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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며,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 - E.Kant
by Ko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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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22.10.20
    도덕과 자기검열이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맡는가.
  2. 2014.04.24
    세월호 사건이 남긴 또 하나의 여파라면, 신뢰의 문제입니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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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도덕이란 자기검열이다.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자기검열이고, 도덕은 그 중 가치판단의 영역에서 옳고 그름을 구분하여 무엇을 검열할 것인지 선택하는 것이다.

 

1.

도덕은 할 수 있지만 하지 않으면서 지켜지는 규범이다. 이는 그것이 법적 처벌을 받을 정도는 아니지만, 누군가에게 크고 작은 유무형적 피해를 발생시키는 것을 피하면서 지켜진다. 작게는 실제 타인의 피해부터 크게는 보는 이로 하여금 기분이 나쁜 것까지 다양하다.

 

2.

그렇다면 왜 도덕은 지키는 것이 옳은가? 그것은 도덕이 규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는 도덕의 범위 내로 포함되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따져야 알 수 있다.

 

도덕이 지키고자 하는 것은 많지만, 가장 근본적인 것은 신뢰이다. 내가 저 사람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을 것처럼 저 사람도 날 존중할 것이라는 것. 내가 욕을 하지 않고 함부로 하지 않으면 타인도 나에게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을 믿는 것이다. 내가 불특정 다수, 내가 알지 못하는 누군가에게 직간접적인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노력하듯 타인도 그러하리라는 믿음이다.

 

이러한 믿음은 사회적 신뢰가 되어 어떠한 불문율이 되기도 한다. 가령 한국에선 밖에서 핸드폰이나 가방, 지갑 등을 놓고 주인이 없어져도 그 자리에 있거나 경찰서, 분실물 보관소 등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이는 남의 것을 함부로 가져가지 않는다는 기본적인 도덕률부터 시작해서, 자기가 자리를 점유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자신의 물품을 놓는 행위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이는 타국에서 줄을 설 때 직접 그 위치에 서있는 게 아니라 신발(슬리퍼)만 줄지어 놓고 본인은 뒤쪽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서 대기하는 것과 유사한 사회적 합의이다.

 

이것은 일종의 문화에 더 가깝다곤 하지만, 그러한 문화와 불문율을 깨고 물품을 훔치는 것은 범죄이지만 비도덕적인 행위이다. 단순히 법을 어기고 남의 것을 훔쳐가는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러한 문화/불문율을 깼고 사회적 신뢰에 대한 훼손을 시도한 것이기 때문에 더더욱 부도덕한 것으로 취급된다.

 

3.

도덕적인 행위는 본인에게 당장의, 직접적인 이익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사회적 신뢰는 거대하게 형성되는 것이고, 조직적/집단적 불문율 역시 그 구성원들의 암묵적 합의에 의해 만들어지는 규칙이고 질서이다.

 

그 집단의 규모가 크면 클수록 개인의 일탈은 사소한 문제로 보인다. 한두 명이 일탈을 저지르고 불문율을 따르지 않고 부덕한 행위를 한다고 해서 집단의 사회적 신뢰가 하루아침에 파괴되지는 않는다. 그들 몇명의 행동이 훼손하는 범위는 극히 협소할 것이다.

 

그러한 불문율은 모두가 일정 정도를 벗어나지 않고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때문에 내가 같은 피해를 보지 않을 수 있다는 신뢰하에 형성되는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 그 불문율을 어기고 사회적 신뢰를 훼손하면 이익을 얻을 수 있다. 자리를 맡아놓았다는 증표로 놓아둔 스마트폰을 누군가 가져간다면 그 사람은 스마트폰 하나만큼의 이익을 본 것이다.

 

그리고 어떤 이유로든, 그러한 생각을 더 많은 사람이 가지고 실천하게 되거나, 단순히 보복성으로 자신 역시 불문율을 지키지 않겠다는 의도로 자신이 당한 피해와 똑같은 가해를 저지를 경우 사회적 신뢰는 빠르게 붕괴한다.

 

더 이상 모두가 신뢰하던 질서-불문율은 신뢰할 수 없게 되고, 사회적 규칙으로 작동하던 양식은 누군가의 먹잇감이 될 뿐이다. 물론 법은 기능할 것이다. 물건을 훔쳐가면 신고하고, 접수받고 수사하며, 범인을 잡으면 처벌한다. 그러나 이는 사회적 신뢰를 깨뜨리는 비도덕적 행위가 법과 얽혀 있기 때문에 법적 제재가 가해지는 것이다.

 

4.

그렇다면 법과 무관한 비도덕적 행위는 어떠한가? 본래 비도덕적 행위자에겐 비난이 있었다. 단순히 말 뿐인 경우도 있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평판이 깎여 기본적인 인식 자체가 나빠져 사회생활과 인간관계에 지장이 생기는 경우도 있고, 소속된 집단(학교, 직장 등)에서 따돌려지거나 쫓겨나는 경우도 발생할 수 있다.

 

비도덕적 행위가 법을 어긴 것은 아니기에 법적 처벌을 받을 수 없지만 비도덕적이라 비난 받는 것 역시 온당한 평가에 따른 것일테다. 물론 언제나 선을 넘고 과하게 비난하고 공격하는 경우 역시 있을 수 있기에 반드시 비도덕적 행위자에 비난하는 것이 정당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비도덕적 행위가 만연하게 된다면 비도덕적 행위자에 대한 비난 역시 힘을 잃게 된다. 너무 흔하기 때문에 욕할 기력을 잃는 것을 떠나, 도덕의 영역이 협소해지고 도덕과 비도덕의 지위가 역전되는 것이다.

 

가령, 공개된 장소에서 적나라하게 욕설을 하는 것이 눈쌀을 찌푸리게 하여 지적을 받았다면, 지금은 그러한 성격의 캐릭터들이 범람하여 지적이 의미가 없어지고, 되려 지적하는 사람을 선비라거나 위선자 따위로 역공을 당하는 것이다. 그것이 불법은 아니지만, 상식의 영역에서 무엇이 도덕적인지는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만의 가치판단에 따라 그것에 의문을 제기하고 거부하는 것이다.

 

문제는 그러한 자들이 늘어나는 것이다. 그들이 협소하나마 일말의 보편성을 획득할 정도로 늘어나게 된다면 기존 도덕의 영역은 다양한 지점에서 도전 받고 반박되고, 무시되고, 훼손되고 파괴될 것이다.

 

5.

도덕적 행위를 하면 모두가 이익을 보고, 비도덕적 행위를 하면 누군가는 손해를 보고 자신은 이익을 본다. 이기적일수록 직접적인 이익을 얻게 된다. 모두가 이익을 얻기 위해선 비도덕적인 행위를 하는 것이 좋다. 누군가 전혀 모르는 남의 호의나 신뢰, 도덕적 행위를 기대하고 심리적 방화벽을 내렸을 때 비도덕적 행위자는 그 틈에 이익을 보게 된다.

 

피해자는 당한 이후 심리적 방화벽을 다시 세우게 된다. 대체로 타인에 대한 신뢰가 낮아지고 사회적 신뢰에 대한 믿음이 낮아지겠지만 그렇다고 가해자가 되지는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비도덕적 행위가 이익이 되고, 하지 않는 쪽이 손해를 보는 구조에서는 마냥 고집부릴 수만은 없다. 구체적 피해와 실질적 이득의 관계는 도덕-비도덕의 문제를 손해-이득의 문제, 혹은 생존-도태의 관계로 도치될 수 있다.

 

6.

그렇다면 그런 식으로 비도덕적 행위자가 늘어날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되는 것일까? 반드시 모든 도덕적 행위 선택자들은 비도덕적 행위자가 될 수밖에 없을까?

 

역사에서 우리는 특별히 더 도덕적이고 부덕한 시절을 고를 수 있다. 매우 정확하고 계량적으로 구분지을 수 있는 것은 아니기에 우리는 그것을 개괄적이고 극단적으로 고르는 것이 용이할 것이다.

 

가령, 전쟁이나 재난 상황이 오래 지속되어 도덕의 문제가 생존의 문제와 충돌할 때가 그러하다. 경신대기근은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게 만들었고, 자식을 바꾸어 잡아먹었으며, 전쟁이 길어질 때면 시민들은 범죄에 더 쉽게 매혹되었다.

 

태평성대라고 하는 세상일수록 여유가 넘치고 범죄가 적거나 공정하게 처리된다. 경쟁과 도태보다는 협력과 신뢰가 사회를 대표하는 정서가 된다.

 

곳간에서 인심난다는 말은 여유와 도덕에 대한 통찰이 담긴 말일 것이다. 우리는 더 여유로울 때 더 쉽게 도덕적인 선택을 한다. 단순히 베푸는 것을 떠나 타인을 배려하고 확실하게 이익으로 돌아올 자신의 비도덕적 선택을 포기하고 사회적 신뢰를 택한다. 그래도 무방하기 때문이다.

 

7.

도덕은 자기검열이다. 우리는 살아오면서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 배우고, 이것을 통칭하여 사회화라고 한다. 이것은 개개인에게 가치관에 뿌리내려 누군가 자신을 규제하고 제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자연스럽게 습관화된 관성에 따라 도덕적 반응을 한다.

 

주변에 차, 또는 보행자가 없기에 그냥 지나가도 상관 없는 도로/횡단보도를 지나치지 않고 신호를 기다리는 것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것은 학습에 의해 얻어진 지식이고, 실천을 통해 습관화한 것이다. 거꾸로 말하자면 학습받지 않았다면 사회 일반 도덕률에서 이격되어 있을 것이고,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것 또한 도덕적이진 않다. 또한 학습된 것은 언제든지 뒤집히거나 덧씌워질 수 있다.

 

도덕적 행위를 선호하는 사람이라도 환경 조건에 따라 언제든 비도덕적인 선택을 할 수 있다.

 

개인의 성향과 개성이라는 것은 개인 단위의 조건일 뿐 거대한 집단적 경향성을 계측하는 근거로 작동하기는 어렵다. 어떤 사회나 집단의 도덕적 성향이 개인의 성향과 개성에 의존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도덕적 선택을 하는 것은 환경 조건이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다.

 

8.

이러한 조건은 다양하다. 경제적 상황, 노동시간, 정치적 혼란, 군사안보적 위험, 지배적 이념.

 

단순화시키면 이렇게 양분된 것이다. 경제적 여유와 사회적 갈등 수준.

 

경제적인 여유가 있을 수록 사는 것 자체에 대한 부담은 줄어든다. 필요한 것에 쓸 돈이 많을 수록 기본적인 생활 수준은 더 높아질 것이고 경제적 부담에서 멀어질 것이다. 이는 심리적 여유가 되고 인지적 여유가 된다. 도덕적 선택은 그러한 여유에서 출발한다. 심리적 여유는 물질적 여유에서 찾아오는 법이다.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지만 그것은 그 사람의 개성이지 일반적으로 기대할 수준이 되지 않는다.

 

사회적 갈등 상황이 길어지고 다각화되어 다양한 분야에서 갈등이 발생하면서 그러한 이슈 인식에 있어 인지적 포화가 이루어질수록 도덕적인 선택에서 멀어질 것이다. 본인이 생각하고 지지하는 입장이 있을 것이고 이슈마다 자신만의 포지션이 있을 것이다.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여러 갈등들을 접할 수록 스트레스를 받게 될 것이다.

 

다양한 갈등에서 다양한 적, 혹은 바보들을 상대로 싸우거나 최소한 비판적인 생각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러한 부정적 정서들은 스트레스를 늘리고 심리적으로 공격적이게끔 한다. 어느 정도까진 상관 없겠으나, 지속되고 점점 많은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불만은 축적된다. 단순히 속으로 타인을 욕하는 것조차도 그 빈도가 늘어나고 후엔 말로만 하지 않을 뿐 습관적이게 될 수 있을 것이다.

 

핵심 자체는 스트레스가 될 것이지만 이러한 스트레스는 사회적 이슈에 따른 갈등 수준이 아닌 직장 생활이 될 수도 있고 인간관계나 게임의 결과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역시 이는 개인 단위의 경험에 한정되기 때문에 사회적인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선 그만큼 사회적 단위가 될 수 있는 현상을 지적해야 하기에 스트레스가 아닌 사회적 갈등 수준으로 짚은 것이다.

 

9.

사회가 각박해지고 삶에서 여유를 잃을 수록, 그리고 비도덕적 선택을 통해 이득을 얻고 제재가 적을 수록 비도덕적 선택의 폭과 그 영역은 넓어질 것이다. 만연한 비도덕은 도덕의 영역을 밀어내다못해 역전시킬 것이고 도덕적 행위나 사고를 위선과 선비질이라 폄하할 것이다.

 

도덕적인 선택이 손해로 이어지고 비도덕적 선택이 이익과 선망으로 이어진다면 더 이상 사람들은 도덕적일 필요가 없어질 것이다. 경쟁과 각자도생, 황금만능주의과 과정을 따지지 않는 출세지향으로 대표되는 사상들이 사회에서 도덕이 설 자리를 대체할 것이다.

 

사회적 신뢰가 작동하는 영역은 그런 성향의 이들에게 자신이 이익을 얻어낼 수 있는 기회의 장으로 비춰질 것이고 몇번의 피해로 인해 해당 영역은 훼손되어 파괴될 것이다.

 

그런 식으로 사람들은 도덕적으로 사회화된 습관을 버리고 비도덕적 습관을 받아들일 것이고, 더 어린 세대는 그들에게서 도덕이 역전된 가치체계를 받아들일 것이다. 도덕과 비도덕이 역전된 가치관으로 사회화되는 것이다. 내가 이익을 얻고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면 남들이 피해를 보더라도 그것이 법을 어긴 것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그것이 정당화되는 세계관이 형성되는 것이다.

 

이것은 한두 사람에게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기에 어느새 사회의 주류 정체성으로 받아들여지고 보편화될 것이다. 

 

10.

도덕은 자기검열이고 그것이 지키고자 하는 것은 사회적 신뢰이다. 내가 쓰레기를 버리지 않고 길에서 함부로 담배를 피지 않고 그러한 생각들이 많은 이들에게서 공유된다면 사회적 비용이 적어진다. 이는 소모되어야할 비용이 다른 곳에서 더 유용한 자원으로 활용될 것이다.

 

사회적 진보를 촉진시키거나 윤택하게 할 것이다. 그러나 비도덕적 선택들은 그러지 못하게 만들고 비용을 늘린다.

 

잘못을 했으면 욕을 먹는 것이 당연하다. 남들이 욕할 것이 뻔한 말을 했다면 당연히 욕을 먹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나 비도덕적 행위자들은 그러한 도덕 기준과 가치판단에 의문을 제기하고 공격한다. 알량한 논리와 주장이지만 지나치게 관용적이거나 지나치게 나이브한 바보들은 그들의 주장을 일부 수용하기도 한다. 가령, 패륜적 비난을 표현의 자유라고 주장하는 바보들에게 표현의 자유이니 제재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이 그러하다.

 

틀렸다. 자유에는 책임이 있고 그것이 법적 제재를 의미하지 않더라도 사회적 제재는 당연하고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개소리를 했으면 욕을 먹는 게 당연하다. 개소리를 크게 내거나 반복하는 사람은 쫓겨나는 것 역시 자연스럽다. 이는 수천년 동안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집단의 질서 유지를 위한 규칙이었다.

 

그러한 사회적 린치, 혹은 집단재판이 도덕적인 것만은 아닐 것이다. 때로는 쫓겨나는 쪽이 도덕적 정당성을 가지고 우위에 서 있을 수도 있고 정의로울 수도 있다. 그러나 쫓겨나는 소수자가 반드시 그런 선각자이거나 정의로운 의사일 거라는 것 역시 당연한 게 아니다.

 

자기검열이 부정적으로 사용되지만 도덕은 그것으로 작동한다. 남이 뭐라고 하지 않더라도, 누가 보는 게 아니라도 자기 스스로의 양심이라는 시스템이 스스로를 검열하게 만들어 규정된 도덕적 규칙 하에 자신의 행동을 제한하게 만든다.

 

지나친 자기검열이 표현의 자유와 사상적 자유를 억압하거나 제한한다고 할 수 있지만, 비슷한 강도로 제한이 풀려버린 것보다는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검열의 제한을 푸는 것은 쉽지만 한번 풀린 제한을 다시 묶는 것은 지나치게 어렵다. 

 

자기검열이라는 표현이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진다면 다른 용어로 바꿀 수도 있을 것이다. 자기통제라는 용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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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을 해보세요, 이승만때나 대구 지하철참사 때나, 이번 세월호 사건 때나, 책임자나 관계자라는 인물들이 했던 지시가 어떤 결과로 이어졌죠? 이승만때는 국군이 잘 막고 있다고 걱정할 거 없다고 해놓곤 자기들끼리 홀랑 도망가면서 한강대교를 폭파시켰으며, 대구 지하철참사때도 기관사가 기다리라고 지시를 내렸지만 자기만 혼자 마스터키 뽑고 도망갔쬬.


이번 사건때도 마찬가집니다. 선장은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고 해놓고 자기들끼리만 먼저 도망가버렸죠. 자기들도 무서워서, 죽을까봐 도망나온 주제에 수백명의 아이들은 그 가장 위험한 공간에 '가만히 있으라'면서 버려두고 말입니다.



이번 사건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느꼈을 겁니다. 이런 사고가 나한테 닥친다면 위에서 내린 관계자들의 지시는 씹고 살기 위해 뛰쳐나와야겠다고. 당장 저부터 그렇게 생각했거든요. 사실 아이들은 정말 잘못한게 없습니다. 그들은 매우 상식적으로 행동했고, 매우 선진적인 태도로 임했던 겁니다.


왜냐? 보통 선진국에선 어떤 사고가 발생하면, 승무원이 됬든 스튜어디스가 됬든 사고에 관해 더 많은 정보를 알고 있고, 이런 사태에 대해 교육을 받았을 관계자의 지시에 침착하게 따르는 것이 생존과 수습에 도움이 되는, 매우 당연하고 상식적인 행동이거든요.


아이들은 그런 어른들을 신뢰하여 지시를 따랐습니다. 자기들끼리 패닉에 빠져 우왕좌왕하지도 않았고, 죄다 지시를 무시하고 뛰쳐나오지도 않았습니다. 두려웠지만 괜찮아 질거다, 관계자들이 잘 처리해줄 것이다라고 분명히 신뢰했을 겁니다. 아이들도 멍청하진 않아요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렇게도 침착하게 그들의 지시에 따랐던 것이죠.


하지만 어른들은 매정하게 아이들을 배신하고 도망나왔습니다. 무서워서, 죽을지도 모르니까. 아이들이야 어쨋든 내가 살고 봐야한다는 생각에 홀랑 도망나온 겁니다. 아이들 죽으랍시고 가만히 있으라는 지시를 내린 뒤에 침몰하고 뒤집히는 배에서 말입니다.


딱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아이들은 이미 선진적인 행동을 몸에 담고 있는데, 어른들이라는 작자는 아직도 미개한 사고방식으로 사는구나. 하고 말입니다. 그들이 해야했던 일은 시작부터 잘못됐습니다. 그러니 이런 대형참사가 발생했지요. 그나마 아이들은 그런 선진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으나, 이번 사건으로 그런 아이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지시를 듣지 않고 두려워서, 혹은 자신의 판단에 따라 도망나왔던 아이들만 살아남았어요.


이번 사건이 제 3자가 되는 우리들에게 남기는 여파는 이겁니다. 더 이상 그 놈의 관계자 지시를 듣지 말아야겠다는 겁니다. 이미 이런 전례들이 있는데 어떻게 믿습니까? 믿어봐야 개죽음 밖에 더 된답니까? 밖으로 뛰쳐나가면 충분히 살 수 있는데 뭘 믿고 지시를 따라요?


정작 제대로된, 메뉴얼에 따른 지시와 대처를 실시했어도 이번 사건을 떠올린 사람들은 생각할 겁니다. 저건 믿어선 안 되겠다, 그냥 내 판단에 따라 홀랑 빠져나와야겠다.


그런 혼란과 독단적인 판단은, 정상적인 지시에 맞지 않을 것이고, 그런 움직임이 사건을 더 키우겠죠. 그리고 언론은 뭐라고 떠들지 모르겠군요. 관계자의 지시를 따르지 않아 발생한 인재다 라고, 또 아직 우리는 멀었구나 라고 하겠죠. 그 중에서 몇몇은 세월호 사건을 기억하며 기사를 쓰겠지만, 어디 그만큼 머리를 굴릴 지 모르겠군요. 보이는 대로만 짓껄이는게 우리네 언론일테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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