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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며,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 - E.Kant
by Ko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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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에 해당되는 글 5건

  1. 2018.09.25
    감정과 판단 능력에 대해서.
  2. 2018.03.04
    맞는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
  3. 2016.04.28
    무엇이 좋은 감정인가. 인사이드 아웃 리뷰.
  4. 2014.05.13
    나는 이성적이다. 쿨뽕. 4
  5. 2013.09.06
    상식에 비추어 생각해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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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감정을 배재하면 더 올바른 판단을 냉철하고 이성적으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감정이라는 기반이 없다면 사람은 어떠한 판단도 내릴 수 없는 혼란에 빠질 것입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감정을 배재한다는 것은 그것을 철저히 통제한다는 것이지 그것을 아예 없애버린 채 판단을 내리는 게 아니기 때문이죠.



모든 판단은 자극이 이루어진 뒤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고, 그 감각이 뜨겁다, 차갑다, 보다와 같은 감각적인 것이 있는가 하면, 어떠한 사회적 경험이나 감정적 교류와 같은 감성적인 것도 있습니다. 불에 손을 넣어보기 전에는 불이 뜨겁고 위험하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그러한 경험이 지식이 되어 판단으로 이어지는 거죠.


이러한 간단한 도식에서도 감정이 완전히 사라진다면 고통은 느낄지언정 그것에 어떠한 위험성이나 거부감을 느끼지 못합니다. [각주:1]불에 대한 공포가 있어야 불을 능동적으로 피할 것이고, 불편함을 느껴야 그것을 배제하고자 할테죠. 따라서 감정이란 판단의 첫 문턱, 혹은 디딤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요컨데, 감정이 없다면 판단의 동기조차 없습니다. 



좀 더 고차원적인 경험과 관계에서도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타인과의 관계나 어떠한 행동판단에 있어서 감정, 혹은 감정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결여된다면 이성적인 판단을 내릴 수 없습니다. 실제로 신경학적으로 감정이 없는 사람은 이성적인 판단을 내릴 수 없습니다. 그에 따른다면 (감정 자체가 없는 사람은 없으니..) 감정의 공감능력이 결여된 이들은 대체적으로 사회성이 떨어지는 경향성이 있고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는 사회생활을 할 때 올바른 판단과 행동을 선택하지 못하죠.


그러한 문제는 앞서 이야기한 것과 같이 어떤 것이 올바른 것인지 판단할 수 없게 되는데, 자신에게 좋든 안 좋든 간에 왜 자신이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전혀 인식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립니다. 


어떤 것에 대한 호불호가 작용해야만 인간은 판단과 행동으로 이어지는 것이고, 이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이성 자체가 없는 것은 아니니 어떤 것이 불리한 것인지에 대해 인식할 수는 있지만, 왜 그것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알 수 없게 되면서 결과적으로 큰 손해나 위험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인류가 공통적인 인식과 사회적 규칙, 룰이 생겨나고 변화하고 이해하고 유지되며 그것을 사회성, 혹은 상식이라 부르는 

이유는 인류가 공통적으로 비슷한 방식과 도식의 감정과 비슷한 수준의 공감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억울하게 손해를 본다면 그에 대해 대부분은 비슷하게 피해자에게 감정이입을 할 것이고, 비슷한 지점에서, 비슷한 방식으로, 비슷하게 화를 낼 겁니다.


하지만 감정이 없거나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이들은 이러한 능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에 올바른 판단이나 행동을 할 수 없게 되죠. 가령 사이코패스는 누군가 떨어져 크게 죽거나 죽어도 남들은 놀라거나 공포에 빠지거나 충격을 받기보단 그 상황이 우습다고 웃을 수도 있는 법이며, 이는 사회적으로 큰 지탄을 받게 될 겁니다. 



감정이 없는 사람은 어떠한 상황이나 판단의 상황에서 판단의 디딤돌이 없기 때문에, 어디로 가야할지, 어떻게 가야할지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없게 되고, 결코 이성적일 수 없는 판단을 내리게 됩니다. 감정이 없는 사람은 항상 이성적이고 냉철한 판단을 내리는 게 아니라 어떠한 선택과 판단을 내려야할지 모르는 혼란 속에 빠져 있는 인간에 가까울 겁니다. 

  1. 좀 모호하게 서술하게 되었는데, 정확히 말하자면 어떤 것이 자신에게 불리한 지는 인식할 수 있지만, 왜 자신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 쪽으로 선택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동기부여가 되지 않습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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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본인이 항상 맞는 말을 한다곤 생각하지 않지만, 이 블로그에서 쓴 글에서 제대로된 '비판'을 시도한 이는 진짜 거의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적습니다. 제가 글을 장황하게 쓴다는 자각은 있지만, 이는 제가 글을 이해하기 쉽게 쓰고자 함에 따라 글이 쭉쭉 늘어지는 거라서, 그리고 필력이 고수들에 비하면 일천하기 때문에 정확한 용어와 간단한 표현을 사용해서 누구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글을 쓸만한 수준의 능력에 도달하지 못해서 이기도 합니다.


어찌됐든, 비단 저 뿐만 아니라 많은 지식인들의 글과 그 반응에서 찾아볼 수 있는 현상이 있는데, 많은 이들이 맞는 말을 하고 정론직필을 써도 그 글을 받아들이지 않고 비난하거나, 무시하는 경우가 많다는 겁니다.


이러한 현상은 그에 대해 비판을 받는 쪽, 혹은 그러한 이념과 사상, 가치관을 공유하는 이의 반응이라는 점과, 특히 주목할 점은 그 글의 어조가 세고 감정적이며, 조롱과 비난의 강도가 셀 수록 발생한다는 거죠.


쉽게 말해서 진중권이 맞는 말을 하지만, 그 강도가 너무 세기 때문에 감정적인 반발이 발생해서 비판 대상이나 그 진영에 속하는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겁니다.



물론 순수 논리의 영역에서 중요한 건 그것이 논리적 정합성을 지녀서 합리적 사실을 지적하고 그것을 근거하거나 증명했느냐입니다.


하지만 실제 현실에선 그런 식으로만 따지지 않게 되는데, 이는 인간이 그리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인격자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실상 이러한 문제에 있어서 논리적 훈련이 잘 이루어지고 감정적 통제를 잘 수행하지 못하는, 훈련된 지성과 정신적 수양이 부족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한 사고를 잘 할 수 없는 것이 그 이유이죠.


어떠한 주장에 있어 그것이 참이냐 아니냐, 그것을 이루는 논리와 합리적, 객관적 근거가 얼마나 잘 구성되어 주장을 뒷받침하느냐가 아니라, 그 주장이 자신의 기분을 얼마나 나쁘게 하느냐라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맞는 말을 좆같이 하면 사람들은 그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이런 현상은 단기적으로 서로 진영간의 갈등과 분쟁을 심화시키고 각 진영끼리의 이해와 합의가 이루어질 수 없는 환경을 조성하며, 이념이나 진영 그 자체에 매몰되게 만들기 때문에 굉장히 비건설적이고 비생산적입니다. 심지어 해악적이기까지 하죠. 개인과 집단을 가리지 않고.



그런 의미에서 고백하건데, 저 또한 그러한 사실을 일찍부터 알고 있었음에도 자신의 감정에 매몰되어 '적'으로 여겨지는 집단 따위에게 가멸찬 비난을 던진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제 실수이기도 합니다. 이는 (그 종류와 성질과 별개로) 이러한 지성과 지식에 어떠한 재미나 성취를 느끼는, 부끄럽지만 저 같은 사람들 또한 그것을 잘 통제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설사 저보다 뛰어난 사람들이라고 해도 인간이고 감정이 정확히 기능하는 한 피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죠. 그 한계선은 사람마다 다를 뿐이고요.


그런데 하물며 일반인들, 대중들은 어떻겠습니까? 이러한 지적 훈련이 잘 되지 않은 이들에게 있어서 그들에게 정신적 성숙과 수양이 있다곤 해도, 그러한 감정적인 영향에서 벗어날 수는 없기 때문에, 감정적으로 마음에 안 드는 표현을, 공격적이고 조롱스러운 레토릭으로 전개할 경우 당연히 반발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것이 아무리 논리적 정합성이 높고, 그 구조의 짜임새가 훌륭하며, 근거의 배치와 논증 과정이 정확하다고 해도 말입니다. 쉽게 말해서, 아무리 맞는 말을 해도 좆같이 쓰면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논리와 그 주장의 객관성과 별개로, 그러한 것을 도구로 하여금 상대방, 독자를 공격하기 때문에, 그러한 것과 접붙혀진 글쓴이의 비난과 조롱에도 동의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자신에 대한 공격과 조롱을 아무런 반발과 반응 없이 수용할만한 사람들은 없겠죠. 그런 면에서 예수나 부처, 교황 같은 이들은 어마어마한 아다만티움 멘탈이었지 않을까 싶은데, 이런 건 뭐 별로 중요한 건 아니고, 중요한 건 남에게 자신의 주장을 설득하려면 아주 당연하게도, 침착하고 차분한 작문으로, 감정적 반발을 이끌어내지 않고, 충분히 설득력 있을 수 있는 독자 위주의 글을 써야 한다는 겁니다.


가령 제 글의 경우(비단 블로그에서 뿐만 아니고, 게임 등에서 발생하는 분쟁에 있어서도;) 자기 자신이나 나와 같은 관점을 공유하는 이들에게 심리적, 말초적 쾌감을 주고자 하는 강렬하고 날카로운 표현으로 비난과 조롱을 퍼부었고, 이는 읽는 이로 하여금 반대파에게 설득의 기능을 전혀 할 수는 없었습니다.


사실 앞서 말했듯이, 이러한 사실은 몇년 전부터 꾸준히 알고 있었고, 쓰면서도 아 이건 좀 아닌가 싶을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역시나 말했듯, 전 그만큼 감정적 통제가 잘 이루어지는 인격자는 아니었다는 점이죠. 



뭐.. 그런 면에서, 이러한 종류의 모든 글은 타인의 생각을 바꾸거나, 지식을 제공하기 위함인 고로, 그것이 제대로 기능하기 위해선 남들을 설득할 수 있는 글을 써야 한다는 것이 맞습니다. 토론이나 논쟁, 심지어 정치적 선동(가치중립적인 의미의 사용임.)에 있어서도 반대파의 지지나 설득을 이끌어내기 위해선 그만큼 설득력 있는 주장과 표현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죠.


만약 본인이 정치나 사회에 대한 글을 쓰고자 한다면 누군가를, 특히 그것이 거대한 진영과 집단을 이루고 있는 이들에게 비난하고 조롱하면 결코 성공할 수 없고, 되려 그들의 결집과 반발만을 이끌어내게 됩니다. 반대로 그러한 말초적 쾌감이 자기 집단의 결집이나 상대방의 반응을 통한 대립 구도를 만드는 데에 있어서도 전략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수단인 건 맞긴 하지만, 여튼간에 마치 북한이 핵도발을 하면서 양국간의 긴장도를 높히고 집단간의 결집을 이룰 수 있는 것처럼요.


하지만 역시 그런 것은 건설적이지 못하고, 정치적 전략의 수로서 사용되는 바, 더 건설적이고 평화적이며 항구적인 발전을 지향한다면 그러한 글을 쓰는 것은 하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정치에 있어서도 정적을 다룰 때의 상책은 겉으로는 웃으면서 뒤로는 상대방의 영향력을 제거하는 작업을 하는 것이고, 하책은 면전에서 공격하며 정적의 지지자를 집결시키고 구체적인 대립구도를 만드는 일이죠. 후자의 경우는 힘의 균형에서 압도적이거나 명분에서 크게 앞설 때나 사용해야할 전략이죠.



뭐, 잡설이 길었는데, 그냥 내용은 이겁니다. 맞는 말을 통해 상대방을 설득시키고자 한다면 좆같이 말하지 말라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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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이드 아웃은 11살 소녀 라일리가 가지고 있는 다섯 감정들과 어떤 상호작용을 하며 영향을 받는지를 연출하고 있습니다. 처음 태어났을 땐 기쁨을, 그 뒤 슬픔을, 그 뒤엔 까칠, 버럭, 소심함 등이 태어나죠.


픽사와 같은 애니메이션 회사의 작품들이 다 그럿듯,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도 매우 간단합니다.


바로, 자기 자신의 감정에 대해 솔직해지자는 것이죠.


기쁘다는 감정은 좋습니다. 우울하고 슬픈 것보다, 기쁜 것이 훨씬 긍정적이고, 밝고, 행복하니까요. 자기 자신이 그렇고, 모든 부모들이 그렇듯 자신, 혹은 자기 자식은 언제나 기쁘고 행복하며, 슬픈 일은 없길 바라죠. 라일리의 탄생과 함께 태어난 감정들도 그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라일리의 탄생부터 성장까지 한시도 빠짐 없이 지켜보고 보살펴주고 행복하게끔 이끌어주는 감정들.


라일리의 다섯 감정 중 리더로서 역할하는 감정은 바로 기쁨입니다. 그리고 뒤에 보이는 기억과 장기 기억들 대부분이 즐겁고 행복한 노란색입니다. 그만큼 어린 시절의 라일리는 많은 기쁨을 느꼈다는 것이고, 감정들도 기쁨이 주축이 되어 라일리에게 즐겁고 행복한 기억만을 만들어주려고 노력했다는 의미죠.


라일리의 기쁜 생활은 샌프란시스코로 오면서 뒤바뀌게 되는데, 그런 동시에 라일리의 마음 속에서도 기쁨이와 슬픔이가 문제를 일으키며 감정 본부에서 떠나버리고 맙니다. 그렇게 본부엔 까칠, 버럭, 소심이만 남게 되죠.


기쁨이는 빨리 돌아와 다시 라일리를 기쁘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매우 긍정적인 태도지만, 기쁨이의 모습을 잘 살펴보면 매우 독선적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슬퍼서는 안 되고, 오직 기뻐야만 한다는 태도죠.


그 과정 속에서 어린 시절의 상상 속의 친구인 빙봉이 매우 중요한 요소인데, 빙봉의 존재는 라일리의 동심을 의미한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아주 어린 시절 풍부한 상상력과 세상에 대한 흥미와 즐거움이 빙봉이라는 유쾌한 캐릭터를 만들어 냈죠. 하지만 그러한 존재들이 다 그렇듯, 점점 조금씩 잊혀져갑니다.


기쁨이가 슬픔이만 놔두고 라일리를 위해서라며 자기 혼자 감정 본부로 돌아가려고 했을 때 복귀에 실패하고 빙봉과 함께 절벽 아래에 떨어진 부분이 가장 중요한 부분인데, 빙봉과 기쁨이가 로켓타고 빠져나올 때, 빙봉은 자기희생을 하며 기쁨이를 올려보냅니다.


그리고 빙봉은 사라지죠. 이는 어린시절, 정확히는 유아의 끝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빙봉과 같은 유아 시절의 상상속의 친구가 완전히 잊혀서 사라져버리며 어른으로서의 한층 더 성장하게 되는 것이죠. 라일리의 정신적 성장을 이룩하게 하는 역할이었던 셈입니다. 


하여튼, 그렇게 올라온 기쁨이는 이제 다시 슬픔이를 찾아야 합니다. 그 과정 속에서 기쁨이는 감정의 본질이 무엇인지 깨닫게 됩니다. 장기 기억 구슬을 문지르다 색이 변하고 기억의 편린을 보게 된 것이죠. 기쁘기 이전에, 슬펐던 사실이 있었다는 것을요.


이는 감정이란 복합적이고 단순한 것이 아니며, 기쁨이란 슬픔이 있을 때 그 가치를 가지는 것이기도 하고, 동시에 슬픔의 감정을 풀어내며 안심할 수 있고 고통을 덜어낼 수 있음을 의미하죠. 이는 나중에 라일리가 가족에게 돌아가 사실대로 자신의 감정을 풀어내고 가속의 품 속에서 불안함을 해소하고 안심하게 되면서 나타납니다.


슬픔은 그 자체로 슬픈 것만이 아니며, 그 슬펐던 기억, 감정 또한 충분히 소중한 기억으로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연출은 감정에 대해 솔직하자는 메시지로 요약할 수 있는데, 무조건 기쁘고 즐겁고 행복한 감정만을 추구하는 것보다, 보다 인간적이고 자연스럽게 많고 다양한 감정을 받아들일 것을 충고하며 그것이 맞는 겁니다. 화날 땐 화를 내야 하고, 슬플 땐 울어야 하며, 기쁠 땐 웃어야죠. 결국 어려울 건 없었습니다. 슬픈 상황 자체를 피하는 것보다 슬픔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자체로 소중하게 간직할 수도 있고, 훗날 기쁨을 위한 밑거름이 될 수도 있죠.


감정이란 단순하면서도 복잡하고, 간단하면서도 다양한 것입니다. 온전히 기쁠 수도 있지만 슬픔과 함께 기쁠 수도 있죠. 일명 기쁨의 눈물 같은 것.


이러한 사건 이후 좀 더 자신의 감정에 대해 솔직해진 라일리의 감정 본부를 보면 두가지 이상의 색이 섞여 있는 기억 구슬들을 볼 수 있습니다. 감정이란 그런 거죠. 온전히 슬프기만 하고, 온전히 분노하기만 하며, 온전히 기쁠 수만은 없는 법입니다. 자신의 감정에 대해 솔직해지고 다섯 감정들도 그 사실을 받아들이며 기쁨만이 최고이고, 가장 나쁘고 피해야 할 것은 슬픔이라는 편견을 깨뜨린 것이죠.


이는 결국 라일리의 정신적 성장으로 이어지고,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 중 하나인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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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뽕. 국뽕이나 일뽕과 같은 맥락으로서의 의미를 지니는 이 단어는 사실 만들어진지 얼마 안 된 신조어입니다. 일명 쿨한 척하는 놈들을 비난할 때 주로 사용되지요. 예컨데, 모 커뮤니티에서 세월호 사건에 대해 이렇게 평하는 사람이 있더군요. 하루에도 수천명이 죽는데 고작 300명 더 죽은게 뭐 대수냐고.


이런 예시라면 쿨뽕이라는게 어떤 것인지 대충 감이 오실 겁니다. 이런 이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도덕, 윤리에 대한 감각이 없다는거죠. 예컨데 누군가 죽을 수 있거나, 죽음에 준하는 위험에 목도한 것을 보았을 때, 그들은 내가 당한 것도 아닌데 도와줄 이유가 뭐 있냐고 하지요. 세월호 사건 때 일베충들이 보여줬던 그런 사고로 슬픈걸 알겠는데, 왜 나도 슬퍼해야 하냐고 했던 것과 비슷한 구석이 있습니다.


그래도 전자는 그럴 수 있다곤 하지만, 후자는 괜히 나서서 욕을 벌어먹는 것이지요.


뭐, 사실 도덕이나 윤리라는 것이 강제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무시하는 것도 옳지 못하죠. 누군가 법적으로는 문제가 없지만, 도덕적,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는 행동을 했을 때 그들이 비난을 받는 것이 그 자체로 비난을 받을 이유가 되기 때문인 것처럼요.


쿨뽕을 빠진 사람들은 그렇습니다. 도덕이나 윤리에 대한 감각이 없어서 누군가의 죽음이나 타인의 슬픔을 제대로 공감하지 못하는 것같아요. 그저 남의 일이고 그렇기 때문에 관심도 별로 없죠. 여기서 문제가 되는 부분은 그러한 누군가의 사고, 참사에 대해 관심을 갖느냐, 소식을 듣고 그 슬픔을 곧장 바로 공감하고 슬퍼할 수 있느냐가 아닙니다. 사실 저도 참사 초반에는 별 느낌이 없었어요. 크게 슬프지도, 관심을 가지지도 않았고요.


하지만 곧 사건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분노하고 슬퍼했지요. 그들의 사연과 사건의 원인, 책임자와 관료들 등등.. 사실 그렇습니다, 모든 일에 관심을 가질 수 없는 일이고, 모든 일에 공감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작은 사건에도 감정을 이입하고 공감할 수 있는 반면, 엄청난 참사에도 똑같이 이입하고 공감할 수 있는 것은 아닐지도요.


쿨뽕에 빠진 자들에게 문제는, 그러한 것을 마치 자랑하듯, 그렇게 슬퍼하는 자들이 되려 무지하고 미개하고 위선에 빠진 것처럼 말한다는 겁니다. 앞서 이야기한 하루에 수천명이 죽는데 고작 삼백명 더 죽는게 뭐가 대수냐, 슬픈건 알겠는데 왜 나도 슬퍼해야 하냐, 자신과 관계도 없는데 왜 화내냐 같은 것들 말입니다.



공감능력은 중요한 능력입니다. 사회적 공감능력에 장애가 있다는 것은, 추후 소시오패스 성향으로 악화될 수 있다는 것이고 정신상담이 필요하죠. 하지만 중고등학생 때의 학생들은 괴로움이나 동요를 일부로 감추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가장하려는 태도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실 그건 일종의 중2병이죠. 이건 별 문제가 안 되죠. 어차피 아이들도 공감능력이 떨어져서 자기만 알고 이기적으로 때쓰는 일이 빈번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남을 배려할 줄 알게 되는 것처럼요.


애도의 감정, 측은지심 등은, 개인차나 상황을 무시하고 한 없이 강요하는 것도 안 될 일입니다만, 그런 것을 별로 느끼지 못하는 것도 문제가 있는 겁니다. 애초에 사회를 이루는 동물은 상호간의 공감능력이 이미 생물학적 차원에서 필수기능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역지사지, 기소불욕 물시어인, 황금률 등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근본적인 상호관계의 윤리적 기초가 바로 그런 공감능력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잔인한 동영상 등을 보고서 나는 아무렇지 않다며 웃기까지 하며 자신의 담력 따위를 자랑하려는 중학생들처럼, 이러한 사태에서 앞서 열거한 태도를 보이며 굳이 표현씩이나 하는 것은, 그러한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애새끼 수준이라는 것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게 아니라면 정신상담이 필요한 인간이거나.


분노해야 하는 일에 분노하는 것은 당연하고, 슬퍼해야 하는 것엔 슬퍼해야 하는 것이 기실 정상적인 반응이듯이, 그러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 덜 이성적이지도, 덜 합리적이지도 않음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쿨뽕들은 그러한 감정에 대한 반응을 느끼지 못하거나, 숨기면서.. 안 그런 척하며 자신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인간이다라는 것을 어필하려고 듭니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그 인간이 정상적이지 못하다는 것을 증명해줄 뿐이죠.


도덕과 윤리에 대해 공감하지 못하고 그러한 원리에 따라 행동하지 못하니 그들에게 도덕, 윤리적 비난은 의미가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 죽어가는 사람을 놔두고 혼자 도망가는 것이 옳다는 것이냐 라는 도덕적 비난을 던졌을 때, 그들은 이렇게 대답하지요. 그럼 내가 위험할지도 모르는데 굳이 모르는 사람을 구하기 위해 내가 그런 위험에 몸을 내던져야 하냐! 고 말입니다. 그렇지요, 내가 위험할지도 모르는데 굳이 모르는 사람을 구하기 위해 그런 위험에 몸을 던지는 것은 분명 생각해볼만한 일입니다. 무작정 그래야 한다! 라고 강요할 수도 없지요.


하지만 그러한 비난에 대해, 되려 큰 소리 치는 것도 멍청한 짓입니다. 차라리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 맞을 겁니다. 모르는 사람을 구하고는 싶었지만, 눈 앞의 위험에 너무 겁이 나서 그럴 수 없었다. 라고요.



이러한 쿨뽕에 대해 설명, 비판하기 위해 세월호 사건과 그때 보여준 행태를 서술했지만, 사실 이러한 태도는 다른 공간, 다른 분야, 다른 이유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것들입니다. 분명 차가운 이성은 필요하고 지향되어야할 태도이지만, 그것에 먹혀 스스로 감정에 무감각한 괴물, 비정상으로서 판단하고 주장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감정과 이성은 상호보완적이기도 하니까요.



이렇게 쓰고나니 저 또한 예전에 비슷한 행태를 보였던 것이 떠올라 문득 부끄러워 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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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욕을 하는 수많은 사건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정치에서 모습을 보인다면 자기들끼리의 정치싸움을 위해 여러가지 술수를 사용하기도 하죠, 언론을 그것을 어떻게든 쉴드를 치려고 하고, 그것을 깍아내리려하는 자들은 치졸한 틈이라도 잡고 물고 늘어지는 등.


대부분 이러한 이들에는 정치적인 이념을 뒤집어 씌우게 되는데, 그것이 정치인들이 의도한 것이었든 아니면 우리들이 스스로 뒤집어 씌우든 상관없이 그러한 문제를 좌파나 우파와 같은 것과 연관지어 판단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재미있게도 이러한 노력을 별 의미 없으며 실상 따지고 본다면 그러한 문제가 좌파냐 우파냐와는 전혀 상관없다는 것이기도 하죠.



어떠한 문제를 살펴보기 위해서 가장 간단하고 치우침 없이 바라보는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상식이 비추어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식에 비추어 판단하기는 정론을 뽑아내기에 가장 쉬운 방법이기도 하죠.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발상을 하지 못하는 것인지, 아니면 사건이나 현상에 대해 감정을 갖기는 쉬워도 판단을 하기가 어렵기 때문인지 그런 모습을 쉽게 보기는 어렵죠.


상식이라. 누구나 알고있고 누구나 동의하고 있는 이러한 판단의 기준은 우리에게 청량감을 안겨줍니다.


일상에서의 갈등이 되었든, 정치나 국가간의 갈등이 되었건 그것을 판단하기 어렵다면 잠시 머리를 식히고 상식에 비추어 판단해보세요. 그럼 문제가 새롭게 보일 것이며, 어쩌면 해결점이 눈에 들어올지도 모를 일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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