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hrodinger

블로그 이미지
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며,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 - E.Kant
by Konn
  • Total hit
  • Today hit
  • Yesterday hit

'2024/01'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24.01.27
    어니스트 섀클턴 남극 탐험 광고 팩트체크
  2. 2024.01.26
    천사의 존재를 믿는다고 답변하게 되는 이유.
  3. 2024.01.03
    이재명 피습 사건, 왜 짐승은 보수인가. 3
반응형

 

 

흔히 위와 같이 알려진 이야기. 한국 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유명하지만.

 

 

[박재항의 反轉 커뮤니케이션] 썌클턴의 전설적 구인광고의 진실
https://www.madtimes.org/news/articleView.html?idxno=4204

'인간은 위대한 여행을 원한다'라는 첫 구절을 보고, 미안한데 웃음이 나왔다. 'Men Wanted'라고 '사람 구함', 곧 '구인'이라고 제목 써 붙인 것을 저렇게 철학적으로 옮겨 놓았다. 그리고 아래에 보니 '헌정된 신문광고'라고 했다. '헌정'이라면 섀클턴을 기리기 위하여 누가 광고를 집행했다는 것인데 이상하지 않은가. 번역된 책의 원저의 원문을 찾아보니 'attributed to Ernest Shackleton'이라고 되어 있다. 섀클턴에 의하여 집행되었다든지 만들어졌다고 'implemented by', ' run by', 'created by' 등의 동사를 쓰면 되었을 것 같은데 왜 굳이 'attributed to'라고 '결부된', '연관된' 식의 모호하게 해석될 수 있는 표현을 썼을까. 

(중략)


광고 자체를 언급한 사례를 찾아서 자료를 뒤진 결과는 놀랍다. 섀클턴이 죽고 거의 30년 가까이가 지난 1944년에 어느 자기계발서 같은 책에서 저 광고가 처음 공개적으로 언급이 되었다. 그를 근거로 1949년에 위대한 광고물 100선을 담았다는 책에서, 그 중의 하나로 저 광고를 선정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1985년 발간된 섀클턴의 전기에 저 광고가 다시 드러나면서 숱한 책들이나 글에 봇물 터지듯 인용이 되어 나타났다고 한다. 그러면 뭐 '헌정'이라고 한 게 'attributed to'를 잘못 번역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 말 자체로는 딱히 틀린 것은 아니라 할 수 있다. 그의 위대함을 기려서 '헌정'한 가짜 광고인 것 같으니까 말이다.

(중략)

"인생은 B와 D 사이의 C이다. 탄생(Birth)과 죽음(Death) 사이 선택(Choice)의 연속이다." (장 폴 사르트르)

"큰 배를 만들게 하고 싶다면 나무와 연장을 주고 배 만드는 법을 가르치기 전에 먼저 바다에 대한 동경을 심어줘라. 그러면 그 사람 스스로 배를 만드는 법을 찾아낼 것이다." (생텍쥐페리 <어린 왕자>중에서)

사르트르나 생텍쥐페리나 저런 말 한 적 없다. 생텍쥐페리 다른 작품에서 억지로 조금 비슷하지 않냐고 막무가내 우길 수 있는 부분은 있지만, <어린 왕자>에는 그럴 만한 구절도 없다.

 

 

사후 30년 쯤 지난 뒤 누군가 헌정하는 글이 사실인 것처럼 알려진 것.

반응형
AND
반응형

하나의 사회가 형성되면 기준적 윤리 역시 형성된다. 그렇지 않으면 집단을 유지시킬 일정한 규칙이 마련되지 않기 때문이며, 규칙이 마련되지 않은 집단이란 언제든 해체될 수 있는, 혹은 애초에 집단 자체가 환상에 불과한 현상이 된다. 이러한 기준은 반드시 윤리일 필요가 없다. 그저 일정한 규칙이 존재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그러한 기준은 대개 윤리적 기준으로 형성되고, 그것을 요구하게 된다. 2023년 조사 기준, 천사가 실제로 있다고 믿는 성인의 수가 가장 많은 나라는 10명 중 7명으로 미국이다. 이는 미국인들이 그만큼 무식하거나 종교적이라는 의미도 되겠지만, 후자에 조금 더 집중할 경우 그것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미국인들의 신앙심이 투철하다는 것이라기보다는 그것이 자신의 생각을 통제하는 자기검열의 수단으로서 작동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봐야 한다.

기실 윤리적 기준은 스스로를 검열하게끔 하는 도덕적 지침이 되지만 도덕과 윤리는 같은 이름과 믿음으로 비도덕적이고 비윤리적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신앙에는 방향이 없이 깊이와 밀도만 존재하기 때문에 신앙심이 깊다는 것이 그 사람이 선하다는 의미 역시 아니다.

그런 관점을 수용한 후에 진행하건데, 미국인들에게 종교는 삶과 삶의 방식에 있어 아주 밀접한 것이고 종교적 믿음이 윤리에 작용하는 바는 아주 강력하다는 것이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종교적 신앙은 미국인들을 아주 강하게 검열하고 있으며, 그것은 본질적인 것이라기보다 피상적으로 요구된다. 즉, 자기 희생이나 약자에 대한 실천적 보호, 지원보다는 누군가 천사를 믿느냐는 비현실적인 것의 존재를 묻는 질문에 그렇다라고 말해야 하는 방식이다.

미국인들이 실제로 천사를 믿느냐 아니냐, 혹은 그것이 진짜로 있느냐 아니냐와 같은 것은 중요한 게 아니다. 그들이 그렇게 말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자신의 신앙심을 지키는 행위이기도 할 뿐더러, 그렇게 요구 받는 윤리적 기준의 존재 때문이다. 그들이 천사의 존재를 믿느냐는 질문에 아니다. 라고 답한다면 그들은 스스로를 규율하는 윤리적 기준에 위반하는 행동을 하는 것으로, 양심에 어긋나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일반적이거나 보편적인, 혹은 과반에 가까운 기준으로 작동하는 사회의 경우, 이것은 하나의 사회적 요구처럼 동작한다.

이것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소아성애와 결부시켜 생각해보자. 어떤 사람이 실제로 어떤 성향을 가지고 있든, 사실이든 그렇지 않든 소아성애적 표현을 하거나 그것을 드러낼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지금 기준으로 소아성애는 끔찍한 범죄가 되고 그 어떤 사회에서도, 특히 서구 사회에서는 가장 끔찍하고 비인간적인 범죄로 인정 받고 멸시, 차별, 배척 받는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소아성애에 속하는 행위나 가치관은 그리 드문 것이 아니었고, 10대 초중반의 아이들에 대한 성애, 결혼, 약혼, 성교나 성적 요구는 꽤 흔한 것이었으며, 그것은 그 시대의 사회적, 관습적, 문화적 사유로 인해 요구되는 형식이었다. 물론 지나치게 어린 아이에 대한 나이 차이가 나는 성인의 그것은 그 시대 기준으로도 지탄 받은 행위 였음은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물론 윤리적 기준은 시대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 중 하나이고 소아성애를 긍정하자는 말은 아니다. 다만 실제로 어떻게 생각하든, 심지어 별 의견조차 없든 그렇게 요구 받는 윤리적 기준, 도덕적 잣대가 존재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증명을 요구받을 때 일정한 답변이 정형화되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즉, 이렇게 말하지 않으면(자신의 신앙을 증명하지 않으면/자신의 혐오나 증오를 증명하지 않으면) 그 자체로 의심 내지는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것을 피해야만 하는 사회적 요구가 되는 것이다. 신을 믿고 신앙을 가진 자신은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천사를 믿느냐는 질문에 그렇다라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되고, 소아성애에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든, 심지어 그 본인이 소아성애자라 하더라도 그에 대한 증오나 혐오를 보여줘야만 한다.

서구의 범죄자나 갱, 혹은 그와 유사한 폭력 집단이 자신들의 소아성애에 대한 혐오와 증오를 증명하기 위해 소아성애자(혹은 동성애자)를 공격하여 폭행하거나 살해하는 것은 그러한 요구의 극단적 표현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스스로 그러한 것에 강렬한 적대감을 증명하기 위해 굳이 그러한 행위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행위는 심지어 범죄적인 것이라 하여도 사회적 윤리 기준에 편승하여 정의로운 것으로 여겨지거나 그에 준하는 행동으로 평가 받는다.

한국 사회에서도 그러한 기준이 있다. 반공이 국시이던 시절에 좌파적 사상에 대해서는 공공연하게 혐오와 증오, 적대감을 강렬하게 표현할 수록 그것은 바람직하고 정의로운 것처럼 평가 받는다. 심지어 그것이 당연히 실현 불가능한 말 뿐인 것이라 하여도 도리어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훌륭한 것이 된다. 가령 북괴 빨갱이에 대한 무제한적 살상과 학살을 통해 지구상에서 북괴 빨갱이를 절멸 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강력하고 폭력적 어조로 웅변한다면 모든 경우에 그렇지만은 않겠지만 어떠한 경우, 꽤 많은 경우 바람직하고 훌륭하며 애국적인 것이 될 것이다.

그것은 사회적 윤리/도덕적 기준이 그렇게 평가하도록 한 사회에 영향을 받는 모든 이에게 요구한다. 이러한 사회적 요구는 거대한 흐름으로서 존재하기에 개인의 사상이나 지성, 양심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모든 개인은 사회 속에서 진영논리에 종속될 수밖에 없고 영향을 받는다. 설령 본인은 어떠한 진영에 속하지 않는 팩트만 본인의 양심과 지성에 따라 공정하고 정확하게 말한다 해도, 그러한 언어는 특정 진영, 집단에 유익하게 될 수밖에 없다.

북한 문제에 관해 진보, 보수, 좌파, 우파적 기준에서 완전히 탈피된 새로운 의견이 나올 수 있을까? 불가능할 것이다. 반공이 국시인 시절에서 벗어났지만 아직도 한국 사회는 여전히 반공적 가치관을 정의롭고 바람직한 것으로 인정하는 사람들이 많고, 적어도 인구 절반에 가깝게 그러하기에 이를 보편적이라고 할 수 있거나, 최소 그에 준한다고 말해도 이상할 게 전혀 없다. 그리고 그들은 그 반대 절반에게 자신들의 윤리 기준을 요구한다.

북한에 대한 강렬한 적대감을 언어와 행동으로 증명하라고, 그러나 결코 북한에 대한 직접적 적대 행위, 공격 행위로 증명하지는 말하는 것이다. 소아성애를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자들이 직접적인 살해를 저지르는 경우는 극히 적은 것처럼, 그러한 범죄적 행위를 행하는 자들은 한국 내에서도 매우 특정할 수 있는 소수에 불과한 것과 같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에게 향해질 비난과 의심을 피하기 위해 그러한 상황이나 요구에 검증적 반응을 요구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바람직한 것일까? 자유주의적 관점 내에서 이러한 사회적 요구가 특정 답변, 태도의 강요로 작동하는 것은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모든 개인은 자신의 지성과 양심에 따라 자유롭게 생각하고 행동하며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며, 본인의 판단에 따라 결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사회 내에서 일정한 윤리적 기준이 형성되는 것은 아주 흔한 일이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자연스러운 일을 비윤리적이라 비난하는 것은 자연스럽지 못한 일이다.

소아성애에 관한 개인의 생각이나 관점이 어떠하든 그것은 자유로운 지성의 결과이겠지만 모든 개인은 오롯이 독립적일 수 없고 사회라는 집단의 흐름에 영향을 받는다. 어떠한 윤리, 도덕적 기준은 그 근간 논리와 사례가 존재해야 구성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생각이나 관점은 진실로 자유로운 사유의 결과일 수 없고, 설령 그러하다 치더라도 개인은 사회 속에 존재하는 객체이기 때문에 사회적 요구에 순응해야 한다는 판단을 내리는 것도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이는 자유가 합리성과 유리될 수 없으며, 외부적 조건에 배율적일 수도 없음을 이유로 한다.

사회도 국가도 타인도 없는 자연 속에서 어떠한 윤리적, 도덕적 요구도 받지 않는 자가 눈앞의 포식자를 두고도 자유로운 사고의 결과 그것을 피하지 않겠다는 판단을 내리는 것은 지적 능력을 자유롭게 활용한 것이겠지만 그 결과는 피식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한 사회 내에 존재하는 사람은 자유롭게 사고할 수 있으나 그 결과에 대해 공개적으로 표현할 경우 그에 대한 대가, 혹은 책임이라는 이유로 타인의 평가를 피할 수 없다.

이것은 자유에 따라야할 것이 책임이기 때문이며 나의 자유를 타인이 인정하는 것과 그 자유에 대한 결과로 따라오는 책임을 받아들이는 것은 서로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대저 자유를 근거로 특정한 표현에 대해 일반의 비난과 비판을 받는 경우 그 자유로운 표현의 결과 따라오는 책임을 자유와 혼동하는 경우가 존재한다.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지만 그에 책임이 부여되는 것은 응당한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그러한 책임을 부여 받는 것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본심이나 판단을 공개적으로 표현하지 않는 것은 흔한 일이면서도, 그 요구가 비이성적이거나 극단적일 수 있다. 사회의 보편적 윤리 기준은 그 사회 구성원의 윤리 기준의 평균에 기인한다.

그러나 특정한 가치에 있어서 유독 극단적인 요구가 이루어지는 경우와 합리적이지 않은, 때때로 감정적이거나 비합리적일 수 있음에도 그것이 도덕적인 기준을 충족하는 경우는 구분되어야 할 것이다. 전자의 경우 내국인에게 좌파적이거나 온건한 형식에 사상검증을 요구하며 그 기준을 충족시키기 못할 경우 비난하는 것이 그럴 것이고, 후자의 경우 적에게서 국가와 민족 등 사회 구성원을 지키기 위한 투쟁이나 행위, 사상을 비난하거나 폄하할 때가 그러하다.

특히 후자가 역사적 문제로 분노할 이유는 충분하나 현실적 필요로 그들과 무조건적으로 적대하거나 책임을 요구하지 못하는 경우가 그러할 것인데, 그러나 인간/집단의 감정 문제 역시 합리적으로 다뤄야할 문제인 고로, 합리적이지 못하거나 비이성적인 것 그 자체가 반드시 틀림의 영역에 속한다고 하는 것은 특정한 목적성을 가진 교조적인 태도일 것이다. 합리성을 어떠한 주장이나 가치에 합치시키기 위한 도구적 활용으로 말이다.

현실에서 찾아볼 수 있는 다양한 구체적 사례에 관해 어떤 것이 옳고 그르고, 그것이 어째서 그렇게 구분되어지는가에 대해서는 이 글에서 굳이 다루지 않겠다. 그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고 개별적으로 많은 근거와 논리, 사례를 열거하며 비교해야 하는 일이 될 것이기에 지리한 일이기도 할 것이기 때문이다.

반응형
AND
반응형
“이재명 피습 당했다“에 환호 나온 與 대전 신년인사회..한동훈도 당혹
https://amn.kr/46441

 

 

이재명 피습 사건 이후, 언론과 대중들의 반응은 아주 흥미로운, 한편으로는 역겹기 그지 없는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보수엔 사람이 없고, 야만적인 짐승 뿐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했습니다. 그러면서 사람의 탈을 쓰고 있으니 보수는 인두겁을 쓴 자들밖에 없다는 거죠.

 

이재명이 피습을 당했을 때, 보수 진영의 반응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1.만세를 외치고 잘 됐다며 환호한다.

2.즉각적으로 음모론과 가짜 뉴스를 유포한다.

 

이런 반응이 참으로 보수다우면서도 비인간적인데, 언제나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에 있어서 정치적 기준을 두고 인의와 도덕, 윤리를 확실하게 내다 버린 태도를 보여주는 게 바로 보수 진영입니다.

 

사람이 목에 칼이 찔렸는데 거기에 대고 만세를 부른다는 건 그 사람이 죽기를 바란다는 거고, 잘 죽었다고 말하는 겁니다. 한 나라의 야당 대표인데 죽기를 바란다는 것부터가 민주주의적인 시민의 태도가 아니측은지심이 없는 인간으로서의 함량에 미달되는 것입니다.

 

심지어 현장의 한동훈을 비롯한 인물들도 당황스럽게 여겼죠. 정치적으로 당연히 좋게 보이지 않는다는 건 최소한의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알 것이고, 그걸 떠나 그런 반응 자체가 상식을 갖춘 주변인의 시선을 생각한다면 함부로 할 수 없는 행동입니다. 사회성이라는 게 괜히 있는 게 아니거든요.

 

이건 정치 테러이고 극우의 백색테러입니다. 민주주의에서 가장 핵심적인 진보적 측면은 정치적 패배가 실존하는 개인, 혹은 가계, 집단의 목숨을 앗아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군부 독재나 특히 공산주의 독재, 왕정이나 과두정 같은 체제에서 정치적 패배로 인해 집단의 수장이나 구성원이 실제로 숙청 되는 경우는 흔합니다. 당장 북한이나 중국만 봐도 심심찮게 발생하는 일이죠.

 

민주주의에서 정치적 패배는 그저 정치적으로 패배한 것이고 그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지 않습니다. 민주정에서 정치란 의사결정을 위한 고도화된 최상위 행위이고 무언가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란 의사 결정으로 누군가의 생사를 가를만한 일이 아닙니다. 즉, 민주주의에서 정치란 독재 등에서의 정치와 같이 생존이 걸린 게 아닙니다. 설령 다신 정치를 하지 못하더라도 그 사람의 생명과는 아무런 관계 없이 먹고 살 수 있죠.

 

그런데 이러한 백색테러는 그러한 민주주의의 원리를 정면으로 위반합니다. 이러한 테러가 허용된다면 정치란 야만적인 시절의 죽고 사는 문제가 되어 내가 살기 위해 적을 죽여야 하고, 적을 죽임으로서 본인과 진영의 이익과 생존을 도모하는 과정이 됩니다. 당연히 국민 일반의 행복이나 효용과 아무런 관계 없는 권력다툼으로 변질이 됩니다.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은 구분되는 게 아니게 될 것이고요.

 

이번 테러는 명백히 극우주의자의 의도적인 살인 미수이고, 민주 정치에 대한 테러입니다. 야당 대표는 국가 의전 서열 8위로, 부총리급 대우를 받습니다. 즉, 국가의 최상위 인물 중 하나인 것이고, 개개인이 입법 기관인 국회의원의 대표라는 점에서 더더욱 위협적인 시도입니다. 안보를 위협하는 행위라는 점에서 더더욱 반국가적이고 비애국적 행위입니다. 저런 건 박정희에 총질하던 빨갱이나 할 법한 시도라는 거죠.

 

그런 사건에 만세를 외친다는 것은 그들 자신이 민주주의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고, 민주주의를 유지하고 지속해나가야 한다는 믿음 자체가 없다는 겁니다. 반대로 진보 진영에서 보수 진영의 대통령이나 여당 대표, 보수 진영의 장관이나 국무총리를 암살하는 테러가 빈번히 일어난다면 그것은 민주주의를 위한 것이고 국가와 안보를 위한 것일까요? 당연히 아니죠. 보수 진영은 그런 일이 벌어지면 당장 계엄령 내리고 관련자들과 진보, 좌파 진영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해야 한다고 부르짖을 겁니다. 평소에도 그런 이들이 있을 정도니까요.

 

 

테러에 사용된 칼. 실제 찌르는 영상은 올리지 않겠음.

 

 

두번째는 더더욱 정치적인 행동인데, 사건 이후 즉각적으로 가짜뉴스와 음모론을 유포하고 있습니다.

 

이게 처음부터 즉각적인 지령이 있었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소식이 당도하자마자 쇼입이다! 쇼! 라고 짖어대는 것만 봐도 정치병 환자들이 많고 거기에 진심으로, 혹은 의도적으로 호응하는 정치병, 혹은 정신병자들이 많은 것이 보수 진영입니다. 이러한 거대한 사건에서 그런 패턴은 보수 진영에서 흔하게 볼 수 있었죠.

 

그들은 유튜브 등지에서 즉각적으로 가짜 뉴스를 만들기 시작했는데, 이는 진영에 피해가 오기 전에 즉각적으로, 비판이 돌아오기 전에 선제적으로 대응하는 자발적인 행위라고 보고 있습니다. 다만 그 이후 어떠한 지침이 내려지거나 공유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고 봅니다. 이러한 주장이 음모론이라고 비판할 수는 있겠지만, 보수 진영에서 지령, 지침이 공유되는 경우가 있었으니까 하는 소립니다. 당장 국정원부터가 그러했던 주범이었고요.

 

이재명 대표 피습 음모론 살포하는 수구 유튜버들
처음부터 '자작극' 단정 후 이 대표 주변 상황 끼워맞춘 음모론
https://www.goodmorningcc.com/news/articleView.html?idxno=302330
이재명 서울 이송은 가족 요청… 부산대병원 “유감 표명은 사실무근”
https://n.news.naver.com/article/658/0000062260?lfrom=twitter
"이재명 피습 쇼" 돌출발언…온라인선 "자작극" 황당 주장도
https://news.jtbc.co.kr/article/article.aspx?news_id=NB12158864

 

 

보수 진영은 언제나 팩트와 진실이 중요한 진영이 아니었습니다. 유리하다면 거짓이라도 사실로 믿고, 불리하다면 모든 것을 거짓으로 만들고 유리한 가짜 뉴스를 만들어서 선동하며 음모론을 만들고 핵심에서 벗어나 물을 흐립니다. 지금 당장 떠도는 음모론부터가 나무젓가락이었다, 손가락으로 찔렀다, 종이로 찔렀다, 기절한 척을 했다, 부산대병원 거부하고 서울대변원으로 갔다, 그래서 부산대병원이 유감을 표명했다 등등 음모론을 만들어 유포하고 있으며, 야당 대표가 응급 의료를 위해 헬기를 타는 걸 특혜라고 욕하는 것까지 다양합니다.

 

정상적인 판단력과 상식적인 지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멍청한 소리는 하지 않죠. 실제 영상이 있고 병원과 경찰, 당의 발표가 있었는데 이걸 다 가짜, 조작이라고 의심할 거라면 이미 이재명은 대통령이 되어 있어야지 야당 대표를 하지 않습니다. 병원 측과도 논의한 결과로 서울로 올라간 것이고, 서울에서 활동하는 사람이 가족과 주변 지인 다 있는 서울로 가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며, 이를 문제삼는 것은 사태의 핵심을 벗어난 물타기 선동입니다. 사람이 다쳤는데 왜 저런 비판을 가하겠습니까? 생각해보면 이상한 비판이죠. 그러면서 유감 표명을 했다는 가짜뉴스를 만들어 명분을 조작하기까지 하죠.

 

음모론은 정신병이고 현재 이재명 관련 음모론을 구분하지 못하거나 주워 삼키는 이들은 속은 게 아니라 그냥 머리가 나쁜 겁니다.

 

이러한 활동은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행해지는 스피커 싸움이고, 진실과 팩트는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저 정치 진영에 돌아올 비판과 손실을 최소화하는 정치적 행위이며 공정하거나 정의로운 행동인 것도 아닙니다. 도리어 사악한 행동이죠. 박근혜 커터칼 사건에 대해 음모론을 주장하던 이들을 비판할 거라면 이것도 문제가 되는 거라 인정해야 합니다.

 

[단독]이웃들 "이재명 습격범, 법 없이도 살 분…깜짝 놀라"
https://v.daum.net/v/20240102185030694
"이재명 죽이려고"…충남서 부산까지 온 60대男, '민주당원'?(종합)  <- 현재 기사 제목에서 '민주당원?' 부분 삭제됨.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8/0004981104?sid=102

 

 

이재명 피습범에 관해 가장 먼저 올라온 것 중 하나입니다. 왜 직후부터 좋은 소리를 해주는 말들을 담아서 서사화하여 기사화 했는지도 의심스러울 수 있지만 그러한 추정은 일단 넘어가고, 곧바로 민주당원이라는 기사들이 올라왔습니다. 일단 제대로 조사를 했는지도 모를 일이지만, 범인이 위장 잠입한 건 사실이니 표면적인 것만 바로 기사화 했다고 참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기사로 보수들은  신이 나서 민주당을 공격했고요. 하지만 당연히, 곧바로 진실이 따라왔습니다.

[단독] 이재명 습격범 ‘태극기집회’ 조카 증언…“유튜브 계속 봐”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28/0002671216?sid=100
“맨날 컴퓨터 앞에 혼자 앉아 있어
4~5년 전 태극기집회…보수였다”
국힘 "4년전 탈당한 동명인물 있을 뿐"…피의자 당적 논란 '유감'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421/0007269022?sid=100
2024.01.03. 오후 12:53
이재명 피습, 60대 오랫동안 국힘 당적 보유…국힘은 ‘침묵’
https://v.daum.net/v/20240103140152126
2024. 1. 3. 14:01
[단독] “이재명 싫어 범행”…피의자, 습격 전 민주당 입당해 일정 파악한 듯
https://n.news.naver.com/article/021/0002614014

 

 

국힘당은 언제나처럼 발뺌하며 유감을 표했지만 약 1시간 뒤 당적 보유가 분명하게 확인되자 침묵을 했습니다.

 

즉, 국힘당 소속, 혹은 출신 극우보수에 의한 야당 대표 살인미수 테러 행위가 사실이라는 것이죠. 대한민국에서 3차례 이상 헌법을 파괴하고 독재를 했으며, 쿠데타를 2번 이상 시도 했으며 불법적으로 가장 많은 한국인을 죽인 국내 정치 진영의 전통에 따라 또 한번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정치인에 대한 살인 의도를 가진 테러를 저지르는 게 바로 보수 진영입니다.

 

그리고 보수 진영은 그러한 사건에 대해 비판이 아니라 음모론과 발뺌, 가짜 뉴스 유포로 극단적인 정치 행위를 전방위적으로 가하고 있는 상황이고요.

 

 

정상적인, 사회 일반이 요구하는 도덕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번 사건에 대해 좋아할 수 없고, 만세를 외칠 수도 없습니다. 기분이 좋을 수도 없고요. 정상적인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를 최소한이나마 가지고 있고, 우리의 자유민주주의를 긍정하는 시민이라면 민주주의에 대한 심대한 테러에 대해 정치적 피해를 막기 위한, 가짜뉴스와 음모론 살포, 선동과 조작을 가하는 정치적 행위를 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나 보수 진영은 그러고 있습니다. 정치적 관점을 떠나서 사람이 할 행동이 아닙니다. 사람이 다쳤는데 기분이 좋은가, 환호할 수 있는가와 별개로 그것을 공개적으로 표현한다는 점에서 사람이 할 행동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 행동은 사회성을 학습하지 못하고 타인을 이해하거나 공감할 능력이 없는 짐승들이나 하는 것이고 사람의 꼴을 하면서 짐승의 태를 하니 인두겁을 뒤집어 썼다고 하는 겁니다.

 

박근혜 테러 사건 때도, 박원순 폭행 사건 때도, 마크 리퍼트 테러 사건 때도 그렇고 정치인에 대한 테러를 자행하는 자들은 하나 같이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사람이거나 극단주의적 위험분자거나 인생 말아먹은 밑바닥 병신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행위는 그러한 비정상성에서 기인한만큼, 그들의 행위에 동조하거나 찬양, 환호하는 것은 행위자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사상 내지는 비정상성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에 가깝습니다.

 

즉, 정신병자의 행위에 동조하는 건 정신병자나 한다는 소리입니다.

 

유독, 이상할 정도로 보수 진영에서만 이러한 행위들이 광범위하고 보편적으로 관찰됩니다. 유독 보수 진영에서만 이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짐승들이나 보수가 되는 것이고, 보수인 사람들이 야만적인 짐승 수준이라는 겁니다. 물론 아닌 사람들도 있겠죠.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많으니 현 보수 진영의 수준이 이토록 낮아진 겁니다.

 

유독 보수만 이렇습니다. 그들은 이 나라 민주주의의 구체적인 위협입니다.

반응형
AND

ARTICLE CATEGORY

분류 전체보기 (858)
취미 (858)
백업 (0)

RECENT ARTICLE

RECENT COMMENT

CALENDAR

«   2024/01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