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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며,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 - E.Kant
by Ko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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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에 해당되는 글 6건

  1. 2022.10.20
    도덕과 자기검열이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맡는가.
  2. 2022.08.21
    커뮤니티와 가치관 형성 선점 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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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도덕이란 자기검열이다.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자기검열이고, 도덕은 그 중 가치판단의 영역에서 옳고 그름을 구분하여 무엇을 검열할 것인지 선택하는 것이다.

 

1.

도덕은 할 수 있지만 하지 않으면서 지켜지는 규범이다. 이는 그것이 법적 처벌을 받을 정도는 아니지만, 누군가에게 크고 작은 유무형적 피해를 발생시키는 것을 피하면서 지켜진다. 작게는 실제 타인의 피해부터 크게는 보는 이로 하여금 기분이 나쁜 것까지 다양하다.

 

2.

그렇다면 왜 도덕은 지키는 것이 옳은가? 그것은 도덕이 규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는 도덕의 범위 내로 포함되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따져야 알 수 있다.

 

도덕이 지키고자 하는 것은 많지만, 가장 근본적인 것은 신뢰이다. 내가 저 사람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을 것처럼 저 사람도 날 존중할 것이라는 것. 내가 욕을 하지 않고 함부로 하지 않으면 타인도 나에게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을 믿는 것이다. 내가 불특정 다수, 내가 알지 못하는 누군가에게 직간접적인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노력하듯 타인도 그러하리라는 믿음이다.

 

이러한 믿음은 사회적 신뢰가 되어 어떠한 불문율이 되기도 한다. 가령 한국에선 밖에서 핸드폰이나 가방, 지갑 등을 놓고 주인이 없어져도 그 자리에 있거나 경찰서, 분실물 보관소 등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이는 남의 것을 함부로 가져가지 않는다는 기본적인 도덕률부터 시작해서, 자기가 자리를 점유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자신의 물품을 놓는 행위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이는 타국에서 줄을 설 때 직접 그 위치에 서있는 게 아니라 신발(슬리퍼)만 줄지어 놓고 본인은 뒤쪽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서 대기하는 것과 유사한 사회적 합의이다.

 

이것은 일종의 문화에 더 가깝다곤 하지만, 그러한 문화와 불문율을 깨고 물품을 훔치는 것은 범죄이지만 비도덕적인 행위이다. 단순히 법을 어기고 남의 것을 훔쳐가는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러한 문화/불문율을 깼고 사회적 신뢰에 대한 훼손을 시도한 것이기 때문에 더더욱 부도덕한 것으로 취급된다.

 

3.

도덕적인 행위는 본인에게 당장의, 직접적인 이익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사회적 신뢰는 거대하게 형성되는 것이고, 조직적/집단적 불문율 역시 그 구성원들의 암묵적 합의에 의해 만들어지는 규칙이고 질서이다.

 

그 집단의 규모가 크면 클수록 개인의 일탈은 사소한 문제로 보인다. 한두 명이 일탈을 저지르고 불문율을 따르지 않고 부덕한 행위를 한다고 해서 집단의 사회적 신뢰가 하루아침에 파괴되지는 않는다. 그들 몇명의 행동이 훼손하는 범위는 극히 협소할 것이다.

 

그러한 불문율은 모두가 일정 정도를 벗어나지 않고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때문에 내가 같은 피해를 보지 않을 수 있다는 신뢰하에 형성되는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 그 불문율을 어기고 사회적 신뢰를 훼손하면 이익을 얻을 수 있다. 자리를 맡아놓았다는 증표로 놓아둔 스마트폰을 누군가 가져간다면 그 사람은 스마트폰 하나만큼의 이익을 본 것이다.

 

그리고 어떤 이유로든, 그러한 생각을 더 많은 사람이 가지고 실천하게 되거나, 단순히 보복성으로 자신 역시 불문율을 지키지 않겠다는 의도로 자신이 당한 피해와 똑같은 가해를 저지를 경우 사회적 신뢰는 빠르게 붕괴한다.

 

더 이상 모두가 신뢰하던 질서-불문율은 신뢰할 수 없게 되고, 사회적 규칙으로 작동하던 양식은 누군가의 먹잇감이 될 뿐이다. 물론 법은 기능할 것이다. 물건을 훔쳐가면 신고하고, 접수받고 수사하며, 범인을 잡으면 처벌한다. 그러나 이는 사회적 신뢰를 깨뜨리는 비도덕적 행위가 법과 얽혀 있기 때문에 법적 제재가 가해지는 것이다.

 

4.

그렇다면 법과 무관한 비도덕적 행위는 어떠한가? 본래 비도덕적 행위자에겐 비난이 있었다. 단순히 말 뿐인 경우도 있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평판이 깎여 기본적인 인식 자체가 나빠져 사회생활과 인간관계에 지장이 생기는 경우도 있고, 소속된 집단(학교, 직장 등)에서 따돌려지거나 쫓겨나는 경우도 발생할 수 있다.

 

비도덕적 행위가 법을 어긴 것은 아니기에 법적 처벌을 받을 수 없지만 비도덕적이라 비난 받는 것 역시 온당한 평가에 따른 것일테다. 물론 언제나 선을 넘고 과하게 비난하고 공격하는 경우 역시 있을 수 있기에 반드시 비도덕적 행위자에 비난하는 것이 정당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비도덕적 행위가 만연하게 된다면 비도덕적 행위자에 대한 비난 역시 힘을 잃게 된다. 너무 흔하기 때문에 욕할 기력을 잃는 것을 떠나, 도덕의 영역이 협소해지고 도덕과 비도덕의 지위가 역전되는 것이다.

 

가령, 공개된 장소에서 적나라하게 욕설을 하는 것이 눈쌀을 찌푸리게 하여 지적을 받았다면, 지금은 그러한 성격의 캐릭터들이 범람하여 지적이 의미가 없어지고, 되려 지적하는 사람을 선비라거나 위선자 따위로 역공을 당하는 것이다. 그것이 불법은 아니지만, 상식의 영역에서 무엇이 도덕적인지는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만의 가치판단에 따라 그것에 의문을 제기하고 거부하는 것이다.

 

문제는 그러한 자들이 늘어나는 것이다. 그들이 협소하나마 일말의 보편성을 획득할 정도로 늘어나게 된다면 기존 도덕의 영역은 다양한 지점에서 도전 받고 반박되고, 무시되고, 훼손되고 파괴될 것이다.

 

5.

도덕적 행위를 하면 모두가 이익을 보고, 비도덕적 행위를 하면 누군가는 손해를 보고 자신은 이익을 본다. 이기적일수록 직접적인 이익을 얻게 된다. 모두가 이익을 얻기 위해선 비도덕적인 행위를 하는 것이 좋다. 누군가 전혀 모르는 남의 호의나 신뢰, 도덕적 행위를 기대하고 심리적 방화벽을 내렸을 때 비도덕적 행위자는 그 틈에 이익을 보게 된다.

 

피해자는 당한 이후 심리적 방화벽을 다시 세우게 된다. 대체로 타인에 대한 신뢰가 낮아지고 사회적 신뢰에 대한 믿음이 낮아지겠지만 그렇다고 가해자가 되지는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비도덕적 행위가 이익이 되고, 하지 않는 쪽이 손해를 보는 구조에서는 마냥 고집부릴 수만은 없다. 구체적 피해와 실질적 이득의 관계는 도덕-비도덕의 문제를 손해-이득의 문제, 혹은 생존-도태의 관계로 도치될 수 있다.

 

6.

그렇다면 그런 식으로 비도덕적 행위자가 늘어날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되는 것일까? 반드시 모든 도덕적 행위 선택자들은 비도덕적 행위자가 될 수밖에 없을까?

 

역사에서 우리는 특별히 더 도덕적이고 부덕한 시절을 고를 수 있다. 매우 정확하고 계량적으로 구분지을 수 있는 것은 아니기에 우리는 그것을 개괄적이고 극단적으로 고르는 것이 용이할 것이다.

 

가령, 전쟁이나 재난 상황이 오래 지속되어 도덕의 문제가 생존의 문제와 충돌할 때가 그러하다. 경신대기근은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게 만들었고, 자식을 바꾸어 잡아먹었으며, 전쟁이 길어질 때면 시민들은 범죄에 더 쉽게 매혹되었다.

 

태평성대라고 하는 세상일수록 여유가 넘치고 범죄가 적거나 공정하게 처리된다. 경쟁과 도태보다는 협력과 신뢰가 사회를 대표하는 정서가 된다.

 

곳간에서 인심난다는 말은 여유와 도덕에 대한 통찰이 담긴 말일 것이다. 우리는 더 여유로울 때 더 쉽게 도덕적인 선택을 한다. 단순히 베푸는 것을 떠나 타인을 배려하고 확실하게 이익으로 돌아올 자신의 비도덕적 선택을 포기하고 사회적 신뢰를 택한다. 그래도 무방하기 때문이다.

 

7.

도덕은 자기검열이다. 우리는 살아오면서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 배우고, 이것을 통칭하여 사회화라고 한다. 이것은 개개인에게 가치관에 뿌리내려 누군가 자신을 규제하고 제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자연스럽게 습관화된 관성에 따라 도덕적 반응을 한다.

 

주변에 차, 또는 보행자가 없기에 그냥 지나가도 상관 없는 도로/횡단보도를 지나치지 않고 신호를 기다리는 것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것은 학습에 의해 얻어진 지식이고, 실천을 통해 습관화한 것이다. 거꾸로 말하자면 학습받지 않았다면 사회 일반 도덕률에서 이격되어 있을 것이고,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것 또한 도덕적이진 않다. 또한 학습된 것은 언제든지 뒤집히거나 덧씌워질 수 있다.

 

도덕적 행위를 선호하는 사람이라도 환경 조건에 따라 언제든 비도덕적인 선택을 할 수 있다.

 

개인의 성향과 개성이라는 것은 개인 단위의 조건일 뿐 거대한 집단적 경향성을 계측하는 근거로 작동하기는 어렵다. 어떤 사회나 집단의 도덕적 성향이 개인의 성향과 개성에 의존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도덕적 선택을 하는 것은 환경 조건이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다.

 

8.

이러한 조건은 다양하다. 경제적 상황, 노동시간, 정치적 혼란, 군사안보적 위험, 지배적 이념.

 

단순화시키면 이렇게 양분된 것이다. 경제적 여유와 사회적 갈등 수준.

 

경제적인 여유가 있을 수록 사는 것 자체에 대한 부담은 줄어든다. 필요한 것에 쓸 돈이 많을 수록 기본적인 생활 수준은 더 높아질 것이고 경제적 부담에서 멀어질 것이다. 이는 심리적 여유가 되고 인지적 여유가 된다. 도덕적 선택은 그러한 여유에서 출발한다. 심리적 여유는 물질적 여유에서 찾아오는 법이다.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지만 그것은 그 사람의 개성이지 일반적으로 기대할 수준이 되지 않는다.

 

사회적 갈등 상황이 길어지고 다각화되어 다양한 분야에서 갈등이 발생하면서 그러한 이슈 인식에 있어 인지적 포화가 이루어질수록 도덕적인 선택에서 멀어질 것이다. 본인이 생각하고 지지하는 입장이 있을 것이고 이슈마다 자신만의 포지션이 있을 것이다.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여러 갈등들을 접할 수록 스트레스를 받게 될 것이다.

 

다양한 갈등에서 다양한 적, 혹은 바보들을 상대로 싸우거나 최소한 비판적인 생각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러한 부정적 정서들은 스트레스를 늘리고 심리적으로 공격적이게끔 한다. 어느 정도까진 상관 없겠으나, 지속되고 점점 많은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불만은 축적된다. 단순히 속으로 타인을 욕하는 것조차도 그 빈도가 늘어나고 후엔 말로만 하지 않을 뿐 습관적이게 될 수 있을 것이다.

 

핵심 자체는 스트레스가 될 것이지만 이러한 스트레스는 사회적 이슈에 따른 갈등 수준이 아닌 직장 생활이 될 수도 있고 인간관계나 게임의 결과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역시 이는 개인 단위의 경험에 한정되기 때문에 사회적인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선 그만큼 사회적 단위가 될 수 있는 현상을 지적해야 하기에 스트레스가 아닌 사회적 갈등 수준으로 짚은 것이다.

 

9.

사회가 각박해지고 삶에서 여유를 잃을 수록, 그리고 비도덕적 선택을 통해 이득을 얻고 제재가 적을 수록 비도덕적 선택의 폭과 그 영역은 넓어질 것이다. 만연한 비도덕은 도덕의 영역을 밀어내다못해 역전시킬 것이고 도덕적 행위나 사고를 위선과 선비질이라 폄하할 것이다.

 

도덕적인 선택이 손해로 이어지고 비도덕적 선택이 이익과 선망으로 이어진다면 더 이상 사람들은 도덕적일 필요가 없어질 것이다. 경쟁과 각자도생, 황금만능주의과 과정을 따지지 않는 출세지향으로 대표되는 사상들이 사회에서 도덕이 설 자리를 대체할 것이다.

 

사회적 신뢰가 작동하는 영역은 그런 성향의 이들에게 자신이 이익을 얻어낼 수 있는 기회의 장으로 비춰질 것이고 몇번의 피해로 인해 해당 영역은 훼손되어 파괴될 것이다.

 

그런 식으로 사람들은 도덕적으로 사회화된 습관을 버리고 비도덕적 습관을 받아들일 것이고, 더 어린 세대는 그들에게서 도덕이 역전된 가치체계를 받아들일 것이다. 도덕과 비도덕이 역전된 가치관으로 사회화되는 것이다. 내가 이익을 얻고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면 남들이 피해를 보더라도 그것이 법을 어긴 것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그것이 정당화되는 세계관이 형성되는 것이다.

 

이것은 한두 사람에게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기에 어느새 사회의 주류 정체성으로 받아들여지고 보편화될 것이다. 

 

10.

도덕은 자기검열이고 그것이 지키고자 하는 것은 사회적 신뢰이다. 내가 쓰레기를 버리지 않고 길에서 함부로 담배를 피지 않고 그러한 생각들이 많은 이들에게서 공유된다면 사회적 비용이 적어진다. 이는 소모되어야할 비용이 다른 곳에서 더 유용한 자원으로 활용될 것이다.

 

사회적 진보를 촉진시키거나 윤택하게 할 것이다. 그러나 비도덕적 선택들은 그러지 못하게 만들고 비용을 늘린다.

 

잘못을 했으면 욕을 먹는 것이 당연하다. 남들이 욕할 것이 뻔한 말을 했다면 당연히 욕을 먹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나 비도덕적 행위자들은 그러한 도덕 기준과 가치판단에 의문을 제기하고 공격한다. 알량한 논리와 주장이지만 지나치게 관용적이거나 지나치게 나이브한 바보들은 그들의 주장을 일부 수용하기도 한다. 가령, 패륜적 비난을 표현의 자유라고 주장하는 바보들에게 표현의 자유이니 제재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이 그러하다.

 

틀렸다. 자유에는 책임이 있고 그것이 법적 제재를 의미하지 않더라도 사회적 제재는 당연하고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개소리를 했으면 욕을 먹는 게 당연하다. 개소리를 크게 내거나 반복하는 사람은 쫓겨나는 것 역시 자연스럽다. 이는 수천년 동안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집단의 질서 유지를 위한 규칙이었다.

 

그러한 사회적 린치, 혹은 집단재판이 도덕적인 것만은 아닐 것이다. 때로는 쫓겨나는 쪽이 도덕적 정당성을 가지고 우위에 서 있을 수도 있고 정의로울 수도 있다. 그러나 쫓겨나는 소수자가 반드시 그런 선각자이거나 정의로운 의사일 거라는 것 역시 당연한 게 아니다.

 

자기검열이 부정적으로 사용되지만 도덕은 그것으로 작동한다. 남이 뭐라고 하지 않더라도, 누가 보는 게 아니라도 자기 스스로의 양심이라는 시스템이 스스로를 검열하게 만들어 규정된 도덕적 규칙 하에 자신의 행동을 제한하게 만든다.

 

지나친 자기검열이 표현의 자유와 사상적 자유를 억압하거나 제한한다고 할 수 있지만, 비슷한 강도로 제한이 풀려버린 것보다는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검열의 제한을 푸는 것은 쉽지만 한번 풀린 제한을 다시 묶는 것은 지나치게 어렵다. 

 

자기검열이라는 표현이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진다면 다른 용어로 바꿀 수도 있을 것이다. 자기통제라는 용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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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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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사람은 자신이 소속된 공동체와 영향을 주고 받습니다. 그리고 그 공동체에 형성된 가치관, 혹은 사상은 새로 유입되는 이들에게도 영향을 주기 마련이며, 이것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알아서 나가거나 쫓겨나기 마련입니다.

 

1.

대부분 인터넷 커뮤니티를 시작하는 시기는 대체로 10대 초반입니다. 늦어도 10대 중반 정도인 경우가 많고, 그 목적은 어떠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거나 어떠한 자료를 찾기 위해서, 혹은 단지 유머 자료를 찾아보며 즐기기 위한 경우도 있습니다. 목적이 어떠하든 소통이 가능한 공간에서는 다양한 의견들이 모이고, 그 커뮤니티의 구성원들의 입맛에 맞거나, 옳다고 여겨지는 것들이 그 커뮤니티의 성격이 되곤 하죠.

 

이러한 커뮤니티 구성원들에 의해 형성되는 보편적인 정서 내지는 감성은 그 커뮤니티의 정체성이 되고 좀 더 일반적인 표현으로는 성향, 혹은 사상이라고도 합니다.

 

이러한 성향은 단순히 어떠한 주제(ex.게임, 콘솔, 연예 등)에 대한 성향으로 어떤 것이 더 우월하거나 더 나쁘거나 하는 판단의 방향이 다른 커뮤니티와 다를 수도 있고 아예 정치나 사회적 이슈에 관련된 내용에 있어서는 더더욱 첨예하기 갈리기도 합니다.

 

대표적으로 일베와 오유는 상반된 정치성향을 가지고 있고, 지금에 와서는 루리웹과 디씨/일베의 구도가 되었습니다.

 

2.

대부분의 청소년들은 가진 바 지식과 정보가 연장자들보다 더 적은 경우가 많고, 이는 경험이라는 틀 안에서 자신이 보는 것만으로 판단을 해야하는 경우가 많기에, 정치나 사회에 대한 인식 역시도 비슷하게 형성됩니다. 가령, 이명박 정부 시절 10대였던 사람이 정치, 사회적 이슈에 관심을 가질 경우 그 당시 사회 분위기와 정치인, 정권에 대한 평가를 직간접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되겠죠.

 

그리고 그 당시의 뉴스에 대해서는 피상적이나마 어느 정도 알겠지만, 90년대에 10대 였던 이들은 그보다 더 많은 정치, 사회적 현상을 보고 겪었을 것이며, 판단의 재료와 근거들 역시 이후의 세대에 비해 더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마찬가지로 이명박 정부 당시 10대 였던 이들과, 문재인 정부 당시 10대 였던 이들의 판단 근거와 관점 역시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 나이 때 접한 뉴스와 정보들, 쌓기 시작하던 정치사회적 정보들이 각 정권의 시간만큼이나 차이가 나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 정보의 차이이자 경험의 차이로 정리됩니다.

 

3.

그런 이유로 10대에 어떤 커뮤니티를 하느냐, 그 사회의 지배적인 분위기가 어떠한가에 따라 10대 청소년에게 형성되는 가치관은 달라집니다. 이는 특정 가치관이나 사상이 이제 막 가치관이 형성되는 이들을 선점하는 것이 되는데, 문재인 정부 당시 문재인 정부와 진보좌파에 매우 비판적인 커뮤니티에 속하게 되면 그들의 가치관을 받아들이고 동질화 됩니다.

 

반대로 이명박 정부 당시 이명박 정부와 여당에 비판적인 커뮤니티를 했다면 여전히 극우보수에 비판적일 가능성이 높고요.

 

이는 그 정보나 지식이 얼마나 합리적이고 사실에 가까운가와 무관하게 형성되는 것이며 한번 형성이 되면 이것이 바뀌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왔고 생각해왔던 모든 것을 거꾸로 뒤집어야 하는 수준이기 때문에 매우 공격적으로 반응하거나 설령 논파되어도 그 주제에 대해서만 말을 아낄 뿐 정체성이나 가치관의 차원에서 바뀌는 일은 극히 드뭅니다.

 

4.

그런 의미에서 일베 전략은 매우 탁월했고, 적지 않은 10대 청소년, 20대 청년들이 일베의 사상과 가치관에 동질화되었으며, 인터넷 환경 내에서 디씨/일베 문화를 받아들이거나 물든 커뮤니티/이용자들이 적지 않은 관계로 일베나 디씨를 하지 않는다고 그들의 가치관과 사상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만은 할 수 없습니다.

 

물론 그런 이들이야 많겠지만, 알게 모르게 여기저기서 디씨/일베 문화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많고 이런저런 이유로 그러한 이들이 많아진 커뮤니티들은 흔히 일베포밍이 되었다고 표현을 합니다.

 

인터넷 환경이 실제 현실사회에 비하면 찻잔이라고 하지만 1020은 물론 이제는 거의 전 세대가 인터넷-유튜브-SNS를 하는 시대이니만큼 일베적 가치관과 디씨 문화에 영향을 받지 않거나, 접하지 않은 이들은 생각보다 적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곧 접한 사람 모두가 동질화되거나 일베화가 됐다는 것은 아닙니다.

 

5.

이러한 가치관 선점 효과는 제가 실제로 해본 적이 있는 사례이기도 합니다. 한때 게임, 게임 정보 관련 카페에서 네임드로 활동하던 시절 역사와 관련된 글을 쓰면서 카페 내에 존재하지 않던 환빠를 조롱하고 공격하는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환빠에 대한 허수아비 공격을 하자(물론 실제 제가 보거나 겪은 사례들이긴 했습니다만.) 얼마 뒤 역사에 대한 지식이나 경험이 공교육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제가 언급하기 전까진 환빠의 존재 자체에 대해 모르던 사람들이 겪어본 적도 없고 본 적도 없는 환빠에 대한 조롱에 동조하기 시작했습니다.

 

역사 관련 지식도, 경험도 없는 사람들이 그들에겐 존재하지 않는 환빠에 대한 조롱과 멸시를 심어주자 빠르게 동질화 되었죠.

 

이는 제가 그 커뮤니티의 네임드였기 때문도 있겠지만 조롱과 멸시, 공격은 지적 우월감과 쾌감을 만들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6.

문재인 정부 당시 많은 커뮤니티들이 기존의 진보좌파적 성향에서 벗어나 심하면 일베포밍 되는 경우들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그 커뮤니티는 한두 곳이 아니었고, 작은 커뮤니티들도 아니었습니다. 사용자가 많은 거대 커뮤니티이자 그러한 커뮤니티 여럿이 극우적 성향으로 돌아선 것은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것이 발생시키는 가치관 선점 효과는 당장은 아니더라도 거대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미 일베의 존재만으로도 인터넷 사회에서 디씨/일베 문화는 거대한 영향을 미쳤고, 이는 실제 현실과 정치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제 와서 일베는 그 영향력을 잃고 줄어들었다고 하지만 대신 다른 커뮤니티들이 일베의 역할을, 그것도 조금 더 온건한 수위로 대신할 가능성이 생겼습니다.

 

이는 일베라는 초거대 커뮤니티 하나보다 거대 커뮤니티 여럿이기 때문에 더 치명적일 수 있는 상황이죠. 이들의 가치관이 민주적이지도 않고 공정하지도 않고 윤리적이거나 도덕적이지도 않다는 점에서 치명적이고 위험하다는 것이며 문제라는 겁니다.

 

7.

본래 가치관이나 정체성의 형성이라는 게 아무 것도 없이 혼자서 만들어지는 경우는 없고, 다른 여러 정보와 관점, 지식을 접하며 형성되고 발전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커뮤니티나 타인에 의해 가치관이 형성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1020 세대 중 특정한 성향이 이미 형성된 커뮤니티에 속하게 된 이들은 특정 진영과 집단, 정부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기 쉽습니다. 이는 그들의 정치사회적 인식과 정보가 부족하기 때문에 아직 형성되지 못한 것을 이들 커뮤니티에 의해 형성되기 때문이고 그렇게 동질화되기 마련입니다.

 

제가 환빠에 대해 그들이 겪지 못하고 접하지 못한 모습을 비판하고 조롱하면서 그들에게 환빠에 대해 실체 없는 공격성과 적대감을 심어준 것처럼 어떠한 커뮤니티에 속한 이들은 그 커뮤니티에 영향을 받아 실체 없는 특정 진영에 공격적이고 적대적이며 조롱과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게 됩니다.

 

그리고 대체로 그 근거는 편향적이거나, 심지어 왜곡된 것도 있으며, 아예 논리 자체가 잘못된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체로 적지 않은 경우 실제 잘못이거나 비판받을만한 사례를 가지고 비판, 조롱하면서 보는 이로 하여금 동조하게 만드는 것이 가장 쉽고 잘 먹힙니다.

 

단지 특정 집단의 실책만 가져오거나 각 집단의 같거나 유사한 행동에 다른 논리와 다른 잣대를 제시하는 것만으로도 가능합니다. 그저 그러한 기사에 몇 줄 정도의 조롱과 비판이면 충분하죠. 아니, 기사일 필요도 없고 그 기사나 몇가지 정보를 짜깁기하여 정치유머 자료를 만드는 것이 가장 훌륭하고 잘 먹히는 방식입니다. XX왕 이명박 같은 방식은 정말 잘 만들어진 사례이기도 하죠.

 

8.

그렇다고 이미 선점된 가치관이 변화하지 않느냐 하면 그건 아닙니다. 급격하게 달라지는 극단적 사례들은 적지만 실제로 발생하는 일이기도 하고 조금씩이나마 커뮤니티의 성향 변화에 따라 자신의 성향 역시도 변화해가기도 합니다. 이런 경우 양방향성이기 때문에 커뮤가 먼저냐 개인이 먼저냐를 따지는 건 쉽지 않습니다.

 

예전 제가 들었던 썰 중 진보좌파, 운동권에 가까운 성향을 가진 사람이 조선일보에 들어가자 몇달만에 조선일보의 논조를 그대로 따라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 있습니다. 아마 이런 경우 어떤 방향성을 제시하고 그 방향성에 맞는 논리와 근거를 스스로 찾게 만들었기 때문에 극단적인 변화가 발생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만, 이런 사례를 제외하고도 대부분의 경우 어떠한 가치관이 완전히 변하지 않는 것은 아니며, 단지 서서히 변화해갈 수는 있습니다.

 

심지어 개인의 도덕관념이나 소통 스타일 역시 마찬가지죠. 좀 더 냉소적이게 되거나, 일반화의 거부감이 줄어든다거나, 특정 정보만 보고 성급하게 판단을 내리는 등.

 

9.

물론 특정 가치관이나 사상, 성향을 10대 인터넷 이용자에게서 분리시키거나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럴 방법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됩니다.

 

그러나 커뮤니티에 의해 가치관이 선점되고, 이미 형성된 가치관이 점점 변화하게 되는 것도 사실이기에 디씨, 일베적 가치관과 디씨/일베 문화가 확산되고 거대 커뮤니티에 크고 작은 영향력이 뿌리내리는 것은 매우 우려할만한 현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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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이 글은 작품의 내용과 결말을 품고 있습니다. 스포일러를 원치 않으신다면 작품를 본 뒤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If technology is a drug – and it does feel like a drug – then what, precisely, are the side-effects? This area – between delight and discomfort – is where Black Mirror, my new drama series, is set. The "black mirror" of the title is the one you'll find on every wall, on every desk, in the palm of every hand: the cold, shiny screen of a TV, a monitor, a smartphone."


"만약 기술이 마약이나 마찬가지고, 사용되기도 마약같이 사용되고 있다면, 그에 따른 부작용은 무엇인가? 불안함과 즐거움 사이의 모호한 존재가 바로 블랙 미러다. 타이틀에 나오는 '검은 거울'은 모든 벽과 책상에 있고, 모든 사람의 손바닥에 있다: 차갑고 번쩍거리는 텔레비전 화면, 모니터, 스마트폰이 바로 '검은 거울'이다."


-가디언지에 실린 찰리 브루커의 인터뷰.-


블랙 미러라는 영국 드라마는 기술의 부작용에 대해 풍자하는 드라마입니다. 처음 볼만한 것들을 찾아가 발견하게 된 작품인데, 주제가 주제인만큼 저에게 큰 관심을 끌게 만들었죠. 아직은 시즌1만 봤지만, 3개 모두 충격적인 내용이었습니다. 사실, 1화가 상당히 충격적이었죠..



기술이라는 것은 나날히 발전하지만, 인간은 수천년전과 크게 다를 바 없는 본능과 사고방식을 가진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에 불과한지라, 발전된 기술을 오남용하는 것이 불러올 파장을 생각하면, 우리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하지 않나 싶었습니다, 2, 3화는 미래의 기술이지만, 1화는 시기적으로 현재이고 현재 있는 기술, 매체를 악용한 것을 다루고 있죠.


지금은 단지 드라마속 이야기일 뿐이지만, 이러한 발전된 기술의 부작용, 오남용은 충분히 있을 수 있고, 여전히 경계해야 하는, 아니.. 오히려 지금도, 앞으로도 더욱 경계해야함을 시사한다고 봅니다. 1화의 일은 너무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동시에 매우 현실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니까요.




저에게 충격을 줬던 1화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어느 미친놈이, 영국 공주를 납치한 것을 트위터와 유튜브를 통해 중계, 공개합니다. 그리고 납치범은 영국 수상에게 돼지와 수간하는 것을 생중계로 보도하라는 요구를 하게 되죠. 당연히 정부에서는 보도를 통제하려고 하지만 이미 삽시간에 인터넷에 퍼지게 되었고, 몇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전세계인에게 이 정보가 공유됩니다. 납치범을 추적, 검거하려는 시도는 물거품으로 돌아가고, 결국 별 수 없게 되자 수상은 어쩔 수 없이.. 납치범의 요구대로 생중계로 돼지와 섹스를 하게 되죠.


그 장면을 지켜보던 시청자들은 처음엔 정말 방송한다고 하니 TV앞에 모여 좋아하며 수상을 비웃고 낄낄대지만, 이내 행위가 절정으로 향함에 따라 모두 충격을 받고 얼어붙지요. 이 방송은 전세계 13억명이 보게 됩니다.


그러나 공주는 예정된 시간이 되기 전에 풀려나고, 범인은 방송을 보고는 자살해버리게 됩니다.


수상은 돼지와의 섹스 후 구토를 하게 되고, 얼마 뒤 지지율이 상승하지만, 아내와의 관계를 파탄에 이르게 됩니다.



시작은 미친놈의 범죄로서 시작되었지만, 그 쇼의 판이 커지고 걷잡을 수 없게 된 것은 기실 대중과 그 대중의 눈과 귀가 되어준 트위터, 유튜브 같은 매체들 덕분이지요. 물론 트위터와 유튜브가 나쁘다거나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 전파과정은 당연 재미, 흥미 따위 때문이라고 봐도 무방하지요. 마치 마약같이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브루커의 말과 같이요.


물론 공주 납치, 수상의 돼지와의 수간이라는 주제는 모두의 흥미와 관심을 끌 수 있는 주제이긴 합니다만.. 



역시 기술에는 항상 윤리가 따라야하고, 오남용에 대한 경계와 어느정도의 대비책, 기술을 악용하지 못하게끔 억제할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사실, 2화는 그렇다치고 1화와 3화는 일상과 사람들에게 있어서 매우 도움이 되고, 필요하며 큰 가치를 지니지만 그것이 악용되었을 때 나타난 결말은 매우 비참하고 잔인하지요.


굳이 기술이 아니더라고 윤리나 도덕, 무언가를 오남용하거나 악용하는 경우가 많고 그에 대한 성찰이나 반성이 부족한 한국에 있어서 더욱 어울리지 않을까 싶은 드라마이기도 합니다. 물론 기술이라는 분야에 대해서도 적절히 들어맞고 말이죠.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찰리 브루커의 작품이었습니다.


혹시 같은 주제에 대한 관심, 혹은 이러한 구성의 드라마를 찾는 분이라면 주저없이 추천하고 싶군요. 굳이 저와 같은 흥미거리를 공유하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드라마로서 매우 훌륭하고 재밌는 작품이기에 역시 추천합니다.


개인적으로 2화와 3화 또한 매우 재밌었기 때문에 개별적으로 리뷰를 올리고 싶지만, 특별히 쓸 말이 떠오르지 않고 줄거리만 쌈박하게 요약할 것만 같아서 이렇게 리뷰해야겠습니다.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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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이 글은 작품의 내용과 결말을 품고 있습니다. 스포일러를 원치 않으신다면 영화를 본 뒤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보통 상상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번 쯤 해보았을 상상, 자신의 정신을 기계로 이식하는 것을 작품의 주요 요소로 한 작품입니다. 개인적으로 이러한 재미있는 상상을 주제로 한 작품을 좋아하는데, 이 작품도 나름 그런 흥미로움을 긁었다고 할 수 있죠.



자아를 가진 인공지능을 만들 수 있을까.


작품내에서도 나왔듯이, 인간의 의식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모르고서는 만들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미 있는 시스템, 인간(혹은 원숭이)의 의식을 컴퓨터로 이식하는 방법을 이용합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것은 성공하지요. 주인공의 친구인 맥스는 그것에 대해 의심합니다. 정말로 내 친구인 윌인가, 아니면 윌과 비슷한 다른 존재인가. 


사실 이것은 매우 당연히 나올 수 있는 의심입니다. 만약 업로드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윌의 근사치를 가진 다른 존재라고 볼 수 있는 것이지요. 어떠한 이유로 윌의 기억과 경험의 대부분을 알고 있지만, 몇가지가 부족하여 전혀 다른 존재일 수 있다는 겁니다. 예컨데 히틀러와 매우 비슷한 경험과 기억을 가지고 있지만, 그저 동물애호가가 될 수 있고 배트맨의 경험과 기억을 가지고 있지만 악당일 수 있지요.



인간을 초월한 지성.


윌이 수퍼 컴퓨터로 업로드 된 이후 그가 만들 것들을 생각해봅시다. 아주 대단한 것들이죠. 식물은 다시 살아나고 부서진 물건이 다시 원형으로 복구된다던가, 더러운 물이 아주 깨끗하게 정화됩니다. 그리고 말하지요, 의학적 응용의 한계는 사라졌다고. 이건 정말 대단한 겁니다. 더 이상 인간에게 육체적 장애는 사라진 것이 되니까요.


실제로 강도에 당해 죽을 뻔 한 사람을 거의 부활시키고 그 육체적 능력을 인간 이상으로 만들어줬죠. 그리고 많은 장애인들을 치유해주기도 했습니다.


위에서 나온 것들이 현실에 적용 된다면, 그야말로 인류학적으로 혁명과 같을 것입니다.



PINN은 선악을 구분하지 못했다.


주인공이 업로드 되는 수퍼컴퓨터의 인공지능인 PINN은 선악을 구분하지 못했다는 말이 나옵니다. 그저 충성했다고 하죠. 만약 윌이 정말 인간성을 가진, 정신을 가진 인간이라면 문제가 없겠지만, 윌과 비슷한, 그저 인간과 비슷할 뿐인 인공지능의 프로그램일 뿐이라면 인간은 인공지능의 판단을 예상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이로봇에서처럼, 인간을 보호해야 한다는 원칙을 확대해석하여 인간을 강력한 통제하에 두려는 시도와 같은 '인간이라면 하지 않을' 행위를 저지를 수 있겠죠.


그리고 윌은 자신의 인부들의 신체능력을 향상시켜주되, 그들에게 접속하여 그들의 육체를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됩니다. 다른 이의 몸으로 에블린과 대화, 신체접촉을 시도하는 윌의 의지는 언듯 매우 위험해보이기도 하죠. 게다가 그에게 치료 받는 사람들과, 나중에 나올 육체까지 만들어내는 것을 보면, 그를 경계하는 이들이 말하듯이 초인 군대를 만들 수도 있을 것이라는 예상 또한 못할 것도 아닙니다.



윌은 인간인가.


작품이 중반을 넘어가며 윌이 인간성을 가진 존재인지, 혹은 비슷한 근사치를 지닌 프로그램일 뿐인지 우리 스스로 의심하게 됩니다. 초인적인 육체능력을 지닌, 그리고 네트워크화 되어 윌의 의지에 따라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인부들, 에블린의 몸에서 일어나는 화학작용을 스캔하여 감정을 읽어내는 비인간적으로 보이는 행동. 그는 과연 인간일까요?


정답은.. 인간이었습니다. 업로드된 윌을 윌이 아닌 윌과 비슷한 인공지능이라고 판단한 '육체를 지닌' 인간들은 그를 위협요소라 여기며 공격을 시도했습니다. 에블린은 몸 속에 바이러스를 품고 윌과 접촉하죠. 윌은 그런 에블린을 의심을 하죠. 왜 다시 돌아왔을까, 왜 땀을 흘리고 심장이 고동칠까, 날 두려워하고 있지 않은가. 공격이 시작된 순간까지 질문을 하는 윌의 모습은 끝까지 관객으로 하여금 윌이 인간인가를 의심하게 하지만, 이내 공격에 상처를 입은 에블린을 안으로 대려간 윌은 그녀를 업로드시키며 동시에 바이러스를 받아들입니다.


그녀와 함께 죽으며 그녀에게 자신이 하고 있던 것들, 그리고 하려던 것을 보여주죠. 나노 입자들이 대기중에 퍼져 오염힘자를 제거하고, 숲은 다시 자라나며, 물은 너무 맑고 깨끗하여 아무 강에서나 마실 수 있는 세상. 그녀가 원했던,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단지 질병의 치료할 뿐 아니라 지구를 치유하는 것. 그것은 윌이 사랑한 그녀, 에블린이 원했던 세상입니다. 사람들은 윌이 자신의 기술력을 이용해 세상을 지배하려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오판이었죠. 윌은 인간처럼 보이는 인공지능이 아닌 인간적 판단을 할 줄 알았던, 뛰어난 지성을 가졌을 뿐인 인간이었고, 그렇게 자신이 사랑한 여자와 함께 죽음을 맞이 합니다.


윌은 네트워크화 시킨 마을 사람들과 자신의 기술을 이용해 군인들을 무력화 시켰지만, 아무도 죽은 사람은 없습니다. 에블린의 몸 속에 넣은 바이러스에 의해 윌은 죽게 되고, 그의 복제를 심어뒀던 모든 인터넷은 오류를 일으키며 세상은 어두워집니다.


그러나 죽은 해바라기는 다시 싱그럽게 피어나고, 공기는 맑아졌으며, 물은 정화되었죠.


사실 이러한 오해는, 윌의 모습에 의해 더 촉발된 감이 있다고 봅니다. '육체를 가지지 않은, 네트워크에 살고 있는 정신'. 육체가 없고, 단지 정신이 컴퓨터에 업로드 되어있다는 이유만으로 그는 인간임을 의심받았던 것이죠. 처음 PINN에게 했던 질문, 너에게 자각능력을 증명할 수 있는가? 에 대해, 윌은 PINN과 같은 대답을 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그 질문에 대답은 윌이 그것을 증명할 수 없음이라 판단했지만, 사실은 에블린의 말처럼 그것은 정말로 유머였을 뿐이었던거죠.



훗날 인간이 정말로 의식을 업로드할 수 있게 되는 날이 온다면, 우리는 똑같은 고민과 의심을 하게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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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한국에서 진행되는 아청법과 게임중독법의 본질을 들여다보면 60~80년대 한국의 국가통제적 멘탈리티가 보입니다. 과거, 그리고 현재의 정통적 보수주의자, 극우주의자라는 사람들의 국가, 사회에 대한 신념은 60년대 박정희라는 인물의 등장 이래 제시된 군사, 병영문화적 통제, 준파시스트적 사회통제, 격렬하고 폭력적인 반공주의, 노동에 대한 자본의 절대적 우의 등등의 것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했죠.


87년도 6월 항쟁을 통해 전두환 정권이 퇴진하고, 90년대를 거쳐 양김정권과 노무현 정권을 지나서 이명박 정권에 들어서야 다시 그동안 국가권력을 수십년간 독점해왔던 이들이 그들의 권력을 탈환하듯 되찾았고 90년대부터 2008년까지, 약 20년에 달하는 세월이 지나갔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바뀐 세상을 그들이 원하는 마인드의 것으로 만들려고 하고 있으며, 어쩌면 그들은 세상이 변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죠.


그들, 새누리당과 그들이 대표하는 한국 사회의 보수주의자들의 이상향은 여전히 60년대적 병영문화라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좋은 나라와 좋은 국민은, 결국 상명하복의 권위적 수직체계 아래 위에서 명령을 내리면 아래에선 불만없이, 일사분란하게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죠.


그들이 지향하는 가치관은 획일화이며 국가와 사회 모두 수월하게 통제되는 부하들이 위에서 내려온 명령에 따라 별다른 요구없이 착착 해나가면 그에 따라 국가가 강성대국으로 전진해나간다. 라고 믿고있는 것이죠. 모두가 일치단결하여, 국론통합을 이루고, 끊임없이 자유와 평화를 위협하는 북한과 그 북한과 한 패거리가 틀림 없는 사회의 모든 불순분자들에 대해 성전을 선포하여 일제히 배제하는 그런 것을 바라는 겁니다.



그들을 상징하는 법이 단 하나 있다면 그것은 바로 국가보안법일 것이고, 게임중독법과 아청법은 문화, 여가생활에 대한 국보법이라 부르기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정말로 게임의 중독성이 너무나 심각하고 위협적이라 그것을 막고 배제해야 하는지 따위나, 강제적 규제와 세금걷기(돈 뜯기)가 중독을 막을 수 있을지, 청소년들의 범죄 등 일탈문제가 정말 그런 게임이나 만화 따위 때문인지에 대해서는 사실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중요한건, 그 법안의 핵심이죠. 국보법과 마찬가지로.. 국가가 나서서, 이것은 옳고, 저것은 그르다. 라고 지정해주는 것입니다. 국민은 우매하고 스스로의 판단을 내버리게 두어 서로 다른 개성과 선택이 나와버리면 그들이 원하는, 그들이 지향하는 사회의 질서가 깨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나라에서 직접 우매한 국민을 위해 이렇게 시시비비를 가려주면, 국민은 당연 그것을 반발없이 수용해야하죠. 그에 대한 반항? 국가체제에 대한 도전이고 종북의 반항입니다.



게임중독법의 본질은 바로 이런 것이죠. 사회적 통제의 강화 및 청소년문제에 대한 희생양 만들기, 아청법도 마찬가지죠. 아동을 성적으로 이용하는 컨텐츠에 대한 규제가 아니라, 그 법의 모호한 기준관계를 통해 줄줄이 엮어 집어넣을 수 있는 만화 및 애니메이션 등 컨텐츠에 대한 억압이죠. 이미 여러 문제없을 작품들이 걸리는 것이 뉴스에 나온 적이 있었죠. 애매한 기준에 애매한 선별이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이러한 법률은, 국가가 국가의 권위를 통해 지정한 공공의 도덕률을 확립하고, 그것을 모든 국민.. 만민이 수용하여 일사분란한 가치판단기중을 마련하여 수월한 사회통제를 위해 만든 것들입니다. 혹은 그렇게 이용하겠죠.


아청법은 애니메이션과 만화 등에 대한 국보법이고, 게임중독법은 게임매체에 대한 국보법이에요. 벌써 문화와 여가생활에 대한 국보법이 두개나 만들어진 겁니다. 그리고 이 법안이 제대로 효과를 발휘하는 시점부터 대상이 되는 모든 매체 및 컨텐츠의 주요 수요를 구성하고 있는 청소년들에 대한 국가적 정신개조가 이루어지겠죠.



불만은 있지만 익숙해지면 벗어나지 못합니다. 가치관의 깊은 곳에서 뭔가 이질감 따위를 느끼고 자기 자신을 옥죄게 되죠. 그리고 가치판단과 정신적 성숙, 사회의 경험이 부족한 청소년들에게 이러한 정신개조는 뉴 에이지 지지자들을 양산하기 위함입니다. 적어도 자신들이 원하는 사회의 부품으로서 써먹을 수 있는 가치관을 지닌 이들이 되어 성장하겠죠.



이젠 정말로 한국 사회가 유신시절로 회귀하고 있는 겁니다. 예전엔 총칼이었다면 이번엔 법률을 통해 이루어내겠죠. 예전처럼 총칼을 사용할 수 없으니, 이전보단 느리지만 안전하고 확실한 법률로 말이죠.. 세련된 수법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지금은 게임과 아청법, 이번 신의진 의원은 성중독에서 볼 수 있듯이 섹스까지.. 그 다음은 뭘까요? 영화, 만화, 애니메이션 등등 하나하나 다른 분야에까지 통제과 규제의 손길이 퍼져나갈 껍니다. 80년대로 돌아가기 위해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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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 국가라는 단어에서 견지하는 강함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혹자는 군사력을 이야기할 수도, 혹자는 경제력을 이야기할 수도, 혹자는 문화의 발전 정도를 이야기할 수도 있습니다. 각각의 것들은 그 나름대로의 국가의 강함을 기준하지만 기실 강대국이라는 단어에는 어느 하나만의 강함만을 두고 사용하지는 않습니다. 단지 어떤 분야에서 강세를 보일 뿐이기에 문화 강대국, 군사 강대국 같은 한정적인 의미로 사용하지요.



미국은 강대국입니다. 일본도 강대국이죠. 이들이 강하다고 생각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일단은 경제력, 둘다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는 경제력을 가졌죠. 일본은 평화헌법에 의해 제한되고는 있지만 막강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그 한계 내에서 상당한 화력을 갖추고 있지요. 미국이야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고, 문화라는 관점에서 일본은 수십년, 아니 백년도 전에 서구에서 인기를 끌었으며 지금도 오타쿠 문화의 총본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국 또한 헐리우드를 필두로 한 문화라면 안 지는 문화강국이기도 하죠.


이렇듯 누구에게 물어봐도 강대국이라고 하는 국가는 어느 한 분야에서만 강세를 보이지만은 않습니다. 경제라면 경제, 군사라면 군사, 문화라면 문화, 학문이라면 학문 등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타국에 비해 밀리지 않고 높은 수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약 누군가 저에게 한국은 강대국이냐 말한다면, 저는 그렇다고 말하면서도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한국은 분명 경제와 군사적으로 강한 편이 맞습니다. 전세계에서 한국 정도의 경제력과 군사력을 지는 국가는 많지 않고, 비슷한 수준을 찾자면 분명 유럽 등지의 국가가 으레 비교대상이 되기 쉽지요. 문화라는 부분에선 K-POP과 드라마, 게임 등이 동남아 등 아시아에서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강대국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어째서 아니다라고 하느냐라고 묻노라면 게임은 해외에서 얻어들이는 수익과 프로게이머들의 명성이 있으나 그것을 마약과 동급으로 취급하며 법적으로, 사회적으로 탄압하고 짖밟기 마련이고 국내 만화, 애니메이션 산업은 거의 죽었다고 봐야하며 그나마 독자적으로 자생적 환경과 덩치를 지니게 된 웹툰 또한 한 차례 탄압을 겪어본 바가 있죠.


학문의 경우에선 대학은 이미 대학으로서의 기능이 제대로 되고 있다고 말하기 부끄럽고 이공계는 물론 심지어 인문계 분야까지 배우면 당장 실전에서 써먹을 수 있는 경영학 정도의 분야가 아니라면 취급이 좋지 않죠. 한국의 이공계는 그 처절한 인식과 대우에 힘 입어 그 인력이 해외로 빠져나가기 일쑤에 인문계 또한 순수 학문은 이공계에 비해 더욱 취급이 안 좋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강대국의 강함은 단순히 겉으로 보이는 강함 이전에 그 기반이 되는 토양이 있습니다. 군사 분야는 기초 학문과 이공계의 기술력이 절대적이고 문화적, 사회적 토양은 대학의 학문적 업적 및 그 지식의 배분이 이면에 존재하죠. 돈? 지식이 돈을 버는 시대에 그러한 지식은 전방위의 분야에서 해당되는 법이고, 그것이 IT, 그래픽이 됬든 수학과 철학과 같은 학문이 됬든 혹은 경영학이 됬든 모두 동일합니다. 가령 프로그래밍이라면 컴퓨터에 앉아서 자판만 두들겨도 아파트 수채는 지어서 벌 돈을 얻을 수 있겠죠.



한국은 강대국이면서도 강대국 워너비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정작 강대국이 갖춰야할 필수요소가 되는 분야에 있어서는 전멸에 가깝고 이런 대학과 순수학문의 지적 사막화는 현재진행형에 문화적, 기술적 환경에 인력은 탄압받고 다른 나라 좋으라고 해외로 빠져나가게 만드니까요. 같은 맥락에서 우리나라는 노벨상.. 노벨평화상을 제외하면 다른 분야에선 정말 절대 못 딸 것 같습니다. 그런 환경과 투자와 인력이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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