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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며,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 - E.Ka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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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관'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22.11.02
    하나의 사회 속에 존재하는 다양한 세계의 간극.
  2. 2021.08.25
    후진국-개도국의 부정부패와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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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

 

실제로 까마귀가 나는 것과 배가 떨어지는 것의 상관관계는 없습니다. 하지만 두가지 현상이 비슷한 시점에 발생한다면, 혹은 관찰된다면 어떤 현상이 다른 현상에 선행하거나 조건으로 여겨질 수 있죠. 그러나 논리적으로 아무런 연관도, 인과도 없다면 그것은 논리적 오류가 됩니다.

 

 

하나의 세계관은 한 사람의 삶으로 구축됩니다. 그 사람이 세상을 어떻게 인식하고 받아들이는지는 그 사람이 살아온 경험에 따르는 것이고, 완전히 다른 세계관이란 완전히 다른 삶의 경험으로 번역될 수 있죠.

 

한 국가의 환경은 대체로 비슷비슷합니다. 도시를 중심으로 하는 발전과 시골의 발전도는 다를 수밖에 없고 상류층과 하층민의 삶은 다를 수밖에 없으며 한 사회에도 여러 층위가 존재하듯 평균에서 크게 벗어난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국가의 구성원으로 보편적으로 겪을 수 있는 환경과 할 수 있는 경험에는 어느 정도 교집합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 국가 내에서도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 서민과 비서민, 수도권 거주자와 지방 거주자의 관점 차이는 꽤 커다란 편입니다. 우리 사회는 지리적 한계 내에서 그 경험의 폭이 좁은 편이라는 점을 고려해도 그 간극은 타국과 비교해서도 상당한 차이를 보입니다.

 

그 이유는 지리적 폭은 좁지만 시간적 폭이 넓기 때문이라고 보는 편인데, 한 세대가 겪는 시대적 경험과 그 다음 세대가 겪은 시대적 경험의 차이는 한 세대 이상의 것이라고 칭해도 무방할 정도로 큰 차이를 보이기 때문입니다. 40년대에 20대를 보냈던 사람과 60년대에 20대를 보냈던 사람, 80년대와 2000년대를 20대로 보냈던 사람에게 한국은 완전히 다른 국가였습니다.

 

사상적 차이가 아니라 물질 문명의 발달 정도가 한 세대 이상의 간격을 보여주며 급속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물질적 경험은 사상의 차이에도 영향을 미치고, 곧 세계관에도 차이를 발생시킵니다. 따라서 한국의 각 세대는 서로 다른 세계를 살아왔던 이방인이며 우리 사회는 이방인들의 집합인 셈이죠.

 

 

진보와 보수가 바라보는 세상은 완전히 다릅니다. 사실, 그들은 같은 나라에 살고 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세상을 살고 있죠. 진보에게 정의인 것이 보수에겐 위선이 되고, 보수의 정의가 진보에겐 범죄로 인식되는 가치관의 차이는 상당한 간극을 두고 있습니다. 심지어 상식의 영역조차도 서로 다르게 인식하고 있고, 정반대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범합니다. 대체로 상식적인 판단력을 보이기도 하죠. 하지만 정치적 영역에 접어드는 순간 그들의 상식적 판단력은 진영간의 간극만큼이나 차이가 벌어지게 됩니다. 그들에게 작동하는 논리 회로가 서로 다르기 때문일 것이고, 그 회로에 작동하는 경험이라는 데이터가 서로 다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간극에도 불구하고 현상에는 객관적으로 판단할만한 요소들이 존재하며 그 요소들을 기반으로 하는 판단이 객관성, 혹은 상식의 보편적 평균치에서 크게 벗어난 경우라면 그 사람은 특별히 더 극단적인 가치관을 가진 것이고, 비상식적인 판단력이 작동하는 세계관의 객체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합리合理는 이치에 맞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이치는 시대와 문화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이지만 우리는 숱한 문화권과 깊은 인류 역사에서 공통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하나의 정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 정도와 범위에서의 차이가 있을 뿐, 인간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정서가 그러합니다.

 

이는 나와 내 가족, 내 주변 사람을 위협으로부터 지키고 생명의 상실에 고통스러워하고 슬퍼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옛적 시절부터 사람은 나와 남을 구분하여 남의 아픔에는 공감하지 않고 (내 주변 사람의 고통으로부터 말미암은) 나의 아픔에 더 이입하였지만 그렇다하여 생명의 무게를 경시하는 것이 지배적이었던 시절은 없었고, 설령 있었다 하더라도 바로 그러한 이유로 다른 사상이 지배하는 체제에 무너져 도태되기 마련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정서에서 출발한 것들은 대체로 도덕, 윤리와 같은 전통적인 정신적 사상이 되었고, 그것을 명문화하거나 관습적 질서로써 작동하는 것을 우리는 법이라 부릅니다.

 

 

그런 까닭에 사람의 생명을 기준으로 하는 도덕률은 객관적 기준으로 삼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물론 악인의 죽음에는 대부분의 사람이 공감하거나 이입하기 어렵고, 그들에게 애도와 명복을 비는 것 자체가 피해자, 희생자에 대한 모독이 될 수 있는, 가령 히틀러나 스탈린과 같은 이들. 대부분의 침략자와 학살자들에 대해서는 그러한 도덕적 기준을 잣대 삼지 않는 것 역시 인정되어야겠죠.

 

반대로 말하자면 죄인이 아닌, 죄 없는 사람의 죽음에 어떠한 태도를 보이는지를 기준으로 한다면 그것은 적절한 판단 기준이 될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무고한 사람들이 사고, 재난, 범죄의 피해로 죽거나 다쳤을 때 그것을 조롱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비도덕적인 행위이고 그러한 행동이 가져다주는 이점이 없기 때문이며 도덕이란 사회화의 가장 중요한 항목이기에 이것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사람이 아닌 이상 그러한 행위를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건이나 사고, 재난, 참사, 학살에 대해 피해자를 조롱하고 공격하는 경우는 단순히 그들이 사회화가 덜 이루어졌거나 도덕적 훈련이 덜 되었다는 것 이상의 사유가 존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령, 정치적 진영의 차이가 그러하고, 정치적 책임의 유무가 어느 쪽에 더 실려 있는지에 따라서도 그러한 입장 차이를 발생시킵니다.

 

이것은 정치적 이념이 객관적 도덕 기준보다 우선했을 때 찾아볼 수 있는 현상이죠. 우리 진영의 정치인이나 통치자가 수많은 피해자를 발생시킨 사건의 원인을 제공하거나 그러한 책임을 질 수밖에 없는 위치와 상황에 있을 때 그 지지자들은 그들에게 책임이 돌아가지 않도록 여러 활동들을 전개합니다.

 

그러한 활동은 누군가의 지령을 받거나 집단의 전략적 행동이 아니고 단순히 각 개인들의 공통적인 정서가 특정한 방향성을 가지는 것이라고 봐야하는데, 이는 특히 내집단의 무오함을 신봉하거나, 무오해야 한다는 믿음을 지닌 이들이 많을 수록 발생하기 쉽죠. 다시 말해, 더 극단주의자가 많은 쪽일수록 그러한 정신증이 쉽게 발병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무책임한 태도로 일관하고 적을 만들거나, 희생자를 만들거나, 피해자와 가해자를 뒤집기도 하고 없는 죄를 만들어서 덮어씌우거나 작은 죄를 과대포장하여 깍아내리기도 합니다. 희생자나 피해자는 그들의 그러한 행동에 의해 무고한 자에서 위선적이거나 욕심많은 장사꾼이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유로 더더욱 공격하고 자신의 공격이 정당하다고 믿죠.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고 그에 대한 정치적 책임이 분명히 존재해야함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진영이나 입장에 따라 책임추궁에 태도 차이가 생기는 이유는 그것이 도덕과 같은 합리적 기준을 기반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정치적인 기준으로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지지하는 집단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들의 모든 잘못과 책임에 그 어떤 추궁도 하지 않고 그들은 항상 무오한 집단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는 당위가 있는 것처럼 말이죠. 도덕적 기준으로 0, 0의 좌표에서 멀어질수록 극단적인 성향이라면 정치적 도그마의 점수가 높을수록 도덕적 기준에서도 멀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는 나와 남의 구분에 따라 나, 혹은 내가 이입하고 공감할 수 있는 내집단內集團과 그렇지 않은 외집단外集團의 차이에서 비롯됩니다.

 

그들에게 내집단에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사건의 피해자는 곧 외집단으로 분류되고, 도덕적 기준의 작동 대상이 아니게 됩니다. 내집단의 전사들이 외집단의 민간인에 도덕적 기준 대신 힘의 논리를 작동시키고, 포식자가 사냥감에 공감하거나 이입하지 않는 것처럼요.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서, 오비이락이란 서로 다른 현상을 한가지 인과로 엮어 설명하는 오류를 말합니다. 평범하게 살아가는 어떤 사람이 어떠한 현상(혹은 사건)에 대해 비상식적인 판단을 내린다면 그 사람이 특별히 멍청하거나 비상식적인 판단을 내릴만한 경험을 받아들여 왔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객관, 혹은 상식의 차이는 그가 살아온 사회의 층위에 가장 큰 영향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것은 특정한 층위에서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고, 다양한 층위가 공통적으로 공유하는 정서 내지는 사회문화적 밈일 가능성 역시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전라도에 대한 편견을 특별히 더 많이 지닌 지역은 그러한 정서 내지는 밈이 그 지역사회의 다양한 층위에 공통적으로 잔존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들은 전라도라는 지역과 그 지역민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가지고 있고, 그 인식은 오비이락식 해석에 의해 사소하거나 심지어 겪어본 적도 없거나, 아예 과장 내지는 거짓말일 경우조차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내집단의 일반적인 감성이 될 수 있습니다. 그 내집단은 가족/집안 단위일 수도 있고 그보다 더 클 수도 있습니다. 그 관계도 역시 밀도 있는 얼개를 지닌 것이 아닐 수도 있지만, 끈끈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오비이락식 해석에 익숙해지고 다양한 분야에 같은 방식의 해석을 적용한다면 그 세계관은 더 논리적인 형식으로 구성되기보단 피상적이고 경험적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 경험이란 실제로 겪은 것 뿐 아니라 자신이 신뢰하는 누군가의 발언 내지는 해석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주입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내집단의 것은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공동체적 성격을 띄지만, 외집단의 것에 대해서는 반사적 거부감을 먼저 일으킬 것이고요. 그 사이에서 편견은 매우 활성화 됩니다.

 

 

그러한 세계관/가치관을 가진 사람은 무고한 사람이 죽은 참사에서도 비슷한 태도를 보일 것이고 피해자에 이입과 공감을 하기보단 그들에게 없는 죄를 찾아내거나, 편견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이태원에서 압사 당한 사람들에게 왜 쓸데없이 밖에 나가 돌아다니다 그런 사고를 내냐거나, 당국에 책임을 묻는 것에 대해 왜 나라 탓을 하느냐는 식으로 나오는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그들에게 도덕과 윤리란 객관적, 합리적으로 작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선택적이고 정치적입니다. 어떠한 경우에는 작동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많고, 내집단과 외집단을 구분해서 작동합니다. 정치적 이념은 그러한 내외집단의 구분 기준에 충실한 근거일 뿐이죠.

 

 

논리는 올바른 형식과 원리하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논리 역시 훈련받아야 가능한 것이고 모든 경우에 단일한 논리를 적용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세계관 하에서 특정한 논리는 그 개인에게 합리성을 획득할 수 있고 그 세계관 내에서 합리적인 설명과 해석을 내놓을 수도 있죠.

 

그것이 일반적인 객관성이나 상식에 부합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러한 세계관을 지닌 사람은 그 오류를 쉽게 자각하거나 논파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당장의 논쟁에서 내가 잘 모르기 때문에, 아직 정확한 모든 정보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등등 다양한 이유로 일시적인 후퇴나 보류를 결정하게 할 뿐이지 자신이 세상을 받아들이고 해석해온 기반 논리가 틀린 것이 되는 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개인의 모든 판단기준과 그러한 기준에 따라 살아온 자신의 삶이 틀린 것으로 부정되는 세계관적 충격을 발생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그 세계관이 사회에서 완전히 배제되거나 충돌을 일으키는 수준의 간극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과 동일 세계관 내지는 유사한 세계관을 지닌 사람들 역시 매우 많을 것이라는 점 때문에 더더욱 포기하거나 틀렸음을 인정할 수 없게 됩니다. 자신이 틀린 증거보다는 자신의 옆에 있는 자신과 같거나 유사한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을 보며 자신이 틀리지 않았음을 재확인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 역시 사회화인 까닭에, 약자에 무자비하고 강자에 비굴한 세계관을 지닌 이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환경/사회/층위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도덕의 영역에서 그렇지 않은 이들에 비해 0, 0의 좌표에서 더 멀어져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이유를 포함하는 다양한(앞서 설명한 여러 요소들) 이유들의 합에 의해 더 극단적인 가치관, 성향을 가지고 있을 것이며 이것은 정치적 이념이 되었을 때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극우, 극좌 타입에 속하게 되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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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진국이라고 피할 수 없는 문제이고 언제나, 어디에서나 부당한 방법을 통해 이익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은 있어왔기에 부정부패는 인간 사회의 핵심 원리 중 하나로 기능한다고 봐도 될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정의롭고 공정하지 못하기에 부정부패는 시대에 따라, 사회 시스템이 발전하면서 정교해지고, 고도화되면서 배척되기 마련입니다.

 

본디 부정부패라고는 하지만 그게 당연했던 시대도 있었고, 그거 말고는 다른 대안점을 찾지 못하는 집단도 있었으며, 앞서 말했듯, 그 자체로 하나의 원리, 시스템으로 기능하는 집단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치에 있어서 부정부패를 말한다면 결정권자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이들에게 돈-이권을 찔러주면서 경쟁의 우위를 확보하거나, 또 다른 이권을 배타적으로 차지할 권리를 얻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경우지요.

 

서구 사회는 수백 년 동안의 시행착오와 갈등을 겪으며 이러한 것들이 현재의 수준으로 진보하였겠지만, 대체로 18-20세기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손아귀에서 서구적 시스템을 이식당한 비서구권은 시대를 뛰어넘어 수많은 시행착오들을 생략한 채 지금의 국가 시스템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구에선 이미 오래전 겪어왔던 것을 지금에서야 겪기도 하고, 아직 시작조차 안 한 국가들도 많지요.

 

유럽 등 서구라고 해서 더 나았던 것은 아닙니다. 더 추악하기도 했고 그들의 시행착오와 갈등을 답습하며 피하거나, 적어도 그 시절 그 수준보다는 좀 더 나은 상태에서 갈등을 시작할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제도와 법이 있음에도 불구하여도 더 나쁘게 시작하는 국가도 있지만요.

 

 

부정부패가 발생하는 원인 중 하나는, 그것을 감시하고 감독하고 검증하며, 관리할 수 있는 인력과 시스템 자체의 한계에서 기인합니다. 아무리 도덕성이 뛰어난 이들로 정부를 구성한다 한들, 어디에선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부정부패가 발생합니다. 이는 그들의 도덕성이 남들보다 떨어지기 때문이라기보단, 할 수 있기 때문에 하게 된 것이라 해석하는 게 옳습니다.

 

할 수 있으면 당연히 하게 되죠. 당장은 아니고, 모두가 다 하는 건 아니더라도 언제 어디선가 누군가는 반드시 하게 됩니다. 어떤 당위나 사명이 있어서가 아니라, 단지 할 수 있기 때문이죠.

 

근대 이전의 세계는 부정부패를 막거나 감시할 수 있는 시스템이 부족했습니다. 언제나 지켜보고 있을 수도 없고 장부나 서류에 어떤 장난질이 쳐졌는지 검증하기도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실제 장부에 적힌 것과 실물을 확인하기만 해도 되지만 그걸 확인하지 못하기 때문에 적발하지 못하는 건 전근대 시절에 흔하디 흔한 일이었습니다. 심지어 물건도 아닌 사람조차도요.

 

 

그리고 서구식 시스템이 도입되었다 해도 이러한 시대적 관성은 여전히 작용합니다. 후진국과 개도국에서 부정부패 문제가 여전히 강력하게 작동하며, 아예 국가를 돌리는 시스템 중 하나로 작동하는 이유죠. 가령 필리핀 같은 경우는 부정부패로 경제가 돌아간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이는 비단 필리핀뿐만이 아닙니다.

 

전근대인이 근대인보다 도덕성이 열등하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들은 그저 그들이 살던 시대에 충실한 인식과 가치관을 가진 것뿐입니다. 다르게 말해서 그들의 세계관은 그들이 살아가는 시스템에 맞지 않을 뿐입니다. 어떤 관점에서 그들의 세계관이 그들의 국가 시스템보다 후진적이라 말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들은 애당초 전근대와 근대 사이의 시기를 경험해본 적도 없습니다. 그러니 근대적, 현대적 국가 시스템 안에서 그 시행착오를 겪으며 경험해볼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한국의 사례와도 같습니다. 특히 한국이 적절한 예시이기도 합니다. 가장 성공적으로 현대화한 국가이기 때문입니다. 고작 100년 전 한국에는 왕이 존재했습니다.(정확히는 111년 전쯤.) 그러나 그 뒤로부터 약 36년 뒤, 민주주의가 도입됩니다. 그리고 전쟁을 거쳐 70~80년대까지 강력한 산업화의 발전을 겪죠. 90년대는 한국이 물질적 빈곤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며 전형적인 후진국의 모습에서 현대적 국가의 모습으로 탈바꿈하던 시기가 됩니다. 밀레니엄이 지나고 2000년대, 명실상부 현대국가에 도착하게 되죠. 거기서 10~20년이 지난 뒤 지금의 모습은 누구도 후진국, 개도국이라 말하지 못하는 물질문명 속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높은 빌딩과 지하철이 깔려 있고, 뛰어난 대중교통 시스템과 전자정부, 스마트폰과 컴퓨터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빠르고 효율적인 경험이 우리 삶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한국은 전근대에서 벗어나지 못한 후진국에서 100년 만에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으로 성장한 선진국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후진적인 부정부패를 겪고 있죠. 물론 이러한 부정부패가 선진국에서 찾아볼 수 없다는 건 아닙니다. 그들에게선 발생 빈도가 적을 수는 있어도 말입니다.

 

이것은 100년을 살아가는 각 세대의 세계관이 발전해가는 물질문명을 따라잡지 못하기 때문인데, 30년대를 살아가던 이에게 50년대는 다른 세상이고, 60년대를 살아가던 사람에게 80년대는 또 다른 세상이며, 80년대를 살아가던 사람에게 2000년대는 완전히 다른 세상입니다. 심지어 2000년대를 살아가던 사람에게 이후의 세상은 정말이지 너무나도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20살 때 왕이 살던 시대를 겪은 이가 약관의 나이에 을사조약으로 왕을 잃고 80살까지 살았다면 70년도까지 살았을 겁니다. 그가 한창 젊었던 시기와 중, 장년을 겪었을 한국의 모습은 그야말로 다른 세계의 연속이었을 겁니다. 전후 세대도 마찬가지일 거고, 산업화 세대에게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그런 그들이 생각하고 받아들였던 세상에서 부정부패란 지금과 달랐을 거고요.

 

그럼에도 우리는 그러한 부정부패를 막아야 한다는 비교적 공통적인 인식을 가지고 그것들을 막아왔습니다. 여전히 틈과 허점을 파고들며 더 참신하고 교활한 부정부패를 일삼기도 하고, 감시할 수 없는 공간과 자리라는 현실적 허점에서 결정되는 이야기를 제도적으로 실현하는 부정부패 또한 여전히 발생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한국은 정말 여러 가지 요인과 원인으로, 그리고 그만큼 강력한 정신적 동기로 발전을 이끌어내었습니다. 심지어 지리적, 지형적인 원인조차 작동할 겁니다.

 

 

대다수의 후진국은 여전히 부정부패가 당연하고 평범한 세계관을 가진 이들이 많습니다. 그것을 적발하거나 제도를 고칠 생각이 없거나 그럴 수 없고, 심지어 그렇게 해봤자 집행의 의지가 없는 경우도 있고, 감시와 검증이 현실적으로 어려운 경우도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들이 발전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의 의지가 뒤떨어지거나 능력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많은 것들이 타국에 비해 열등하기 때문도 아닙니다. 단지 그들에겐 시간이 부족할 뿐입니다. 우리야 100년 정도가 걸렸다지만 우리가 특수한 케이스일 뿐, 다른 국가들은 전근대-근대-현대를 거칠 시간이 필요합니다. 무엇을 하고 싶든 그것을 실행하고 집행하기 위해서 부정부패가 없어야 합니다.

 

기계로 비유하자면 작동에 필요한 부품을 빼서 자신의 주머니에 넣는 것과 같습니다. 더 많은 부정부패의 손길이 닿는다면 실제 작동해야 할 때 삐걱이며 고장 나거나 그 이상으로 사고가 발생하겠죠.

 

부정부패를 막기 위해선 시스템적 정비가 필수적입니다. 지금 발생하는 부정부패를 원천적으로, 가능한 최대한 막을 수 있도록 제도를 정비하고 실시해야 합니다. 물론 그것이 잘 돌아갈 수 있도록 감시하고 관리하는 행정력을 갖추는 것도 필수적입니다. 애당초 부정부패가 삶을 지탱하는 기둥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 봉급이 너무 부족해서 먹고 살기 어렵다는 이유로 시민의 주머니를 약탈해선 안 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부정부패는 반드시 발생할 겁니다. 모든 시스템은 결국 사람에 의해 돌아가고, 그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을 하게 되며, 그 대가를 치르게 되지 않는다면 문제는 반복될 겁니다. 지금도 우리 사회의 수많은 크고 작은 결정권자들은 자신의 권한과 권력으로 크고 작은 이익을 취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러지 않는 이유는 자신의 욕심을 실행에 옮겼을 때 거의 반드시 적발되어 처벌되는 대가를 치르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고, 동시에 부정부패는 나쁜 것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정부패를 막기 위해선 그것을 방지하고 적발하며 처벌하는 시스템이 그것이 나쁘다고 여겨 행하지 않는 개인의 도덕성보다 강력하고 합리적인 대책이겠지만 기술적으로 불가능한 위치에서 발생하는 것을 막는 것은 그럼에도 개인의 덕성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덕성을 다수가 공유하는 세계관으로서 형성된 사회에선 동일한 시스템을 갖추었으나 그러한 세계관이 빈약한 사회보다 부정부패의 발생이 적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조선에서 부정부패가 없진 않았겠지만, 유교적 세계관이 관리들을 정신적으로 통제하며 동시대 다른 국가보단 그나마 나은 처지라 여겨지는 것처럼요.

 

 

그렇기에 후진국-개도국의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건 시간입니다. 여전히 부정부패를 무감각하게 받아들이며, 사회의 원리로써 작동하는 세계에서 그것은 옳지 못하다는 인식을 가진 사람들이 늘어나게 된다면, 그들의 요구로 하여금 시스템은 부정부패를 배척하는 쪽으로 변화할 겁니다. 한국이 수십 년 동안 겪었고, 지금도 겪고 있는 것처럼요. 네, 오래 걸리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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