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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며,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 - E.Kant
by Ko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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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이야기'에 해당되는 글 598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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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3.08.14
    로마가 위대한 이유 2
  3. 2013.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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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13.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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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13.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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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국가적 번역 기관이 필요하기에 앞서 전제되야할 조건은 인문학에 대한 인식 개선이 맞을 겁니다. 한국은 인문학의 지옥이라고 보며 철학이나 역사학보다는 더 쓸모있는 기술이나 경영학과 같은 실제로 어딘가 써먹을 수 있는 것들을 더 중시하고 그렇지 못한 학문은 아예 신경도 안 쓰고 관심도 없으며 더욱이 지원 조차 없는 것이 현실이니까요.


어찌됬든 국가적 번역 기관이 필요하다는 이유는 한국의 지적 환경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입니다. 이전 글들에서도 몇번 주장했다시피 학문적 정보는 물론 일반 교양도서에까지 그 양적인 환경이 열악합니다. 세계의 거의 모든 정보는 영어로 기록되기 마련인데, 하루가 다르게 발전해가는 세상에서 이러한 정보에 발 맞춰 걷지 못한다면 그것은 도태된다는 의미이죠.


교양도서가 되었든 전문서적이 되었든 정보가 빵빵해야 뭘 공부하든 발전할 토양이 생기든 하는데 그러지 못한다는 것이 의미하는건 언제나 2류, 3류에 남아있게 된다는 겁니다. 논문도 마찬가지죠, 한국 학계가 일본 학계를 뛰어넘지 못하는 이유는 인문학이 무시당하는 것도 있지만 학문적 토양이 좁다는 것 또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타국의 논문을 번역해서 학자, 교수들도 공부를 해야하는데 그러기가 어렵다는 겁니다. 물론 원서로 읽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되면 영어 능력이 모자라는 사람들.. 특히 대학생이나 대학원생들은 더욱 힘이 들겠죠.



한국의 번역 환경은 '김우열' 저자의 <나도 번역한번 해볼까>라는 책에서 어느 정도 다루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번역가로 활동하기 위해선 어떠한 길이 없고 그저 어떤 방식으로든 탁월한 번역실력을 기르고 출판사와 계약을 맺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 공부해야하는 방법이 딱히 정해져 있지도 않고, 관련 정보를 얻기도 쉽지 않으며 실력이 있다고 해서 쉽게 일을 맡을 수도 없다고 합니다. 특히 선배 번역가나 출판업계와의 연줄이 없으면 더 어렵다고도 하더군요.



일본에는 번역만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국가 기관이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번역하는 수많은 정보들은 모두 일본의 지적 환경을 이루겠죠. 타국의 국가 공문서, 책, 논문 등등.. 이러한 정보는 곧 힘이 되는 것이고 국가적 역량이 되며, 정보의 차이로 인해 외교전략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러한 번역의 필요성은 모두 이해하시리라 믿습니다.


단지 학문적인 발전만을 위한 번역이 아니라 정치적, 외교적, 지적인 발전을 위해서 국가적 번역기관의 존재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전문 번역가를 양성함에 따라 한국 번역환경에 희소식을 들려주고 또한 일거리 창출이 되며 여러 분야에 도움이 될 수 있을테지요.


무엇보다 한국의 영어 교육이 말하기 위함이 읽고 해석하기 위함인데 제대로 써먹을 곳이 없으면 아쉽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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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고대사에서 하나의 본좌로 여겨지는 대제국이었던 로마. 그 로마에 대한 수식어로 위대한이라는 단어가 붙는데, 그 로마가 위대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그 드넓은 영토와 도로? 강대한 군사력? 정치체제? 사회문화?


사실 로마가 진정 위대한 이유는 바로 법률에 있습니다. 


만민법과 시민법은 로마의 전국적인 법률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게 현대 국제법의 조상이라고 할 수 있죠. 사실 법학이라는게 꽤 오랜 전통을 가진 학문이고, 이 법학이야말로 로마의 진정한 유산이라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전국적인 법이라는 개념이 사실 국왕과 같은 통치자의 명령이 곧 법이었던 것이 근대 이전의 일반적인 예시였고, 지역이나 시대를 불문하고 국왕같은 통치자의 명령이나 칙령은 그 자체로 거진 전국적인 법이라고 할 수 있었죠. 


그렇다고 명령과 같은 불문법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암흑시대 게르만 왕국시대부터 게르만인들은 성문화된 자기 부족의 법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 법전은 암흑시대 게르만 전통 부족 관습법과 로마법을 토대로 만들어졌죠. 법이라는 게 통치의 근간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리 허술하더라도 시대나 지역을 구분짓지 않고 통치라는 것이 이루어지는 모든 곳에서 존재하기 마련이죠.


그런데 재밌는 건, 중세의 봉건시대같은 경우 봉건제도의 특성상 통일된 전국적인 법이 나타나지 못했던 시기였습니다. 동로마는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이 있었지만, 비교적 강한 중앙집권화를 보여줬던 프랑크 제국이 있었을 때까진 전국적 영향력을 지닌 살리카 법과 법원이 존재했으나 그 프랑크 제국이 무너지고 현재의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에 해당되는 지역의 3개의 국가로 쪼개지기 시작하며 전국적인 법이라는 개념은 사라지고 지역에 따라 법이 집행되던 시기였죠. 중세가 끝나고 봉건제가 약화되면서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지는 시기부터 다시 전국적인 법 개념이 등장하게 되는데, 중세 말기와 르네상스 시기를 거쳐 절대왕정이 형성되는 시기에 강력한 왕권을 가진 국왕은 그들의 강한 권력을 확립시키고 굳히기 위해 대대적으로, 전국적으로 통용이 될 법이 필요해졌습니다.


그런 법을 만들기 위해 찾은 것이 바로 고대의 로마법인데, 한마디로 고대의 로마제국의 법을 가져와서 자기네 방식으로 고친 뒤 적용하겠다는 겁니다. 이게 그 로마법 계수라는 것이죠. 이 로마법 계수를 통해 봉건적인 요소들이 사라지고 절대주의가 성립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더불어 이때 사용된 로마법이 바로 유스티니아누스의 로마법 대전이었습니다. 그래서 유스티니아누스의 로마법 대전 편찬이 그의 업적에서 가장 대단한 것으로 꼽히는 이유라고 합니다.


로마법의 계수는 15세기~19세기까지 지속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법학계에선 근세 전기의 계수는 전기계수, 18세기 이후의 계수를 후기계수라고 부르는데, 시민 혁명과 민족국가, 근대국가가 성립되며 18~19세기에 본격적으로 근대적인 법적편찬운동이 시작됩니다. 나폴레옹 몰락 이후 1871년 프로이센의 독일제국이 성립함과 동시에 독일의 통일법전이 편찬되기 시작하는데 이것이 바로 오늘날 대륙법계 국가들의 민법전의 기초라고 할 수 있죠. 그리고 이 (아직은 미완성이었던 독일의)법과 프랑스 민법전을 일본에서 수입하여 자기네 민법전으로 삼고 이후 우리나라는 완성된 독일의 민법과 일본의 민법을 수입하여 우리나라의 민법을 만듭니다.


이를 연속적으로 보게 될 시 현재 거의 전세계 법률은 로마에서부터 시작되는 건데, 현재도 이 로마법의 영향을 짙게 가지고 있는 것이 우리가 사용하는 법들입니다. 로마가 망한지 500년, 길게는 천년이나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로마의 법은 근대를 넘어 현대의 지금 시대까지 그 영향이 진하게 남아있다는 것을 본다면, 괜히 로마가 위대하다는 소리를 듣는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실 겁니다. 단지 영토가 넓고 강한 군사력을 지녔고 멋지고 웅장한 건물을 지었다고 위대한 것이 아니라, 후대의 수많은 민족, 국가에게 강렬한 영향을 끊임없이 미칠 수 있게 하는게 진짜 위대한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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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 일본, 프랑스, 미국, 러시아 등 세계에서 내노라할 열강들에 의해 조선이라는 국가가 이리저리 휘둘리고 공격받고 약탈당하는 상황에서 국가의 안위 자체가 커다란 화두로 떠버렸고 이에 대한 조선의 지식인과 일반 백성들 또한 걱정했던 것이, 몇십년 뒤에는 실질적인 위협으로 다가와 결국 1905년 을사조약, 1910년 한일합방이라는 초굴욕을 당하며 힘이 없으면 당한다는 제국주의의 진리를 직접 겪었죠.


그런 상황에서 조선의 지식인들은 이러한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하나의 사상에 의지했는데, 그 사상이 무엇인고 하니 바로 민족주의라는 것입니다. 조선의 백성들이, 대한제국의 백성들이 뜻을 모아 하나로 뭉쳐 수천만 한민족이라는 긍지를 가지고 대항하고 싸워나간다면 다시 조국을 되찾고 영광스런 역사를 다시 쓸 수 있다라는 것이죠.


이를 정리하자면, 조선-한국의 민족주의는 태생부터 '생존'을 위해 대두되고 발전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생존지향적 민족주의는 매우 배타적이게 마련인데, 주로 일본에 대한 배타성을 짙게 드러내었지요.



광복 이후 한국의 민족주의는 쉽사리 사라질리가 없었는데, 이는 하나의 이데올로기이자 프로파간다 형식으로 국가 주도하에 이용된 측면이 존재합니다. 일본에 의한 식민지에 대한 트라우마를 자극하며, 일본이라는 발전된 국가에 대한 열등감을 부채질하며 (경제적인 측면에서의) 생존과, 발전을 지향하며 이용되었죠. 물론 그 자체로 일본이라는 원수를 까야할 이유는 분명 존재했고, 민족주의가 잘 뿌리내린 마당에 그걸 다시 뽑을 수도 없었던 것도 사실이었지만요.


민족주의라는 것이 민족이라는 자부심이 '남과 다른 고유성'에 기반을 두고 있는 만큼, 피아의 구분과 자타의 구분이 공격적인 성격을 띄기 시작하면서 적극적인 배타성, 오만한 우월의식, 민족과 국가, 역사를 지나치게 높히고 찬양하는 식의 자만심으로 변질되기 시작하는 시점이 언젠가는 나타나기 마련인데, 우리는 이것을 이미 겪었습니다. 


역사 교과서, 역사 교육은 민족주의적이기 짝이 없고 학계 또한 마찬가지였죠, 학교에서는 '국기에 대한 경례'를 민족주의-국가주의적 정체성을 주입시켰죠. 노골적으로 표현하자면 '세뇌'. 민족주의적인 사회상과 교육은 민족주의라는 프레임을 극복하기 어려운 환경이었고 문화에서도 일본 애니메이션을 수입하면서도 인명이나 지명에서 왜색이 느껴진다며 수입이 금지되는 작품도 많았고, 수입이 되면 죄다 한국식 이름, 지명으로 바꿔댔습니다.



사실 이러한 민족주의가 조금씩 걷혀져가는 원인은 크게 두가지가 있는데, 국가에 대한 충성을 맹목적으로 교육시키던 독재에서 벗어나며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민주주의가 조금씩 사회로 뻣어나가는 시절이었던 90년대의 조금 더 자유로워진 사회상과 그에 비롯된 적극적인 일본 문화의 수입, 그리고 기술의 발전으로 컴퓨터가 보급되고 인터넷을 막을 수가 없으니 좋든 실든 개방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 그러합니다. 물론 90년대엔 일본 만화 보려면 해적판으로 봐야했고 애니메이션도 암시장을 통해 구해야 했죠. 일본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입하게 된 건 조금 뒤의 이야기.


이러한 변화로 인해 민족주의 물을 덜 먹은 사람이나, 그것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민족주의라는 것에 대해 고찰하고 의심하게 되는데, 과연 민족주의라는 것이 필요한 것인가, 옳은 것인가, 이것에서 비롯된 각종 문제나 선입견 등은 무엇이 되는가 등등을 생각해 볼 수 있었죠.



세계화, 국제화라는 것은 여러 인종과 여러 민족과 좀 더 직접적으로 교류를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뜻하는데, 당연하지만 이런 환경에서 민족주의는 고리타분하고 그들과의 교류, 배움에 있어서 방해되는 것이라고 봅니다. 이미 배타적이고 스스로를 높히는 민족주의인데, 현재 한국을 찾아오는 외국인들이 많아졌음에도 이들을 앞에 두고 이러한 민족주의적 태도를 고집하며 행동하는 것은 다름 아닌 인종차별로 비추어질 가능성이 크며, 이는 세계화-국제화의 시대에 있어서 커다란 마이너스 요인이기도 합니다.


단지 다른 나라 사람.. 타인종, 타민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차별을 받는 것을 좋아할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특히나 나치라는 트라우마를 안고 있는, 세계 대부분의 선진국이 모여있는 북미와 유럽에서는 정말 싫어할 요소이죠.



따라서 현재 대한민국에게 필요한 것은 민족주의를 탈피, 극복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탈민족주의를 지향하자는 것이죠. 이미 민족주의라는 것을 통해 여러가지 부정적인 것을 목도하였고 이제는 그것에서 벗어날 차례입니다. 진정 세계속에 뛰어들길 원한다면 세계를 포용해야하듯이 그러려면 자신을 민족이라는 가치에 묶어두는 쐐기를 먼저 뽑아야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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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국을 바라봄에 있어서 국민감정이라는 것이 십분 발휘되고 주로 그러한 감정은 역사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전쟁, 식민지, 약탈, 학살 등등 오랜시간 서로 붙어있으면서 전쟁 한번 안 터진 국가가 있을까 싶습니다만 어찌됬든 붙어있는 국가일 경우 대체로 사이가 좋지 많은 않은게 많은 나라들의 공통점이라면 공통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같습니다.


이는 동아시아에서도 예외가 아닌데, 아니 오히려 동아시아는 이러한 관계의 극을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까 싶습니다. 한국와 중국, 일본의 관계는 서로 까고 까이는 관계라고 할 수 있죠.


최근 어느 카페에 쓴 글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겪은 일들이 몇 있죠. 일본 사이트에서 쓴 소설인지 실화인지 잘 모르겠지만, 정말 감동적이고 가슴 아픈 짧은 소설이 번역된 글이었습니다. 전 그것을 보고 실화인지 아닌진 몰라도 일본이 정말 이런 이야기는 잘 만들어 내는구나라고 생각했죠. 실제로 무서운 괴담(공포소설이라고 해야하나..) 같은 이야기들도 일본쪽에서 많이 생성되고 훌륭한 작품들이나 재밌는 작품들이 많으니까요.


그렇게 그런 감동적인 자료를 보고 이런 댓글이 달리덥니다.


"좋은 글인데 쪽바리라 짜증"

"동감, 쪽바리라 더 X같음"


물론 반대되는 댓글도 달리긴 했습니다만, 정말 맹목적인 혐오감, 적대감이라는 생각이 확 들더군요.


중국의 경우도 마찬가집니다. 현재 중국이 발전해가는 와중이고 그렇기 때문에 발전한 곳은 매우 발전되있지만 그렇지 않은 곳도 많고, 사회의 의식수준이나 행태 등 속칭 대륙의 기상이라며 비꼬고 웃지만 실제로 중국은 한국보다 강한 나라임에 결코 부정할 수 없는 강대국이죠. 단적으로 핵무기가 있기도 하고..


이런 중국에 대해 여전히 후진국으로 보며 중국이나 중국인을 맹목적으로 까는건 일본의 사례와 다를바 없죠. 중국이나 일본의 인정할 점은 분명히 존재하고, 그것을 넘어 분명 배울 점 또한 분명히 존재합니다. 개인대 개인이라면 존경하거나, 그렇지는 못할지언정 분명 인간적이고 착한 사람도 있을 것이구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이나 일본, 중국인이나 일본인을 깔보며 욕하는 것은 어느 면에선 열등감의 발로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죠. 무시하지 못할 부러움은 깊은 추종으로 이어지거나 반대로 가치를 깍아내려 자신의 수준이나 그 이하로 만들려고 하는게 사람 마음이니까요.


뭐, 저들이 한 짓이 있어서 개객끼라 개객끼라고 욕한다고 할 수 도 있겠습니다만, 정말 말도 안되는 부분에서까지 그런 혐오감을 드러내는 것은 맹목적이다라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중국이나 일본과 관련된 소식, 혹은 그들과 연관된 글에서까지 뜬금없을 만치 혐오감, 적대감을 드러내며 힐난하는 자세를 맹목적이다라고 하지 않는다면 어떤 단어를 찾아야 할지요.


이런 국민감정은 역사에서도 비롯되지만, 가장 큰 원인이라면 역시 민족주의겠죠. 한국은 이러한 민족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고, 2000년대 들어서 점차 수그러드는 추세라고는 하지만 여전히 이러한 영향은 남아있고 우의 좋은 글인데 쪽바리라 짜증난다니 하는 반응은 민족주의에서 기반된, 민족주의적 태도에서 기인했다고 봐야할 겁니다. 


그래서 민족주의가 나쁘냐고 한다면 나쁜 것은 아니지요, 다만 필요없다고 할 겁니다. 왜냐하면.. 정말 필요없기 때문이죠. 민족주의 내지는 국수주의라는 것에 인해 국제화시대에 타국과 많은 문화적, 사회적 교류가 잦은데 민족주의에 찌든 태도를 보여준다면 인종차별주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타국에 대한 정당한 비판은 용인되어 마땅합니다. 예컨데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해서는 분노해도 되고 비판해도 되죠. 일본의 역사인식과 방사능 문제에 대해서 분노해도 되고 비판을 해도 됩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분노에 이성적 판단이 뭉개져 아무때나 일본, 중국을 까대며 그들 자체를 하나의 개객끼들 내지는 더 나아가 악 따위로 치부한다면 그건 정당한 비판도 뭣도 아닌 그저 맹목적인 적대, 혐오 감정일 뿐이죠. 우리를 분노하게 했다고 모든 이유로 그들을 까는 것은 찌질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라고 봅니다.


그들을 까고 비난하고, 싫어하며 혐오하고 적대하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하게 생각되는 분이 있다면 잘 생각해보세요, 그들을 우리가 비판하거나, 비난해야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말입니다. 싫어하는 이유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봐야 정당하게 비판할 수 있으니까요.


저 또한 한때 일본을 굉장히 싫어했고 일본은 = 쪽바리 등식이 머리속에 있었습니다. 사실 90년대와 그 이전 세대라면 다들 공감하실 겁니다. 이러한 등식이 만들어졌던 이유는 민족주의적 교육과 그런 사회상 덕분이었겠지요. 이유는 모르지만, 혹은 그 이유를 피상적으로 알지만 어째서 그들을 까야하는지에 대한 성찰은 부족했던 시절.. TV에서든 어디에서든 반일감정을 조장하는 것들이 많았죠. 독도 관련 다큐멘터리라던가 하는 것들..


주변국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민족주의가 필요없다고 생각됩니다만 그 이상으로 세계화, 국제화 시대인 현 시점에서 민족주의는 발전을 막는 쐐기와 같다고 봅니다. 이젠 탈피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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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부터 내려져오는 전설이나 신화에는 어떠한 교훈이나 혹은 통찰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신비하고 흥미롭고, 또한 재미있는 이야기였기 때문에, 종교나 민족과 관련된 이유에서 현재까지 내려져오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작지만 분명 교훈을 남겨주는 이야기라고는 생각합니다.


이는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프로메테우스와 에피메테우스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죠.


프로메테우스, 먼저 보는 사람,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가진 이름입니다. 그 이름대로 프로메테우스는 매우 영리하고 현명했던 티탄이었죠. 제우스와 그의 형제자매에 의해 티탄족의 시대가 끝나고 올림푸스 신들의 시대가 열렸을때 프로메테우스는 가장 인간을 사랑했던 신이었죠.


인간과 신이 갈라서게 되어 신들과 인간이 각각 소의 어느 부위를 먹을 지 선택하는 일이 있었을때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지방으로 쓸모없는 뼈를 두르고 가죽으로 살코기를 덮도록 해 제우스에게 어느 것을 먹을지 선택하라고 했죠. 제우스가 그의 꾀에 넘어가지는 않았지만, 화를 속으로 삭히면서 뼈가 들어있는 쪽을 선택했습니다.(그리고 그에 대한 대가로 인간들에게서 불을 빼앗아 버리죠.)


또한 프로메테우스는 인간들을 위해 불을 훔쳐냈습니다. 이야기에 따라 다르지만 태양의 신이었던 헬리오스의 마차에서 불을 훔쳤다고도, 혹은 헤파이스토스의 대장간에서 불을 훔쳤다고도 하죠. 그리고 그는 코카서스의 바위산에 묶인 채 매일 제우스의 독수리에게 간을 쪼여먹히는 벌을 받게 됩니다. 그는 죽지 않기 때문에 간은 하루만 지나면 다시 복구되었고 그렇게 매일같이 같은 고통을 느껴야만 했죠.



제가 보는 프로메테우스는 그 이름답게 선각자, 현자인 인간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권력에 타락하지 않은 진정한 지식인은 일반인보다 더 넓은 시야로 세상을 보고 분석한 뒤 민중을 위해, 사람을 위해 자신의 소신껏 행동하지요. 신들이 권력자라면 프로메테우스는 민중의 편이었던, 민중을, 사람을 사랑했던 지식인이었을 겁니다. 권력자에 맞서 민중에게 고기를 선물했고, 권력자에 대항해서 감히 자신이 끔찍한 벌을 받을 지도 모르는 위험을 무릅쓰고 불을 훔쳐 인간들에게 선물했지요.


그렇지만 권력자를 기만하고 권위이자 권력인 동시에 힘이었던 불을 훔쳐 인간에게 건내준 프로메테우스는 벌을 받았습니다. 권력에 항거하고 불의를 두고보지 못하는 이가 권력에 대항하다 고통을 받게 된 것이죠. 마치 일제에 저항했던 독립운동가처럼, 독재에 항거했던 민주화운동가들과 수많은 지식인들처럼 말입니다. 잘못된 것들은 너무나도 많고, 그것에 일일히 저항하고 옳은 것을 이야기했다는 이유로 매일같이 간을 뜯어먹히는 프로메테우스처럼 고통받는 지식인들을 프로메테우스라는 신으로 표현할 것이 아닐까요?


인간들을 위해 선물해준 살코기가 무엇을 뜻하는지, 불이 무엇을 뜻하는지 어설프게 해석하며 장광설을 펴고 싶지는 않군요..



에피메테우스, 프로메테우스의 동생으로 이름의 의미는 나중에 생각하는 자입니다.


에피메테우스는 그 이름답게 형에 비해 어리석은 존재로 나오는데, 신들이 선물한 최초의 여자인 판도라를 아내로 맞았습니다. 프로메테우스는 선각자답게 제우스와 그 선물인 판도라를 조심하라고 경고했지요. 그렇지만 에피메테우스는 형의 충고를 무시하고 아름다운 판도라를 자신의 부인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판도라는 에피메테우스의 집에 있었던 만물에게 재능을 부여하고 남은, 필요 없는 것, 온갖 나쁜 것들을 담아놓은 상자가 있었는데, 호기심에 못이긴 판도라가 어느날 그 상자를 열어 버리고 말았죠.


인간에게 불행을 가져다줄 수많은 것들이 세상에 풀리게 되었고 그 때부터 인간의 모든 질병과 불행들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상자에 마지막으로 남았던 유일한 것은 바로 희망이었죠. 희망은 나중에서나 나오게 되지만, 결국 판도라가 연 상자 덕에 세상은 한번 멸망하고 맙니다. 만약 나중에 생각하는 자가 그 이름답지 않게 행동했다면 이런 불행도 찾아오지 않았겠지요.



에피메테우스는 우리들 일반인, 일반 민중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언제나 앞을 볼 줄 모르고, 영리하지 못하며 언제나 미련하게 행동하죠. 한번 겪은 일을 다신 반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해도 어느새 똑같은 일을 당하고 있는 이들, 아무 생각 없이 말하고 행동하며 그로 인해 결국은 후회하게 되는 어리석은 이들, 종국에는 세상을 멸망시키는 엄청난 일을 일으키는.. 일으킬 요소를 만들어놓은 힘을 지닌 이들. 바로 우리와 같은 보통 사람이자 대중들을 의미하는 것이겠죠.


세상에 널리고 널린게 바로 에피메테우스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생각하기 때문에 후회하고 어리석다 자각할 수많은 일들을 겪고 또 격겠죠. 판도라에 의해 상자는 열렸지만, 그 판도라를 아내로 맞은 것이 에피메테우스이기 때문에 세상을 멸망시켰던 것은 어쩌면 에피메테우스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어떻게 에피메테우스가 그렇게 커다란 사건을 일으킬 수 있었는지 생각해본다면, 우리들에게 있어서 커다란 충격이자 사건이었던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과 같은 거대한 사건들은 그러한 어리석은 자들이 세상에 너무나도 많았기 때문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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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현상인지 나쁜 현상인지의 구분없이 어떤 현상이 생겼을때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많은 방법과 의견들이 생기기 마련인데, 현상이 어느 하나의 이유만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각각의 현상을 설명하는 의견들은 어느 정도의 타당성을 지닙니다. 가장 큰 원인과 작은 원인들이 있기 마련이기에 이러한 의견들 중 어느 하나만 맞았다고 할 수 없고 다른 의견들도 맞는 의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겠지요.


그렇지만 이러한 설명들을 모으고 모아보면 설명하는 길들이 너무 많아지기 때문에 가장 타당하고 이해하기 쉽고 공감을 유도할 수 있는 설명이 가장 많은 인기를 갖는거겠지요.


어떠한 현상을 설명하려는 사람들은 그것을 완벽하게 설명해내고 싶어하는 일종의 욕구가 있습니다. 저 또한 마찬가지이죠. 하지만 그것을 설명하기 위한 어떠한 주제, 혹은 키워드를 잡는 순간 자신이 설명할 수 있는 수많은 길들을 포기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현상을 설명하기는 하는데 모든 원인들을 이야기할 수는 없다는 것이 되겠지요.


물론 한 글에 모든 원인들을 담으려 시도할 수는 있을 겁니다. 각각의 주제를 나눠서 단락을 나누고 문단화시켜 한 글에 여러가지 키워드를 설명할 수 있게끔 할 수도 있죠. 하지만 그것은 너무 어렵고 머리도 좋아야하기 때문에 쉬운 일은 아닙니다.


가끔 이런 생각이 듭니다. 어느 현상을 완벽하게(절대적으론 아니고;) 설명 할 수 있기는 한걸까.. 모든 원인을 거론하고 설명할 수 있을지 이런 생각요. 물론 그럴 필요가 있느냐 한다면 꼭 그럴 필요는 없겠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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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엔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만연해있는데, 북한에 대해서는 상식이 마비될 정도의 증오와 비관용을 갖게하는 이른바 반공 이데올로기가 존재하죠. 반공 이데올로기는 분명 북한이 먼저 남침을 통해 터뜨린 6.25 전쟁에서 비롯되고, 실제로 북한군이 저지른 수많은 학살과 피해는 분노하기에 충분한 조건입니다. 그들에 의해 가족과 친구, 친척을 잃은 이들이 이들을 용서하자느니 하는건 당연코 가만히 보고 있을 수 없을 일이죠.


하지만 이러한 반공 이데올로기가 생겨난 이면에는 권력을 쥔 친일파들의 숨구멍이기도 했다는 점입니다. 먼저 전제해야할 것은, 광복 이후.. 그리고 전쟁 이후 한국에는 정말로 고급 인력이 너무나도 적었다는 것이죠. 어느정도 배웠다하는 사람들은 대개 일본군 소속이었던 전례가 있다던가, 친일파였던 이들이 꽤 많았죠. 그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실제로 나라를 이끌려면 고급인력이 부족한 그 시국에 이들과의 협력은 필수불가결했다고 봅니다. 이들마저 죄값을 받게한다, 죄인을 처단한다고 죄다 죽여버리면 정말로 나라를 이끌어갈 사람이 없어져버리는거거든요.


이는 북한도 마찬가지인게, 북한도 악질 친일파는 다 죽여버렸지만 많은 수는 자아비판을 통해 포용하게 됩니다. 이들을 다 죽여버리면 나라를 이끌어갈 사람이 없었던 것은 북한도 마찬가지였죠.


이런 상황에서 이승만은 자신의 정치적인 입지와 권력을 다지기 위해(이승만은 특히 권력에 중독된 사람이었죠.) 이러한 친일파를 눈 감아주는 대신 자신의 발판으로 삼았습니다. 친일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친일파들은 다시 한번 권력을 잡은 셈이죠. 이런 친일파들이 살기 위해선 이승만과 함께 반공으로 돌아서야 했습니다. 친일파보다 북한이 더 개객끼! 이런 셈이라고 해야할까요?


반공 이데올로기는 또한 친일파들의 생존을 위해 견고화되었다고 볼 수 있는 측면이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박정희라는 만주국 장교 소속이었던 자가 군을 통해 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독재를 시작했는데 이때 자신의 정권을 공고히하기 위해 이러한 반공 이데올로기를 십분 활용했고, 이는 민정이양이 된 90년대에 들기 이전 모든 정권들이 가지고 있었던 기본 국시이고, 이러한 반공 사상을 이용해 자신들의 더러운 부분을 덮고 반대파를 공격하기 위해 사용되었죠.


독재를 비판한다 -> 너 좌빨!

노동자가 권리를 주장한다 -> 너 좌빨!

학생들이 시위를 한다 -> 너 좌빨! or 너 선동당함!


등등, 자신들에게 오는 상식적인 수준의 비판마저 종북과 좌빨로 돌려버리면서 괴상하게 역공을 했죠. 이러한 이데올로기에 심취하게된 국민 절반 이상의 '지지자'들은 그것을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받아들이는 것은 그만큼 이데올로기가 강했다는 반증이라고 할 수 있을겁니다.


문제는, 이러한 경향이 민주화가 된 이후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는 것인데, 정권과 우파 인물에게 어떠한 비판을 하게 되면 그 비판자를 종북이나, 선동을 당한 이들이라고 매도합니다. 예컨데 정권이나 여당 인물이 비리 등 부정부패가 걸리게 되면 그럴 수도 있다는 식으로 넘어가고, 이런 이들을 공격하는 이들을 종북으로 몰아세우죠.


예컨데 중앙일보가 오유 사이트를 종북사이트라고 개시한 바 있습니다. 정권에 호의적이지 않고 비판이 올라오며, 민주당 정권 10년에 호의적인 이들을 종북으로 몰아세우는거죠. 이명박 4대강 비판하면 종북소리 듣던게 얼마전 일이었습니다. 비슷한 예로는 변모씨의 다음 종북포털 드립이 존재하구요.


이러한 종북드립은 보수우익 세력이 사용하는 하나의 전략적 카드가 되는데, 김문수의 역대 대통령 부정하면 종북이라던가, 박원순을 종북이라 매도한다던가, 심지어 차별금지법을 찬성하면 북한을 이롭게 하기 때문에 반대해야하고, 찬성하는 이들은 북한을 이롭게하려는 종북세력이라고 하질 않나, 국정원의 명백한 선거개입을 대북심리전 -> 개인글 -> 종북대응 이라고 말을 바꾸며 심지어 모든건 북한과 종북 때문이라며 화를 돌리려는 원세훈의 발언도 있었죠.


국정원 사건 등 수많은 비판들은 매우 상식적인 선에서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들에 종북이라는 탈을 씌워 도깨비로 만들고 도깨비가 된 이들을 공격하는 것은 정말이지 비이성적인 대응 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허수아비 공격이죠. 그런데 그러한 반공 이데올로기와 프로파간다에 넘어간 수많은 사람들이 그 비이성적인 대응을 옳은 방식이라 여기고 진짜 종북이라고 착각하게 됩니다.


종북. 물론 존재합니다. 통진당의 이정희, 이석기라든가, 가끔 발견되는 종북 블로그나 카페 같은 커뮤니티.. 하지만 이들은 정말이지 눈씻고 찾아봐도 찾기 어려울 정도로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한때 절대시계 받겠다고 인터넷 뒤지던 때가 있었는데, 정말이지 종북 블로그나 그런거 찾기 힘들더군요. 그럴 정도로 매우 극소수에 불과한데, 이들이 나라를 뒤엎는다던지 이들이 나라를 망하게 한다는 소리는 설득력있지 않습니다.


종북이라는 허상, 종북이라는 신기루에 빠져 존재하지도 않는 종북 세력을 만들어내 다른 이에게 이러한 프레임을 덮어씌우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하는 것은 매우 비열하기 짝이 없는 행동입니다. 


모든건 북한, 종북 탓이다의 원세훈

정치권에 종북 세력이 있어 국정원 국내 파트 해결이 불가능하다는 새누리

오유는 종북사이트의 중앙일보

차별금지법 찬성하면 종북의 기독교 세력

3.15 부정선거를 종북의 선동이라 주장하는 새누리 신의진 의원


상식이 종북에 갇힌 사례들과, 종북이라는 신기루를 통해 상대방을 공격하는 예시들입니다. 상식이 종북에 갇혀 좌파도, 우파도, 진보도, 보수도 상관없는 매우 상식적인 내용의 비판마저 종북 프레임을 씌우고, 자신들을 비판하는 세력과 더러운 면을 종북이라는 신기루를 뿌림으로서 희석시키고 역공을 하는게 아직까지 이어지고 당연하게 이루어지는 나라.. 그리고 그런 정치술수에 너무나도 쉽게 넘어가버리는 국민들..


반공 이데올로기와 종북 프레임은 북한이 망하고도 십수년 동안은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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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적으로 문화는 사회의 경직성에 영향을 많이 받는지라, 자유로운 사회일 수록 문화도 발달하기 쉽죠.


예컨데 미국의 개방적인 문화와 이슬람교가 강력한 힘을 가진 중동지방을 비교해보면 많은 부분, 특히 여성 및 성적인 부분에서 굉장한 차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도 이와 마찬가지인데, 예전에 비해 크게 달라진거 없는 검열 기관들은 아직도 구시대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사회문화를 검열하고 있습니다.


특히 음악과 관련된 부분이 유명한데, 사회비판 곡은 여전히 검열대상으로 공중파는 물론 방송에서 볼 일이 없죠. 만화같은 경우 경무대 똥통사건, 정병섭군 자살사건같은 정치, 사회적인 이슈가 될만한 사건을 겪으며 검열이되었죠. 물론 그러한 정치적인 이유가 아니었어도 검열을 하며 문화를 억압했겠죠.


이런 것이 국가, 국가기관에 의해 경직성이 유지되는 부분이라면 반대로 국민들에 의해 경직성이 유지되는 분야가 있는데 만화, 게임, 애니메이션 분야가 있으며, 이러한 것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은 '공부는 안하고 만화만 보고 있다, 게임만 하고 있다'가 대표하는 학생들의 유희거리가 아닌 공부를 방해하는 해로운 것 취급이죠. 물론 학생들만의 전유물은 아니지만 학생에게 들이대는 잣대가 유독 불합리할 뿐입니다.


산업과 관련을 때고 이야기해보자면 존대말이 있을 수 있겠죠. 옛말에 '5살까진 친구'라는 말이 존재하듯이 절친의 상징 오성과 한음도 나이 차이는 5살이었고, 20세기 초 즈음엔 부자간의 나이차이가 20살 미만이라면 아예 아버지의 친구가 아들의 친구인 경우도 있었는데 반해 일제시대를 겪으며 나이 한살만 차이나도 매우 깍듯이 대해야하는 분위기는 기실 유교라기 보단 일본의 군국주의(나이=계급..)의 영향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사회의 경직적인 분위기는 대체로 권위에 의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은데, 그러한 것이 어떠한 전통이든, 잘못된 악습이든 현대의 자유국가로서의 기틀에 방해물이 되는 것은 분명하다 봅니다.


사회가 진정 자유롭기 위해선 이러한 것들에 대해 논하여 어디까지가 옳은 것이고 어디까지가 옳지 않은가, 혹은 적절하지 않은가를 정하고 그것을 현실 사회에 적용시켜 새로운 분위기를 형성시켜야하지 않나 싶습니다. 


어떻게 라고 묻는다면, 글쎄요?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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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우리는 가끔 매우 봉건적이거나 중세적인, 하여튼 현대 사회에 어울리지 않은 매우 뒤떨어진 사고방식을 보여줄 때가 있습니다. 이는 그 사회, 사회를 이루는 사람들의 전체적인 경향성으로 판단컨데 그 사회와 사회를 이루는 사람들의 의식 수준을 대변해주는거겠죠.


발달한 서구의 시민의식과 과거 한국의, 혹은 현대 한국의 시민의식, 매우 기초적인 부분에서 비교해보자면 어느 정도 후달린다는게 일반적인 인식이겠죠? 가령 몇십년전 한국에선 길가에 사과나무가 있다면 사과를 그냥 다 따가버리던가, 그걸 지적하면 너도 따시던가와 같은 답변이 돌아오곤 했던..



어... 뭐, 일상에서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을 무작정 기대하기에는 솔까 인간이라는 생물이 그렇게 똑똑한 존재는 아니겠죠. 그렇지만 교육과 사회적 분위기에서 얻을 수 있는 의식의 수준에서, 현대적이다 할만한 사람은 봉건적이거나, 중세적인 사고방식에 얽매여있는 경우는 적을 겁니다.


우리나라같은 경우는 약 100년전만 해도 왕이 있었고 왕실이 있었으며, 시간을 조금 더 뒤로 당겨보면 분명한 계급구조가 존재했습니다. 전통적인 한복을 입고, 관복을 입으며, 왕이 있던 시절에서 단 100년만에 컴퓨터를 하고 지하철을 타고 출퇴근하는 시대까지의 발달은 분명 너무 짧다고 할 수 있겠죠.


그렇지만 인간의 의식 수준은, 그러한 가치관은 한번 형성되면 물질적인 시대가 아무리 변한다고 해서 쉬이 변하는 것이 아니고 윗세대-아랫세대의 상호관계, 혹은 주류를 차지한(혹은 했던) 기성세대에 의해 물질적으로 발달한 사회에서도 전근대적인 사고방식과 가치관이 아랫세대, 신세대에게 주입되는 등, 그 한계를 벗어나기 힘든 것 또한 사실이니, 지금 당장 일반인들의 우주여행이 가능하다고 해도 단지 100년만에 왕이 다스리던 세상에서 민주주의 국가가 된 세상의 의식 차이는 아무리 차이가 나도 당장 그 사회의 수준에 맞는 의식을 갖을 순 없겠죠.


이러한 전근대적인 사고방식 덕분인지, 우리나라에선 순수한 의미의 종교의 광신과 옳지 않은 믿음의 형태가 너무나도 많은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예수천국 불신지옥과 같은 형태가 그러한데, 어린아이에게 무시무시한 지옥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죽어서 이런 곳에 가기 싫으면 예수님을 믿고 교회를 다녀라, 성경을 읽어라라고 합니다. 이는 단지 지옥의 공포에 의해 교회라는 곳으로 도피하는 것이며 정녕 올바른 종교적 믿음과 신념이라고 할 수 없죠.


이러한 믿음의 형태는 신, 종교가 그 세상의 정의였으며 기준이었던 시대의 믿음과 별반 다를바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비단 저만의 생각일지 모르겠습니다. 지옥의 공포에 쫓겨 믿는 신, 믿어야하기에 믿는 신. 그것에 대한 회의를 가지는 것 자체를 이단이자 배교로 여기는 풍조.


합리적인 현대적 판단의 가치에 어울리는 형태는 분명 아니리라 믿습니다. 이런 식의 전근대적 종교의 믿음이 유지되기 쉬운 이유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의식 수준이 아직 물질적인 사회의 수준을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시대는 21세기이지만, 아직 의식수준은 그 이하.. 종교에 빠지기 쉬운 의식 수준이랄까..


한때는 이러한 광신적인 성격을 유지하거나.. 혹은 그것을 방조하는 종교를 전근대적인 사고방식, 의식수준을 잡아두는 족쇄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지금은 그 이전에, 전근대적 사고방식이기 때문에 광신적 성격을 갖는 것이고, 그러한 의식수준을 유지하게끔 하는 것이 광신적인 성격을 유지, 방조하는 종교 때문이 아닐까 하곤 생각합니다.


종교가 의식수준의 발달을 저해하는 것이냐라고 한다면 그렇다고 할 여지가 있다고 봅니다. 그렇다고 종교의 순기능을 부정하는 것은 절대 아니고, 이는 서로 다른 문제죠. 하여간 사회가 아무리 발달해도 그에 걸맞는 의식수준을 갖추지 못했다면 종교와 같은 것도 그 수준에 맞는 형태로 가공되는게 아닐까 싶습니다. 21세기의 종교와 중세 수준의 종교. 우리가 믿는 것은 어떤 종교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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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자기인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뿌리는 무엇이며, 자신은 누구인가. 간단해 보이는 문장이고 단순해보이기 때문에 쉽게 와닿지 않겠지만, 이 문장이 단순히 있어보이기 위해 만들어진 문장이 아니라는 것을 역사를 공부하며 깨닳았습니다.


자신의 뿌리는 무엇인가. 즉, 나라는 존재를 이루는 수많은 문화적, 민족적 가치관과 그것을 공유하는 수많은 이들이 이루어져있는 사회-국가는 이 땅에 살았던 나와 그들(우리)의 조상에 의해 만들어졌고 유지되고 발전해갈 것입니다. 즉, 자신을 이루는 가치관들은 이러한 조상들에 의해 연속적으로 나에게 이어졌으며, 나라는 존재를 이해하기 위해선 조상들의 과거,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 길이라고 할 수 있죠.


역사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경험이며, 경험은 우리가 무엇을 했는지를 알려주며, 무엇을 했는지 안다는 것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알려줍니다. 역사를 통해 나의 조상, 혹은 모든 인류가 도달한 것들에 대해 아는 것은, 우리가,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려주는 것이고, 이러한 인식에서 발전의 기반이 형성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또한 어떠한 사회적 문제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는다는 것은, 어떠한 가치관에 의해 옳지 않다라고 인식되는 것에서 출발하는데, 그러한 가치관은 우리의 과거에서부터 어떻게 어떤 방향으로 형성되었고, 현재 어떤 형태로 존재하는지 알려주죠. 그런 까닭에 이러한 가치판단의 기준은 과거를 기준으로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과거와 단절된 이들이,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으려면 어째서 잘못되었는가를 알아야하는데, 그러한 판단의 기준이 되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결국 문제의식을 갖지 못한다는 것이고, 이는 곧 무엇이 문제인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모든 가치관은 과거에서 인간이 무엇을 했고 어떻게 했느냐에 의해 연속적으로 발달되고 생성된 것들이기 때문이죠.


그러기 위해선 역사를 공부할때, 역사적 사고력을 가질 수 있게 교육받아야 합니다. 단지 누가 몇년에 무슨 일을 저질렀다와 같이 무의미한 것을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누가 몇년에 무슨 일을 어떻게 왜 저질렀고 그러한 행동의 결과는 무엇이며 이후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 지에 대해 공부해야 합니다.


어떤 사건이 몇년에 일어났느냐 하는 문제는 기억 안나면 텍스트 찾아보면 그만인 시덥잖은 문제이고, 정작 중요한 것은 어째서, 왜, 어떻게. 이러한 것들이 중요하니까요.


우리나라 역사 과목의 문제점은 바로 이러한 지점에서 발생합니다. 중요한 것은 제대로 가르치지 않고, 이런 무의미한 것들을 외우게 함으로서 재미없는 암기과목이라는 인식을 만들어내고, 그러한 인식 덕에 그 누구도 공부하려들지 않으며 수능같은 시험에서도 소외되는 과목. 학문.


역사는 순수한 의미로 철학과 관계가 깊은 학문이며, 철학은 인간에게 깊이를 더해주는 학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사를 공부함에 따라 통찰력이 형성되고, 이러한 통찰력을 기반으로 깊고 섬세한 사고가 가능해짐에 따라 많은 것들을 생각할 여지를 남겨주며, 그러한 것들을 판단하고 평가하는 것의 기반은 당연 과거일테죠.


현재 한국에서 발생하고 있는 수많은 사회문제와 정치문제. 이러한 것들이 왜 잘못되었는가, 어째서 잘못되었는가를 이해하고 판단하기 위해선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우용 역사학자의 트윗들과 같이, 역사적 통찰력이 담긴 수준높은 판단력은 역사와 철학의 깊이있는 공부를 통해 만들어진 내공이니까요.


개인적으로 역사라는 것은 절대 쉽게 볼 수 없는 학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과학과 수학은 그렇지 않느냐라고 한다면 물론 절대 쉽게 볼 수 없는 것엔 동의하지만, 한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이라는 존재에게 역사는 과거도, 지금도, 미래에도 가장 중요한 근본적 지식이어야 하고, 민주주의 국가에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를 더욱 견고히 해주는 것도 결국은 역사라고 보니까요.


따라서 현재의 역사과목은 모든 과목 중 가장 중요한 과목으로 설정하고, 프랑스의 졸업시험과 마찬가지로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해마다 달라지는 여러 시대의 여러 주제를 놓고(예컨데 고대부터 근현대까지 시대를 구분해놓고, 각 시대마다 주제를 몇개씩 나눠놓는 식.), 시험을 보는 학생이 스스로 어떤 주제를 선택한 뒤 그것에 대해 논술하듯 작성해야 합니다. 그리고 체점자는 사학과의 교수 수십 수백명으로 하고 답안을 체점하게 하는 것이죠.


저 혼자만의 생각일지 몰라도, 역사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우민화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인간이 옳고 그름을 구분하는 기준은 자신이 소속된 사회에서 찾기 마련인데, 이 사회가 매우 글러먹게 타락해버렸다면, 예컨데 부정부패와 불평등, 차별이 일상화된 사회에 소속되었다면, 결국 그 인간은 그 집단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으니까요. 하지만 이러한 가치관의 한계, 인식의 한계를 벗어나게 해주는 것이 바로 과거, 역사일테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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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gito, ergo Sum.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가 남긴 유명한 말입니다.


그러나 이 말의 진짜 의미에 대해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이 짧은 문장 하나로 르네 데카르트는 철학계 최고의 스타로 발돋움했습니다. 그 어려운 철학계에서 한방에 스타가 될 정도면 이 문장이 가진 의미의 가치는 얼마나 될까.



감각은 인간을 속일 수 있습니다. 기만할 수 있죠. 감각하기에 따라 뜨거운 물도 따뜻하게, 혹은 따뜻한 물도 뜨겁게. 반대로 차가운 물도 미지근한 물로 느낄 수 있습니다. 같은 방식으로 상대주의에 의해 객관적 진리란 있을 수 없죠. 데카르트는 이 점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감각은 때떄로 인간을 기만하므로, 감각으로 얻어지는 정보는 확실할 수가 없다는 것. 하지만 감각이 아닌 이성의 추리를 통해 얻어지는 지식은 확신 할 수 있습니다.


예컨데 수학적 추론, 논리의 영역이죠. 혹은 물질의 부피와 질량. 직관적인 사실입니다. 여기서 지식을 얻는 자신의 추론적 과정이 어떤 이유에 의해서든(말하자면, 사악한 악마나 전능한 신이 인간의 인식을 속이고 경험까지 조작한다건가 하는.) 오류를 범하도록 조작되어있다면? 1+1=2인데, 우리는 1+1=3으로 생각하게 되는 경우. 이러한 직관적이고 객관적인 지식의 영역까지 부정했다면 자신이 확신할 수 있는 것은 회의의 주체인 나 자신 뿐입니다. 인간일 수도 있고, 인간과 다른 형태일 수도 있는 생각하는 주체는 존재하는 것이며, 생각하기 때문에 비본질적인 것(경험, 편견, 오류, 감각 등)을 의심하고 제거할 수 있죠. 이런 의심의 능력을 통해 최종의, 최후로 남는 명증한 진리가 바로 'Cogito, ergo Sum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내 감각과 이성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모든 지식과 추론적 과정이 진실을 담고 있지 않을 경우-왜곡되고 기만되어질 경우, 그것을 회의하는 나 자신은 확실히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문장입니다.



하나의 철학적 사유를 소개해보겠습니다. 일명 통 속의 뇌라는 사고실험인데, 굉장히 재미있고, 본문과 연관지어 생각하면 본문의 이해가 빠를 것입니다.


만약 우리의 뇌를 몸에서 때어낸 뒤, 통 속에 넣고 생명력을 유지시키며, 모든 외부의 자극을 컴퓨터로 만들어내 뇌에 주입하여 가상의 환경을 느끼게 만들 수 있다면, 그렇게 감각하는 뇌는 자기 자신이 진짜 세계와 마주하고 있는지, 아니면 주어지는 자극에 반응할 뿐인지에 대해 구분할 수도, 증명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진짜 이 세계에서 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통 속에 뇌만 담긴채 거짓된 감각만을 느끼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마 매트릭스가 생각날 겁니다. 진짜 세상에선 육체의 생명만을 유지시킨채 잠들어있고, 1990년대 후반이라는 환상 속에 모두가 살고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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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부터 많은 커뮤니티에 속해보기도 했고, 몇몇 커뮤니티를 운영해보기도 하면서 운영에 대해 들은 이야기, 직접 겪은 경험을 토대로 커뮤니티의 운영에 대해 생각해볼 일이 많았습니다. 그중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라야 당연 운영진의 운영, 관리 부분일텐데, 운영진으로서의 능력, 심지어 덕성의 부분이 떨어지는 운영진들을 보아온 바, 자신을 되돌아보기에 적절한 경험들이었죠.


커뮤니티를 운영한다는 것은 단순히 광고글을 지우고 적절한 게시판을 생성하며, 그 게시판의 영역에 맞는 게시글을 올라오게 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단순한 관리의 영역이며 운영이라는 것은 그보다 더 넓은 영역의 활동이라고 할 수 있죠.


다음과 네이버 등등 수많은 커뮤니티, 주로 카페가 존재합니다만, 그 중에서 나이가 어린 운영자들도 수두룩한 카페가 많습니다. 이는 특히 네이버에서 두드러지는 현상인데, 주 연령층이 초등학생~10대가 많고 활동량도 뛰어나기 때문일 겁니다.


사실, 운영이라는 것은 많은 경험과 판단력을 필요로하여, 특히 게시판 내의 회원간 분쟁에 대해 처리하는 것이 가장 까다로운 부분이라고 할 수 있죠. 문제는 나이가 어린 운영자가 커뮤니티를 운영할 때에는 이러한 분쟁에 대해 매우 편파적이고, 올바르지 못한 판결을 내리는 일이 잦다는 것이며, 더 나아가 이러한 활동이 친목을 위한 경우일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운영진은 자신의 커뮤니티에서 막강한 권한을 지니고 있고, 그러한 권한에서 나오는 권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운영진의 역할을 실로 중대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위치에 대한 책임감과 무게감을 알지 못하는 어린 운영진들은 그 운영에 대해 매우 미숙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편파적이고 독선적인 운영이 이루어질 수 밖에 없는 것은 어찌보면 필연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같습니다.


게시판에서 분쟁이 일어났다면 가장 중요한 것은 누가 잘못했느냐가 아니라, 먼저 무엇이 원인이 되었느냐이고, 그 이후 누가 먼저 잘못했는지와, 그와 싸운 다른 이의 잘못은 얼마나 되는가. 또한 그 사실들의 총합으로 어떠한 처벌을 내려야 알맞은가에 대한 판단이 있어야합니다.


이러한 판단은 개인으로서는 까다롭기 때문에, 주로 많은 운영진(혹은 판단을 의논하기에 적지 않은)을 두고 있는 집단이라면 서로간의 의논을 통해 게시글, 혹은 댓글의 처리와 분쟁 당사자에게 맞는 처벌을 정합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운영법에 익숙치 않고, 오직 자기 자신만을 믿고 행동하는 식견좁은 어린 운영진들은 이러한 과정을 통하지 않고 자신의 판단력만을 통해 판결하기 쉽습니다. 예컨데 어느 커뮤니티에선 운영진이 자신과, 자기와 어울리는 친목파벌의 의견에 거스르는 회원을 게시글, 댓글을 쓰지 못하도록 강등하거나 활동중지를 내린 뒤, 보란듯이 게시판에서 해당 회원을 조롱하고 공격하는 경우가 존재합니다.


조금 사건이 큰 경우가 있습니다. 여러 게시판에 글이 튈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분쟁에 엮일 경우가 있죠. 이런 경우에도 이러한 처벌에 대한 성찰이나 원칙이 없는 경우 그 판단을 예측하기는 굉장히 쉽습니다. 주로 두가지 경우가 있는데, 첫번째는 그냥 끝나기를 무력하게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기. 두번째 경우 자신과 친한 사람들만 남겨놓고 모두 활중 혹은 강퇴.


제 3자가 보기에도 이러한 편파적이고 올바르지 못한 운영법은 그 커뮤니티에 해악만을 남겨줍니다. 제대로된 운영이 아니기 때문에 분쟁이 발생해도 제대로 처리가 되지 않고 점점 극렬화 되거나 시시때때로 싸움질을 하게 되는 경우가 있으며, 이는 각각의 잘잘못을 따지려드는 회원들에 의해 곧잘 파벌이 갈리는 막장 사례가 생기기도 하죠. 혹은 운영진과 친한 파벌만을 남겨두고 친목질을 통해 커뮤니티가 서서히 말라죽어가는 경우도 심심찮게 존재하죠. 주로 후자가 압도적으로 많은 경우를 차지합니다.


혹은 각 판결마다 형량이 서로 달라지고, 그 본질을 파고들자면 그와 친한가, 안 친한가에 이유가 달려있는 경우도 적지 않은 편이죠. 이쯤되면 친목질이지만, 그것을 방조하고 심지어 조장한 운영진의 운영미숙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을 겁니다.



운영진이 여럿 존재하고, 그들간의 논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개개인의 운영진이 뛰어나다면 그 커뮤니티는 어느정도 굳건할 여지가 존재합니다. 다만 오직 자기 자신만을 믿고, 자기 자신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고 모든 일을 혼자 처리하려 든다면 그 커뮤니티는 그 개인이 매우 뛰어난 인물이 아니라면 언젠가 문제가 생겨 심지어 파국에 다다를 수 있죠.


인터넷의 크다하는 커뮤니티의 경우 대개 어느정도 숙련된 운영진과 원칙이 존재하며, 독자적인 운영 방식 또한 있기 마련입니다. 반면 나이가 어리고 그닥 크지 않거나, 작은 커뮤니티의 어린 나이의 경험과 통찰등 판단력이 떨어지는 운영자가 있는 커뮤니티는, 사실 그 규모를 막론하고 언젠가 분명 문제가 생겨 쇠퇴하기 마련입니다.



커뮤니티도 하나의 집단이고 그것을 올바른 방향으로 운영하기 위해선 그에 걸맞는 요소를 갖추어야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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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재준, 'NLL 포기' 발언 맞아 대화록 공개"

최경환 "盧, NLL 포기 넘어 상납..칠거지악 경악"

김을동, `盧 NLL 포기` 주장 듣고 "부인이 빨갱이라.."



등등.



정치에 관심이 있고 꾸준히 찾아보며 상식적인 수준의 판단력을 가졌다면 그 수준에서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 행위인지 판단할 수 있을 것인데, 만약 정치에 관심도 없고 그러한 판단력에 어떠한 외부적 요인이 개입하여 온전한 판단력을 기대할 수 없을 경우 그 사람은 다시 말해 정치꾼의 정치공작에 넘어가기 쉬운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제 1당이자 집권 여당, 그리고 대한민국 기성 3대 언론사가 빵빵하게 밀어주며, 사회각계에 이들의 사상, 이념을 같이하는 수많은 기업-개인이 존재한다는 것을 통해 이들은 저런 말을 할 수 있는 겁니다.


자신들만을 믿는 이들에겐 NLL 포기를 머리속에서 기정사실화 시키며, 이런 식으로 계속 NLL을 포기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정치에 관심없는 이들도 그것을 보고 그것이 사실이라고 믿게끔 만드는 장치인거죠. 우리가 보기에 저것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헛소리인지 알 수 있을테지만, 반면 정치에 관심이 없는 이들에게는 계속해서 NLL을 포기했다고 하고 언론에선 이런 발언은 밀어주니 그게 사실이라고 믿는 겁니다.


이런 거죠. "노무현 NLL? 그거 포기한거 아니야?" 그들이 좋아하는 단어로 표현하자면 선동당한거죠.. 이미 새누리당에서도 발을 빼려고 하고 국민 절반이 NLL 포기가 아니다라고 하는 와중인데 말입니다. 어떠한 사건에 대한 주장이 많을 경우, 그 사건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겐 가장 많이 주장되는 주장이 곧 진실로 여겨질 확률이 높습니다. 크게 관심을 가지도 있지 않기 때문에 그 사건에 대해 알려는 노력을 더 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고, 그들이 접할 정보는 가장 많이 돌고 있는, 가장 많이 눈에 보이는 것들일 테니까요.


다르게 보자면 언론의 힘이 국민들의 인식에 얼마나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를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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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김일성이 스탈린의 허락을 받고 남한을 침공하던 그날부터 53년 7월 27일 휴전하던 그날까지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수많은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겐 가족이 있었고 또한 자식이 있었으며, 어느 누군가에겐 자식은 없었지만 나만 바라보는 부모님이 있었습니다. 어린 고등학생들도 군인으로 징병되고, 탐욕적인 김일성의 명령으로 내려오게된, 거짓된 정보를 믿고 내려왔던 수많은 이들과 총부리를 겨눴지요.

비단 그들만이 아닌 동방의 작은, 독립한지 5년된 국가를 위해 자기 목숨을 걸어주셨던 수많은 외국 군인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이 있었기에 우리는 이렇게 살아있습니다. 결국 망할 수 밖에 없었던, 망할 수 밖에 없는 나라의 노예가 아닌 진정 자유로운 국가로서 자신의 권리가 있고, 자신의 의무를 다 할 수 있는 나라에 우리는 살아있습니다.

오늘은 이제 막 태어난 작은 나라가 피를 흘린 날입니다. 어렸을때 병이 걸리거나 다치면 평생 후유증이 적던 크던 있다고 합니다. 오늘은 그런 날입니다. 우리가 병에 걸린, 크게 다친 날입니다. 이런 다친 국가지만, 그런 국가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숭고하게 희생한 수많은 장병들을 위해, 우리는 그들을 이 나라의 마지막이 다할 때까지 기억해야 합니다. 기억해야 역사라면, 우리는 역사를 안고가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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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나라의 국가기관이자 정보기관인 국정원이 일개 정당과 후보를 위해 선거에 개입하고 여론조작을 실시했다는 것이 명백한 사실로 드러난 지금 사태를 무마하기 위해 NLL 발언을 떡밥으로 던져 물타기를 시전하며 피장파장의 오류를 범하고 있고, 결국 비공개 됐어야할 NLL 문서가 공개되버렸으니, 이제 앞으로 우리나란 타국과 제대로 외교하긴 글러먹었네요.

비공개로 이뤄진 것을 다 공개하자 이러면 이제 대한민국 대통령과 누가 진솔하게 회담하겠습니까? 비공개 회담이나 외교적 신뢰가 바닥으로 떨어질게 뻔한데 말입니다. 어차피 이번 NLL은 때되면 공개될 것이고 그거 지금 터뜨려봐야 여당이나 야당이나 손햅니다. 아예 국가적인 개망신이자 국가적 신뢰의 추락이에요.

비공개로 진솔하게,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한 것들이 얼마 지나지 않아서 싸그리 공개될거면 누가 이야기하고 싶어하고 더 나아가 어떻게 신뢰합니까? 이번 한번 했는데 다음에 또 못할까봐요?



무엇보다 웃긴건, 우리나라 사람들은 진보고 보수고 좌파고 우파고를 떠나서 대부분 북한을 외교의 대상으로 보질 않아요. 그게 그렇게 어려운가? 북한 또한 외교의 대상이라는게요. 북한에 대한 맹목적인 적대감, 혐오감 때문에 북한 문제에 대해서는 이상하리만치 극단적이고 단적인 행동양식을 보여주고 있는게 우리나랍니다. 북한을 마치 사탄으로서 대화의 상대 등으로 보지 않고 마치 종교적인 맹목적인 증오와 혐오만을 보여주는데.

지금 당장 북한을 똑바로 보세요. 명백히 실체하고 있는 정치적인 집단입니다. 이걸 애써 외면하고 있는건 우리나라에요. 북한에 대해서 제대로 이야기해보려는 사람이 없습니다. 적어도 위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는 더요. 그렇다고 계속 그대로 두기에는 썩어가는 염증과도 같습니다. 앞으로 악화 될 것은 뻔한데 아무로 그걸 제대로 보려고도, 치료해보려 하지도 않죠.

오히려 그런 사람이 있다면 종북빨갱이로 몰리며 공격을 받습니다.



이번 사건의 기초를 마련해준 새누리당은 잃은게 있을까요? 없죠. 50%의 콘트리트 지지자들이 있는데. 자기들만 잘 살면, 잘 되면 사실 뭐가 어떻게 되든 별 상관도 없다는 심봅니다. 어디서 많이 보는 특성 아닙니까? 북한 고위층이죠. 아랫것, 북한이라는 국가의 이미지가 어떻든 자기들만 잘 살면 그만.

이 모든 것의 단초를 제공해준 새누리당. 대단합니다 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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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적으로 국가 공무원은 정치에 개입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지난 국정원녀 사건의 정황포착부터 시작해서, 점입가경으로 그것이 사실로 드러나버렸습니다. 전에 글을 쓴 적 있듯이, 이 사태로는 아예 대통령이 하야하고도 남을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 나라의 국민들의 반응은 생각보다 뜨겁지 못하더군요.



국정원은 국가 정보기관입니다. 북한의 간첩, 산업스파이 등등 사회적으로 위험성이 큰 범죄적인 것을 방지하고 잡아내는 국가부서란 말입니다. 근데 이런 국가 정보기관이 법을 어겨서까지 일개 정당과 일개 후보를 뒤에서 몰래 지원하고 있었다는 것이 사실로 밝혀졌습니다.


이것은 국가적으로 매우 큰 사건입니다. 이건 어떻게 커버칠래야 칠 수 있는 수준의 사건이 아닙니다. 현재 국정원 사건을 옹호하는 사람들. 반대로 민주당이 똑같은 짓을 했어도 커버치고 용서하겠습니까? 아니잖아요?


대북심리전을 위해 일개 유머사이트인 오늘의 유머 사이트에서 정부, 여당에게 유리한 내용, 옹호하는 글과 댓글을 국정원 요원이 작성을 한다.


대북심리전? 그냥 여론조작인거죠. 그것의 효과가 얼마가 됬든 말입니다. 그것을 국가 정부부서가 시도했다는 것 자체가 문젭니다. 별 효과가 없었으면, 계속 해도 된다 이겁니까? 똑같은걸 민주당이 해도 된다고 생각하세요?


간첩이라면 체포를 해야죠, 인터넷에서 키배를 뜰게 아니라.


헌법정신에도 민주주의가 스며들어있습니다. 전 정부와 현 정부는 헌법정신을 짓밟고 있는 것이고, 빨갱이라면 이게 빨갱이죠. 별게 빨갱입니까? 동성애를 찬성하면 간접적으로 북한에게 이익이 간다는 개신교 목사가 생각나는군요. 그렇다면 국가의 헌법정신을 짓밟고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이 정부는, 북한에게 이익이 안 간다는 겁니까? 이상할 노릇입니다.


지금 새누리당, 국정원을 옹호하는 것은 그야말로 (그들이 반대세력에게 자주 주장하던) 세뇌, 선동을 당한 것과 다름없습니다. 보수우익은 해도 되지만 반대의 경우에는 결사반대를 하며 공격하겠지요, 세뇌 당한 수준입니다. 지금 조중동에서 이러한 사건을 축소시키고 쉴드를 치며 덮으려하는 것에는 선동되는 것입니다.



새누리당에서 뜬금없이 NLL을 걸고 넘어지고 있습니다. 이건 그야말로 물타기입니다. 새누리당이 주장했습니다. 국정원 국정조사보다 NLL 발언문 전문 공개가 시급하다라구요. 그래서 민주당이 말했죠. NLL 발언문 전문 공개하겠으니, 국정원 국정조사 받자고.


그러자 새누리당이 그걸 거부했습니다. 그게 지금 새누리당입니다. 감이 안 잡히십니까? 일단 던져보는 물타기라는 거죠. 현재 NLL 발언은 그 실체가 입증되지 않은 새누리당의 '주장'입니다. 국정원 사건이 커지자 NLL을 떡밥으로 던져 현 국정원 사태를 덮어보려는 시도이자, 반대 세력에 대한 공격으로 저열한 정치 공작이라 이겁니다.


지금 국정원은 애써 무시하고 NLL에 힘을 실어주는 이들은, 이러한 새누리당-조선일보 등의 언론에게 선동 당하는 겁니다. 제가 별로 좋아하는 단어도 아니고, 소통을 파괴하는 행위라고 생각하기에 입에 담으려는 단어는 아니지만, 지금 꼴을 보면 딱 이 단어가 맞더군요.


만약 이번 물타기가 성공한다면 앞으로는 이렇게 전개 될 겁니다. NLL 발언에 의해 국정원 사건이 묻혀버리고 언론에서도 노무현 NLL 관련 보도를 줄이면서 입 싹 씻고 가만히 있다가 조금 지나서 짤막하게 그런 적 없다고 뜨는거요. 비슷한 경우가 한두번 있는게 아니었죠. 그야말로 새누리당 원하는 대로 돌아가는 겁니다.


NLL문제가 따질만한 사항이라곤 해도, 현 시점에서는 뜬금포에 가깝고, 국정원 사건은 절대 넘어가서는 안되는 심각한 문제입니다. 지금 새누리당은 노무현이 했다는 발언을 '주장'하면서 물타기, 사건을 묻으려고 시도하는거죠. 그 발언이 사실이냐 아니냐를 떠나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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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헷갈리시는데, 이 글에서 이것에 대해 정리하고자 합니다.


기본적으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정치체제가 아닌 경제체제입니다. 공산주의의 반대는 자본주의이고, 민주주의의 반대는 왕정, 과두정, 금권정, 귀족정 등 국민에게 주권이 없는 모든 체제를 아우릅니다. 이건 기본이니 알고 갑시다. 간혹 민주주의의 반대를 공산주의 사회주의라고 알고 있는 분들도 왕왕 계시더군요.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에 대한 명확한 정의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대충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사회주의, 공산주의가 있고 맑시즘적 맥락에서의 사회주의와 공산주의가 있습니다. 이 둘은 서로 일정한 차이를 지니고 있으며 이에 대해 혼동하기가 쉽죠.


전자의 경우, 계급간의 평등을 주장했던 모든 이념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매우 이상적이고 현실적이지 못한, 다분히 철학적인 성격을 지닌 이론들이었고, 마르크스는 자신의 저서인 <공산당선언>에서 이것들에 대한 비판을 하죠. 어째서 이러한 이념들이 이론적으로 불충분하고, 모자르며 어째서 실패 할 것인지에 대해서.


그리고 자신은 그에 반해 그러한 이상적이고 감상적이었던 기존의 사회주의와는 다른, 경제학과 유물론에 입각한 새로운 사회주의 이론을 주창하는데, 그것이 바로 "과학적 사회주의", 즉 공산주의입니다. 공산주의라는 명칭은 맑스가 생시몽, 오웬같은 철학자들과 다른 차별성을 강조하기 위해 붙힌 명칭이구요.



이후 마르크스가 비판했던 이론들, 다시 말하자면 마르크스의 과학적 사회주의(공산주의) 이론을 제외한 이론, 이념들은 현실적인 영향력을 잃고 사라집니다. 이제 '사회주의'라고 한다면 맑스의 사회주의를 의미하게 되죠. 그리고 마르크스는 자신의 공산주의를 조금 더 정교하게 수정, 보완하여 더욱 발전시키게 되는데, 여기서 또 (맑시즘적 맥락에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개념이 갈리게 됩니다.


전환적이고 과도기적인 체제인 사회주의와, 그 끝인 최종단계의 공산주의로 구분이 됩니다.


다시 말하자면 사회주의는 각종 혁명과 개혁을 통해 자본주의적 체제를 무너뜨리고 공산주의 체제를 완성시키기 위해 거쳐지나가는 하나의 과도기적 체제로서의 성격을 가지게 되고, 공산주의는 그러한 혁명과 개혁을 통해 만들어진 사회주의의 최종 형태, 즉 공산주의로 끝을 맺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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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민 자본주의라는 말이 있습니다. 양심을 따르지 않고, 어떤 부도덕, 비윤리적인 행위라도 단지 돈만 벌 수 있다면 그것으로 됬다는 것으로, 이러한 옳지 않은 사상에 따라 행동하는 결과는 궁극적으로 사회부조리와, 동시에 비판을 가져오게 됩니다. 대표적으로 적은 임금을 주면서 더 오래 직장에 잡아두고 부려먹는다던가, 개인 차원에선 거지나 장애인인 척하면서 돈을 기부받고 일 끝나면 멀쩡히 일어나서 목욕하고 집에 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러한 행위의 근본에는 돈이 존재하고 있는데, 이러한 맥락을 같이 하는 사상들은 어떤 사물이나 대상이 다른 이에게 피해를 주거나 그 행위 자체가 부도덕적이고 비윤리적인 것을 고려하지 않고, 혹은 고려하고서라도 그저 자신과 자신이 소중히하는(예컨데 가족이나 투자자) 이들과 이익을 공유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됬다는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천민 자본주의는 돈, 자본에 대한 몰양심이라면 후자와 같은 경우, 대개 더 넓은 범위.. 사회전반적으로 통용되는 이기주의에 가까울 겁니다.



이러한 천민 자본주의나 (개인이나 집단)이기주의는 그 자체로 주변에 눈쌀을 찌뿌리게 만드는데, 그것이 위법일 경우 법적인 처벌이나 보상을 물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법에 어긋나지 않는 경우(거지나 장애인인 척하며 돈을 기부받는 등..) 법에 저촉되지는 않지만 도덕적인 차원에서 사회적 비난을 야기하지요.


우리나라의 갖가지 사건사고가 끊임없이 보도되는 것을 보며 이러한 '단순히 이익만 된다는 태도'를 가지는 것은 그야말로 사회악의 하나라고 생각하게 되더군요. 이러한 태도를 가진 사람들은 또한 이기주의를 가진게 대부분인데, 집단 이기주의의 경우 이번 태권도 편파판정으로 사퇴한 임원의 복귀가 있습니다.


결국은 집단 이기주의에 의해 잘못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들끼리 좋게좋게 넘어가기 위해 1주일 이후 다시 불러들인 경우이죠. 제식구 챙기기. 이 말이 가장 설명하기 편한 말일 겁니다.


이런 경우는 비단 이번 일만이 아닙니다. 정치에서도, 기업에서도, 협회에서도 이러한 경우는 차고도 넘쳐요. 이를 다시 말하자면 우리나라 사회자체가 이러한 잘못을 명백히 짚고 넘어가지 않고, 그에 따른 처벌이나 책임을 확실하게 묻지도 않고 그저 없던 일로 묻고 '좋게좋게' 넘어가는 비양심적이고 무책임하며 진보된 의식을 가지지 못했다는 반증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떠한 잘못이 일어났다면 그것을 명백하게 짚고 넘어가야 후환이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상태로 곪고 썩어 집단 전체를 경도시키고, 더 나아가 사회자체를 병들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짧은 시간동안 빠르게 발달한 한국 사회는 이러한 선진화의 과정에서 튀어나온 각종 사회문제를, 일단 발달하고 난 뒤 생각하자며 묻어놓고 발달했습니다. 그 결과 우리나라는 이러한 사회문제의 염증을 아직도 가지고 있으며 심지어 이러한 태도로 인해 제대로 바라볼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렇게 하나 둘 묻어둔게 서로 엮이고 엮여 무엇하나 골라잡고 해결하기엔 너무 많은 문제들이 서로 얽혀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빠르게 발달했고,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두뇌들이 생산되고 있으며 사실 어느 나라보다 고학력자가 많은 나라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추측컨데 분명 해결할 역량은 있을거라고 생각합니다. 실이 많이 얽혀있다고 포기하거나 잘라버리는 것보단, 충분히 시간을 두고 각잡고 풀어나가면 언젠간 분명 모든 실을 풀어낼 수 있을거라 전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를 골치아프다는 이유로, 해결하기 힘들다는 이유로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외면하지 말고, 묻어두지 말고 지금이라도 자리 깔고 앉아서 어떻게 해결해야하는가  각잡고 생각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늦으면 푸는게 더 힘들어질 것이니까요. 제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이러한 사회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가 아닌, 개인의 차원에서, 국민 전체가 이러한 이기심에서 벗어나며 책임 질 것은 확실하게 져야한다, 문제는 확실하게 처리한다는 의식을 가져야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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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어트, 공부, 건강..


노력없이 얻으려하는 대표적인 것들입니다. 정말 원하고 됐으면 좋겠다고 진심으로 생각하지만 언제나 하기 귀찮다고, 힘들다며 기피하는 것들이죠. 언제나 열망하면서, 정작 노력하지는 않는 것이 사람일까요. 그래서 힘든 것은 피하면서 결과물을 얻으려하는 잘못된 편법들을 사용하나 봅니다. 어느 종교에서 말하듯이 시련이 없으면 성취도 없다는 말처럼, 물리학의 어느 법칙처럼 작용이 있으면 반작용이 있듯이 무언가를 원한다면 그에 합당한 무언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그것이 돈이 되었든, 노력이 되었든.



여성분들, 다이어트 굉장히 원하죠. 조금만 더 뺏으면 좋겠다. 조금만 더 예뻐졌으면 좋겠다. TV에 나오는 저 연예인같은 몸매를 가지고 싶다. 모델같은 몸매였으면 좋겠다. 허벅지살, 뱃살, 팔뚝살이 없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원하면서도 하는 행동은 이기적이기 그지 없습니다. 그저 굶어서 빼려는 것은 물론이요 약을 사먹는다거나, 검증도 안된 잘못된 다이어트법을 무작정 시도한다거나, 심지어 먹토 다이어트, 먹고 토하는 다이어트를 하는 막장 다이어트도 있습니다. 화룡점정은 성형 다이어트려나요? 어쩌면 이건 나은 축일지도 모르겠군요.



뭐.. 노력과는 조금 다른 이야기가 될지도 모르겠지만, 모델같은 몸매, 연예인같은 몸매, 탄력적인 몸매를 원한다면.. 살을 빼고 싶다면 해야하는 것은 별 시덥잖은 다이어트법이나 약따위가 아니라 운동입니다.


넵. 몸을 움직이며하는 운동이요.


사실 몸매를 좋게하겠다며 살만 빼는 다이어트야말로 가장 보편적이고 바보같은 다이어트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건강에도 좋지 못할 뿐더라 단지 삐쩍 마른 상태밖에 안되거든요. 그렇게 원하는 11자 복근, 탄력적인 몸매는 모두 운동으로만 얻을 수 있는 것들입니다..


단지 굶어서 빠지는 몸매는 살도 푸석푸석하며 탄력적이지도 못하고 엉덩이는 축 처지고 건강미가 없는, 말린 생선같은(...)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우리나라는 미적 기준이 마른 사람들에 맞춰져 있어서 허리 가늘고 몸에 살이 없으면 그게 예쁘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만, TV에 나오는 연예인들의 몸매와 그 관리법을 보면 적게 먹는 것만이 요령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각종 운동, 요가, 훈련(또한 운동이라고 할 수 있죠.)을 병행하는 것은 그야말로 건강한 몸매를 만드는 방법이거든요.



공부도 마찬가집니다. 뭐 별로 길게 할 말은 없는데, 수업시간에 쳐놀고 집에서도 게임만 하고 학원에서도 딴데 정신팔려있는 주제에 성적이 안 나온다고 징징대는 것은 걍 답 없는거죠. 물론 이쯤되면 자기도 왜 성적이 안 나오는지는 알 것이고, 진짜 잘하는 애들도 있는 법이라 노력은 해도 원하는 등수를 얻지 못하는 경우도 있겠죠. 그래도 뭐 어쩌겠습니까;;


공부라.. 저도 한창 공부할때는 나보다 머리 똑똑한 애들보고 부럽다, 쟤넨 어떻게 저렇게 똑똑한가 생각하면서도 집에 돌아가면 가장 먼저하는 것이 컴퓨터를 키는 일이었죠. 그런 주제에 그런 애들 보면서 머리속의 지식만 뽑아다 내 머리에 넣고 싶다 같은 생각도 했었지요.. 진정 성적을 올리고 싶었으면 집에서도 공부를 했어야하는데 말입니다..



건강.


개인적으로 보약에 대해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오래전에도 이와 관련되어 글을 한번 쓴 적이 있죠. 앞서 말했듯이 전 보약을 먹는 것에 대해 큰 의미가 없이 돈을 날리는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보약과는 약간 떨어진 뱀술같은 것도 그렇죠. 먹으면 건강이 좋아진다고? 무슨 근거로?..


보약. 말은 좋죠. 먹으면 건강해진다. 그래서 야생동물이나 지네 큰거 잡아다가 좋은 부위만 때서 말리고 달여마시죠. 그리고 그걸 먹으면서 건강이 좋아질거라고 생각해요. 뱀 같은거 잡아다가 뱀술담가 먹는데 이건 진짜 뭔 근거인지 모르겠습니다.


건강을 얻고 싶으면 해야하는건 걍 간단해요. 운동을 하는거죠..-_-;; 괜히 보약이다 뭐다 하면서 이상한거 먹지 말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조깅을 하든 일주일에 한두번 산을 가든 운동을 하면 됩니다. 단순히 뭘 먹는다고 건강이 좋아질거라고 생각한다면 그거야 말로 날로 먹는거죠.


건강은 그렇게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효과가 있더라도 일정 선 이상 효과를 볼 것이라고 생각치도 않구요. 나이드신 분들 중에 이런 분들이 계십니다. 젊은이들 보고 요즘 것들은 노력도 안하면서 좋은 결과를 원한다고, 그러면서 자기는 변변찮은 운동도 안하면서 보약이나 먹고 있죠. 건강 좋아지겠다면서요.



노력없는 성취는 그야말로 날로 먹는 것과 다를바 없습니다. 운이 좋아 별 다른 노력을 하지 않고 좋은 결과를 얻을 수도 있겠죠. 그건 뭐 상관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날로 먹으려는 심보나, 다른 사람 굴려놓고 자기 업적이니 하는 것이야말로 놀부 심보겠지죠. 그니까 이 글의 주제는 뭔갈 얻고 싶다면 그만큼 노력을 하자는 겁니다. 별거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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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국가 두개를 꼽으라면 북한과 일본이 가장 많은 표를 차지할 것 같습니다. 북한이야 6.25 이후로 꾸준히 개새끼 위치를 차지해왔고 일본이야 제국주의 시절, 더 거슬러가자면 임진왜란 때문에 원숭이 위치를 차지해왔죠.



레드 컴플렉스라는게 있습니다. 빨간색을 공산주의와 연관시켜 혐오감을 드러내는 반공주의의 일종인데요, 하여간 이러한 레드 컴플렉스는 우리나라의 북한-빨갱이에 대한 극도의 혐오감을 설명해주는 단어이기도 하죠. 우리나라는 그간의 반공교육과 이데올로기 덕분에 북한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라도 북한이라면 당연코 호감이 있을리 만무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북한과 연관된 것에 대해서 또한 민감하게 반응하는데, 공산주의, 사회주의에 관련된 것을 이야기할때도 조금이라도 우호적이거나 심지어 지극히 정상적인 이야기임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며 빨갱이라고 매도하죠. 이는 북한에 대한 맹목적일 수준의 혐오감에서 기인하지만 그와 마찬가지로 그것에 대해 우호적(혹은 상식적인 이야기라도)으로 이야기하면 같은 집단내에서 자신을 빨갱이라고 낙인찍고 매도하는 것에 대한 반동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공격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적에 대해 더 크고 거친 비난을 하는 것이죠.


후자는 쉽게 말해 똑같은 취급 받지 않기 위한 방어기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김정일 개새끼해봐 같은 사상검증이라고 할 수 있죠.


이러한 레드 컴플렉스는 우리가 북한을 보는 시각을 매우 제한적이게 만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지극히 상식적으로 합리적인 방법일지라도 옳지 못한 것으로 만들기도 하죠. 가령 북한 인민들의 인권에 관한 이야기를 할 적에도 빨갱이 딱지, 낙인이 붙는 것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일본에 대한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본어를 배운다, 공부한다는 이유로 친일파로 매도된다거나, 일본 만화를 본다고 친일파로 매도되고 그러한 일본 문화를 향유한다고 해서 일본의 잘못을 비판하는 것을 이중잣대로 취급하는 것은 같은 맥락에서 벌어지는 부당함이죠.



북한에 대한 레드 컴플렉스는 6.25와 각종 사건사고, 그리고 반공교육과 이데올로기가 만들어낸 맹목적 혐오감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한다면, 일본은 그러한 혐오감과 더불어 열등감에서 출발했다고 봅니다.


일본은 수세기전만 해도 한국을 통해 대륙 문화를 들여오던 이들인지라, 조선 통신사는 국가적 행사급이었는데 이러한 관계가 점점 반전되더니 19세기 중반에 다달아서는 우리의 문화, 기술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어 근대화에 성공하죠. 그리고 이러한 근대화를 통해 제국주의 사상에 물들어 주변국을 침략하며 다름아닌 군국주의로 발전해버립니다. 뭐, 이들도 나름대로 열등감을 가졌기에 그러한 침략의 잔혹함이 만들어졌을지 모르겠습니다만, 하여간 이러한 발전한 일본을 보며 언제나 한 수 아래라고 생각했던 일본이 강해져버리고, 끝내 조선이라는 나라를 아예 식민지로 만들어버렸다는 것에 충격을 받습니다.


그리고 45년 광복할때 느꼈던 일본의 발전상은 우리에게 깊은 상처를 만들었죠. 50년에 6.25가 발발하고 전쟁이 끝나며 아무 것도 없었을때 일본은 전쟁 특수를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게 되었고, 이는 수십년간 일본의 황금기를 맞이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우리는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에 이러한 선진국 일본에 더 큰 열등감을 느낄수 밖에 없었죠.


그렇지만 우리를 식민지화하고 무지막지한 수탈과 학살을 경험한 우리는 일본에게 열등감만을 느끼는 것뿐만 아니라 증오 또한 느끼게 됩니다. 아직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반일감정(이건 당연한거겠죠.)과 많이 해소되었다면 아직도 문화, 국제적, 사회적 위상에선 열등감을 조금 느끼고 있죠. 그러한 것을 잘 나타내는 것이 전여옥의 일본은 없다라는 책입니다. 허무맹랑하고 악의적으로 폄하되어있는 일본이 묘사되어있는 이 책을 보며 우리가 하던 것이 역시 그럼 그렇지, 원숭이 클라스가 어디가겠어~낄낄 대던게 우리의 현실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말입니다.


일본은 없다라는 책이 그렇게 히트칠 수 있었던 이유가 일본에 대한 호기심 뿐만 아니라 일본에 대한 맹목적 혐오감, 증오감에서 시작했다는 것은 자명할 것입니다. 우리가 싫어하는 일본이, 듣기로는 그렇게 선진국이고 발달했다면서 하는 꼴은 천박하고 꽉 막히기 그지 없으니 우리는 그걸 비웃으며(깍아내리며) 스스로 자위질하던 것이었죠.


일본에 대한 정보가 아무리 없다고서니 그런 책을 보고 철썩같이 믿어버린 것은 믿고 싶어서였을 겁니다. 전문용어로는 확증편향..



반일감정을 없애라는 것이 아닙니다. 반북감정을 없애라는 것이 아닙니다. 둘다 충분히 가질 수 있어요. 그들이 하는 꼴과 그들이 했던 꼴을 보면 없을 수가 없지요. 그렇지만 단지 그러한 감정에 휩쓸려 자신이 비판하려는 대상에 옳지 않은 비판과 비난을 하는 것은 경계해야 합니다.


저도 한때 그러한 혐일감정을 가지고 있었고, 그에 따라 일본이라고 하는 대상이 하는 것, 하는 말 등 일본이라고 하면 일단 까고 봤습니다만, 지금 생각하면 저 스스로가 멍청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왜 일본을 깠느냐 하면 정말 까야할 것도 아닌데 단지 일본이기 때문에 깠었던 것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거든요.


그래서 지금은 오히려 이러한 북한, 일본에 대해 차라리 말을 아끼는 편입니다. 물론 스스로 생각하기에 분명 까야할 것이 있다면 까기도 합니다만, 한국은 일본, 북한에 대해 혐오하고 증오하는 감정이 많기 때문에 저 스스로 그것에 휩쓸려 나도 모르게 눈먼 양떼처럼 마녀사냥하듯 까고 있지 않을까 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이러한 환경과 프레임에서는 비판하려는 대상을 두고 스스로에게 더욱 경계해야 한다고 봅니다.


더불어 자기가 싫어하는 것이 있다면 내가 어째서 그것을 싫어하는가에 대한 성찰도 한번쯤 해보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연장선에서, 내가 싫어하는 이것이 이런 행동-말을 했다면 그것을 비판하는게 합당한가 또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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