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분제 사회에서 애국자는 국왕 개인에 대한 충성과 동일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왕정에서 공화제로 넘어가던 시기 애국자란 잠재적 반역자나 증명된 반역자, 혹은 잠재적 반체제분자에 가까웠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은 애국이라는 프레임을 반역자들이 선점했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이것을 알고 선점한 것인지, 아니면 본능적으로 유리한 명분을 찾아간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쿠데타를 2번 범하고 쿠데타 시도를 최소 2번 이상 미수에 그친 진영이 스스로를 애국보수라 칭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심지어 그들이 애국을 증명하는 대상이 외적이 아니라 자국민이라는 점이 더더욱 그렇다. 그들이 비록 잘못된 가치관을 가지고 정치적 행위를 하고 정책을 이끈다면 그것은 부족한 현실 감각과 무능의 영역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영국의 리즈 트리스는 이데올로기에 매몰되어 비현실적인 정책과 무능을 통해 자국에 심대한 피해와 위기를 가져왔지만 반역적인 건 아니었다.
따라서 한국의 애국보수라는 자들이 반역적 정권과 정신에서 결별하지 않는다면 그들이 매국적인 적성 집단이라는 평가에 억울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들의 정신이 결국 매국적이고 반국가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개인의 행동은 예측하기 어렵다. 사회의 변화 역시 그렇다. 그 중 난이도를 따지자면 개인의 행동을 예측하기가 더 어렵다. 사회의 변화는 거대한 흐름으로 읽을 수 있고 작은 변수보다 큰 변수에 흐름에 변화가 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인에게는 아침에 늦게 일어나 지각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하루 일과와 기분에 큰 변화가 일어나고, 누군가는 그대로 퇴사해버리는 일까지 벌어진다. 물론 이것이 흔한 일은 아니겠지만, 그만큼 개인에게 변수는 변화폭의 스펙트럼이 훨씬 크다는 것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사회의 변화폭은 점진적으로 쌓여온 요소들의 총합이거나, 한 개인의 삶을 초월하는 단발적인 거대한 스트레스에서 비롯된다는 의미가 된다.
이러한 변화를 통해 어떻게 변화할 것인지 예측하는 것은 개인이든 집단이든, 사회든 쉬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하위 층위에서 쌓여오는 압력은 사회적 분위기로 대표되는, 인지적 환경에 의해 모두 느껴올 수 있다. 문제는 그 압력이 결국 폭발했을 때 좋은 일은 아닐 것이라는 건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식견 있는 자, 안목이 있는 자들에겐 더더욱 어렵지 않을 것이다.
세상만물은 임계를 넘으면 성질이 변한다. 단순 물질부터 시작해서 사회적 현상까지, 특정할 수 있는 개별적 사건이 임계점에 다다를 경우 성질이 변화하고 그것은 본래의 것보다 더 큰 에너지를 가질 수밖에 없다.
그것은 대체로 파괴적이거나 이전과는 다른 것이 된다. 물이 끓어 수증기가 되고, 질량이 임계를 넘어 블랙홀이 되듯, 단순한 시위나 집회가 혁명이 되어 사회 체제를 골격부터 바꿔버리고 단순한 경찰의 업무 태만에 의한 개인의 억울함이 사회 전체적인 자력갱생 분위기를 만들 수 있다. 정치가 자원의 분배를 목적으로 한다면 마찬가지로 사회적 압박, 스트레스를 적절히 분배, 해소하여 항구적이고 지속 가능한 체제를 유지하는 것 역시 목적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그러한 정치적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가? 불행하게도, 일부 그렇다고 할 수 있다. 나눠서 지배하라는 것은 아주 오래 전부터 실현되었다. 이것을 스트레스의 분배라는 관점으로 보았을 때, 표적으로 삼을 수 있는 일점 대상에 대한 스트레스가 구분 가능한 타자들에게 벡터를 바꾸어 겨냥하기 때문에 해소된다. 서로가 서로를 증오하고 차별하며 공격하고 서로 성장시키며, 발생한 사회적 스트레스는 일정 정도 해소된다.
그러나 구조적인 스트레스의 원인 자체는 절대 사라지지 않고 일시적으로 해소되어가며 관리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계단식 접근에 불과하다. 결국 사회 총합의 스트레스는 계속해서 상승하고 있고, 도리어 스트레스를 발생시키는 원점들을 다수 형성시켜 전체 시민 사회의 견고함을 분해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이러한 압점壓點들이 한계를 넘어 임계에 다다르게 된다면, 그것은 너무 많은 변수들의 합이기 때문에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사태가 발생할 것이다.
그것을 우리가 흔히 혁명이라 부를 수도 있겠지만, 현대 사회의 복잡성을 고려하면 그러한 표현만으로 설명되고 정의할 수 있는 현상일지 예측할 수 없다. 현대에 와서 전통적 현상들이 다른 형태와 양상으로 변성하여 해석이 달라지는 것처럼 극도의 스트레스가 더 이상 관리될 수 없는 상태에서 터져 나오는 사태가 우리가 흔히 부르는 혁명에 포함되는 정도일까 되물어야 한다.
당연하지만, 힘 있는 자들이 힘을 합쳐서 힘 없는 자들을 압박하면 그것은 누적되고 응집되기 마련이고, 그러한 응집을 분열책으로 일정 정도 해소한다 해도, 시간이 지날 수록 분열점에서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사회적 스트레스는 또 다른 생성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현재의 대한민국이 그러한 임계점에 다가서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그 생각에 반대한다. 현재의 대한민국은 의외로 상당히 스트레스가 해소된 국가에 가깝다. 윤석열 정부 지지율이 30% 안팍이고 매일 같이 참사급 뉴스와 다종다양한 혐오와 차별이 판을 치는 지금 이 시점에서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말할 수 있겠지만, 이는 박근혜 탄핵 심판 당시의 거대한 도파민이 정말 오랫동안 한국인의 뇌리에 꽂혀 있으며, 그 당시 해소된 스트레스가 상당했고, 문재인 정부 당시 보수 진영의 스트레스는 상당한 편이었지만 지지율 70%대가 몇 년 동안 이어졌고, 보수 진영의 호들갑과 다르게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한 여러 정책들이 시행되었다. 물론 문재인 정부 당시 새롭게 생겨나서 효과를 발휘한 압점들이 있었지만, 정부 내내 해소가 발생보다 더 많았다.
유이하게 조국 당시의 논란과 코로나 사태가 어마어마한 스트레스를 발생시켰지만, 후자의 경우 상당히 잘 관리한 케이스이며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적으로 해소되었다. 자연적 문제가 원인이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윤석열 정부의 탄생인데, 윤석열 정부의 수많은 참사와 실패들, 그리고 수많은 부정부패와 매국적 행위, 외교적 실패 등이 사회적 스트레스를 늘렸으며, 경제적으로도 상당한 압박이 발생하고 있다. 그러나 의외로 한국인들이 받아들이는 스트레스는 코로나 스트레스가 완화되면서 총량에서 큰 차이를 발생시키는 건 아닐 수 있으며, 무엇보다 박근혜 정부 탄핵을 겪은 뒤 발생하는 비슷한 종류의 문제들은 이미 한번 겪어봤기에 내성이 생겨버렸다.
즉, 처음 발생하는 일에는 충격을 받지만 두 번째부터는 덜 하고, 세 번째에는 더 약하며, 네 번째, 다섯 번째에는 더더욱 약화되는 것이다. 이를 만성적으로 익숙해지는 것이라 말할 수도 있지만 이것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만성적으로 뿌리 내려진 현상이 될 것인지, 일시적으로 감당하다 어느 순간 거부하는 상황이 나올지 예측하긴 어렵다.
한국은 그래도 지속적으로 부정부패를 줄여온 국가이지만 최근 들어 부정부패는 공개적으로 늘어나고 있고 그에 대한 문제 의식이나 거부반응이 강하지 않다. 이는 한국이 스트레스를 받고 있지만 이미 해소된 바가 커서 감당 가능한 역치가 커져 버렸기 때문이고, 양분화된 혐오 정서 속에서 서로 간의 대화나 타협을 포기하는 양상이 형성되며 아예 현 상황을 인정해버리기에 도달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즉, 더 이상 대화와 타협, 협상보다는 힘으로 승리하는 쪽이 합리적이라는 판단에 도달한 것이다. 이는 이전까지의 진보좌파-민주당 지지 측에서 보여준 가장 특기할만한 상황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이들이 싸우는 법을 배웠고 실전에 사용하길 원한다는 것이다. 이재명의 압도적인 지지는 그러한 의지를 대변하는 것이다. 싸움판에서 잘 싸우는, 잘 싸울 것이라 기대하는 대장을 갈아 치우는 일을 누가 하겠는가. 적들이나 원하는 일이다.
그러한 인정 상태가 도리어 스트레스의 해소를 불러왔다. 대화를 시도했는데 말이 안 통하면 화가 나지만, 저 놈은 원래 저래. 그러니 내가 떠나든 쫓아내든, 아니면 맞서 싸워 두들겨 패면 돼. 라는 판단이 서면 오히려 마음이 편해진다. 말로 설득하며 스트레스를 받느니, 두들겨 패겠다고 정해 놓으면 스트레스를 받을 이유가 없다. 상대의 변화를 기대하기보단 더 쉽고 간단하며, 행위에 따른 결과값이 정해진 일이기 때문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혐오와 차별의 영역이 더 넓어진 셈이지만,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스트레스의 일시적 해소를 의미한다. 앞서 말했듯이 표적으로 삼을 수 있는 일점 대상에 대한 스트레스가 구분 가능한 타자들에게 벡터를 바꾸기 때문이다. 그리고 혐오든, 차별이든, 공격이든 실행되며 일정 정도 해소 된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나뉘어 있을 때보다 서로가 가해자인 상태일 때 감당 가능한 스트레스의 풀이 넓어지는 효과이다.
그런 이유로 현 대한민국의 스트레스가 임계점에 도달하기엔 아직 멀었다고 생각한다. 어떠한 대형 사건이나 그에 준하는 트리거가 발동하지 않는 한 그렇다. 세월호 사건조차도 거대한 충격과 스트레스를 주었지만, 최순실 사건이라는 대형 폭탄에 의한 탄핵까지는 몇 년을 갔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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