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표의 제시는 그 자체로 동기가 된다. 정답이 없는 삶에서 해야 할 무언가를 제시한다는 것은 방황을 방지하고 부여된 목표에 충실하게 이행하여 내제적 만족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이는 다양성의 시대에서 더더욱 그렇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사람이란 가진 바 조건에 따라 할 수 있는 범위가 한정되어 있고, 그러한 범위 내에서 무엇을 할 지 골라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그 자신의 향후 미래를 결정하는 일이기도 하고, 투자에 따른 비용이 있기 때문에, 20대의 5년을 사업에 투자한 뒤 실패하면 5년 동안의 시간과 경제적 손실이라는 결과만 남는다. 그렇다고 새로운 무언가를 시도하기엔 손실이 크다. 모든 사람이 다 성공할 수는 없으니까.
이러한 개인적 단위에서 발생하는 미래 계획과 비전과 별개로 무리 생활을 하는 존재는 자신의 무리의 방향성에 민감하다.
이는 더 고차원적인 사회적 동물인 인간에게 특히 더 그러하다.
대의.
혹은 시대정신.
인간은 정치적 행위에 민감하고 집단의 향방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특히 자신이 그러한 결정권을 가지고 있을 때 더더욱 그러하고, 민주주의를 비롯한 현대 국가들에게 이 나라의 방향성, 국가적 비전, 사회적 지향점을 아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모든 정치적 행위에 있어 전제가 되는 것이 존재하기 마련이고, 그것은 그 사회의 가장 낮은 층위에서 윗 층위에 투사하는 가장 강력한 영향력이기 때문이다.
대의의 존재가 개인들을 표류하지 않고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한 방향성이 국가의 역량을 집중시키고 불필요한 사회적 낭비와 방황에서 시작되는 불안과 불만을 억제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대의가 될 수 있을까? 당연히 좋은 것, 바람직한 것, 항구적이고 발전적인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어디 꼭 그럴 수 있었겠는가. 좋은 것이란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가치인 것을.
우리는 어떠한 대의를 가지고 있었는가.
조선은 사대부에게 대의였고, 조선이 멸망했을 때 광복은 조선인들의 대의가 되었다. 한국 전쟁 이후 한국인들의 대의는 반공이었고, 그 나머지 반쪽엔 경제 성장이라는 강력한 대의가 한국인들의 정신에서 작동했다. 그것이 현실에서 어떤 표현형으로 나타났는가와 별개로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생존과 번영. 모든 생명이 추구하는 가치였고,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성공적으로 작동했다. 그러한 반면, 통일이나 평화, 민주주의와 자유라는 가치 역시 꾸준히 한국인들의 정신을 자극하였다.
이러한 것이 있을 때 사회 불만과 불안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지금보다 치안은 불안정했고, 식민지는 가장 큰 생존의 위협이자 차별의 근원이었다. 그럼에도 구성원들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가. 무엇을 원하는가를 물어보았을 때, 나오는 답이 있다. 한때 한국인들에게 우리의 소원은 독립이었고,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었다. 경제성장을 통해 잘 먹고 잘 살자에서 출발하는 표어들이 있었고, 그러한 대의를 위해 더 많은 고생을 기꺼이 짊어진 이들이 있었다. 그것이 대의이고, 시대정신이었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떠한가? IMF를 겪은 한국인들에게 경제적 실패의 공포는 심대한 것이었고, 국가적 규모의 구조 조정에 따라 한국인들의 세계관은 크게 변화했다. 좀 더 세속적으로 변화했다고 말할 수도 있고, 좀 더 노골적으로 천박해졌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에 따라 한국인들에게 대의는 변질되었거나, 점차 사라졌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말은 2010년대 전후로 북한의 도발과 충격 속에서 적대감이 평화적 방법론을 압도하기 시작했고, 경제는 이미 부족함 없는 수준까지 도달했다. 소련의 해체, 남북의 격차 속에서 반공은 더 이상 설득력을 얻기 어려워지고 있고, 대안으로 나온 반중은 경제적 협력이라는 또 다른 가치 속에서 균형을 잡기 어려워졌다.
고전적 반공처럼 무조건적 적대와 증오만으로 다루기엔 접하는 지점이 너무 많고 깊기도 했다. 단순 반감과는 별개로 균형적인 입장에서 외교를 취해야 하는데 기존 한국인들에게 제시되었던 반공 방법론으로는 불가한 접근이다.
따라서, 현 시점에서 사람들은 대의를 잃고 있다. 대의가 상실되는 시대. 이는 비단 한국만의 일이 아니다. 20세기 당시 제시되었던 대의들은 어느 정도 달성했거나 또 다른 가치 속에서 중요도가 감소했고
그러한 변화 속에서 새롭게 제시되는 대의가 없는 결과 우리는 어떠한 병적 징후의 등장을 목도해야만 한다.
낡은 것은 죽어 가는데도 새로운 것은 아직 탄생하지 않았다는 사실 속에 위기가 존재한다. 바로 이 공백 기간이야말로 다양한 병적 징후들이 출현하는 때다.
-안토니오 그람시
세계의 극우화는 단지 경제 발전이 어려워졌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부의 재분배 문제가 더 클 것이다. 서구의 원죄나 다름 없는 난민 문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고 현대화와 더불어 강성해진 국가 체제는 외부 정체성에 대한 적대감이 커지게 되었고, 기존에 문제되지 않았거나 지적되지 않았던 지점들이 지적되며 그것을 다루기 위한 갈등과 충돌이 고도화되기도 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경제 성장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이고 대의가 될 수 없다. 심지어 이미 세계권에 속하는 국가들에게 경제는 궤도에 오른 것이기에 대의가 될 수 없다.
그러한 이유로 대의가 상실되어 가는 시대 속에서 사람들은 표류하기 시작했고, 대체로 과거의 것을 선택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더 단순하고, 강력하며, 과격하지만서도 그럼에도 대답과 방향성을 제시해주기 때문이다.
왜 극우화 되는가? 그들이 저능하고 멍청하기 때문에? 어쩌면 그럴 수도. 하지만 반대로, 그들이 원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과 감성을 자극하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다. 단순한 것은 누구든 좋아한다. 쉽고 간단하니까. 진보적 의제는 특유의 지적 허영심과 도그마에 빠져 가르치려 들거나, 어려운 내용을 말하기 때문에 단순한 것만을 다룰 수밖에 없는 이들에겐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다. 살아온 데로 살아온 것 뿐인데 잘못되었다고 말하며 비난하거나 가르치려 드는 것을 누가 받아들이겠는가. 말이 맞고 아니냐를 떠나 재수가 없고 꼴보기 싫다는 것이다.
진보는 대의를 제시하지 못했고, 그 이전에 정치적 승리를 얻어내지 못하거나, 그것을 이용할 줄 몰랐다. 해야 할 일은 너무 많은데, 할 수 있는 것을 골라야 했다.
그러한 대의의 상실이 이루어지는 시대 속에서 극우화 되는 것은 그들의 대의가 누군가에겐 받아들여지거나 그것이 대안처럼 여겨지기 때문이고, 그나마 제시된 것이 극우의 것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방황하고 있고 가치가 표류되어 혼란스러워 하고 있다. 무엇을 해야 하는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목적으로 삼아 살아가야 하는가? 나 개인의 삶이 아니라
더 거대한 흐름 속에서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반공이 대의이던 시절 국가 안보를 위해 안보 의식을 고취시키는 마음을 가지는 것만으로도 충실함을 느낄 수 있었다. 경제 성장이라는 대의가 국민들을 지배하던 시절 늦은 시간까지 야근하고 주말에도 출근을 하더라도 어느 날 잠깐 나의 이 고생이 나와 내 가족, 우리 후손들에게 더 나을 미래를 만들 것이라는 상상을 하며 버틸 수 있었다. 대의라는 방향성이 가지는 힘이다. 국가를 되찾기 위해 죽음을 마다하지 않고, 광복을 맞이 할 때 기뻐할 수 있게 만드는 것.
대의. 시대 정신이 있었을 때 우리는 고생했을 지언정 방황하지 않았다. 그 대의, 시대 정신이라는 것이 방향성을 제시해줬고, 무엇을 해야 할 지 알지 못하는 이들이 자신의 재능과 시간을 낭비하지 않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능력이 없는 게 아니라 뭘 할 지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니까.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항상 답을 원했고, 과거엔 더 단순한 사회와 그것을 충분히 다룰 수 있었던 극소수의 지식인, 종교인들이 있었다. 계시자, 예언자, 선각자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렸던 그들이 사람들에게 대의를 제시했고 방향을 가리켜 이끌었다.
공자는 인의예지로써 사람과 사회가 어떠한 모습이어야 하고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를 제시했고, 예수는 사랑과 용서를 제시했다. 부처는 덧없음을 이야기하며 집착하지 않는 삶의 태도를 제시했다. 그러한 대의는 수천 년 동안 사람의 세계관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고 인간 역사상 가장 중요한 질문 : 어떻게 살 것인가. 에 대한 대답을 제시했으며, 그 설득력과 효용성은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적확했다. 범인류에 대한 대의는 제시되었지만 각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제시되어야 하는 대의. 시대 정신으로 대표되는 가치는 어떠한가. 어둠 속에서 혼란과 불안에 떠는 이들에게 한 줄기 빛이 되어줄 누군가, 혹은 무언가가 있어야 하는데 지금 그것이 없다.
그 결과 개인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인 생존과 번영을 위한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다. 어떻게든 돈/권력을 많이 확보하여 자강하는 것.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나(와 내 가족)만 잘 먹고 잘 사는 것. 그리고 그것을 위해 도덕과 윤리 규범에 구속 받지 않을 것.
인류사 3대 성인이 인간이란 어떠해야 하는가를 제시했지만, 그것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그 종교성, 전근대적 이념이라는 한계에 직면하여 정식으로 채택된 국가는 거의 없다. 그러한 문제로 일반 영역에서의 도덕은 종교에서 기반한 것들이 많겠으나, 실질적으로 세속적 논리로 구성되어야 했다. 따라서 그것을 지키지 않았을 때 발휘되는 사회적 제재는 세속 국가이기 때문에 이전 시대 야만성, 중세적이라 비판 받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없게 되었고, 철저히 사회적 인식과 법률에 기반하여야만 한다.
그러나, 이전 시대와 지금 시대를 통틀어 언제나 인간이 문제였듯이, 그러한 도덕적 요구를 자신의 성취, 일신의 영달만을 위해 기꺼이 무시하거나 희생할 수 있는 이들이 있고, 이것은 현대 사회에서 더 큰 규모로 문제를 일으켰다. 다룰 수 있는 자원이 더 많고, 다룰 수 있는 권한이 더 크기 때문이다.
결국 어떤 사회에서 어떤 것이 가장 중요한 지에 대해서는 조금씩 차이가 있겠으나, 결국 부와 명예(권력)을 추구하는 본성이 있는 바, 제시된 대의를 도구 삼아 부와 권력을 획득하려는 이들이야 당연히 있겠지만, 그러한 권력자가 아닌 이들에게 대의는 삶의 목표를 지정해주는 요소이다.
그러한 요소가 사라진 시대에 나 혼자 잘 먹고 잘 산다는 원리에 충실해질 수밖에 없으니 일반 사회에서 볼 수 있는 도덕과 윤리는 방황 속에서 해체되어가고 더 많은 돈을 얻어내고, 더 높은 자리와 더 강한 권력을 획득하게끔 만든다. 도덕과 윤리는 그 자체로 목적일 수도 있겠으나, 단지 지켜야만 한다고 지키고자 하겠는가. 종교는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교리였고, 인의예지는 사회 규범을 넘어 사회를 규율하는 원리였다. 도덕과 윤리를 지켜야 한다면 대의로서 그것을 납득하거나 받아들이게끔 해야 한다. 왜 착하게 살아야 하는가에 교과서적인 답변은 모든 것에 질문을 던지는 시대에 어울리는 답변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도덕과 윤리와 같은 규범을 잘 지키는 것보다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자는 결론이 나오는 것은 특이한 일이 아닐 것이다. 무엇을 해야 할 지 알 수 없다면 일단 주머니를 채워야 하고, 내일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면 당장 배를 채우는 게 급선무니까.
결국 IMF와 이후 시민 사회의 확장과 함께 한국인에게 제시 되는 대의는 뚜렷하지 않고, 결국 남는 건 먹고 사는 것, 성공하며 떵떵 거리는 것으로 수렴되는 건 거의 운명적 귀결이다.
이러한 세태 속에서 변화를 만들기 위해선 대개 변수가 필요하다. 물질이 임계에 달하면 성질이 변하듯, 현상 역시 그러하다. 우리의 사회적 압력(Social Pressure)이 사회적 압박(Social Stress)이 되어 임계점에 다다를 때 거대한 사회적 변혁이 발생한다. 혁명, 내전, 전쟁, 쿠데타 등 체제의 변화가 발생할 정도의 거대한 변혁이 발생하게 되는데, 이러한 변화에 의해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고 가치관, 세계관의 변화가 발생한다. 기존의 환경과 조건들이 변화하게 된다면 당연히 그 속에서 살아가는 개인-집단의 반응 역시 달라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변혁이 없다면 구성원의 세계관 변화는 이루어지되, 기존 체제의 관성, 연장이라는 맥락 속에서 이루어지는 점진적 변화에 불과하다. 그러한 변화 폭이 결코 좁지는 않을 것이지만, 사람의 생각이라는 게 세대마다 다르지 않겠는가.
세대에 따라 살아가는 국가의 모습, 이해하는 체제의 형태가 다르기 때문에 갈등은 발생하고, 이러한 갈등이 국가 체제와 대의적 지향의 근본적인 충돌점이 된다면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협력은 불가능할 것이다.
여전히 반공을 국시로 여기는 이들이 대중 정책은 물론 아시아-태평양 외교를 어떻게 현실적으로 이끌어갈 것인가. 반대로 어떠한 대의로 지향점도 없는 이가 어떻게 국가를 이끌고 국정을 지휘할 수 있을까. 세상은 변화하는데 단지 현상에 대응만 하며 유지만 할 것이라면 지도자를 뽑을 이유가 없다. 그저 관료들로만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변화하고, 대응해야 하고, 그걸 넘어 미래를 고려하며 준비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를 받아들이고 나아가게끔 해야 하는데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만 골라서 없애버릴 수도 없지 않겠는가. 결국 바뀌어야 하는 건 사람의 생각인데, 이 생각을 바꾸기 위해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사상 무기가 바로 시대정신Zeitgeist이다.
대규모로 사람의 생각을 변화 시키는 것. 이념이든, 사상이든 하나의 시대 정신 속에서 협력점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진보든 보수든, 좌파든 우파든 산업화 시기 한국이라는 국가에서 경제 발전이라는 대의, 시대 정신은 정말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지금 우리에게 제시되어야 할 대의는 무엇이고, 어떤 시대 정신이 필요할까? 다양성 속에서 표류한 이들에게 어떤 별이 떠서 방향을 지시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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