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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이야기

폭력의 명분, 내 폭력은 정당하다.

by Konn 2022. 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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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부터 하던 생각이 있었습니다. 예전이라고 얼마나 다르겠냐만, 요즘들어 더 노골적으로 보이는 경향성 중 하나가 바로 이겁니다.

 

"난 누군가를 조롱하고, 비난하고, 폭력을 휘두를 권리가 있다."는 경향성이요.

 

 

대체로 이러합니다. 어딘가에서 누군가 무슨 잘못을 저지르거나, 어떠한 사건을 터뜨렸을 때 사람들은 주모자를 쉽게 비난합니다. 그리고 그걸 아주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그럴 수 있습니다. 누군가 타인의 지탄을 받을만한 행위를 했을 때 다른 사람들은 응당 그들의 행동을 판단하고 비난할 수 있습니다. 이건 권리가 아니라 당연히 있을 수 있는 일일 뿐더러, 그러한 비난이 두려워 자신의 행동을 규약하는 자기검열의 역할도 존재합니다.

 

모든 자기검열이 나쁜 것만은 아니고, 남들이 보지 않거나, 알게 될 수 있다는 가능성만으로 정말 나쁜 일을 하게 만들지 않는 효과도 있습니다. 이를 우리는 사회화, 사회성이라고도 표현합니다.

 

 

그러나 비난은 반드시 폭력적일 수밖에 없고 이러한 폭력에는 쾌감이 뒤따릅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보복의 권리이자 보복의 쾌감이죠. 몽테크리스토 백작은 복수극 작품이면서 그 복수의 쾌감으로 독자에게 감정적 쾌감을 안겨줍니다. 대리만족이었지만, 주인공에게 감정을 이입한 이들은 그의 복수에서 나름의 쾌감을 얻죠.

 

문제는, 사람들은 누군가를 비난할 때 분노와 혐오 뒤에 쾌감이 숨어있다는 겁니다. 쾌감은 중독될 수 있죠. 폭력에 중독된다는 건 폭력이 가져오는 쾌감에 중독된 것이라 봐야할 겁니다. 그리고 비난자는 자신과 같은 정서를 공유하는 이들과 함께 공격을 하기 때문에 자기확신과 소속감을 가지게 됩니다. 나 혼자 공격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같은 생각이라고 말이죠. 그리고 그렇게 얻어진 상호확인은 그것이 정당하고, 올바른 것이라 믿게 됩니다.

 

여기까지라면 단순히 혐오와 증오 속에서 자기 자신을 잘 찾고 자기 중심을 잘 잡으라고만 할 수 있겠지만, 제가 지적하고 싶은 부분들은 이 이후입니다.

 

 

흔히 사이다패스라고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웹소설이나 웹툰 등 문화매체에서 답답한 상황을 싫어하고, 불편한 상황을 빠르게 해소하고 싶어하는 이들입니다. 이들은 작품, 혹은 주인공에 강력하게 이입한 이들이며 그런 주인공 대부분은 강하거나 뛰어납니다. 지나치게 뛰어나서 누구도 이들을 감히 넘볼 수 없고, 감히 그러한 시도를 한 이들은 완벽하고 끔찍하게 분쇄되어야 합니다. 단지 그 한 사람뿐 아니라 그 세력, 혹은 가족 등 주변사람까지 포함하는 경우도 있으며, 아예 국가 단위인 경우도 있습니다.

 

이 또한 단순히 죽이거나 멸하는 정도를 벗어나 끔찍한 신체적, 정신적 고통과 고문까지 함께하는 경우도 있죠. 이는 그들이 어떤 행위를 했든 절대 공정하지 않은 수준의 보복을 받습니다. 함무라비 법전에서 말했듯,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넘는 압도적이고 강력한 폭력을 행사하죠. 보복이라는 정당한 명분으로요.

 

 

'그것들'이라는 작품에 이런 캐릭터가 등장합니다. "복수 중독자." 이 캐릭터는 다른 힘 좀 쓰는 조직들 사이에서 기피되는 녀석입니다. 단순히 강하거나 위협적이라서가 아니라, 이 녀석에게 뭔가 피해를 입히거나 복수할 명분을 제공하는 순간 누구보다 집요하고 잔혹한 놈이 되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복수하며, 그 복수의 방법도 잔혹하기 짝이 없기 때문입니다. 가령, 그는 목 아래로 감각이 없는 놈 하나를 산 채로 상자에 가두고 손수 못박습니다.

 

 

단순히 웹소설 독자들이 그런 성향이 있다는 게 아니라, 요즘 사람들의 성향이 그렇게 변화했기 때문에 독자들 또한 그런 흐름을 선호하고, 고객이 원하는 쪽으로 맞춰가는 작가들이 그들의 니즈에 맞춰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만, 주제에 맞지 않기 때문에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복수는 대체로 정당합니다. 자신이 피해를 입었다면 그에 대한 대가를 요구하는 건 정당하죠. 그것이 단순한 말뿐인 사과일 수도 있고, 돈 같은 재물일 수도 있고, 법적인 방법도 있으며, 직접 손수 폭력을 휘두르는 방식도 있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이것이 신체에 간접적이고, 법을 통한 공권력의 행사로 대체하는 쪽으로 발전해왔죠.

 

하지만, 그럼에도 복수는 대체로 정당합니다. 내가 피해를 입었다면 그 대가를 요구하는 거야 당연한 거죠. 그 방식과 정도가 문제입니다. 함무라비 법전은 잃은 것 이상의 보복을 금했습니다. 그것은 정당하지 않고 공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즘 시대 대중들은 누군가 자신에게 부당한 피해를 입혔다면 압도적이고 잔혹한 보복을 통해 누구도 자신에게 피해를 입히지 못하도록 경고하고, 자신을 두려워하길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스스로 정의롭고 정당한 존재이길 바라죠. 바로 여기에 복수의 명분이 필요한 겁니다. 보복이란 누군가 자신에게 먼저 피해를 입혔을 때 발동할 수 있는 것입니다. 먼저 나서서 다 쳐죽이고 갈아버리는 건 누군가의 복수의 명분이 되는 행동이지 스스로 정당하다고 여기는 게 아니죠. 이것이 악하다는 관념은 대체로 다들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껀수를 찾는 거죠.

 

이유, 명분. 누군가를 조롱하고, 비난하고 공격할 수 있는 권리는 갈구하고 있는 겁니다. 자신의 불만과 분노를 정당하게 표출하고 싶은 명분 하나를 원한다는 말입니다. 감정은 객관적이지 않고 계측 가능한 것이 아니고, 정도와 사안, 그리고 대상에 따라 가변적입니다. 똑같은 행위를 자신에게 저질러도, 누군가에겐 과한 보복심을 품지만 누군가에겐 약소하거나, 아예 용서해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따라서 감정에 따른 보복론은 정당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 감정의 해소는 무엇보다 시원하고 강력한 쾌감을 가져오죠. 단순히 상대방에게 내가 원하는 수준의 폭력을 휘둘렀기 때문이 아니라, 그 상대방이 망가지고 애원하고 후회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즐기는 겁니다.

 

 

여기게 천착된 이들은 보복, 혹은 논란 발생자의 행동에 정당한 비난과 조롱을 한다는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즐기는 겁니다. 정의를 독점한 채 무제한적으로 휘두르는 폭력의 쾌감. 심지어 정당하기 때문에 결코 비난받을 수 없는 성스러운 징벌.

 

그러기 위해서 자신은 결코 잘못해서는 안 되며, 비난 대상자는 마땅히 욕을 먹어야할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공격은 정당해야하며, 또한 정당합니다. 

 

 

이러한 것은 단순한 정치, 사회적 현상을 대할 때 뿐 아니라 개인 단위의 경험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불편할만한 상황에서 나는 잘못하지 않은 이유를 찾고, 역으로 책임은 상대방이 질만한 이유를 찾습니다.

 

결말이 이해 안되는 치킨화상

https://www.bobaedream.co.kr/view?code=strange&No=3860890 

 

몇가지 사례가 있지만, 위와 같은 사례가 떠오르기에 위 사례를 먼저 이야기하겠습니다.

 

이때에도 주인이 있든 없든, 자기가 상품을 원하든 원하지 않든 정당한 허락 없이 자기가 남의 물건을 멋대로 건드려서 스스로 손해를 보고, 상품 등에도 손해를 입혀놓았음에도 그 책임을 판매자에게 전가하고 있습니다. 당사자가 잘못했다는 건 정상적인 상식과 판단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든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자신은 손해만 보고 누구도 보상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에 억울해하며 그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고, 자신을 피해자인 것처럼 만들고 있죠. 내가 피해자여야 정당하게 피해보상을 요구할 수 있으니까요. 심지어 부당하게 보상해준 판매자에게 여전히 자신은 정당하고 저 사람이 잘못한 것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당연합니다. 그래야 자신이 정당하고 비도덕적인 악인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잘못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기에 무조건 타인이 잘못해야 합니다. 잘못은 반드시 상대방이 해야 한다는 겁니다.

 

 

비슷한 여러 사례들은 찾아보거나 살다보면 생각보다 쉽게 볼 수 있을 겁니다. 여자 아이돌 악플달아놓고 남초에서 했다고 조작하거나 책임을 전가하려는 여초의 행위 또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고, 그 반대로 거기에 일조했음에도 여초탓으로 죽었다고 전가하는 이들도 있죠.

 

 

앞서 이야기한 것이 폭력에 중독된 이들이고, 위 사례는 자신의 잘못을 전가하여 책임이라는 감정적 부채에서 벗어나기 위한다면, 역시 인터넷에서 찾아볼 수 있는 비난자들 중 누군가들은 자신을 우월한 지위에 놓고 싶기 때문에 그러기도 합니다.

 

그런 이들은 그저 이유를 찾는 것 뿐입니다. 세상에는 멍청하고 나쁜 놈들, 잘못된 이들이 가득하고 너무 문제투성이인데, 그걸 비난하는 자신은 그것을 판단하고 무엇이 올바른 것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다고 말이죠. 판사병 걸린 이들인데, 평가하고, 판단하고, 지적합니다. 대체로 원론적으로 틀리지 않거나 어느 정도 맞는 지적들과 비판들이긴 하지만 그것이 그들이 정확한 판단력과 상식, 지성을 갖추었다기 보단 그러한 자신의 행위를 통해 더 우월한 지성과 사회성을 갖춘 사람이라고 느끼길 바라는 겁니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평가하는 것으로 스스로 지적으로 우월하다거나, 문제를 지적함으로써 더 올바른 방향을 가르친다고 여기는 것이지요.

 

처음 이야기한 복수 중독자들과 마지막의 판단자들의 성급한 비난과 지적들은 이후 이어지는 진실에 따라 쉽게 뒤집어지기도 하고 더 복잡한 상황이 있음으로 무용하게 되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피카츄 배 만진다는 표현이 등장하기도 하고, 중립기어하는 표현도 발생한 거죠.

 

모든 사건은 그에 대한 모든 정보가 정확하게 제공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어떤 분야에 대해 정당한 명분과 이유를 찾으며 그것이 발견되면 무차별적이고 무제한적으로 증오와 혐오, 폭력을 휘두르는 이들이 있습니다. 무엇이 잘못됐고 어디까지 잘못됐는지 지적하고 평가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반대되는 진영이나 집단이 무언가 잘못하면 그걸 정당한 명분으로 삼아 공격하고 조롱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판단이나 성향을 강화시키는 재료로 사용하죠.

 

그들에게 중요한 건, 그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정당하다는 믿음입니다. 복수는 대체로 정당하고, 누군가 잘못하면 그에 대한 비난 또한 정당한 것처럼 자신에게 그러한 폭력을 휘두를 정당한 권리, 권한이 있다고 믿는 겁니다. 그리고 그 선은 감정이라는 가변적이고 계측 불가능한 조건에 근거합니다.

 

이러한 경향과 정서가 만연해질수록 그렇지 않은 이들조차 점차 폭력에 무감각해지고, 폭렬화되어가며 극단화될 겁니다. 그리고 더더욱 단순하고 극단적인 해결책을 추구할 겁니다. 사실, 이미 그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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