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hrodinger

블로그 이미지
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며,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 - E.Kant
by Konn
  • Total hit
  • Today hit
  • Yesterday hit

'재벌'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23.02.02
    한국은 충분히 경쟁하는 사회인가?
  2. 2022.12.27
    자본주의의 한계에 대한 단상.
  3. 2016.12.06
    한심하기 짝이 없는 재계 인사 국정조사.
  4. 2014.01.21
    주제를 알라? 2
반응형

자본주의는 경쟁을 골자로 한다. 이것은 핵심 원리이다. 경쟁하지 않는 자본주의는 발전할 수 없고 발전하지 않는 자본주의란 존재할 수 없다. 자본주의는 숙명적으로 경제성장을 해야만 하는 체제이며,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자본주의라 부를 수 없거나, 실패한 것이다.

 

경쟁은 많은 스트레스를 발생시킨다. 안주하거나 쉴 수 없이 계속해서 발전해야만 한다. 더 나은 시스템을 도입하거나, 기존의 비효율을 정리하거나, 새로운 산업과 사업을 고안하고, 투자하며, 그러기 앞서 타당성을 평가해야 한다. 인재를 채용하고 저성과자를 해고하거나 좌천시킨다. 사업이 성공하면 다시 분배하여 규모를 키울 수도 있고 내실을 다질 수도 있다. 실패한다면 그 손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해야만 한다.

 

그럼에도 경쟁에서 패배한다면 도태되어 없어지거나 흡수되는 결말을 받아들여야 한다. 원하지 않더라도 이루어지는 일이다.

 

그러나 경쟁은 스트레스를 발생시키고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부담을 달가워할 개인도, 조직도 없다. 또한 사람은 경쟁보다 협력이 더 쉽다는 것을 알고 있고 그러한 협력이 더 많은 것을 가져다줄 수 있다면 그렇게 하는 동물이기도 하다. 이것은 자본주의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정치 역시 마찬가지이고, 기실 사람이 존재하고 집단이 존재할 수 있는 모든 곳에서 발생하는 일이기도 하다. 경쟁은 투쟁이고 투쟁은 이익과 동시에 손실을 내포한다. 그러한 손실을 최소화하고 이익을 나눌 수 있다면 그것을 선택하지 않을 이유 또한 없다.

 

 

한국 자본주의 시장에서 기업은 충분히 경쟁하고 있는가? 그런 기업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정 이상의 위치에서 경쟁은 크게 약화된다. 어차피 모두 아는 사이이고 이 좁은 국토의 좁은 공간에서 그들은 서로를 영원히 피할 수도 없고, 접하지 않을 방법 역시 없다. 어느 정도 규모가 된다면 그들은 어떻게든 알고 지내게 된다. 이는 인적관계망의 형성으로 이어지고, 그러한 관계망에 속하게 될 기회를 말한다.

 

재벌, 대기업은 가급적 경쟁하기보다 담합하는 것이 한국 시장에서 더 큰 이익을 발생시킨다는 것을 알고 있다. 물론 이것은 불법이고 부패이다. 그러나 이 부패가 충분히 사업성 있는 수단이 되기 위해서 중요한 것은 재벌의 존재이고, 그 재벌의 역할은 정경유착이다. 대기업은 많은 돈을 가지고 있고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지만 어디까지나 기업이다. 핵심은 그 대기업을 지배하는 재벌이며, 재벌이 수많은 대기업과 계열사를 지배할 수 있는 가장 큰 조력은 정치권의 협조에서 나온다.

 

그들은 재벌 대기업을 해체하거나, 그들과 반목하지 않는다. 어차피 그들에게 후원과 지원을 받는 것이 더 큰 이익이라는 것 역시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기업이 어느 정도 성장하면 다른 재벌 대기업이 그것을 인수해버린다는 말이 있다. 특히 중요하고 미래 가치가 큰 기술을 가지고 있거나 개발한 회사들이 그렇다. 부정한 방법을 써서라도 그들을 강제로 품안에 넣어버린다. 삼성이 그러하듯이.

 

한국의 수많은 제품은 경쟁보단 담합에 의해 가격이 조정된다. 닭, 소고기부터 시작해서 우리가 아는 많은 제품과 상품들은 담합에 노출되어 있다. 간혹 적발되어 처벌받는 경우는 있지만 그건 아무런 의미도 없다. 담합을 해서 얻는 이익이 처벌 받아서 발생하는 손해보다 압도적으로 크기 때문이다.

 

물론 전혀 경쟁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경쟁하는 업계도 있고, 경쟁하는 업체들도 많다. 그러나 먹을 게 있고 경쟁에 자신이 없다면 담합은 어떻게든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기도 너무 쉬운 환경이고 그 대가 역시 너무 작다. 그렇다면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앞서 언급했듯, 이러한 습속은 경제 분야가 아니라 다른 분야에서도 쉽게 발생한다. 가령 정치를 보자. 민주당과 국힘당은 서로 경쟁하는 관계이지만 동시에 협력적인 모습 역시 찾아볼 수 있다. 기본적으로, 소수의 집단이 너무 오랫동안 경쟁하다보면 그들의 경쟁은 경제적인 계산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담합적인 형태가 된다.

 

A라는 주제에 대해 찬성과 반대 입장으로 갈라져 있다면 둘은 서로 하나의 주제를 두고 경쟁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A 주제의 찬반 영역을 지지하는 사람들에게서 지지를 나누는 것일 뿐이다. 두 집단 모두 찬성한다면 그 주제가 받아들여지는 것과 별개로 그 주제에 관해 반대하는 지지 집단은 붕 떠버린 처지가 된다.

 

그리고 그들의 지지를 받고자 하는 이들은 A 주제에 관해 반대하는 입장을 취해 반대하던 집단의 지지를 차지할 수 있다. 즉, 지지자들은 하나의 자원이 되고 주제에 대한 찬반 입장은 어떤 자원을 차지할 것인가에 대한 입장표명이 된다. 그러한 이유는 명확하다. 사람이 모이면 이권이 형성되듯, 그들은 지지자들에게 위임받는 권력, 그 권력이 가져다주는 특혜와 경제적 접근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는 더 이상 옳고 그름의 목적과 믿는 바에 따른 신념의 영역이 아니라 경제활동에 가까우며, 이러한 관계는 적대적 공생관계라 말할 수 있다. 한국 보수와 중국/북한의 관계가 그러하고 진보 언론과 보수 언론의 관계가 그러하다.

 

북한이 정말 증오스럽다면 그들의 멸망을 위한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였어야 하지만 그들은 무대응으로 일관했다. 언론사는 기본적으로 자본을 추구하는 기업이며 진보 언론과 보수 언론은 표적으로 삼는 고객층이 다른 것 뿐이다. 그들이 사회정의와 이념적 규범을 위해 존재한다면 입장이 다를지언정 편파적이지 말아야 하며, 해석이 다를지언정 가짜뉴스와 의도적 선동이 있어선 안 된다.

 

 

그렇다면, 한국의 다양한 집단들은 정말 건전하게 경쟁하고 있는 것이 맞을까?

 

다시 말하지만, 경쟁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LG가 스마트폰 사업을 접었던 것처럼. 그러나 온전히 경쟁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하림, 마니커, 사조원 등이 닭고기 가격을 담합하여 막대한 이익을 나눠먹었듯이.

 

그들이 진짜 경쟁이라는 걸 한다면 재벌가 오너들이 개소리를 하고 사업적 실패를 겪으며 기업가치에 손해를 입힐 때 그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도태되어야 한다. 기업들이 시장에서 더 큰 지분을 확보하고 경쟁력을 갖추고 싶다면 개발에 투자해야 하고 가격경쟁이 됐든 판로 개척, 효율적인 시스템을 도입하고 검증해야 한다.

 

만약 정치와 사법이 자본으로부터 영향력을 덜 받는다면 그들의 부정부패에는 이익보다 강력한 손해를 주어 함부로 부정부패를 저지르지 않도록 할 것이다. 부정부패는 우발적인 것이 아니고 계획적인 것이기에, 그러한 부패를 계획할 때 반드시 리스크를 고려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에서 어떤 기업은 도태되고 약화되어야 하며, 어떤 기업은 성장하고 성공해야 한다. 그럼에도 한국에서 밑에서부터 올라온 새로운 기업이 등장하는 것보단 기존 재벌 대기업이 출자하여 만들어진 기업이 시장의 한 영역을 차지해버린다. 한국 시장은 자본의 규모와 별개로 좁은 곳이다. 그러한 행위들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국토가 좁은 나라의 숙명이라면 숙명이다.

 

그렇게 한국 자본주의의 구성원들은 경쟁을 기피하는 편이다. 전혀 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상대방을 파멸시키거나 일정 이상의 손해를 발생시킬 정도로 경쟁하지 않는다. 잘 돌아가고 있는 카르텔에 파문을 발생시켜서 좋을 것이 뭐가 있을까. 스스로의 오판과 실패로 망하는 것에 막대한 돈을 쏟아부어 살려줄 정도는 아니더라도 일부러 도태시킬 정도의 관계는 아니다. 망하지 않는 한 그들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매력적인 협력 대상이다.

 

그렇게 그들은 더 쉬운 방법을 찾았다. 경쟁하기보다 경쟁사끼리 모여 담합을 했고, 이는 시장에 대한 독과점 구조를 만들었다. 독과점 구조는 막대한 이익을 발생시키지만 소비자들에게 긍정적일 수는 없다. 제품 개발과 가격 경쟁을 해야할 이유가 없다.

 

 

또 다른 영역을 바라보자.

 

한국에서 성공하기 위해 공부를 잘해서 더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좋은 기업에 입사하거나, 장교가 되어 열심히 진급을 하는 방법과, 어려운 국가고시에 합격하여 전문지식을 갖춘 엘리트가 되는 방법 등이 있다. 

 

이것은 아주 상식적인 이야기지만, 단순히 자기 능력과 실력만으로 달성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순진하다. 부모의 재산이나 지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소위 라인이라 불리는 파벌 싸움을 말하는 것이다.

 

 

한정된 자원을 더 많이 차지하기 위해서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자신의 힘을 기르는 것이다. 그러나 혼자의 힘은 한계가 있고, 혼자서 차지할 수 있는 자원 역시 한계가 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협력/담합하기 마련이고, 이는 집단 내 파벌을 형성시킨다. 조직사회에서는 흔히 라인이라고 불리는 그것이다.

 

어떤 유력자들이 있고 그 유력자들에겐 자신의 라인이 있다. 대개 더 좋은 사업 아이템을 물어오고, 그것을 자신과 자기 아랫사람들에게 분배하며, 성과를 내면 그 라인 모두의 공이 된다. 그러한 성과를 기반으로 승진하거나 조직 내 요직을 차지하고, 더 뛰어난 인재를 자기 라인으로 끌어들인다.

 

그렇게 끌어들인 인재을 밀어주고 성과를 내면 라인 내 윗사람의 공이 되기도 한다. 사원의 공이 대리의 공이 되고, 대리의 공이 과장의 공이 되며, 과장의 공이 부장의 공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식으로 조직 내 한정된 자원을 라인이라는 파벌을 형성하여 차지하는 것이다. 당연히 다른 파벌과의 경쟁은 그러한 자원을 두고 다투는 것이고.

 

 

그렇다면 그러한 관점에서, 자신의 성공이 온전히 자신의 공일 수 있겠는가? 라인으로 대표되는 사내정치에 가담하지 않고 한정된 자원을 차지하기란 어렵다. 사관학교 출신이 아니라면 진급에서 불리한 장교들이 그렇듯이 말이다.

 

당연히 사내정치는 어느 나라에서든 있고, 파벌 싸움 역시 당연히 발생한다. 그리고 그것은 조직 내 경쟁이 되어 긍정적으로 작동하기도 한다. 경쟁은 발전의 동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비사관학교 출신 장교들의 진급이 다소 부당하게 막히는 사례처럼 한정된 자원에 대한 경쟁은 아주 강력하다. 그리고 그 자원을 차지하기 위해 라인을 타지 않고 파벌에 속하지 않는 이들은 무조건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 혼자서 다수와 경쟁할 수 없으니 말이다.

 

즉, 라인과 파벌은 반드시 긍정적으로 작동할 수만은 없다는 것이다. 때로는 더 부정하게 작동하기도 하며, 이러한 형식의 관계는 결국 인적관계망이라 이름붙혀 지고, 그것들이 부정적으로 작동한다면, 우린 그러한 예시 중 하나로 엘리트 카르텔을 꼽을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 한국의 정말 중요한 집단에는 이러한 파벌, 라인이라는 혈관으로 조직되는 엘리트 카르텔이 형성되어 있다. 이는 공부를 아무리 잘하고 실력이 아무리 뛰어나며, 사법시험, 행정시험, 외교관 시험, 로스쿨 졸업, 변호사 시험, 의사시험 등 전문직 엘리트가 될 수 있는 자격시험에 통과한 이들이라도 인맥이라 불려지는 엘리트 카르텔의 도움이 없다면 정말 중요한 요직에 접근하기 어렵다는 말이 된다.

 

이 나라에서 성공하기 위해서 중요한 건 그 엘리트 카르텔에 소속될 수 있는가와 얼마나 핵심에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느냐에 달렸다. 물론 실력이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어려운 일이지만, 재벌 2세와 3세, 유력 정치인들의 자녀들이 어떤 노력을 해서 그러한 카르텔에 소속될 수 있었을까? 그들이 노력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지만, 태생부터 카르텔에 소속된 것과 다름 없는 이들과 흙수저 출신 개천의 용과는 혈통이 다를 수밖에 없다는 건 인정할 것이다. 그 혈통이 꽤 큰 장벽이라는 점 역시.

 

파벌싸움, 라인, 엘리트 카르텔에 속하여 인맥을 동원하는 것 역시 자신의 실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것이 공정하지 않다는 점이다. 시험의 공정성에 맹목적인 신앙을 보이는 자들이 시험 외적인 불평등한 인간 관계로 잠재적 경쟁자를 탈락시키고 차지한 자원을 나누지 않는 것에 분노하지 않는다면 이중적인 것이고 위선적인 행동이다.

 

물론 모든 파벌, 라인이 잘못됐다는 건 아니다. 그것이 긍정적으로 작동하고, 자연스럽게 형성된다는 것 역시 인정한다. 하지만 엘리트 카르텔은 그것과 다르다. 그들은 한정된 자원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이 아니라 한정된 자원을 남과 나누지 않고 독점하기 위한 담합에 가깝다. 그들이 외부에 언터쳐블한 접근을 요구하고 자신들에 대한 어떠한 정당한 요구조차 불응하며 공격이라 간주하며 반응하는 것이 그러하며, 사법처리에 있어서도 불공정의 영역을 한참 벗어난 것을 보라. 이것이 공동의 발전을 위한 것인가?

 

 

경쟁보다 담합이 매력적인 선택지가 되는 것은 기실 당연하다. 인간이 투쟁만큼이나 협력을 선호했기 때문에 무리를 짓고 집단을 이루며 지금까지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이 협력의 효율성을 보장한다. 그러나 외적인 요소에 대한 투쟁을 위한 협력과 내부 집단의 경쟁자를 도태시키고 시장과 같은 영역을 장악하기 위한 담합은 서로 다르다.

 

협력을 통해 인간은 발전했지만, 담합은 내부 역량을 제한하고 그 발전 역시 족쇄를 걸기 때문이다. 이는 협력이 공동의 발전과 이익을 위한 것이지만 담합은 소수의 이익만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 이익을 위해 전체 집단의 대부분은 불필요한 손해를 봐야만 한다.

 

그럼에도 담합은 그것에 가담할 수 있는 이들에게 여전히 매력적이고 합리적인 선택지가 된다. 그것을 막아야 하는 것은 견제 세력이다. 단순히 담합에 끼지 않은 업체 같은 것이 아니다. 가령 시장에서의 담합은 업계의 다른 기업이 아니라 정부라는 공권력, 정치권력이 개입해야 한다

 

정치권력이 부패하여 담합한다면 그들을 견제할 수 있는 것은 그 체제 내에서 힘을 가진 이들이다. 민주주의에서 그것은 국민이 된다.

 

절대권력이 절대부패하는 이유는 그들을 견제할 세력이 없고, 경쟁할 세력이 없기에 소수의 관계자들만의 이익을 위해 담합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단순히 가능하다는 까닭에 더 쉽고 매력적인 선택지를 고른다. 이는 완벽히 합리적으로 이루어지는 경제적인 선택이다. 그 목적이 공동의 발전, 항구적인 발전이 아닌 그 소수 기득권의 이권이라는 목적에 부합할 뿐.

반응형
AND
반응형
자본주의는 또 다른 한계점을 맞이하는가.
https://cafe.daum.net/Europa/38b2/4516

처음 자본주의에 가장 심대한 위협을 줬던 사회주의, 공산주의가 등장했던 때와 유사한 상황에 치달아가는 게 아닌가 싶은데, 문제는 공산주의는 소련의 멸망과 함께 이미 실패한 체제가 되었고, 이에 대한 도전이나 견제가 가능한 대안, 혹은 경쟁적 이념은 등장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세계는 명실상부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세상이나 마찬가지가 되었고요.
 
즉, 자본주의는 현재 견제할만한 사상이 없습니다. 자본주의는 사회주의, 공산주의라는 경쟁자 때문에라도 살아남기 위해 사회주의적 요소들을 받아들였습니다. 그게 아니더라도 자유주의나 프로테스탄트적이지 않은 전통적 기독교 윤리, 인본주의, 애국심, 참정권과 함께 이어지는 대다수 노동자들의 요구 등 다양한 관점과 사유로 노동법이나 노동환경은 점차 나아졌고 자본주의는 지나친 비인간성이 줄어들어 현재와 같은 체제에 이르게 됐습니다.

 

 

저번 글에서 언급했듯, 자본주의는 공산주의라는 경쟁 체제가 사라지고 자본주의의 폭주를 억누르고 견제할만한 방법이 없어졌습니다. 소련이 붕괴한 이후 자본주의는 세계를 지배하는 사상이자 체제가 되었고 자본주의가 아닌 체제들은 자본주의에 비해 경쟁력이 없습니다. 

 

독점 시장은 언제나 독점자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됩니다. 얼마나 물량을 풀 것인지, 개발에 얼마나 투자할 것인지, 가격을 얼마로 책정할 것인지 등등 독점적 지위는 그 자체로 사는 사람이 아쉽게 만드는 위치이죠. 그것은 체제 역시도 다르지 않습니다. 자본주의는 정치체제가 아닌 경제체제이고, 그 핵심원리상 패권을 추구하게 설계되어 있습니다.

 

더 많은 부를 획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그 방법은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세계의 정치, 사회, 문화적 규칙으로 게임을 하죠.

 

전근대 사회의 체면과 탐욕 문제.
https://cafe.daum.net/Europa/38b2/4528

 
11.
그들은 결코 자신의 탐욕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욕심을 가지는 게 무엇이 문제냐고 할 것이다. 욕심은 발전의 자양분이 되고 충분히 추구할 수 있는 것이다. 욕망은 욕망되어야 하고 그것이 법을 어기거나 비도덕적이지 않는 한 잘못된 게 아니다.
 
그러나 탐욕과 욕심이 죄악으로 여겨지는 이유는 그것이 무한하기 때문이며 절제될 수 없는 속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충분히 먹고 살 수 있으면서도 더 큰 이익을 얻고자 했던 파홈은 더 많은 땅을 얻기 위해 탐욕을 부리다 악마의 의도대로 죽게 되었다. 그가 중간에 절제했다면 더 넓고 훨씬 좋은 땅을 얻은 채 오랫동안 잘 먹고 잘 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종래에 그가 얻은 땅은 그가 누울 3아르신 뿐이었다.
 
파홈의 이야기는 톨스토이의 기독교적 교훈이 담긴 이야기일 뿐이지 현실세계의 당위나 운명으로 작동하지는 않는다. 부정한 사회일수록, 부정한 정치권력이 지배하는 사회일수록 파홈의 사례는 줄어든다. 정부가 부정하고 악한 이들에게 적절한 처벌과 규제를 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제는 그 자체로 공유지이다. 자원이 순환되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유한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에는 한계가 있고, 자원 역시 한계가 있다. 이것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자원은 한계가 존재하기에 순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본의 동맥경화가 찾아오면 자본주의는 지속 가능성에 한계가 찾아온다. 누군가 자원의 절대다수를 독점하고 분배하지 않는다면 모두가 고사할 것이다. 단지 가진 사람이 더 늦을 뿐이다. 그마저도 아무런 폭력도, 외부세계로의 도피가 없다는 전제 하의 이야기일 뿐이다. 대체로 그러한 한계 상황에서는 혁명, 쿠데타, 정부전복, 심지어 외침 등 다양한 방식의 폭력이 체제에 끝장을 내기 마련이다.

 

문제는 탐욕입니다. 욕심은 모든 인간이 다 가지고 있는 생물학적 본능이고 이것은 생존에 유리하게 해주는 동력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욕심이 지나쳐 탐욕이 되는 것은 공동체의 발전에 부정적인 힘을 발생시키죠. 언급했듯, 탐욕은 무한하며 절제될 수 없기 때문에 어느 문명 어느 사회든 무한하게 추구하여 공동체를 파괴할 수 있는 것들을 죄라 불렀고, 기독교의 칠죄종이나 불교의 오욕칠정이 그러한 것입니다.

 

본능적이기에 순수하고 자연스러운 욕구가 욕망이 되고, 그것이 지나쳐 탐욕이 됩니다. 그러한 탐욕은 끝없이 추구되며 자원과 인신을 무한하게 빨아들이죠. 그리고 자원의 독점은 올바른 곳에 적절하게 사용되지 못하기에 공동체를 파괴하게 만듭니다. 무한하게 자원이 제공되지 않는 한 순환하지 않는 자원은 그 양이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집단의 유지를 위해 소모되지 않기에 문제거리가 됩니다.

 

 

이러한 탐욕은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도덕적인 것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부를 얻는 것이 목적인 체제이기 때문이죠. 그러한 욕망이 발전과 경제성장을 가져온다고 말하고 이것은 전혀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러한 탐욕은 소수의 부자들이 막대한 재산을 축적하게 만들었고 순환하지 않는 자원은 분배되지 않기에 자본의 동맥경화를 발생시키고 있죠. 정상적인 자본의 순환이 이루어졌다면 물가와 임금은 지금과 다른 수치를 보였을 것이며 경제문제로 나타나는, 이 사이에서 발생하는 괴리 역시 지금보다 훨씬 낮은 수준의 사회적 스트레스를 유발했겠지요.

 

자본주의는 최대한의 부를 추구하는 체제이고 인간은 언제나 더 효율적인 방법을 찾죠. 그러나 그 효율적인 방법은 규칙에 대한 도전 역시도 시도하게 만들고 이는 자본을 부정한 방법으로 축적하거나 한계 이상으로 추구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자본주의의 모순이 발생하는 거죠.

 

더 많은 부를 추구하는 체제이나, 그것이 일정 임계점을 넘어갈 경우 부가 순환하지 않고 경제가 성장하지 않거나 둔화되거나, 오히려 후퇴하면서 자본주의의 유지를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탐욕이 지나칠 경우 공동체, 집단은 붕괴하는데 이것은 자본주의라고 해서 다를 게 없습니다.

 

단지 자본주의는 그것을 억제하지 않고 최대한으로 긍정했을 뿐입니다. 사람의 탐욕을 통제하는 경제체제 중 공산주의는 최대한 억제하는 식이었다면 자본주의는 그 반대였을 뿐이죠. 그리고 승리한 것은 자본주의보다 더 큰 한계와 모순을 지녔던 공산주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본주의가 존재하는 모든 경제체제 중 유일하게 영구적이며 항구적인 체제라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닐 뿐이죠.

 

 

자본주의에는 한계점이 존재합니다. 커다란 구의 형태로 존재하며, 이 이상 부는 성장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인구, 자원, 기술 등 다양한 이유로 발생하는 것이며, 이 한계점은 현 지구적 인류의 상황에 기초합니다. 인구는 소비할 고객이며 생산할 노동자이고, 기술은 그것의 속도와 규모를 확장시킵니다. 자원은 소비하고 생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자본, 돈으로 환산 가능한 가치들입니다.

 

다르게 말하자면 그 한계점에 도달할 정도로 인구, 기술, 자원의 혁신 따위가 없다면 그 21세기 이후 급격하게 확장되는 경제성장은 언젠가, 어쩌면 머지않아 그 한계점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한계점을 최대한 유예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먼저, 그 한계점은 한계 영역이라는 이름으로 커다란 구의 형태로 그려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부의 규모에 따라 크고 작은 구들이 존재하고요. 소수의 부자가 더 많은 부를 소유하고 있다면 자본주의의 한계 영역 내 적지 않은 영역을 차지하고 있을 겁니다.

 

그리고 대다수의 중산층, 서민, 빈자들은 그보다 훨씬 작은 구로 나머지 영역을 차지하고 있을 것이고요. 문제는 전 지구상 보유하고 있는 부의 양은 한정되고 있고 한계영역이 더 넓어지지 않는 한 최대한 부를 추구한 부자들에 의해 영역 내 거대 구형들은 더 크기를 키우겠지만 반대로 중산층과 서민들의 크기는 더 작아지며 영역이 줄어들 것이라는 겁니다.

 

점차 이 공간들은 좁아지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빈 공간들이 남아 있을 겁니다. 이론상 그 부분들은 더 작은 구체로 채워질 수 있는 부분이지만 커다란 구는 부피 대비 표면적이 적기 때문에 도형의 공간을 채운다는 목적에선 비효율적인 빈 공간이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해결할 방법은 더 큰 구체들을 쪼개고 쪼개어 부피를 줄이는 대신 표면적을 늘리는 식으로 한계점을 유예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더 나은 기술, 더 나은 합의, 더 나은 체제를 발생시킬 여유가 될 것이고요. 현실의 대다수 개인들에게도 부정적인 내용은 아닐 겁니다. 다만, 현행 자본주의가 추구하는 방향성과 다르며 오히려 공산주의에 가까운 개념으로 도달한다는 점이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방식으로든 자본주의의 한계점을 더욱 확장시키거나 개선하지 않으면 찾아올 미래 중 하나가 될 것이라 봅니다. 그때가 된다면 자신의 부를 나누기보단 그러한 한계에 도전하는 이들에 의해 자본주의 자체가 붕괴할 수 있는 것 역시 가능성 있는 미래 중 하나라고 보고요.

반응형
AND
반응형


야당 멍청이들의 호통질과 으름장 밖에 없는 놀이의 어록에 대해서는 검색만 해봐도 금방 나올 것이니 굳이 하나하나 열거하진 않겠습니다. 


하지만 이번 국정조사의 목적이 도대체 뭐에 있는 지 이해가 안 되는 쇼에 불과하더군요. 재계 거물 9명 모두 소환해놓고 한다는 게 고작 비난회 소리나 들을 뻘짓이라니.. 목적 구분도 못하는 질문자들이 많더군요. 무엇을 어떻게 질문해야 하는 지도 모르는 사람들 밖에 없다고 할 정도?


거기서 해야할 질문들은, 정말 치밀하게 뽑아서 최대한 간단명료하게 질문할 스크립트를 짜고 그에 대해 논리적이고 집요하게 파고 들어야 합니다. 근데 하고 있는 거 보세요. 의원이 문제인 지 의원들의 보좌관, 참모진의 수준이 떨어지는 건지.. 시간도 고작 몇 분 밖에 없는 데 쓰잘데기 없는 의레적이고 수사적인, 관용적 표현들이 참 많더군요.


그런 자리에선 경직된 말투와 호통, 으름장과 큰 소리가 권위와 카리스마를 보여주는 게 아니라 담담하지만 직설적인 질문들도 명료하게 상황을 풀어나가며 문제의 핵심을 파고드는 게 훨씬 대단하고 제대로된 겁니다.


지금하고 있는 건 평소에 하고 싶었던 말 하는 속풀이 한마당에 불과하고, 자신들의 감정적 불만을 노골적으로 비난하듯 토해내는 것에 불과합니다. 다들 무슨 청문회 스타라도 되고 싶은 것마냥 큰 소리 치고 웃기지도 않을 내용과 말로 추궁하고.. 그냥 다 놀음에 불과하죠.


오죽하면 새누리당 황영철 의원이 가장 잘 한다는 말이 나오겠습니까.


걔넨 거기서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하는 지도 모르는 것에 불과해요. 그냥 자리 깔렸으니 판이나 벌이는 것에 불과하지. 실제로 도움이 되는 유의미한 성과가 하나도 없습니다. 이미 총수들은 죄다 전날에 미리 준비 다 하고 대본대로 연기하고 있는 것 뿐인데 오히려 그걸 도와주는 셈이거든요. 


재벌 총수들 연기하는 걸 무너뜨리고 제대로 털어야 하는 것을 그저 빼액질만 하고 있는 수준에 불과합니다. 아무 의미 없는 뻘짓이죠. 감정적으로 시원하다는 쾌감을 느끼고 싶어하는 것일 뿐이고요.

반응형
AND
반응형


요즘따라 드는 생각인데, 최근 대학생들이나, 젊은 사람들을 보면 자기를 실제 자신보다 더 대단하거나 높은 사람이라고 착각하고 있는거 같습니다. 얼마전 중앙대 커뮤니티에 붙은 중베라는 별칭에서도, 청소 노동자들에 대해 떼나 쓰는 무식한 노동자들로 비하하며 능력껏 살라고 훈수를 두는 학생이 있다던가 말이죠.


제 아무리 대학생이라도 졸업하고나서 창업을 하고, 그걸로 성공할게 아니면 결국 되는건 똑같이 '노동자'라는 사실이고, 그 또한 지금과 같은 편견과 분위기속에서라면 나중에 40대, 50대까지 나이먹고 회사에서 짤리고나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자기가 훈수두던 청소 노동자 같은 '무식한 노동'을 할 수 밖에 없는게 대부분이죠.


마치 자신은 졸업하고 나서 '노동자'가 되지 않을 것처럼 생각하는.. 적어도, 흔히 생각하는 육체노동을 하지 않는 --결국은 똑같은 노동자지만-- 회사원 정도나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죠. 하지만 결국 그런 회사원이 되도 업무에 이리치이고 윗사람에게 깨지고 하면서 현실을 배워갈텐데, 그때되서도 그래도 나는 무식한 노동자가 아니다, 그들보다는 훨씬 낫다. 라는 알량한 프라이드에 취해 살 것을 생각하면.. 뭐, 현실을 겪으며 똑같은 노동자이고 무시할 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배우면 좋겠지만, 사실 그것도 웃긴거죠. 노동에 귀천은 없다는 말은 초등학생도 아는 격언이기에..



비단 이런 대학생들의 노동자에 대한 인식뿐만 아닙니다, 어느 커플은 다음해에 결혼한다는데(지금 기준은 아닙니다.) 3억짜리 아파트를 무슨 가게에서 과자사듯이 얘기하면서, 결론은 가족들에게 몇천, 은핵에서 억 빌려서 새 아파트를 분양받는다고 합니다. 그것도 프리미엄 500주고 계약을 말이죠.. 그런데 그 사람과 아는 분이 말렸다고 합니다, 임대살다 완공하면 계약하라고 말이죠. 프리미엄이라는 것도 사기라고 결국 한달 후 그 아파트의 프리미엄은 0원으로 떨어졌습니다. 그 여자분이 공장 경리라고 하는데, 무슨 부족하지 않은 중산층 처럼 말하는걸 보고 행동한다고 하더군요.



이처럼 자기 자신을 전혀 모자람없는 중산층 내지는 재벌이나 부자까진 아니라도 잘사는 축이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그리고 자기는 노동자가 아니라고 생각하거나, 훨씬 대단한 사람이라고 자신의 미래를 너무 낙관적으로 판단하는 젊은 이들이 많은거 같습니다.


사실은 전혀 대단할 것 없고, 그렇게 쉽게 여유부릴 수 있는 수준도 아니며, 너무 낙관적으로 바라볼 미래도 아닌데 말이죠. 우습게 보이지 않기 위해, 혹은 자기 스스로 자신감을 갖기 위해 자기 자신을 속이거나, 너무 모르기 때문에 부리는 근거없는 자신감.. 내지 허세를 보면 뭐라고 해야할지..

반응형
AND

ARTICLE CATEGORY

분류 전체보기 (849)
취미 (849)
백업 (0)

RECENT ARTICLE

RECENT COMMENT

CALENDAR

«   2024/03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