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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며,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 - E.Kant
by Ko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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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4'에 해당되는 글 6건

  1. 2022.04.22
    시위는 왜 불편해야 하는가. (3)
  2. 2022.04.21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과 방어적 민주주의의 개념. 보호받아야할 탄압자의 구분. (2)
  3. 2022.04.18
    부패한 사회가 강할 수 있는가.
  4. 2022.04.07
    2030이 복지보다 성장을 추구하는 이유.
  5. 2022.04.05
    어휘력과 지적 능력에 대하여.
  6. 2022.04.05
    왜 저소득층은 독재자-극단주의 세력을 선호하는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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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30 - [취미/이야기] - 아프리카의 시위 민주주의.

 

 

전국 장애인 차별 철폐연대에서 지하철 시위를 한다고 사람들이 불편해하고, 욕을 합니다. 그건 당연히 그럴 수 있습니다. 근데 왜 시위를 사람들 불편하게 하냐며 욕하더군요. 근데 사실, 시위의 목적 중 하나가 바로 사람들 불편하게 하는 겁니다.

 

애초에 시위가 왜 발생하느냐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시위란 무언가를 바꾸기 위해 밖에 나가 직접적으로 요구하는 겁니다. 어느 한 사람에게, 어떤 단체에게 요구했는데 들어주지 않았다면 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요구하게 만드는 게 시위의 목적입니다. 시위는 내 목소리를 들어달라는 요구이고,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달라는 요구예요. 내 말이 타당하다면 도와달라고요.

 

전장연의 과거 활동내역이 어떻든, 지금 그들이 주장하는 건 장애인 이동권 문제입니다. 이에 대해 처음 들어본 사람들도 많을 겁니다. 애초에 관심이 없었을테니까요. 그리고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그들이 시위를 하는 겁니다. 장애인들은 어딘가로 이동하려면 돈도 많이 들고 시간도, 품도 많이 드니까 이걸 좀 해결해달라고, 편의를 개선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요구하는 겁니다.

 

 

애초에 정부에, 국가기관에 요구했는데도 들어주지 않으니까 밖에 나와서 사람들 불편하게 하는 거고요. 왜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냐고요? 그래야 들어주니까요. 불편하지 않았으면 누가 관심을 가져줍니까. 어디 산골짜기로 들어가서 나무와 개울 앞에서 목 터져라 소리질러봐야 기사에 한 줄 나옵니까? 거기서 누가 뭘 하고 있는지 세상은 몰라요. 아무도 들어주는 사람이 없으니까요.

 

그래서 사람들은 거리로 나오고, 교통을 막고, 고성을 내고, 시민들을 불편하게 하는 겁니다. 그래야 관심을 가지거든요. 사람들의 역할은 저들이 우릴 불편하게 하니까 개새끼고 개새끼들은 몽둥이로 때려서 내쫓아야 한다는 게 아니라, 그 사람들이 왜 저런 시위를 하는 거고, 그들이 하는 말은 무엇이며, 왜 밖에 나와서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면서까지 시위를 하는가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시위가 불법이고, 사람들 불편하게 하고, 피해를 발생시키는 건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절차가 신념보다 위에 있으면 안 되는 것처럼, 다소 문제가 있더라도 그들의 주장과 요구가 형해화되는 건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그들이 하는 말이 옳다면 그 표현 방법이 잘못됐더라도 그에 대해 타당성을 인정해야 해요. 즉, 생각해봐야할 문제라는 겁니다.

 

 

시위하는 사람들의 주장이 옳고 타당하다면 그에 대해 같이 요구해줘야 합니다. 그냥 그에 대해 관심을 가져주기만 해도 되요. 인터넷에 한번 검색해보고, 관련 기사 하나 찾아서 보기만 해도 그들에게 도움이 됩니다. 시민들의 관심과 그 이슈에 관심이 몰리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결정권자들에게 눈에 보이는 수치로 다가오는 요구가 됩니다. 왜냐고요? 그게 민주주의니까요. 시민들이 요구하면, 그들은 요구에 부응해야 합니다. 그것이 타당하지 않기에 들어줄 수 없다면 그 또한 대의 민주주의고요.

 

 

건전한 민주사회라면 소수자, 약자의 시위에 대해 '왜'를 생각하고, 그것이 타당한가를 먼저 따져야 합니다. 우리가 관심이 없었던 사각지대에서 어떠한 불편과 문제가 있었는지를 알아야 하거든요. 절차와 제도는 중요하지만 그것이 약자를 위해 기능하지 않을 때 저항할 수 있는 것도 하나의 방식입니다.

장애인 단체가 불편을 야기하며 시위를 했을 때, 그것이 타당하다면 그들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어 지적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가장 올바르고 적절한 해법입니다. 그렇게 사회가 진보하는 거고요. 그렇지 않고 지적질, 훈수질, 비난질만 한다면 진보할 수 없어요.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없는데 그런 행동이 어떻게 정의롭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용률 낮은 교외 버스정류장이 불편하다고 의자 세워달라, 비를 피할 수 있게 지붕을 설치해달라. 시에 요구하면 실제로 들어줍니다. 제가 경험해본 거거든요. 장애인들이 이동하기 불편하다고 요구한다면 들어줄 수도 있어요. 불가능한 거 아닙니다.

 

그들이 시위하면서 출근도 제대로 못하겠고, 불편하고, 시끄럽다면 그들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보고, 그것이 타당하다고 생각된다면 그들의 목소리에 힘을 실어주면 됩니다. 문제가 해결되면, 그들은 자연스럽게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들은 자신이 요구하는 결과를 달성했음에도 세상이 끝날 때까지 시위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않아요. 시끄럽다고 쫓아내는 건 올바른 게 아닙니다. 그들이 왜 시위를 하는지를 따지는 게 옳고, 그들의 요구를 따지는 게 올바른 거죠.

 

그래서 시위자들은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 겁니다. 그래야 들어주고 관심 가져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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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https:// BlogIcon ㅇㅇ 2022.05.11 00:57 address edit/delete reply

    저도 이 문제에 대해 정말 오래 고민해봤는데 결국 어느 쪽이 정답인지 모르겠습니다. 말씀하셨듯 장애인의 이동권 문제는 하루 빨리 개선되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장애인 단체에서 국가와 사회에 여러번 호소했지만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방향으로 시위 방향이 바뀐 것 또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시위 방법이 옳은가?' 에 대한 대답으로 즉시 "예"라고 답할 수는 없었습니다. 제가 장애인 단체의 지하철 시위 소식을 처음으로 접한건 에브리타임(이하 에타)이라는 학교 커뮤니티에서였습니다. 어느날 아침 저희 학교 에타에 이런 글들이 속속 올라왔습니다. '지하철 시위 때문에 지각하게 생겼는데 지각사유 인정 될까요?'. 이 상황을 마주한 뒤 제게 처음 든 생각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권익을 위해 타인에게 피해를 입히는 행위는 정당화 될 수 있을까?'. 물론 장애인 단체가 사익을 추구하고자 시위를 벌인 것은 아닙니다. 분명 공익을 위한 시위였으며 주장하는 내용이 사회를 좋은 방향으로 이끌 것은 틀림 없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피해를 입는 무고한 이들이 발생한다면 과연 정당화 될 수 있는 행위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이 의문은 지금도 해결되지 않고 남아있습니다. 이에 선생님의 고견을 여쭙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 Favicon of https://konn.tistory.com BlogIcon Konn 2022.05.11 15:21 신고 address edit/delete

      가급적 불편하게 하되, 피해는 주지 않는 쪽으로 하는 게 좋기야 하겠죠. 하지만 시위는 본질적으로 타인을 불편하게 하고 피해를 줘야 합니다. 그게 방법론이에요.

      우리가 선진국이라 말하는 그 서구라고 해서 이게 다른 게 아닙니다. 오히려 이쪽에서 시위가 크게 나면 약탈과 차량 방화까지 같이 발생하는 경우도 흔할 정도고요. 이 경우엔 시위자들 사이로 시위와 무관한 폭도, 약탈자들이 혼란을 틈타 벌이는 범죄에 더 가깝지만 말입니다.

      물론 자기가 피해를 보면 짜증나고 화가 날 수밖에 없고, 그 시위 때문에 내 학교나 직장생활에 불이익을 본다면 역시 화가 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저런 방식을 취했다면 그런 이유가 있는 법이고요. 기실, 이건 정당화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권익과 요구를 위해 너희들이 피해를 봐도 좋다. 필요한 희생이다. 같은 게 아니라, 우리 요구를 들어줘라. 우리 요구를 이슈로 만들겠다. 그러니 더 소란스럽게 하기 싫고 시민들이 피해 보는 것을 막기 위해전 우리 요구를 들어줘라. 하는 거죠.

      물론 어느 정도 정당성이 있긴 합니다. 표현의 자유, 집회 및 시위의 자유로. 이건 우리 체제가 민주주의이기 때문이고요.

      하여간 본질적으로 시위는 남을 불편하게 하는 겁니다. 아무에게도 피해주지 않기 위해 산골짜기 아무도 없는 곳에서 시위를 벌여봤자 누구도 관심을 주지 않아요. 무슨 요구를 하든 아무 실현 가능성이 없죠.

      누군가 피해를 받는다는 이유로 이 민주주의의 본질적 행동을 제약한다면 그거야말로 민주주의에 대한 심각하고 중대한 피해입니다. 체제에 대한 훼손에 가깝죠. 실제 그런 식으로 민주주의를 후퇴시켰거나 시도했던 정권들도 있었고요.

      피해에 대해선.. 그저 사회적 관용이 좀 더 넓었으면 할 수밖에 없지 않나 싶습니다. 직장이나 학교에 늦었다면 그냥 어떤 사고나 사건 때문에 교통체증이 발생했다고 여기고 간단히 넘어가주는 게 맞겠죠.

      갑작스런 교통사고가 발생해 도로가 막히고 그 때문에 늦기도 하는 거 대부분의 직장에서 큰 문제삼지 않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거 가지고 뭐라고 하면 꼰대 꼴통이고.. 그런 의미에서 같은 맥락으로 시위 때문에 늦었다고 하면 그냥 이해하고 넘어가주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는 게 그나마 가장 나을 겁니다. 실제 그런 경우도 많아요. 시위 때문에 길이 막혔다고 하면 그냥 그렇구나 하고 넘어가는 경우.

    • BlogIcon ㅇㅇ 2022.05.11 20:14 address edit/delete

      별 볼 일 없는 댓글에 이렇게 정성들여 답변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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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정치나 철학 이론들도 사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실패했을 때는 드러나지 않을 수 있었던 결함들과 약점들이 성공했을 때에는 분명하게 드러난다. 대중 정부가 단지 꿈으로 생각되거나 옛날옛적의 까마득한 과거에 존재했던 것으로 책에서만 읽을 수 있는 그런 일이었을 때에는, 국민이 그들 자신을 지배하는 그들의 권력을 제한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은 자명한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한 생각은 프랑스 혁명 같은 일시적인 일탈들에 의해서도 별로 동요되지 않았다. - 그런 일탈 중에서 최악의 것은 대중적인 제도들의 지속적인 활동이 아니라 소수의 사람들이 갑작스럽게 발작적으로 일어나서 왕이나 귀족에 의한 전제정치를 와해시키고 권력을 장학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하나의 민주 공화국이 지구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서, 국가들의 공동체에서 가장 강력한 구성원들 중 하나로 자리잡았다. 선거를 통해 선출되고 국민에게 책임을 지는 정부는 국민이라는 기존의 위대한 존재의 관찰과 비판 아래 놓이게 되었다. 이제는 "자치"라든가 "국민 자신을 지배하는 국민의 권력"이라는 문구들은 사안의 실상을 제대로 표현해내지 못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권력을 행사하는 "국민"이 그 권력 행사의 대상인 국민과 언제나 동일한 것도 아니었고, "자치"라는 것도 각자가 자기 자신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자기를 제외한 나머지 모두에 의해 지배를 받았다. 또한 국민의 의지라는 것도 현실적으로는 국민 중에서 가장 수가 많거나 가장 능동적인 집단, 즉 다수파, 또는 다수파로 인정받는 게 성공한 사람들의 의지를 의미한다. 따라서 국민은 그들 중의 일부를 압제하려고 할 수도 있기 때문에, 그 밖의 다른 권력 남용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그러한 권력 남용에 대해서도 예방조치가 필요하다.

따라서 집권자가 공동체, 즉 공동체 내에서 가장 힘 있는 집단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이 정착되어 있다고 할지라도, 개개인에 대한 정부의 권력을 제한하는 것은 그 중요성을 조금도 잃지 않는다. 이러한 사고는 사상가들의 지성에도, 그리고 유럽 사회에서 민주주의가 자신들의 현실적이거나 가설적인 이해관계에 불리하게 작용하는 저 중요한 계급들의 취향에도 똑같이 매력적으로 받아들여져서 어려움 없이 자리를 잡아왔다. 그리고 이제는 정치 사상 속에서 "다수파의 폭정"은 사회가 늘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악들 중의 하나로 여겨지는 것이 일반화 되었다.

      -"다수파의 폭정"(The Tyranny of the majority)은 프랑스의 정치학자이자 역사가인 토크빌이 자신의 저서인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한 말이다. 그는 영국에서 자유주의자들과 교류하였고, 밀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다수파의 폭적은 그 밖의 다른 폭정들과 마찬가지로 처음에 공권력의 행사를 통해 행해졌고, 지금도 여전히 사람들은 그것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이 문제를 깊이 숙고한 사람들은 사회 자체가 폭군이 되었을 때, 즉 사회가 자신의 구성원인 개개인들에게 집단적으로 폭정을 행할 때, 그 폭정의 수단은 정치인들의 손을 빌려 행하는 것들에 국한되지 않는다. 사회는 자기 자신의 명령들을 집행할 수 있고, 실제로 집행한다.

그런데 사회가 올바르지 않고 잘못된 명령들, 또는 자신이 개입해서는 안 되는 일들과 관련된 명령들을 내리는 경우에는, 그렇게 해서 이루어지는 사회의 폭정은 온갖 종류의 정치적 압제보다 더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것이 되고 만다. 그 폭정은 통상적으로 정치적 압제에서와는 달리 극단적인 형벌들을 사용하지는 않지만, 개개인의 삶의 모든 영역에 아주 깊이 파고들어서 개인의 영혼 자체를 예속시킴으로써,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거의 남겨놓지 않기 때문이다.


개인적 자유의 필연성.
따라서 공권력의 폭정을 막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지배적인 여론이나 정서의 폭정도 막아야 한다. 또한 사회가 공격적인 처벌 이외의 다른 수단들을 사용해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념들과 실천들을 그들의 행위규범으로 받아들이도록 강요함으로써, 자신의 방식과 부합하지 않는 개성(individuality)이 발전하는 것은 물론이고 가능하면 형성되는 것조차 차단하고,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그들의 인격을 사회가 정한 방식으로 만들어나가도록 강제하는 것도 막아야 한다. 집단의 의사가 개개인의 독립성에 합법적으로 간섭하는 데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다. 그 한계를 규정해서 넘어서지 못하게 하는 것도, 정치적으로 독재를 막는 것만큼이나 인간다움 삶을 살기 위한 적절한 여건을 조성하는 데 필수불가결하다.


- 존 스튜어트 밀, 자유론.

 

 

중요한 부분은 끝자락의 다수파의 폭정부터 시작합니다. 이번 글에선 이 부분과 함께 방어적 민주주의 개념을 끌고와서 밀의 자유주의 사상을 짧게 소개하고 그 이후 약 백년 뒤 나치를 겪은 이후에 구체화되어 나타난 방어적 민주주의로 보완을 시켜 밀의 자유론은 중요한 고전이지만 그것을 진리로 삼을 수는 없고 이후 발전된 자유에 대한 논의 역시 수용해야 한다는 내용의 글을 쓰고자 합니다.

 

왜 일베 류 극단주의는 보호받지 말아야 하고, 쫓아내야 하며, 그렇지 않은 주장과 자유의 주체는 그들 극단주의자들을 공격하면서도 보호 받아야 하는가를 이야기하는 것이 이 글의 핵심이 될 것입니다.

 

물론 제 인문학, 철학에 대한 이해도는 아마 채 학부생 수준도 되지 않을 것이기에 그 깊이도 얕고 얕은 만큼 많은 비판점이 있을 수 있습니다. 감안하고 봐주시기 바랍니다.

 

 

여기저기서 윤 정부의 민주정 파괴를 함의하는 움직임과 발언들, 그리고 그러한 정부를 지지하는 집단이 기세등등한 것을 보면서 마침 떠오른 밀의 자유론 내용을 먼저 소개했습니다.

 

밀은 국가, 정부로 대표되는 공권력의 폭정이 가져오는 위험성에 대해서 말했지만 거기서 더 나아가 지배적인 여론과 정서의 폭정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처음 일베를 접했을 때 우리는 그것을 소수로 여겼습니다. 저는 그것이 금방 극우보수 정서의 중심 내지는 핵심을 차지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일베가 있기 이전부터 그러한 사상과 가치관을 가진 이들을 보아왔기 때문이고, 그러한 세계관을 가진 이들이 모여 디씨에서 어떠한 분위기가 형성되는 것을 보았고, 그것이 일베라는 이름으로 구체화된 것을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일베 류 가치관이 세계관으로 자리잡은 것이 이 시대의 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베를 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라 말할 것이고, 실제 인간관계에서 그런 사람을 보지 않았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보수우파임에도 일베를 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있고요. 하지만 일베를 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만큼 일베를 하는 사람 역시 많은 것이 사실이고, 실제 인간관계에서 일베임을 숨기고 평범함을 연기하거나 관리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무엇보다 실제 일베 사이트를 하느냐 하는 피상적인 조건보다 일베 류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것이 핵심이고요. 

 

그렇기에, 일베 류 가치관은 이미 극우보수 세력의 핵심 가치관이거나, 최소한 그 중 하나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애초에 일베 류 세계관은 70~90년대 극우보수 가치관의 변형/발전/현대적 적응의 결과이지 없던 것이 생겼거나 이식된 개념이 아닙니다. 일베 탄생 이전부터 호남에 대한 멸시와 진보좌파에 대한 혐오, 자국민에 대한 차별과 공격을 애국이라 착각하고 그 근거를 합리, 합리적인 것라고 풀이하는 등의 행태는 결코 특별한 게 아니었습니다.

 

 

"공화당원으로서의 당신 생각도 얘기할 각오가 돼 있어?"
"공화당원인게 무슨 소아마비라도 걸린듯이 말하는군."

 

미드 뉴스룸에서 나온 대사입니다. 주인공 윌 매커보이는 자신의 여자와 바람을 피운 기자를 자신의 스튜디오로 불러와 토론회 준비 중인 자신과 그 팀원들을 관찰하고 기사를 쓸 수 있게 해주면서 나온 대사입니다.

 

어떤 정당이 바보 같은 행위를 한다면 그 지지자들 역시 창피할 것이고 지지에 회의가 들 것입니다. 당시 공화당은 빠르게 극우화, 정확히는 티파티화 되어 갔었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비판과 지적이 있었지만 동시에 그들에 영합하려는 움직임 역시도 거대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각본가인 애런 소킨은 그것을 공화당원 캐릭터의 이름으로 이렇게 비꼰 것이죠. 사실, 한국에서도 아주 쉽게 찾아볼 수 있었고, 지금도 찾아볼 수 있는 겁니다. 저건 드라마이기에 아주 점잖게 표현된 거고요.

 

실제 한국에서는 이런 식으로 나옵니다.

 

"대깨문이 아직도 있네?"

 

마치 문재인 지지가 비상식적이고, 부끄러워해야할 것이고 창피해해야하는 것처럼 표현합니다. 마치 내가 문재인 지지자면 조롱을 받는 것이 당연하고 조롱 받아야 하는 행위인 것처럼요. 이는 그 사람의 정신, 이념에 대한 조롱이자 망신주기입니다. 망신을 주고 부끄럽게 만들어서 그들이 정치적 견해를 자유롭게 밝히는 걸 불가능하게 입을 막는 겁니다. 마치 장애인들이 자신의 장애 부위를 남들에게 보이기 부끄러워하는 것처럼요. 혹은 자신의 반사회적 가치관(Ex.소아성애 등)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처럼요. 

 

 

"사회가 공격적인 처벌 이외의 다른 수단들을 사용해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념들과 실천들을 그들의 행위규범으로 받아들이도록 강요함으로써, 자신의 방식과 부합하지 않는 개성(individuality)이 발전하는 것은 물론이고 가능하면 형성되는 것조차 차단하고,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그들의 인격을 사회가 정한 방식으로 만들어나가도록 강제하는 것도 막아야 한다."

 

일베 류 가치관을 지닌 이들은 민주당과 관계된 것에 대해 대깨문, 형보수지 등 다양한 표현을 사용하며 공개적으로 린치를 가하는 등 공격합니다. 그들이 어떠한 목소리를 내는 것을 불허하고 그들이 스스로를 검열하게 만들어 공개적이고 많은 조회가 보장된 공간 내에서 자신들의 가치관에 반하거나 맞지 않는 사상이 등장하는 것을 봉쇄합니다. 즉, 그들은 동집단의 것과 맞지 않는 개성을 배제하려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이 어찌 되었든, 공격받고 린치 당하지 않기 위해 사람들은 침묵하거나 그들의 말에 수동적인 동조를 해야만 합니다. 특히 어떤 공동의 목적이 있을 때는 지금의 상황을 무너뜨리지 않기 위해 더더욱 그렇습니다. 이는 특히 협동과 경쟁이 필요한 게임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물론, 같은 원리가 작동하는 직장생활에서도 마찬가지고요.

 

인터넷의 공개적인 장소에서 점차 일베적 가치관을 가진 이들이 다수의 목소리를 점하고 그렇지 않은 소수의 목소리를 공격하는 것으로 확인할 수 있는 현상입니다. 특히 이는 웹툰 댓글창 같은 비정치적인 공간이면서도 여러 세대가 모이는 장소(주로 젊은 세대 위주)에서도 확인할 수 있죠.

 

 

일베는 인터넷을 하는 이들이, 어떠한 활동공간과 재미를 추구하는 이들에게 꽤 훌륭한 장소가 되어주었고, 유머 자료에 섞인 정치색과 사상적 용어들을 통해 10대~20대 사용자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고, 그들은 10년 동안 성장하고, 그러한 사상을 재생산, 전파하면서 더 넓은 영역을 차지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일베적 가치관은 세대와 거의 무관하게 동일한 의식을 공유하게 해줬고 다르게 말해 이것은 극우보수라는 진영 내에서는 세대에 얽매이지 않은 광범위한 가치관으로 기능함을 말합니다. 앞서 말했듯이, 극우보수의 가치관/세계관의 핵심을 차지했다는 말입니다.

 

이제 다시 올라가 위에 따로 인용한 존의 말을 다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밀은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다면 개인은 그것이 아무리 위험한 사상이라도 자유롭게 가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네오나치, 파시스트, 제국주의자, 인종차별주의자, 역사 수정주의자, 종교적 원리주의자 등 사회를 위험하게 할 수 있고, 실제 위험을 발생시키는 이들과 그들의 사상조차도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말입니다. 

 

획일성과 전체적은 자유의 적이며, 진리는 여러 다면적인 특성을 지니고 복잡한 것이라 말했던 것처럼 위험한 사상이라도 그것을 원천적으로 배제하는 것은 도리어 자유, 혹은 민주주의라는 이름을 기치로 한 다수파의 폭정인 동시에 자유를 훼손하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가령, 소아성애자 또한 그러한 가치관이나 성벽을 가질 수 있지만 실제 범죄로 이어지지 않는 한 그것에 대해 처벌할 수는 없습니다. 히틀러를 위인으로 모시고 그의 사상과 가치관에 동의한다고 해도 실제 유대인을 비롯한 유색인종, 슬라브족에 대한 테러를 감행하는 등의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다면 법과 자유의 이름 하에 보호받아야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는 동시에 이상적이고 이론적입니다. 그러한 반사회적이고, 반자유적이며, 반민주적인 사상의 공격성은 단순히 사상의 자유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아니, 모든 사상이란 결국 행동으로 증명되기 마련이며, 그 사유는 그것이 옳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정의롭고 올바른 일을 행하는데 부끄러움을 느끼지는 않습니다. 잘못된 것을 알면서 하는 것과 다릅니다.

 

“우리의 상대가 ‘그래, 전에 우리는 당신에게 표현의 자유를 보장해주었잖아’라고 한다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래, 당신들이 우리에게 그렇게 했지! 하지만 그건 우리가 당신들에게도 그렇게 해야한다는 증거가 아냐! 당신들이 멍청하다는 증거일 뿐!’”

- 파울 요제프 괴벨스.

 

그들은 자유를 조롱하고 목적 달성을 위한 도구로 사용합니다. 이는 무기가 될 수도 있고, 때로는 방패가 될 수도 있습니다. 밀은 모든 자유는 보호받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위르겐 하버마스는 관용의 개념을 통해 누구도 자신의 선호와 가치관에 따라 무엇은 허용하고, 무엇은 배제해야 한다고 정할 권리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민주주의에 사상의 자유는 기본질서의 핵심 중 하나이고, 위험한 사상을 골라 베재하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민주주의의 핵심요소가 사라지는 것이라 말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어적 민주주의는 민주주의가 제도적으로 자살하지 않기 위해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개념으로 민주주의를 지키도록 발생했습니다. 나치는 민주적인 절차를 통해 권력을 획득했고, 독재국가가 되었습니다. 박정희 또한 4대 대선 이후 여러번의 대선에서 승리하는 형식으로 독재정권을 유지했습니다. 

 

독일에선 사회주의 제국당과 독일 공산당에 위헌판결을 내려 정당을 강제 해산시켰습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정치 정당에 대한 조치였을 뿐, 그들의 지자자에 대한 조치는 전혀 아닙니다.

 

자유의 적에게 줄 자유는 없다는 루이 드 생쥐스트의 말처럼 자유와 민주주의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유와 민주주의의 적을 베재해야 합니다. 윤석열 당선인은 입법권 박탈을 이야기했고, 이에 동조하는 집단 역시 존재합니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하는지에 따라 그 위험성 평가는 사람마다 달라지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법권 박탈을 입에 올렸고, 그것에 동조하는 집단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으며 설령 비유적인 표현이라고 해도 할 말이 있고 못 할 말이 있는 것처럼, 그런 식으로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말은 생각의 그릇이고, 말이라고 다 같은 말이 아닙니다. 농담이라고, 비유라고 말한다고 그것이 (설령 일시적인) 진심인지 아닌지 그 자체로 판별하긴 어려운 까닭입니다.

 

 

일베 류 가치관은 극우보수에게 핵심적인 것이 되었고, 결코 소수가 아닙니다. 오히려 점차 다수를 차지해가는 과정에 있다고 볼 수 있고, 사실, 이미 다수이거나 다수에 가까워졌다는 것인 현실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러한 이들이 사회의 다수를 차지한다면 그들과 다른 이들을 공격적으로 배제할 것입니다. 이미 다양한 집단을 차별하고 공격하는 것처럼요.

 

윤석열 당선자가 유퀴즈에 나왔을 때 사람들은 방송 자체와 유재석, 조세호의 리액션, 진행을 지적하고 공격했습니다. 배제는 그런 식으로 이루어집니다. 잘못을 했든 안 했든, 그들의 정서에 부합하지 않으면 마치 잘못을 한 것처럼 손가락질하고, 활동은 물론 존재조차 부끄럽게 만들어 망신주며, 공격하여 밀어냅니다.

 

 

그렇다면 그 반대는? 그 반대 역시 마찬가지의 활동을 했고, 하고 있지 않느냐 말할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진보, 좌파, 민주당 지지자 역시 그들에 반대되는 이들을 공격하고, 면박주고, 린치하며 쫓아내어 배제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 글에서 피상적인 현상만 바라보는 것은 결코 본질에 다가가 핵심을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고 여러 차례 이야기한 바가 있듯, 같은 행동 역시도 다르게 평가받을 수 있습니다.

 

예컨데, 일베-펨베 류는 반사회적인 행위를 하기 때문에 공격당하고 배제 당하는 것이고, 진보좌파의 경우 그 자체로 공격받고 배제 당하기도 한다는 겁니다. 일베나 펨베가 사자 명예훼손과 조롱, 특정 성별이나 직종, 지역에 대한 차별과 공격을 하여 반발을 받는다면 그것은 정당합니다.

 

그러나 진보좌파가 특정 정당이나 정치인을 지지하거나, 반대로 특정 진영의 집단이나 인사를 비판한다면 그 자체로 비난을 받고 배제당합니다. 심지어 그 당사자가 정치적 견해나 이념, 사상을 밝히지도 않았고, 어떤 정당이나 정치인을 지지한다고 밝히지도 않았으며, 그것을 근거할 수 있는 활동 내역 따위를 알 수도 없음에도 그런 일이 벌어집니다.

 

실제로, 박근혜나 박근혜 정부의 정책, 윤석열에 대한 비판을 했을 때, 대깨문을 비롯한 규정, 낙인을 통한 공격이 발생하곤 했습니다. 이보다 더욱 노골적이고 전통적인 사례는, 독재정부나 보수정부 대한 비판을 가하고 저항하는 모든 이를 빨갱이라고 규정하여 공격했습니다.

 

따라서, 언어와 용어가 달라졌다면 그 핵심 원리가 달라진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일베 류 가치관을 가진 사람과 그렇지 않은 반대자들을 비교했을 때, 일베 류 가치관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공격받고 배제 당하여 사회의 지배적 가치관이자 세계관으로 작동하지 않도록 탄압해야 하고, 그들에 대한 공격자는 대체로 자유와 민주주의에 의해 보호받아야 마땅합니다.

 

 

존 스튜어트 밀은 1800년대 사람이며, 그의 대표적인 저작 자유론은 1859년에 출간된 것입니다. 그리고 약 100년이 조금 덜 되었을 때, 자유는 무기이자 방패가 되어 자유의 적이자 민주주의의 적에 의해 자유와 민주주의를 살해하는데 사용되었습니다. 자유와 민주주의에게 그 사건은 피살이 아니라 자살이었습니다. 국민들이 그것을 바랬기 때문입니다.

 

구스타프 라드브루흐는 1800년대 중후반에서 1949년까지의 인물입니다. 칸트학파의 일원이었고, 법학자로서 법의 3요소인 정의-합목적성-법적안정성의 개념을 처음 고안해낸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는 칸트주의의 관점으로 가치상대주의를 주장했고, 무질서보다 부정의가 낫다는 가치관을 견지했습니다. 그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건국에 큰 기여를 한 사람이었고, 이후 나치에 의해 강단에서 쫓겨난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는 모든 가치를 존중하기 위해 나치를 용인했고, 그들에 의해 강단에서 추방당했고, 법을 제정하여 악행과 폭정을 했음에도 침묵했습니다. 전후, 그는 강단해 복귀하였고, 저명한 법학자였던 라드브루흐는 새로운 독일의 법을 세워야 했는데, 가치상대주의자였던 그가 나치의 수많은 악핵을 목격하고, 경험했기에 자신의 사상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죠.


그래서 그는 나치에 대한 반면교사로, 법률적 불법과 초법률적인 법 개념을 도입했으며, 자신이 고안한 법의 3요소 중 법이념의 1순위 역시 법적 안정성에서 정의로 수정했습니다. 그렇게 그는 가치상대주의자였음에도 방어적 민주주의를 도입하게 되었죠.

 

 

존이 자유론을 냈던 시대와 나치 시대는 약 100년의 간격이 있습니다. 그리고 바이마르 공화국의 붕괴와 나치당의 승리, 2차대전이 인류에게 전해준 교훈은 너무나도 중요하고 거대합니다. 자유론은 매우 중요한 지성을 담은 서적이고, 여전히 우리를 가르치는 고전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존이 아무리 위대한 인물이고, 그의 사상이 담긴 자유론이 얼마나 위대한 서적이든, 그것은 결코 진리로 기능할 수 없는 것이고, 자유에 대한 담론과 법철학 역시 발전해왔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발전을 수용해야만 하고, 존의 말을 금과옥조로 다루어 존의 말과 다른 것을 열등하거나 저열하거나 모자란 것으로 취급해서는 안 됩니다. 존의 가치관은 존의 가치관이며, 그것을 옳다고 여기어 자신의 사상 안에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만, 동시에 비판받고 반박될 수 있는 과거의 말이기도 하다는 것 또한 인정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또 다시 다른 형태의, 그러나 여전히 같은 핵심을 간직한 일베 류 가치관과 그 세력은 배제해야하며, 그들을 공격하는 이들은 보호 받아야 합니다. 자유와 민주주의의 적이 우리 사회를 지배해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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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황지만 2022.04.22 20:27 address edit/delete reply

    일베류 가치관의 영향은 최근 다시 불이 집혀진 장애인 시위에서도 보이는 것 같네요. 일베가 주를 이루고 있는 인터넷에서 장애인 시위에 대한 여론은 굉장히 부정적인데 이는 여론의 의한 선동으로 하나 둘 동조하는 모습으로 보여집니다. 현재 학교에 재학 중인 학생으로서 학생들을 살펴보자면 현재 상황에 대한 객관적인 분석이나 상황 판단이 아닌 당장에 자신이 피해를 입는 것이 화나는 것이 먼저로 보입니다. 이는 글쓴이님이 전에도 말씀하신 사고를 할 수 있는 여유가 없는 상황과 그러한 상황에서 인터넷 여론마저 굉장히 부정적인 반응이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 점점 그런 식에 사고를(일베류 가치관)을 가지는 것 같네요.
    현 장애인 시위에 대해서 저의 견해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시위는 너무나 당연한 행동이고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대중들 일반 시민들의 불편함을 야기하지 않으면 관심조차 주지 않는 현 대한민국에서 어쩔 수 없이 가장 확실한 목소리를 내는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들이 직접적인 피해를 입지 않으면 사회적 소수나 작은 목소리에는 관심조차 안 주며 자신의 안위만 생각하는 현 대한민국의 시민 의식에서 비롯된 문제라고 봅니다.
    시민의 관심이 곧 힘이기에 그러한 관심으로 힘을 실어주면 장애인에 기본적인 이동권 문제가 빠르게 보장되고 문제가 해결되리라 생각합니다. 아직 정치에 관해선 잘 알지 못해서 제 생각에 대한 의문이 조금은 듭니다. KONN님은 어떻게 현 장애인 시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듣고싶네요.

    • Favicon of https://konn.tistory.com BlogIcon Konn 2022.04.22 21:12 신고 address edit/delete

      그들이 주장하는 건 타당합니다. 장애인 이동권, 이에 대해 사회는 그들이 시위를 하며 '소란'을 피우기 전까진 관심도 없었습니다. 그러다 시위를 하면서 그에 관한 의제가 나왔던 거죠.

      그러나 사람들은 당장 자기 불편한 것에 대해서만 화를 내고, 이런저런 욕하고 비난할만한 명분을 찾을 뿐이지 왜 그들이 그러한 시위를 했고, 불편을 야기하는지에 대해서 공감하고 이성적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그들 단체의 시위 내역을 꺼내며 과거 불순한 활동을 했다고 비난하지만, 그것과 지금 시위 논제는 별 관계도 없어요. 그들이 소위 빨갱이, 종북스러운 활동을 했다는 것과 장애인 이동권 때문에 많은 장애인분들이 실질적 불편을 겪고 있는 건 다른 문제거든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욕하고 비난하고 쫓아내어 장애인 단체의 불법적이고 불편한 시위라는 불의에 승리하길 바라는 거지 그들이 왜 그런 시위를 하고 왜 그래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건전한 민주사회라면 소수자, 약자의 시위에 대해 '왜'를 생각하고, 그것이 타당한가를 먼저 따져야 합니다. 절차와 제도는 중요하지만 그것이 약자를 위해 기능하지 않을 때 저항할 수 있는 것도 하나의 방식이고요.

      장애인 단체가 불편을 야기하며 시위를 했을 때, 그것이 타당하다면 그들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어 지적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가장 올바르고 적절한 해법입니다. 그렇게 사회가 진보하는 거고요. 그렇지 않고 지적질, 훈수질, 비난질만 한다면 진보할 수 없어요.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없는데 그런 행동이 어떻게 정의롭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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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나 사회에 있어서 부패함은 자원이 필요한 곳으로 가지 못했음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자원은 돈, 현물, 물자, 상품, 재료 뿐 아니라 노동력과 관리 및 조율, 심지어 절차 진행와 판단 등 인간이 하는 역할 또한 포함합니다. 가령, 성이나 나이, 지역을 근거로 차별적인 판단을 내리거나, 혹은 자격이 없거나 부족한 사람이, 혹은 자격은 있으되 정당한 절차와 방식을 무시하고 어떠한 직위를 차지하는 경우 또한 있겠지요. 소위, 낙하산이라고 불리는.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가 보이는 행태를 보았을 때, 강하다고 여겼던 러시아의 치명적인 추태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는 그들이 부패한 군대이기 때문에 자원이 필요한 곳에 제대로 분배되지 않았고, 그탓에 개인무장부터 기갑 장비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정확한 작전 수행이 불가능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특정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자원이 주어지지 않았는데 해당 목적을 달성하기란 불가능하거나 극히 어렵기 때문입니다. 가령, 폭탄이 없이 폭파 작업을 할 수가 없고, 먹을 수 없는 전투식량을 가지고 장기간 작전 수행은 불가능하며, 기갑병력을 전개하여 보병과 함께 전선을 밀어야 하는데 전차, 장갑차가 없어졌으면 제병합동 작전은 불가능하겠죠.

 

이는 필연적인 실패. 즉, 패전으로 이어집니다. 아무리 강한 군대라도 부정부패로 인해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패배하게 됩니다. 역사에는 그러한 크고 작은 사례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가장 처참한 사례로는 토목보의 변, 국민방위군 사건 등이 있습니다. 지금의 러시아군의 졸전도 그러한 크고 작은 부정부패가 쌓이고 모여서 발생했죠.

 

 

군대에서는, 정확히 말해서 전쟁 상황에선 적군과 직접적으로 부딪히며 증명하기 때문에 그 결과가 빠르게 증명되는 편입니다. 부패한 군대는 그렇지 않은 군대와 싸워 패배할 것이고, 패배한 이유를 분석하게 될 것이며, 결국 드러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회에서는 그렇게 빠르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성수대교는 79년도에 최초 개통되어 94년도에 붕괴했습니다. 삼풍백화점은 89년도에 개점하여 95년도에 붕괴했죠. 이건 그나마 눈에 띄게 보이는 사례들입니다. 그렇지 않은 사례들, 심각하지 않다고 여겨지는 크고 작은 부정부패와 비리는 정말 많습니다.

 

그 옛날 촌지부터 시작해서 부동산 관련 부정부패, 주식시장 관련 경제범죄, 돈과 인맥, 지위를 통해 자기 자식에게 유리한 스펙을 만들어주기도 하고, 그 인맥을 이용해 우월한 지위와 직위를 획득하는 경우도 있으며, 은퇴나 사직 후 회사의 한 자리를 줄 수도 있기 때문에 유독 편파적인 판결이나 기소, 변호를 하는 경우 역시 존재합니다. 전관예우는 대표적인 법조 비리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죠.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사회의 크고 작은 영역에서 자원이 필요한 곳에 가지 못하도록 합니다. 처벌받아야할 사람이 처벌받지 않고, 더 자격 있는 누군가의 자리를 다른 사람이 빼앗고, 내가 투자한 돈이 다른 사람 주머니에 가게 되며, 다른 사람이 가져야할 집을 부당한 방법으로 얻어 큰 차익을 남기기도 합니다.

 

필요한 자원이 필요한 곳에 가지 못했기에 누군가는 반드시 피해를 보게 되고 그것들은 쌓이고 쌓여 거시적인 수치에도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또한 더욱 중요한 것은, 그러한 불공정한 경험을 한 사람들은 물론 전파되어 그러한 사례를 접한 이들에게도 점차 사회적 신뢰를 잃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한 신뢰의 상실이 확대되어가면 협력과 협동보다는 개인적 성취와 이익에 매몰될 것이고 우리 사회의 개인들은 분절되어 파편화될 것입니다.

 

민주주의 체제임에도 대의를 위해 국민 개개인이 힘을 모으는데 동의하기 어려워질 것이며, 이는 우리 사회가 어떠한 도전을 받을 때 그것을 이겨나가기 어려워짐을 의미합니다. 당장 경찰, 검찰, 법원에서 보여주는 성차별적인 사례들은 남성들이 여성 피해자를 위해 나서기보단 스스로의 안위를 지키는 것을 더 중요시하는 분위기를 만들었습니다. 우리 사회가 세대, 혹은 특정 계층의 경제적/사회적 고난을 해결하기 위해 자신의 이익을 일부 포기할 가능성은 점점 줄어들 것이고, 자신에게 별다른 손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돕는 것에 인색하게 될 것입니다.

 

 

차별하고 분열시켰기 때문에 우리는 힘을 모으지 못할 것이고, 그 차별과 분열의 근거는 불평등 그 자체에서 나옵니다. 부패는 불평등의 한 형태일 뿐이고요. 필요한 자원이 다른 곳으로 가는 것 자체가 불평등합니다. 우리에게 와야 마땅한 자원이 누군가의 주머니로 가는 것이니까요.

 

 

부패는 위기의 순간에 그 해악함을 드러냅니다. 그 자체로도 해악하지만, 위기의 순간에는 그것이 특히나 두드러지죠. 바이욘트 댐 역시 부정부패로 인해 수천명이 사망했습니다. 성수대교는 32명, 삼풍백화점은 502명이 사망했습니다. 누군가가 필요한 자원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빼돌렸기 때문이고 우리 사회에 거대한 상처와 충격을 발생시켰지요. 이러한 사고는 부정부패가 만들어내는 해악 중 하나일 뿐이고, 한 종류일 뿐입니다.

 

동남아 등의 후진국에서 부패는 그 자체로 경제를 이루기도 합니다. 뇌물을 통해 특정 절차가 진행되기도 하고, 공정한 결과나 유리한 결과를 위해 뇌물을 사용해야 하기도 하죠. 그러나 반대로 이것은 그 사회의 발전을 저해하는 가장 거대한 원인 중 하나가 됩니다. 뇌물을 받지 않는다면 공정한 결과를 기대할 수 없고, 뇌물을 통해 유리한 결과를 만들어내는 부정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누군가의 성공과 기회가 뇌물을 비롯한 부정부패를 통해서만 이루어진다면 당연히 더 많은 뇌물을 낼 수 있는 사람만이 유리할 것이고, 이는 사회적 손실과 빈부격차로 이어집니다.

 

즉, 사회 전체의 성장은 저해되고, 더 공정한 사회가 될 수 없으며, 능력 있는 개인의 성취 역시 누군가의 자본과 유착에 무력화되죠. 후진국 사회가 성장하기 어려운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그러한 부정부패 문제에 발목이 잡혀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요.

 

 

부패한 군대가 성공할 수 없고, 자원이 필요한 곳에 가지 못한다면 반드시 잘못된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는 것처럼, 부패한 사회 역시 위기에 취약하고 평시에도 성장과 발전을 저해하게 됩니다. 경제성장을 말하면서 경제사범을 방지하고 필요한 만큼의 처벌을 하지 않는 것은 언어도단입니다. 군대가 승리하기 위해서 필요한 자원이 제공되어야 하고, 필요한 인력이 구성되어 적절한 판단을 내려야만 합니다.

 

공정한 사회를 바란다면 부정한 방식으로 자격과 직위, 자본과 권력을 취득하고 달성한 사람을 배제해야 하며, 그러한 방식을 막거나 더 나은 방식으로 유도해야 합니다. 그 자체로 불공정을 발생시키는 차별과 혐오 또한 최소화될 수 있도록 억제하고 축소시켜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성장과 발전을 위해서라면 당연히 부정부패와 불공정한 사례에 대해 정파와 이념과 관계 없이 그것을 배제하는 것이 옳고, 애국자의 자세가 바로 그러합니다. 부패한 군대가 강할 수 없듯이, 부패한 사회가 강할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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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남성 세대는 대체로 복지보다는 성장 위주의 경제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40대 이상 세대에게서 성장 우선이 나오는 이유야 그 당시엔 한국 경제가 실제로 지금에 비해 많이 뒤떨어졌기 때문에 그러한 관성이라고 볼 수 있다면 2030의 경제 성장 우선은 어떤 면에선 특기할만한 경향성이죠.

 

 

위 통계는 어디까지나 경제관을 보여주는 것이고, 몇몇 사람들의 이야기도 그렇고 제가 느끼는 것도 그렇고 요즘은 각자도생, 이익주의, 이기주의가 강화된듯 보입니다. 나만 살아남고 나만 이익을 보면 된다는 생각으로 협력과 협동보다는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공공의 이익을 다소 저해하는 선택을 더 선호하게 되었달까요.

 

인터넷에서도 현실에서도 그런 사람들을 볼 수 있거나 이야기 들어보면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거나 선택을 하겠다는 사람들이 꽤 있기도 합니다. 그만큼 사회가 각박해지고 신뢰나 연대, 공감, 유대와 같은 사회적 자본이 고갈되어간다는 의미라고 봐야할 겁니다.

 

 

전 이것이 2030세대가 한창 공부할 시기이자 대학생-사회에 첫발을 내딜 즈음인 이명박 정부 시절부터 이러한 경향성이 좀 생겼다고 생각합니다. 아닌 게 아니라 이명박, 박근혜 정부는 교육, 취업 등 경쟁과 노력을 담론으로 정책을 펼치기도 했고 그러한 사회적 분위기는 분명히 있었습니다. 특히 이명박 정부 당시의 스펙난과 취업경쟁은 어마어마한 수준이었죠. 그 때문에 스펙보다는 실제 능력을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하려 하기도 했고요.

 

개인적으로 경쟁이라는 표현은 너무 많은 요소들을 뭉뚱그려 설명하려하는 인상이 있기 때문에 그닥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렇기 때문에 전 이를 구체화해보려 합니다.

 

일단, 이 시기의 세대들은 연대와 유대, 협력과 협동보다는 경쟁압력 속에서 개인의 성취를 극대화하는 것을 요구받았습니다. 사교육 논란도 이 시기에 재점화되었고 교육비가 성적에 유의미한 영향을 낸다는 통계, 교육 자본에 따른 계층 사다리 문제도 지적된 시기이기도 합니다.

 

실제 내 주변 학생들 중 뛰어난 성취를 낸 아이들은 몇개월간 어학연수도 보내주는 경우도 있었고 더 많은 관심과 지원을 독차지하는 경우도 볼 수 있었습니다. 격차는 점점 커졌고 뉴스에서는 다른 이들이 얼마나 노력하는가, 얼마나 경쟁에서 많은 자원을 차지했는가, 얼마나 많은 성과를 이끌어냈는가를 보도했습니다.

 

화성인 바이러스 같은 프로에서조차 스펙중독자 같은 컨셉의 자격증만 수십개에 어학연수, 봉사활동 등 여러 경험, 면접에 최전화된 전략을 구사하는 등의 고스펙 출연자가 나오기도 했죠. 뉴스에서조차 취업하기 위해 수십만원짜리 헤어샵에 성형까지 하는 사람조차 있었으며, 그 사람들이 수능이든 취업이든 결국 목표를 달성하는 모습들을 보여주었습니다.

 

보는 사람들에겐 나도 저 정도는 해야 평균에 가까스로 다다를 수 있다거나, 저 정도는 해야 달성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심어줬겠지요. 저 역시 그랬으니까요.

 

그 당시 교육, 스펙, 취업을 목적으로 하는 경쟁은 정말 강력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회적 분위기에 적응한 이들은 노력에 따른 성취와 목적 달성을 당연시 여기며, 그러지 못한 패배자, 혹은 게으름뱅이에 대한 평가는 반비례하게 될 가능성이 높지요.

 

 

조금 더 개인 단위에서는, 연대와 협동, 공감을 경험하지 못했던 이들은 내 옆의 친구를 학업성취의 경쟁자로 받아들이게 만들었고 결국 졸업, 혹은 대입할 때쯤엔 이 경쟁에서 살아남았거나 이만한 성과를 얻어내는데 성공했다. 반대로, 그만큼 노력했지만 이것밖에 되지 않았다고 스스로 평가내리게 되었을 겁니다.

 

그리고 그 경쟁 과정 동안 국가나 사회에 내가 이만큼 하는 동안 해준 게 무엇이냐고 반문할 수 있겠죠. 어학연수 지원? 장학금? 그건 자신이 노력해서 얻어낸 것이지 복지와 같은 차원에서 받은 게 아닙니다.

 

따라서 복지는 내가 받지 못한 것이기에 다른 이 역시 받아선 안 되고, 그러한 복지가 공정한 경쟁을 무너뜨리는 요소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나보다 못한 녀석이 복지의 혜택을 받아 아슬아슬하게 버티던 내 위치(순위)를 변동시킬 위험성으로요.

 

이들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자기가 모든 문제를 해결해왔다고 생각합니다. 가족이나 제도 같은 것들은 제외하고요.

 

 

그러한 이유로 2030세대는 복지사회와 같은 협력하고, 상생하고, 협동하는 '사회'가 아니라 '나 혼자'의 세계로 축소됩니다. 나 혼자만 잘 살면 되고 나 혼자만 성공하면 되고 나 혼자만 이익보면 되며 다른 이들 역시 알아서 각자도생 하면 된다고 말입니다. 사회적 연대와 협동의 경험을 해본 적이 없고, 그러한 현상에 공감하기도 어려운 시절을 겪어왔기 때문입니다.

 

본인들부터가 그러한 것들을 경험해본 적 없고 혜택을 받아본 적이 없기 때문에 생소합니다. 심지어 거부감마저도 들지요. 그들의 세상은 유기적인 사회가 아니라 개별적으로 파편화되고 분절화된 개인의 집합일 뿐입니다. 사회 전체가 이익을 향해 움직이는 거대한 진보가 아니라, 개인이 자신의 욕망과 욕구에 따라 원하는 바를 실현시키면 그게 곧 사회 전체의 발전이자 성장으로 이어진다는 개념으로 세계관이 형성된 것이죠. 이는 보수적 가치관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 전체에 작동하는 복지를 선호하기보단, 개개인의 성공을 도와줄 수 있는, 다시 말해 성장으로 향하도록 지원해주는=그러한 환경을 조성해주는 것을 선호하기 때문에 복지보다는 성장을 선호하게 된 것이 아닐까 말입니다. 모두가 잘사는 것보다(정확히는, 모두가 조금 더 나아지는 것보다) 내가 성공하느냐가 중요한 겁니다.

 

아래로 가면 지옥으로, 위로 가면 천국으로 가는 계단에서 모두 다 같이 계단 하나를 올라가는 것보단 내가 남들보다 앞서서 10단을 올라서는 게 좋다는 거지요. 남들이야 성공하든 말든 알아서 할 일이고요.

 

 

사회적 자본은 이러한 이들에 의해 피드백 받아 더더욱 고갈이 심화되어가고 있습니다. 최근 유독 그러한 분위기가 느껴지니 말입니다. 그렇다고 이들이 나쁘거나 어리석다는 게 아닙니다. 그냥 그렇게 되었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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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씨, 일베 등에서 어휘력과 문해력이 낮은 이들이 보이고 있고 그들을 지적하는 글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해 나오는 말들 중 하나가 우리가 옛세대보다 어휘력, 아는 단어가 적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머리가 나쁘냐 하면 그건 아니라고 하는 것이고, 마찬가지로 단어 좀 모른다고 머리가 나쁜 건 아니라는 겁니다.

 

 

하지만 전 조금 생각이 다릅니다. 옛 시절에는 지금보다 더 많은 한자어와 옛 단어, 낱말들이 자주 사용되었고, 아예 한글도 아닌 한자가 신문 등 공식 문서와 뉴스에서조차 자주 나왔던 시기입니다. 그렇다고 그들의 교육 수준이 지금보다 높느냐 하면 그건 아니라고 할 것입니다. 이유는 간단한데, 단지 당시에 비해 지금 배우는 교육의 질과 양이 모두 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단지 시대의 차이였을 뿐이지, 40년전, 50년전 대학에서 배우는 것은 지금보다 더 높은 위상과 평균적으로 더 높은 지적 능력을 요구했을 겁니다. 이는 지식을 가지지 못한 사람, 교육 서비스를 제공받지 못하거나 중단된 사람이 많았고, 사회가 발전하고 있던 시기였기 때문에 대학 평균 진학률이 낮았습니다. 그 당시를 기준으로 한다면 대학 학사 졸업자조차 상대적으로 높은 학력을 가진 고스펙이었습니다.

 

물론 그 당시 사람들이 지금보다 어휘력이나 문해력이 높았느냐 하는 것도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이, 높은 세대로 갈수록 어휘력은 낮다고 합니다. 이것 역시 지금 수준의 교육 서비스를 받지 못하거나, 독서의 기회가 적었기에 그런 것입니다. 단, 요즘 세대에서 사용되지 않는 단어 정도는 조금 더 알고 있긴 할 겁니다. 그것들이 사용되었던 시대였기 때문에요.

 

연령별 문해력 점수 분포

https://kosis.kr/statHtml/statHtml.do?orgId=420&tblId=DT_42001N_025&vw_cd=&list_id=&seqNo=&lang_mode=ko&language=kor&obj_var_id=&itm_id=&conn_path=

 

 

여튼, 그렇다하여 이것이 높은 어휘력 = 더 똑똑한 사람. 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르는 단어가 좀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이 머리가 나쁘거나 사고력, 합리성, 논리력이 미달되거나 부족하다는 뜻은 아닐테니까요. 마찬가지로 수십년전 사용되었던 한자와 지금은 잘 사용되지 않은 많은 단어들이 영어 단어 등으로 대체되었다고 생각하면 총량에서 크게 달라지진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우리 세대의 평균 수준일 뿐 우리 아래 세대의 어휘력과 문해력에서는 조금 다르게 생각합니다.

 

책을 읽고 풍부한 단어를 알게된다는 건, 슬픔의 저 끝에서부터 기쁨의 저 끝까지. 자신이 알고 있는 수많은 감정의 결들을 하나하나 구분해내는 거에요. 정확히 그만큼의 감정을 정확히 그만큼의 단어로 집어내어 자신의 마음을 선명하게 들여다보는 거죠.  

 

(중략)

 

같은 단어를 알고 있다면 감정의 의미를 공유할 수 있고 같은 문장을 이해할 수 있다면, 감정의 흐름을 공유할 수 있어요. 그리고 그건 서로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게 만들죠. 정기씨가 저에게, 제가 정기 씨에게. 그런 사람이면 좋겠어요.

 

앞으로의 많은 고난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와 위로가 되도록.

- 가담항설 90화 中 홍화

 

 

많은 단어를 안다는 것은 한가지 현상에 대해 더 다양하고 정확한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똑같은 것을 보고도 더 정밀하게 분석할 수 있을 것이고 커다란 명제를 더 작은 단위의 논리로 분해할 수 있는 능력의 기반이 되어줍니다.

 

조지 오웰의 1984에서는 '신어'라고 하여 한가지 주제에 곂치는 개념이 있다면 해당 단어들을 폐기하고 더 단순한 단어 하나로 통일합니다. 또한 새로운 단어보다는 간단한 두 단어를 합성시켜서 사용하기도 하죠. 좋다는 Good으로, 나쁘다는 Bad가 아니라 NoGood이라는 식으로요. 이는 대중들의 사고력과 개념 분석능력을 저해시키기 위한 당의 우민화 정책이었습니다.

 

똑같은 것을 보고 더 정확하고 통찰력 있게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것의 핵심과 개념을 파악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언어적으로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하죠. 자기가 설명할 수 없는 것은 자기가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이 아니며, 자기가 언어적으로 해석하고 설명할 수 있어야 정확하게 알고 있다는 증명입니다.

 

최근 디씨 등에서 보이는 우리 세대 기준으로 너무 낮은 어휘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말은 똑같은 것을 보고도 더 다양하게 설명하고 더 정확하게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지 않을까 합니다. 이는 피상적인 해석과 근시안적 시야를 가지게 하는데, 장기적인 계획은 지능이 높을 수록, 지적능력이 뛰어날수록 더 능숙하게 할 수 있는 작업입니다. 장기적 계획에 취약하고 단기적인 계획, 혹은 근시안적 시야를 가지는 사람들은 지능, 혹은 지적능력이 상대적으로 낮은 사람인 경우들이 많습니다.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장기 계획 역시 그러한 경험과 훈련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며, 여러 불확실성의 변수들과 불필요성 때문에 아예 그런 계획 자체를 세우지 않거나 아주 단순한 수준으로만 세우는 경우조차 있으며 그조차 언제든지 폐기, 수정이 가능한 경우들이야 정말 무수하기 때문입니다.

 

 

하여간, 어휘력이 높은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에 비해 더 똑똑하고 논리적인 사고가 가능할 것이라 기대될 수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덜 똑똑하고 논리적 사고 능력이 다소 부족할 것이라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는 어휘력이 높아야만 똑똑한 게 아니라, 어휘력이 사회에서 평균적으로 사용하는 것보다 부족한 사람은 특별히 더 머리가 나쁠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것 뿐입니다.

 

그런 이유로 전 어휘력이 낮다고 멍청하다는 건 아니다. 라는 말을 부정하는 편입니다. 어휘력이란 특별히 국어사전을 보고 처음부터 끝까지 외우거나 하는 식으로 익히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들 대부분은 글을 읽는 것에서 시작했고, 그렇게 완성된 것입니다.

 

인터넷 글이든 책이든 더 많은 단어와 어휘, 문장, 낱말을 읽고 이해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어휘력을 늘려왔습니다. 우리가 모르는 단어가 나온다면 사전을 찾아보기도 했을 것이고 그게 아니더라도 문장의 맥락에서 그 속뜻을 유추하고 사용례를 보면서 그 유추가 정확했음을 확인/교정받습니다.

 

다시 말해, 어휘력이 낮다는 건 그만큼 책이나 글을 덜 읽었다는 것이고, 많은 단어들을 경험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책을 많지 보지 않았다는 것은 지식의 양이 상대적으로 적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겠죠. 어휘력은 그 사람이 얼마나 많은 단어, 지식을 접했느냐를 유추할 수 있는 지표가 될 수 있습니다.

 

 

물론 이에 대한 반론은 당연히 제기될 수 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용되지 않은 단어들은 늘어가고 있고 우리 세대와 이전 세대, 그리고 우리 다음 세대가 사용하고 익힌 단어들의 숫자와 종류는 달라지는데 그러한 시대적 차이를 구분하지 않고 무조건 어휘력만으로 일괄적으로 지적능력의 고하를 구분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거나, 구한말 사람들이 사용하는 어휘 중 지금은 잘 사용되지 않는 어려운 말과 단어들이 줄곧 쓰였는데 그 사람들이 지금 기준으로도 더 똑똑한 사람들이냐, 아니면 단지 당시 사용되는 단어가 그러한 것들이 많아 단순히 체득한 단어만 더 많이 알고 있는 것은 아니냐 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실제 사회생활이나 업무 활동에 있어서 대단한 어휘력이 필요한 건 소수의 직종 뿐이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일 잘만 한다. 어휘력으로 추측할 수 있는 지적능력과 실제 지적능력 및 그 활용 현실은 아무 관계 없거나 별 관계가 없을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글의 초반부터 그러한 가능성을 염두해두고 이야기를 풀어낸 것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인문학적 소양과 직장업무 능력이 직결되는 비중은 크지 않을 것이고, 그러한 비중이 크기 위해선 사람을 알고 다루는 일을 할만큼 높은 자리에 올라가야할 것입니다. 인문이란 인류가 쌓아온 문명을 연구하는 것이고 이 거대한 개념은 세부적으로 인간에 대한 이해는 물론, 그 인간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대한 질문과 나름의 답을 만들 수 있게 하는 재료들이 됩니다. 

 

그런 이유로 전 인문학적 소양으로 대표될 수 있는 더 많은 책을 읽는 것과 그것을 유추할 수 있는 어휘력이 아무런 상관이 없느냐 하는 것에도 역시 부정적입니다. 또한 모든 책이 인문학 책인 것도 아니고 공학, 수학 등 비인문적 책들도 있지만 그러한 책에서도 최소한의 소양은 필요합니다. 이 단어가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고 뭘 의미하는 지 아는 것 바로 그 자체 말입니다.

 

1.자기 언어의 부재, 철학의 부재.
 
예전에 미국 쪽에서 이걸 다룬 다큐멘터리 같은 게 있었습니다. 대충 10년쯤 전 내용이라 정확하게 토씨 하나하나 기억나지는 않지만, 요는 평소에 불만이 많고 다소 반사회적이었던 이들에게 철학책을 주고 그것을 계속해서 읽도록 시킨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임무를 잘 수행했고, 나중에 가서는 반사회적인 행동을 하지 않게 되었죠.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신은 많은 것에 불만이었지만 왜 불만이었고 뭐가 문제였는지 알지 못했다. 알지 못했기 때문에 더 화가 났고 무엇에 화가 났는지 모르니 아무 곳에나 그것을 분출했다. 그러나 철학책을 읽으면서 자기 생각을 잘 정리하자 문제들이 보였고 그것을 설명해낼 수 있게 되었다. 그러자 감정을 다스릴 수 있게 되었다..
 
정확한 발언은 아니었지만, 제가 기억하는 맥락은 이러했습니다. 즉, 그들은 사회현상과 정치현상, 그리고 그것을 지배하는 철학적 기반에 대한 지적 부재가 너무나도 복잡하고 어려운 사회를 설명하지 못하는 한계로 다가왔고, 그 때문에 뭔가 불만은 있는데, 그 불만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었던 거죠. 해소될 수 없는 불만이니 아무렇게나, 아무에게나 터져나왔던 겁니다.
 
분노했지만, 무엇에 분노한지 모르는 사람들이 극단주의에 쉽게 경도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런 사람들에게 사색의 기반이자 자기 언어를 가져다주는 것은 더 '깊은 생각'을 가능하게 해준 철학입니다.


왜 저소득층은 독재자-극단주의 세력을 선호하는가? (https://konn.tistory.com/753)

 

전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언어적으로 정확하고 세밀하게 표현하지 못 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한계를 크게 드러내는 때가 바로 정치인이나 정치적 현상을 대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특정 정치인이 싫다고 하지만 정작 물어보면 정확히 왜 싫은지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그냥 싫다, 아무튼 개새끼다. 하는 사람들이 꽤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어떤 정치인을 싫어하기는 하는데, 왜 싫어하는지는 모르는 사람들인 거죠. 그것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냥 싫기는 한데, 스스로도 돼 싫어하는지 구체적이고 논리적으로, 언어로서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면 스스로도 그걸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럼 왜 싫어하느냐, 여러 뉴스들에 의해 형성된 이미지 때문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우리가 어떤 뉴스를 보고 어떤 정치인에 대해 어떠한 인상을 가질 수 있을만한 내용을 보지만 그것들은 따로 기록하거나 기억해두지 않으면 금방 잊혀집니다. 이는 어떤 사건에 대해 시기, 상황, 심지어 당사자인지 아닌지 사람조차도 헷깔릴 수도 있게 됩니다. 단기기억으로만 남고 장기기억으로 잘 남지 않는 내용들인 셈이죠.

 

그렇게 구성된 이미지가 그 정치인에 대한 호불호로 이어지는 거고 설명할 수는 없는데 아무튼 누구는 싫다.가 됩니다. 따지고 보면 아예 없는 건 아니겠지만 스스로 설명할 정도로 기억에 남는 무언가가 딱히 없죠. 최소한 당장 머리속에서 찾아낼 수는 없다고 보시면 됩니다.

 

 

1984의 당은 신어를 만들어 사람들에게서 다양한 개념을 사고할 자유성를 억압했습니다. 생각은 언어에 묶이고 단어에 휘둘립니다. 같은 것을 보고도 다른 단어를 사용할 수 있고, 다른 단어에서 다른 정서를 느낍니다. 이는 다른 감성과 다른 과정이 되어 다른 결론으로 이어지죠.

 

복잡하여 정확히 규정해야할 현상을 그렇지 못한 언어로 해석하려고 한다면 필연적으로 오류가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정치, 사회적 현상 뿐 아니라 우리의 일상소통에서조차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다소 뭉뚱그려 커다란 개념으로서만 전달시키고 받아들이게 될 수 있습니다.

 

꼰대 같을지 몰라도, 전 이게 좋게 보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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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예전에 했던 말들의 재탕이긴 한데, 그냥 그 말들을 적당히 모아 새로 글 하나로 다시 정리해보려고 합니다.

 

 

 

1.자기 언어의 부재, 철학의 부재.

 

예전에 미국 쪽에서 이걸 다룬 다큐멘터리 같은 게 있었습니다. 대충 10년쯤 전 내용이라 정확하게 토씨 하나하나 기억나지는 않지만, 요는 평소에 불만이 많고 다소 반사회적이었던 이들에게 철학책을 주고 그것을 계속해서 읽도록 시킨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임무를 잘 수행했고, 나중에 가서는 반사회적인 행동을 하지 않게 되었죠.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신은 많은 것에 불만이었지만 왜 불만이었고 뭐가 문제였는지 알지 못했다. 알지 못했기 때문에 더 화가 났고 무엇에 화가 났는지 모르니 아무 곳에나 그것을 분출했다. 그러나 철학책을 읽으면서 자기 생각을 잘 정리하자 문제들이 보였고 그것을 설명해낼 수 있게 되었다. 그러자 감정을 다스릴 수 있게 되었다..

 

정확한 발언은 아니었지만, 제가 기억하는 맥락은 이러했습니다. 즉, 그들은 사회현상과 정치현상, 그리고 그것을 지배하는 철학적 기반에 대한 지적 부재가 너무나도 복잡하고 어려운 사회를 설명하지 못하는 한계로 다가왔고, 그 때문에 뭔가 불만은 있는데, 그 불만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었던 거죠. 해소될 수 없는 불만이니 아무렇게나, 아무에게나 터져나왔던 겁니다.

 

분노했지만, 무엇에 분노한지 모르는 사람들이 극단주의에 쉽게 경도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런 사람들에게 사색의 기반이자 자기 언어를 가져다주는 것은 더 '깊은 생각'을 가능하게 해준 철학입니다.

 

 

2.정신력과 인지력.

 

...몇몇 심리학적 연구결과를 보면 까다로운 인지작업과 유혹의 도전을 동시에 받는 사람들은 유혹에 굴복할 가능성이 더 높다. 매우 중요한 일이니 1~2분 동안 7자리 숫자를 기억하라는 요구를 받았다고 가정하자. 숫자에 집중하는 동안, 건강에 해로운 초콜릿 케이크와 건강에 이로운 과일 샐러드라는 두 가지 디저트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실험 결과를 보면 머릿속이 온통 숫자로 가득 차 있을 때는 유혹적인 초콜릿 케이크를 선택할 확률이 더 높다. 시스템 2(이성)가 바쁘면 시스템 1(본능, 직관)이 행동에 더 많은 영향을 미치는데, 그 시스템 1은 단 것을 좋아한다.

'인지적으로 바쁜' 사람들은 이기적인 선택을 하고, 성차별적인 언어를 사용하고, 사회생활을 하며 피상적인 판단을 할 가능성이 더 높다. 물론 '인지 부하가' 자제력을 약화시키는 유일한 원인은 아니다. 불면과 마찬가지로 음주도 똑같은 효과를 낸다.

심리학자 로이 바우마이스터와 동료들이 수행한 일련의 놀라운 실험들을 보면 인지적이건 감정적이건 신체적이건 상관없이 모든 다양한 자발적 노력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라도 정신 에너지의 공유풀에 의존한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다. 바우마이스터는 의지나 자제력 유지 노력이 피곤한 일임을 거듭 확인했다. 억지로 뭔가를 하도록 자신을 독려해야 한다면, 다음 도전이 닥쳐왔을 때 자제력을 발휘하려 하지 않거나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줄어든다. 이런 현상을 '자아 고갈'이라고 한다.

- 다니엘 카너먼, 생각에 관한 생각.

 

정치적 현상과 메시지들을 이해하고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만한 인지작업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저소득층은 그것을 설명하고 분석할 수 있을만한 교육을 받지 못했거나, 스스로 공부하지 않은/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남들보다 더 각박하고 고난하게 살아가기 때문에 당장 자신의 삶에 집중해야할 시간과 정신력, 체력이 많이 할당되고 정치, 사회적 현상을 파악에 할당되는 자원은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쉽게 말해, 새벽 6시에 일어나 첫차타고 일터로 나가 6시까지 일하고 7시부터 11시까지 일해서 12시에 돌아오는 아주머니가 정치, 사회적 현상에 대한 복잡한 이론을 이해하거나 스스로 전개할만한 능력은 부족할 겁니다. 이는 배운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만큼 일에 정신력과 체력이 소모된다면 일과 무관한 복잡한 지적 활동을 하기 어렵겠죠.

 

저소득층은 교욕수준에서부터 정치현상을 파악하고 판단하기에 지적, 철학적 기반이 부재된 경우가 많고, 자아가 고갈된 사람들이기에 깊게 파고들어 분석할만한 여유도 없습니다. 삶에 여유가 없기에 무엇이 좋고 나쁜지 판단할 정신적 여유가 없고 뉴스를 보며 인지 자원을 동원한 작업을 하기 어려우니 더 간단한 말과 더 직관적인 액션을 보여주는 사람에게 지지를 표하게 됩니다.

 

더불어 그들은 자신의 삶에 있던 불만들을 해소해줄 것 같은 언어들을 씁니다. 이명박은 물론, 박근혜 정권 역시 선거철만 되면 사회주의에 가까울 정도로 포퓰리즘 공약을 내거는 것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18대 대선 당시 새누리당의 공약 플래카드들은 대표적인 예시라 해도 무방합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언제나 뒤통수를 맞고, 그럼에도 잊어버립니다. 당장의 삶이 고난하기에 정치에 계속 관심을 두고 있었던 일을 계속 기억해두는 것조차 힘겹기 때문입니다.

 

 

3.선동과 액션의 중요성.

 

더 간단한 표어와 더 직관적인 메시지는 선동에 있어서 가장 효과적이고 효과적인 것을 넘어 가장 이상적입니다. 선동은 보통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지만 기실 이 선동이라는 단어는 꽤 중립적인 용어인데, 가령 반드시 필요한 개혁이나 복지를 밀어붙힐 때 정부는 국민들에게 이것의 필요성을 설득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설득은 논리적이고 많은 근거를 제시하며 분석적으로 접근하는 것보다 간단하고 경제적으로 선동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죠.

 

국민들에게 여러 데이터를 제시해봤자 그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이들은 생각보다 적습니다. 능력이 부족한 사람은 물론이며, 시간이 부족한 사람들도 많고, 오히려 그러한 데이터를 반박하고 논쟁을 시도하는 이들조차 발생하게 될 것입니다. 정부는 국민과 논쟁해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좋은 정책과 법안이라도 그것을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 정부는 국민들을 선동해서 원하는 목표를 이뤄야 합니다. 설령 그것이 필요하더라도 국민들을 설득하지 못한다면 나쁜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쉽고, 그 이상으로 나쁜 결과로 돌아오게 됩니다.

 

이 선동의 예시로 문재인 친중설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자면, 문재인이 중국몽을 언급한 원문을 본 사람은 교묘하게 중국을 비판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재인 친중설을 선동하는 이들은 문재인 중국몽까지만 언급하며 왜곡하죠. 아주 간단하고 직관적인 한 문장만으로 맥락은 뒤집혔습니다.

 

문재인 정부 당시 재경부는 미래를 위해 돈을 아껴야 하며, 그렇기 때문에 대규모 추경이나 지원은 불가하다는 부정적인 견해를 지속적으로 밝혔습니다. 실제로 연금 문제는 매우 부정적인 결과를 예정해놓은 문제이고, 어떠한 해법이나 준비가 필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한 이유로 문재인 정부는 이러한 지원 정책에 꽤 미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가진 사람들 역시 많아졌죠. 이는 문재인 정부가 국민들을 선동하여 그들을 설득하지 못했다는 관점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보수 세력은 진보 세력에 비해 이러한 선동적 능력이 탁월하며, 동시에 보수 지지자들은 진보 지지자들에 비해 이 선동에 더 쉽게 넘어가고 더 빠르게 감화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평균적으로 보수 지지자들의 수준이 진보 지지자들의 수준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극우보수는 가짜뉴스에 더 쉽게 속으며, 스스로 그 가짜뉴스를 만들고 배포시키고, 그렇게 유포된 가짜뉴스에서 새롭게 생성된 컨텐츠가 스스로 속아넘어가기도 합니다.

 

그러한 이유로 저소득층은 더 직관적이고 간단한 극우보수의 선동에 더 쉽게 넘어가는 것이고, 그들이 TV에서, 언론에서 보여주는 직관적인 쇼들을 쉽게 이해합니다. 고고한 진보주의자들은 그러한 쇼를 하지도 않고 잘 볼 수도 없습니다. 그들의 말과 언어는 복잡하고 어려운 내용들이라 머리만 어지러워져 쉽게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극우보수의 언어는 쉽고 간결합니다. 단순해서 이해하기 쉽죠.

 

물론 이 쉽고 간결한 언어가 어떠한 왜곡을 낳고 얼마나 피상적인지 알 겁니다. 그런만큼 문제의 핵심에 다가가지 못하고 제대로된 해결이나 변화를 이끌어낼 수는 없죠. 오직 더 나쁘게 되는 거 빼고는요.

 

독재자들의 액션들 역시 매우 직관적이고 이해하기 쉽습니다. 게다가 화끈하기도 하죠. 말 한마디면 높으신 분도 앞에 나와서 굴복해야 합니다. 강력한 메시지들은 우리의 적을 분쇄해야 한다는 믿음과 확신으로 가득차 있고, 그들은 정말로 문제입니다. 문제는 해결되어야 하고 해결하기 위해선 강한 지도자가 필요하죠. 따라서 강한 이미지를 가진 이들, 우리가 이길 수 있다는 믿음을 주는 강한 워딩을 쓰는 매파에게 지지를 표합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이고 어떤 피해와 손해로 돌아오며, 그들이 진짜 매파인지, 아니면 치킨호크인지, 아니면 그조차 아니고 단지 정치적 이해관계에서 이익을 얻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스트롱 워드를 사용하는 것인지도 고려하지 않고 파악할 능력도 없습니다.

 

자신에게 어떤 이익을 돌려줄 것이며 자신의 삶보다 더 크고 중요한 것들이 어떻게 망가질지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고 애당초 관심도 없습니다. 당장 자신의 삶이 더 중요한 문제이고 높으신 분들이 얼마나 빼쳐먹든 내 돈은 아닐 것이며, 권력자들이 자기 밥그릇을 어떻게 빼앗기고 누가 차지하든 그 역시 자신의 삶과 동떨어진 이야기죠.

 

심지어 경제, 복지, 노동 정책의 변화로 인해 진짜 자신의 삶에 영향을 주게 되고 피해를 입게 된다 하더라도 그것을 파악할 수도 없습니다. 그것을 파악하려면 자신의 한 표가 만든 정치인이 경제, 복지, 노동 정책을 어떻게 변화시켰고 기존과 어떤 것이 다르며 그러한 결과 어떠한 절차를 거쳐 어떤 이유로 자신에게 이러한 변화(손해)를 입혔는지 알아야 합니다. 몇가지 과정을 아무리 단순화 시키더라도 자신이 뽑아준 정치인이 바꾼 정책이 자신에게 어떻게 돌아왔는지 이해해야 하는데, 그걸 잘 못합니다.

 

심지어 주변에 그걸 잘 아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냥 어려워졌으니 어려워졌고 윗 사람이, 공무원이 개새끼라 그런갑따 할 뿐이죠. 한번도 삶이 편했던 적이 없으니 어려운 삶에 적응한 사람들입니다.

 

 

4.내 계급적 이익과 이념적 지향.

 

때로 이런 사람들도 있습니다. 너무 어려운 사람들 말고 조금이라도, 살짝이라도 더 여유로운 이들에게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내가 뽑아줄 정치인이 복지, 의료, 노동, 취업에서 나와 내 가족들에게 불이익을 안겨줄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정치적 사상과 이념에 있어서 상대 정당의 그것에 동의할 수 없다는 사람들 말입니다.

 

내 취업 조지고 내 동생 교육 조지고 내가 취업했을 때 더 많은 시간 노동하고 더 적은 임금을 받으며, 내 엄마아빠 병원비 더 비싸지고 우리집 월세 더 오르며 우리 집안 지원금 더 줄어들어도 반미친중친북 빨갱이 페미 민주당에게 정권을 줄 수는 없다는 사람들.

 

부정부패 많이 저지르고 인성 문제 있고 범죄자인 것도 알지만 빨갱이 민주당에게 나라를 넘겨줄 수 없다며 이명박 찍어준 사람들, 정치적 능력은 의심스럽고 인격적으로 덜 성숙했고, 아버지 후광으로 지지 받는 거 다 알지만 빨갱이 민주당에 정권 못 준다며 박근혜 찍어준 사람들. 다 알고 하는 겁니다. 다 알고 하는 건데 민주당이 반미친중친북 빨갱이가 아니라는 사실만큼은 모릅니다.

 

이건 자기 삶과 별개로 내가 손해를 보더라도 더 큰 거대담론과 이념, 사상을 지향하며 표를 던지는 이들입니다. 세금이나 부동산으로 손해를 보더라도 더 나은 세상을 기대하며 민주당에 표를 주는 사람들이 있는 것과 다를 게 없습니다. 미련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그들에겐 세계관적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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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황지만 2022.04.13 10:15 address edit/delete reply

    제 경험으로 심적의 여유가 지식의 상승으로 이어진다는 생각에 곰감합니다.
    스스로 말하기 조금 부끄러운 말이지만 생각의 깊이나 깊어지고 사색을 즐기는 마음이 언제 생겼나 한번 고민해 보았는데 코로나가 굉장히 심해져 집에서 굉장히 오랜시간을 보냈는데 그시간 동안 정말 자유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딱히 부모님에게 제제도 안 받아 하고싶은걸 하고 쉬고싶을떄 쉬는 그런 삶이였는데 그런 시간이 있을 떄 자신을 시작으로 점점 생각이 넓여저 갔습니다. 이런 경험으로 심적 여유, 휴식, 사색이 성장에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내용에 글을 보니 공감이가네요.

    • Favicon of https://konn.tistory.com BlogIcon Konn 2022.04.14 04:11 신고 address edit/delete

      그런 의미에서 노동시간이 여유시간보다 많은 사회는 정신적으로도, 지적으로도 풍부하지 못한 사회고, 그런 철학적/인문학적 빈곤함은 극단주의로 치닫기 쉬워집니다. 자유로운 민주사회를 위해서라면 경계해야할 태도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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