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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며,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 - E.Kant
by Ko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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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득권'에 해당되는 글 7건

  1. 2023.01.07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 받지 않는다. 6월 혁명은 성공했는가.
  2. 2023.01.07
    인구-노동력 문제를 이민으로 해결하면 안 되는 이유.
  3. 2022.11.19
    약자에 대한 멸시와 힘의 논리.
  4. 2016.01.25
    헬죠센론. 사회학적 상상력과 탈정치화.
  5. 2015.12.20
    헬죠센론. 문제에 대한 인식과 해결.
  6. 2014.12.19
    통진당 해체가 갖는 의의. 10
  7. 2014.11.22
    기득권은 모두 부패했다. 근데 정확히 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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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한 쿠데타는 처벌 받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걸주를 몰아내고 새로운 왕조를 창건한 것도 쿠데타지만 처벌받지 않고 폭군을 물리친 건국 서사로 인정 받는다. 망해가는 고려가 개혁할 수 있을 거란 기대를 버리고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도 건국왕의 업적을 말하지 쿠데타의 수괴라 말하지 않는다. 이것은 단순히 역취순수했기 때문이 아니라 실제 그들은 성공했고 승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승자가 승리를 굳히는 건 모든 이들이 그 체제를 긍정하는 때이다. 정확히는, 그 체제를 부정하지 않을 때이다. 만약 고려를 그리워하던 이들이 조선을 받아들이지 못하겠다고 각지에서 변란이 일어났다면 조선은 어떻게 대응해야 했을까? 역적 이성계의 세력을 몰아내겠다고 일어난 이들을 모두 죽여 없애야했을까?

 

그러나 민초들은 조선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고, 고려와 왕씨 왕조를 어떻게 생각했든 결국 그들은 저항하지 않았고 조선을 받아들였다. 마음 속으로는 조선과 이성계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을지언정 그것은 규합되고 행동으로 나설 정도의 것은 아니었다. 성계탕은 단지 그들의 불편한 마음의 발로일 뿐이지 이성계를 찢어 죽이고 싶다는 증오의 피상이 아니었다.

 

쿠데타, 역성혁명으로 만들어진 체제는 본디 사람들에게 인정 받아서 정당화 된다. 역사는 승자가 쓰는 것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이다. 우리의 쿠데타와 역성혁명은 정당했다고. 그리고 그 정당함의 근거는 그 체제를 살아가던 사람들이 그 체제를 받아들였음으로 증명되는 것이라고 말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이는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 하지 않는다는 말이 역사적 사실에 가까운 판단이라는 것이다. 정당성을 만들지 못하고 역사의 승자가 되지 못한, 중과부적인 왕조와 국가들은 아주 짧은 기간만 존속하고 사라졌다. 그 짧은 기간 때문에 그들의 존속은 별 관심을 못 받을 뿐 그들은 실패한 것이다.

 

 

86년 6월, 한국은 독재를 끝장내는데 성공했다. 그렇게 믿었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사실일까? 국민들은 전두환의 독재정권을 무너뜨리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대선을 치뤘고, 양김의 갈등 끝에 노태우가 당선됐다. 노태우의 정치와 정책들은 독재의 정통성을 이어갔다고 평가하긴 어렵지만 자신의 권력을 근거했던 쿠데타를 부정하진 않았다.

 

이후 김영삼 시대에나 겨우 그들은 법정에 설 수 있었고, 사형을 선고 받았다. 그러나 결국 집행은 취소되고 그들은 사면받아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게 가장 큰 문제 지점이다.

 

법원에서 어떤 선고가 내려졌든 독재와 반란의 핵심을 살려두는 것은 아주 나쁘다. 그들이 공개적으로 사죄하고 반성하여 세력을 무너뜨렸다면 달랐겠으나, 전두환은 자신의 범죄를 반성하지 않았다. 처벌받지도, 반성하지도 않았기에 그들이 만들고 형성시킨 독재와 반민주의 정신은 살아남아 한국 사회의 중핵을 유지하는데 성공했다.

 

우리가 정말 독재를 무너뜨리고 그 정신을 끝장냈다면 전두환은 살아있어선 안 되고, 설령 그렇다 해도 철저한 책임추궁 하에 비참한 삶을 살다 죽었어야 했다. 부와 존경받은 채 천수를 누릴 게 아니라.

 

인정해야한다. 한국인들은 독재를 무너뜨리지도 못했고 그 정신을 끝장내지도 못했다. 독재가 무너진 이유는 단순하다. 한국인 다수가 그것을 거부했기 때문이지만 그러한 이유는 단지 한국이 자본주의 국가였기 때문이다.

 

경제를 성장시키는 목적을 지닌 자본주의 체제에서 경제적 성장은 그것의 재투자로 이어진다. 더 높은 성과와 효용을 발휘하기 위해서다. 더 고도화된 경제시스템과 효율적인 부의 창출을 위해서 구성원들은 교육을 받아야 했고, 이는 필연적으로 자유를 추구하게 될 수밖에 없다. 정치적 자유는 경제적 자유를 기반으로 한다. 가진 게 없는 이들은 힘이 없고 힘이 없는 자들은 요구할 수 없다.

 

한국의 경제가 성장함에 따라 교육 받은 국민들은 독재보다 더 나은 체제를 추구했던 것이고 그 이유와 사유가 어떤 것이든 구조적으로 독재를 거부할 토양이 만들어진 것이다. 물론 독재 시스템이 더 공고하고 강력하게 통제할 수 없었던 기술적, 제도적 이유와 한국이 본래 민주주의 국가였기 때문에 헌법에서부터 그러한 성질의 문장으로 한국의 체제를 규정했다는 점 역시 부정할 수 없다.

 

아무리 헌법과 법률에서 반민주적인 성질의 것을 적어놓았다 하더라도 민주주의 국가로 출발한 이상 그 내용을 전면적으로 뒤집지 않는 한 민주주의에 검은 색칠을 하고 부품을 갈아끼운 것일 뿐이다. 가령, 결국 투표를 해야 했다던가 언제 어떤 시대의 한법이든 한국 헌법 1조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라는 문장은 단 한번도 지워진 적이 없다. 그것이 한국이 본질적으로 민주주의를 추구할 수밖에 없는 당위가 되었다.

 

즉, 전두환 정권이 무너진 것은 그들이 더 강력한 독재를 시행할 능력과 기술이 없었고, 경제성장에 따라 국민들이 더 좋은 교육을 받았으며 그 결과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와 열망 역시 강해졌다는 것으로 정리된다. 이것이 올바르고 완벽한 정답은 아니지만 이러한 관점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독재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했다. 전두환과 노태우를 법정에 세우고 사형을 선고하는데 성공했지만 집행은 실패하고 사면했다. 독재의 하수인들을 골라내 불법적으로 얻은 부와 권력을 회수하지도 못했고 강력하게 처벌하는데에도 실패했다.

 

이는 한국인들이 승리에 취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대의 민주주의의 원칙에 따라 정치적, 법적, 제도적 방식으로 처분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에 동의하기 때문에 그러한 요건이 되지 않거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는 한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현실적인 사유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그 독재를 긍정하는 국민들이 약 절반은 되기 때문이다.

 

최소한 그 비율은 현재까지도 30%는 되며, 경우에 따라 독재적 가치의 위험성보다 다른 가치를 더 우선시하는 이들이 합세하여 약 50% 안팍까지 도달하기도 한다.

 

 

한국에서 쿠데타는 그렇게 불법이나 불법적이지만은 않은 것이 되었다. 이성계는 단지 역사적 상징일 뿐이다. 실질적인 힘은 독재자와 그들의 정신이 살아남아 지배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에 있다. 독재자 중 한명은 반인반신이 되어 종교적 숭배의 대상이 되었고, 그 신화는 자식에게까지 이어져 숭앙 받았다.

 

성공한 독재는 처벌하지 못한다며 살아남았고, 부와 존경을 받으며 천수를 누리다 죽었다. 그의 자손은 그 부와 영향력을 통해 부유한 삶을 살고 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성계가 쿠데타를 일으킨 주역이지만 그를 쿠데타 수괴라 평가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역사는 승리한 자가 기록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그렇다. 쿠데타라는 군사반란, 국가반역이 제대로 청산받지 않았기에 그들은 힘을 잃지 않았고 지배적인 위치를 잃어버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러한 힘을 통해 정치적 승리를 할 때마다, 정권을 얻어낼 때마다 역사를 새롭게 기록하고자 하는 역사 수정주의적 시도가 있었다.

 

군사반란을 구국의 결단으로 포장하고, 성공한 쿠데타라며 처벌할 수 없다고 말이다. 쿠데타를 통해 만들어진 독재정권이 그렇게 정당하다면 한국 사회는 쿠데타를 권장하는 사회나 다름이 없지 않은가? 단지 그들은 쿠데타 세력에 의해 이권과 주도권을 빼앗기는 것이 싫기 때문에 새로운 쿠데타를 긍정하지 않을 뿐이다. 그들의 힘과 부의 원천이었던 과거의 쿠데타를 긍정하고 정당화하는 것은 그들에게 도움이 되기에 하는 것이지. 물론 그들에게 이익이 된다면 새로운 쿠데타는 언제든 있을 수 있다. 실제 쿠데타 시도는 몇년 전 분명히 있었다.

 

이번에도 5.18은 교과서에서 사라진다는 말이 나왔다. 정권을 잡은 승리자가 역사를 자신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그들의 정신적 근간을 긍정하고 정당화하는 쪽으로 기록하려는 것이다. 그 당시 부와 명예, 권력을 가진 이들은 그것을 잃어버리지 않았고, 사회의 지배적 위치를 잃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의 사상은 지배적 사상이 되어 우리 세대 독재의 정신을 가진 후예들을 양산하고야 말았다.

 

대한민국 헌법 1조를 긍정한다면 그것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체제는 어떤 성과를 일궈냈든 긍정할 수 없다. 그것을 역사화하여 그러한 사실이 있었다. 라고 하는 것이라면 누가 뭐라고 할 것인가. 그러나 어떤 이들은 그것을 어쩔 수 없었다거나, 필요했다며 정당화한다. 그들은 헌법 1조에 살해 시도를 하고 있는 것이다. 본인들은 절대 모르겠지만.

 

 

그렇다면 다시 질문을 던지겠다.

 

한국 사회는 정말 86년 6월, 독재에게서 승리를 거두었나? 6월 혁명은 성공했는가?

 

성공했다면 왜 패배자들은 살아남았고, 이 사회의 권력자로 기득권을 행사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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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적으로, 한국은 미국이 아닙니다. 다민족 사회라는 유럽도 이민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인구, 노동력 문제고요.

 

이건 몇가지 이유가 있는데, 일단 유럽조차도 민족주의가 결코 약한 나라들이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탈민족으로 극복했다거나 민족주의 빨면 나치나 파시스트처럼 취급된다느니 하는 것도 백번 양보해서 옛날 이야기고 지금 같은 난세에는 오히려 그런 가치들이 더 큰 호응을 받고 우리 집단에 대한 편향이 강해집니다.

 

 

근데 한국은 여전히 민족주의적인 나라에 가깝고 대규모 이민은 필연적으로 충돌을 낳을 수밖에 없어요.

 

소규모거나 진짜 한국을 사랑하고 한국에서 사는 게 좋아서 이민, 귀화하는 사람들은 어느 정도 걸러지고 검증되었기 때문에 이미 한국화 되었거나 빠르게 한국화되는 사람들이지만 그건 그 사람들이 한국이 좋아서이지 한국에 일하러 온 사람들이 아니예요.

 

외국인들이, 그것도 더 나은 환경에서 더 많은 돈과 더 좋은 대우를 받기 위해 열악하고 후진적인 국가, 예컨데 동남아 등 인태지역 국가, 아랍, 중앙아시아, 아프리카, 남미 등의 국가에서 오는 사람들은 그 사회에서 태어나 자랐기 때문에 그 사회의 환경에 사회화된 사람들입니다.

 

당연히 다른 사회적 문화와 관습을 익힌 사람이 다른 지역에서 살아가면 충돌이 발생할 수밖에 없고 그걸 부딪히며 배우고 익히며 받아들이는 과정이 필요한데, 후진적이고 전근대적인 관성이 한국보다 강하게 작동하는 사회의 일원이 한국에 온다고 빠르게 한국화되는 걸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심지어 그런 이들이 대규모로 오게 된다면 한국 사회의 문화와 관습을 익히며 한국화라는 이름의 새로운 사회화를 이루기보다는 자기들끼리 게토를 만들며 한곳에 모여 살 것이고, 여러 이유로 배타적인 성격을 띌 가능성이 아주 높아요. 이건 이미 유럽에서도 벌어진 일들이고요.

 

 

한국에서 민족주의는 제국주의, 식민지 시대에 생존을 목적으로 도입되었고 빠르게 전파됐습니다. 우리 민족의 지위와 생존을 걸고 뭉칠 수밖에 없었고, 그것은 분명히 효과적이었고 한민족 외의 정체성에 배타적이었죠. 일본의 것에 대해서는 배타적인 동시에 한 세대를 지배한 것이었기에 완전히 뿌리를 뽑을 수 없었다는 한계가 있었지만요.

 

한국은 그나마 민족주의적 관성에서 꽤 벗어난 편이긴 합니다. 민족주의가 적당히 균형을 찾아가면서 오히려 견제 받지 않았던, 재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국까, 반민족의 성장을 발생시키며 이것들을 걱정해야할 시대가 되었고요.

 

현실이 어떠하든 한국인들은 인구와 노동력 문제를 이민으로 해결하며 여러 일자리와 이권을 이민자가 지분을 가져가거나 확대하는 것과 자기 자식이 그것을 가지는 것을 비교하면 당연히 후자를 선택합니다.

 

이건 결국 이민자는 본디 외부인이었고 규모와 속도, 한국화 작업이 어떻게 진행되느냐에 따라 한국 내의 이민자 출신 한국인이 아닌 한국 사회 내 외부 정체성을 가진 집단화 될 이들보다 결국 한국 본토 혈통의 한국인이 한국 내 이권을 차지하는 게 좋다는 내집단 편향, 민족주의적 발로가 아예 없을 순 없기 때문입니다.

 

 

외국인을 노동력으로 쓰려면 단기 비자 등 한국 내에서 활동할 시간과 여력을 제한해야만 합니다. 실제로 그렇게 하는 나라들 많고 노동력이 부족하면 이걸 적절한 균형감각를 가지고 확대해야할 문제고요.

 

근데 그들을 아예 이민자로 받아들여 한국인으로 살게 만든다면 그들이 쉽게 한국화되어 한국인의 정체성을 가질 것을 기대하기보단 원래 자기들이 살던 관성을 거의 그대로 유지하며 자기들끼리 모여서 그들의 문화와 관습, 전통을 따르거나 그것을 한국 내에 뿌리 내리길 시도할 겁니다. 한국인들이 외국에 나가서도 한국 명절을 챙기는 것과 비슷한 맥락에서요.

 

그게 나쁜 건 아닙니다만, 그들만의 관습과 질서는 한국의 질서와 충돌할 가능성이 높고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지적, 비판을 공격으로 받아들이고 그러한 공격이 체면, 자존심의 영역과 동일시하여 내가 틀렸더라도 그것 지적하면 날 공격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그러한 공격에 강경하게 대응하지 않으면 집단 내 평판과 서열에 불이익이 생기는 전근대적 관성은 곧 폭력 사건의 확대와 같은 말이 됩니다.

 

베트남 등 동남아 노동자가 일본에 인턴 등으로 일하면서 실수를 지적한 것만으로도 폭력을 휘두르는 건 그러한 지적을 공격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에 대응하지 않으면 약자로 낙인 찍히는 근대적 법과 질서의 세계관이 아닌 집단 내 위신과 체면, 서열이 우선시되는 전근대적 세계관의 관성이 폭력이라는 대응책으로 그것을 지키라는 요구를 하기 때문이고요.

 

한국, 일본, 유럽 등과 같은 사회에선 지적이 단순 쪽팔림이나 반성하고 마는 정도가 아니고, 그게 집단 내 영향력으로 이어지는 경우라도, 가령 회사 부서간 경쟁에 있어 타 부서가 우리 부서의 실수나 실패를 지적하고 비판할 때 비판 내용이 정당하다면 가오 좀 상하고 부서의 영향력과 출세 경쟁에서 불이익이 있겠지만 부서장이 주먹질을 하거나 부서원 끌고 가서 패싸움을 벌이진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에 대한 지적이나 비판을 감히 날 무시해? 내 가오를 살리기 위해선(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내가 대응도 못하는 나약한 놈이라고 보이지 않기 위해선) 내가 얼마나 무서운 놈인지 보여줘야해. 에서 시작되는 폭력 대응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게 사실이라는 겁니다. 한국도 예전엔 그랬듯이요. 아니, 그 관성은 지금도 어느 정도 남아 있는 게 사실입니다. 직장문화가 그렇지 않는 것처럼 공적으로 엮이지 않는 관계에서 주로요.

 

 

그럼 왜 인구와 노동력 문제를 이민으로 해결하려고 하느냐면, 이건 진짜 간단한 문제입니다.

 

인구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대책을 선택하면 당장의 이익구조가 파괴되고 자신의 것을 더 많이 내줘야하는 기득권이 그것을 거부하고, 어차피 돈 벌어다주는 아랫것들이 한국인의 피를 이었든 동남아, 중동, 남미, 아프리카의 피를 이엇든 아무 상관 없기 때문입니다.

 

부품의 색깔이 어찌됐든 잘 작동만 해서 내 통장에 돈만 꽂아주면 상관 없다는 기득권식 인식 때문이지 별 다를 대단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니예요. 이민이 없으면 해결할 수 없다? 애초에 해결할 생각이 있는 게 아닙니다. 이미 10년도 전에 저임금 외국인 노동자 들어오면 3D 업계의 한국인 노동자들조차 임금 하락이나 동결이 예상된다고 하는데, 그것처럼 대규모 이민 노동자들은 당연히 저임금 노동자들일 수밖에 없고요.

 

그럼 그저 돈 벌어주는 부품에 불과한 한국인들은 외국인들과의 경쟁에 의해 임금 상승 역시 동결되거나 느리게 상승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들에게 한국인이냐 외국 출신 이민자냐는 별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들과 드잡이할 것도 아니고 그 드잡이조차 내 돈 받아서 일하는 아랫 것들이 해줄텐데요. 기득권들에게 대규모 이민자가 부족한 노동시장을 커버하는 건 아무런 손해도 안 되는 일입니다. 오히려 각 출신국끼리의 차별과 갈등을 조장하여 미리미리 정치적 영향력을 거세하고 그들의 문화가 추구하는 바를 상품화시켜 돈을 버는, 시장 확대의 기회라고 보고나 있겠죠.

 

그렇다고 기득권의 자리를 그들에게 양보해주거나 일정 지분을 줄 것이냐 역시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그들이 끼리끼리 문화는 모든 기득권 사회가 그렇듯 배타적이고 인맥과 혼맥 등으로 연결됩니다. 고소득 전문직 이민자조차 그들의 고급 하인, 시녀가 될 가능성이 높고요.

 

애초에 다른 사회에 외부의 경쟁력 있는 권력-재력을 가진 이가 들어오려고 하면 그게 심지어 동남아나 아프리카의 세계적 수준에서 미약하기 짝이 없는 힘을 가진 이들조차도 매우 배타적이고 음습하게 대응합니다. 음습하지 않으면 격렬하게 저항하고요. 한국 재벌이 외국에 이민간다고 그 사회에서 방귀 좀 뀌길 바라려면 어어어어어어엄청나게 많은 돈이 필요하고, 그 사회의 기득권층에 편입되기 위해 어어어어어어어어엄청 많은 돈을 뿌려야 할 겁니다.

 

기득권 사회에 편입되지 않고 노후만 즐기려면 큰 문제 없이 돈 많은 인맥 하나가 될 뿐이지만요. 물론 이런 경우 기득권으로서 권력에 접근하기 어렵고 인맥 형성이나 사업 참여와 별개로 그러한 접근은 여전히 거부됩니다. 당연하지만 기득권으로 나누고 있는 파이를 굴러들어온 돌에게 쪼개서 주고 싶을 리가 없으니까요.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니긴 합니다. 상대적 약자가 외부 세력을 끼어서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싶은 경우 그걸 적극적으로 조장, 협력하는 식으로는 가능하죠.

 

 

어찌됐든 한국 기득권은 자신들의 카르텔에 외부 집단을 끼게할 생각이 없고 경쟁과 갈등은 모두 서민들의 것이 될 겁니다. 인구 문제와 인구에서 비롯되는 노동력 문제 역시 기득권에게 한국에 대한 민족주의적 가치관이나 한국 사회의 생존을 위한 필요 선택이 아닌 자본주의적, 계급주의적 관점에서 자신들에게 피해는 없고 이익이 되기 때문에 불과합니다. 한국인이 노동자든 베트남, 이집트, 콩고, 브라질 출신 이민자 노동자든 그들이 일만 똑바로 한다면 어차피 들어오는 돈은 큰 차이가 없을테니까요.

 

한국이 멸망한다면 그런 식으로 해체되기 때문이지 다른 게 아닐 겁니다. 한국은 미국이 아니고 다민족, 다인종 사회가 되기엔 너무 좁은 국가입니다. 그런 전통도 역사도 없었어요. 그런 폐쇄성과 요구가 한국의 고도로 발전된 물질문명 및 서비스와 함께 한국에 살고자 하는 이들을 한국화시키는데 강력하게 일조한 건 사실이지만, 그 규모가 커질수록 한국화의 역량은 약해질 수밖에 없죠.

 

한국이 한 해 10만명씩 이민자를 받아들이고, 현 130만명 규모의 이민자가 500만명이 되면 지금과는 다른 강도의 갈등과 분쟁이 생길 겁니다.

 

인구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느냐와는 별개로..

 

이거, 서민으로서 감당하고 싶어요?

 

 

 

p.s 외국인 노동자를 없애거나 막자는 의미는 아닙니다. 오히려 현재는 확대해야 하는 것에 꽤 동의하는 편이고요. 다만 그걸 인구 문제로 묶어서 해결하겠다고 하는 건 끔찍한 일입니다. 한 사회의 주류 정체성은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중국인 2000만 명 이민 받고 그 규모를 점차 늘리거나 유지시킨다면 한국은 머지 않아 중국 내 한국성이 될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고려해야 할 것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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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의 극단주의 사상은 몇가지 공통적인 요소를 보입니다.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본 글의 주제인 약자에 대한 멸시가 그러합니다.

 

파시즘을 비롯하여 강자는 약자에 대한 절대적 권리를 지니고 힘은 그 자체로 도덕적인 법칙으로 받아들이고 행동하죠. 옳고 그름의 기준은 힘의 강약, 승리와 패배로 구분되며 승자는 절대적 무오성을 지닙니다. 제왕은 무치하고 군주의 잘못은 기군을 망상한 간신의 탓이 됩니다.

 

정치에 있어서 더 극단주의적인 집단을 찾기 위해선 간단한 몇가지 징후를 파악하면 됩니다. 제가 제안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누가 더 무책임하냐에 대한 것입니다. 극단주의 집단은 무오하고 도덕적으로 우월하기 때문에 잘못하지 않으며,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기에 남탓으로 책임을 돌립니다.

 

책임자에 속하는 권력, 권한을 지닌 더 높은 사람은 그에 대한 책임을 아래로 전가하고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으려 합니다. 도리어 책임을 묻는 입장이 되길 원하죠.

 

 

힘에 대한 숭배와 약자에 대한 멸시는 같은 것이 아니지만, 서로 섞이기 쉬운 조합입니다. 파시스트, 나치, 극우주의자, 종교적 광신도 등 극단주의자들이 힘을 숭배하는 이유는 힘이 가져다주는 다양한 이익 때문이고, 약자를 멸시하는 이유는 그 과정이 도덕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더 많은 힘을 가져서 더 많은 이익을 추구하기 마련이고, 그 힘은 책임에 대한 회피 역시 가능하게 해줍니다.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마땅히 더 큰 책임을 져야하지만, 이들의 정신이 말하는 원리는 그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해 그 자리까지 올라가 그만한 힘을 가지는 것이거든요.

 

범죄를 저질러도 이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그 책임을 벗고 타인에게 씌웁니다. 언론플레이를 통해 자신의 잘못을 정적에게 엮어서 뒤집어 씌우고, 검찰과 경찰을 비롯한 법집행기관을 통해 조사를 불충분하게 하거나 기소를 이상하게 하거나 근거를 적절치 않게 수집하여 제출하기도 하고, 유리한 판단을 내려줄 판사를 배정받게끔 하는 방식도 있고 그러한 판사를 사전에 기름칠을 하는 방식도 있습니다.

 

혹은 자기 부하 직원이나 하위 기관에 책임을 전가시키고 그 책임추궁을 본인이 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거래 하는 방법도 있죠. 조폭들이 네가 대신 빵에 들어가주면 나중에 잘 챙겨준다, 얼마 주겠다는 식으로. 다양한 방식으로 책임은 아랫사람에게 전가되고 권력자, 기득권은 결과적으로 무오하게 되죠. 법적으로 그러한 판정을 받지만, 도덕과 윤리의 기준을 법에 맞추는 인식을 보편화 시킬 수록 법적으로 무오하게 판정받기만 하면 도덕적으로도 무오하게 됩니다.

 

 

그런 이들이 약자를 멸시하는 이유가 바로 그 부분에 있죠. 내가 저지르는 잘못을 아랫사람, 약자들이 지게 되기에 잘못한 쪽은 약자가 되는 겁니다. 사건사고의 책임을 일선의 말단과 그들을 직접 지휘하는 이들에게 전가하면 죄를 지은 사람은 말단, 기껏해야 중간관리자급에서 꼬리가 잘려지는 거고 이들이 잘못한 게 되기 때문에 나쁜 건 그들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 무오한 권력자와 부덕한 아랫사람으로 구분되는 것이며, 그 구분은 철저하게 힘으로 이루어집니다. 내 잘못을 네가 책임지게 되었으니 나쁜 건 너라는 거고, 그런 처분을 위해서 권력은 누구보다 영악하고 유능하게 움직입니다. 그들이 정말 유능하고 뛰어났으면 그런 사건사고, 범죄가 발생하지도 않았겠지만, 애초에 그들은 그 권력과 힘을 남용하여 법과 제도를 어겨서라도 이익을 취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 결과 자신에게 책임을 묻게 되는 상황이 오더라도 그 권력과 힘을 통해 약자들에게 전가하기 위해서 힘을 추구한 것이죠. 앞서 말했듯, 그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해 그 높은 자리까지 올라온 것이기에.

 

 

당연히 피해를 보는 약자들, 그리고 그들과 같은 편에 선 자들은 불만을 가질 겁니다. 자기가 잘못해놓고 왜 남에게 책임을 전가시키고 남탓하냐고, 무책임하다고.

 

그러면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게 불만이면 힘을 기르라고. 억울하면 성공하라고. 성공해서 바꾸라고.

 

하지만 애초에 그들이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그 자체로 약자에게 책임을 전가하기 위해서입니다. 너희가 약했기 때문에 날 징치할 수 없고 내게 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말하는 거고요. 옳고 그름, 도덕과 부덕, 윤리와 비윤리가 아니라 힘의 유무에 따라 정의는 구분되는 거고, 아무리 떠들어봐야 이미 성공하고 힘을 가진 자신이 옳다는 겁니다.

 

그러니 약자들이 떠드는 건 그저 소음공해에 불과하고, 힘도 없고 불만만 많고 시끄럽고 귀찮은 개돼지들이 되는데, 그래야만 잘못한 게 내가 아니라 그들이 되며, 그들이 자신의 양심과 도덕성을 공격할수록 그에 대한 반동으로 그들을 더 천하고 질 떨어지는 집단으로 설정해야만 자신의 더러운 행위들이 정당화됩니다.

 

이러한 정신적 기제가 그들이 대중, 서민을 저열한 것으로 바라보고 자신들을 그들에 비해 우월하다 여기게 만드는 것이며 과정이 부정하기 때문에 자신들이 얻어낸 결과의 정당성이 떨어진다면 그 과정을 정당한 것으로 바꿔야하기 때문에 도덕, 윤리나 법적 정의가 아닌 힘의 강약과 유무를 기준으로 삼는 것입니다.

 

 

전에 이야기했듯, 그러한 정신을 공유하는 이들이 현 사회의 기득권, 권력자, 지도층 다수일 경우 그 사회의 지배적 사상을 그들의 것이 됩니다. 그들처럼 되기 위해선 그들이 해왔던 방식을 답습하는 것이 올바르고 정석적인 성공의 공식일 것이며, 그들 집단의 일원이 되기 위해서 역시 그들의 사상을 공유해야하기 때문인데다, 자신이 그들처럼 될 수 없더라도 그러한 성공을 자신의 현실과 무관하게 추구하는 이들이기만 해도 그들의 지배적 사상을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이죠.

 

그러한 사상을 받아들인 이들은 그 지배적 사상 내지는 그 사상대로 행동하여 성공한 기득권, 엘리트들이 사라지거나 패배하지 않는 한 더 늘어날 수밖에 없기에 부정한 방식으로 성공하고, 힘의 원리에 따르는 극단주의자들이 성공하며 더 많은 자원을 차지하는 사회일수록, 도덕과 윤리는 계속해서 도전받고 그 영향력은 축소될 수밖에 없습니다.

 

도덕과 윤리는 성공과 힘에 비해 중요하지 않는 것이 될 것이고 때때로 경쟁을 위한 도구로서 활용될 뿐입니다. 저자가 더 나쁘기에 덜 나쁜 내가 한정된 자원을 차지해야 한다는 식으로. 그런 방식이 관성을 얻어 정의의 기준을 뒤바꾸게 될 것이고 이는 우리가 말하는 비상식의 상식화라는 말로 표현됩니다.

 

 

어째서 상대적으로 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이들이 패배하며, 그들의 영향력과 세력이 그렇지 않은 이들보다 약하고, 시민들은 왜 더 부덕하고 비윤리적인 이들을 지지하느냐의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자신이 약자인지 아닌지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힘은 상대적이고, 서민이나 저소득층 같은 약자조차 자신보다 더 약한 이들을 멸시하며 부정한 방식을 정당화하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 방식으로 크고 작은 이득을 취하길 바라고, 그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길 바랄 뿐이죠.

 

그러나 약할 수록, 아주 작은 죄조차 그들보다 더 약한 이들에게 전가할 힘이 없어서 결과적으로 더 높은 범죄율에 일조하고 더 삭막하고 각박한 사회를 만드는 일원이 되며 당한 사람은 그 방식을 답습하여 다른 사람에게 똑같이 할 기회를 추구하게 됩니다.

 

경제적으로나 사회지위적으로나 평범한 사람들조차 그러한 지배적 원리가 지배하는 사회속에서 도덕적 선택보다 비도덕적이더라도 자신에게 더 많은 이익을 가져다줄 선택을 기꺼이 할 것이고, 그걸 위해 타인이 피해를 보거나 고통을 받더라도 양심의 작동이라는 정신적 불쾌함과 도덕적 비난이라는 외부적 공격을 방어하고 정당화할 힘의 논리로 그것을 무시할 것입니다. 그걸 위해 흔하고 전통적인 다양한 변명들이 나올 것이고요. 너희라고 안 그랬겠어? 어쨌든 이익 봤으면 그만. 너희라고 얼마나 깨끗하다고 등등..

 

 

그러한 힘의 논리에 따라 약자는 부당한 권력의 횡포에 대한 공감의 대상이나 보호와 연대의 파트너가 되는 게 아니라 멸시의 대상이 되며 약자의 범위는 시간에 따라, 양극화의 원리에 따라 더 늘어날 것입니다. 자신이 약자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서민들조차 어느새 부동산, 주식, 직장에서 다양한 피해를 받게 될 것이고, 그럴 때마다 돈이 더 많든가, 인맥이 더 많든가, 머리가 더 좋고 실력이 더 뛰어났거나, 더 많이 공부해서 더 좋은 대학 나와 더 좋은 직장 구했으면 될 거 아니냐는 조롱과 비난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사회적 보호망와 시민들의 연대엔 구멍이 뚫리고 끝끝내 제역할을 하지 못하게 될 것이고요. 누칼협의 정신은 피해자와 약자가 더 나은 대우와 마땅한 권리를 추구하는 것을 방해하고 약자이기 때문에 어떤 피해를 받았든 고분고분 받아 들이라는 조롱입니다. 누칼협엔 진보가 없고 정체한다면 다행일 뿐인 후퇴 뿐인 정신이죠.

 

누칼협이 정당하기 위해선 불법을 저지르거나 비도덕적이고 비윤리적인 행위를 저지른 이들이 그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되었을 때 그들이 억울하다는 말에 해줘야할 말입니다. 누가 칼들고 협박해서 네가 범죄 저지른 거냐고. 하지만 그들에게 정의의 기준은 힘의 논리이기 때문에, 누칼협을 사용하는 이들은 그 대상을 피해자와 약자에게 씁니다. 네들이 힘이 없어서 그런 거니까 고분고분하게 받아들이라고.

 

 

이는 사회현상에도 적용되고 국제논리에도, 역사적 판단에도 같은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전라도가 멸시 받는 이유는 전라도에 힘이 없기 때문이고, 그들에게 가해했던 이들이 사회의 질서를 만드는 극우보수 기득권 내지는 그러한 기득권을 창출하는(=기득권이 제시하는 질서에 순응하는) 정신을 공유하는 이들이기 때문이며, 한일 관계의 역사적 관계에 대해 가해자 일본이 아니라 피해자인 한국에게 책임을 요구하는 것 역시 한국이 약하고 약해야하는 약자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일본이 제국주의 침략이라는 비도덕적인 행위를 했기에 나쁜 게 아니라 조선이 약했기 때문에 정복당한 것이니 조선의 잘못이고, 조선이 강했다면 일어나지 않을 일이기에 조선/한국의 책임이라는 겁니다. 아직도 일본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고 그들을 비판해선 안 되는 이유 또한 한국이 일본보다 약하기 때문이고, 감히 약자에 대한 절대적 영향력과 도덕적 무오의 권위를 지닌 강대국 일본에 대해 감히 비판하고 공격하는 이들 때문에 일본이 한국에 보복을 하면 버틸 수 없다고 믿습니다.

 

그들의 정신은 일본의 정신과 유사하고 그러한 원리를 공유하기 때문에 한국보다 일본에 이입하고, 한국의 이권보다 일본의 이권에 부역하며, 강대국의 부당한 요구와 강압에 저항조차 제대로 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콧방귀에 한국 같은 약소국은 버틸 수 없을 것이라는 비현실적인 믿음이자 힘의 논리가 작동하는 그들의 세계관 내에선 너무나도 합리적이며 당연한 공식이기 때문에요.

 

그래서 그들의 외교는 강대국엔 감히 반항도, 주권을 지킬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이고, 약소국에 대해선 강짜와 무례를 저질러도 책임을 지려 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신경쓰는 것은 무지몽매한 국민 대중이라는 이름의 개돼지들이 사리분별하지 못하고 올바른 판단을 내린 엘리트 기득권인 자신들에게 표를 주지 않고, 그 표를 받아 권력을 얻은 이들과의 관계로 얻어지는 이익구조를 복잡하고 귀찮게 만드는 게 싫기에 최소한의 눈치를 보는 것 뿐입니다.

 

그들의 비정상적이고 한심하기 짝이 없는 국내정치와 외교의 작동원리가 바로 여기에 있는 셈이죠. 힘의 논리, 힘에 대한 숭배와 약자에 대한 멸시에서.

 

이익을 얻는 결과를 위한 과정이 부당하다면 언제든 잃을 수 있기에 그 과정을 정당하게 만들어야 하니 규칙과 도덕, 윤리보다 힘 그 자체로 정당화를 시도하는 것이고, 이 사회에서 그 시도는 매우 성공적이었습니다. 힘이 있다면 책임지지 않고,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정과 부당함 역시 힘으로 무마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방식으로 힘과 권력을 얻은 이들이 기득권이라는 이름으로 사회지도층이 되었고, 그들을 성공하게 만들어준 사상은 이 사회의 지배적 사상이 되어 그들처럼 되고 싶은 이들, 그들에게 이입하는 이들에게 이식되어 이 사회에서 상식과 정의의 기준을 바꾸고 있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데엔 이제 얼마 남지 않았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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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비판사회학자인 밀스가 저술한 '사회학적 상상력'에 따르면, 개인이 자신의 인생 경험의 한계를 뛰어넘어 사회 전체를 통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개념을 제시했습니다. 사회학적 상상력이란 곧 인간과 사회, 개인의 일생과 사회 역사, 자아와 세계의 상관관계에 한계를 두지 않고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하죠.


50년대 미국에선 너무나 비대해진 사회체계 안에서 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문제에 부딪혔을 때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문제가 무엇인지 파악도 못하며 절망하게 되어버리며, 자신이 사회 안에서 어떤 위치에 자리잡고 있는지조차 몰라 불안해하는 현상이 감지되고 있었습니다. 옛날의 농부는 자신이 소유한 논, 밭에서 일어나는 일만 알고 관리만 잘 하면 살아가는 데 별 문제가 없었지만 현대사회는 너무나 복잡하고 다양해졌으며, 그에 따라 다방면의 이해가 필요하지만, 한 개인이 모든 사회를 이해하고 대응할 순 없죠. 


현대인이 모든 사회방면의 것들을 경험할 순 없지만 자신이 경험하지 않더라고 사회학적 상상력을 통해 간접적인 방법으로 사회 구조를 통찰함으로써 문제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아내고 해결하는 데 필요한 행동을 결정할 수 있다고 합니다.



기실 이러한 사회학적 상상력을 막는 것이 모든 사악한 기득권층의 목표이자 이상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령 한국에선 모두 개인의 탓으로 돌려버리는 경향이 곧 그러한데, 사회, 국가 등 집단의 문제를 개인의 정신력과 노력의 탓으로 돌려버리면서 사회나 국가(엄밀히 말해서 정부)의 책임을 없애기 위함입니다.


자신에게 문제의 원인이 있고, 혹은 그에 대해 해결할 능력과 의무를 가지고 있음에도 그렇지 않고 발생한 문제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으면 편한데다, 그러한 문제를 통해 이익을 얻는 자들에겐 오히려 문제를 해결하고자 할 의지도 없고, 실제로 해결하지 않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으면 되려 문제가 계속 존속되길 원하죠.


만약 대중이 그러한 사회적, 국가적 문제에 대해 통찰할 수 있는 능력이 있거나, 그러한 통찰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면 그러한 거대한 패악질과 사악한 의지는 멈추어질 것입니다. 아무리 대통령, 총리, 장관, 의원, 사장, 회장들이 힘이 있어도 거대한 대중들의 의지를 이길 수는 없습니다. 이는 역사가 증명해왔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대중들이 그러한 사회학적 상상력을 갖추지 못하고, 특정 정치세력과 그들의 나팔수들에게 지속적으로 노출된다면 그들의 주장에 선동, 세뇌될 수 밖에 없죠. 사회학적 상상력을 갖추지 못한 이들은 구조적 문제를 절대 발견할 수 없고, 그러한 상태 속에서 개인의 한계를 뛰어넘는 구조적, 사회적 문제에 부딪히게 되면 그들은 자신들에게 문제가 있거나, 그러한 문제에 부딪힌 타인을 개인의 노력이나 정신력 등 개인의 탓으로 돌려버리게 됩니다.


이러한 분위기가 만연해 있을 경우 우리가 흔히 말하는 '헬조센'이 되는 거죠. 문제가 있어도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구조적이고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 개인의 탓으로 귀결시키며, 가해자보다 피해자가 잘못한 게 되는 헬조센.



사회학적 상상력을 갖추기 위해선 깊게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한데, 바로 철학과 역사학이 그러한 지성을 갖출 수 있게 해줍니다. 이들은 배우는 자에게 논리와 지식을 주며 그러한 논리와 지식을 문제를 천천히 살펴보고 문제의 원인과 현상을 분리하여 볼 수 있게 해주며 더 나아가 해결책을 제시해줄 수도 있죠.


역사학은 과거의 사례와 사회 및 국가의 구조, 사회에 형성된 구조적인 틀을 볼 수 있게 해주며, 자신이 살아온 시대가 어떻게 발전해온 것인지 인지할 수 있게 해줍니다. 그러한 것들이 곧 사회학적 상상력을 이룹니다. 그렇게 얻어진 지성은 언어적으로 풀이할 수 있게 되는데, 어떠한 것을 알고 있거나 느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언어적으로 나타낼 수 없을 때 사람은 답답함을 느끼고, 그러한 답답함은 쉽게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억울할 땐 어째서 억울함을 느끼고 그것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하지만, 억울하지만 설명하기 어려우니 주먹부터 나가게 되는 거죠.  하지만 반드시 이러한 폭력으로 나타나는 건 아닙니다. 그 반대되는 현상이 발생하기도 하죠. 바로 '포기' 설명할 수 없으니 설명하지 않고 그저 그러한 문제를 묵묵히, 꿋꿋이 견디기만 하는 겁니다.





대한민국. 헬조센에서는 청년층에게 출혈과 희생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말도 안 되는 논리와, 매우 위험한 친자본-친기업의 사상을 기반으로 더 쉽게 해고할 수 있는 법안을 마련하는 등 국민을 노예로 만들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죠. 이게 절대 과장이 아닙니다.


청년들에게 어떠한 지원도 없고, 오히려 매출 300억 청년 기업을 문 닫게 하는 등[각주:1] 청년의 성공을 막고 무너뜨리고 있죠. 이런 상황에서도 대학생들, 청년들이 취업을 못하고 어렵고 힘든 것이 개인의 노력과 정신력 탓이라 일갈하고 있는 게 현 집권층, 기득권들의 현실입니다.


그들 자신의 책임을 없애기 위한 탈정치화이죠. 탈정치화란 사회계층간 불평등과 같은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사회 갈등을 분석하고 이해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정치적 원인을 배제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모든 문제는 개인의 탓으로 귀결되는데, 현재 대한민국에 만연해 있는 문제죠. 주로 중장년층과 기득권층이 그렇습니다.


진짜 문제는, 기득권층은 자신들의 이권 때문에 그러한 헛소리를 하는 거지만, 중장년층은 그러한 이익관계와 무관하게 그들의 선동에 세뇌당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자신은 물론 자기 자식들 쉽게 해고 당할 수 있는 법을 마련하겠다는 데 좋다고 찬성하는 건 걍 병신이죠.



대한민국의 청년들과 대학생들은 인문학적 자식과 그러한 지식을 바탕으로 하는 사회학적 상상력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의 인식은 발생했지만, 어째서 그러한 문제가 발생한 것인지도 모르고,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도 답하지 못하고 있죠.


단순히 문제를 인식한다는 것만으로 괜찮아지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오히려 그러한 문제의 인식이 힘들게 할 수도 있는데, 문제는 인식했으나 어떻게 할 수 없다는 사실로 하여금 되려 절망에 빠뜨릴 수도 있죠. 내가 저들에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고, 지금 상태에서 더 나아질 수도 없다는 것을 안다는 게 말입니다. 



그런 한 세대의 집단 절망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것이 바로 득도세대. 사토리 세대입니다. 절망한 사람에겐 욕심이 없죠. 도전하거나 무언가를 희생할 배짱도 없기 마련이고 그저 지금의 생활에 만족하며 나아지면 좋고, 적어도 더 나빠지지는 않기만을 원하는 세대가 된 겁니다.


일본과 한국의 사회적 격차는 10년이라고 하죠. 앞으로 약 10년내에 한국도 일본과 같은 꼴이 될 겁니다. 현재 한국의 청년층은 절망해가는 과정 속에 있으며, 청년 세대는 문제의 원인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인식해도 해결할 힘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절망하게 될 겁니다. 당장 인구부터가 중장년층이 더 많고, 통진당 해체, 재보궐 참패, 무능한 문재인과 민주당, 역시 무능한 안철수의 야권 갈라먹기 등 맞서 싸울 야권의 힘을 너무나도 약하며, 심지어 적지 않은 청년층도 일베 등의 영향으로 극우화가 되었습니다.


즉, 더욱 더 우편향, 극우화된 한국에서 노동자와 인권, 소수자는 설 곳을 잃게 될 것이고, 소시민적 삶을 유지하는 것만으로 다행스런 사회가 될 것입니다. 젊은이들의 고통은 더욱 커지고 그러한 고통에 절망하고 절망에 익숙해지며 발전없는 진짜 헬조센이 완성될 거라는 거죠.


그나마 일본은 국력이 있고 여력이 있지만 한국은 그런 일본에 비해 한참 모자랍니다. 적어도 일본에선 프리터 생활만으로도 먹고 사는 데 전혀 문제는 없으니까요. 하지만 한국에선? 직장인도 노예로 살아야죠. 돈도 적게 버는데 나가는 돈은 더 많아지기만 하니까.



정말로, 이러한 헬조센이 고쳐지려면 지금 당장 모든 세대가 민주적 소양을 갖추게 되거나, 아니면 적어도 40대나 50대 이상 국민들은 다 사라져야 할 겁니다. 50대부터 새누리당 몰표 현상이 발생하는데, 그들은 이미 정상적인 판단력을 갖추지 못한 유신노예나 다를 바 없는 상태이기 때문이죠. 그 윗세대는 새누리당과 같은 극우파에게 세뇌당한 세대입니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공정한 정치경쟁을 하려면 그런 반칙 세대는 없어야죠. 일명 콘크리트 지지. 뭐, 나라를 팔아먹어도 무조건 새누리당 1번 찍는다는 사람 많잖아요? 그게 정상으로 보입니까?

  1. '매출 3백억' 청년 기업, 법 하나에 문 닫았다 http://media.daum.net/economic/all/newsview?newsid=20160105203509188&RIGHT_COMM=R3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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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하지 않고 변하려고 하지 않는,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문제라 여기지 않거나, 해결의지가 없는 현재의 세태를 우리는 헬죠센이라고 부르지만, 기실 이러한 헬조센 문제는 극우, 수구세력이 득세한 비정상적인 정치환경을 가지게된 국가라면 어디가 됐든 같은 특성을 공유할 뿐입니다.


그것이 현재에 와서 똥재팬이나 헬죠센이라는 표현으로 비판, 조롱을 받을 뿐이죠.



한국을 헬죠센으로 만든 원인들은 너무나도 많지만, 먼저 문제에 대한 인식과 대응은 정상적인 국가와는 다른 프로세스로 진행됩니다.


일단 문제나 위기가 생기고 그것을 인지하게 되면 좋든 싫은 그 위기에 대해 대응하게 되는데, 한국 같은 사회에선 다음과 같은 모습을 보이죠.


1.다른 것에 관심을 돌리고 빠져들게 하여 문제나 위기 따위에 관심이 없도록 한다는 3S 정책.

2.문제를 인식하고 그에 대해 생각하는 것 자체를 부정적인 것으로 포장하는 탈이념, 탈정치 등의 개소리와 그러한 문제에 대한 저항, 사회운동에 대해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같은 헛소리 운운.

3.문제를 인식해도 그에 대해 행동하는 것을 부정적인 것으로 만드는 시위억제, 언론 및 집회, 결사의 자유 무력화.

4.끊임없이 현재의 기득권을 쥔 세력은 문제, 위기에 대해 잘 대응하고 있다는 거짓선동.



기득권 세력, 집권세력과 그 세력과 뜻을 같이하고 이권을 나눠먹는 이들이 이러한 헬죠센을 만드는 것에 일조하는 이들인데, 잘 생각해봅시다. 어째서 그들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그러한 해결을 방해하려는 것인가.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러한 문제가 자신들의 이권에 도움이 되고, 이익이 되기 때문이죠. 자신들의 이권에 도움이 되는 것들이기 때문에 그러한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은 그러한 문제를 통해 이익을 보는 자신들에게 손해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그러한 해결과 관련된 모든 것을 어떻게든 막으려 하는 거죠. 관심이 없도록, 문제해결에 대한 말도, 행동도 부정적인 것으로 틀어막는 것.


가령 경제인, 기업인에 대한 처벌을 생각해봅시다. 그들이 수 천억의 분식회계를 저질러도 고작 몇 년의 형을 선고 받고 그 중 몇 개월만 지나면 집행유예나 보석으로 풀려나서 그 자리 그대로 돌아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문제에 대한 지적에 대해 극우 정치권은 국가 경제를 들먹이며 이들이 있어야 나라 경제를 살릴 수 있다느니 하는 헛소리를 내뱉죠.


2015/09/22 - [취미/이야기] - 경제에 대한 태도로 보는 진짜 보수.


그러한 말을 하는 본인이나 본인들 세력이 그 경제인과 이권을 같이 하는 '인맥, 파벌의 일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문제에 대한 지적을 말도 안 되는 헛소리로 반박하고, 계속 지적하고 문제삼으면 빨갱이니 종북이니 하는 프레임을 씌우죠. 마치 범죄인과 그 형편없는 처벌에 대한 비판이 나라를 무너뜨릴 것처럼 여기면서 말입니다.


이에 대해 그 정치권에 선동과 세뇌를 당한 국민들은 그 의견을 같이하면서 나라를 분열시킵니다. 이는 분열이 맞아요. 문제가 있는 것에 대한 지적과 비판을 그 자체로 잘못된 것으로 여기게끔 하는 것이니 논의도 뭣도 아닌 분열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변하지도 않고 변하려 하지도 않는 헬죠센이 만들어지는 겁니다. 어떤 문제가 있는데 그것을 지적하거나 비판하는 것을 막으려 든다면, 그들이 그것을 통해 이득을 본다는 것이고, 그러한 이득을 보는 자들과 그러한 것을 해결할 수 있는 직접적인 권력을 가진 자들이 그 문제를 막으려 들지 않는다는 것은 서로 긴밀한 관계에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에게 책임을 물어야 할 일이죠. 하지만 국민들이 그것을 원하지 않으니 절대 변하지 않는 헬죠센이 탄생하는 거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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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민주주의는 사망했다는 것을 발표한 것과 다름없습니다.


정말 우스운 게, 해산 근거랍시고 내세운 것 중에 말이 안 되는 것도 한 둘이 아니고 아예 연좌제 수준으로 당과 개인의 활동을 묶는데, 그런 논리대로라면 마찬가지로 부정부패와 비리, 성폭력 범죄자들이 득시글한 새누리당은 조직폭력에 대한 특별법으로 처리 못할 건 또 뭡니까?


오늘은 통진당이지만, 내일은 종북주의나 NL과 전혀 상관없는 노동계급의 정치세력화와 복지, 삶의 질을 화두로 사회주의나 사민주의를 외치는 정당이 나온다면 그 때 그것들을 기득권의 깜냥대로 해산시켜버리려는 폭압을 이젠 누가 막아낼 수 있겠습니까. 이미 전례가 나왔는 데.


저도 통진당은 싫습니다만, 그들이 싫다면 그들을 지지하지 않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으며, 근본적으로 그들이 지지받는 이유는 그들의 정치적 성향과 종북으로 의심받을 수 있는 언행들과 무관하게 실제로 현실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고 탄압받는 노동자들에게 실제로 현장에 나가 직접적으로 도와주는 세력이 그들이기 때문에 그들의 언행에 논란이 많더라도 그들이 지지받은 것입니다.


다른 진보진영은 그런 당이 없는 거 같더군요.



통진당이 국가 안보에 위협이 된다면 당장 새누리당부터 해산시켜야 합니다. 지금까지 실제로 벌인 일과 모든 삽질을 보면 진짜로, 정말로 국가에 끼친 손해와 위협은 새누리당이 훨씬 위험합니다. 심지어 북한보다도요. 추정이나 의심과 달리 '실제로' 북한과 결탁하여 총풍사건을 일으켰으며, '실제로' 수 십, 수 백 조원 규모의 국고를 사대강과 자원외교 등으로 날린 것이 바로 새누리당입니다.


이에 비해 통진당은 뭘 했죠? 이석기 등의 종북 자위질 말고는 딱히 한 게 없어요. 그게 꼴보기 싫다고 없애버리자면 이땅에 남아 있을 정당이 어딨습니까?



무엇보다, 국민이 선출한 것보다 높은 권력이 있다는 게 우습기도 합니다.


자, 다음은 누굴까요? 노동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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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에게 기득권이 부패했느냐고 물어보면 많은 사람들이 그렇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부패한 기득권을 없애야 한다고 물어보면 역시나 그렇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정확히 누구를 지목하여 이런 이는 몰아내야 한다고 하면 의견이 갈리죠.


대부분의 민주주의 사회에서 사회가 앞으로 나아가지 않거나, 그러는 것이 전혀 쉬운 일이 아닌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나쁜 놈은 분명 존재하고, 분명히 몰아내야 한다는 것에는 모두가 동의하지만, 정확히 그것이 누구인가 지목하자면 의견이 갈리거든요. 


그러니까 진영논리식으로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진보좌파는 새누리당과 기업가들이 부패하여 몰아내야 할 이들이라고 한다면 반대로 보수우파는 새정연과 같은 야당과 노조조직들이 나라를 위협하여 몰아내야 할 이들이라고 말한다는 것이죠.


그리고 중요한 게 이겁니다. 분명 나쁜 놈은 있는 데, 그게 누구인지 의견이 갈린다는 것.


서로 올바르지 않은 것과 올바른 것에 대한 가치관이 전혀 다릅니다. 그 중에서 올바르지 않은 것을 올바르다고 보고, 올바른 것을 올바르지 않다고 보는 쪽이 힘과 주도권을 가질 경우 국가와 사회는 후퇴하고 국민 대부분의 삶이 어려워지고 위험해지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자신이 지지하고 있는 자들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하거나 고치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더 힘이 드니까 더 그런 놈들을 뽑아주고 지지하죠. 웃긴 세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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