딱 봤을 때 댐을 만들어먹기 좋은 지형에서 시작합니다. 당시 이탈리아의 사업가 주세페 볼피는 이 지역에서 돈 냄새는 맡은 거죠. 그는 자신의 사업체인 SAFE라는 전력 회사를 통해 이탈리아 북부 밀라노의 공업지대에 전력을 공급하여 큰 돈을 만질 수 있다는 겁니다. 이미 주세페는 전기, 철도, 수도 같은 기간산업으로 큰 성과를 올린 사람이니만큼 이번에도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일을 진행했습니다.


사실 사업 자체는 1920년부터 계획되었습니다. 그러나 2차대전도 터지고 하는 통에 일이 잘 안 풀렸고, 그에 따라 본격적인 공사는 56년에 베네치아 북쪽 100km 쯤 떨어진 바이온트 협곡을 막는 건설을 시작하게 되었죠. 그리고 약 3년 후, 59년도에 완공하여, 높이 262m, 두께 27m, 담수량 1억 5000만 톤으로 당시 유럽에서 가장 높은, 대규모 댐이었죠.




<딱봐도 뭔가 쏟아진 흔적이 역력한 바이온트 댐의 풍경...>



그러나 이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도 컸습니다. 먼저, 건설 전 조사 과정에서부터 학자들에 의해 논쟁이 발생했는데, 이곳의 지형이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기반암이 계곡 양쪽에서 경사를 따라 아래로 내려가는 향사구조였다는 겁니다. 심지어 지층에는 점토층을 포함하는 곳인지라, 물에 매우 약한 지반이라는 거죠.


다시 말해 물이 많이 모이면 지층이 물러져 산사태가 발생할 확률이 매우 높았다는 겁니다. 따라서 과학자들과 언론인들은 SADE에 경고했지만, 언제나 그렇듯, 이러한 사업에서 발을 빼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것도 부정부패한 국가와 기업이라면 더더욱이죠.


오히려 SADE는 그들의 경고를 무시했고, 언론과 정부와 함께 사업 방해를 막으려 했습니다.



<역사적으로 물은 불보다 많은 인간을 죽였다.>



먼저 이탈리아 정부는 댐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언론인, 마을 주민, 반대 운동을 벌이는 사람들부터 사회질서를 무너뜨리고 체제전복을 획책하는 내란 음모 내지는 파르티잔으로 몰아버립니다. 소송까지 벌일 정도로요. 마치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죠. 여기에 어디서 더 많이 본 것 같은 짓을 하나 더 합니다. 어용 학자를 동원하거나 학자적 판단보단 정치적, 경제적 판단을 우선시하는 이들이 자신의 전문성을 객관적으로 펼치기보단, 계곡에서 그러한 산사태가 일어날 가능성이 낮다거나 설령 난다 하더라도 그 규모는 위협적인 수준이 되지 못할 것이라고 보고하죠.



당연히 시민단체들과 주민들은 이러한 판단에 동의하지 않았고, 상식적으로도 석회암 지형은 물에 약하다는 건 공교육을 제대로 배웠다면 알 겁니다. 석회석은 물에 녹는다는 건 어렸을 때 과학 교과서만 제대로 봤어도 머리 어딘가엔 남아 있을 지식이죠. 그러니 댐 건설은 중단되어야 한다고 했지만.. 정경유착은 그들의 저항 따위는 이도 안 들어갈 정도로 훨씬 공고합니다. 언론은 통제되었고, 앞서 말했듯 반대자들은 지역 주민들을 포함해 파르티잔, 빨갱이가 되었죠. 참으로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죠. 아무래도 반도국가끼리는 뭔가 통하는 게 있긴 한 모양입니다.




<참사의 결과가 어떨지 너무나도 뻔하게 보이는 지도.>



결국 댐은 완공, 60년 2월부터 담수가 시작되었습니다. 바로 다음달 3월엔 수위가 130m, 이후 170m까지 올랐는데, 이 시점에서 당연하게도 경고되어왔던 문제들이 발생하기 시작하죠. 댐 주변 지층에 물이 차면서 석회암 지층으로 이루어진 산이 기울어버린 것입니다. 이 당시 주변 지층의 움직임은 하루 3.5cm 정도의 이동이 관찰되었다고 합니다. 동시에 2km의 거대한 절리가 댐 쪽으로 발생했고요.


그리고 60년도 11월 4일, 기어코 산사태가 발생해 토사 70만㎡가 쏟아져버리는 사태가 발생합니다. 그러나 바이온트 댐 측에선 더 큰 일이 벌어질 까 그저 댐 수위를 135m까지 낮추는 정도로만 대처를 해버리죠. 덕분에 지층의 이동은 하루 1mm 정도로 줄어들게 됩니다.


하지만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는 말은 동서고금에 통하다보니, 안전불감증인지 인지부조화인지 알 수는 없지만 분명한 건 욕심과 고집 때문에 SADE는 자신들의 오류를 인정하지 않고 그대로 돌립니다. 댐 사용을 중지하거나 타당성 검사를 다시 하거나, 지속적인 경고를 인정하기 보단 수위를 낮추니 괜찮아지니 적당히 높이를 조절해가며 전기를 생산하면 된다는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결국 현장에서 사면의 이동 속도를 봐가면서 수위를 다시 높이기 시작했는데, 약 1여년 동안 185m, 235m, 다시 185m로 조잘하며 산의 흙이 얼마나 움직이지는 확인했지만 경계한 것과는 다르게 지층의 이동은 생각보다 빨라지지 않았죠. 그래서 62년 11월엔 수위를 235m까지 올려 버립니다.


당연하지만 이 상대적으로 안전해보이는 관찰 동안 간헐적으로 소규모의 산사태가 발생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인부들은 산사태를 무서워하거나 위험하다고 여기지 않았고, 오히려 모여서 산사태를 구경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들에겐 별로 위험한 게 아니라는 거죠. 하지만 이런 것들은 대참사의 전조였고, 욕심에 눈이 먼 이들은 그 신호들을 제대로 인식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댐의 수위가 240m를 넘자 흙의 이동속도가 급속도로 빨라지기 시작합니다. 나중에는 아예 1m씩 움직일 정도에 이르러 댐 관리 기술자들은 댐의 수위를 240m까지 낮추기로 결정하죠.



<그나마 코믹한 짤이긴 하지만.. 실제로는 끔찍한 참사였습니다. 가장 큰 피해를 본 것도 SADE와 정부가 아닌 반대하던 지역 주민들이었죠.>



1963년 10월 9일 오후 10시 39분, 대참사가 발생했습니다. 바이온트 댐이 범함한 것이죠. 단 6분이었습니다. 이 댐에서 발생한 사태가 바로 아래, 롱가로네 마을을 집어삼키기까지 말입니다.


먼저 댐의 상부 남쪽에 있는 토크 산에서 산사태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댐에 의해 형성된 인공호수로 2억 3800㎡의 토사가 덮쳤죠. 그리고 그 충격으로 호수의 물은 협곡의 북쪽 사면으로 쏠렸고, 높이 250m나 되는 거대한 메가 쓰나미가 발생해버렸습니다. 파도는 댐을 부순 게 아니라, 넘어서 쏟아졌고 협곡을 타며 6분간 흘러 앞서 사진에 보이는 롱가로네 마을을 비롯하여 리발타, 피라고, 빌라노바, 파에 등의 인근 마을을 쓸어버렸습니다. 이 쓰나미는 1.5km를 더 가고도 70m나 되는 규모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가장 가까이 있고 정면에 있는 롱가로네 마을이 가장 큰 피해를 입었죠. 마을 자체가 쓸려나갔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요.



<당시 참사의 그래픽 이미지. 롱가로네 마을이 있는 곳이 완전 수장되어 버렸습니다.>

 


추정 사망자는 약 1900~2500명이며, 이 중 절반이 롱가로네 마을 주민들이었습니다. 피해자 중 350여 가구는 가족 전원 사망이라는 끔찍한 결과였죠. 주민 추산으로는 총 5000명까지도 추산된다고 합니다.



<사고 이후의 사진.>



그렇다면 이 참사는 이후 어떻게 되었을까요? 상식적으로 책임자들에게 무거운 처벌을 내리는 것이 맞겠지만, 아시다시피 이탈리아의 부정부패는 이 거대한 참사조차 묻어버릴 정도였습니다. 최소 계획자였던 주세페는 이미 늙어 죽었고, SADE와 정부의 책임자들은 제대로 처벌받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정부는 이 사고는 인재가 아닌 천재, 신이 하신 일이라며 책임을 피하려고만 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을 수는 없죠. 그게 억울할 정도로 과한 책임이라곤 해도 말입니다. 사고발생 후의 재판과정에서 책임을 져야한 고위직, 임원진들은 모두 빠져나가고, SADE와 관련 회사들의 기술자, 실무자 몇 명만이 처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재판과정에서 공개된 설계자 까를로 세멘짜가 동료에서 썼던 편지를 보면 "그 힘든 공사를 우리는 용케도 아주 운 좋게 멋지게 해냈네. 그러나 내 능력을 벗어난, 나로서는 제어할 수 없는 그 뭔가가 거대한 것에 여전히 대책없이 노출된 상태임은 나는 느낀다네.."라고 적었습니다.


댐 설계자부터가 이러한 사업에 위기감과 불안감을 가질 수밖에 없는 공사였다는 것이지요. 


결국 법정에 회부된 기술자들 중 마리오 판치니는 법정 진술 전날 자살, 몇 명은 재판이 끝나지 전에 사망하며, 진짜 책임을 져야할 고위관계자들은 모두 빠져나갔습니다. 실제 책임과 처벌이라는 독박은 실무진들이 죄다 뒤집어썼죠.




<오, 인간이여.>


 

결국 이 사건은 이탈리아 역사상 가장 커다란 인명피해를 입힌 정경유착 비리와 잘못된 토건사업이 빚은 참사로 기록되었습니다. 수많은 책과 영화 등으로 소개되고 분석되었지요.


이후 이 지역은 02년 동안 접근 금지구역이었다가 풀렸고, 08년에 유네스코는 인류 역사상 기억해야할 사고로 세계유산으로 지정했습니다. 의외일진 몰라도 댐 자체는 별 피해가 없었습니다. 물들이 넘어가며 댐 상부에 손상을 입혔지만, 댐 자체는 그대로 서서 남았죠. 댐 붕괴사고라곤 하지만, 실제로 댐이 붕괴된 건 아니었습니다. 물론 이제 물을 담진 않습니다만..


이 사건 이후 이 근처를 지나가는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경적을 울리지 않고, 라디오를 끄며 대화를 중단하거나, 잠시 내려 추모를 한다고 합니다.


또한 근처에 사고를 추모하는 작은 성당이 건축되기도 했죠.



정경유착이라는 것은 한국에서도 어렵지 않게 발생하는 범죄이기도 합니다. 토건과 얽히는 것은 거의 한국의 전통에 가까울 정도로 흔했고요. 이익을 위해 위험을 묻어버리는 기업과 그것을 묵인하는 정부, 학자적 양심보단 정치경제적 판단을 우선시하는 학자, 정부의 의도대로 사건을 정치화하여 반대자를 공격하는 언론, 주민과 단체, 학자들의 경고와 반대를 찍어누르고 정부의 부당한 공권력 남용 등..


정의와 어긋난 일은 그것이 도덕적으로 지탄받는 일이기 때문에만 비판받고 비난에 시달리는 게 아닌, 어떻게든 크고 작은 실질적 피해를 발생시키기 때문입니다. 이익을 위해 그러한 정의를 묵인하고 묵살한다면 언젠간 이익으로 덮을 수 없는 대참사가 발생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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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핍에서 옵니다. 모든 것이 적당히 풍족하며 그러한 풍족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은 대체로 건전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건전하게 살기 때문이고, 그러한 건전한 삶이 건전한 정신을 대변합니다.


도박이나 게임, 마약, 음란물 등에 중독되는 사람들은 어딘가 매우 결핍이 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대체로 인간관계나 가족관계, 혹은 돈에 의해 유지되는 생활기반인 경우가 많죠.


가령 청소년의 게임중독을 살펴보면 아무 문제 없는 가정과 학교생활에서 그러한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보시면 됩니다. 가정에 문제가 없다면 가정에 충실하면 되고, 학교생활에 문제가 없다면 친구들이랑 평범하게 놀면 되는 거죠. 가정환경이 불우하고 왕따나 따돌림을 당하는 경우 정상적인 인간관계가 형성되지 못한 것입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사회적 관계가 충족되지 않는 경우 정상적인 정신을 유지하거나 건전한 삶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관계의 결핍은 그 반대급부를 발생시키는 거죠. 배가 고프면 식욕이라는 욕구가 발생하고, 재미가 부족하면 자극을 찾듯이요.


인간관계가 결핍된 경우 마찬가지로 인간관계를 추구하게 됩니다. 다만 이는 반드시 그런 것이 아니고, 이러한 인간관계의 결핍 또한 여러 유형과 상황이 있기 때문에 이것 하나만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하지만 어느 정도 공통된, 통합된 설명이 가능한 부분들은 있습니다. 가령 왕따를 당하는 청소년의 경우 게임으로도 빠질 수 있고, 커뮤니티에도 빠질 수 있지만 전자의 경우 클랜이나 길드 따위로도 어느 정도 충족한다고 해도 결과적으로 자신의 실력과 성과를 가시적으로 확인하고 남들을 통해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더 크게 작용합니다.


커뮤니티에서도 마찬가집니다. 끝없이 과잉 소통하고 댓글이나 답글, 리트윗 등을 즉각적으로 확인하고 피드백을 하는 등 소통에 대한 결핍된 욕구를 토해냅니다. 현실에서 그렇게까지 많은 소통을 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강박적인 반응 확인과 자신에 대한 공격이나 지적에 매우 적대적이고 방어적인 태도 또한 현실에선 그리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건 아니죠.


현실에서 부족한 인간관계에 대한 결핍을 게임, 커뮤니티의 대체제로 해결하고자 하는 겁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가상이고 간접적이다보니, 언제나 부족할 수밖에 없고 그것이 중독을 발생시키는 겁니다. 소통과 관계가 더 쉽고 빠르다보니 그곳에 더 쉽게 빠져들고, 현실의 인간관계보다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거죠.


이는 주변인들에게 무시 당하고 멸시 당하는 반대급부가 그러한 인정욕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메슬로의 자꾸 늘어나는 욕구 계층 피라미드에도 소속 및 애정 욕구 위로 인정 욕구가 있죠. 


<원래 5계층으로 시작했다. 앞으로 더 늘어날지도 모른다. 끝없이.. 분열하는.. 옥수수처럼..!!>



따라서 게임이나 커뮤니티 중독에 빠져있는 경우 대체로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기는 한 겁니다. 그리고 그 집단에서 나름 네임드이거나 네임드를 추구하는 활발한 활동성을 보이고 있을 것이고요. 다만 건전한 정신을 갖춘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 집단의 수준은 그 본인과 비슷한 수준으로 낮거나 불건전한 곳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상황에 접어들면 현실보단 가상에 더 큰 무게를 두게 됩니다. 현실보다 가상의 친구들이 더 소중한 거고, 그곳에서의 활동이 더 중요한 일이며, 하루라도, 몇 시간조차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겁니다. 그게 삶의 루틴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그것을 깬다는 건, 더구나 그러한 중독에 빠져 있는 이들로선 쉽게 견디기 어려운 금단 증상일 것이고요.


현실에서 아무리 한심하고 찌질하며 무가치한 존재라도 인터넷의 가상 세상에선 자길 인정해주는 사람들이 많고 그들과의 소통을 충분히(사실 과잉으로) 즐기고 있습니다. 마치 정상적인 것처럼요.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현실을 무가치하고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여깁니다. 인지부조화죠. 현실에서 날 조롱하는 놈들은 아무 것도 모르며 수준 떨어지는 병신들이고 난 훨씬 대단해. 그런 내가 인정 받을 수 있는 세상과, 날 인정해주는 인맥들이 있는 인터넷이 내 가치를 정하는 거야.


그렇게 가상 세계에 빠지는 겁니다. 다시 말해, 현실에서 건전한 삶을 살지 못하기 때문에 가상 세계로 도피하고, 그 세계에서 자신이 부족한 것들을 충족시키며 그 상태에 중독되어버리는 것이지요.




인간의 적응력은 너무 뛰어나기 때문에 새롭게 변한 환경에도 금세 적응하고 맙니다. 무슨 극한의 기후나 오지도 아닌 가상세계에 불과한데 적응하지 못하는 게 더 이상하죠. 여기서 낙오하는 사람은 없잖아요.


일례로 이 인간의 적응력이 얼마나 뛰어나냐면, 노숙자가 되는 사람들은 노숙에서 쉽게 빠져나오기 어렵습니다. 처음 경제적인 영역이 무너지고 집도 살 곳도 의지할 사람도 없어서 길바닥에 나앉아버리게 되면 처음에는 금방 노력해서 재기하자는 욕구에 꽉 차있습니다. 이런 사회의 낙오자들과 함께하기도 싫고, 난 그런 사람도 아닌데다, 이렇게 살고 싶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노숙을 해야할 정도로 무너진 삶을 다시 복구하는 건 노력의 문제를 떠나 충분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시간은 정신과 각오를 무디게 하기에도 충분하죠. 그래서 그냥 그런 더 낮은 수준의 삶에 적응해 버립니다. 그리고 거기에 적응해버리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기가 어려워지죠.


그냥 이렇게 살아도 되고 모든 책임에서 탈피해버린 무책임자가 되어버리니 지금까지 살아오며 져왔던 것들이 생각보다 무겁고 불편했다는 걸 알게 됩니다. 그냥 너무 편해버리는 거에요. 힘들고 춥고 덥고 배고프고 그러긴 하죠. 근데 구걸하고 어떻게든 살기만 하면 아무 책임 없이 살아버릴 수 있는 겁니다.


아무데서나 자고 아무데서나 먹고 자기 하고 싶은데로 살아버리고. 노숙이라는 상황 자체에 중독된 겁니다. 노숙자가 다시 원래의 삶으로 돌아오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죠. 본인의 의지가 있더라도 그 무책임하고 자유로운 삶의 뽕에서 쉽게 빠져나오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노력하고 갱생하려고 하고 지원도 받아서 상담이나 일 같은 걸 하더라도 금방 다시 노숙으로 복귀하는 경우 꽤 많습니다.


노숙이라는 상황에 중독된 거거든요. 이는 마약에 중독된 사람을 다시 멀쩡한 사람으로 갱생시키는 것만큼 어렵습니다. 비유가 아니라 대충 난이도가 그 정도는 될 거에요. 수많은 시간과 자원과 인력을 쏟아부어서 케어시키고 자신도, 가족도, 돕는 사람도 오랜 시간에 걸쳐서 꾸준히 노력을 해야 합니다. 마약쟁이 하나 사람 만드는 게 결코 쉽지 않다는 것만큼 노숙자 하나 갱생시켜 사회로 복귀시키는 건 꽤 어려운 일이죠.



마약중독도 마찬가집니다. 게임이나 음란물, 커뮤니티 같은 것보다 더 쉽게 접하고 그것이 주는 더 강력한 쾌락에 맛을 들리면 마약에 중독되는 거죠. 그들이 마약에 중독되는 이유 또한 멀쩡한 가정과 건전한 친구 등 인간관계가 결핍되었기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앞서 마약중독자 갱생의 어려움을 피력해놓고 이런 말을 하는 게 모순되지만, 베트남전 때 마약에 빠진 수많은 장병들이 미국 사회로 복귀했을 때 수만 명의 마약중독자를 걱정했지만, 의외로 꽤 많은 이들이 자신의 가정과 친구들로 복귀했고 마약에서 벗어난 이유는 전쟁 당시 결핍된 영역을 대체하여 채워주던 마약을 다시 원래의 요소들이 채워줬기 때문입니다.


전쟁이라는 극한의 상황에서 마약을 찾게된 장병들이었지만 고향으로 복귀하자 더 이상 마약에 의존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마약이나 게임, 커뮤니티, 도박 중독은 대체로 불우한 삶, 소외된 환경, 인간관계의 단절에서 찾아옵니다.


좀 더 정확히 짚자면, 현실의 삶이 가혹할수록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눈을 돌려 대체하거나, 의존할 대상을 찾게 되는 겁니다.


현실의 단절된 인간관계에서 소속감과 애정을 느끼기 위해 가상의 커뮤니티에 빠지게 되고,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기 위해 더 많은 커뮤 활동을 하거나 더 많은 승리를 위한 더 폭력적인 플레이를 하게 되고, 경제적 어려움을 한번에 뒤집기 위해 도박에 빠졌다 운 좋게, 어쩌면 호구를 낚기 위해 따낸 손 쉽게 번 돈의 뽕에 빠지는 경우도 있고, 총과 폭력의 위험 때문에 현실에서 눈을 돌릴 수도 없고 보호할 수도, 보호 받을 수도 없는 가족이나 주변인에게 의지할 수가 없어 이 현실에서 조금이라도 행복을 느끼기 위해 마약에 손을 대기도 하며, 역시 의지할 수도 없는데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들이 이 사회의 고독함에서 더 커다란 무언가에 의지하며 믿기 시작한 종교가 광신에 접어들게 되는 것도.


모두 표현형이 다를 뿐 비슷한 유전형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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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몇 심리학적 연구결과를 보면 까다로운 인지작업과 유혹의 도전을 동시에 받는 사람들은 유혹에 굴복할 가능성이 더 높다. 매우 중요한 일이니 1~2분 동안 7자리 숫자를 기억하라는 요구를 받았다고 가정하자. 숫자에 집중하는 동안, 건강에 해로운 초콜릿 케이크와 건강에 이로운 과일 샐러드라는 두 가지 디저트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실험 결과를 보면 머릿속이 온통 숫자로 가득 차 있을 때는 유혹적인 초콜릿 케이크를 선택할 확률이 더 높다. 시스템 2(이성)가 바쁘면 시스템 1(본능, 직관)이 행동에 더 많은 영향을 미치는데, 그 시스템 1은 단 것을 좋아한다.


'인지적으로 바쁜' 사람들은 이기적인 선택을 하고, 성차별적인 언어를 사용하고, 사회생활을 하며 피상적인 판단을 할 가능성이 더 높다. 물론 '인지 부하가' 자제력을 약화시키는 유일한 원인은 아니다. 불면과 마찬가지로 음주도 똑같은 효과를 낸다.


심리학자 로이 바우마이스터와 동료들이 수행한 일련의 놀라운 실험들을 보면 인지적이건 감정적이건 신체적이건 상관없이 모든 다양한 자발적 노력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라도 정신 에너지의 공유풀에 의존한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다. 바우마이스터는 의지나 자제력 유지 노력이 피곤한 일임을 거듭 확인했다. 억지로 뭔가를 하도록 자신을 독려해야 한다면, 다음 도전이 닥쳐왔을 때 자제력을 발휘하려 하지 않거나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줄어든다. 이런 현상을 '자아 고갈'이라고 한다.


- 다니엘 카너먼, 생각에 관한 생각.


아이는 자극이 부족할 수록 성장발달이 느려진다고 합니다. 비단 아이 뿐만 아니라 정신의 성장에 있어서도 다양한 자극과 극복이 있어야만 합니다. 마찬가지로 지적능력의 성장 또한 지적 발달을 자극하는 요인이 있어야 하며, 이는 대체로 공교육이라는 시스템을 통해 형성되죠.


중요한 건 단순히 자극을 받기만 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자극을 받되, 그것을 올바르게 풀이할 수 있어야 성장을 할 수 있습니다. 수학 문제를 풀 때 단순히 문제에 자극을 받기만 하고 해결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스트레스가 되고, 더 나아가 한계처럼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 문제를 풀 수 있어야 성장, 발달이 가능한 것이지요.


그러나 이는 그만한 정신력, 인지력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문제를 정확히 인식하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논리적 사고와 그 사고에 투자되는 정신력. 그러한 인지작업은 그만큼의 정신 에너지를 소모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만한 자원이 충분히 전제되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고요.



삶에 더 여유롭다는 것은 복잡하고 까다로운 인지작업에 도전 받아도 그것에 쏟아부을 수 있는 정신 에너지가 여유롭지 못한 쪽보다 더 많고 더 오래 투자할 수 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가령 생업에 종사하지 않는 선비나 귀족의 경우 수년간 충분히 공부에 전념할 수 있고 지적능력 발달에 투자할 수 있으며 그것은 낮은 단계의 인지작업부터 더 높은 차원의 인지작업을 충실히 따라올랐다는 것이기도 하죠.


반대로 매일 일을 해야 하는 농민, 혹은 현대의 일 12시간씩 일하는 막노동꾼이나 시장 장사꾼, 그 외 높은 노동강도와 노동시간을 가지는 업종에 종사하는 노동자의 경우 그러한 인지작업에 쏟아부을 정신 에너지가 극도로 부족합니다. 이는 육체노동부터 정신노동까지 하루 동안 소모되는 양이 많기 때문이며, 대체로 하루이틀 쉰다고 회복되지도 않기 때문이죠. 


그렇기 때문에 더 많은 일을 하고 더 적은 시간 쉬는 일을 하는 사람일수록 더 복잡하고 여유를 가져야할 일에 많은 정신, 시간의 투자가 어렵게 됩니다.



더 여유로운 삶을 사는 이가 지적 발달에 우월한 조건을 가지는 요인 중 하나는 그러한 자극을 취미, 혹은 자발적 자기계발로 선택하여 받을 수 있다는 겁니다. 가령 책이나 방송, 다큐멘터리, 심지어 네이버 지식인 활동조차도 다양한 지적 자극을 받을 수 있는 요인이 되는데, 책이나 방송이야 말할 것도 없고, 지식인 활동조차도 평범하거나 어려운 질문부터 황당하거나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질문이 쏟아지는 공간이기에 다양한 생각과 정리가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요컨데, 그러한 공간에서 답변자로 활동하지 않았다면 거의 결코 생각하거나 정리하거나 찾아보거나 분석할 여지가 없었을 영역이나 주제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여지가 생기긴 한다는 겁니다. 즉, 더 많은 지적 자극을 받게 된다는 겁니다.


일반적인 경우, 더 많은 지적 자극과 그에 대한 처리가 가능한 쪽은 그렇지 못한 쪽보다 지성에서 우월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다양한 자극(질문)을 받고 그에 대한 다양한 결론(답변)을 내놓았기 때문에 생각과 관점의 폭이 넓을 수 있기 때문이죠. 그렇게 훈련된 지적능력과 인지능력이 곧 통찰력으로 환산될 것입니다.



마시멜로 실험 오류 가능성...어렸을 때 잘 참으면 훗날 성공?

https://www.mk.co.kr/news/it/view/2018/07/445129/

(전략) 다만 가정 수입이 적은 아이들의 경우에는 마시멜로를 빨리 먹는 경향이 나타났다. 부모의 소득이 높지 않은 경우 당장 눈앞에 있는 음식을 먹는 것이 기다리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했을수도 있다고 연구진은 덧붙였다. (후략)


경향성의 관점에서, 더 부유하고 여유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고소득층, 정확히는 고소득층의 자식들의 경우 좋든 싫든 교육에 투자되어야 하는 시간과 노력이 강제되곤 하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더 여유로운 일상을 누릴 수 있습니다. 더 다양한 경험을 겪을 수 있고, 그들 중 지성에 관심이 있다면 남들보다 더 높은 수준의 지적능력을 쌓을 수도 있지요.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더 많은 시간을 더 차분하게 사용하여 고등한 사고로 문제를 해결하는 건 아니더라도, 설령 틀렸더라도 내용 자체는 더 차분히 정리된 결론을 내놓기에도 유리합니다.


반면 고노동 저소득층일수록 그러하기 어렵죠. 부모부터가 자식을 관리하고 교육시키기에 시간이 부족하고 자식에 투자할 인지력도 부족하게 됩니다. 자식 또한 그러한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교육비 등 교육에 대한 투자도 받기 어렵고요.



지적 자극을 받고도 그것을 잘 처리할 수 있는지는 그것을 잘 처리할 수 있는 환경에 따라 갈립니다. 그리고 그것은 대체로 자본력에 기초할 가능성이 크고요. 물론 자본의 정도에 따라 인지처리능력의 정도가 얼마나 차이가 발생하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만, 각박하고 힘들게 살아가는 하위 노동자와 그 반대에 있는, 다시 말해 삶의 양극단에 있는 사람의 경우 상당한 차이가 날 수 있다고 추정합니다.


다양한 지적자극은 다양한 사고와 결론을 내놓을 것이고, 그렇게 형성된 통찰력과 지성은 정치, 사회, 역사 등 다양한 분야에서 사용될 것입니다. 애초에 현대의 다양한 지적자극들은 대개 그러한 영역에서 발생하는 것들이 많은 편이고요.


문제는 충분한 정신 에너지, 인지력을 갖추기 어려운.. 일상적인 자아고갈에 빠져 있는 계층인데, 정말 바쁘고 열심히 살아가지만, 돈 자체는 적게 버는 사람들일수록 정치, 사회에서 발생하는 지적자극에 충분한 투자를 통해 품질 있는 결론을 내놓기 어렵게 됩니다.



전라도 혐오와 한국 혐오. 가해자의 피해자 혐오.

https://konn.tistory.com/703

더 간단한 논리의 선동이 그러한 것을 판단하기 위한 지적능력이나 소모해야할 인지력이 부족한 이들에게서 더 쉽고 광범위하며 빠르게 받아들여지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무엇이 문제라면 그것이 왜 문제인지 제나름대로 분석하고 판단할 지적능력이나 그 능력을 활용할 정신력(인지력)이 필요한데, 여유롭지 못할수록 그렇지 못하다는 겁니다.

음.. 이거 꽤 자주 인용하게 되는군요. 위 링크의 글에서 했던 말은 사실 이전에도 간간히 여러 곳에서 자주 했던 말이긴 합니다. 다만 좀 더 짧고 자세하지 못했을 뿐이죠. 저 내용은 본 글의 관점에서 나온 말입니다.


정치에서 계급배반현상은 오랫동안 관찰되었고, 분석되고 연구되는 주제이긴 합니다. 이 현상에 대해 어떤 분석과 결론이 나왔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사상이나 이념은 자신의 주머니 사정이나 사회적 위치와 무관하거나 상반되게 존재할 수 있다고도 생각했고, 지금은 거기에 정신적 여유로 설명을 하곤 합니다.



극단주의와 반지성주의, 정의를 독점한 편협한 바보들.

https://konn.tistory.com/706


현대는 너무나도 복잡해서 전문가라고 해도 현실의 일부분만을 설명할 수 있을 뿐 그 외의 영역에선 남들보다 조금 더 낫거나 남들과 큰 차이가 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어떠한 사회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선 다양한 의견과 다각도의 관점들을 수렴해야만 하고, 그러한 다양성이 충족되는 사회가 건전한 사회의 조건일 것입니다.


정치, 사회적 현상과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현대 사회의 복잡함을 간과하고 너무나도 간단하고 편협하게 해석하려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지성이 부족하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계급적 관점에서 하위 계급일수록 노동은 많이 하지만 정작 소득은 적은 이들이기 때문에 그러한 사건에 더 많은 정신력을 인지작업에 투자할 수 없다고 봅니다. 그러한 이유로 복잡하고 어려운 분석의 과정을 스킵해버리고 아주 쉽고 간단한 설명으로 대체하려고 하지요.


가령, 한반도 평화와 장기적으로 북한 사회에 자본주의의 영향력을 확대하여 북한 스스로 개방하거나 개방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하거나, 현 체제에 한계를 요구하게 만들어 무너뜨리게 한다는 등의 목적을 두고 대북온건책을 시행하는 이들에게 그러한 정책과 관점을 이해하거나 상상하기보다는, 저 새끼가 빨갱이라 나라 팔아먹고 북한에 돈 주려고 한다. 가 더 쉽고 간단하며 말초적으로 빠르게 더 뜨거운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죠.


그리고 이를 잘 아는 이들일수록 더 간단한 논리와 더 자극적인 문구로 이 계층을 공략합니다. 간혹 기사에서 볼 수 있는 어처구니없이 멍청하고 일방적으로 특정 세력이나 인물을 공격하는 자극적인 발언들은 그들이 딱 그 수준의 지적능력이나 사고력, 사상의 극단성을 지녔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좀 더 그들의 사회적 성취과 그 기반이 되는 지적능력을 고려했을 때 인지작업에 투자하기 어려운 하위 계층을 조준하고 날리는 정치공학적 계산의 산물일 수 있는 것이겠죠.



인민들을 너무 배불리면 딴 생각을 품게 된다. - 김일성.


그리고 그들의 지지는 생각보다 튼튼하고, 많습니다. 60년대, 80년대, 심지어 90년대와 IMF를 겪어왔던 세대가 여전히 살아있고, 각 세대는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아왔다고 해도 될 정도로 완전히 다른 물질문명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60년대의 대한민국과 80년대의 대한민국은 물질적으로 한 세대라고 하기 어려울 정도로 커다란 발전을 겪었고, 90년대, 2000년대, 그리고 지금 2020년에조차 그러한 시대적 차이는 단순 시간적 차이로 설명하기 어려운 거대한 간극이 있지요.


다만 90~00년대 세대 아래 쪽으로 공통점이 있다면, 먹고 살기 어렵고 각박함을 실제로 겪어왔던 세대라는 겁니다. 그리고 더 어려웠던 시기를 살아온 이들에 의해 여전히 잔재해 있던 구시대의 관성은 여전히 정신적인 세계를 지배했지요. 멀리 갈 것도 없이 현재에도 80년대를 기준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데 실제 80년대엔 60년대 이전의 각박하고 더 중세적인 태도로 살아가던 이들이 있었을 겁니다. 물질문명만큼 사람들의 의식수준이 따라가지 못했다는 표현으로 정리되는 간극이죠.


왜 이런 말을 하느냐면, 그러한 어렵고 배고픈 시대를 겪었던 이들은 여전히 살아있고, 그러한 시절의 관성이 여전히 희미하게라도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배를 곯진 않더라도, 그러한 시대를 살아왔고 충분한 교육, 혹은 여유를 가지고 살지 못한 이들이 나이를 먹으면서 정신적 유연성이 더더욱 굳어져갔을 겁니다.


그리고 과거 생각해왔고 받아들여왔던 가치관과 관점으로 여전히 현 시대를 바라보겠지요. 누구누구는 빨갱이고, 어느 정당은 빨갱이이며, 어느 진영과 이념은 빨갱이다. 그리고 빨갱이는 물리쳐 없애야할 적이지 타협하고 협상하는 대화의 대상이 아니다. 까지...


먹고 사는 문제로 여유롭지 못함이 사고와 인지능력에 좋은 영향을 주진 않았을 겁니다. 이는 교육을 통한 기술과는 다릅니다. 농부가 농사일과 농사 기술에 통달했다고 해도, 오랜시간 동안 지식을 쌓아오고 다양한 지적 자극을 처리해왔던 선비의 큰 그림을 보는 능력, 사회적 통찰력에는 전혀 비교될 수 없을 가능성이 큰 것처럼요. 


정치적으로 안정되거나 수준이 높은 국가는 선진국들이 많습니다. 민주주의나 법치, 문민통제, 교육 시스템 등 여러 제도들을 오래 경험해왔기 때문만은 아닐 겁니다. 그 나라의 국민들이 그만한 의식수준에 도달해있었기 때문이며, 그러한 의식수준은 그만한 경제적 여유로움에서 찾아올 수 있는 것이지요.


곶간에서 인심나듯이, 각박한 사회였다면 각박한만큼 더 천박하고 더 야비하게 자신의 이익을 찾으며 사회적 신뢰나 정치, 사회적 불문율이 무너지며 관습적 도덕 영역이 조금씩 침해되었을 겁니다. 더 건전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유지하던 조건들이 하나하나 사라져가는 것이지요.


먹고 사는 게 여유로울수록 정신문화는 발달하게 됩니다. 영화나 음악, 미술과 같은 연예, 예술도 그러하겠지만 철학이나 미학, 인문학과 같은 정신적 세계를 다루고 파고들어가는 체계 또한 마찬가집니다. 그리고 이는 개개인에게도 그러한 문화를 더 폭넓게 접하게 하고 더 기준이 높은 눈을 가지게 되죠. 전체적인 의식의 수준이 높아지는 것입니다.


반면 그러한 점을 알고 있는 일부 정치인들, 권력자들은 그러한 상황을 경계합니다. 더 낮은 임금 수준, 더 긴 노동시간, 문화에 대한 탄압 등으로 삶에서 인지력의 소모를 발생시키고, 정적을 꾸준히 공격하고, 논란을 내보내면서 그에 대한 대중의 인지력 소모를 유도합니다. 조국에 소모된 대중의 화력은 이후 지금까지 이어진 여러 사건, 공격에서 그 당시의 화력과 집중도가 떨어지죠. 이미 조국 사건 때 많은 화력을 소모했기 때문입니다.


대중의 정신 에너지, 인지력에 소모가 발생할수록 무엇이 옳고 그른지, 얼마만큼 문제가 있고 어떤 의미를 지니는 사건인지 판단하기 어려워집니다. 이런 저런 사건으로 꾸준히 소모되고, 삶에 치이며 이미 자아 고갈에 다다랐기 때문에, 이러한 사회적 현상을 분석하고 하나하나 따져가기엔 투입될 수 있는 정신력이 부족하기 때문이죠.



정치와 사회가 건전하고, 더 건설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선 개개인이 여유로운 환경에 놓여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찾아오는, 맞닥뜨리는 지적자극을 처리하면서 말이죠. 정치와 사회적 현상에 대해서도 더 많은 정신 에너지와 인지력을 투자할 수 있고, 조금이라도 더 복잡한 사고를 하면서 더 나은 통찰력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허접하고 조잡한 논리와 결론을 내놓으며 잘못된 판단을 내놓는 것보다 훨씬 훌륭한 사회를 구성할 수 있을 겁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지적자극을 더 여유롭게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은 더 많은 사람들이 더 여유로운 삶을 산다는 것이고, 이는 경제적, 정신적인 여유에서 나옵니다. 이것이 함의하는 것은 많을 것입니다. 나라가 잘 살아야 한다든지, 청년 실업을 해결해야 한다든지, 교육열을 줄이고 잉여로운 시간을 더 늘리게 해줄 수도 있고, 최저임금을 높혀 더 여유로운 경제력을 가질 수 있게 해줘야 하거나, 복지 등 사회안전망으로 정신적 여유를 보장, 부담해줄 수 있어야 한다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핵심은 사람들이 다양한 지적자극을 회피하거나 단순무식하게 처리하기보다 더 여유로운 상황에서 올바른 방식으로 적절하게 처리할 수 있는 환경 속에서 사는 것이야말로 건전한 정치환경을 만들 것이라는 겁니다. 지적자극을 처리하면서 형성되는 세계관, 가치관, 관점은 지성만큼이나 다양할 것이고 그러한 다양함은 또 다시 건전한 사회를 구성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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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와 지역 커뮤니티.

https://konn.tistory.com/701

괴베클리 테페에 대하여

cafe.daum.net/Europa/3L0P/5347

메이지 유신: 일본인들이 '태양 너머'를 상상하게 되었을 때

cafe.daum.net/Europa/3L0P/7826




지금은 자삭하신 모양이지만, 과거 첝님이 <이슬람은 왜 이 모양인가.> 라는 글에서, 그리고 비교적 최근까지 작성한 글에서 종교는 단순 신앙의 모체가 아닌 사회적 관계망을 제공하는 기능적 측면을 설명하였습니다. 150명 이상이라는 인지적 한계에 벗어나서도 인구 집단이 유지되고, 서로 전혀 모르는 타인을 사막 위에서 만나도 안전을 확인할 수 있으며 신왕으로서는 거대해진 영토를 감당할 수 없는 통치원리로써의 민족신앙의 한계를 벗어나 보편성을 획득하기 위해 종교라는 도구를 적극적으로 활용했지요.


집중해야할 부분은 바로 전혀 모르는 남들, 거대한 규모의 타인이 한가지 정체성과 세계관 하에 크고 작은 사회적 관계망을 형성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종교의 역할이죠. 오늘 처음 만나는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도 신-종교라는 틀 안에서는 하나의 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보편성은 그래서 정말 중요한 요소인데, 인종과 성별, 나이와 지역을 떠나서 같은 종교적 정체성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종교에 대한 신앙과 믿음의 사유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고, 개개인 차원에서는 삶의 어려움에서 벗어나 의지하고 싶은 욕구를 충족시키거나 믿음 그 자체가 주는 정신적 만족감, 종교가 품는 거대한 뜻에 신념적 감동을 느낀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회적 차원에서 종교는 그러한 사회적, 통합적 기능이 매우 주효하게 작용하죠. <한국 교회와 지역 커뮤니티>에서 설명했듯, 사람들이 교회를 가는 이유 중 일부는 인간관계와 정보의 공유를 위해서일 겁니다. 교회만큼 많고, 다양한 사람들이 공동의 의식적 행위를 하며 소속감을 공유하고 인간적 관계를 맺으며 사회적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곳은 드물기 때문이지요.


이러한 교회는 단순 신앙을 위해서가 아닌 적극적인 사회활동의 일부가 됩니다. 단순 성경 공부를 하고 교리를 나누고 공동의 의식 행위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서로 개인적인 삶을 나누고 때로는 도움을 주고 받기도 하지요. 뭔가 대단한 것도 아닙니다. 이사를 가는데 도움을 받거나 집안 가구를 옮기는데 거들어줄 수도 있고 자식 컴퓨터에 이상이 생겨서 컴퓨터에 대해 잘 아는 아저씨에게 상담을 받을 수도 있으며, 결혼을 축하해주고, 부고를 같이 슬퍼해주기도 합니다.


젊은이에겐 새로운 친구나 지인, 심지어 애인을 찾는 창구가 되어주기도 하지요. 


이러한 사회적 관계로 작용하는 교회의 커뮤니티성은 어느 나라, 어느 시대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아니면 이러한 커뮤니티는 나타날 수 없는가? 하면,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가령 동호회나 모임, 동창회나 종친회, 향우회, 특정 직종의 협회 등이 될 수 있습니다. 또 하나 더, 스포츠가 바로 그러하죠.


다른 집단들이 제각기 규모가 작거나, 정기적이며 잦은 모임이 어렵거나, 다양한 직종과 신분이 모이기 어려우며, 어떤 자격이나 조건이 필요하기도 하다는 점에서 교회 등 종교의 커뮤니티성에 비하면 그 개방성과 규모에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심지어 교회는 어느 지역에든 있곤 하다보니 이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간다고 해도 그곳의 교회에서 꾸준히 같은 종교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정기적이고 잦은 교류가 가능합니다. 이는 종교로서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렇다면 종교와 유사한 개방성과 규모를 가진 다른 정체성을 없을까? 있습니다. 정확히는, 있긴 합니다. 바로 스포츠지요. 스포츠는 고대 그리스 시절부터 집단의 화합을 유도하는 촉매 역할을 햇습니다. 같은 그리스 문명권이긴 했지만, 그 내에서 구분되는 서로 다른 집단들 또한 스포츠라는 요소에 통합될 수 있었지요. 서로 즐기고, 열정을 나눌 수 있었습니다. 그러한 열정은 종교적 열의와도 일부 유사한 부분이 있기도 하지요.


현대에서도 스포츠는 세계인의 화합을 위한 역할로 주목 받았습니다. 냉전 때에도 스포츠로 인류는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희망했고, 서로 다른 국적, 서로 다른 인종, 서로 다른 세대와 성별, 종교의 차이에도 스포츠는 인류를 하나로 묶어 열광하게 만들고 때로는 경쟁하기도 하였지요.


예전 중동 쪽으로 파병 나간 사람의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전혀 다른 인종에 말도 안 통하는, 완전히 자신의 세계관과 단절된 험악한 인상의 현지인이 맨유, 박지성이라는 공통된 관심사에서 금방 잘 통하지도 않는 언어로 소통하고 축구 경기를 보며 즐겼다고 합니다. 스포츠는 과장 좀 덧붙혀서, 현대의 종교입니다.


종교가 가지고 있는 요소 중 많은 부분을 스포츠 또한 가지고 있지요. 첝님이 그린 신을 정점으로 하는 관계 연결망에서 신-종교를 스포츠로 치환한다면 꽤 유사한 개념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스포츠가 종교를 대체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에는 결코 그렇다고 하기 어렵다는 답을 내놓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선, 전 세계에 수많은 종교가 있긴 하지만, 보편종교라 불리는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 불교계 종교를 제외한 나머지 종교들은 그 세력이 작습니다. 그 지역 내에서는 충분히 통할진 몰라도, 세계적 관점에서 신토는 너무 애매하고, 어느 제3세계의 전통 민족신앙은 설 자리가 없지요.


따라서 대체로 아브라함 계통과 불교로 양분되는 세계의 종교는 적게 보면 서너덧개 정도로 압축될 수 있습니다. 같은 신을 모시는 것치고는 사이가 굉장히 안 좋은 가톨릭, 개신교, 이슬람, 유대교야 그렇다치고요.


그러나 스포츠는 종류가 많습니다. 축구, 야구, 농구 정도가 메이저한 스포츠이고, 지역에 따라 미식축구나 달리기, 무에타이, 하키, 심지어 e스포츠나 체스마저도 포함될 수 있겠지요. 물론 종교도 종류가 많고 세세하게 분류된다면 정말 한도 끝도 없니 분류될 수 있듯이, 메이저한 몇 종목을 제외하면 스포츠도 비슷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가톨릭은 대체로 어딜가든 가톨릭이고, 개신교도 좀 차이야 있겠지만 어딜가든 개신교일 수 있으며, 이슬람이나-시아파와 수니파 정도는 구분해야겠지요;;- 유대교도 크게 다르지 않지만, 스포츠는 지역마다 리그가 다르고, 그 리그만큼 지역색이 차이가 나곤 합니다. 그리고 리그의 수준에 따라 우열이 나뉘기도 하고요.


이는 바로 이어지는 스포츠의 경쟁성과 결부되어 스포츠의 보편성, 통합적 측면에 어느 정도 대치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즉, 상대가 있어야만 성립된다는 것입니다. 스포츠의 핵심은 바로 경쟁이지요. 상대 선수와, 상대 팀과, 상대 지역과, 상대 국가와 경쟁을 하는 구도입니다.


경쟁이라는 요소는 흥미와 재미, 발전성에 큰 도움이 되는 요소들이지만, 언제나 정도가 지나치게 되는 것은 피할 수가 없습니다. 때때로 차별하거나 조롱하거나 아예 훌리건 등 폭력 따위를 휘두를 수도, 폭동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등 스포츠맨쉽에 어긋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죠.


또 하나 더, 교회와 같은 커뮤니티성을 가지기엔 꽤나 느슨한, 어떻게 보면 파편적인 관계라는 것입니다. 어떤 스포츠, 더 좁게는 리그나 팀, 선수라는 관심사를 공유하여 같은 정체성 내에 소속될 순 있지만, 어디까지나 스포츠라는 영역 내에서만 존재한다는 점입니다. 교회라는 한 장소에서 주기적이고 공통된 의식을 하듯 경기장이라는 한 장소에서 대체로 주기적이고 공통된 경기를 관람하지만 그 이후, 혹은 그 사이사이 인간적인 관계를 내누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설령 나눈다 해도 자기 친구나 동료, 가족과의 관계일 뿐이고, 다른 사람이나 다른 무리와 알게 된다고 해도 몇명 되지 않는 협소한 인간관계이고 대체로 오래가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커뮤니티성은 경기장에서 같은 팬끼리라기 보단, 영국의 펍과 같은 곳에서 경기를 시청하는 이들끼리 형성되기 더 쉽죠.


스포츠 팬들끼리의 커뮤니티는 대체로 해당 스포츠와 관계된 정보를 공유하고 의견과 감정을 나눌 뿐, 좀 더 삶에 가까운 곳까지 연결되지는 않으며, 교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실제적 연결망으로 이어져 교감을 나누고 아는 사이가 되는 것과 다르게 대부분의 스포츠팬들은 스포츠라는 거대한 틀 안에 있지만 대규모의 실제적 연결망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단적으로 말해, 팬으로서의 정체성은 형성되어도, 실제 해당 경기장에 모이는 지역사회인들을 수십, 수백명씩 알게 되거나 안면을 트게 되는 일은 좀처럼 없다는 겁니다.



그런 면에서 종교의 삶에 더 밀접한 면모와는 차이가 있지요. 이렇듯 종교가 제공하는 다양한 부분들은 규모와 밀도 양면에서 다른 영역이 비등하게 제공하기 어렵다는 것이 현실입니다. 신앙과 믿음이라는 요소를 완전히 제외한 채 바라보아도 종교는 여전히 현대에도 매우 중요한 사회적인 기능을 하기에 없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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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 좀 더 생각해보니 이슬람, 유대교 등 같은 종교라도 파벌간의 투쟁과 배타성을 너무 간과한 듯 싶습니다. 너무 단순화시켰네요. 하지만 본질적으로 종교가 신을 정점으로 하는 통합, 질서를 요구하는 개념이라면 스포츠는 본질적으로 나누어 경쟁하는 식의 통합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또한 도리어 종교 쪽의 분열과 경쟁, 갈등은 그러한 신의 뜻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더 교조적이고 용납의 여지를 줄인다면, 스포츠는 상대를 말살할 경우 스포츠가 성립되지 않기에 결과적으로 선의의 경쟁일 수밖에 없다는 점도 특기할만 합니다.


더욱이 종교는 애당소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혹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도덕적 기준과 행동 및 사고방식을 제시하기도 하다보니 인간의 실제적 삶에 더 가까울 수밖에 없지만, 스포츠는 기본적으로 어디까지나 놀이에 한정된 개념이다보니 삶에 더 가까울 수는 없지요. 스포츠가 스포츠맨쉽, 한계의 돌파, 극기의 극복 등 정신적인 부분에 가르침 따위를 주는 건 사실이지만 어떤 총체적 윤리, 도덕률을 제시하고 지킬 것을 요구하진 않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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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정식 소통 태도란 남들이 납득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길게 잘 설명할 수 있는 것을 토론이나 논쟁, 혹은 일반적인 소통 상황에서조차 일부러 상대방이 낚이길 바라며 스스로 논파될 장소로 유도하는 식의 소통을 말합니다. 


어디에 원래 이런 용어가 있는 건 아니고, 글을 써서 지적하기 위해 제가 임의로 만든 용어입니다.



간혹 논쟁이나 토론을 할 때 소통 중 자신의 우위와 승리를 점하기 위해 논리나 팩트의 일부를 나열하며 지리하게 이어지는 경우가 발생하곤 합니다. 처음부터 자신의 생각과 근거를 잘 정리하여 논리적으로 서술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반박과 논파를 위해 그 일부만을 짧게 내놓고 그것을 상대방이 물어 뜯다 논리적 허점이나 모순을 유도하는 거죠.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상대방을 바보로 만들고 날 더 우월한 지성인으로 설정하기 위해 그러한 상황을 만들 목적으로 주로 발생한다고 봅니다. 논쟁 대상자를 논리적으로 두들겨패고 팩트로 무너뜨리며 유린하기 위한 태도인데, 이런 태도가 성공할 경우 지적 쾌감과 우월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매우 즐겁죠.


하지만 그런만큼 이게 잘 통하지 않을 경우, 상대방도 똑같은 태도로 대응하면 매우 지리하고 무의미한 소통, 논리적 참호전이 벌어지게 됩니다. 서로의 허점과 모순을 찾기 위한 싸움이 되는 거고 이 과정에서 갈등, 분쟁으로 이어지기도 쉽습니다. 다시 말해, 점점 격해지면서 말싸움이 되기 쉽다는 거죠.


생각보다 많은 논쟁은 처음부터 성실한 소통 태도로 임했을 경우 발생하지 않거나 더 생산적인, 유의미한 결론을 낼 수 있습니다. 적어도 분쟁이 아닌 끝을 볼 수 있곤 하죠. 그러나 함정식 소통태도는 그러한 결론을 내놓기 어렵게 됩니다. 처음부터 문제의 핵심을 짚어 그 모순점이나 문제점을 무너뜨린다면 단 한 줄의 논리도 위력을 발하겠지만, 대개의 경우 그렇지 않죠.


하나의 문제에 대해 한두 가지의 결론이 나올 수 있다면 정말 좋고 편하겠지만 생각보다 더 많은 관점과 생각이 제나름의 합리성과 의미를 지니며 가치를 지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덜 합리적일 수 있고, 그 논리적 구성이 탄탄하지 않을 수 있지만, 그러한 의견과 주장이 나올 수 있는 바탕엔 의외로 반박하기 어려운 합리성이 존재할 수 있죠. 논리는 좀 허술하지만, 맞는 말일 수 있다는 겁니다.


한 줄의 논리로 논파했다면 정말 멋지고 재밌는 일이겠지만, 실제로 그러긴 어렵죠. 오히려 쿨병 걸린 것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따라서 자신의 의견에 논리와 근거를 충실히 마련하는 성실한 소통이 상호 모두에게 이로운 태도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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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


난 당시에, ‘여성’의 역할에 갇히는 느낌이 견딜 수 없어서 화가 난 상태였다.

뒤돌아보면 그건 사회적 억압과 내 성정체성, 썩 불행했던 가정사 등등이 섞인 결과였다.

어렸을 때야 우리편 vs. 니네편으로 모든게 단순했지만. 돌아보면 그건 결코 단순치 않았다.

사람 일이 얼마나 복잡한 건데. 하지만 그 때는 상관없었다.

내 정신적 불행을 잠시나마 외면하는 데 ‘사상’만한 게 없었으니까.

일단 겁나 가난한 집안이 싫었고, 오빠와 차별대우하는 부모가 싫었고, 너무 일찍 자각한 내 정체성이 싫었고,

내가 짊어진 짐을 이해할 수 조차 없는 세상이 싫었고. 기타 등등. 모든게 내가 여성이기 때문이면 간단했다.

근데 돌아보면 그냥 이런 생각이 드는거. 그게 뭐? 내가 불행한게 내 주변 개인들 탓인가?

IMF때 폭삭 망한 부모가 나 미워서 날 내보냈을까? 오빠는 잘 되고 나 망하라고 등록금 안보태줬을까?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이 굳이 호모포비아라서 날 외면했을까?

나에게 겹쳐진 불행들이 어떤 한 사람, 한 집단의 탓인가? 울분을 토하면 그게 사회운동인가?

하지만 그 때, 그쪽 집단 안에 있을 때는 몰랐다.

거의 절대 다수의 내 문제들은 사실 ‘우리편 vs. 니네편’보다 훨씬 복잡했다는 걸.

나를 둘러싼 상황은 더럽게 복잡한데, 이게 단순히 ‘여성의 억압’이라는 필터로 단순화되었을 뿐이라는걸.

난 내가 20년쯤 젊었더라면 요즘 흔한 애들처럼, 깨어있는 페미니스트를 자처했을 것이라 확신한다.


(후략)


한 레즈비언 아줌마의 넋두리.


현대는 너무나도 복잡해서 전문가라고 해도 현실의 일부분만을 설명할 수 있을 뿐 그 외의 영역에선 남들보다 조금 더 낫거나 남들과 큰 차이가 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어떠한 사회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선 다양한 의견과 다각도의 관점들을 수렴해야만 하고, 그러한 다양성이 충족되는 사회가 건전한 사회의 조건일 것입니다.


그러나 극단주의자, 반지성주의자들은 그러한 사회를 너무나도 간단한 형식으로 파악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큰 오류를 범하고는 하는데, 그들의 지성이 뛰어나지 않거나 관점이 너무나도 편협하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이죠. 


문제는 그들이 단지 멍청하기만 한 게 아니라, 고집까지 세다는 점에 있습니다. 다른 시각과 관점을 알지 못하고, 심지어 받아들이고 하지도 않기 때문에 자신이 아는 것이 전부이고 자신의 관점이 진리라고 여깁니다. 저는 이를 독선이라고 표현하는데, 그들이 어떠한 사회문제나 정치를 판단할 때 자신의 판단이 정의이고 다른 관점과 다른 생각은 틀린 것, 혹은 잘못된 것으로 기준하기 때문입니다.


즉, 그들은 그들의 모자란 지성과 편협한 시각과 함께 쓸데없는 자존심과 고집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세상을 판단하고 평가할 때 한두 가지의 간단한 논리와 딱 그 수준의 사고로 제단한다는 겁니다.



제가 보는 소설 중 천마신교 낙양지부(2부는 낙양본부)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작가가 무공에 대해 흥미로운 관점으로 서술하였는데, 간단히 요약하자면 정공은 불세출의 천재(입신의 경지)가 어마어마하게 넓고 뛰어난 통찰력으로 전체를 그려 만든 무공이기에 뛰어난 오성(재능)을 가지고 그가 만든 체계를 이해하고 따라갈 수 있는 인재라면 시간이 느릴 뿐이지 꾸준히 올라갈 수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반면 마공의 경우 위가 아닌 아래에서부터, 자신의 논리와 관점을 점점 체계화시켜 마공을 뜯어고치고 발전시킨다는 점인데, 문제는 이럴 경우 낮은 수준의 체계에선 충분히 통할 정도의 논리와 형식을 갖추어서 별 문제가 없지만, 그 체계를 그대로 쌓아올리다보면 체계 스스로 모순이 발생하고, 그 모순을 해결하지 못할 때 주화입마가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잘해야 마공을 잃고 평범or폐인이 되거나 나쁘면 걍 죽죠.


그럼 천마신교의 마인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느냐면, 서로 다른 관점과 개념을 가지고 무공을 만들거나 발전시켜가는 다른 마인과의 교류를 늘리는 방식으로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 저변을 넓히는 것이죠. 자신의 무공을 나누고, 자기가 준 만큼 다른 무공을 배우며 자신의 무공이 가지고 있는 근본 한계를 넓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한가지 시각으로 바라보면 그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개념, 현상이 닥쳤을 때 반드시 오류가 발생할 수 없는 것을, 다른 시각들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체계 내로 편입시키면서 모순과 오류를 해결한다는 겁니다.


이는 무협이라는 소설 내의 설명이지만 이러한 관점이 시사하는 바가 있다고 느껴지더군요.



애석하게도 세상에는 그런 종류의 바보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반지성주의, 혹은 극단주의라 부르는데, 이는 반지성주의와 극단주의가 같기 때문이 아니라 서로 공유되는 교집합적인 부분, 혹은 서로가 서로의 이유가 되어주기도 한다는 쪽일 것입니다. 반지성주의자이기 때문에 극단주의자가 되거나, 극단주의자이기 때문에 반지성주의로 빠지거나.. 


일베나 메갈류가 그렇죠. 그들은 매우 편협한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수준 낮은 논리와 사고로 판단하려 합니다. 



더 간단한 논리의 선동이 그러한 것을 판단하기 위한 지적능력이나 소모해야할 인지력이 부족한 이들에게서 더 쉽고 광범위하며 빠르게 받아들여지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무엇이 문제라면 그것이 왜 문제인지 제나름대로 분석하고 판단할 지적능력이나 그 능력을 활용할 정신력(인지력)이 필요한데, 여유롭지 못할수록 그렇지 못하다는 겁니다.


전라도 혐오와 한국 혐오. 가해자의 피해자 혐오.

https://konn.tistory.com/703


앞서 짚었던 편협한 시각, 저열한 지성을 고려해보면, 복잡하고 다양한 관점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러한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지성을 가진 이들일수록 더 간단한 논리의 선동이 잘 먹힐 수밖에 없는 거죠. 최근 많이 비판받고 지적이 나오는 사이버렉카와 그들의 추종자, 무사트와 그 직원들에 대한 공격을 하는 자들이 많고 그러한 행위에 죄책감이나 가책 따위가 느껴지지 않는 것은 그들 스스로는 자신의 행동을 정의롭다 여기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신들이 비판하는 문제 삼는 현실의 여러 현상과 객체들은 제각기 더 복잡한 설명이 필요한 것들인데 너무나도 편협한 시각으로 바라보고, 그걸 더 떨어진 지성으로 판단하다보니 저열한 결론이 나오고, 그들의 쓸데없는 고집은 자신을 정의의 포지션에 설정하는 거죠.


애당초 모든 인간들은 자신을 정의롭고 공정한 판단을 한다 여기지만, 객관적 현실은 전혀 다르게 판단될 수 있듯이, 그들이 비판을 받는 이유는 그들의 행위에 있지 그들의 주관에 있는 게 아닙니다. 



그들이 가지는 한계 덕분에, 그들의 철학도, 신념도 정교하지 못하고, 허술하나 최소한 체계가 정립된 세계관이나 가치관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그들의 한계와 함께 어떤 것을 판단할 때의 유일한 기준은 자신들이 소속된 커뮤니티에 형성된 분위기거나 그저 자신의 기분, 비위에 불과합니다.


더닝-크루거 효과에 대해서는 익히 아실테니 굳이 설명하고 넘어가진 않겠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자신이 정의롭고 공정하다고 생각하면서 자신을 똑똑하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누군가 자신을 가르치려들면 감히 나를 가르치려한다며 역으로 가소롭게 여기죠. 정작 본인들의 저열한 지성을 본인은 자각하지 못하고요. 


너 자신을 알라는 시대를 초월한 금언인 이유가 있는 법이죠. 하여간 자신의 무지함과 편협함을 자각하지 못한 이들이 자신이 독점한 정의의 자신감을 기반으로 오히려 남들을 가르치려하고 넌 틀렸다고 자신 있게 말합니다. 일베, 메갈이 자신의 태도와 가치관을 자랑스럽고 비판받거나 논파 당해도 포기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죠. 지금은 내가 잘 몰라서, 니가 말이 안 통해서 포기하는 거지 내 관점과 사상이 틀린 건 아니다. 라고.


그런 이들이니 공정이나 정의라는 것도 앞서 언급한 기준에 따라갑니다. 소속된 집단의 분위기나, 자신의 기분과 비위. 이걸 직관이라고 하면 직관이겠지만, 그 직관도 지성을 기반으로 하는 통찰력이 있어야 의미가 있습니다.


기존의 윤리나 가치관, 철학이나 사상을 비웃고 비판하고 하는 거야 개인의 자유입니다. 하지만 본인 스스로부터가 그러한 기준을 세우지 않고서는 언제나 이중적이고 사안에 따라 다른 기준이 될 수밖에 없죠. 그 기준은 자신의 기분에 따라 다르고 자신의 비위에 따라 달라지는 가볍기 짝이 없는, 가변적인 물건이 되는 거고요.


일베와 메갈을 위시하는 극단주의자들의 편협성과 독선성이야 너무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태도들이고, 단지 이들 집단 뿐만 아니라 현실과 인터넷 어디에서든 존재합니다. 심지어 우리들도 정도의 차이일 뿐이지,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그렇다면 중요한 건 정도죠. 선을 넘거나, 지나쳤다는 표현이 존재하는 이유는 누구도 아닐 수 없는 요소에서 남들과 다름을 구분하기 위함입니다.


인터넷의 악플러들이 연예인이나 일반인을 죽이고, 누군가의 아내를 유산시키거나 멀쩡한 사람을 정신병이 생기게 괴롭히는 이유는 그들이 어떤 잘못을 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저 자신을 정의라 여기는 편협한 바보들이 독점한 정의를 휘두르는 쾌감에 빠지고 싶을 뿐이기 때문이죠.


반성도, 성찰도, 고민도 없고, 무언가를 판단하고 적절히 설명해내기엔 판단력과 합리성이 부족한 겁니다. 그런 주제에 자신이 대법관이라도 되는 양 모든 것을 공정하고 정확하게 판단하는 뛰어난 지성인이라고 생각하죠. 기껏해야 인터넷에 나돌아다니는 글 몇개 주워읽은 것이 다일 것인데 자신의 판단을 과신하며 뭐라도 되는 듯이 굴죠.


그들의 태도는 소아병적이고, 비대한 자아가 여물지 못한 것처럼 보입니다. 좁아터진 세계관 속에 남이 자리할 공간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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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관계가 특수한 관계에 있는 건 맞는데, 그 기반이 증오와 혐오에 있다보니 더더욱 객관적인 판단력을 상실하고 서로의 관계를 바라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는 우파로 갈수록 그 경향성이 강해지는데, 그들에게 북한은 말살해야할 적이고, 대화나 타협, 협상의 대상이 아닙니다.


예전에 극우보수는 북한이라는 존재가 없어지면 자신들의 정치적, 이념적 기반을 상실하기에 안 되기 때문에 건드리지 않는다고 한 적이 있습니다만, 이는 정치적 계산하에 이루어지는 결론이라면, 지금 하는 이야기는 역사적 경험에서 비롯된, 그리고 정치적 목적에 의해 조장된 세뇌와 관계된 내용입니다.



북한이 정상적인 국가가 아닌 이상 다른 국가들과는 전혀 다른 룰에 의해 굴러가고, 전혀 다른 질서와 원칙의 적용을 받기 때문에 한국이나 일본, 서구의 다른 국가들과 비교해서 같은 잣대를 대고 판단해서는 안 되는 건 맞습니다.


하지만 그걸 떠나서 북한에도 통용되고 적용될 수 있는 일반 원칙들은 존재하고, 그것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이죠. 하지만 이상할 정도로 북한에 대해서는 자기가 알고 있는 상식이 적용될 수 있다는 상상을 하지 않는 경우가 있곤 합니다.



북한이 헌법상 국가가 아니더라도, 이미 90년대부터 사실상의, 현실에 존재하는 국가임을 은연중에, 훗날 거의 공식적으로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즉, 북한과 어떤 진전을 이룩하고 싶다면 대화와 타협, 협상을 해야하고, 마찬가지고 북한에 불만이 있어서 항의하거나 압박하고자 한다면 그러한 대화와 타협, 협상을 해야 한다는 겁니다. 혹은 국가대 국가로 사용될 수 있는 유의미한 압박 카드를 적용해야 하죠.


하지만 이명박근혜 정부에서 보여줬듯이, 북한에 대한 불만이 있어도 그들이 한 것은 대화나 협상 따위가 아니라 일방적인 조치들이었고, 그마저도 제대로 하지 못했거나 되려 자해를 입게 만드는 경우조차 있었죠. 



이는 북한을 국가, 정부로 보지 않고 정상적인 관계를 이어나갈 수 있다는 상상 자체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북한에게 북한 나름의 주권이 있다고 보질 않는 거죠. 그렇다보니 매우 비정상적인 요구들이 나오기도 하는데, 거의 일방적으로 북한이 굴복하고 우리의 조건, 요구를 이행해야 한다는 입장이 그러하죠.


마찬가지로 북한에서 발생하는 문제, 특히 한국과 관계된 일에 대해서 그들의 조치나 행동이 그들에겐 상식적인, 자기들의 원리와 원칙에 충실한 행위였음에도 그러한 맥락을 이해하지 않고 공분을 일으키거나, 실제 분노할 사안에 대해서도 맥락상 미묘하게 갈리는 입장에서 분노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는 북한 자체에만 적용되는 태도가 아닌, 북한에 대해 판단하거나 표현하는 경우에도 그렇습니다. 이번 유시민의 발언도 그렇고, 가끔 나오기도 하는 조금이라도 북한에게 좋게 들릴만한, 혹은 욕이나 증오 표현이 아닌 표현들은 죄다 욕을 먹게 됩니다. 북한과 관계되면 객관성을 완전히 잃어버리는 거죠. 말살해야할 적이기 때문에 객관적 판단이 아예 안 되는 겁니다.


유시민의 계몽군주라는 발언이 비판받을 껀덕지가 있는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욕을 먹거나 적으로 규정하거나, 혹은 이미 한 규정이 더욱 강화되는 것은 인지부조화이고, 객관성의 상실입니다.


김정은이 북한을 개혁하고 개방까지 보는 듯한 사인들이 드러나며 기존 체제에서 개변을 원한다면 그걸 뭐라 부를까요? 계몽군주라는 표현 자체가 북한이 정상적인 국가가 아님을 드러내는 표현이기도 하죠. 왕조 국가라고. 요컨데, 저 표현이 비판을 받을 껀덕지가 있는 건 사실이지만, 저런 걸로 열불내는 건 아직도 왕조시대를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6.25 이후, 그리고 독재 정권에 의해 더더욱 조장된 반공정신과 사상이 비판이나 반성, 성찰의 대상이 되지 않는 절대진리의 세계관으로 자리잡은 이들에게 북한은 몇번씩이나 말했듯, 말살해야할 적입니다. 적이라도 타협이 가능한 종류가 아니라, 글자 그대로 대화도, 타협도, 협상도, 거래도, 협력도 불가능한 지워버려야할 안티 그리스도인 셈이죠.



그 갈래는 북한 하나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닌 조금이라도 친북적이거나, 좀 더 극단적으로는 혐북이 아닌 이들 모두에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적어도 제가 보기에 극우보수 세력이 진보좌파를 대할 때, 대화나 타협보다는 없애버려야할 적으로 규정한 채 없어져야 한다고 여기는듯한 모습들을 굉장히 자주 봤습니다. "빨갱이는 죽여도돼."로 대표되는 가치관이죠.



북한이 적인 건 사실입니다. 종전을 하지 않는 한 말이죠. 그게 아니더라도 의심스러운 잠재적 적국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객관성을 상실한 뒤 할 수 있는 선택지들을 지워놓고 전쟁과 굴복이라는 두가지 버튼만 남겨두고 무한정 대기를 하는 것은 합리적인 운영이 아닙니다.


조금이라도 북한에 유리하게 들리는 모든 표현에 빨갱이 필터를 씌우고 보는 경우도 정말 많습니다. 하지만 그게 북한이라는 대상이 아닌 경우에도 적용될 수 있는 것인지 먼저 판단해보고, 남북관계라는 특수성 하에서도 적용될 수 있는지도 같이 판단해봤으면 합니다.


남북관계가 특수한 관계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혀 다른 별세계 관계까진 아닙니다. 우리가 다른 나라에 적용할 수 있는 원리와 원칙, 상식을 그대로는 아니더라도, 적지 않은 부분을 적용 가능한 세계이고요. 남북관계에 진전이 있고, 어떤 식으로든 발전을 원한다면 북한을 대하기 위해 좀 덜 감정적이고, 합리적이며 객관적 판단이 가능한 영역에 서서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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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 공무원 피살 관련 북측이 보내온 통지문

https://news.v.daum.net/v/20200925143139233
외신, '김정은 사과' 긴급보도.."북한지도자 사과 극히 이례적"
https://news.v.daum.net/v/20200925150206549


북한이 정말 이례적으로, 제가 살아있는 동안 거의 처음으로 보는 북한의 사과입니다. 이건 정말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먼저 비교해야할 것은 과거의 사례인데, 현재 반정부세력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이게 정부의 잘못이거나 문재인이 욕을 먹어야 하는 사례인가 하면, 과거의 사건들과 비교해서 북한이 정말 완전히 다른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저 정부를 깍아내리고 공격하기 위한 정치적 시도임을 알 수 있습니다.


북한, 금강산 피살 "유감"... 현장조사는 거부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945032
북한 "천안함 무관, 사과 못해"...한국, 유감 표명
https://www.voakorea.com/korea/korea-politics/2692152
[北, 연평도 포격 도발]北 “민간인 사망 유감이지만…”
https://www.donga.com/news/Politics/article/all/20101129/32928006/1



박왕자 사건, 천안함 피격, 연평도 포격 사건 모두 북한은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한 적이 없습니다. 당연히 사과한 적도 전혀 없고요. 오히려 한국과 미국 측에 책임을 떠넘기며 공분을 샀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 사건에 대해서 북한은, 김정은은 직접적으로 "사과"를 했습니다. 이건 굉장히 이례적인 사례이고, 마찬가지로 굉장히 시사하는 바가 큰 사건이죠.



먼저 짚어야 할 것은 이겁니다.



1.이 일이 어떻게 벌어진 것인가?


북한은 이미 월경자는 이유 불문하고 모두 쏴죽이라는 지시를 내린 바가 있습니다. 이유는 코로나19 때문인데, 북한은 후진국답게 전염병을 제대로 통제할 수가 없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전염력은 매우 강하고, 이 때문에 평양을 봉쇄했다는 등의 이야기도 나올 정도이죠. 게다가 상상하기 어렵지 않듯, 북한의 감염자에 대한 대책은 사살이라 알려져 있습니다.


즉, 일은 이렇게 이루어진 겁니다. 김정은이 감염자에 대한 사살 내지는 특정 지역이나 공간에 집단 감금 수용하여 사실상의 처형을 했을 겁니다. 외부에서 계속 들어와서는 안 될테니 중국인이 됐든 한국, 일본인이 됐든 월경자가 발견되면 위협해서 돌려보내거나 사살했을 겁니다. 대체로 사살할 것이고요. 


해안 초병은 그러한 명령에 따라 한국에서 넘어온 월북자에 대해 사격을 했던 거고요. 이에 대한 전후관계는 북측 통지문에 나타나 있습니다. 어쨌든 그렇게 사살하고 전염병 감염자의 시신을 처리하는 방법대로 화장을 했을 겁니다. 이에 대해 북한은 시신이 아닌 부유물을 소각했다고 하지만, 북한이 이에 대해 거짓말을 하는 것이고 실제 시신을 태운 거라면 전염병 확산을 막기 위해 위에서 정한 조치대로 했다고 봐야할 겁니다.



2.이 일이 의도된 것인가?


위에서 서술했듯이, 이는 북한의 의도적으로 했다고 보기 어렵고, 위에서 내려진 행동원칙에 따라 해안 초병이 정해진 명령대로 행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보통 월북자가 나타나면 일단 받아주고(혹은 체포하고) 선동을 위해서든 어떻게든 써먹거나 하지만 다짜고짜 총질하며 사살하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간간히 발생하는 월북자나 월북 사고자들이 판문점 등을 통해 송환되는 경우들을 보면 더더욱 확실하죠. 이 경우는 코로나19와 엮여 강력한 봉쇄, 사살 조치를 취하는 시점에서 자진월북 했다가 사살 된 경우이고, 이 일에 김정은 등 북한 수뇌부의 의도가 있는 건 아니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국정원 정보를 보면 더 확실합니다. 


[속보]국정원 "김정은, 통지문으로 보면 사건 보고 못받은 듯"

https://news.v.daum.net/v/20200925165059605


그냥 코로나 확산을 막기 위해 강력한 지시를 내려놓고 그에 따른 것 뿐인데 잘못 걸린 거죠. 



3.김정은 사과가 의미하는 바는?



한국이 북한을 그동안 동등한 대화나 협상의 상대로 보지 않았고, 마찬가지로 북한도 한국을 동등한 대화나 협상의 대상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서로 물리쳐야할 적 정도로 규정했고, 이 관계를 깨보자고 했던 것이 김대중, 노무현의 햇볕정책이었죠. 그러나 이는 박왕자 사건과 이명박 정부의 등장으로 강제로 셧다운 되었고 문재인 정권에 들어서야 상호주의를 견지하는 대북온건책이 시행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남북회담도 있었고, 북미회담도 있었고, 삼국의 정상이 한 자리에 모이기도 했으며, 김정은이 남쪽 땅을 밟아보기까지 했습니다. 문재인 정권 이후로 남북관계는 언제나 좋기만한 것은 아니었지만, 분명하게 나아갔습니다. 이번 사례는 그걸 분명하게, 그리고 아주 크게 변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죠.


불과 몇달 전만 해도 북한은 한국 정부를 비난했습니다. 이에 대한 사유야 뭐 자기들이 코로나 때문에 이렇게 힘든데 앞으로 나아가자느니 평화를 바란다느니 해놓고 인도적인 지원조차 없다는 것 때문일 거라는 게 추측이지만, 중요한 건 표면적으로 북한은 한국 정부를 비난했고, 이번에는 한국 월북자를 사살했습니다.


그러나 과거 어떤 사례와도 다른 점은 바로 그들이 직접적으로, 그리고 분명하게 사과를 표하며 미안하다고 했다는 점이죠. 그동안 자신들의 행위에 대해 어떠한 사과도 없이 유감 정보를 표현하거나, 아예 한국과 미국에 책임을 떠넘기는 것과는 아주 다른 태도입니다.


이게 무엇을 의미하느냐, 분명하게 확신할 수 있는 것만은 아닙니다만, 북한은 앞으로 자신들이 남측에 '직접적으로 책임이 있을만한 행위'를 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기껏해야 바다에 포나 기관총 좀 난사하면서 물고기와 교전을 벌이는 정도를 제외하면 한국인의 목숨을 의도적으로 빼앗려 하거나 한국 영토를 공격하지 않으며, 주권을 침해하지 않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죠.


뭐, 물론 이북 지역을 점유하고 있다는 거 자체가 침해하는 거라면 틀린 것도 아니겠지만 명목상의 명분과 현실적 관계는 다른 법이죠. 우리가 북한을 인정하고 있지 않다고 해도 실제 북한은 주권을 가진 국가, 독재국가라는 것은 현실이고 그게 현실인 이상 어떻게든 현실적으로 부딪히지 않는 한 진전이 없으니까요. 가령, 국가가 아니라고 대화와 협상을 하지 않는다면 전쟁말고는 남는 선택지라곤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는 무의미한 선택지밖에 남는 게 없다는 겁니다.


하여간 북한의 이런 태도는 정말 이례적입니다. 자기 잘못을 인정했다는 건 그 자체로 전례가 되어 앞으로도 북한의 태도와 외교 관계에 영향을 줄 거고, 북한이 나서서 이러한 인정을 했다는 것 역시 앞으로 이러한 상황이 반복되지 않을 것임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서, 좀 더 정상적이고 발전적인 관계를 원한다는 이야기죠. 


적어도 문재인 정권 이후 실질적으로 한국을 '공격'한 사례는 이번 뿐인데, 전후관계를 살펴봤을 때 북한 정부가 의도적으로 한국을 공격한 사례인 건 아닙니다. 그 이전까진 기껏해야 용궁과 교전하며 자기네 바다에 포를 쏘거나 핵실험을 하는 등 내부 통제력을 강화하기 위한 도발이 다였죠.


따라서 북한 또한 한국과의 관계개선을 원하는 것으로 봐야합니다. 이는 12일 보내왔다는 친서에서도 드러납니다.


[전문]김정은 국무위원장이 文대통령에 보낸 친서

https://news.v.daum.net/v/20200925161641385


이런 친서를 보내놓고 올지 안 올지도 모르는 월북자에 대해 즉각적으로 북한 수뇌부가 결정하여 사살 명령을 내려 한국의 주권을 침해하며 한국인을 공격하는 사례를 만든다? 납득이 되는 설명이 아니죠.


김정은은 오히려 이런 시국에서 대화를 하며 무언가를 얻어내려 할 겁니다. 아무 일 없는데 갑자기 바이러스 운운하며 걱정한다며 유화적인 메시지를 보냈다는 것 자체가 자기들도 힘드니 코로나 백신이든 뭐든 보내달라, 도와달라는 의도로 읽힙니다. 



북한은 지도자의 위신이 다른 나라보다 매우매우매우 중요한 국가입니다. 그렇다보니 사과하지 않으려 하고, 한다고 해도 본인이 아닌 아랫사람이 대신 하곤 합니다. 독재자에게 위신이 깍인다는 건 그만큼 자신의 권위가 상실된다는 거고, 북한은 아예 지도자의 무오설을 주장할 정도로 종교적인 면까지 있죠. 그런 김정은이 직접 사과를 전해왔다는 건 정말 중요한 의미를 가진 사건입니다.



재밋는 점이 하나 있는데, 문재인 정권이 끝날 시기가 얼마 안 됐음에도 불구하고 저러한 메시지를 보냈다는 건 그만큼 북한이 급하다는 의미거나, 다음 정권 또한 민주당 정권일 거라는, 그럴 가능성이 높다는 계산이 나왔다고도 볼 수 있지 않나 싶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다음 정권 때 또 대북기조가 바뀔 수 있음에도 이런 이야기 안 나오죠. 이러한 대북기조가 이어질 것이라는 기대 하에 보냈을 거라는 이야깁니다.




마지막으로 한가지 더, 이거 가지고 문재인을 공격하는 건 문재인과 민주당의 지지와 정권 통제력이 보이는 것보다 크기 때문에, 그리고 자신들의 세력이 정말 예전같지 않기 때문에 하는 치킨호크 놀이인데, 갈등 상황에서 강경파의 입장에 서는 건 의제를 장악하거나 누군가에게 책임추궁을 하며 더 많은 영향력과 지지를 끌어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말하는 것만 들어보면 마치 전쟁이라도 일으키거나 직접 특수부대 따위를 보내 보복 타격이라도 있어야 한다는 것처럼 말하지만, 이것은 책임질 자리에 없기 때문에 하는 정치적인 수사들이고, 쉽게 말해 잘 걸렸다 이겁니다. 이러한 발언에 넘어가는 거 자체가 선동당하는 것이죠. 그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이 연평도, 천안함 때 아무 것도 못했다는 걸 상기해야 합니다.


아 그리고, 통일전선부에서 보내온 통지문의 어투가 했다에서 했습니다로, 다시 했다에서 또 했습니다체로 왔다 갔다 하는 건 아마 강경파와 온건파가 돌아가면서 쓴 것을 그대로 담았기 때문일 겁니다. 이 또한 북한의 내부적인 타협의 결과인 셈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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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일베를 위시한 호남혐오자나, 일본의 혐한은 가해자와 피해자가 명확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반성하기는커녕, 오히려 피해자를 조롱하고 공격하고 멸시하고 있죠. 지금까지도요. 오히려 있는 문제를 찾아내거나 없는 문제를 만들어내서까지도, 이유를 조작하고 날조해가면서까지 해대는 작업입니다. 


이것을 단순히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는 정도로 이해하는 것은 틀린 것만은 아니겠지만, 그것만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일은 아닐 것입니다.



1.

기본적으로, 앞서 말했듯이 전라도 혐오나 일본의 혐한은 공통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전라도가 경상도와 경기도 같은 우월한 지위에 있던 지역에 차별 및 상대적으로 착취 당했던 지역이었다는 것과,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것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쉽게 말해 수직적 위계서열이 있었으며, 어느 한쪽이 사실상 일방적 가해자의 위치에 있다는 점입니다.


좀 더 문제가 단순한 한일관계를 주 예시로 들겠습니다.


일본은 한국을 식민지배했고, 그러한 관계는 오랫동안 정신적 우월감을 가져다줬습니다. 그리고 해방 이후에도 수십년간 서구에서조차 가볍게 보지 않았으며, 대단한 경제적, 문화적 업적을 가진 세계대국인 일본에 비해 9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분명한 후진국, 개발도상국이었던 한국이 어느새 일본과 맞먹거나 그 위상을 넘보는 시점까지 오게 되었죠.


이는 일본에게 하여금 언제나 발 밑에 있던 한국이 자신과 맞먹으려 한다는 불쾌감을 안겨줬습니다. 언제나 내 아래에 깔려 있어야 할 아랫것인데, 당당히 허리를 펴고 선다는 게 싫은 거죠.


따라서 일본의 혐한은 단순히 이러이러해서 한국이 싫고 어쩌고가 아닌, 위상의 역전에서 찾아오는 위기감에 더 가깝습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이를 막을 방법이 거의 없기 때문에 그저 깍아내리며 정신승리를 하는 겁니다. 그 위기감을 절실히 느꼈을 때 무역공격을 감행한 것이고요. 사실상 실패했지만.


전라도에 대한 혐오도 그와 같습니다. 독재정권하에 착취와 차별을 받던 전라도가 자신의 위치를 복구하며 남과 같은 대우, 남과 같은 위상을 되찾는, 정확히 말하자면 정상화해가는 것을 거부하고자 하는 것이죠. 물론 독재시절 만들어진 차별의식을 밈으로써, 구시대적 정신의 계승을 통해 젊은 세대 또한 갖추게 된 것도 사실일 겁니다.



2.

이제 인간을 바라보자면.. 삶이 여유로울수록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은 직접적이게 됩니다. 트위터나 커뮤니티, 게임, 애니, 영화에서 여행, 스포츠, 술자리 등 인간관계나 이성관계마저도요. 경제가 되었든 시간이 되었든 여유가 부족하고 인간관계가 협소할수록 스트레스와 불만을 푸는 방법은 한정적이게 됩니다. 더욱 간접적이게 되죠.


물론 이 직간접적 방법들은 직접적일수록 더 건전하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오히려 문란해지기도 쉽고 더욱 직접적인 갈등에 휘말리기도 쉽죠.



3.

강약약강은 비열한 것이긴 하지만, 동시에 그게 당연하고 합리적인 본능적 태도임은 사실입니다. 정의로운가와는 별개로 말입니다. 조선시대 양민들이 계급적 차별이나 때때로 폭력의 피해자였지만 동시에 천민에 대한 잔혹한 가해자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훗날 신분제가 없어졌을 때도 그것에 반발했던 것은 자신들의 감정받이 역할을 하는 천민이 사라진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들이 자신들과 같은 취급과 자격을 얻게 됨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고요.


양반은 너무 고고하고 와닿지 않을진 몰라도 바로 옆에서, 바로 밑에서 치대는 천민은 곧바로 자신의 혐오와 차별 등 가해의 쾌감을 느끼게 해주는 창구였지요. 물론 실제 역사에서 그 정도로 노골적이고 광범위하며 직접적인 폭력을 행하는 수준은 아니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들의 존재는 양민들로 하여금 신분적 차별과 불만을 해소할 수 있는 역할을 했지요.


요는 감정받이 역할을 해줄 약자, 혹은 그러한 계급이 중간에 낀 이들의 감정받이 역할을 해주고 자존감을 회복시켜주는 용도로 사용된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이러한 구조는 결코 정의롭지도, 공정하지도, 심지어 항구적이지도 않습니다. 반드시 희생되어야 하는 최하위 계층에 계층적 불만을 거르고 걸러 쏟아낸다는 것이니까요.



4.

혐오와 차별은 그 자체로 우월한 지위를 안겨줍니다.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그런 것처럼 느껴지게 하죠. 이는 자신이 얼마나 대단하고 뛰어난 사람인가와 별개로 가해하는 대상에 비해 우월하게 느껴진다는 게 중요합니다. 거기에서 찾아오는 정신적 쾌감도 작지 않죠.



5.

이번엔 대상을 좀 더 한정지어보겠습니다. 인터넷에서 찾아볼 수 있는 일베류 혐오종자들의 경우 게임이나 다른 커뮤니티에서 갑자기 정치 이야기를 꺼내곤 합니다. 그리고 혐오자의 태도를 취하죠. 과거 일베는 왜 티를 낼까라는 글을 쓴 적은 있습니다. (https://konn.tistory.com/652) 그 글에서 일베는 사회 낙오자, 잉여인간, 정상적인 인간관계를 맺지 못하는 이들이라 한 적이 있죠.


그들이 갑자기 정치를, 그것도 혐오적 태도를 취하는 이유는 단순합니다. 그것 말고는 내세울 게 없기 때문이며, 혐오자의 태도를 취하며 자신의 빈약한 자존감을 회복시켜줄 수 있는 몇 안 되는 활동이기 때문이죠. 무언가를 혐오하고 차별하고 공격하면 자신은 아주 뛰어나고 대단한 사람이 된 것처럼 느껴지니까요.


삶이라는 경쟁에서 탈락한 패배자들이 자신의 자존감을 회복하고 자신이 훨씬 대단한 사람이라 느끼고 싶은 겁니다. 내가 이렇게 살아도 이만큼 아는 게 많고 뛰어난 능력을 지닌 사람이다. 올바르게 인식하고 사는 사람이다. 라고. 


그렇다고 일베나 일베류 사상과 맞서기엔 더 간단하고 더 노골적이며 더 직관적인 논리나 주장을 하는, 더욱이 그러한 공격에 조롱이라는 유머적 요소를 가미한 일베의 그것이 더욱 재밌고 받아들이기 쉽다는 겁니다. 제공하는 말초적 쾌감이 다르고 이해하기에 더 간단하고 직관적입니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문제다. 라는 긴 설명보다 저새끼가 개새끼다. 라고 표적을 가리키고 문제를 단순화(돈 때문이다, 관심 때문이다, 원래 전라도 종자라.. 등등)시킨 것이 더 이해하기 쉽습니다.


더 간단한 논리의 선동이 그러한 것을 판단하기 위한 지적능력이나 소모해야할 인지력이 부족한 이들에게서 더 쉽고 광범위하며 빠르게 받아들여지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무엇이 문제라면 그것이 왜 문제인지 제나름대로 분석하고 판단할 지적능력이나 그 능력을 활용할 정신력(인지력)이 필요한데, 여유롭지 못할수록 그렇지 못하다는 겁니다.



6.

인터넷 혐오종자 일베충들이야 그렇다치고, 그렇다면 다른 이들은? 더 잘 살고 더 여유로운 이들은 어째서 그러한가 한다면, 사실 그들은 그렇게 여유롭지 못하다는 점과, 오래전부터 그러한 가치관을 받아들였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이 여유라는 개념은 경제적일 수도 있고 정신적인 면일 수도 있습니다. 권력자임에도 아랫사람을 괴롭히거나 부당한 명령을 내리거나 사소한 것마저도 꼬투리를 잡고 굳이 찍어누르는 것은 자신의 권력을 끊임없이 재확인하고자 하는 불안감에서 비롯됩니다. 혹은 자신이 받는 스트레스를 자기보다 낮은 위계에 있는 이들을 통해 해소하려는 것이죠. 앞서 이야기한 감정받이.


혹은 젊은 시절 전라도에 대한 혐오적 가치관을 접하고 별다른 비판 없이 받아들인 이들은 그에 대한 비자발적 가치관적 붕괴나 자발적 편견포기가 있지 않는 이상 오히려 오랜 시간 동안 확고해집니다. 그냥 그러한 태도가 삶이 되는 거고, 자신을 형성하는 가치관, 혹은 세계관의 일부가 되는 거죠.


그러니 이에 대한 비판이나 의식개선보다는 그것을 온전히 보존하고나 하는 욕구와 이에 대한 공격에 방어적 태도를 발생시킵니다. 얼마나 합당한지와 별개로 그저 거부하고 보는 거죠.



7.

가해자가 도리어 피해자를 혐오하는 것은 일견 비합리적이고 이중적으로도 보입니다. 그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피해자의 말살을 의도하는 것처럼도 보입니다. 하지만 단지 그 뿐만은 아닐 것입니다. 정말 피해자가 아무 것도 아니게 되었다면 혐오하고, 조롱하고, 차별하겠지만 그 이상의 공격성을 보이진 않을 테니까요. 하지만 적극적이고 전략적인 작업을 하는 이유는 위상이 정상화되어 맞먹는 것에 대한 거부반응일 것입니다.



8.

이러한 것들을 조합해보면, 일본의 혐한론자는 자신들의 불만을 쏟아낼 창구로 한국을 선택한 것이고, 그 근거는 식민지 시절의 우월한 지위에서 출발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성장과 위상의 정상화는 천민이 양민과 맞먹으려 하는 받아들일 수 없는 계급적 반란으로 보이는 것이죠.


이는 단순히 한일관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닌, 흑백갈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노예 신분이었고 제도적 차별의 대상이었던 흑인이 자신들과 같은 위상을 가지며 맞먹는다는 것은 그로 인한 우월감을 느끼던 백인들에게 불쾌감을 안겼고, 마찬가지로 그러한 시대를 겪지 않았던 백인에겐 그러할 수 있었던 기회를 상실했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전라도가 자신의 위상을 회복, 정상화하는 것이 비호남 전라도 혐오자들에겐 덮어놓고 조롱하고 차별하고 혐오하던 대상이 사라짐에 따라 불쾌감과 위기감을 느낀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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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자기 전에 했던 생각은 이것보다 잘 정리가 되었는데, 일어나서 글로 쓰니 생각했던 것의 반도 제대로 못 썼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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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전 세계적으로 발생하는 판데믹 상황을 보면서 각 국가마다 방역에 어려움이 있는 약점, 취약점들이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는 한국 또한 다를 바가 아니고요.


미국 같은 경우 인종차별, 저소득 흑인계층, 안티백서, 반사회적 음모론자 및 방종주의자.[각주:1]

유럽의 경우에는 인종차별, 이민자와 난민, 안티백서, 방종주의자.

싱가폴 및 중동 부국은 처우와 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외국인 노동자 문제.

남미나 저소득 빈곤국가는 관리가 안 되는 빈민촌과 이를 매개로 하는 범죄, 반군조직.

일본은 관료조직과 정치체제, 정치문화 자체(...)


한국은 고령자, 극우보수, 종교가 그러한 사회취약점이고요. 이번 8.15 태극기 집회에서처럼 동일 시위했던 다른 집단에 비해 분명하게 방역지침을 무시했고, 코로나를 확산시켰습니다. 그 때문에 우려했던 2차 파동이 발생하게 될 것이고, 이번 사태는 신천지보다 위험하고 파괴적일 겁니다.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여러 자료에서 고령자의 반사회적인 행동들은 방역과 행정, 치안에 위협이 되고 있습니다. 이는 이번 사태에 한정해서조차 그렇고 오히려 더더욱 노골적입니다. 심지어 이들 세대는 높은 복지 부담을 안기고 심각한 빈곤문제를 겪고 있기 때문에 어려운 세대이기도 합니다.


더욱이 지금처럼 '근대화, 문명화'가 되기 이전의 세대이기 때문에 60~80년대의 폭력적이고 구시대적이며, 심지어 중세적이기까지 했던 가치관을 수십년 동안 겪어온 이들입니다. 다시 말해, 한창이던 젊은 시절 형성된 세계관은 지금 기준으로 후진적이고 반사회적이기 일쑤라는 거죠.


그탓에 현 세대 사람들과, 그리고 현 시대의 행정과 사회적 관계에 있어서 마찰을 빚기 쉽죠. 복잡하고 어려운 건 모르겠고, 그러한 필요성을 이해할 생각도, 능력도 없으며, 문제가 생기면 목소리를 키우고 위압을 하거나 폭력을 휘두르거나, 최소한 상대방의 말을 전혀 수용하지 않은 채 자신의 주장만 반복해서 우기기만 합니다.


왜냐면 자신이 살아왔던 시대는 그렇게 해야 이기고 손해를 안 보고 때로는 이익을 보기 때문이죠. CCTV도 없고 블랙박스도 없고 고도화된 전산이나 행정 시스템도 없던 시절 문제가 생길 여지가 있다면 목소리로 찍어누르면서 무조건 우기면 최소 반반 가져간다 이거거든요. 지금이야 CCTV나 블박이 있어서 교통사고만 해도 증거가 있어서 뒤집어지는데 여전히 자기 아니라고, 오히려 상대가 박았다고 박박 우기는 이들도 있죠. 


이번 사태에선 아래 자료가 대충 그런 예시죠.




극우보수는.. 예전부터 꾸준히 하던 말이지만, 한국 극우보수의 수준은 정말로 중세적이거나 아무리 현대적 수준에 가까워도 군사독재 시절의 그것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들의 정신세계 자체가 그 시절에서 진보하길 거부했고, 발전하기엔 자신들의 세계관과 가치관을 포기해야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권력과 정체성 자체가 그 시절 그것에 있기 때문에 거부한다는 건 세계관의 붕괴와 가치관의 상실로 이어지기 때문에 발전할 수가 없죠.


다시 말해, 시대는 변해가는데 문제적 시대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여전히 유지하고 그대로 세상에 적용하겠다는 욕심이죠. 이 욕심 덕분에 한국에 여러 갈등과 문제, 모순들이 발생하는 거고 그 모순이 또 새로운 갈등과 충돌을 야기합니다.


2019/08/15 - [취미/이야기] - 한국 극우보수의 반공과 민족주의적 특이성에 대한 단상.

2019/05/13 - [취미/이야기] - 나경원의 반국가적 국민 인식과 처절한 쉴드.

2018/11/04 - [취미/이야기] - 한국 보수의 태생적 한계와 근원.

2017/04/22 - [취미/이야기] - 우리의 주적은 누구인가.

2017/02/16 - [취미/이야기] - 헬조센론. 국민가축론.

2017/11/07 - [취미/이야기] - 내가 왜 극우보수만 비판하는가?

2016/12/03 - [취미/이야기] - 극우보수의 사상적 근간. 마초 오르가즘.

2016/07/12 - [취미/이야기] - 극우보수가 보는 미개한 개돼지들.

2016/06/29 - [취미/이야기] - 극우보수가 교육을 건드리는 이유.


한국 극우보수 자체가 현대화된 사회체제에 걸맞는 수준이 아니라는 게 가장 큰 표면적 이유죠. 그렇기 때문에 정부의 방역지침을 공격하고 온갖 것에 독재라는 이름을 붙히며 공격하고 있습니다. 국가적 위기 속에서도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잘해나가는 정부를 공격하고 무너뜨리기 위해 깍아내리길 서슴치 않죠. 


옛 이야기속 나라를 지키기 위해 연전연승을 이룩하는 장군이 너무 큰 공을 세운다고 처형하고 나라가 망하거나 큰 피해를 입는 경우가 있는 것처럼 잘하고 있는 이를 정치적 득실 문제로 공격하는 근시안적이고 반국가적 세력이 극우보수입니다. 자기들이 책임질 것도 아니라면서요. 어떤 문제가 발생하든 이전 정권을 욕하고 탓하면 그만이니까.



심지어 한국 극우보수와 개신교회는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이미 전광훈, 이만희와 같은 종교인이나 소망교회를 비롯한 여러 교회, 한기총의 수뇌와 친밀한 관계에 있다는 건 이미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이고요. 더욱이 산발적이긴 하나, 몇몇 교회에선 보수편향적인 정치적 주장과 선동을 목사, 장로라는 사람들이 공적으로 연설하는 경우조차 알 사람은 알 겁니다.


종교적이라는 용어는 대체로 합리적 사고와 이성적 판단에서 거리가 있는 무조건적 믿음과 근거 없는 신뢰를 비판할 때 쓰이는, 대체로 부정적으로 사용되는 표현입니다. 광신의 뉘앙스가 있는 말이죠. 그리고 이번 사태에서 전광훈의 사랑제일교회 등 여러 교회에서 발생하는 방역 적대 행위에서 찾아볼 수 있는 교인들의 행동은 종교적 리더쉽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자생적이고 산발적인 반사회적 행동들이죠.


그리고 그 행동들은 종교적입니다. 가령 그들은 문 정권이 자기들을 타겟팅하여 음성인데도 양성으로 조작한다고 믿고 있죠. 이는 전광훈을 비롯한 목사들의 종교적 리더쉽 하에 일어나는 일이지만, 이만희와 다른 점은 이만희를 잡아서 신천지의 조직력과 활동을 와해시키는 것과는 별개로 이들의 행동은 단일 조직적이거나 수직적 위계의 권위에 의존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말했듯이, 자생적이고 산발적입니다. 전광훈과 사랑제일교회 등에서 나오는 대부분의 구호는 종교적인 게 드뭅니다. 거의 다 정치적인 구호들이죠. 다시 말해 이들은 종교적 활동이 아닌 정치적 활동을 종교적 리더쉽하에 이루는 것이며, 단순히 종교적 이유로 방역을 거부하는 게 아니라 정치적 이유로 방역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즉, 정치적 동기와 종교적 조장에 선동된 거죠. 그냥 선동된 게 아닌 그게 세계관 자체이고 그 세계관에 합치되는 내용에 등떠밀고 부추겨진 것이기 때문에 거부감조차 없습니다. 스스로의 신념적인 행동인 셈이죠. 자생적이라는 말의 의미이고 산발적인 이유입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는 거죠. 단지 조직적이기에 그 실천이 적극적일 뿐입니다.



이들에게 가장 큰 문제는 교회와의 연결고리가 삶의 핵심을 차지하는 요소라는 겁니다. 그 비중이 너무 크다보니 단순히 소모임이나 회식, 활동 같은 거 하지 말라는 것조차 그들에겐 삶과 사회적 활동의 일부를 포기하라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에 거부감이 큰 거죠.


이런 모든 이유 때문에 정부의 지시와 방역지침을 개무시하고 반사회적인 활동을 반복하는 겁니다. 이미 신천지 때문에 한국 개신교회의 방역 적대 행위와 테러행위는 수차례 발생했습니다. 교회 자체가 돈과 관계된 이권이 상당하고, 그런 수익을 포기하기 어렵다보니 이런 시국에서도 계속 교회를 열려는 거고 수익 땡기려는 거거든요.


심지어 정치성향이 정반대에 문 정부를 아예 북한과 결탁한 세력으로 낙인 찍고 협의나 협조, 대화의 대상이 아닌 없애고 무너뜨려야할 적이란 관점으로 바라보니 대화가 안 통하죠. 이권부터 정치적 관계까지, 적대적인 게 너무 커서 말도 안 듣고, 도리어 정신병적 광신과 극우적 정치병이 합쳐져서 이 사태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한국에서 방역 취약점은 고령자, 극우보수, 종교입니다.


이 사태가 어떻게든 끝난다면 추후 필수목표는 단순 시스템만 잘 만들거나 만들어진 시스템 아무리 잘 굴려고 판데믹이나 그에 준하는 상황에서 전국적 감염병 발생시 방역을 무력화하는 정치사회적 취약점을 잡아내고 그에 대한 선제적이고 공격적 대응이 필요한 연구사례가 되지 싶습니다.


가령 방역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세력에 대한 초동적 조치나 집중적 감시와 관리, 방역이 뚫린 상황에 대한 즉각 대응체계의 수립 같은 것 말입니다. 



덧. 종교가 문제가 아니라 전체 개신교회 중 일부만 발생시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종교 시설 중 발생하는 문제 대부분이(알기론 전부가..) 교회라면 그게 종교의 문제라는 건 비약이되, 교회의 시스템이든 교인이든 어딘가에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심지어 발생한 이후 그들의 반사회적 활동과 동기는 종교적 리더쉽 내지는 상호관계를 기반으로 합니다. 카톡 등으로 정보를 공유하고 피해자 심리를 형성하며 어떤 태도나 대응을 해야할지 정하기도 합니다. 종교가 문제라면 지금까지 전 세계적으로 유지될 수는 없었겠죠. 하지만 교인과 신도들은 문제일 수 있습니다.

  1. 자유주의자라고 하기엔 너무 무책임하기 때문에 임의로 사용하는 용어입니다. 자유주의가 깊게 뿌리내린 유럽 등 서구 국가에서 자유라는 이름하에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움직임을 보이는 이들을 통칭합니다. 가령, 국가는 자신들의 자유를 통제해서는 안 되며 그에 대한 반발심리로 도리어 마스크 등 방역지침을 따르지 않고 밖에 나가서 사교 활동을 하는 이들처럼요.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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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근대화가 이루어지기 이전 각 마을, 고을 등에는 여러 계층과 집단에 의해 형성되는 지역 커뮤니티가 있었습니다. 고을처럼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곳이라면 직종이나 고을내에 구분되는 지역, 성별 등으로 구분되는 커뮤니티가 있었을 것이고, 작은 마을이라면 요즘으로 치자면 마을 회관 같은 곳, 마을마다 있는 정자 같이 사람들이 모이기 좋은 곳에 동네 사람들이 모이면서 소통이 이루어졌을 겁니다.


전근대라곤 해도 정보의 중요성을 모르진 않지요. 다만 필요한 정보의 종류와 용도가 달랐을 뿐이고요. 마을이 어떻게 돌아가고 농사가 잘 되는지, 어느 집 누구가 누구랑 무슨 일이 있었고 누구 집 소가 새끼를 얼마나 낳았는지, 윗 고을에 가봤던 김씨네가 하는 이야기들이나 간혹 들리는 장사꾼들의 딴 지역 이야기, 소금 가격이나 새로 부임한 고을 원님 소식, 나랏님들 이야기 등등..


작고 정체되어 발전이라곤 그리 없을진 모를 마을이지만 세상 돌아가는 걸 알고 필요한 정보를 가지고 있어야 꾸준히 생존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작은 사회 나름의 소속감과 안정감을 유지시켜주는 핵심 요소이기도 하고요. 서로가 서로의 정보를 공유하고 실용적으로 사용하거나 인간관계를 조정하기도 하고, 앞서 말했다시피 그 자체로 소속감과 안정감을 지속적으로 확인하기도 하죠.


이러한 지역 사회의 크고 작은 커뮤니티들은 지금도 전 세계에 존재합니다. 미국 중산층들은 여러 모임과 식사 초대, 파티, 아예 봉사활동이나 자경단 활동, 스포츠 등 여러 사회적 활동 등을 이루며 사회적 관계를 꾸준히 유지시킵니다. 그러한 사교적 활동은 간혹 과하다싶어서 그들에게 알게 모르게 왕따를 당하거나 기피되는 경우도 있으며 그런 이웃이나 지역 내의 사회활동에 참여하지 않으면 손가락질 받는 경우도 있다고 하죠.



이러한 커뮤니티의 해체는 사실 거의 모든 국가들이 크고 작게 겪는 일이긴 합니다. 산업혁명을 필두로 산업화, 근대화가 되가면서 기존의 농촌사회가 해체되며 도시로 상경하는 등 지역 발전과 인구 이동이 발생했죠.


한국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일제시기 근대화가 이루어지고 공장들이 세워지면서 농촌이 점점 해체가 되었고 농부에서 공장 노동자가 되는 등 농업 사회의 커뮤니티는 그 크기가 줄어들었습니다. 물론 도시의 근대적 학교나 일자리, 교회나 성당 따위에서 새롭게 커뮤니티가 형성되기도 했죠.


그리고 여기가 진짜 중요한데, 한국 전쟁이 터지고 나서 대규모 인구이동이 발생했죠. 이는 거의 기존 계급적 사회관과 세계관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갑오개혁으로 신분제가 없어졌다곤 하지만 여전히 적잖은 양반 집안은 양반 가문의 어르신이었고, 노비는 여전히 노비였습니다. 수많은 천민들이 신분제가 없어졌지만 그들에 대한 차별과 폭력은 거의 인종차별 수준으로 존재했었죠.


한국전쟁은 그러한 신분적 관념 또한 불 속에 소멸시켰습니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이리저리 움직이고 섞이고 하다보니 누가 누군지도 모르겠고 신분이나 계급 따위는 중요한 게 아니게 되었죠. 숨기면 알 방법도 없고.


근데 이 한국전쟁은 많은 것을 없앴지만 지역 사회의 커뮤니티 또한 없앴습니다. 사람들이 피난가고 정착하면서 너무 많이 섞였거든요. 같은 도 내에서라곤 해도 사는 지역이 달라지는 경우도 있었고.. 전쟁 이후 먹고 살기 위해 또 떠나거나 모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정보와 소식의 교류는 정말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된 거죠. 새롭게 재편된 질서와 재정립되어가는 사회 속에서 조금이라도 더 이익을 보려면, 이익이고 뭐고 생존하기 위해서라면 정보가 필요했습니다. 직장이나 학교에서 맺어지는 관계와 형성되는 커뮤니티도 있겠지만, 한계는 명확하죠.


옛날처럼 농부는 농부끼리, 상인은 상인끼리, 관료는 관료끼리 모여서 자기들이 속한 영역 내의 정보, 그 영역에서 필요한 정보만을 주고 받는 게 아니라 다른 여러 직종과 계층의 정보들이 필요해졌기 때문입니다. 작은 마을 수준도 아니고 변화와 발전이 빠른 도시이다보니 중심적 역할을 하는 커뮤니티가 꾸준히, 적당한 인구풀로 유지되기란 어려운 일이었죠.


여기서 교회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종교라는 소속감과 집단적 정체성을 제공해주고, 모일 공간과 소통할 장소를 제공해줬기 때문입니다. 직종이 다르고 집도 꽤 멀리 떨어져 있는데다, 나이도, 성별도 다 다른 이들이 신앙이라는 매개로 교회라는 장소로 모이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런 장소에서 농촌사회의 객채에서 산업도시의 주체가 되어 해맸던, 갈증에 시달리던 이들이 정보 교류와 사교에 매우 활발했다는 것 쯤은 알만한 일이지요.


정리하자면, 교회는 기존의 지역 커뮤니티가 해체된 이후의 근대화, 산업화된 사회에서 기존 커뮤니티 역할을 완벽하게, 혹은 그 이상으로 대체할 수 있는 창구가 되었다는 겁니다. 교회 자체가 지역 커뮤니티로 기능하게 된 것이지요. 이는 원래 유럽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던 역할이지만 말입니다.


그 덕에 교회는 쉽고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던 거고, 종교와 신앙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신실한 종교집단이라기 보단 세속적인 가치와 질서와 매우 가까운 형태를 보이기도 합니다. 때로는 전통 민간신앙과 섞여서 개신교라는 이름의 다른 무언가를 보는 기분이 들 때도 있곤 합니다.


신앙과 종교 그 자체를 이유로 교회에 간 것이 아니다보니 말입니다. 물론 신앙이 없는 것도 아니고 배워서 나쁠 것도 없으며, 그 내용이 사실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닌 것도 사실이죠. 시기적으로도 신이라는 초인에 기대고 싶은 거친 시대였기도 했고..


물론 안 좋은 영향이라면 충분히 성숙하지 못한, 중세나 왕정 수준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가진 이들과 전쟁 을 거치며 남쪽으로 내려오거나 친일 행적 때문에 문제가 될 소지가 있는 이들이 종교인으로 둔갑해서 사회적 영향력과 존경을 받기 위해 생존형 목사 따위가 된 이들의 기독교와 엮여서 마치 중세 기독교가 보여줬을 법한 악덕을 발생시키기도 했고.. 돈과 사람이 모이니 정치권력이 군침을 들이거나 아예 적극적으로 야합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돈 있고 영향력 있는 이들이 정치인, 법조인, 경찰 따위와 친해지려는 건 흔한 것처럼요. 혹은 본인 스스로 정치를 하기도 하거나.


한국 개신교가 가톨릭에 비해서 질적 관리가 안 되고 세속적이며 정치적인 경우도 많고 사실상 기업화된 사례도 있으며 여러 문제가 있고, 그런 문제가 있으면서도 여전히 세력이 거대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지 않나 싶습니다.


종교 그 자체를 위해 만들어지고 신앙을 위해 사람이 모였다기 보단 여러 이해관계가 엮이면서 형성된 것이 한국 개신교회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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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일뽕이라 불리는 이들이 실제 사회, 생활에서 어떠한 모습으로 살고, 어떠한 입장과 처지에 있는지는 개인마다 다 다를 것이고, 그렇기에 성급히 정의내릴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야기를 하기 위해 이 글에선 크게 두가지 범주로 나눠보려고 합니다.


하나는 한국 사회의 주류 정체성에 편입되지 못한 이들.

다른 하나는 한국 사회의 주류 정체성에 편입되지 않아도 되는(혹은, 않고자 하는) 이들.



그러나 먼저, 일뽕으로 한정 지었지만, 정체성이라는 건 언제나 한가지 뿐만은 아니고, 이러한 사례가 한국이 아닌 다른 국가에서, 그리고 일뽕이 아닌 다른 종류로 발생 가능하다는 것을 짚어야합니다. 따라서, 일뽕이라 한정지은 것은, 그것을 대표적 예시로 하고자 함이지 그것이 다가 아님을 알아야 하죠.


한 국가, 한 집단 내에서도 여러 정체성이 나뉘지만, 기본적으로 그러한 집단을 이룰 수 있는 거대하고 포괄적인 정체성이 있긴 합니다. 가령 우리가 한국인의 정체성을 가지는 것처럼요. 한국인이란 정체성을 이루는 여러 구성요소들이 있죠.


근데 가끔 이 정체성을 부정하거나, 편입되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말 많은 이유들이 있는데, 학교를 예시로 설명하자면, 엄청 잘나가는 애들이 있고, 평범한 애들이 있고, 그 평범한 애들 사이에도 끼지 못하는 애들이 있습니다.


편의상 각각 탑, 미드, 바텀이라는 간단하고 익숙한 개념으로 설명하자면, 일진이나 공부를 잘하면서도 집안 좋고 잘난 인싸들이 탑, 평범한 애들이 미드, 왕따 등 따돌림을 당하는 이들이나 특별히 친구로 지내지 않는 아싸가 바텀이라고 규정하겠습니다.


이중에서 가장 많은 건 미드 계층이고 학생이라는 집단의 주류 정체성에 해당하는 이들입니다. 좀 직관적으로 설명하자면, 흔히 '애들'이라고 하면 해당되는 이들이 이 계층이죠. 


탑 계층의 경우 인기가 많고, 영향력도 큽니다. 다만 역시 소수에 불과하죠. 먹이사슬의 최상위층이고 미드 계층은 이들을 동경하거나 두려워합니다.


바텀 계층은 모두가 싫어하거나 호감을 보이지 않고, 적극적으로 괴롭힘 당하거나 무시 당합니다. 친구가 없거나 자기들끼리만 어느 정도 알고 지내지만 그마저도 그리 적극적이지 않고 그들의 불행에 나서주지도 않습니다. 다시 말해 서로가 서로를 지켜줄 수 있는 집단은 아닙니다.


여기서 계층의 동경, 호감 등 방향성을 읽어낸다면 미드 계층은 탑 계층을 두려워하거나 동경합니다. 이는 사실 비슷한 개념이기 때문에 자기들이 탑 계층이 될 수 있다면(될 능력이 있다면) 기꺼이 되고자 하고, 그러한 탑 계층의 구성원과 알고 지내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반대로 바텀 계층에 대해선 혐오 내지는 무시를 받기 때문에 누구도 그 계층에 편입(추락)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같이 알고 지내고 싶어하지도 않고, 적극적으로 괴롭히거나 배척하기도 합니다.


현실 사회에도 이러한 구조는 어느 정도 적용이 되는데, 상류층과 중산층을 포함하는 서민 계층, 그 아래의 하위 저소득층이나 수급자 등등이 해당되죠.



한국에 존재하는 주류 정체성의 비중은 서민에 의해 형성된 것들이 많습니다. 근데 여기서 중요한 건, 탑 계층(상류층)은 그 아래로 떨어지기 싫어하고, 미드 계층(서민)은 바텀 계층으로 떨어지고 싶어하지 않다는 거죠. 그리고 하위 계층은 위로 올라가고 싶어하지만, 그럴만한 수단이나 능력 등등 부적합한 경우가 있으며, 집단으로 읽을 경우 그 이상으로 교육이나 재산, 빚 등등의 문제를 가진 경우도 있고요.



인터넷에서 보는, 가령 디씨 역갤 같은 곳에서 보였던 일뽕의 경우 실제로 한국이 못났고 일본이 우월하기 때문에 일뽕에 빠진 게 아닙니다. 그저 그들이 한국의 주류 정체성에 편입되지 못했기 때문에 반동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 뿐이죠.


사람은 집단에 소속되어야 하고, 개인으로서 존재하기 어렵습니다. 무엇이 되었든 집단 등 특정 정체성에 소속되길 바라고, 되도록 그게 자신의 자부심과 명예욕, 과시욕 등을 충족시켜주길 바라죠. 되도록 비교되고 우월하고자 합니다. SKY 대학생들이 하위 대학생들에 비해 더 큰 자부심과 명예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때때로 그걸 (적극적으로까진 아니더라도) 비교하며 과시하기도 한 것처럼요.


문제는 일뽕을 비롯한 하위 계층 중 주류 정체성에 편입되지 못한 이들이 새로운 정체성을 찾게 되는데, 주로 외부에서 찾게 되죠. 내부에서 자신이 소속될 수 없기도 하고, 소속될 가치가 없는 정체성을 거부하기도 하기 때문에요.


한국의 경우 가장 가깝고, 비슷하며, 이입하기 좋고, 정보를 얻기도 상대적으로 쉬우며, 무엇보다 한국보다 우월한 지위에 있고 지금도 어느 정도 그러한 위치에 있는 일본에 이입하는 겁니다. 즉, 한국의 주류 정체성에 편입되지 못하자 그에 대한 반동적 태도로 한국보다 우월한 일본의 정체성을 가지려 하는 거죠. 다시 말해 자존감의 문제입니다.


반드시 일본일 필요는 없습니다. 누군가는 일본일 수도 있고, 미국일 수도 있으며, 심지어 이해는 어렵겠지만 북한일 수도 있죠. 이 경우는 좀 드물긴 합니다만, 실제 종북 중 일부가 그러한 계층적 패배자이자 교육 수준이 낮고 심지어 정신적 문제도 있는 등의 경우가 있곤 하는 걸로 압니다. 정말, 아주 드물게요. 


얘넨 이석기 같은 부류와는 또 다릅니다. 자신을 핍박하고 잘 살지도 못하게 괴롭히는 한국은 밉지만 한민족을 배신할 순 없고, 그런 한민족을 핍박한 타 민족을 빨 수는 없으니 한국과 한국인들을 짓밟아줄 강력한 무력이나 정체성을 찾으니 그게 북한이었던 괴랄한 경우죠.


일뽕은 자기들이 한국인들보다 우월하고 그런 이유로 한국을 업신여깁니다. 왜냐면 자기들이 열등한 위치에 있으면서 주류 정체성에 편입되지 못하고 있거나, 그러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대신 자신의 위치를 남들이 무시하거나 조롱하기도 하고, 그게 아니더라도 본인 스스로 열등감을 가지기도 하죠.


그러니 외부 정체성으로 자신의 자존감을 채워야 했습니다. 위에서 열거한 일본인 이유가 있지만, 실은 거기에 하나를 더 추가해야 합니다. 매우 저열하고 말초적인 이유인데,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화한 경험이 있어서죠. 그러니 식민지배를 당한 후진국 한국과 한국인보다 정신적 일본인인 본인들이 훨씬 우월한 거고, 그 우월한 위치에서 한국인을 조롱하고 무시하는 겁니다.


날 병신으로 보는 한국인들을 원 없이 비웃고 조롱하고 공격하기 위해서요. 자존감을 회복하기 위한 방법 중 하나인 남을 공격하는 겁니다. 쓰러뜨리거나, 그러지 못한다면 꾸준히 자신보다 낮은 위치에 있음을 확인하고자(or 그렇게 믿고자) 깍아내리는 거죠.


학교의 찐따들이 평범함을 거부하고 일진 같은 잘나가는 애들을 도리어 증오하다시피 거부하는 이유는 그들이 별났나거나 일진 같은 애들을 엄청나게 증오하기 때문만은 아니고, 그러한 위치에 도달할 수 없기에 다른 정체성을 찾는 겁니다. 현실에서 쳐맞고 다니는 애들이 인터넷에선 여포이거나, 커뮤에 심각하게 빠져 중독되는 일이 발생하는 이유죠.


현실에서 주류 정체성에 편입되지 못하고, 스스로 그러한 정체성을 구성할 수 없으니 가상세계로 파고드는 겁니다.


미국 슬럼가 등 거리의 흑인 무리들이 백인 중산층이나 상류 엘리트를 무시하고 정부의 권위를 씹는 이유는 그러한 우월하고 안전한 정체성에 포함되기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다 봅니다. 심지어 될 가능성조차 없으니, '저 포도는 신 포도'인 셈이죠. 마찬가지로 사회의 찐따들이 한국인의 주류 정체성에 평범하게 편입될 수 없으니 외부 정체성을 가져오는 거고요.


ISIS가 한창 흥할 때 유럽에서 그러한 이념에 동화되거나 받아들이는 이들이 생기곤 했었죠. 실제 테러까지 이어지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지만, ISIS로 향하거나 하는 이들이 생기긴 했습니다. 심지어 한국에서도요. 이 또한 외부 정체성을 찾기 위함입니다.


이민자 1세대야 그렇다쳐도, 2세대 밑으로는 그곳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랐음에도 유럽의 주류 정체성에 편입되지 못하고 여전히 이민자, 무슬림, 그것도 테러나 저지르는 문제적 민족이라는 인식에 차별 당하고 공격 받으니 자신을 배척하는 유럽의 주류 정체성을 본인 스스로가 배척하고(내쫓긴 게 아니라 내 발로 나간 거다. 라는..) 대신 외부의 속시원한 정체성을 찾았던 겁니다. 그게 ISIS였던 거고요.



뭐.. 여기까진 차별 받거나 열등감이 있는 하위 계층에 대한 거고..


맨 위에서 말했던 한국 사회의 주류 정체성에 편입되지 않아도 되는(혹은, 않고자 하는) 이들. 에 해당하는 이들은.. 쉽게 말해서 정몽준 아들 같은 케이스입니다. 워낙 잘 살고 남들 머리 위에 있는 천상계의 상류층이다보니 그 아래에 있는 이들과 다르다는 거죠. 쉽게 말해 난 너희와 달라. 이겁니다. 


미드 계층이 바텀 계층과 동일시 되기 싫어하고, 그들과 아예 같이 있는 걸 배척하기도 하는 것처럼, 상류층은 그 하위 계층과 적극적으로 어울리진 않죠. 아예 무시하는 건 아니더라도. 하지만 탑 계층에 있던 이가 그 하위 계층과 동일시 되면 기분은 나쁠 수 있습니다. 계층 정체성에 위기감을 느낀다면 아예 손절해버리기도 하고요.


하도 잘나고 잘살고 있으니 아득아득 사는 이들이 천박해보이고 그런 천한 서민과 동일시 되기 싫다 이겁니다. 같은 한국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남들과는 다르다는 엘리트 의식, 선민사상. 이런 의식이 주류 정체성은 아니죠. 얘네가 일뽕 같은 것에 빠진다면 프랑스어를 쓰던 러시아 왕족, 한자를 쓰던 양반 계층처럼 서민보다 우월하다는 우월주의 때문이지 주류 사회, 주류 정체성에 편입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겉으로는 잘나가고 잘 사는 그들을 서민은 동경하거나 부러워하죠. 단지 그런 차이일 뿐입니다. 뭐 이런 우월주의나 선민사상 같은 거야 상류층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거긴 합니다. 하위 계층에서 볼 수 있는 열등감과 자존감 문제로 외부 정체성을 끌어오는 것도 특별한 일은 아니라고 보고요. 모든 이들이 그렇지는 않을 뿐.


이러한 문제는 단지 그 뿐만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ISIS의 정체성을 받아들인 이들이 그렇듯, 반사회적 문제로 이어지기도 한다는 겁니다. 원래 소득이나 교육 수준이 낮을수록 범죄율이 높다고는 하지만, 이 사회의 정체성이 아니고, 다른 사회의 정체성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러한 간극에서 반사회적인 행위가 나타나기 쉽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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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문제는 별 거 아닙니다.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니죠. 다만, 이 문제는 비판하려면 할 수 있지만 동시에 그냥 넘어가도 무방한 사안이 아닌가 한다는 거죠.



먼저, 어느 장소든 드레스코드는 존재합니다. 학교부터 장례식장, 심지어 일부 직장마저도 드레스코드를 지킬 것을 요구합니다. 시간과 장소에 맞는 옷을 입는 건 동서양을 가리지 않는 예의고요. 이에 국회 또한 예외일 수는 없고, 국민의 대표로서 일하는 자리이기 때문에 그러한 드레스코드는 단순 엄숙주의가 아닌 국민에 대한 예의이기도 하죠.


하지만 반면, 지나치게 선정적이거나 폭력적 의미가 담긴 옷 따위가 아니라면 굳이 옷을 가지고 뭐라고 하는 것도 지나친 엄숙주의일 수 있습니다. 국회가 존중과 예의가 필요한 곳이라지만 지나친 엄숙주의 또한 권위주의의 상징이고 국회가 그렇게 엄숙하고 엄격한 드레스코드가 필요한 장소인가에 대해 명확한 합의가 있는 것도 아니죠.


마찬가지로 일반 국민들은 저 정도 복장으로 어느 정도 격식을 차리는 곳에 자유롭게 나가는 편입니다. 물론 장례식장이면 무례한 건 맞지만, 국회가 장례식장은 아니죠. 장례식장만큼 처참한 일이 종종 벌어지는 곳이기는 하다만..



개인적으로 국회가 너무 난잡해지지만 않는다면 여러 다양성이 함께하는 자리여서 나쁠 건 없다고 보기도 하고요.



전례가 없는 것도 아니긴 합니다만.. 류호정 건과는 약간 차이가 있긴 합니다. 강기갑의 한복 같은 경우 당시 우리 지지자들은 비싼 정장 쉽게 입지 못하니 그 대표인 우리가 정장을 사입는 건 위선이다 라면서, 또한 자타가 공인하는 농민계층의 대표로 그러한 상징성을 위해서라도 한복을 입었죠.


더불어 유시민도 권위주의를 타파하기 위해서 넥타이 안 하고 하얀색 단색바지를 입고 갔습니다. 이것도 국회의 금기라고 해야하나, 그런 걸 깬 거고 당시에도 논란이 좀 있긴 했습니다만, 사실 넥타이 안 하기는 90년대 후반부터 청년들 사이에서 퍼져나가던 양식이었꼬, 백바지도 세미포멀 스타일에서 흔히 이던 재질의 바지만 색만 다른 걸로 입은 겁니다.


당시 유시민에 대한 비판 여론은 주로 장년층이었고, 젊은 청년층에서는 오히려 호평이었다고 하죠. 



다만 이들이 류호정과 다른 부분은, 유시민은 사전에 인터뷰를 하면서 이렇게 입고갈 것이다 하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그대로 실천한 거고 정장이라는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도 않은 채로 국회의 탈권위를 위한 퍼포먼스였죠.


류호정 같은 경우 청년 국회의원 모임에서 밝혔다고 하는데, 솔직히 그건 누가 알아줍니까? 국민에게 밝히는 게 아니라 동료 국회의원들에게 밝히는 건 그냥 자기들끼리 친목하는 자리에서 나 이렇게 입고갈 거야 하는 것 뿐인데, 무책임한 태도죠.



류호정의 이번 원피스는 그런 면에서 문제가 됩니다. 옷입는 거 가지고 뭐라고 하긴 뭐하지만, 안 까일 수는 없고 까려면 또 깔 수는 있는 그런 거죠. 이건 류호정이 정당하기 때문이라기 보단 그러한 것을 정당함의 범위로 인정해주는, 바라봐주는 사람들의 관용에 달린 일이거든요.



왜냐하면, 내 복장이 상대에 대한 예의냐 아니냐는 입는 내가 아니라 보는 사람이 결정하는 거기 때문입니다. 사소한 것이라도 협의 과정이 필요한 자리는 분명히 있고요. 국회는 입법기관이고, 국회의원 개개인 또한 입법기관입니다. 이들은 국가라는 개념을 이루는 일부에 속할 정도로 중요성과 대표성이 큰 위치이고요.


류호정은 그 과정을 매우 의도적으로 무시한 건데, 사전 인터뷰를 한 것도 아니고 동료와의 친목 중에 밝힌 것일 뿐입니다. 그저 난 말했다. 말 했으니 문제 없다. 이런 태도라고 보지 않을 수 없죠. 심지어 지난 맹인안내견 같은 필수적인 부분도 미통당에선 뭐라고 말했죠? 국회 관행을 변경해야 한다고 인터뷰에서 밝히고 들어갔죠.


심지어 맹인안내견은 정파와 무관하게 반대할 이유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되는 일이었고요. 류호정은 이런 과정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관심 받기 위한 쇼라고 보는 거고, 그마저도 매우 무책임하고 무례한 태도이죠.



이는 그 인간 개인의 인성이 아직 어른이 못 됐다고, 사회성이 덜 여물었다고 봅니다. 정상적인 사람이면 롤 대리로 회사들어가지도 않고, 그걸 들켜서 짤렸을 때 억울해하지도 않으며, 그런 자신의 과오와 잘못을 무시하고 얼굴 뻣뻣이 들고 다니지도 않습니다. 그건 당당한 게 아니라 뻔뻔한 거죠.


이번 논란에서 류호정의 가장 큰 문제는, 태도 문제입니다. 자신이 하는 건 무오한 거고 무결한 것이며 나를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꼰대거나 한남일 뿐이라는 태도. 자신에 대한 비판을 무의미한 성대결로 몰고갔다는 겁니다. 본인의 몰상식과 무례함, 관심 받고자 하는 비대한 에고에서 비롯된 문제를 타인에 대한 공격으로 벗어나려고 한다는 거죠.


이건 과거 신한국당, 한나라당 등 시절 수준 낮은 인물들이 논란만 터졌다하면 자신을 비판하는 세력을 빨갱이, 종북, 진보 꾼세력에 선동당한 무리로 몰고가던 것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습니다.



류호정이 갑자기 국민들에게 밝히지도 않고 원피스를 입고간 이유는 너무나도 뻔합니다. 그냥 어그로를 끌기 위해서죠. 단지 어그로로 끌면서 관심 좀 받겠다는 게 아니라, 국회의 엄숙주의, 권위주의를 용감하게 타파하고 맞서 싸우는 당당한 여성이라는 이미지를 얻고, 좀 더 노골적으로는 그런 걸로 칭찬 좀 듣겠다고 하는 게죠. 난 남들과는 달라라는 중2병적 멘탈리티로요.


옷을 뭘 입었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국민들에게 밝히지도 않고 자기들 친목질 자리에서 밝히고는 그냥 들어와놓고 비판 받으니 반성이나 수용은커녕 되려 성대결로 몰고가고 있죠.


류호정이 비판을 받고 욕을 먹는 게 이런 부분입니다. 성희롱들이야 문제가 되는 건 맞지만, 그것과 별개로 자신에 대한 비판을 듣지 않겠다는 여기저기서 흔히 보던 무책임한 아몰랑 니가 잘못한 거야 태도가 문제인 거죠. 그러니, 관종에겐 무관심이 답인 거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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