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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며,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 - E.Kant
by Ko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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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에 해당되는 글 8건

  1. 2024.01.26
    천사의 존재를 믿는다고 답변하게 되는 이유.
  2. 2022.10.20
    도덕과 자기검열이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맡는가.
  3. 2021.01.26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와 공해 문제.
  4. 2017.10.20
    아이소포스 리뷰.
  5. 2014.09.10
    비폭력적인 항거에 대한 범죄화
  6. 2014.09.08
    표현의 자유. 표현에 대한 책임.
  7. 2014.06.18
    같은 행동, 다른 대상. 3
  8. 2013.07.19
    사회가 진정 자유로워지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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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사회가 형성되면 기준적 윤리 역시 형성된다. 그렇지 않으면 집단을 유지시킬 일정한 규칙이 마련되지 않기 때문이며, 규칙이 마련되지 않은 집단이란 언제든 해체될 수 있는, 혹은 애초에 집단 자체가 환상에 불과한 현상이 된다. 이러한 기준은 반드시 윤리일 필요가 없다. 그저 일정한 규칙이 존재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그러한 기준은 대개 윤리적 기준으로 형성되고, 그것을 요구하게 된다. 2023년 조사 기준, 천사가 실제로 있다고 믿는 성인의 수가 가장 많은 나라는 10명 중 7명으로 미국이다. 이는 미국인들이 그만큼 무식하거나 종교적이라는 의미도 되겠지만, 후자에 조금 더 집중할 경우 그것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미국인들의 신앙심이 투철하다는 것이라기보다는 그것이 자신의 생각을 통제하는 자기검열의 수단으로서 작동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봐야 한다.

기실 윤리적 기준은 스스로를 검열하게끔 하는 도덕적 지침이 되지만 도덕과 윤리는 같은 이름과 믿음으로 비도덕적이고 비윤리적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신앙에는 방향이 없이 깊이와 밀도만 존재하기 때문에 신앙심이 깊다는 것이 그 사람이 선하다는 의미 역시 아니다.

그런 관점을 수용한 후에 진행하건데, 미국인들에게 종교는 삶과 삶의 방식에 있어 아주 밀접한 것이고 종교적 믿음이 윤리에 작용하는 바는 아주 강력하다는 것이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종교적 신앙은 미국인들을 아주 강하게 검열하고 있으며, 그것은 본질적인 것이라기보다 피상적으로 요구된다. 즉, 자기 희생이나 약자에 대한 실천적 보호, 지원보다는 누군가 천사를 믿느냐는 비현실적인 것의 존재를 묻는 질문에 그렇다라고 말해야 하는 방식이다.

미국인들이 실제로 천사를 믿느냐 아니냐, 혹은 그것이 진짜로 있느냐 아니냐와 같은 것은 중요한 게 아니다. 그들이 그렇게 말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자신의 신앙심을 지키는 행위이기도 할 뿐더러, 그렇게 요구 받는 윤리적 기준의 존재 때문이다. 그들이 천사의 존재를 믿느냐는 질문에 아니다. 라고 답한다면 그들은 스스로를 규율하는 윤리적 기준에 위반하는 행동을 하는 것으로, 양심에 어긋나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일반적이거나 보편적인, 혹은 과반에 가까운 기준으로 작동하는 사회의 경우, 이것은 하나의 사회적 요구처럼 동작한다.

이것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소아성애와 결부시켜 생각해보자. 어떤 사람이 실제로 어떤 성향을 가지고 있든, 사실이든 그렇지 않든 소아성애적 표현을 하거나 그것을 드러낼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지금 기준으로 소아성애는 끔찍한 범죄가 되고 그 어떤 사회에서도, 특히 서구 사회에서는 가장 끔찍하고 비인간적인 범죄로 인정 받고 멸시, 차별, 배척 받는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소아성애에 속하는 행위나 가치관은 그리 드문 것이 아니었고, 10대 초중반의 아이들에 대한 성애, 결혼, 약혼, 성교나 성적 요구는 꽤 흔한 것이었으며, 그것은 그 시대의 사회적, 관습적, 문화적 사유로 인해 요구되는 형식이었다. 물론 지나치게 어린 아이에 대한 나이 차이가 나는 성인의 그것은 그 시대 기준으로도 지탄 받은 행위 였음은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물론 윤리적 기준은 시대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 중 하나이고 소아성애를 긍정하자는 말은 아니다. 다만 실제로 어떻게 생각하든, 심지어 별 의견조차 없든 그렇게 요구 받는 윤리적 기준, 도덕적 잣대가 존재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증명을 요구받을 때 일정한 답변이 정형화되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즉, 이렇게 말하지 않으면(자신의 신앙을 증명하지 않으면/자신의 혐오나 증오를 증명하지 않으면) 그 자체로 의심 내지는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것을 피해야만 하는 사회적 요구가 되는 것이다. 신을 믿고 신앙을 가진 자신은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천사를 믿느냐는 질문에 그렇다라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되고, 소아성애에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든, 심지어 그 본인이 소아성애자라 하더라도 그에 대한 증오나 혐오를 보여줘야만 한다.

서구의 범죄자나 갱, 혹은 그와 유사한 폭력 집단이 자신들의 소아성애에 대한 혐오와 증오를 증명하기 위해 소아성애자(혹은 동성애자)를 공격하여 폭행하거나 살해하는 것은 그러한 요구의 극단적 표현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스스로 그러한 것에 강렬한 적대감을 증명하기 위해 굳이 그러한 행위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행위는 심지어 범죄적인 것이라 하여도 사회적 윤리 기준에 편승하여 정의로운 것으로 여겨지거나 그에 준하는 행동으로 평가 받는다.

한국 사회에서도 그러한 기준이 있다. 반공이 국시이던 시절에 좌파적 사상에 대해서는 공공연하게 혐오와 증오, 적대감을 강렬하게 표현할 수록 그것은 바람직하고 정의로운 것처럼 평가 받는다. 심지어 그것이 당연히 실현 불가능한 말 뿐인 것이라 하여도 도리어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훌륭한 것이 된다. 가령 북괴 빨갱이에 대한 무제한적 살상과 학살을 통해 지구상에서 북괴 빨갱이를 절멸 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강력하고 폭력적 어조로 웅변한다면 모든 경우에 그렇지만은 않겠지만 어떠한 경우, 꽤 많은 경우 바람직하고 훌륭하며 애국적인 것이 될 것이다.

그것은 사회적 윤리/도덕적 기준이 그렇게 평가하도록 한 사회에 영향을 받는 모든 이에게 요구한다. 이러한 사회적 요구는 거대한 흐름으로서 존재하기에 개인의 사상이나 지성, 양심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모든 개인은 사회 속에서 진영논리에 종속될 수밖에 없고 영향을 받는다. 설령 본인은 어떠한 진영에 속하지 않는 팩트만 본인의 양심과 지성에 따라 공정하고 정확하게 말한다 해도, 그러한 언어는 특정 진영, 집단에 유익하게 될 수밖에 없다.

북한 문제에 관해 진보, 보수, 좌파, 우파적 기준에서 완전히 탈피된 새로운 의견이 나올 수 있을까? 불가능할 것이다. 반공이 국시인 시절에서 벗어났지만 아직도 한국 사회는 여전히 반공적 가치관을 정의롭고 바람직한 것으로 인정하는 사람들이 많고, 적어도 인구 절반에 가깝게 그러하기에 이를 보편적이라고 할 수 있거나, 최소 그에 준한다고 말해도 이상할 게 전혀 없다. 그리고 그들은 그 반대 절반에게 자신들의 윤리 기준을 요구한다.

북한에 대한 강렬한 적대감을 언어와 행동으로 증명하라고, 그러나 결코 북한에 대한 직접적 적대 행위, 공격 행위로 증명하지는 말하는 것이다. 소아성애를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자들이 직접적인 살해를 저지르는 경우는 극히 적은 것처럼, 그러한 범죄적 행위를 행하는 자들은 한국 내에서도 매우 특정할 수 있는 소수에 불과한 것과 같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에게 향해질 비난과 의심을 피하기 위해 그러한 상황이나 요구에 검증적 반응을 요구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바람직한 것일까? 자유주의적 관점 내에서 이러한 사회적 요구가 특정 답변, 태도의 강요로 작동하는 것은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모든 개인은 자신의 지성과 양심에 따라 자유롭게 생각하고 행동하며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며, 본인의 판단에 따라 결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사회 내에서 일정한 윤리적 기준이 형성되는 것은 아주 흔한 일이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자연스러운 일을 비윤리적이라 비난하는 것은 자연스럽지 못한 일이다.

소아성애에 관한 개인의 생각이나 관점이 어떠하든 그것은 자유로운 지성의 결과이겠지만 모든 개인은 오롯이 독립적일 수 없고 사회라는 집단의 흐름에 영향을 받는다. 어떠한 윤리, 도덕적 기준은 그 근간 논리와 사례가 존재해야 구성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생각이나 관점은 진실로 자유로운 사유의 결과일 수 없고, 설령 그러하다 치더라도 개인은 사회 속에 존재하는 객체이기 때문에 사회적 요구에 순응해야 한다는 판단을 내리는 것도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이는 자유가 합리성과 유리될 수 없으며, 외부적 조건에 배율적일 수도 없음을 이유로 한다.

사회도 국가도 타인도 없는 자연 속에서 어떠한 윤리적, 도덕적 요구도 받지 않는 자가 눈앞의 포식자를 두고도 자유로운 사고의 결과 그것을 피하지 않겠다는 판단을 내리는 것은 지적 능력을 자유롭게 활용한 것이겠지만 그 결과는 피식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한 사회 내에 존재하는 사람은 자유롭게 사고할 수 있으나 그 결과에 대해 공개적으로 표현할 경우 그에 대한 대가, 혹은 책임이라는 이유로 타인의 평가를 피할 수 없다.

이것은 자유에 따라야할 것이 책임이기 때문이며 나의 자유를 타인이 인정하는 것과 그 자유에 대한 결과로 따라오는 책임을 받아들이는 것은 서로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대저 자유를 근거로 특정한 표현에 대해 일반의 비난과 비판을 받는 경우 그 자유로운 표현의 결과 따라오는 책임을 자유와 혼동하는 경우가 존재한다.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지만 그에 책임이 부여되는 것은 응당한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그러한 책임을 부여 받는 것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본심이나 판단을 공개적으로 표현하지 않는 것은 흔한 일이면서도, 그 요구가 비이성적이거나 극단적일 수 있다. 사회의 보편적 윤리 기준은 그 사회 구성원의 윤리 기준의 평균에 기인한다.

그러나 특정한 가치에 있어서 유독 극단적인 요구가 이루어지는 경우와 합리적이지 않은, 때때로 감정적이거나 비합리적일 수 있음에도 그것이 도덕적인 기준을 충족하는 경우는 구분되어야 할 것이다. 전자의 경우 내국인에게 좌파적이거나 온건한 형식에 사상검증을 요구하며 그 기준을 충족시키기 못할 경우 비난하는 것이 그럴 것이고, 후자의 경우 적에게서 국가와 민족 등 사회 구성원을 지키기 위한 투쟁이나 행위, 사상을 비난하거나 폄하할 때가 그러하다.

특히 후자가 역사적 문제로 분노할 이유는 충분하나 현실적 필요로 그들과 무조건적으로 적대하거나 책임을 요구하지 못하는 경우가 그러할 것인데, 그러나 인간/집단의 감정 문제 역시 합리적으로 다뤄야할 문제인 고로, 합리적이지 못하거나 비이성적인 것 그 자체가 반드시 틀림의 영역에 속한다고 하는 것은 특정한 목적성을 가진 교조적인 태도일 것이다. 합리성을 어떠한 주장이나 가치에 합치시키기 위한 도구적 활용으로 말이다.

현실에서 찾아볼 수 있는 다양한 구체적 사례에 관해 어떤 것이 옳고 그르고, 그것이 어째서 그렇게 구분되어지는가에 대해서는 이 글에서 굳이 다루지 않겠다. 그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고 개별적으로 많은 근거와 논리, 사례를 열거하며 비교해야 하는 일이 될 것이기에 지리한 일이기도 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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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도덕이란 자기검열이다.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자기검열이고, 도덕은 그 중 가치판단의 영역에서 옳고 그름을 구분하여 무엇을 검열할 것인지 선택하는 것이다.

 

1.

도덕은 할 수 있지만 하지 않으면서 지켜지는 규범이다. 이는 그것이 법적 처벌을 받을 정도는 아니지만, 누군가에게 크고 작은 유무형적 피해를 발생시키는 것을 피하면서 지켜진다. 작게는 실제 타인의 피해부터 크게는 보는 이로 하여금 기분이 나쁜 것까지 다양하다.

 

2.

그렇다면 왜 도덕은 지키는 것이 옳은가? 그것은 도덕이 규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는 도덕의 범위 내로 포함되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따져야 알 수 있다.

 

도덕이 지키고자 하는 것은 많지만, 가장 근본적인 것은 신뢰이다. 내가 저 사람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을 것처럼 저 사람도 날 존중할 것이라는 것. 내가 욕을 하지 않고 함부로 하지 않으면 타인도 나에게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을 믿는 것이다. 내가 불특정 다수, 내가 알지 못하는 누군가에게 직간접적인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노력하듯 타인도 그러하리라는 믿음이다.

 

이러한 믿음은 사회적 신뢰가 되어 어떠한 불문율이 되기도 한다. 가령 한국에선 밖에서 핸드폰이나 가방, 지갑 등을 놓고 주인이 없어져도 그 자리에 있거나 경찰서, 분실물 보관소 등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이는 남의 것을 함부로 가져가지 않는다는 기본적인 도덕률부터 시작해서, 자기가 자리를 점유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자신의 물품을 놓는 행위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이는 타국에서 줄을 설 때 직접 그 위치에 서있는 게 아니라 신발(슬리퍼)만 줄지어 놓고 본인은 뒤쪽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서 대기하는 것과 유사한 사회적 합의이다.

 

이것은 일종의 문화에 더 가깝다곤 하지만, 그러한 문화와 불문율을 깨고 물품을 훔치는 것은 범죄이지만 비도덕적인 행위이다. 단순히 법을 어기고 남의 것을 훔쳐가는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러한 문화/불문율을 깼고 사회적 신뢰에 대한 훼손을 시도한 것이기 때문에 더더욱 부도덕한 것으로 취급된다.

 

3.

도덕적인 행위는 본인에게 당장의, 직접적인 이익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사회적 신뢰는 거대하게 형성되는 것이고, 조직적/집단적 불문율 역시 그 구성원들의 암묵적 합의에 의해 만들어지는 규칙이고 질서이다.

 

그 집단의 규모가 크면 클수록 개인의 일탈은 사소한 문제로 보인다. 한두 명이 일탈을 저지르고 불문율을 따르지 않고 부덕한 행위를 한다고 해서 집단의 사회적 신뢰가 하루아침에 파괴되지는 않는다. 그들 몇명의 행동이 훼손하는 범위는 극히 협소할 것이다.

 

그러한 불문율은 모두가 일정 정도를 벗어나지 않고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때문에 내가 같은 피해를 보지 않을 수 있다는 신뢰하에 형성되는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 그 불문율을 어기고 사회적 신뢰를 훼손하면 이익을 얻을 수 있다. 자리를 맡아놓았다는 증표로 놓아둔 스마트폰을 누군가 가져간다면 그 사람은 스마트폰 하나만큼의 이익을 본 것이다.

 

그리고 어떤 이유로든, 그러한 생각을 더 많은 사람이 가지고 실천하게 되거나, 단순히 보복성으로 자신 역시 불문율을 지키지 않겠다는 의도로 자신이 당한 피해와 똑같은 가해를 저지를 경우 사회적 신뢰는 빠르게 붕괴한다.

 

더 이상 모두가 신뢰하던 질서-불문율은 신뢰할 수 없게 되고, 사회적 규칙으로 작동하던 양식은 누군가의 먹잇감이 될 뿐이다. 물론 법은 기능할 것이다. 물건을 훔쳐가면 신고하고, 접수받고 수사하며, 범인을 잡으면 처벌한다. 그러나 이는 사회적 신뢰를 깨뜨리는 비도덕적 행위가 법과 얽혀 있기 때문에 법적 제재가 가해지는 것이다.

 

4.

그렇다면 법과 무관한 비도덕적 행위는 어떠한가? 본래 비도덕적 행위자에겐 비난이 있었다. 단순히 말 뿐인 경우도 있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평판이 깎여 기본적인 인식 자체가 나빠져 사회생활과 인간관계에 지장이 생기는 경우도 있고, 소속된 집단(학교, 직장 등)에서 따돌려지거나 쫓겨나는 경우도 발생할 수 있다.

 

비도덕적 행위가 법을 어긴 것은 아니기에 법적 처벌을 받을 수 없지만 비도덕적이라 비난 받는 것 역시 온당한 평가에 따른 것일테다. 물론 언제나 선을 넘고 과하게 비난하고 공격하는 경우 역시 있을 수 있기에 반드시 비도덕적 행위자에 비난하는 것이 정당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비도덕적 행위가 만연하게 된다면 비도덕적 행위자에 대한 비난 역시 힘을 잃게 된다. 너무 흔하기 때문에 욕할 기력을 잃는 것을 떠나, 도덕의 영역이 협소해지고 도덕과 비도덕의 지위가 역전되는 것이다.

 

가령, 공개된 장소에서 적나라하게 욕설을 하는 것이 눈쌀을 찌푸리게 하여 지적을 받았다면, 지금은 그러한 성격의 캐릭터들이 범람하여 지적이 의미가 없어지고, 되려 지적하는 사람을 선비라거나 위선자 따위로 역공을 당하는 것이다. 그것이 불법은 아니지만, 상식의 영역에서 무엇이 도덕적인지는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만의 가치판단에 따라 그것에 의문을 제기하고 거부하는 것이다.

 

문제는 그러한 자들이 늘어나는 것이다. 그들이 협소하나마 일말의 보편성을 획득할 정도로 늘어나게 된다면 기존 도덕의 영역은 다양한 지점에서 도전 받고 반박되고, 무시되고, 훼손되고 파괴될 것이다.

 

5.

도덕적 행위를 하면 모두가 이익을 보고, 비도덕적 행위를 하면 누군가는 손해를 보고 자신은 이익을 본다. 이기적일수록 직접적인 이익을 얻게 된다. 모두가 이익을 얻기 위해선 비도덕적인 행위를 하는 것이 좋다. 누군가 전혀 모르는 남의 호의나 신뢰, 도덕적 행위를 기대하고 심리적 방화벽을 내렸을 때 비도덕적 행위자는 그 틈에 이익을 보게 된다.

 

피해자는 당한 이후 심리적 방화벽을 다시 세우게 된다. 대체로 타인에 대한 신뢰가 낮아지고 사회적 신뢰에 대한 믿음이 낮아지겠지만 그렇다고 가해자가 되지는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비도덕적 행위가 이익이 되고, 하지 않는 쪽이 손해를 보는 구조에서는 마냥 고집부릴 수만은 없다. 구체적 피해와 실질적 이득의 관계는 도덕-비도덕의 문제를 손해-이득의 문제, 혹은 생존-도태의 관계로 도치될 수 있다.

 

6.

그렇다면 그런 식으로 비도덕적 행위자가 늘어날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되는 것일까? 반드시 모든 도덕적 행위 선택자들은 비도덕적 행위자가 될 수밖에 없을까?

 

역사에서 우리는 특별히 더 도덕적이고 부덕한 시절을 고를 수 있다. 매우 정확하고 계량적으로 구분지을 수 있는 것은 아니기에 우리는 그것을 개괄적이고 극단적으로 고르는 것이 용이할 것이다.

 

가령, 전쟁이나 재난 상황이 오래 지속되어 도덕의 문제가 생존의 문제와 충돌할 때가 그러하다. 경신대기근은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게 만들었고, 자식을 바꾸어 잡아먹었으며, 전쟁이 길어질 때면 시민들은 범죄에 더 쉽게 매혹되었다.

 

태평성대라고 하는 세상일수록 여유가 넘치고 범죄가 적거나 공정하게 처리된다. 경쟁과 도태보다는 협력과 신뢰가 사회를 대표하는 정서가 된다.

 

곳간에서 인심난다는 말은 여유와 도덕에 대한 통찰이 담긴 말일 것이다. 우리는 더 여유로울 때 더 쉽게 도덕적인 선택을 한다. 단순히 베푸는 것을 떠나 타인을 배려하고 확실하게 이익으로 돌아올 자신의 비도덕적 선택을 포기하고 사회적 신뢰를 택한다. 그래도 무방하기 때문이다.

 

7.

도덕은 자기검열이다. 우리는 살아오면서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 배우고, 이것을 통칭하여 사회화라고 한다. 이것은 개개인에게 가치관에 뿌리내려 누군가 자신을 규제하고 제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자연스럽게 습관화된 관성에 따라 도덕적 반응을 한다.

 

주변에 차, 또는 보행자가 없기에 그냥 지나가도 상관 없는 도로/횡단보도를 지나치지 않고 신호를 기다리는 것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것은 학습에 의해 얻어진 지식이고, 실천을 통해 습관화한 것이다. 거꾸로 말하자면 학습받지 않았다면 사회 일반 도덕률에서 이격되어 있을 것이고,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것 또한 도덕적이진 않다. 또한 학습된 것은 언제든지 뒤집히거나 덧씌워질 수 있다.

 

도덕적 행위를 선호하는 사람이라도 환경 조건에 따라 언제든 비도덕적인 선택을 할 수 있다.

 

개인의 성향과 개성이라는 것은 개인 단위의 조건일 뿐 거대한 집단적 경향성을 계측하는 근거로 작동하기는 어렵다. 어떤 사회나 집단의 도덕적 성향이 개인의 성향과 개성에 의존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도덕적 선택을 하는 것은 환경 조건이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다.

 

8.

이러한 조건은 다양하다. 경제적 상황, 노동시간, 정치적 혼란, 군사안보적 위험, 지배적 이념.

 

단순화시키면 이렇게 양분된 것이다. 경제적 여유와 사회적 갈등 수준.

 

경제적인 여유가 있을 수록 사는 것 자체에 대한 부담은 줄어든다. 필요한 것에 쓸 돈이 많을 수록 기본적인 생활 수준은 더 높아질 것이고 경제적 부담에서 멀어질 것이다. 이는 심리적 여유가 되고 인지적 여유가 된다. 도덕적 선택은 그러한 여유에서 출발한다. 심리적 여유는 물질적 여유에서 찾아오는 법이다.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지만 그것은 그 사람의 개성이지 일반적으로 기대할 수준이 되지 않는다.

 

사회적 갈등 상황이 길어지고 다각화되어 다양한 분야에서 갈등이 발생하면서 그러한 이슈 인식에 있어 인지적 포화가 이루어질수록 도덕적인 선택에서 멀어질 것이다. 본인이 생각하고 지지하는 입장이 있을 것이고 이슈마다 자신만의 포지션이 있을 것이다.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여러 갈등들을 접할 수록 스트레스를 받게 될 것이다.

 

다양한 갈등에서 다양한 적, 혹은 바보들을 상대로 싸우거나 최소한 비판적인 생각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러한 부정적 정서들은 스트레스를 늘리고 심리적으로 공격적이게끔 한다. 어느 정도까진 상관 없겠으나, 지속되고 점점 많은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불만은 축적된다. 단순히 속으로 타인을 욕하는 것조차도 그 빈도가 늘어나고 후엔 말로만 하지 않을 뿐 습관적이게 될 수 있을 것이다.

 

핵심 자체는 스트레스가 될 것이지만 이러한 스트레스는 사회적 이슈에 따른 갈등 수준이 아닌 직장 생활이 될 수도 있고 인간관계나 게임의 결과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역시 이는 개인 단위의 경험에 한정되기 때문에 사회적인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선 그만큼 사회적 단위가 될 수 있는 현상을 지적해야 하기에 스트레스가 아닌 사회적 갈등 수준으로 짚은 것이다.

 

9.

사회가 각박해지고 삶에서 여유를 잃을 수록, 그리고 비도덕적 선택을 통해 이득을 얻고 제재가 적을 수록 비도덕적 선택의 폭과 그 영역은 넓어질 것이다. 만연한 비도덕은 도덕의 영역을 밀어내다못해 역전시킬 것이고 도덕적 행위나 사고를 위선과 선비질이라 폄하할 것이다.

 

도덕적인 선택이 손해로 이어지고 비도덕적 선택이 이익과 선망으로 이어진다면 더 이상 사람들은 도덕적일 필요가 없어질 것이다. 경쟁과 각자도생, 황금만능주의과 과정을 따지지 않는 출세지향으로 대표되는 사상들이 사회에서 도덕이 설 자리를 대체할 것이다.

 

사회적 신뢰가 작동하는 영역은 그런 성향의 이들에게 자신이 이익을 얻어낼 수 있는 기회의 장으로 비춰질 것이고 몇번의 피해로 인해 해당 영역은 훼손되어 파괴될 것이다.

 

그런 식으로 사람들은 도덕적으로 사회화된 습관을 버리고 비도덕적 습관을 받아들일 것이고, 더 어린 세대는 그들에게서 도덕이 역전된 가치체계를 받아들일 것이다. 도덕과 비도덕이 역전된 가치관으로 사회화되는 것이다. 내가 이익을 얻고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면 남들이 피해를 보더라도 그것이 법을 어긴 것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그것이 정당화되는 세계관이 형성되는 것이다.

 

이것은 한두 사람에게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기에 어느새 사회의 주류 정체성으로 받아들여지고 보편화될 것이다. 

 

10.

도덕은 자기검열이고 그것이 지키고자 하는 것은 사회적 신뢰이다. 내가 쓰레기를 버리지 않고 길에서 함부로 담배를 피지 않고 그러한 생각들이 많은 이들에게서 공유된다면 사회적 비용이 적어진다. 이는 소모되어야할 비용이 다른 곳에서 더 유용한 자원으로 활용될 것이다.

 

사회적 진보를 촉진시키거나 윤택하게 할 것이다. 그러나 비도덕적 선택들은 그러지 못하게 만들고 비용을 늘린다.

 

잘못을 했으면 욕을 먹는 것이 당연하다. 남들이 욕할 것이 뻔한 말을 했다면 당연히 욕을 먹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나 비도덕적 행위자들은 그러한 도덕 기준과 가치판단에 의문을 제기하고 공격한다. 알량한 논리와 주장이지만 지나치게 관용적이거나 지나치게 나이브한 바보들은 그들의 주장을 일부 수용하기도 한다. 가령, 패륜적 비난을 표현의 자유라고 주장하는 바보들에게 표현의 자유이니 제재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이 그러하다.

 

틀렸다. 자유에는 책임이 있고 그것이 법적 제재를 의미하지 않더라도 사회적 제재는 당연하고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개소리를 했으면 욕을 먹는 게 당연하다. 개소리를 크게 내거나 반복하는 사람은 쫓겨나는 것 역시 자연스럽다. 이는 수천년 동안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집단의 질서 유지를 위한 규칙이었다.

 

그러한 사회적 린치, 혹은 집단재판이 도덕적인 것만은 아닐 것이다. 때로는 쫓겨나는 쪽이 도덕적 정당성을 가지고 우위에 서 있을 수도 있고 정의로울 수도 있다. 그러나 쫓겨나는 소수자가 반드시 그런 선각자이거나 정의로운 의사일 거라는 것 역시 당연한 게 아니다.

 

자기검열이 부정적으로 사용되지만 도덕은 그것으로 작동한다. 남이 뭐라고 하지 않더라도, 누가 보는 게 아니라도 자기 스스로의 양심이라는 시스템이 스스로를 검열하게 만들어 규정된 도덕적 규칙 하에 자신의 행동을 제한하게 만든다.

 

지나친 자기검열이 표현의 자유와 사상적 자유를 억압하거나 제한한다고 할 수 있지만, 비슷한 강도로 제한이 풀려버린 것보다는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검열의 제한을 푸는 것은 쉽지만 한번 풀린 제한을 다시 묶는 것은 지나치게 어렵다. 

 

자기검열이라는 표현이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진다면 다른 용어로 바꿀 수도 있을 것이다. 자기통제라는 용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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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스튜어트 밀은 벤담의 공리주의에 큰 영향을 받은 인물로서, 그의 자유론은 효용이라는 가치를 기반으로 주장을 전개해 나갑니다. 그는 국가와 사회, 더 나아가 인류 발전을 이끌 원동력으로 개개인의 개성을 꼽았습니다. 또한 밀은 다른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지 않는 모든 행위는 개인의 자유 영역으로 규정했지요.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영역은 사회적 행위에 속한다는 것이며, 사회나 정부는 그러한 개인의 행위에 개입할 수 있고 개입 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직접적인 영향만을 이야기하는 것이며, 간접적인 영향을 따져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의 행동이, 다른 사람의 언어가 다른 어떤 사람들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주진 않지만, 기분을 상하게 했다면 그것은 전자의 자유가 후자의 자유보다 우선한다고 본 것입니다.


밀이 개성을 중요시 여긴 것은, 그것이 인간 정신의 건전한 토론과 토론의 다양성을 통해 발전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사회나 국가는 일반적으로 옳다고 여기는 것을을 목표로 하여, 국민들이 일치단결하여 목표를 달성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모습은 아무리 좋고 옳은 것을 목표로 한다 하여도 독선의 요소가 있기 때문에 그 부작용과 역작용이 있을 것이며, 그것이 개인과 사회, 국가의 발전을 가로막게 될 것이라 하죠.


반면 개성은 사람들을 분열시키는 요소처럼 보이지만, 실은 자유로운 토론 속에서 개성이 극대화될 때 개인과 사회는 그런 부작용을 제거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국가와 사회 또한 결국 개개인에 의해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요.



밀의 자유론에서 말하는 자유와 그것을 건전히 유지시키기 위해 제시된 것들은 일견 이상적이기도 합니다. 그때와 지금이 크게 다르진 않을 것일테지만 여전히 대중은 자신의 자유를 통해 사회적 해악을 발생시키고, 개성과 자유로운 토론을 통해 그러한 해로운 주장과 목소리가 사그라들거나 나쁜 것으로 규정되어 힘을 잃기는커녕 오히려 그러한 악종에 열광하고 환호하며, 그것을 지지하는 세력이 형성되어 실질적인 힘을 갖추기까지 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러한 목소리는 자유가 주어졌기에 나오는 것이 아닌, 그러한 사상과 생각을 갖춘 개개인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며, 세대와 직종, 지역을 뛰어넘어 광범위한 집단이 공유하는 것은 그만한 경쟁력, 혹은 (아무리 어설프고 황당하다 하더라도 그들에게만큼은) 설득력을 지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상이 먼저고, 그 사상을 표현할 자유가 있기에 그러한 존재를 확인하고, 확대될 수 있는 것입니다. 가치판단의 영역에 속하는 윤리, 도덕은 남을 통해 확인하고 충돌하며 수정되면서 그 시대, 그 환경에서의 적절한 선을 찾아가려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 윤리와 도덕이라는 것은 개인이 따라가는 것이 아닌 윤리와 도덕이 사람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악한들의 모임에서 도덕과 윤리의 기준은 건전한 집단에 비해 매우 낮거나, 혹은 매우 색다를 것입니다. 그와 같이, 해악적인 함의를 담는 사상이 사회를 지배하거나, 우위에 설 때 도덕과 윤리의 기준도 그에 맞게 변화되는 것입니다. 밀은 이러한 안 좋게 나아가는 사회는 자유로운 토론과 개성을 통해 혁파되고 더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될 것임을 믿었을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그게 맞을 수도 있습니다. 또한 맞기를 바라고요. 대체로 안 좋은 것들은 아무리 거대하더라도 시간에 따라 사라지곤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것은 더 나은 것을 요구했던 사람들이 더 나은 논리와 주장을 통해 비판하고, 제시했기 때문이고요. 



그러나 우리 주변에는 여전히 해악스러운 악종들이 있고, 그것들은 여러 지점에서 다양한 피해를 입힙니다. 문제는 그것이 피해인지, 문제인지 알 수 없는 경우도 있으며, 그것에 영향을 받은 이들이 그것을 나쁘지 않다, 문제가 아니다. 라고 생각하게 만들기도 한다는 것이지요.


일베, 워마드, 최근의 ㅇㅅㅇ에 다다르기까지, 그들의 행동과 언어는 반사회적이고 일반 윤리와 도덕, 심지어 인권의 영역까지도 건드리는 민감하고 위험천만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밀의 주장에 따르면, 이것들은 직접적인 피해를 주지 않는 간접적인 것들이라는 것이지요.


서구사회에선 한국처럼 명예훼손, 모욕죄에 대해 인정이 훨씬 까다롭거나, 아예 그러한 죄를 인정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누군가에 대한 완전한 날조와 거짓선동조차 자유로써 보호 받는 미국 같은 곳에선 정말 이게 같은 인간의 지성을 공유하는 자인가를 의심하게 만드는 지적 실패작들을 보게 되는 경우도 있을 정도지요.



그러나 보기 싫은 건 보기 싫은 것입니다. 자유로운 토론과 논쟁을 통해 더 나은 답과 타협을 찾는 것은 아름다운 행동이지만 의외로 그러한 결과를 찾아보는 것은 매우 어렵기도 하죠. 특히 사람이 많아질 수록, 그 토론자가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지 않을 수록, 때때로(혹은 대체로;) 토론자의 지성이 부족할수록..


일베충이나 환빠와 같은 정신을 차리지 않는 이들이 어느 곳에서 완전한 논파를 당하거나 상당한 반격으로 자신의 주장과 논리에 힘을 잃더라도 그들은 자신의 사상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주장을 다른 곳에서 반복하거나, 자신의 생각을 바꾸지 않죠. 인지부조화, 자기합리화 등 여러 정신적 기제들이 상처받은 자아를 복구하면서 자신의 패배를 회피하게 됩니다.


그렇게 그 자신은 결코 변하지 않으면서, 무익한 토론과 논쟁을 만들어내고, 아무런 이익도 효용도 없는 활동을 발생시키죠. 그러한 활동은 매우 피곤스럽기 때문에 한두 번 하는 정도로도 힘들고 귀찮아집니다. 공연히 바뀌지 않는 이들을 상대로 싸우러다니거나, 토론으로 쫓아내기보다는 차라리 권위나 권한을 동원하여 공격하거나 내쫓아버리거나 혹은 그 본인이 최대한 무시하기도 하고, 아예 그 장소를 떠나는 경우도 발생하게 됩니다.


이는 결코 건전한 현상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건전하지 않은 것은 해악적 행위를 반복하는 당사자에게 있을 것입니다. 자신과 같은 사상을 공유하는 이들은 그것에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표현의 자유, 사상의 자유를 읊으며 용인하라고 요구하지만, 실상 그 반대에 선 이들에겐 하나의 공해(Polution)에 불과합니다.


집에서, 학교에서, 도서관에서, PC방에서, 직장에서, 심지어 인터넷 커뮤니티나 게임 속에서조차 그 내용의 해악성 때문에 듣기 싫은 소리를 강제로 반복해서 듣는 것을 선호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집에 있는데 밖에서 듣기 싫은 소음이 지속해서 들린다면 우리는 그것을 소음공해라고 합니다. 원하지 않는 해로운 성분이 공기나 물에 섞여서 건강을 해친다면 그 또한 환경오염, 공해라고 할 것입니다.


정신과 사상의 영역에서도 정신적 건강을 해치고 토론으로 교정되지 않는 사상을 반복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그 자체로 공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밀 또한 그러한 부정한 표현에 대해 좋진 않게 봤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또한 하나의 개성으로 토론을 통해 부딪히고 배울 수 있는 것이라 보겠지요.


그러나 우리는 그보다 더 좁고 짧은 세계를 보는 사람들입니다. 인류의 항구적인 발전보다 당장의 평온함을 선호하고, 토론과 같은 고차원적인 지적 활동을 즐기기보단 그런 경험은 때때로, 그리고 남이 하는 것을 보는 걸 더 좋아하죠. 우리는 밀처럼 관용적이고 이상적으로 바라볼 수만은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변명이지만, 동시에 어쩔 수 없이 인정하는 사실이기도 할 것입니다.



일베, 페미와 같은 정치병자들의 주장과 표현들이 공해라면 그것을 어떻게 다루어야할까요? 밀의 유지를 따라 직접적인 영향,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용인하고 최대한 토론을 통해 부딪히며 교정될 것을 희망해야할까요? 그러나 그것은 너무 힘들고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때때로 직접적인 영향을 줍니다. 아니, 이미 그 자체로 그러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밀 또한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사회적 해악으로 규정했습니다.


그러니 차라리 우리가 일상적인 공해를 다루는 방식이 더 나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역시 이는 자유를 억압하는 행위이며 개성을 짓밟는 것이기도 하죠. 윤리적이지 않고 도덕과 거리가 멀며 반사회적인 사상은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고 언제고 힘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당장의 짓밟음은 감정적인 쾌감을 줄 수 있고 깔끔함에 청량함을 느낄 수 있겠지만, 그러한 폭력적 방식은 그 자체로 해악일 수 있습니다.


악을 짓밟은 우리가 또 다른 해악이 되는 것이지요. 아무리 옳아 보이는 것에도 독선적 요소가 있어 발전을 저해한다는 밀의 주장처럼요.


사상이 환경에서 나온다면, 우리는 환경을 개선하는 것으로 대응해야 할 것입니다. 당연히 매우 어렵고 더 오래 걸릴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변화가 가능한지, 가능하다면 얼마나 가능한지, 그것에 반발하는 이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에 대한 새로운 질문과 난제들이 우릴 괴롭힐 겁니다. 또한 개개인이 어쩔 수 없는 영역에 속한 것들이 대부분일 것이고요.


단지 극소수의 머저리들이 자기들끼리 헛소리를 하는 것이라면 무시해줘도 큰 문제는 없겠지만 대중을 이룰 정도로 거대한 사상의 공유는 무시할 수 없겠지요. 무엇이 올바른지 판단하고 그러한 판단을 기반으로 어떻게 실현할 것인지, 그렇게 더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해야할 대화와 토론, 그 토론을 풍성하게 해줄 수많은 개성을 생각하면 지리할 정도로 아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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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리뷰는 작품에 대한 내용누설이 있습니다. 


아이소포스는 언젠가 꼭 리뷰를 작성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하는 명작인데, 제가 엄청 게으르다보니 많은 부분을 잊어버린 지금에서야 작성하게 됐습니다. 사실 이런 버릇 고쳐야 하는데 말이죠..


김양수, 도가도 콤비의 작품입나다만 먼저 도가도의 그림 실력부터 칭찬하고 넘어가고 싶습니다. 이전부터 도가도 작가의 그림 실력이야 익히 알려진 사실이지만 고대 시대를 배경으로 자기 스타일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충분히 어울리고 수준 높은 작화와 드라마틱한 연출을 뽑아낼 수 있는 건 정말이지 몇 안 되는 그림작가만의 역량이죠.


초반부터 후반까지 도가도의 드라마틱한 연출은 가히 괴물급이다 싶을 정도의 장면들이 있었는 데, 후반부의 이솝 처형장면이나 초반이나 중간중간 나타나던 야드몬의 압도적 지배자로서의 위엄, 카리스마를 꼽을 수가 있죠. 그 장면들은 정말이지 컷 방식이나 크기 등 연출부터 압도적으로 웅장할 정도로 보는 이름 위압하는 그런 게 있습니다. 야드몬은 그러한 연출을 통해 최종보스의 풍모를 가감없이 보여줬고, 그러한 역할에 충실했죠.


특히 마지막 회에서의 종교적 광기와 희생, 죽음과 혼돈을 연출해낸 것은 정말이지 그 누가 그러한 고대적이고 종교적인 수준의 연출을 해낼 수 있을지 한번쯤 생각해보게 만들 정도로 압도적이고 파괴적인 씬들이었습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완벽히 매료되고 이입시켜버리는 힘을 지닌 그림과 연출이었지요. 최고였습니다.



아이소포스라는 작품은 그 원작이 되는 이솝 우화와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하는 작품입니다. 개인적으로 이런 작품들 정말 좋아하는 데, 특히 작가의 역량과 캐릭터의 매력이 돋보이는 지혜와 철학적 사유가 담긴 작품들을 굉장히 좋아하죠. 김양수 작가의 역량은 정말이지 엄청났는 데, 아이소포스의 스토리텔링은 그 유명한 폴빠 작가와 비교해도 절대 꿀리지 않을 정도로 굉장한 몰입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거기에 도가도 작가의 프로다운 그림실력을 깔고 들어가니 하나의 살아 있는 작품이 되어버리더군요. 초반부터 중간중간 캐릭터로서도, 독자들에게도 무언가를 전달하기 위해 이솝과 캐릭터들은 설화를 매개로 이야기를 풀어나갑니다. 그러한 액제식 구성은 작품의 매력과 작품성을 풍부하게 만드는 요소이지만 아주 자연스럽고 흥미롭게 이끌어나가죠. 사실 남들도 대부분 알고 있을만한 이야기를 이용해 스토리를 풀어나가는 것은 하나의 장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애초에 이솝 우화라는 거 자체가 그러한 설화와 이야기의 모음이기 때문에 작품적으로 그러한 이야기들이 나오고 연출되는 것은 아주 당연한 거고 재미의 요소인 것도 맞고 당연한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작품 구조를 아주 잘 짰다고 생각합니다. 독자에게 생각을 하게 해주는 작품은 그 자체로 명작의 요소를 담고 있는 셈이죠.



작품의 중심이 되는 주제는 자유와 복수입니다. 이솝은 태생부터가 야드몬의 것이었던 부모의 자식이었고, 그 부모가 야드몬이 원치 않는 방식으로 죽게 되자 그 대신 자식인 이솝이 야드몬의 노예가 됩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부모에게서 자랐던 이솝은 그러한 통제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으나 부모의 장례를 이유로 결국 노예가 되어 버리죠. 그렇게 부모에게서 받은 지혜와 명석한 지성을 갖추고 있었던(어렸을 시점에선 아직 멀었지만..) 이솝은 자유를 꿈꾸고 추구하게 되었죠.


이솝에게 있어서 자유란 삶의 존재 가치이기도 합니다. 또한 부모를 그렇게 만든 야드몬에 대한 복수 또한 그의 삶을 관통하는 족쇄이기도 하고요.


그는 자유를 추구하지만, 과거의 일에 족쇄가 채여진 노예이기도 합니다. 이솝이 결국 그 족쇄를 벗어던지지 못했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야드몬이 그 족쇄를 풀어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결국 자유를 손에 넣었으나 사랑을 잃고 말게 돼죠. 복수를 하기 위해선 2개의 묘를 파놔야 한다는 말처럼 그 대가를 치루게 된 겁니다. 그 대가가 온전히 자신의 의지에 따른 것만은 아닐 뿐이죠.



이솝은 성실하고 지혜로웠기 때문에 인덕이 있는 편이었습니다. 나름의 매력을 갖추고 그러한 진심을 보였기 때문에 브리와 테오, 알카노스, 야만인 아저씨 등 굵직한 인물들이 그의 곁에 모일 수 있었고 그와 함께할 수 있었죠.


브리는 그 중 이솝에게 반드시 있어야 했고, 가장 큰 도움이 되었던 인물이기도 합니다. 훗날 목숨을 바칠 정도로. 어렸을 때부터 서로 도왔고, 이솝 또한 그녀에게 도움을 받으면서 나중엔 아예 애정과 우정이 사랑이 되기도 했죠. 서로 오랜 시간을 떨어져 지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알아보고 사랑과 비슷한.. 혹은 사랑의 감정을 품고 있었으나 그걸 표현할 수 없었고요. 그럴 수 밖에 없었으니까.. 


이솝의 어린 시절은 가혹했고 그만큼 타인에게 진심으로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절박했기 때문일 수도 있었죠. 야드몬의 밑에서, 임무를 위해 갔었던 스파르타에서도, 그 이후에서도 말입니다. 진심으로, 선의를 기반으로 남을 도왔고 그 행동은 인과가 되어 자신을 돕는 방향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는 자신 뿐만 아니라 주변인에게도 마찬가지인데, 단적으로 이솝이 이데스에게 받은 반지를 브리세우스에게 주면서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죠. 그 덕에 노예로 팔려나갔던 브리를 이데스가 알아보고 사오며 전사로 성장할 수 있게 됩니다. 


이솝이 진심을 다하며 남들과 대하며 그 선의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받은 결과, 그는 자유를 되찾기 위한 여정을 떠날 수 있었습니다. 겉으로나마 자유로울 수 있었죠. 알카노스를 도와 말레우스로 갈 수 있었던 건 그에게 있어서 가장 큰 전환점이었고요. 그 알카노스가 이솝에게 물어본 적 있습니다. 너의 소원이 무엇이냐고. 이솝은 대답했죠. 나의 소원은 나 자신을 나 스스로가 소유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 이름 자유. 이솝이 추구하는 삶의 목적이자 모든 것이죠.



그러나 모든 일이 잘 돌아가기만 할 순 없었죠. 야드몬은 결코 이솝을 포기하지 않았고, 나이든 야드몬과 아르키우스의 추적을 받습니다. 그에 따라 이솝은 일행과 함께 코린토스로 도망을 가면서 브리와 재회하게 되죠. 그 재회가 그리 감동적이지 않고 아주 담담했지만 브리의 바뀐 모습이 정말 여신 of 여신이었죠. 이후에도 꾸준히 작화 깡패 여신님으로 나오는 데 역시 여캐는 정말 잘 그립니다..


하여간, 그렇게 도망을 갔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이솝에겐 불행이 찾아왔죠. 브리는 신병을 앓으며 무녀로서의 삶을 살아야 하는 운명을 가지게 되었고, 결국 브리를 살리기 위해 과거의 연을 끊어야 하기 때문에 브리의 주인인 삽포와 야드몬을 데려오려고 했죠. 야드몬에게 복수하기 위해 이전부터 계획을 진행해왔고, 브리를 살리기 위해 아예 납치라는 계획을 세우려 했지만.. 결국 실패하게 됐습니다. 심지어 구상하던 사업조차도 재기 불가능할 정도로 처참하게 박살나버리죠.


결국 이솝은 희생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야드몬에게 가서 동료들의 안전을 보장하고 브리가 무녀가 될 수 있게 도와달라는 조건으로 다시 한번 야드몬의 노예가 되죠. 아니, 보이지 않게 감추어 두었던 족쇄를 드러냅니다. 그는 원래 야드몬의 노예였기에.


그 장면이 참으로 슬픈 비극인데, 서로 사랑하고 아끼던 사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은인이었던 이솝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은인인 브리를 서로가 포기할 수 밖에 없었죠. 브리가 무녀가 된 밤, 브리와 함께 깨어난 이솝은 서로 밤을 보냅니다. 이때 이솝이 브리에게 깨어났냐고 묻자 브리는 아니라고 대답하죠. 깨어났다면 브리는 무녀가 되어야 했기 때문에 깨어나지 않았다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이솝과의 인연을 끊고 싶지 않아서, 그를 사랑하고 싶어서. 


그 이후.. 다음날이 오자 이솝은 홀로 꺠어나 무녀가 된 브리를 만나지만 브리는 차갑게 무녀의 거처이니 이방인은 떠날 것을 차갑게 말하죠. 이솝은 말업이 브리를 지나쳤으며, 브리는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립니다. 사랑의 감정은 그렇게 감추어둘 수 있는 것이 아니죠. 말은 그렇게 하지만 서로 찢어지는 가슴을 감추어둘 수 밖에 없었던 겁니다.



그렇기 브리는 지나친 이솝은 다시금 노예가 되었습니다. 야드몬에게 족쇄가 채워진 채 끌려가죠. 처음부터 노예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원래 상태로 돌아온 것이죠. 그는 도망간 것이지 자유를 찾은 것도, 해방된 것도 아니었습니다.



3부의 시작은 그 시점으로부터 20년이 지난 뒤입니다. 아주 긴 시간대를 건너 뛰었지만 원래부터 잘 짜여진 작품이니 독자들은 놀랐지만 뭐.. 명작이라는 것이 그런 것이죠.


이솝의 지혜는 여전했고, 스토리텔링을 통해 수려하게 이끌어나가며 극을 시작합니다. 여전히 이솝은 노예 신분이죠. 다만 직책이 조금 높은 편인 것으로 보이고요. 야드몬은 나이 들었지만 여전히 살아서 이솝의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었고, 이 시기 이솝은 정신마저 굴복한 상태인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야드몬은 아들을 낳았죠. 리케스라는 아들을.


리케스라는 캐릭터는 기실 무언가를 떠올리게 만드는데, 야드몬의 아버지가 그랬죠. 아들을 지배하고 통제하려고 했던 아버지. 그런 아버지가 자식을 왜 낳았을 것이냐는 질문과 대답을 말입니다. 그러나 리케스는 야드몬의 수준이 미치지 못했고, 야드몬 또한 리케스에게 그러한 무언가를 느끼거나 지배하려는 그런 면도 그리 부각되진 않았습니다만.. 솔직히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3부의 구체적인 스토리는 생략하고 본다면, 이솝은 수 십년을 야드몬의 노예로 살아갈 수 밖에 없었고, 자유를 추구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정신적인 굴복. 야드몬을 싫어하는 건 사실이지만 리케스에게마저 증오할 순 없었고 야드몬과 리케스가 다름을 그는 알고 있었죠. 그가 벗어날 방법 또한 없었고 시도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3부 시점에서 그는 시도를 했고, 리케스를 돌봐주었으며, 야드몬의 정치 등 그러한 여러 사정이 겹쳐 야드몬의 눈 밖에 나며 인민재판과 돌팔매질을 당하며 죽어갑니다. 그것도 자신의 사랑, 브리세우스 앞에서요.



아이소포스는 그리스 시대를 기반으로 하는 작품이고, 그리스 시대의 작품은 그리스 비극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정형화되고 유명한 장르가 있기도 하죠. 아이소포스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작품은 비극적으로 끝맺음을 이뤘죠. 이솝은 인민재판을 받으며 십자가에 묶여 처형되는 상황까지 가고, 브리는 자신을 바쳐서 주술을 시행했으며, 결국 브리의 목숨을 대가로 이솝은 자신의 적인 야드몬의 아들인 리케스의 몸과 바뀌게 되었습니다.


결국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과 사모하는 이의 죽음이라는 비극과 함께 끝맺게 되었죠. 이솝은 복수를 원했으며, 그것을 포기하고자 했으나 포기할 수 없었고, 결과적으로 그 복수는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실현되었습니다. 그 결과 그는 공허함만을 안고 살아가게 되었죠. 자유란 허망한 것이었을까요? 복수라는 족쇄에서 벗어난 이후에서나 자유를 얻었고, 그 자유를 대가로 삶의 영혼을 잃게 되었으니, 자유란 이토록 잔혹한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야드몬과 이솝, 브리세우스라는 캐릭터에 대해서 할 말도 많고, 그 캐릭터들에 대한 분석을 하고 싶은 것도 사실입니다. 특히, 야드몬이라는 캐릭터는 그 캐릭터성과 작품 내에서의 행적을 보면 정말이지 할 말이 많고 이야기하고 싶은 것도 많습니다. 그만큼 매력적인 캐릭터이기도 하고 뛰어난 캐릭터성을 지닌 캐릭터이기도 하다는 겁니다. 작품 내에선 결코 정을 줄 수 없는 정형화된 악역이긴 하지만, 작품적으로는 굉장히 매력적으로 재창조된 캐릭터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제 기억력의 한계와 유료화된 작품이기 때문에 이 캐릭터들에 대한 모든 것을 분석하고 이야기할 수 없음이 아쉽고 안타까울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주 약간, 약간의 편린만을 꺼내어 설명하고자 합니다.



이솝


말했듯이, 이솝의 삶을 관통하는 두가지 기둥이 있다면 그것은 자유와 복수입니다. 그는 아무런 사실도 몰랐던 야드몬에게 그의 양친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부모의 썩어가는 시체를 밖에 내다 버리는 것을 대가로 자유인으로 살 것인가, 장례를 치뤄주는 대가로 노예가 될 것이라는 선택지를 놓고 후자를 선택했습니다. 아주 잔혹한 선택지였죠.


그런 그는 야드몬의 밑에 들어가 노예로서 일해야 했습니다. 당연히 다른 노예들에게도 따돌림 당하고 핍박 받으면서 지내야 했죠. 야드몬 또한 그를 좋아하진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부모님은 지혜로웠고 현명했죠. 그 부모 밑에서 태어나고 자란 이솝에게도 지재가 있었습니다. 그 어린 나이에 가혹하고 열악한 조건 속에서 그는 그 스스로를 소유하기 위한 불꽃을 언제나 가슴 속에 지니고 있었고 노예로 살면서도 그러한 욕구를 위해 노력했습니다.


시험 받고, 성취하며, 남을 돕고, 도움을 되돌려 받으며 신뢰 받고 은혜를 주고 받으며 인망을 쌓았죠. 그렇게 그는 그들의 도움을 받아 자유를 손에 넣었고, 먼 이국의 땅으로 도망갑니다. 하지만 이런 말이 있죠.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고. 그는 도망나온 것이지 진정한 자유를 손에 넣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었던 것이고 언제나 떠돌아 다녀야만 했던 것이죠. 물론 복수라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지만요. 


복수.. 복수란 언제나 과정을 음미하는 것이고, 결과에서 성취를 느끼고 행복을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의 복수는 과정을 음미할 수 조차 없었습니다. 그의 복수는 또한 그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죠. 그가 복수를 해야만 하는 이유는 그가 복수를 원하기 때문이라기 보단, 그가 복수를 하게끔 만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야드몬이 이솝을 결코 놔주지 않았거든요. 그가 복수를 포기하고 싶다고 생각해도 야드몬은 결코 그러한 결정을 허락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든 이솝을 소유하고 통제하려고 했고, 이솝은 자유를 갈망하기에 반드시 야드몬을 죽여야만 했던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유가 될 수 없었으니.


그 결과 이솝은 원래의 노예 상태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간의 노력과 인망, 성공과 성취가 무의미하게 변해버린 것입니다. 지재가 있어 나름의 성공과 성취를 하며 살았지만 처음부터 그는 자유롭지 못했으니까요. 그로서는 동료를 버릴 수 없었고, 그러한 모든 것은 그에게 족쇄가 되었습니다. 동료에게 죄가 있거나 한 건 아니었지만 진정한 자유를 얻기 위해선 자신이 쓰고 있던 족쇄를 벗어야만 했죠. 야드몬에게서 말입니다. 그런 겁니다.


사실, 이전에도 이솝은 두차례 가량 야드몬을 죽일 수 있었습니다. 칼로 찔러 죽일 수도 있었고 불에 타죽게 놔둘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솝은 그러지 않았죠. 나름의 정의와 추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쩌면, 어쩌면 이솝은 단지 그러한 복수를 벗어나고 싶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런 복수 같은 것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를 찾고 싶었던 것이죠. 결과적으로 그 복수라는 족쇄 때문에 이솝의 결말이 파탄으로 이끌렸던 것을 생각해보면 말입니다.


자유란 단순 물리적, 신분의 구속이 아닌 정신의 구속에서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이죠. 그렇기 때문에 이솝은 복수를 포기한 듯한 결단을 내린 것이고, 그것을 나름의 논리로 포장했던 것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혹은 복수를 행한 이후를 두려워 해서 일 수도 있죠. 정말 모든 것이 끝날까봐. 모든 좋은 것과 나쁜 것이 다 끝날까봐 말입니다. 복수의 끝은 언제나 공허하기에.


야드몬의 노예가 된 이솝은 결국 자유를 포기하게 됩니다. 포기하고 살게 되었죠. 야드몬이 자식을 보며 성공한 삶을 보낼 때, 그의 성공을 이끌어줬던 것은 이솝이었습니다. 증오해 마지않을 원수이자 집요한 지배자인 야드몬을 말이죠. 그러나 이솝인 결국 그의 눈 밖에 나게 되었고, 죽임 당하게 되었습니다. 단지 여기까지만 본다면 야드몬은 이솝이라는 인간의 인생과 정신 모두를 소유하고 지배하고자 했던 놈이었고, 실제로도 그러한 시도가 성공하기도 했죠.


...이솝이 만들었던 인연이 이솝을 구해주지 않았더라면 말입니다.



브리세우스


노예가 된 이솝에게 먼저 다가갔던 아이이자, 우정을 나누고, 동경을 주었던 캐릭터죠. 이솝을 동경하고 이솝에게 은혜를 갚고자 했던 아이였습니다. 결국 노예로 팔려나가게 됐지만, 이솝이 준 반지 덕분에 전사로 성장할 수 있게 되었죠. 그 덕에 당차고 강한 여성이 되어 돌아왔고요.


이솝의 인생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커다란 조각이 브리세우스 였나면, 브리세우스의 인생 대부분을 차지하는 조각은 이솝이었습니다. 그를 위해 성장했고 그를 위해 살고자 했기 때문이죠. 하지만 운명의 장난이란 이럴 때 쓰는 말입니다. 신병을 앓기 시작하면서 브리는 이솝과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죠. 어렸을 때의 그 감정은 점차 사랑이 되어 나타났는데, 이젠 더 이상 같이 있을 수도 없게 되고, 다시 노예가 됨을 아는 그녀에게 운명이란 신들의 짖꿎은, 잔인한 놀음판이었죠.


이솝 또한 자신이 완전한 자유를 가진 이가 아니었음을 알았기에 브리의 감정을 받아줄 수 없었던 거고요. 지재가 있으며 사기도 치고 다니던 녀석인데 설마 브리의 감정을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있겠습니까? 알았겠죠. 알았죠. 그러나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겁니다. 자신도 어떻게 될 것인지 어렴풋이 알았고 그 위험성 또한 알고 있었으니까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그 진부하고 진부한 만큼 애닳는 관계를 어떻게 견딜 수 있을는지..


결국 이솝은 자신을 버리며 브리를 무녀로 만듭니다. 그리고 그날 밤 잠에서 깨어난 브리는 깨어났냐는 이솝을 물음에 아니라고 대답하죠. 깨어나면 자신은 이제 무녀이고, 이솝과의 관계와, 이솝에 대한 감정을 버릴 수 밖에 없음을 알기 때문이죠. 그러니 깨어난 게 아닌 겁니다. 그러니 서로의 감정을 더 이상 감추지도, 숨기지도 않아도 되는 마지막 날인 것이고요.


그러나 밤이 지나고 아침이 오자, 새로운 관계로 정립됩니다. 브리는 이솝을 냉담하게 대하죠. 그 속은 썩어들어갔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이솝은 노예가 됩니다.


20년 동안 브리는 무녀로서 충실히 봉사해왔습니다. 좋은 대우를 받았고, 남들의 떠받듬을 받았죠. 그러나 사랑이라는 강렬한 감정은 그 시간 속에서 무뎌지지 않았고, 단지 감춰지기만 했습니다. 극의 마지막. 이솝이 십자가에 묶여 죽을 것을 알게 된 브리는 무녀로서의 자신을 버리게 됩니다. 주종관계는 끓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랑은 외압에 끊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죠. 아직 남아 있다면, 그것은 존재하는 겁니다.


브리는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여, 자신의 사랑에게, 자신의 인생을 차지했던 그에게 자신의 목숨을 바치기로 했습니다. 자신의 목숨을 희생해 자신의 사랑을 구하고자 한 것이죠.


결국 브리는 죽게 되었고, 이솝은 살아남습니다. 리케스의 몸으로요. 그리고 그 이후에나 복수는 끝마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복수란 그토록 어렵고, 이토록 허망한 것이죠. 이솝이 그리도 바래왔으나 실패하고, 포기한 시점에서나 성공하게 되었으며, 그 또한 자신의 손이 아니었고, 자신이 자신을 버림으로서 살렸던 여자가 죽어 잃고난 뒤에 모든 것이 끝나게 되었으니..



야드몬


야드몬은 아이소포스에서 가장 매력적이고 다채로운 인물입니다. 그의 태도가 크게 변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지만 심리적, 정신적 방황과 충동은 가장 완성도 있고 복잡한 캐릭터죠. 그는 헤파이스토폴리스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헤파이스토폴리스는 권력자이고, 지배자입니다. 왕이었죠. 권력을 얻기 위해선 자신의 아내라도 팔아넘길 수 있는 냉혈한 인물이었고, 자신의 자식을 사랑이나 애정의 대상이 아닌 지배와 통제, 소유의 대상이었습니다. 자신을 두려워 하라. 그게 자신의 아들에게 원했던 것입니다.


헤파이스토폴리스는 야심만만하고 패기 넘치는 인물이었지만 독하지 못했고, 잔혹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야드몬에게 살해당한 것이었죠.


야드몬은 엘리오스를 보고 사랑에 빠졌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라더니, 그말이 사실이었으며 그녀를 사랑하여 결혼하고자 했죠. 그러나 엘리는 자유를 원했습니다. 강제로 누군가의 여자가 되는 것이 아닌 자유롭게 자신이 남과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랬죠. 아마 이솝의 그 자유를 갈망하는 선청은 어머니에게 물려 받은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 그녀가 슬픔에 빠져 웃지 않으니, 야드몬은 그녀를 위해 뭐든 하겠다는 일념으로, 프론티스라는 광대를 소개해줍니다. 그리고 그의 광대짓에 엘리가 웃죠. 야드몬은 만족했습니다. 그녀가 웃었으니까요. 사랑하는 그녀가 웃었으니 말이죠. 하지만 사람의 감정은 통제하고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그녀는 땅딸보인 프론티스와 함께 도망을 가게 됩니다. 프론티스는 남들이 알아보지 못하게 얼굴을 황산으로 뭉갰지만, 그녀가 사랑한 그는 외모가 아닌 그의 지성과 내면을 사랑했었죠.


그렇게 사랑하는 여인을 잃게 된 야드몬은 자신의 사랑을 찾기 위해 추격자들을 보냅니다. 그 과정은 10년이나 이어졌죠. 10년 동안 한 여자를 찾고자 했던 겁니다. 순정이라면 순정이고, 징그러운 집착과 집요한 강박이기도 한 그의 정신을 옅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사고로 프론티스와 엘리가 모두 죽어버리고, 남은 것은 그들의 자식인 이솝 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이솝을 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사랑하는 여인과 증오하는 남자 사이에서 태어난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 아이를.. 그 복잡하고 끔찍스러운 감정을 어떻게 받아들여야만 했을까요?


결국 그는 꾀를 써 그를 자신의 노예로 삼습니다. 사랑하는 여인의 자식이자 증오하는 남자의 자식인 이솝을 어떻게 해야할지 몰랐기에, 어쩌면 가장 적절한 결정을 내렸던 거라고 봅니다. 사랑할 순 없으나 마냥 증오할 순 없는 그런 아이..


어느날, 야드몬의 아버지 헤파이스토폴리스가 돌아와 엘리를 찾기 위해 10년을 낭비한 야드몬을 꾸짖으며, 그렇게 낭비한 병력을 자신에게 원군으로 보내라고 합니다. 그러나 야드몬은 그 원병을 돌려 아버지를 공격하고 살해하죠. 야드몬은 자신이 아버지의 소유물이 아니라며 항변했습니다. 그의 삶에서 처음으로 있었던 반항이었죠. 어떻게 보면 이중적이기도 하죠. 하지만 그 답기도 합니다. 아버지에게 소유 당하고 통제 당했으나, 자신의 사랑과 원수의 자식인 이솝을 소유하고 통제하려는 면모.. 그만큼 복잡한 캐릭터죠.


이솝에겐 나름대로의 정의와 추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살해하려고 했을 때도, 훗날 배에 불이 타 죽을 수도 있었을 때도 이솝은 그를 죽이지 않았죠. 그가 추구하는 복수의 방식이 아니었기 때문이기도 했거든요. 처음 이솝이 그를 죽이려 할 수 있었을 때 야드몬과의 대화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너에게서는 네 어머니의 어떤 것도 볼 수 없구나. 내게서 내 아버지의 어떤 것도 볼 수 없듯이... 라고 말입니다.


이솝은 아버지의 외모를 더 닮았고, 야드몬은 아버지의 내면을 닮지 못했습니다. 이솝은 어머니의 내면을 닮았꼬, 야드몬은 아버지와 비슷하게 소유와 통제를 추구했지만, 그 방식이 전혀 달랐듯이요. 야드몬은 그의 아버지와는 다르게 독하고 집요했으며 집착적이고 강박적이었습니다. 수 십년 동안 한 여자만을 사랑하고, 그 자식을 통제하고 소유하고자 했으니. 왕이자 전사였던 아버지와는 다르게 뱀과 같은 정치인인 야드몬이었습니다.


어째서 야드몬은 이솝에게 그토록 집착했을까요? 분명 자신의 영원한 사랑이나 신전이었던 엘리의 자식이었기 때문일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코 죽이지 못하고 잡아 소유하고자 했던 거죠. 다신 도망가지 못하게 말입니다. 뒤틀리고 비뚤어진 겁니다. 아버지의 소유와 통제에 대한 트라우마 같은 거랄까요? 살면서 겪고 배워온 것이 그것이니 그 성향을 받은 것도 있으며, 강렬한 사랑의 감정이 수 십년 동안 그를 통제하고 있었던 것이죠.


이솝에게 채워진 노예와 복수라는 족쇄처럼 사랑과 소유라는 족쇄가 그를 감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솝 또한 브리와의 사랑이라는 감정과 인연에 의해 인생이 변하게 되었는 데, 야드몬 또한 그랬다니.. 자유란 무엇일까요? 사랑을 위해, 사랑에 의해 자신의 아버지에게 반항하고 살해한 그 또한 자유를 추구했을 것인데.


비록 이솝에게서 엘리의 무엇도 찾아볼 수는 없었지만 이솝의 내면은 엘리와 닮은 면이 있었죠. 아니면 단지 과거를 추억하고 회생하게 해줄 매개체로서 그가 필요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엘리의 자식이라는 사실 그 자체가 노예 이상이나 그 이하로 만들 수 없는 장치가 되었을 수도 있고요.


야드몬이라는 캐릭터를 피상적으로 바라복 되면 평면적인 변태적 집착과 소유욕을 지닌 남자라고 보일 수도 있지만, 실은 가장 복잡하고 입체적인 캐릭터이기도 합니다. 겉으로 드러나진 않고 내면이 글로 표현되는 것도 아니지만 그 내면은 복잡하고 혼란스럽기 때문입니다. 정치인답게 표정을 다스릴 줄 알고 태도를 갈무리할 줄 알기에 그것을 알기 어렵지만, 그에게 같은 목적을 위한 내면적 상태는 시점에 따라 지속해서 변해간다고 전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복잡한 것은 사실이고 그에 대한 수 많은 해석을 낳을 수도 있지요.


그렇기 때문에 가장 훌륭하고 완성도 있는 캐릭터를 야드몬으로 꼽는 것이고, 매력적인 캐릭터라고 단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캐릭터를 만들고 연출해낸 김양수, 도가도 콤비의 작가적 능력과 작품성은 그야말로 신화적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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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 포터 (Will Potter): 비폭력적 항거를 범죄화하는 충격적인 움직임

2002년 수사전문 기자이자 TED Fellow 인 윌 포터는 시카고드리뷴에 자신이 통상적으로 다루는 총격과 살인에 관련한 영역에서 벗어난 기사를 쓰기로 한다. 통물 실험에 반대하는 지역 운동에 도움을 주러갔다. "저는 그것이 뭔가 긍정적인 일을 하는 확실한 길일거라고 생각했습니다."라고 그는 말한다. 하지만 그는 체포되었고, 그로 인해 그는 평화적인 항의가 테러리즘으로 누명을 쓰는 세계로의 여정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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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엔 아주 고약한 인식이 많습니다. 그 중 하나는 시위나 집회 따위를 사회적 범죄 따위로 여기는 것이죠.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가 떨어지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오늘날에도 분명한 문제 중 하나이고 말입니다. 이는 시위나 집회가 어떠한 목적, 성격, 그리고 그 의미가 있는지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피해자가 억울함을 풀기 위해 시위, 집회를 할 때마다 그것에 빨갱이, 반국가, 반정부, 선동과 같은 단어를 써붙히며 악마화하고 범죄화하여 소위 나쁜 것으로 인식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고용주가 약속한 돈을 주지 않아서, 노동환경이 무자비할 정도로 가혹하기 때문에 등등.. 피해자가 정당한 이의를 제기하는데 그러기엔 상대하는 자의 힘이 너무 세고 이야기를 듣고자 하는 의지 또한 없으니 시위를 하고 집회를 하는 겁니다. 기업을 상대로, 정부를 상대로, 그리고 우리가 그러하고 있다는 것을 국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그런데 수십년전 우리나라는 그런 것을 허용하지 않았죠. 모든 시위와 집회, 데모는 모조리 나쁜 것이고, 국가와 정부에 반하는 것으로 나라를 북한에 들어 바치기 위한 것이라고, 빨갱이들이라고, 빨갱이에게 '선동'당했다고 '선동'했지요. 신문에서 뉴스에서 나라에서 시위니 뭐니 하는 것들은 죄다 나쁜 것이라 말하며 몽둥이 들고 후려치니 모르는 사람은 그냥 나쁜 것인갑따.. 하면서 그냥 그렇게 알게 되었죠.

문제는, 이게 아직도 통한다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비단 나이든 어르신이 아닌 10대 20대 젊은이도 주류 언론이 말하는 대로 그대로 이해하고 다른 이야기는 모조리 조작이고 왜곡이고 선동이라 여깁니다. 모든 시위는 나쁜 것이고 모든 집회도 나쁜 것이죠. 물론 '우덜'이 하는 시위와 집회는 좋은 겁니다. 일베의 광화문 폭식(풉)투쟁만 봐도 그렇지요.

사실, 시위나 집회 같은 것들은 사회에 순기능을 하는 활동입니다. 국가와 국민을 위한 것이고, 건전하고 올바른 사회를 이룩하기 위해서 더더욱 필요한 운동들이죠. 그에 대한 내용은 위쪽 링크의 글을 참고하길 바랍니다.


위 동영상의 윌 포터는 동물 실험에 반대하는 지역운동에 참가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뒤 FBI가 찾아왔고, 그렇게 테러리스트 딱지가 붙었지요.

그가 했던 시위는 비폭력적인 항거였습니다. 동물실험을 반대한다는 요지의 시위였어요. 당연히 폭동 또한 아니었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범죄화했습니다. 그에게 스파이 행위를 강요했고 테러리즘의 누명을 씌웠지요. 우리나라에선 너무나 흔하게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실제로 과거 운동권에서 그렇게 하라고 강요받거나 강요한 사례가 있고, 아예 공부는 잘하지만 운동권에서 멀었던 학생을 운동권에 집어넣고 조종하거나, 정보를 캐내려는 일도 많았죠. 그렇게 졸업하고 나면 그에 대한 보상으로 앞으로 사는게 좀 더 편해졌고요.

그리고 지금도 한국에서 일어나는 모든 시위와 집회를 범죄화하고 있습니다. 악마화하고 있죠. 세월호 사건에 대한 평화적인 집회도, 정부에 불만을 가지고 요구사항을 관철시키기 위해, 국민들에게 자신의 의지를 알리기 위한 광화문 시위를 범죄화하고 잘못된 것으로 만들려고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그러한 집회와 시위를 강제해산시키지요. 평화롭고 올바른 목적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것을 죄인 것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미신고집회 해산명령' 남발하는 경찰.. 대법 판결도 무시
http://media.daum.net/society/affair/newsview?newsid=20140904060109933


이는 시민들의 의지와 말할 권리를 억압하는 행위와 다를 바 없습니다. 그들이 하고자 하는 말을 끊고 입 닥치라고 해산시킨 꼴이니까요. 아래의 기사를 보시면, 광장은 시민의 것이라고 합니다. 광화문에서 집회를 하는 사람들은 시민이 아니던가요? 일본 우익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들은 '비국민'인겁니까?

말할 권리 막나 vs 광장은 시민의 것…與 광화문집회 금지 추진 논란
http://news.heraldcorp.com/view.php?ud=20140905000694&md=20140908083733_BK

시위와 집회는 명백히 보장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국가가 나서서 그것을 보장하고 있지 않죠. 오히려 억압하고, 잘못된 것으로 만들려고 하고 있습니다. 정부의 나팔수가 되어버린 주류언론은 그들의 권력과 돈에 굴복해 그들이 하고자 하는 말, 듣고자 하는 말만 하며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을 선동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옳은 것을 잘못된 것이라 알게 되고 그렇게 말하게 되죠. 이유는 모르지만, 시위와 집회는 나쁜 것이다. 이러이러한 이유로 시위와 집회는 나쁜 것이다. 라고 말입니다. 정말 나쁜 것일까요? 그럴리가 있나, 저 위의 링크를 보면 왜 그렇지 않은 것인지 알 수 있을 겁니다.


국가는 선박감시라는 의무를 소홀히 했고 그로 인해 기업은 선박을 개판으로 운영했습니다. 그리곤 수백명이 죽었죠. 그리고는 해경과 기업이 짜고 증거를 은닉, 훼손하려고 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순간에도 사람보다 돈을 먼저 걱정했고 그렇게 제대로된 대처조차 못해 죽었습니다. 이는 명백한 정부가 국민을 대하는 의무를 방기한 것이고 국민을 우롱한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더 당당하던가요? 정말 잘못한 이들은 어깨 당당히 펴고 고개 뻣뻣히 들고 있는데, 그들 때문에 자식이 죽고 친구가 죽은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떨궜습니다.

이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그 의견을 표현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면, 길가다 뺨 맞으면 자신이 잘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뺨 때린 놈은 당당히 어깨를 펴고 고개를 뻣뻣히 들어야죠. 잘했으니까. 맞은 놈은 잘못했고. 이유와 잘잘못 따위는 필요없고 맞은 놈이 맞았으니 잘못한 겁니다. 그러니 고개를 떨구겠죠.


정당히 말을 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해선 안 됩니다. 정당히 말을 할 권리가 보장되어있고, 이건 '너' 따위가 침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말을 했다면 그 책임을 제대로 져야 합니다. 애새끼마냥 회피하려들지 말고 말이지요. 시위와 집회는 정당하고 옳으며, 오히려 권장되어야 합니다. 말을 해도 안 들어쳐먹으니 시위와 집회를 하는 것인데, 이조차 막는다면 애초에 이야기를 들을 생각이 없으니 아주 이기적이고 독선적인 것이죠. 그리고 실제로도 그럽니다. 지금도 그러고 있고.


지금 이 나라와 이 사회는 명백히 잘못되었습니다. 그걸 말하는 게 잘못이라고 생각한다면, 자기 스스로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게 맞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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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흔히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물론 표현의 자유는 중요합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그 말을 함에 있어서 어떠한 내, 외부적인 압박 따위가 있어서는 안 되지요. 그렇게 검열이 되는 사회는 자유로운 사회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런 자유롭지 않은 사회는 소통이 되지 않고 서로간의 이해의 폭이 좁아지게 됩니다. 즉, 발전을 저해합니다.


그렇지만 표현의 '자유'와는 별개로 자신의 행위에 있어서 '책임'이라는 개념 또한 명백하게 존재합니다. 엄밀히 말해서, 자신이 무슨 말을 하든 그에 대한 타인의 평가와 비판은 자신이 온당히 받아야할 책임영역이라는 것이죠. 만약 이 책임이 증발해버린다면 무슨 말을 하든 아무 거리낌이 없어질 것이고, 그러한 절제할 수 있게 해주는 견제장치가 없어진다면 타인에 대한 모욕과 증오를 쏟아냄에도 아무런 상관이 없어집니다.



이것은 분명한 문제입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증오하고 차별할 권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은 증오받기 싫고 차별당하기 싫지만 다른 누군가는 증오하고 차별당하기 싫다? 그러한 증오와 차별에는 수직적 구조가 존재합니다. 즉, 강자와 약자가 존재하고 그 구조속에서 상호간의 증오와 차별은 서로 다른 무게감을 지닌다는 의미이죠.


그러한 차이에서 나오는, 혹은 그러한 차이 자체를 만들어내는 증오와 차별, 그리고 그것을 나타내는 모든 표현은, 잘못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자체를 막지는 안 되, 그에 대한 책임을 온전히 받게 해야지요. 분명히 표현의 자유는 보장되어있습니다. 누군가를 싫어한다고, 증오한다고, 차별하고 싶다고 말해도 됩니다. 사회적 통념에 어긋나는 표현을 써도 됩니다. 하지만 그 결과로서 돌아오는 자신에 대한 타인의 평가와 비판, 그리고 좀 무지할 수 있는 이들의 '증오'와 '차별'은 그 자신이 책임져야 합니다.



자유에는 필연적으로 책임이 따라갑니다. 책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유가 아닌 방종이고, 방종한 것은 옳지 못합니다. 타인의 자유와 권리를 억압하기 때문이죠.


누군가를 증오하고 차별하는 발언이 너무도 쉽게 오가는 사회는 책임소재를 제대로 따지지 않는 사회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방종한 사회지요. 책임이 사라졌으니까.



누군가를 비난하고, 차별하고, 조롱하고, 증오하면서 그에 대한 책임을 표현의 자유라고 할 수 없습니다. 자유에는 책임이 따라오기 때문이지요. 그들은 그들의 자유를 영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하지요. 그러게 책임을 지지 않는 자들이 이 사회를 차지하게 된다면, 그 사회는 발전할 수 없습니다. 더 이상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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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재밌는게, 행동은 같은데 대상이 다르면 다른 평가를 받는다는 거지요.


똑같이 폭력이지만 좌파에 대한 폭력은 옹호받고, 우파에 대한 폭력은 자유에 대한 테러라고 하는 것처럼.(혹은 그 반대.)



기본이 되는 태도가 있습니다. 인체에 비유하자면 그러한 태도는 '뼈대'가 됩니다. 척추와 같은. 그리고 그 태도를 감싸는 단어들과 행동들, 즉 우리가 보는 형태는 '근육'과 '살'에 비유할 수 있겠군요. 우리가 무언가를 비판하거나 할 때 중요한건 형태가 아닙니다. 바로 뼈대이지요.


일베충이 하는 행태를 똑같이 일베충에게 한다고 해서, 자신이 일베충보다 나은 사람이 되는게 아닙니다. 동급이 되는거지요, 아니, 똑같은 짓을 하면서 그 원류에 대해 공격하니 더 질이 낮다고 할 수 있겠네요. 대상이 일베충이라는 이유로, 똑같은 행동을 했는데 쟤네들은 당해도 싸다. 하는건 논리적인 행동이 아닙니다.


행동이 같으면, 대상이 어찌됐든 똑같은거에요. 그렇기 때문에 뼈대가 되는 태도는 어떤 경우에도, 어떤 대상에게도(심지어 자신에게도) 적용했을 때 다른 말이 튀어나와선 안 되는 겁니다. 그렇지 못하면 "내가 하면 로맨스, 니가 하면 불륜"이 되는 거지요..


일베이나, 우익을 비판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간혹 분노 따위에 휩싸여 일베충과 똑같은 형태의 공격을 하는 경우가 간혹 있습니다. 개중에는 일베충을 아예 인간으로 보지 않고 글자 그대로의 벌레로, 다 죽여야 한다 같은 과격한 언사를 남발하는 경우도 찾아볼 수 있죠. 하지만 그러한 형태의 공격은 자충수를 두는 꼴이고, 일베충의 좌파, 전라도인에 대한 언사 및 행동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 마당에 누가 누굴 비판하고자 하는가. 라는 비판이 온다면, 할 말이 없겠죠. 나는 되고 쟤는 안 된다? 그런 이중잣대가 어딨습니까. 색깔만 다른 일베충이죠. 중요한 건 형태가 아니라 뼈대, 기본이 되는 태도에 있습니다. 그게 다르지 않다면 또 다른 일베충의 모습에 불과합니다. 극과 극은 통한다고 하죠? 대부분의 극단주의자들은 그 행동에 비슷함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모든 극단주의는 비슷한, 혹은 같은 '뼈대'를 공유하니까요. 그렇기에 절대 상종하지 않을 것 같은 그들이 어느샌가 전향한 모습을 볼 수 있을 겁니다.


그 이유는 형태만 다르고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태도가 똑같기 때문입니다.


무언가를 비판하고자 한다면 자신에게도 적용할 수 있는 원칙에 따라 비판을 해야지, 똑같은 짓을 하면서 다른 평가를 듣고자 한다면 그게 미개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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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적으로 문화는 사회의 경직성에 영향을 많이 받는지라, 자유로운 사회일 수록 문화도 발달하기 쉽죠.


예컨데 미국의 개방적인 문화와 이슬람교가 강력한 힘을 가진 중동지방을 비교해보면 많은 부분, 특히 여성 및 성적인 부분에서 굉장한 차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도 이와 마찬가지인데, 예전에 비해 크게 달라진거 없는 검열 기관들은 아직도 구시대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사회문화를 검열하고 있습니다.


특히 음악과 관련된 부분이 유명한데, 사회비판 곡은 여전히 검열대상으로 공중파는 물론 방송에서 볼 일이 없죠. 만화같은 경우 경무대 똥통사건, 정병섭군 자살사건같은 정치, 사회적인 이슈가 될만한 사건을 겪으며 검열이되었죠. 물론 그러한 정치적인 이유가 아니었어도 검열을 하며 문화를 억압했겠죠.


이런 것이 국가, 국가기관에 의해 경직성이 유지되는 부분이라면 반대로 국민들에 의해 경직성이 유지되는 분야가 있는데 만화, 게임, 애니메이션 분야가 있으며, 이러한 것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은 '공부는 안하고 만화만 보고 있다, 게임만 하고 있다'가 대표하는 학생들의 유희거리가 아닌 공부를 방해하는 해로운 것 취급이죠. 물론 학생들만의 전유물은 아니지만 학생에게 들이대는 잣대가 유독 불합리할 뿐입니다.


산업과 관련을 때고 이야기해보자면 존대말이 있을 수 있겠죠. 옛말에 '5살까진 친구'라는 말이 존재하듯이 절친의 상징 오성과 한음도 나이 차이는 5살이었고, 20세기 초 즈음엔 부자간의 나이차이가 20살 미만이라면 아예 아버지의 친구가 아들의 친구인 경우도 있었는데 반해 일제시대를 겪으며 나이 한살만 차이나도 매우 깍듯이 대해야하는 분위기는 기실 유교라기 보단 일본의 군국주의(나이=계급..)의 영향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사회의 경직적인 분위기는 대체로 권위에 의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은데, 그러한 것이 어떠한 전통이든, 잘못된 악습이든 현대의 자유국가로서의 기틀에 방해물이 되는 것은 분명하다 봅니다.


사회가 진정 자유롭기 위해선 이러한 것들에 대해 논하여 어디까지가 옳은 것이고 어디까지가 옳지 않은가, 혹은 적절하지 않은가를 정하고 그것을 현실 사회에 적용시켜 새로운 분위기를 형성시켜야하지 않나 싶습니다. 


어떻게 라고 묻는다면, 글쎄요?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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