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씨, 일베 등에서 어휘력과 문해력이 낮은 이들이 보이고 있고 그들을 지적하는 글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해 나오는 말들 중 하나가 우리가 옛세대보다 어휘력, 아는 단어가 적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머리가 나쁘냐 하면 그건 아니라고 하는 것이고, 마찬가지로 단어 좀 모른다고 머리가 나쁜 건 아니라는 겁니다.
하지만 전 조금 생각이 다릅니다. 옛 시절에는 지금보다 더 많은 한자어와 옛 단어, 낱말들이 자주 사용되었고, 아예 한글도 아닌 한자가 신문 등 공식 문서와 뉴스에서조차 자주 나왔던 시기입니다. 그렇다고 그들의 교육 수준이 지금보다 높느냐 하면 그건 아니라고 할 것입니다. 이유는 간단한데, 단지 당시에 비해 지금 배우는 교육의 질과 양이 모두 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단지 시대의 차이였을 뿐이지, 40년전, 50년전 대학에서 배우는 것은 지금보다 더 높은 위상과 평균적으로 더 높은 지적 능력을 요구했을 겁니다. 이는 지식을 가지지 못한 사람, 교육 서비스를 제공받지 못하거나 중단된 사람이 많았고, 사회가 발전하고 있던 시기였기 때문에 대학 평균 진학률이 낮았습니다. 그 당시를 기준으로 한다면 대학 학사 졸업자조차 상대적으로 높은 학력을 가진 고스펙이었습니다.
물론 그 당시 사람들이 지금보다 어휘력이나 문해력이 높았느냐 하는 것도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이, 높은 세대로 갈수록 어휘력은 낮다고 합니다. 이것 역시 지금 수준의 교육 서비스를 받지 못하거나, 독서의 기회가 적었기에 그런 것입니다. 단, 요즘 세대에서 사용되지 않는 단어 정도는 조금 더 알고 있긴 할 겁니다. 그것들이 사용되었던 시대였기 때문에요.
연령별 문해력 점수 분포
여튼, 그렇다하여 이것이 높은 어휘력 = 더 똑똑한 사람. 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르는 단어가 좀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이 머리가 나쁘거나 사고력, 합리성, 논리력이 미달되거나 부족하다는 뜻은 아닐테니까요. 마찬가지로 수십년전 사용되었던 한자와 지금은 잘 사용되지 않은 많은 단어들이 영어 단어 등으로 대체되었다고 생각하면 총량에서 크게 달라지진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우리 세대의 평균 수준일 뿐 우리 아래 세대의 어휘력과 문해력에서는 조금 다르게 생각합니다.
책을 읽고 풍부한 단어를 알게된다는 건, 슬픔의 저 끝에서부터 기쁨의 저 끝까지. 자신이 알고 있는 수많은 감정의 결들을 하나하나 구분해내는 거에요. 정확히 그만큼의 감정을 정확히 그만큼의 단어로 집어내어 자신의 마음을 선명하게 들여다보는 거죠.
(중략)
같은 단어를 알고 있다면 감정의 의미를 공유할 수 있고 같은 문장을 이해할 수 있다면, 감정의 흐름을 공유할 수 있어요. 그리고 그건 서로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게 만들죠. 정기씨가 저에게, 제가 정기 씨에게. 그런 사람이면 좋겠어요.
앞으로의 많은 고난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와 위로가 되도록.
- 가담항설 90화 中 홍화
많은 단어를 안다는 것은 한가지 현상에 대해 더 다양하고 정확한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똑같은 것을 보고도 더 정밀하게 분석할 수 있을 것이고 커다란 명제를 더 작은 단위의 논리로 분해할 수 있는 능력의 기반이 되어줍니다.
조지 오웰의 1984에서는 '신어'라고 하여 한가지 주제에 곂치는 개념이 있다면 해당 단어들을 폐기하고 더 단순한 단어 하나로 통일합니다. 또한 새로운 단어보다는 간단한 두 단어를 합성시켜서 사용하기도 하죠. 좋다는 Good으로, 나쁘다는 Bad가 아니라 NoGood이라는 식으로요. 이는 대중들의 사고력과 개념 분석능력을 저해시키기 위한 당의 우민화 정책이었습니다.
똑같은 것을 보고 더 정확하고 통찰력 있게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것의 핵심과 개념을 파악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언어적으로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하죠. 자기가 설명할 수 없는 것은 자기가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이 아니며, 자기가 언어적으로 해석하고 설명할 수 있어야 정확하게 알고 있다는 증명입니다.
최근 디씨 등에서 보이는 우리 세대 기준으로 너무 낮은 어휘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말은 똑같은 것을 보고도 더 다양하게 설명하고 더 정확하게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지 않을까 합니다. 이는 피상적인 해석과 근시안적 시야를 가지게 하는데, 장기적인 계획은 지능이 높을 수록, 지적능력이 뛰어날수록 더 능숙하게 할 수 있는 작업입니다. 장기적 계획에 취약하고 단기적인 계획, 혹은 근시안적 시야를 가지는 사람들은 지능, 혹은 지적능력이 상대적으로 낮은 사람인 경우들이 많습니다.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장기 계획 역시 그러한 경험과 훈련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며, 여러 불확실성의 변수들과 불필요성 때문에 아예 그런 계획 자체를 세우지 않거나 아주 단순한 수준으로만 세우는 경우조차 있으며 그조차 언제든지 폐기, 수정이 가능한 경우들이야 정말 무수하기 때문입니다.
하여간, 어휘력이 높은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에 비해 더 똑똑하고 논리적인 사고가 가능할 것이라 기대될 수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덜 똑똑하고 논리적 사고 능력이 다소 부족할 것이라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는 어휘력이 높아야만 똑똑한 게 아니라, 어휘력이 사회에서 평균적으로 사용하는 것보다 부족한 사람은 특별히 더 머리가 나쁠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것 뿐입니다.
그런 이유로 전 어휘력이 낮다고 멍청하다는 건 아니다. 라는 말을 부정하는 편입니다. 어휘력이란 특별히 국어사전을 보고 처음부터 끝까지 외우거나 하는 식으로 익히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들 대부분은 글을 읽는 것에서 시작했고, 그렇게 완성된 것입니다.
인터넷 글이든 책이든 더 많은 단어와 어휘, 문장, 낱말을 읽고 이해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어휘력을 늘려왔습니다. 우리가 모르는 단어가 나온다면 사전을 찾아보기도 했을 것이고 그게 아니더라도 문장의 맥락에서 그 속뜻을 유추하고 사용례를 보면서 그 유추가 정확했음을 확인/교정받습니다.
다시 말해, 어휘력이 낮다는 건 그만큼 책이나 글을 덜 읽었다는 것이고, 많은 단어들을 경험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책을 많지 보지 않았다는 것은 지식의 양이 상대적으로 적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겠죠. 어휘력은 그 사람이 얼마나 많은 단어, 지식을 접했느냐를 유추할 수 있는 지표가 될 수 있습니다.
물론 이에 대한 반론은 당연히 제기될 수 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용되지 않은 단어들은 늘어가고 있고 우리 세대와 이전 세대, 그리고 우리 다음 세대가 사용하고 익힌 단어들의 숫자와 종류는 달라지는데 그러한 시대적 차이를 구분하지 않고 무조건 어휘력만으로 일괄적으로 지적능력의 고하를 구분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거나, 구한말 사람들이 사용하는 어휘 중 지금은 잘 사용되지 않는 어려운 말과 단어들이 줄곧 쓰였는데 그 사람들이 지금 기준으로도 더 똑똑한 사람들이냐, 아니면 단지 당시 사용되는 단어가 그러한 것들이 많아 단순히 체득한 단어만 더 많이 알고 있는 것은 아니냐 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실제 사회생활이나 업무 활동에 있어서 대단한 어휘력이 필요한 건 소수의 직종 뿐이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일 잘만 한다. 어휘력으로 추측할 수 있는 지적능력과 실제 지적능력 및 그 활용 현실은 아무 관계 없거나 별 관계가 없을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글의 초반부터 그러한 가능성을 염두해두고 이야기를 풀어낸 것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인문학적 소양과 직장업무 능력이 직결되는 비중은 크지 않을 것이고, 그러한 비중이 크기 위해선 사람을 알고 다루는 일을 할만큼 높은 자리에 올라가야할 것입니다. 인문이란 인류가 쌓아온 문명을 연구하는 것이고 이 거대한 개념은 세부적으로 인간에 대한 이해는 물론, 그 인간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대한 질문과 나름의 답을 만들 수 있게 하는 재료들이 됩니다.
그런 이유로 전 인문학적 소양으로 대표될 수 있는 더 많은 책을 읽는 것과 그것을 유추할 수 있는 어휘력이 아무런 상관이 없느냐 하는 것에도 역시 부정적입니다. 또한 모든 책이 인문학 책인 것도 아니고 공학, 수학 등 비인문적 책들도 있지만 그러한 책에서도 최소한의 소양은 필요합니다. 이 단어가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고 뭘 의미하는 지 아는 것 바로 그 자체 말입니다.
1.자기 언어의 부재, 철학의 부재.
예전에 미국 쪽에서 이걸 다룬 다큐멘터리 같은 게 있었습니다. 대충 10년쯤 전 내용이라 정확하게 토씨 하나하나 기억나지는 않지만, 요는 평소에 불만이 많고 다소 반사회적이었던 이들에게 철학책을 주고 그것을 계속해서 읽도록 시킨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임무를 잘 수행했고, 나중에 가서는 반사회적인 행동을 하지 않게 되었죠.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신은 많은 것에 불만이었지만 왜 불만이었고 뭐가 문제였는지 알지 못했다. 알지 못했기 때문에 더 화가 났고 무엇에 화가 났는지 모르니 아무 곳에나 그것을 분출했다. 그러나 철학책을 읽으면서 자기 생각을 잘 정리하자 문제들이 보였고 그것을 설명해낼 수 있게 되었다. 그러자 감정을 다스릴 수 있게 되었다..
정확한 발언은 아니었지만, 제가 기억하는 맥락은 이러했습니다. 즉, 그들은 사회현상과 정치현상, 그리고 그것을 지배하는 철학적 기반에 대한 지적 부재가 너무나도 복잡하고 어려운 사회를 설명하지 못하는 한계로 다가왔고, 그 때문에 뭔가 불만은 있는데, 그 불만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었던 거죠. 해소될 수 없는 불만이니 아무렇게나, 아무에게나 터져나왔던 겁니다.
분노했지만, 무엇에 분노한지 모르는 사람들이 극단주의에 쉽게 경도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런 사람들에게 사색의 기반이자 자기 언어를 가져다주는 것은 더 '깊은 생각'을 가능하게 해준 철학입니다.
왜 저소득층은 독재자-극단주의 세력을 선호하는가? (https://konn.tistory.com/753)
전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언어적으로 정확하고 세밀하게 표현하지 못 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한계를 크게 드러내는 때가 바로 정치인이나 정치적 현상을 대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특정 정치인이 싫다고 하지만 정작 물어보면 정확히 왜 싫은지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그냥 싫다, 아무튼 개새끼다. 하는 사람들이 꽤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어떤 정치인을 싫어하기는 하는데, 왜 싫어하는지는 모르는 사람들인 거죠. 그것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냥 싫기는 한데, 스스로도 돼 싫어하는지 구체적이고 논리적으로, 언어로서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면 스스로도 그걸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럼 왜 싫어하느냐, 여러 뉴스들에 의해 형성된 이미지 때문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우리가 어떤 뉴스를 보고 어떤 정치인에 대해 어떠한 인상을 가질 수 있을만한 내용을 보지만 그것들은 따로 기록하거나 기억해두지 않으면 금방 잊혀집니다. 이는 어떤 사건에 대해 시기, 상황, 심지어 당사자인지 아닌지 사람조차도 헷깔릴 수도 있게 됩니다. 단기기억으로만 남고 장기기억으로 잘 남지 않는 내용들인 셈이죠.
그렇게 구성된 이미지가 그 정치인에 대한 호불호로 이어지는 거고 설명할 수는 없는데 아무튼 누구는 싫다.가 됩니다. 따지고 보면 아예 없는 건 아니겠지만 스스로 설명할 정도로 기억에 남는 무언가가 딱히 없죠. 최소한 당장 머리속에서 찾아낼 수는 없다고 보시면 됩니다.
1984의 당은 신어를 만들어 사람들에게서 다양한 개념을 사고할 자유성를 억압했습니다. 생각은 언어에 묶이고 단어에 휘둘립니다. 같은 것을 보고도 다른 단어를 사용할 수 있고, 다른 단어에서 다른 정서를 느낍니다. 이는 다른 감성과 다른 과정이 되어 다른 결론으로 이어지죠.
복잡하여 정확히 규정해야할 현상을 그렇지 못한 언어로 해석하려고 한다면 필연적으로 오류가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정치, 사회적 현상 뿐 아니라 우리의 일상소통에서조차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다소 뭉뚱그려 커다란 개념으로서만 전달시키고 받아들이게 될 수 있습니다.
꼰대 같을지 몰라도, 전 이게 좋게 보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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