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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며,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 - E.Kant
by Ko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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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화'에 해당되는 글 5건

  1. 2022.11.02
    하나의 사회 속에 존재하는 다양한 세계의 간극.
  2. 2016.01.24
    동성애가 잘못되지 않은 이유. (2)
  3. 2015.10.17
    인간의 본성은 선한가 악한가에 대한 단상. (1)
  4. 2015.08.14
    법치에 대한 이해 2편. 피해자 인권? (4)
  5. 2014.10.04
    망할 회사는 망해라.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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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

 

실제로 까마귀가 나는 것과 배가 떨어지는 것의 상관관계는 없습니다. 하지만 두가지 현상이 비슷한 시점에 발생한다면, 혹은 관찰된다면 어떤 현상이 다른 현상에 선행하거나 조건으로 여겨질 수 있죠. 그러나 논리적으로 아무런 연관도, 인과도 없다면 그것은 논리적 오류가 됩니다.

 

 

하나의 세계관은 한 사람의 삶으로 구축됩니다. 그 사람이 세상을 어떻게 인식하고 받아들이는지는 그 사람이 살아온 경험에 따르는 것이고, 완전히 다른 세계관이란 완전히 다른 삶의 경험으로 번역될 수 있죠.

 

한 국가의 환경은 대체로 비슷비슷합니다. 도시를 중심으로 하는 발전과 시골의 발전도는 다를 수밖에 없고 상류층과 하층민의 삶은 다를 수밖에 없으며 한 사회에도 여러 층위가 존재하듯 평균에서 크게 벗어난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국가의 구성원으로 보편적으로 겪을 수 있는 환경과 할 수 있는 경험에는 어느 정도 교집합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 국가 내에서도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 서민과 비서민, 수도권 거주자와 지방 거주자의 관점 차이는 꽤 커다란 편입니다. 우리 사회는 지리적 한계 내에서 그 경험의 폭이 좁은 편이라는 점을 고려해도 그 간극은 타국과 비교해서도 상당한 차이를 보입니다.

 

그 이유는 지리적 폭은 좁지만 시간적 폭이 넓기 때문이라고 보는 편인데, 한 세대가 겪는 시대적 경험과 그 다음 세대가 겪은 시대적 경험의 차이는 한 세대 이상의 것이라고 칭해도 무방할 정도로 큰 차이를 보이기 때문입니다. 40년대에 20대를 보냈던 사람과 60년대에 20대를 보냈던 사람, 80년대와 2000년대를 20대로 보냈던 사람에게 한국은 완전히 다른 국가였습니다.

 

사상적 차이가 아니라 물질 문명의 발달 정도가 한 세대 이상의 간격을 보여주며 급속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물질적 경험은 사상의 차이에도 영향을 미치고, 곧 세계관에도 차이를 발생시킵니다. 따라서 한국의 각 세대는 서로 다른 세계를 살아왔던 이방인이며 우리 사회는 이방인들의 집합인 셈이죠.

 

 

진보와 보수가 바라보는 세상은 완전히 다릅니다. 사실, 그들은 같은 나라에 살고 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세상을 살고 있죠. 진보에게 정의인 것이 보수에겐 위선이 되고, 보수의 정의가 진보에겐 범죄로 인식되는 가치관의 차이는 상당한 간극을 두고 있습니다. 심지어 상식의 영역조차도 서로 다르게 인식하고 있고, 정반대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범합니다. 대체로 상식적인 판단력을 보이기도 하죠. 하지만 정치적 영역에 접어드는 순간 그들의 상식적 판단력은 진영간의 간극만큼이나 차이가 벌어지게 됩니다. 그들에게 작동하는 논리 회로가 서로 다르기 때문일 것이고, 그 회로에 작동하는 경험이라는 데이터가 서로 다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간극에도 불구하고 현상에는 객관적으로 판단할만한 요소들이 존재하며 그 요소들을 기반으로 하는 판단이 객관성, 혹은 상식의 보편적 평균치에서 크게 벗어난 경우라면 그 사람은 특별히 더 극단적인 가치관을 가진 것이고, 비상식적인 판단력이 작동하는 세계관의 객체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합리合理는 이치에 맞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이치는 시대와 문화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이지만 우리는 숱한 문화권과 깊은 인류 역사에서 공통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하나의 정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 정도와 범위에서의 차이가 있을 뿐, 인간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정서가 그러합니다.

 

이는 나와 내 가족, 내 주변 사람을 위협으로부터 지키고 생명의 상실에 고통스러워하고 슬퍼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옛적 시절부터 사람은 나와 남을 구분하여 남의 아픔에는 공감하지 않고 (내 주변 사람의 고통으로부터 말미암은) 나의 아픔에 더 이입하였지만 그렇다하여 생명의 무게를 경시하는 것이 지배적이었던 시절은 없었고, 설령 있었다 하더라도 바로 그러한 이유로 다른 사상이 지배하는 체제에 무너져 도태되기 마련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정서에서 출발한 것들은 대체로 도덕, 윤리와 같은 전통적인 정신적 사상이 되었고, 그것을 명문화하거나 관습적 질서로써 작동하는 것을 우리는 법이라 부릅니다.

 

 

그런 까닭에 사람의 생명을 기준으로 하는 도덕률은 객관적 기준으로 삼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물론 악인의 죽음에는 대부분의 사람이 공감하거나 이입하기 어렵고, 그들에게 애도와 명복을 비는 것 자체가 피해자, 희생자에 대한 모독이 될 수 있는, 가령 히틀러나 스탈린과 같은 이들. 대부분의 침략자와 학살자들에 대해서는 그러한 도덕적 기준을 잣대 삼지 않는 것 역시 인정되어야겠죠.

 

반대로 말하자면 죄인이 아닌, 죄 없는 사람의 죽음에 어떠한 태도를 보이는지를 기준으로 한다면 그것은 적절한 판단 기준이 될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무고한 사람들이 사고, 재난, 범죄의 피해로 죽거나 다쳤을 때 그것을 조롱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비도덕적인 행위이고 그러한 행동이 가져다주는 이점이 없기 때문이며 도덕이란 사회화의 가장 중요한 항목이기에 이것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사람이 아닌 이상 그러한 행위를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건이나 사고, 재난, 참사, 학살에 대해 피해자를 조롱하고 공격하는 경우는 단순히 그들이 사회화가 덜 이루어졌거나 도덕적 훈련이 덜 되었다는 것 이상의 사유가 존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령, 정치적 진영의 차이가 그러하고, 정치적 책임의 유무가 어느 쪽에 더 실려 있는지에 따라서도 그러한 입장 차이를 발생시킵니다.

 

이것은 정치적 이념이 객관적 도덕 기준보다 우선했을 때 찾아볼 수 있는 현상이죠. 우리 진영의 정치인이나 통치자가 수많은 피해자를 발생시킨 사건의 원인을 제공하거나 그러한 책임을 질 수밖에 없는 위치와 상황에 있을 때 그 지지자들은 그들에게 책임이 돌아가지 않도록 여러 활동들을 전개합니다.

 

그러한 활동은 누군가의 지령을 받거나 집단의 전략적 행동이 아니고 단순히 각 개인들의 공통적인 정서가 특정한 방향성을 가지는 것이라고 봐야하는데, 이는 특히 내집단의 무오함을 신봉하거나, 무오해야 한다는 믿음을 지닌 이들이 많을 수록 발생하기 쉽죠. 다시 말해, 더 극단주의자가 많은 쪽일수록 그러한 정신증이 쉽게 발병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무책임한 태도로 일관하고 적을 만들거나, 희생자를 만들거나, 피해자와 가해자를 뒤집기도 하고 없는 죄를 만들어서 덮어씌우거나 작은 죄를 과대포장하여 깍아내리기도 합니다. 희생자나 피해자는 그들의 그러한 행동에 의해 무고한 자에서 위선적이거나 욕심많은 장사꾼이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유로 더더욱 공격하고 자신의 공격이 정당하다고 믿죠.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고 그에 대한 정치적 책임이 분명히 존재해야함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진영이나 입장에 따라 책임추궁에 태도 차이가 생기는 이유는 그것이 도덕과 같은 합리적 기준을 기반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정치적인 기준으로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지지하는 집단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들의 모든 잘못과 책임에 그 어떤 추궁도 하지 않고 그들은 항상 무오한 집단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는 당위가 있는 것처럼 말이죠. 도덕적 기준으로 0, 0의 좌표에서 멀어질수록 극단적인 성향이라면 정치적 도그마의 점수가 높을수록 도덕적 기준에서도 멀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는 나와 남의 구분에 따라 나, 혹은 내가 이입하고 공감할 수 있는 내집단內集團과 그렇지 않은 외집단外集團의 차이에서 비롯됩니다.

 

그들에게 내집단에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사건의 피해자는 곧 외집단으로 분류되고, 도덕적 기준의 작동 대상이 아니게 됩니다. 내집단의 전사들이 외집단의 민간인에 도덕적 기준 대신 힘의 논리를 작동시키고, 포식자가 사냥감에 공감하거나 이입하지 않는 것처럼요.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서, 오비이락이란 서로 다른 현상을 한가지 인과로 엮어 설명하는 오류를 말합니다. 평범하게 살아가는 어떤 사람이 어떠한 현상(혹은 사건)에 대해 비상식적인 판단을 내린다면 그 사람이 특별히 멍청하거나 비상식적인 판단을 내릴만한 경험을 받아들여 왔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객관, 혹은 상식의 차이는 그가 살아온 사회의 층위에 가장 큰 영향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것은 특정한 층위에서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고, 다양한 층위가 공통적으로 공유하는 정서 내지는 사회문화적 밈일 가능성 역시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전라도에 대한 편견을 특별히 더 많이 지닌 지역은 그러한 정서 내지는 밈이 그 지역사회의 다양한 층위에 공통적으로 잔존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들은 전라도라는 지역과 그 지역민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가지고 있고, 그 인식은 오비이락식 해석에 의해 사소하거나 심지어 겪어본 적도 없거나, 아예 과장 내지는 거짓말일 경우조차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내집단의 일반적인 감성이 될 수 있습니다. 그 내집단은 가족/집안 단위일 수도 있고 그보다 더 클 수도 있습니다. 그 관계도 역시 밀도 있는 얼개를 지닌 것이 아닐 수도 있지만, 끈끈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오비이락식 해석에 익숙해지고 다양한 분야에 같은 방식의 해석을 적용한다면 그 세계관은 더 논리적인 형식으로 구성되기보단 피상적이고 경험적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 경험이란 실제로 겪은 것 뿐 아니라 자신이 신뢰하는 누군가의 발언 내지는 해석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주입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내집단의 것은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공동체적 성격을 띄지만, 외집단의 것에 대해서는 반사적 거부감을 먼저 일으킬 것이고요. 그 사이에서 편견은 매우 활성화 됩니다.

 

 

그러한 세계관/가치관을 가진 사람은 무고한 사람이 죽은 참사에서도 비슷한 태도를 보일 것이고 피해자에 이입과 공감을 하기보단 그들에게 없는 죄를 찾아내거나, 편견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이태원에서 압사 당한 사람들에게 왜 쓸데없이 밖에 나가 돌아다니다 그런 사고를 내냐거나, 당국에 책임을 묻는 것에 대해 왜 나라 탓을 하느냐는 식으로 나오는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그들에게 도덕과 윤리란 객관적, 합리적으로 작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선택적이고 정치적입니다. 어떠한 경우에는 작동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많고, 내집단과 외집단을 구분해서 작동합니다. 정치적 이념은 그러한 내외집단의 구분 기준에 충실한 근거일 뿐이죠.

 

 

논리는 올바른 형식과 원리하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논리 역시 훈련받아야 가능한 것이고 모든 경우에 단일한 논리를 적용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세계관 하에서 특정한 논리는 그 개인에게 합리성을 획득할 수 있고 그 세계관 내에서 합리적인 설명과 해석을 내놓을 수도 있죠.

 

그것이 일반적인 객관성이나 상식에 부합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러한 세계관을 지닌 사람은 그 오류를 쉽게 자각하거나 논파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당장의 논쟁에서 내가 잘 모르기 때문에, 아직 정확한 모든 정보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등등 다양한 이유로 일시적인 후퇴나 보류를 결정하게 할 뿐이지 자신이 세상을 받아들이고 해석해온 기반 논리가 틀린 것이 되는 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개인의 모든 판단기준과 그러한 기준에 따라 살아온 자신의 삶이 틀린 것으로 부정되는 세계관적 충격을 발생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그 세계관이 사회에서 완전히 배제되거나 충돌을 일으키는 수준의 간극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과 동일 세계관 내지는 유사한 세계관을 지닌 사람들 역시 매우 많을 것이라는 점 때문에 더더욱 포기하거나 틀렸음을 인정할 수 없게 됩니다. 자신이 틀린 증거보다는 자신의 옆에 있는 자신과 같거나 유사한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을 보며 자신이 틀리지 않았음을 재확인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 역시 사회화인 까닭에, 약자에 무자비하고 강자에 비굴한 세계관을 지닌 이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환경/사회/층위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도덕의 영역에서 그렇지 않은 이들에 비해 0, 0의 좌표에서 더 멀어져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이유를 포함하는 다양한(앞서 설명한 여러 요소들) 이유들의 합에 의해 더 극단적인 가치관, 성향을 가지고 있을 것이며 이것은 정치적 이념이 되었을 때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극우, 극좌 타입에 속하게 되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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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본인이 다음 팁에서 답변한 내용을 퍼온 것입니다.



1.동성애자가 이성애자가 되는 것은 편견에 기인한 것이고, 동성애자에게는 하나의 폭력입니다.


2.그렇기 때문에 동성애 문제의 근본적인 것은 다름아닌 '그것이 옳은 것이다.'라는 것인 데, 왜 그것이 옳은 '것인가?'가 아니라 옳은 것이다. 라고 단정짓는 이유는, 정말로 그것이 나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3.동성애는 선천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선천적인 것을 강제로 바꾸는 것은 '옳지 않아요.' 우리가 왼손잡이를 강제로 오른손잡이로 바꾸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합니다. 태어난 그대로의 것을 잘못되었다 하며 그것을 자신, 혹은 세상의 관념에 끼워 맞추기 위해 강제하죠.


4.바로 그 부분이 잘못된 것입니다. 선천적이라면, 그것은 이미 정당합니다. 왼손잡이가 잘못된 것이 아니고, 장애인으로 태어난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듯이, 동성애도 같은 잣대로 바라보고 인정해야하는 것입니다.


5.그렇기 때문에 동성애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성애자인 다수는 물론 동성애자 본인 또한 말이죠.


6.따라서 동성애자를 강제로 이성애자로 만드는 것은 그 자체로 폭력이고 편견입니다. 동성애자는 그 자체로 정상이며, 도덕적이고 윤리적입니다. 이에 대해 드는 모든 도덕적, 윤리적 잣대는 동시에 이성애자에게도 적용 가능한 것입니다.


7.종교를 이유로 동성애를 탄압하는 것은 종교라는 이름으로 타인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입니다. 현대 사회에 와서 그러한 종교와 종교의 교리를 타인에게 강제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배웁니다. 자신의 가치관은 타인에게 강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8.따라서 동성애에 대해서는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하며, 그것이 정상적이고 전혀 문제가 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지 못하겠다면, 그것을 말로, 그리고 행동으로 보여서는 안 됩니다. 자신이 동성애 혐오자라도, 동성애자를 차별하거나 비난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9.동성애자가 이성애자가 되고 싶다고 한다면 그것은 매우 높은 확률로 동성애에 대한 사회적 시선과 탄압 때문입니다. 자신에게 가해지는 타인들의 시선과 혐오, 편견에 쌓인 말들과 눈빛이 두려워 그것에서 벗어나 타인과 같은 상태에 있고 싶은 것이죠. 두려움에서 벗어나고 싶은 것이지, 진정으로 이성애를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10.만약 그러한 이유와는 전혀 다르게 이성애자가 되고 싶은 동성애자가 있다면, 제가 아는 한 동성애를 이성애로 바꾸는 방법은 없는 걸로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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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나 지금이나 동성애에 대한 터부와 편견이 강했는데, 그나마 최근엔 나아지는 것으로 보였으나 백X대학교의 좀 모자란 멍청이들이 동성애자 반대모임이라는 이름으로 아웃팅을 해야 한다느니, 교정강간 운운하는 사상이 글러먹었다는 걸 스스로 증명하고 있는데, 그런 꼴통들을 보면 그저 한숨만 나올 뿐입니다.


동성애 반대나 차별에 대해서는 어떠한 논리를 대든 그저 헛소리에 반박 가능할 뿐입니다. 흰 말을 검은 소라고 주장하는 데 어떤 논리를 대든 그저 헛소리에 불과한 뻘짓에 불과하듯이요. 처음부터 개소리라면 무슨 논리를 대든 개논리가 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그러한 합리적인 생각이라는 것을 단 한번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고 밖에 볼 수 없죠. 그게 아니라면 선천적으로 지능이 떨어지든가.


사람이 생각을 하고 살아야 하는데, 이걸 안 하고 자기 직관과 교정, 타파되지 않은 편견과 고정관념에 대한 어떠한 고민이나 심지어 그에 대한 인식 자체가 이루어지지 않은 이들이 그런 비합리적 폭력을 휘두르기 쉽습니다. 미망에 빠져서 주먹을 휘두르는 모지리들인 셈이죠.


소위 '문명인', '근대인(혹은 현대인)'이 되어가는 과정이라는 것은 그러한 비합리적 행동양상과 편견 및 고정관념에 대한 논리적 교정을 통한 것입니다. 21세기에 스마트폰에 대중교통을 이용한다고 해서 머리 속 생각이 2000년전 고대인과 다를 바 없다면 의미가 없죠. 전근대적 편견과 비합리성에서 빠져나오는 과정이 근대적 이성의 진정한 가치인데, 이게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근대인, 현대인이라고 할 수 없죠. 적어도 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X석대학교의 모지리들은 고대인과 다를 바 없는 또라이들인 셈입니다. 동성애에 대한 합리적 판단이 이루어지지 않고, 교정강간이니 뭐니 하는 꼴마초적 성향을 자랑스레 내보이는 전근대적 폭력성향. 그들의 언행엔 일관성도, 합리성도, 논리성도 결여되어 있죠. 머리속 근대화는 물론 사회화도 덜 되었다고 봐야 합니다. 그런 놈들도 대학을 간다는 게 참 우습죠? 낄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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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은 다음 팁에서 본인이 작성한 답변을 일부 수정, 추가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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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하지도 않고, 악하지도 않은 자연적인 본능과 성향만이 존재합니다. 인간이라는 것이 본디 짐승에서 진화한 생물이고, 그저 다른 생물보다 뛰어난 지성을 가졌기에 사회와 문명이라는 것을 이룩했는 데, 이러한 환경은 원시적 자연환경과는 다른 인위적 사회환경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회환경은 인간들끼리의 사회적 관계와 유대, 그리고 불문율이나 성문법 등의 새로운 규칙에 의해 지배 받고 지배하는 곳이기 때문에, 원시적 자연환경에서와는 전혀 다른 환경이라고 할 수 있죠.


자연환경. 즉, 야생에선 어떠한 도덕이나 윤리 따위는 존재하지 않고 기실 그러한 것이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서로가 서로를 지키는 시스템인 사회, 혹은 문명은 그러한 서로간의 신뢰가 깨어지면 결코 유지될 수 없는 특성을 지니고 있죠. 쉽게 말해서 누구나 쉽게 범죄에 해당되는 범주의 행동을 마구잡이로 하고 다니면서 어떠한 처벌을 받지 않는다면 사회는 곧 붕괴한다는 겁니다.


도덕이나 윤리 또한 인간적 기준에서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사회적 규약인 데, 이러한 규약은 역시 사회환경에서만 통용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생물학적인 인간이라는 개체와 사회학적 개인이라는 개체는 양립하면서도 모순되는 형태를 띄는거죠. 이는 아주 어린아이에게서 선한 모습을 볼 수 있으면서도 악마성에 가까운 악한 모습 또한 관찰할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교육이라는 것은 그러한 악한 모습에 대한 규제를 의미하고, 사회성이란 그 사회를 이룰 수 있는 능력을 말하죠.


달리 말하자면 아직 사회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동물에 더 가까운 아이들에게서 자연적인 형태의 선과 악의 모습을 둘 다 볼 수 있고 커가면서 그러한 사회화(교육)을 통해 그러한 악한 행동을 규제하게 됨을 의미합니다. 물론 그러한 교육이 생물적 본능이나 성향, 욕구를 완벽하게 제어할 수는 없기 때문에 인간은 커서도 짐승 같은 모습이나, 사회적이지 못한 모습, 또는 악한 모습을 보이곤 하는 거죠.


자연상태에선 어떠한 도덕과 윤리도 없고 사람의 본성이란 곧 동물적 본능과 욕구를 의미하는 바, 그러한 기준을 통해 선한가 악한가를 논하는 건 의미 없다고 봅니다. 인간의 본성이란 생물학적 진화를 통해 자연환경을 기준으로 적응되어온 결과이기 때문에 전혀 다른 사회적 환경, 문명을 기준으로 한다면 당연히 맞지 않을 수 밖에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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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어떤 범죄 사건이 발생했을 때 범죄자를 쳐죽여야 한다느니 능지처참을 해야 한다느니 하는 극형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범죄자 인권만 인권이고 피해자 인권은 없냐고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추악한 범죄에 희생된 피해자를 동정하면서 그 사람은 인권을 보호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건 큰 오해죠.


피해자의 인권 역시 보호가 됩니다. 범죄자를 강하게 처벌하거나 비인도적으로 처형하는 것은 피해자의 인권과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피해자와 가해자는 서로 다른 객체이며 서로의 인권에 대한 보호는 별개거든요. 그러한 주장이 나오는 이유는 그저 피해자는 저런 잔인한, 추악한 범죄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법의 보호를 받아가며 재판을 받고 어디 망가지지도 않고 고작 몇년형을 살다 나오고 피해자는 아무런 보상도 뭣도 없이 그런 고통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죠.


바로 그 부분이 착각인 겁니다. 먼저, 인권에 대한 보호는 모두에게 동일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 인권을 침해했다면 그에 따른 처벌이나 조치를 받을 수 있는 거죠. 인권을 보호한다는 것이 모든 국민들의 생활 속에서 벌어질 수 있는 모든 범죄를 사전에 막고 예방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랬으면 좋겠죠. 실제로 그런 쪽으로 제도나 시스템이 발달해나가는 것은 좋을 일이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도 아니고 언제 어디서 누가 누구에게 어떻게 범죄가 발생할지 예상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계획범죄이든 우발적 범죄이든 말이죠. 계회범죄라고 해봐야 계획이 새어나가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이고, 우발적 범죄는 글자 그대로 우발적 범행이니 어떻게 할 수가 없죠.


이런 범죄의 발생 자체를 완벽하게 막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미 발생한 범죄에 대해 국가든 뭐든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이미 범죄가 발생했으니까요. 이미 범죄자에 의해 인권이 침해됐습니다. 이는 범죄자에 의한 인권의 침해이고 국가나 정부에 의한 인권의 침해가 아닙니다. 애초에 막을 수조차 없는 일을 막지 못했다고 피해자의 인권은 인권도 아니냐고 하는 것은 그저 비난을 위한 비난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죠.


피해자에게는 애석하지만, 이미 발생한 범죄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으니 그에 따른 사후조치 밖에 할 수 없습니다. 피해자에 대한 어떠한 사후조치가 있는 지 정확히 알지는 못하지만, 일반적인 경우 피해자의 신변에 대한 비밀을 보장하는 것 정도는 하는 게 정상입니다.


만약 그러한 비밀을 지키지 못하고, 사건 조사 과정에서 어떠한 인권침해가 있었다면 그건 국가나 정부가 인권을 침해한 것이 맞습니다.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당연히 그 문제에 대한 책임과 보상의 주체는 정부가 되어야 하죠.



범죄자는 인권의 보호를 받으며 처벌을 받습니다. 이건 좆같더라도 어쩔 수 없는 거에요. 그가 죽기를 바랄 순 있고 비난하고 저주할 수는 있어도 그것이 일정 이상, 혹은 물리적인 차원에서 행사되면 그것 또한 범죄입니다. 범죄자에 대한 범죄는 정의가 아니에요. 하여간, 그러한 범죄자는 고문 받지 아니하며 강요받지 아니하고 그 외의 비인도적, 비인간적 대우와 차별을 받지 않으며 절차대로 일이 이루어집니다.


검사에 의해 기소되고, 판사에 의해 형이 확정이 나고, 실제로 교도소에 수감이 되는 모든 과정은 인권의 보호를 받지요. 고작 몇년 살다 나온다고 가볍게 여기는 사람이 많은 데, 실제로 생각해보면 꼭 그렇지 많도 않습니다.


무엇보다 범죄자 교도의 1차적 목적은 사회와의 격리이며, 2차적 목적은 교화 및 갱생에 있거든요. 이건 제가 예전 글부터 꾸준히 설명해왔던 부분이죠. 언젠가 범죄자는 다시 사회에 나옵니다. 모든 범죄자를 죽이거나 모든 범죄자를 영원히 가두자고요? 그럼 단순 폭력이나 좀도둑질을 하다 몇 개월에서 1년 정도 갇힐 정도의 범죄 또한 평생 가둬놓거나 죽이자는 것에도 동의하는 겁니다. 이건 너무하죠. 그렇기 때문에 언젠가 다시 나올 범죄자는 다시 사회화가 되어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인간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다시 사회로 나왔는 데 또 다시 범죄를 저지른다면 그것은 단지 범죄의 발생을 미뤄두게 만든 것일 뿐이죠. 그렇기 때문에 범죄자의 교화, 갱생이 중요한 겁니다.



그리고 법률에서 정한, 그리고 판사가 내리는 형량은 첫번째로 법률, 두번째는 죄의 질, 세번째는 교화 및 갱생에 필요하다 판단되는 기간, 네번째는 반성여부 등을 따져서 확정을 내리는 거죠. 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는 법률을 무시하고 그 이상의 징역을 선고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죄의 질이 낮다면 1년 정도, 혹은 그보다 낮은 수준의 선고를 내릴 수 있지만 죄의 질이 너무 심각하면 정해진 형량의 한계까지 선고할 수 있죠.


그렇기 몇 년 정도 수감이 된다면 그 기간 동안 할 수 있는 건 거의 없습니다. 사회활동도 못하고 원하는 일도 못하게 되죠. 당장 자기 집에서 나와서 어떤 특정한 작은 공간에서 누군가에게 관리, 감시 당하면서 자기와 비슷한 여러명과 어울려서 살며 입고 싶은 옷, 보고 싶은 TV, 하고 싶은 게임이나 인터넷, 먹고 싶은 음식 못 먹고 정해진 대로, 허용해준 만큼만 하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보세요.


이게 행복할까요? 5년 동안 수감되면 5년 동안의 시간은 사회의 기준에선 거의 버려진 것과 마찬가지일 수 있어요. 흔히들 그러잖아요. 군대 2년 동안 낭비하고 온다고. 그만큼 남들보다 늦어지는 겁니다. 물론 그렇게 늦어진 결과 다시 범죄로 빠지지 않게 직업교육을 시켜주거나 하지만요.


또 범죄경력이 있는 사람을 채용하려는 기업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공장 등 낮은 수준의 직장만을 가질 수 밖에 없죠. 범죄경력이 있다며 다른 사람에게도 기피당하고 말입니다. 연애나 결혼이야 뭐..


이런 점을 무시하고 몇년 동안 세금으로 옷 입고 밥 먹고 잘 먹고 잘 살다 온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좋은 감옥 자기도 가지 그러십니까. 라고 말해주고 싶더군요. 감옥은 그렇게 유쾌한 곳이 못 됍니다. 당신이 소말리아 출신의 해적이 아니라면 말이죠.



다시 말하지만, 피해자의 인권의 지켜집니다. 애초에 이미 발생한 범죄에 의해 인권이 침해 당했는 데 국가가 할 수 있는 건 없어요. 그 이상의 침해를 방지해주는 것 뿐이죠. 그렇다고 해서 모든 발생할 범죄를 사건에 방지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 정부가 피해자의 인권을 무시하느냐, 피해자 인권은 인권도 아니냐는 말은 아예 맞는 말이 아닌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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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의 사유화, 손실의 사회화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이익을 볼 때는 소수만이 그 이익을 독식하지만, 손실이 발생했을 때는 어떻게든 그 손실을 타인과 공유하려는 것을 설명합니다.


우리나라의 경유 그런 집단이야 많지만 가장 대중적이고 대표적이라면 역시 기업들이죠. 임직원이라는 말은 임원과 직업을 합친 단어로, 임원은 회사를 경영하고 집단을 운영하는 관리자들입니다. 이들은 당연히 책임자의 입장인데, 직급이 높아질수록 급여가 높아지는 것은 짊어지는 책임이 그만큼 막중해지기 때문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그만한 책임을 질 만한 능력이 있는 사람이기에 높은 연봉을 받는 것이고요.


우리는 간혹 경영난에 허덕이는 기업들을 볼 수 있는데, 돈을 많이 벌지 못하거나 투자를 적게 받아서 직원들의 월급을 챙겨주기도 힘든 회사들이 있어요. 문제는 이런 회사의 경우 직원들 월급을 때먹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는 겁니다. 법으로 보장된 최저임금을 비롯한 각종 수당을 부담하는 것이 힘든 회사는, 그냥 망하는게 맞습니다.


괜히 직원들 월급 때가면서 부려먹을게 아니라, 이제 사업을 접을 때라는 겁니다. 반드시 지출해야만 하는 항목조차도 견디지 못할 정도로 수익성이 떨어지면 질질 끌고가면서 여러사람 괴롭힐게 아니에요. 직원들의 생계와 시간, 노동력을 착취하지 말고 그만 접어야 할 것이지, 고통분담이니 하는 웃기지도 않을 헛소리 내뱉으면서 부려먹으며 착취해서는 안 됩니다.



근데 어디나라나 그런 이들이 있지만, 특히 우리나라는 그런 풍조를 너무 당연히 여겨요. 회사가 어려우면 직원들이 조금 희생할 수 있다는 풍조. 지랄하지 말라 그러세요. 주는 것도 없는데 받을 건 다 받자고요? 받은 것도 없는데 달라고 하면 줄껍니까?


최저임금 다 지키면 어떻게 회사를 운영하냐, 야근, 특근수당 다 주면 회사 망한다 같은 소리. 잘 아는 겁니다. 최저임금을 않줘서 운영될 회사면 망하는게 맞고, 야근, 특근수당 못 줘서 망할 회사면 망하는게 맞아요. 괜히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주면서 질질 끌고갈게 아니라. 사업성, 수익성 없는 짓을 여러사람 민폐주면서 끌고가는 겁니다 그거.


회사가 잘 될 때 돈을 더 주는 것도 아닌 주제에 직원에게만 희생을 강요하는 꼴입니다. 최저임금, 야근수당, 특근수당 등등 이런거 못 주는 회사는 그냥 망하는 게 맞아요. 운영할 돈도, 능력도 없는데 여러 사람 괴롭히는 겁니다.



그렇게 직원들 착취하면서 되잖은 이익을 보고, 회사 힘든건 직원들이랑 고통을 분담시킵니다. 아주 개새끼들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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