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hrodinger

블로그 이미지
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며,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 - E.Kant
by Konn
  • 2,017,072Total hit
  • 4Today hit
  • 118Yesterday hit

'철학'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16.01.25
    헬죠센론. 사회학적 상상력과 탈정치화.
  2. 2014.10.11
    인문학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 (2)
  3. 2013.07.13
    역사란 무엇이며, 어째서 중요한가. (6)
  4. 2013.07.03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1)



논리절벽


미국의 비판사회학자인 밀스가 저술한 '사회학적 상상력'에 따르면, 개인이 자신의 인생 경험의 한계를 뛰어넘어 사회 전체를 통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개념을 제시했습니다. 사회학적 상상력이란 곧 인간과 사회, 개인의 일생과 사회 역사, 자아와 세계의 상관관계에 한계를 두지 않고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하죠.


50년대 미국에선 너무나 비대해진 사회체계 안에서 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문제에 부딪혔을 때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문제가 무엇인지 파악도 못하며 절망하게 되어버리며, 자신이 사회 안에서 어떤 위치에 자리잡고 있는지조차 몰라 불안해하는 현상이 감지되고 있었습니다. 옛날의 농부는 자신이 소유한 논, 밭에서 일어나는 일만 알고 관리만 잘 하면 살아가는 데 별 문제가 없었지만 현대사회는 너무나 복잡하고 다양해졌으며, 그에 따라 다방면의 이해가 필요하지만, 한 개인이 모든 사회를 이해하고 대응할 순 없죠. 


현대인이 모든 사회방면의 것들을 경험할 순 없지만 자신이 경험하지 않더라고 사회학적 상상력을 통해 간접적인 방법으로 사회 구조를 통찰함으로써 문제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아내고 해결하는 데 필요한 행동을 결정할 수 있다고 합니다.



기실 이러한 사회학적 상상력을 막는 것이 모든 사악한 기득권층의 목표이자 이상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령 한국에선 모두 개인의 탓으로 돌려버리는 경향이 곧 그러한데, 사회, 국가 등 집단의 문제를 개인의 정신력과 노력의 탓으로 돌려버리면서 사회나 국가(엄밀히 말해서 정부)의 책임을 없애기 위함입니다.


자신에게 문제의 원인이 있고, 혹은 그에 대해 해결할 능력과 의무를 가지고 있음에도 그렇지 않고 발생한 문제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으면 편한데다, 그러한 문제를 통해 이익을 얻는 자들에겐 오히려 문제를 해결하고자 할 의지도 없고, 실제로 해결하지 않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으면 되려 문제가 계속 존속되길 원하죠.


만약 대중이 그러한 사회적, 국가적 문제에 대해 통찰할 수 있는 능력이 있거나, 그러한 통찰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면 그러한 거대한 패악질과 사악한 의지는 멈추어질 것입니다. 아무리 대통령, 총리, 장관, 의원, 사장, 회장들이 힘이 있어도 거대한 대중들의 의지를 이길 수는 없습니다. 이는 역사가 증명해왔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대중들이 그러한 사회학적 상상력을 갖추지 못하고, 특정 정치세력과 그들의 나팔수들에게 지속적으로 노출된다면 그들의 주장에 선동, 세뇌될 수 밖에 없죠. 사회학적 상상력을 갖추지 못한 이들은 구조적 문제를 절대 발견할 수 없고, 그러한 상태 속에서 개인의 한계를 뛰어넘는 구조적, 사회적 문제에 부딪히게 되면 그들은 자신들에게 문제가 있거나, 그러한 문제에 부딪힌 타인을 개인의 노력이나 정신력 등 개인의 탓으로 돌려버리게 됩니다.


이러한 분위기가 만연해 있을 경우 우리가 흔히 말하는 '헬조센'이 되는 거죠. 문제가 있어도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구조적이고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 개인의 탓으로 귀결시키며, 가해자보다 피해자가 잘못한 게 되는 헬조센.



사회학적 상상력을 갖추기 위해선 깊게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한데, 바로 철학과 역사학이 그러한 지성을 갖출 수 있게 해줍니다. 이들은 배우는 자에게 논리와 지식을 주며 그러한 논리와 지식을 문제를 천천히 살펴보고 문제의 원인과 현상을 분리하여 볼 수 있게 해주며 더 나아가 해결책을 제시해줄 수도 있죠.


역사학은 과거의 사례와 사회 및 국가의 구조, 사회에 형성된 구조적인 틀을 볼 수 있게 해주며, 자신이 살아온 시대가 어떻게 발전해온 것인지 인지할 수 있게 해줍니다. 그러한 것들이 곧 사회학적 상상력을 이룹니다. 그렇게 얻어진 지성은 언어적으로 풀이할 수 있게 되는데, 어떠한 것을 알고 있거나 느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언어적으로 나타낼 수 없을 때 사람은 답답함을 느끼고, 그러한 답답함은 쉽게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억울할 땐 어째서 억울함을 느끼고 그것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하지만, 억울하지만 설명하기 어려우니 주먹부터 나가게 되는 거죠.  하지만 반드시 이러한 폭력으로 나타나는 건 아닙니다. 그 반대되는 현상이 발생하기도 하죠. 바로 '포기' 설명할 수 없으니 설명하지 않고 그저 그러한 문제를 묵묵히, 꿋꿋이 견디기만 하는 겁니다.



사토리 세대



대한민국. 헬조센에서는 청년층에게 출혈과 희생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말도 안 되는 논리와, 매우 위험한 친자본-친기업의 사상을 기반으로 더 쉽게 해고할 수 있는 법안을 마련하는 등 국민을 노예로 만들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죠. 이게 절대 과장이 아닙니다.


청년들에게 어떠한 지원도 없고, 오히려 매출 300억 청년 기업을 문 닫게 하는 등[각주:1] 청년의 성공을 막고 무너뜨리고 있죠. 이런 상황에서도 대학생들, 청년들이 취업을 못하고 어렵고 힘든 것이 개인의 노력과 정신력 탓이라 일갈하고 있는 게 현 집권층, 기득권들의 현실입니다.


그들 자신의 책임을 없애기 위한 탈정치화이죠. 탈정치화란 사회계층간 불평등과 같은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사회 갈등을 분석하고 이해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정치적 원인을 배제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모든 문제는 개인의 탓으로 귀결되는데, 현재 대한민국에 만연해 있는 문제죠. 주로 중장년층과 기득권층이 그렇습니다.


진짜 문제는, 기득권층은 자신들의 이권 때문에 그러한 헛소리를 하는 거지만, 중장년층은 그러한 이익관계와 무관하게 그들의 선동에 세뇌당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자신은 물론 자기 자식들 쉽게 해고 당할 수 있는 법을 마련하겠다는 데 좋다고 찬성하는 건 걍 병신이죠.



대한민국의 청년들과 대학생들은 인문학적 자식과 그러한 지식을 바탕으로 하는 사회학적 상상력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의 인식은 발생했지만, 어째서 그러한 문제가 발생한 것인지도 모르고,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도 답하지 못하고 있죠.


단순히 문제를 인식한다는 것만으로 괜찮아지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오히려 그러한 문제의 인식이 힘들게 할 수도 있는데, 문제는 인식했으나 어떻게 할 수 없다는 사실로 하여금 되려 절망에 빠뜨릴 수도 있죠. 내가 저들에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고, 지금 상태에서 더 나아질 수도 없다는 것을 안다는 게 말입니다. 



그런 한 세대의 집단 절망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것이 바로 득도세대. 사토리 세대입니다. 절망한 사람에겐 욕심이 없죠. 도전하거나 무언가를 희생할 배짱도 없기 마련이고 그저 지금의 생활에 만족하며 나아지면 좋고, 적어도 더 나빠지지는 않기만을 원하는 세대가 된 겁니다.


일본과 한국의 사회적 격차는 10년이라고 하죠. 앞으로 약 10년내에 한국도 일본과 같은 꼴이 될 겁니다. 현재 한국의 청년층은 절망해가는 과정 속에 있으며, 청년 세대는 문제의 원인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인식해도 해결할 힘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절망하게 될 겁니다. 당장 인구부터가 중장년층이 더 많고, 통진당 해체, 재보궐 참패, 무능한 문재인과 민주당, 역시 무능한 안철수의 야권 갈라먹기 등 맞서 싸울 야권의 힘을 너무나도 약하며, 심지어 적지 않은 청년층도 일베 등의 영향으로 극우화가 되었습니다.


즉, 더욱 더 우편향, 극우화된 한국에서 노동자와 인권, 소수자는 설 곳을 잃게 될 것이고, 소시민적 삶을 유지하는 것만으로 다행스런 사회가 될 것입니다. 젊은이들의 고통은 더욱 커지고 그러한 고통에 절망하고 절망에 익숙해지며 발전없는 진짜 헬조센이 완성될 거라는 거죠.


그나마 일본은 국력이 있고 여력이 있지만 한국은 그런 일본에 비해 한참 모자랍니다. 적어도 일본에선 프리터 생활만으로도 먹고 사는 데 전혀 문제는 없으니까요. 하지만 한국에선? 직장인도 노예로 살아야죠. 돈도 적게 버는데 나가는 돈은 더 많아지기만 하니까.



정말로, 이러한 헬조센이 고쳐지려면 지금 당장 모든 세대가 민주적 소양을 갖추게 되거나, 아니면 적어도 40대나 50대 이상 국민들은 다 사라져야 할 겁니다. 50대부터 새누리당 몰표 현상이 발생하는데, 그들은 이미 정상적인 판단력을 갖추지 못한 유신노예나 다를 바 없는 상태이기 때문이죠. 그 윗세대는 새누리당과 같은 극우파에게 세뇌당한 세대입니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공정한 정치경쟁을 하려면 그런 반칙 세대는 없어야죠. 일명 콘크리트 지지. 뭐, 나라를 팔아먹어도 무조건 새누리당 1번 찍는다는 사람 많잖아요? 그게 정상으로 보입니까?

  1. '매출 3백억' 청년 기업, 법 하나에 문 닫았다 http://media.daum.net/economic/all/newsview?newsid=20160105203509188&RIGHT_COMM=R3 [본문으로]
TRACKBACK 0 AND COMMENT 0




"인문학의 발전이 꼭 풍요롭고 행복한 나라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모든 역사상의 풍요롭고 행복했던 나라들은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가장 융성한 인문학을 꽃피운 나라들이었다."


인문학은 인간의 조건, 즉 인간다움의 특징, 인간의 삶과 사고에 관해 탐구하는 학문입니다. 또한 진리를 탐구하는 영역이기도 하지요. 인간의 본질에 대한 이해를 통해 인간과 인간 사회를 진일보시킬 수 있습니다. 또한 인간이 스스로를 앎으로써 진리의 탐구에서 똑바로 나아갈 수 있죠.


개개인의 차원에서도 역사나 철학과 같은 인문학을 공부하는 것은 뛰어난 통찰력을 가져다 주기도 하는데, 그러한 통찰력을 앞서 말한 인간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을 의미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인간이 만들고 구축하며 세상을 구성하는 모든 것을 뚫어볼 수 있게 만듭니다. 모든 뛰어난 인물들은 그러한 통찰력을 가지고 있고, 그러한 통찰력은 역사학, 철학과 같은 인문학의 깊은 탐구로 인해 얻어진 것입니다.


아는 만큼 세상이 보인다. 사실입니다. 공부를 하면 할 수록 세상은 다르게 보이고 처음엔 확실하다고 생각되게 보이나 이내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과정으로 나아가고, 그 이후로 뼈를 깍는 공부를 통해 철학적, 인문학적 갓난아기의 상태로 새롭게 보이고 알아가는 과정을 거치게 되죠. 그리고 그 상태의 극에 다다른 역사상의 선각자, 현자들이 바로 예수와 부처, 공자와 같은 인간을 뚜렷히 이해하고 인간이 나아갈 길을 수천년 앞서 제시한 자들입니다.


인문학을 '반드시' 공부해야할 이유는 없지만, 누군가는 '반드시' 인문학을 공부해야 합니다.



TRACKBACK 0 AND COMMENT 2
  1. Favicon of https://myahiko.tistory.com BlogIcon 무량수won 2014.10.22 23:02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저는.... 인문학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 마다 드는 생각은 누군가에게 공부하자고 하는 것이 아니라 정부 차원에서 연구하는 인문학도들에게 연구만 하면서 먹고 살만한 기반을 마련해주는 것이 더 좋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뭐든지 여유가 마음의 여유가 있을 때 좋은 생각이 나온다고 믿고(?)있거든요. 인문학도들이 편하게 공부하면 할수록 다른 사람들에게 좀 더 쉬운 인문학, 삶의 이유, 삶의 목적을 더 많이, 더 쉽게 이야기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 물론 안그럴 사람도 있겠지만요. 확실한 사실은 인문학을 재미있게 공부하고도 인문학자로 남아 있을 수 없는 이유는 사회적 안전망이 너무 없어서거든요. 그 덕에 왠만한 뒷받침 없으면 대학원 조차도 꿈꾸기 힘든 동네라... ㅜㅜ

    • Favicon of https://konn.tistory.com BlogIcon Konn 2014.10.22 23:17 신고 address edit/delete

      학문적 영역에서의 인문학도 한국에선 그 토양이 상당히 취약한 편인 것도 사실이죠. 하지만 전 그러한 학문적 영역에서의 인문학이 아닌 일반 대중의 교양 차원에서의 인문학도 상당히 중요하다고 봅니다.

      민주적 소양을 기르는 것은 그런 인문학을 통해서 확립될 수 있고 김치맨 클라스라 비꼬아지는 민도의 수준을 분명히 높은 수준으로 끌어 올릴 수 있다고 믿습니다. 물론 이것은 인문학보단 가정교육과 공교육의 확실한 상벌체제가 더 많은 영향을 미치긴 하겠다만 결국 그것도 인문학적 기반에서 나올 수 있는 것들이니..





역사는 자기인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뿌리는 무엇이며, 자신은 누구인가. 간단해 보이는 문장이고 단순해보이기 때문에 쉽게 와닿지 않겠지만, 이 문장이 단순히 있어보이기 위해 만들어진 문장이 아니라는 것을 역사를 공부하며 깨닳았습니다.


자신의 뿌리는 무엇인가. 즉, 나라는 존재를 이루는 수많은 문화적, 민족적 가치관과 그것을 공유하는 수많은 이들이 이루어져있는 사회-국가는 이 땅에 살았던 나와 그들(우리)의 조상에 의해 만들어졌고 유지되고 발전해갈 것입니다. 즉, 자신을 이루는 가치관들은 이러한 조상들에 의해 연속적으로 나에게 이어졌으며, 나라는 존재를 이해하기 위해선 조상들의 과거,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 길이라고 할 수 있죠.


역사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경험이며, 경험은 우리가 무엇을 했는지를 알려주며, 무엇을 했는지 안다는 것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알려줍니다. 역사를 통해 나의 조상, 혹은 모든 인류가 도달한 것들에 대해 아는 것은, 우리가,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려주는 것이고, 이러한 인식에서 발전의 기반이 형성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또한 어떠한 사회적 문제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는다는 것은, 어떠한 가치관에 의해 옳지 않다라고 인식되는 것에서 출발하는데, 그러한 가치관은 우리의 과거에서부터 어떻게 어떤 방향으로 형성되었고, 현재 어떤 형태로 존재하는지 알려주죠. 그런 까닭에 이러한 가치판단의 기준은 과거를 기준으로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과거와 단절된 이들이,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으려면 어째서 잘못되었는가를 알아야하는데, 그러한 판단의 기준이 되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결국 문제의식을 갖지 못한다는 것이고, 이는 곧 무엇이 문제인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모든 가치관은 과거에서 인간이 무엇을 했고 어떻게 했느냐에 의해 연속적으로 발달되고 생성된 것들이기 때문이죠.


그러기 위해선 역사를 공부할때, 역사적 사고력을 가질 수 있게 교육받아야 합니다. 단지 누가 몇년에 무슨 일을 저질렀다와 같이 무의미한 것을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누가 몇년에 무슨 일을 어떻게 왜 저질렀고 그러한 행동의 결과는 무엇이며 이후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 지에 대해 공부해야 합니다.


어떤 사건이 몇년에 일어났느냐 하는 문제는 기억 안나면 텍스트 찾아보면 그만인 시덥잖은 문제이고, 정작 중요한 것은 어째서, 왜, 어떻게. 이러한 것들이 중요하니까요.


우리나라 역사 과목의 문제점은 바로 이러한 지점에서 발생합니다. 중요한 것은 제대로 가르치지 않고, 이런 무의미한 것들을 외우게 함으로서 재미없는 암기과목이라는 인식을 만들어내고, 그러한 인식 덕에 그 누구도 공부하려들지 않으며 수능같은 시험에서도 소외되는 과목. 학문.


역사는 순수한 의미로 철학과 관계가 깊은 학문이며, 철학은 인간에게 깊이를 더해주는 학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사를 공부함에 따라 통찰력이 형성되고, 이러한 통찰력을 기반으로 깊고 섬세한 사고가 가능해짐에 따라 많은 것들을 생각할 여지를 남겨주며, 그러한 것들을 판단하고 평가하는 것의 기반은 당연 과거일테죠.


현재 한국에서 발생하고 있는 수많은 사회문제와 정치문제. 이러한 것들이 왜 잘못되었는가, 어째서 잘못되었는가를 이해하고 판단하기 위해선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우용 역사학자의 트윗들과 같이, 역사적 통찰력이 담긴 수준높은 판단력은 역사와 철학의 깊이있는 공부를 통해 만들어진 내공이니까요.


개인적으로 역사라는 것은 절대 쉽게 볼 수 없는 학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과학과 수학은 그렇지 않느냐라고 한다면 물론 절대 쉽게 볼 수 없는 것엔 동의하지만, 한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이라는 존재에게 역사는 과거도, 지금도, 미래에도 가장 중요한 근본적 지식이어야 하고, 민주주의 국가에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를 더욱 견고히 해주는 것도 결국은 역사라고 보니까요.


따라서 현재의 역사과목은 모든 과목 중 가장 중요한 과목으로 설정하고, 프랑스의 졸업시험과 마찬가지로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해마다 달라지는 여러 시대의 여러 주제를 놓고(예컨데 고대부터 근현대까지 시대를 구분해놓고, 각 시대마다 주제를 몇개씩 나눠놓는 식.), 시험을 보는 학생이 스스로 어떤 주제를 선택한 뒤 그것에 대해 논술하듯 작성해야 합니다. 그리고 체점자는 사학과의 교수 수십 수백명으로 하고 답안을 체점하게 하는 것이죠.


저 혼자만의 생각일지 몰라도, 역사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우민화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인간이 옳고 그름을 구분하는 기준은 자신이 소속된 사회에서 찾기 마련인데, 이 사회가 매우 글러먹게 타락해버렸다면, 예컨데 부정부패와 불평등, 차별이 일상화된 사회에 소속되었다면, 결국 그 인간은 그 집단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으니까요. 하지만 이러한 가치관의 한계, 인식의 한계를 벗어나게 해주는 것이 바로 과거, 역사일테죠.



TRACKBACK 0 AND COMMENT 6
  1. Favicon of http://simglorious.tistory.com BlogIcon 도플파란 2013.07.13 19:26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저도 동감합니다. 전공자로서 더더욱 공감가네요...

    • Favicon of https://konn.tistory.com BlogIcon Konn 2013.07.13 21:36 신고 address edit/delete

      역사라는 것도 재미없고 지루한 팩트 외우기가 아니라 역사의 흐름과 그 과정, 결과를 제대로 배우면 정말 재밌죠. 그러한 배움의 과정에서 역사적 사고력이 생기는 거구요.

  2. Favicon of https://myahiko.tistory.com BlogIcon 무량수won 2013.07.16 16:30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역사는 중요하지만... 역사가 수능 필수로 들어가는 것에는 반대하는 입장입니다. 수능 필수가 된다고 학생들이 역사에 대해서 좀 더 가치를 높게 쳐주고 또 그것을 바탕으로 바른 생각을 가지는 것은 아니거든요. 말씀하신대로 역사에 대한 제대로 된 교육이 실천되지 않은 이상, 그 무엇을 하든 역사는 주입식 교육의 하나의 형태로써 남을 뿐이기도 하구요.

    저는 역사가 역사 그 자체로써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역사를 통해서 사건과 인물등을 좀 더 다양하고 넓게 볼 수 있는 학문이기 때문에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똑같은 사건을 보고도 다른 이야기 다른 생각을 하게 되는 것 처럼 역사도 누구의 입장에서 혹은 어떤 각도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굉장히 다른 이야기가 펼쳐지게 되거든요.

    20년 전에 드라마로 그려지는 광해군이 엽기적인 폭군으로 그려지는 반면, 요즘에는 굉장히 대단한 사람인데 정치적인 희생양이 되었다는 식으로 그려지는 것 처럼 말이죠. 이건 학계에서 바라보는 시각의 변화기도 하구요. 이렇게 인물에 대한 해석이 변하는 건 주어지는 증거의 한계가 있기 때문이지요.

    물론 이런 교육이 이뤄지려면 현재의 교육제도와 방법론을 모두 버리고 새로운 종위 위에서 다시 써내려가야 하는 문제가 있긴 하지만요.

    그래서 지금 상황에서 교육에 대해서 떠들어야 할 것은 국사교과 과정을 수능에 필수로 넣느냐 넣지 않느냐는 그리 큰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더욱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면 아이들의 인성이 지금처럼 미친 망아지 처럼 날뛰는 상황을 바로잡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지요. 저는 역사적 인식 부재와 쉽게 내뱉는 타인에 대한 모욕에 관련된 것들은 모두 비뚤어진 교육 탓이라고 보고 있거든요.

    역사를 얼마나 배우는 가보다, 잘못된 생각을 어떻게 바로 잡고 반성하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 Favicon of https://konn.tistory.com BlogIcon Konn 2013.07.16 19:36 신고 address edit/delete

      공감합니다. 지금과 같은 똑같은 암기 위주의 주입식 교육은 역사의 가치를 깍는 것이죠.

      역사를 공부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사의 어떤 특정한 팩트를 둘러싼 그 맥락, 의미와 제반 상호관계 등 입체적으로 그것을 이해하고 더 나아가 해석과 평가를 할 줄 알아야하는 것이죠. 한마디로 역사적 사고력을 기를 수 있게 해야한다는 것.

      현재와 같은 식의 교육이면 차라리 역사교육 자체가 별 다른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고 해도 할 말 없을 겁니다. 실제로 현재의 역사교육은 대학을 가서 전공을 하지 않는 이상 그 자체로 뭔가 얻을게 없기 때문이죠.

      현재의 교육제도와 방법론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은 수차례 나왔죠. 결국 그러한 교육제도와 방법론이 결과적으로 현재 역사 과목을 죽여놓은 것처럼요.. 정말 이 교육쪽은 어떻게 개혁될지..ㄷㄷ;;

      저는 현재 아이들이 미친 망아지처럼 날뛰는 것은 공교육보다 부모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가정교육의 측면이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http://konn.tistory.com/178
      이 글에서 이야기했죠. 사실 이 글도 수정이 필요한데, 부모님들에 의한 가정교육이 이루어지기 위해선 아이와 같이 있는 시간이 많아야하는데 그러려면 일단 맞벌이 풍조부터 어떻게 해야하니...

  3. Favicon of https://sephia.tistory.com BlogIcon sephia 2013.07.29 20:58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역사학과 출신으로서 동의합니다. 가정교육이 안 되는 상황에서 공교육 강화요? 어렵죠. -__-;;;;;;;

    그나저나 역사를 가르치는 것은, 암기보다는 내가 그 당시 사람이라면 어때야 했는가에 대한 것들을 가르치고, 독서를 통한 상황 인식 등으로 전환해야 할텐데... 그놈의 제도가 참.... ㄱ-

    • Favicon of https://konn.tistory.com BlogIcon Konn 2013.07.29 21:01 신고 address edit/delete

      역사라는 노다지를 참 멍청한 방법으로 캐고 있다고 해야할까요.. 안타깝죠.





Cogito, ergo Sum.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가 남긴 유명한 말입니다.


그러나 이 말의 진짜 의미에 대해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이 짧은 문장 하나로 르네 데카르트는 철학계 최고의 스타로 발돋움했습니다. 그 어려운 철학계에서 한방에 스타가 될 정도면 이 문장이 가진 의미의 가치는 얼마나 될까.



감각은 인간을 속일 수 있습니다. 기만할 수 있죠. 감각하기에 따라 뜨거운 물도 따뜻하게, 혹은 따뜻한 물도 뜨겁게. 반대로 차가운 물도 미지근한 물로 느낄 수 있습니다. 같은 방식으로 상대주의에 의해 객관적 진리란 있을 수 없죠. 데카르트는 이 점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감각은 때떄로 인간을 기만하므로, 감각으로 얻어지는 정보는 확실할 수가 없다는 것. 하지만 감각이 아닌 이성의 추리를 통해 얻어지는 지식은 확신 할 수 있습니다.


예컨데 수학적 추론, 논리의 영역이죠. 혹은 물질의 부피와 질량. 직관적인 사실입니다. 여기서 지식을 얻는 자신의 추론적 과정이 어떤 이유에 의해서든(사악한 악마나 전능한 신이 인간의 인식을 속이고 경험까지 조작할 수 있는 경우) 오류를 범하도록 조작되어있다면? 1+1=2인데, 우리는 1+1=3으로 생각하게 되는 경우. 이러한 직관적이고 객관적인 지식의 영역까지 부정했다면 자신이 확신할 수 있는 것은 회의의 주체인 나 자신 뿐입니다. 인간일 수도 있고, 인간과 다른 형태일 수도 있는 생각하는 주체는 존재하는 것이며, 생각하기 때문에 비본질적인 것(경험, 편견, 오류, 감각 등)을 의심하고 제거할 수 있죠. 이런 의심의 능력을 통해 최종의, 최후로 남는 명증한 진리가 바로 'Cogito, ergo Sum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내 감각과 이성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모든 지식과 추론적 과정이 진실을 담고 있지 않을 경우-왜곡되고 기만되어질 경우, 그것을 회의하는 나 자신은 확실히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문장입니다.



하나의 철학적 사유를 소개해보겠습니다. 일명 통 속의 뇌라는 사고실험인데, 굉장히 재미있고, 본문과 연관지어 생각하면 본문의 이해가 빠를 것입니다.


만약 우리의 뇌를 몸에서 때어낸 뒤, 통 속에 넣고 생명력을 유지시키며, 모든 외부의 자극을 컴퓨터로 만들어내 뇌에 주입하여 가상의 환경을 느끼게 만들 수 있다면, 그렇게 감각하는 뇌는 자기 자신이 진짜 세계와 마주하고 있는지, 아니면 주어지는 자극에 반응할 뿐인지에 대해 구분할 수도, 증명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진짜 이 세계에서 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통 속에 뇌만 담긴채 거짓된 감각만을 느끼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마 매트릭스가 생각날 겁니다. 진짜 세상에선 육체의 생명만을 유지시킨채 잠들어있고, 1990년대 후반이라는 환상 속에 모두가 살고 있는.

TRACKBACK 0 AND COMMENT 1
  1. Favicon of https://soulco.tistory.com BlogIcon 지성의 전당 2019.02.02 19:56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안녕하세요.
    저는 지성의 전당 블로그와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데,
    존재한다 글이 있어서 댓글을 남겨 보았습니다.
    제가 또 댓글을 달았다면 죄송합니다.
    인문학 도서인데,
    저자 진경님의 '불멸의 자각' 책을 추천해드리려고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와 죽음에 대한 책 중에서 가장 잘 나와 있습니다.
    책 내용 중 일부를 아래 글로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제 블로그에 더 많은 내용이 있으니 참고 부탁드립니다.

    정보를 드리는 것뿐이니
    이 글이 불편하시다면 지우거나 무시하셔도 됩니다.
    ---

    인식할 수가 있는 ‘태어난 존재’에 대한 구성요소에는, 물질 육체와 그 육체를 생동감 있게 유지시키는 생명력과 이를 도구화해서 감각하고 지각하는, 의식과 정신으로 나눠 볼 수가 있을 겁니다.

    ‘태어난 존재’ 즉 물질 육체는 어느 시점에 이르러 역할을 다한 도구처럼 분해되고 소멸되어 사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 육체를 유지시키던 생명력은 마치 외부 대기에 섞이듯이 근본 생명에 합일 과정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육체와의 동일시와 비동일시 사이의 연결고리인 ‘의식’ 또한 소멸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추후에 보충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이러한 총체적 단절작용을 ‘죽음’으로 정의를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감각하고 지각하는 존재의 일부로서, 물질적인 부분은 결단코 동일한 육체로 환생할 수가 없으며,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의식’ 또한 동일한 의식으로 환생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정신은 모든 물질을 이루는 근간이자 전제조건으로서, 물질로서의 근본적 정체성, 즉 나타나고 사라짐의 작용에 의한 영향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타날 수도 없고, 사라질 수도 없으며, 태어날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는 불멸성으로서, 모든 환생의 영역 너머에 있으므로 어떠한 환생의 영향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신에 대한 부정할 수가 없는 사실이자 실체로서, ‘있는 그대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본체에 의한 작용과정으로써 모든 창조와 소멸이 일어나는데, 누가 태어나고 누가 죽는다는 것입니까? 누가 동일한 의식으로 환생을 하고 누가 동일한 의식으로 윤회를 합니까?

    정신은 물질을 이루는 근간으로서의 의식조차 너머의 ‘본체’라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윤회의 영역 내에 있는 원인과 결과, 카르마, 운명이라는 개념 즉 모든 작용을 ‘본체’로부터 발현되고 비추어진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자신을 태어난 ‘한 사람’, 즉 육신과의 동일성으로 비추어진 ‘지금의 나’로 여기며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로 착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한 사람’은 스스로 자율의지를 갖고서,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행동한다고 믿고 있지만 태어나고 늙어지고 병들어지고 고통 받고 죽어지는, 모든 일련의 과정을 들여다보면 어느 것 하나 스스로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책임을 외면하기 위해 카르마라는 거짓된 원인과 결과를 받아들이며, 더 나아가 거짓된 환생을 받아들이며, 이 과정에서 도출되는 거짓된 속박, 즉 번뇌와 구속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환영 속의 해탈을 꿈꾸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저는 ‘나는 누구이며 무엇이다’라는 거짓된 자기견해 속의 환생과 윤회는, 꿈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습니다. 더불어서 ‘누구이며 무엇이다’라는 정의를 내리려면 반드시 비교 대상이 남아 있어야 하며, 대상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는 그 어떠한 자율성을 가졌다 할지라도, ‘그’는 꿈속의 꿈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뚜렷하고 명백하다 할지라도 ‘나뉨과 분리’는 실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는 ‘나’에 대한 그릇되고 거짓된 견해만을 바로잡았을 뿐입니다.

    https://blog.naver.com/ecenter2018





ARTICLE CATEGORY

분류 전체보기 (611)N
취미 (611)N
백업 (0)

CALENDAR

«   2019/07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ARCHI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