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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며,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 - E.Kant
by Ko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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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에 해당되는 글 5건

  1. 2022.01.30
    체제 완결성과 다음 체제로의 이행.
  2. 2019.12.23
    종부세로 죽겠다는 가진 자와 지속 불가능한 체제 문제.
  3. 2014.02.01
    별거 아닌 썰.. 지식인 하면서 본 유사역사 2
  4. 2013.09.12
    카노사의 굴욕, 그 비하인드 스토리. 4
  5. 2013.08.14
    로마가 위대한 이유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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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집단이 기능하며 그것이 유지된다는 것은 그것을 이루는 어떠한 체제가 있다는 것이다. 작은 동아리나 모임에도 규칙은 있고 그것으로 규정하지 않는 크고 작은 관습과 약속이 있기도 하다.

 

그러나 어떠한 체제이든 그것은 결코 완전할 수 없고 필연적인 지속불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것은 환경의 변화나 내부적인 규칙의 형해화, 권력의 독점화, 구성원간 상호 신뢰 붕괴 등 다양한 원인이 있을 것이다.

 

같은 환경 내에서도 여러 집단이 존재할 경우 상호관계를 맺으며 유사해지거나 문화적 동질성을 가질 수는 있다. 그러나 완전히 같은 경우는 매우 드물고 이는 각 집단의 체제가 각기 다른 형태를 한다는 것이다.

 

 

한 체제가 태생적인 한계에 도달하고 그것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그 집단은 무너진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 집단을 유지하고 보호, 팽창시키던 체제는 완결된다. 감상적으로 표현할 수도 있겠지만 이는 해당 체제의 태생적 한계가 찾아왔기 때문이지 소수의 이기적인 권력자나 무능한 왕, 운명의 장난 때문이 아니다. 그 때가 아니라면 그 집단의 역량과 체제의 견고함 덕분에 조금 더 뒤에 이루어질 일일 것이다.

 

로마 공화정은 그들 체제의 뛰어남 덕분에 다른 경쟁자들을 제치고 우위를 점하며 생존을 넘어 정복자의 지위를 얻어냈다. 그것이 잘 작동할 때에 그들은 강대했고 실패와 패배는 복기되어 보완되었다. 능력자는 마땅한 대우를 받았고 실력자는 인정받았다. 그들의 정치사회적 전통은 그들을 부강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것은 영구적일 수 없었고 로마 공화정의 위대한 정복이 승리할 때마다 값싼 노동력인 노예들은 흘러들어왔고 이제 원정을 갔다 오기에는 너무 넓어진 영토를 마주해야 했다. 로마의 시민들은 토지를 팔고 스스로 노예가 되더라도 먹고 살아야 했고 로마의 보호들은 그렇게 라티푼디움이라는 대농장을 만들어 더 많은 부를 획득했다.

 

일부는 이러한 체제변화에 위험성을 경고하며 개혁을 주장했고 시도했다. 그러나 숫한 시도들은 실패로 돌아갔고 그들은 자신의 부를 포기하길 거부했다. 결국 그들의 위협적인 경쟁자인 카이사르 또한 암살당한 뒤 로마 공화정 체제는 완결되었고 제정으로 향하게 되었다.

 

누군가는 로마 부호들이 이기적이라 공화정이 무너졌다 할 수 있다. 누군가는 로마 시민들이 그들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로마가 체제의 한계에 도달해갔고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수정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른 사례를 좀 더 간략히 알아보자.

 

신라는 골품제를 통해 소국이 점차 커지면서 경주 주변의 여러 소국들을 흡수하며 옛 지배층을 등급화하였다. 이는 소국의 흡수를 용이하게 하고 경주 출신 왕족인 성골과 구분지어 왕권을 보전했다. 이는 정복지의 흡수와 통치를 수월하게 했고 기존의 정복지 왕족, 귀족과 본래 경주 일대 소국의 왕권에 계층적 차등을 두어 왕권의 침해를 방지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였다.

 

이 역시 로마와 마찬가지로 확장을 하기 위한 그들 나름의 유용한 체제였을 것이다. 그러나 왕이 될 성골이 부족해지자 여왕이 등극하게 되었고, 그마저도 사라지자 진골이 신라의 왕가를 이루게 되는 등 필연적인 계급적 변화가 있었다.

 

골품제는 왕족과 귀족, 평민 출신의 명확한 구분으로 일반적인 경우 침해될 수 없는 강력한 벽을 형성했다. 아무리 뛰어난 이라도 한미한 출신이라면 6두품을 뚫을 수 없었고 진골은 결코 성골이 될 수 없었다. 로마와는 상당히 다르게 실력자와 능력자가 혈통적 신분과 출신에 강하게 메여 있었던 체제였다. 이러한 체제는 확장 이후 안정적 유지와 발전에 큰 걸림돌이 되었고, 이후 고려가 건국될 때 골품제는 사라지고 그 문제들이 수정된 새로운 체제로 변화하였다.

 

고려 또한 과거를 도입하면서 골품제로 억눌려진 기회와 능력을 펼칠 수 있게 열어 놓았고 이는 고려의 관료제로 이어졌다. 그 역량은 수 차례의 전쟁을 견딜 수 있는 근거로 작동하였으나 동시에 음서, 공음전 등 체제의 한계를 예비하는 제도 또한 존재했기에 국가 내부 자원을 분배하지 못하고 자본이 흐르지 않게 되는 등 극심한 정치, 사회, 경제적 문제를 야기했다. 이것을 해결하려 노력한 이들은 있었으나, 근본적인 체제적 수정은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이러한 문제들이 수정된 새로운 체제, 조선으로 변화하였다.

 

조선의 경우는 강대한 왕권과 뛰어난 대왕들에 의해 선정이 이루어지고 견고한 관료제와 강력한 중앙집권국가를 만들었으나 양란을 거치며 왕권이 무너지고 유교적 질서가 해이해지는 동시에 무너진 권위를 세우기 위한 반동으로 교조화가 이루어지며 허례허식이 늘어 내부적 유연성을 경직시켰다. 정조 대왕의 개혁과 실학의 등장은 조선이라는 체제의 역량을 보여주었으나 내부적 한계와 정치의 문란이 곂치며 해결되지 못했고, 거기에 제국주의 시기와 곂치며 외부적 압박을 이겨내지 못하고 체제가 완결되었다.

 

이는 잘잘못을 떠나 사실로써 당시 조선의 역량이 외부적 압박을 이겨낼 정도로 견고하며 유연하지 못했고, 그러한 역량을 배양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로마가 아니더라도 어떤 집단에서든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다. 환경과 내부 조건이 극히 안정적이라면 발전없이 정체되더라도 아주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다. 환경변화가 없어 외부적 리스크가 없고 내부적 밀도 변화가 적어 똑같은 삶의 형태를 반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지의 정글속 원시 부족들이 수천년 넘게 그러한 삶을 반복했던 것처럼. 그들에게도 나름의 체제는 있고 단지 한계에 도달하기까지 아주 오랜시간이 걸렸을 뿐이다.

 

이처럼 한 체제가 태생적 한계를 지녀 발전 끝에 한계를 넘기 못하고, 혹은 미리 체제를 수정하지 못한 채 끝나는 것을 나는 체제 완결성이라 한다. 이 체제 완결이 이루어지고 나면 그 체제에 의존했던 집단은 멸망하게 되고 수정, 보완된 다른 체제를 가지게 된다.

 

이것은 다른 국가가 될 수도 있고 부족이나 도시 규모의 소집단이 될 수도 있으며 다른 체제에 정복되어 흡수, 혹은 예속될 수도 있다. 체제의 변화는 반드시 더 발전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더 나은 체제를 가지게 된다. 여기서 주의해야할 점은, 유럽. 특히 영국처럼 나라는 그대로이나 왕조만 다른 이름으로 바뀌는 경우는 해당된다 하기 어려울 것이다.

 

 

체제의 완결은 여러 형태로 찾아온다. 그러나 그 원인을 내부에서 찾는다면 그 어떤 분석이 있든 근본적으로 체제의 한계에 도달했다고 생각한다. 로마에 라티푼디움이 등장한 것은 너무 넓어진 영토와 값싼 노동력의 유입이 시작이었고, 이는 로마 자체의 팽창을 요구하는 제도와 체제에서 기인한다.

 

고려에 음서는 비록 녹봉도, 실권도 없는 말직을 받았고 무능하면 고위 관직을 얻을 수 없었으나, 능력과 실력에 무관하여 혈통에 의해 관직을 얻을 수 있어 과거 시험으로 관료가 된 이들에 비해 유리한 위치를 점할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이며, 공음전은 음서보다 심각하여 토지는 물론 수조권까지 세습하여 체제적으로 고려의 체제 완결에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한다.

 

때로는 외부적 요소에 의해 체제 완결이 발생하기도 한다. 소빙기가 찾아오며 흉년이 오고, 화산 폭발 등의 재앙에 의한 대기근이 발생하기도 한다. 지진에 의해 큰 피해를 보며 기독교적 세계관의 붕괴를 앞당기기도 하고 외세의 침략에 의해 멸망하기도 한다.

 

특별히 예외적인 사례가 아닌 이상 대부분 체제의 완결은 근본적으로 그들 체제의 한계에 근거한다. 심지어 외세의 침략이라고 해도 그러한 침략에 의해 멸망하는 것은 그 국가가 이미 병들고 쇠약해져 있을 때이며, 튼튼하고 강한 몸을 가진 이에게 병마가 쉽게 찾아오지 않고 싸움에서 쉽게 지지 않지만 나약하고 병든 몸에는 병마가 쉽게 찾아오고, 타인과의 싸움에서 육체적으로 불리한 조건을 가진다.

 

이처럼 나라가 부강할 때 외세의 침략이 발생한다면 피해는 입고 멸망을 앞당기는 치명상을 입을지언정, 멸망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나라가 쇠약해져 역량이 저하될 경우 외세의 침략에도 쉽게 무너져 멸망하게 된다. 외세의 침략은 온전히 외적이 강대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이 아니다.

 

 

그러나 모든 체제 완결 사례에 대해 아는 것은 아니나, 한가지 재밌는 점을 찾을 수 있었다.

 

로마 공화정이 제정으로 바뀌었고, 독일 제국이 바이마르 공화국이 되었다, 다시 나치 독일이 되었으며, 러시아 제국 이후 소련이 되었으나 스탈린에 의해 부하린, 트로츠키 등이 축출되고 사실상 일인독재가 되는 등의 체제 변화를 살펴본 결과, 더 많은 사람들이 권력을 가지고 있던 체제가 무너지고 다른 체제가 되었을 경우 대체로 소수가 권력을 독점하는 체제로 변화하였다는 것이다.

 

그 반대 또한 존재한다 말할 수 있다. 독일 제국이 멸망하고 바이마르 공화국이 되었으며, 조선이 멸망 후 식민지를 격고 대한민국이 되기도 하였으며, 대부분의 민주국가가 되었을 경우 왕정 국가가 멸망한 뒤 찾아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마찬가지로 소수가 권력을 독점하는 체제에서 똑같이 소수가 권력을 독점하는 체제로 변화하기도 하는 등 정치적 권력 소유자의 비율이 크게 변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반대로 다수가 정치적 권력을 가진 경우, 그러한 체제가 한계에 달해 완결되고 다음 체제로 이행될 경우 높은 확률로 소수가 권력을 독점하는 체제로 변화한다는 것이다.

 

이는 난세에서 힘 있는 유력자, 주로 가장 강한 힘을 가진 자가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실력을 행사한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10.26과 12.12는 혼란스러운 대한민국을 안정시키기 위한다는 명분을 대외적으로 노출했지만 언제나 있을 법한 난세의 실력자가 등장한 사건이다. 그들은 자신의 힘, 혹은 정치력으로 국가를 장악하여 권력을 독점했다.

 

카이사르가 의도했으나 옥타비아누스가 완성한 권력의 독점이다. 스탈린이 부하린과 트로츠키를 축출하며 완성한 권력의 독점이며, 김일성이 갑산파, 소련파 등을 숙청하고 완성한 일인독재처럼 말이다. 바이마르 공화국은 민주적인 법률을 가지고 있었으나, 당시에 없었던 방어적 민주주의 개념으로 스스로를 보호하지 못하는 체제적 한계를 가지고 있었고, 이 부분이 문제가 되어 히틀러와 나치당은 권력을 독점하게 되었다.

 

모든 권력은 대중의 지지가 없으면 성립될 수 없다. 단지 그 비율과 권력 획득 방식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독재라면 다소 낮은 지지를 보유한다 하여도 힘과 공포로 체제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에도 왕정국가는 존재하고, 어떤 독재국가라 하더라도, 심지어 축출되어 살해 당하는 순간까지도 그를 지지하는 사람이 아예 없는 일은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소수에 의한 권력 독점 또한 그것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성립될 수 있다. 때로 시민들은 스스로의 권리를 권력자에게 진상한다. 그렇게 민주주의에서도 독재는 발생할 수 있다.

 

이것을 막기 위해서라면 해당 국가에 적용된 민주주의 체제와 그것이 구체적으로 작동하는 제도들이 최대한 오랫동안 지속 가능하게 끊임없이 수정되어야 하며, 그러한 수정이 가능하게끔 내부적 역량과 유연성을 유지시켜야 한다.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 좋은 것은 뭐든 흡수해야 하는 것처럼 체제의 존립을 유지시키기 위해서 좋은 것은 흡수해야 하며 적용에 문제가 없을 지 살펴야 한다. 무조건 좋아 보인다고 기존 제도와 현실성, 충돌 여부를 생각치 않고 도입한다면 현실에 맞지 않아 문제가 생길 것이고 그렇다고 구태의연한다면 발전은 있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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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관련된 내용은 다소 이해하기 쉽도록 서사적이기 때문에 전문적이고 정확한 내용을 담는 것은 아닙니다. 가령 신라의 멸망 같은 경우 골품제는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이유에서 제한적인 영향력만을 발휘했을 뿐이고 음서제의 경우 글에서도 언급했듯이 음서만으로 고위직을 꿰차거나 녹봉을 받는 건 아닙니다. 실제 능력이 있는 자들은 과거와 음서를 모두 했었습니다. 음서만으로 관직을 가지는 사람의 대우는 그다지 좋지 못했습니다.

 

로마의 경우 체제가 완결됐다고 하기보단 변화되었다고 하는 쪽에 더 가깝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변화의 폭이 커지더라도 말입니다.

 

조선 후기에 성리학은 교조화되었지만 생각만큼 대단히 교조적이게 되진 않았으며, 실학의 등장 등 꽤 유연한 편이었습니다. 오히려, 성리학이 조선에 악영향을 미친 것은 지나치게 실용적이고 실천적인 면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는데, 당장 쓸데없는 짓이면 무조건 다 필요 없다 취급하기 때문에 (중근세적인 시대적 사상의 한계를 감안하더라도) 성리학 외 다른 학문이 성장할 환경이 조성되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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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정 로마의 탄생은 전쟁과 토지의 문제에서 파생됩니다. 당시 로마는 수많은 지역에 정복전쟁을 진행했었고, 많은 성과를 보며 영광스러운 로마를 일궈내고 있었죠. 하지만 전쟁은 언제나 이기는 쪽에게도 손해가 발생하는 사업인지라, 정복전쟁으로 노예가 많아지고 땅이 넓어지면서 그 노예를 이용해 거대 농장을 경영하는 장원제도가 로마에도 도입됩니다.


이를 라티푼디움이라고 하는데, 원래 카르타고의 제도였으나 정복전쟁에 따라 로마에 도입되었죠. 전쟁이 계속되면 될 수록 더 많은 값싼 노예와 더 넓은 토지가 생기고, 라티푼디움으로 막대한 돈을 버는 장원주들은 더 많은 부를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른바 부익부 빈익빈이죠.


문제는 단순히 부자가 더 많은 돈을 번다는 개념이 아닙니다. 부자가 많은 돈을 벌어도 중산층 등 다수 서민이 먹고 사는데 문제가 없다면 사회적 혼란으로 이어지지 않죠. 전쟁이 지속되는 동안 자영농민들은 농지를 관리하지 못하게 되었고, 전쟁에 참여하지 않으면 휴한기가 길어 지속적인 생계유지가 어려웠습니다. 이는 자영농민의 몰락(중산층의 몰락)과 장원주의 성장이라는 결과로 이어지며 로마의 큰 갈등요소가 되었죠.


물론 로마인들도 멍청이들은 아니고, 이러한 문제는 충분히 인지했습니다. 따라서 농지법 개정을 중심으로 하는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이 대두되었으나, 문제는 당연히 그러한 법안을 입법하는 이들이 원로원 의원들이었고, 역시 당연하게도 원로원 의원 다수는 라티푼디움으로 큰 부를 형성한 대농장주라는 점이죠. 국가나 사회의 갈등요소이자 반드시 개혁해야할 것도 자신의 이익을 방해하거나, 손해를 입히게 되면 반대하는 것이 가진 자들의 속성이니만큼, 입안에 차질을 빚었죠.


머리수가 극소수에 불과해도 가진 게 많으면 그 자체로 권력이 되고 그 권력의 영향력과 행동력은 더 치명적이듯, 그라쿠스 형제는 개혁을 하기도 전에 모두 암살되었습니다. 그 이후로도 마리우스의 개혁안 또한 기각되었으며, 카이사르마저도 농지법을 통과시키자 원로원 의원들에게 암살되었죠.


그 결과 로마 공화정은 붕괴하며, 제정 로마가 등장하면서 우리가 흔히 아는 로마 제국이 탄생하게 됩니다.



이러한 역사는 단순히 로마의 사례만이 아니라, 토지와 농업, 그리고 그것을 통해 부를 얻는 모든 체제에서 비슷한 사례가 발생합니다. 가령 음서 제도와 공음전은 고려를 말아먹었는데, 이 역시 마찬가지로 기득권의 특권을 보장해주고, 토지를 기반으로 영속적인 부를 축적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면서 많은 숙청과 제도적인 문제를 고치면서 그나마 해소되었지요. 그러나 더 많은 토지와 더 많은 소작, 혹은 노비를 만들어 더 많은 부를 얻고자 하는 욕심은 조선에서도 있었고,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노비종부법을 시행하기도 했죠. 물론 기득권인 양반들이 온갖 방법으로 자발적으로 노비가 되게 하거나 하는 등 일천즉천으로 회귀했었습니다. 그나마 사정이 낫다는 점은 양란을 거치며 국가재정 문제 때문에 노비를 적잖이 양민으로 만들었고, 조선 후기로 가는 동안 꾸준히 노비의 비율이 줄었다는 점이죠.


중국 역시 한나라, 수나라도 그러한 장원과 같은 기득권의 넓은 토지로 만들어지는 대농장에 의해 농업과 경제의 양극화가 극심해지면서 혼란이 발생했죠. 그 이후 당부터 명, 청까지 여러 혼란과 제도가 있었지만 그러한 대농장 중심의 경제 구조가 힘을 쓰지 못하게 하면서 경제적인 문제에서 어느 정도 탈피하게 되었습니다.



세계사에서 대부분의 문제는 기득권과 일반 백성간의 양극화 현상이 벌어지면서 혼란스러워지고 내전이 터지든 반란이 터지든 내부 역량이 갉아먹히든 내부에서부터 붕괴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약해진 국가를 타국, 이민족에 의해 공격 받으며 멸망하곤 하죠. 대부분의 국가에서, 멸망 직전의 기득권은 언제나 부유했고, 많은 특권을 누렸습니다. 오히려 그 이전 시대보다 더 한 경우도 있을 정도죠.



이렇듯, 역사에서 보여주는 사례에서 기득권은 언제나 자신의 특권과 부를 놓으려 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나라가 멸망할 때까지도 자신의 것을 풀거나, 자신의 수익구조를 바꾸어 더 국가와 사회 전체에 이익이 되고 영속적인 발전이 가능하도록 하지 않습니다.


더 많이 가진 자에게 더 많은 세금을 부과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다른 모든 이유를 차지하고서라도, 아니. 다른 모든 이유는 별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렇게 해야만 지속 가능한 체제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더 많은 자에게 더 많이 걷지 않고, 그들의 거대한 수익구조를 견제하거나 억제하지 않는 한 국가의 부 대부분은 극소수 기득권에게 독점될 것이고, 양극화 현상에 따라 중산층은 붕괴하며, 몰락한 채 국가의 경제력은 그대로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중산층이 무너지면 국가 경제는 그대로 박살나죠. 그걸 막기 위해서라도 양극화 현상, 부익부 빈익빈은 반드시 잡혀야 하고,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반드시 막아야만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지속 불가능한 체제가 되어 다수 서민은 점점 더 살기 어려워지고 경제력을 잃으며, 극소수 기득권은 무제한적인 부와 특권을 누리되, 국가 경제는 박살나고 국가가 무너집니다.


어떤 이유가 되었든 부익부 빈익빈은 억제되어야 합니다. 단순히 많이 뜯는다는 개념이 아니라, 중산층이 충분히 유지 가능하거나 하위 계층이 부의 축적이 가능하게 하여 늘어날 수 있도록 하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그게 가능하다면 극소수의 기득권에게 세금을 덜 매기는 것 정도야 문제될 것은 아니죠.


하지만 그게 가능하려면 국가 전체 경제력이 커야하고, 무엇보다 그것이 잘 분배되어야만 합니다. 정확히는 노동자인 이들의 소득격차가 크지 않거나, 전체적으로 높아져서 저소득층이라고 해도 충분히 먹고 살며 예적금을 통해 자본을 축적하거나, 작더라도 투자를 하여 이익을 볼 수 있도록 하는 등 여유자금이 만들어지도록 해야 하죠.


그러나 한국은 그게 안 되고 있죠. 오히려 가진 자들이 위 이미지에서 말하는 역겨운 엄살을 부리며 자기만 힘들고 정부가 자기들만 죽이려 든다는 비양심적인 이기주의를 보여줍니다. 이미지에서도 가진 자의 눈물이 없는 자들의 눈물보다 더 찐하는 말이 있는데, 딱 그 꼴이죠.


불로소득은 커녕 집에 쌀이 없는 이들도 있는 마당에 수십억 건물 수채 + 월세도 한달 1000이상인데 거기서 몇백 세금으로 낸다고 누굴 죽이네 먹고 살기 어렵네 하는 거 보면 그저 역겨울 뿐입니다. 그렇지 않을 수가 없죠. 심지어 종부세는 내는 사람도 극소수이고, 그마저도 1년에 한번 냅니다. 근데 그거 낸다고 죽겠다고 한다니. 우습죠. 


이런 이유로 한국이 지속 가능한 체제가 되려면 수십년간 더 극심해지고 있는 양극화 현상을 잡아야 하고, 이는 다른 거 다 필요 없이 그냥 기득권에게 더 많은 세금을 걷기만 하면 됩니다. 물론 체납자에 대한 강경한 추징이 동반되어야 하죠.


물론 기득권자들은 그걸 반기지 않을 거고, 반대할 것입니다. 기득권들도 기득권 나름이고, 다 똑같은 경제, 소득수준을 가진 것도 아니긴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사정을 다 봐주면 세금 못 걷을 거고, 목적을 이루지도 못하겠죠. 어떤 명분과 이유로도 그들은 납득하지 못할 거고, 정당하다고 여기지도 않을 겁니다.


문제가 바로 그것인데, 어떤 명분과 이유와 철학으로도 그들을 설득하거나 협조를 이끌어낼 수는 없다는 겁니다. 로마의 예시를 다시 보십시오. 그들은 어떤 개혁안도 받아들이지 않았고, 암살과 비협조, 반대로 방해했고 그것은 대체로 성공했습니다. 중국과 고려의 예시에서도 그들은 국가가 망할지언정 자신의 특권과 경제구조에 양보한 것이 없었죠.


그들이 자신의 특권을 내려놓거나, 무언가를 양보할 때는 자신들의 목이 날아갈 수 있을 때 뿐입니다. 가령 강력한 왕권과, 그 왕권을 보장해주는 강력한 무력이 귀족 등 기득권자들 목에 걸려 있다면, 그리고 적절한 명분 하나만 있다면 그들은 반대하지 못합니다. 왕권과 무력이 없다면 그들은 어떻게든 반대하고 발목 잡고 무력화했을 겁니다. 실제 역사가 그러하니까요.


한국과 같은 민주주의 국가에서, 거대 양당이 국정을 주도하고, 국민 절반의 이념이 대립하는 국가에서, 무력을 사용할 수도 없고 오직 민주적 원칙과 제도만 가지고 일을 진행해야 한다면 방법은 딱 하나 뿐입니다. 선거를 통해서 지속 가능한 체제를 유지시킬 수 있는 집단을 만드는 거죠. 어떠한 명분과 이유와 철학을 가져오든 기득권들은 반대할 거고 협조하지 않을 거고, 시도를 무력화시킬 것이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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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환빠로 대표되는 유사역사학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만약 모르신다면 초록불님 블로그에서 (http://orumi.egloos.com/) 그들이 누구이며 어떤 주장을 하는지 일독을 권합니다.



아주 오래전에 밝혔듯이 전 지식인 답변 활동을 합니다, 특히 역사 관련에서 많은 답변을 다는게 취미활동인데, 그곳에 있다보면 참 재밌는 주장을 가끔씩 듣곤 합니다. 아래는 그 사례 중 생각나는 몇가지를 정리한 겁니다.




1. 로마 vs 고구려.


물론 로마가 고구려를 이길 것이라는건 당연한 이야기죠, 국력의 차이는 로마가 월등하니까요. 당연한 겁니다. 근데 무엇이 문제냐하면, 주장은 물론 주장의 전개가 참으로 황당하기 그지 없다는 겁니다..


먼저, 로마와 싸울 대상이 왜 하필 고구려냐는 겁니다. 당시에 중국에는 한나라, 한제국이라는 동서양 양대제국이 떡하니 있었고, 주로 if논쟁으로 로마와 한나라가 싸운다면 이라는 떡밥이 역사 커뮤니티에서도 간혹 다뤄지는 요소임을 생각해보면, 거의 어그로에 가까운 비교대상이 아닌가 합니다. 주장 자체가 요상하죠.


게다가 더 웃긴 것은, 머리속으로 시뮬레이션 해놓고 로마가 이긴다는 주장을 피는 것인데, 이건 일단 로마가 이긴다는 것을 먼저 전제해놓은 뒤 자기 멋대로 토탈워 돌려서 이긴다고 소설을 써놓는 격입니다. 왜 거기에 고구려군(혹은 로마군)이 있느냐는 별로 중요한게 아니라고 쳐도, 로마군이 어떻게 모여서 어떻게 움직이고 어떤 대응과 공격을 통해 이렇게 저렇게 고구려군을 전멸시킨다! 라는 주장을 매우 진지하게 주장하는 꼴을 보면.. 되려 놀랍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기서 멈추면 제일 먼저 꼽은 이유가 없겠죠. 로마군 10만 vs 고구려군 100만, 한술 더 떠 로마군 10만 vs 고구려군 5000만대군 드립을 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조건 로마군이 이긴다는 주장을 정말, 진심으로, 진지하게, 상상 시뮬레이션을 돌려서 질문을 올리고 있습니다. 


네, 질문입니다. 그게 질문이에요. 미리 머리속에 결과를 설정해놓고 질문을 올리는 겁니다. 상식적으로 5000만 대군이 산 위에서 오줌만 갈겨도 로마군 10만명은 수장당해 죽을 판인데 어떻게든 이긴다고 주장을 펴는 겁니다. 그것도 압승이라는 단어를 강조까지 해가면서 말이죠. 심지어 로마군은 화약무기가 있다나 콜타르 등으로 천연 화합물 대포를 사용한다나.. 게다가 무슨 사거리 1200m 카타발리스타(캐터펄트도 아니고 발리스타도 아닙니다. 심지어 전 1200m사거리의 카타발리스타라는게 나온다는 사료까지 찾아봤으나, 1200m의 근거조차 찾지 못했습니다.)라는 무기로 다 죽인다고 하는데 참.. 게다가 10만명이면 이런 공성무기가 1만대는 있다고 합니다.


하도 황당하고 어이없는 주장, 말도 안 되는 소설을 뱉어내고, 이런게 몇차례에 걸쳐서 반복되는데, 나중에는 답이 없다는걸 깨닫고 그곳에서 답변활동하는 모두가 손을 때게 되죠. 물론 그 치도 금방 사라졌지만.. 롬뽕도 참 답이 없다는걸 다시금 깨닫게 해줬습니다.



2. 거란, 여진족 = 한민족


중국이 몽골의 원나라 등을 자기네 역사라고 주장하는 것을 예로 들면서 두 민족을 한민족 내지는 친척이라고 주장합니다. 더 놀라운 것은 이런 주장을 펴는 사람이 국사, 세계사 분야 우수 답변가라는 거지요. 주장을 제대로 들어본 지가 꽤 오래되서 잘 기억은 안 납니다만, 하여튼 만주, 연해주 지방에서 살던 이들이고 우리 혈족이다, 중국보다 우리에 가깝다 같은 주장을 합니다. 저런거 말고도 우리 역사쪽과 연관된 주장도 있긴 있었는데 잘 기억은 나지 않는군요. 하여간 참 황당한 주장이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그렇게 주장합니다.



3. 발해는 대진제국!


... 솔까 환빠를 위시한 유사역사가들은 주로 고조선이나 고구려, 혹은 고려를 찬양하기 마련인데 참 재밌게도 발해에 빠진 사람이 있습니다. 발해뽕이라는 걸까요? 발해는 원래 국명이 진, 혹은 진국이라 불렸습니다. 이후 국명을 발해로 바꿨고, 이게 정식명칭이 맞죠.


근데 이 친구는 삼국사기, 삼국유사를 위서로 보고 환단고기를 진서로 보는 친구인데, 하여튼 그러면서 발해를 대진제국이라고 부릅니다. 대진국도 아니고 대진제국, 알다시피 발해는 외왕내제도 아니기 때문에 황제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제국이라는 표현을 쓰는건 역사에 대한 기본, 상식이 부족하다는 거겠죠; 大대자도 왜 붙히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영토가 넓어서? 흠, 거의 땅만 넓은 수준이고 그 조차도 영토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아서 각 나라마다 자기네 정치적 입장에 따라 그어놓은 영토에다 인구밀도도 낮고 어느 지역은 직접통치조차 안 됬죠.


그런 나라에 대, 제국이라는 단어를 붙혀가며 빨아가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솔까 질문자가 발해에 대한 지식이 얼마나 있는지는 고사하고 말이죠.


최근에는 이 발해, 대진제국(...)과 비잔티움 제국이 외교관계, 교역을 맺었냐는 질문을 올리는데, 이거 진짜 생각을 하고 올리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중국과도 못한 외교관계를 뭔 발해랑..-0-;;


아참, 환단고기를 진서에 삼국사기, 유사를 위서라고 보는 마당에 자신을 환빠로 매도하지 말라고 하더군요. 재밌는 친굽니다.




뭐.. 지금 생각해보려니 막상 사례는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가끔가다 환단고기는 무엇이냐, 환단고기를 뒷받침하는 고고학적 증거는 얼마나 있냐 같은 시덥잖은 질문들이야 자주 올라오긴 합니다만 별로 중요한 것도 아니고 관심가질 것도 아니죠.


하여간 이상한 주장 참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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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세계사 파트에서 배울 수 있는 카노사의 굴욕은 대충 다음과 같은 이야기로 설명되어있습니다.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원래 황제에게 있었던 성직자 임명권을 교황인 자신에게 가져와서 교황권을 강하게 하려 했으나 신성 로마 제국의 하인리히 4세가 반발했고, 그에 따라 그레고리오 7세는 하인리히를 파문 시켜버리고 그 이후 교황의 권력이 강해졌다 십자군 때 들어서 서서히 약해진다.. 라고 말이죠.


이에 대한 기본 설명이고, 조금 더 심화해서 알아보자면, 하인리히 4세가 서임권을 내놓지 못하겠다고 한 이유는 오토 대제 이후로 실시된 제국 교회 정책 때문인데, 성직자들에게 땅을 하사하여 자신에게 충성하고 다른 봉건영주들과 대립시킬 수 있는 성직 제후들을 여럿 만들었습니다. 이런 정책은 기독교를 보호한다는 명분과 더불어 각 주교들에게 충성을 얻을 수 있었으며 기존의 봉건 제후들에 맞서게 할 수도 있었죠. 게다가 성직 제후가 죽으면 봉토가 세습되는 여타 봉건 제후와는 달리 황제 자신에게 돌아오므로 남는 장사이자 당연히 황제의 권한을 높히는 도구이기도 하죠.


하지만 클뤼니 수도원 출신의 원칙주의자이자 교회개혁을 주장한 그레고리오 7세가 이것을 금지하자 하인리히 4세는 당연하게도 반발합니다. 이것에 대해 그레고리오 7세는 파문을 날려버리고 파문을 당한 하인리히 4세는 기독교도도 아니고 기독교 왕국의 왕도 아니게 되버리는데, 기독교가 세상의 근본원칙이자 이데올로기이기도 한 그 시절에 이것은 그러한 파문을 씹을 만큼의 물리적, 정치적 실력이 있지 않고서야 큰 문제가 되버립니다.


미디블 토탈워할 때 교황에게 파문 당하면 다른 국가가 막 때리고 그러잖아요? 딱 그런 꼴이라고나 할까요. 다르긴 달라도 왕의 정치적인 생명을 끝장내버리는 조치이기도 합니다.


이런 사건이 터짐에 따라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서는 황제파와 교황파로 나뉘어 집니다. 교황의 파문 선언 이후에 신롬 내부의 제후들과 성직자들이 교황 편으로 붙기도 했고, 이미 많은 제후들은 하인리히 4세의 정책에 불만이 컸기 때문에 파문의 여파는 더욱 커졌죠. 심지어 황제파에 붙은 제후들도 대다수 이탈하거나 충성을 바치던 자들도 교황에게 사죄하라는 압박을 넣기도 했죠. 제후들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아예 새로운 황제를 뽑을 움직임까지 보이자 결국 하인리히 4세는 교황이 있는 카노사 성을 홀로 방문하여 3일간 눈 밭에서 용서를 구합니다. 


이에 교황은 황제를 용서하고 미사에 참여시켜 파문 선언을 취소했죠. 


이제부터가 카노사의 굴욕 비하인드 스토리인데, 카노사의 굴욕은 하인리히 4세의 승리라 평해집니다. 사실 그레고리우스 7세는 카노사의 굴욕 사건 이전 아우스크부르크 회의를 소집하여  황제에 반대하는 귀족들을 한방에 보내버릴 찬스를 가지고 있었습니다만, 황제가 재빨리 사죄해버리자 이 기회를 놓쳐버리고 말았죠.


이후 제국으로 돌아온 하인리히 4세는 파문을 명분으로 하여금 자신에게 대항하던 귀족들의 반란을 진압하며 힘을 기르는데 주력합니다. 당시 귀족 제후들은 그를 황제로 인정치 않고 슈바벤공 루돌프를 황제로 인정하던 세력이 있었기에 하인리히 4세는 3년간 힘을 기르며 반란 세력을 타도하는데 성공하죠. 이 슈베반공도 사실 참 은혜를 원수로 갚은 녀석인데, 하인리히 4세의 어머니인 아그네스가 그에게 슈바벤 공령을 직할령으로 주었던만 황제 자리를 넘보고..


하튼, 굴욕 사건 이후 3년이 지난 1080년에 하인리히 4세는 어느 정도 신성 로마 제국에서 강력한 왕권을 안정시켜 가지게 되었고

이에 반해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는 교회 개혁 운동에 대한 반발로 신롬의 많은 성직자들에게서 반감을 사고 있었죠. 그러던 중 같은 해에 루돌프와 하인리히 4세를 중재하려던 교황은 하인리히 4세의 괘씸한 행각에 분노하고 다시 한번 파문과 동시에 폐위를 선언합니다.


그러나 많은 성직자에게 반감을 산 교황과 국내에서 실력을 기르는 황제와의 실질적인 물리력의 차이를 무시할 수는 없는 법. 하인리히 4세는 아예 따로 회의를 소집하여 현 교황을 강제로  폐위시키고 클레멘스 3세를 교황에 선출하려는 목적으로 로마로 쳐들어갑니다. 이에 따라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는 로마에서 도망치고 남부 이탈리아에 가서 5년간 살다 죽어버립니다. 당시 남부 이탈리아는 노르만족이 지배하고 있었는데, 그곳의 지배자인 로베르트 기스카르도 로마에서 교황을 구출하려다 죽을 뻔 했다고 하죠.


이렇게 하인리히 4세에 의해 옹립된 새 교황 클레멘스 3세에게 황제의 면류관을 받게 되지만 이렇게 되니 이탈리아 남부와 북부에 2명의 교황이 있게 되는 촌극도 벌어지게 됩니다.


이리하여 교황의 승리이자 교황권의 상징으로 알려진 카노사의 굴욕은 사실 하인리히 4세, 신성 로마제국 황제의 승리로 끝이 나버립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과는 조금 다른 이야기죠. 게다가 더 재밌는 점은 그 하인리히 4세도 자신의 장남 콘라드의 반란으로 차남 하인리히 5세의 반란으로 쫓겨나 죽게 되버립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교황권의 강화는 그보다 이후인 보름스 협약으로 교권의 우위를 인정 하면서부터죠.



한 가지 더 내용을 추가하자면, 하인리히 3세의 치세 때는 황제권의 최절정기로서 자기 마음대로 교황을 폐위하는 게 자주 벌어졌다는 점이죠. 아예 교황은 황제의 신하였던 수준의 시절이었습니다. 황제가 교회를 등에 업고 자신에게 반역적인 세력들을 평정하기도 했죠. 그렇지만 그는 클뤼니 수도원의 개혁 운동을 지지하였고, 이는 역으로 교회 세력들이 황권에 감히 도전하는 초석을 만들어버리게 됩니다.


심지어 그는 아직 어린 아들을 남기고 죽게 됐고 그 아들은 6살에 황제가 되어 결국 어머니 아그네스가 섭정으로 통치를 하나, 문제는 하인리히 3세가 넓혀 놓은 직할령들을 공작들의 환심을 사고자 뿌려대며 황제권이 약화되고 제후들이 황제를 업신여기게 되며, 하인리히 3세에게 가족을 잃은 로렌 지방의 프리드리히와 마틸다는 그와 그의 가문에 칼을 갈았고, 나중엔 마틸다 여사의 뒷공작으로 장남에게 이탈리아 왕의 자리를 미끼로 아버지 하인리히 4세에게 대항하게 만듭니다. 그렇게 자신의 아들에게 폐위 당하기도 합니다. 이후 한번 더 자신의 아들 하인리히 5세 또한 마틸다의 공작에 넘어가 아버지를 등지고 아예 납치 당해 폐위 되는 경험을 겪게 되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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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고대사에서 하나의 본좌로 여겨지는 대제국이었던 로마. 그 로마에 대한 수식어로 위대한이라는 단어가 붙는데, 그 로마가 위대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그 드넓은 영토와 도로? 강대한 군사력? 정치체제? 사회문화?


사실 로마가 진정 위대한 이유는 바로 법률에 있습니다. 


만민법과 시민법은 로마의 전국적인 법률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게 현대 국제법의 조상이라고 할 수 있죠. 사실 법학이라는게 꽤 오랜 전통을 가진 학문이고, 이 법학이야말로 로마의 진정한 유산이라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전국적인 법이라는 개념이 사실 국왕과 같은 통치자의 명령이 곧 법이었던 것이 근대 이전의 일반적인 예시였고, 지역이나 시대를 불문하고 국왕같은 통치자의 명령이나 칙령은 그 자체로 거진 전국적인 법이라고 할 수 있었죠. 


그렇다고 명령과 같은 불문법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암흑시대 게르만 왕국시대부터 게르만인들은 성문화된 자기 부족의 법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 법전은 암흑시대 게르만 전통 부족 관습법과 로마법을 토대로 만들어졌죠. 법이라는 게 통치의 근간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리 허술하더라도 시대나 지역을 구분짓지 않고 통치라는 것이 이루어지는 모든 곳에서 존재하기 마련이죠.


그런데 재밌는 건, 중세의 봉건시대같은 경우 봉건제도의 특성상 통일된 전국적인 법이 나타나지 못했던 시기였습니다. 동로마는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이 있었지만, 비교적 강한 중앙집권화를 보여줬던 프랑크 제국이 있었을 때까진 전국적 영향력을 지닌 살리카 법과 법원이 존재했으나 그 프랑크 제국이 무너지고 현재의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에 해당되는 지역의 3개의 국가로 쪼개지기 시작하며 전국적인 법이라는 개념은 사라지고 지역에 따라 법이 집행되던 시기였죠. 중세가 끝나고 봉건제가 약화되면서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지는 시기부터 다시 전국적인 법 개념이 등장하게 되는데, 중세 말기와 르네상스 시기를 거쳐 절대왕정이 형성되는 시기에 강력한 왕권을 가진 국왕은 그들의 강한 권력을 확립시키고 굳히기 위해 대대적으로, 전국적으로 통용이 될 법이 필요해졌습니다.


그런 법을 만들기 위해 찾은 것이 바로 고대의 로마법인데, 한마디로 고대의 로마제국의 법을 가져와서 자기네 방식으로 고친 뒤 적용하겠다는 겁니다. 이게 그 로마법 계수라는 것이죠. 이 로마법 계수를 통해 봉건적인 요소들이 사라지고 절대주의가 성립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더불어 이때 사용된 로마법이 바로 유스티니아누스의 로마법 대전이었습니다. 그래서 유스티니아누스의 로마법 대전 편찬이 그의 업적에서 가장 대단한 것으로 꼽히는 이유라고 합니다.


로마법의 계수는 15세기~19세기까지 지속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법학계에선 근세 전기의 계수는 전기계수, 18세기 이후의 계수를 후기계수라고 부르는데, 시민 혁명과 민족국가, 근대국가가 성립되며 18~19세기에 본격적으로 근대적인 법적편찬운동이 시작됩니다. 나폴레옹 몰락 이후 1871년 프로이센의 독일제국이 성립함과 동시에 독일의 통일법전이 편찬되기 시작하는데 이것이 바로 오늘날 대륙법계 국가들의 민법전의 기초라고 할 수 있죠. 그리고 이 (아직은 미완성이었던 독일의)법과 프랑스 민법전을 일본에서 수입하여 자기네 민법전으로 삼고 이후 우리나라는 완성된 독일의 민법과 일본의 민법을 수입하여 우리나라의 민법을 만듭니다.


이를 연속적으로 보게 될 시 현재 거의 전세계 법률은 로마에서부터 시작되는 건데, 현재도 이 로마법의 영향을 짙게 가지고 있는 것이 우리가 사용하는 법들입니다. 로마가 망한지 500년, 길게는 천년이나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로마의 법은 근대를 넘어 현대의 지금 시대까지 그 영향이 진하게 남아있다는 것을 본다면, 괜히 로마가 위대하다는 소리를 듣는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실 겁니다. 단지 영토가 넓고 강한 군사력을 지녔고 멋지고 웅장한 건물을 지었다고 위대한 것이 아니라, 후대의 수많은 민족, 국가에게 강렬한 영향을 끊임없이 미칠 수 있게 하는게 진짜 위대한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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