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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며,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 - E.Kant
by Ko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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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자'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22.11.19
    약자에 대한 멸시와 힘의 논리.
  2. 2019.03.09
    여성은 약자? 약자의 폭력성.
  3. 2016.12.03
    극우보수의 사상적 근간. 마초 오르가즘.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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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의 극단주의 사상은 몇가지 공통적인 요소를 보입니다.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본 글의 주제인 약자에 대한 멸시가 그러합니다.

 

파시즘을 비롯하여 강자는 약자에 대한 절대적 권리를 지니고 힘은 그 자체로 도덕적인 법칙으로 받아들이고 행동하죠. 옳고 그름의 기준은 힘의 강약, 승리와 패배로 구분되며 승자는 절대적 무오성을 지닙니다. 제왕은 무치하고 군주의 잘못은 기군을 망상한 간신의 탓이 됩니다.

 

정치에 있어서 더 극단주의적인 집단을 찾기 위해선 간단한 몇가지 징후를 파악하면 됩니다. 제가 제안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누가 더 무책임하냐에 대한 것입니다. 극단주의 집단은 무오하고 도덕적으로 우월하기 때문에 잘못하지 않으며,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기에 남탓으로 책임을 돌립니다.

 

책임자에 속하는 권력, 권한을 지닌 더 높은 사람은 그에 대한 책임을 아래로 전가하고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으려 합니다. 도리어 책임을 묻는 입장이 되길 원하죠.

 

 

힘에 대한 숭배와 약자에 대한 멸시는 같은 것이 아니지만, 서로 섞이기 쉬운 조합입니다. 파시스트, 나치, 극우주의자, 종교적 광신도 등 극단주의자들이 힘을 숭배하는 이유는 힘이 가져다주는 다양한 이익 때문이고, 약자를 멸시하는 이유는 그 과정이 도덕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더 많은 힘을 가져서 더 많은 이익을 추구하기 마련이고, 그 힘은 책임에 대한 회피 역시 가능하게 해줍니다.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마땅히 더 큰 책임을 져야하지만, 이들의 정신이 말하는 원리는 그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해 그 자리까지 올라가 그만한 힘을 가지는 것이거든요.

 

범죄를 저질러도 이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그 책임을 벗고 타인에게 씌웁니다. 언론플레이를 통해 자신의 잘못을 정적에게 엮어서 뒤집어 씌우고, 검찰과 경찰을 비롯한 법집행기관을 통해 조사를 불충분하게 하거나 기소를 이상하게 하거나 근거를 적절치 않게 수집하여 제출하기도 하고, 유리한 판단을 내려줄 판사를 배정받게끔 하는 방식도 있고 그러한 판사를 사전에 기름칠을 하는 방식도 있습니다.

 

혹은 자기 부하 직원이나 하위 기관에 책임을 전가시키고 그 책임추궁을 본인이 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거래 하는 방법도 있죠. 조폭들이 네가 대신 빵에 들어가주면 나중에 잘 챙겨준다, 얼마 주겠다는 식으로. 다양한 방식으로 책임은 아랫사람에게 전가되고 권력자, 기득권은 결과적으로 무오하게 되죠. 법적으로 그러한 판정을 받지만, 도덕과 윤리의 기준을 법에 맞추는 인식을 보편화 시킬 수록 법적으로 무오하게 판정받기만 하면 도덕적으로도 무오하게 됩니다.

 

 

그런 이들이 약자를 멸시하는 이유가 바로 그 부분에 있죠. 내가 저지르는 잘못을 아랫사람, 약자들이 지게 되기에 잘못한 쪽은 약자가 되는 겁니다. 사건사고의 책임을 일선의 말단과 그들을 직접 지휘하는 이들에게 전가하면 죄를 지은 사람은 말단, 기껏해야 중간관리자급에서 꼬리가 잘려지는 거고 이들이 잘못한 게 되기 때문에 나쁜 건 그들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 무오한 권력자와 부덕한 아랫사람으로 구분되는 것이며, 그 구분은 철저하게 힘으로 이루어집니다. 내 잘못을 네가 책임지게 되었으니 나쁜 건 너라는 거고, 그런 처분을 위해서 권력은 누구보다 영악하고 유능하게 움직입니다. 그들이 정말 유능하고 뛰어났으면 그런 사건사고, 범죄가 발생하지도 않았겠지만, 애초에 그들은 그 권력과 힘을 남용하여 법과 제도를 어겨서라도 이익을 취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 결과 자신에게 책임을 묻게 되는 상황이 오더라도 그 권력과 힘을 통해 약자들에게 전가하기 위해서 힘을 추구한 것이죠. 앞서 말했듯, 그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해 그 높은 자리까지 올라온 것이기에.

 

 

당연히 피해를 보는 약자들, 그리고 그들과 같은 편에 선 자들은 불만을 가질 겁니다. 자기가 잘못해놓고 왜 남에게 책임을 전가시키고 남탓하냐고, 무책임하다고.

 

그러면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게 불만이면 힘을 기르라고. 억울하면 성공하라고. 성공해서 바꾸라고.

 

하지만 애초에 그들이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그 자체로 약자에게 책임을 전가하기 위해서입니다. 너희가 약했기 때문에 날 징치할 수 없고 내게 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말하는 거고요. 옳고 그름, 도덕과 부덕, 윤리와 비윤리가 아니라 힘의 유무에 따라 정의는 구분되는 거고, 아무리 떠들어봐야 이미 성공하고 힘을 가진 자신이 옳다는 겁니다.

 

그러니 약자들이 떠드는 건 그저 소음공해에 불과하고, 힘도 없고 불만만 많고 시끄럽고 귀찮은 개돼지들이 되는데, 그래야만 잘못한 게 내가 아니라 그들이 되며, 그들이 자신의 양심과 도덕성을 공격할수록 그에 대한 반동으로 그들을 더 천하고 질 떨어지는 집단으로 설정해야만 자신의 더러운 행위들이 정당화됩니다.

 

이러한 정신적 기제가 그들이 대중, 서민을 저열한 것으로 바라보고 자신들을 그들에 비해 우월하다 여기게 만드는 것이며 과정이 부정하기 때문에 자신들이 얻어낸 결과의 정당성이 떨어진다면 그 과정을 정당한 것으로 바꿔야하기 때문에 도덕, 윤리나 법적 정의가 아닌 힘의 강약과 유무를 기준으로 삼는 것입니다.

 

 

전에 이야기했듯, 그러한 정신을 공유하는 이들이 현 사회의 기득권, 권력자, 지도층 다수일 경우 그 사회의 지배적 사상을 그들의 것이 됩니다. 그들처럼 되기 위해선 그들이 해왔던 방식을 답습하는 것이 올바르고 정석적인 성공의 공식일 것이며, 그들 집단의 일원이 되기 위해서 역시 그들의 사상을 공유해야하기 때문인데다, 자신이 그들처럼 될 수 없더라도 그러한 성공을 자신의 현실과 무관하게 추구하는 이들이기만 해도 그들의 지배적 사상을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이죠.

 

그러한 사상을 받아들인 이들은 그 지배적 사상 내지는 그 사상대로 행동하여 성공한 기득권, 엘리트들이 사라지거나 패배하지 않는 한 더 늘어날 수밖에 없기에 부정한 방식으로 성공하고, 힘의 원리에 따르는 극단주의자들이 성공하며 더 많은 자원을 차지하는 사회일수록, 도덕과 윤리는 계속해서 도전받고 그 영향력은 축소될 수밖에 없습니다.

 

도덕과 윤리는 성공과 힘에 비해 중요하지 않는 것이 될 것이고 때때로 경쟁을 위한 도구로서 활용될 뿐입니다. 저자가 더 나쁘기에 덜 나쁜 내가 한정된 자원을 차지해야 한다는 식으로. 그런 방식이 관성을 얻어 정의의 기준을 뒤바꾸게 될 것이고 이는 우리가 말하는 비상식의 상식화라는 말로 표현됩니다.

 

 

어째서 상대적으로 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이들이 패배하며, 그들의 영향력과 세력이 그렇지 않은 이들보다 약하고, 시민들은 왜 더 부덕하고 비윤리적인 이들을 지지하느냐의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자신이 약자인지 아닌지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힘은 상대적이고, 서민이나 저소득층 같은 약자조차 자신보다 더 약한 이들을 멸시하며 부정한 방식을 정당화하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 방식으로 크고 작은 이득을 취하길 바라고, 그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길 바랄 뿐이죠.

 

그러나 약할 수록, 아주 작은 죄조차 그들보다 더 약한 이들에게 전가할 힘이 없어서 결과적으로 더 높은 범죄율에 일조하고 더 삭막하고 각박한 사회를 만드는 일원이 되며 당한 사람은 그 방식을 답습하여 다른 사람에게 똑같이 할 기회를 추구하게 됩니다.

 

경제적으로나 사회지위적으로나 평범한 사람들조차 그러한 지배적 원리가 지배하는 사회속에서 도덕적 선택보다 비도덕적이더라도 자신에게 더 많은 이익을 가져다줄 선택을 기꺼이 할 것이고, 그걸 위해 타인이 피해를 보거나 고통을 받더라도 양심의 작동이라는 정신적 불쾌함과 도덕적 비난이라는 외부적 공격을 방어하고 정당화할 힘의 논리로 그것을 무시할 것입니다. 그걸 위해 흔하고 전통적인 다양한 변명들이 나올 것이고요. 너희라고 안 그랬겠어? 어쨌든 이익 봤으면 그만. 너희라고 얼마나 깨끗하다고 등등..

 

 

그러한 힘의 논리에 따라 약자는 부당한 권력의 횡포에 대한 공감의 대상이나 보호와 연대의 파트너가 되는 게 아니라 멸시의 대상이 되며 약자의 범위는 시간에 따라, 양극화의 원리에 따라 더 늘어날 것입니다. 자신이 약자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서민들조차 어느새 부동산, 주식, 직장에서 다양한 피해를 받게 될 것이고, 그럴 때마다 돈이 더 많든가, 인맥이 더 많든가, 머리가 더 좋고 실력이 더 뛰어났거나, 더 많이 공부해서 더 좋은 대학 나와 더 좋은 직장 구했으면 될 거 아니냐는 조롱과 비난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사회적 보호망와 시민들의 연대엔 구멍이 뚫리고 끝끝내 제역할을 하지 못하게 될 것이고요. 누칼협의 정신은 피해자와 약자가 더 나은 대우와 마땅한 권리를 추구하는 것을 방해하고 약자이기 때문에 어떤 피해를 받았든 고분고분 받아 들이라는 조롱입니다. 누칼협엔 진보가 없고 정체한다면 다행일 뿐인 후퇴 뿐인 정신이죠.

 

누칼협이 정당하기 위해선 불법을 저지르거나 비도덕적이고 비윤리적인 행위를 저지른 이들이 그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되었을 때 그들이 억울하다는 말에 해줘야할 말입니다. 누가 칼들고 협박해서 네가 범죄 저지른 거냐고. 하지만 그들에게 정의의 기준은 힘의 논리이기 때문에, 누칼협을 사용하는 이들은 그 대상을 피해자와 약자에게 씁니다. 네들이 힘이 없어서 그런 거니까 고분고분하게 받아들이라고.

 

 

이는 사회현상에도 적용되고 국제논리에도, 역사적 판단에도 같은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전라도가 멸시 받는 이유는 전라도에 힘이 없기 때문이고, 그들에게 가해했던 이들이 사회의 질서를 만드는 극우보수 기득권 내지는 그러한 기득권을 창출하는(=기득권이 제시하는 질서에 순응하는) 정신을 공유하는 이들이기 때문이며, 한일 관계의 역사적 관계에 대해 가해자 일본이 아니라 피해자인 한국에게 책임을 요구하는 것 역시 한국이 약하고 약해야하는 약자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일본이 제국주의 침략이라는 비도덕적인 행위를 했기에 나쁜 게 아니라 조선이 약했기 때문에 정복당한 것이니 조선의 잘못이고, 조선이 강했다면 일어나지 않을 일이기에 조선/한국의 책임이라는 겁니다. 아직도 일본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고 그들을 비판해선 안 되는 이유 또한 한국이 일본보다 약하기 때문이고, 감히 약자에 대한 절대적 영향력과 도덕적 무오의 권위를 지닌 강대국 일본에 대해 감히 비판하고 공격하는 이들 때문에 일본이 한국에 보복을 하면 버틸 수 없다고 믿습니다.

 

그들의 정신은 일본의 정신과 유사하고 그러한 원리를 공유하기 때문에 한국보다 일본에 이입하고, 한국의 이권보다 일본의 이권에 부역하며, 강대국의 부당한 요구와 강압에 저항조차 제대로 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콧방귀에 한국 같은 약소국은 버틸 수 없을 것이라는 비현실적인 믿음이자 힘의 논리가 작동하는 그들의 세계관 내에선 너무나도 합리적이며 당연한 공식이기 때문에요.

 

그래서 그들의 외교는 강대국엔 감히 반항도, 주권을 지킬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이고, 약소국에 대해선 강짜와 무례를 저질러도 책임을 지려 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신경쓰는 것은 무지몽매한 국민 대중이라는 이름의 개돼지들이 사리분별하지 못하고 올바른 판단을 내린 엘리트 기득권인 자신들에게 표를 주지 않고, 그 표를 받아 권력을 얻은 이들과의 관계로 얻어지는 이익구조를 복잡하고 귀찮게 만드는 게 싫기에 최소한의 눈치를 보는 것 뿐입니다.

 

그들의 비정상적이고 한심하기 짝이 없는 국내정치와 외교의 작동원리가 바로 여기에 있는 셈이죠. 힘의 논리, 힘에 대한 숭배와 약자에 대한 멸시에서.

 

이익을 얻는 결과를 위한 과정이 부당하다면 언제든 잃을 수 있기에 그 과정을 정당하게 만들어야 하니 규칙과 도덕, 윤리보다 힘 그 자체로 정당화를 시도하는 것이고, 이 사회에서 그 시도는 매우 성공적이었습니다. 힘이 있다면 책임지지 않고,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정과 부당함 역시 힘으로 무마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방식으로 힘과 권력을 얻은 이들이 기득권이라는 이름으로 사회지도층이 되었고, 그들을 성공하게 만들어준 사상은 이 사회의 지배적 사상이 되어 그들처럼 되고 싶은 이들, 그들에게 이입하는 이들에게 이식되어 이 사회에서 상식과 정의의 기준을 바꾸고 있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데엔 이제 얼마 남지 않았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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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라트 로렌츠의 실험으로 잘 알려진 우리 속 두 비둘기의 사례는 흔히 복종의 자세를 취하면 공격을 멈추는 본능적 장치가 있는 늑대와 이미 패배한 한 쪽을 죽을 때까지 공격하는 비둘기의 대비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여러 사색으로 이끌기도 하죠. 약자인 비둘기의 잔혹한 폭력성이라든가.. 


물론 이는 비둘기와 늑대의 생태와 집단생활에 따른 본능의 차이를 염두해둬야 합니다. 가령 비둘기는 원래 싸움에서 지면 도망가야 하지만 가둬뒀기 때문에 두 비둘기의 생활권에서 쫓아내기 위해선 어느 한 쪽이 죽어야만 끝날 싸움이 된 것이죠. 원래라면 걍 싸움에서 지면 도망갔어야 했다는 겁니다.



로렌츠의 실험, 관찰과는 궤가 다르지만, 실제로 약자의 폭력성이 더 잔혹한 경우는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컨데 저소득층, 막노동꾼이 자신보다 더 약자에 있는 이들(알바생, 공무원 등)에게 갑질을 하는 경우가 있죠. 실제 소득수준이 다른 지역에서 모두 알바 생활을 해본 이의 말에 따르면 더 잘사는 쪽이 더 유하고 예의있게 대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곳간에서 인심난다는 말도 있죠. 가진 자는 여유가 있기 때문에 약간의 손해나 피해에 더 관대할 수 있고, 마찬가지로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관대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없는 자는 항상 부족하고 없기 때문에 열등감과 낮은 자존감을 가지고 있고, 그만큼 조그마한 손해에도 날카롭게 반응할 수 있죠.



페미를 위시한 여성계는 스스로를 약자라고 낙인찍습니다. 하지만 어떨 때는 반대로 Girls can do anything, Girls do not need a prince라며 스스로의 자존감을 높히는 표현을 쓰며 약자가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하죠. 공통점은 자존감이 낮다는 점입니다. 후자는 단지 여성 특유의 허세, 강한 척, 의연한 척을 하며 자기 자신에게 도취되는 감정과잉에 빠져 있다는 거죠. 


사실 여성은 약자라는 말은 어떻게 보면 맞지만, 페미 진영에서 말하는 약자라는 말은 정치적인 목적을 가진 캐치프라이즈 따위에 더 가까울 겁니다. 사실, 여성은 여성이라는 것을 무기로 사용하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죠. 아니, 그 이상입니다. 여성은 자기가 여자라는 점을 어필하며 그걸 써먹지 못하는 경우도 많을 정도죠.


유리천장이 있으면 유리바닥도 있다고 하는데, 여성들은 여자라는 성별을 유리바닥으로 써먹습니다. 여자이기 때문에 받는 특혜와 유리한 진형을 결코 포기하지 않고, 동시에 인정하려고도 하지 않죠. 그저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그것을 공격하면 되려 찌질하다거나, 비논리적인 것을 가져와서 공격을 시도하죠.



여성이 약자일 때는 분명히 있고, 사회구조와 직업선택, 연봉에 있어서 불리한 점이 있는 건 사실입니다. 실제 통계로 증명된 사실이고요. [각주:1][각주:2]


하지만 반대로 여성이 갑의 위치에 있을 때 더 노골적이고 뻔뻔한 갑질과 폭력을 행사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버지뻘' 원사에 반말하고 40세 중사 정강이 발로 차며 폭행한 20대 여군 대위

https://www.insight.co.kr/news/210538

'인벤’, 청와대 국민청원에 등장... “여성 CEO, 남성 직원들 술자리 데려가 사욕 채운다”

http://www.sporbiz.co.kr/news/articleView.html?idxno=240817
조현아 남편의 이혼 청구 사유는... "아내의 폭행·폭언 때문"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2/15/2019021502358.html
갑질, 어디까지 해봤니? 조현민 엄마 이명희의 ‘몰상식 DNA’
http://www.hani.co.kr/arti/economy/economy_general/841687.html


위와 같은 사례는 단지 일부일 뿐이고,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알려진 사례일 뿐이지, 더 작고 흔해 빠진 권력형 공격은 일반적인 일상생활에서의 인간관계나, 특히 연애 관계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물론 모든 여성들이 다 그런 것도 아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적지 않죠.


하지만 기본적으로 한국 여성은 섹스를 여성인 자신이 남성에게 베풀 수 있는 최고의 은혜라고 생각하고 시혜를 퍼주는 거라고 인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섹스 권력이죠. '내가 안 주면 니가 뭘 어쩔 수 있는데? 그러니 니가 나한테 굽실거려야지. 내가 갑이니까.'



폭력을 가져본 적이 없는 이가 그 폭력에 더 쉽게 취할 수 있고, 돈이 없었던 이가 그 돈에 더 쉽게 취할 수 있으며, 권력을 가져본 적이 없는 이가 그 권력에 더 취할 수 있듯이, 여성 또한 마찬가집니다. 약자이기 때문에 강자의 위치에 쉽게 취하는 거죠. 아니, 어쩌면 스스로를 약자라 낙인 찍고 스스로를 약자라 믿기 떄문에 권력과 힘을 가질 때 더더욱 잔혹하고 노골적이며 뻔뻔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여성은 약자다? 원할 때, 약자인 것이 갑질(을질?)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을 때 약자인 겁니다. 선택적 약자이고, 자기가 더 유리할 수 있을 땐 언제든 폭군적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이들입니다. 모든 여성이 그렇다는 건 아니고, 그런 여자들이 있다는 겁니다. 특히 자기가 페미를 한다는 이들은 백이면 백 그렇죠. 


왜냐하면 그들이 하는 활동은 100% 여성 스스로를 위한 게 아니라, 자신들의 권력과 쾌감을 위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싸울 대상과 전장 또한 자기들이 유리한 쪽으로만 취사선택하죠. 만만한 쪽만 건드리고, 공격하며, 불리하거나 건들기 무서우면 결코 건드리지도 않습니다. 같은 여성 피해자라도 건드리기 껄끄러운 상대가 저지른 일에는 아무런 반응도 없고, 만만하고 약해보이고 그 대가가 돌아올 거 같지도 않은 이들에 의한 문제에는 미친 개새끼마냥 덤벼들고 물어뜯죠.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말하는 여성은 약자다. 라는 말이 정치적 캐치프라이즈일 뿐이지, 실제 사회적 현실을 반영하는 통찰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저 있는 사실을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왜곡시키고 날조하면서 만들어낸 허상을 가지고 현실인 척 내뱉는 거죠. 그런 이유로 이들의 활동은 또한 여성의 인권과 사회정의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전략 자체가 틀렸고요. 적을 마구 만들었으니 그에 대한 반대급부가 오는 건 당연합니다. 그런 그들이 여성인권에 힘을 써줄까요? 적어도 그들이 원하는 방향은 아닐 겁니다.



여성은 약자가 아닙니다. 어떨 때는 약자일 때도 있죠. 하지만 반대로 남성 또한 마찬가집니다. 남성은 약자가 아니지만, 어떨 때는 약자일 때도 있죠. 그리고 솔직히, 보편적으로 남자가 더 약자인 경우가 많습니다. 여성이기 때문에 강요되는 무언가야 있겠지만, 단지 남자라는 이유로 앞서서 죽어야할 때가 강요되는 경우, 여성은 공감하기 어려울테죠. 그렇기 때문에 군대와 군인, 병역에 대해 공감하지 못하고 무시하는 거고요.

  1. https://sovidence.tistory.com/1000 [본문으로]
  2.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440352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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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28 - [취미/이야기] - 브렉시트, 멍청이들과 노친네들의 마초적 자살쇼.

2016/11/15 - [취미/이야기] - 트럼프 당선과 대중정치의 함정.

2016/07/30 - [취미/이야기] - 대중선동의 기본. 분열.



새누리당, 황금새벽당, 공화당 등의 극우, 보수적 성향을 띄는 정당의 경우, 그들을 지지하는 계층은 아이러니하게도 대부분 저소득층에 가깝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챙겨주지 않고, 오히려 거국적으로 자신들의 이익을 줄어들고 사회적 입지가 줄어들 것임에도 그들을 지지하고 표를 던져주는 경우가 많은데, 이를 정치학에서는 계급배반 현상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종류의 계급배반 현상을 설명하는 많은 근거와 주장들이 있습니다. 많은 노동에 따른 인지적 한계, 낮은 교육수준, 지역적 정치기류, 종사하는 산업에 따른 입장 등등..


모두 틀린 설명이 아니라고 봅니다. 그것들은 일정 정도 사실을 설명하고 있으며, 그 정도는 경우에 따라 영향성을 달리할 뿐이죠. 하지면 지금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그런 요소들과는 다른 데, 그들의 정치사회적 입장과 한계라기 보단 정신적 가치관에 대한 설명이 좀 더 올바르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먼저, 새누리당과 같은 종류의 극우보수 세력을 지지하는 자들은 크게 두가지 기저를 바탕으로 합니다.


하나는 약자와 비주류, 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경멸이고, 다른 하나는 강자, 힘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과 환상이죠.



1.약자, 비주류, 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경멸.


기실 따져보다면 저소득층은 자신들부터가 약자임에도 불구하고, 자기혐오적 성향이 강합니다. 이는 흔히 갑질이라는 형태로 분석될 수 있는데, 갑질은 졸부 따위에게서나 찾아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저소득층의 사회적 약자들에게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중산층이 사는 곳보다 저소득층이 사는 곳에서 알바나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직원들에게 갑질하는 경향성이 큽니다. 이는 아래의 글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요약하자면, 자신이 겪은 만큼 타인을 대한다는 겁니다. 자신이 위계적 폭력과 억압을 경험한 사람은 자신이 상위에 위치한 관계일 때 어렵지 않게 하위에 위치한 이에게 마찬가지의 위계적 폭력과 억압을 가하기 쉬워지죠. 


2014/08/30 - [취미/이야기] -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배경.


이런 현상에 따라, 그들은 힘에 대해 갈망하게 되고, 강자와 주류에 대해 동경하고 선망합니다. 비록 그들은 거의 결코 그렇게 될 수 없지만 말이죠. 그런 정신적 작용은 정치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약자와 비주류에 대한 혐오와 경멸로 이어집니다. 타인의 비루함과 비참함은 쉽게 인정하고 흉보기 쉽지만 자신의 비루함과 비참함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죠. 그렇기 때문에 자신과 타인을 어렵지 않게 구분하고 그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는 중2병의 나는 남들과 달라 같은 게 아니라, 단지 자신의 형편을 무시하고 타인만을 판단하는 것에 불과한 것에 가깝습니다.


이런 모순적 행태 덕에 이들은 자신과 같은 약자와 비주류를 연대의 대상이라고 보질 않습니다. 자신이 조금이라도 더 나은 환경에 있다면 우습게 보고 모멸감을 주고자 하며, 자신에게 힘을 보태달라고 요청하면 거기서 정신적 우월감을 느끼며 그것에 심취하고 알량한 입장을 무기로 유세를 부리게 되죠. 이는 어렵지 않게 수평폭력으로 발생하게 되고, 특정 정치세력과, 그들과 야합한 언론은 그것을 부추겨 분열시켜 그들의 단결을 파괴하거나 이루어지지 않게 조작합니다.


따라서 이들은 같은 약자나 비주류, 소수자에게 공감하지 못하고 최소한 무시, 최대한 적대 및 공격에 가까운 입장을 가지게 되죠. 같은 이유로 그들 또한 다른 집단에게서 공감 받거나 연대하고자 하지 않고요. 이것이 정치적인 요소로 흐르게 된다면 (노인, 청소년, 저소득층, 환자, 장애인 등의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복지, 외노자,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배척으로 발생하게 됩니다.


이는 필연적으로 진보 및 좌파와 같은 소수자와 약자를 주로 대변하는 성격의 집단에 대한 혐오와 괄시로 이어지죠. 즉, 그들은 자신들의 입장과 이익을 대변해줄 수 있는 정치집단을 반대하고 비판적인 자세를 가지게 됩니다. 반대로 말하자면, 흔히 말하는 저소득층은 자신이 되고 싶은 자들을 지지한다. 는 말대로가 되는 거죠. 강자와 주류에 대한 동경은 자신과 그들을 동일시하는 공감이 이루어지기 쉽고 그에 따라 정치적 결정을 내립니다. 그게 진정한 본인의 판단이라기 보단 정치적 선동에 따른 결과라고 해도 말이죠.



2.강자, 힘에 대한 맹목적 추종과 환상.


앞서 이야기 했듯, 그들은 힘과 강자에 대해 추종하고 환상을 가집니다. 자신들이 힘이 없어 억울하고 마음 속으로 담아만 둬야할 괄시와 무시를 많이 겪어 봤기 때문에, 그만큼 그들을 짓밟고 비웃어 줄 수 있는 힘에 대한 동경과 환상을 가지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강한 자를 사랑하고 편파적인 애정을 가집니다.


정치에선 소위, 힘 있는 자들에게 표를 줘야 한다와 같은 이야기로 나타나죠. 힘 있는 자들이 정치를 해야 하고, 힘 있는 자들이 권력을 가져야 한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보고 공감하고 싶은 것은 기집애처럼 이빨만 털면서 대화하고 화합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강인한 힘과 권력으로 상대를 짓밟고 박살내며 무릎 꿇고 빌게 만들 수 있는 타협하지 않는 강함, 강자거든요.


그러기 위해선 그들이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느낄 수 없는 적이 필요하고, 그들에게 자신들의 기저에 있는 분노와 혐오를 뿜어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대상은 주로 외부의 적국, 혹은 자국의 진보 온건파들이 되기 쉽죠. 자신들이 혐오해 마지 않는 약자와 소수자를 대변하고 그들의 이익을 주장하는 약해빠진 기집애들. 그들이 적으로 상정되는 것이고, 그래야만 합니다.


파시즘의 공통점은 내부든 외부든 타협할 수 없는 불가침의 적, 혹은 악을 상정하고 국민들로 하여금 그들의 분노와 혐오, 증오 따위를 조장하며 그렇게 조장해낸 부정적 에너지를 그 적에게 쏟아붓게 만드는 겁니다. 그리고 그들이 원하는 주장과 발언을 대신해주는 자신들은 그만큼 비이성적이게 된 감정적 에너지체가 된 대중에게서 지지와 표를 받는 거죠.


따라서 그들의 지지를 받고자 하는 극우보수 집단은 그들에게 자신들이 힘이 있다는 스텐스를 명백히 보여줄 필요가 있고, 적어도 그들이 듣고 싶은 말을 해줘야만할 이유가 있는 겁니다. 실제로 할 수 있느냐, 그것이 국가적, 사회적 이익이 되느냐, 그것이 사회정의와 법적 정의에 부합하는가 따위와는 관계 없이요. 단지 지엽적 정치적 승리를 얻어낼 수 있다면 국가나 사회적 손실과 손해는 무시해도 되는 소小에 불과한 겁니다.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이 대大에 해당할 뿐이거든요.


이는 청와대나 새누리당, 혹은 이번 미 대선에서의 트럼프, 혹은 브렉시트 이전의 영국 보수당들이 했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당장의 정치적 이익과 승리, 저소득층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 혹은 국민 다수에 대한 지지를 이끌어 낼 수 있는 그들이 원하는 말의 대변을 여실히 보여준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게 올바른 말이든, 정의에 부합하거나 국가적, 사회적 이익을 얻어낼 수 있는 종류의 것들이냐고 하면 아니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거든요.


즉, 적지 않은 유권자들이 원하는 것은 정의로움이 아닌 힘이 있다는 것의 증명이고, 또한 정의니 합리니가 아닌 강한 자, 힘 있는 자들이 필요한 것일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경화가 이루어지는 국가에선 힘 없는 정의보다 정의 없는 힘이 승리하는 것을 찾아보기 쉬운 것이고요. 마찬가지로 문재인이나 버니 샌더스, 힐러리와 같은 힘 없는 나약한 놈에게 표를 주지 않는 겁니다.


그들은 당장의 원칙과 정의보다, 당장 힘을 동원해서 자신들에게 대드는 버러지들을 짓밟고 박살내는 것에 열광합니다. 대화와 타협은 기집애들이나 하는 것이고, 그딴 건 필요 없이 자신들에게 기어오르는 놈들에게 본때를 보여줘야만 한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힘을 가진 강자가 타협도 협상도 없이 적을 박살내고 짓밟는 것 자체에 대한 쾌감. 저는 그걸 마초 오르가즘이라고 부릅니다.



3.마초 오르가즘.


앞서 말했듯, 마초 오르가즘이란 힘으로 타협이나 협상, 대화와 같은 나약한 행위를 일체 하지 않고(혹은 강경한 태도의 경고만 한번 던져주고) 자신들이 설정한 적, 혹은 악에 대해 무차별적인 폭력을 휘둘러 박살내고자 하는 것에 대해 쾌감을 느끼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민주적 원칙에서도 벗어나 있고, 벗어나기도 쉬우며 정의나 합리와도 동떨어진 태도입니다. 이런 태도가 극단화된 것이 파시즘이고, 군국주의이죠. 자신들의 적이 있어야만 생존할 수 있는 사상과 집단. 절대적 악과 강력한 적을 찾고, 그들과 싸워 이겨야만 합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사라져버리면 자신들의 존재 자체에 의미가 없어지죠.


거의 전세계의 극우, 보수 정치집단은 그들을 지지하는 자들이 듣고 싶어하는 말을 해줍니다. 사회정의에 부합하는 해야 하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자극적이든 편파적이고 피상적이든 듣고 싶은 말을 해주죠. 트럼프가 가장 적절한 예시입니다. 적지 않은 대중들은 어떠한 현상과 사건에 대해 근본적으로 파헤치고 분석하는 것보다, 그것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피상적인 현상에 집중하기 마련이고, 이게 힘과 관계된 것이라면 그것을 휘두르고 싶어만 하죠. 자신들의 자존심과 가치, 이입할 수 있는 대상(혹은 그런 종류의 가치)의 권위 상승이라는 일방적 짝사랑에 따라 움직이고 표를 던집니다.


현실과는 별개로 자신들은 아주 강한 존재이고, 그런 강한 힘을 가졌으니 대화나 타협 같은 불필요하고 나약한 행위보다 힘을 통한 의지의 관철만을 원합니다. 그게 자신들의 자존감을 회복시켜주고 고양시켜주며 적지 않은 쾌감을 주기 때문이죠. 


이런 마초 오르가즘은 교육 수준이 낮고 노동 강도가 높고 노동 시간이 많은 저소득층에게 쉽게 발현하고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앞서 말했듯, 그들은 수직적, 위계적 권위에 의한 폭력을 쉽게 경험하고 낮은 자존감과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지적능력은 어떠한 현상이나 사건에 대해 충분히 고민하고 분석할 시간도, 능력도 주어지지 않게끔 된 환경에 놓여져 있기 때문이죠.


그들이 조금이라도 더 여유롭다면 극우적 집단의 피상적인 정치적 선동보단 다른 지식인들의 근본적 분석에 공감하고 그 주장이나 분석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적지 않은 이들이 그렇지 못한 환경에 놓여져 있기 때문에 그러기 어렵죠.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해주는 진보나 좌파보다는, 강하고 자신감이 넘치는 남성적 이미지의 보수에 이입하기 쉽습니다. 


교육 수준이 낮기 때문에, 그리고 삶에 여유가 없어서 정치사회적 안건이나 쟁점에 쓸 정신력이 없는 이들이 대부분이고, 자기들이 평소에 이입해왔던 보수, 극우적 진영이나 인물에 지지를 보내기 쉽습니다. 쟁점에 대해 분석하고 공부하고 판단을 내릴 여유도, 그럴만한 지적 능력도 없기 때문에 그냥 그들이 하는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죠. 한국 보수, 저소득층, 50대 이상의 세대가 조중동 등 보수언론이 하는 말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고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는 상태로 정치적 권리를 행사하는 것은 그런 이유죠.


그리고 그런 성질을 잘 알고 있는 극우보수는, 그 집단이 정치정당이 됐든 경제집단이 됐든 언론이 됐든 그들의 마초 오르가즘을 자극할만한 정치적 선동을 하는 것이고요. 그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들은 사회정의나 사회국가적 이익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런 요소들과 동떨어진 주장을 하고 분열을 획책하게 되는 것이며 그 결과로 알량한 정치적 승리만을 반복해서 쟁취했을 따름이죠.


즉, 마초 오르가즘을 자극하면, 자신들이 승리할 수 있게 되기 때문에 계속 자극하는 것인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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