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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며,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 - E.Kant
by Ko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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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에 해당되는 글 5건

  1. 2017.10.20
    아이소포스 리뷰.
  2. 2014.09.10
    비폭력적인 항거에 대한 범죄화
  3. 2014.09.08
    표현의 자유. 표현에 대한 책임.
  4. 2014.06.18
    같은 행동, 다른 대상. (3)
  5. 2013.07.19
    사회가 진정 자유로워지려면 (2)


※ 본 리뷰는 작품에 대한 내용누설이 있습니다. 


아이소포스는 언젠가 꼭 리뷰를 작성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하는 명작인데, 제가 엄청 게으르다보니 많은 부분을 잊어버린 지금에서야 작성하게 됐습니다. 사실 이런 버릇 고쳐야 하는데 말이죠..


김양수, 도가도 콤비의 작품입나다만 먼저 도가도의 그림 실력부터 칭찬하고 넘어가고 싶습니다. 이전부터 도가도 작가의 그림 실력이야 익히 알려진 사실이지만 고대 시대를 배경으로 자기 스타일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충분히 어울리고 수준 높은 작화와 드라마틱한 연출을 뽑아낼 수 있는 건 정말이지 몇 안 되는 그림작가만의 역량이죠.


초반부터 후반까지 도가도의 드라마틱한 연출은 가히 괴물급이다 싶을 정도의 장면들이 있었는 데, 후반부의 이솝 처형장면이나 초반이나 중간중간 나타나던 야드몬의 압도적 지배자로서의 위엄, 카리스마를 꼽을 수가 있죠. 그 장면들은 정말이지 컷 방식이나 크기 등 연출부터 압도적으로 웅장할 정도로 보는 이름 위압하는 그런 게 있습니다. 야드몬은 그러한 연출을 통해 최종보스의 풍모를 가감없이 보여줬고, 그러한 역할에 충실했죠.


특히 마지막 회에서의 종교적 광기와 희생, 죽음과 혼돈을 연출해낸 것은 정말이지 그 누가 그러한 고대적이고 종교적인 수준의 연출을 해낼 수 있을지 한번쯤 생각해보게 만들 정도로 압도적이고 파괴적인 씬들이었습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완벽히 매료되고 이입시켜버리는 힘을 지닌 그림과 연출이었지요. 최고였습니다.



아이소포스라는 작품은 그 원작이 되는 이솝 우화와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하는 작품입니다. 개인적으로 이런 작품들 정말 좋아하는 데, 특히 작가의 역량과 캐릭터의 매력이 돋보이는 지혜와 철학적 사유가 담긴 작품들을 굉장히 좋아하죠. 김양수 작가의 역량은 정말이지 엄청났는 데, 아이소포스의 스토리텔링은 그 유명한 폴빠 작가와 비교해도 절대 꿀리지 않을 정도로 굉장한 몰입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거기에 도가도 작가의 프로다운 그림실력을 깔고 들어가니 하나의 살아 있는 작품이 되어버리더군요. 초반부터 중간중간 캐릭터로서도, 독자들에게도 무언가를 전달하기 위해 이솝과 캐릭터들은 설화를 매개로 이야기를 풀어나갑니다. 그러한 액제식 구성은 작품의 매력과 작품성을 풍부하게 만드는 요소이지만 아주 자연스럽고 흥미롭게 이끌어나가죠. 사실 남들도 대부분 알고 있을만한 이야기를 이용해 스토리를 풀어나가는 것은 하나의 장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애초에 이솝 우화라는 거 자체가 그러한 설화와 이야기의 모음이기 때문에 작품적으로 그러한 이야기들이 나오고 연출되는 것은 아주 당연한 거고 재미의 요소인 것도 맞고 당연한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작품 구조를 아주 잘 짰다고 생각합니다. 독자에게 생각을 하게 해주는 작품은 그 자체로 명작의 요소를 담고 있는 셈이죠.



작품의 중심이 되는 주제는 자유와 복수입니다. 이솝은 태생부터가 야드몬의 것이었던 부모의 자식이었고, 그 부모가 야드몬이 원치 않는 방식으로 죽게 되자 그 대신 자식인 이솝이 야드몬의 노예가 됩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부모에게서 자랐던 이솝은 그러한 통제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으나 부모의 장례를 이유로 결국 노예가 되어 버리죠. 그렇게 부모에게서 받은 지혜와 명석한 지성을 갖추고 있었던(어렸을 시점에선 아직 멀었지만..) 이솝은 자유를 꿈꾸고 추구하게 되었죠.


이솝에게 있어서 자유란 삶의 존재 가치이기도 합니다. 또한 부모를 그렇게 만든 야드몬에 대한 복수 또한 그의 삶을 관통하는 족쇄이기도 하고요.


그는 자유를 추구하지만, 과거의 일에 족쇄가 채여진 노예이기도 합니다. 이솝이 결국 그 족쇄를 벗어던지지 못했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야드몬이 그 족쇄를 풀어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결국 자유를 손에 넣었으나 사랑을 잃고 말게 돼죠. 복수를 하기 위해선 2개의 묘를 파놔야 한다는 말처럼 그 대가를 치루게 된 겁니다. 그 대가가 온전히 자신의 의지에 따른 것만은 아닐 뿐이죠.



이솝은 성실하고 지혜로웠기 때문에 인덕이 있는 편이었습니다. 나름의 매력을 갖추고 그러한 진심을 보였기 때문에 브리와 테오, 알카노스, 야만인 아저씨 등 굵직한 인물들이 그의 곁에 모일 수 있었고 그와 함께할 수 있었죠.


브리는 그 중 이솝에게 반드시 있어야 했고, 가장 큰 도움이 되었던 인물이기도 합니다. 훗날 목숨을 바칠 정도로. 어렸을 때부터 서로 도왔고, 이솝 또한 그녀에게 도움을 받으면서 나중엔 아예 애정과 우정이 사랑이 되기도 했죠. 서로 오랜 시간을 떨어져 지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알아보고 사랑과 비슷한.. 혹은 사랑의 감정을 품고 있었으나 그걸 표현할 수 없었고요. 그럴 수 밖에 없었으니까.. 


이솝의 어린 시절은 가혹했고 그만큼 타인에게 진심으로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절박했기 때문일 수도 있었죠. 야드몬의 밑에서, 임무를 위해 갔었던 스파르타에서도, 그 이후에서도 말입니다. 진심으로, 선의를 기반으로 남을 도왔고 그 행동은 인과가 되어 자신을 돕는 방향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는 자신 뿐만 아니라 주변인에게도 마찬가지인데, 단적으로 이솝이 이데스에게 받은 반지를 브리세우스에게 주면서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죠. 그 덕에 노예로 팔려나갔던 브리를 이데스가 알아보고 사오며 전사로 성장할 수 있게 됩니다. 


이솝이 진심을 다하며 남들과 대하며 그 선의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받은 결과, 그는 자유를 되찾기 위한 여정을 떠날 수 있었습니다. 겉으로나마 자유로울 수 있었죠. 알카노스를 도와 말레우스로 갈 수 있었던 건 그에게 있어서 가장 큰 전환점이었고요. 그 알카노스가 이솝에게 물어본 적 있습니다. 너의 소원이 무엇이냐고. 이솝은 대답했죠. 나의 소원은 나 자신을 나 스스로가 소유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 이름 자유. 이솝이 추구하는 삶의 목적이자 모든 것이죠.



그러나 모든 일이 잘 돌아가기만 할 순 없었죠. 야드몬은 결코 이솝을 포기하지 않았고, 나이든 야드몬과 아르키우스의 추적을 받습니다. 그에 따라 이솝은 일행과 함께 코린토스로 도망을 가면서 브리와 재회하게 되죠. 그 재회가 그리 감동적이지 않고 아주 담담했지만 브리의 바뀐 모습이 정말 여신 of 여신이었죠. 이후에도 꾸준히 작화 깡패 여신님으로 나오는 데 역시 여캐는 정말 잘 그립니다..


하여간, 그렇게 도망을 갔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이솝에겐 불행이 찾아왔죠. 브리는 신병을 앓으며 무녀로서의 삶을 살아야 하는 운명을 가지게 되었고, 결국 브리를 살리기 위해 과거의 연을 끊어야 하기 때문에 브리의 주인인 삽포와 야드몬을 데려오려고 했죠. 야드몬에게 복수하기 위해 이전부터 계획을 진행해왔고, 브리를 살리기 위해 아예 납치라는 계획을 세우려 했지만.. 결국 실패하게 됐습니다. 심지어 구상하던 사업조차도 재기 불가능할 정도로 처참하게 박살나버리죠.


결국 이솝은 희생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야드몬에게 가서 동료들의 안전을 보장하고 브리가 무녀가 될 수 있게 도와달라는 조건으로 다시 한번 야드몬의 노예가 되죠. 아니, 보이지 않게 감추어 두었던 족쇄를 드러냅니다. 그는 원래 야드몬의 노예였기에.


그 장면이 참으로 슬픈 비극인데, 서로 사랑하고 아끼던 사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은인이었던 이솝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은인인 브리를 서로가 포기할 수 밖에 없었죠. 브리가 무녀가 된 밤, 브리와 함께 깨어난 이솝은 서로 밤을 보냅니다. 이때 이솝이 브리에게 깨어났냐고 묻자 브리는 아니라고 대답하죠. 깨어났다면 브리는 무녀가 되어야 했기 때문에 깨어나지 않았다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이솝과의 인연을 끊고 싶지 않아서, 그를 사랑하고 싶어서. 


그 이후.. 다음날이 오자 이솝은 홀로 꺠어나 무녀가 된 브리를 만나지만 브리는 차갑게 무녀의 거처이니 이방인은 떠날 것을 차갑게 말하죠. 이솝은 말업이 브리를 지나쳤으며, 브리는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립니다. 사랑의 감정은 그렇게 감추어둘 수 있는 것이 아니죠. 말은 그렇게 하지만 서로 찢어지는 가슴을 감추어둘 수 밖에 없었던 겁니다.



그렇기 브리는 지나친 이솝은 다시금 노예가 되었습니다. 야드몬에게 족쇄가 채워진 채 끌려가죠. 처음부터 노예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원래 상태로 돌아온 것이죠. 그는 도망간 것이지 자유를 찾은 것도, 해방된 것도 아니었습니다.



3부의 시작은 그 시점으로부터 20년이 지난 뒤입니다. 아주 긴 시간대를 건너 뛰었지만 원래부터 잘 짜여진 작품이니 독자들은 놀랐지만 뭐.. 명작이라는 것이 그런 것이죠.


이솝의 지혜는 여전했고, 스토리텔링을 통해 수려하게 이끌어나가며 극을 시작합니다. 여전히 이솝은 노예 신분이죠. 다만 직책이 조금 높은 편인 것으로 보이고요. 야드몬은 나이 들었지만 여전히 살아서 이솝의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었고, 이 시기 이솝은 정신마저 굴복한 상태인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야드몬은 아들을 낳았죠. 리케스라는 아들을.


리케스라는 캐릭터는 기실 무언가를 떠올리게 만드는데, 야드몬의 아버지가 그랬죠. 아들을 지배하고 통제하려고 했던 아버지. 그런 아버지가 자식을 왜 낳았을 것이냐는 질문과 대답을 말입니다. 그러나 리케스는 야드몬의 수준이 미치지 못했고, 야드몬 또한 리케스에게 그러한 무언가를 느끼거나 지배하려는 그런 면도 그리 부각되진 않았습니다만.. 솔직히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3부의 구체적인 스토리는 생략하고 본다면, 이솝은 수 십년을 야드몬의 노예로 살아갈 수 밖에 없었고, 자유를 추구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정신적인 굴복. 야드몬을 싫어하는 건 사실이지만 리케스에게마저 증오할 순 없었고 야드몬과 리케스가 다름을 그는 알고 있었죠. 그가 벗어날 방법 또한 없었고 시도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3부 시점에서 그는 시도를 했고, 리케스를 돌봐주었으며, 야드몬의 정치 등 그러한 여러 사정이 겹쳐 야드몬의 눈 밖에 나며 인민재판과 돌팔매질을 당하며 죽어갑니다. 그것도 자신의 사랑, 브리세우스 앞에서요.



아이소포스는 그리스 시대를 기반으로 하는 작품이고, 그리스 시대의 작품은 그리스 비극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정형화되고 유명한 장르가 있기도 하죠. 아이소포스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작품은 비극적으로 끝맺음을 이뤘죠. 이솝은 인민재판을 받으며 십자가에 묶여 처형되는 상황까지 가고, 브리는 자신을 바쳐서 주술을 시행했으며, 결국 브리의 목숨을 대가로 이솝은 자신의 적인 야드몬의 아들인 리케스의 몸과 바뀌게 되었습니다.


결국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과 사모하는 이의 죽음이라는 비극과 함께 끝맺게 되었죠. 이솝은 복수를 원했으며, 그것을 포기하고자 했으나 포기할 수 없었고, 결과적으로 그 복수는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실현되었습니다. 그 결과 그는 공허함만을 안고 살아가게 되었죠. 자유란 허망한 것이었을까요? 복수라는 족쇄에서 벗어난 이후에서나 자유를 얻었고, 그 자유를 대가로 삶의 영혼을 잃게 되었으니, 자유란 이토록 잔혹한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야드몬과 이솝, 브리세우스라는 캐릭터에 대해서 할 말도 많고, 그 캐릭터들에 대한 분석을 하고 싶은 것도 사실입니다. 특히, 야드몬이라는 캐릭터는 그 캐릭터성과 작품 내에서의 행적을 보면 정말이지 할 말이 많고 이야기하고 싶은 것도 많습니다. 그만큼 매력적인 캐릭터이기도 하고 뛰어난 캐릭터성을 지닌 캐릭터이기도 하다는 겁니다. 작품 내에선 결코 정을 줄 수 없는 정형화된 악역이긴 하지만, 작품적으로는 굉장히 매력적으로 재창조된 캐릭터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제 기억력의 한계와 유료화된 작품이기 때문에 이 캐릭터들에 대한 모든 것을 분석하고 이야기할 수 없음이 아쉽고 안타까울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주 약간, 약간의 편린만을 꺼내어 설명하고자 합니다.



이솝


말했듯이, 이솝의 삶을 관통하는 두가지 기둥이 있다면 그것은 자유와 복수입니다. 그는 아무런 사실도 몰랐던 야드몬에게 그의 양친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부모의 썩어가는 시체를 밖에 내다 버리는 것을 대가로 자유인으로 살 것인가, 장례를 치뤄주는 대가로 노예가 될 것이라는 선택지를 놓고 후자를 선택했습니다. 아주 잔혹한 선택지였죠.


그런 그는 야드몬의 밑에 들어가 노예로서 일해야 했습니다. 당연히 다른 노예들에게도 따돌림 당하고 핍박 받으면서 지내야 했죠. 야드몬 또한 그를 좋아하진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부모님은 지혜로웠고 현명했죠. 그 부모 밑에서 태어나고 자란 이솝에게도 지재가 있었습니다. 그 어린 나이에 가혹하고 열악한 조건 속에서 그는 그 스스로를 소유하기 위한 불꽃을 언제나 가슴 속에 지니고 있었고 노예로 살면서도 그러한 욕구를 위해 노력했습니다.


시험 받고, 성취하며, 남을 돕고, 도움을 되돌려 받으며 신뢰 받고 은혜를 주고 받으며 인망을 쌓았죠. 그렇게 그는 그들의 도움을 받아 자유를 손에 넣었고, 먼 이국의 땅으로 도망갑니다. 하지만 이런 말이 있죠.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고. 그는 도망나온 것이지 진정한 자유를 손에 넣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었던 것이고 언제나 떠돌아 다녀야만 했던 것이죠. 물론 복수라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지만요. 


복수.. 복수란 언제나 과정을 음미하는 것이고, 결과에서 성취를 느끼고 행복을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의 복수는 과정을 음미할 수 조차 없었습니다. 그의 복수는 또한 그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죠. 그가 복수를 해야만 하는 이유는 그가 복수를 원하기 때문이라기 보단, 그가 복수를 하게끔 만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야드몬이 이솝을 결코 놔주지 않았거든요. 그가 복수를 포기하고 싶다고 생각해도 야드몬은 결코 그러한 결정을 허락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든 이솝을 소유하고 통제하려고 했고, 이솝은 자유를 갈망하기에 반드시 야드몬을 죽여야만 했던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유가 될 수 없었으니.


그 결과 이솝은 원래의 노예 상태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간의 노력과 인망, 성공과 성취가 무의미하게 변해버린 것입니다. 지재가 있어 나름의 성공과 성취를 하며 살았지만 처음부터 그는 자유롭지 못했으니까요. 그로서는 동료를 버릴 수 없었고, 그러한 모든 것은 그에게 족쇄가 되었습니다. 동료에게 죄가 있거나 한 건 아니었지만 진정한 자유를 얻기 위해선 자신이 쓰고 있던 족쇄를 벗어야만 했죠. 야드몬에게서 말입니다. 그런 겁니다.


사실, 이전에도 이솝은 두차례 가량 야드몬을 죽일 수 있었습니다. 칼로 찔러 죽일 수도 있었고 불에 타죽게 놔둘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솝은 그러지 않았죠. 나름의 정의와 추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쩌면, 어쩌면 이솝은 단지 그러한 복수를 벗어나고 싶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런 복수 같은 것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를 찾고 싶었던 것이죠. 결과적으로 그 복수라는 족쇄 때문에 이솝의 결말이 파탄으로 이끌렸던 것을 생각해보면 말입니다.


자유란 단순 물리적, 신분의 구속이 아닌 정신의 구속에서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이죠. 그렇기 때문에 이솝은 복수를 포기한 듯한 결단을 내린 것이고, 그것을 나름의 논리로 포장했던 것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혹은 복수를 행한 이후를 두려워 해서 일 수도 있죠. 정말 모든 것이 끝날까봐. 모든 좋은 것과 나쁜 것이 다 끝날까봐 말입니다. 복수의 끝은 언제나 공허하기에.


야드몬의 노예가 된 이솝은 결국 자유를 포기하게 됩니다. 포기하고 살게 되었죠. 야드몬이 자식을 보며 성공한 삶을 보낼 때, 그의 성공을 이끌어줬던 것은 이솝이었습니다. 증오해 마지않을 원수이자 집요한 지배자인 야드몬을 말이죠. 그러나 이솝인 결국 그의 눈 밖에 나게 되었고, 죽임 당하게 되었습니다. 단지 여기까지만 본다면 야드몬은 이솝이라는 인간의 인생과 정신 모두를 소유하고 지배하고자 했던 놈이었고, 실제로도 그러한 시도가 성공하기도 했죠.


...이솝이 만들었던 인연이 이솝을 구해주지 않았더라면 말입니다.



브리세우스


노예가 된 이솝에게 먼저 다가갔던 아이이자, 우정을 나누고, 동경을 주었던 캐릭터죠. 이솝을 동경하고 이솝에게 은혜를 갚고자 했던 아이였습니다. 결국 노예로 팔려나가게 됐지만, 이솝이 준 반지 덕분에 전사로 성장할 수 있게 되었죠. 그 덕에 당차고 강한 여성이 되어 돌아왔고요.


이솝의 인생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커다란 조각이 브리세우스 였나면, 브리세우스의 인생 대부분을 차지하는 조각은 이솝이었습니다. 그를 위해 성장했고 그를 위해 살고자 했기 때문이죠. 하지만 운명의 장난이란 이럴 때 쓰는 말입니다. 신병을 앓기 시작하면서 브리는 이솝과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죠. 어렸을 때의 그 감정은 점차 사랑이 되어 나타났는데, 이젠 더 이상 같이 있을 수도 없게 되고, 다시 노예가 됨을 아는 그녀에게 운명이란 신들의 짖꿎은, 잔인한 놀음판이었죠.


이솝 또한 자신이 완전한 자유를 가진 이가 아니었음을 알았기에 브리의 감정을 받아줄 수 없었던 거고요. 지재가 있으며 사기도 치고 다니던 녀석인데 설마 브리의 감정을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있겠습니까? 알았겠죠. 알았죠. 그러나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겁니다. 자신도 어떻게 될 것인지 어렴풋이 알았고 그 위험성 또한 알고 있었으니까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그 진부하고 진부한 만큼 애닳는 관계를 어떻게 견딜 수 있을는지..


결국 이솝은 자신을 버리며 브리를 무녀로 만듭니다. 그리고 그날 밤 잠에서 깨어난 브리는 깨어났냐는 이솝을 물음에 아니라고 대답하죠. 깨어나면 자신은 이제 무녀이고, 이솝과의 관계와, 이솝에 대한 감정을 버릴 수 밖에 없음을 알기 때문이죠. 그러니 깨어난 게 아닌 겁니다. 그러니 서로의 감정을 더 이상 감추지도, 숨기지도 않아도 되는 마지막 날인 것이고요.


그러나 밤이 지나고 아침이 오자, 새로운 관계로 정립됩니다. 브리는 이솝을 냉담하게 대하죠. 그 속은 썩어들어갔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이솝은 노예가 됩니다.


20년 동안 브리는 무녀로서 충실히 봉사해왔습니다. 좋은 대우를 받았고, 남들의 떠받듬을 받았죠. 그러나 사랑이라는 강렬한 감정은 그 시간 속에서 무뎌지지 않았고, 단지 감춰지기만 했습니다. 극의 마지막. 이솝이 십자가에 묶여 죽을 것을 알게 된 브리는 무녀로서의 자신을 버리게 됩니다. 주종관계는 끓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랑은 외압에 끊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죠. 아직 남아 있다면, 그것은 존재하는 겁니다.


브리는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여, 자신의 사랑에게, 자신의 인생을 차지했던 그에게 자신의 목숨을 바치기로 했습니다. 자신의 목숨을 희생해 자신의 사랑을 구하고자 한 것이죠.


결국 브리는 죽게 되었고, 이솝은 살아남습니다. 리케스의 몸으로요. 그리고 그 이후에나 복수는 끝마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복수란 그토록 어렵고, 이토록 허망한 것이죠. 이솝이 그리도 바래왔으나 실패하고, 포기한 시점에서나 성공하게 되었으며, 그 또한 자신의 손이 아니었고, 자신이 자신을 버림으로서 살렸던 여자가 죽어 잃고난 뒤에 모든 것이 끝나게 되었으니..



야드몬


야드몬은 아이소포스에서 가장 매력적이고 다채로운 인물입니다. 그의 태도가 크게 변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지만 심리적, 정신적 방황과 충동은 가장 완성도 있고 복잡한 캐릭터죠. 그는 헤파이스토폴리스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헤파이스토폴리스는 권력자이고, 지배자입니다. 왕이었죠. 권력을 얻기 위해선 자신의 아내라도 팔아넘길 수 있는 냉혈한 인물이었고, 자신의 자식을 사랑이나 애정의 대상이 아닌 지배와 통제, 소유의 대상이었습니다. 자신을 두려워 하라. 그게 자신의 아들에게 원했던 것입니다.


헤파이스토폴리스는 야심만만하고 패기 넘치는 인물이었지만 독하지 못했고, 잔혹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야드몬에게 살해당한 것이었죠.


야드몬은 엘리오스를 보고 사랑에 빠졌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라더니, 그말이 사실이었으며 그녀를 사랑하여 결혼하고자 했죠. 그러나 엘리는 자유를 원했습니다. 강제로 누군가의 여자가 되는 것이 아닌 자유롭게 자신이 남과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랬죠. 아마 이솝의 그 자유를 갈망하는 선청은 어머니에게 물려 받은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 그녀가 슬픔에 빠져 웃지 않으니, 야드몬은 그녀를 위해 뭐든 하겠다는 일념으로, 프론티스라는 광대를 소개해줍니다. 그리고 그의 광대짓에 엘리가 웃죠. 야드몬은 만족했습니다. 그녀가 웃었으니까요. 사랑하는 그녀가 웃었으니 말이죠. 하지만 사람의 감정은 통제하고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그녀는 땅딸보인 프론티스와 함께 도망을 가게 됩니다. 프론티스는 남들이 알아보지 못하게 얼굴을 황산으로 뭉갰지만, 그녀가 사랑한 그는 외모가 아닌 그의 지성과 내면을 사랑했었죠.


그렇게 사랑하는 여인을 잃게 된 야드몬은 자신의 사랑을 찾기 위해 추격자들을 보냅니다. 그 과정은 10년이나 이어졌죠. 10년 동안 한 여자를 찾고자 했던 겁니다. 순정이라면 순정이고, 징그러운 집착과 집요한 강박이기도 한 그의 정신을 옅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사고로 프론티스와 엘리가 모두 죽어버리고, 남은 것은 그들의 자식인 이솝 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이솝을 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사랑하는 여인과 증오하는 남자 사이에서 태어난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 아이를.. 그 복잡하고 끔찍스러운 감정을 어떻게 받아들여야만 했을까요?


결국 그는 꾀를 써 그를 자신의 노예로 삼습니다. 사랑하는 여인의 자식이자 증오하는 남자의 자식인 이솝을 어떻게 해야할지 몰랐기에, 어쩌면 가장 적절한 결정을 내렸던 거라고 봅니다. 사랑할 순 없으나 마냥 증오할 순 없는 그런 아이..


어느날, 야드몬의 아버지 헤파이스토폴리스가 돌아와 엘리를 찾기 위해 10년을 낭비한 야드몬을 꾸짖으며, 그렇게 낭비한 병력을 자신에게 원군으로 보내라고 합니다. 그러나 야드몬은 그 원병을 돌려 아버지를 공격하고 살해하죠. 야드몬은 자신이 아버지의 소유물이 아니라며 항변했습니다. 그의 삶에서 처음으로 있었던 반항이었죠. 어떻게 보면 이중적이기도 하죠. 하지만 그 답기도 합니다. 아버지에게 소유 당하고 통제 당했으나, 자신의 사랑과 원수의 자식인 이솝을 소유하고 통제하려는 면모.. 그만큼 복잡한 캐릭터죠.


이솝에겐 나름대로의 정의와 추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살해하려고 했을 때도, 훗날 배에 불이 타 죽을 수도 있었을 때도 이솝은 그를 죽이지 않았죠. 그가 추구하는 복수의 방식이 아니었기 때문이기도 했거든요. 처음 이솝이 그를 죽이려 할 수 있었을 때 야드몬과의 대화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너에게서는 네 어머니의 어떤 것도 볼 수 없구나. 내게서 내 아버지의 어떤 것도 볼 수 없듯이... 라고 말입니다.


이솝은 아버지의 외모를 더 닮았고, 야드몬은 아버지의 내면을 닮지 못했습니다. 이솝은 어머니의 내면을 닮았꼬, 야드몬은 아버지와 비슷하게 소유와 통제를 추구했지만, 그 방식이 전혀 달랐듯이요. 야드몬은 그의 아버지와는 다르게 독하고 집요했으며 집착적이고 강박적이었습니다. 수 십년 동안 한 여자만을 사랑하고, 그 자식을 통제하고 소유하고자 했으니. 왕이자 전사였던 아버지와는 다르게 뱀과 같은 정치인인 야드몬이었습니다.


어째서 야드몬은 이솝에게 그토록 집착했을까요? 분명 자신의 영원한 사랑이나 신전이었던 엘리의 자식이었기 때문일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코 죽이지 못하고 잡아 소유하고자 했던 거죠. 다신 도망가지 못하게 말입니다. 뒤틀리고 비뚤어진 겁니다. 아버지의 소유와 통제에 대한 트라우마 같은 거랄까요? 살면서 겪고 배워온 것이 그것이니 그 성향을 받은 것도 있으며, 강렬한 사랑의 감정이 수 십년 동안 그를 통제하고 있었던 것이죠.


이솝에게 채워진 노예와 복수라는 족쇄처럼 사랑과 소유라는 족쇄가 그를 감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솝 또한 브리와의 사랑이라는 감정과 인연에 의해 인생이 변하게 되었는 데, 야드몬 또한 그랬다니.. 자유란 무엇일까요? 사랑을 위해, 사랑에 의해 자신의 아버지에게 반항하고 살해한 그 또한 자유를 추구했을 것인데.


비록 이솝에게서 엘리의 무엇도 찾아볼 수는 없었지만 이솝의 내면은 엘리와 닮은 면이 있었죠. 아니면 단지 과거를 추억하고 회생하게 해줄 매개체로서 그가 필요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엘리의 자식이라는 사실 그 자체가 노예 이상이나 그 이하로 만들 수 없는 장치가 되었을 수도 있고요.


야드몬이라는 캐릭터를 피상적으로 바라복 되면 평면적인 변태적 집착과 소유욕을 지닌 남자라고 보일 수도 있지만, 실은 가장 복잡하고 입체적인 캐릭터이기도 합니다. 겉으로 드러나진 않고 내면이 글로 표현되는 것도 아니지만 그 내면은 복잡하고 혼란스럽기 때문입니다. 정치인답게 표정을 다스릴 줄 알고 태도를 갈무리할 줄 알기에 그것을 알기 어렵지만, 그에게 같은 목적을 위한 내면적 상태는 시점에 따라 지속해서 변해간다고 전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복잡한 것은 사실이고 그에 대한 수 많은 해석을 낳을 수도 있지요.


그렇기 때문에 가장 훌륭하고 완성도 있는 캐릭터를 야드몬으로 꼽는 것이고, 매력적인 캐릭터라고 단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캐릭터를 만들고 연출해낸 김양수, 도가도 콤비의 작가적 능력과 작품성은 그야말로 신화적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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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 포터 (Will Potter): 비폭력적 항거를 범죄화하는 충격적인 움직임

2002년 수사전문 기자이자 TED Fellow 인 윌 포터는 시카고드리뷴에 자신이 통상적으로 다루는 총격과 살인에 관련한 영역에서 벗어난 기사를 쓰기로 한다. 통물 실험에 반대하는 지역 운동에 도움을 주러갔다. "저는 그것이 뭔가 긍정적인 일을 하는 확실한 길일거라고 생각했습니다."라고 그는 말한다. 하지만 그는 체포되었고, 그로 인해 그는 평화적인 항의가 테러리즘으로 누명을 쓰는 세계로의 여정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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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엔 아주 고약한 인식이 많습니다. 그 중 하나는 시위나 집회 따위를 사회적 범죄 따위로 여기는 것이죠.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가 떨어지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오늘날에도 분명한 문제 중 하나이고 말입니다. 이는 시위나 집회가 어떠한 목적, 성격, 그리고 그 의미가 있는지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피해자가 억울함을 풀기 위해 시위, 집회를 할 때마다 그것에 빨갱이, 반국가, 반정부, 선동과 같은 단어를 써붙히며 악마화하고 범죄화하여 소위 나쁜 것으로 인식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고용주가 약속한 돈을 주지 않아서, 노동환경이 무자비할 정도로 가혹하기 때문에 등등.. 피해자가 정당한 이의를 제기하는데 그러기엔 상대하는 자의 힘이 너무 세고 이야기를 듣고자 하는 의지 또한 없으니 시위를 하고 집회를 하는 겁니다. 기업을 상대로, 정부를 상대로, 그리고 우리가 그러하고 있다는 것을 국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그런데 수십년전 우리나라는 그런 것을 허용하지 않았죠. 모든 시위와 집회, 데모는 모조리 나쁜 것이고, 국가와 정부에 반하는 것으로 나라를 북한에 들어 바치기 위한 것이라고, 빨갱이들이라고, 빨갱이에게 '선동'당했다고 '선동'했지요. 신문에서 뉴스에서 나라에서 시위니 뭐니 하는 것들은 죄다 나쁜 것이라 말하며 몽둥이 들고 후려치니 모르는 사람은 그냥 나쁜 것인갑따.. 하면서 그냥 그렇게 알게 되었죠.

문제는, 이게 아직도 통한다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비단 나이든 어르신이 아닌 10대 20대 젊은이도 주류 언론이 말하는 대로 그대로 이해하고 다른 이야기는 모조리 조작이고 왜곡이고 선동이라 여깁니다. 모든 시위는 나쁜 것이고 모든 집회도 나쁜 것이죠. 물론 '우덜'이 하는 시위와 집회는 좋은 겁니다. 일베의 광화문 폭식(풉)투쟁만 봐도 그렇지요.

사실, 시위나 집회 같은 것들은 사회에 순기능을 하는 활동입니다. 국가와 국민을 위한 것이고, 건전하고 올바른 사회를 이룩하기 위해서 더더욱 필요한 운동들이죠. 그에 대한 내용은 위쪽 링크의 글을 참고하길 바랍니다.


위 동영상의 윌 포터는 동물 실험에 반대하는 지역운동에 참가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뒤 FBI가 찾아왔고, 그렇게 테러리스트 딱지가 붙었지요.

그가 했던 시위는 비폭력적인 항거였습니다. 동물실험을 반대한다는 요지의 시위였어요. 당연히 폭동 또한 아니었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범죄화했습니다. 그에게 스파이 행위를 강요했고 테러리즘의 누명을 씌웠지요. 우리나라에선 너무나 흔하게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실제로 과거 운동권에서 그렇게 하라고 강요받거나 강요한 사례가 있고, 아예 공부는 잘하지만 운동권에서 멀었던 학생을 운동권에 집어넣고 조종하거나, 정보를 캐내려는 일도 많았죠. 그렇게 졸업하고 나면 그에 대한 보상으로 앞으로 사는게 좀 더 편해졌고요.

그리고 지금도 한국에서 일어나는 모든 시위와 집회를 범죄화하고 있습니다. 악마화하고 있죠. 세월호 사건에 대한 평화적인 집회도, 정부에 불만을 가지고 요구사항을 관철시키기 위해, 국민들에게 자신의 의지를 알리기 위한 광화문 시위를 범죄화하고 잘못된 것으로 만들려고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그러한 집회와 시위를 강제해산시키지요. 평화롭고 올바른 목적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것을 죄인 것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미신고집회 해산명령' 남발하는 경찰.. 대법 판결도 무시
http://media.daum.net/society/affair/newsview?newsid=20140904060109933


이는 시민들의 의지와 말할 권리를 억압하는 행위와 다를 바 없습니다. 그들이 하고자 하는 말을 끊고 입 닥치라고 해산시킨 꼴이니까요. 아래의 기사를 보시면, 광장은 시민의 것이라고 합니다. 광화문에서 집회를 하는 사람들은 시민이 아니던가요? 일본 우익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들은 '비국민'인겁니까?

말할 권리 막나 vs 광장은 시민의 것…與 광화문집회 금지 추진 논란
http://news.heraldcorp.com/view.php?ud=20140905000694&md=20140908083733_BK

시위와 집회는 명백히 보장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국가가 나서서 그것을 보장하고 있지 않죠. 오히려 억압하고, 잘못된 것으로 만들려고 하고 있습니다. 정부의 나팔수가 되어버린 주류언론은 그들의 권력과 돈에 굴복해 그들이 하고자 하는 말, 듣고자 하는 말만 하며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을 선동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옳은 것을 잘못된 것이라 알게 되고 그렇게 말하게 되죠. 이유는 모르지만, 시위와 집회는 나쁜 것이다. 이러이러한 이유로 시위와 집회는 나쁜 것이다. 라고 말입니다. 정말 나쁜 것일까요? 그럴리가 있나, 저 위의 링크를 보면 왜 그렇지 않은 것인지 알 수 있을 겁니다.


국가는 선박감시라는 의무를 소홀히 했고 그로 인해 기업은 선박을 개판으로 운영했습니다. 그리곤 수백명이 죽었죠. 그리고는 해경과 기업이 짜고 증거를 은닉, 훼손하려고 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순간에도 사람보다 돈을 먼저 걱정했고 그렇게 제대로된 대처조차 못해 죽었습니다. 이는 명백한 정부가 국민을 대하는 의무를 방기한 것이고 국민을 우롱한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더 당당하던가요? 정말 잘못한 이들은 어깨 당당히 펴고 고개 뻣뻣히 들고 있는데, 그들 때문에 자식이 죽고 친구가 죽은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떨궜습니다.

이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그 의견을 표현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면, 길가다 뺨 맞으면 자신이 잘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뺨 때린 놈은 당당히 어깨를 펴고 고개를 뻣뻣히 들어야죠. 잘했으니까. 맞은 놈은 잘못했고. 이유와 잘잘못 따위는 필요없고 맞은 놈이 맞았으니 잘못한 겁니다. 그러니 고개를 떨구겠죠.


정당히 말을 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해선 안 됩니다. 정당히 말을 할 권리가 보장되어있고, 이건 '너' 따위가 침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말을 했다면 그 책임을 제대로 져야 합니다. 애새끼마냥 회피하려들지 말고 말이지요. 시위와 집회는 정당하고 옳으며, 오히려 권장되어야 합니다. 말을 해도 안 들어쳐먹으니 시위와 집회를 하는 것인데, 이조차 막는다면 애초에 이야기를 들을 생각이 없으니 아주 이기적이고 독선적인 것이죠. 그리고 실제로도 그럽니다. 지금도 그러고 있고.


지금 이 나라와 이 사회는 명백히 잘못되었습니다. 그걸 말하는 게 잘못이라고 생각한다면, 자기 스스로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게 맞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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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흔히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물론 표현의 자유는 중요합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그 말을 함에 있어서 어떠한 내, 외부적인 압박 따위가 있어서는 안 되지요. 그렇게 검열이 되는 사회는 자유로운 사회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런 자유롭지 않은 사회는 소통이 되지 않고 서로간의 이해의 폭이 좁아지게 됩니다. 즉, 발전을 저해합니다.


그렇지만 표현의 '자유'와는 별개로 자신의 행위에 있어서 '책임'이라는 개념 또한 명백하게 존재합니다. 엄밀히 말해서, 자신이 무슨 말을 하든 그에 대한 타인의 평가와 비판은 자신이 온당히 받아야할 책임영역이라는 것이죠. 만약 이 책임이 증발해버린다면 무슨 말을 하든 아무 거리낌이 없어질 것이고, 그러한 절제할 수 있게 해주는 견제장치가 없어진다면 타인에 대한 모욕과 증오를 쏟아냄에도 아무런 상관이 없어집니다.



이것은 분명한 문제입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증오하고 차별할 권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은 증오받기 싫고 차별당하기 싫지만 다른 누군가는 증오하고 차별당하기 싫다? 그러한 증오와 차별에는 수직적 구조가 존재합니다. 즉, 강자와 약자가 존재하고 그 구조속에서 상호간의 증오와 차별은 서로 다른 무게감을 지닌다는 의미이죠.


그러한 차이에서 나오는, 혹은 그러한 차이 자체를 만들어내는 증오와 차별, 그리고 그것을 나타내는 모든 표현은, 잘못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자체를 막지는 안 되, 그에 대한 책임을 온전히 받게 해야지요. 분명히 표현의 자유는 보장되어있습니다. 누군가를 싫어한다고, 증오한다고, 차별하고 싶다고 말해도 됩니다. 사회적 통념에 어긋나는 표현을 써도 됩니다. 하지만 그 결과로서 돌아오는 자신에 대한 타인의 평가와 비판, 그리고 좀 무지할 수 있는 이들의 '증오'와 '차별'은 그 자신이 책임져야 합니다.



자유에는 필연적으로 책임이 따라갑니다. 책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유가 아닌 방종이고, 방종한 것은 옳지 못합니다. 타인의 자유와 권리를 억압하기 때문이죠.


누군가를 증오하고 차별하는 발언이 너무도 쉽게 오가는 사회는 책임소재를 제대로 따지지 않는 사회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방종한 사회지요. 책임이 사라졌으니까.



누군가를 비난하고, 차별하고, 조롱하고, 증오하면서 그에 대한 책임을 표현의 자유라고 할 수 없습니다. 자유에는 책임이 따라오기 때문이지요. 그들은 그들의 자유를 영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하지요. 그러게 책임을 지지 않는 자들이 이 사회를 차지하게 된다면, 그 사회는 발전할 수 없습니다. 더 이상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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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재밌는게, 행동은 같은데 대상이 다르면 다른 평가를 받는다는 거지요.


똑같이 폭력이지만 좌파에 대한 폭력은 옹호받고, 우파에 대한 폭력은 자유에 대한 테러라고 하는 것처럼.(혹은 그 반대.)



기본이 되는 태도가 있습니다. 인체에 비유하자면 그러한 태도는 '뼈대'가 됩니다. 척추와 같은. 그리고 그 태도를 감싸는 단어들과 행동들, 즉 우리가 보는 형태는 '근육'과 '살'에 비유할 수 있겠군요. 우리가 무언가를 비판하거나 할 때 중요한건 형태가 아닙니다. 바로 뼈대이지요.


일베충이 하는 행태를 똑같이 일베충에게 한다고 해서, 자신이 일베충보다 나은 사람이 되는게 아닙니다. 동급이 되는거지요, 아니, 똑같은 짓을 하면서 그 원류에 대해 공격하니 더 질이 낮다고 할 수 있겠네요. 대상이 일베충이라는 이유로, 똑같은 행동을 했는데 쟤네들은 당해도 싸다. 하는건 논리적인 행동이 아닙니다.


행동이 같으면, 대상이 어찌됐든 똑같은거에요. 그렇기 때문에 뼈대가 되는 태도는 어떤 경우에도, 어떤 대상에게도(심지어 자신에게도) 적용했을 때 다른 말이 튀어나와선 안 되는 겁니다. 그렇지 못하면 "내가 하면 로맨스, 니가 하면 불륜"이 되는 거지요..


일베이나, 우익을 비판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간혹 분노 따위에 휩싸여 일베충과 똑같은 형태의 공격을 하는 경우가 간혹 있습니다. 개중에는 일베충을 아예 인간으로 보지 않고 글자 그대로의 벌레로, 다 죽여야 한다 같은 과격한 언사를 남발하는 경우도 찾아볼 수 있죠. 하지만 그러한 형태의 공격은 자충수를 두는 꼴이고, 일베충의 좌파, 전라도인에 대한 언사 및 행동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 마당에 누가 누굴 비판하고자 하는가. 라는 비판이 온다면, 할 말이 없겠죠. 나는 되고 쟤는 안 된다? 그런 이중잣대가 어딨습니까. 색깔만 다른 일베충이죠. 중요한 건 형태가 아니라 뼈대, 기본이 되는 태도에 있습니다. 그게 다르지 않다면 또 다른 일베충의 모습에 불과합니다. 극과 극은 통한다고 하죠? 대부분의 극단주의자들은 그 행동에 비슷함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모든 극단주의는 비슷한, 혹은 같은 '뼈대'를 공유하니까요. 그렇기에 절대 상종하지 않을 것 같은 그들이 어느샌가 전향한 모습을 볼 수 있을 겁니다.


그 이유는 형태만 다르고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태도가 똑같기 때문입니다.


무언가를 비판하고자 한다면 자신에게도 적용할 수 있는 원칙에 따라 비판을 해야지, 똑같은 짓을 하면서 다른 평가를 듣고자 한다면 그게 미개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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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06.21 02:50 address edit/delete reply

    비밀댓글입니다

    • Favicon of https://konn.tistory.com BlogIcon Konn 2014.06.21 15:24 신고 address edit/delete

      저도 한 때 세상의 모든 문제는 대화를 통해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지요. 하지만 그조차도 이상론에 불과하더군요.. 진짜로 말이 안 통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겁니다. 사상이나 이념의 차이가 극단으로 치닫은 사람들은 뭔가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지 않은거 같습니다.. 결국 제 생각을 수정하고, 모든 문제를 대화로 해결할 수는 없다는 식의 결론만 나왔죠.

      토론이라는게 원래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이 증명되면 자신의 생각을 바꾸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인데, 실상 조금만 과열되거나, 자기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억지주장, 정신승리를 일삼지요. 아, 저도 엔하위키 자주 사용합니다 ㅎ


      사실 한국처럼 토론환경이 잘 조성되지 못한 곳에선 토론이나 논쟁 따위가 제기능을 발휘하기가 어렵죠. 뭐, 다른 나라라고 뭐가 다르겠냐만은, 결국 사람이라는게 자기 생각, 주관이 맞다고 생각하고 그에 반대되는 생각에 대해서는 쉽게 용인하려 들지 않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그런 의견대립이 발생할 경우 좋지 않은 결과를 보기도 하지요.. 그래서 대부분 서로 좋게 좋게 넘어가는게 일반적이기도 하고요.

      애초에 토론과 논쟁을 목적으로 하거나, 그런 환경이 잘 조성되어있거나, 자연스럽게 그런 상황이 되어 서로 적절한 의견나눔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일상에서 그러한 토론 따위를 하는 것이 좋다고 보기엔 좀 어려울 수도 있지 않을까 저도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들도 일상에서 비슷한 상황이 발생하자 결국 마음만 상하고 토론, 논쟁의 환경이 잘 조성되어있고 겪을 만큼 겪은 사람들도 왠만하면 좋게좋게 넘어가라고 조언할 정도이니..

      사실 그렇기 때문에 토론이나 논쟁과 같은 의견대립, 논리의 싸움은 현실에서보다 인터넷에서, 그리고 모르는 사람과 하는 것이 더 좋고, 실제로 이런 조건에서 더 많이 발생하죠.

  2. 2014.06.21 20:09 address edit/delete reply

    비밀댓글입니다





기본적으로 문화는 사회의 경직성에 영향을 많이 받는지라, 자유로운 사회일 수록 문화도 발달하기 쉽죠.


예컨데 미국의 개방적인 문화와 이슬람교가 강력한 힘을 가진 중동지방을 비교해보면 많은 부분, 특히 여성 및 성적인 부분에서 굉장한 차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도 이와 마찬가지인데, 예전에 비해 크게 달라진거 없는 검열 기관들은 아직도 구시대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사회문화를 검열하고 있습니다.


특히 음악과 관련된 부분이 유명한데, 사회비판 곡은 여전히 검열대상으로 공중파는 물론 방송에서 볼 일이 없죠. 만화같은 경우 경무대 똥통사건, 정병섭군 자살사건같은 정치, 사회적인 이슈가 될만한 사건을 겪으며 검열이되었죠. 물론 그러한 정치적인 이유가 아니었어도 검열을 하며 문화를 억압했겠죠.


이런 것이 국가, 국가기관에 의해 경직성이 유지되는 부분이라면 반대로 국민들에 의해 경직성이 유지되는 분야가 있는데 만화, 게임, 애니메이션 분야가 있으며, 이러한 것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은 '공부는 안하고 만화만 보고 있다, 게임만 하고 있다'가 대표하는 학생들의 유희거리가 아닌 공부를 방해하는 해로운 것 취급이죠. 물론 학생들만의 전유물은 아니지만 학생에게 들이대는 잣대가 유독 불합리할 뿐입니다.


산업과 관련을 때고 이야기해보자면 존대말이 있을 수 있겠죠. 옛말에 '5살까진 친구'라는 말이 존재하듯이 절친의 상징 오성과 한음도 나이 차이는 5살이었고, 20세기 초 즈음엔 부자간의 나이차이가 20살 미만이라면 아예 아버지의 친구가 아들의 친구인 경우도 있었는데 반해 일제시대를 겪으며 나이 한살만 차이나도 매우 깍듯이 대해야하는 분위기는 기실 유교라기 보단 일본의 군국주의(나이=계급..)의 영향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사회의 경직적인 분위기는 대체로 권위에 의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은데, 그러한 것이 어떠한 전통이든, 잘못된 악습이든 현대의 자유국가로서의 기틀에 방해물이 되는 것은 분명하다 봅니다.


사회가 진정 자유롭기 위해선 이러한 것들에 대해 논하여 어디까지가 옳은 것이고 어디까지가 옳지 않은가, 혹은 적절하지 않은가를 정하고 그것을 현실 사회에 적용시켜 새로운 분위기를 형성시켜야하지 않나 싶습니다. 


어떻게 라고 묻는다면, 글쎄요?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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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happytheo.tistory.com BlogIcon 최테오 2013.07.19 22:27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물론 백퍼센트 확실한 답은 없을 거라고 감주되네요. 그러나 개개인의 잣대들을 하나로 뭉치기에는 또 다른 '경직'이 요구되지 않을까요.
    어떠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여기서는 자유로운 국가)서는 같은 뜻과 같은 마음으로 뭉쳐야 가능 할 것 같은데요, 다만 그것이 지금까지 종교라는, 정치라는 것들로 수단삼아 이루어왔다는 것은 누구나 알거라고 믿습니다.
    이제 SNS의 보편화 및 대중화로 인해 군중심리의 '경직'성이 극도를 치닫고 있는 가운데, 진정한 자유를 위해 과연 누가 관심이나 있나가 첫번째 답을위한 방향제시라고 사려됩니다.

    • Favicon of https://konn.tistory.com BlogIcon Konn 2013.07.20 23:23 신고 address edit/delete

      자유의 필요성을 사회 구성원 다수가 알아차리는 그날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정말로, 누가 진정한 자유에 대해 관심이 있을지는 모르겠군요.. 지금같은 상황에서 말로는 자유, 자유 외치지만, 실상 아직도 여러 부분에서 진정한 자유의 맹점은 존재하니까요.

      선진국의 진정한 자유와 정의로운 국가다운 권리와 의무의 충실한 이행을 덜 겪었고, 그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 나라이기 때문에 이 자유라는 것에 대해 큰 자각이 없는 걸지도 모르겠죠. 달리 말하자면 그만큼 우리나라가 구시대적인 경직과 억압에 많이 익숙해져 있다는 것이겠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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