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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며,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 - E.Ka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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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3.02.14
    극단주의적 대립의 심화에 따른 민주주의의 위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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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극단적일수록 타협할 수 없다.

 

***

 

1.

중도에 가까운 입장은 이념적인 색깔이 적다는 것이 장점이자 단점이 된다. 어떠한 쟁점에 대해 필요한 강력한 주관과 추진력을 얻기보다 더 많은 의견을 취합하거나, 어중간한 결정을 내놓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만큼 많은 이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는 근거가 되지만, 그만큼 극단적인 지지층은 잃을 것이고, 그 결정들이 어중간할수록 필요한 조치를 필요한만큼 강력하게 실행하기 어렵게 된다.

 

그러나 이들은 양 진영의 중간에 가까운 입장에 있기 때문에 어느 쪽으로든 타협의 여지가 있고 대화가 가능하다는 매력이 있다.

 

 

2.

전 세계가 그러하듯, 한국 역시 점차 극단주의적 대립이 강해지고 있다. 이에 대해 이견이 있을 사람도 있겠지만 최소한 본인은 그렇게 생각한다. 그리고 이 극단주의적 대립의 골은 점점 깊어지고 있기 때문에 중도는 줄어들고 양 극단의 비중은 늘어나고 있다. 이는 그만큼 양 진영간의 대화와 협상, 타협의 여지가 줄어드는 것을 의미한다.

 

민주주의에서 그러한 요소들은 핵심적인 것들이고, 핵심적 요소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건 민주주의가 성공적으로 작동하기 어려워짐을 의미한다. 양 극단은 성장하는 몸집만큼 결코 소수라고 하기 어려워지겠지만 간극만큼이나 입장의 차이가 클 수밖에 없고, 정치적 승리자는 당연히 자기 진영의 입장을 더욱 대변할 것이다.

 

또한 중도적인 정책이나 제도는 그 누구도, 최소한 양 극단의 다수는 바라지 않을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정치적 승리자는 특정 진영에 더 많은 입장을 대변할 것이고 그들의 이익에 더 충실할 것이며, 그러한 것을 통해 정치적 이익과 생존력을 담보할 것이다. 이는 정치 정당과 정권의 의사와 무관하게 지지자들의 요구에 따라 상대 진영에 대한 공격과 말살을 시도하게 할 수도 있다. 그것이 지지자들이 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3.

이는 서로 다른 양 극단의 진영관계 뿐 아니라 하나의 정당 내부에서도 발생할 수 있는 일이다. 한 집단이 모든 것에 대해 공통된 단일한 의사를 공유할 리는 만무하다. 즉, 한 집단 내에서도 진보파와 중도, 보수파는 분리되고, 온건파와 관망파, 과격파는 구분된다. 지지자들이 상대 진영에 대한 강력한 공격과 정도를 벗어난 말살을 요구한다면 온건파는 그것을 거부하려할 것이다. 그리고 과격파는 더 극단적인 수사와 행동력으로 지지자들의 요구를 실행하려 하거나 그러한 의사를 보여줄 것이다.

 

이는 과격파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고 극단주의적 대립이 강해지는 시대에 과격파의 승률은 결코 낮지 않다. 지금 당장 낮다면, 앞으로도 그러긴 어려울 것이다.

 

 

4.

그렇다면 현실에서, 극단주의적 대립의 결과로, 그리고 과격파의 승리로 인해 정치 권력을 장악한 정권과 정당이 상대 집단에 대한 심대한 피해를 입히고자 할 것이다. 핵심 정치인들을 법과 언론을 동원하여 탈락시키고 정치적 생명을 위태롭게 하며, 정치인과 그들의 가족을 공격하며 불리한 싸움으로 몰고갈 것이다. 정당의 동력은 정책과 정치적 경쟁이 아닌 생존을 위해 사용될 것이고, 지지자들은 지속적인 공격에 결집되거나 와해될 것이다.

 

그러한 시도들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면 공격을 받은 정당은 매우 큰 피해를 입고 정치적 힘이 약화될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극단주의적 대립 상황이 완화되지 않는 한 그러한 시도를 더 강력하게 할 사람이 권력을 차지할 가능성이 높다.

 

 

5.

민주주의에서 대립은 민의에 따른 정치적 행동으로 발생한다. 즉, 투표와 시위, 시민적 요구로 이루어지고, 싱크탱크 및 전문가, 대학 등의 연구와 요구 역시 존재한다.

 

그러나 이러한 민의가 양 극단으로 분리가 된다면 서로간의 타협의 여지는 적고, 이해의 폭이 줄어들수록 상대방에 대한 공격으로만 동력이 작동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민의는 더 극단적이고 강력한 공격성을 가진 이를 대표로 뽑을 것이다. 상대 정당과 진영, 혹은 이민자, 자국의 이익과 산업에 손해를 끼치는 불공적한 외국에 대해서도 그럴 것이다.

 

이는 정치적 내전 상황으로 이어질 것이다.

 

이게 문제가 되는 이유는, 민주주의에서, 그것도 21세기 현대 사회에서 물리적 대립이 실제로 발생할 가능성이 매우 낮다는 것이다. 최소한 한국은 그렇다. 미국에서조차 총으로 무장한 이들이 의회를 점령하는 파격적인 사태가 벌어졌지만 그것이 실제 대규모 물리적 충돌로 이어지진 않았다. 한국에선 총이 없고, 그러한 행동력을 지닌 이들이 매우 적어졌다.

 

한국에서 시민들의 모든 정치적 요구는 폭력이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거세된 평화 시위로 완성되었다. 따라서 이들은 거리에 나와 촛불을 들지언정 쇠파이프와 차량을 동원하여 청와대로 밀고 가거나, 그들에 맞서 빨갱이 폭도, 혹은 수꼴 반역자를 상대로 똑같이 무장한 채 집단 패싸움을 하는 상황은 상상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특정 진영이 보기에 제정신이 아닌 미쳐돌아가는 정부를 단죄하기 위해 혁명을 한다는 것조차 어렵다. 한국의 민주주의와 국가체제는 꽤 굳어진 편이고, 이전처럼 쿠데타와 민주주의 운동, 운동권 투쟁이 활발하던 뜨거운 수프 같았던 시기와는 다르게 되었다. 그렇게 굳어진 체제는 쉽게 변하지 않고, 그러한 틀에서 벗어나지 않으려는 보수성 역시 존재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혁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그러한 혁명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리고 세력이 동참하는가이다. 극단화된 사회에서 시민 90%가 혁명에 동참할 리는 만무하고, 40~50%의 국민이, 현실적으로는 그보다 더 적은 국민이 혁명하겠다고 나선다 해도 군과 경찰이 동원되어 내란, 국가 반역으로 규정될 혁명세력에 대한 물리적 진압이 예상된다.

 

지금의 감시, 통제 시스템과 그것을 집행할 무력은 그 정확성과 강력함에서 독재 시기와 비교도 할 수 없다. 따라서 현재로선 혁명은 불가능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것에 동의할 사람들이 많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지만 그만한 힘이 국가 내부를 쓸어버리기도 어렵다. 그 여파를 감당하기도 매우 어렵다. 외국 세력은 이를 커다란 기회로 여길 것이다.

 

 

6.

그런 이유로 혁명이든 내전이든 실질적 충돌로 이어지는 상황은 발생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당연히 민주주의적 제도로 대립하게 될 것인데, 여당정부의 강력한 정치 권력과 엘리트 카르텔로 완성되는 강력하고도 견고한 기득권의 힘은 특정 정치 세력에 대한 강력한 공격과 보복이 가능할 것이고, 비협조와 반발로 다른 진영에 선 정권의 권력 사용에 부담과 비용을 발생시킬 것이다.

 

이러한 작용으로 상대 진영은 그 힘을 잃어버릴 것이고 그들에 대한 압도적 우위를 차지한 이들은 최소한 단기적으로는 그들이 다시 성장하거나 일어서지 못하게끔 할 것이다. 설령 그들이 다음 대선 때 패배한다 하여도 엘리트 카르텔로 대표되는 각계 각층의 인적 관계망은 건재할 것이고, 총선 때 어지간히 박살나서 인원수부터 약 3배, 혹은 그 이상 차이날 정도의 대패를 겪지 않는 한 의회 권력 역시 조정될지언정 잃지 않을 것이다.

 

그런 상황이 온다 해도 공격을 받은 진영과 정당의 지지자들은 매우 큰 불만과 반발감을 가질 것이다. 마찬가지로 무력감과 절망감으로 정치적 무관심으로 빠질 가능성도 높다.

 

극단주의는 승리했고, 극단주의적 인사가 국민의 대표들도 채워질 것이다. 정당 역시 그러한 성향의 과격한 이들이 헤게모니를 장악할 것이다. 한번 실패 했다고 그러한 영향력이 말소되거나 사라지지도 않을 것이다. 독재 이후 보수당처럼 ,트럼프의 공화당처럼.

 

 

7.

극단적일수록 타협의 폭은 적다. 따라서 극단주의자들이 승리한 미래는 어떠한 쪽이 이기든 상대방에게, 심지어 중도층에게도 긍정적일 순 없다. 승리한 자들은 반대파를 위험분자 내지는 적으로 규정하며 공격할 것이고 그들이 권력을 쥐어서는 안 된다고 믿을 것이다. 나치는 나치가 아닌 정치세력을 견제했다. 가장 큰 적을 당연 유대인과 공산주의자였으며, 더 나아가 슬라브 전체가 되기도 했다. 김일성은 자신의 파벌이 아닌 대부분의 파벌을 숙청하는데 성공했고 이는 스탈린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폭력적이진 않을 것이다. 예전처럼 납치와 고문, 살해와 암매장, 불법 화장이 벌어지진 않을 것이다. 불공정하지만 합법적으로 보일 방식과 제도적인 수단을 동원하여 그들의 정치적 힘과 동력을 잃게할 것이다. 대표할 사람이 없다면 지지자들은 힘을 잃는다. 그들 중 총대를 매는 사람들은 나오겠지만 기존 정치인에 비해 경력, 실력, 경험이 부족할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그들은 약해져갈 것이며 승리한 쪽이 사회를 장악할 것이다. 지지율로 대표될 것이며 정치적 권력을 장악하고 그러한 상황을 꾸준히 이어가려 할 것이다. 우월한 지위와 이익구조를 최대한 오랫동안 유지하고자 하는 건 모든 이들이 바라는 바이며, 엘리트 카르텔과 같은 인적 관계망 역시 그러한 욕구와 이해관계로 구성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반대되는 목소리, 다른 목소리들은 극단주의의 야성 아래 말살될 것이고, 이는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음을 말한다. 헌법은 민주주의를 규정하고, 법과 제도 역시 민주주의적 원리 아래 작성되었지만 실제 민주성은 약해지고 집권 세력의 이익을 위해서 동작할 가능성이 높다.

 

물론 그러한 제도들이 민주주의와 거리가 멀고 대중, 시민과 유리되어간다는 점은 꾸준히 비판될 것이지만, 그러한 목소리는 너무 약하고, 그렇지 않다해도 집권층이 그러한 요구에 부응해줄 이유가 없다. 그렇게 간신히 도달한 제도적 민주주의는 그마저도 형해화되어 실질적 파시즘 국가와 유사한 형태가 될 것이다.

 

아마 그 모습은 중국와 일본을 섞어놓은 형태일 가능성이 높다. 적어도 한국에선 말이다.

 

 

8.

극단주의적 요구는 다양한 목소리와 관점을 묵살시킨다. 언젠가 말했듯, 극단주의는 좁은 시야를 가지고 그 외의 것을 배척하기 때문에 자신이 아는 것과 자신이 설명하는 세상의 바깥을 상상하지 못하고, 거부한다. 단지 거부하는 걸 넘어 틀렸다 규정하며 공격적으로 반응한다. 이는 극단주의의 속성이 공격적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신들의 세계관에 대한 공격으로 여겨지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들은 그러한 침범을 용납하지 않는다.

 

한국의 정치사회적 환경은 극단주의적 대립으로 심화되고 있다. 그리고 이는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어느 한쪽이 온건하고 더 이성적이라 해도 다른 한쪽이 그렇지 않다면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유의미한 효과를 보기 어렵다.

 

이는 아주 간단한 이유 때문인데, 경기에 있어서 룰은 필수적이지만 그것을 어느 한쪽만 지키고 다른 한쪽이 지키지 않는다면 경기가 성립되지 않는다. 그리고 룰은 단순히 법률이나 제도가 아니라, 그것을 다루는 사람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시민들이 극단주의적 요구를 하면 그것에 부응하는 이들이 나오기 마련이다. 정치인들은 그들의 지지에 편승하여 권력을 확보할 것이고, 관료와 엘리트 역시 더 많은 부와 명예, 권력을 얻기 위해 그러한 조류에 동승할 것이다. 때로는 그들 스스로가 그러한 분위기를 심화시키고 조장할 수도 있다. 아예 그들 자신이 극단주의적 관점에 동의하거나, 사회의 요구보다 더 극단적인 경우도 있을 것이다.

 

 

9.

문제는 이를 해결할 방법이 마땅치 않다는 것이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본인은 해결할 방법이나 완화시킬 방법 같은 건 없다고 본다. 유일하게 떠오를만한 것은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상태를 먼저 조성하는 것 뿐이다. 풍요로운 환경에서 생존에 대한 욕구는 대단히 낮아진다. 더 많은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더 치열하고 잔혹할 필요가 없으니 말이다.

 

정치적 대립이란 정치 권력이란 한정된 자원을 얻기 위한 것이고 이념 대립 역시 결과적으로 그들이 믿는, 더 나은 상태를 만들기 위한 관점의 대립이다. 일자리, 산업, 노동환경 등 소위 말하는 먹고 살기 좋은 상태를 만들기 위한 것이다. 즉, 어떤 것이 더 좋은 상태를 만들 수 있느냐의 논쟁이자 대립이다. 케인즈의 주장이 더 좋은 상태를 만들었던 때가 있고, 그 한계로 인해 밀턴 프리드먼의 신자유주의가 등장하며 그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던 시절이 있었다.

 

가능하냐 불가능하냐를 떠나, 아주 단순하게, 정말 단순하게 가정했을 때 대한민국의 거의 대부분의 국민이 지금과 별 차이 없는 물가 상태에서 지금 연봉의 2배를 받는다면 극단적 정치대립은 상당히 완화될 것을 기대할 수 있다. 어떤 것이 더 좋은 상태를 만들 수 있느냐, 누가 나라를 더 많이 망치고 더 많이 망칠 더 나쁜 놈이냐를 두고 목숨 걸고 싸울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당장 먹고 살기 어렵지 않고 아마 앞으로도 오랫동안 그럴텐데 그런 것에 온 힘을 다해 싸울 이유가 무엇이 있느냐는 것이다. 생존은 보장되었다. 남의 것을 빼앗을 이유도 없고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해 더 치열하게 싸울 이유도 없어졌다.

 

그러나 그렇지 않기에, 한국을 비롯한 유사한 경제적, 인구적, 사회구조적 문제를 안고 있는 전 세계 대부분의 국가들은 비슷한 문제와 비슷한 현상을 겪고 있다.

 

그리고 말했듯이,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현실적으로 없다. 그저 더 심화되어 임계점을 넘는 것을 눈뜨고 기다릴 수밖에 없다.

 

그것은 내전이 될지, 전쟁이 될지, 승자의 정치적 말살을 통한 파시즘적 정부의 구성 및 사회의 재편이 될지 모를 일이다.

 

놀랍게도, 그리고 불행하게도, 또한 끔찍하게도, 그나마 가장 나은 건, 전쟁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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