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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며,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 - E.Kant
by Ko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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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세계사 파트에서 배울 수 있는 카노사의 굴욕은 대충 다음과 같은 이야기로 설명되어있습니다.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원래 황제에게 있었던 성직자 임명권을 교황인 자신에게 가져와서 교황권을 강하게 하려 했으나 신성 로마 제국의 하인리히 4세가 반발했고, 그에 따라 그레고리오 7세는 하인리히를 파문 시켜버리고 그 이후 교황의 권력이 강해졌다 십자군 때 들어서 서서히 약해진다.. 라고 말이죠.


이에 대한 기본 설명이고, 조금 더 심화해서 알아보자면, 하인리히 4세가 서임권을 내놓지 못하겠다고 한 이유는 오토 대제 이후로 실시된 제국 교회 정책 때문인데, 성직자들에게 땅을 하사하여 자신에게 충성하고 다른 봉건영주들과 대립시킬 수 있는 성직 제후들을 여럿 만들었습니다. 이런 정책은 기독교를 보호한다는 명분과 더불어 각 주교들에게 충성을 얻을 수 있었으며 기존의 봉건 제후들에 맞서게 할 수도 있었죠. 게다가 성직 제후가 죽으면 봉토가 세습되는 여타 봉건 제후와는 달리 황제 자신에게 돌아오므로 남는 장사이자 당연히 황제의 권한을 높히는 도구이기도 하죠.


하지만 클뤼니 수도원 출신의 원칙주의자이자 교회개혁을 주장한 그레고리오 7세가 이것을 금지하자 하인리히 4세는 당연하게도 반발합니다. 이것에 대해 그레고리오 7세는 파문을 날려버리고 파문을 당한 하인리히 4세는 기독교도도 아니고 기독교 왕국의 왕도 아니게 되버리는데, 기독교가 세상의 근본원칙이자 이데올로기이기도 한 그 시절에 이것은 그러한 파문을 씹을 만큼의 물리적, 정치적 실력이 있지 않고서야 큰 문제가 되버립니다.


미디블 토탈워할 때 교황에게 파문 당하면 다른 국가가 막 때리고 그러잖아요? 딱 그런 꼴이라고나 할까요. 다르긴 달라도 왕의 정치적인 생명을 끝장내버리는 조치이기도 합니다.


이런 사건이 터짐에 따라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서는 황제파와 교황파로 나뉘어 집니다. 교황의 파문 선언 이후에 신롬 내부의 제후들과 성직자들이 교황 편으로 붙기도 했고, 이미 많은 제후들은 하인리히 4세의 정책에 불만이 컸기 때문에 파문의 여파는 더욱 커졌죠. 심지어 황제파에 붙은 제후들도 대다수 이탈하거나 충성을 바치던 자들도 교황에게 사죄하라는 압박을 넣기도 했죠. 제후들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아예 새로운 황제를 뽑을 움직임까지 보이자 결국 하인리히 4세는 교황이 있는 카노사 성을 홀로 방문하여 3일간 눈 밭에서 용서를 구합니다. 


이에 교황은 황제를 용서하고 미사에 참여시켜 파문 선언을 취소했죠. 


이제부터가 카노사의 굴욕 비하인드 스토리인데, 카노사의 굴욕은 하인리히 4세의 승리라 평해집니다. 사실 그레고리우스 7세는 카노사의 굴욕 사건 이전 아우스크부르크 회의를 소집하여  황제에 반대하는 귀족들을 한방에 보내버릴 찬스를 가지고 있었습니다만, 황제가 재빨리 사죄해버리자 이 기회를 놓쳐버리고 말았죠.


이후 제국으로 돌아온 하인리히 4세는 파문을 명분으로 하여금 자신에게 대항하던 귀족들의 반란을 진압하며 힘을 기르는데 주력합니다. 당시 귀족 제후들은 그를 황제로 인정치 않고 슈바벤공 루돌프를 황제로 인정하던 세력이 있었기에 하인리히 4세는 3년간 힘을 기르며 반란 세력을 타도하는데 성공하죠. 이 슈베반공도 사실 참 은혜를 원수로 갚은 녀석인데, 하인리히 4세의 어머니인 아그네스가 그에게 슈바벤 공령을 직할령으로 주었던만 황제 자리를 넘보고..


하튼, 굴욕 사건 이후 3년이 지난 1080년에 하인리히 4세는 어느 정도 신성 로마 제국에서 강력한 왕권을 안정시켜 가지게 되었고

이에 반해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는 교회 개혁 운동에 대한 반발로 신롬의 많은 성직자들에게서 반감을 사고 있었죠. 그러던 중 같은 해에 루돌프와 하인리히 4세를 중재하려던 교황은 하인리히 4세의 괘씸한 행각에 분노하고 다시 한번 파문과 동시에 폐위를 선언합니다.


그러나 많은 성직자에게 반감을 산 교황과 국내에서 실력을 기르는 황제와의 실질적인 물리력의 차이를 무시할 수는 없는 법. 하인리히 4세는 아예 따로 회의를 소집하여 현 교황을 강제로  폐위시키고 클레멘스 3세를 교황에 선출하려는 목적으로 로마로 쳐들어갑니다. 이에 따라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는 로마에서 도망치고 남부 이탈리아에 가서 5년간 살다 죽어버립니다. 당시 남부 이탈리아는 노르만족이 지배하고 있었는데, 그곳의 지배자인 로베르트 기스카르도 로마에서 교황을 구출하려다 죽을 뻔 했다고 하죠.


이렇게 하인리히 4세에 의해 옹립된 새 교황 클레멘스 3세에게 황제의 면류관을 받게 되지만 이렇게 되니 이탈리아 남부와 북부에 2명의 교황이 있게 되는 촌극도 벌어지게 됩니다.


이리하여 교황의 승리이자 교황권의 상징으로 알려진 카노사의 굴욕은 사실 하인리히 4세, 신성 로마제국 황제의 승리로 끝이 나버립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과는 조금 다른 이야기죠. 게다가 더 재밌는 점은 그 하인리히 4세도 자신의 장남 콘라드의 반란으로 차남 하인리히 5세의 반란으로 쫓겨나 죽게 되버립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교황권의 강화는 그보다 이후인 보름스 협약으로 교권의 우위를 인정 하면서부터죠.



한 가지 더 내용을 추가하자면, 하인리히 3세의 치세 때는 황제권의 최절정기로서 자기 마음대로 교황을 폐위하는 게 자주 벌어졌다는 점이죠. 아예 교황은 황제의 신하였던 수준의 시절이었습니다. 황제가 교회를 등에 업고 자신에게 반역적인 세력들을 평정하기도 했죠. 그렇지만 그는 클뤼니 수도원의 개혁 운동을 지지하였고, 이는 역으로 교회 세력들이 황권에 감히 도전하는 초석을 만들어버리게 됩니다.


심지어 그는 아직 어린 아들을 남기고 죽게 됐고 그 아들은 6살에 황제가 되어 결국 어머니 아그네스가 섭정으로 통치를 하나, 문제는 하인리히 3세가 넓혀 놓은 직할령들을 공작들의 환심을 사고자 뿌려대며 황제권이 약화되고 제후들이 황제를 업신여기게 되며, 하인리히 3세에게 가족을 잃은 로렌 지방의 프리드리히와 마틸다는 그와 그의 가문에 칼을 갈았고, 나중엔 마틸다 여사의 뒷공작으로 장남에게 이탈리아 왕의 자리를 미끼로 아버지 하인리히 4세에게 대항하게 만듭니다. 그렇게 자신의 아들에게 폐위 당하기도 합니다. 이후 한번 더 자신의 아들 하인리히 5세 또한 마틸다의 공작에 넘어가 아버지를 등지고 아예 납치 당해 폐위 되는 경험을 겪게 되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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