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사람은 자신이 소속된 공동체와 영향을 주고 받습니다. 그리고 그 공동체에 형성된 가치관, 혹은 사상은 새로 유입되는 이들에게도 영향을 주기 마련이며, 이것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알아서 나가거나 쫓겨나기 마련입니다.
1.
대부분 인터넷 커뮤니티를 시작하는 시기는 대체로 10대 초반입니다. 늦어도 10대 중반 정도인 경우가 많고, 그 목적은 어떠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거나 어떠한 자료를 찾기 위해서, 혹은 단지 유머 자료를 찾아보며 즐기기 위한 경우도 있습니다. 목적이 어떠하든 소통이 가능한 공간에서는 다양한 의견들이 모이고, 그 커뮤니티의 구성원들의 입맛에 맞거나, 옳다고 여겨지는 것들이 그 커뮤니티의 성격이 되곤 하죠.
이러한 커뮤니티 구성원들에 의해 형성되는 보편적인 정서 내지는 감성은 그 커뮤니티의 정체성이 되고 좀 더 일반적인 표현으로는 성향, 혹은 사상이라고도 합니다.
이러한 성향은 단순히 어떠한 주제(ex.게임, 콘솔, 연예 등)에 대한 성향으로 어떤 것이 더 우월하거나 더 나쁘거나 하는 판단의 방향이 다른 커뮤니티와 다를 수도 있고 아예 정치나 사회적 이슈에 관련된 내용에 있어서는 더더욱 첨예하기 갈리기도 합니다.
대표적으로 일베와 오유는 상반된 정치성향을 가지고 있고, 지금에 와서는 루리웹과 디씨/일베의 구도가 되었습니다.
2.
대부분의 청소년들은 가진 바 지식과 정보가 연장자들보다 더 적은 경우가 많고, 이는 경험이라는 틀 안에서 자신이 보는 것만으로 판단을 해야하는 경우가 많기에, 정치나 사회에 대한 인식 역시도 비슷하게 형성됩니다. 가령, 이명박 정부 시절 10대였던 사람이 정치, 사회적 이슈에 관심을 가질 경우 그 당시 사회 분위기와 정치인, 정권에 대한 평가를 직간접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되겠죠.
그리고 그 당시의 뉴스에 대해서는 피상적이나마 어느 정도 알겠지만, 90년대에 10대 였던 이들은 그보다 더 많은 정치, 사회적 현상을 보고 겪었을 것이며, 판단의 재료와 근거들 역시 이후의 세대에 비해 더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마찬가지로 이명박 정부 당시 10대 였던 이들과, 문재인 정부 당시 10대 였던 이들의 판단 근거와 관점 역시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 나이 때 접한 뉴스와 정보들, 쌓기 시작하던 정치사회적 정보들이 각 정권의 시간만큼이나 차이가 나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 정보의 차이이자 경험의 차이로 정리됩니다.
3.
그런 이유로 10대에 어떤 커뮤니티를 하느냐, 그 사회의 지배적인 분위기가 어떠한가에 따라 10대 청소년에게 형성되는 가치관은 달라집니다. 이는 특정 가치관이나 사상이 이제 막 가치관이 형성되는 이들을 선점하는 것이 되는데, 문재인 정부 당시 문재인 정부와 진보좌파에 매우 비판적인 커뮤니티에 속하게 되면 그들의 가치관을 받아들이고 동질화 됩니다.
반대로 이명박 정부 당시 이명박 정부와 여당에 비판적인 커뮤니티를 했다면 여전히 극우보수에 비판적일 가능성이 높고요.
이는 그 정보나 지식이 얼마나 합리적이고 사실에 가까운가와 무관하게 형성되는 것이며 한번 형성이 되면 이것이 바뀌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왔고 생각해왔던 모든 것을 거꾸로 뒤집어야 하는 수준이기 때문에 매우 공격적으로 반응하거나 설령 논파되어도 그 주제에 대해서만 말을 아낄 뿐 정체성이나 가치관의 차원에서 바뀌는 일은 극히 드뭅니다.
4.
그런 의미에서 일베 전략은 매우 탁월했고, 적지 않은 10대 청소년, 20대 청년들이 일베의 사상과 가치관에 동질화되었으며, 인터넷 환경 내에서 디씨/일베 문화를 받아들이거나 물든 커뮤니티/이용자들이 적지 않은 관계로 일베나 디씨를 하지 않는다고 그들의 가치관과 사상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만은 할 수 없습니다.
물론 그런 이들이야 많겠지만, 알게 모르게 여기저기서 디씨/일베 문화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많고 이런저런 이유로 그러한 이들이 많아진 커뮤니티들은 흔히 일베포밍이 되었다고 표현을 합니다.
인터넷 환경이 실제 현실사회에 비하면 찻잔이라고 하지만 1020은 물론 이제는 거의 전 세대가 인터넷-유튜브-SNS를 하는 시대이니만큼 일베적 가치관과 디씨 문화에 영향을 받지 않거나, 접하지 않은 이들은 생각보다 적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곧 접한 사람 모두가 동질화되거나 일베화가 됐다는 것은 아닙니다.
5.
이러한 가치관 선점 효과는 제가 실제로 해본 적이 있는 사례이기도 합니다. 한때 게임, 게임 정보 관련 카페에서 네임드로 활동하던 시절 역사와 관련된 글을 쓰면서 카페 내에 존재하지 않던 환빠를 조롱하고 공격하는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환빠에 대한 허수아비 공격을 하자(물론 실제 제가 보거나 겪은 사례들이긴 했습니다만.) 얼마 뒤 역사에 대한 지식이나 경험이 공교육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제가 언급하기 전까진 환빠의 존재 자체에 대해 모르던 사람들이 겪어본 적도 없고 본 적도 없는 환빠에 대한 조롱에 동조하기 시작했습니다.
역사 관련 지식도, 경험도 없는 사람들이 그들에겐 존재하지 않는 환빠에 대한 조롱과 멸시를 심어주자 빠르게 동질화 되었죠.
이는 제가 그 커뮤니티의 네임드였기 때문도 있겠지만 조롱과 멸시, 공격은 지적 우월감과 쾌감을 만들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6.
문재인 정부 당시 많은 커뮤니티들이 기존의 진보좌파적 성향에서 벗어나 심하면 일베포밍 되는 경우들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그 커뮤니티는 한두 곳이 아니었고, 작은 커뮤니티들도 아니었습니다. 사용자가 많은 거대 커뮤니티이자 그러한 커뮤니티 여럿이 극우적 성향으로 돌아선 것은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것이 발생시키는 가치관 선점 효과는 당장은 아니더라도 거대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미 일베의 존재만으로도 인터넷 사회에서 디씨/일베 문화는 거대한 영향을 미쳤고, 이는 실제 현실과 정치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제 와서 일베는 그 영향력을 잃고 줄어들었다고 하지만 대신 다른 커뮤니티들이 일베의 역할을, 그것도 조금 더 온건한 수위로 대신할 가능성이 생겼습니다.
이는 일베라는 초거대 커뮤니티 하나보다 거대 커뮤니티 여럿이기 때문에 더 치명적일 수 있는 상황이죠. 이들의 가치관이 민주적이지도 않고 공정하지도 않고 윤리적이거나 도덕적이지도 않다는 점에서 치명적이고 위험하다는 것이며 문제라는 겁니다.
7.
본래 가치관이나 정체성의 형성이라는 게 아무 것도 없이 혼자서 만들어지는 경우는 없고, 다른 여러 정보와 관점, 지식을 접하며 형성되고 발전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커뮤니티나 타인에 의해 가치관이 형성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1020 세대 중 특정한 성향이 이미 형성된 커뮤니티에 속하게 된 이들은 특정 진영과 집단, 정부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기 쉽습니다. 이는 그들의 정치사회적 인식과 정보가 부족하기 때문에 아직 형성되지 못한 것을 이들 커뮤니티에 의해 형성되기 때문이고 그렇게 동질화되기 마련입니다.
제가 환빠에 대해 그들이 겪지 못하고 접하지 못한 모습을 비판하고 조롱하면서 그들에게 환빠에 대해 실체 없는 공격성과 적대감을 심어준 것처럼 어떠한 커뮤니티에 속한 이들은 그 커뮤니티에 영향을 받아 실체 없는 특정 진영에 공격적이고 적대적이며 조롱과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게 됩니다.
그리고 대체로 그 근거는 편향적이거나, 심지어 왜곡된 것도 있으며, 아예 논리 자체가 잘못된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체로 적지 않은 경우 실제 잘못이거나 비판받을만한 사례를 가지고 비판, 조롱하면서 보는 이로 하여금 동조하게 만드는 것이 가장 쉽고 잘 먹힙니다.
단지 특정 집단의 실책만 가져오거나 각 집단의 같거나 유사한 행동에 다른 논리와 다른 잣대를 제시하는 것만으로도 가능합니다. 그저 그러한 기사에 몇 줄 정도의 조롱과 비판이면 충분하죠. 아니, 기사일 필요도 없고 그 기사나 몇가지 정보를 짜깁기하여 정치유머 자료를 만드는 것이 가장 훌륭하고 잘 먹히는 방식입니다. XX왕 이명박 같은 방식은 정말 잘 만들어진 사례이기도 하죠.
8.
그렇다고 이미 선점된 가치관이 변화하지 않느냐 하면 그건 아닙니다. 급격하게 달라지는 극단적 사례들은 적지만 실제로 발생하는 일이기도 하고 조금씩이나마 커뮤니티의 성향 변화에 따라 자신의 성향 역시도 변화해가기도 합니다. 이런 경우 양방향성이기 때문에 커뮤가 먼저냐 개인이 먼저냐를 따지는 건 쉽지 않습니다.
예전 제가 들었던 썰 중 진보좌파, 운동권에 가까운 성향을 가진 사람이 조선일보에 들어가자 몇달만에 조선일보의 논조를 그대로 따라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 있습니다. 아마 이런 경우 어떤 방향성을 제시하고 그 방향성에 맞는 논리와 근거를 스스로 찾게 만들었기 때문에 극단적인 변화가 발생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만, 이런 사례를 제외하고도 대부분의 경우 어떠한 가치관이 완전히 변하지 않는 것은 아니며, 단지 서서히 변화해갈 수는 있습니다.
심지어 개인의 도덕관념이나 소통 스타일 역시 마찬가지죠. 좀 더 냉소적이게 되거나, 일반화의 거부감이 줄어든다거나, 특정 정보만 보고 성급하게 판단을 내리는 등.
9.
물론 특정 가치관이나 사상, 성향을 10대 인터넷 이용자에게서 분리시키거나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럴 방법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됩니다.
그러나 커뮤니티에 의해 가치관이 선점되고, 이미 형성된 가치관이 점점 변화하게 되는 것도 사실이기에 디씨, 일베적 가치관과 디씨/일베 문화가 확산되고 거대 커뮤니티에 크고 작은 영향력이 뿌리내리는 것은 매우 우려할만한 현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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