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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ㄴ친일매국 비판

한국과 일본/유사 일본인의 도덕적 감수성이 다른 이유에 관한 단상

by Konn 2024. 7.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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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악인의 갱생은 아주 아름다운 미담으로 받아 들여진다. 물론 그것은 좋은 일이고, 아름다운 일일 것이다. 나빴던 이가 착하게 된다니, 얼마나 훌륭한 일인가. 그러나 그것은 정말 좋은 일이기 때문에 좋아한다기 보단, 그들의 컴플렉스에서 기인한 일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 생각한다. 즉, 일본에게는 하나의 컴플렉스가 있다. 패전의 컴플렉스가 문화에 남아 어떤 악인이든 갱생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며, 주인공은 아치 에너미 역시 포기하지 않고 갱생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마치 악의 제국이었던 일본 제국이 건전하고 도덕적이며 국제적 미담으로 여겨질 수 있을 법한 착한 일본인, 착한 일본을 변모했다는 것처럼. 하지만 그것은 일본인들의 의식적인 성찰일 수도 있을지 모른다. 예컨데, 이전과 같은 실수를 겪지 않기 위해 평화 헌법과 그 기반이 되는 사상을 의식적으로 자국민에게 반복 학습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이제 우린 착하니까 나쁘게 보지 말라는 위선의 발로일 수 있다. 겉과 속이 다르고 앞과 뒤가 다른 습성은 일본만의 것은 아니지만, 유독 일본의 것은 지저분한 면모가 있다. 

 

그럼에도 일본의 평화 헌법은 꽤 성공적이긴 했다. 충분히 오랜 시간 외부 확장과 군사적 해결, 모험주의를 지양하게끔 만들었고, 전쟁 수행 능력을 제한해왔으며, 의식적으로 전쟁이나 침략을 위험하고 나쁜 것이라 인식시켰다. 물론 모두에게 그렇지는 않았으며, 제국의 기억과 경험에 향수를 느끼는 이들에 의해 보통 국가화가 추동되는 경우 역시 많았고 오래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일본인들에게 악인의 갱생은 미담이다. 설령 그의 악행이 용서 불가능하고 용서는커녕 대가를 치르지도 않았음에도 말이다.


그리고 바로 이 부분에서 한국과 일본의 정서 차이가 발생한다. 예전에는 도덕 의식이 지금과 같은 수준이 아니었기에 일본식 관점이나 감성, 정서가 통용되었지만, 지금은 다소 극단주의적인 환경이 조성되었다는 걸 감안해도 도덕적 문제의 책임에 아주 민감하고 예민하게 반응한다. 이것은 오히려 심각할 정도라서, 잘못이되 죽거나 몰락해서 다신 일어나지 못해야 한다는 정신으로 함축되기까지 한다. 도덕을 무기로 반인륜적 폭력을 정당화하는 상태인 셈이다.

도덕적 문제에 있어서 이토록 민감한 이유는 아마 한국과 일본의 역사적 경험 차이 때문일 것이다. 현 일본의 도덕 감수성이 일제 패망 이후에 형성된 것이라면, 한국의 도덕 감수성은 일제 이후부터 독재를 거쳐, 민주화 이후 본격적으로 재평가, 판단이 이루어지는 것이 시민 단위로까지 내려왔기 때문일 것이다. 이전까지 한국인들은 도덕적 문제나 판단에 있어서 엄밀하기보단 두루뭉술하고 정교하기보단 통합적이었다. 너도 잘못이 있다던가, 너희 모두 연대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둥. 

 

때로는 잘못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어떻게 보면 일제-군부독재를 거쳐서 사회에 뿌리 내린 일제식 군대 문화의 악습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조선 시대에만 해도 그와 같은 모습은 흔히 찾아볼 수 없었다. 면신례와 같이 어느 사회, 어느 문명에서든 흔히 볼 수 있는 사례 말고, 훈장님이 아이에게 시시때때로 폭력을 휘두르거나 촌지를 요구하거나, 폭언을 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 이것들은 보다 높은 수준의 논의와 판단이 가능한 수준까지 사회 전체의 지적/도덕적 논의 및 경험이 쌓였고, 이러한 진보는 도덕적 문제에 있어서 새로운 답을 내놓으라 요구하게 되었다. 즉, 이게 맞느냐고.

그리고 어느 사회나 그렇듯이, 두 입장으로 나뉘게 된다. 하나는 문제다. 다른 하나는 그게 뭐가 문제냐. 의외일지 몰라도, 사상적 차원에서 현대 사회에서 정치/사회적 사상 및 이념과 무관한 문제는 거의 없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인간의 어떠한 정신적 상태나 감성, 정서, 입장, 가치관은 사회를 이루는 이데올로기에 포섭되어 다뤄지는 요소들로 편입되어 있다. 이데올로기가 그것들을 다루기 때문이고, 그것을 판단하거나 제시하거나 유도하기 때문에 그렇다. 

 

예컨데, 억울한 피해자가 발생했고 이게 이슈가 되었을 때 누군가는 그 자가 약했기 때문이고 힘이 있었으면 저런 일도 없었을 것이라며, 그리고 저런 거 하나하나 다 구제하거나 불쌍하다고 할 필요 없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를 우리는 다양한 태도로 부르는데, 약자가 어떠한 위치와 상태에 있느냐에 따라 민족주의나 파시즘, 전체주의, 군국주의, 인종주의, 극단주의 등 다양한 이름의 이데올로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따라서 어떠한 비정치적 사건에 관해서 어떠한 정치적 입장과 사상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특정한 경향성을 관찰할 수 있게 된다. 극우, 보수적인 사람은 약자에 대한 멸시나 관용이 그 반대 입장에 있는 자들보다 더 협소할 수 있다. 가난한 자를 돕자는 주제에 있어 누군가는 예산과 인력을 통해 그들을 구제하고 돕자고 하고, 누군가는 그들에게 돈만 써서는 안 되고 고기를 잡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고기를 잡는 법을 가르치는 것도 돈과 인력이 필요하지만, 그들은 예산의 숫자를 줄이는 것을 원하는 것이고 논리와 명분은 중요하지 않다. 물론 그 반대 입장에 있는 자들도 예산에 비해 얼마나 효과가 있느냐는 그닥 중요하지 않고 일단 그만한 지원을 했다는 것 그 자체에 만족하곤 한다. 그들의 관심은 의외일지 몰라도, 휘발적인 면이 있다.

여튼, 도덕적인 문제에 있어서 이러한 입장 차이가 사상과 관계가 깊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한 성향이 특정한 정치 이념을 추구하게 되는지, 그러한 이념을 가진 이들이 그러한 성향을 만들어내는 것인지는 알 수 없고, 선후관계를 알기란 아주 어려우며, 둘 다 일 수도 있는 문제이지만, 연관관계는 있을 것이다.

일본은 패전을 통해 일방적인 도덕적 원칙이 강요되었다. 일제 시절의 것을 부정하라는 명령이었다. 그러한 사상을 추종하지 말고 되풀이 하려 하지 말며, 반복하려 들지 말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강대국의 환상은 강렬한 향수를 형성했고 여전히 일제의 영광을 그리워하고 언제든지 복귀할 수 있다면 복귀하고 싶어하는 것 역시 거짓을 아니리라.

그럼에도 일본의 평화 헌법과 평화 체제, 그리고 그러한 평화를 목적으로 하는 사상이 사회에 강요되어 외부적 확장과 공격성을 억제하게 된 것은 분명한 성과일 것이다.

문제는 한국이다. 일제는 패전이라는 결과로 패망하고 실패하게 되었지만, 한국은 입장이 다르다. 일제라는 공통조상에 의해 잉태된 한국의 극우적 사상은 일본과 아주 비슷하고, 유사한 것이지만 완전히 같지는 않다. 이는 한국 사회에서 어떠했는가를 보면 알 수 있다. 한국 극우는 일제 패전의 실패와 다르게 군부 쿠데타와 독재의 연달은 성공을 맞봤다. 식민지 시절은 어떻게 해야 성공해야 하는지를 배운 학교였고, 독재 시절은 그것을 기반으로 실제 성공한 경험을 안겨주었다.

 

지배자의 사상이 성공하는 사상이니만큼, 성공의 방법을 배우고 실습했던 일제와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군부 독재와 그 시기의 성공을 증명해냈다. 그리고 독재가 무너지면서 끝나는가 했지만, 그러한 비열한 방법을 통해 성공한 자들은 여전히 아주 많았고, 그들에 의해 성공의 공식은 무너진 적 없이 이 사회의 혈관을 채우고 있다.

이러한 차이 속에서, 일제의 실패와 반대로 독재와 부정의 성공이 한국의 도덕적 입장의 분열을 발생시켰다. 그리고 일본과 다르게 한국의 도덕성은 피해자적 입장에 기인했기 때문에 책임론에 아주 민감했고, 이것은 진보와 보수 양쪽 모두 그렇다. 단, 우리편과 남의 편에게 다르게 작동하며, 우리편도, 남의 편도 아닌 이들에게 역시 마찬가지다. 이해관계가 없으니 오히려 공격하기 쉬울 때도 있는 법이다.

이러한 도덕에 관한 피해자적 입장이 가해와 책임론에 대해 민감하고 예민하게 반응하는 이유의 일정 이상의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는데, 일본이 가해자였던 역사적 사실에 대한 부정이 인지부조화를 일으켜 제국의 영광을 재현하고 싶지만, 동시에 우리는 착한 일본이며 국제사회의 충실한 일원이라는 것을 인정 받고 싶어한다. 정확히는, 사실로 여겨주길 바란다. 그렇기에 그러한 정신이 가미된 문화적 창작물들이 나오는 것이고, 그에 대한 조롱과 비판이 한국에서 활발한 이유이다.

한국에서 도덕/윤리 논란의 문제는 그것이 두가지 관점에서 평가된다는 것이다. 이는 기실 한국 뿐만이 아니다.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고, 미국에서도 보수와 진보의 입장 및 관점에 따라 사회의 거의 모든 이슈와 요소에 대해 다르게 판단한다. 한국의 문제는 그것이 자생적인 것이 아니라 식민지 이후의 역사적 맥락에 의해 형성된 것인데, 그 중 보수의 관점이 반국가적이라는 점이다. 

 

그 이유는 그들의 판단이 극우보수적 관점에서 오판 내지는 적절치 못한 근거에 기인했다는 것보다, 극우보수의 사상적 뿌리가 바로 일제 식민지 시절 매국노-군부독재 당시의 반역자와 그들과 같은 사상을 가진 자의 것에 기인했기 때문이다.



표현형은 비슷할 수 있으나, 그 유전형이 한국이 다른 나라와 구별되는 이유로 반국가적인 셈이다. 다른 모든 나라보다 미국과 일본에 유독 패배주의적이고 굴복적이며, 숭앙하는 것은 그들이 단순히 강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감히 대들어서는 안 된다는 사상적 유전성 때문이다. 극우보수는 구한말 조선과 한민족에게서 저열함과 열등함을 보았고, 그것을 시대적 특성이나 역사적 흐름의 결과로 인식하지 않고 일제가 그토록 주입하고 싶었던 그것, 한민족은 열등하다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깨닫고 사회적 성취를 이룬, 혹은 그런 이들과 동질성을 느끼는 이들에 의해 반민족적, 반국가적 가치관은 지배적 사상을 이루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깨우친 존재로, 기존의 열등한 한민족과 다르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그들은 한민족을 자신과 분리하여 생각하고, 그 생각이 표현으로 나오곤 한다. 

 

정몽준 아들의 미개 발언이나, 수많은 극우보수 인물들에 의해 마치 자신이 한민족이 아니거나 다르다는 전제로 말한다. 평론이라고도 말하기 어려운 촌평이지만, 그들은 그렇다. 미개하고 열등한 한민족과 그러한 열등함에서 벗어난 자신은 다르다고.

그렇기에 한국과 한국인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은 도덕적이고, 성공의 방법론과 함께 한국을 파괴하는 것이 정의로운 일이 되어버린 것이다. 물론 그들은 그러한 인식 자체가 없을 것이다. 의도적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장대한 국가 붕괴 계획을 작성하고 이행하며 그렇게 망가진 한국을 일본이나 미국 등지에 판매할 예정인 것도 아니다. 그저 그들의 사상과 가치관이 결과적으로 그러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이다. 국가 기밀이 유출되었어도 우방국이라면 문제되지 않는다는 근본 없는 안보 의식과 자국 대기업이 수십 년 동안 쌓인 노하우와 기술을 기반으로 일본에 압도적 점유율을 가진 플랫폼을 그대로 넘겨주려 하며, 일본의 초계기가 저공으로 위협 비행을 해도 총 맞은 것도 아닌데 뭐가 유난이냐는 것이다. 

 

특히, 유독 일본과 관계되면 합리성이나 이성이 말끔히 지워지고 모든 분쟁과 갈등은 한국과 한국인이, 일본은 모든 정당성과 올바름을 전제한 채 문제를 다룬다. 즉, 우월한 일본은 무오하고 열등한 조센의 잘못이라는 것이다. 결국 한국이 약소국이고 일본이 강대국이라는 정명한 근거조차 있다. 그들에게 강자의 폭력은 절대적 선이고 약자의 피해는 마땅히 받아야 할 업보이기 때문에.

그런 맥락으로 역사관을 살펴보면 일본 극우와 한국 극우의 역사관이 일치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들에게 있어서 (부끄러운) 역사는 잊어야 할 것이다. 잘못에 대한 책임은 방기되어 책임론을 정치적 의미로 해석하며, 누군가 역사적 잘잘못을 따지거나 책임을 부여하려고 한다면 이미 지난 일이거나, 다 끝난 일, 옛날 일보다 지금과 미래를 더 중요시 한다는 둥의 변명으로 일관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과거의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않았을 때 그 문제는 훗날 다시 돌아온다는 것이다. 즉, 끝나지 않은 일을 끝났다고 치부하며 앞으로 나아갈 수는 없다는 뜻이다. 

 

끝나지 않았으니 한일의 역사 문제가 꾸준히 지적되는 것이다. 한일 뿐 아니라 어느 나라든 그러하다. 그게 싫다면 과거의 문제를 적절하게 끝맺어야 하며, 사리에 맞지 않게 일방에게만 유리한 매국적, 반국가적, 반민족적인 결정은 다시금 문제를 제기할 껀덕지를 제공한다. 그렇기에 어떤 문제든 적절한 지점에서 합리적으로 처리되어야 한다.

그러나 한일 극우세력의 이해관계는 한국이 일방적으로 잘못했고, 일본은 무오하며, 그렇기에 역사 문제에 있어서 한국은 지난 일에 연연하지 말아야 하며, 일본은 과거의 죄악에서

자유로워야 한다. 그렇게 죄는 있으나, 책임은 없어 진다. 그들의 역사관/가치관이 곧 그러하다. 유리한 책임은 추궁하고, 불리한 책임은 회피하거나 더 약한 자에게 떠넘겨아만 한다는 것이다. 한국 극우가 일본 극우와 이해관계가 일치하거나, 일치 한다고 믿기에 반국가적인 행위를 서슴지 않는 것이고, 그러한 가치관을 가진 자들이 국민 절반에 가까운 것이 현실이다.

우리는 모두 착각하고 있다. 외부 정체성이 너무 오래 뿌리 내려서 그것이 우리의 것이라 오해하고 있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정체성이 확립되지 않는 한, 이 나라는 아직 건국되지 않았다.

일본의 극우 세력은 죽은 적 없지만, 약화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극우 세력은 확실하게 권력을 확보했고, 그 정체성을 감추지 않아도 된다. 한국 극우는 극단화 되는 현실정치 속에서 한번도 제대로 패배한 적 없는 역사적 경험 속에서 피해자에게 책임을 부여하기만 했다. 그리고 한국의 2000년대 이후로 강화된 도덕 감수성은 그들에게 아주 껄끄러운 것이 되었다.

이념에 따른 도덕적 판단은 다를 수 있지만, 도덕 감수성은 의외로 비슷하다. 이것은 서로 같은 게 아니다. 무엇을 잘못으로 볼 것인가와 그에 대해 얼마나 책임을 추궁할 것인가, 얼마나 강한 처벌을 요구할 것인가에 대한 판단은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극우보수의 도덕적 판단은 기본적으로 객관성보다는 진영논리가 우선한다. 

 

자기 진영의 인사의 잘못은 입을 다물거나, 일부 변명에 쓸 수 있는 요소를 전체로 둔갑시켜 잘못이 아니라는 식으로 옹호한다. 반면 반대 진영의 잘못에 대해서는 강력한 도덕적 감수성을 발동한다. 조국에 대해서는 죽을 죄라고 비난의 축제를 열었으나 같은 진영에서 발생한 동일하거나 더 심각한 문제에 대해 그들은 입을 열지 않고 보려고 하지도 않았다.

문재인 정부 시절에 있었던, 심지어 조작되었던 문제들에 대해 같거나 더 심각한 경우에 대해 역시 마찬가지다. 겉으로는 욕하고 있지만 그저 말 뿐이고, 행동도 실제 결정에 있어서도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다. 자기 진영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도덕은 객관성이 결여되어 있고, 선택적이다. 옳고 그름의 문제에 있어 이러한 태도는 흔히 이중성이라 부르고, 때때로 위선적이기도 한 것이다.

따라서 역사적 맥락에 의해 한국인에게 형성된 도덕적 감수성은 잘잘못을 따지는 데 발전하게 되었고, 진영논리와 결합하여 니 잘못에 강력한 지적과 비판을 가하게 되었고, 사회 일반에서는 논란을 발생시킨 사람에 대한 집단적 공격이 도덕적 비판이라는 명분 하에 이루어진다. 극우보수와 일본인들은 이러한 기질을 미개하다고 말하지만, 옳고 그름에 대한 첨예성은 사회 발전의 자양분이 되며 더 도덕적인 사회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된다. 

 

그들이 그러한 비판을 가하는 이유는 그것이 일본인의 기질과 다르기 때문이다. 말했듯, 그들은 보복보다 갱생을 더 아름다운 것으로여긴다. 일반적이라면 그것이 맞겠으나, 그 갱생에 반성은 있을지언정 책임은 없다는 점에서 악하며 그들 스스로의 잘못으로부터의 갱생이 제대로 이루어졌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역사적 문제를 덮고 나아가자는 일방적으로 유리한 주장을 발전적이고 훌륭한 것으로 둔갑시킨다. 책임 지지 않았다면 끝난 게 아니고, 반성과 갱생은 내제적인 변화일 뿐이다. 잘못을 했으면 벌을 받아야 한다. 한국인이기 때문에 하는 말이 아니라, 그게 옳다.

그러한 이유로 패전 했으되 진정 책임을 져야 하는 다양한 영역에서 정치/외교적 이유로 정말 많은 면제를 받은 일본과 독재 이후 책임지지 않고, 심지어 책임을 경감시켜주기까지 했던 역사적 사실 속에서 극우보수와 일본인들이 요구하는 갱생이란 이제 우린 착해졌어요라는 위선에 불과하고, 책임진 게 없는 것을 넘어 책임을 거부하거나 그러한 시도를 무너뜨리고자 하는 이들은 여전히 원죄를 벗어던질 생각 없이 사악할 수밖에 없는 연유이며, 한국인에게 형성된 책임론은 우리가 비판했던 것을 스스로 되풀이 하지 않고자 하는 강박이 된 동시에, 극우보수에겐 보고 배우며 답습해야 할 것으로 위안부, 군국주의적 군대 문화, 쿠데타와 군부독재, 비밀주의적 엘리트 정치, 범죄 사실에 대한 무책임적 부정 내지는 꼬리 자르기 등 일본을 비판하던 요소들을 보수 정권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이유이자, 진영논리와 결합하여 너희 진보좌파들에 대한 무제한적인 공격을 자연스럽게 하고자 하는 근거가 된다.

 

그렇게 만들어진 한국은 한민족이라는 정체성과 한민족보다 우월한 유사 일본인이라는 정체성으로 두 개의 세계가 형성되었고, 이 두 개의 정체성에서 기인한 두 개의 세계관이 서로 다른 도덕적/윤리적/정치적/사회적 충돌을 빚는 원인이다. 어째서 극우보수가 일본의 정체성과 유사하며, 일본의 이해관계와 일치하는 행위를 서슴지 않게 저지르며 그것에 문제의식은커녕 올바른 것이라 여기는 지 의아할 필요가 없다. 그들 스스로 일본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많은 것을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차이에서 같은 문제를 바라보는 도덕적 관점이 갈리는 것이고, 도덕적 감수성이 다르게 작동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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