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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며,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 - E.Kant
by Ko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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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에 해당되는 글 855건

  1. 2022.05.12
    자본주의는 또 다른 한계점을 맞이하는가. 4
  2. 2022.05.04
    미국의 윤석열 패싱, 취임식에 민간인 보내기.
  3. 2022.05.02
    경찰 갑질 미국 정치인. 원칙이 지켜지는 사회.
  4. 2022.04.22
    시위는 왜 불편해야 하는가. 3
  5. 2022.04.21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과 방어적 민주주의의 개념. 보호받아야할 탄압자의 구분. 2
  6. 2022.04.18
    부패한 사회가 강할 수 있는가.
  7. 2022.04.07
    2030이 복지보다 성장을 추구하는 이유.
  8. 2022.04.05
    어휘력과 지적 능력에 대하여.
  9. 2022.04.05
    왜 저소득층은 독재자-극단주의 세력을 선호하는가? 2
  10. 2022.03.26
    윤석열의 예상된 미국 패싱과 친중 레드팀 외교 행보.
  11. 2022.03.12
    윤석열 당선 이후 중국과 일본이 품은 야심.
  12. 2022.03.10
    윤석열을 찍은 2030에게. 7
  13. 2022.03.07
    미국은 우크라이나를 제물로 러시아를 무너뜨리려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14. 2022.03.06
    1번남과 2번남, 부끄럽지 않은 목소리.
  15. 2022.02.27
    우크라이나의 전황에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몇가지 사항.
  16. 2022.02.25
    지정학 문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유.
  17. 2022.02.24
    폭력의 명분, 내 폭력은 정당하다.
  18. 2022.02.12
    동북공정에 대응 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 1
  19. 2022.01.30
    체제 완결성과 다음 체제로의 이행.
  20. 2022.01.23
    윤석열 지지자가 가지는 좁은 시야.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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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다른 곳에서 대화하다 나온 이야기인데, 전부터 생각을 좀 정리하던 게 있어서 여기에도 마저 정리하여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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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는 자본주의 체제 자체가 또 다른 한계점에 맞이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경제적 양극화, 부익부 빈익빈이 너무 심해졌습니다. 수치적으로도 수십 년 전과 지금은 말도 안 되는 임금격차, 자본 격차가 발생했어요. 부자와 그렇지 않은 사람의 격차는 80년대~90년대까지만 해도 그리 크지 않았던 걸로 압니다. 한국 또한 대졸자와 고졸자의 소득을 비교하면 예전에 비해 지금 격차가 훨씬 커졌고요.

 

 

 

문제는 어느 나라든 중산층이 얇아지고 있는 상황이며 이렇게 중산층에서 탈락하여 빈곤층, 저소득층이 되는 것은 정치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매우 위험하고 위태로운 상황으로 이어집니다. 사회불안과 불만은 더욱 커지고, 정치와 사회에 대한 고민과 관심 역시도 줄어들고 포퓰리즘이 횡행하게 됩니다.

 

또 이런 상황에서 파시즘이나 그와 유사한 극단주의가 발생하기 너무 좋은 환경이 됐죠. 나치 독일은 대공황과 인플레이션에서 급격히 성장했고요.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자신의 계층이 하락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경제적인 이익은 이념과 사상에 무관하게 호응받을 수 있는 주제이며, 그것이 설령 가능성이 없고 실현 의지조차 없더라도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처럼 하는 말, 혹은 국익을 저해하고 미래를 팔아서라도 당장의 생존에 직결되는 이익을 가져다준다면 사람들은 그것에 환호하고 지지를 표할 겁니다.

 

 

트럼프는 그러한 환경에서 당선되었죠.

 

 

 

문제는 이젠 물리적 방법(혁명)이나 정치적 방법(개혁) 역시 쉽지 않아 졌습니다. 혁명은 그 경제적 격차로 인해 사실상 불가능해졌습니다. 더 가진 사람들은 더 안전한 환경에서 보호받습니다. 예전처럼 테러, 암살을 하기에 쉽지 않게 되었고 운이 좋다면 설령 그런 공격에 부상을 입어도 발전한 의료기술의 덕을 볼 수도 있겠죠. 아무리 비싸도 의료비 내는 건 어렵지 않을 재산이 있으니까요.

 

부자들이 아닌 정권이나 정치 세력에 대해서도 마찬가집니다. 이전에 비해 전술적 자유도와 가능성은 너무나도 커졌고, 이를 훈련받지 않은 대중들은 결코 이겨낼 수 없습니다. 살상무기는 물론이고, 비살상무기를 사용하는 군대나 경찰집단 역시도 너무 강해졌습니다. 기술의 발전은 적을 상대하는 것 뿐만 아니라 대중과 국민들을 통제하는데에도 아주 효과적으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죽이지 않더라도요.

 

그렇다고 개혁 역시도 쉽지 않아졌습니다. 그 자본에 의해 언론, 학술계에 의도를 투영하기 쉬워졌습니다. 로비, 혹은 이권, 심지어 정치적 이념에 따라 학자들은 정치적 담론에 편향적일 수 있고 언론은 편파적으로 자기들이 지지하는 진영에 유리한 것만 취사선택할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무엇이 진실이고 객관적인 사실인지 구별하지 못할 것이며 알고리즘, 본인의 선택과 비토를 통해 원하는 이야기만 듣고 그렇지 않은 목소리를 거부하고요.

 

그렇게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걸 알아도 그걸 달성하기 위한 싸움이 너무 무용하고 무익한 걸로 싸우고, 그렇게 싸워서 얻은 것조차 무가치하게 됩니다. 이겨서 얻는 것도 없는데 싸우는 이유조차 핵심과 거리가 멀기 때문입니다.

 

 

처음 자본주의에 가장 심대한 위협을 줬던 사회주의, 공산주의가 등장했던 때와 유사한 상황에 치달아가는 게 아닌가 싶은데, 문제는 공산주의는 소련의 멸망과 함께 이미 실패한 체제가 되었고, 이에 대한 도전이나 견제가 가능한 대안, 혹은 경쟁적 이념은 등장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세계는 명실상부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세상이나 마찬가지가 되었고요.

 

즉, 자본주의는 현재 견제할만한 사상이 없습니다. 자본주의는 사회주의, 공산주의라는 경쟁자 때문에라도 살아남기 위해 사회주의적 요소들을 받아들였습니다. 그게 아니더라도 자유주의나 프로테스탄트적이지 않은 전통적 기독교 윤리, 인본주의, 애국심, 참정권과 함께 이어지는 대다수 노동자들의 요구 등 다양한 관점과 사유로 노동법이나 노동환경은 점차 나아졌고 자본주의는 지나친 비인간성이 줄어들어 현재와 같은 체제에 이르게 됐습니다.

물론 지금도 비인간적이고 지나친 부분들은 여전히 많이 보입니다만, 산업혁명 초기에 비하면 비약적으로 발전한 것 역시 사실이고, 그에 대한 이유 중 하나로 공산주의라는 강력하고 위협적인 경쟁자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죠. 노동자들이 혁명을 일으키기보단 자본가들의 이권 조금을 떼어 주는 것으로 그들의 불만이 역치(혁명)에 다다르기 전에 누그러뜨리는 쪽이 낫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소련의 멸망 이후 경쟁자가 없어진 자본주의는 다시금 산업혁명 당시와 유사한 상황에 놓이게 됐습니다. 지금의 노동환경과 자본-노동의 관계가 산업혁명 당시처럼 암울하진 않지만 지나치게 노동자와 자본가, 노동자 사이에서조차 많은 경제적 요소들의 갭Gap이 커진 상황은 지표상 얼마나 경제가 성장했든 불안한 상황이 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가지는 대부분의 불만은 경제적 원인 때문이고, 심지어 경제와 무관해보이는 사회적 갈등과 젠더갈등조차 경제적인 원인이 해결될 경우 적지 않게 해소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빈부격차는 말도 안 되는 수준으로 벌어지고 있고, 이는 코로나 상황이 더더욱 심화시켰습니다. 이 불만과 두려움이 공격성으로 이어지며 극단화 되면서 뚜렷하게 극단주의가 횡행하게 되는 게 지금의 현실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상황을 해소하기엔 모두가 잘못된 선택을 내리고, 올바른 선택을 내린 사람들조차 올바른 이유나 판단의 결과로 선택하지 않은 경우조차 많습니다. 어쩌다보니 결과적으로 그렇게 된 경우 역시 많다는 거죠. 또한 이 옳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다른 선택지에 비해 더 낫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지 객관적인 정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이유로, 문제는 경제가 아니라, 분배에 있습니다.

 

그 이전에 옳고 그름을 판단할 능력 자체가 거세되어가고 사멸해져가는 환경에도 있지요.

 

 

이 경제 문제에 대한 유일한 희망은 기계와 인공지능을 통해 인간노동의 완전 탈피를 통해 초과생산 초과수요로 자본 자체가 무의미해지는 것 정도 말고는 없지 않나 싶은데, 이것 역시도 자본주의 디스토피아가 될 가능성 역시 내포하고 있죠. 점차 진실과 거짓을 구분할 능력이 사라지고, 사람 또한 그럴 필요조차 못 느끼는 시대가 옴에 따라 우리는 정치적으로 교란된 메시지들로 인해 대중 대다수에게 이익이 오고 더 나아가 모든 인류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선택이 있다 하더라도 극소수의 기득권, 권력자에게 가장 유리하고 이익이 되는 선택을 위해 서로 피튀기게 싸울지도 모를 일입니다.

 

객관적이고 건조하게 바라보면 누구라도 알 수 있는 단순한 사실조차 정치적 이념과 진영논리에 따라 진실을 거부하고 피상적이고 파편화된 사실을 조합하여 전혀 다른 결과를 만들어내는 식으로 말입니다. 우리는 점점 넓은 시야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당연하지만 그 부와 권력을 쥔 능력 있고 실력 있는 사람이 자기 이익을 아무 이유 없이 때어줄 이유도 없고, 포기할 이유도 없습니다.

 

자본주의 디스토피아도, 사실 자본주의를 유지할 이유 자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계급의 존재 그 자체를 위해서 그러한 디스토피아 세상을 만들고 장기간 유지하는 것조차도 그런 이유에서 발생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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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당선인 취임식에 미 해리스 부통령 남편 참석 가능성
https://n.news.naver.com/article/437/0000297749

 

대통령의 부인은 영부인이고 부군이라고도 불립니다. 성별에 따라서요. 

 

부통령의 경우 세컨드 젠틀맨, 혹은 세컨드 레이디로 불립니다. 하지만 영부인과는 다르게 부통령, 그것도 미국 부통령은 권한이 큰 편이 아니고 부통령의 부인이나 남편은 어떤 공직에 있지 않는 한 그냥 민간인입니다. 물론 의전은 받습니다만.

 

 

그런데 대한민국이라는 1티어 동맹국의 대통령이 취임하는 자리에 어떤 공직에 있는 사람도 아니고 의전만 받을 자격이 있는 민간인을 보냈다는 거 자체가 상당히 멕이는 겁니다. 게다가 같이 보내는 공직자 역시 다른 장관도 아니고 노동부 장관이고요.

 

이게 무슨 의미인지 읽을 수 있다면 윤석열이 상당한 무시, 홀대를 받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걸 더 확실하게 보여지는 것이 바로 이어질 방한에 있어 일본보다 한국을 먼저 방문하는 국제관계 위상의 역전이 벌어졌는데, 명분을 어차피 방한할 건데 아무런 권한도, 권력도, 미국 정계 영향력도 없는 민간인(아마 특사 자격이면 다행일.)을 보내고, 노동부 장관을 보낸다는 건 취임식에 중요하지 않은 사람을 보낸다는 것이고, 취임식 때 한미간의 외교, 정책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노동부 장관이 무슨 외교 정책을 논하겠냐는 겁니다.

 

민간인인 해리스 부통령의 부군이야 법조계 종사 말고는 내세울 게 없고, 노동부장관의 경우 당연히 한미 공조에 어떤 의미가 있는 사람도 아닙니다. 국방도, 외교도, 경제교류와도 아무 관계 없는 사람이니까요. 

 

즉, 뒤에 있을 바이든의 방한 때 나올 이야기를 미리 조율하거나 언질해주지 않을 거라는 거고, 한국이라는 국가는 중요하게 여기되, 윤석열 정부에 대한 점수는 낮게 책정했다는 의미입니다.

 

그에 대해 읽을만한 맥락은 아래와 같고요.

 

문 대통령, 퇴임 후 ‘방한’ 바이든 만난다
https://m.khan.co.kr/politics/president/article/202204281535001

청, 만남 이유에 “상호 우정·존중 쌓여
”미국 측 먼저 요청…“세부 일정 협의 중”

 

윤석열을 만나지만, 이제 퇴임할 사람도 만나겠다는 겁니다. 한국에서 이런 예는 없었습니다. 현직 대통령이 취임한지 한달도 안 되는 시점에서 해외 정상이 왔을 때, 이전 대통령을 만나는 일은 거의 없었어요. 이는 지금 시작하는 새 정부를 무시하는 것으로 메시지를 줄 수도 있고, 이미 끝난 정권임에도 현 정부와 동등하게 여기는 모양새로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즉, 외교적 결례가 될 수 있다는 겁니다.

 

근데 바이든이 이미 끝난 정권에 퇴임한 전 대통령과 만나는 건 윤석열 정부를 무시하는 일이고, 이 자리에서 의미 있는 대화가 이루어진다면 윤 정부 입장에서는 상당히 골치아픈 일이 되는 거죠. 

 

이미 미국 정부는 차기 윤석열 정부에 대한 점수를 낮게 잡은 거에요. 그다지 기대하지 않고 있다는 거고, 윤석열 정부의 (자기 자신도 인지하지 못하고 저지르는) 친중 행보를 통제해야할 필요성만 생겼습니다. 그리고 당선된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취임하지도 않은 정부에 대해 바보도 알 수 있는 메시지를 준 거고요. 정말 바보라면 못 알아듣고 진짜 바보 같은 행보를 보여주겠지만 말입니다.

 

 

이와 반대로 보아야할 것은 중국의 움직임입니다.

 

尹취임식에 美는 부통령 남편·中은 시진핑 측근 왕치산 보낼듯(종합)
https://news.v.daum.net/v/20220503221113233?x_trkm=t 

 

미국이 보낸 사람과 중국이 보낸 사람을 비교했을 때, 미국이 중국 측에서 보낼 사람이 누군지 몰랐을 거라는 가능성은 없는 만큼, 중국이 보내는 이와 같은 급으로 맞춰서 보내는 것조차 안 했다는 의미입니다.

 

중국은 아주 극진한 대접을 해주려고 마음 먹고 있습니다. 사실 중국도 윤석열을 그다지 좋게 보는 건 아닙니다. 이미 대선 때 미국 쪽 외교관에게도, 중국 측 외교관에게도 무례를 저지르고 불쾌를 주었던만큼 좋게 봐줄 이유가 없죠.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중국의 국익을 위해선 외교와 국제관계 초보인 윤석열 정부가 훨씬 찔러볼 여지가 큽니다.

 

그래서 중국은 대한외교에 힘을 쓰겠다는 거고, 그만큼 공을 들이겠다는 겁니다. 이런 노력이 성과를 이룬다면 미국이 경계하는 박근혜 정부 시절의 충격적인 친중행보를 보여줄 위험성도 있죠.

 

 

여기서 특히 중요시 여겨야할 사람은 바로 왕치산이라는 인물입니다.

 

中, 올 10월 일왕 즉위 의식에 왕치산 부주석 파견
https://www.yna.co.kr/view/AKR20190811019300073

 

미국은 부통령도 아니고 부통령의 부군을 보냈지만, 중국은 왕치산 부주석을 보냈죠. 이걸 중국이 한국을 대접하기 시작했다거나 한국에 굴복했다 같은 의미가 아니라, 친중 가능성이 높은 정권으로 만들겠다는 의미로 읽어야 맞습니다. 반문 극우보수가 문재인 정부를 친중이라 하였지만 실상 문재인 정부와 중국 정부는 단 한번도 사이가 가까웠던 적이 없었죠.

 

왕치산 부주석은 시진핑의 전폭적인 신임을 받았고, 복심이자 그림자인 사람입니다. 집권 초기부터 권력 기반을 다진 반부패 사정 운동을 이끌었던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 상하이방을 비롯해 시진핑의 경쟁파벌 숙청을 지휘했던 사람이라는 의미고요.

 

심지어 이 사람이 일왕이나 어느나라 대통령이 즉위, 취임했다고 파견된 기록이 없습니다. 단 한번, 19년도 일본에 간 것을 제외하면요. 즉, 이 사람은 어지간하면 중국 내부에 있고 밖으로 나가지 않는 사람입니다. 외교를 총괄하지만, 외부로 거의 돌지 않는 사람이고요.

 

중국은 한국에 그런 사람을 보냈습니다. 

 

 

윤석열 지지자들은 중국이 한국과의 외교를 중요시 여기겠다는 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지 모르겠으나, 결코 긍정적으로 읽을만한 문장이 아닙니다. 그들도 잘 알듯이 중국은 믿을 수 없는 국가이고 가까이 할 수 없는 국가이며, 신뢰할 수 없는 잠재적 적국입니다.

 

그런 나라가 한국 외교를 중요시 여긴다면 그것이 한국을 위한 일일까요? 최소한, 한중 양자가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외교를 말하는 것이겠습니가? 한국은 친미 국가이고 친미 국가여야만 하는 시대적 당위에 있는 국가입니다. 한국이 중국과 친해진다는 건 중립외교나 줄타기 외교가 아니라 반미 친중 국가화 되어간다는 거고 이는 일본이 줄창 비난했던 레드팀이 되는 길인 셈이죠.

 

따라서 윤석열 정권이 들어서자 중국이 한국을 대접해주기 시작했다고 좋아할 게 아니라, 윤석열 정부가 친중적 행보를 하게끔 수작을 부리고 있다는 걸로 받아들여야 하고, 그러한 시도를 하겠다는 베이징의 판단이 어째서 나타났는가를 숙고해야 합니다.

 

 

한국은 보이는 것 이상으로 위험하고 아슬아슬한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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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 유세용 도메인 내려가고 페북, 트위터 계정도 폐쇄.

 

 

 

 

재선까지 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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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패함에 대해 자원이 가야할 곳에 가지 못했음을 의미한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자원이 가야할 곳에 가기 위해선 원칙이 지켜지기만 하면 되죠. 원칙을 어기고 사적으로 자원을 유용하거나 자신의 직위와 권한을 남용하여 부정한 방식과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누군가에게 어떠한 자리를 임명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물적 자원이 가야할 곳에 가지 못하고, 인적 자원이 있어야할 자리에 있지 못하게 하기에 부패한 겁니다. 그러나 아무리 부패하고 싶어도 정해진 원칙을 지킨다면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죠. 도로에서 도로교통법을 어기고 싶어도 중앙선을 넘지 않고 과속을 하지 않고 난폭운전, 보복운전을 하지 않으며, 신호등을 비롯한 원칙을 다 지킨다면, 아니. 지키도록 강제된다면 하고 싶어도 못합니다.

 

위 사건은 해당 공화당 정치인이 잘못을 했고, 그에 대한 보복으로 그의 정치생명을 끝내버린 게 핵심이 아닙니다. 그건 결과일 뿐이죠. 핵심은 경찰이 직위와 권한, 권력의 유무와 관계 없이 법이라는 원칙을 끝까지 지키고자 했고, 지켰으며, 단지 그 뿐입니다. 그것이 사람들에게 알려져 민주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시민(=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는 시민)의 선택과 그들의 선택권을 고려할 수밖에 없는 민주사회의 원리 하에 발생한 결과인 거죠.

 

 

한국에서 높은 위치에 있는 이가 휘두를 수 있는 권력과 권한에 두려움을 느끼고 원칙을 접는 경우는 참 많았습니다. 심지어 이에 대한 공분과 지적을 천박한 냄비들의 떼법이라고까지 폄하하죠. 정작 핵심에 대해서는 눈을 돌리면서 말입니다.

 

 

원칙이 지켜지는 사회가 더 건전하고 부패하지 않은 사회일 겁니다. 미국이라고 완벽한 건 아니지만, 적어도 어떤 면에서 한국보다는 나은 면이 있는 건 사실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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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30 - [취미/이야기] - 아프리카의 시위 민주주의.

 

 

전국 장애인 차별 철폐연대에서 지하철 시위를 한다고 사람들이 불편해하고, 욕을 합니다. 그건 당연히 그럴 수 있습니다. 근데 왜 시위를 사람들 불편하게 하냐며 욕하더군요. 근데 사실, 시위의 목적 중 하나가 바로 사람들 불편하게 하는 겁니다.

 

애초에 시위가 왜 발생하느냐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시위란 무언가를 바꾸기 위해 밖에 나가 직접적으로 요구하는 겁니다. 어느 한 사람에게, 어떤 단체에게 요구했는데 들어주지 않았다면 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요구하게 만드는 게 시위의 목적입니다. 시위는 내 목소리를 들어달라는 요구이고,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달라는 요구예요. 내 말이 타당하다면 도와달라고요.

 

전장연의 과거 활동내역이 어떻든, 지금 그들이 주장하는 건 장애인 이동권 문제입니다. 이에 대해 처음 들어본 사람들도 많을 겁니다. 애초에 관심이 없었을테니까요. 그리고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그들이 시위를 하는 겁니다. 장애인들은 어딘가로 이동하려면 돈도 많이 들고 시간도, 품도 많이 드니까 이걸 좀 해결해달라고, 편의를 개선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요구하는 겁니다.

 

 

애초에 정부에, 국가기관에 요구했는데도 들어주지 않으니까 밖에 나와서 사람들 불편하게 하는 거고요. 왜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냐고요? 그래야 들어주니까요. 불편하지 않았으면 누가 관심을 가져줍니까. 어디 산골짜기로 들어가서 나무와 개울 앞에서 목 터져라 소리질러봐야 기사에 한 줄 나옵니까? 거기서 누가 뭘 하고 있는지 세상은 몰라요. 아무도 들어주는 사람이 없으니까요.

 

그래서 사람들은 거리로 나오고, 교통을 막고, 고성을 내고, 시민들을 불편하게 하는 겁니다. 그래야 관심을 가지거든요. 사람들의 역할은 저들이 우릴 불편하게 하니까 개새끼고 개새끼들은 몽둥이로 때려서 내쫓아야 한다는 게 아니라, 그 사람들이 왜 저런 시위를 하는 거고, 그들이 하는 말은 무엇이며, 왜 밖에 나와서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면서까지 시위를 하는가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시위가 불법이고, 사람들 불편하게 하고, 피해를 발생시키는 건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절차가 신념보다 위에 있으면 안 되는 것처럼, 다소 문제가 있더라도 그들의 주장과 요구가 형해화되는 건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그들이 하는 말이 옳다면 그 표현 방법이 잘못됐더라도 그에 대해 타당성을 인정해야 해요. 즉, 생각해봐야할 문제라는 겁니다.

 

 

시위하는 사람들의 주장이 옳고 타당하다면 그에 대해 같이 요구해줘야 합니다. 그냥 그에 대해 관심을 가져주기만 해도 되요. 인터넷에 한번 검색해보고, 관련 기사 하나 찾아서 보기만 해도 그들에게 도움이 됩니다. 시민들의 관심과 그 이슈에 관심이 몰리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결정권자들에게 눈에 보이는 수치로 다가오는 요구가 됩니다. 왜냐고요? 그게 민주주의니까요. 시민들이 요구하면, 그들은 요구에 부응해야 합니다. 그것이 타당하지 않기에 들어줄 수 없다면 그 또한 대의 민주주의고요.

 

 

건전한 민주사회라면 소수자, 약자의 시위에 대해 '왜'를 생각하고, 그것이 타당한가를 먼저 따져야 합니다. 우리가 관심이 없었던 사각지대에서 어떠한 불편과 문제가 있었는지를 알아야 하거든요. 절차와 제도는 중요하지만 그것이 약자를 위해 기능하지 않을 때 저항할 수 있는 것도 하나의 방식입니다.

장애인 단체가 불편을 야기하며 시위를 했을 때, 그것이 타당하다면 그들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어 지적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가장 올바르고 적절한 해법입니다. 그렇게 사회가 진보하는 거고요. 그렇지 않고 지적질, 훈수질, 비난질만 한다면 진보할 수 없어요.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없는데 그런 행동이 어떻게 정의롭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용률 낮은 교외 버스정류장이 불편하다고 의자 세워달라, 비를 피할 수 있게 지붕을 설치해달라. 시에 요구하면 실제로 들어줍니다. 제가 경험해본 거거든요. 장애인들이 이동하기 불편하다고 요구한다면 들어줄 수도 있어요. 불가능한 거 아닙니다.

 

그들이 시위하면서 출근도 제대로 못하겠고, 불편하고, 시끄럽다면 그들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보고, 그것이 타당하다고 생각된다면 그들의 목소리에 힘을 실어주면 됩니다. 문제가 해결되면, 그들은 자연스럽게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들은 자신이 요구하는 결과를 달성했음에도 세상이 끝날 때까지 시위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않아요. 시끄럽다고 쫓아내는 건 올바른 게 아닙니다. 그들이 왜 시위를 하는지를 따지는 게 옳고, 그들의 요구를 따지는 게 올바른 거죠.

 

그래서 시위자들은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 겁니다. 그래야 들어주고 관심 가져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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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정치나 철학 이론들도 사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실패했을 때는 드러나지 않을 수 있었던 결함들과 약점들이 성공했을 때에는 분명하게 드러난다. 대중 정부가 단지 꿈으로 생각되거나 옛날옛적의 까마득한 과거에 존재했던 것으로 책에서만 읽을 수 있는 그런 일이었을 때에는, 국민이 그들 자신을 지배하는 그들의 권력을 제한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은 자명한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한 생각은 프랑스 혁명 같은 일시적인 일탈들에 의해서도 별로 동요되지 않았다. - 그런 일탈 중에서 최악의 것은 대중적인 제도들의 지속적인 활동이 아니라 소수의 사람들이 갑작스럽게 발작적으로 일어나서 왕이나 귀족에 의한 전제정치를 와해시키고 권력을 장학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하나의 민주 공화국이 지구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서, 국가들의 공동체에서 가장 강력한 구성원들 중 하나로 자리잡았다. 선거를 통해 선출되고 국민에게 책임을 지는 정부는 국민이라는 기존의 위대한 존재의 관찰과 비판 아래 놓이게 되었다. 이제는 "자치"라든가 "국민 자신을 지배하는 국민의 권력"이라는 문구들은 사안의 실상을 제대로 표현해내지 못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권력을 행사하는 "국민"이 그 권력 행사의 대상인 국민과 언제나 동일한 것도 아니었고, "자치"라는 것도 각자가 자기 자신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자기를 제외한 나머지 모두에 의해 지배를 받았다. 또한 국민의 의지라는 것도 현실적으로는 국민 중에서 가장 수가 많거나 가장 능동적인 집단, 즉 다수파, 또는 다수파로 인정받는 게 성공한 사람들의 의지를 의미한다. 따라서 국민은 그들 중의 일부를 압제하려고 할 수도 있기 때문에, 그 밖의 다른 권력 남용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그러한 권력 남용에 대해서도 예방조치가 필요하다.

따라서 집권자가 공동체, 즉 공동체 내에서 가장 힘 있는 집단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이 정착되어 있다고 할지라도, 개개인에 대한 정부의 권력을 제한하는 것은 그 중요성을 조금도 잃지 않는다. 이러한 사고는 사상가들의 지성에도, 그리고 유럽 사회에서 민주주의가 자신들의 현실적이거나 가설적인 이해관계에 불리하게 작용하는 저 중요한 계급들의 취향에도 똑같이 매력적으로 받아들여져서 어려움 없이 자리를 잡아왔다. 그리고 이제는 정치 사상 속에서 "다수파의 폭정"은 사회가 늘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악들 중의 하나로 여겨지는 것이 일반화 되었다.

      -"다수파의 폭정"(The Tyranny of the majority)은 프랑스의 정치학자이자 역사가인 토크빌이 자신의 저서인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한 말이다. 그는 영국에서 자유주의자들과 교류하였고, 밀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다수파의 폭적은 그 밖의 다른 폭정들과 마찬가지로 처음에 공권력의 행사를 통해 행해졌고, 지금도 여전히 사람들은 그것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이 문제를 깊이 숙고한 사람들은 사회 자체가 폭군이 되었을 때, 즉 사회가 자신의 구성원인 개개인들에게 집단적으로 폭정을 행할 때, 그 폭정의 수단은 정치인들의 손을 빌려 행하는 것들에 국한되지 않는다. 사회는 자기 자신의 명령들을 집행할 수 있고, 실제로 집행한다.

그런데 사회가 올바르지 않고 잘못된 명령들, 또는 자신이 개입해서는 안 되는 일들과 관련된 명령들을 내리는 경우에는, 그렇게 해서 이루어지는 사회의 폭정은 온갖 종류의 정치적 압제보다 더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것이 되고 만다. 그 폭정은 통상적으로 정치적 압제에서와는 달리 극단적인 형벌들을 사용하지는 않지만, 개개인의 삶의 모든 영역에 아주 깊이 파고들어서 개인의 영혼 자체를 예속시킴으로써,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거의 남겨놓지 않기 때문이다.


개인적 자유의 필연성.
따라서 공권력의 폭정을 막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지배적인 여론이나 정서의 폭정도 막아야 한다. 또한 사회가 공격적인 처벌 이외의 다른 수단들을 사용해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념들과 실천들을 그들의 행위규범으로 받아들이도록 강요함으로써, 자신의 방식과 부합하지 않는 개성(individuality)이 발전하는 것은 물론이고 가능하면 형성되는 것조차 차단하고,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그들의 인격을 사회가 정한 방식으로 만들어나가도록 강제하는 것도 막아야 한다. 집단의 의사가 개개인의 독립성에 합법적으로 간섭하는 데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다. 그 한계를 규정해서 넘어서지 못하게 하는 것도, 정치적으로 독재를 막는 것만큼이나 인간다움 삶을 살기 위한 적절한 여건을 조성하는 데 필수불가결하다.


- 존 스튜어트 밀, 자유론.

 

 

중요한 부분은 끝자락의 다수파의 폭정부터 시작합니다. 이번 글에선 이 부분과 함께 방어적 민주주의 개념을 끌고와서 밀의 자유주의 사상을 짧게 소개하고 그 이후 약 백년 뒤 나치를 겪은 이후에 구체화되어 나타난 방어적 민주주의로 보완을 시켜 밀의 자유론은 중요한 고전이지만 그것을 진리로 삼을 수는 없고 이후 발전된 자유에 대한 논의 역시 수용해야 한다는 내용의 글을 쓰고자 합니다.

 

왜 일베 류 극단주의는 보호받지 말아야 하고, 쫓아내야 하며, 그렇지 않은 주장과 자유의 주체는 그들 극단주의자들을 공격하면서도 보호 받아야 하는가를 이야기하는 것이 이 글의 핵심이 될 것입니다.

 

물론 제 인문학, 철학에 대한 이해도는 아마 채 학부생 수준도 되지 않을 것이기에 그 깊이도 얕고 얕은 만큼 많은 비판점이 있을 수 있습니다. 감안하고 봐주시기 바랍니다.

 

 

여기저기서 윤 정부의 민주정 파괴를 함의하는 움직임과 발언들, 그리고 그러한 정부를 지지하는 집단이 기세등등한 것을 보면서 마침 떠오른 밀의 자유론 내용을 먼저 소개했습니다.

 

밀은 국가, 정부로 대표되는 공권력의 폭정이 가져오는 위험성에 대해서 말했지만 거기서 더 나아가 지배적인 여론과 정서의 폭정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처음 일베를 접했을 때 우리는 그것을 소수로 여겼습니다. 저는 그것이 금방 극우보수 정서의 중심 내지는 핵심을 차지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일베가 있기 이전부터 그러한 사상과 가치관을 가진 이들을 보아왔기 때문이고, 그러한 세계관을 가진 이들이 모여 디씨에서 어떠한 분위기가 형성되는 것을 보았고, 그것이 일베라는 이름으로 구체화된 것을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일베 류 가치관이 세계관으로 자리잡은 것이 이 시대의 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베를 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라 말할 것이고, 실제 인간관계에서 그런 사람을 보지 않았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보수우파임에도 일베를 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있고요. 하지만 일베를 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만큼 일베를 하는 사람 역시 많은 것이 사실이고, 실제 인간관계에서 일베임을 숨기고 평범함을 연기하거나 관리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무엇보다 실제 일베 사이트를 하느냐 하는 피상적인 조건보다 일베 류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것이 핵심이고요. 

 

그렇기에, 일베 류 가치관은 이미 극우보수 세력의 핵심 가치관이거나, 최소한 그 중 하나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애초에 일베 류 세계관은 70~90년대 극우보수 가치관의 변형/발전/현대적 적응의 결과이지 없던 것이 생겼거나 이식된 개념이 아닙니다. 일베 탄생 이전부터 호남에 대한 멸시와 진보좌파에 대한 혐오, 자국민에 대한 차별과 공격을 애국이라 착각하고 그 근거를 합리, 합리적인 것라고 풀이하는 등의 행태는 결코 특별한 게 아니었습니다.

 

 

"공화당원으로서의 당신 생각도 얘기할 각오가 돼 있어?"
"공화당원인게 무슨 소아마비라도 걸린듯이 말하는군."

 

미드 뉴스룸에서 나온 대사입니다. 주인공 윌 매커보이는 자신의 여자와 바람을 피운 기자를 자신의 스튜디오로 불러와 토론회 준비 중인 자신과 그 팀원들을 관찰하고 기사를 쓸 수 있게 해주면서 나온 대사입니다.

 

어떤 정당이 바보 같은 행위를 한다면 그 지지자들 역시 창피할 것이고 지지에 회의가 들 것입니다. 당시 공화당은 빠르게 극우화, 정확히는 티파티화 되어 갔었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비판과 지적이 있었지만 동시에 그들에 영합하려는 움직임 역시도 거대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각본가인 애런 소킨은 그것을 공화당원 캐릭터의 이름으로 이렇게 비꼰 것이죠. 사실, 한국에서도 아주 쉽게 찾아볼 수 있었고, 지금도 찾아볼 수 있는 겁니다. 저건 드라마이기에 아주 점잖게 표현된 거고요.

 

실제 한국에서는 이런 식으로 나옵니다.

 

"대깨문이 아직도 있네?"

 

마치 문재인 지지가 비상식적이고, 부끄러워해야할 것이고 창피해해야하는 것처럼 표현합니다. 마치 내가 문재인 지지자면 조롱을 받는 것이 당연하고 조롱 받아야 하는 행위인 것처럼요. 이는 그 사람의 정신, 이념에 대한 조롱이자 망신주기입니다. 망신을 주고 부끄럽게 만들어서 그들이 정치적 견해를 자유롭게 밝히는 걸 불가능하게 입을 막는 겁니다. 마치 장애인들이 자신의 장애 부위를 남들에게 보이기 부끄러워하는 것처럼요. 혹은 자신의 반사회적 가치관(Ex.소아성애 등)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처럼요. 

 

 

"사회가 공격적인 처벌 이외의 다른 수단들을 사용해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념들과 실천들을 그들의 행위규범으로 받아들이도록 강요함으로써, 자신의 방식과 부합하지 않는 개성(individuality)이 발전하는 것은 물론이고 가능하면 형성되는 것조차 차단하고,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그들의 인격을 사회가 정한 방식으로 만들어나가도록 강제하는 것도 막아야 한다."

 

일베 류 가치관을 지닌 이들은 민주당과 관계된 것에 대해 대깨문, 형보수지 등 다양한 표현을 사용하며 공개적으로 린치를 가하는 등 공격합니다. 그들이 어떠한 목소리를 내는 것을 불허하고 그들이 스스로를 검열하게 만들어 공개적이고 많은 조회가 보장된 공간 내에서 자신들의 가치관에 반하거나 맞지 않는 사상이 등장하는 것을 봉쇄합니다. 즉, 그들은 동집단의 것과 맞지 않는 개성을 배제하려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이 어찌 되었든, 공격받고 린치 당하지 않기 위해 사람들은 침묵하거나 그들의 말에 수동적인 동조를 해야만 합니다. 특히 어떤 공동의 목적이 있을 때는 지금의 상황을 무너뜨리지 않기 위해 더더욱 그렇습니다. 이는 특히 협동과 경쟁이 필요한 게임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물론, 같은 원리가 작동하는 직장생활에서도 마찬가지고요.

 

인터넷의 공개적인 장소에서 점차 일베적 가치관을 가진 이들이 다수의 목소리를 점하고 그렇지 않은 소수의 목소리를 공격하는 것으로 확인할 수 있는 현상입니다. 특히 이는 웹툰 댓글창 같은 비정치적인 공간이면서도 여러 세대가 모이는 장소(주로 젊은 세대 위주)에서도 확인할 수 있죠.

 

 

일베는 인터넷을 하는 이들이, 어떠한 활동공간과 재미를 추구하는 이들에게 꽤 훌륭한 장소가 되어주었고, 유머 자료에 섞인 정치색과 사상적 용어들을 통해 10대~20대 사용자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고, 그들은 10년 동안 성장하고, 그러한 사상을 재생산, 전파하면서 더 넓은 영역을 차지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일베적 가치관은 세대와 거의 무관하게 동일한 의식을 공유하게 해줬고 다르게 말해 이것은 극우보수라는 진영 내에서는 세대에 얽매이지 않은 광범위한 가치관으로 기능함을 말합니다. 앞서 말했듯이, 극우보수의 가치관/세계관의 핵심을 차지했다는 말입니다.

 

이제 다시 올라가 위에 따로 인용한 존의 말을 다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밀은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다면 개인은 그것이 아무리 위험한 사상이라도 자유롭게 가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네오나치, 파시스트, 제국주의자, 인종차별주의자, 역사 수정주의자, 종교적 원리주의자 등 사회를 위험하게 할 수 있고, 실제 위험을 발생시키는 이들과 그들의 사상조차도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말입니다. 

 

획일성과 전체적은 자유의 적이며, 진리는 여러 다면적인 특성을 지니고 복잡한 것이라 말했던 것처럼 위험한 사상이라도 그것을 원천적으로 배제하는 것은 도리어 자유, 혹은 민주주의라는 이름을 기치로 한 다수파의 폭정인 동시에 자유를 훼손하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가령, 소아성애자 또한 그러한 가치관이나 성벽을 가질 수 있지만 실제 범죄로 이어지지 않는 한 그것에 대해 처벌할 수는 없습니다. 히틀러를 위인으로 모시고 그의 사상과 가치관에 동의한다고 해도 실제 유대인을 비롯한 유색인종, 슬라브족에 대한 테러를 감행하는 등의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다면 법과 자유의 이름 하에 보호받아야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는 동시에 이상적이고 이론적입니다. 그러한 반사회적이고, 반자유적이며, 반민주적인 사상의 공격성은 단순히 사상의 자유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아니, 모든 사상이란 결국 행동으로 증명되기 마련이며, 그 사유는 그것이 옳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정의롭고 올바른 일을 행하는데 부끄러움을 느끼지는 않습니다. 잘못된 것을 알면서 하는 것과 다릅니다.

 

“우리의 상대가 ‘그래, 전에 우리는 당신에게 표현의 자유를 보장해주었잖아’라고 한다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래, 당신들이 우리에게 그렇게 했지! 하지만 그건 우리가 당신들에게도 그렇게 해야한다는 증거가 아냐! 당신들이 멍청하다는 증거일 뿐!’”

- 파울 요제프 괴벨스.

 

그들은 자유를 조롱하고 목적 달성을 위한 도구로 사용합니다. 이는 무기가 될 수도 있고, 때로는 방패가 될 수도 있습니다. 밀은 모든 자유는 보호받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위르겐 하버마스는 관용의 개념을 통해 누구도 자신의 선호와 가치관에 따라 무엇은 허용하고, 무엇은 배제해야 한다고 정할 권리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민주주의에 사상의 자유는 기본질서의 핵심 중 하나이고, 위험한 사상을 골라 베재하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민주주의의 핵심요소가 사라지는 것이라 말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어적 민주주의는 민주주의가 제도적으로 자살하지 않기 위해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개념으로 민주주의를 지키도록 발생했습니다. 나치는 민주적인 절차를 통해 권력을 획득했고, 독재국가가 되었습니다. 박정희 또한 4대 대선 이후 여러번의 대선에서 승리하는 형식으로 독재정권을 유지했습니다. 

 

독일에선 사회주의 제국당과 독일 공산당에 위헌판결을 내려 정당을 강제 해산시켰습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정치 정당에 대한 조치였을 뿐, 그들의 지자자에 대한 조치는 전혀 아닙니다.

 

자유의 적에게 줄 자유는 없다는 루이 드 생쥐스트의 말처럼 자유와 민주주의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유와 민주주의의 적을 베재해야 합니다. 윤석열 당선인은 입법권 박탈을 이야기했고, 이에 동조하는 집단 역시 존재합니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하는지에 따라 그 위험성 평가는 사람마다 달라지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법권 박탈을 입에 올렸고, 그것에 동조하는 집단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으며 설령 비유적인 표현이라고 해도 할 말이 있고 못 할 말이 있는 것처럼, 그런 식으로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말은 생각의 그릇이고, 말이라고 다 같은 말이 아닙니다. 농담이라고, 비유라고 말한다고 그것이 (설령 일시적인) 진심인지 아닌지 그 자체로 판별하긴 어려운 까닭입니다.

 

 

일베 류 가치관은 극우보수에게 핵심적인 것이 되었고, 결코 소수가 아닙니다. 오히려 점차 다수를 차지해가는 과정에 있다고 볼 수 있고, 사실, 이미 다수이거나 다수에 가까워졌다는 것인 현실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러한 이들이 사회의 다수를 차지한다면 그들과 다른 이들을 공격적으로 배제할 것입니다. 이미 다양한 집단을 차별하고 공격하는 것처럼요.

 

윤석열 당선자가 유퀴즈에 나왔을 때 사람들은 방송 자체와 유재석, 조세호의 리액션, 진행을 지적하고 공격했습니다. 배제는 그런 식으로 이루어집니다. 잘못을 했든 안 했든, 그들의 정서에 부합하지 않으면 마치 잘못을 한 것처럼 손가락질하고, 활동은 물론 존재조차 부끄럽게 만들어 망신주며, 공격하여 밀어냅니다.

 

 

그렇다면 그 반대는? 그 반대 역시 마찬가지의 활동을 했고, 하고 있지 않느냐 말할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진보, 좌파, 민주당 지지자 역시 그들에 반대되는 이들을 공격하고, 면박주고, 린치하며 쫓아내어 배제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 글에서 피상적인 현상만 바라보는 것은 결코 본질에 다가가 핵심을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고 여러 차례 이야기한 바가 있듯, 같은 행동 역시도 다르게 평가받을 수 있습니다.

 

예컨데, 일베-펨베 류는 반사회적인 행위를 하기 때문에 공격당하고 배제 당하는 것이고, 진보좌파의 경우 그 자체로 공격받고 배제 당하기도 한다는 겁니다. 일베나 펨베가 사자 명예훼손과 조롱, 특정 성별이나 직종, 지역에 대한 차별과 공격을 하여 반발을 받는다면 그것은 정당합니다.

 

그러나 진보좌파가 특정 정당이나 정치인을 지지하거나, 반대로 특정 진영의 집단이나 인사를 비판한다면 그 자체로 비난을 받고 배제당합니다. 심지어 그 당사자가 정치적 견해나 이념, 사상을 밝히지도 않았고, 어떤 정당이나 정치인을 지지한다고 밝히지도 않았으며, 그것을 근거할 수 있는 활동 내역 따위를 알 수도 없음에도 그런 일이 벌어집니다.

 

실제로, 박근혜나 박근혜 정부의 정책, 윤석열에 대한 비판을 했을 때, 대깨문을 비롯한 규정, 낙인을 통한 공격이 발생하곤 했습니다. 이보다 더욱 노골적이고 전통적인 사례는, 독재정부나 보수정부 대한 비판을 가하고 저항하는 모든 이를 빨갱이라고 규정하여 공격했습니다.

 

따라서, 언어와 용어가 달라졌다면 그 핵심 원리가 달라진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일베 류 가치관을 가진 사람과 그렇지 않은 반대자들을 비교했을 때, 일베 류 가치관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공격받고 배제 당하여 사회의 지배적 가치관이자 세계관으로 작동하지 않도록 탄압해야 하고, 그들에 대한 공격자는 대체로 자유와 민주주의에 의해 보호받아야 마땅합니다.

 

 

존 스튜어트 밀은 1800년대 사람이며, 그의 대표적인 저작 자유론은 1859년에 출간된 것입니다. 그리고 약 100년이 조금 덜 되었을 때, 자유는 무기이자 방패가 되어 자유의 적이자 민주주의의 적에 의해 자유와 민주주의를 살해하는데 사용되었습니다. 자유와 민주주의에게 그 사건은 피살이 아니라 자살이었습니다. 국민들이 그것을 바랬기 때문입니다.

 

구스타프 라드브루흐는 1800년대 중후반에서 1949년까지의 인물입니다. 칸트학파의 일원이었고, 법학자로서 법의 3요소인 정의-합목적성-법적안정성의 개념을 처음 고안해낸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는 칸트주의의 관점으로 가치상대주의를 주장했고, 무질서보다 부정의가 낫다는 가치관을 견지했습니다. 그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건국에 큰 기여를 한 사람이었고, 이후 나치에 의해 강단에서 쫓겨난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는 모든 가치를 존중하기 위해 나치를 용인했고, 그들에 의해 강단에서 추방당했고, 법을 제정하여 악행과 폭정을 했음에도 침묵했습니다. 전후, 그는 강단해 복귀하였고, 저명한 법학자였던 라드브루흐는 새로운 독일의 법을 세워야 했는데, 가치상대주의자였던 그가 나치의 수많은 악핵을 목격하고, 경험했기에 자신의 사상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죠.


그래서 그는 나치에 대한 반면교사로, 법률적 불법과 초법률적인 법 개념을 도입했으며, 자신이 고안한 법의 3요소 중 법이념의 1순위 역시 법적 안정성에서 정의로 수정했습니다. 그렇게 그는 가치상대주의자였음에도 방어적 민주주의를 도입하게 되었죠.

 

 

존이 자유론을 냈던 시대와 나치 시대는 약 100년의 간격이 있습니다. 그리고 바이마르 공화국의 붕괴와 나치당의 승리, 2차대전이 인류에게 전해준 교훈은 너무나도 중요하고 거대합니다. 자유론은 매우 중요한 지성을 담은 서적이고, 여전히 우리를 가르치는 고전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존이 아무리 위대한 인물이고, 그의 사상이 담긴 자유론이 얼마나 위대한 서적이든, 그것은 결코 진리로 기능할 수 없는 것이고, 자유에 대한 담론과 법철학 역시 발전해왔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발전을 수용해야만 하고, 존의 말을 금과옥조로 다루어 존의 말과 다른 것을 열등하거나 저열하거나 모자란 것으로 취급해서는 안 됩니다. 존의 가치관은 존의 가치관이며, 그것을 옳다고 여기어 자신의 사상 안에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만, 동시에 비판받고 반박될 수 있는 과거의 말이기도 하다는 것 또한 인정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또 다시 다른 형태의, 그러나 여전히 같은 핵심을 간직한 일베 류 가치관과 그 세력은 배제해야하며, 그들을 공격하는 이들은 보호 받아야 합니다. 자유와 민주주의의 적이 우리 사회를 지배해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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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나 사회에 있어서 부패함은 자원이 필요한 곳으로 가지 못했음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자원은 돈, 현물, 물자, 상품, 재료 뿐 아니라 노동력과 관리 및 조율, 심지어 절차 진행와 판단 등 인간이 하는 역할 또한 포함합니다. 가령, 성이나 나이, 지역을 근거로 차별적인 판단을 내리거나, 혹은 자격이 없거나 부족한 사람이, 혹은 자격은 있으되 정당한 절차와 방식을 무시하고 어떠한 직위를 차지하는 경우 또한 있겠지요. 소위, 낙하산이라고 불리는.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가 보이는 행태를 보았을 때, 강하다고 여겼던 러시아의 치명적인 추태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는 그들이 부패한 군대이기 때문에 자원이 필요한 곳에 제대로 분배되지 않았고, 그탓에 개인무장부터 기갑 장비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정확한 작전 수행이 불가능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특정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자원이 주어지지 않았는데 해당 목적을 달성하기란 불가능하거나 극히 어렵기 때문입니다. 가령, 폭탄이 없이 폭파 작업을 할 수가 없고, 먹을 수 없는 전투식량을 가지고 장기간 작전 수행은 불가능하며, 기갑병력을 전개하여 보병과 함께 전선을 밀어야 하는데 전차, 장갑차가 없어졌으면 제병합동 작전은 불가능하겠죠.

 

이는 필연적인 실패. 즉, 패전으로 이어집니다. 아무리 강한 군대라도 부정부패로 인해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패배하게 됩니다. 역사에는 그러한 크고 작은 사례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가장 처참한 사례로는 토목보의 변, 국민방위군 사건 등이 있습니다. 지금의 러시아군의 졸전도 그러한 크고 작은 부정부패가 쌓이고 모여서 발생했죠.

 

 

군대에서는, 정확히 말해서 전쟁 상황에선 적군과 직접적으로 부딪히며 증명하기 때문에 그 결과가 빠르게 증명되는 편입니다. 부패한 군대는 그렇지 않은 군대와 싸워 패배할 것이고, 패배한 이유를 분석하게 될 것이며, 결국 드러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회에서는 그렇게 빠르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성수대교는 79년도에 최초 개통되어 94년도에 붕괴했습니다. 삼풍백화점은 89년도에 개점하여 95년도에 붕괴했죠. 이건 그나마 눈에 띄게 보이는 사례들입니다. 그렇지 않은 사례들, 심각하지 않다고 여겨지는 크고 작은 부정부패와 비리는 정말 많습니다.

 

그 옛날 촌지부터 시작해서 부동산 관련 부정부패, 주식시장 관련 경제범죄, 돈과 인맥, 지위를 통해 자기 자식에게 유리한 스펙을 만들어주기도 하고, 그 인맥을 이용해 우월한 지위와 직위를 획득하는 경우도 있으며, 은퇴나 사직 후 회사의 한 자리를 줄 수도 있기 때문에 유독 편파적인 판결이나 기소, 변호를 하는 경우 역시 존재합니다. 전관예우는 대표적인 법조 비리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죠.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사회의 크고 작은 영역에서 자원이 필요한 곳에 가지 못하도록 합니다. 처벌받아야할 사람이 처벌받지 않고, 더 자격 있는 누군가의 자리를 다른 사람이 빼앗고, 내가 투자한 돈이 다른 사람 주머니에 가게 되며, 다른 사람이 가져야할 집을 부당한 방법으로 얻어 큰 차익을 남기기도 합니다.

 

필요한 자원이 필요한 곳에 가지 못했기에 누군가는 반드시 피해를 보게 되고 그것들은 쌓이고 쌓여 거시적인 수치에도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또한 더욱 중요한 것은, 그러한 불공정한 경험을 한 사람들은 물론 전파되어 그러한 사례를 접한 이들에게도 점차 사회적 신뢰를 잃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한 신뢰의 상실이 확대되어가면 협력과 협동보다는 개인적 성취와 이익에 매몰될 것이고 우리 사회의 개인들은 분절되어 파편화될 것입니다.

 

민주주의 체제임에도 대의를 위해 국민 개개인이 힘을 모으는데 동의하기 어려워질 것이며, 이는 우리 사회가 어떠한 도전을 받을 때 그것을 이겨나가기 어려워짐을 의미합니다. 당장 경찰, 검찰, 법원에서 보여주는 성차별적인 사례들은 남성들이 여성 피해자를 위해 나서기보단 스스로의 안위를 지키는 것을 더 중요시하는 분위기를 만들었습니다. 우리 사회가 세대, 혹은 특정 계층의 경제적/사회적 고난을 해결하기 위해 자신의 이익을 일부 포기할 가능성은 점점 줄어들 것이고, 자신에게 별다른 손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돕는 것에 인색하게 될 것입니다.

 

 

차별하고 분열시켰기 때문에 우리는 힘을 모으지 못할 것이고, 그 차별과 분열의 근거는 불평등 그 자체에서 나옵니다. 부패는 불평등의 한 형태일 뿐이고요. 필요한 자원이 다른 곳으로 가는 것 자체가 불평등합니다. 우리에게 와야 마땅한 자원이 누군가의 주머니로 가는 것이니까요.

 

 

부패는 위기의 순간에 그 해악함을 드러냅니다. 그 자체로도 해악하지만, 위기의 순간에는 그것이 특히나 두드러지죠. 바이욘트 댐 역시 부정부패로 인해 수천명이 사망했습니다. 성수대교는 32명, 삼풍백화점은 502명이 사망했습니다. 누군가가 필요한 자원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빼돌렸기 때문이고 우리 사회에 거대한 상처와 충격을 발생시켰지요. 이러한 사고는 부정부패가 만들어내는 해악 중 하나일 뿐이고, 한 종류일 뿐입니다.

 

동남아 등의 후진국에서 부패는 그 자체로 경제를 이루기도 합니다. 뇌물을 통해 특정 절차가 진행되기도 하고, 공정한 결과나 유리한 결과를 위해 뇌물을 사용해야 하기도 하죠. 그러나 반대로 이것은 그 사회의 발전을 저해하는 가장 거대한 원인 중 하나가 됩니다. 뇌물을 받지 않는다면 공정한 결과를 기대할 수 없고, 뇌물을 통해 유리한 결과를 만들어내는 부정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누군가의 성공과 기회가 뇌물을 비롯한 부정부패를 통해서만 이루어진다면 당연히 더 많은 뇌물을 낼 수 있는 사람만이 유리할 것이고, 이는 사회적 손실과 빈부격차로 이어집니다.

 

즉, 사회 전체의 성장은 저해되고, 더 공정한 사회가 될 수 없으며, 능력 있는 개인의 성취 역시 누군가의 자본과 유착에 무력화되죠. 후진국 사회가 성장하기 어려운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그러한 부정부패 문제에 발목이 잡혀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요.

 

 

부패한 군대가 성공할 수 없고, 자원이 필요한 곳에 가지 못한다면 반드시 잘못된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는 것처럼, 부패한 사회 역시 위기에 취약하고 평시에도 성장과 발전을 저해하게 됩니다. 경제성장을 말하면서 경제사범을 방지하고 필요한 만큼의 처벌을 하지 않는 것은 언어도단입니다. 군대가 승리하기 위해서 필요한 자원이 제공되어야 하고, 필요한 인력이 구성되어 적절한 판단을 내려야만 합니다.

 

공정한 사회를 바란다면 부정한 방식으로 자격과 직위, 자본과 권력을 취득하고 달성한 사람을 배제해야 하며, 그러한 방식을 막거나 더 나은 방식으로 유도해야 합니다. 그 자체로 불공정을 발생시키는 차별과 혐오 또한 최소화될 수 있도록 억제하고 축소시켜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성장과 발전을 위해서라면 당연히 부정부패와 불공정한 사례에 대해 정파와 이념과 관계 없이 그것을 배제하는 것이 옳고, 애국자의 자세가 바로 그러합니다. 부패한 군대가 강할 수 없듯이, 부패한 사회가 강할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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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남성 세대는 대체로 복지보다는 성장 위주의 경제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40대 이상 세대에게서 성장 우선이 나오는 이유야 그 당시엔 한국 경제가 실제로 지금에 비해 많이 뒤떨어졌기 때문에 그러한 관성이라고 볼 수 있다면 2030의 경제 성장 우선은 어떤 면에선 특기할만한 경향성이죠.

 

 

위 통계는 어디까지나 경제관을 보여주는 것이고, 몇몇 사람들의 이야기도 그렇고 제가 느끼는 것도 그렇고 요즘은 각자도생, 이익주의, 이기주의가 강화된듯 보입니다. 나만 살아남고 나만 이익을 보면 된다는 생각으로 협력과 협동보다는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공공의 이익을 다소 저해하는 선택을 더 선호하게 되었달까요.

 

인터넷에서도 현실에서도 그런 사람들을 볼 수 있거나 이야기 들어보면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거나 선택을 하겠다는 사람들이 꽤 있기도 합니다. 그만큼 사회가 각박해지고 신뢰나 연대, 공감, 유대와 같은 사회적 자본이 고갈되어간다는 의미라고 봐야할 겁니다.

 

 

전 이것이 2030세대가 한창 공부할 시기이자 대학생-사회에 첫발을 내딜 즈음인 이명박 정부 시절부터 이러한 경향성이 좀 생겼다고 생각합니다. 아닌 게 아니라 이명박, 박근혜 정부는 교육, 취업 등 경쟁과 노력을 담론으로 정책을 펼치기도 했고 그러한 사회적 분위기는 분명히 있었습니다. 특히 이명박 정부 당시의 스펙난과 취업경쟁은 어마어마한 수준이었죠. 그 때문에 스펙보다는 실제 능력을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하려 하기도 했고요.

 

개인적으로 경쟁이라는 표현은 너무 많은 요소들을 뭉뚱그려 설명하려하는 인상이 있기 때문에 그닥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렇기 때문에 전 이를 구체화해보려 합니다.

 

일단, 이 시기의 세대들은 연대와 유대, 협력과 협동보다는 경쟁압력 속에서 개인의 성취를 극대화하는 것을 요구받았습니다. 사교육 논란도 이 시기에 재점화되었고 교육비가 성적에 유의미한 영향을 낸다는 통계, 교육 자본에 따른 계층 사다리 문제도 지적된 시기이기도 합니다.

 

실제 내 주변 학생들 중 뛰어난 성취를 낸 아이들은 몇개월간 어학연수도 보내주는 경우도 있었고 더 많은 관심과 지원을 독차지하는 경우도 볼 수 있었습니다. 격차는 점점 커졌고 뉴스에서는 다른 이들이 얼마나 노력하는가, 얼마나 경쟁에서 많은 자원을 차지했는가, 얼마나 많은 성과를 이끌어냈는가를 보도했습니다.

 

화성인 바이러스 같은 프로에서조차 스펙중독자 같은 컨셉의 자격증만 수십개에 어학연수, 봉사활동 등 여러 경험, 면접에 최전화된 전략을 구사하는 등의 고스펙 출연자가 나오기도 했죠. 뉴스에서조차 취업하기 위해 수십만원짜리 헤어샵에 성형까지 하는 사람조차 있었으며, 그 사람들이 수능이든 취업이든 결국 목표를 달성하는 모습들을 보여주었습니다.

 

보는 사람들에겐 나도 저 정도는 해야 평균에 가까스로 다다를 수 있다거나, 저 정도는 해야 달성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심어줬겠지요. 저 역시 그랬으니까요.

 

그 당시 교육, 스펙, 취업을 목적으로 하는 경쟁은 정말 강력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회적 분위기에 적응한 이들은 노력에 따른 성취와 목적 달성을 당연시 여기며, 그러지 못한 패배자, 혹은 게으름뱅이에 대한 평가는 반비례하게 될 가능성이 높지요.

 

 

조금 더 개인 단위에서는, 연대와 협동, 공감을 경험하지 못했던 이들은 내 옆의 친구를 학업성취의 경쟁자로 받아들이게 만들었고 결국 졸업, 혹은 대입할 때쯤엔 이 경쟁에서 살아남았거나 이만한 성과를 얻어내는데 성공했다. 반대로, 그만큼 노력했지만 이것밖에 되지 않았다고 스스로 평가내리게 되었을 겁니다.

 

그리고 그 경쟁 과정 동안 국가나 사회에 내가 이만큼 하는 동안 해준 게 무엇이냐고 반문할 수 있겠죠. 어학연수 지원? 장학금? 그건 자신이 노력해서 얻어낸 것이지 복지와 같은 차원에서 받은 게 아닙니다.

 

따라서 복지는 내가 받지 못한 것이기에 다른 이 역시 받아선 안 되고, 그러한 복지가 공정한 경쟁을 무너뜨리는 요소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나보다 못한 녀석이 복지의 혜택을 받아 아슬아슬하게 버티던 내 위치(순위)를 변동시킬 위험성으로요.

 

이들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자기가 모든 문제를 해결해왔다고 생각합니다. 가족이나 제도 같은 것들은 제외하고요.

 

 

그러한 이유로 2030세대는 복지사회와 같은 협력하고, 상생하고, 협동하는 '사회'가 아니라 '나 혼자'의 세계로 축소됩니다. 나 혼자만 잘 살면 되고 나 혼자만 성공하면 되고 나 혼자만 이익보면 되며 다른 이들 역시 알아서 각자도생 하면 된다고 말입니다. 사회적 연대와 협동의 경험을 해본 적이 없고, 그러한 현상에 공감하기도 어려운 시절을 겪어왔기 때문입니다.

 

본인들부터가 그러한 것들을 경험해본 적 없고 혜택을 받아본 적이 없기 때문에 생소합니다. 심지어 거부감마저도 들지요. 그들의 세상은 유기적인 사회가 아니라 개별적으로 파편화되고 분절화된 개인의 집합일 뿐입니다. 사회 전체가 이익을 향해 움직이는 거대한 진보가 아니라, 개인이 자신의 욕망과 욕구에 따라 원하는 바를 실현시키면 그게 곧 사회 전체의 발전이자 성장으로 이어진다는 개념으로 세계관이 형성된 것이죠. 이는 보수적 가치관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 전체에 작동하는 복지를 선호하기보단, 개개인의 성공을 도와줄 수 있는, 다시 말해 성장으로 향하도록 지원해주는=그러한 환경을 조성해주는 것을 선호하기 때문에 복지보다는 성장을 선호하게 된 것이 아닐까 말입니다. 모두가 잘사는 것보다(정확히는, 모두가 조금 더 나아지는 것보다) 내가 성공하느냐가 중요한 겁니다.

 

아래로 가면 지옥으로, 위로 가면 천국으로 가는 계단에서 모두 다 같이 계단 하나를 올라가는 것보단 내가 남들보다 앞서서 10단을 올라서는 게 좋다는 거지요. 남들이야 성공하든 말든 알아서 할 일이고요.

 

 

사회적 자본은 이러한 이들에 의해 피드백 받아 더더욱 고갈이 심화되어가고 있습니다. 최근 유독 그러한 분위기가 느껴지니 말입니다. 그렇다고 이들이 나쁘거나 어리석다는 게 아닙니다. 그냥 그렇게 되었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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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씨, 일베 등에서 어휘력과 문해력이 낮은 이들이 보이고 있고 그들을 지적하는 글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해 나오는 말들 중 하나가 우리가 옛세대보다 어휘력, 아는 단어가 적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머리가 나쁘냐 하면 그건 아니라고 하는 것이고, 마찬가지로 단어 좀 모른다고 머리가 나쁜 건 아니라는 겁니다.

 

 

하지만 전 조금 생각이 다릅니다. 옛 시절에는 지금보다 더 많은 한자어와 옛 단어, 낱말들이 자주 사용되었고, 아예 한글도 아닌 한자가 신문 등 공식 문서와 뉴스에서조차 자주 나왔던 시기입니다. 그렇다고 그들의 교육 수준이 지금보다 높느냐 하면 그건 아니라고 할 것입니다. 이유는 간단한데, 단지 당시에 비해 지금 배우는 교육의 질과 양이 모두 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단지 시대의 차이였을 뿐이지, 40년전, 50년전 대학에서 배우는 것은 지금보다 더 높은 위상과 평균적으로 더 높은 지적 능력을 요구했을 겁니다. 이는 지식을 가지지 못한 사람, 교육 서비스를 제공받지 못하거나 중단된 사람이 많았고, 사회가 발전하고 있던 시기였기 때문에 대학 평균 진학률이 낮았습니다. 그 당시를 기준으로 한다면 대학 학사 졸업자조차 상대적으로 높은 학력을 가진 고스펙이었습니다.

 

물론 그 당시 사람들이 지금보다 어휘력이나 문해력이 높았느냐 하는 것도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이, 높은 세대로 갈수록 어휘력은 낮다고 합니다. 이것 역시 지금 수준의 교육 서비스를 받지 못하거나, 독서의 기회가 적었기에 그런 것입니다. 단, 요즘 세대에서 사용되지 않는 단어 정도는 조금 더 알고 있긴 할 겁니다. 그것들이 사용되었던 시대였기 때문에요.

 

연령별 문해력 점수 분포

https://kosis.kr/statHtml/statHtml.do?orgId=420&tblId=DT_42001N_025&vw_cd=&list_id=&seqNo=&lang_mode=ko&language=kor&obj_var_id=&itm_id=&conn_path=

 

 

여튼, 그렇다하여 이것이 높은 어휘력 = 더 똑똑한 사람. 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르는 단어가 좀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이 머리가 나쁘거나 사고력, 합리성, 논리력이 미달되거나 부족하다는 뜻은 아닐테니까요. 마찬가지로 수십년전 사용되었던 한자와 지금은 잘 사용되지 않은 많은 단어들이 영어 단어 등으로 대체되었다고 생각하면 총량에서 크게 달라지진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우리 세대의 평균 수준일 뿐 우리 아래 세대의 어휘력과 문해력에서는 조금 다르게 생각합니다.

 

책을 읽고 풍부한 단어를 알게된다는 건, 슬픔의 저 끝에서부터 기쁨의 저 끝까지. 자신이 알고 있는 수많은 감정의 결들을 하나하나 구분해내는 거에요. 정확히 그만큼의 감정을 정확히 그만큼의 단어로 집어내어 자신의 마음을 선명하게 들여다보는 거죠.  

 

(중략)

 

같은 단어를 알고 있다면 감정의 의미를 공유할 수 있고 같은 문장을 이해할 수 있다면, 감정의 흐름을 공유할 수 있어요. 그리고 그건 서로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게 만들죠. 정기씨가 저에게, 제가 정기 씨에게. 그런 사람이면 좋겠어요.

 

앞으로의 많은 고난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와 위로가 되도록.

- 가담항설 90화 中 홍화

 

 

많은 단어를 안다는 것은 한가지 현상에 대해 더 다양하고 정확한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똑같은 것을 보고도 더 정밀하게 분석할 수 있을 것이고 커다란 명제를 더 작은 단위의 논리로 분해할 수 있는 능력의 기반이 되어줍니다.

 

조지 오웰의 1984에서는 '신어'라고 하여 한가지 주제에 곂치는 개념이 있다면 해당 단어들을 폐기하고 더 단순한 단어 하나로 통일합니다. 또한 새로운 단어보다는 간단한 두 단어를 합성시켜서 사용하기도 하죠. 좋다는 Good으로, 나쁘다는 Bad가 아니라 NoGood이라는 식으로요. 이는 대중들의 사고력과 개념 분석능력을 저해시키기 위한 당의 우민화 정책이었습니다.

 

똑같은 것을 보고 더 정확하고 통찰력 있게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것의 핵심과 개념을 파악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언어적으로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하죠. 자기가 설명할 수 없는 것은 자기가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이 아니며, 자기가 언어적으로 해석하고 설명할 수 있어야 정확하게 알고 있다는 증명입니다.

 

최근 디씨 등에서 보이는 우리 세대 기준으로 너무 낮은 어휘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말은 똑같은 것을 보고도 더 다양하게 설명하고 더 정확하게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지 않을까 합니다. 이는 피상적인 해석과 근시안적 시야를 가지게 하는데, 장기적인 계획은 지능이 높을 수록, 지적능력이 뛰어날수록 더 능숙하게 할 수 있는 작업입니다. 장기적 계획에 취약하고 단기적인 계획, 혹은 근시안적 시야를 가지는 사람들은 지능, 혹은 지적능력이 상대적으로 낮은 사람인 경우들이 많습니다.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장기 계획 역시 그러한 경험과 훈련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며, 여러 불확실성의 변수들과 불필요성 때문에 아예 그런 계획 자체를 세우지 않거나 아주 단순한 수준으로만 세우는 경우조차 있으며 그조차 언제든지 폐기, 수정이 가능한 경우들이야 정말 무수하기 때문입니다.

 

 

하여간, 어휘력이 높은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에 비해 더 똑똑하고 논리적인 사고가 가능할 것이라 기대될 수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덜 똑똑하고 논리적 사고 능력이 다소 부족할 것이라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는 어휘력이 높아야만 똑똑한 게 아니라, 어휘력이 사회에서 평균적으로 사용하는 것보다 부족한 사람은 특별히 더 머리가 나쁠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것 뿐입니다.

 

그런 이유로 전 어휘력이 낮다고 멍청하다는 건 아니다. 라는 말을 부정하는 편입니다. 어휘력이란 특별히 국어사전을 보고 처음부터 끝까지 외우거나 하는 식으로 익히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들 대부분은 글을 읽는 것에서 시작했고, 그렇게 완성된 것입니다.

 

인터넷 글이든 책이든 더 많은 단어와 어휘, 문장, 낱말을 읽고 이해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어휘력을 늘려왔습니다. 우리가 모르는 단어가 나온다면 사전을 찾아보기도 했을 것이고 그게 아니더라도 문장의 맥락에서 그 속뜻을 유추하고 사용례를 보면서 그 유추가 정확했음을 확인/교정받습니다.

 

다시 말해, 어휘력이 낮다는 건 그만큼 책이나 글을 덜 읽었다는 것이고, 많은 단어들을 경험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책을 많지 보지 않았다는 것은 지식의 양이 상대적으로 적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겠죠. 어휘력은 그 사람이 얼마나 많은 단어, 지식을 접했느냐를 유추할 수 있는 지표가 될 수 있습니다.

 

 

물론 이에 대한 반론은 당연히 제기될 수 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용되지 않은 단어들은 늘어가고 있고 우리 세대와 이전 세대, 그리고 우리 다음 세대가 사용하고 익힌 단어들의 숫자와 종류는 달라지는데 그러한 시대적 차이를 구분하지 않고 무조건 어휘력만으로 일괄적으로 지적능력의 고하를 구분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거나, 구한말 사람들이 사용하는 어휘 중 지금은 잘 사용되지 않는 어려운 말과 단어들이 줄곧 쓰였는데 그 사람들이 지금 기준으로도 더 똑똑한 사람들이냐, 아니면 단지 당시 사용되는 단어가 그러한 것들이 많아 단순히 체득한 단어만 더 많이 알고 있는 것은 아니냐 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실제 사회생활이나 업무 활동에 있어서 대단한 어휘력이 필요한 건 소수의 직종 뿐이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일 잘만 한다. 어휘력으로 추측할 수 있는 지적능력과 실제 지적능력 및 그 활용 현실은 아무 관계 없거나 별 관계가 없을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글의 초반부터 그러한 가능성을 염두해두고 이야기를 풀어낸 것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인문학적 소양과 직장업무 능력이 직결되는 비중은 크지 않을 것이고, 그러한 비중이 크기 위해선 사람을 알고 다루는 일을 할만큼 높은 자리에 올라가야할 것입니다. 인문이란 인류가 쌓아온 문명을 연구하는 것이고 이 거대한 개념은 세부적으로 인간에 대한 이해는 물론, 그 인간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대한 질문과 나름의 답을 만들 수 있게 하는 재료들이 됩니다. 

 

그런 이유로 전 인문학적 소양으로 대표될 수 있는 더 많은 책을 읽는 것과 그것을 유추할 수 있는 어휘력이 아무런 상관이 없느냐 하는 것에도 역시 부정적입니다. 또한 모든 책이 인문학 책인 것도 아니고 공학, 수학 등 비인문적 책들도 있지만 그러한 책에서도 최소한의 소양은 필요합니다. 이 단어가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고 뭘 의미하는 지 아는 것 바로 그 자체 말입니다.

 

1.자기 언어의 부재, 철학의 부재.
 
예전에 미국 쪽에서 이걸 다룬 다큐멘터리 같은 게 있었습니다. 대충 10년쯤 전 내용이라 정확하게 토씨 하나하나 기억나지는 않지만, 요는 평소에 불만이 많고 다소 반사회적이었던 이들에게 철학책을 주고 그것을 계속해서 읽도록 시킨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임무를 잘 수행했고, 나중에 가서는 반사회적인 행동을 하지 않게 되었죠.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신은 많은 것에 불만이었지만 왜 불만이었고 뭐가 문제였는지 알지 못했다. 알지 못했기 때문에 더 화가 났고 무엇에 화가 났는지 모르니 아무 곳에나 그것을 분출했다. 그러나 철학책을 읽으면서 자기 생각을 잘 정리하자 문제들이 보였고 그것을 설명해낼 수 있게 되었다. 그러자 감정을 다스릴 수 있게 되었다..
 
정확한 발언은 아니었지만, 제가 기억하는 맥락은 이러했습니다. 즉, 그들은 사회현상과 정치현상, 그리고 그것을 지배하는 철학적 기반에 대한 지적 부재가 너무나도 복잡하고 어려운 사회를 설명하지 못하는 한계로 다가왔고, 그 때문에 뭔가 불만은 있는데, 그 불만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었던 거죠. 해소될 수 없는 불만이니 아무렇게나, 아무에게나 터져나왔던 겁니다.
 
분노했지만, 무엇에 분노한지 모르는 사람들이 극단주의에 쉽게 경도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런 사람들에게 사색의 기반이자 자기 언어를 가져다주는 것은 더 '깊은 생각'을 가능하게 해준 철학입니다.


왜 저소득층은 독재자-극단주의 세력을 선호하는가? (https://konn.tistory.com/753)

 

전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언어적으로 정확하고 세밀하게 표현하지 못 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한계를 크게 드러내는 때가 바로 정치인이나 정치적 현상을 대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특정 정치인이 싫다고 하지만 정작 물어보면 정확히 왜 싫은지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그냥 싫다, 아무튼 개새끼다. 하는 사람들이 꽤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어떤 정치인을 싫어하기는 하는데, 왜 싫어하는지는 모르는 사람들인 거죠. 그것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냥 싫기는 한데, 스스로도 돼 싫어하는지 구체적이고 논리적으로, 언어로서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면 스스로도 그걸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럼 왜 싫어하느냐, 여러 뉴스들에 의해 형성된 이미지 때문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우리가 어떤 뉴스를 보고 어떤 정치인에 대해 어떠한 인상을 가질 수 있을만한 내용을 보지만 그것들은 따로 기록하거나 기억해두지 않으면 금방 잊혀집니다. 이는 어떤 사건에 대해 시기, 상황, 심지어 당사자인지 아닌지 사람조차도 헷깔릴 수도 있게 됩니다. 단기기억으로만 남고 장기기억으로 잘 남지 않는 내용들인 셈이죠.

 

그렇게 구성된 이미지가 그 정치인에 대한 호불호로 이어지는 거고 설명할 수는 없는데 아무튼 누구는 싫다.가 됩니다. 따지고 보면 아예 없는 건 아니겠지만 스스로 설명할 정도로 기억에 남는 무언가가 딱히 없죠. 최소한 당장 머리속에서 찾아낼 수는 없다고 보시면 됩니다.

 

 

1984의 당은 신어를 만들어 사람들에게서 다양한 개념을 사고할 자유성를 억압했습니다. 생각은 언어에 묶이고 단어에 휘둘립니다. 같은 것을 보고도 다른 단어를 사용할 수 있고, 다른 단어에서 다른 정서를 느낍니다. 이는 다른 감성과 다른 과정이 되어 다른 결론으로 이어지죠.

 

복잡하여 정확히 규정해야할 현상을 그렇지 못한 언어로 해석하려고 한다면 필연적으로 오류가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정치, 사회적 현상 뿐 아니라 우리의 일상소통에서조차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다소 뭉뚱그려 커다란 개념으로서만 전달시키고 받아들이게 될 수 있습니다.

 

꼰대 같을지 몰라도, 전 이게 좋게 보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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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예전에 했던 말들의 재탕이긴 한데, 그냥 그 말들을 적당히 모아 새로 글 하나로 다시 정리해보려고 합니다.

 

 

 

1.자기 언어의 부재, 철학의 부재.

 

예전에 미국 쪽에서 이걸 다룬 다큐멘터리 같은 게 있었습니다. 대충 10년쯤 전 내용이라 정확하게 토씨 하나하나 기억나지는 않지만, 요는 평소에 불만이 많고 다소 반사회적이었던 이들에게 철학책을 주고 그것을 계속해서 읽도록 시킨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임무를 잘 수행했고, 나중에 가서는 반사회적인 행동을 하지 않게 되었죠.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신은 많은 것에 불만이었지만 왜 불만이었고 뭐가 문제였는지 알지 못했다. 알지 못했기 때문에 더 화가 났고 무엇에 화가 났는지 모르니 아무 곳에나 그것을 분출했다. 그러나 철학책을 읽으면서 자기 생각을 잘 정리하자 문제들이 보였고 그것을 설명해낼 수 있게 되었다. 그러자 감정을 다스릴 수 있게 되었다..

 

정확한 발언은 아니었지만, 제가 기억하는 맥락은 이러했습니다. 즉, 그들은 사회현상과 정치현상, 그리고 그것을 지배하는 철학적 기반에 대한 지적 부재가 너무나도 복잡하고 어려운 사회를 설명하지 못하는 한계로 다가왔고, 그 때문에 뭔가 불만은 있는데, 그 불만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었던 거죠. 해소될 수 없는 불만이니 아무렇게나, 아무에게나 터져나왔던 겁니다.

 

분노했지만, 무엇에 분노한지 모르는 사람들이 극단주의에 쉽게 경도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런 사람들에게 사색의 기반이자 자기 언어를 가져다주는 것은 더 '깊은 생각'을 가능하게 해준 철학입니다.

 

 

2.정신력과 인지력.

 

...몇몇 심리학적 연구결과를 보면 까다로운 인지작업과 유혹의 도전을 동시에 받는 사람들은 유혹에 굴복할 가능성이 더 높다. 매우 중요한 일이니 1~2분 동안 7자리 숫자를 기억하라는 요구를 받았다고 가정하자. 숫자에 집중하는 동안, 건강에 해로운 초콜릿 케이크와 건강에 이로운 과일 샐러드라는 두 가지 디저트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실험 결과를 보면 머릿속이 온통 숫자로 가득 차 있을 때는 유혹적인 초콜릿 케이크를 선택할 확률이 더 높다. 시스템 2(이성)가 바쁘면 시스템 1(본능, 직관)이 행동에 더 많은 영향을 미치는데, 그 시스템 1은 단 것을 좋아한다.

'인지적으로 바쁜' 사람들은 이기적인 선택을 하고, 성차별적인 언어를 사용하고, 사회생활을 하며 피상적인 판단을 할 가능성이 더 높다. 물론 '인지 부하가' 자제력을 약화시키는 유일한 원인은 아니다. 불면과 마찬가지로 음주도 똑같은 효과를 낸다.

심리학자 로이 바우마이스터와 동료들이 수행한 일련의 놀라운 실험들을 보면 인지적이건 감정적이건 신체적이건 상관없이 모든 다양한 자발적 노력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라도 정신 에너지의 공유풀에 의존한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다. 바우마이스터는 의지나 자제력 유지 노력이 피곤한 일임을 거듭 확인했다. 억지로 뭔가를 하도록 자신을 독려해야 한다면, 다음 도전이 닥쳐왔을 때 자제력을 발휘하려 하지 않거나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줄어든다. 이런 현상을 '자아 고갈'이라고 한다.

- 다니엘 카너먼, 생각에 관한 생각.

 

정치적 현상과 메시지들을 이해하고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만한 인지작업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저소득층은 그것을 설명하고 분석할 수 있을만한 교육을 받지 못했거나, 스스로 공부하지 않은/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남들보다 더 각박하고 고난하게 살아가기 때문에 당장 자신의 삶에 집중해야할 시간과 정신력, 체력이 많이 할당되고 정치, 사회적 현상을 파악에 할당되는 자원은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쉽게 말해, 새벽 6시에 일어나 첫차타고 일터로 나가 6시까지 일하고 7시부터 11시까지 일해서 12시에 돌아오는 아주머니가 정치, 사회적 현상에 대한 복잡한 이론을 이해하거나 스스로 전개할만한 능력은 부족할 겁니다. 이는 배운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만큼 일에 정신력과 체력이 소모된다면 일과 무관한 복잡한 지적 활동을 하기 어렵겠죠.

 

저소득층은 교욕수준에서부터 정치현상을 파악하고 판단하기에 지적, 철학적 기반이 부재된 경우가 많고, 자아가 고갈된 사람들이기에 깊게 파고들어 분석할만한 여유도 없습니다. 삶에 여유가 없기에 무엇이 좋고 나쁜지 판단할 정신적 여유가 없고 뉴스를 보며 인지 자원을 동원한 작업을 하기 어려우니 더 간단한 말과 더 직관적인 액션을 보여주는 사람에게 지지를 표하게 됩니다.

 

더불어 그들은 자신의 삶에 있던 불만들을 해소해줄 것 같은 언어들을 씁니다. 이명박은 물론, 박근혜 정권 역시 선거철만 되면 사회주의에 가까울 정도로 포퓰리즘 공약을 내거는 것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18대 대선 당시 새누리당의 공약 플래카드들은 대표적인 예시라 해도 무방합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언제나 뒤통수를 맞고, 그럼에도 잊어버립니다. 당장의 삶이 고난하기에 정치에 계속 관심을 두고 있었던 일을 계속 기억해두는 것조차 힘겹기 때문입니다.

 

 

3.선동과 액션의 중요성.

 

더 간단한 표어와 더 직관적인 메시지는 선동에 있어서 가장 효과적이고 효과적인 것을 넘어 가장 이상적입니다. 선동은 보통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지만 기실 이 선동이라는 단어는 꽤 중립적인 용어인데, 가령 반드시 필요한 개혁이나 복지를 밀어붙힐 때 정부는 국민들에게 이것의 필요성을 설득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설득은 논리적이고 많은 근거를 제시하며 분석적으로 접근하는 것보다 간단하고 경제적으로 선동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죠.

 

국민들에게 여러 데이터를 제시해봤자 그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이들은 생각보다 적습니다. 능력이 부족한 사람은 물론이며, 시간이 부족한 사람들도 많고, 오히려 그러한 데이터를 반박하고 논쟁을 시도하는 이들조차 발생하게 될 것입니다. 정부는 국민과 논쟁해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좋은 정책과 법안이라도 그것을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 정부는 국민들을 선동해서 원하는 목표를 이뤄야 합니다. 설령 그것이 필요하더라도 국민들을 설득하지 못한다면 나쁜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쉽고, 그 이상으로 나쁜 결과로 돌아오게 됩니다.

 

이 선동의 예시로 문재인 친중설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자면, 문재인이 중국몽을 언급한 원문을 본 사람은 교묘하게 중국을 비판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재인 친중설을 선동하는 이들은 문재인 중국몽까지만 언급하며 왜곡하죠. 아주 간단하고 직관적인 한 문장만으로 맥락은 뒤집혔습니다.

 

문재인 정부 당시 재경부는 미래를 위해 돈을 아껴야 하며, 그렇기 때문에 대규모 추경이나 지원은 불가하다는 부정적인 견해를 지속적으로 밝혔습니다. 실제로 연금 문제는 매우 부정적인 결과를 예정해놓은 문제이고, 어떠한 해법이나 준비가 필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한 이유로 문재인 정부는 이러한 지원 정책에 꽤 미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가진 사람들 역시 많아졌죠. 이는 문재인 정부가 국민들을 선동하여 그들을 설득하지 못했다는 관점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보수 세력은 진보 세력에 비해 이러한 선동적 능력이 탁월하며, 동시에 보수 지지자들은 진보 지지자들에 비해 이 선동에 더 쉽게 넘어가고 더 빠르게 감화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평균적으로 보수 지지자들의 수준이 진보 지지자들의 수준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극우보수는 가짜뉴스에 더 쉽게 속으며, 스스로 그 가짜뉴스를 만들고 배포시키고, 그렇게 유포된 가짜뉴스에서 새롭게 생성된 컨텐츠가 스스로 속아넘어가기도 합니다.

 

그러한 이유로 저소득층은 더 직관적이고 간단한 극우보수의 선동에 더 쉽게 넘어가는 것이고, 그들이 TV에서, 언론에서 보여주는 직관적인 쇼들을 쉽게 이해합니다. 고고한 진보주의자들은 그러한 쇼를 하지도 않고 잘 볼 수도 없습니다. 그들의 말과 언어는 복잡하고 어려운 내용들이라 머리만 어지러워져 쉽게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극우보수의 언어는 쉽고 간결합니다. 단순해서 이해하기 쉽죠.

 

물론 이 쉽고 간결한 언어가 어떠한 왜곡을 낳고 얼마나 피상적인지 알 겁니다. 그런만큼 문제의 핵심에 다가가지 못하고 제대로된 해결이나 변화를 이끌어낼 수는 없죠. 오직 더 나쁘게 되는 거 빼고는요.

 

독재자들의 액션들 역시 매우 직관적이고 이해하기 쉽습니다. 게다가 화끈하기도 하죠. 말 한마디면 높으신 분도 앞에 나와서 굴복해야 합니다. 강력한 메시지들은 우리의 적을 분쇄해야 한다는 믿음과 확신으로 가득차 있고, 그들은 정말로 문제입니다. 문제는 해결되어야 하고 해결하기 위해선 강한 지도자가 필요하죠. 따라서 강한 이미지를 가진 이들, 우리가 이길 수 있다는 믿음을 주는 강한 워딩을 쓰는 매파에게 지지를 표합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이고 어떤 피해와 손해로 돌아오며, 그들이 진짜 매파인지, 아니면 치킨호크인지, 아니면 그조차 아니고 단지 정치적 이해관계에서 이익을 얻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스트롱 워드를 사용하는 것인지도 고려하지 않고 파악할 능력도 없습니다.

 

자신에게 어떤 이익을 돌려줄 것이며 자신의 삶보다 더 크고 중요한 것들이 어떻게 망가질지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고 애당초 관심도 없습니다. 당장 자신의 삶이 더 중요한 문제이고 높으신 분들이 얼마나 빼쳐먹든 내 돈은 아닐 것이며, 권력자들이 자기 밥그릇을 어떻게 빼앗기고 누가 차지하든 그 역시 자신의 삶과 동떨어진 이야기죠.

 

심지어 경제, 복지, 노동 정책의 변화로 인해 진짜 자신의 삶에 영향을 주게 되고 피해를 입게 된다 하더라도 그것을 파악할 수도 없습니다. 그것을 파악하려면 자신의 한 표가 만든 정치인이 경제, 복지, 노동 정책을 어떻게 변화시켰고 기존과 어떤 것이 다르며 그러한 결과 어떠한 절차를 거쳐 어떤 이유로 자신에게 이러한 변화(손해)를 입혔는지 알아야 합니다. 몇가지 과정을 아무리 단순화 시키더라도 자신이 뽑아준 정치인이 바꾼 정책이 자신에게 어떻게 돌아왔는지 이해해야 하는데, 그걸 잘 못합니다.

 

심지어 주변에 그걸 잘 아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냥 어려워졌으니 어려워졌고 윗 사람이, 공무원이 개새끼라 그런갑따 할 뿐이죠. 한번도 삶이 편했던 적이 없으니 어려운 삶에 적응한 사람들입니다.

 

 

4.내 계급적 이익과 이념적 지향.

 

때로 이런 사람들도 있습니다. 너무 어려운 사람들 말고 조금이라도, 살짝이라도 더 여유로운 이들에게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내가 뽑아줄 정치인이 복지, 의료, 노동, 취업에서 나와 내 가족들에게 불이익을 안겨줄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정치적 사상과 이념에 있어서 상대 정당의 그것에 동의할 수 없다는 사람들 말입니다.

 

내 취업 조지고 내 동생 교육 조지고 내가 취업했을 때 더 많은 시간 노동하고 더 적은 임금을 받으며, 내 엄마아빠 병원비 더 비싸지고 우리집 월세 더 오르며 우리 집안 지원금 더 줄어들어도 반미친중친북 빨갱이 페미 민주당에게 정권을 줄 수는 없다는 사람들.

 

부정부패 많이 저지르고 인성 문제 있고 범죄자인 것도 알지만 빨갱이 민주당에게 나라를 넘겨줄 수 없다며 이명박 찍어준 사람들, 정치적 능력은 의심스럽고 인격적으로 덜 성숙했고, 아버지 후광으로 지지 받는 거 다 알지만 빨갱이 민주당에 정권 못 준다며 박근혜 찍어준 사람들. 다 알고 하는 겁니다. 다 알고 하는 건데 민주당이 반미친중친북 빨갱이가 아니라는 사실만큼은 모릅니다.

 

이건 자기 삶과 별개로 내가 손해를 보더라도 더 큰 거대담론과 이념, 사상을 지향하며 표를 던지는 이들입니다. 세금이나 부동산으로 손해를 보더라도 더 나은 세상을 기대하며 민주당에 표를 주는 사람들이 있는 것과 다를 게 없습니다. 미련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그들에겐 세계관적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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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 측 "시진핑과 北 ICBM 긴밀 협의..당선인 통화 이례적"(종합)
https://news.v.daum.net/v/20220325095536656?x_trkm=t


두 사람의 통화가 성사된 배경에 대해선 "물론 시 주석이 당선인 신분의 국가차기 지도자와 전화 통화를 한 사례가 없는 것으로 안다. 그만큼 이례적"이라며 "추측컨대 새롭게 시작하는 윤 정부의 한중 관계에 대한 기대감을 반영한 것이 아닐까"라고 전했다.

다만 "관례상 누가 먼저 전화 요청을 해왔다는 것을 공개하지 않는다"라며 "상호존중을 하고 호혜정신을 바탕으로 건강하고 성숙한 한중관계가 이뤄질 것을 희망한다"고 했다.

 

예상했던데로 윤석열 당선인은 취임 이전, 당선 직후부터 빠르게 친중 행보를 하고 있습니다.

 

중국과 대화할 수는 있죠. 근데 전례를 하나 살펴보자면, 그 이명박 시절에서 첫번째는 미국, 두번째가 일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문에 중국은 당시 한국에 별 개지랄을 떨었었죠. 또한 중국은 대통령이 되지 않은 당선인에게 통화를 걸지 않습니다. 근데 이게 윤석열 때 갑자기 바뀐다? 그럴 가능성은 매우 낫습니다.

 

숱한 기사에서 마치 시진핑이 먼저 전화를 건 것처럼 은유하는 경우가 몇개 보였는데, 엄밀히 말해서 누가 먼저 걸었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라고 합니다. 근데 누가 했을지는 뻔하거든요. 외교 초등학생 윤석열이 외교감각 하나도 없이 무엇무엇이 필요하니 전화 걸어서 이야기해보면 되겠지. 정도로 벌어진 일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외교에 대해 공부한 것도 아니고, 제대로 경험해본 적도 없습니다. 검찰 시절 누굴 만났고.. 그런 거 다 의미 없습니다. 실제 외교 필드는 그런 거 이상의 자리입니다. 특히 국가 지도자급의 외교는 어마어마한 전략사단을 데리고 해야하는 일이죠. 

 

 

자, 그럼 저 기사 하나만 가지고 생각해봅니다.

 

북한 ICBM 문제로 통화를 해야한다면, 대북정책을 같이 하는 미국이 되어야 합니까, 중국이 되어야 합니까?

 

바로 이 지점이 문제가 됩니다. 미국은 윤석열의 이와 같은 행보를 친중, 레드팀으로 볼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누가 먼저 전화를 했는지 역시도 예상 가능한 일입니다. 중국은 자칭 대국이기 때문에 일개 소국인 한국에 먼저 전화를 하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그럴 필요도 없죠. 북한이 문제국가인 건 맞지만 중국보단 한국, 미국에게 문제가 되는 녀석들이거든요. 그러니 북한 문제에 적극성을 띄어야하는 것은 중국이 아니고 한국과 미국입니다.

 

근데 그런 문제로 전화를 했다면, 당연히 윤석열이 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죠. 중국에게 대국이라는 자존심은 생각보다 심각합니다. 특히 전랑 세대들이 심각하지만, 그렇다고 중국 지도부 쪽이 합리적인 수준이라는 건 절대 아니고요.

 

그러니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ICBM 문제에 대해 미국과 통화를 해야 합니다. 먼저 통화를 해야 한다는 개념이 아니라, 그냥 미국과 통화를 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근데 미국을 거르고 중국과 하고 있습니다.

 

 

그런 중국의 반응을 살펴봅시다.

 

[속보]시진핑, 윤 당선인에 "중국은 언제나 한중 관계 중시"
https://newsis.com/view/?id=NISX20220325_0001808367&cID=10101&pID=10100

시진핑 "국제사회 협력, 공급망 안정 함께 노력하자" 
https://www.sedaily.com/NewsView/263K0LHE8M

시 주석은 중국과 한국은 영원한 이웃이자 떼려야 뗄 수 없는 파트너라고 지적했다. 그는 “중국은 
항상 한중관계를 중시한다”며 “쌍방의 공동 노력으로 한중 관계는 급속하게 발전해 양국은 전략적 동반자가 됐다”고 강조했다.

시 주석은 “올해는 한중 수교 30주년이 되는 해”라며 “쌍방은 이 기회를 통해 상호 존중을 견지하고 정치적 상호 신뢰를 강화하며 인문 우호를 강화하고 중한 관계의 안정적이고 장기적인 발전을 촉진해야 한다”고 말했다.

 

곧바로 한중관계를 과시하고 있습니다. 이건 윤석열 정부가 외교를 잘한다. 가 아니라 레드팀 행보를 중국이 기쁘게 받아먹고 있는 겁니다. 말하자면 박근혜 전승절이 어른거리는 상황인 거죠. 중국은 지속적으로 한중 수교 30주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중국은 이번 정권에서의 관계 개선을 매우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데, 그 이유는 윤석열이 훨씬 만만한 상대고, 원하는데로 움직이기 쉽다고 판단한 것이라 봐야 합니다.

 

더불어 공급망이라는 워딩이 나왔는데, 현재 미국은 중국을 국제 서플라이에서 퇴출하고자 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물론 자국의 이익과 경제를 위해서 한국과 일본은 물론 여러 나라들이 그렇게까지 적극적으로 임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성과가 있는 건 사실이었거든요.

 

근데 여기서 중국이 한국에게 공급망 안정을 이야기 한다? 쉽게 말해서 중국이 전쟁을 준비하고 내정을 안정시키기 위한 자원을 한국에게서 공급받겠다는 의미입니다. 네, 레드팀이 되라는 말이죠. 이걸 단순히 의례적으로 하는 말이라고 이해한다면 정말 감각 없는 겁니다.

 

그리고 딱 하나만 더. 양국은 전략적 동반자라고 말했습니다만, 중국은 동반자이고 미국은 동맹입니다. 바로 이 기본적인 외교관계를 이해하지 못한 윤석열은 미국이 아니라 중국과 대화 중인 거고요.

 

尹당선인, 習주석에 “北 완전한 비핵화 실현 위해 긴밀 협력하자”
http://news.heraldcorp.com/view.php?ud=20220325000579

특히 윤 당선인과 시 주석은 고위급 전략적 소통을 활성화해 한중관계 현안을 잘 관리해 나감과 동시에, 공급망, 보건, 기후변화, 환경(미세먼지 등),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실질협력을 더욱 확대해 나가기로 했다.

[속보] 尹당선인-시진핑 "이른 시일 만남 위해 긴밀소통"
https://view.asiae.co.kr/article/2022032518542339326

 

바로 여기에서 또 나오죠. 공급망이라는 단어. 나머지는 어디까지나 자기네 국력과 국익에 해가 되지 않거나 충분히 조정 가능한 것들입니다. 근데 공급망은 또 이야기가 다르죠. 앞서 말했듯이, 공급망은 다양한 의미가 함의되어 있습니다. 단순히 식량을 팔아도 우크라 전쟁에서처럼 국제 식량 가격에 변동이 옵니다. 식량 공급망은 사람들이 망각하기 쉬운데, 정말 중요한 물류 요소 중 하나입니다.

 

당장 한국 식자재 가격 상승한다고 말 꽤 많죠. 우크라-러시아 전쟁 때문에 연어 가격이 높아졌다던가 아예 공급이 안 되고 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비슷하게 밀, 콩 역시 중요 자원 중 하나이고 중국은 몇해전 가축 먹일 콩이 부족해서 사단난 적이 있었고요.

 

근데 그 서플라이에 한국이 낀다면? 중국은 내수 부담이 줄어들 겁니다. 만약 한국이 미국 압박에 수출을 줄이거나 중지한다면? 중국은 한국을 때릴 수 있는 강력한 명분이 생기는 거죠. 물리적이진 않을 거고, 경제적인 제재, 보복이겠지만 우린 이미 한한령을 경험해봤습니다. 크고 작은 중국의 경제제재 역시 겪어봤고요.

 

그리고 무엇보다, 식량이 아니라 반도체 같은 걸 생각해보십시오. 차량을 생각해보시고, 석유나 등유 같은 걸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마지막으로, 대중무역 의존도를 생각해보십시오. 중국은 다시금 한국이 대중 무역의존도가 높아지길 바라는 겁니다. 그래야 구워삶기 쉽고, 때릴 때 세게 때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시진핑과 만난다고 합니다. 참고로 말하자면, 제가 아는 한 문재인이 중국으로 간 적은 박근혜 정권이 싼 똥인 사드 수습하기 위해 딱 한번을 제외하면 없고, 시진핑이 한국으로 온 적 역시 없습니다. 사드 수습을 제외한 문재인과 시진핑의 만남은 G20에서, 그리고 두번째가 베트남 쪽 호텔에서 만났습니다. 다른 나라 다 가고 많이 만났지만 중국만큼은 안 갔습니다.

 

경쟁국가, 어중간한 잠재적 적국 관계는 물론이고 자유세계에서 세계 10위 안에 드는 민주주의 국가이자 미국의 최상위 동맹인 한국이 중국에 가는 것이나 반대로 미국의 패권에 도전하는 중국 지도자가 한국에 먼저 오는 건 국가 자존심은 물론 국제사회에 더니는 메시지가 됩니다.

 

전에도 말했듯이, 당선이 되거나 대통령이 되면 국가정상들에게 전화를 하는 순서조차도 이 정부가 앞으로 어느 나라를 외교적으로 우선하는지를 보여주는 겁니다. 근데 윤석열과 시진핑의 만남이라면 누가 어디로 먼저 갈 거 같습니까? 

 

제 눈에는 전승절 시즌2가 눈에 어른거립니다.

 

 

그리고 미국은 그러한 행동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이미 박근혜 정부 시절 조 바이든은 "미국의 반대편에 베팅하는 게 좋은 베팅인 적이 없었다. 미국은 한국에 계속 베팅하겠다.”라고 한 바가 있습니다. 조만한 한국은 그만한 대가를 치루게 될 겁니다.

 

가령, 기시다 정부가 한국에 몽니 부렸다 아직까지도 방미를 못하고 있습니다. 이제 5월달을 주시하시고, 기억해두십시오. 미국은 5월 중 한국과 일본의 방문 일정에서 한국이 일본의 뒤로 밀릴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그런 요구가 나왔습니다.

 

바이든에 "4월에 일본 와달라"는 日 총리…일정조율 까닭은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058403

역대 미국 대통령은 동아시아 순방시 한국과 일본을 함께 방문하는 게 관례였다. 당초 계획대로 바이든 대통령이 5월 쿼드 정상회의를 계기로 방일하면, 이후 한국에 들러 그달 10일 취임하는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과 첫 정상회담을 서울에서 가질 것이란 관측이 있었다. 바이든 대통령의 방일 일정이 달라지면, 윤 당선자가 취임 후 미국을 방문해 정상회담을 갖는 방안이 검토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외교에서 어떤 행위를 위한 명분은 목적과 다를 수 있습니다. 북한이 미사일을 쏘면 한국이 MD 시스템을 도입하거나, 군사력을 증강시키기도 하고, 미국과 훈련을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목적은 북한이 아니라 중국이 되기도 하죠. 가령, 북한이 도발을 했는데, 미국은 그에 대한 대응으로 동해가 아니라 서해에서 군사훈련을 진행한 바가 있듯이요.

 

일본은 호주 총선을 명분으로 댔지만, 기존 한국과 일본을 함께 방문하는 관례를 깰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유? 윤석열의 레드팀 행보 때문이거든요. 취임도 아니고 당선 며칠 지났다고 곧바로 친중 행보를 보이니 중국도 그렇겠지만 일본 역시 매우 즐거울 겁니다. 위협적인 경쟁국가가 알아서 일본의 하위 구조로 편입될 것처럼 보이거든요.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정말 순진한 거고요. 미국이 윤석열의 행보 때문에 저 제안을 받거나 어느 정도 절충하여 한국에 불이익을 주는 모양새를 만든다면 정말 확실해지는 겁니다. 미국 역시도 윤석열의 행보에 제재를 걸 것이라고요.

 

 

마지막으로, 문재인 중국몽 하나로 친중정부, 친중대통령이라는 '틀린' 프레임을 씌우며 공격했던 사람들, 대중은 물론이고 기자들은 윤석열의 빠른 친중 행보와 레드팀 행위에 대해 제대로 비판은커녕 지적조차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이건 정말 심각한 문제입니다.

 

문재인이 하면 일반적인 대화조차도 나라를 팔아먹는 음모가 되는 나쁜 친중이고, 윤석열이 하면 합리적인 외교를 위한 착한 친중이 되는 겁니까? 전혀 그렇지 않죠. 근데 지금 뉴스에서, 각종 커뮤니티에서 뭐라고 하는 줄 압니까? 친중이라는 말이 안 나오고 있습니다. 다른 이야기들 중이죠.

 

그만큼 대중들이, 심지어 기자는 물론이고 국힘당과 윤핵관 다수가 국제정세에 무지하고 사리분별을 못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들 세계관에서 윤석열은 반중 강경론자로 친중이 아니며, 마찬가지로 언론에서 친중 프레임은커녕 그 은근한 분위기 조장조차도 하지 않으니 윤석열이 친중을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아니, 애초에 사람들 대부분이 뭐가 친중이고 뭐가 아닌지 모릅니다. 심지어 윤석열 본인부터가 자기가 친중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요. 이건 윤석열 뿐 아니라 국힘당 다수와 윤핵관 대부분이 다 그렇습니다. 극우보수들은 자기들이 정권을 잡고 뭔가 해야할 때 자기들이 뭘 해야하는지도 모르는 이들입니다.

 

오직 헤게모니 싸움과 국내 정치에서 기득권 확보를 위해 합법과 비합법을 넘나드는 수단을 활용하여 유지하고 그에 대한 도전을 응징하는 것에만 유능하죠.

 

따라서 윤석열과 그 주변인들 역시 자기들이 하는 것인지 친중인지 중립외교인지 알지도 못하고, 친일인지 정상적인 외교활동인지 구분도 못합니다.

 

애초에 그런 세계관 속에서 살아가고, 그렇게 만들어진 세계관 속에서 논리가 작동하는 이들이기 때문이라 그렇습니다. 

 

 

제가 전에 말했죠. 은근히 친중적이고 거침없이 친일적일 거라고. 지금 윤석열이 하고 있는 행보가 그 은근한 친중입니다. 아니, 사실 이 정도면 굉장히 대놓고 친중하고 있는 레드팀 행위입니다. 언론이 그런 뉘앙스를 보이지 않고 대중들에게서 친중한다는 비판이 안 나오니까 친중이 아닌게 아닙니다.

 

이럴 때 문재인 친중이라고 욕하던 사람들은 갑자기 합리적인 척을 할 겁니다. 원래 적이 하면 레드팀이고 우리가 하면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무언가가 되죠. 윤석열이 친중 행위를 하는 걸 욕하면 이렇게 말할 겁니다. "아니 그럼 중국이랑 외교 안 함?;;; 아무리 그래도 바로 옆에 있는 나라인데다 서로 이것저것 얽혀서 명분 줄 이유가 어딨음?..;;;" 이라고 할 겁니다.

 

선택적 합리죠. 이런 태도 개인적으로 이명박 정부 시절에 엄청나게 많이 봤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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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보] 중국 "尹 당선 축하…한중은 떨어질 수 없는 중요한 파트너"

https://www.yna.co.kr/view/AKR20220310143251083?input=1195m 

자오리젠(趙立堅)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10일 정례브리핑에서 윤 당선인의 당선에 대한 평론을 요구받고 "중국은 윤석열 당선인이 한국의 새 대통령으로 선출된 것을 축하한다"면서 "양국이 함께 노력해 수교 30주년을 계기로 양국관계의 건강하고 안정적인 발전과 양국 국민에 더 큰 복을 주기를 바란다"고 답했다.

자오 대변인은 "한중 양국은 이사갈 수 없는 이웃이자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중요한 파트너"라며 "올해는 중한 수교 30주년으로 30년 동안 양국관계는 빠르게 발전해왔다"고 말했다.


尹당선인 "한중관계 발전 확신" 시진핑 "우호협력 심화" 축전(종합2보)
https://www.yna.co.kr/view/AKR20220311068852001?input=1195m

김은혜 당선인 대변인은 이날 오후 당사 브리핑에서 "윤 당선인이 면담에서 한중 관계 발전을 위해 양국 지도자 역할이 중요하고, 책임 있는 중국의 역할이 충족되길 우리 국민이 기대한다고 밝혔다"고 전했다.

윤 당선인은 또 한중 고위급 회담 정례화를 강화해 한중 수교의 의미를 발전시키자고도 했다고 김 대변인은 설명했다.

김 대변인은 '주한 미국 대사대리보다 중국 대사를 먼저 만난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사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제일 먼저 통화했다"며 "자연스러운 흐름"이라고 답했다.

 

이렇게만 보면 특별할 건 없어 보일 수 있습니다. 일단 외교 무대에서 누군가 당선되면 그 사람에 어떤 문제가 있든 그것과 무관하게 좋은 말을 하고 정제된 표현을 씁니다. 어차피 자기 나라 일도 아니고 남의 나라 일이기 때문이죠. 어찌됐든 외교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걸 얻고 볼 손해를 피하기만 하면 됩니다.

 

바이든 대통령과 통화하는 거야 당연한 거고, 그건 특별할 게 없습니다. 원래 당선 이후 전화 통화 순서는 그 자체로 외교적 메시지이다보니 누구와 먼저 통화하고, 얼마나 오래 통화하는가마저도 분석 대상이거든요. 미국 대통령과 가장 먼저 통화하는 건 정말 특별할 거 없이 당연한 일입니다. 근데 실제로 얼굴을 보고 만나는 건 좀 다른 이야기이기도 한 것이, 가장 먼저 만난 것이 기초적인 중요한 이야기는 바이든과 먼저 했다고는 해도 단순 축하를 받기 위해서도 미 대사보다 중국 대사를 먼저 만난 것은 두가지 볼만한 게 있습니다.

 

하나는 미국만큼이나 중국을 우선시, 중요시 했다는 거고 이는 윤 당선인 본인이 중국을 어느 정도의 무게감으로 보는지 알 수 있습니다. 선제타격이니 반중이니 지지자들 생각보다 쉽지 않을 거라는 거죠.

 

두번째는 중국이 윤 당선인을 어떻게 여기는지인데, 사실 문재인 정부 당시 왕이가 21년 9월 경 방한 했을 때 뺨 석대 맞고 돌아왔다고 평했습니다. 정확히는 이렇게 말했죠. “왕이(王毅) 부장이 이번 방한(訪韓) 전후 뺨을 석 대나 얻어맞았다. 중국 지도부 관점으로 보면 대형 사고다.” 그만큼 중국의 한국 외교는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외교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는 윤석열은 주변국 입장에서 아주 만만한 아마추어로 보일 겁니다. 빠르게 접근해서, 가늠해봤을 겁니다. 미리 사전작업 해놓는 거죠.

 

물론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그렇기에 평범한 축하, 관계 다지기로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럼 다음 기사를 보십시오.

 

中 관영매체 "사드, 한국 내정 사안으로 여길 수 없다"
https://www.yna.co.kr/view/AKR20220311048100083?input=1195m

(베이징=연합뉴스) 김진방 특파원 = 중국 관영 영자지 글로벌타임스는 11일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문제는 한국의 내정과 주권의 문제로 여길 수 없다는 주장을 폈다.

글로벌타임스는 이날 사설에서 사드 문제와 관련해 "중국은 자국의 안보에 대한 한국의 정당한 우려를 존중하지만 진정한 안보는 공통적이고, 포괄적이며, 협력적이고 지속 가능해야 한다"면서 "한국은 중국의 전략적 안보 이익을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사드를 (한국의) 내정과 주권의 문제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면서 "미국이 원하는 것은 동북아시아에 쐐기를 박는 것"이라고 했다.

(중략)

앞서 윤 당선인은 지난달 26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주관 2차 TV토론에서 3불 정책에 대해 "폐지할 필요도 없는, 그것은 (문재인) 정부의 입장이었기 때문에 그런 입장을 유지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라며 "우리 주권 사항이기 때문에 그때그때 필요하면 판단하면 된다는 입장"이라고 말한 바 있다.

 

같은 11일입니다. 윤 당선인을 축하하는 날 곧바로 중국 관영 영자지 매체를 통해 저러한 메시지를 던졌습니다. 영자지에 올렸다는 것은 외국인들 보라고 쓴 기사라는 겁니다. 정확히는, 한국 관계자들 보라고요.

 

심지어 말하는 바의 근거조차 본인이 했던 말이죠. 중국이 사드 배치를 민감하게 여기는 이유는 전에 다른 글에서 설명했듯이, 탄도탄, 미사일 전력을 동원한 중국의 한국 제압력이 약화된다는 게 이유입니다. 즉, 사드를 빼거나 약화시키라는 것은 한국의 안보능력을 약화시키라는 메시지죠.

 

물론 윤석열 본인은 사드를 추가 배치하겠다라는 말을 했지만, 그건 미국이 팔아야 도입을 하는 거고, 그걸 떠나 중국은 한국의 새 대통령, 새 정부에게 꾸준한 압박과 공작을 시도할 겁니다.

 

 

왜냐고요? 더 만만한 상대거든요. 완숙해진 경력과 실력 있는 행정가, 정치인, 외교적 안목을 검사 받은 이재명보다 검찰질 말고는 해본 적도 없고 꼴랑 6개월 날로 정치하고 대통령된 윤석열이 더 만만한 상대이기 때문입니다. 미국이 윤 정부를 강력하게 통제할 거라고 생각하긴 합니다. 왜냐면 미국이 가장 걱정하고 싫어하는 게 바로 5년전 정권, 박근혜 정부 당시 전승절에 참여하는 거대한 트롤짓을 다시 보고 싶어하지 않거든요.

 

그럼에도 실제 외교 필드에서 본인이 나서서 무언가를 해야할 때 짧은 식견과 안목, 중국의 기센 외교관의 압박과 교활한 언변에 어떻게 넘어갈지 모릅니다. 외교 필드에서 이루어지는 언어들은 매우 정교한 외교적 수사입니다. 이쪽 언어와 의미 파악에 정통한 사람이 아니라면 글자 그대로와 다른 의미를 읽어내지 못해요.

 

따라서, 중국에게 이번 당선인의 등장은 기회입니다.

 

 

마지막으로 다음 기사를 보십시오. 3월 12일자 뉴스입니다.

 

中 인민일보, 1면에 '尹 당선' 시진핑 축전 실어…"한중은 협력 동반자"
https://www.news1.kr/articles/?4613353

중국 관영매체인 인민일보가 윤석열 제20대 대통령 당선인에게 축전을 보낸 소식을 1면에 실었다.

인민일보는 11일자 신문 1면에 시진핑 국가주석이 윤석열 당선인에게 전화를 걸어 "한중은 가까운 이웃이자 중요한 협력 파트너다. 수교 이래 한중 관계는 빠르게 발전해 양국 국민들에게 실질적인 이익을 가져다 줬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인민일보에 따르면 시 주석은 한중 관계가 "지역 및 세계 평화, 안정, 발전 및 번영을 촉진하는 데 긍정적인 기여를 하고 있다"면서 "올해는 한중 수교 30주년이 되는 해로, 양국 관계에 큰 의미가 있다"고 전했다.

시 주석은 그러면서 "한국과는 수교 초심을 지키고 우호협력을 심화시켜 한중 전략적 협력동반자 관계를 안정적으로 추진해 양국과 국민을 행복을 가져다줄 용의가 있다"고 덧붙였다.

 

역시 일반적인 축전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만, 1.이러한 메시지를 연달아서 던진 점. 2.인민일보에, 그것도 1면에 올렸다는 점. 3.그걸 보는 대상은 중국 내국인이라는 점.

 

이렇게 3가지 살펴본 측면이 있습니다. 물론 저런 기사들이야 몇번이고 올라올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똑같은 소식 다른 언론들이 배껴서 올리기도 하고 그러는 것처럼요. 하지만 그게 인민일보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인민일보는 중국공산당 정책과 이념을 홍보, 선전하는 공산당의 기관지입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환구시보 역시 인민일보의 계열사죠.

 

즉, 저러한 메시지는 단순히 중국의 한 언론에서 다뤘다. 정도가 아니라 중국 공산당의 시각과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상투적인 메시지이기 때문에 해석할 구석은 거의 없습니다만, 저러한 긍정적인 메시지가 인민일보를 통해 내국인에게 전달되는 것은 조금 다른 맥락을 발생시킵니다.

 

마찬가지로, 단순한 축전이고 관계개선을 요망한다 정도로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중공이 긍정적으로 다뤄주며 새로운 한국 정권에 중립적 기대를 하게 되는 경우, 다시 말해. 기존 한중관계보다 진일보할 수 있는 관계 개선이 이루어질 수 있을 거라는 태도를 기대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중국인들이 기사 한두 개에 자기 생각을 홀라당 바꾸는 바보들은 아니지만 최소한 다음을 기다리게 만드는 역할 정도까진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사실 진짜 볼만한 부분은 일본의 태도입니다.

 

日기시다, 윤석열 당선인과 전화통화…"냉각된 한일관계 개선 의향전달"
https://newsis.com/view/?id=NISX20220311_0001790043&cID=10101&pID=10100

기시다 총리는 이날 오전 10시30분부터 약 15분 간 이어진 통화에서 윤 당선인에게 선거 승리를 축하하는 한편 냉각된 한·일 관계 개선을 위해 협력하고 싶다는 의향을 전한 것으로 보인다고 NHK는 보도했다.

그는 또 태평양전쟁 중 '강제징용'과 위안부 문제 등에 대해 일본의 일관된 입장을 설명하고 한국의 적절한 대응을 요구한 것으로 보인다고 NHK는 덧붙였다.

기시다 총리는 이와 함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포함한 북한의 반복되는 미사일 발사와 관련해 한일 양국, 또 한·미·일 3국 협력의 중요성도 확인했다 NHK는 전했다.

 

한일관계에서 현재 가장 민감하고 중요하게 다뤄줘야할 문제들을 당선 직후부터 언급했습니다. 모든 외교, 첩보라인에서는 타국 대통령이 바뀌었을 경우 그 이전부터 미리 프로파일링을 진행합니다. 처음 트럼프 당선 당시 중국에서는 트럼프가 출연한 쇼 프로그램을 정주행 해야 했다고 했을 정도로 고생했다고 하죠. 그래서 해당 정치인, 외교관, 대통령 후보자들이 과거에 어떤 발언을 했고 어떤 행적이 있었는지를 연구하고 공부하는 건 다 하는 일입니다.

 

윤석열은 자위대가 한국에 주둔할 수 있다는 말을 공개적으로 했을 정도로 친일적인, 정확히 말하자면 극우보수가 일본을 대하는 저자세적인 태도와 한국 책임론을 주장해왔습니다. 일본이 뭘 했든 한국이 잘못한 거라면서요. 따라서 일본 입장에서 윤석열 당선인은 정말 다루기 쉬운 먹이감입니다. 만만하다는 거 이거죠.

 

박근혜 정부 시절 오바마 정권의 입김이 있었다지만 결국 위안부 문제와 강제징용 문제를 한국에 불리한 방식으로 끝내려는 새로운 문제를 만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비슷한 가치관, 세계관을 가진 윤석열 정부가 일본에 '협조'하기를 바라는 겁니다. 그래서 눈여겨볼만한 문장은 '일본의 일관된 입장을 설명하고' 부분과 '적절한 대응을 요구'했다는 부분입니다. 참고로, 협조나, 논의가 아닙니다.

 

입장을 설명하고, 대응을 요구한다. 우리가 말하는데로 너희가 행동하라는 겁니다. 저런 건 일방적인 명령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표현이죠. 물론 외교관계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이고, 관계가 좋지 않은 경우에도 나올 수 있는 강경한 메시지라고도 할 수 있을 겁니다. 근데 그걸 친일적인 성향을 지닌 윤 당선인에게, 당선된지 며칠 되지도 않아서 할만한 표현은 아닙니다. 일본이 한국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알 수 있는 시선입니다. 이제야 자기 자리(일본의 아래)로 돌아왔다고 여기는 거죠.

 

 

다음 기사를 보시면 아주 노골적인 입장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아사히 "윤석열, 日기업 자산매각 바람직하지 않다고 분명히 밝혀라"
http://www.dt.co.kr/contents.html?article_no=2022031202109919607006&ref=naver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노동자(징용 등) 배상 판결과 관련해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피고인 일본 기업의 자산 매각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견해를 분명히 밝혀야 한다고 일본 유력매체가 12일 주장했다.

아사히신문은 사설에서 윤 당선인이 징용 및 위안부 등 역사 문제와 안보·경제 관련 한일 현안의 포괄적 해결을 공약한 것을 거론하면서 "일본 정부가 가장 경계하는 것은 (한국 법원에서) 배상 명령을 받은 일본 기업 자산의 현금화 조치"라고 전했다.

이어 "윤 당선인은 우선 현금화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새 정부의 생각을 명시해야 한다"면서 "아울러 일본 정부와의 새로운 교섭 태세를 서둘러 정비해줬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아사히는 "일본 정부에도 (한국과의) 대화를 쇄신하기 위한 유연성이 요구된다"며 "한국의 정권 교체를 대립의 종지부를 찍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주문했다.

일본 정부는 한일 역사 갈등 현안에 대해 '일본 측이 수용할 수 있는 해결책을 한국 측이 제시해야 한다'는 경직된 자세를 고수해왔다.

(중략)

도쿄신문도 이날 사설에서 "한일 양국 간에는 징용 및 위안부 등 역사 문제로 정상 간 의사소통도 마음대로 안 되는 상황이 오래 지속됐다"면서 "(한국에서의) 정권 교체는 관계 개선의 호기"라고 강조했다. 신문은 "기시다 후미오 총리에게는 원칙을 중시하면서도 유연한 외교 자세로 (한국의) 새 대통령과 마주할 것을 요구하고 싶다"고 주문했다.

 

내용 중 대북관계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지만, 그건 본문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와 무관한 편이니 그 부분은 뺐습니다. 다만 일본 역시 당장 동아시아 안보 상황이 악화되는 건 바라지 않는다는 것 정도만 확인할 수 있다고만 넘어가겠습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대놓고 적나라하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먼저, 본인 공약을 거론하며 배상 명령을 받은 일본 기업 자산의 현금화 조치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새로운 교섭 태세를 서둘러 정비하라고 하죠. 즉, 우리 피해를 보전해야 한다고 요구한 거고, 빨리 우리랑 대화하러 오라고 요구하고 있는 겁니다.

 

일본은 여전히 과거사 문제를 인정하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입장을 보여준 것이며, 일본이 스스로 한국으로 가는 것은 자존심 상하니 니들이 먼저 와서 조아리라는 겁니다. 이는 문재인 정부 시절에서 니들이 먼저 와라. 니들이 먼저 개선을 보여라. 라고 요구한 바가 있습니다. 일본은 여전히 달라진 거 없이 국제관계에서 한국을 일본보다 낮은 서열에 두고 싶은 겁니다.

 

일본 정부에도 한국과의 대화를 쇄신하기 위한 유연성이라는 것은 한국이 저자세로 나오고 자기 입장을 명확히 한다면 그에 대해, 정확히는 윤석열 정부를 예쁘게 보겠다라고 보시면 됩니다. 즉, 니들이 먼저 자기 수준을 깨닫고 굴복한다면 중요 가신으로 관심있게, 중요히 다뤄주겠다는 의미죠.

 

좀 더 드라이하게 서술해볼까요? 한국이 먼저 일본 쪽에 대화를 요구하며 사람을 보내거나, 본인이 직접 방일한다면 일본은 그에 대해 대외적으로 친밀한 태도를 연출해줄 것이고 상당히 예우해주는 모양새를 만들어줄 겁니다. 그렇게 한일관계가 개선되면 좀 더 밀접하게 대화하며 경색된 관계를 개선해나가겠다는 거죠.

 

그러나 앞서 이야기했듯이, 일본이 한국을 바라보는 시각과 태도를 고려했을 때 단순히 두 국가가 관계를 개선하게 된다 정도로만 이해하는 것은 극히 편향적인 시각입니다. 

 

그리고 다음에 나오는 문장도 중요한데, 한국의 정권 교체를 대립의 종지부를 찍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즉, 한일관계에 있어 더 상대하기 어렵고 까다로운, 그리고 친일적이지 않은('그들 입장'에서는 반일적인) 민주당 정권보다 더 만만하고 쉽게 저자세로 나와주는 보수 정권이 더 오랫동안 일본과의 관계를 맺었으면 좋겠다는 의미거든요.

 

이명박 정권과 박근혜 정권 9년 동안 국정원을 통해 일본 극우단체에 자금을 지원했고, 여러 친일 비판이 있었던 활동과 발언들이 있었고, 박근혜 정권 때는 논란의 위안부, 강제징용 관련 조약이 있었죠. 반면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정권 당시 일본과의 관계는 좋지 못했고, 문재인 정권과의 관계는 그 중 최악이었습니다. 이건 일본이 자초한 면이 크죠. 그 때문에 미국도 기시다 총리 취임 이후 방미를 허락하지 않은 거이고.

 

이처럼 민주당 정권, 진보 정권이 들어서면 일본에 보이는 극우보수의 굴복적인 태도를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한국의 이익보다는 일본의 이익에 충실하고 한국과 한국인보다 일본에 더욱 충성하는 성향이 있다보니 일본은 한국과의 외교에 있어서 얻는 게 많고, 난이도 또한 상당히 낮죠. 그래서 극우보수 정권을 선호하는 겁니다.

 

한국에서의 정권 교체는 관계 개선의 호기라는 발언은 그래서 나온 거고요. 이재명이 당선되고 기존의 외교 기조를 이어갔다면 저런 메시지들은 나올 수 없거나, 매우 상투적으로 언급만 됐을 겁니다.

 

 

 

이제 윤석열이 대통령이 되고나면, 지난번에 말했듯이 은근히 친중적이고 노골적으로 친일적인 정부를 보게 될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게 옳다고,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거라고 마인드 컨트롤하는 이들은 많을 겁니다. 그건 이성적인 것도 아니고 합리적인 것도 아닙니다. 

 

아, 참고로 중일 양국에서 나오는 이 메시지들은 당선 이후 1주일도 되지 않고 나온 것들입니다. 고작 2일, 3일만에 나온 겁니다. 이게 무슨 의미인지, 중일이 윤석열을 어떻게 판단하고 평가했는지 생각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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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대선에 대해서 할 말이야 여럿 나올 수 있고 왜 졌는지 등등을 이야기할 수도 있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될 건지 등등 같은 것도요. 하지만 그런 식상한 이야기보다는 이번 대선에 윤석열에게 표를 준 2030에게 몇가지 말을 하고 싶어졌더군요.

 

 

민주당이 위선적이고 정의롭지 않으며, 공정하지 못하다고 공격하던 2030은 앞으로 윤석열 정부 아래에서 발생하는 상식을 초월한 불의를 보게 될 겁니다. 이명박근혜 시절보다 더 적나라한 것들을요. 그리고 언론과 검찰은 거기에 충분히 동조하며 마치 별 일 아닌 것처럼 보도하고, 언변과 제도적 장치를 오용, 왜곡하며 불법은 아닌 것처럼 둔갑시킬 겁니다. 보도를 안 하거나 덜 하기도 할 겁니다. 당장 자기 주변 사람들부터 무죄, 무혐의가 될 거고, 뭔가 이상한 수사와 판결로 누군가 감옥에 갈 겁니다. 만들어진 죄죠. 죄는 실제로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법기술에 대해 관심을 가져본 사람들은 그게 가능하다는 걸 압니다. 실제 사례들도 있고요.

 

그럼에도, 대가리가 깨지지 않은 2030은 그럼에도 윤 정부가 민주당 정부보다 낫다고 할 겁니다.

 

 

이재명과 문재인이 싫어서 윤석열을 찍은 2030들은 자기가 싫어했던 그 이유들을 윤석열 정부에게서 찾아볼 수 있게 될 겁니다. 사실, 그들이 이재명과 문재인, 민주당을 싫어했던 이유는 그저 만들어진 것이고 누군가에게 주입된 것이지 실제 현실과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도 알아야할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러지 못할 겁니다. 자신의 시각은 자신의 세계관 그 자체이기 때문에 그 세계관을 부수어야 하는데, 그들은 그러지 않을 거고 그러지도 못할 겁니다. 그러니 대가리가 깨지지 않는 한 아주 오랫동안 문재인은 친중 빨갱이고 민주당 역시 그러하다는 만들어진 프레임을 진실로 여길 겁니다.

 

 

문재인 정부가 친중친북이라 윤석열을 찍었다는 이들은 앞으로 강자 앞에서 쩔쩔 매는 외교 초등학생 윤석열의 멍청한 행동들에 답답함을 느낄 겁니다. 일본에 굴종하고, 강한 중국에게 쩔쩔매며 굴복하는 윤석열을 보게 될 겁니다. 은근히 친중적이고 거침없이 친일적인 아이러니를 보게 될 겁니다. 하지만 희망은 있습니다. 미국이 그걸 통제하고 관리하는 거죠. 그렇기에 친중은 최대한 컨트롤 할 수 있다 해도 친일만큼은 막지 않을 겁니다. 어느날 우리가 주권국이긴 한가를 고민해야할 겁니다. 물론, 안 하겠지만요.

 

 

반페미 하나만 보고 찍은 2030들은 이제 자기 현실을 감당해야할 겁니다. 실제로 반페미 정책을 펼칠 것인가부터 의아할 것이고, 그쪽 담론에 대해서는 눈길조차 제대로 안 줄 겁니다. 그러나 그런 게 중요한 건 아닙니다. 그따위 성담론보다 중요한 건 내 인생과 내 삶이거든요. 찍어서 대통령 만들어줬으면 그 책임도 져야죠. 가난한 사람들, 좋은 직장을 가지지 못했거나 저스펙 취준생들, 이제 막 대학 졸업하거나 대학 재학 중인 이들. 앞으로 그들이 목도해야할 세상은 2030에 유리한 게 아니라 끔찍할 정도로 착취하고 막대하는 잔혹한 사회일 겁니다. 최저임금은 오르지 않거나 없어질 위기에 쳐했고, 주 120시간은 아니더라도 제한 없이 노동을 강요받을 수 있으며, 월 200을 받을 수도 있었지만 월 150, 170을 받는 첫 사회생활을 시작할 겁니다.

 

자기는 더 좋은 조건으로 사회생활을 할 거라 믿는지 모르겠지만, 꼴랑 사회초년생에게 무슨.. 대기업에 가는 사람들은 극소수이고 대부분의 직장인, 사회초년생은 중소기업 갑니다. 거기서 한번 잘 버텨보세요. 내가 만든 나라, 내가 지지한 세상이니, 대가리가 깨져라 고생해야죠.

 

의료민영화가 된다면? 그럴 가능성은 다소 낮다고 생각하지만 가족 중에 아픈 사람 있다면 감당 가능할지 계산기 두드려보시길. 의료가 자본의 논리와 경쟁의 논리로 돌아가게 된다면 받는 의료에 따라야할 사람 목숨 또한 자본의 논리로 계산됩니다.

 

 

꼴랑 거대 담론에 휘둘리면서 자기 현실에 칼을 꽂았으니 이제 당해봐야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어떤 꼴을 보게 되든, 나중에 이럴 줄 몰랐다는 개소리는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들은 다 알았습니다. 대선 시작하기도 전 몇개월, 몇년 동안 보여줬고 스스로 드러낸 것들입니다. 남들은 다 알았는데 여러분들만 모를 수는 없죠. 그때가서 손가락을 자르든, 목을 매고 책임을 지든, 대가리가 깨져 후회하든, 다 알아서 감당하고 책임져야하는 겁니다. 민주주의는 자기 선택에 책임을 지는 것도 있습니다.

 

 

2021.06.25 - [취미/이야기] - 내가 더 유능해. 라는 청년들의 망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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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가 현재 굉장한 분투를 보여주고 예상 이상의 성과와 전과를 만들어내고 있으며 독일의 재무장과 하나 된 유럽, 나토의 모습을 연출하게 되었으며, 동시에 러시아에 어마어마한 제재와 더불어 군사적 피해까지 발생하고 있습니다.

 

이건 미국이 도와준 것도 있고 서방이 지원해준 것도 있고, 그 이전에 우크라이나가 굉장히 잘해준 것도 맞긴 합니다만...

 

 

미국은 이 전쟁을 오래 끌고 싶어하거나, 최소한 러시아에게 돌이킬 수 없는 큰 피해를 주고 싶어 하는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우크라이나가 어떤 꼴이 되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고 나라에 지금 이상의 심대한 피해를 입더라도요.

 

말하자면 러시아의 지옥으로 만들겠지만, 러시아만의 지옥은 아닌 셈이죠. 우크라이나인에게도 끔찍한 상황이 될 거고 너무 많은 피가 흐르며 피해도 지금 보는 것 이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국토 절반 이상을 점령하더라도 얻는 것보다 손해가 더더더욱 커다랗게 만들고 싶어 할 수도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걸 미국탓이라고 하거나 미국이 개입을 지상군 안 해서 이렇게 됐다는 말도 안 나올 겁니다. 모든 시선은 우크라이나와 유럽, 러시아에 향할 것이고 미국과 미군의 위상에 대한 찬사만 나오겠지요. 심지어 우크라이나와 젤렌스키의 분투와 용기, 책임감에 대한 경의와 찬사로 사람들의 이목이 모일 거고, 모두 그런 이야기만 할 겁니다. 정작 우크라이나인들은 피를 너무 많이 흘렸을 때겠죠.

 

 

하지만 미국은 우크라이나에게 분명한 지원을 해주면서도 그들의 손해에 대해 꽤 무감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을까.. 우크라이나가 어떤 피해를 입게 되든 러시아의 피해만 필요한 만큼, 될 수 있으면 많이 발생시키겠다는 목적으로 말이죠;

 

정작 미국은 우크라이나를 통해 고급 적성무기와 정보전, 우주전 경험을 얻고 그걸 보여줌으로써 미국의 위상을 다시금 높히기도 하고 미국의 능력을 목도한 이들에게 지금 미군 부대가 주둔하고, 전 세계에 항모가 있는 것 이상으로 미군의 존재, 미국과의 동맹에 강렬한 필요를 느끼게 하면서요.

 

 

물론 그냥 뇌피셜이고 제 망상입니다. 그냥 그런 생각이 들어서 쓴 글이지 저도 진지하게까지 생각하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결국 남의 나라이고, 동맹이나 조약의 대상도 아닌 우크라이나이며 독일 재무장 등 유럽이 알아서 국방에 돈을 쓰고 러시아를 견제하는 상황은 만들어졌죠. 우크라이나가 어떻게 되든 미국 입장에서 별 피해도 손해도 없습니다.

 

이번 세기 동안 러시아의 위협을 없애버리겠다는 생각을 한다면 우크라이나를 제물로 지옥을 만들어 두 나라의 국민과 군대를 한쪽은 환호와 다른 한쪽은 지탄 속에서 녹이려 할 수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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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남이라는 용어는 20대 남자를 특정 프레임에 끼워넣고 과대표하기 위한 언어가 되었습니다.

 

20대는 수많은 스펙트럼이 있습니다. 정치적 이념부터 사회적 가치관, 세계관, 단순 개인의 덕성과 윤리기준, 개인적 사상 및 철학 등. 정말 많은 것이 뒤섞인 세대입니다. 세대적 경향성과 시대에 영향 받은 것은 당연히 있겠지만, 그럼에도 20대는 다른 어느 세대보다 스펙트럼이 넓을 수밖에 없는 세대입니다.

 

현대사회는 복잡하고 많은 변화가 있다보니, 지금의 세대가 이전 세대보다 더 다양하고 복잡한 세대일 수밖에 없는 건 당연한 일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이대남이라는 표현은 지나치게 과대표되는 용어입니다. 마치 MZ세대라는 용어가 너무 넓은 세대를 포괄하기 때문에 무의미하고 말도 안 되는 억지 용어인 것처럼 말이죠.

 

 

지난 몇년간, 아니. 10여년간 2030세대는 빠르게 부정적이게 되었습니다. 여기엔 여러 이유들이 있을 거고, 특정 정치 세력의 탓도 아닌 이유들도 많을 겁니다. 하지만 확실한 건, 이들이. 그리고 이들을 포함한 많은 세대들이 혐오와 증오에 너무 익숙해져버린 거죠.

 

핵심은 이겁니다. 

 

일베, 펨베, 디씨 같은 곳에서 혐오의 언어와 용어들을 만들어내고 모든 세대와 계층, 집단에 혐오 표현들을 하나씩 만들어냈습니다. 여자들은 어떻고, 결혼은 어떻고, 엄마는 어떻고, 남편은 어떻고, 40대는, 50대는, 60대 이상은 어떻고.. 군인은 어떻고 미필은 어떻고 어린아이, 심지어 고양이까지.

 

문제가 있어 보이는 모든 것들을 면밀하게 분석해서 뭐가 원인이고 어떻게 해야하는가 등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그냥 아주 간단하게 이러이러한 개새끼들이라고 만들어버렸습니다. 맘충, 털바퀴, 피싸개, 틀딱, 586 등등.. 엄청나게 많아요. 앞서 말했듯, 모든 세대와 계층, 집단에 혐오 표현들을 하나씩 만들어냈죠.

 

 

인터넷에서 말하는 이대남들은 세상 모든 것을 적으로 만들었습니다. 마치 세상 모두가 문제인 것처럼. 그 이전에, 세상 모든 것이 개새끼인 것처럼. 혐오와 분노에 중독된 이들이 눈에 거슬리는 모든 것을 적으로 규정하고, 문제로 낙인찍고, 그 낙인으로 하여금 재평가와 재판단의 여지를 소거해버렸죠.

 

 

그런데 현실은 어떻습니까? 인터넷의 이대남만 20대 남자인가요? 그들만 20대를 대표할 수 있을까요? 전혀 아닙니다. 좀 더 현실에 충실하고, 정상적인 인간관계를 맺거나 맺으려 노력하고, 자기 삶을 위해 노력하고 사는 사람들 정말 많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증오와 혐오에 휩쌓인 이들과 다른 생각과 언어를 사용하며 살아가고 있죠.

 

 

그럼에도 그들의 목소리는 왜 커질 수 없었을까요?

 

간단합니다. 그들의 목소리를 공격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좀 더 정확히는, 마치 진보좌파거나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목소리를 소아성애라도 되는 것처럼 모욕하고, 비난하고, 부끄러움을 주는 이들이 있다는 겁니다. 미드 뉴스룸에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공화당원으로서의 당신 생각도 얘기할 각오가 돼 있어?"

 

"공화당원인게 무슨 소아마비라도 걸린듯이 말하는군."

 

주인공은 공화당원이고 보수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의와 도덕, 윤리규범을 모르는 사람은 아닙니다. 그래서 티파티에 장악당해가는 공화당과 보수적 가치관을 비판하는데 적극적이게 됐죠. 한국의 정치진영의 골은 상대 진영이 내 진영과 같지 않으면 그 사람을 제정신이 아닌 사람으로 여기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저 정당을 지지해? 정상이 아니군."

 

이렇기 때문에 각 진영간은 대화가 잘 안 됍니다. 심지어 상대 진영을 지지한다는 이유만으로 마치 지능이나 정신병이 있는 것처럼 공격하는데, 이 정도까지는 차라리 흔한 일이죠.

 

제가 진짜 지적하고 싶은 부분은 이런 겁니다. 민주당을 지지하거나 그러한 성향을 드러내면, 마치 그게 잘못된 것인 것처럼 공격하고 조롱하고 비아냥댑니다. 보수 성향인 사람이나 극우정당을 지지하는 이들이 자신의 성향을 감추고 입을 다물며 진보좌파 성향의 사람들 사이에서 샤이보수로 자신을 감추는 것처럼, 반대로 극우, 일베적 성향이 높은 곳에서 그러한 이들과의 마찰을 두려워하거나 피하기 위해 진보, 좌파적 성향을 감추는 것과 마찬가집니다.

 

그렇게 목소리들이 사라져가죠. 그리고 최근 몇년 동안, 인터넷 환경에서만큼은 일베적 가치관을 가진 이들이 거의 모든 곳에서 발견될 수 있고 그들 역시 숫자가 상당히 많으며, 자신의 성향을 드러내는 걸 부끄러워하거나 피하지도 않습니다. 따라서 진보좌파적 성향을 드러내는 사람이 있다면 모두 달려들어서 린치를 가하죠. 단순히 린치를 가하는 게 아니라, 민주당 지지자, 문재인 지지자라는 사실, 혹은 추정 그 자체를 근거로 그게 잘못된 것인 것처럼 조롱합니다.

 

 

이게 혐오와 증오를 퍼뜨리며 모든 존재와 싸우는 이대남과 그러한 성향의 집단이 과대표된 이유이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목소리와 존재감이 매우 줄어든 이유죠. 드러내면, 공격 받습니다. 기실, 혐오자들이 받아야할 취급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이 혐오자들에게 공격 받고 있는 게 현실이죠.

 

최근 대선과 관련되어 1번남과 2번남이라는 표현이 새로 생겼습니다. 거의 하루아침에 생겨난 표현인가 싶을 정도인데, 이것도 굉장히 빠르게 자정되고 있더군요. 혐오에 기반한 거라고 스스로 지적 하면서요.

 

하지만 이 용어에 위안 받거나, 자기 목소리를 찾는 사람들고 있게 됐습니다. 혐오자 2번남과 반대되는, 목소리가 억눌렸던 1번남들이 말이죠. 이번 대선은 이 1번남과 2번남의 세계관 차지 싸움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겁니다. 이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겠습니다만, 전 혐오와 증오로 가득찬 세계에서 살고 싶지는 않습니다. 세상 모든 것을 적으로 만들고, 단지 문제로만 바라보며, 비난 받게 만들고, 행위나 표현과 무관하게 그저 그 집단에 속했거나 지지한다는 이유만으로 비난받는 세상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대선으로 더 상식적인 생각과 정제된 언어들이 혐오를 이겨내고 목소리를 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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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렌스키 대통령의 모습은 많은 위정자들 사이에서도 빛이 날만한 행동이고 뛰어난 귀감이 될 행동입니다. 그의 능력이나 안목과는 별개로 저만한 책임감을 가진 대통령이란 국민들에게도 자랑이고 병사들에게도 마땅한 충성의 대상이 될 겁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통령 중 하나가 될 겁니다.

 

 

그러나 젤렌스키 대통령이 정말 능력이 있는 대통령이냐 한다면 저는 모르겠습니다. 일단 검증된 것이 매우 적고 실제 정치를 시작한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사실상 매국노와 제정신 아닌 부패한 강경파 후보가 될 수 없기에 당선된 대통령인 것도 사실이며 그 대통령 후보 시절 이후에나 사실상의 정치 활동을 시작했으니까요.

 

그의 스펙이 경제대 법학과 출신이라는 점이 그가 뛰어난 능력자라는 건 알 수 있지만 그만한 스펙을 가진 사람들은 정재계에도 흔합니다. 그러니 그의 과거 학력과 지적능력은 기본 조건 중 하나일 뿐이지 그가 뛰어난 대통령이나 정치인을 근거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그는 책임감 있는 사람이고 용감한 인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키예프에서 도망가지 않고 그의 측근들과 함께 결코 포기하지 않고 러시아를 상대로 버티고, 리더쉽을 발휘하고 있는 거죠. 그래서 위대하다는 거고.

 

 

현재 우크라이나의 상황은 그리 좋은 건 아닙니다. 점점 나아지고는 있지만, 여전히 위험한 건 사실입니다. 여기서 알아볼만 한 것은 우크라이나가 그리 녹록한 군대가 아니라는 것이고, 이것은 대통령이 책임감 있게 리더쉽을 발휘해준 것이기 때문에 제능력을 보이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젤렌스키가 외국으로 도망가거나 제대로된 리더쉽을 발휘하지 못했다면 우크라이나의 군대도 제대로 효용을 발휘할 수는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서방, 유럽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이고 이에 관한 무책임한 유럽 돼지들을 비판하려는 글을 쓰려고도 했지만 며칠 정도 더 지켜본 뒤 새롭게 구축되는 통합적 전쟁관과 우크라이나 전역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조금 알게된 것도 있고 해서 몇가지 써보려고 합니다.

 

 

먼저, 우크라이나의 항전 의지는 매우 중요합니다. 미국은 우크라이나와 군사동맹이나 조약을 맺은 것도 없고 나토에 가입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직접적인 파병이나 지원을 해주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에 대한 간접적인 지원 정도는 해줄 수 있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1.위성 정찰 정보.

 

2.F-35를 통한 공역 내 투사체 추적, 식별, 정찰, 관리, 전자전 지원.

 

이 두가지 요소가 매우 중요합니다. 흔히 맵핵 켰다는 말이 있듯이, 미군의 정보지원은 우크라이나가 러시아군의 움직임과 활동을 식별하고 분석할 수 있게 해줍니다. 그들이 어디로 움직였고, 언제 움직였으며, 언제 도착할 수 있는지, 이러한 움직임의 목적은 무엇이며 그에 대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를 결정할 수 있게 해줍니다.

 

F-35가 전투기이지만 사실 전투기만으로의 효용만 있는 게 아니라 데이터 링크 중계자로서의 역할 또한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이거 미군이 보증하는 보안 수준이 안 되면 다른 나라에 함부로 팔지도 않죠.

 

덕분에 우크라이나군의 저항에 정말 매우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또, 이러한 우크라이나의 결사항전 의지는 미국으로 하여금 직접적인 군사개입의 여지를 만들어줍니다. 가령, 미국민들의 여론이 바뀐다면 좀 더 적극적인 행동을 가능하게 해주는 동력이 되어줄 수 있죠. 미국의 NSC는 우크라이나의 항전 의지를 평가했으며, 명백히 항전의지가 있다고 평가했습니다. 또한 백악관 역시 지금 이 사태에 대한 공식적인 입장을 발표하길 미루고 있습니다. 러시아와의 소통은 여전히 진행되고 있을 것이고, 한번 입장을 발표하면 번복하기 어렵기 때문에 신중하게 결정되어야 합니다.

 

 

이번 러시아의 침략은 미국을 비롯한 서방의 직접적인 개입 이전에 끝을 내야 한다는 대전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군대는 물론, 시민들의 자발적이고 조직적인 저항군, 의용병이 구성되어 반격을 당하면서 장기화될 가능성도 생겼습니다. 서방에서 지원해준 재블린은 러시아군의 전차와 기갑차량에 꾸준한 피해를 입혀주고 있습니다. 이게 장기화된다면 푸틴은 새로운 출구전략이 필요해질 겁니다.

 

지금 상황은 러시아에 매우 불리하고, 우크라이나군과 시민군 양쪽이 적이며 산발적인 피해들이 늘어나고 있는 점 때문에 러시아군은 오히려 시민들에 대한 강경책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민간인들이 총을 들고 저항 중이며, 이에 대해 그들의 저항 의지를 꺽으려면 젤렌스키가 저항을 포기하거나 도주해야 하며, 그렇게 급속도로 사기와 의지를 잃은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포기해야만 하는데, 젤렌스키는 여전히 용기를 복돋고 있으며 시민들이 거기에 적극적으로 호응 중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러시아군인 민간인 사살을 하지 않고서는 매우 어려운 전황에 빠지게 될 겁니다. 심지어 민간인들의 의용병 가입, 투신은 점점 늘어만가고 있습니다.

 

 

서방의 제재는 당장 큰 역할을 하진 못할 겁니다. 하지만 장기화된다면 러시아의 경제는 그들이 가진 자원과 식량생산력과 무관하게 더욱 더 침체되며 국제사회의 비중이 줄어들 겁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인데, 러시아의 군대 또한 경제력이 뒷받침 되어야 유지 가능한 겁니다. 발전이 아니라, 유지 자체를 말하는 겁니다. 심지어 그들에게 임금을 평균보다 적게 주거나 아예 안 준다고 해도 자원은 소모됩니다. 군대는 생산성이 거의 없는 집단이기 때문에 자원만 소모되기에 임금을 안 준다 해도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 돈이 나갑니다.

 

1차대전 때 그러한 대전쟁이 날 수 없을 거라는 전망이 많았습니다. 여러 국가들이 이렇게 고도화되어 연결되었는데 어떻게 전쟁이 날 수 있겠느냐고요. 그러나 실제로 발생했습니다. 최근 유럽의 제재는 전쟁이 난다고 했을 때 민간, 경제 등의 피해가 줄어들 수 있도록 제재를 통해 그 연결점과 비중을 낮추는 역할을 합니다. 그렇기에 전쟁이 나거나 참전한다 해도 그에 상응하는 파급력은 다소 약화될 수 있죠.

 

이는 훗날 군사력을 사용할 여지를 만듭니다. 지금의 제재가 러시아에 대한 유럽의 빌드업이라면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러시아는 단기 결전을 원했고, 빠르게 키예프를 점령하고자 했으나 그것은 예상 외로 잘 싸운 우크라이나군의 대응과 의용병의 저항, 미군의 정보 지원, 러시아군의 사기 문제 등이 맞물려 어느 정도 돈좌된 것으로 보이고, 그에 따라 시진핑과 통화를 하는 등 중국의 간접적인 지원을 받을 것으로 보입니다.

 

역시 우크라이나에서 중국인에 대한 혐오 감정이 빠르게 확산 중이고요.

 

그런 맥락에서 푸틴은 자국의 군사력을 통해 우크라이나를 꺽지 못하고 우크라이나군에 대해 쿠데타를 종용했으나, 통할 가능성은 없다고 봐도 됩니다. 지난 돈바스 전쟁 때부터 우크라이나군의 부사관, 장교들은 자기 친우, 전우를 잃으며 이를 갈았던 이들이고 친러파가 있다고 해도 소수일 것이며 지금 상황에서 행동에 나서는 것 역시 어렵습니다. 희망없는 종용이었습니다.

 

 

앞선 미국 NSC의 우크라이나 항전의지에 대한 평가는 곧 나토의 신속대응군 가동을 결정하게 했고 우크라이나 뿐 아니라 벨라루스로 향할 가능성 또한 있습니다. 이는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3면 공격을 받고 있는데, 벨라루스를 밀어낸다면 2면 공격으로 한정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 키예프에서 러시아군은 순조롭게 격퇴되고 있고, 이는 다른 지역에서도 비슷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러시아군과의 일진일퇴가 진행되는 지역도, 좋지 않게 격퇴되어 밀려난 지역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공군이 러시아 영토 공군기지를 습격한 일은 매우 긍정적인 신호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전황과, 다시 한번 말하지만 우크라이나 항전 의지는 매우 높게 평가받을만 하고, 실제로 그 덕분에 26일, 나토는 직접 군사지원을 실시하게 되었습니다. 영국은 혼성 지상 전투단을 에스토니아에 투입할 것이고, 네덜란드와 폴란드는 전시 비축된 대공 미사일 200여 기 이상, 전시 비축 탄약 직접 지원 및 지상 보급대 편성으로 이어졌습니다.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진 이러한 항전의지는 정말이지, 몇번이고 다시 언급할 필요가 있을 정도로 중요한 요소입니다. 우리가 전쟁이 나서 설령 매우 절망적인 상황에 빠진다고 해도 결코 포기하지 않아야할 이유이기도 하고, 싸울 수 있다면 싸워야만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시민들은 놔두고 혼자 도망이나 가는 대통령이나 한반도에 야욕을 가진 국가의 군대를 들이겠다고 하는 이들은 제대로된 리더쉽을 발휘하기 어려울 것이며 젤렌스키의 예처럼 그러한 리더쉽의 존재는 매우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그렇다고 그런 이들을 죽인다면 위대한 순교자가 되어 더더욱 결집할 요소가 될 것이니 쉽게 죽일 수도 없고요.

 

또한 바로 이 요소에서 아프간과 우크라이나의 운명이 크게 갈린 거기도 합니다. 미국은 아프간처럼 지원을 해주고 자국 군대의 피를 뿌린다 해도 의지도 없고 그 안에서 자기만의 이익을 보려는 놈들이 있다면 결코 이러한 지원을 해주지 않았을 겁니다. 나토 또한 마찬가집니다. 도와줄 가치도, 의미도 없었다면 나서지도 않았을 겁니다.

 

즉, 제대로된 국가와 그렇지 못한 자들의 차이입니다. 우크라이나는 아프간과 비교할 수 없는 제대로된 국가라는 거죠. 비록 그들의 힘과 경제력이 부족하다고 해도 말입니다. 바로 그것에서 운명이 갈린 겁니다.

 

 

마지막으로 러시아군이 생각보다 약한 군대인지, 우크라이나군이 생각보다 과소평가된 군대였는지 확인하기가 어렵습니다. 다만 확실한 건 우크라이나군이 어느 정도는 과소평가되었거나, 온당한 평가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는 겁니다. 처음 전쟁이 벌어졌을 때 예상했던 것보다 대단한 성과를 내주고 있습니다.

 

푸틴의 끔찍한 오판은 핀란드, 스웨덴의 나토 가입 실무 진행을 이끌어내는 등 러시아에 대한 위협으로 다가오게 되었습니다.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이 러시아에게 지나치게 자극이 되었던 것은 맞지만, 이런 식의 군사적 침략은 비난의 여지가 없는 행동이며, 초기 대전략의 실패 이후 러시아는 굉장한 반동에 시달리게 될 겁니다. 특히, 러시아 내에서 반전여론이 커지고 있는 만큼 이번 전쟁의 실패는 푸틴의 실각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푸틴파 역시도.

 

이번 전쟁이 끝난다면 우크라이나의 업적, 공적을 평가하게 되면서 나토 가입이 현실화될 가능성 또한 있을 것이고, 친러 지역을 도로 내뱉어야 한다면 크림 반도까지 도로 내줘야할 가능성 또한 있으며, 우크라이나 내 친러파는 크나큰 반격에 직면하게 될 겁니다. 이른바 반민특위 같은 거죠. 단지 그 뿐이라면 다행이겠지만, 우크라이나인의 거대한 반러 감정은 러시아에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게 될 것이고, 모스크바는 바로 밑에서 그러한 국가가 새롭게 재편됐음을 감당하게 될 겁니다.

 

다른 곳에서 딱 한번 언급한 일이긴 하지만 여기에도 적겠습니다.

 

이번 전쟁이 러시아의 패배로 끝난다면 유럽은 러시아의 영향력을 과장 조금 섞어서, 우랄 산맥 동쪽으로 밀어낼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디까지나 비유적인, 과장 섞인 표현인데, 우랄 이서의 영토에서 외부적 영향력이 극도로 축소될 가능성을 말하는 겁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결국 우크라이나 전황이 매우 긍정적으로 흘러갔을 때를 이야기하는 것인지라, 러시아군은 100만 대군이고, 나토의 더 적극적인 개입이 시작되기 전에 예비대를 포함해 대규모의 전력과 무기들을 우크라이나에 밀어넣고 소모전에 가까운 단기결전을 강제해버린 채 전쟁을 끝내버린다면 결국 러시아의 승리이자 러시아의 의도가 어느 정도 충족된 결말을 맞을 수도 있다고 봅니다.

 

실제로 이쪽도 상당히 높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계속 지켜봐야 결론을 낼 수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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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의 붕괴는 지정학적 재앙이었다.
-블라디미르 푸틴.

 

 

사람들이 이번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에 대해 무조건 러시아만 잘못이고 러시아는 명분 없이 전쟁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아예 틀린 말은 아니지만 러시아에게 전쟁의 이유가 없느냐, 명분이 없느냐 하면 그건 절대 아닙니다. 생각보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지역에 러시아의 생존권까지 달려 있다고 여기고 있어요.

 

 

먼저, 이런 일이 벌어진 이유는 소련 붕괴 시절로 올라가야 합니다. 소련의 붕괴는 지정학적 재앙이었다는 말처럼, 당시 소련은 우크라이나, 벨로루스, 발트 3국을 완충지대로 가지고 있던 나라입니다. 이게 왜 중요한지 알기 위해서는 유럽의 지리적 조건부터 알아봐야 합니다.

 

유럽 대평원.

위 이미지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프랑스 끝부터 우랄산맥까지 어마어마한 평원이 보이실 겁니다. 유럽 대평원이라고 칭할 때는 저기서 프랑스 평원, 북독일 평원, 동유럽 평원으로 나뉘고 그걸 합쳐서 부르는 건데, 보시다시피 저 넓고 광활한 대평원은 농사짓기에 참 좋겠지만 그런 동시에 군대가 이동하기에도 정말 좋은 조건입니다.

 

그리고 이걸 러시아의 기갑전력과 함께 놓고 보면 재래식 전력을 동원한 전력이 발발한다고 했을 때 러시아의 무시무시한 기갑전력은 저 대평원에서 걸리적 거리는 거 없이 쭉 밀고 지나갈 수 있습니다.

 

 

바로 여기서 유럽 지정학의 군사 문제가 발생하는 거죠.

 

서방세계는 러시아의 기갑전력이 그대로 밀고 들어오는 것이 매우 우려스러운 상황이고, 러시아는 반대로 유럽세계가 모스크바 턱밑에서 총구를 들이미는 것이 매우 우려스러운 상황입니다.

 

소련 시절에는 철의 장막이라는 완충지대를 구성하여 이걸 막아냈었고요. 이러한 완충지대론은 다른 나라에도 많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소련이 해체되면서, 우크라이나, 벨로루스, 발트 3국 등 여러 나라들이 독립을 하면서 이러한 완충지대를 잃어버렸다는 거죠.

 

그 당시 소련은 서방세계에게 약속을 받았습니다. 정확히는, 나토는 더 이상 회원국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미국이 고르바초프와 약속을 했죠. 다만 이것은 문서로 남지 않는 신사협정이었기 때문에 지킬 필요가 없었다는 게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이걸 순진하게 믿어버린 소련도 문제였죠.

 

나토는 2차대전 이후 공산화된 동유럽 등 공산주의의 위험에 맞서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고, 구성 회원국 중 하나만 공격 당해도 모든 회원국이 참전하는 구조입니다. 

 

나토 회원국.

위 이미지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단순히 유럽 국가 뿐 아니라 터키, 미국과 캐나다까지 가입되어 있습니다.

 

처음 발트 3국은 나토 회원이 아니었습니다. 소련이 붕괴한 뒤 독립한 국가들이었지만 소련 붕괴 이후 나토는 러시아와의 신사협정을 너무도 쉽게 저버리고 발트3국을 나토에 가입시키죠. 물론 이들의 가입이 러시아에 대한 군사적 위협은 아닙니다. 애당초 발트 3국은 러시아에 대한 위협이 되기에 너무 작고 약한 국가들이며, 실제 전쟁이 벌어질 경우 이 세 국가는 포기하고 이후 탈환한다는 것이 계획일 정도입니다.

 

그렇지만 이들에 대한 가치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닌데, 러시아의 서진을 막는 역할을 합니다. 러시아가 서진 욕심을 낸다면 당연히 작고 약하고 유럽 세계에 별 가치가 없는 이들 정도는 쉽게 내줄 수 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걸 미리 선점한다면 러시아는 시작부터 움직임이 막히게 됩니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참을 수 있었습니다. 문서로 명시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약속을 지키라고 강력하게 요구할 수가 없었죠.

 

 

문제는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시도부터 찾아옵니다.

 

사실, 조지아와의 전쟁부터 문제의 싹이 보이기 시작했지만, 간단히 미국과 서방만 믿고 러시아에 도전한다면 다소의 손해를 본다고 해도 단호하게 군사적 해결책을 보여주겠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고, 주변국에. 정확히는, 러시아의 우방은 러시아가 피를 흘려서라도 지킬 것이고 러시아와 우방에 대한 위협과 도전 역시 피를 흘려서라도 맞상대하겠다는 것을 천명한 사건 정도로만 요약하겠습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폴란드와 헝가리는 중부 유럽에 걸쳐져 있는 국가들이고, 영토 역시 결코 작지 않은 국가입니다. 게다가 러시아와 가까운 벨라루스 역시 바로 접경하고 있죠. 이런 상황에서 폴란드가 나토에 가입했던 것은 유럽 입장에서 매우 큰 소득이 됩니다. 독일과 프랑스는 커다란 완충지대를 얻을 수 있었고 나토는 동진할 수 있었죠.

 

여기까지는 러시아가 참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아주 예민하게 받아들였지만요. 그러나 말했듯,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시도부터 문제는 심각해집니다.

 

 

기존 러시아는 이러한 완충지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크라이나가 양쪽으로 긴 영토 특성탓에 다소 러시아에게 유리한 균형을 가지고 있었지만 2010년대 중반들어 우크라이나는 친러 성향을 잃어가고 있었고 러시아 또한 나토에 직접적으로 공격적인 행보를 보이기 어려웠습니다.

 

근데, 우크라이나가 나토에 가입하려는 시도를 하면서 러시아는 매우 큰 위협을 느끼게 됩니다. 위협이 아니라면, 아주 큰 자극을 받았다고 설명해도 좋습니다.

 

 

 

벨라루스를 포함했기 때문에 그리 정확하게 그린 선은 아닙니다. 하지만 중요한 건 발트 3국과 우크라이나를 선으로 이었을 때 보여지는 이 균형을 보시면 알 수 있을 겁니다.

 

러시아와 유럽간의 판도 균형이 완전히 역전되어 버립니다. 우크라이나가 나토에 가입하면 러시아가 지금처럼 우크라이나를 공격했을 때 다른 나토 가입국들이 자동으로 참전하게 됩니다. 그리고 러시아는 유럽 거의 전체와 미국까지도 상대해야 하는 무시무시한 결과가 발생하죠. 그렇기 때문에 러시아는 반드시 우크라이나가 나토 가입을 하지 않은 지금 이 시점에서 일을 벌여야 합니다.

 

지도에서처럼, 우크라이나가 가입한다는 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공격할 수 없다는 걸 떠나서 우크라이나를 발판으로 모스크바를 사정권에 넣고 턱밑에서 총구를 들이밀게 된다는 걸 뜻합니다. 발트 3국이 큰 힘을 쓸 수는 없겠지만, 유럽의 방패이자 현재 유럽에서 가장 쓸만한 육군력을 가진 폴란드와 우크라이나 사이의 벨라루스는 어렵지 않게 압박당하게 되고요.

 

 

 

지정학 이론 중 대표적인 것들이 핼퍼드 매킨더의 심장지대 이론과 이 이론을 수정, 발전시킨 니콜라스 존 스피크먼의 림랜드 이론이 있습니다. 위 이미지를 보았을 때, 러시아의 심장부는 러시아 뿐 아니라 벨라루스, 그리고 우크라이나까지 포함하는 것을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만큼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지정학적 완충지대이고, 거의 심장부에 가까운 취급을 받는 지역입니다.

 

그런데 이런 지역을 통째로 나토에 가입시켜 나토의 권역을 동진시키고, 러시아를 압박한다? 유럽 입장에서 성공만 하면 최상의 시나리오일 겁니다. 러시아의 위협은 반토막이 날 정도로 약화될 것이고 유럽은 또 하나의 성공을 맛볼 수 있겠지요. 단, 독일, 프랑스 등의 국가는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을 반대해왔습니다. 유럽 정세를 불안정하게 한다는 이유로요. 하지만 성공한다면 나토는 러시아에게 강한 압박을 넣을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나 러시아는 소련 붕괴 당시처럼 약하고 위태로운 국가가 아닙니다. 그리고 지금 유럽도 옛시절의 힘을 가진 국가들이 아니었고요. 러시아는 빠르게 반응하며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을 막으려 하게 된 겁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러시아에 대해 지나치게 쉴드를 치고 있고 그들의 입장에서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단, 쉴드를 치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러시아의 입장에서 바라본 건 맞습니다. 유럽은 나토를 서진시켜 러시아를 압박하고 싶어하고 그것을 통해 러시아의 위협을 줄이고 싶어합니다. 러시아 리스크를 줄이려는 거죠. 하지만 러시아는 이를 굉장한 위협이자 자극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이건 유럽의 시각만으로 바라봐서는 절대 안 됩니다. 러시아와 푸틴이 순 개새끼들이고 정신병자 집단이며 전쟁광 싸이코라서 이런 일을 벌이는 게 아닙니다. 손해를 막고, 이익을 보기 위해 움직이는 전략적인 행보들이고, 그러한 러시아의 이유와 필요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럼에도 알아두어야할 것은,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은 스스로 원했던 것이고, 유럽은 그에 대해 꽤 반대하는 입장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러시아를 필요 이상으로 자극하여 유럽 정세를 흔드는 일이 되고,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손아귀에 넘어간다 해도 프러시아 영토를 잃은 독일은 아예 서유럽 국가가 되었으며, 독일에서 러시아까지는 폴란드 영토까지 포함해서 1500km가 됩니다. 프랑스 국경선에서 모스크바까지는 약 2000km가 되고요.

 

그래서 적극적으로 개입할 이유도, 위기감도 느끼지 못하는 거죠.

 

푸틴은 이번 기회를 내부적 불만의 해소용으로 사용하려는 의도도 없진 않을 겁니다. 우크라이나를 수복하여 군사안보적 완충지대를 만들고 균형의 축을 다소 밀어낼 수 있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이긴 하겠지만 말입니다. 그렇다해서 우크라이나가 나토에 쉽게 가입할 수 있었느냐 하면 전 그것 또한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래전부터, 최소 2000년대 후반부터 우크라이나가 나토에 가입하지 못했던 거죠. 그 의지도 아주 강력했던 것도 아니었고.

 

따라서 러시아를 비난하는 거야 당연한 거고 할 수 있는 겁니다. 부다페스트 각서를 이야기하시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건우크라이나의 안전을 보장해주는 것도 아니고 국제법적 강제력도 없는 단순 각서이자 재확인입니다. 물론 이걸 무시하고 공격했기 때문에 비난의 명분, 근거가 될 수 있는 거긴 합니다.

 

그렇다해도 러시아의 군사안보적, 지정학적 필요성이 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지, 단순히 권력이나 전쟁에 미친놈이기 때문은 결코 아니라는 겁니다. 쉽게 말해, 러시아는 러시아의 필요가 있었고 의지도 있었으며, 의지를 실행할 힘과 그 자신감을 확인했던 몇가지 전례, 그리고 그 힘을 사용할 적절한 시점이 있었던 겁니다.

 

 

자, 그럼. 우크라이나가 나토에 가입하지 않으려 했다면 해결될 문제였을까요?

 

전 솔직히 그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모스크바는 자신을 지키기 위한 완충지대를 다시금 원했고, 벨라루스를 합병하는 시도를 함과 동시에 우크라이나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걸 위해서 최소 2014년 돈바스 전쟁 때부터, 아마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전부터 계획해왔을 겁니다.

 

러시아는 이미 돈바스 전쟁 때부터 우크라이나에 개입해왔고 친러파 요인들을 포섭, 확보해갔습니다. 그 당시부터 돈바스 반군에 지원을 해준 것은 확실하고 그렇게 하나하나 빌드업해오면서 우크라이나를 러시아의 영향력하에 집어넣기 위해 활동해왔을 겁니다.

 

 

그리고 이걸 가능하게 해준, 러시아에게 자신감을 안겨준 몇가지 사태는 세르비아 내전 때 보여준 유럽의 실망스러운 대처와 지나친 유럽의 군축, 미국(정확히는 트럼프)가 유럽에 방위비를 늘리라고 요구한 것 등등이 있습니다. 심지어 돈바스를 비롯한 우크라이나 내 여러 사태들에 유럽은 직접적인 개입과 지원은 극히 적었습니다. 사실상 없다고 봐도 될 정도로 방관했죠.

 

그 결과 러시아는 자신의 액션에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우크라이나에 직접적인 군사활동을 전개해도 유럽은 개입하지 않으려 할 것이고, 미국은 이 일에 개입할 욕심이 없으며, 당장 집중해야하는 것은 아시아 태평양 지역이라는 겁니다. 그렇기에 일정 선 이상 개입하지 않을 것이 확실하다는 거죠.

 

 

따라서,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에게 반드시 얻어야할 완충지대 역할을 해줄 지역이며 이에 대해 상당한 관심과 중요성을 두었다는 겁니다. 이들의 나토 가입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고 고상한 척 하는 유럽의 돼지들은 움직이지 않을 거라는 것 또한 알기 때문에 여러 기만전과 정보전을 감행하며 결국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거고요.

 

 

개인적으로 약소국이었고 한때 식민지배를 당한 적 있는 국가의 국민으로서 강대국에 휘둘리는 약소국 감수성이 터져나오는 사태이기 때문에 매우 안쓰럽습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략하며 국가 하나의 운명을 결정짓고, 그들 국민에게 피와 죽음을 강요하며, 영토와 국민, 그리고 재산을 빼앗아간다는 점을 비난합니다.

 

그러나 국제사회는 냉정하고 냉혹한 곳인지라, 그들에게 이유가 전혀 없는 개새끼들이라고만은 할 수 없는 것은 그럼에도 그들의 일이 남의 일이라는 점 때문이겠지요. 사실, 우리도 약했더라면, 조금이라도 중요성이 적었더라면, 그리고 중국이 지금보다 훨씬 빨리 강해졌고 자신감과 욕심이 더 컸다면 저런 꼴을 보았을지도 모른다는 점이 남 일 같지 않게 느껴지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분명하게 말하는 것은, 이 사태의 결코 작지 않은.. 오히려 커다란 지분을 차지하는 것은 바로 유럽의 욕심과 오만함 때문이었습니다. 게다가 피를 흘리지도, 손에 피를 묻힐 생각도 전혀 안 하고 있죠. 우크라이나는 유럽이 아닌 유럽 외 세계이기 때문에요. 우크라이나가 어떻게 되든 얼마나 많은 피가 흐르고 불행이 쏟아진다 해도 그들은 무의미한 경제제재만 하고 말 겁니다. 한심하게도.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덧하자면, 이번 사태를 통해 21세기의 현대전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확인해볼 수 있습니다. 총력전이나 면대면의 전면전은 쉽게 볼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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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내용.

 

젤렌스키과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분전과 용기 덕분에, 그리고 러시아를 고꾸라뜨릴 수 있으며 전쟁 성공 시 가지는 러시아의 이점을 막기 위해서 유럽은 미국이 아프간에서 철수한 것과는 다르게 나름 공개적으로, 그리고 비공개적으로 상당한 지원을 해주고 있습니다.

 

물론 내부적으로야 여러 목소리와 자원의 문제로 러시아에게 가스, 석유 등을 수입하며 돈 주고 있는 건 여전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을 완전히 남의 일로 보지 않고 있습니다. 그게 부족하다고 욕하는 사람들도 있긴 하지만, 아예 손 놓고 남의 일로 보지 않고 그 정도 지원을 해주는 것은 아주 좋은 일이죠.

 

 

러시아에겐 러시아의 필요가 있고 그걸 실행할 의지와 힘도 있었지만, 그 계산이 정확했느냐 하면 그건 아닙니다. 돈바스 전쟁 때 보여줬던 러시아의 완성적인 BTG 전술과 기만전 등등은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고, 우크라이나가 쉽게 항복하지 않았던 점 또한 러시아의 너무 이상적인 오판이었죠. 이는 8년 동안 우크라이나에서 혈채를 쌓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고문하고 학대하고 납치하고 감금하고 강간했으면 머리통이 터져 죽어도 러시아군 한명이라도 죽이고 갈 사람들은 생겨나기 마련이죠.

 

이는 미국의 기만책과 여러 함정들이 있었다지만 심각한 오판이자 실책이었습니다. 이 전쟁의 결과는 러시아가 세계 주류 국가들에게서 이탈되는 결과로 돌아오지 않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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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부터 하던 생각이 있었습니다. 예전이라고 얼마나 다르겠냐만, 요즘들어 더 노골적으로 보이는 경향성 중 하나가 바로 이겁니다.

 

"난 누군가를 조롱하고, 비난하고, 폭력을 휘두를 권리가 있다."는 경향성이요.

 

 

대체로 이러합니다. 어딘가에서 누군가 무슨 잘못을 저지르거나, 어떠한 사건을 터뜨렸을 때 사람들은 주모자를 쉽게 비난합니다. 그리고 그걸 아주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그럴 수 있습니다. 누군가 타인의 지탄을 받을만한 행위를 했을 때 다른 사람들은 응당 그들의 행동을 판단하고 비난할 수 있습니다. 이건 권리가 아니라 당연히 있을 수 있는 일일 뿐더러, 그러한 비난이 두려워 자신의 행동을 규약하는 자기검열의 역할도 존재합니다.

 

모든 자기검열이 나쁜 것만은 아니고, 남들이 보지 않거나, 알게 될 수 있다는 가능성만으로 정말 나쁜 일을 하게 만들지 않는 효과도 있습니다. 이를 우리는 사회화, 사회성이라고도 표현합니다.

 

 

그러나 비난은 반드시 폭력적일 수밖에 없고 이러한 폭력에는 쾌감이 뒤따릅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보복의 권리이자 보복의 쾌감이죠. 몽테크리스토 백작은 복수극 작품이면서 그 복수의 쾌감으로 독자에게 감정적 쾌감을 안겨줍니다. 대리만족이었지만, 주인공에게 감정을 이입한 이들은 그의 복수에서 나름의 쾌감을 얻죠.

 

문제는, 사람들은 누군가를 비난할 때 분노와 혐오 뒤에 쾌감이 숨어있다는 겁니다. 쾌감은 중독될 수 있죠. 폭력에 중독된다는 건 폭력이 가져오는 쾌감에 중독된 것이라 봐야할 겁니다. 그리고 비난자는 자신과 같은 정서를 공유하는 이들과 함께 공격을 하기 때문에 자기확신과 소속감을 가지게 됩니다. 나 혼자 공격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같은 생각이라고 말이죠. 그리고 그렇게 얻어진 상호확인은 그것이 정당하고, 올바른 것이라 믿게 됩니다.

 

여기까지라면 단순히 혐오와 증오 속에서 자기 자신을 잘 찾고 자기 중심을 잘 잡으라고만 할 수 있겠지만, 제가 지적하고 싶은 부분들은 이 이후입니다.

 

 

흔히 사이다패스라고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웹소설이나 웹툰 등 문화매체에서 답답한 상황을 싫어하고, 불편한 상황을 빠르게 해소하고 싶어하는 이들입니다. 이들은 작품, 혹은 주인공에 강력하게 이입한 이들이며 그런 주인공 대부분은 강하거나 뛰어납니다. 지나치게 뛰어나서 누구도 이들을 감히 넘볼 수 없고, 감히 그러한 시도를 한 이들은 완벽하고 끔찍하게 분쇄되어야 합니다. 단지 그 한 사람뿐 아니라 그 세력, 혹은 가족 등 주변사람까지 포함하는 경우도 있으며, 아예 국가 단위인 경우도 있습니다.

 

이 또한 단순히 죽이거나 멸하는 정도를 벗어나 끔찍한 신체적, 정신적 고통과 고문까지 함께하는 경우도 있죠. 이는 그들이 어떤 행위를 했든 절대 공정하지 않은 수준의 보복을 받습니다. 함무라비 법전에서 말했듯,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넘는 압도적이고 강력한 폭력을 행사하죠. 보복이라는 정당한 명분으로요.

 

 

'그것들'이라는 작품에 이런 캐릭터가 등장합니다. "복수 중독자." 이 캐릭터는 다른 힘 좀 쓰는 조직들 사이에서 기피되는 녀석입니다. 단순히 강하거나 위협적이라서가 아니라, 이 녀석에게 뭔가 피해를 입히거나 복수할 명분을 제공하는 순간 누구보다 집요하고 잔혹한 놈이 되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복수하며, 그 복수의 방법도 잔혹하기 짝이 없기 때문입니다. 가령, 그는 목 아래로 감각이 없는 놈 하나를 산 채로 상자에 가두고 손수 못박습니다.

 

 

단순히 웹소설 독자들이 그런 성향이 있다는 게 아니라, 요즘 사람들의 성향이 그렇게 변화했기 때문에 독자들 또한 그런 흐름을 선호하고, 고객이 원하는 쪽으로 맞춰가는 작가들이 그들의 니즈에 맞춰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만, 주제에 맞지 않기 때문에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복수는 대체로 정당합니다. 자신이 피해를 입었다면 그에 대한 대가를 요구하는 건 정당하죠. 그것이 단순한 말뿐인 사과일 수도 있고, 돈 같은 재물일 수도 있고, 법적인 방법도 있으며, 직접 손수 폭력을 휘두르는 방식도 있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이것이 신체에 간접적이고, 법을 통한 공권력의 행사로 대체하는 쪽으로 발전해왔죠.

 

하지만, 그럼에도 복수는 대체로 정당합니다. 내가 피해를 입었다면 그 대가를 요구하는 거야 당연한 거죠. 그 방식과 정도가 문제입니다. 함무라비 법전은 잃은 것 이상의 보복을 금했습니다. 그것은 정당하지 않고 공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즘 시대 대중들은 누군가 자신에게 부당한 피해를 입혔다면 압도적이고 잔혹한 보복을 통해 누구도 자신에게 피해를 입히지 못하도록 경고하고, 자신을 두려워하길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스스로 정의롭고 정당한 존재이길 바라죠. 바로 여기에 복수의 명분이 필요한 겁니다. 보복이란 누군가 자신에게 먼저 피해를 입혔을 때 발동할 수 있는 것입니다. 먼저 나서서 다 쳐죽이고 갈아버리는 건 누군가의 복수의 명분이 되는 행동이지 스스로 정당하다고 여기는 게 아니죠. 이것이 악하다는 관념은 대체로 다들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껀수를 찾는 거죠.

 

이유, 명분. 누군가를 조롱하고, 비난하고 공격할 수 있는 권리는 갈구하고 있는 겁니다. 자신의 불만과 분노를 정당하게 표출하고 싶은 명분 하나를 원한다는 말입니다. 감정은 객관적이지 않고 계측 가능한 것이 아니고, 정도와 사안, 그리고 대상에 따라 가변적입니다. 똑같은 행위를 자신에게 저질러도, 누군가에겐 과한 보복심을 품지만 누군가에겐 약소하거나, 아예 용서해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따라서 감정에 따른 보복론은 정당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 감정의 해소는 무엇보다 시원하고 강력한 쾌감을 가져오죠. 단순히 상대방에게 내가 원하는 수준의 폭력을 휘둘렀기 때문이 아니라, 그 상대방이 망가지고 애원하고 후회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즐기는 겁니다.

 

 

여기게 천착된 이들은 보복, 혹은 논란 발생자의 행동에 정당한 비난과 조롱을 한다는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즐기는 겁니다. 정의를 독점한 채 무제한적으로 휘두르는 폭력의 쾌감. 심지어 정당하기 때문에 결코 비난받을 수 없는 성스러운 징벌.

 

그러기 위해서 자신은 결코 잘못해서는 안 되며, 비난 대상자는 마땅히 욕을 먹어야할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공격은 정당해야하며, 또한 정당합니다. 

 

 

이러한 것은 단순한 정치, 사회적 현상을 대할 때 뿐 아니라 개인 단위의 경험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불편할만한 상황에서 나는 잘못하지 않은 이유를 찾고, 역으로 책임은 상대방이 질만한 이유를 찾습니다.

 

결말이 이해 안되는 치킨화상

https://www.bobaedream.co.kr/view?code=strange&No=3860890 

 

몇가지 사례가 있지만, 위와 같은 사례가 떠오르기에 위 사례를 먼저 이야기하겠습니다.

 

이때에도 주인이 있든 없든, 자기가 상품을 원하든 원하지 않든 정당한 허락 없이 자기가 남의 물건을 멋대로 건드려서 스스로 손해를 보고, 상품 등에도 손해를 입혀놓았음에도 그 책임을 판매자에게 전가하고 있습니다. 당사자가 잘못했다는 건 정상적인 상식과 판단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든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자신은 손해만 보고 누구도 보상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에 억울해하며 그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고, 자신을 피해자인 것처럼 만들고 있죠. 내가 피해자여야 정당하게 피해보상을 요구할 수 있으니까요. 심지어 부당하게 보상해준 판매자에게 여전히 자신은 정당하고 저 사람이 잘못한 것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당연합니다. 그래야 자신이 정당하고 비도덕적인 악인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잘못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기에 무조건 타인이 잘못해야 합니다. 잘못은 반드시 상대방이 해야 한다는 겁니다.

 

 

비슷한 여러 사례들은 찾아보거나 살다보면 생각보다 쉽게 볼 수 있을 겁니다. 여자 아이돌 악플달아놓고 남초에서 했다고 조작하거나 책임을 전가하려는 여초의 행위 또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고, 그 반대로 거기에 일조했음에도 여초탓으로 죽었다고 전가하는 이들도 있죠.

 

 

앞서 이야기한 것이 폭력에 중독된 이들이고, 위 사례는 자신의 잘못을 전가하여 책임이라는 감정적 부채에서 벗어나기 위한다면, 역시 인터넷에서 찾아볼 수 있는 비난자들 중 누군가들은 자신을 우월한 지위에 놓고 싶기 때문에 그러기도 합니다.

 

그런 이들은 그저 이유를 찾는 것 뿐입니다. 세상에는 멍청하고 나쁜 놈들, 잘못된 이들이 가득하고 너무 문제투성이인데, 그걸 비난하는 자신은 그것을 판단하고 무엇이 올바른 것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다고 말이죠. 판사병 걸린 이들인데, 평가하고, 판단하고, 지적합니다. 대체로 원론적으로 틀리지 않거나 어느 정도 맞는 지적들과 비판들이긴 하지만 그것이 그들이 정확한 판단력과 상식, 지성을 갖추었다기 보단 그러한 자신의 행위를 통해 더 우월한 지성과 사회성을 갖춘 사람이라고 느끼길 바라는 겁니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평가하는 것으로 스스로 지적으로 우월하다거나, 문제를 지적함으로써 더 올바른 방향을 가르친다고 여기는 것이지요.

 

처음 이야기한 복수 중독자들과 마지막의 판단자들의 성급한 비난과 지적들은 이후 이어지는 진실에 따라 쉽게 뒤집어지기도 하고 더 복잡한 상황이 있음으로 무용하게 되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피카츄 배 만진다는 표현이 등장하기도 하고, 중립기어하는 표현도 발생한 거죠.

 

모든 사건은 그에 대한 모든 정보가 정확하게 제공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어떤 분야에 대해 정당한 명분과 이유를 찾으며 그것이 발견되면 무차별적이고 무제한적으로 증오와 혐오, 폭력을 휘두르는 이들이 있습니다. 무엇이 잘못됐고 어디까지 잘못됐는지 지적하고 평가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반대되는 진영이나 집단이 무언가 잘못하면 그걸 정당한 명분으로 삼아 공격하고 조롱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판단이나 성향을 강화시키는 재료로 사용하죠.

 

그들에게 중요한 건, 그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정당하다는 믿음입니다. 복수는 대체로 정당하고, 누군가 잘못하면 그에 대한 비난 또한 정당한 것처럼 자신에게 그러한 폭력을 휘두를 정당한 권리, 권한이 있다고 믿는 겁니다. 그리고 그 선은 감정이라는 가변적이고 계측 불가능한 조건에 근거합니다.

 

이러한 경향과 정서가 만연해질수록 그렇지 않은 이들조차 점차 폭력에 무감각해지고, 폭렬화되어가며 극단화될 겁니다. 그리고 더더욱 단순하고 극단적인 해결책을 추구할 겁니다. 사실, 이미 그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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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04 - [취미/이야기] - 중국이 한국 문화를 공략하는 이유.

 

이전 글에서 이어지는 글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먼저, 동북공정과 문화적 침략은 중국의 문화적 열등감으로 한국 문화가 탐이 나서 하는 조작이 아닙니다. 분명하게 의도가 있는 명분 쌓기죠. 위에서 소개한 링크의 글을 보시면 대충 이해하시겠지만, 그 목적은 최소 북한, 최대 한반도 자체를 점령하기 위함입니다. 그건 다른 글에서도 몇번 이야기한 것인데, 유사시 한반도에서 전쟁이 벌어지거나 한반도 전체, 혹은 일부(높은 확률로 북한 지역)를 중국이 점령하게 될 경우 장기 주둔하거나 영토화, 혹은 식민지 내지는 보호국화 할 명분을 만들고 있는 거죠.

 

가령 북한이 무너졌을 때 중국이 자국의 소수민족인 조선족과 같은 민족인 북한 민족을 보호하기 위해 문화적 주권국, 혹은 명분을 가진 국가가 나선다고 했을 때 이걸 반박하려면 그것이 틀렸다는 역사적, 문화적 이유를 대야 합니다.

 

문제는 조선족이 중국의 소수민족으로 인정받는 것이 사실이라는 거거든요. 심지어 이건 한국인들도 '당연하게' 인정하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이어서 필연적으로 학술적이거나 그렇게 보이는 논쟁이 발생하게 되는데 역시 완벽한 논파는 거의 불가능하거나 최소한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 거라는 겁니다.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중국이 질질 끌면서 십수년 동안 이북 지역에 코어를 박는다면? 그때부터는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군사적 충돌로 밀어내는 게 아니라면 뱉어낼 생각도 없고 뱉어내게 할 방법도 없습니다. 역사적, 문화적 논쟁? 그런 거야 중국은 인정 안 하고 조작되거나 무리한 내용으로 반박할 거고요. 상상하기 어렵다면 일본이 과거사에 대해 취하는 태도보다 좀 더 더럽고 추잡하다고 뻔뻔하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미 중국은 전 세계에 동북공정의 역사관을 담은 책과 자료를 배포했고 실제로 이걸 받아들인 이들도 존재하는 것으로 압니다.

 

 

중국은 하드파워에서 한반도를 제압할 힘을 기르는 동시에 그 점령과 통치의 명분이 되어줄 것을 만드는 작업이 동북공정입니다. 이미 수십년 전에도 적잖은 서구인들은 한국이나 일본이 중국에서 나왔거나 한 때 중국의 영토였다는 정도로 이해하는 이들도 있었죠. 이게 현실 외교, 정치 측면에서 기능하게 된다면 중국이 한반도를 점령했을 때 그러한 동북공정의 논리를 댄다면 역사적 명분이 있다고 데 쥬레로 여길 가능성이 있습니다. 물론 이해관계 때문에 인정은 안 하겠지만 껄끄러운 명분논리가 되겠죠. 어차피 실질적으로 점령한 중국의 물리력이 가장 큰 문제지만.

 

 

무지성 반중하는 바보들이나 잘 모르는 사람들이나 마찬가지로 중국이 문화적 침략, 동북공정을 공식적/비공식적으로 표현할 때 왜 정부에게 항의하지 않느냐고 합니다.

 

근데 이건 진짜 뭣도 모르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먼저.

 

1.중국이 항의한다고 들어먹을 것이냐 하는 문제.

 

2.한국의 전략적 모호성 외교.

 

3.동북공정을 반박하기에 필요한 논리와 자료로 얽히면 오히려 불리하다는 점.

 

 

 

1번부터 보자면, 간단합니다. 중국이 다른 나라가 항의하고 불만을 표한다고 받아들이고 고쳐질 국가입니까? 이건 누구나 다 알 겁니다. 물론 이렇게 말할 수는 있을 겁니다. 외교적 문제가 있을 경우 받아들이든 아니든 항의하는 것이 정부가 해야할 당연한 일이다. 저도 동의합니다. 2번째 항목만 빼면요.

 

 

2번에서 한국은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 전략적 모호성을 띄고 있습니다. 물론 완벽하게 애매한 건 아니에요. 한국은 분명하게 친미국가이고 이건 정권이 어떻게 바뀌든 달라지는 게 아닙니다. 박근혜 같은 돌대가리가 근본도 없는 친중행보를 한다면 미국이 어차피 들여왔을, 그리고 좀 더 무난하고 매끄럽게 들여왔을 사드를 아주 거칠게 강제하며 친중과 친미 중 확실한 사이드를 정하라고 강요했고 이에 자극받은 중국은 한한령을 비롯한 제재를 하는 등 대단한 외교경제적 패널티를 감내하며 결국(그리고 당연히) 친미국가임을 보여줬죠.

 

지정학적으로 일본과 한국은 같은 조건에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일본이 반중적인 행동을 공개적으로 한다 쳐도 한국은 대놓고 그러기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일본은 바다를 건너 좀 더 멀리 있지만 한국은 아니거든요. 중국 코앞에 있는 국가입니다. 한국이 많이 발전하고 강해졌으며 주한미국도 있고 뒤에 일본과 주일미군이 있다지만 주먹이 닿는 거리에 있다는 점이 가장 중요합니다.

 

따라서 약간의 여지를 보여주며 대놓고 확고한 반중친미 국가임을 보여준다면 중국은 한국에 최소한의 외교적 관계마저도 포기하고 강경책 일변도로 나갈 겁니다. 중국이 남중국해에서 동남아 국가들에게 보여주는 깡패짓을 한국에게 그대로 하지 못하는 이유는 한국은 동남아 수준이 아니고 미국이 뒤에 있다는 걸 차치해도, 중국에게 한국마저도 등을 돌리면 정말 큰일납니다. 특히 저번 요소수 이후로 중국이 한국에 실질적인 경제적 제재를 할 가능성은 매우 낮아진 상태입니다. 다른 게 문제지.

 

중국도 한국이 친미국가인 건 압니다. 아예 확실하게 등을 돌리지 않는 걸 바랄 뿐이죠. 그건 너무 불편한 일이 되거든요. 마찬가지로 한국도 중국의 강경한 제재와 보복을 받으면 한한령 당시보다 훨씬 큰 손해를 봅니다. 그래서 일정 정도의 관계를 유지하는 게 맞아요. 이걸 이해 못한다면 국제사회가 어떻게 굴러가고 국가가 어떻게 외교관계를 유지하는지, 국가간 경제교류가 왜 중요한지 전혀 모르는 무지랭이라는 것 뿐입니다.

 

 

마지막 3번 항목이 가장 중요한 부분인데, 이건 일본이 독도 문제에 있어서 국제사법재판소로 끌고 가려는 의도와 다를 게 없습니다. 독도는 분쟁지역이 아니죠. 일본이 분쟁지역'화' 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고 어떤 방법을 쓰든 자기들에게 유리한 결과를 만들어내려는 목적으로 하는 겁니다. 최소한의 명분이라도 만들어지면 그걸 점점 키워서 이용하기 위해서 국제사법재판소 가자는 등 분쟁지역화 하려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동북공정은 중국이 한국 역사와 문화를 억지로 자국의 것으로 편입시키려는 시도입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분명하게 구분되고 구별되는 사실들이 존재하고, 기원이 중국이라고 해서 한국화 된 것이 아닌 것도 아닙니다. 한국에서 일본으로 문화적, 기술적 요소, 심지어 인구조차도 전래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한국이 일본의 조상이거나 그것에 영향을 받은 일본의 문화 요소들이 모두 한국의 것이라고는 안 하죠. 참고로 이걸 거꾸로 뒤집으면 그게 일본의 내선일체 논리가 됩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것은 분명히 우리의 것입니다.

 

그러나 중국은 그것을 논쟁의 대상으로 만들어서 아직 확실하게 정해지지 않은 것, 혹은 우리의 주장에 따르면 중국의 것. 이라는 결론을 만들기 위해 작업하는 겁니다. 항의? 할 수는 있죠. 근데 그걸 가지고 그래? 그럼 증명해봐. 라고 했을 때 한국이 적절한 근거를 제시하지 안/못 하는 경우 자기것도 증명 못한다며 논쟁 주도권이 저쪽으로 넘어갑니다.

 

그럼 반대로 한국이 적절한 근거를 제시한다면? 어떻게든 트집을 잡고 조작하거나 무리한 해석과 근거를 제시하면서 논쟁화가 성공하게 됩니다. 한국이 아무리 좋은 근거와 논리를 제시하며 논파한다고 해도 아주 세세하고 애매한 영역에서조차 완승을 거둘 수는 없습니다.

 

특히 고대사는 기록의 부족 때문에 추측과 유예의 영역으로 남겨놓은 것들이 정말 많아서 이런 부분에서 일본이 일본서기 사본을 근거로 임나일본부설 등 한반도 남부에 역사적 명분 등을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전개될 가능성이 거의 확실합니다.

 

 

따라서 이에 대한 한국의 대응이 적극적이지 않은 것은 오히려 정확하게 대응하고 있는 형상이죠.

 

 

그렇다면 이에 대한 가장 확실한 대응 방법은 뭐가 있겠느냐 하면, 아주 간단합니다.

 

그냥 중국이 건드리기 어려울 정도로 한국이 강해지면 그만입니다. 한국이 여전히 강해졌다고는 하나 중국과 1:1로 붙으면 패배하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인구도 인구지만 핵무기의 존재가 큽니다. 중국의 무기들이 카탈로그 성능이 안 나올 가능성이 높다고는 해도 무시할 수 있는 건 아니죠. 한국도 카탈로그 성능과 훈련, 교육 등등 이야기하지만 막상 병들의 생활보면 온갖 가라와 똥군기, 상상하기 어려운 간부들의 병신짓과 신뢰하기 어려운 똘추들이 많다고 누구나 인정하는 것처럼요.

 

그러나 그렇다고 한국군이 개병신군대냐 하면 그건 아닌 것처럼, 중국군과 무기 성능을 신뢰하기 어렵다고는 해도 군대는 군대고 무기는 무기입니다. 원래 나와야할 수준까진 아니더라도 대충 어느 정도 수준까진 전투력이 산출될 거고, 그걸 평균삼아서 전략을 짜게 되는 게 실제 전쟁이 될 겁니다.

 

 

어찌됐든, 한국이 지금보다 훨씬 강해지고 여러 나라들에게 지금보다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국가가 된다면 중국도 함부로 한국을 건드리기 어려워집니다. 아예 모든 활동을 중단하진 않겠지만, 한국이 강해지는 수준만큼 축소될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정부 들어서 미사일 사거리, 무게 제한이 줄어들고 KF-21의 개발 성공, 반중 국가들에게 성공적인 무기 수출이 이루어지며 현무4 등 강력한 무기, 미사일이 개발되는 것에 아주 반깁니다.

 

분명하게 말하겠지만, 중국의 동북공정을 비롯한 한국에 불순한 의도를 지닌 작업들에 대응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한국이 강해지는 것 뿐입니다. 다른 나라를 믿거나 말 뿐인 항의를 하는 게 아니라요. 멍청한 놈들은 이걸 몰라서 욕하겠죠.

 

 

덧. 심지어 한국인들은 조선족을 혐오하고 차별하기 거리낌이 없어서 동북공정의 근거로 중국이 조선족을 내세우면 한국이 그 조선족은 한민족이다. 라고 해봐야 조선족이 한국을 택하겠습니까, 중국을 택하겠습니까.

 

실제로 중국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많아서 범죄도 저지르거나 문화적, 관습적 충돌이 발생하기도 하는 등 사회문제가 있긴 하지만 전 오히려 조선족을 한국이 끌어들여서 동북공정에 활용되는 조선족을 명분적으로 약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교육과 재사회화로 한국화를 하는  것도 중요하다고는 생각하지만.. 쉽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국제외교적 문제에 있어서 조선족을 한국이 끌어들여 중국의 중국 내 소수민족론을 약화시킬 수 있다면 국익에 매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전략적 안목이 없다면 그저 혐오하고 말 뿐이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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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집단이 기능하며 그것이 유지된다는 것은 그것을 이루는 어떠한 체제가 있다는 것이다. 작은 동아리나 모임에도 규칙은 있고 그것으로 규정하지 않는 크고 작은 관습과 약속이 있기도 하다.

 

그러나 어떠한 체제이든 그것은 결코 완전할 수 없고 필연적인 지속불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것은 환경의 변화나 내부적인 규칙의 형해화, 권력의 독점화, 구성원간 상호 신뢰 붕괴 등 다양한 원인이 있을 것이다.

 

같은 환경 내에서도 여러 집단이 존재할 경우 상호관계를 맺으며 유사해지거나 문화적 동질성을 가질 수는 있다. 그러나 완전히 같은 경우는 매우 드물고 이는 각 집단의 체제가 각기 다른 형태를 한다는 것이다.

 

 

한 체제가 태생적인 한계에 도달하고 그것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그 집단은 무너진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 집단을 유지하고 보호, 팽창시키던 체제는 완결된다. 감상적으로 표현할 수도 있겠지만 이는 해당 체제의 태생적 한계가 찾아왔기 때문이지 소수의 이기적인 권력자나 무능한 왕, 운명의 장난 때문이 아니다. 그 때가 아니라면 그 집단의 역량과 체제의 견고함 덕분에 조금 더 뒤에 이루어질 일일 것이다.

 

로마 공화정은 그들 체제의 뛰어남 덕분에 다른 경쟁자들을 제치고 우위를 점하며 생존을 넘어 정복자의 지위를 얻어냈다. 그것이 잘 작동할 때에 그들은 강대했고 실패와 패배는 복기되어 보완되었다. 능력자는 마땅한 대우를 받았고 실력자는 인정받았다. 그들의 정치사회적 전통은 그들을 부강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것은 영구적일 수 없었고 로마 공화정의 위대한 정복이 승리할 때마다 값싼 노동력인 노예들은 흘러들어왔고 이제 원정을 갔다 오기에는 너무 넓어진 영토를 마주해야 했다. 로마의 시민들은 토지를 팔고 스스로 노예가 되더라도 먹고 살아야 했고 로마의 보호들은 그렇게 라티푼디움이라는 대농장을 만들어 더 많은 부를 획득했다.

 

일부는 이러한 체제변화에 위험성을 경고하며 개혁을 주장했고 시도했다. 그러나 숫한 시도들은 실패로 돌아갔고 그들은 자신의 부를 포기하길 거부했다. 결국 그들의 위협적인 경쟁자인 카이사르 또한 암살당한 뒤 로마 공화정 체제는 완결되었고 제정으로 향하게 되었다.

 

누군가는 로마 부호들이 이기적이라 공화정이 무너졌다 할 수 있다. 누군가는 로마 시민들이 그들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로마가 체제의 한계에 도달해갔고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수정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른 사례를 좀 더 간략히 알아보자.

 

신라는 골품제를 통해 소국이 점차 커지면서 경주 주변의 여러 소국들을 흡수하며 옛 지배층을 등급화하였다. 이는 소국의 흡수를 용이하게 하고 경주 출신 왕족인 성골과 구분지어 왕권을 보전했다. 이는 정복지의 흡수와 통치를 수월하게 했고 기존의 정복지 왕족, 귀족과 본래 경주 일대 소국의 왕권에 계층적 차등을 두어 왕권의 침해를 방지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였다.

 

이 역시 로마와 마찬가지로 확장을 하기 위한 그들 나름의 유용한 체제였을 것이다. 그러나 왕이 될 성골이 부족해지자 여왕이 등극하게 되었고, 그마저도 사라지자 진골이 신라의 왕가를 이루게 되는 등 필연적인 계급적 변화가 있었다.

 

골품제는 왕족과 귀족, 평민 출신의 명확한 구분으로 일반적인 경우 침해될 수 없는 강력한 벽을 형성했다. 아무리 뛰어난 이라도 한미한 출신이라면 6두품을 뚫을 수 없었고 진골은 결코 성골이 될 수 없었다. 로마와는 상당히 다르게 실력자와 능력자가 혈통적 신분과 출신에 강하게 메여 있었던 체제였다. 이러한 체제는 확장 이후 안정적 유지와 발전에 큰 걸림돌이 되었고, 이후 고려가 건국될 때 골품제는 사라지고 그 문제들이 수정된 새로운 체제로 변화하였다.

 

고려 또한 과거를 도입하면서 골품제로 억눌려진 기회와 능력을 펼칠 수 있게 열어 놓았고 이는 고려의 관료제로 이어졌다. 그 역량은 수 차례의 전쟁을 견딜 수 있는 근거로 작동하였으나 동시에 음서, 공음전 등 체제의 한계를 예비하는 제도 또한 존재했기에 국가 내부 자원을 분배하지 못하고 자본이 흐르지 않게 되는 등 극심한 정치, 사회, 경제적 문제를 야기했다. 이것을 해결하려 노력한 이들은 있었으나, 근본적인 체제적 수정은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이러한 문제들이 수정된 새로운 체제, 조선으로 변화하였다.

 

조선의 경우는 강대한 왕권과 뛰어난 대왕들에 의해 선정이 이루어지고 견고한 관료제와 강력한 중앙집권국가를 만들었으나 양란을 거치며 왕권이 무너지고 유교적 질서가 해이해지는 동시에 무너진 권위를 세우기 위한 반동으로 교조화가 이루어지며 허례허식이 늘어 내부적 유연성을 경직시켰다. 정조 대왕의 개혁과 실학의 등장은 조선이라는 체제의 역량을 보여주었으나 내부적 한계와 정치의 문란이 곂치며 해결되지 못했고, 거기에 제국주의 시기와 곂치며 외부적 압박을 이겨내지 못하고 체제가 완결되었다.

 

이는 잘잘못을 떠나 사실로써 당시 조선의 역량이 외부적 압박을 이겨낼 정도로 견고하며 유연하지 못했고, 그러한 역량을 배양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로마가 아니더라도 어떤 집단에서든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다. 환경과 내부 조건이 극히 안정적이라면 발전없이 정체되더라도 아주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다. 환경변화가 없어 외부적 리스크가 없고 내부적 밀도 변화가 적어 똑같은 삶의 형태를 반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지의 정글속 원시 부족들이 수천년 넘게 그러한 삶을 반복했던 것처럼. 그들에게도 나름의 체제는 있고 단지 한계에 도달하기까지 아주 오랜시간이 걸렸을 뿐이다.

 

이처럼 한 체제가 태생적 한계를 지녀 발전 끝에 한계를 넘기 못하고, 혹은 미리 체제를 수정하지 못한 채 끝나는 것을 나는 체제 완결성이라 한다. 이 체제 완결이 이루어지고 나면 그 체제에 의존했던 집단은 멸망하게 되고 수정, 보완된 다른 체제를 가지게 된다.

 

이것은 다른 국가가 될 수도 있고 부족이나 도시 규모의 소집단이 될 수도 있으며 다른 체제에 정복되어 흡수, 혹은 예속될 수도 있다. 체제의 변화는 반드시 더 발전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더 나은 체제를 가지게 된다. 여기서 주의해야할 점은, 유럽. 특히 영국처럼 나라는 그대로이나 왕조만 다른 이름으로 바뀌는 경우는 해당된다 하기 어려울 것이다.

 

 

체제의 완결은 여러 형태로 찾아온다. 그러나 그 원인을 내부에서 찾는다면 그 어떤 분석이 있든 근본적으로 체제의 한계에 도달했다고 생각한다. 로마에 라티푼디움이 등장한 것은 너무 넓어진 영토와 값싼 노동력의 유입이 시작이었고, 이는 로마 자체의 팽창을 요구하는 제도와 체제에서 기인한다.

 

고려에 음서는 비록 녹봉도, 실권도 없는 말직을 받았고 무능하면 고위 관직을 얻을 수 없었으나, 능력과 실력에 무관하여 혈통에 의해 관직을 얻을 수 있어 과거 시험으로 관료가 된 이들에 비해 유리한 위치를 점할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이며, 공음전은 음서보다 심각하여 토지는 물론 수조권까지 세습하여 체제적으로 고려의 체제 완결에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한다.

 

때로는 외부적 요소에 의해 체제 완결이 발생하기도 한다. 소빙기가 찾아오며 흉년이 오고, 화산 폭발 등의 재앙에 의한 대기근이 발생하기도 한다. 지진에 의해 큰 피해를 보며 기독교적 세계관의 붕괴를 앞당기기도 하고 외세의 침략에 의해 멸망하기도 한다.

 

특별히 예외적인 사례가 아닌 이상 대부분 체제의 완결은 근본적으로 그들 체제의 한계에 근거한다. 심지어 외세의 침략이라고 해도 그러한 침략에 의해 멸망하는 것은 그 국가가 이미 병들고 쇠약해져 있을 때이며, 튼튼하고 강한 몸을 가진 이에게 병마가 쉽게 찾아오지 않고 싸움에서 쉽게 지지 않지만 나약하고 병든 몸에는 병마가 쉽게 찾아오고, 타인과의 싸움에서 육체적으로 불리한 조건을 가진다.

 

이처럼 나라가 부강할 때 외세의 침략이 발생한다면 피해는 입고 멸망을 앞당기는 치명상을 입을지언정, 멸망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나라가 쇠약해져 역량이 저하될 경우 외세의 침략에도 쉽게 무너져 멸망하게 된다. 외세의 침략은 온전히 외적이 강대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이 아니다.

 

 

그러나 모든 체제 완결 사례에 대해 아는 것은 아니나, 한가지 재밌는 점을 찾을 수 있었다.

 

로마 공화정이 제정으로 바뀌었고, 독일 제국이 바이마르 공화국이 되었다, 다시 나치 독일이 되었으며, 러시아 제국 이후 소련이 되었으나 스탈린에 의해 부하린, 트로츠키 등이 축출되고 사실상 일인독재가 되는 등의 체제 변화를 살펴본 결과, 더 많은 사람들이 권력을 가지고 있던 체제가 무너지고 다른 체제가 되었을 경우 대체로 소수가 권력을 독점하는 체제로 변화하였다는 것이다.

 

그 반대 또한 존재한다 말할 수 있다. 독일 제국이 멸망하고 바이마르 공화국이 되었으며, 조선이 멸망 후 식민지를 격고 대한민국이 되기도 하였으며, 대부분의 민주국가가 되었을 경우 왕정 국가가 멸망한 뒤 찾아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마찬가지로 소수가 권력을 독점하는 체제에서 똑같이 소수가 권력을 독점하는 체제로 변화하기도 하는 등 정치적 권력 소유자의 비율이 크게 변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반대로 다수가 정치적 권력을 가진 경우, 그러한 체제가 한계에 달해 완결되고 다음 체제로 이행될 경우 높은 확률로 소수가 권력을 독점하는 체제로 변화한다는 것이다.

 

이는 난세에서 힘 있는 유력자, 주로 가장 강한 힘을 가진 자가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실력을 행사한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10.26과 12.12는 혼란스러운 대한민국을 안정시키기 위한다는 명분을 대외적으로 노출했지만 언제나 있을 법한 난세의 실력자가 등장한 사건이다. 그들은 자신의 힘, 혹은 정치력으로 국가를 장악하여 권력을 독점했다.

 

카이사르가 의도했으나 옥타비아누스가 완성한 권력의 독점이다. 스탈린이 부하린과 트로츠키를 축출하며 완성한 권력의 독점이며, 김일성이 갑산파, 소련파 등을 숙청하고 완성한 일인독재처럼 말이다. 바이마르 공화국은 민주적인 법률을 가지고 있었으나, 당시에 없었던 방어적 민주주의 개념으로 스스로를 보호하지 못하는 체제적 한계를 가지고 있었고, 이 부분이 문제가 되어 히틀러와 나치당은 권력을 독점하게 되었다.

 

모든 권력은 대중의 지지가 없으면 성립될 수 없다. 단지 그 비율과 권력 획득 방식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독재라면 다소 낮은 지지를 보유한다 하여도 힘과 공포로 체제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에도 왕정국가는 존재하고, 어떤 독재국가라 하더라도, 심지어 축출되어 살해 당하는 순간까지도 그를 지지하는 사람이 아예 없는 일은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소수에 의한 권력 독점 또한 그것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성립될 수 있다. 때로 시민들은 스스로의 권리를 권력자에게 진상한다. 그렇게 민주주의에서도 독재는 발생할 수 있다.

 

이것을 막기 위해서라면 해당 국가에 적용된 민주주의 체제와 그것이 구체적으로 작동하는 제도들이 최대한 오랫동안 지속 가능하게 끊임없이 수정되어야 하며, 그러한 수정이 가능하게끔 내부적 역량과 유연성을 유지시켜야 한다.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 좋은 것은 뭐든 흡수해야 하는 것처럼 체제의 존립을 유지시키기 위해서 좋은 것은 흡수해야 하며 적용에 문제가 없을 지 살펴야 한다. 무조건 좋아 보인다고 기존 제도와 현실성, 충돌 여부를 생각치 않고 도입한다면 현실에 맞지 않아 문제가 생길 것이고 그렇다고 구태의연한다면 발전은 있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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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관련된 내용은 다소 이해하기 쉽도록 서사적이기 때문에 전문적이고 정확한 내용을 담는 것은 아닙니다. 가령 신라의 멸망 같은 경우 골품제는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이유에서 제한적인 영향력만을 발휘했을 뿐이고 음서제의 경우 글에서도 언급했듯이 음서만으로 고위직을 꿰차거나 녹봉을 받는 건 아닙니다. 실제 능력이 있는 자들은 과거와 음서를 모두 했었습니다. 음서만으로 관직을 가지는 사람의 대우는 그다지 좋지 못했습니다.

 

로마의 경우 체제가 완결됐다고 하기보단 변화되었다고 하는 쪽에 더 가깝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변화의 폭이 커지더라도 말입니다.

 

조선 후기에 성리학은 교조화되었지만 생각만큼 대단히 교조적이게 되진 않았으며, 실학의 등장 등 꽤 유연한 편이었습니다. 오히려, 성리학이 조선에 악영향을 미친 것은 지나치게 실용적이고 실천적인 면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는데, 당장 쓸데없는 짓이면 무조건 다 필요 없다 취급하기 때문에 (중근세적인 시대적 사상의 한계를 감안하더라도) 성리학 외 다른 학문이 성장할 환경이 조성되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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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어디까지나 제 주관적인 관점이기 때문에 당사자들이 들으면 상당히 기분 나쁠 수도 있을 겁니다. 시야가 좁다는 소리 들으면 누군들 기분 안 나쁘겠습니까.

 

근데 이런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지금은 21세기입니다. 21세기가 함의하는 수많은 기술과 발전, 혁명적 사회상은 이전 시대에 비할 바가 아니고 지금도 꾸준히 발전하고 있죠. 20년전과 10년전은 다르고 10년전과 지금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에요. 우리 삶의 발전이 거기서 거기인 거 같고 기술적 발전에 따른 혁신적인 제품들이라고 해봐야 기초적이고 초기적인 것들이 나오니까 당장 돈값을 못하는 거 같고 굳이 필요할 거 같지는 않고 그럴 뿐이지, 예전과 기술적으로 비교하면 정말 많은 게 발전한 건 사실이거든요. 그리고 그런 것들을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고.

 

근데 지금 시점에서 윤석열이라는 인물은 어떻습니까?

 

'현대적'인가요? '21세기'적인가요? 옛날 사람이니까 현대적인 감각을 요구하는 건 지나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최소한 현대 언저리쯤은 되어야죠.

 

주변에 무당, 점쟁이를 끼고 있고 와이프조차 그런 거에 빠져 있으며 과학과 기술에 대한 몰이해 뿐만 아니라 그것을 거부하는 모습조차 보이고 있습니다. 노동에 대한 관점은 심각할 정도이고, 법과 원칙에 따르겠다는 말버릇과는 반대로 법조인 출신이 맞나 싶을 정도로 법학적 개념을 무시하고 있을 정도지요.

 

그리고 그걸 바라보는 사람들 수백만명 이상이 지지하고 있어요. 

 

 

나이든 사람들이야 그럴 수 있습니다. 옛날 사람들이니까.

 

근데 2030 세대가 윤석열의 이런 모습들을 보고서도 지지한다? 정말 저런 모습들을 이해하거나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인가요? 저는 정말 모르겠습니다.

 

저는 오히려 이들이 너 넓은 시야에서 큰그림을 보지 않고, 이슈 하나하나, 내놓는 공약 하나하나만 바라보면서 유리한 건 기억하고 마음에 안 드는 건 빠르게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있는 건 아닌가 싶습니다. 당장 여성부 폐지 하나 딱 던지니까 홀라당 넘어가서 지지하겠네 어쩌네 이러고 있는 거 보면..

 

문재인 정부가 싫을 순 있죠. 이재명이 싫을 수도 있어요. 근데 그렇다고 윤석열을 뽑겠다니. 윤석열이 어떤 사람인지 이해하고 바라보고 판단하고 있는 게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냥 마음에 안 드는 놈이 있으니 한번 좆되보라는 식으로 그 반동타고 반대급부로 모이는 거에 불과하다. 이게 사실에 가깝다고 봅니다. 내게 이익이 안 되더라도(심지어 다소 손해가 있더라도) 저놈이 더 불행하고 더 큰 실패를 겪을 수 있다면 무지성으로 그걸 선택하겠다 이거죠.

 

그리고 그들은 그걸 '벌'을 준다고 생각할 겁니다. 죄가 있으면 벌을 받아야 한다고.

 

 

2030세대들이 국가 통치와 외교조차도 수십년간 해당 영역에서 공부하고 연구하고 경험해본 전문가들의 판단과 조언을 받아들이기보단 근본도 없는 무당과 점쟁이들이 점지해준 길일에 따라 그날 회동하고 어떤 국가적 판단을 주술적인 방식으로 결정하는 걸 정말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단 말입니까?

 

최소한 전문가들은 아무리 병신이라고는 해도 그 영역의 전공자이고 수십년 동안 구르고 굴렀으며 직접 경험하고 관련 인적 자원들과의 네트워크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경력으로 여러 과정들을 차근차근 밟으며 올라온 사람들이죠. 다시 말해, 2030이 말하는 실력과 노력의 증명자들이라는 겁니다.

 

근데 무당과 점쟁이들은? 그냥 요상한 미신놀음이나 하면서 이말 저말 끼워맞추며 있어 보이는, 맞아 떨어지는 듯한 사이비들이고 똑같은 방식으로 사회현상을 진단하거나 추측하는 이들을 우리는 음모론자라고 부르거든요. 그런 근본도 없는 이들을 데려다가 국사의 중요한 판단과 결정을 맡기고 조언을 받는다?

 

그들이 남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어떤 전문성과 능력이 있는데요? 그걸 어떻게, 언제 증명했고요. 전혀 그런 적 없죠. 말솜씨 좋은 사이비에 불과합니다. 거기에 넘어간 윤석열 같은 종류의 인간은 권력을 잡을 자격이 없는 거고요.

 

이걸 2030은 무비판적으로 대합니다. 최소한, 탐탁찮게 보지만 그럼에도 지지합니다.

 

 

여기 어디에 공정과 평등이 있고 원칙이 있는지 전 전혀 모르겠습니다.

 

전 아직도 인국공 사태를 기억합니다. 윤석열 주변의 무당, 샤먼들은 자격 없이 권력을 움직이고 있습니다. 인국공 사태때 2030 청년들은 어땠죠? 나보다 시험 못 본 자격 없는 것들이 자기와 동등한 정규직이 된다고 발광을 하고 발작을 해댔죠.

 

그리고 거기에 댄 명분이 공정하지 않다는 거였습니다. 윤석열 주변의 무당들은 마땅히 그 자리에 있어야할 다른 전문가들에게 어떻게 공정하죠?

 

그럼 이렇게 쉴드칠 놈들이 있을 겁니다. 실력만 있으면 된다고. 그럼 마찬가지로 인국공 때 정규직이 될 사람들 중 실력이 있는 사람들은 왜 정규직이 되지 못해야만 했을까요. 그렇게 실력 있으면 시험 보라고요? 그럼 또 말이 달라지는 거죠. 실력만 있으면 되고 그걸 증명만 하면 되는데 그거랑 별개로 시험은 봐야 인정한다는 거니까.

 

 

다른 모든 걸 떠나서, 지금 한국이 어떤 나라이고 21세기 현대 국가와 사회를 영유하고 있는지 제대로 눈 뜨고 보고 있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조금만 넓게 바라봐도 세계 10대 선진국, 군사, 경제강국인 한국에 무당 끼고 미신에 따라 움직이는 대통령 후보가 있다면 다른 나라 사람들이 어떻게 바라보겠습니까?

 

중세국가인 줄 알 겁니다.

 

눈에 보이는 포퓰리즘 공약, 지킬지 신뢰할 수도 없는 공약과 반문, 반민주라는 보복심과 폭력성에만 매몰되고 천착되어 이런 세태를 못 보고 있는 거 같습니다. 당장 눈앞의 이슈만 보고 움직이며 그 이상을 보려고 하질 않아요.

 

그들은 마음껏 공격하고 괴롭히고 폭력의 쾌감을 즐기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민주당과 그 족속들은 때려 죽여도 무죄인 놈들이니까요. 약자들로 만들어서, 폭력을 휘두르고 싶은 거지요. 양심에 거리낄 거 없이. 그게 정의니까. 10년 넘게 약자에겐 그래도 된다고 배웠을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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