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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며,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 - E.Kant
by Ko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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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는 경쟁을 골자로 한다. 이것은 핵심 원리이다. 경쟁하지 않는 자본주의는 발전할 수 없고 발전하지 않는 자본주의란 존재할 수 없다. 자본주의는 숙명적으로 경제성장을 해야만 하는 체제이며,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자본주의라 부를 수 없거나, 실패한 것이다.

 

경쟁은 많은 스트레스를 발생시킨다. 안주하거나 쉴 수 없이 계속해서 발전해야만 한다. 더 나은 시스템을 도입하거나, 기존의 비효율을 정리하거나, 새로운 산업과 사업을 고안하고, 투자하며, 그러기 앞서 타당성을 평가해야 한다. 인재를 채용하고 저성과자를 해고하거나 좌천시킨다. 사업이 성공하면 다시 분배하여 규모를 키울 수도 있고 내실을 다질 수도 있다. 실패한다면 그 손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해야만 한다.

 

그럼에도 경쟁에서 패배한다면 도태되어 없어지거나 흡수되는 결말을 받아들여야 한다. 원하지 않더라도 이루어지는 일이다.

 

그러나 경쟁은 스트레스를 발생시키고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부담을 달가워할 개인도, 조직도 없다. 또한 사람은 경쟁보다 협력이 더 쉽다는 것을 알고 있고 그러한 협력이 더 많은 것을 가져다줄 수 있다면 그렇게 하는 동물이기도 하다. 이것은 자본주의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정치 역시 마찬가지이고, 기실 사람이 존재하고 집단이 존재할 수 있는 모든 곳에서 발생하는 일이기도 하다. 경쟁은 투쟁이고 투쟁은 이익과 동시에 손실을 내포한다. 그러한 손실을 최소화하고 이익을 나눌 수 있다면 그것을 선택하지 않을 이유 또한 없다.

 

 

한국 자본주의 시장에서 기업은 충분히 경쟁하고 있는가? 그런 기업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정 이상의 위치에서 경쟁은 크게 약화된다. 어차피 모두 아는 사이이고 이 좁은 국토의 좁은 공간에서 그들은 서로를 영원히 피할 수도 없고, 접하지 않을 방법 역시 없다. 어느 정도 규모가 된다면 그들은 어떻게든 알고 지내게 된다. 이는 인적관계망의 형성으로 이어지고, 그러한 관계망에 속하게 될 기회를 말한다.

 

재벌, 대기업은 가급적 경쟁하기보다 담합하는 것이 한국 시장에서 더 큰 이익을 발생시킨다는 것을 알고 있다. 물론 이것은 불법이고 부패이다. 그러나 이 부패가 충분히 사업성 있는 수단이 되기 위해서 중요한 것은 재벌의 존재이고, 그 재벌의 역할은 정경유착이다. 대기업은 많은 돈을 가지고 있고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지만 어디까지나 기업이다. 핵심은 그 대기업을 지배하는 재벌이며, 재벌이 수많은 대기업과 계열사를 지배할 수 있는 가장 큰 조력은 정치권의 협조에서 나온다.

 

그들은 재벌 대기업을 해체하거나, 그들과 반목하지 않는다. 어차피 그들에게 후원과 지원을 받는 것이 더 큰 이익이라는 것 역시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기업이 어느 정도 성장하면 다른 재벌 대기업이 그것을 인수해버린다는 말이 있다. 특히 중요하고 미래 가치가 큰 기술을 가지고 있거나 개발한 회사들이 그렇다. 부정한 방법을 써서라도 그들을 강제로 품안에 넣어버린다. 삼성이 그러하듯이.

 

한국의 수많은 제품은 경쟁보단 담합에 의해 가격이 조정된다. 닭, 소고기부터 시작해서 우리가 아는 많은 제품과 상품들은 담합에 노출되어 있다. 간혹 적발되어 처벌받는 경우는 있지만 그건 아무런 의미도 없다. 담합을 해서 얻는 이익이 처벌 받아서 발생하는 손해보다 압도적으로 크기 때문이다.

 

물론 전혀 경쟁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경쟁하는 업계도 있고, 경쟁하는 업체들도 많다. 그러나 먹을 게 있고 경쟁에 자신이 없다면 담합은 어떻게든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기도 너무 쉬운 환경이고 그 대가 역시 너무 작다. 그렇다면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앞서 언급했듯, 이러한 습속은 경제 분야가 아니라 다른 분야에서도 쉽게 발생한다. 가령 정치를 보자. 민주당과 국힘당은 서로 경쟁하는 관계이지만 동시에 협력적인 모습 역시 찾아볼 수 있다. 기본적으로, 소수의 집단이 너무 오랫동안 경쟁하다보면 그들의 경쟁은 경제적인 계산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담합적인 형태가 된다.

 

A라는 주제에 대해 찬성과 반대 입장으로 갈라져 있다면 둘은 서로 하나의 주제를 두고 경쟁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A 주제의 찬반 영역을 지지하는 사람들에게서 지지를 나누는 것일 뿐이다. 두 집단 모두 찬성한다면 그 주제가 받아들여지는 것과 별개로 그 주제에 관해 반대하는 지지 집단은 붕 떠버린 처지가 된다.

 

그리고 그들의 지지를 받고자 하는 이들은 A 주제에 관해 반대하는 입장을 취해 반대하던 집단의 지지를 차지할 수 있다. 즉, 지지자들은 하나의 자원이 되고 주제에 대한 찬반 입장은 어떤 자원을 차지할 것인가에 대한 입장표명이 된다. 그러한 이유는 명확하다. 사람이 모이면 이권이 형성되듯, 그들은 지지자들에게 위임받는 권력, 그 권력이 가져다주는 특혜와 경제적 접근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는 더 이상 옳고 그름의 목적과 믿는 바에 따른 신념의 영역이 아니라 경제활동에 가까우며, 이러한 관계는 적대적 공생관계라 말할 수 있다. 한국 보수와 중국/북한의 관계가 그러하고 진보 언론과 보수 언론의 관계가 그러하다.

 

북한이 정말 증오스럽다면 그들의 멸망을 위한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였어야 하지만 그들은 무대응으로 일관했다. 언론사는 기본적으로 자본을 추구하는 기업이며 진보 언론과 보수 언론은 표적으로 삼는 고객층이 다른 것 뿐이다. 그들이 사회정의와 이념적 규범을 위해 존재한다면 입장이 다를지언정 편파적이지 말아야 하며, 해석이 다를지언정 가짜뉴스와 의도적 선동이 있어선 안 된다.

 

 

그렇다면, 한국의 다양한 집단들은 정말 건전하게 경쟁하고 있는 것이 맞을까?

 

다시 말하지만, 경쟁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LG가 스마트폰 사업을 접었던 것처럼. 그러나 온전히 경쟁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하림, 마니커, 사조원 등이 닭고기 가격을 담합하여 막대한 이익을 나눠먹었듯이.

 

그들이 진짜 경쟁이라는 걸 한다면 재벌가 오너들이 개소리를 하고 사업적 실패를 겪으며 기업가치에 손해를 입힐 때 그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도태되어야 한다. 기업들이 시장에서 더 큰 지분을 확보하고 경쟁력을 갖추고 싶다면 개발에 투자해야 하고 가격경쟁이 됐든 판로 개척, 효율적인 시스템을 도입하고 검증해야 한다.

 

만약 정치와 사법이 자본으로부터 영향력을 덜 받는다면 그들의 부정부패에는 이익보다 강력한 손해를 주어 함부로 부정부패를 저지르지 않도록 할 것이다. 부정부패는 우발적인 것이 아니고 계획적인 것이기에, 그러한 부패를 계획할 때 반드시 리스크를 고려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에서 어떤 기업은 도태되고 약화되어야 하며, 어떤 기업은 성장하고 성공해야 한다. 그럼에도 한국에서 밑에서부터 올라온 새로운 기업이 등장하는 것보단 기존 재벌 대기업이 출자하여 만들어진 기업이 시장의 한 영역을 차지해버린다. 한국 시장은 자본의 규모와 별개로 좁은 곳이다. 그러한 행위들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국토가 좁은 나라의 숙명이라면 숙명이다.

 

그렇게 한국 자본주의의 구성원들은 경쟁을 기피하는 편이다. 전혀 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상대방을 파멸시키거나 일정 이상의 손해를 발생시킬 정도로 경쟁하지 않는다. 잘 돌아가고 있는 카르텔에 파문을 발생시켜서 좋을 것이 뭐가 있을까. 스스로의 오판과 실패로 망하는 것에 막대한 돈을 쏟아부어 살려줄 정도는 아니더라도 일부러 도태시킬 정도의 관계는 아니다. 망하지 않는 한 그들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매력적인 협력 대상이다.

 

그렇게 그들은 더 쉬운 방법을 찾았다. 경쟁하기보다 경쟁사끼리 모여 담합을 했고, 이는 시장에 대한 독과점 구조를 만들었다. 독과점 구조는 막대한 이익을 발생시키지만 소비자들에게 긍정적일 수는 없다. 제품 개발과 가격 경쟁을 해야할 이유가 없다.

 

 

또 다른 영역을 바라보자.

 

한국에서 성공하기 위해 공부를 잘해서 더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좋은 기업에 입사하거나, 장교가 되어 열심히 진급을 하는 방법과, 어려운 국가고시에 합격하여 전문지식을 갖춘 엘리트가 되는 방법 등이 있다. 

 

이것은 아주 상식적인 이야기지만, 단순히 자기 능력과 실력만으로 달성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순진하다. 부모의 재산이나 지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소위 라인이라 불리는 파벌 싸움을 말하는 것이다.

 

 

한정된 자원을 더 많이 차지하기 위해서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자신의 힘을 기르는 것이다. 그러나 혼자의 힘은 한계가 있고, 혼자서 차지할 수 있는 자원 역시 한계가 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협력/담합하기 마련이고, 이는 집단 내 파벌을 형성시킨다. 조직사회에서는 흔히 라인이라고 불리는 그것이다.

 

어떤 유력자들이 있고 그 유력자들에겐 자신의 라인이 있다. 대개 더 좋은 사업 아이템을 물어오고, 그것을 자신과 자기 아랫사람들에게 분배하며, 성과를 내면 그 라인 모두의 공이 된다. 그러한 성과를 기반으로 승진하거나 조직 내 요직을 차지하고, 더 뛰어난 인재를 자기 라인으로 끌어들인다.

 

그렇게 끌어들인 인재을 밀어주고 성과를 내면 라인 내 윗사람의 공이 되기도 한다. 사원의 공이 대리의 공이 되고, 대리의 공이 과장의 공이 되며, 과장의 공이 부장의 공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식으로 조직 내 한정된 자원을 라인이라는 파벌을 형성하여 차지하는 것이다. 당연히 다른 파벌과의 경쟁은 그러한 자원을 두고 다투는 것이고.

 

 

그렇다면 그러한 관점에서, 자신의 성공이 온전히 자신의 공일 수 있겠는가? 라인으로 대표되는 사내정치에 가담하지 않고 한정된 자원을 차지하기란 어렵다. 사관학교 출신이 아니라면 진급에서 불리한 장교들이 그렇듯이 말이다.

 

당연히 사내정치는 어느 나라에서든 있고, 파벌 싸움 역시 당연히 발생한다. 그리고 그것은 조직 내 경쟁이 되어 긍정적으로 작동하기도 한다. 경쟁은 발전의 동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비사관학교 출신 장교들의 진급이 다소 부당하게 막히는 사례처럼 한정된 자원에 대한 경쟁은 아주 강력하다. 그리고 그 자원을 차지하기 위해 라인을 타지 않고 파벌에 속하지 않는 이들은 무조건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 혼자서 다수와 경쟁할 수 없으니 말이다.

 

즉, 라인과 파벌은 반드시 긍정적으로 작동할 수만은 없다는 것이다. 때로는 더 부정하게 작동하기도 하며, 이러한 형식의 관계는 결국 인적관계망이라 이름붙혀 지고, 그것들이 부정적으로 작동한다면, 우린 그러한 예시 중 하나로 엘리트 카르텔을 꼽을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 한국의 정말 중요한 집단에는 이러한 파벌, 라인이라는 혈관으로 조직되는 엘리트 카르텔이 형성되어 있다. 이는 공부를 아무리 잘하고 실력이 아무리 뛰어나며, 사법시험, 행정시험, 외교관 시험, 로스쿨 졸업, 변호사 시험, 의사시험 등 전문직 엘리트가 될 수 있는 자격시험에 통과한 이들이라도 인맥이라 불려지는 엘리트 카르텔의 도움이 없다면 정말 중요한 요직에 접근하기 어렵다는 말이 된다.

 

이 나라에서 성공하기 위해서 중요한 건 그 엘리트 카르텔에 소속될 수 있는가와 얼마나 핵심에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느냐에 달렸다. 물론 실력이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어려운 일이지만, 재벌 2세와 3세, 유력 정치인들의 자녀들이 어떤 노력을 해서 그러한 카르텔에 소속될 수 있었을까? 그들이 노력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지만, 태생부터 카르텔에 소속된 것과 다름 없는 이들과 흙수저 출신 개천의 용과는 혈통이 다를 수밖에 없다는 건 인정할 것이다. 그 혈통이 꽤 큰 장벽이라는 점 역시.

 

파벌싸움, 라인, 엘리트 카르텔에 속하여 인맥을 동원하는 것 역시 자신의 실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것이 공정하지 않다는 점이다. 시험의 공정성에 맹목적인 신앙을 보이는 자들이 시험 외적인 불평등한 인간 관계로 잠재적 경쟁자를 탈락시키고 차지한 자원을 나누지 않는 것에 분노하지 않는다면 이중적인 것이고 위선적인 행동이다.

 

물론 모든 파벌, 라인이 잘못됐다는 건 아니다. 그것이 긍정적으로 작동하고, 자연스럽게 형성된다는 것 역시 인정한다. 하지만 엘리트 카르텔은 그것과 다르다. 그들은 한정된 자원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이 아니라 한정된 자원을 남과 나누지 않고 독점하기 위한 담합에 가깝다. 그들이 외부에 언터쳐블한 접근을 요구하고 자신들에 대한 어떠한 정당한 요구조차 불응하며 공격이라 간주하며 반응하는 것이 그러하며, 사법처리에 있어서도 불공정의 영역을 한참 벗어난 것을 보라. 이것이 공동의 발전을 위한 것인가?

 

 

경쟁보다 담합이 매력적인 선택지가 되는 것은 기실 당연하다. 인간이 투쟁만큼이나 협력을 선호했기 때문에 무리를 짓고 집단을 이루며 지금까지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이 협력의 효율성을 보장한다. 그러나 외적인 요소에 대한 투쟁을 위한 협력과 내부 집단의 경쟁자를 도태시키고 시장과 같은 영역을 장악하기 위한 담합은 서로 다르다.

 

협력을 통해 인간은 발전했지만, 담합은 내부 역량을 제한하고 그 발전 역시 족쇄를 걸기 때문이다. 이는 협력이 공동의 발전과 이익을 위한 것이지만 담합은 소수의 이익만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 이익을 위해 전체 집단의 대부분은 불필요한 손해를 봐야만 한다.

 

그럼에도 담합은 그것에 가담할 수 있는 이들에게 여전히 매력적이고 합리적인 선택지가 된다. 그것을 막아야 하는 것은 견제 세력이다. 단순히 담합에 끼지 않은 업체 같은 것이 아니다. 가령 시장에서의 담합은 업계의 다른 기업이 아니라 정부라는 공권력, 정치권력이 개입해야 한다

 

정치권력이 부패하여 담합한다면 그들을 견제할 수 있는 것은 그 체제 내에서 힘을 가진 이들이다. 민주주의에서 그것은 국민이 된다.

 

절대권력이 절대부패하는 이유는 그들을 견제할 세력이 없고, 경쟁할 세력이 없기에 소수의 관계자들만의 이익을 위해 담합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단순히 가능하다는 까닭에 더 쉽고 매력적인 선택지를 고른다. 이는 완벽히 합리적으로 이루어지는 경제적인 선택이다. 그 목적이 공동의 발전, 항구적인 발전이 아닌 그 소수 기득권의 이권이라는 목적에 부합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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