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hrodinger

블로그 이미지
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며,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 - E.Kant
by Konn
  • Total hit
  • Today hit
  • Yesterday hit

'엘리트'에 해당되는 글 6건

  1. 2023.02.16
    민주주의 사회에 존재하는 사회적 역할과 전근대적 계급 관념.
  2. 2023.02.02
    한국은 충분히 경쟁하는 사회인가?
  3. 2022.09.23
    전근대 사회의 체면과 탐욕 문제. 2
  4. 2022.08.28
    엘리트 카르텔이라는 이름의 한국의 문벌文閥귀족.
  5. 2020.08.13
    국가, 종교, 민족, 사회적 정체성 문제.
  6. 2014.02.17
    빅토르 안, 대한민국 스포츠단체에 대한 단상.
반응형

민주주의와 전근대 사회의 가장 큰 차이점 중 하나라면 계급이다. 그리고 민주주의 사회라 하여도 아직 전근대에서 탈피하지 못한 사회는 여전히 계급주의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어떠한 사회든 지구상 대부분의 국가는 자본주의가 지배한다. 단지 그 형태와 구성이 다르고 자본의 규모 등 정도와 수준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어떤 사회든 법적으로, 명시적으로 계급과 계급주의적 계층 및 신분은 존재하지 않는다. 민주주의의 가장 핵심적인 전제는 바로 모든 시민들이 평등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어떤 국민이 다른 국민보다 더 우월하거나 열등하다는 믿음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체계이고 그러한 믿음이 사회를 지배해선 안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계급은 존재한다. 더 많이 벌고 적게 벌고, 그러한 자본을 획득하게 해주는 권력과 권한을 가진 직업군에 따라 실질적인 계급이 발생한다. 이는 어쩔 수 없는 현실적인 현상이며 그저 더 평등한 사회를 추구하는 곳일수록 그러한 차이가 단순히 삶의 질이나 사회적 영향력과 무관하게 신분이나 계급처럼 작동하지 못하도록 억제한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회도 있고, 오히려 그러한 차이를 긍정하거나 추구하는 사회도 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민주주의의 가장 핵심적인 평등의 원칙을 부정할 수는 없다. 더 부패하고 더 전근대적인 사회일수록, 더 금권적인 사회일수록, 다시 말해 더 계급주의적인 사회일수록 더 노골적으로 신분적 계급이 기능한다.

 

***

 

옛 세대일수록 고위 공무원이나 정치인, 사장이나 회장, 고위 장교 등을 신분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고 대한다. 높으신 분이라 말하며 계급주의적으로 이해한다. 어떤 사람들은 전현직 대통령을 주군이라 부르며 왕으로써 충성의 대상으로 본다. 정당 내부의 헤게모니 싸움을 궁정 정치와 비슷하게 바라보며, 그러한 문법으로 이해한다.

 

이것은 요즘의 세대라 하여도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있다. 어떤 직군의 엘리트들은 마땅히 그러한 특혜를 가지는 것이 옳다고 믿고, 어떠한 대학에 입학하거나 졸업하는 것만으로도 사회적 신분을 획득한 것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이러한 신분은 그렇지 않은 하위 계급으로 분류되는 이들의 도전을 계급주의적 반란으로 받아들인다.

 

특이한 점은 그러한 계급을 노력과 성취로 얻어낼 수 있다고 믿는다는 점이다. 마치 공부해서 과거에 합격하면 양반 신분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들은 타인의 실력과 능력, 경력보다 명시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타이틀. 가령, 대학 졸업장이나 고난이도 국가시험 합격증이나 자격증, 특정 직업군 등을 기준으로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조건을 취득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어떠한 사람이든 계급과 신분을 초월할 수 있을만한 어마어마한 성과가 있지 않는 한 인정받지 못한다.

 

그리고 이러한 이해는 한국 사회가 그러한 요소들에 의해 실제 계급주의적 신분으로 기능한다는 현실에서 기인한다. 엘리트들은 자신들의 특혜에 언터처블한 접근을 요구하고 그들과 같은 위치에 서고 싶은 이들은 그러한 불공정한 가치를 보호한다. 불공정한 현상을 해소하기보단 그러한 것을 사회적 기능으로 받아들이며 그러한 범위 내에 진입하고자 하는 것이다. 즉, 검찰의 범죄적인 검사 기소율을 보고 검찰개혁에 동의하기보단 본인이 검사가 되거나 검사 지인을 두고 싶어 한다.

 

***

 

이는 한국 사회에서 발생하는 갑질과 차별을 발생시키는 관념이기도 하다. 교장, 교감, 사기업이나 공기업 부장, 임원, 과장급 이상 공무원, 경력과 계급이 높은 군 장교와 일부 부사관, 농협 간부 등 수십년 연차와 경력을 쌓은 옛 세대 사람들은 그 위치에서 계급적인 사고로 직원들을 받아들인다.

 

그들에게 공사구분은 다소 형해화된 관념이고 사적인 명령과 공적인 명령을 구분하지 못한다. 마치 왕에게 정무와 개인의 삶에 대한 개념이 다소 모호하듯이 말이다.

 

 

젊은 꼰대나 일부 대학생, 졸업생, 대기업 등에 입사한 젊은 세대 역시 당연하듯 앞서 열거한 조건에 따라 계급적 신분 관념을 받아들인다. 겉으로는 그러한 것이 없다고, 본인 역시 그러한 사고에 따른 것이 아니라며, 그저 현실적인 차이를 말하는 것처럼 말하지만 그것은 불공적하고 대체로 비현실적인 조건을 기준으로 합리화하는 것이 사실에 가깝다.

 

예컨데, 상위권 대학 입학 및 졸업이나 전문직 자격증 획득은 그 사람이 얼마나 풍족한 집안에서 태어나 얼마나 많은 사교육비를 지출했으며 그들이 사는 지역과 학군에 따라 결정되는 면이 크다. 이들의 노력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노력에 비해 더 편하고 수월했음을 그들은 인정하지 않는다. 혹은 인정하되, 그것을 당연한 것이라 말한다.

 

 

그런 식으로 부하 직원에게 사적인 심부름을 시키고 어떠한 무례를 저질러도 아랫 사람은 그저 받아들일 수밖에 없고 당연하게 의전과 대우를 받아야 하며, 심지어 부하 직원이 부장 등의 직위에 있는 이들을 위해 밥당번으로 직원이 같이 식사를 해주거나 품의로 밥을 사줘야 한데다, 대학원생이나 공관병을 노예처럼 쓰기도 하고, 청소업체 직원이나 가사 도우미를 천한 것 정도로 멸시하기도, 항공사 오너 집안의 입장에서 승무원을 비인간적으로 대우하는 등의 행동이 나타나는 것은 그들이 수직적 계급 관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민주주의적 기본 원칙에 먼 관념을 가지고 있다.

 

***

 

그렇다면 민주주의에서 계급을 발생시키는 요소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본인은 기본적으로 어떠한 직업군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 의사, 검사, 판사, 변호사, 교장, 장군, 고위 공무원, 지자체장, 정치인, 대통령 등 다양한 위치에서 강력한 사회적 영향력과 권력을 가지고 그들의 권익을 위해 집단화될 수 있는 엘리트들은 어떠한 역할을 맡고 있는 사람들이지 그러한 위치에서 계급화된 집단이 아니라고 봐야 한다.

 

즉, 계급이 아닌 역할로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떠한 권력이나 권한을 가지고 있고 그것이 다른 이들보다 더 강력하다 해도 그것을 자신이 그러한 신분과 계급을 가진, 더 우월한 지위에 서있는 사람이 아니라 그저 어떠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그러한 권한과 권력이 부여된 사람이라 인식해야 한다.

 

예컨데 검사는 가장 강력한 신분이자 매우 높은 계급이라 여겨지고 그렇게 이해하는 이들이 많다. 그들이 가진 권력이 너무 강력하고 그들에게 부여된 특혜는 극단적으로 불공정하다. 귀족 중에서도 가장 위계가 높은 귀족인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검사는 단지 용의자를 기소하고 범죄 사실을 입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역할일 뿐이라 이해해여야 맞다. 그리고 그러한 역할은 관련 자격을 취득한 사람이 맡을 수 있고 대체될 수 있는 종류의 것이다. 권력과 권한의 종류와 정도와 무관하게 그들은 자신의 능력과 자격에 따라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는 위치에 서있는 것이라 봐야 한다. 그들 스스로도 그렇게 여겨야만 한다.

 

가령, 그들은 자신들의 자격과 지위를 함부로 취소하거나 약화되지 못하도록 아주 강력하게 반발한다. 검사는 검사를 기소하지 않고 경찰, 군인, 공무원은 자기 식구를 감싸기 위해선 추악한 짓이라도 서슴치 않고 한다. 의사들은 코로나 시기 환자들을 인질로 삼고 의사를 더 늘릴 수 있는, 자신들의 미래 수입에 타격을 입히는 경쟁자를 만들지 않기 위해 집단행동에 나섰다. 양승태는 고위 법관직을 늘려 대법원장의 인사권을 확대하고 실질적인 4심제를 구상하려 했다.

 

 

이는 그들이 쉽게 대체될 수 없는 희소 자원으로 여겨지게 하기 위함이고 강력한 권력과 영향력을 나누지 않으려 했다. 공급이 늘면 당연히 권력도, 자본도 하향평준화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특정 업계에 노동자가 늘어나면 임금이 줄어들듯이.

 

 

다시 말해, 이 사회의 모든 구성원은 제각기 어떠한 사회적 역할을 맡고 있고, 이는 합리적인 이유로 대체될 수 있어야 하며, 그러한 대체를 위한 공급이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사회적 역할이 폐쇄적인 구조가 되어 불공정한 특혜를 강력하게 추구하는 세력이 되는 것은 반드시 막아야 한다. 자신들의 이익이나 권리를 위하는 것과 불공정한 특혜와 초법적인 영향력의 행사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이다. 이는 민주주의 체제의 구성을 형해화시키는 계급주의적 사고의 발로이다.

 

어떠한 직군이나 위치에 있든, 민주주의 사회의 모든 구성원은 계급이 아니라 역할에 따라 구분되고 이해되어야 한다. 대통령은 대통령 계급이 아닌 대통령의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이다. 정치인도 그렇고, 군인도 그렇다. 검사도, 법관도, 의사도, 재벌도. 그들은 그들만의 계급과 신분제적 위치에서 언터처블한 접근을 요구할 것이 아닌 그러한 어떠한 사회적 위치에서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는 부품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필요할 때 그러한 부품은 대체될 수 있어야 한다. 범죄를 저지른 의사와 검사는 바로 그 이유로 남들보다 더 공정하게 수사받고 그 위치에서 저지를 수 있는 범죄의 재발을 차단하기 위해 처벌받아야 한다. 자기 역할과 직군과 무관한 범죄라면 다소간의 불이익을 받고, 자기 역할과 직군과 유관한 범죄. 검사의 경우 기소권의 남용이나 기획수사, 불법수사 등 자기 권한을 부당하게 사용하여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 그 역할을 맡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재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경제범죄를 저질렀다면 그들은 그러한 행위를 저지를 수 있는 위치에 있지 말아야 한다.

 

반면 어디까지나 예시적인 성격으로 말하건데, 의사가 폭력을 휘두르거나 재벌이 차량사고를 일으켰다면 폭행을 처벌하고, 차량사고에 대한 처벌을 할 지언정 그들의 역할과 무관한 영역에서 발생한 범죄이기에 재범을 발생시키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그들이 자기 역할에서 대체되거나 자격이 취소될 이유는 없다.

 

한편 갑질은 수직적 권력의 고하에 따르는 사유가 크기 때문에 권력을 가진 어떤 이가 됐든 갑질을 발생시켰고 그 정도가 크다면 어떤 위치에서 어떠한 역할을 맡고 있든 그 위치에 있지 말아야 한다. 이는 역할보다 위치가 중요하다.

 

***

 

엘리트, 혹은 엘리트가 될 수 있는 조건을 가진 사람들은 그러한 조건을 자신의 계급으로 여긴다. 어떤 대학에 입학했고, 어떤 대학 출신이며, 어떤 자격증을 가지고 있고,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는지 등등. 남들보다 우월한 조건을 계급화한다. 그것이 이익으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일단 달성한다면 하위 계층에 비해 더 강력한 사회적 영향력과 이익을 보장한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만들어져 있다.

 

서울대 출신이기 때문에 타 대학의 더 뛰어난 학생에 비해 더 좋은 조건으로 사회에 진출할 수 있고, 엘리트 집단은 그 구성원이 어떠한 죄를 저질렀든 집단에 대한 반역이 아닌 이상 대부분 보호해줄 수 있다. 그들 스스로 역할이 아닌 계급의 관념으로 생각하고 움직이기 때문이다.

 

***

대한민국 헌법 제11조는 이렇게 작성되어 있다.

 

대한민국 헌법 제11조(평등권, 특수계급제도의 부인, 영전의 효력)
①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 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
②사회적 특수계급의 제도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어떠한 형태로도 이를 창설할 수 없다.
③훈장등의 영전은 이를 받은 자에게만 효력이 있고, 어떠한 특권도 이에 따르지 아니한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할 수 있기에 하는 사람들이 있고, 할 수 있기 위해 그렇게 만든 자들이 있다. 한국은 주변 다른 나라들보다 더 탈피했을 수는 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전근대 사회의 관념에서 탈피하지 못했다.

 

수평적 정의보다 수직적 정의가 더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고, 그것을 옳다 믿으며 더 우월한 계층과 열등한 계층으로 구분하여 실질적으로 계급화 되어 있는 사회에 가깝다.

 

성공하는 자, 성취하는 자가 상을 받고 보상을 얻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그것은 정의롭고 올바르다. 그러나 실패한 자, 성취하지 못한 자가 벌을 받는 것은 이상하고 불합리하다. 그것은 실제로 그들이 받는 벌이 아니다. 성공한 사람들이 열등한 패배 계급에 내리는 벌이다. 다분히 계급주의적 우월의식의 발로일 뿐이다.

 

실패하고 성취하지 못한 사람은 성공한 사람에 의해 갑질을 당하고, 그들에게 범죄 피해를 받아도 그들이 처벌 받는 것은 쉽게 기대할 수 없다. 적절하고 충분한 보상 역시 그러하다. 이것은 시스템에 의해 벌을 받는 것이 아니다. 그 시스템을 다루는 사람에 의한 것이다.

반응형
AND
반응형

자본주의는 경쟁을 골자로 한다. 이것은 핵심 원리이다. 경쟁하지 않는 자본주의는 발전할 수 없고 발전하지 않는 자본주의란 존재할 수 없다. 자본주의는 숙명적으로 경제성장을 해야만 하는 체제이며,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자본주의라 부를 수 없거나, 실패한 것이다.

 

경쟁은 많은 스트레스를 발생시킨다. 안주하거나 쉴 수 없이 계속해서 발전해야만 한다. 더 나은 시스템을 도입하거나, 기존의 비효율을 정리하거나, 새로운 산업과 사업을 고안하고, 투자하며, 그러기 앞서 타당성을 평가해야 한다. 인재를 채용하고 저성과자를 해고하거나 좌천시킨다. 사업이 성공하면 다시 분배하여 규모를 키울 수도 있고 내실을 다질 수도 있다. 실패한다면 그 손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해야만 한다.

 

그럼에도 경쟁에서 패배한다면 도태되어 없어지거나 흡수되는 결말을 받아들여야 한다. 원하지 않더라도 이루어지는 일이다.

 

그러나 경쟁은 스트레스를 발생시키고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부담을 달가워할 개인도, 조직도 없다. 또한 사람은 경쟁보다 협력이 더 쉽다는 것을 알고 있고 그러한 협력이 더 많은 것을 가져다줄 수 있다면 그렇게 하는 동물이기도 하다. 이것은 자본주의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정치 역시 마찬가지이고, 기실 사람이 존재하고 집단이 존재할 수 있는 모든 곳에서 발생하는 일이기도 하다. 경쟁은 투쟁이고 투쟁은 이익과 동시에 손실을 내포한다. 그러한 손실을 최소화하고 이익을 나눌 수 있다면 그것을 선택하지 않을 이유 또한 없다.

 

 

한국 자본주의 시장에서 기업은 충분히 경쟁하고 있는가? 그런 기업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정 이상의 위치에서 경쟁은 크게 약화된다. 어차피 모두 아는 사이이고 이 좁은 국토의 좁은 공간에서 그들은 서로를 영원히 피할 수도 없고, 접하지 않을 방법 역시 없다. 어느 정도 규모가 된다면 그들은 어떻게든 알고 지내게 된다. 이는 인적관계망의 형성으로 이어지고, 그러한 관계망에 속하게 될 기회를 말한다.

 

재벌, 대기업은 가급적 경쟁하기보다 담합하는 것이 한국 시장에서 더 큰 이익을 발생시킨다는 것을 알고 있다. 물론 이것은 불법이고 부패이다. 그러나 이 부패가 충분히 사업성 있는 수단이 되기 위해서 중요한 것은 재벌의 존재이고, 그 재벌의 역할은 정경유착이다. 대기업은 많은 돈을 가지고 있고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지만 어디까지나 기업이다. 핵심은 그 대기업을 지배하는 재벌이며, 재벌이 수많은 대기업과 계열사를 지배할 수 있는 가장 큰 조력은 정치권의 협조에서 나온다.

 

그들은 재벌 대기업을 해체하거나, 그들과 반목하지 않는다. 어차피 그들에게 후원과 지원을 받는 것이 더 큰 이익이라는 것 역시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기업이 어느 정도 성장하면 다른 재벌 대기업이 그것을 인수해버린다는 말이 있다. 특히 중요하고 미래 가치가 큰 기술을 가지고 있거나 개발한 회사들이 그렇다. 부정한 방법을 써서라도 그들을 강제로 품안에 넣어버린다. 삼성이 그러하듯이.

 

한국의 수많은 제품은 경쟁보단 담합에 의해 가격이 조정된다. 닭, 소고기부터 시작해서 우리가 아는 많은 제품과 상품들은 담합에 노출되어 있다. 간혹 적발되어 처벌받는 경우는 있지만 그건 아무런 의미도 없다. 담합을 해서 얻는 이익이 처벌 받아서 발생하는 손해보다 압도적으로 크기 때문이다.

 

물론 전혀 경쟁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경쟁하는 업계도 있고, 경쟁하는 업체들도 많다. 그러나 먹을 게 있고 경쟁에 자신이 없다면 담합은 어떻게든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기도 너무 쉬운 환경이고 그 대가 역시 너무 작다. 그렇다면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앞서 언급했듯, 이러한 습속은 경제 분야가 아니라 다른 분야에서도 쉽게 발생한다. 가령 정치를 보자. 민주당과 국힘당은 서로 경쟁하는 관계이지만 동시에 협력적인 모습 역시 찾아볼 수 있다. 기본적으로, 소수의 집단이 너무 오랫동안 경쟁하다보면 그들의 경쟁은 경제적인 계산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담합적인 형태가 된다.

 

A라는 주제에 대해 찬성과 반대 입장으로 갈라져 있다면 둘은 서로 하나의 주제를 두고 경쟁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A 주제의 찬반 영역을 지지하는 사람들에게서 지지를 나누는 것일 뿐이다. 두 집단 모두 찬성한다면 그 주제가 받아들여지는 것과 별개로 그 주제에 관해 반대하는 지지 집단은 붕 떠버린 처지가 된다.

 

그리고 그들의 지지를 받고자 하는 이들은 A 주제에 관해 반대하는 입장을 취해 반대하던 집단의 지지를 차지할 수 있다. 즉, 지지자들은 하나의 자원이 되고 주제에 대한 찬반 입장은 어떤 자원을 차지할 것인가에 대한 입장표명이 된다. 그러한 이유는 명확하다. 사람이 모이면 이권이 형성되듯, 그들은 지지자들에게 위임받는 권력, 그 권력이 가져다주는 특혜와 경제적 접근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는 더 이상 옳고 그름의 목적과 믿는 바에 따른 신념의 영역이 아니라 경제활동에 가까우며, 이러한 관계는 적대적 공생관계라 말할 수 있다. 한국 보수와 중국/북한의 관계가 그러하고 진보 언론과 보수 언론의 관계가 그러하다.

 

북한이 정말 증오스럽다면 그들의 멸망을 위한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였어야 하지만 그들은 무대응으로 일관했다. 언론사는 기본적으로 자본을 추구하는 기업이며 진보 언론과 보수 언론은 표적으로 삼는 고객층이 다른 것 뿐이다. 그들이 사회정의와 이념적 규범을 위해 존재한다면 입장이 다를지언정 편파적이지 말아야 하며, 해석이 다를지언정 가짜뉴스와 의도적 선동이 있어선 안 된다.

 

 

그렇다면, 한국의 다양한 집단들은 정말 건전하게 경쟁하고 있는 것이 맞을까?

 

다시 말하지만, 경쟁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LG가 스마트폰 사업을 접었던 것처럼. 그러나 온전히 경쟁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하림, 마니커, 사조원 등이 닭고기 가격을 담합하여 막대한 이익을 나눠먹었듯이.

 

그들이 진짜 경쟁이라는 걸 한다면 재벌가 오너들이 개소리를 하고 사업적 실패를 겪으며 기업가치에 손해를 입힐 때 그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도태되어야 한다. 기업들이 시장에서 더 큰 지분을 확보하고 경쟁력을 갖추고 싶다면 개발에 투자해야 하고 가격경쟁이 됐든 판로 개척, 효율적인 시스템을 도입하고 검증해야 한다.

 

만약 정치와 사법이 자본으로부터 영향력을 덜 받는다면 그들의 부정부패에는 이익보다 강력한 손해를 주어 함부로 부정부패를 저지르지 않도록 할 것이다. 부정부패는 우발적인 것이 아니고 계획적인 것이기에, 그러한 부패를 계획할 때 반드시 리스크를 고려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에서 어떤 기업은 도태되고 약화되어야 하며, 어떤 기업은 성장하고 성공해야 한다. 그럼에도 한국에서 밑에서부터 올라온 새로운 기업이 등장하는 것보단 기존 재벌 대기업이 출자하여 만들어진 기업이 시장의 한 영역을 차지해버린다. 한국 시장은 자본의 규모와 별개로 좁은 곳이다. 그러한 행위들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국토가 좁은 나라의 숙명이라면 숙명이다.

 

그렇게 한국 자본주의의 구성원들은 경쟁을 기피하는 편이다. 전혀 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상대방을 파멸시키거나 일정 이상의 손해를 발생시킬 정도로 경쟁하지 않는다. 잘 돌아가고 있는 카르텔에 파문을 발생시켜서 좋을 것이 뭐가 있을까. 스스로의 오판과 실패로 망하는 것에 막대한 돈을 쏟아부어 살려줄 정도는 아니더라도 일부러 도태시킬 정도의 관계는 아니다. 망하지 않는 한 그들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매력적인 협력 대상이다.

 

그렇게 그들은 더 쉬운 방법을 찾았다. 경쟁하기보다 경쟁사끼리 모여 담합을 했고, 이는 시장에 대한 독과점 구조를 만들었다. 독과점 구조는 막대한 이익을 발생시키지만 소비자들에게 긍정적일 수는 없다. 제품 개발과 가격 경쟁을 해야할 이유가 없다.

 

 

또 다른 영역을 바라보자.

 

한국에서 성공하기 위해 공부를 잘해서 더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좋은 기업에 입사하거나, 장교가 되어 열심히 진급을 하는 방법과, 어려운 국가고시에 합격하여 전문지식을 갖춘 엘리트가 되는 방법 등이 있다. 

 

이것은 아주 상식적인 이야기지만, 단순히 자기 능력과 실력만으로 달성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순진하다. 부모의 재산이나 지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소위 라인이라 불리는 파벌 싸움을 말하는 것이다.

 

 

한정된 자원을 더 많이 차지하기 위해서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자신의 힘을 기르는 것이다. 그러나 혼자의 힘은 한계가 있고, 혼자서 차지할 수 있는 자원 역시 한계가 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협력/담합하기 마련이고, 이는 집단 내 파벌을 형성시킨다. 조직사회에서는 흔히 라인이라고 불리는 그것이다.

 

어떤 유력자들이 있고 그 유력자들에겐 자신의 라인이 있다. 대개 더 좋은 사업 아이템을 물어오고, 그것을 자신과 자기 아랫사람들에게 분배하며, 성과를 내면 그 라인 모두의 공이 된다. 그러한 성과를 기반으로 승진하거나 조직 내 요직을 차지하고, 더 뛰어난 인재를 자기 라인으로 끌어들인다.

 

그렇게 끌어들인 인재을 밀어주고 성과를 내면 라인 내 윗사람의 공이 되기도 한다. 사원의 공이 대리의 공이 되고, 대리의 공이 과장의 공이 되며, 과장의 공이 부장의 공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식으로 조직 내 한정된 자원을 라인이라는 파벌을 형성하여 차지하는 것이다. 당연히 다른 파벌과의 경쟁은 그러한 자원을 두고 다투는 것이고.

 

 

그렇다면 그러한 관점에서, 자신의 성공이 온전히 자신의 공일 수 있겠는가? 라인으로 대표되는 사내정치에 가담하지 않고 한정된 자원을 차지하기란 어렵다. 사관학교 출신이 아니라면 진급에서 불리한 장교들이 그렇듯이 말이다.

 

당연히 사내정치는 어느 나라에서든 있고, 파벌 싸움 역시 당연히 발생한다. 그리고 그것은 조직 내 경쟁이 되어 긍정적으로 작동하기도 한다. 경쟁은 발전의 동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비사관학교 출신 장교들의 진급이 다소 부당하게 막히는 사례처럼 한정된 자원에 대한 경쟁은 아주 강력하다. 그리고 그 자원을 차지하기 위해 라인을 타지 않고 파벌에 속하지 않는 이들은 무조건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 혼자서 다수와 경쟁할 수 없으니 말이다.

 

즉, 라인과 파벌은 반드시 긍정적으로 작동할 수만은 없다는 것이다. 때로는 더 부정하게 작동하기도 하며, 이러한 형식의 관계는 결국 인적관계망이라 이름붙혀 지고, 그것들이 부정적으로 작동한다면, 우린 그러한 예시 중 하나로 엘리트 카르텔을 꼽을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 한국의 정말 중요한 집단에는 이러한 파벌, 라인이라는 혈관으로 조직되는 엘리트 카르텔이 형성되어 있다. 이는 공부를 아무리 잘하고 실력이 아무리 뛰어나며, 사법시험, 행정시험, 외교관 시험, 로스쿨 졸업, 변호사 시험, 의사시험 등 전문직 엘리트가 될 수 있는 자격시험에 통과한 이들이라도 인맥이라 불려지는 엘리트 카르텔의 도움이 없다면 정말 중요한 요직에 접근하기 어렵다는 말이 된다.

 

이 나라에서 성공하기 위해서 중요한 건 그 엘리트 카르텔에 소속될 수 있는가와 얼마나 핵심에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느냐에 달렸다. 물론 실력이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어려운 일이지만, 재벌 2세와 3세, 유력 정치인들의 자녀들이 어떤 노력을 해서 그러한 카르텔에 소속될 수 있었을까? 그들이 노력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지만, 태생부터 카르텔에 소속된 것과 다름 없는 이들과 흙수저 출신 개천의 용과는 혈통이 다를 수밖에 없다는 건 인정할 것이다. 그 혈통이 꽤 큰 장벽이라는 점 역시.

 

파벌싸움, 라인, 엘리트 카르텔에 속하여 인맥을 동원하는 것 역시 자신의 실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것이 공정하지 않다는 점이다. 시험의 공정성에 맹목적인 신앙을 보이는 자들이 시험 외적인 불평등한 인간 관계로 잠재적 경쟁자를 탈락시키고 차지한 자원을 나누지 않는 것에 분노하지 않는다면 이중적인 것이고 위선적인 행동이다.

 

물론 모든 파벌, 라인이 잘못됐다는 건 아니다. 그것이 긍정적으로 작동하고, 자연스럽게 형성된다는 것 역시 인정한다. 하지만 엘리트 카르텔은 그것과 다르다. 그들은 한정된 자원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이 아니라 한정된 자원을 남과 나누지 않고 독점하기 위한 담합에 가깝다. 그들이 외부에 언터쳐블한 접근을 요구하고 자신들에 대한 어떠한 정당한 요구조차 불응하며 공격이라 간주하며 반응하는 것이 그러하며, 사법처리에 있어서도 불공정의 영역을 한참 벗어난 것을 보라. 이것이 공동의 발전을 위한 것인가?

 

 

경쟁보다 담합이 매력적인 선택지가 되는 것은 기실 당연하다. 인간이 투쟁만큼이나 협력을 선호했기 때문에 무리를 짓고 집단을 이루며 지금까지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이 협력의 효율성을 보장한다. 그러나 외적인 요소에 대한 투쟁을 위한 협력과 내부 집단의 경쟁자를 도태시키고 시장과 같은 영역을 장악하기 위한 담합은 서로 다르다.

 

협력을 통해 인간은 발전했지만, 담합은 내부 역량을 제한하고 그 발전 역시 족쇄를 걸기 때문이다. 이는 협력이 공동의 발전과 이익을 위한 것이지만 담합은 소수의 이익만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 이익을 위해 전체 집단의 대부분은 불필요한 손해를 봐야만 한다.

 

그럼에도 담합은 그것에 가담할 수 있는 이들에게 여전히 매력적이고 합리적인 선택지가 된다. 그것을 막아야 하는 것은 견제 세력이다. 단순히 담합에 끼지 않은 업체 같은 것이 아니다. 가령 시장에서의 담합은 업계의 다른 기업이 아니라 정부라는 공권력, 정치권력이 개입해야 한다

 

정치권력이 부패하여 담합한다면 그들을 견제할 수 있는 것은 그 체제 내에서 힘을 가진 이들이다. 민주주의에서 그것은 국민이 된다.

 

절대권력이 절대부패하는 이유는 그들을 견제할 세력이 없고, 경쟁할 세력이 없기에 소수의 관계자들만의 이익을 위해 담합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단순히 가능하다는 까닭에 더 쉽고 매력적인 선택지를 고른다. 이는 완벽히 합리적으로 이루어지는 경제적인 선택이다. 그 목적이 공동의 발전, 항구적인 발전이 아닌 그 소수 기득권의 이권이라는 목적에 부합할 뿐.

반응형
AND
반응형

0.

전근대 사회에서 법보다 주먹이 가까운 까닭은 행정력과 치안이 기술을 기반으로 하여 구성원 개개인에게 빠르고 직접적으로 적용, 통제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장 발생한 범죄나 불만을 빠르고 정확하게 해결해줄 수 있느냐를 따졌을 때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며, 행정력의 수준이 낮을 수록 공정한 집행 역시 기대하기 어렵다. 이는 필연적으로 관료나 군인 개인의 부패 및 지역 유지와의 유착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1.

또한 전근대 사회는 대체로 적은 인구로 구성된 작은 공동체사회이곤 했다. 그리고 어떤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평생 얼굴보고 살 사이이기 때문에 웬만한 문제는 어떻게든 원만하게 합의하기 마련이고, 합의가 어려울 경우 공동체의 큰 어르신 역할을 하는 이, 요즘의 마을에서라면 이장 같은 위치에 있는 사람의 권위를 통해 합의를 이루어낸다.

 

문제는 이 작은 사회 속에서 누군가의 평판이 나빠진다면 이를 다시 원상복구 시키기 위해선 지대한 노력이 필요하고, 그럴 수 없는 문제를 발생시켰거나 지나치게 이미지가 망가질 경우는 복구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영화 더 헌트에서 주인공은 오해로 인해 누명을 썼고 결국엔 벗어났지만 모두에게 크나큰 낙인이 찍혀버렸고 어렸을 때부터 허물 없이 지냈던 친구들과도 알 수 없는 벽이 세워진 어색한 사이가 되어버리고 만다. 단순 오해로 인해 발생한 일조차도 이럴진데 뒤집을 수 없는 사건이라면 어떻겠는가.

 

2.

이러한 이유로 전근대 사회에서 법보다 주먹이 더 빠르게 문제를 해결하는 믿음직한 수단이 되었고, 작은 사회 내에서 입소문과 평판은 그 사람의 사회적 지위와 극단적으로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이러한 평판이 나빠져 집단 내에서 도태되거나 서열이 밑바닥으로 떨어져버리는 상황을 매우 경계할 수밖에 없다.

 

흔히 말하는 불가촉천민이 되어버리는 경우 개인이 할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다. 큰 희생이나 큰 도움을 주면서 자신의 지위를 어느 정도 복구해야만 하는데 결코 쉬운 일이 아니고 의도적으로 할 수 있는 일도 아닌 경우가 많을 것이다.

 

3.

문제는 전근대 사회에서 다른 지역으로 이주한다는 것은 그보다도 어려운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자신이 태어나고 살아온 지역사회는 자신의 조상대부터 살아왔던 인맥과 인연으로 이어져 있는 곳이고 살아오면서 만들어낸 인맥과 인간관계는 자기 혼자서 해결할 수 없는 일에 도움을 받거나 도와줄 수 있다.

 

정보를 제공하고 제공받을 수 있으며 개인 단위 노동력의 한계를 아웃사촌친구지인의 도움을 받아서 해결할 수 있다. 자기 집안 자식이 남의 집안 농작물을 서리했다 하더라도 나중에 아이고 형님, 형수님 하고 찾아와 다른 농작물을 선물해주거나 초대해서 밥을 한끼 해줄 수도 있다. 그리고 그럴 것을 서리 당한 집안도 안다. 그렇지 않을 경우 당한 쪽은 체면이 깍이고, 갚아주지 않은 집안은 평판이 깍인다.

 

조상 대대로 살아왔다는 역사성은 그들이 그 지역에서 앞으로도 계속 살아가야할 당위가 되고 밖으로 나가선 안 되는 금기가 된다.

 

이를 반대로 말하자면 지역사회를 떠난다는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고, 전쟁이나 재해, 재난, 집안 누군가가 관직을 얻어 이주하는 경우는 이유가 있고 정당한 사유가 될 것이다. 그러나 아닌 경우, 처음보는 모르는 동네의 누군가가 자신의 동네까지 와서 이주를 청하는 경우 대부분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무슨 사고치고 도망쳐왔나보군. 이런 사람을 받았을 때 어떤 문제를 일으킬지 알 수 없겠어.'

 

조상 대대로 살아온 이웃사촌들은 그러한 역사성으로 이어져있기 때문에 믿을 수 있다. 같은 지역에 태어나 같이 자라왔던 이들이기에 믿을 수 있다. 우리 공동체 내부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외지인은 그러한 역사적 연관이 없다. 그들의 뿌리를 알 수 없고 뭐하는 사람인지, 어쨰서 이곳에 왔는지 등등 많은 것을 알 수 없다. 대체로 사고치고 쫓겨났거나 도망쳐왔을 것이라는 의심은 어떤 면에선 합리적인 구석도 있다. 새로 적응하고 뿌리내리는 것도 쉽지 않다.

 

이러한 구조는 이주가 상대적으로 자유로워지는 도시, 공장으로 대표되는 근대에 접어들면서 해체되었다.

 

4.

지역 사회의 언터쳐블이 되지 않기 위해, 아니. 그저 자신의 평판이 나빠지고 체면이 상하는 것을 막기 위해 민감할 수밖에 없다. 특히 암묵적 인정받는 높은 지위와 권위를 가졌을 수록 그렇게 된다.

 

누군가 자신을 모욕하거나 무시한다면 설령 그것이 어느 정도 정당하다 하더라도 이를 옳고 그름의 문제와 도덕적인 문제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다. 가령, 내가 잘못한 것은 맞지만 저렇게 공개적으로 들고 나와 사람들 귀에 들어가게 만드는 것은 내 체면을 훼손시키는 일이고 내 평판을 떨어뜨리는 일이다. 따라서 더욱 강경하게 대응하고 실질적인 손해와 압박을 통해 굴복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행적 사회구조는 21세기에 접어들어도 전근대 사회에 가까운 사회일 수록 흔하고 보기 쉽다. 근본적으로 근대화, 혹은 현대화되지 못한 사회적 관계망 체계 및 지역사회의 형태, 무엇보다 개개인의 의식수준이 물질 문명의 발전속도와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한국 역시도 개발기엔 여전히 중세적, 왕조시대적, 전근대적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고, 촘촘하지 못한 행정력과 치안, 부패 문제는 법보다 주먹이 더 가까웠던 까닭이었다.

 

5.

현대에도 그러한 사회가 여전히 있고 전근대적일 수록 그러한 경우가 많다고 했는데, 몇가지 엄밀히 짚어야할만한 집단들이 있다.

 

하나는 독재국가이고, 다른 하나는 조폭집단이다.

 

독재국가에선 지도자나 당의 체면과 평판이 매우 중요하다. 이는 조폭집단에서 높은 위치에 있는 이들이 아랫사람에게 자신의 체면과 평판이 매우 민감한 가치가 되는 것과 완벽하게 동일하다. 조폭에서는 아무리 낮은 위치에 있다 하더라도 자신보다 낮은 말단이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건방지게 굴거나 대드는 것을 결코 허용하지 않는다.

 

반드시 보복과 처벌이 있기 마련이고 이러한 수직적 서열관계는 그것이 법과 제도상의 원칙이 아니라 폭력과 주먹에 의해 형성되는 관행과 경험적으로 구성되는 체계로 이루어진다.

 

독재자들이 자신에 대한 도전과 반항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 역시도 유사하다. 독재라는 권력독점을 끝 없이 유지하기 위해서 시민들의 반발과 정치/경제/특히 군 내의 반대세력을 무력화해야 하고 지속적으로 감시 및 통제해야 하는 것 역시 맞는 설명이지만 근본적으로 조폭세계와 다를 바 없는 전근대적 가치관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도전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누구라도 하나 용인하면 누구든 자신을 무시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북한은 그러한 가치관들이 혼재되어 있는 가장 대표적이고 적절한 사회라고 볼 수 있다. 독재자인 지도자의 체면과 평판은 무엇보다 중요하고, 실제 외교적, 군사적 성과와 발전보다 단순 지도자의 체면을 다른 것보다 더 우선하기 때문에 상식적으로 받아들일만한 제안이나 협상마저도 파토내고 독재자 개인의 가오를 살리는 쪽을 택한다. 조금이라도 굽히는 듯한 모습이나 동등한 모습을 연출하지 않고 파토내더라도 회담과 협상의 결정권에 자신이 주도권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6.

이는 한마디로 정의할 수 있는 형식이다.

 

나에 대한 도전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의 엘리트들은 어떠할까. 의사들은 자신의 지위와 특혜 언터처블한 접근을 요하고, 이는 검사나 판사 역시도 크게 다르지 않는다. 이에 대한 접근은 오직 더 강하고 위험한 특정 정치세력에게만 일부 허할 뿐이다. 그마저도 원래 그 집단의 구성원들이 정치세력의 구성원이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떠한 대가를 주고 받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자식이 서리한 농작물을 다른 것으로 갚아주는 것처럼.

 

여기에 권력, 특혜, 자본이라는 문제가 낄 경우에 현대사회의 문제가 된다.

 

전문직을 비롯한 엘리트들은 자신들의 권위와 이익에 민감하다. 그들은 똑똑하고 능력이 있기 때문에 남들보다 더 유리한 위치와 더 많은 수익을 얻어낸다. 기업가들은 특히 더 많은 자본을 얻어내며 그렇게 벌어들인 돈은 다른 법, 의료 등의 사회지도층 전문직에 비해 전문영역을 기반으로 하는 권력을 가지진 못하지만 자본주의 체제이기 때문에 어떤 면에선 그들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할 수도 있다.

 

문제는 그들이 자신의 이권을 단 하나도 내놓지 않으려한다는 사실 그 자체이다.

 

7.

엘리트 카르텔에 속하는 자들은 상식적이고 공정한 위치로 그들의 특혜를 재조정하는 것은 자신들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한번이라도 거기서 물러나 양보하게 된다면 그러한 일이 끝없이 반복되리라 믿는다.

 

첫 시도 자체를 도전으로 받아들인만큼 이는 공정과 불공정, 필요한 불필요, 정의와 부정의 문제와 같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이기고 지고의 문제가 된다. 그들은 자신이 노력과 성공을 통해 얻어온 것이고, 그러한 특혜와 권위, 언터처블한 지위를 얻기 위해 여기까지 온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그에 대한 외부자의 접근에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외부자들이 자신들의 이권, 다시 말해 밥그릇 문제로 귀결되는 그것을 건드리는 것은 체면의 문제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무언가 문제로 지적되는 요소가 '공정하게'. '정의롭게'. '상식적이게' 변화하는 것을 거부한다. 만약 그것이 성공하게 된다면 굴욕적인 패배로 인식하게 된다. 만약 그들에게 어떠한 문제가 바뀌기 위해선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요구할 것이다. 이는 불공정에서 올바름을 찾아가는 개혁이 아니라 자기 밥그릇을 보전해줄 거래로 여기는 것이다.

 

8.

이제 자본주의에 대해 특정해보자. 이러한 문제는 기업가에 대한 개혁, 자본시장에 대한 개혁 역시도 마찬가지다. 밥그릇에 대한 침해이자 권력자인 자신에 대한 도전으로 여기기 때문에 그러한 개혁과 공정한 변화를 거부하고 반발한다.

 

전근대적 체면 문제로 인해 개혁을 침해와 체면 문제로 받아들이고 거부한다. 모든 것은 결국 제어받지 않는 탐욕이 원인이다.

 

9.

공유지의 비극을 알 것이다. 본래 생태학, 환경과 관계된 것이지만 실제로는 경제학 쪽에서 더 자주 쓰이는 그것말이다.

 

모두가 사용할 수 있는 목초지가 있고 주변에 가축을 치는 이들이 있다면 자기 소유의 목초지 대신 공유지의 목초지에서 먹이는 것을 더 선호할 것이다. 그것이 자신의 손해를 줄이고 이익을 늘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목초지는 적당히 넓어서 모두가 일정량만 소모시킨다면 지속 가능하고 충분히 나누어 먹일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누군가 탐욕을 부려 이 목초지의 자원을 전부 소모시켜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다음부터는 먼저, 많이 먹이는 쪽이 무조건 이익이 된다. 이미 누군가 다 먹이게 된다면 그곳까지 가축을 끌고 오는 비용만 낭비될 뿐 얻는 건 전혀 없게 된다. 결국 이는 극소수를 제외하곤 모두에게 손해가 될 것이다. 특히, 사회적 신뢰가 파괴된다.

 

10.

자본은 순환되어야 한다. 기실, 모든 자원은 순환되는 것이 좋다. 자본주의에서 자본은 역시 순환되어야 한다. 물론 순환되기만 해야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의 발전과 함께 순환되어야 하고, 올바른 순환은 경제의 발전을 불러오기에 순환되는 것이 옳다.

 

공유지의 비극을 막기 위해 제안된 이론과 방법들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가장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심판의 존재이다. 공유지의 목초지를 누군가 독점하고 전부 소비하지 못하도록 심판이 그들을 규제하고 제한을 두는 것이다. 이것이 반드시 올바른 것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원론적으로는 효과적이고 필요하다.

 

그리고 자본주의 체제에서 그러한 역할은 정부가 담당한다.

 

기업과 노동자, 정부가 알아서 시장경제에 따라 균형을 맞춘다면 정말 좋은 일이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론적으로만 가능하고 누군가는 반드시 공유지를 소모시킨다. 편법, 불법, 관행과 부정, 로비와 엘리트 카르텔끼리의 관계망까지. 다종다양한 방식으로 원칙을 지키지 않고 가능한 것보다 더 많은 자원(이익)을 얻기 위해 움직이는 자들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남들보다 더 많은 이익과 성공을 추구하는데 제한되지 않는다면 법과 원칙, 정의를 지키려하지 않을 것이고 남들보다 더 교활하고 부정한 방식으로 이익의 극대화를 추구할 것이다.

 

문제는 정부와 정당이 그들의 방식에 호응하는 것이다. 법을 어겨도 얻어낸 것보다 훨씬 적은 푼돈으로 죄값을 치루거나, 이익에 비해 너무 약한 처벌이 가해지는 경우도 있으며, 아예 법적인 마사지를 통해 빠져나가게 해주거나 꼬리자르기 등으로 넘어가는 경우도 있다.

 

심지어 법이나 제도를 바꾸어 재벌대기업에게 유리한 환경을 조성해주기도 한다.

 

돈은 돌아야 하는데 물가는 오르고 임금이 오르지 않는다. 단기적으로는 기업은 지출이 줄고 수익이 늘어나기 때문에 경제적인 이익을 얻게 될 것이고, 기본적으로 이익을 늘리기 위한 단순하고도 논리적인 방식이다.

 

그러나 이것이 장기적으로, 그리고 전방위적으로 발생할 경우, 무엇보다 노동자의 임금상승을 제한하는 식으로 이루어진다면 노동자들은 적게 벌고 반드시 나가야할 돈은 많기 때문에 지출을 최대한 줄일 것이다. 그리고 이는 기업의 이익을 줄이게 되는 일이 될 것이다.

 

물론 이 또한 어디까지나 이론적인 이야기일 뿐이고 실제로 기업은 그래도 돈을 벌 것이다. 그러나 점차 사회의 성장동력은 줄어들고, 다양한 분야에서 부작용이 발생할 것이다. 한탕주의, 저출산, 사기나 횡령 등의 경제사범이 늘어나기도 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시민, 노동자들은 부를 쌓기 어려워지고 재벌대기업은 막대한 부를 쌓게 될 것이다. 이를 관리해야할 정부가 이 흐름과 순환을 건전한 방식으로 조성하지 않으면 자본의 동맥경화가 발생하게 될 것이다. 기업가를 비롯한 엘리트들은 이를 더 나은 발전이나 장기적 지속 가능성으로 보지 않고 체면과 자존심이 걸린 도전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한번 자신의 이권을 양보하면 두번이 될 것이고, 세번이 될 것이며, 끝없이 양보하고 내줘야할 것으로 여길 것이다. 그렇게 자본가는 정치권력에 예속된 존재가 될 것으로 예측할 수도 있다. 

 

11.

그들은 결코 자신의 탐욕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욕심을 가지는 게 무엇이 문제냐고 할 것이다. 욕심은 발전의 자양분이 되고 충분히 추구할 수 있는 것이다. 욕망은 욕망되어야 하고 그것이 법을 어기거나 비도덕적이지 않는 한 잘못된 게 아니다.

 

그러나 탐욕과 욕심이 죄악으로 여겨지는 이유는 그것이 무한하기 때문이며 절제될 수 없는 속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충분히 먹고 살 수 있으면서도 더 큰 이익을 얻고자 했던 파홈은 더 많은 땅을 얻기 위해 탐욕을 부리다 악마의 의도대로 죽게 되었다. 그가 중간에 절제했다면 더 넓고 훨씬 좋은 땅을 얻은 채 오랫동안 잘 먹고 잘 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종래에 그가 얻은 땅은 그가 누울 3아르신 뿐이었다.

 

파홈의 이야기는 톨스토이의 기독교적 교훈이 담긴 이야기일 뿐이지 현실세계의 당위나 운명으로 작동하지는 않는다. 부정한 사회일수록, 부정한 정치권력이 지배하는 사회일수록 파홈의 사례는 줄어든다. 정부가 부정하고 악한 이들에게 적절한 처벌과 규제를 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제는 그 자체로 공유지이다. 자원이 순환되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유한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에는 한계가 있고, 자원 역시 한계가 있다. 이것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자원은 한계가 존재하기에 순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본의 동맥경화가 찾아오면 자본주의는 지속 가능성에 한계가 찾아온다. 누군가 자원의 절대다수를 독점하고 분배하지 않는다면 모두가 고사할 것이다. 단지 가진 사람이 더 늦을 뿐이다. 그마저도 아무런 폭력도, 외부세계로의 도피가 없다는 전제 하의 이야기일 뿐이다. 대체로 그러한 한계 상황에서는 혁명, 쿠데타, 정부전복, 심지어 외침 등 다양한 방식의 폭력이 체제에 끝장을 내기 마련이다.

 

공유지의 지속 가능성을 유지하기 위해선 공정한 심판의 존재가 필수적이다.

 

정부는 자본주의 체제를 지속 가능하게 만들기 위해서 필요한 조치를 취해야만 한다.

 

엘리트들은 그러한 요구를 받아들이는 걸 체면이 깍이는 문제, 혹은 이권에 대한 도전으로 여겨선 안 된다. 이것은 그러한 문제를 초월한 것이다.

반응형
AND
반응형

엘리트 카르텔의 선출직 권력에 대한 무력화.

https://konn.tistory.com/768

 

 

고려시대의 문벌귀족은 음서와 공음전을 통해 권력과 경제력을 세습했으며, 그러한 제도를 기반으로 강력한 가문을 형성하고 유지했다. 그렇게 가문의 힘으로 권력과 경제력을 세습받으며 유지되었기 문벌門閥이었고, 이들의 권력은 무력을 지닌 무인들의 반란을 통해 뒤집어졌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경제력을 훼손당했다고는 해도 개국공신 가문에 뿌리 깊은 가문들이었고 그들은 약화되었을 뿐, 무신정권 시기에도 여전히 명맥을 잇고 있었고, 이후 권문세족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한국에서 권력자라고 부를 수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체로 공부를 통해 얻어낸 성과이다. 공부를 잘해서 좋은 대학을 갔거나, 외교관 시험, 행정시험, 사법시험 등의 고급 공무원을 선발하는 고시 출신이고, 공부 잘하고 좋은 대학 나온 사람이 대기업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여 기업가, 경영자들이 되어 큰 힘을 가지게 되기도 하였다.

 

본래 결혼은 비슷한 수준의 사람/집안끼리 하기 마련이다. 검사가 재벌가와 결혼하고, 의사가 변호사와 결혼하며, 판사가 교수와 결혼한다. 그렇게 사회적 권력을 지닌 지도층을 혈연으로 이어진다.

 

이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고, 막을 수도 없고 막을 필요도 없다. 단지 한국이 너무 좁은 국가이고, 좁은 영토 내 높은 인구밀도를 지닌 서울과, 그 서울에 국가 모든 중요 시설과 핵심이 모여 있는 환경상 그런 식으로 이어지는 혈연은 그 자체로 카르텔화되기 쉽다.

 

어느 지역에 큰 영향력을 미치는 지역 유지가 아닌 국가 전체의 핵심 중앙 권력을 장악하고 나눠먹는 권력형 카르텔이라는 것이 문제이다.

 

 

대기업 등에서 이루어지는 일부 낙하산을 제외하면 기본적으로 실력을 필요로 한다. 이는 더 좋은 대학, 더 좋은 직업을 가져야할 이유이자 근거가 된다. 공부를 잘해야 얻을 수 있는 것들이고, 그렇게 얻어진 대학 졸업장, 고시 합격자는 더 좋은 직업의 조건이 된다. 운이 좋아 시험 몇번 잘 본 것으로는 버틸 수 없고, 운이 좋게 얻어 들어간 자리에서 성과를 내는 것은 더더욱 어렵다.

 

물론 재벌 성골 출신이라면 타이틀에 비해 대단한 능력이 없다 해도 여전히 자기 자리를 유지할 수 있다. 어차피 경영권만 가지고 있다면 웬만해서는 밀려날 일이 없기 때문에 경영적 실패를 쌓으며 사회적, 경제적 손실을 발생시켜도 여전히 권력의 중심에서 도태되지 않는다.

 

 

중요한 건 그들에게 얼마만큼의 실력이 있고 얼마나 유능한지가 아니라 그 권력을 유지할 수 있는가이다. 검사 같은 경우 그 자체로도 유능한 사람들이지만 설령 그 조직 평균에 비해 무능하다고 해도 그들은 자신의 권력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한직으로 밀리거나 따돌려질지는 몰라도 검찰 조직에 반역하지 않는 한 그들은 여전히 검사 권력을 누릴 수 있다.

 

이는 설령 그 본인이 범죄를 저질러도 기소되지 않고, 기소된다 해도 그의 권력과 신분, 경제적 이익 창출에는 아무 영향을 주지 못한다.

 

 

이들의 권력이 공부를 잘했기 때문인 까닭에, 강남-대치동의 부모들은 자신의 자식을 고문과 학대에 가깝게 공부를 시키고 그렇게 강요받은 이들 중 부모의 의도에 합치된 성과를 낸 이들은 결국 사회적으로 성공하는 경우가 다른 지역 학생들에 비해 많다.

 

그렇게 그들은 사회, 아니. 국가 중심 핵심 권력에 남들보다 더 가까이 다가간다. 그리고 십수 년~수십 년간의 경력과 성과는 그 핵심의 가장 가까이로 그들의 접근을 허락하게 될 것이다. 물론 그 과정 동안 형성시킨 비슷한 위치의 다른 엘리트들과의 사회적 관계망은 이미 엘리트 카르텔의 일원으로 만들었을 것이고 말이다.

 

그리고 그들의 자식은 그들의 성공과 비슷한 경로를 탈 가능성이 높다. 똑같이 10살 안팍의 나이 때 고등학교 과정을 소화할 정도의 교육을 시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들은 문벌文閥귀족화 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공부와 시험을 통해 권력을 얻고, 비슷한 수준의 엘리트끼리 결혼하며, 각 집안이 가진 사회적 관계망을 결합 및 확장시킨다. 그리고 그 사회적 관계망은 국가 중요 권력은 물론 사회적 영향력을 차지한 사람들로 이루어져있다.

 

 

다른 나라에서도 공부 잘하고 인맥을 가진 사람들이 성공하고 중요 요직을 차지하며, 더 좋은 위치로 올라서기 쉽다. 특정 대학이나 특정 지역 출신이 요직을 차지하는 경우 역시도 많다.

 

그러나 한국은 그 정도가 특히 심하다. 이는 서울집중화, 밀집화와 좁은 국토에서 기인한다. 이미 집중된 서울은 다른 지역보다 훨씬 우월한 조건을 가지고 있고, 성장하기 어렵다. 다른 지역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것은 쉽다. 모든 요소를 다 고려한다 해도, 서울은 그 자체로 더 큰 이득을 준다. 거리 역시 짧은 편이고, 잘 닦인 교통은 시간 역시 오래 걸리지 않는다. 원래 지역에서 쌓아놓은 사회적 자본 역시 서울이 가져다줄 이익에 비하면 충분히 포기 가능하다.

 

어느 정도 지역 내 위치가 있다면 이미 서울에 자리 잡은 누군가와 인맥 관계일 가능성이 크다. 그것이 고등학교나 대학 시절 인맥이든, 교회 인맥이든, 직장 인맥이든, 친적과 같은 혈연이든.

 

그리고 엘리트 카르텔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들의 권력과 경제적 이권을 유지, 성장시키고 그러기 위한 자신들의 불법, 탈법을 법적 제재에서 지켜주거나 그러한 이익을 충족시켜줄 수 있는 정보를 미리 제공해줄 수 있고, 때때로 원하는 직위와 자리를 마련해줄 수 있는 사람이다. 그것은 자기 세대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식 세대에게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사기업의 경우 자리를, 학계의 경우 자격을 준다. 불법일 때도 있고 탈법일 때도 있으며, 합법적인 꼼수일 때도 있다.

 

그렇기에 다른 지역에서 올라오는 엘리트, 혹은 엘리트의 가능성이 있는 인재를 선호한다. 굳이 따지자면 전라도 출신의 경우 차별을 받거나 덜 선호될 수는 있다. 그러나 결국 중요한 것은 그들의 입맛과 이권에 부합되는 자인가가 핵심이다.

 

 

본래 사회지도층, 엘리트 권력자 집안의 경우 당연히 자기 자식에게도 더 좋은 교육을 시키고, 더 많은 지원을 해줄 수 있다. 당연하다. 그리고 그걸 막을 수도 없고 차별이라고 하기도 어렵다. 그렇게 그들은 부와 명예를 세습하게 된다. 자연스러운 일이다.

 

한국에서는 그 모든 과정이 심화되어 있다. 단순히 엘리트 교육이 아니라 끔찍한 사교육으로 부와 명예를 확보하고 그걸 세습시키려 한다. 그걸 위해 불공정과 불법 역시도 자행된다. 그럼에도 검사, 판사, 경찰 인맥은 그것을 기소하지 않거나 제대로 조사하지 않는다. 이런 저런 이유로 그들의 불법을 불법이 아니게 만들거나, 설령 처벌받는다 하더라도 솜방망이 처벌을 하게 된다.

 

이러한 불공정한 불법적 사례는 언론에서 다뤄질 때에만 그나마 처벌을 받거나 조사를 받을 뿐 적지 않은 경우는 아예 기소는커녕 조사조차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들끼리 덮고 유출시키지 않으면 그만이다. 언론의 조명을 받고 대중적 관심을 받는 경우는 그저 재수가 없을 뿐이라 여겨진다.

 

 

이는 완화시킬 방법은 없다. 어떠한 개혁도 엘리트 카르텔에 의해 가로막힐 것이고 일부의 성공 역시도 중과부적일 것이다. 역사는 이러할 때 무신정변, 혹은 역성혁명이라는 대답을 내놓았다. 무신정변은 군부독재와 같이 다른 문제가 되었을 뿐 근본적으로는 실패했고 역성혁명 역시도 일시간(어떤 면에서는 꽤 장기간) 효과를 보았을 뿐 다시 같은 문제를 발생시키며 다시 한번 멸망했다.

 

부정부패를 비롯한 불공정의 확대는 체제의 지속가능성을 약화시키고 이것이 임계점에 다다르거나, 그에 근접할 때 민중은 폭발한다. 그 이후 외세의 공격이 있었거나 내부에서 쿠데타/혁명을 일으켰는지의 차이만 있을 뿐 그렇게 역사는 국가/체제의 멸망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말해왔다.

 

한국이 이 상황에 어떻게 응답할지는 국민들의 몫이다. 아니, 어쩌면 우리의 몫이 아닐 수도 있다. 대한제국이 민중의 요구에 응답하여 멸망한 게 아니고 조선의 독립이 민중들의 요구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닌 것처럼.

반응형
AND
반응형



흔히 일뽕이라 불리는 이들이 실제 사회, 생활에서 어떠한 모습으로 살고, 어떠한 입장과 처지에 있는지는 개인마다 다 다를 것이고, 그렇기에 성급히 정의내릴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야기를 하기 위해 이 글에선 크게 두가지 범주로 나눠보려고 합니다.


하나는 한국 사회의 주류 정체성에 편입되지 못한 이들.

다른 하나는 한국 사회의 주류 정체성에 편입되지 않아도 되는(혹은, 않고자 하는) 이들.



그러나 먼저, 일뽕으로 한정 지었지만, 정체성이라는 건 언제나 한가지 뿐만은 아니고, 이러한 사례가 한국이 아닌 다른 국가에서, 그리고 일뽕이 아닌 다른 종류로 발생 가능하다는 것을 짚어야합니다. 따라서, 일뽕이라 한정지은 것은, 그것을 대표적 예시로 하고자 함이지 그것이 다가 아님을 알아야 하죠.


한 국가, 한 집단 내에서도 여러 정체성이 나뉘지만, 기본적으로 그러한 집단을 이룰 수 있는 거대하고 포괄적인 정체성이 있긴 합니다. 가령 우리가 한국인의 정체성을 가지는 것처럼요. 한국인이란 정체성을 이루는 여러 구성요소들이 있죠.


근데 가끔 이 정체성을 부정하거나, 편입되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말 많은 이유들이 있는데, 학교를 예시로 설명하자면, 엄청 잘나가는 애들이 있고, 평범한 애들이 있고, 그 평범한 애들 사이에도 끼지 못하는 애들이 있습니다.


편의상 각각 탑, 미드, 바텀이라는 간단하고 익숙한 개념으로 설명하자면, 일진이나 공부를 잘하면서도 집안 좋고 잘난 인싸들이 탑, 평범한 애들이 미드, 왕따 등 따돌림을 당하는 이들이나 특별히 친구로 지내지 않는 아싸가 바텀이라고 규정하겠습니다.


이중에서 가장 많은 건 미드 계층이고 학생이라는 집단의 주류 정체성에 해당하는 이들입니다. 좀 직관적으로 설명하자면, 흔히 '애들'이라고 하면 해당되는 이들이 이 계층이죠. 


탑 계층의 경우 인기가 많고, 영향력도 큽니다. 다만 역시 소수에 불과하죠. 먹이사슬의 최상위층이고 미드 계층은 이들을 동경하거나 두려워합니다.


바텀 계층은 모두가 싫어하거나 호감을 보이지 않고, 적극적으로 괴롭힘 당하거나 무시 당합니다. 친구가 없거나 자기들끼리만 어느 정도 알고 지내지만 그마저도 그리 적극적이지 않고 그들의 불행에 나서주지도 않습니다. 다시 말해 서로가 서로를 지켜줄 수 있는 집단은 아닙니다.


여기서 계층의 동경, 호감 등 방향성을 읽어낸다면 미드 계층은 탑 계층을 두려워하거나 동경합니다. 이는 사실 비슷한 개념이기 때문에 자기들이 탑 계층이 될 수 있다면(될 능력이 있다면) 기꺼이 되고자 하고, 그러한 탑 계층의 구성원과 알고 지내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반대로 바텀 계층에 대해선 혐오 내지는 무시를 받기 때문에 누구도 그 계층에 편입(추락)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같이 알고 지내고 싶어하지도 않고, 적극적으로 괴롭히거나 배척하기도 합니다.


현실 사회에도 이러한 구조는 어느 정도 적용이 되는데, 상류층과 중산층을 포함하는 서민 계층, 그 아래의 하위 저소득층이나 수급자 등등이 해당되죠.



한국에 존재하는 주류 정체성의 비중은 서민에 의해 형성된 것들이 많습니다. 근데 여기서 중요한 건, 탑 계층(상류층)은 그 아래로 떨어지기 싫어하고, 미드 계층(서민)은 바텀 계층으로 떨어지고 싶어하지 않다는 거죠. 그리고 하위 계층은 위로 올라가고 싶어하지만, 그럴만한 수단이나 능력 등등 부적합한 경우가 있으며, 집단으로 읽을 경우 그 이상으로 교육이나 재산, 빚 등등의 문제를 가진 경우도 있고요.



인터넷에서 보는, 가령 디씨 역갤 같은 곳에서 보였던 일뽕의 경우 실제로 한국이 못났고 일본이 우월하기 때문에 일뽕에 빠진 게 아닙니다. 그저 그들이 한국의 주류 정체성에 편입되지 못했기 때문에 반동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 뿐이죠.


사람은 집단에 소속되어야 하고, 개인으로서 존재하기 어렵습니다. 무엇이 되었든 집단 등 특정 정체성에 소속되길 바라고, 되도록 그게 자신의 자부심과 명예욕, 과시욕 등을 충족시켜주길 바라죠. 되도록 비교되고 우월하고자 합니다. SKY 대학생들이 하위 대학생들에 비해 더 큰 자부심과 명예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때때로 그걸 (적극적으로까진 아니더라도) 비교하며 과시하기도 한 것처럼요.


문제는 일뽕을 비롯한 하위 계층 중 주류 정체성에 편입되지 못한 이들이 새로운 정체성을 찾게 되는데, 주로 외부에서 찾게 되죠. 내부에서 자신이 소속될 수 없기도 하고, 소속될 가치가 없는 정체성을 거부하기도 하기 때문에요.


한국의 경우 가장 가깝고, 비슷하며, 이입하기 좋고, 정보를 얻기도 상대적으로 쉬우며, 무엇보다 한국보다 우월한 지위에 있고 지금도 어느 정도 그러한 위치에 있는 일본에 이입하는 겁니다. 즉, 한국의 주류 정체성에 편입되지 못하자 그에 대한 반동적 태도로 한국보다 우월한 일본의 정체성을 가지려 하는 거죠. 다시 말해 자존감의 문제입니다.


반드시 일본일 필요는 없습니다. 누군가는 일본일 수도 있고, 미국일 수도 있으며, 심지어 이해는 어렵겠지만 북한일 수도 있죠. 이 경우는 좀 드물긴 합니다만, 실제 종북 중 일부가 그러한 계층적 패배자이자 교육 수준이 낮고 심지어 정신적 문제도 있는 등의 경우가 있곤 하는 걸로 압니다. 정말, 아주 드물게요. 


얘넨 이석기 같은 부류와는 또 다릅니다. 자신을 핍박하고 잘 살지도 못하게 괴롭히는 한국은 밉지만 한민족을 배신할 순 없고, 그런 한민족을 핍박한 타 민족을 빨 수는 없으니 한국과 한국인들을 짓밟아줄 강력한 무력이나 정체성을 찾으니 그게 북한이었던 괴랄한 경우죠.


일뽕은 자기들이 한국인들보다 우월하고 그런 이유로 한국을 업신여깁니다. 왜냐면 자기들이 열등한 위치에 있으면서 주류 정체성에 편입되지 못하고 있거나, 그러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대신 자신의 위치를 남들이 무시하거나 조롱하기도 하고, 그게 아니더라도 본인 스스로 열등감을 가지기도 하죠.


그러니 외부 정체성으로 자신의 자존감을 채워야 했습니다. 위에서 열거한 일본인 이유가 있지만, 실은 거기에 하나를 더 추가해야 합니다. 매우 저열하고 말초적인 이유인데,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화한 경험이 있어서죠. 그러니 식민지배를 당한 후진국 한국과 한국인보다 정신적 일본인인 본인들이 훨씬 우월한 거고, 그 우월한 위치에서 한국인을 조롱하고 무시하는 겁니다.


날 병신으로 보는 한국인들을 원 없이 비웃고 조롱하고 공격하기 위해서요. 자존감을 회복하기 위한 방법 중 하나인 남을 공격하는 겁니다. 쓰러뜨리거나, 그러지 못한다면 꾸준히 자신보다 낮은 위치에 있음을 확인하고자(or 그렇게 믿고자) 깍아내리는 거죠.


학교의 찐따들이 평범함을 거부하고 일진 같은 잘나가는 애들을 도리어 증오하다시피 거부하는 이유는 그들이 별났나거나 일진 같은 애들을 엄청나게 증오하기 때문만은 아니고, 그러한 위치에 도달할 수 없기에 다른 정체성을 찾는 겁니다. 현실에서 쳐맞고 다니는 애들이 인터넷에선 여포이거나, 커뮤에 심각하게 빠져 중독되는 일이 발생하는 이유죠.


현실에서 주류 정체성에 편입되지 못하고, 스스로 그러한 정체성을 구성할 수 없으니 가상세계로 파고드는 겁니다.


미국 슬럼가 등 거리의 흑인 무리들이 백인 중산층이나 상류 엘리트를 무시하고 정부의 권위를 씹는 이유는 그러한 우월하고 안전한 정체성에 포함되기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다 봅니다. 심지어 될 가능성조차 없으니, '저 포도는 신 포도'인 셈이죠. 마찬가지로 사회의 찐따들이 한국인의 주류 정체성에 평범하게 편입될 수 없으니 외부 정체성을 가져오는 거고요.


ISIS가 한창 흥할 때 유럽에서 그러한 이념에 동화되거나 받아들이는 이들이 생기곤 했었죠. 실제 테러까지 이어지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지만, ISIS로 향하거나 하는 이들이 생기긴 했습니다. 심지어 한국에서도요. 이 또한 외부 정체성을 찾기 위함입니다.


이민자 1세대야 그렇다쳐도, 2세대 밑으로는 그곳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랐음에도 유럽의 주류 정체성에 편입되지 못하고 여전히 이민자, 무슬림, 그것도 테러나 저지르는 문제적 민족이라는 인식에 차별 당하고 공격 받으니 자신을 배척하는 유럽의 주류 정체성을 본인 스스로가 배척하고(내쫓긴 게 아니라 내 발로 나간 거다. 라는..) 대신 외부의 속시원한 정체성을 찾았던 겁니다. 그게 ISIS였던 거고요.



뭐.. 여기까진 차별 받거나 열등감이 있는 하위 계층에 대한 거고..


맨 위에서 말했던 한국 사회의 주류 정체성에 편입되지 않아도 되는(혹은, 않고자 하는) 이들. 에 해당하는 이들은.. 쉽게 말해서 정몽준 아들 같은 케이스입니다. 워낙 잘 살고 남들 머리 위에 있는 천상계의 상류층이다보니 그 아래에 있는 이들과 다르다는 거죠. 쉽게 말해 난 너희와 달라. 이겁니다. 


미드 계층이 바텀 계층과 동일시 되기 싫어하고, 그들과 아예 같이 있는 걸 배척하기도 하는 것처럼, 상류층은 그 하위 계층과 적극적으로 어울리진 않죠. 아예 무시하는 건 아니더라도. 하지만 탑 계층에 있던 이가 그 하위 계층과 동일시 되면 기분은 나쁠 수 있습니다. 계층 정체성에 위기감을 느낀다면 아예 손절해버리기도 하고요.


하도 잘나고 잘살고 있으니 아득아득 사는 이들이 천박해보이고 그런 천한 서민과 동일시 되기 싫다 이겁니다. 같은 한국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남들과는 다르다는 엘리트 의식, 선민사상. 이런 의식이 주류 정체성은 아니죠. 얘네가 일뽕 같은 것에 빠진다면 프랑스어를 쓰던 러시아 왕족, 한자를 쓰던 양반 계층처럼 서민보다 우월하다는 우월주의 때문이지 주류 사회, 주류 정체성에 편입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겉으로는 잘나가고 잘 사는 그들을 서민은 동경하거나 부러워하죠. 단지 그런 차이일 뿐입니다. 뭐 이런 우월주의나 선민사상 같은 거야 상류층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거긴 합니다. 하위 계층에서 볼 수 있는 열등감과 자존감 문제로 외부 정체성을 끌어오는 것도 특별한 일은 아니라고 보고요. 모든 이들이 그렇지는 않을 뿐.


이러한 문제는 단지 그 뿐만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ISIS의 정체성을 받아들인 이들이 그렇듯, 반사회적 문제로 이어지기도 한다는 겁니다. 원래 소득이나 교육 수준이 낮을수록 범죄율이 높다고는 하지만, 이 사회의 정체성이 아니고, 다른 사회의 정체성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러한 간극에서 반사회적인 행위가 나타나기 쉽다는 거죠. 

반응형
AND
반응형


기실 우리나라 체육계는 엘리트 체육이고, 그마저도 협회, 연맹 등의 조직의 입김이 너무나도 강하게 작용하는지라, 이들의 눈 밖에 나면 경기고 뭐고 선수 인생 제대로 필 수 조차 없으며, 이들이 선수들에게 끼칠 수 있는 영향력은 그야말로 절대적입니다.


문제는 이들이 자기 영역에서 전문성이 뛰어나느냐는건데, 수십년전부터 이러한 체육계의 협회니, 연맹이니 하는 것의 높은 자리엔 그쪽 분야의 전문가는 커녕 그저 명예직에 가까운 감투죠. 돈 많은 재벌, 의원들 몇 앉혀놓는. 그러니 출전자격도 모르고 선수를 내보내니마니 같은 뻘짓이나 하지요.


이미 이 나라 협회니 연맹이니 하는 단체들이 보여준 병크들은 너무나도 많죠, 배구여제 김연경, 박태환, 심지어 김연아까지도 데였고, 이용대 도핑테스트 불응처리 사건, 빅토르 안은 이미 퍼질 대로 퍼진 것 같습니다.


이러한 스포츠단체의 고위직은 또 일도 제대로 안 하고 그 위치 덕에 권력은 권력대로 갖고 비리는 비리대로 저지릅니다. 실제로요. 무능과 파벌, 탐욕, 이권싸움.. 한국의 거의 모든 협외니 연맹이니 하는 집단은 이러한 문제점을 모두, 두루두루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 덕에 스포츠스타들만 고생하는거죠.



그런 와중에서 빅토르 안의 러시아 이민, 그리고 다른 후배 선수들의 이민을 장려하는 행위는 기실 당연 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솔까 지금까지 이러한 횡포에 참고 있었던 것도 대단하다고 봐요. 서호진이 자기 1위 할 수 있게 일부러 져달라고, 밀어달라고 했다가 정정당당히 하고 싶다는 안현수를 넌 뭐가 그리 잘라서 튀냐며 무려 8시간 동안 구타를 했고, 서호진 부모는 또 협회에 올림픽에 출전 할 수 있도록 몇차례에 걸쳐 2100만원을 뇌물로 바쳤죠. 앞서 말한 구타사건으로 서호진의 코치가 짤리고 국가대표 발탁에도 떨어졌지만, 다음해에 아무 문제 없이 국가대표로 발탁됩니다. 뒷돈이 있었다는 의혹이 있죠.


어디 그 뿐인가 하면, 경기에서도 다른 선수들이 안현수가 앞으로 나오지 못하게 막고 심지어 서로 부딪혀 넘어지게까지 만들었습니다. 이 일을 기획한 코치들의 말 중에, 외국선수에게 져도 좋으니 안현수 우승 못하게 막아라. 라는 말까지 했다죠? 그리고 외국선수들은 너희들은 이상하다, 외국선수들을 막는게 아니라 너를 막는 경기를 한다. 라고 하질 않나..



이런 마당에 개인이 국가를 위해 희생해야 한다는 고결한 정신에 뭔 같잖은 애국심(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무식함이죠.)을 들이밀면서 니가 이라면 되냐고, 뺨 맞은 놈 다그치는 코메디를 연출하는건 무슨 멍청한 짓인지 모르겠습니다. 자기 집단이 자신을 내쳐서 나갔다가 자기 실력 제대로 뽐내서 메달따고 우승했는데 저새끼는 배신자라고, 변절자라고, 매국노니 어쩌는 소리 들으면 진짜 듣는 제가 다 쪽팔립니다.


개병신같은 대우하면서 개좆같애서 뛰쳐나가게 만든 새끼가 누군데 이제와서 꼬리 흔드는 새끼를 뭐라고 하더라요?


이런 환경에서 열심히 노력하는 선수들이 정말 대단한 겁니다. 일종의 애국심인지, 아니면 의무감인지는 모르겠지만, 무능하고 탐욕스럽고 부정부패와 비리로 얼룩지며 가장 뛰어난 선수 밀어주진 못할 망정 꺽고 죽이고 싶어 안달난 개자식들 밑에서 메달 따주고 국위선양해준거, 정말 대단한 거에요.

반응형
AND

ARTICLE CATEGORY

분류 전체보기 (855)
취미 (855)
백업 (0)

RECENT ARTICLE

RECENT COMMENT

CALENDAR

«   2024/04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