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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며,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 - E.Kant
by Ko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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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23.10.29
    False Patriot 틀린 애국심.
  2. 2023.10.11
    하마스는 왜 괴물이 되었는가?
  3. 2023.10.08
    바바리안 퀘스트 리뷰
  4. 2023.10.01
    한국 사형 집행 시 한-EU FTA 파기 팩트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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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심은 사악한 자의 미덕이다.

- 오스카 와일드

False Patriot 틀린 애국심.

애국자는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긍정적인 미덕으로 여겨지며 공통된 지향점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애국에 대한 비판과 금언들이 그것을 경계하는 것은 그것을 내세우는 것이 실질적 긍정성에 도움이 되느냐와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가령, 입으로 애국을 말하는 자가 단기적으로, 그 이상으로 장기적인 관점에서 사회적 신뢰를 깎고 제도적 불공정과 경제적 불평등에 조력을 가하며, 정치적 경쟁을 자극하고 자의적인 기준에 따라 애국자와 비애국자를 가르며 비애국자로 구분된 자에 대한 공격성을 보인다. 그러한 행위는 공동체가 지켜야 할 공통된 도덕과 유리된 경우가 많으며 애국의 기준이 자신이 믿고 지지하는 정치적/사회적/경제적, 총체적으로 국가적 이념에 부합하지 않았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즉, 애국자는 적을 찾으며 자신의 애국심을 증명하려 한다.

그것은 자신의 국가를 이롭게 하기 위한 공통된 선행, 봉사, 발전이 아닌 자신이 구분 지은 적에 대한 배격, 차별, 증오, 혐오, 공격 등 배타적 성질의 행위로 나타난다. 그러한 활동에서 성취감과 충만함, 그만큼의 위기감을 느끼며 자신의 애국심을 강화한다. 

만약 그 적이 진짜 적이라면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구체적인 구분을 어떻게 할 것인가? 미래에 대한 평가와 판단은 관점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누군가 그것을 옳은 것, 해야 하는 것, 국가가 나아갈 길이라고 생각할 지라도, 누군가는 그것을 국가적 손실, 체제에 대한 위협, 안보의 파괴, 경제적 불평등 심화, 매국적 외교 등으로 상이하게 판단할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우리가 역사적 사건에 관해 판단할 때 일반적으로 해석되는 경향이 있고 어떤 것은 그러한 해석이 옳은 해석이 되는 것처럼, 현재 이루어지는 정치적 향방에 대한 해석은 사람마다 다를지언정, 역사적 관점에서 그것은 하나의 주류 해석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다.


다시 말해, 지금 우리는 확언 할 수 없다고 해도, 미래의 후손들은 현 정치적 상황에 있어 누가 애국을 했는지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가령 나치 시대 대부분의 대중들은 스스로를 애국자라 여겼겠지만 현재에 와서 나치에 반대하고 자유와 인권을 위해 투쟁한 이들에게나 애국자라는 평가를 붙힐 수 있을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모든 가치의 최상위에는 인권과 도덕이 존재한다.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행위는 애국적일 수 없다. 모든 공동체는 집단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 존재하고, 그것을 이룩하지 못한다면 존재 가치가 없다. 헌법에서 스스로 규정하는 국가 최고 규범적 가치를 실행에 옮기지 못하는 행정부와 정권은 집권 자격에 흠결이 존재할 수밖에 없고 인권과 그것을 기반으로 하는, 혹은 인권의 기반이 되는 범도덕적 원리에 단호히 반대하는 세력은 전체 집단의 생존과 번영이 아닌 특정 집단의 생존과 번영만을 추구하는 위험성을 내포한다.

문제는 그것이 민주주의적 원리, 혹은 자본적 우위, 무력의 독점을 통해 사회적 질서를 형성하는 경우를 생각해볼 수 있다. 자본주의에서 윤리란 자본의 축적을 의미하고, 독재에서 윤리란 독재자, 혹은 독재 정당의 절대 권력을 지키는 것이다. 이것이 말하는 윤리와 도덕은 우리가 인권을 기반으로 하여 인식하는 규범과 큰 차이가 있다. 그것은 타인, 혹은 대중, 국민, 시민이라 불려지는 자들의 권리를 인정치 않고, 그들 삶의 풍요와 행복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즉, 인권을 존중하지 않는 가치 체계이다.

인권을 존중해야 하는 이유는 당연하다. 그것이 다수의 행복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인간의 집단에서 행복은 매우 중요한 가치이며, 한 개인이 생명으로서 살아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절대 다수가 불행한 사회가 장기적으로 생존 가능하며 항구적 발전과 평화를 이행할 수는 없는 법이다. 불행과 불만은 충돌과 갈등을 빚고, 시간에 따라 증대하는 사회 비용의 엔트로피는 그 사회의 여력과 자산을 갈등과 분쟁의 해결에 투입하게 될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그 사회는 스스로 붕괴한다. 즉, 집단의 구조적 모순이 집단의 생존 가능성을 스스로 불능 상태로 만든다는 것이다.


물론 인권을 존중하지 않는다면 모든 집단이 붕괴하는 것은 아니다. 역사상 수많은 왕조와 국가들은 구조적 이유만으로 붕괴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역사상 대부분의, 혹은 적지 않은 집단은 내부 구조적 모순을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에 멸망하거나, 그 원인이 된 경우는 무수히 많다.

또한 인권에 대한 보장이 어느 수준이냐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민중 대다수가 비참하게 살아간다 하더라도 국가는 존립할 수 있다. 그들이 생존이 가능한 상태이기에 생존에 몰두하며 협력과 연대보다 상호 경쟁하는 것에 몰두하는 상태, 혹은 아예 생존만을 위해 남은 여력을 모두 투입해야 하기 때문에 그 이상을 추구하는 것이 불가능한 빈사의 상태. 전근대의 경우, 민주와 국민주권을 상상할 수 없는 체계 속 개인.

이러한 상태에서 첫번째의 경우 일정 정도의 권리는 보장이 되지만, 구조적 모순을 사회적 규칙으로 받아들이길 요구하고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인 이들에 의해 유지되는 경향이 크다. 극소수의 기득권이 어떠한 이유로든 막대한 특권과 자본을 독점하며 그것을 제도적으로, 사회적으로 인정 받아야 한다 믿는 경우 그러한 기득권에 도달하고 싶거나, 그들에 의해 사회의 안정과 발전이 이루어진다 믿는 그렇지 못하는 자들에 의해서 구조적 모순은 해소될 수 없다. 아니, 애초에 인식되거나 인정받지도 못한다.

지구상 대부분의 국가를 구성하는 민주주의 체계는 근본적으로 국민주권을 인정해야 하고, 그러한 국민주권은 본질적으로 인권을 보장하기 위함이다. 국민 스스로가 결정하고 책임지는 것으로 인해 소수의 집권 기득권에 의해 다수가 피해를 입는 상황을 방지하고 다수의 의견과 주장을 모아 더 나은 결론을 낼 수 있는 토론의 장을 만들기 위해서이다. 결정권자는 스스로 생각하여 선택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애국자라고 하는 이들은 자신이 믿는 어떠한 가치를 위해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고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것이 민주주의의 원리와 체계를 위협하는 것이 아님에도 그들에게 다양한 낙인을 찍고 국가의 적으로 규정한다. 그들의 적은 외부에 있지 아니하고 언제나 내부에 존재하며, 외부의 적과 싸우는 것보다, 외부의 적에게 비난하되, 싸우는 건 내부의 동조자를 향한다. 그들이 상상하는 국가에는 모종의 순수성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해치는 것에 병리적인 면역 반응을 일으켜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알러지 반응이지 병원균 반응이 아니다.

물론 내부의 적과 싸워야 할 것이다. 국가 정체성을 거부하고 외부 정체성을 받아들인 채 그것을 주류로 만들고자 하는 이들, 직간접적으로 잠재적 적국이나 경쟁국에 이익을 가져다주는 자, 국가의 원리와 규범을 형해화하고 파괴하려는 자들.

말은 언제나 옳다. 어떻게 규정하고 인식하는가의 문제에 있어 평범한 국민은 국가의 적으로 규정되어 사냥을 당할 때도 있고, 사회 개혁을 위해 노력하거나, 소수자의 권리를 요구하는 것이 국가의 적으로 공격 당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다시 돌아와서, 누군가의 애국이 누군가의 비애국이 될 수 있는가? 그렇게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스스로 애국을 한다 믿는 자들도 순수한 활동이 오판에 따른 비애국적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러한 가치판단의 문제에 있어 모든 이들의 행동이 결과적으로 애국심에서 출발한 것이라 할 수 있을까? 정녕 비애국적 행동은 없는가? 끝 없는 충돌과 논쟁을 발생시키며, 서로가 서로를 공화국의 적성 행위라 규정 짓기도 하는, 진보의 애국도, 보수의 애국도 모두 똑같은 애국일까?

나는 과감히 그렇지 않다고 말할 것이다. 나치 시대의 애국이 진정 애국이 아니었고, PATRIOT Act가 글자 그대로 애국적이지 않으며, 노동자의 안전과 권익을 위해 투쟁하는 것이 적성 행위가 될 수 없고, 노인에게 더 윤택한 삶과 청소년, 어린이에게 더 안전하고 부당치 않은 경험을 하게 해주는 것이 비애국적이라 할 수 없다. 사회적 안전망을 구성하여 취약한 이들이 한번의 실패만으로 그들의 삶이 복구 불가능한 상태로 남는 것을 방지하는 게 비애국적일 수 없다. 부정부패와 비윤리적 차별을 정당하게 처벌하고 방지하자는 것이 나라를 위한 일이 아닐 수는 없다.

그것이 국가 최고 규범이 규정한 인권을 지키는 행위이고, 민주국가의 주권자를 보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국민이 주권을 가졌다면 당연히 국민 한 사람 한 사람보다 다른 누군가가 더 우월할 수는 없다. 민주주의 사회에선 역할이 존재할 뿐 계급적 우열이 존재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단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것을 넘어 기회의 균등과 정당한 권리를 보장하고, 법적, 제도적 정의를 지켜 사회의 혼란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 역시 국민을 지키고 그들의 행복을 보장할 수 있는 것이다.

필요에 의해 자연스럽게 형성된 모든 집단은 목표를 가진다. 적과 싸우고 구성원을 지키기 위해 형성된 것이 전사 집단/군대이듯이, 국가란 모든 사람들이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되어야 하지 특정할 수 있는 소수 특권 계급을 위해 존재할 수 없고, 존재해서도 안 된다. 최소한 우리의 헌법은 그렇게 규정했다. 그렇다면 애국과 비애국을 구분 짓는 기준은 이미 준비된 것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부정부패의 처벌과 방지를 요구하는 것이 어떻게 비애국적인가? 당파와 진영의 소속에 근거하지 않는 한 부정한 자의 권력 행사는 보호 받아선 안 된다.

차별받는 소수자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운동이 어떻게 비애국적인가? 그들에게 투입되어야할 세금이 다른 곳에 쓰여야 한다는 목적이 있지 않고서야, 또한 그들의 표 행사보다 더 많은 이들에게서 받을 표가 계산된다면 그렇게 말할 것이다.

개인적 이익 내지는 부당한 보복을 우려하여 특정 정당이나 정치인에게 유리한 기소와 판결을 내리는 판검사를 비판하는 것이 어떻게 비애국적인가? 그것을 통해 이익을 얻는 자들과 그들의 권력을 지지하는 자들이 아닌 이상에야 비애국적이라 할 수 없다.

정치적 승리를 위해, 또는 정치적 책임을 피하기 위해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지 못한 사건을 정치화하는 이들에게 책임을 요구하는 것이 어떻게 비애국적인가? 그러한 책임이 특정 진영으로 향해 정치적 불리함을 만드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다수의 정의와 소수 이익의 대립 속에서 정의를 추구하는 것이 어떻게 비애국적인가? 그러한 대립에서 정의가 훼손되어도 이익을 원하는 자들은 비애국적이라 할 것이다.

군납비리를 저지른 지휘관을 해임하거나 처벌하라는 요구가 어떻게 비애국적인가? 스스로 군대를 약화시킨 지휘관이 병력의 전투력을 온존시키고 전쟁을 제대로 수행하리라 믿지 않는 한에야.


어떤 애국이 진짜 국가와 사회, 그리고 국민에게 도움이 되는 애국인지에 대해서는 그 사람이 얼마나 온전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느냐와, 그 가치관이 어디에 기인하여 형성되었는지로 알 수 있다. 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해 자본주의적 시장에 혼란을 가져와 경제를 왜곡시킨 경제사범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 올바른 가치관으로 나올 수 있는 결론인가? 더 나쁜 사람이 그 자리를 차지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은 처벌과 책임추궁이 제대로 이루어지는 사회에서는 나오기 어렵다. 일정 규모와 수준의 사회에서 대체하지 못할 것은 드물다. 그것은 CEO나 대통령이라 해서 다를 게 없다.

이 나라의 최고 규범은 인권과 자유, 민주를 기치로 삼았고, 그것을 단호히 거부하는 자들이 바로 비애국자이다. 말은 행동보다 강력하지 못한지라, 그들이 말하는 자유, 인권, 민주, 애국, 정의란 단어는 그들의 가치관에 맞는 의도를 내포한다. 그것은 단어 그대로의 뜻이 아니다. 목적에 따라 가공된 단어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너와 나의 구분으로 이루어지며, 여기서 말하는 너는 우리의 적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러한 사상에서 촉발되는 그들의 행동은 적에 대한 적개심과 증오, 폭력과 차별로 발현된다.

그렇다면 누가 애국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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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오에는 계획이 없습니다. 더 큰 증오를 증명하기 위한 계획이 있을 뿐이죠. 우리네 독립운동가와 비교하긴 꺼림칙하나, 모든 우리 독립운동가들이 진정 자신들의 활동으로 나라를 되찾을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을 강력하고 진지하게 가지진 않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특히 30, 40년대에는 더더욱이요.

 

그럼에도 독립운동을 해야 했던 이유는 그게 민족의 대의인 동시에, 적지 않은 부분이 바로 침략자 일제에 대한 증오일 겁니다. 침략하여 빼앗고 죽인 자들을 상대로 우리가 이길 수 있고 현 상황을 뒤집을 수 있을 거라는 믿음 대신 하나라도 더 많은 적들을 죽이는 것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경우 역시 있었을 겁니다.

 

물론 독립운동가와 그대로 비교할 수는 없을 겁니다. 한국 독립운동가 정도면 그나마 꽤 온건하게 한 편인가 싶을 정도이기도 하고요. 최소한 무차별 민간인 테러를 하는 경우가 거의 없거나 극히 없다고 봐도 될 정도였으니까요. 이 경우엔 그 테러, 보복의 장소가 국내이고 피해자로 같은 조선인들이 많을 거라는 것도 이유이긴 합니다만.

 

요는 독립운동이든 하마스의 활동이든 IRA의 활동이든, 그들의 활동 기저에는 정의와 자유만큼이나 분노와 증오가 크다는 거고, 사람에 따라, 조직에 따라 그 비중은 크게 차이를 보일 수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너무 오래, 너무 많은 사람에게 지나치게 분노를 응축시켜놓으면 그 반발 역시 클 수밖에 없습니다. 심지어 통제와 관리를 할 머리들을 죄다 잘라놓으면 더더욱 터질 때 폭주할 수밖에 없죠. 분노 역시 방향을 잡아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데나 튀거든요. 임정에서 일본인이면 민간인 무차별 씨몰살하자, 왜놈 유충들 참수하자고 하는 놈은 없었습니다.

 


하마스는 추악한 행위를 저지른 테러리스트지만 그런 테러리스트들은 어디 땅 속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게 아니라 이스라엘이 만든 괴물이기도 합니다. 그들의 테러와 잔악 행위가 역겹다 한들 그들이 그렇게 된 이유, 그렇게 만든 이들이 있는 한 단순 사악한 괴물 테러리스트라고만은 할 수가 없죠.

 

약자가 항상 정의는 아니고, 싸우면서 정의를 챙기는 것도 여유가 있어야 가능하며, 당하면 당할 수록, 잃으면 잃을 수록, 억압 받고 차별 받고 죽기를 바랄수록 악에 받힐 수밖에 없게 됩니다. 가진 게 없고 약하기 때문에 더 비도덕적인 집단이 되기도 쉽고요. 홀로코스트를 피해 도망 온 사람들에게 자기 집에서 머물 수 있도록 해줬는데 그 대가가 은인에 대한 침략과 학살이며 말살을 목적으로 하는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감옥이라면 당연히 증오와 혐오는 이루 말할 수 없게 되겠죠. 

 

애 어른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모두 죽이고 싶을 정도로요. 사람이 괴물이 되는 건 대단찮은 이유가 아니죠. 당했는데 갚아줄 힘이 없을 때 괴물이 되는 겁니다. 조금이라도 더 갚아주기 위해 지켜야 할 선을 하나하나 포기하다보면 그렇게 되죠. 가끔은, 한번에 여러 단계를 추월하기도 합니다. 팔레스타인의 어느 소년은 자폭 테러를 한 자기 누이를 자랑스럽게 여기며, 같은 길을 갈 거라고 하더군요. 그게 자신의 운명이라고. 다른 선택지들도 있겠지만, 어떤 이들에겐 정해진 선택지가 있는 법일 겁니다. 사람 마음이라는 게 그렇게 만드니까요.

이기고 싶어서 싸우는 게 아닙니다. 죽이고 싶어서 싸우는거죠.

 

하마스가 갑자기 생겨났을까요? 그들의 잔악 행위가 그들이 원래부터 사악한 괴물들이라 그럴까요? 중국군이 한국을 장악하고 지역별로 게토를 만들어서 감옥화 시키고 재미 삼아 쏴죽이고 물도, 전기도 제대로 공급 안 해주며 신나게 죽이고 고문해대면 한국인 중에 증오에 머리가 터지고 악에 받혀 중국인이기만 하면 한명이라도 더 죽여버리겠다며 몸뚱이에 폭탄 묶고 자폭할 사람 없을까요? 다 같이 총에 칼차고 기습 공격해서 중국인 민간인 잡아다 신나는 보복을 하고 싶은 사람 하나도 없겠습니까?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잔혹하고 끔찍하며 반인륜적인 행위가 보복, 되갚음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한 쾌락이 될텐데요.

 

멀리 갈 필요도 없이 북한군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사람, 중국인에게 강간 살해 고문을 현재 진행형으로 당하고 있는 위구르인들은 그들에게 잔혹한 보복을 상상하지 않을까요? 당연히 하죠. 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일 뿐이지.

 

하마스가 딱 그런 상황입니다. 온갖 개짓거리란 개짓거리는 수십년 동안 죄다 당했는데 증오와 혐오, 분노가 뼛속 깊숙하게 자리잡지 않으면 죄다 성불해서 부처가 되어야지 테러를 하겠습니까. 우리 사회의 일개인의 잔인하고 반인륜적인 범죄를 보고 가죽을 벗겨야 하네 팔다리를 포떠야 하네 산 채로 불태워야 하네 하는 건 잔인하다 축에도 못 낄 온갖 기발한 고문과 살해 방식으로 분노하는 이들이 실제로 그보다 더 한 피해를 입은 자들의 분노에 공감하지 못한다면 그거야 말로 위선입니다.

 

 

하마스가 잔혹한 테러를 저지른 건 맞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만든 건 이스라엘이죠. 가해자는 신나게 가해하는데 악에 받힌 피해자의 보복에는 비난한다니, 같잖기도 해라.

 

아 물론 하마스가 저지른, 이스라엘에 비해 특별할 것도 없는 행위가 잔혹한 건 맞고 미디어에서 부정적으로 다뤄지며 세계인에게 부정적인 인식이 씌워지는 건 맞는데, 그게 그토록 잘못이라면 다 같이 손잡고 팔레스타인에 쳐들어가서 팔레스타인 사람이라면 노인부터 신생아까지 쏴죽이고 찔러 죽이고 묻어 죽이고 태워죽이고 목졸라 죽여서 지구상에 팔레스타인인이라는 단어는 역사책에서나 찾아볼 수 있도록 멸절시켜야죠. 마찬가지로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면 무제한 인종멸절권 부여하고요. 힘 센 가해자는 무조건 무죄고.

 

이스라엘이 억울할 게 뭐가 있습니까. 자기 업보인데. 이런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하마스의 개새끼짓에만 분노하는 게 바로 위선입니다. 선비짓도 그런 선비짓도 없죠.

 

 

참고로 전 하마스의 행위 자체를 옹호하는 게 아닙니다. 당할 짓을 했으니 당하는 거고, 그게 잔혹하든 그렇지 않든 혈채를 갚은 거라는 걸 인정하는 것 뿐이죠. 애들 참수하고 외국인 시체 조리돌리는 거? 물론 통제되지 않은 죄악이고 무분별한 공격입니다.

 

근데 미쳐서 눈깔 돈 놈들이 사리분별 못하고 총들고 브레이크 댄스 추는 걸 누가 말리겠습니까. 그걸 통제하고 관리할 팔레스타인, 하마스 측 인물들 단 한번도 멈춘 적 없이 암살해댄 건 이스라엘인데. 그래서 업보라는 겁니다. 약자가 정의롭지만은 않듯이, 그 약자들의 분노가 광기가 되어 대상을 가리지 않고 분출되는 것 역시 있을 수 있는 현상입니다. 

 

그걸 이해해야 일차원적 하마스 개새끼 소리가 얼마나 유치한 줄 아는 거죠. 개빡쳐서 눈깔 돈 놈이 자기 말리는 사람한테도 주먹질 하는 게 드문 일입니까? 하도 조롱 받고 괴롭힘 받은 사람이 피해망상에 빠져 중립적인 사람의 평범한 행동에도 너도 나 놀리냐며 쌍욕 박는 게 그리 신기한 일인가요? 똑같아요. 거기에 피와 시체만 추가 된 것 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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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리뷰는 작품에 대한 내용누설이 있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쓰는 리뷰네요. 그동안 본 작품들이야 많았지만 게으른 것도 있고, 쓸 정도는 아닌 작품들도 있고 해서 안 썼다, 최근 완결까지 본 바바리안 퀘스트는 좀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먼저, 이 소설의 초반부는 큰 흥미를 끌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모든 교과서적인 서사를 지닌 작품들의 초반부는 중후반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밋밋하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고요. 이는 심지어 무한의 마법사의 극초반부에 있어서 큰 흥미를 끌지 못하거나 심지어 작품 특유의 의도적인 불쾌감을 주는 부분 때문에 더더욱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부분을 지나간다면 작품은 독자를 끌고 갑니다. 주인공 유릭과 그 주변인들은 살아 있는 욕구와 감성을 가지고 움직이며, 그것은 상당한 설득력을 지니죠. 백수귀족 작가의 전작이었던 킬 더 드래곤에서처럼 담담하면서도 진한 인간미가 드러나는 필체는 상당히 매력적이기도 하고요.

 

 

주인공 유릭은 서부의 야만인입니다. 하지만 그 어떤 사람과도 달랐죠. 괴력을 타고난 강력하고 뛰어난 전사이자 사냥꾼이라는 점부터 시작해서 상당한 지성을 지닌, 타고난 영웅의 기재입니다. 그러나 그의 기질은 탐험가에 있지 전사에 있지 않았죠. 이 부분은 조금 엄밀하게 이야기해야 할텐데, 모든 뛰어난 탐험가는 뛰어난 전사적 기질을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전사는 적과 싸우는 존재이고, 적과 대적하여 이겨내는 자를 말합니다. 대개의 경우 전사라 함은 다른 전사, 병사, 집단 등 사람과 싸우는 자를 상정하지만, 탐험가에게 적이란 자기 앞을 가로막는 모든 장애물을 말합니다. 때로 그것은 칼과 창을 든 사람일 수도 있고, 귀족일 수도 있고, 제국이나 문명사회 그 자체일 수도 있으며, 심지어 동료와 친구, 은인, 자식이 될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미지의 자연 그 자체가 적이 되어야 하죠. 탐험가란 알지 못하는 새로운 곳을 알고자 하는 이들이며, 그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세계는 언제나 위협적인 무언가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그것에 겁먹지 않고 마땅히 한 발자국을 내딛을 수 있는 용기와, 그러한 미지의 존재와의 싸움에서 살아남고 이겨나가는 강인한 육체와 정신을 필요로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어떤 상처를 입어도 살아남고, 어떠한 적과 맞서도 이겨내며, 끝끝내 제국을 무너뜨리고 문명사회에 거대한 충격과 새로운 세계관을 이끌어낸 유릭은 세계관 최강의 전사이자, 그러한 기풍을 인간에게 돌리지 않고 죽을 때까지 자신이 알지 못하는 새로운 것, 미지의 장막 너머, 낯선 세계에 쏟으며 어린 시절에 그랬듯, 가슴이 뛸 줄 아는 사내입니다.

 

만약 그가 전사이기만 했다면 문명 사회는 끔찍한 꼴을 당했겠죠. 문명 사회를 크게 퇴보시키는 멸망의 존재가 될 것이고, 악마의 이름으로 전승이 될 것이며, 뛰어난 지성과 예술, 기술과 인격이 존재했던 아름다운 세상을 스스로의 손으로 멸하는 자가 되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죠. 그는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즐거워 했고, 타고난 호기심으로 모르는 것을 알고자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을 배우고, 또 글을 배우며 익히고 받아들였죠. 익히고 배우는 것. 지성인의 가장 기본적인 태도이자 가장 중요한 핵심. 유릭의 지성에 대해서는 작중 캐릭터들이 수 차례 놀라고 인정한 요소이죠.

 

그렇기 때문에 유릭은 문명인들이 이룩한 위업을 진심으로 경탄할 줄 알았습니다. 그저 빼앗고 부수고 약탈하기만을 즐겼던 그 어떤 서부의 야만인과는 다르게요. 그리고 그의 선택 덕에 문명은 자신이 이끌고온 서부의 약탈자들, 연맹에게 파괴 되었지만, 동시에 보호될 수 있었습니다.

 

예술에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는 자에게 모나리자나 최후의 만찬, 아테네 학당을 보여준다 해도 그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그저 땔감으로 쓰면 족할 화려한 장작일 뿐이죠. 하지만 그것을 보고 아름답다는 감각을 느끼고, 그 미학에 인간 예술의 거대한 위대함을 느낀다면 그것은 지고의 예술이 됩니다.

 

유릭은 그것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었지요. 제국 수도 하멜의 위대한 건축물과 예술에 진정 감탄할 줄 알았기에 하멜을 공격하면서도 약탈을 제약하고, 다시 적극적으로 재건하는 것은 민심이 아닌 자신의 욕구에 따르는 일이었습니다. 천 위에 얼룩진 색채에 의미는 담고, 감정의 움직임을 느끼는 사람에게 그것은 중요하고 소중한 무언가가 되기 마련이니까요. 설령 그것이 단순히 모래를 쌓아 만든 모래탑이라 할 지라도, 그것에 만족한다면 그것이 부숴지지 않고 훼손되지 않기를 바라는 것처럼.

 

그럼에도 그는 탐험가였고, 의도적으로 연맹을 약화시킨 후 사라졌습니다. 마치 이야기 속 영웅처럼. 전설처럼, 또 신화처럼.

 

탐험가. 모험가. 그것이 유릭의 정체성이었기에 자신의 생존이 어떠한 의미를 지닐 지 알면서도 그것을 감추며 남부를 여행하고, 또 다시 동부로 가게 됐습니다. 친우를 만날 겸, 자식도 보게 될지 몰라서, 무엇보다 바다 너머를 가기 위해. 동대륙이란 이름은 20년 전부터 그의 마음 속에 새겨진 미래의 계획, 혹은 추구였죠. 그에게 세상은 여전히 넓었고, 여전히 가슴 뛰는 모험이 존재한다는 것을 새겨준.

 

 

유릭은 금기는 범한 자입니다. 하늘산맥은 서부인에게 금기였죠. 감히 그것을 넘지 말라는 공통된 인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태생적인 탐험가인 유릭은 그 너머를 원했습니다. 비록 스스로의 의지만으로 했던 것은 아니지만 제국의 탐험가이자 기사에 의해 하늘산맥을 넘는 지점에서 유릭은 그들을 죽이고 바라봤습니다.

 

고향의 땅. 그리고 금기 너머 미지의 땅. 서부의 어떤 자라도, 심지어 지즐조차도 전통과 금기를 함부로 범할 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유릭은 과감히 그것을 넘어버렸죠. 호기심이라는 천성을 그가 하늘산맥이라는 금기를 아무렇지 않게 넘는 이유가 됩니다. 그에게 미지란 도전의 대상이지 두려움의 대상은 아니었으니까. 그가 가장 위대한 이유는 시작과 동시에 제시되죠. 절대와 같은 금기를 자신의 의지로 극복하는 것. 새로운 것에 대한 욕구를 제시하는 것. 더 나아가 그것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가에 대해서까지.

 

 

유릭의 주변 사람들도 생동감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기실 대부분의 캐릭터들이 그렇죠. 주인공의 동료들이 잘못되길 바라는 사람은 없겠지만, 이 작품에서 동료들이란 그저 잠시 함께 하는 자들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작품의 정체성 그 자체를 드러내는 서술이기 때문인데, 유릭이라는 주인공 자체가 이방인입니다. 서부의 야만인으로 금기로 여겨진 하늘 산맥을 넘고 문명 사회에 진입한 이방인이죠.

 

이방인은 그 이름이 바뀌지 않는 한 언제나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뿌리 내릴 수 없죠. 부평초처럼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듯, 그는 이런 저런 사람들을 만나고, 함께하며, 또 이별합니다. 유릭의 형제들과 지낸 시기는 결코 짧지 않을 테지만 그는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위해 기꺼이 형제들을 떠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에게 주어진 많은 것들, 작위나 땅. 부귀영화조차도 그가 원하는 게 아니었으니까요.

 

그것이 얼마나 삶을 풍요롭게 하고 안전하게 하며, 안락하게 할 수 있다 하여도 유릭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더 추구했기에 미련 없이 버릴 수 있었습니다. 자신이 얻은 것이되, 자신의 것이 아니었기에 미련을 가질 이유가 없었죠. 자기 자신에 순수한 자. 천성이죠.

 

탐험가는 언제나 새로운 곳을 보기 위해 떠나는 사람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더더욱 설득력을 얻습니다. 서부를 떠나고, 포를카나와 용병단을 떠나고, 제국을 떠나고, 북부를 떠나고, 다시 서부로 돌아와 제국을 멸망시켰음에도 다시 떠났죠. 그렇게 떠나고 또 떠나오는 삶은 힘겨울만도 하지만 오히려 즐거웠을 겁니다. 새로운 것을 보고 배우고 익히고 접하는 것에 즐거움을 느끼는 종류의 인간이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피붙이와 친우를 두고도 죽을 지 모르는 바다로 나갔습니다. 전혀 모르는 새로운 것. 동대륙을 향해서.

 

그는 진정 뿌리 내릴 수 없는 사람입니다. 태생이 그러했죠. 부모 없이 들판에서 주워진 아이. 부모라는 뿌리부터 없었습니다.

 

 

작품 내에선 여러 영웅적인 인물들이 나옵니다. 유릭을 제외하고도 바르카, 다미아, 얀키누스, 사미칸, 벨루아, 페르젠.

 

이 중에서 벨루아나 다이마는 조금 쳐진다 해도 나머지 인물들은 꽤 영웅적인 인물입니다. 그들의 성과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천성이 그러합니다. 바르카는 왕실에서 오냐오냐 하며 컸기 때문에 건방지고 우둔했지만 유릭과 만나고 필리온 경의 죽음을 겪으며 어린 모습을 버리게 되며 왕의 자질을 얻습니다.

 

사실 바르카는 꽤 비판을 받을만한 캐릭터이긴 합니다. 다미아와 함께 일단 넘어가고..

 

얀키누스는 황제로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러나 황제로 태어났기에 수많은 사람들의 당연한 기대를 받아야만 했죠. 나는 그걸 할 수 없는데 당연히 할 줄 알아야 했고,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할 수 있게 되어야 했습니다. 그건 단순히 노력을 하느냐와 다르게, 그냥 그렇게 해야 했기에 하게 되어야 하는 것에 가까웠을 겁니다.

 

모든 것은 상속 받은 채 태어났기에 부족함도, 모자람도 없는 세계의 지배자였으나 바로 그것이 얀키누스의 갈증을 만들었습니다. 내가 스스로 얻은 게 없다는 것. 모든 것이 상속 받은 것이지 내 손으로 이룬 것이 없다는 잔혹한 갈증. 그는 정복자의 핏줄을 타고났고, 정복할 것이 필요한 침략자의 자질과 그것을 다루는 통치자의 자질을 물려 받았습니다. 그의 정치력과 판단력은 부족한 편이 아닙니다. 오히려 뛰어난 편이죠.

 

그러나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그는 서부를, 그리고 동대륙을 정복하고자 했습니다. 단순히 교류를 하는 게 아니라 필요 없는 싸움을 벌이고, 무가치한 땅을 정복하며, 죽을 이유 없이 피를 흘리게끔 하며 자신의 위업을 만들어내고 싶어 했습니다. 모든 걸 다 가졌으나 업적에 목마른 자. 그게 얀키누스였죠.

 

그런 그를 역겹다고도 할 수 있고 멍청하다고도 할 수 있으며, 애처럼 군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게 그의 본질인 것은 어쩔 수 없죠. 탐험가에게 언제나 새로운 곳을 필요로 하듯, 정복자는 언제나 장복할 것을 필요로 했습니다. 유릭과 얀키누스는 이러한 면에서 비슷한 사람이었죠. 단지 탐험가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미지를 대하는 지, 아니면 정복자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미지를 대하는 지에 대한 태도 차이일 뿐입니다.

 

만약 유릭이 얀키누스로 태어났다면 그는 군사력이 아닌 탐험가를 동원하여, 어쩌면 스스로 탐험가가 되어 하늘산맥을 넘고 그곳에서 서부의 야만인들과 같은 방식으로 살며 그들의 삶을 이해하고 익히려 했을지 모를 일입니다. 얀키누스가 서부에서 태어났다면 사미칸의 이름을 대신 했을 것이고요.

 

그럼에도 그는 황제였습니다. 자신이 실패하고 모든 것이 영락하며, 가장 추잡하고 수치스러운 꼴을 당하고서도 생을 갈구하며 승자의 권리를 충실히 지켰죠. 승자로서 자신에 대한 생사여탈권은 물론, 어떻게 망가뜨리고 수치를 주고 조롱하는 것조차 패자가 살아 있을 때나 의미가 있으니까요. 그는 생존으로서 유릭의 권리를 지켜냈습니다. 계약을 중요시 하는 문명사회의 푸른 피다운 태도라면 태도였죠.

 

그렇다고 증오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실패는 자신에게 있지 승자에게 있지 않으니까요. 그들은 싸웠고, 생존의 문제에 있어 규칙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중요한 건 이기느냐 지느냐, 누가 이겼는가. 얀키누스는 패배자였고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였습니다. 그건 감정의 영역이 아니라 사실의 영역이었죠. 그렇기에 그는 최후의 식사에서도 유릭을 증오하거나 분노하지 않고 도리어 당당하게 식사를 하고 오랜만에 제대로된 식사였음이라 감사를 전합니다.

 

실패하였고, 인격적 결함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그는 실로 지배자였습니다.

 

 

페르젠은 재밌는 캐릭터입니다. 문명 사회를 대표하는 전사이자 기사인 동시에, 전설 그 자체가 된 사람입니다. 평생을 루의 품에서 살아왔음에도, 스스로 전사였기에 전사를 좋아하지 않는 루의 품을 떠나 자신이 무수히 죽이고 정복했던 북부의 울가로를 믿었습니다. 유릭과 비슷한 면이 있죠. 단지 기사적인 인물이었을 뿐.

 

뛰어난 통찰력, 늙었지만 날카로운 검술과 실전적인 수법들. 살아온 세월만큼 그의 인생에 새겨진 것들은 모두 그의 무기이자 명성이었습니다. 그러나 루는 전사를 좋아하지 않고, 그는 오래 사는 것으로 형벌을 받고 있었죠. 이미 죽어야 할 나이였음에도 그저 늙고 병들고 기량이 쇠해지면서 전사로서도, 기사로서도 추락해가는 삶을 사는 것으로요.

 

그는 마지막 전장에서 전사로서 죽고 싶어했지만 그의 위치가 감히 그러지 못하게끔 했습니다. 그와 싸워서 이길 적도 없었고, 하찮은 화살에 맞아 죽기에 그는 너무 거물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을 죽일 사람을 골라야 했죠. 인정 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하면서도, 자신을 죽이는데 거리낌이 없어야 하며, 무엇보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법한 사람.

 

유릭이었습니다. 북부에서의 많은 경험을 가진 페르젠은 자연스럽게 유릭이 북부 출신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챕니다. 남부의 인종과도 다르다면 남는 건 서부일 수밖에 없죠. 그리고 페르젠은 과감히 그가 서부 출신일 것이라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음을 유릭에게 넌지시 알리며 죽이기 위한 이유를 만들어주죠.

 

그리고 싸웁니다. 당연히 늙고 쇠한 페르젠은 유릭을 감히 감당할 수 없고, 죽게 됩니다. 그의 유언은 울가로여..

 

유릭은 크게 놀랍니다. 평생을 북부와 싸워온 기사이자 영웅이 정작 루가 아닌 울가로를 믿었다고요. 하늘 산맥을 넘어 조상의 영혼이, 자신의 영혼이 어디로 가야 하는가에 대한 번뇌를 가진 유릭은 그때 페르젠의 개종 사실을 알게 되고 루에게 의탁한 자신의 영혼을 되돌려 받습니다. 그저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그 두려움에 믿었던 루였고, 그것은 나약한 도피에 불과했으니까요.

 

울가로의 환영은 단지 그러한 번뇌의 발로였을 뿐..

 

 

사미칸과 벨루아는 서부의 영웅이라 칭해도 부족함 없는 사람입니다. 물론 벨루아가 조금 쳐지죠. 여성이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지만 애초에 기질 자체가 지배자나 통치자가 아닌 대장장이에 가깝습니다. 유릭과 얀키누스, 페르젠, 사미칸과 벨루아는 비슷한 특성을 가지고 있지만 공유하는 교집합과 서로 다른 곳에 방점이 찍혀 있죠.

 

사미칸은 타고난 정치가였습니다. 통치자라고 하기엔 조금 부족하지만 그의 정치력은 타고난 영역에 가깝고, 수많은 사람과 부족들을 파악하고 조율하는데 능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누군가를 견제하고 밀어낼 수 있고, 자신의 품에 담을 수 있는지. 한번도 거대한 체계를 이룩한 적 없는 서부에서 구전으로만 남는 역사를 지니는 지역의 출신이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운 역량이었죠.

 

하지만 바로 그런 정치가로서의 기질이 그를 실패하게끔 만들었습니다. 그 역시 약한 자는 아니었지만 유릭이었다면 죽지 않을만한 상처와 싸움 속에서 그는 상처 입고 약해졌으며, 무엇보다 거대한 욕심이 그를 죽게 만들었죠. 모든 정치인들이 그렇듯이 그 역시 자신만의 업적, 성과를 위해 타인의 목숨을 희생시킬 줄 알았습니다.

 

그는 전설이 되고 싶어했고 그것을 위해 승산 없는, 혹은 도박에 가까운 공격을 실행하려 했습니다. 유릭은 언제나 부족과 동포만을 생각했고, 그 이상으로 권력이나 지배자를 원하지 않았으며, 탐험과 모험에 더 타오르는 남자였음에도 사미칸은 단지 그가 그럴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견제했죠. 형제의 맹세를 했음에도 그는 유릭을 형제로 대하지 않았습니다. 정치인에게 쇼맨쉽을 중요하고 말은 어디까지나 말 뿐이었으니까요.

 

만약 그가 유릭을 죽여도 됐다면 죽였을 겁니다. 그러기에 너무 아까웠을 뿐이지. 그럴 수 없었기에 죽이지 못했을 따름입니다.

 

스스로 병 들어 죽기 전에 제국을 친다는 도박을 할 때에도, 유릭과 정당하게 싸우는 대신 그에게 치사량에 가까운 독을 쓰고 유릭이 자신을 먼저 공격하지 못해도 자신은 그럴 수 있다는 걸 알았죠. 그의 정치적 역량과 사고의 유연성은 확실히 여느 문명인 귀족, 왕족과 비교해서도 부족함은 없었다고 평가합니다. 단지 그 정치적 기질, 집단의 생존과 번영보다 자신의 명예와 영광, 업적을 탐하는 자세 역시 부족함이 없었을 뿐이죠.

 

그가 더 오래 살았다면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었겠지만, 단일화되지 못한 권위(유릭-사미칸)으로 꾸준한 분열과 갈등이 있었을 것이고, 만약 정말 하멜을 치겠다고 했다면 그건 성공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컸습니다. 장창부대는 중기병에게 상당한 피해를 강요하는 새로운 전술이었지만 그럼에도 수적 차이와 전략 전술의 격차, 강력한 성벽을 지닌 공성전이라는 열세를 넘기는 어렵죠.

 

그래서 사미칸 본인부터가 하멜을 정복한다가 아니라, 제국의 심장을 친 야만인이라는 명성을 상상했던 것이고요. 이는 모든 동포를 위해 다시 하늘산맥을 넘고, 전쟁을 준비했으며, 가장 중요한 순간들을 이끌었던 유릭의 방향성과 차이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동포를 위해 하는 짓인데 그 동포들을 다 죽여버릴 셈이냐며.

 

 

구조적으로 봤을 때 사미칸과 벨루아의 역할은 명확합니다. 처음 서부를 통합할 때는 3강 구도를 만들어 바위도끼 부족과 푸른안개 부족의 충돌을 방지하는 세력 구도를 만들고, 이후엔 벨루아의 약점인 여성이라는 점을 강조하여 사미칸과 유릭의 1:1:0.5의 구도를 만들었습니다. 여기서 벨루아는 자신의 주도권을 잃는 상황에 몰아넣어 그것을 타개할만한 계책을 발휘해야 했고, 처음에는 유릭에게, 그 이후에는 사미칸에게 붙었습니다.

 

결혼 동맹을 통해서요. 이건 단지 작품적으로 필요하기 때문 어거지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럴 수밖에 없게끔 상황을 이끌어간 겁니다. 자연스럽고 당연하게요. 작품적 필요로 이러한 캐릭터를 만들고 구도를 만들었지만, 캐릭터의 필요와 합치되게끔 하여 설득력을 확보한 셈입니다. 뛰어난 작가는 이러한 서술이 아주 매끄럽고 자연스럽죠.

 

반면 사미칸은 유릭과의 경쟁 구도에서 반드시 탈락할 수밖에 없는 작품적 운명을 부여 받았으나 벨루아는 살짝 밀려 있었고, 임신을 이유로 중간에 이탈하게 되면서 끝까지 남을 수 있었습니다. 작품적으로는 벨루아를 이탈시켜 양강의 구도를 강화 및 집중시킬 수 있고 더 단순하게 만들어 필요 이상의 복잡함을 덜어낼 수도 있었죠. 여성이라는 특징을 적절할 때 적절하게 사용한 셈입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바르카와 다미아, 그리고 얀키누스를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개인적으로 바르카는 좋아할 수가 없는 캐릭터인데, 저는 단순히 운이 좋아서 횡재하는 캐릭터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그건 주인공이라 해도 마찬가지고요. 단순한 운으로 죽을 뻔 했는데 살아났다 같은 게 아니라 단순 운으로 운명이 바뀔 정도로 거대한 무언가를 손에 넣는다는 걸 싫어합니다.

 

바르카와 유릭의 만남은 있을 수 있는 만남이지만, 그 결과 여러모로 모자랐던 바르카가 왕으로 각성하는 것은 어떤 면에선 다소 어색한 면이 있습니다. 물론 어색하다는 게 개인적인 감상일 뿐이지 작품적으로 용인이 가능하고, 그러한 과정이나 특성을 지니는 캐릭터들이야 수많은 작품에 엄청나게 많죠.

 

다만 그건 다미아라는 캐릭터가 없었다면 더 그랬을 겁니다. 바르카(파헬)의 성공은 단순히 유릭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겁니다. 그 스스로의 능력만으로는 거의 한 게 없죠.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건 어느 정도 철이 들고난 뒤에나 가능했던 거고 그 이전까지 파헬은 너무나도 한심한 애송이였습니다. 필리온이 사후세계를 포기 하면서까지 그를 지키려 했던 충성 덕분에 가능했다는 게 더 말이 될 거고요.

 

주인공과 만나서 그의 보호를 받았기 때문에 왕까지 될 수 있었다는 건 그 본인에게 있어서 글자 그대로 운으로 왕이 된 것과 다름이 없다고 봅니다. 그가 숙부와의 싸움에서 어떤 모습을 보여줬고 승리 후 그를 어떻게 추락시켰는지는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건 그냥 뛰어난 왕의 재목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였을 뿐이지 사실 그런 거 없이 여전히 애송이라도 왕은 될 수 있었습니다. 유릭이 이겼으니까요.

 

단지 여전히 애송이였다면 룽겔 공작의 견제를 감히 버텨내지 못했을 거고 그 이전에 다미아에게 살해 되었을 것 뿐이죠.

 

바로 이 지점에서 전 다미아에게 더 마음이 끌렸습니다. 다미아나 얀키누스나 비슷하게 말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다미아는 단지 여자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할 수 있음에도 가지지 못하는 게 있으며, 지금 상태에 만족하는 대신, 가질 수 있는 것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게 뭐냐 문제냐는 태도를 지닌 캐릭터입니다.

 

얀키누스는 모든 것을 가졌지만 그것은 상속받은 것일 뿐, 스스로의 손으로 얻은 건 아무 것도 없기에 자신의 것으로 얻을 수 있는 업적을 갈구하고자 하는 캐릭터였고요.

 

저는 이들의 욕구를 긍정합니다. 제가 현대인이기 때문에 그러한 감성을 버릴 수 없는 것도 있겠지만 안분지족 대신 더 나은 상태를 추구하는 향상심을 부정하는 건 바람직하지 못한 것도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왜 가진 것에 만족하지 않았느냐고 바르카는 자신의 누이에게 말합니다. 하지만 그건 자기 자신에게도 할 수 있는 말이죠. 왜 하멜에서 망명한 손님 대우를 받으며 안락하게 살지 않고 사람이 죽고 혼란에 빠질 수 있는 내전을 벌였느냐고.

 

왕위가 애초에 자신의 것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왕위를 빼앗길 당시 자신이 왕의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었느냐고 되돌아 봤을 때, 오히려 왕의 자격은 숙부에 더 가까웠을 겁니다.

 

다미아는 단지 여성으로 태어났을 뿐, 모두가 그녀에게 남자 였다면 뛰어난 왕이 되었을 것이라 평했습니다. 많은 것을 보고 읽었고, 익혔기에 대단히 뛰어난 지성을 갖추고 있었고, 결코 꺽이지 않는 정신과 강자의 기질을 타고났으며, 잃거나 희생하는 것에 나약해지지도 않습니다.

 

단지 여성이기 때문에, 남자가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그저 어느 남자의 소유가 되는 것과 비교하기에 그녀는 지나치게 뛰어납니다. 왕이 되어서 이상할 것도, 모자랄 것도 없을 정도로요. 벨루아는 여성임에도 부족장의 자리를 거머쥐었지만 여성이기 때문에 연맹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었습니다. 그곳이 야만적인 곳이었기에 가능했지만, 그렇기 때문에 직접적인 한계가 있었죠.

 

하지만 다미아는 문명인입니다. 왕위는 힘이 세거나 특정 기술이 뛰어나다고 인정 받는 게 아니죠. 숙부가 죽고 바르카가 죽는다면 남은 건 다미아가 최적격자입니다. 또한 다미아의 뛰어난 정치력과 지성, 음모를 꾸미는 솜씨를 고려한다면 몇년 안에 왕권을 확보하고 강력하게 만들었을 지도 모를 일이죠. 그리고 그 모든 것은 결국 자신의 능력을 기반으로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르카는? 자신의 생존조차도 자신의 기사인 필리온이 개고생을 하면서, 그리고 유릭과 형제들을 끌어들이면서 가능했고, 제국까지 갔을 때조차 얀키누스는 거의 가벼운 마음으로 그에게 병력을 빌려 줬습니다. 페르젠은 자신의 욕구와 일치하기에 같이 갔던 거였고요. 결과적으로 그는 스스로 얻은 게 없습니다. 남에게 기댔거나, 빌린 것 뿐이죠.

 

전쟁조차 페르젠이 이끄는 병력으로 세력 하나를 평정했고, 유릭과 페르젠, 제국 중장보병으로 승리를 거머쥔 것이며, 다미아를 빼돌리고 성문을 열어 젖힌 것도 유릭입니다. 그 스스로 한 것은 말 몇마디에 불과할 정도죠. 그 몇 마디가 중요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평가하진 못하겠습니다. 얀키누스에게 병력을 빌려온 것은 분명 중요한 일이지만 그게 그토록 어려운 일이었느냐 하면 꼭 그렇게까진 아닌 거 같고, 그마저도 동대륙 떡밥은 유릭에게 받은 거죠.

 

그런 의미에서 바르카는 왕위를 얻을 자격이 없었습니다. 다미아가 더 어울렸죠. 그가 왕이 된 것은 순전히 운에 가까웠고, 그 이후 각성한 그가 훌륭한 왕이자 정치력을 가지는 것은 어디까지나 내전에서 승리하고 난 이후, 혹은 직전이었으니 스스로 얻은 게 아닌 남의 힘으로 얻고 그걸 잘 유지시킨 것에 불과합니다. 그가 가진 자격이란 그저 선왕의 적자라는 것 하나 뿐이죠. 왕조 사회에서 그건 아주 중요한 명분이지만, 인간적으로 바르카는 자격 미달의 인간이었습니다. 운이 좋았을 뿐이지.

 

그렇기 때문에 바르카를 좋아하기가 어렵습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 남의 힘으로 얻은 것 왕좌에 올라섰고, 제국의 후원 덕분에 보호 받고 성장할 수 있었으면서 제국을 치는데 앞장서며 가장 많은 것을 얻었죠. 그것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왕이란 그래야 하고 정치라는 게 그러하니까요. 하지만 카르니우스와의 전투나 하멜 침공에 있어서도 서부의 야만인만큼의 성과를 냈고 그만한 희생을 했느냐 하면.. 바르카와 포를카나는 흘린 피와 자격에 비해 너무 많은 걸 얻었습니다.

 

결국 모든 건 유릭 덕분에 얻은 것이었을 뿐이죠. 자격에 있어서 부적격이라는 겁니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개인의 평가일 뿐이고, 자격이 있고 없고에 따라 삼키고 뱉는 게 정해진 세상이 아니니 그저 운으로 주운 금화가 훗날 황제로 만들어 주었다 해서 이상할 건 없습니다. 그냥 꼬울 뿐이죠.

 

다미아가 아쉬운 점이 바로 그겁니다. 그녀는 아버지인 왕을 죽였고, 숙부를 충동질했으며, 동생인 바르카를 죽이려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여왕이 되려고 했죠. 그게 잔혹하고 비인간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 또한 능력이라면 능력이고,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일이었습니다. 실로 성공할 뻔 했죠. 유릭의 존재가 아니었다면.

 

다시 말하지만 전 다미아의 욕구를 긍정합니다. 그 방식이 잔혹하고 비인간적이라 실패하면 벌 받을 수 있다는 건 인정하지만, 그녀를 얀키누스에 보내 성노예로 살게끔 하는 건 오히려 지나쳤다고 봅니다. 대가로서는 손색은 없죠. 조금 지나쳤을 뿐. 죽음은 그냥 죽음입니다. 다미아는 그냥 죽을 수도 있었죠. 실제로 자결하려고 했고요. 실패했을 뿐. 그런 그녀는 단지 자신의 한계를 넘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얻을 수 있는 것을 얻고자 벌인 일의 대가 치고는 좀 지나쳤다고 봅니다.

 

여자가 누군가의 좆집이 되는 게 불쾌하다기보단 그녀를 얻는 자에 대한 거부감과 불쾌감이 더 컸을 수도 있지만, 그걸 감안해도 다미아의 목적은 정당하다고 보며, 귀족 사회에서 암살과 음모는 흔한 일이니 그게 비인간적이라 하더라도 바르카와 포를카나가 제국을 배신하고 하멜을 공격한 것과 비교해서 대단찮은 일인가 싶습니다. 하멜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고 강간 당하고 약탈 당하고 고문 당했죠? 하멜까지 가고 봉쇄를 진행하던 그 과정에서는? 그 이전에는?

 

다미아의 욕구는 정당했으되, 그저 유릭이라는 주인공 때문에 실패한 거고, 실패한 거 치고는 비참한 대가를 치뤘습니다. 음모의 이유가 별 거 아니었다면 어떻게 되든 상관 없었겠지만 너무 정당하다 느낀 게 문제였죠. 다만 그게 작품적 비판점이라고 생각지는 않고, 캐릭터에 대한 비평일 뿐입니다.

 

 

마지막으로 세계관에 대한 이야기를 짤막하게 하겠습니다. 작품적 세계관이 아니라, 세계관의 충돌에 관해서요.

 

서부는 중앙와 연고가 없었고, 황제 얀키누스의 욕망에 의해 개척됩니다. 유릭은 그 욕망에 의해 산맥을 넘을 계기를 얻었고, 자신의 천성에 따라 금기를 범하고 새로운 세계로 진입합니다. 세계관의 확장이지요. 그리고 훗날 서부에 군대를 보내고, 연맹군이 도로 넘어오며 두 세계관은 충돌하게 됩니다.

 

이는 단순히 북부와의 전쟁에서 제국이 어떤 피해를 입었느냐와 달랐습니다. 그들이 패배했으니까요. 제국의 중심까지 침탈 당하고 숱한 문명인과 문명국, 지역이 피해를 입고 정복이 되었습니다. 이제 어쩔 수 없이 그들은 같이 할 수밖에 없게 되었죠. 그렇게 귀족 사회에서도 야만인 출신이 연회에 나타나고, 거래하고, 작위와 땅을 주는 경우도 생겼습니다.

 

이 세계관의 충돌은 언제나 거대한 변화를 야기합니다. 그 변화는 강제적인 게 아니고 자연스러운 것이며, 그 과정에서 우리는 적절한 균형점을 찾아가기 마련이고요. 물론 그 과정에서 피가 흐를 수도 있고, 비극이 생길 수도 있으며, 누군가가 무엇은 얻는 만큼, 누군가는 모든 것을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변화라는 건 언제나 좋은 것만을 이끌어내는 게 아니니까요. 하지만 일단 발생하면 막을 수 없습니다. 그 상황에서 어떻게 헤야 하느냐가 아니라,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일 뿐입니다. 모든 것이 새로운 세계를 보고도 당당하게 그것을 탐구하며 익히고 배워 탐험했던 유릭처럼 스스로 미지를 향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지 않아도 충분할 겁니다. 그들 문명인이, 그리고 서부인이 결국 세계관의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처럼요.

 

 

백수귀족 작가의 작품 중 두번째로 본 작품입니다. 애초에 킬 더 드래곤을 재밌게 본 입장에서 이번 작품은 하나의 보증이 있었죠. 백수귀족이라는 넉자로요. 강력한 힘을 지닌 주인공이 견인하는 작품이었기도 했지만 너무 자연스러운 전개와 훌륭하게 사용한 열린 결말까지.

 

누구에게든 무난하게 추천할 수 있을만한 수작입니다. 밀도 있는 작품이었고 재밌는 작품이며, 중간 중간 작가의 통찰이 보이는 문장들 역시 볼만한 부분들이기도 했습니다. 으레 나올 수 있는 억지나 캐릭터성의 붕괴, 모순이나 설정붕괴 같은 것도 없었고 모든 캐릭터들이 선역이거나 악역으로 이분화된 것도 아니며, 개인이 가질 수 있는 당연한 욕구와 추구, 입장이 잘 드러나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앞서 말했듯이, 작품의 전개를 위해 필요한 사건이나 캐릭터의 입장, 이유를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작품의 흐름에 맞게 캐릭터의 입장과 욕구, 추구를 합치시키는 데 있어서 아주 능숙하고 그건 실력 있는 작가일수록 자연스럽게 다루는 방식이죠. 그만큼 백수귀족 작가의 필력은 상당히 뛰어나다는 거고 어떤 작품이든 무난하게 볼 수 있는 수작급은 될 거라는 기대를 줍니다. 아마 그 기대를 쉽게 배신할 거 같지는 않네요.

 

또 몇가지 요소를 짚어보자면, 작품 내에서 영혼, 신, 사후세계에 관한 이야기들이 나오고 이것은 곁다리처럼 지나가는 것처럼 보여도 실은 작품 시작부터 끝까지 함께하는 줄기가 됩니다. 마치 현실에서의 우리네 삶과 종교적, 혹은 내세적 세계가 이분화되어 존재하는 것처럼 현실적인 전개 속에서 사후세계와 영혼은 어디로 가는가, 누구의 품으로 가는가에 대한 논의는 꾸준히 이끌어가집니다.

 

유릭이 하늘산맥을 넘고 선조들의 영혼이 하늘산맥 너머 영혼의 세계로 간다는 말을 믿었는데, 똑같이 사람이 사는 세상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번뇌하는 순간들이 나옵니다. 그러한 두려움과 불안감에서 그는 검은 그림자 환상을 보게 되기도 하고, 루를 믿기도 하죠. 그러다 자신의 정체성이 사랑과 자비가 아닌 전사적 기풍에 있다는 것을 재확인하고서는 루의 펜던트를 버립니다.

 

그리고 울가로 쪽에 관심을 가지게 되죠. 스벤과 함께 하는 여정에서 스벤의 실수와 실패를 보기도 하고 결국 그는 아주 오랫동안 무엇을 믿어야 할지,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라는 질문 속에서 정신적 방황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결국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새로운 질문 속에서 번개를 맞고도 살아 남은 그는 자신의 의지만을 확신하게 되며 모든 신성을 거부하게 되죠.

 

이제 자신이 죽어 영혼이 어디로 가느냐보다 내가 살아서 무엇을 하느냐가 더 중요한 세계관을 형성한 것입니다. 그게 단지 유릭이라는 개인 단 한 사람의 것이라고 해도. 고트발은 꾸준히 그를 루의 품으로 돌려 놓고 싶어 했으나, 늑대는 매어둘 수 없는 것처럼 탐험가는 어딘가에 뿌리 내리는 사람이 아니죠. 설령 그가 서부인이고 서부의 야만인으로 살았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 해도요.

 

그가 진정 위대한 이유는 자신의 의지로 선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금기와 신에 의해 제약 받는 뭇 사람들과는 다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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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트체크] 사형 집행하면 한·EU FTA 파기되나
https://www.yna.co.kr/view/AKR20210902054700502

(중략)

◇ FTA 협정문 '사형 금지' 내용 없어…유럽의회, 사형 중단 권고

한·EU FTA 협정문을 보면 한국이 사형을 집행하면 협정이 취소된다는 내용은 없다. 인터넷상 주장처럼 사형 집행 중단이 한국과 EU간 FTA 체결의 전제 조건은 아니었던 셈이다.

협정문 서문엔 "1945년 6월 26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서명된 유엔헌장과 1948년 12월 10일 유엔 총회에서 채택된 세계인권선언에 대한 약속을 재확인한다"라는 인권 문제와 관련해 포괄적으로 합의한 내용이 포함됐을 뿐이다.

산업통상자원부 관계자는 2일 연합뉴스에 "우리나라가 사형을 집행하면 FTA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취지의 내용은 한·EU FTA 협정문 어디에도 없다"며 "협정문에 없는 내용을 근거로 FTA를 취소할 수는 없다"고 설명했다.

협정문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우리 정부가 사형 집행이 EU와 FTA를 체결하는 데 도움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것으로는 보인다.

(중략)


"법무부, EU에 사형집행 안한다는 서약서를 제출" 보도내용은 사실과 다름
https://www.yna.co.kr/view/RPR20100319021000353

(중략)


외교통상부는 2008. 9. 법무부의 동의하에 프랑스에 있는 유럽평의회(Council of Europe, EU가 아님)에 외교 서한을 송부, 사형不집행을 조건으로 협약에 가입하겠다는 내용을 전달하였음

유럽평의회의 '범죄인인도에 관한 유럽협약'(회원국 47개) 가입시 동 협약에 의하여 인도되어 오는 범죄인에 대하여는 사형집행을 하지 않겠다는 내용임

이는 우리나라가 사형을 일반적으로 집행하지 않겠다는 내용이 아니라, 위 협약 가입국가들이 사형집행을 하지 않으므로 상호주의 원칙상 동 협약에 의하여 인도되는 범죄인에 대하여는 사형을 집행하지 않겠다는 것임

이러한 내용은 범죄인인도조약 체결시 일반적으로 포함되는 내용이며, 우리나라와 조약이 체결된 30개 국가중 미국, 프랑스 등 16개 국가과도 같은 내용의 조항이 들어 있음

(중략)

 

 

1.해당 조약은 존재하지 않음.

2.당시 한국 정부 스스로 EU와의 FTA 협정에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고 판단 한 것 뿐.

3.일본 등 사형을 실행하고 있는 국가는 있지만 외교, 무역 등 국제적으로 문제가 되지는 않음.

4.김영상 정부 후기, 사형제 폐지는 민주진보 진영의 숙원이었기에 실질적 폐지, 미집행은 민주화 이후의 영향이 더 큰 것으로 필자는 추측.

5.한 때 퍼졌던 서약서 제출 역시 해당 사실이 아님.

6.서약서 관련 팩트는 범죄인 인도와 관련된 것으로, 협약 가입국이 사형집행을 하지 않기에 상호주의 원칙에 따라 인도되는 범죄인에 대하여 사형을 집행하지 않겠다는 것.

7.한국이 사형을 재집행 한다고 해서 국제적인 비판은 있을 수 있으나 유의미한 외교적 불이익은 없을 것으로 예상.

8.사형 집행 시 EU FTA 파기는 이러한 맥락이 와전된 것으로 추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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