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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며,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 - E.Kant
by Ko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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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당'에 해당되는 글 6건

  1. 2023.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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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22.12.11
    힘으로 빼앗아, 도리로 다스려라.
  3. 2022.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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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22.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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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찰 갑질 미국 정치인. 원칙이 지켜지는 사회.
  6. 2016.12.03
    극우보수의 사상적 근간. 마초 오르가즘.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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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극단적일수록 타협할 수 없다.

 

***

 

1.

중도에 가까운 입장은 이념적인 색깔이 적다는 것이 장점이자 단점이 된다. 어떠한 쟁점에 대해 필요한 강력한 주관과 추진력을 얻기보다 더 많은 의견을 취합하거나, 어중간한 결정을 내놓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만큼 많은 이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는 근거가 되지만, 그만큼 극단적인 지지층은 잃을 것이고, 그 결정들이 어중간할수록 필요한 조치를 필요한만큼 강력하게 실행하기 어렵게 된다.

 

그러나 이들은 양 진영의 중간에 가까운 입장에 있기 때문에 어느 쪽으로든 타협의 여지가 있고 대화가 가능하다는 매력이 있다.

 

 

2.

전 세계가 그러하듯, 한국 역시 점차 극단주의적 대립이 강해지고 있다. 이에 대해 이견이 있을 사람도 있겠지만 최소한 본인은 그렇게 생각한다. 그리고 이 극단주의적 대립의 골은 점점 깊어지고 있기 때문에 중도는 줄어들고 양 극단의 비중은 늘어나고 있다. 이는 그만큼 양 진영간의 대화와 협상, 타협의 여지가 줄어드는 것을 의미한다.

 

민주주의에서 그러한 요소들은 핵심적인 것들이고, 핵심적 요소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건 민주주의가 성공적으로 작동하기 어려워짐을 의미한다. 양 극단은 성장하는 몸집만큼 결코 소수라고 하기 어려워지겠지만 간극만큼이나 입장의 차이가 클 수밖에 없고, 정치적 승리자는 당연히 자기 진영의 입장을 더욱 대변할 것이다.

 

또한 중도적인 정책이나 제도는 그 누구도, 최소한 양 극단의 다수는 바라지 않을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정치적 승리자는 특정 진영에 더 많은 입장을 대변할 것이고 그들의 이익에 더 충실할 것이며, 그러한 것을 통해 정치적 이익과 생존력을 담보할 것이다. 이는 정치 정당과 정권의 의사와 무관하게 지지자들의 요구에 따라 상대 진영에 대한 공격과 말살을 시도하게 할 수도 있다. 그것이 지지자들이 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3.

이는 서로 다른 양 극단의 진영관계 뿐 아니라 하나의 정당 내부에서도 발생할 수 있는 일이다. 한 집단이 모든 것에 대해 공통된 단일한 의사를 공유할 리는 만무하다. 즉, 한 집단 내에서도 진보파와 중도, 보수파는 분리되고, 온건파와 관망파, 과격파는 구분된다. 지지자들이 상대 진영에 대한 강력한 공격과 정도를 벗어난 말살을 요구한다면 온건파는 그것을 거부하려할 것이다. 그리고 과격파는 더 극단적인 수사와 행동력으로 지지자들의 요구를 실행하려 하거나 그러한 의사를 보여줄 것이다.

 

이는 과격파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고 극단주의적 대립이 강해지는 시대에 과격파의 승률은 결코 낮지 않다. 지금 당장 낮다면, 앞으로도 그러긴 어려울 것이다.

 

 

4.

그렇다면 현실에서, 극단주의적 대립의 결과로, 그리고 과격파의 승리로 인해 정치 권력을 장악한 정권과 정당이 상대 집단에 대한 심대한 피해를 입히고자 할 것이다. 핵심 정치인들을 법과 언론을 동원하여 탈락시키고 정치적 생명을 위태롭게 하며, 정치인과 그들의 가족을 공격하며 불리한 싸움으로 몰고갈 것이다. 정당의 동력은 정책과 정치적 경쟁이 아닌 생존을 위해 사용될 것이고, 지지자들은 지속적인 공격에 결집되거나 와해될 것이다.

 

그러한 시도들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면 공격을 받은 정당은 매우 큰 피해를 입고 정치적 힘이 약화될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극단주의적 대립 상황이 완화되지 않는 한 그러한 시도를 더 강력하게 할 사람이 권력을 차지할 가능성이 높다.

 

 

5.

민주주의에서 대립은 민의에 따른 정치적 행동으로 발생한다. 즉, 투표와 시위, 시민적 요구로 이루어지고, 싱크탱크 및 전문가, 대학 등의 연구와 요구 역시 존재한다.

 

그러나 이러한 민의가 양 극단으로 분리가 된다면 서로간의 타협의 여지는 적고, 이해의 폭이 줄어들수록 상대방에 대한 공격으로만 동력이 작동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민의는 더 극단적이고 강력한 공격성을 가진 이를 대표로 뽑을 것이다. 상대 정당과 진영, 혹은 이민자, 자국의 이익과 산업에 손해를 끼치는 불공적한 외국에 대해서도 그럴 것이다.

 

이는 정치적 내전 상황으로 이어질 것이다.

 

이게 문제가 되는 이유는, 민주주의에서, 그것도 21세기 현대 사회에서 물리적 대립이 실제로 발생할 가능성이 매우 낮다는 것이다. 최소한 한국은 그렇다. 미국에서조차 총으로 무장한 이들이 의회를 점령하는 파격적인 사태가 벌어졌지만 그것이 실제 대규모 물리적 충돌로 이어지진 않았다. 한국에선 총이 없고, 그러한 행동력을 지닌 이들이 매우 적어졌다.

 

한국에서 시민들의 모든 정치적 요구는 폭력이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거세된 평화 시위로 완성되었다. 따라서 이들은 거리에 나와 촛불을 들지언정 쇠파이프와 차량을 동원하여 청와대로 밀고 가거나, 그들에 맞서 빨갱이 폭도, 혹은 수꼴 반역자를 상대로 똑같이 무장한 채 집단 패싸움을 하는 상황은 상상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특정 진영이 보기에 제정신이 아닌 미쳐돌아가는 정부를 단죄하기 위해 혁명을 한다는 것조차 어렵다. 한국의 민주주의와 국가체제는 꽤 굳어진 편이고, 이전처럼 쿠데타와 민주주의 운동, 운동권 투쟁이 활발하던 뜨거운 수프 같았던 시기와는 다르게 되었다. 그렇게 굳어진 체제는 쉽게 변하지 않고, 그러한 틀에서 벗어나지 않으려는 보수성 역시 존재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혁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그러한 혁명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리고 세력이 동참하는가이다. 극단화된 사회에서 시민 90%가 혁명에 동참할 리는 만무하고, 40~50%의 국민이, 현실적으로는 그보다 더 적은 국민이 혁명하겠다고 나선다 해도 군과 경찰이 동원되어 내란, 국가 반역으로 규정될 혁명세력에 대한 물리적 진압이 예상된다.

 

지금의 감시, 통제 시스템과 그것을 집행할 무력은 그 정확성과 강력함에서 독재 시기와 비교도 할 수 없다. 따라서 현재로선 혁명은 불가능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것에 동의할 사람들이 많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지만 그만한 힘이 국가 내부를 쓸어버리기도 어렵다. 그 여파를 감당하기도 매우 어렵다. 외국 세력은 이를 커다란 기회로 여길 것이다.

 

 

6.

그런 이유로 혁명이든 내전이든 실질적 충돌로 이어지는 상황은 발생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당연히 민주주의적 제도로 대립하게 될 것인데, 여당정부의 강력한 정치 권력과 엘리트 카르텔로 완성되는 강력하고도 견고한 기득권의 힘은 특정 정치 세력에 대한 강력한 공격과 보복이 가능할 것이고, 비협조와 반발로 다른 진영에 선 정권의 권력 사용에 부담과 비용을 발생시킬 것이다.

 

이러한 작용으로 상대 진영은 그 힘을 잃어버릴 것이고 그들에 대한 압도적 우위를 차지한 이들은 최소한 단기적으로는 그들이 다시 성장하거나 일어서지 못하게끔 할 것이다. 설령 그들이 다음 대선 때 패배한다 하여도 엘리트 카르텔로 대표되는 각계 각층의 인적 관계망은 건재할 것이고, 총선 때 어지간히 박살나서 인원수부터 약 3배, 혹은 그 이상 차이날 정도의 대패를 겪지 않는 한 의회 권력 역시 조정될지언정 잃지 않을 것이다.

 

그런 상황이 온다 해도 공격을 받은 진영과 정당의 지지자들은 매우 큰 불만과 반발감을 가질 것이다. 마찬가지로 무력감과 절망감으로 정치적 무관심으로 빠질 가능성도 높다.

 

극단주의는 승리했고, 극단주의적 인사가 국민의 대표들도 채워질 것이다. 정당 역시 그러한 성향의 과격한 이들이 헤게모니를 장악할 것이다. 한번 실패 했다고 그러한 영향력이 말소되거나 사라지지도 않을 것이다. 독재 이후 보수당처럼 ,트럼프의 공화당처럼.

 

 

7.

극단적일수록 타협의 폭은 적다. 따라서 극단주의자들이 승리한 미래는 어떠한 쪽이 이기든 상대방에게, 심지어 중도층에게도 긍정적일 순 없다. 승리한 자들은 반대파를 위험분자 내지는 적으로 규정하며 공격할 것이고 그들이 권력을 쥐어서는 안 된다고 믿을 것이다. 나치는 나치가 아닌 정치세력을 견제했다. 가장 큰 적을 당연 유대인과 공산주의자였으며, 더 나아가 슬라브 전체가 되기도 했다. 김일성은 자신의 파벌이 아닌 대부분의 파벌을 숙청하는데 성공했고 이는 스탈린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폭력적이진 않을 것이다. 예전처럼 납치와 고문, 살해와 암매장, 불법 화장이 벌어지진 않을 것이다. 불공정하지만 합법적으로 보일 방식과 제도적인 수단을 동원하여 그들의 정치적 힘과 동력을 잃게할 것이다. 대표할 사람이 없다면 지지자들은 힘을 잃는다. 그들 중 총대를 매는 사람들은 나오겠지만 기존 정치인에 비해 경력, 실력, 경험이 부족할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그들은 약해져갈 것이며 승리한 쪽이 사회를 장악할 것이다. 지지율로 대표될 것이며 정치적 권력을 장악하고 그러한 상황을 꾸준히 이어가려 할 것이다. 우월한 지위와 이익구조를 최대한 오랫동안 유지하고자 하는 건 모든 이들이 바라는 바이며, 엘리트 카르텔과 같은 인적 관계망 역시 그러한 욕구와 이해관계로 구성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반대되는 목소리, 다른 목소리들은 극단주의의 야성 아래 말살될 것이고, 이는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음을 말한다. 헌법은 민주주의를 규정하고, 법과 제도 역시 민주주의적 원리 아래 작성되었지만 실제 민주성은 약해지고 집권 세력의 이익을 위해서 동작할 가능성이 높다.

 

물론 그러한 제도들이 민주주의와 거리가 멀고 대중, 시민과 유리되어간다는 점은 꾸준히 비판될 것이지만, 그러한 목소리는 너무 약하고, 그렇지 않다해도 집권층이 그러한 요구에 부응해줄 이유가 없다. 그렇게 간신히 도달한 제도적 민주주의는 그마저도 형해화되어 실질적 파시즘 국가와 유사한 형태가 될 것이다.

 

아마 그 모습은 중국와 일본을 섞어놓은 형태일 가능성이 높다. 적어도 한국에선 말이다.

 

 

8.

극단주의적 요구는 다양한 목소리와 관점을 묵살시킨다. 언젠가 말했듯, 극단주의는 좁은 시야를 가지고 그 외의 것을 배척하기 때문에 자신이 아는 것과 자신이 설명하는 세상의 바깥을 상상하지 못하고, 거부한다. 단지 거부하는 걸 넘어 틀렸다 규정하며 공격적으로 반응한다. 이는 극단주의의 속성이 공격적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신들의 세계관에 대한 공격으로 여겨지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들은 그러한 침범을 용납하지 않는다.

 

한국의 정치사회적 환경은 극단주의적 대립으로 심화되고 있다. 그리고 이는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어느 한쪽이 온건하고 더 이성적이라 해도 다른 한쪽이 그렇지 않다면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유의미한 효과를 보기 어렵다.

 

이는 아주 간단한 이유 때문인데, 경기에 있어서 룰은 필수적이지만 그것을 어느 한쪽만 지키고 다른 한쪽이 지키지 않는다면 경기가 성립되지 않는다. 그리고 룰은 단순히 법률이나 제도가 아니라, 그것을 다루는 사람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시민들이 극단주의적 요구를 하면 그것에 부응하는 이들이 나오기 마련이다. 정치인들은 그들의 지지에 편승하여 권력을 확보할 것이고, 관료와 엘리트 역시 더 많은 부와 명예, 권력을 얻기 위해 그러한 조류에 동승할 것이다. 때로는 그들 스스로가 그러한 분위기를 심화시키고 조장할 수도 있다. 아예 그들 자신이 극단주의적 관점에 동의하거나, 사회의 요구보다 더 극단적인 경우도 있을 것이다.

 

 

9.

문제는 이를 해결할 방법이 마땅치 않다는 것이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본인은 해결할 방법이나 완화시킬 방법 같은 건 없다고 본다. 유일하게 떠오를만한 것은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상태를 먼저 조성하는 것 뿐이다. 풍요로운 환경에서 생존에 대한 욕구는 대단히 낮아진다. 더 많은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더 치열하고 잔혹할 필요가 없으니 말이다.

 

정치적 대립이란 정치 권력이란 한정된 자원을 얻기 위한 것이고 이념 대립 역시 결과적으로 그들이 믿는, 더 나은 상태를 만들기 위한 관점의 대립이다. 일자리, 산업, 노동환경 등 소위 말하는 먹고 살기 좋은 상태를 만들기 위한 것이다. 즉, 어떤 것이 더 좋은 상태를 만들 수 있느냐의 논쟁이자 대립이다. 케인즈의 주장이 더 좋은 상태를 만들었던 때가 있고, 그 한계로 인해 밀턴 프리드먼의 신자유주의가 등장하며 그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던 시절이 있었다.

 

가능하냐 불가능하냐를 떠나, 아주 단순하게, 정말 단순하게 가정했을 때 대한민국의 거의 대부분의 국민이 지금과 별 차이 없는 물가 상태에서 지금 연봉의 2배를 받는다면 극단적 정치대립은 상당히 완화될 것을 기대할 수 있다. 어떤 것이 더 좋은 상태를 만들 수 있느냐, 누가 나라를 더 많이 망치고 더 많이 망칠 더 나쁜 놈이냐를 두고 목숨 걸고 싸울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당장 먹고 살기 어렵지 않고 아마 앞으로도 오랫동안 그럴텐데 그런 것에 온 힘을 다해 싸울 이유가 무엇이 있느냐는 것이다. 생존은 보장되었다. 남의 것을 빼앗을 이유도 없고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해 더 치열하게 싸울 이유도 없어졌다.

 

그러나 그렇지 않기에, 한국을 비롯한 유사한 경제적, 인구적, 사회구조적 문제를 안고 있는 전 세계 대부분의 국가들은 비슷한 문제와 비슷한 현상을 겪고 있다.

 

그리고 말했듯이,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현실적으로 없다. 그저 더 심화되어 임계점을 넘는 것을 눈뜨고 기다릴 수밖에 없다.

 

그것은 내전이 될지, 전쟁이 될지, 승자의 정치적 말살을 통한 파시즘적 정부의 구성 및 사회의 재편이 될지 모를 일이다.

 

놀랍게도, 그리고 불행하게도, 또한 끔찍하게도, 그나마 가장 나은 건, 전쟁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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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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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취순수逆取順守. 
그른 짓으로 천하를 빼앗아, 바른 도리로 지키는 것.

-사기史記

 

상나라의 탕왕과 주나라의 무왕은 본래의 임금을 몰아내고 상과 주를 건국했다. 조선의 태조는 전조 고려의 명을 받고 요동을 공격하러 갔으나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역으로 고려의 우왕에게서 나라를 빼았았다. 탕왕과 무왕은 걸주라 불렸던 걸왕과 주왕을 몰아내어 도를 바로 세웠고 이성계 역시 난세에 무리한 전쟁을 벌이려는 우왕에게 칼을 돌렸다.

 

이것은 나라를 멸하여 기존의 질서를 뒤집어 부당하게 정권을 획득한 것이고, 천하를 찬탈한 것과 다름이 없다.

 

그러나 이들은 인의의 정치를 펼쳐 나라를 지켰고 기존 정치의 고약함을 바로잡았다. 또한 자신은 이신벌군의 역을 행했음에도 남들에겐 불사이군의 충절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들의 정치는 인의의 정치였고, 도리로 다스렸기에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피렌체 공화국의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The end justifies the means)고 말했다. 그는 목적을 달성할 수만 있다면 과정의 부정함이야 충분히 덮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실제로 전혀 틀린 말은 아니다. 수많은 이들이 부정한 방식으로 성공만 하면 얻을 것이 더 크다는 계산하에 부정한 방식을 사용한다.

 

합리적으로 생각했을 때, 약간의 비도덕적 행위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 그것을 지켰을 때보다 더 많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이익이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하는 이들은 적지 않다. 그러한 이들이 도덕적 선택보다 이익을 더 추구할수록, 그 정도가 더 심할수록 그 사회는 비도덕적 사회가 될 것이다.

 

 

그러나 정말 마키아벨리의 어록이 맞는 말일까? 난 그것이 일차원적인 명제라고 생각한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고 했지만, 목적이 달라지면 수단 역시 달라지는 법이고, 목적을 정당화하기 위해 수많은 성과와 업적을 탐하려 한다.

 

걸주를 몰아낸 왕들은 인의의 도리를 세우는 것으로 목적을 정당화했다. 그들의 목적이 순수하게 폭군을 몰아내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선하고 아름다운 의지의 발로라고 할 수 있을까? 통치의 정당성을 위해 그들은 업적을 필요로 했고, 이건 어떤 시대든 다를 게 없었다.

 

제3공화국의 박정희는 독재의 정당성을 위해 성과와 업적을 필요로 했고, 제4공화국의 전두환 역시 그러했다. 국풍81은 그러한 맥락에서 연출된 행사였다는 걸 생각해보자.

 

"통치자가 최고의 목표를 달성하고자 한다면 도덕적인 것이 항상 합리적이지 않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군주가 국가를 유지하려 한다면 때로는 어쩔 수 없이 진실과 자비, 인간애와 종교에 반하여 행동할 필요가 있다."

-니콜로 마키아벨리.

 

마키아벨리에게 도덕과 정치는 분리되는 것이었고, 역취순수는 그 둘을 분리될 수 있는 것이되, 필수불가분의 관계로 바라본다.

 

승리는 많은 것을 가져다준다. 그리고 승리하기 위해 다소간의 비도덕적 행위는 용납될 수 있는 것이다. 소열제 유비는 작은 선이라 하여 아니 행하지 말 것이며, 작은 악이라 하여 행하지 말라 하였지만, 그 역시 유장을 배신하고 서촉 땅을 얻어냈다. 인의의 유비라지만 배신을 통해 거대한 이익을 얻어낸 것이다.

 

반대로 조조는 서주에서 대학살을 벌였고 평생토록 약점이 되었다. 서주 사람들은 조조를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겼고, 제갈량 역시 조조의 대학살 때문에 결국 유비에게 갔다는 해석도 있다. 조조가 중원을 통일하고 도리로 다스리려 한들 서주 사람들은 받아들이려 했을까? 어쩌면 그랬을 수도 있다. 하지만 끝까지 반란의 근거지가 되었을 수도 있다.

 

 

마키아벨리의 어록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어떤 행위도 해도 할 수 있음을 말하지만, 실제로 목적은 달라진다. 얻기 위함과 그것을 취한 뒤 지키는 것은 서로 다르지 않은가. 얻고자 한다면 후과를 생각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지키고자 한다면 과정은 두고두고 자신의 약점이 될 것이다. 박정희와 전두환의 쿠데타는 민주적 정통성이 부족하기에 정권 내내 민주화 운동이라는 반발을 맞이해야 했듯이.

 

물론 그들이 도리로 다스렸느냐 하면 절대 아니라고 할 수 있다는 점 역시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한국은 어떠할까? 이명박, 박근혜 정권은 대선과 이후에도 불법적인 방식으로 유리함을 획득했고 그 결과 정권을 얻었고 그것을 지켜내는게 사용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내에서 역취逆取했다고 하나 순수順守했다면 어땠을지 몰라도, 그들은 여전히 국민들을 분열시키고 국민이 아닌 엘리트 카르텔과 거대자본에 친화적인 정치를 했다.

 

그리고 그저 운 나쁘게, 그러나 충분히 당연한 이유로 박근혜 정권은 탄핵이라는 결과로 돌아왔고 이명박 역시 감옥에 가게 됐다. 누군가는 그들의 정치를 올바르다 말할 것이고 정당하고 훌륭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 체제, 혹은 이념 내에서 이득을 보거나 그 이념에 동의하는 이들이기 때문이고 그렇지 않은 자들은 객관적으로 그들이 왜 틀렸는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그들은 법을 어겼고, 사적으로 공적자금과 권력을 유린했다. 결정적으로, 그것을 들켰다.

 

 

윤석열은 민주화 이후 가장 특이한 케이스로 꼽힐 것이다. 삼당합당의 김영삼이나 역전극의 노무현, 탄핵 수혜의 문재인의 케이스가 있을 수 있겠지만, 윤석열의 케이스와는 차별될 수밖에 없다.

 

먼저, 앞선 이들은 모두 정치인이었다. 정치활동을 했고 공과는 있겠지만 모두 걸출한 내력을 가지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정치인으로서 그들의 활동은 지지와 불호의 충분한 근거가 될 수 있고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역시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윤석열은 그렇지 않다. 검찰총장을 했다 바로 대선에 나왔다. 그리고 불가사의하게 당선되었다. 그가 대통령이 될 정도의 무엇을 했기 때문이 아니고, 그가 무언가를 매우 잘했기 때문이 아니며, 통치나 외교를 잘 할 것이라는 기대를 받은 것도 아니다. 그저 문재인과 이재명이 싫었기 때문이고 그들을 잡아넣길 바라는 일차원적이고 악의에 찬 기대 하나 때문이었다.

 

심지어 지지한 자들 역시도 윤석열에 거는 기대는 딱 그 뿐이었고 정치나 외교에 있어 특출난 능력을 발휘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온 말이 어차피 대통령은 가만히 있고 전문가에게 맡기면 된다는 허황된 망상이었다. 지금 그러고 있는가?

 

 

윤석열은 정치인이 아니고, 대통령으로서의 자각 역시 부족하다. 그는 자신이 뭘 하고 있는지 모르고 뭘 해야하는지 모르고 있다. 그냥 주어지는 것에 원래 하던데로 자기반응을 보여주고 있다. 습관적인 태도와 움직임일 뿐이지 기본적인 것조차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대통령 직위에 있는 것이다.

 

그의 주변인은 그런 뭘 모르는 대통령 옆에서 최대한의 이익을 추구하고 있다. 천공을 대통령을 조종하고 있고 김건희는 자신의 과거를 덮을 품위 있고 고귀한 이미지를 만들어 명예를 창작하고 있다. 장제원 같은 이들이나 대통령실 직원들 역시 대통령을 등에 업고 자신의 권력에 취해 있으며, 그 권력을 이용해 이익을 추구하고 있다. 당연히 그들은 자리에 어울리는 능력과 품위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역취순수를 하려는 것은 한동훈 장관인데, 계속해서 실패하고 있다는 점이 특기할만하다. 윤석열은 여전히 정치인이라고 하기 어렵고, 그나마 정치적 감각이 있는 한동훈은 성과를 내려고 노력하고 있다. 얻는 건 별로 없었지만 미국에도 가봤고 이민청을 만들거나 마약수사를 통해 공을 얻어내려고도 했다.

 

 

이태원 참사는 마약수사라는 거대한 쇼를 통해 커다란 업적을 만들어내려는 한동훈 장관의 계획이었을 것이다. 그는 부정하지만, 정황이 말해주는 현실은 다르다. 수많은 마약 사범을 현장에서 잡아내고, 스스로 그 현장에 나타나 미리 정보를 전달하여 대기시킨 기자들 앞에서 진두지휘하는 차기 대통령 후보이자 명실상부 소통령의 카리스마를 연출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계획은 이전까진 했지만, 그들은 하지 않았던 조치로 인해 무산되고 말았다. 경찰이 본래 해야했던 일을 하지 않고, 권력자의 명령대로 지시받은 임무를 하면서 참사는 시작됐다. 경찰이 현장에서 지시하고 통제해야했던 일을 하지 않았기에 사람들은 좁은 골목에서 압사된 것이다.

 

 

윤석열 정권은 많은 면에서 공격받고 있다. 30%의 콘크리트 좀비들은 신실한 신앙의 발로로 무제한적 지지를 보내오고 엘리트 카르텔은 한 식구로서 그들에게 도전하지 않으며(애초에 한 몸이기에 그것은 자해일 것이다.) 언론은 그들과 야합하며 어떻게든 윤석열 정권에 부역하는 애완동물 역할에 충실하지만 너무나도 한심한 정치와 언행은 비판을 스스로 만들어주는 꼴이고, 비전과 미래는커녕 아무 것도 없이 그저 반문, 반이재명, 반민주당만으로 당선된 정권답게 민주적 정당성은 그저 선거에서 이겼다는 절차적 요소 하나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석열 정권은, 정확히 윤석열 대통령 본인은 그것을 반전시키려 노력하지 않는다. 어차피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공을 세워 통치의 정당성을 형성하려 하지도 않고 국민적 지지를 받기 위해 성과를 보일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대통령 자리에서 내려오거나 검찰이 칼날을 자신에게 돌려 수사하겠다고 하지 않을 걸 알기 때문이다.

 

또한 보수진영의 정체성을 지닌 사람답게 약자의 반발은 도전으로 인식하고 용납하지 않는다. 이번 화물연대의 파업을 다룬 대통령의 입장과 태도는 그저 밟아놓을 건방진 것들이었다.

 

공약했던 것들을 지키지 않고 작은 정부를 주창하며 복지와 지원을 줄이고 있으며 특히 2030에게 각별한 지지를 받았던 이준석은 내쳐졌다. 이준석의 역할은 그저 2030 보수들을 결집시킬 도구에 불과했고, 2030 이준석 지지자들은 이준석의 이미지에 이입하여 정신적 자위를 했을 뿐이다. 그의 역할이 다했을 때 윤석열 정권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거나 비판적으로 돌아온 이들이 얼마였을까.

 

 

혐오와 반대만으로 지지를 받았고 정권을 얻었다. 어떤 성과나 능력을 보여준 게 아니다. 증명된 적도 없고, 당선 이후로 무능만 증명되고 있다. 박정희와 전두환의 역취는 명백히 민주주의 그 자체에 대한 부정이었다. 그들은 독재를 실시했고 정당성 없는 정권이기에 국민들에게 도전받았다. 박정희는 김재규에 의해 암살 되었지만 전두환은 수단이 목적을 정당화하지 못한 결과 6월 혁명으로 돌아왔다.

 

현대 민주주의는 쿠데타와 같은 방식으로 찬탈되지 않는다. 대신 민주적 방식으로 그것을 찬탈한다. 제도적으로 가능하지만, 그것의 목적이 민주성을 줄이거나, 아예 민주적 규범을 파괴하는 제도를 합법적으로 만든다. 제도와 권한 내에서 특정 정당이나 정권이 유리하게 환경을 조성하고 인물을 임명시킬 수 있다. 원래 있었던 절차를 없애거나 줄이거나 새로 만들 수도 있다.

 

미 공화당이 새로운 민주당 주지사의 권한을 빼앗기 위해 주지사 임명을 인준하는 권한을 스스로에게 부여하고, 현직 공화당 주지사에게 임시직을 영구직으로 전환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으며, 주 선거위원회를 개편하여 선거구 조정, 유권자 등록, 신분확인 요건, 투표 시간과 투표소 배치 등 주 선거의 모든 규칙을 담당하게 만들었고, 당시 선거 위원회는 공화당이 과반을 차지하는 데 기여한 현직 공화당 주지사였던 매크로리가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주어진 권한은 모두 합법적이었고, 제도적 틀 안에서 이루어졌지만 정치 경쟁자를 최대한 불구로 만들기 위한 것들이었으며, 그것이 대중의 일반의지라고 할 수도 없었다. 국가와 사회의 진보를 목적으로 한 것도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것은 민주적이지 않았다. 소수의 정치집단이 권력을 얻고 유지하며, 경쟁자에게선 그렇지 못하도록 한 수작이었을 뿐이다.

 

 

윤석열이 당선된 이유가 혐오와 반대, 엘리트와 언론들의 절대적 조력이라는, 현대 민주주의에 대한 반민주적인 방법론 내지는 수단이었기에 이를 역취逆取라 한다면, 현 정권은 순수順守하고 있는가? 성과를 내는 것도 아니고, 어떤 업적을 쌓고 있지도 않는다. 정치 경쟁자를 몰락시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고, 국가적 이익과 안보 영역 역시도 희생하고 있다. 없는 죄를 만들려는 의혹을 받고 있고 검찰 권력에 도전한 이들을 본보기 삼아 잔혹하게 짓밟고 있으며 공과 사를 구분하지 않고 국정을 문란케 하고 있으며, 유무능이 아닌 친분과 이익관계만으로 인선을 세우고 있다.

 

협상과 대화보다는 명령과 권위만으로 일을 처리하고자 하고 도전하는 모든 이들에 대한 무제한적이고 무자비한 보복을 감행하고 있으며, 화물연대와 같은 노조들이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망언을 하며 실천한다.

 

지지율 30%가 말해주는 바는 명확하다. 콘크리트 좀비들을 제외하면 국민의 절대다수가 윤석열 정권이 잘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고, 그의 방향성과 행위에 반대한다는 것이다.

 

 

제선왕은 탕왕이 걸왕을 몰아내고 무왕이 주를 정벌했다는 것을 두고 신하가 임금을 시해하는 것이 옳은가 물었다. 이에 대해 맹자는 인을 해치는 자는 남을 해치는 사람이고, 의를 해치는 자는 잔인한 사람이라고 했으니, 남을 해치고 잔인하게 구는 자는 인심을 잃어 고입된 자이기에 인심을 잃고 고립된 사람인 주를 처형했다는 말은 들었어도 군주를 시해했다는 말은 들은 적 없다 답했다.

 

맹자는 그렇게 역성혁명을 긍정했다.

 

그러나 윤석열이 탄핵당할 수 있나? 여전히 난 부정적이다. 그가 법을 어기고 그것이 증명되어야 가능하며, 그 이전에 국회에서 소추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럴 수 있을까? 박근혜-최순실의 사례는 윤석열 정권의 반면교사가 되어 구체적 범죄를 들키지 않으려 할 것이고 검찰은 검찰 공화국을 만들어준 윤석열에게 칼날을 휘두르지 않을 것이다. 엘리트 카르텔에서 검찰은, 그리고 검찰 출신 대통령의 위치와 역할은 결코 작지 않다.

 

국회는 어떠할 것인가? 소추가 가능할 것인가? 언론은 윤석열 정권의 흠결을 어떻게 마사지하고 사실을 공작해낼 것인가?

 

대한민국은 어찌됐든 법치로 작동하고, 법률에 근거하여야 한다. 그러나 그것을 집행하고 결정하는 것은 사람이다. 밝혀지지 않은 사실은 증거로 쓸 수 없고 윤석열 정권이 범죄를 저질러도 그것이 밝혀지지 않거나, 왜곡된다면 입증할 수 없다. 그들을 수사하는 것을 결정하는 것 역시 사람이고, 제도적 허점과 한계를 이용하여 수사를 막거나 방해할 수 있다. 수사관이 제대로 증거를 수집하지 않거나, 수집된 증거를 취사선택하여 제출한다면 법률적으로 범죄가 아니게끔 만들 수 있다. 재판 결과 무혐의나 무죄, 혹은 아주 작은 처벌만 선고될 것이다.

 

 

윤석열 정부가 역취순수하지 않는다하여 물리적으로, 법률적으로 윤 정부를 강제로 끌어내리는 것은 어렵다고 본다. 그러나 이러한 기조가 지속된다면 다음 선거 때 국민은 어떠한 선택을 내릴지 기대해볼 수는 있을 것이다. 물론, 그 국민이 윤석열 정권을 거부하는 것이지 민주당으로 대표되는 진보좌파를 긍정한다는 것을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확실한 건, 비도덕적 통치를 지속하는 사회는 망조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역사가 말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현재, 우리는 난세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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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민주주의는 길거리 농구가 아니다. 민주주의는 성문화된 규칙(헌법)과 심판(사법부)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오랫동안 건강하게 기능하는 국가의 경우, 성문화되지 않은 규범이 성문화된 헌법을 지속적으로 강화환다. 성문화되지 않은 규범이 민주주의를 보호하는 완충적인 가드레일로 기능하면서, 일상적인 정쟁이 전면전으로 치닫지 않도록 막아준다.

규범은 개인의 성향을 초월한 것이다. 규범은 정치 지도자 개인이 성향에 의존하지 않으며, 공동체 및 사회 내부에 널리 공유된, 다시 말해 모든 구성원이 인정하고, 존중하고, 강화하는 행동 규칙에서 비롯된다. 규범은 성문화되어 있지 않으므로 눈에 보이지 않는다. 특히 규범이 제대로 작동할 때에는 더욱 그렇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사람들은 규범의 필요성을 종종 간과한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다. 규범의 가치는 물과 산소처럼 그것이 사라질 때 비로소 드러난다. 규범이 강력한 힘을 발휘할 때 사람들은 폭력 행위를 비난하거나 조롱하고, 혹은 공식적인 비판이나 노골적인 배척을 통해 부정하는 입장을 뚜렷이 드러낸다. 규범을 어긴 정치인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

사실 성문화되지 않은 규범은 상원이나 선거인단 운영에서 대통령의 기자회권 방식에 이르기까지 정치 구석구석에 존재한다. 그래도 민주주의 수호에 가장 핵심 역할을 하는 두 가지 규범을 꼽자면 상호 관용과 제도적 자제를 들 수 있다.

(중략)

규범은 민주주의를 보호하는 연성 가드레일이다. 규범이 무너질 때 용인 가능한 정치 행동 범위는 넓어지고, 민주주의를 파멸로 몰아갈 주장과 행동이 시작된다. 예전에는 미국 정치에서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행동이 이제 고려해볼 만한 전술이 되고 있다. 물론 트럼프 자신이 헌법적 민주주의라는 강성 가드레일을 파괴한 것은 아니지만, 미래의 대통령이 언젠가 그러한 일을 할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레비츠키, 지블랫.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

 

얼마전 윤석열 정부는 민정수석실을 폐지하겠다는 방침을 발표했습니다.

 

수사·정보기능 틀어쥔 법무장관..명실상부 '소통령' 현실화
https://news.v.daum.net/v/20220524172612941

 

그리고 그렇게 민정수석실이 없어지고, 더 큰 권력과 권한을 가진 새로운 인사정보관리단이 만들어졌습니다. 청와대에 있던 민정수석실이 법무부 장관 직속으로 왔다고 해서 권한이 약해졌느냐 하면 그걸 아니고요. 중요한 건 그 권한이 얼마나 발휘되느냐와 누가 발휘하느냐가 문제가 됩니다.

 

지난 정권 동안 정부에 대놓고 들이 받으며 마침내 권력의 획득에 성공한 검찰총장 출신 대통령과 그 오른팔이 법무부를 장악했다는 건 보이는 것 이상으로 위험한 권력의 비대화가 발생할 수 있다는 의미고요.

 

조국이 거쳐갔던 민정수석실이 없어지는 건 중요한 게 아닙니다. 민정수석실의 권한을 법무부, 높은 확률로(사실상 이미 정해진 수순대로) 검찰 쪽 인사들이 획득한다는 게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이 기존 규범, 제도의 해체와 새로운 대안 내지는 대책으로 이루어지는 방식이라는 게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티파티가 공화당을 장악하던 오바마 정권 당시부터, 공화당은 많은 제도를 경쟁 정당을 견제하고 권한과 영향력을 빼앗기 위해 없애거나 바꾸었습니다. 이것이 불법이었느냐 하면 그건 결코 아니었습니다만, 이는 법과 무관하게 관료제로 유지되고 헌법이 의도하는 민주주의적 규범을 무너뜨리는 방식이었습니다.

 

위 인용글에서처럼, "사실 성문화되지 않은 규범은 상원이나 선거인단 운영에서 대통령의 기자회권 방식에 이르기까지 정치 구석구석에 존재한다. 그래도 민주주의 수호에 가장 핵심 역할을 하는 두 가지 규범을 꼽자면 상호 관용과 제도적 자제를 들 수 있다."

 

 

가드레일이 사라진 민주주의가 어떤 것인지 상상해보기 위해 현재의 노스캐롤라이나 주를 생각해보자. 노스캐롤라이나는 전형적인 '경합'주다. 다각화된 경제와 세계적인 대학 시스템을 갖춘 노스캐롤라이나는 남부에 비해 보다 부유하고 도시적이며, 높은 수준의 교육을 자랑한다. 또한 인구통계적으로도 다양하며, 아프리카계, 아시아계, 라틴계가 전체 인구의 3분의 1을 차지한다. 이러한 이유로 노스캐롤라이나는 전통적인 남부 주에 비에 민주당에 우호적이다. 노스캐롤라이나 주 유권자 구성은 미국 전역의 유권자 구성과 비슷하다. 다시 말해 민주당이나 샬럿이나 롤리-더럼과 같은 도심 지역에서, 그리고 공화당은 시골 지역에서 우세를 점하면서 전반적으로 양당이 세력 균형을 이룬다.

 듀크 대학 법학과 교수 제데이아 퍼디Jedeiah Purdy의 표현을 빌리자면, 노스캐롤라이나 주는 "미국의 극단적인 당파 정치, 그리고 점점 심각해지는 상호 불신의 소우주"가 되었다.

(중략)

많은 이들의 설명에 따르면 노스캐롤라이나가 정치 전면전에 휘말리게 된 것은 2010년 공화당이 의회를 장악하고 나서였다. 그 이듬해 노스캐롤라이나 주 의회는 '인종적 게리먼더링'이라고 알려진 선거구 조정안을 통과시켰다. 이를 통해 공화당은 아프리카계 유권자를 몇몇 선거구에 집중적으로 몰아넣음으로써 그들의 선거 영향력을 희석하고, 공화당의 의석수를 극대화했다. 노스캐롤라이나 '모럴 먼데이즈Moral Mondays'운동을 이끈 진보주의 목사 윌리엄 바버WIlliam Barber는 새롭게 조정된 선거구를 '인종차별 선거구'라 불렀다. 그 결과 2012년 선거에서 민주당이 주 전체에서 많은 표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공화당이 13개 의석 중 아홉 개를 석권했다.

2012년 선거에서 팻 매크로리Pat McCrory가 주지사에 당선되면서 공화당은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입법, 사법, 행정을 모두 장악하게 되었다. 그후로 공화당은 지배를 장기적으로 이어나갈 방안을 모색했다. 주지사, 그리고 상원과 하원 및 주 대법원 내 과반을 기반으로 공화당 지도부는 운동장을 기울이기 위해 여러 야심찬 개혁안을 추진해나갔다. 가장 먼저 주 전체에 걸쳐 유권자 개인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을 요구했다. 그리고 이 정보를 활용하여 선거권 행사를 더 힘들게 만들기 위한 다양한 선거 개혁법을 통과시켰다. 또한 매우 엄격한 유권자 신분확인법도 통과시켰다. 나아가 사전투표 기회를 줄이고, 16-17세를 대상으로 하는 예비등록제를 중단했으며, 당일등록제를 폐지하고, 여러 주요 카운티에서 투표소 수를 크게 줄였다. 연방 항소법원의 설명에 따르면 공화당은 새롭게 손에 넣은 자료를 가지고 아프리카계 유권자를 목표물로 삼아 "외과수술처럼 정밀하게" 선거 개혁법을 설계했다. 나중에 항소법원이 그 새로운 법의 집행을 중단시켰을 때 공화당은 그들이 장악하고 있는 주 선거위원회를 이용해 그 법안 중 몇 가지를 필사적으로 실행에 옮겼다.

이러한 제도 전쟁은 2016년 주지사 선거에서 민주당 로이 쿠퍼Roy Cooper가 매크로리를 간신히 이긴 후에도 끝나지 않았다. 공화당이 아무런 근거 없이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했고, 매크로리는 한 달 가까이 패배 인정을 거부했다. 그러나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2016년 12월 매크로리가 끝내 패배 승복을 한 후 공화당은 주 의회에서 "깜짝 특별회의"를 소집했다. 정치 상황이 얼마나 악화되었는지를 보여주듯, 머지않아 "의회 쿠데타"가 일어날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즉, 선거 결과에 대한 의혹이 있을 때 의회가 개입할 수 있도록 규정한 접을 악용함으로써 공화당이 선거 결과를 뒤집으려 한다는 소문까지 돌았던 것이다.

비록 쿠데타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뉴옥 타임스>가 "뻔뻔한 권력 장악"이라고 언급했던 특별회의에서 공화당은 새로운 민주당 주지사의 권한을 뺴앗는 갖가지 방안을 통과시켰다. 상원은 주지사 임명을 인준하는 권한을 스스로에게 부여했고, 현직 공화당 주지사에게는 임시적을 영구직으로 전환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퇴임을 앞둔 매크로리 현 주지사는 자신이 뽑은 1000명에 달하는 직원들에게 종신재직권을 부여했다. 이는 결국 자기 입맛에 맞게 구성한 행정부를 장기적으로 유지하겠다는 계산이었다. 다음으로 공화당은 주 선거위원회 개편에 착수했다. 주 선거위원회는 선거구 조정, 유권자 등록, 유권자 신분확인 요건, 투표 시간, 투표소 배치 등 주 선거와 관련된 모든 규칙을 담당한다. 당시 선거 위원회는 공화당이 과반을 차지하는 데 기여한 현직 주지사 매크로리가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그는 동등한 정당 대표 시스템을 구축했다. 다시 말해 선거위원회 위원장을 양당이 번갈아가면서 맡도록 제도를 바꾸었다. 게다가 위원 수가 두 번째로 많은 정당(즉, 공화당)이 짝수 년도에 위원장을 맡도록 정했다. 짝수 년도는 곧 선거가 있는 해를 의미한다. 그리고 몇 달 후 의회는 주 항소법원에서 세자리를 줄이기로 의결했으며, 이는 새로 들어올 쿠퍼 주지사에게서 세 명의 판사 임명권을 실질적으로 뺴앗았다.

이후 법원이 인종차별적 선거구 조정, 2013년 투표법, 그리고 선거위원회 개혁안 모두를 무효화했음에도, 그러한 법안이 의회를 통과했다는 사실은 주어진 권력을 최대한 활용함으로써 정치 경쟁자를 불구로 만들겠다는 공화당의 강한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채플 힐 출신 민주당 하원 의원 데이비드 프라이스David Price는 이번 사태를 통해 "미국 민주주의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취약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노스캐롤라이나는 가드레일이 사라진 민주주의가 어떤 모습일지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의 창이다. 우리는 노스캐롤라이나를 통해 미국의 미래를 엿보게 된다. 정치 경쟁자가 적으로 변할 때 정치는 전쟁으로 전락하고 민주주의 제도는 무기로 바뀐다. 그 결과 사회는 끊임없이 위기를 맞게 된다.

-레비츠키, 지블랫.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

 

 

윤석열 정부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문재인 정부 지우기, 혹은 제도적 개혁은 저에게 합법적인 방식으로 민주적 규범을 해체하던 미국 공화당의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 이번 민정수석실 해체와 새로운 단체 신설은 기존 민정수석이라는, 물론 개혁해야하고 할 수 있는 조직의 건전한 견제/개혁이 아니라 제도적 개혁의 모양새를 한 민주적 규범의 해체라고 이해하는 게 맞지 않나 싶습니다.

 

[연합시론] '윤석열 라인' 약진한 검찰 고위급 인사
https://www.yna.co.kr/view/AKR20220519102700022
한동훈 체제 첫 검찰 인사…'윤석열 라인' 대거 배치
https://m.yonhapnewstv.co.kr/news/MYH20220518020100038
'尹 사단' 전면 배치, 검찰 중립성 우려된다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2051818090001398
윤석열 정부 ‘검수완판’ 인사…여기도, 저기도 검찰 출신
https://m.khan.co.kr/national/court-law/article/202205151924001

 

민정수석실은 큰 권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민정수석실의 권력은 검찰을 다루는 법무부에게 쥐어졌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대통령 직속의 민정수석실이 법무부 산하로 위상이 추락한 것이 아닙니다. 박근혜 정권 당시 우병우가 있었던 그 민정수석실의 권력이 법무부의 손에 쥐어진 거고, 윤석열 라인이 가지게 된 겁니다.

 

법무부 자체의 권력도 강력한데 거기에 청와대, 현 국민관이 가져야할 권력을 쥐어준다는 것은 과도한 권력의 집중이며, 반드시 분리해서 다뤄져야할 권한이 불법이나 월권이 아닌, 제도적 방식으로 이전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 대통령 직속이자 청와대(현 국민관) 내에 포함시켜야 했던 조직을 해체시키고 똑같은 힘을 법무부라는 조직에 준 것인데, 대통령이 검찰 출신이고 그 검찰을 다루는 것이 법무부이며, 그 방법은 제도적 방식을 따랐다는 겁니다. 법과 헌법이 규정하지 않은 민주주의의 관습, 규범은 그런 식으로 파괴되는 것이고 우리가 이해하는 민주주의가 후퇴하는 또 다른 방식입니다.

 

 

앞으로 이번 정권 하에서 이루어지는 제도적 개혁이 어떤 의미를 함의하고, 어떤 의도와 목적이 있는지 정말 잘 살피셔야 합니다. 그것이 어떻게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고, 정치적 라이벌을 고사시키려 하는지, 제도 개혁이라는 방식으로 독재와 유사한 권력의 독점이 이루어질 수 있는지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노파심으로 말하건데, 단순히 의석을 많이 차지했거나, 국회의 중요 요직을 차지했다거나, 지지율이 높다고 해서 독재가 아닙니다. 그렇게 보이거나 시도될 수 있는 위험성을 가질 뿐이죠. 물론 그러한 지적 역시도 어느 정도 성립 가능합니다.

 

하지만 지지율은 국민들이 보내는 것이고 국회 의석 역시도 국민들이 찍어줬다는 점에서 의도적일 순 없습니다. 국회 요직을 장악하는 것들 정도라면 비판이 합당할 겁니다. 현실적인 발목잡기를 고려하지 않는다면요.

 

그러나 그러한 권력을 가진 뒤 제도적 개혁으로 상대 정당, 파벌의 권한과 영향력을 점차 앗아가고 견제가 불가능하거나 미약할 수밖에 없는 상태로 만드는 것은 독재와 유사한 권력의 독점을 이룰 수 있습니다. 상원이 주지사 임명을 인준하는 권한을 스스로에게 부여하거나, 임시직을 영구직으로 전환할 수 있는 권한을 주거나, 자신이 뽑은 직원에게 종신재직권을 주거나, 선거위원회를 개편하거나, 주 항소법원에서 세자리를 줄여 새로 들어올 상대 정당의 주지사에게 3명의 판사 임명권을 빼앗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자기들의 권한을 유지하거나 확대시키고, 상대 정당의 권한을 빼앗고 축소시킨다면 정권을 차지한 집단의 권력은 견제 불가능하게 됩니다. 이러한 개혁은 유기적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법안이라면 새로 개정하는 게 쉽지만은 않겠지만, 조직 개편을 비롯한 제도적인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민정수석실을 없애고 법무부 장관 직속 인사관리단을 만드는 것처럼 쉽고 빠릅니다. 그 반대 역시도 쉽고 빠르죠.

 

자기들이 유리할 때와 불리할 때 제도적 개혁을 통해 권력을 집중시키거나 축소시키는 것으로 특정 집단이 권력을 합법적으로 독점하는 방식이 민주주의에서 벌어질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유사 독재입니다. 우리가 이해하고 알고 있는 독재는 옛 방식인 거죠. 민주주의에서도 독재적 방법론과 유사한 방식은 얼마든지 발생 가능합니다.

 

민주주의의 규범을 해체하고, 파괴하는 식으로 가능합니다.

 

윤석열 정부가 독재 정부냐고요? 그건 확대해석이고, 단지 민주주의를 후퇴시킬 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전의 다른 보수정부들과 마찬가지로. 또한 그 방식 역시 독재와 유사한 방식으로 우리 민주주의에 분탕을 쳐놓을 가능성은 농후하다고 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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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일론 머스크가 트위터를 인수하면서 밝혔던 바에 따르면, 양극단 10%씩만 불행하게 만들겠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양극단 10%가 의제 대부분을 장악하기 때문이라고 했죠. 가장 시끄럽고 많은 말을 쏟아내는 이들이 가장 적은 극단의 10%씩이라면서요. 실제로 연구결과가 그러한 것은 사실이고 그들의 목소리를 줄이고 중간에 가까운 목소리를 키우는 것이 건전한 논의의 장, 토론장(Agora)를 만들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머스크의 이런 행보에 대해서 저는 어느 정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데, 그에 대한 조치 중 하나가 트럼프 트윗에 대한 정지 해제입니다.

 

 

1.

트럼프의 개소리를 듣고 싶다는 건 아니고, 트럼프가 트위터에서 정지 당한 이후 만든 트루스 소셜의 위험성이 지대하다고 생각해서 입니다. 트루스 소셜은 트럼프가 만들 SNS 플랫폼으로, 트럼프의 트위터라고 할 수 있는 건데, 트럼프는 이미 트위터에서 가짜뉴스를 생산하기도 했고, 대통령 시절에서 편견과 잘못된 정보, 거짓말을 공적으로 반복해왔습니다.

 

그리고 그건 트럼프 지지자 역시도 마찬가지이고, 그러한 성향의 지지자들끼리 모여서 가짜뉴스를 재생산, 유포하고 있습니다. 이는 국가와 진영을 떠나서 발생하는 일이지만, 주로 극단적인 성향의 집단일수록 더 만연하고 심각하게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그들이 트루스 소셜에 모이게 된다면 미국 음모론, 가짜뉴스, 왜곡 선동 및 증오연설, 증오범죄, 심지어 테러의 근거가 되는 공간이 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일베와 같은 본진이 만들어진다는 거고, 트루스 소셜이 만들어져서는 안 되는 이유가 그들에게 본진을 줘서는 안 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극단주의자들을 한꺼번에 모아서 다 없애버릴 생각이 아니라면 그들을 결집시키거나 결집하는 것을 방관, 혹은 수동적 조장하는 것은 그들의 강력한 에너지가 모이게 하는 것입니다.

 

이는 가세연이 수억 원 이상의 후원을 받는 것처럼 경제적인 힘이 될 수도 있고 일베에서 근거지를 가지고 성장한 뒤 사회에 크고 작은 영향력을 미친 일베적 마인드와 같은 사회적 영향력은 물론, 그러한 성향의 정치인을 만들거나 그러한 성향의 지지자를 흡수하고자 하는 정치인을 만들어 정치권력을 획득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미국은 이미 한번 티파티는 공화당 장악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이후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을 겪었고요.

 

 

2.

예전이라고 해서 정치성향에 따른 갈등과 마찰이 없었느냐 하면 결코 아닙니다. 종교와 더불어 정치 이야기는 하는 게 아니라는 말이 있었던 것처럼 오래 전부터 좁혀지지 않는 가치관/세계관의 충돌은 웬만큼 배운 식자가 아닌 이상엔 반드시 싸움이 나기 쉽상입니다.

 

아무런 부담 없이 정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건 같은 정치 성향을 공유하는 이들일 뿐이고요.

 

 

3.

인터넷은 온 세상의 소통을 즉각적이게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소통에 한해서, 그리고 인터넷을 향유할 수 있는 매체와 그것을 작동시킬 몇가지 요소(전기, 유무선의 연결)만 있다면 전 세계 거의 누구와든 소통이 가능합니다. 단지 우리는 우리가 소통할 사람과 소통할 공간을 정할 뿐이죠.

 

그리고 문제는 여기에서 발생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와 비슷한 성향과 가치관을 가진 사람과의 대화를 더 즐겁고 부담없이 받아들이며 우리의 가치관과 반대되거나 충돌할 수밖에 없는 사람과의 대화를 꺼립니다. 불쾌해하는 것을 넘어 때로는 두려워하기도 하죠. 그리고 그러한 반감은 정도와 개인의 가치관 등에 따라 실제로 배제를 시도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커뮤니티 웹사이트에서 회원은 선동하거나 신고를 남용하는 경우도 있고, 계속 싸우고 비난하면서 쫓아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반면 운영진 등 실질적 권한을 가진 관리자의 경우에는 좀 더 쉽고 간단한데, 자신의 의견에 동의하거나 자신을 신격화하는 데에 참여하지 않는 경우 정지/강제탈퇴 기능을 남발하는 거죠.

 

물론 이에 대해 구분해야할 것은, 아무리 이상적으로 공정해도 소통하는 자 본인이 집단의 명시적 규칙을 지키지 않고 마음대로 굴다 쫓겨나는 경우 역시도 있습니다. 주로 일베충들이 타 커뮤니티에서 일베 가치관을 드러내거나 반사회적 소통방식을 견지하다 쫓겨나고 탄압을 받았다고 코스프레하거나 정치질을 하는 경우 역시도 존재합니다.

 

 

4.

여튼, 그러한 이유로 사람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공간을 선택하고, 이는 필연적으로 편향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듣기 싫은 이야기를 듣지 않을 수 있는 공간에서 편하게 소통할 수 있고, 불편한 충돌에서 멀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만큼 자신과 같은 가치관, 성향을 지닌 이들끼리 모여서 그 반대의 이야기나 다른 관점을 접하지 못하고 편향성은 더더욱 강화됩니다. 다른 시각이나 가치관을 접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에 세계관은 협소해지고 편협해질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지요.

 

이는 비교적 온건한 사람이라도 자신들이 옳다고 믿었던 것이 새로운 정보나 관점하에서 다르게 해석되는 사실에 설득력을 느낄 기회가 없어지게 되기에 집단은 더더욱 편향적이게 됩니다. 피드백이 오직 자기들끼리만 이루어지며 이것이 심해지면 팩트체크조차 이루어지지 않고 가짜뉴스를 사실로 믿거나 그러한 가짜뉴스를 기반으로 또 다른 가짜뉴스를 만들게 됩니다.

 

 

5.

사실 기존 한국에서 어떤 커뮤니티나 어떤 웹사이트가 더 쓰레기라고 하는 경우는 있었고 그것은 대체로 예의와 가식을 내려놓았다는 디씨가 대상이 되곤 했습니다. 아예 정치적인 목적으로 만들어진 사이트나 노노데모 같은 카페의 경우는 별개로 취급되고요.

 

각 커뮤니티끼리는 공유되는 구성원에 따른 수동적이고 제한적인 교류나 관찰이 있었습니다. 단, 주로 유머 자료로 소비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며, 대체로 비판적인 것도 아니었습니다. 또한 각 커뮤니티간의 정치적인 성향 역시도 두드러지지 않았고, 정치와 비정치적 사안에 대해서는 대체로 잘 분리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정치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점진적으로 높아진 시기가 찾아옵니다. 이는 우리가 민주사회를 살아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고, 긍정적인 현상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프랑스 혁명 이후에도 오랫동안 혼란과 충돌이 반복되었던 것처럼 균형을 잡아가기 위한 과도기 동안의 혼란과 충돌 역시도 감내할 수박에 없는 시기였습니다.

 

그리고 그 시기에 등장한 것이 바로 일베입니다. 그리고 일베는 싸워야할 적, 그리고 일방적으로 공격하고 괴롭히며 우월감을 느끼게 해줄 만만한 샌드백을 원했고, 그렇게 선택된 것이 바로 오늘의 유머 사이트였죠. 문제는 이것이 정치성향을 이유로 발생한 싸움이라는 겁니다.

 

오유는 일베와의 충돌 이후 한국 웹에서 커다란 영향력, 위상의 추락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이 이후로 한국 인터넷에선 각 커뮤니티별 정치적 경향성이 좀 더 뚜렷하고 표면적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그리고 각 커뮤니티마다 적대감이 발생하기도 했는데, 여기에 특히 기여한 사건은 남초/여초로 구분되는 성갈등 문제가 한몫을 했죠.

 

페미니즘을 추종하는 거대 여초 커뮤니티 역시 모든 남초 집단과 싸웠고 이 젠더 이슈는 설령 정치성향과 무관하다고 치더라도 커뮤니티간의 적대성은 지나치게 높아졌습니다. 커뮤니티간 정치/ 젠더 갈등이 심해지기 전까지 여초와 남초는 서로 싸우는 일 자체가 없었습니다. 남남보듯이 하긴 했지만 굳이 따지자면 거의 긍정적이기까지 했죠.

 

즉, 정치성향으로 갈리는 적대성과 젠더 이슈로 갈리는 적대성까지하여 한국 커뮤니티 이용자들은 서로 다른 커뮤니티에 적대감을 느끼거나 자기가 애착을 느끼는 커뮤니티에 강력한 소속감을 느끼게 됩니다. 외부의 적은 결집에 효과적인 까닭입니다.

 

그렇게 커뮤니티끼리 고립되고 교류, 혹은 여러 커뮤니티를 동시에 하지 않게 되었으며 그러한 적대성이 타 커뮤니티 비하로 이어지며 더욱 피드백되었지요. 루리웹을 근이라고 비하하고 펨코를 펨베로 비하하는 등 이제는 어렵지 않게 찾아보게 되었습니다.

 

 

6.

여기에 인터넷 방송과 유튜브는 이러한 편향성과 고립성에 크게 기여하게 됩니다. 인터넷 방송 중 정치를 주제로 하는 경우 대부분은 큰 인기를 얻지 못했고, 대부분은 유튜브와 연계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프리카나 트위치에 그러한 방송이 없는 건 아니지만 대부분 유튜브 쪽에서 큰 수익과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그리고 한국에선 네이버 등에서 벌어진, 언론기사의 대문 페이지 노출 문제가 이슈로 다뤄져 개편이 이루어졌듯이, SNS에서는 알고리즘 문제가 이슈가 됩니다. 한국에선 네이버에 언론 기사가 네이버 측에서 조작하거나 조작하지 않더라도 특정 성향의 언론사들의 기사나 특정 이슈만 부각되는 등의 부작용 때문에 기사 자체를 노출하는 게 아니라 언론사들을 보여주고 해당 언론 사이트에 들어가 기사를 보는 것으로 개편되었습니다.

 

SNS에서 문제가 되는 알고리즘 문제는 이보다 훨씬 적극적이고 개별적인 섬세함을 지녔습니다. 웹사이트에서 강제로 특정 기사나 정보를 노출시키는 게 아니라, 각 개인별에 맞춰진 선호, 흥미를 유발할 수 있는 컨텐츠를 알아서 뽑아서 제공해주기 때문이죠.

 

가령 어떤 주제의 유튜버 영상을 보면 해당 유튜버의 다른 영상들을 제안(노출)해주고 비슷한 주제의 다른 영상 컨텐츠 역시도 노출해줍니다. 그리고 이것이 게임이나 인터넷 방송, 애니, 영화 리뷰 따위라면 별 상관 없겠지만 정치, 사회 이슈를 다루는 컨텐츠라면 위험성이 발생합니다.

 

어떤 커뮤니티를 하지 않더라도 유튜브나 유튜브와 유사한 방식으로 컨텐츠를 제공해주는 SNS 서비스를 하게 될 경우 특정 성향 위주의 컨텐츠들을 제안받게 됩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자각이나 면역 따위가 없는 사람들, 특히 기성세대 사용자들은 이에 특히 크게 영향을 받게 됩니다.

 

한번 보면 계속 뜨고 뜨는 걸 계속 보게 되기 때문에 정치적 편향성은 더더욱 강화됩니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더 극단적인 컨텐츠를 제공해주고, 거기에 어그로 끌린 사용자들 역시 무비판적으로 보게 되거나, 최소한 약간의 설득력을 느끼게 되는 경우 역시도 존재하죠.

 

알고리즘이 현대 정치환경의 극단화를 심각하게 만드는 원인 중 하나입니다.

 

 

7.

맨 위 이미지는 미국의 상황에 대한 자료이지만, 한국에 대입해도 크게 차이는 없을 겁니다. 아니, 오히려 한국의 극단화는 더 심각한 편일 가능성 역시도 배제할 수는 없을지 모르겠습니다.

 

본래 한국은 전쟁 이후로 특별히 더 극우화된 편이었기 때문에 우파 극단주의자의 비율이 높은 편이었는데, 이게 결코 해소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해가고 있습니다. 단순히 극우보수 정당이 집권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러한 사실이나 맥락을 완전히 무시해도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기술적으로 그렇게 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때문에 저는 최근 파편화에 대한 생각을 자주하게 됩니다.

 

로빈 블릭의 저서, 독일의 파시즘:히틀러는 어떻게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노동운동을 분쇄했다. 에서 그는 히틀러의 이러한 발언을 인용합니다. "우리 운동을 파괴할 수 있는 것이 딱 하나 있었다. 만약 우리의 적이 그 원칙을 이해하고, 일이 시작될 즈음 우리 운동 중핵을 무자비하게 타격했다면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우리가 처음 일베가 등장했을 때, 그 중핵을 무자비하게 부수었다면 일베와 유사한 집단이나 단체는 나왔을지언정, 그 규모와 영향력은 지금과 비교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본진을 마련해주지 않는다면 그들의 힘은 결집되지 않았을 것이고, 파편화된 개인, 소규모 집단은 연대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며 응축된 내부의 힘을 외부로 발산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니까요.

 

그렇다면 반대로, 집단화된 극단주의자들을 파편화시켜 그 역량을 감퇴시키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는 아주 어려운 일이고 정교한 공작의 영역에서 가능할 것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자기들끼리의 분열이 이루어져야할 것이고 혹은 더 끔찍한 집단의 공격에 의해서만 가능할 겁니다. 중도적일 수록, 온건할 수록 공격성을 갖춘 집단이 되기 어렵고 남들보다 더 강력한 공격성과 행동력을 지닌 것은 더 극단화된 집단에서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물론 어떻게 할 것이냐 하는 질문에 대해서는 당연히 저도 알지 못한다고밖에 할 수 없습니다. 심지어 이것 역시 하나의 방법이자 아이디어일 뿐이지 다른 더 방안들이 있을 수는 있습니다.

 

8.

우리는 이전 시대에 비해 더욱 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서로에게 관용을 보이지 못하는데다, 더욱 극단화되고 정보는 물론 정보의 해석의 차이 역시도 커졌습니다. 그러한 해석의 차이로 우리는 완전히 다른 세계관을 가지게 되었고, 그러한 세계관의 차이가 크면 클수록 대화나 타협의 폭은 좁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볼셰비키와 나치당원이 하는 짓이 비슷하더라도 서로 선 위치가 다르고 지지하는 지도자가 다르며 입은 옷의 색깔이 다르다는 이유로 결코 이해하지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 상태에선 두가지 선택지밖에 없습니다. 완전히 다른 대륙에 있어 보이지도, 들리지도, 내게 영향력을 행사하지도 않는 것처럼 전혀 신경쓰지 않거나, 혹은 죽여 없애는 전쟁 뿐이죠.

 

우리는 우리가 가진 세계관과 가치관을 완전히 포기하고 내가 싸워왔고 이해하지 못했던, 그리고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경쟁자들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받아들일 수는 없을 겁니다. 세계관 격차의 폭이 넓어지는 것은 더 크고 광범위한 갈등을 예견하는 일이 될 것이며 이것을 해결할 방법은 양차대전이나 냉전의 종식과 같은 세계사적 거대한 사건, 혹은 최소한 우리 세계관적 거대한 충격만이 가능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러나 박근혜 정권 탄핵 사건과 같은 현대 한국사에서도 유래 없는 사건이 벌어졌음에도 우리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나빠졌으면 나빠졌죠. 서로서로 더 극단화되고 이념 격차는 요 몇년 동안에서조차 벌어졌으니까요. 쿠데타도, 폭동도, 계엄령도 없었던 가장 이상적이고 온건하게 발생한 충격이었음에도 우리가 변화하기엔 충격량은 부족했던 모양입니다. 그렇다면 이것보다 더 큰 충격은 도대체 무엇이 되어야할지 두려울 정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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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 유세용 도메인 내려가고 페북, 트위터 계정도 폐쇄.

 

 

 

 

재선까지 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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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패함에 대해 자원이 가야할 곳에 가지 못했음을 의미한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자원이 가야할 곳에 가기 위해선 원칙이 지켜지기만 하면 되죠. 원칙을 어기고 사적으로 자원을 유용하거나 자신의 직위와 권한을 남용하여 부정한 방식과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누군가에게 어떠한 자리를 임명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물적 자원이 가야할 곳에 가지 못하고, 인적 자원이 있어야할 자리에 있지 못하게 하기에 부패한 겁니다. 그러나 아무리 부패하고 싶어도 정해진 원칙을 지킨다면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죠. 도로에서 도로교통법을 어기고 싶어도 중앙선을 넘지 않고 과속을 하지 않고 난폭운전, 보복운전을 하지 않으며, 신호등을 비롯한 원칙을 다 지킨다면, 아니. 지키도록 강제된다면 하고 싶어도 못합니다.

 

위 사건은 해당 공화당 정치인이 잘못을 했고, 그에 대한 보복으로 그의 정치생명을 끝내버린 게 핵심이 아닙니다. 그건 결과일 뿐이죠. 핵심은 경찰이 직위와 권한, 권력의 유무와 관계 없이 법이라는 원칙을 끝까지 지키고자 했고, 지켰으며, 단지 그 뿐입니다. 그것이 사람들에게 알려져 민주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시민(=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는 시민)의 선택과 그들의 선택권을 고려할 수밖에 없는 민주사회의 원리 하에 발생한 결과인 거죠.

 

 

한국에서 높은 위치에 있는 이가 휘두를 수 있는 권력과 권한에 두려움을 느끼고 원칙을 접는 경우는 참 많았습니다. 심지어 이에 대한 공분과 지적을 천박한 냄비들의 떼법이라고까지 폄하하죠. 정작 핵심에 대해서는 눈을 돌리면서 말입니다.

 

 

원칙이 지켜지는 사회가 더 건전하고 부패하지 않은 사회일 겁니다. 미국이라고 완벽한 건 아니지만, 적어도 어떤 면에서 한국보다는 나은 면이 있는 건 사실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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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28 - [취미/이야기] - 브렉시트, 멍청이들과 노친네들의 마초적 자살쇼.

2016/11/15 - [취미/이야기] - 트럼프 당선과 대중정치의 함정.

2016/07/30 - [취미/이야기] - 대중선동의 기본. 분열.



새누리당, 황금새벽당, 공화당 등의 극우, 보수적 성향을 띄는 정당의 경우, 그들을 지지하는 계층은 아이러니하게도 대부분 저소득층에 가깝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챙겨주지 않고, 오히려 거국적으로 자신들의 이익을 줄어들고 사회적 입지가 줄어들 것임에도 그들을 지지하고 표를 던져주는 경우가 많은데, 이를 정치학에서는 계급배반 현상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종류의 계급배반 현상을 설명하는 많은 근거와 주장들이 있습니다. 많은 노동에 따른 인지적 한계, 낮은 교육수준, 지역적 정치기류, 종사하는 산업에 따른 입장 등등..


모두 틀린 설명이 아니라고 봅니다. 그것들은 일정 정도 사실을 설명하고 있으며, 그 정도는 경우에 따라 영향성을 달리할 뿐이죠. 하지면 지금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그런 요소들과는 다른 데, 그들의 정치사회적 입장과 한계라기 보단 정신적 가치관에 대한 설명이 좀 더 올바르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먼저, 새누리당과 같은 종류의 극우보수 세력을 지지하는 자들은 크게 두가지 기저를 바탕으로 합니다.


하나는 약자와 비주류, 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경멸이고, 다른 하나는 강자, 힘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과 환상이죠.



1.약자, 비주류, 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경멸.


기실 따져보다면 저소득층은 자신들부터가 약자임에도 불구하고, 자기혐오적 성향이 강합니다. 이는 흔히 갑질이라는 형태로 분석될 수 있는데, 갑질은 졸부 따위에게서나 찾아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저소득층의 사회적 약자들에게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중산층이 사는 곳보다 저소득층이 사는 곳에서 알바나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직원들에게 갑질하는 경향성이 큽니다. 이는 아래의 글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요약하자면, 자신이 겪은 만큼 타인을 대한다는 겁니다. 자신이 위계적 폭력과 억압을 경험한 사람은 자신이 상위에 위치한 관계일 때 어렵지 않게 하위에 위치한 이에게 마찬가지의 위계적 폭력과 억압을 가하기 쉬워지죠. 


2014/08/30 - [취미/이야기] -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배경.


이런 현상에 따라, 그들은 힘에 대해 갈망하게 되고, 강자와 주류에 대해 동경하고 선망합니다. 비록 그들은 거의 결코 그렇게 될 수 없지만 말이죠. 그런 정신적 작용은 정치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약자와 비주류에 대한 혐오와 경멸로 이어집니다. 타인의 비루함과 비참함은 쉽게 인정하고 흉보기 쉽지만 자신의 비루함과 비참함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죠. 그렇기 때문에 자신과 타인을 어렵지 않게 구분하고 그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는 중2병의 나는 남들과 달라 같은 게 아니라, 단지 자신의 형편을 무시하고 타인만을 판단하는 것에 불과한 것에 가깝습니다.


이런 모순적 행태 덕에 이들은 자신과 같은 약자와 비주류를 연대의 대상이라고 보질 않습니다. 자신이 조금이라도 더 나은 환경에 있다면 우습게 보고 모멸감을 주고자 하며, 자신에게 힘을 보태달라고 요청하면 거기서 정신적 우월감을 느끼며 그것에 심취하고 알량한 입장을 무기로 유세를 부리게 되죠. 이는 어렵지 않게 수평폭력으로 발생하게 되고, 특정 정치세력과, 그들과 야합한 언론은 그것을 부추겨 분열시켜 그들의 단결을 파괴하거나 이루어지지 않게 조작합니다.


따라서 이들은 같은 약자나 비주류, 소수자에게 공감하지 못하고 최소한 무시, 최대한 적대 및 공격에 가까운 입장을 가지게 되죠. 같은 이유로 그들 또한 다른 집단에게서 공감 받거나 연대하고자 하지 않고요. 이것이 정치적인 요소로 흐르게 된다면 (노인, 청소년, 저소득층, 환자, 장애인 등의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복지, 외노자,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배척으로 발생하게 됩니다.


이는 필연적으로 진보 및 좌파와 같은 소수자와 약자를 주로 대변하는 성격의 집단에 대한 혐오와 괄시로 이어지죠. 즉, 그들은 자신들의 입장과 이익을 대변해줄 수 있는 정치집단을 반대하고 비판적인 자세를 가지게 됩니다. 반대로 말하자면, 흔히 말하는 저소득층은 자신이 되고 싶은 자들을 지지한다. 는 말대로가 되는 거죠. 강자와 주류에 대한 동경은 자신과 그들을 동일시하는 공감이 이루어지기 쉽고 그에 따라 정치적 결정을 내립니다. 그게 진정한 본인의 판단이라기 보단 정치적 선동에 따른 결과라고 해도 말이죠.



2.강자, 힘에 대한 맹목적 추종과 환상.


앞서 이야기 했듯, 그들은 힘과 강자에 대해 추종하고 환상을 가집니다. 자신들이 힘이 없어 억울하고 마음 속으로 담아만 둬야할 괄시와 무시를 많이 겪어 봤기 때문에, 그만큼 그들을 짓밟고 비웃어 줄 수 있는 힘에 대한 동경과 환상을 가지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강한 자를 사랑하고 편파적인 애정을 가집니다.


정치에선 소위, 힘 있는 자들에게 표를 줘야 한다와 같은 이야기로 나타나죠. 힘 있는 자들이 정치를 해야 하고, 힘 있는 자들이 권력을 가져야 한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보고 공감하고 싶은 것은 기집애처럼 이빨만 털면서 대화하고 화합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강인한 힘과 권력으로 상대를 짓밟고 박살내며 무릎 꿇고 빌게 만들 수 있는 타협하지 않는 강함, 강자거든요.


그러기 위해선 그들이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느낄 수 없는 적이 필요하고, 그들에게 자신들의 기저에 있는 분노와 혐오를 뿜어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대상은 주로 외부의 적국, 혹은 자국의 진보 온건파들이 되기 쉽죠. 자신들이 혐오해 마지 않는 약자와 소수자를 대변하고 그들의 이익을 주장하는 약해빠진 기집애들. 그들이 적으로 상정되는 것이고, 그래야만 합니다.


파시즘의 공통점은 내부든 외부든 타협할 수 없는 불가침의 적, 혹은 악을 상정하고 국민들로 하여금 그들의 분노와 혐오, 증오 따위를 조장하며 그렇게 조장해낸 부정적 에너지를 그 적에게 쏟아붓게 만드는 겁니다. 그리고 그들이 원하는 주장과 발언을 대신해주는 자신들은 그만큼 비이성적이게 된 감정적 에너지체가 된 대중에게서 지지와 표를 받는 거죠.


따라서 그들의 지지를 받고자 하는 극우보수 집단은 그들에게 자신들이 힘이 있다는 스텐스를 명백히 보여줄 필요가 있고, 적어도 그들이 듣고 싶은 말을 해줘야만할 이유가 있는 겁니다. 실제로 할 수 있느냐, 그것이 국가적, 사회적 이익이 되느냐, 그것이 사회정의와 법적 정의에 부합하는가 따위와는 관계 없이요. 단지 지엽적 정치적 승리를 얻어낼 수 있다면 국가나 사회적 손실과 손해는 무시해도 되는 소小에 불과한 겁니다.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이 대大에 해당할 뿐이거든요.


이는 청와대나 새누리당, 혹은 이번 미 대선에서의 트럼프, 혹은 브렉시트 이전의 영국 보수당들이 했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당장의 정치적 이익과 승리, 저소득층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 혹은 국민 다수에 대한 지지를 이끌어 낼 수 있는 그들이 원하는 말의 대변을 여실히 보여준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게 올바른 말이든, 정의에 부합하거나 국가적, 사회적 이익을 얻어낼 수 있는 종류의 것들이냐고 하면 아니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거든요.


즉, 적지 않은 유권자들이 원하는 것은 정의로움이 아닌 힘이 있다는 것의 증명이고, 또한 정의니 합리니가 아닌 강한 자, 힘 있는 자들이 필요한 것일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경화가 이루어지는 국가에선 힘 없는 정의보다 정의 없는 힘이 승리하는 것을 찾아보기 쉬운 것이고요. 마찬가지로 문재인이나 버니 샌더스, 힐러리와 같은 힘 없는 나약한 놈에게 표를 주지 않는 겁니다.


그들은 당장의 원칙과 정의보다, 당장 힘을 동원해서 자신들에게 대드는 버러지들을 짓밟고 박살내는 것에 열광합니다. 대화와 타협은 기집애들이나 하는 것이고, 그딴 건 필요 없이 자신들에게 기어오르는 놈들에게 본때를 보여줘야만 한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힘을 가진 강자가 타협도 협상도 없이 적을 박살내고 짓밟는 것 자체에 대한 쾌감. 저는 그걸 마초 오르가즘이라고 부릅니다.



3.마초 오르가즘.


앞서 말했듯, 마초 오르가즘이란 힘으로 타협이나 협상, 대화와 같은 나약한 행위를 일체 하지 않고(혹은 강경한 태도의 경고만 한번 던져주고) 자신들이 설정한 적, 혹은 악에 대해 무차별적인 폭력을 휘둘러 박살내고자 하는 것에 대해 쾌감을 느끼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민주적 원칙에서도 벗어나 있고, 벗어나기도 쉬우며 정의나 합리와도 동떨어진 태도입니다. 이런 태도가 극단화된 것이 파시즘이고, 군국주의이죠. 자신들의 적이 있어야만 생존할 수 있는 사상과 집단. 절대적 악과 강력한 적을 찾고, 그들과 싸워 이겨야만 합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사라져버리면 자신들의 존재 자체에 의미가 없어지죠.


거의 전세계의 극우, 보수 정치집단은 그들을 지지하는 자들이 듣고 싶어하는 말을 해줍니다. 사회정의에 부합하는 해야 하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자극적이든 편파적이고 피상적이든 듣고 싶은 말을 해주죠. 트럼프가 가장 적절한 예시입니다. 적지 않은 대중들은 어떠한 현상과 사건에 대해 근본적으로 파헤치고 분석하는 것보다, 그것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피상적인 현상에 집중하기 마련이고, 이게 힘과 관계된 것이라면 그것을 휘두르고 싶어만 하죠. 자신들의 자존심과 가치, 이입할 수 있는 대상(혹은 그런 종류의 가치)의 권위 상승이라는 일방적 짝사랑에 따라 움직이고 표를 던집니다.


현실과는 별개로 자신들은 아주 강한 존재이고, 그런 강한 힘을 가졌으니 대화나 타협 같은 불필요하고 나약한 행위보다 힘을 통한 의지의 관철만을 원합니다. 그게 자신들의 자존감을 회복시켜주고 고양시켜주며 적지 않은 쾌감을 주기 때문이죠. 


이런 마초 오르가즘은 교육 수준이 낮고 노동 강도가 높고 노동 시간이 많은 저소득층에게 쉽게 발현하고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앞서 말했듯, 그들은 수직적, 위계적 권위에 의한 폭력을 쉽게 경험하고 낮은 자존감과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지적능력은 어떠한 현상이나 사건에 대해 충분히 고민하고 분석할 시간도, 능력도 주어지지 않게끔 된 환경에 놓여져 있기 때문이죠.


그들이 조금이라도 더 여유롭다면 극우적 집단의 피상적인 정치적 선동보단 다른 지식인들의 근본적 분석에 공감하고 그 주장이나 분석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적지 않은 이들이 그렇지 못한 환경에 놓여져 있기 때문에 그러기 어렵죠.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해주는 진보나 좌파보다는, 강하고 자신감이 넘치는 남성적 이미지의 보수에 이입하기 쉽습니다. 


교육 수준이 낮기 때문에, 그리고 삶에 여유가 없어서 정치사회적 안건이나 쟁점에 쓸 정신력이 없는 이들이 대부분이고, 자기들이 평소에 이입해왔던 보수, 극우적 진영이나 인물에 지지를 보내기 쉽습니다. 쟁점에 대해 분석하고 공부하고 판단을 내릴 여유도, 그럴만한 지적 능력도 없기 때문에 그냥 그들이 하는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죠. 한국 보수, 저소득층, 50대 이상의 세대가 조중동 등 보수언론이 하는 말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고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는 상태로 정치적 권리를 행사하는 것은 그런 이유죠.


그리고 그런 성질을 잘 알고 있는 극우보수는, 그 집단이 정치정당이 됐든 경제집단이 됐든 언론이 됐든 그들의 마초 오르가즘을 자극할만한 정치적 선동을 하는 것이고요. 그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들은 사회정의나 사회국가적 이익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런 요소들과 동떨어진 주장을 하고 분열을 획책하게 되는 것이며 그 결과로 알량한 정치적 승리만을 반복해서 쟁취했을 따름이죠.


즉, 마초 오르가즘을 자극하면, 자신들이 승리할 수 있게 되기 때문에 계속 자극하는 것인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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