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1/11 - [취미/ㄴ리뷰] - 개판(박현욱 작가) 작품 심층 해석 1편.
2014/05/05 - [취미/ㄴ리뷰] - 사이트별 웹툰 리뷰 및 추천
※ 본 리뷰는 작품에 대한 내용누설이 있습니다.
이전에도 심층 해석을 올렸고, 다른 웹툰들 리뷰하면서 같이 리뷰한 적 있었죠. 이번 리뷰는 좀 제대로 파볼 생각입니다.
작품의 전체적인 메시지.
작품의 주제를 관통하는 메시지는 시작 부분의 판 영감의 말에 다 드러나 있습니다. 충동과 의지, 그 사이의 판단. 판 영감은 정의를 주장하는 아마란스가 변질되어 가는 걸 보며 은퇴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새롭게 들어오는 신입인 바울에게 노인네의 조언 정도로 충동과 의지의 구분과 중요성을 이야기해주죠. 이러한 말은 그저 시작 부분에서 흘러가듯이 딱 한번 나올 뿐입니다. 조언은 그저 조언이라는 듯이요.
작품 속 캐릭터들은 다들 이런 충동적 행동을 경험해본 적 있습니다. 바울도, 알레사도, 토드도, 더크도, 도리안도, 허쉬 영감도, 크롬도.. 모두 그런 충동적 행동을 해본 적 있죠.
그리고 모두 다시 한번 충동과 의지 사이의 기회를 얻습니다. 그리고 그들 중 의지를 가지고 선택하는 자들도, 그 기회를 놓치고 다시 충동을 몸을 맡기는 이들도 있죠. 재미있게도, 의지를 선택한 이들은 살아남고, 충동을 선택한 자들은 죽게 됩니다.
충동과 의지란 무엇일까요? 스스로의 의지로 무엇을 한다고 한다 했을 때, 의지란 그렇게 가벼운 단어가 아닙니다. 판 영감이 이에 대해 훌륭한 설명을 했지만, 덧하여 설명해보자면.. 충동이란 어떠한 밀림입니다. 충동에 등떠밀린다는 표현이 있듯이, 어떠한 일을 할 때 충분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이나 결심이 없는 그저 자신의 감정적 해소를 위한 등떠밀림이죠.
이러한 감정적 문제는 자신이 타자에게 가지는 분노나 복수심 따위가 될 수도 있고, 상황 자체에 의한 강박적 반응이기도 합니다. 가령 투견인 바울은 투견이기 때문에, 남들이 투견을 그렇게 보기 때문에 다른 길 갈 기회 없이 싸웠었고, 남들 또한 그걸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심지어 바울 조차도요. 하지만 이는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싸운 게 아니라 남들의 시각에 따라 움직여준 것에 불과합니다. 싸우고 싶어서 싸운 게 아니라, 싸워야 하기 때문에 싸웠던 것, 혹은 싸우는 게 정상적이기 때문에 싸운 것에 불과합니다. 하고 싶든 하기 싫든 해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상황이 본심을 속이게 된다면 그것이 곧 충동이 되는 거죠.
의지는 이와 다릅니다. 밀림이 아니라 끌림이거든요.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 그것입니다. 충분히 생각하고, 고민해서 얻어낸 결론을 신념과 확신에 따라 실천하는 것, 그것이 의지이죠. 감정적 불만이나 고통마저도 극복해내고 얻어낸 결론과 실천이 곧 의지입니다. 그런 감정적 불만이나 고통, 자신을 어떤 상황이나 상태로 밀어넣는 상황을 이겨내고 극복해내야 그것이 의지라고 할 수 있다는 거죠. 그러한 과정 속에 끊임 없는 고민과 생각을 할 수 밖에 없고요.
물론 모두들 실수할 때가 있습니다. 모두 실수 한번 쯤을 할 수 있는 법이죠. 바울도, 토드도, 크롬도, 알레사도, 더크, 도리안, 모두 실수했던 전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두번째 기회가 있다는 말이 있죠. 모두 두번째 기회를 가질 자격이 있고, 모두 그런 자격에 따라 기회를 받았습니다. 바울은 그 기회에서 롤프와 싸워서 죽이지 않고, 도리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레아를 구한다는 선택을 했습니다. 롤프는 다시 제국으로 돌아와 아버지를 구하고 친구들이 다치지 않게 전쟁을 막고자 했으며, 이후에도 자신의 친구를 구하기 위해 제국의 총수 자리를 내던지기도 했습니다.
허쉬는 다시 한번 떠나겠다는 아들에게 해야 했던 말을 해주며 후회 없이 보내줬으며, 더크는 진작 했어야 했던 일을 하기 위해 후버와 싸우고 도리안은 진작 했어야 했던 사과를 했죠. 아론 또한 과거의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받습니다. 모두 기회가 왔을 때 충동이 아닌 의지를 가지고 새롭게 선택했던 거죠. 그리고 이들을 작품이 끝날 때까지 모두 살아남습니다. 허쉬는 이런저런 이유들로 인해 죽긴 하지만요;
하지만 반대로, 그 두번째 기회를 보지 못하고 다시 한번 충동에 빠진 채 움직였던 토드와 알레사(나오미)는 죽게 되었습니다. 10번째 생일 날 장로와 참석자를 죽이고 제국의 거처에서 15년의 계약을 승낙했죠. 하지만 알레사를 죽이고 나오미의 함께 제국을 무너뜨리겠다고 마음 먹습니다. 나오미도 마찬가지죠. 알레사가 죽은 뒤 토드에게 제국을 무너뜨리겠다고 엄포를 놓았고, 이후에도 꾸준히 그것을 위해 활동합니다. 자기 스스로 말하죠. 기회를 놓친 건 자신이었다고.
결국 의지에 따라 선택했던 이들은 살고, 충동에 휩쌓였던 자들은 죽었습니다.
이러한 의지를 가진 결정은 모두 그들 나름에게 굉장히 중요한 선택지였습니다. 그저 선택에 불과하지만, 그게 정반대의 결말로 이끌 상황이었으니까요. 누군가는 친구를 잃게 될 상황이었고, 누군가는 삼촌과의 신뢰를 잃었을 것이었으며, 누군가는 친구도, 자신의 신념도 모두 잃어버릴 수도 있었고 그 중 한명은 그 상황에서 괴물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모두 의지를 가지고 선택했죠. 자존심은 잠깐 접고, 부담은 감당하며, 충분히 생각하고, 충분히 고민하고, 다시 후회없을 그런 선택을요. 그렇기 때문에 의지를 가지고 무언가를 한다 했을 때, 의지란 그렇게 가벼운 단어가 아닌 셈이죠.
각자의 인생.
바울의 경우.
주연급 인물 중에 누가 고통과 후회 없는 삶을 살았겠냐만, 바울은 그 중에서도 가장 비참했던 편이었죠. 태어나 투견이 되고 싶다고 했을 때도 그의 아버지는 자신의 아들이 어떤 대우를 받고 어떻게 살지 눈에 훤했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처럼 되고 싶다는 아들이 얼마나 기특하고 고마웠을까요. 그래서 많이 용기를 주고 위로도 해줬을 겁니다. 그렇게 희망을 가지고 열심히 했지만 결국 반푼어치 잡종 투견이라는 혈통에 얽매여 자신의 실력도 제대로 발휘할 수 없게 되며 물어 뜯기는 개로 살다 차별 받고, 결국 버려지게 되죠. 그것도 진작에 도태 당했어야 했다는 말마저 들으며..
바울의 과거편은 그런 비참함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는 데, 평소처럼 차별 받고 자신의 가치를 의심하는 우울한 일상을 보내며 자신과 자신의 길에 회의를 느낍니다. 그래서 도망가려고도 했고요. 하지만 부모님이 도망치지 않게 바로잡아줍니다. 무엇을 하든 끝은 보라고. 끝을 보지 않고 도망가지 말라고.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솔직히 하고 싶지도 않았을 겁니다. 아니, 하고는 싶지만 자기가 원한 방식이, 원하는 싸움이 있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 것도 할 수 없었고, 그렇게 밑바닥 투기장에서 굴러야 했습니다. 그렇지만 이겨도 시원하지 않고, 답답함만 느끼죠. 그러다 아버지가 자신을 찾아오고, 똑같이 도태되어야할 것들 취급 당하며 버려집니다.
비참했죠. 자신은 그렇다쳐도 아버지마저 퇴물 취급 당하며, 도태될 거라 낙인을 찍듯 치워버렸으니. 이런 상황 속에서 바울의 심리 상태는 매우 위험할 수준으로 무너집니다. 눈은 검게 나오고 혼돈과 같은 느낌의 그림체로 그려지며 암울하고 위험한 분위기를 내면서요.
그러다 아버지가 정신차리고 바울에게 제대로된 길을 선택할 기회를 줍니다. 그 동안 자신의 희망을 바울에게 투사했던 걸 깨달았던 거죠. 자신은 아들을 위해 용기를 복돋아주고 희망을 주고 노력하면 성과가 나올 거라고 믿게 해줬지만, 사실은 반쯤은 자기만족이었던 겁니다. 그렇게 바울은 새로운 마음 정리를 할 기회를 받게 되죠.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건달들과의 시비에 아버지가 죽게 되고, 바울은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마음정리를 끝내고 진짜 자신만의 길을 선택합니다. 자기 의지로요. 그래도 역시 아버지처럼 되고 싶다며. 이전과 똑같은 길이지만, 그 길에 담긴 의미는 다릅니다. 이번엔 자신의 의지로 선택한 길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자신의 처지는 변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누가 되었든, 자신이 어떤 것인지로만 보는 세상 속에서 여전히 그는 반푼어치 잡종 투견에 불과합니다. 여전히 물어 뜯기는 개로 취급되다 사고치고 결국 쫓겨나 스스로를 정의라 부르는 아마란스라는 조직과 만나죠.
이때 바울은 스스로의 의지로 아마란스에 갔을 지, 충동에 의해 갔을 지에 대해선 잘 모르겠습니다. 반쪽짜리 투견은 투견도 아니라더니, 사회에선 반쪽짜리 투견이라도 투견이라며 무서워하죠. 결국 남은 선택지는 하나 뿐이었던 겁니다. 아마란스..
아마란스에서 바울은 최선을 다합니다. 다하고자 했고요. 헤스터를 지키려 했고, 후버와도 싸웠고, 플루토를 쓰러 뜨렸습니다. 아론도 영입하고, 심지어 바스커빌을 때려눕히기도 했습니다. 이후에도 알레사를 지키고 전쟁을 막기 위해 분투했죠. 하지만 돌아온 건? 헤스터는 결국 죽었고 크롬은 제국으로 돌아갔으며, 토드를 잡기 위해 싸우다 코스타를 잃기도 한데다, 토드의 탈출과 이어지는 허쉬의 죽음과 함께 제국과 아마란스는 전쟁이 벌어졌고, 사라 바스커빌의 집에 가서는 친구에게마저 잡종 소리를 들었으며 자신이 목숨을 걸듯이 싸웠음에도 불구하고 알레사를 빼앗깁니다.
제국에 가서도 친구에게 제대로 도움도 못 받고 갇혀 있었으며 모든 것을 되찾기 위해 모든 걸 걸고 싸웠지만 결국 레아의 말대로 이겨도, 져도 후회할 수 밖에 없는 결과만 발생했죠. 전쟁은 막을 수 없었고 아마란스와 제국은 공멸로 향해 치닫습니다.
마지막엔 자신이 믿었던 모든 것이 그저 거짓에 불과하다는 진실마저도 감당해야 했습니다. 바울에게 아마란스는 의지에 따른 선택이든, 충동에 따른 선택이든, 어느 쪽이든 진심이었습니다. 비참한 인생을 살며 비루하게 살아온 투견 한 마리의 인생 제대로 바꿔줄 수 있냐고 물었을 때의 그 대답은 그에게 아무런 가치도 지나지 않는 그저 기만에 불과했던 거였죠. 정의는 없었고, 그의 노력은 무가치한 것이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했던 말과는 다르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다시, 최후의 순간 두번째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레아를 구하는 거죠. 레아를 구할 수 있다면 자신이 원했고 추구했던 모든 진심과 모든 것을 되찾을 수 있었던 겁니다. 영웅이 될 수 있고 가치 있는 싸움도 할 수 있게 되었죠. 그리고 결국 토드를 쓰러뜨리고 레아를 구해내는 데 성공하죠. 단지 문 밖을 나간다고 세상이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았을 뿐.. 그는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낸 겁니다.
어려서부터 태생적으로 가지는 한계와, 그 한계 속에서 아무리 노력해도 보이는 성과는 없고, 잡종이기 때문인지, 다른 투견들은 가지지 않는 싸움에 대한 모종의 가치와 그에 대한 갈증을 느끼며 많은 고민을 했던 바울입니다. 아무리 비참하고 속상한 상황에서도 근성 있게 버티고 버텨 계속 노력하며 언젠가 찾아올 희망, 혹은 기회를 바라지만, 결국 그 누구도 자신을 가능성 있는 투견으로 봐주지 않고, 그저 잡종으로만 바라보았습니다. 그가 누구인가보다 무엇인가만을 바라보는 세상이었죠.
바울이 투견이 되고 싶었던 이유는 투견인 아버지가 멋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같이 되고 싶어했죠. 그래서 말했듯, 죽어라 노력하고 근성있게 버텼죠. 차별 받고 괴롭힘을 당해도 견디고 버텨서 언젠가 경기 한번 나가기를 소망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관장의 노골적인 차별과 폭언은 그로 하여금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만들었죠. 실력도 변변찮은 후배의 도발에 넘어가 결국 싸우고 쫓겨납니다.
아마란스에 들어간 이유는, 그럴 수 밖에 없었기도 하지만 그러고 싶었던 것도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아버지처럼 되고 싶었다고 했죠. 아들을 위해 투기장에서 싸웠고,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건달들과 싸우다 죽었습니다. 아버지는 영웅이었죠. 그리고 아마란스는 스스로를 정의라고 했습니다. 밑바닥에서 다시금 비참함을 느끼던 바울에게 그 말은 하나의 희망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그의 앞날은 그의 의욕만큼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새 친구와 새 식구를 만났지만, 첫 임무에서부터 헤스터는 죽음을 맞았고, 그는 아무 것도 못했습니다. 그 날 죄책감을 가지게 됐죠. 오른손의 흉터는 낙인이 되었고요. 그래서 다짐했습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게 하자고. 그래서 바스커빌을 잡으려 했을 때 그렇게 적극적이었죠. 토드를 잡음으로써 보상을 받고 속죄를 바랬을 겁니다. 죄책감과 절박함에 떠밀리면서요.
하지만 토드를 잡았지만 반대로 잃은 것도 컸습니다. 코스타가 죽었거든요. 바울은 나중에 말합니다. 싸우지 못해 잃어도 봤고, 이겼는 데도 지키지 못한 것도 있으며, 죽을 각오로 싸웠음에도 불구하고 빼앗긴 것도 있었죠. 싸우지 못해 헤스터를 잃었고, 이겼음에도 불구하고 코스타를 잃었어야 했습니다. 훗날 발생하는 전쟁에서 한스가 알레사를 데려가려고 왔을 땐 죽을 각오로 한스에 맞섰지만 결국 일어나지도 못할 정도로 처참하게 얻어맞고 쓰러져야만 했죠. 알레사를 빼앗기면서요.
그의 모든 노력이 배신 당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원망했죠. 잡종 투견으로 태어났다는 걸, 자신의 혈통을 원망하면서요. 맹수였으면 덜 노력했어도 지금보다는 더 나았을 거라면서요. 다시 한번 느끼는 비참함이었을 겁니다. 스스로도 아론에게 화내면서 말이죠.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때 한스는 쿠퍼 패거리에게 쓰러진 다른 맹수 부하들에게 타고난 혈통만 믿고 노력은 안 했다며 평했죠. 가장 맹수 다운 맹수는 바울을 인정했던 겁니다. 비록 패배했지만..
하지만 바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제국으로 가고자 합니다. 모든 것을 되찾기 위해. 그 판돈으로 잃어버린 모든 것을 걸었지만.. 그러나 전쟁을 막기 위해 롤프를 쓰러뜨렸음에도 결국 롤프는 총수의 자리를 내던지고 전쟁은 막을 수 없게 됩니다. 여전히 노력했지만 아무 의미가 없었죠. 그리고 마침내 전쟁이 본격화되고 르넨은 토드에게 살해 당하며 바울은 스스로 감옥 문을 부수고 나옵니다. 그리고 토드와 알레사, 나오미에 대한 진실을 듣게 되죠.
바울은 정말 충성을 다했습니다. 개들은 원래 그런다고. 그래서 충성을 다했다고. 하지만 그 결과가 고작 이따위 기만과 위선, 배신이었다는 걸 깨달은 거죠. 알레사를 구하기 위해 죽을 각오를 해서 싸웠고, 죽을 각오로 왔으며, 죽을 각오로 구하러 갔지만 그 모든 가치는, 아마란스에서의 모든 노력은 아무런 의미도 없고 가치도 없는 장기말로서의 행동에 불과했던 겁니다. 그저 이용만 당하고 배신 당하는 그런 말. 충견. 투견, 사냥개.
토드와 싸우면서 다시 한번 오른손에 송곳이 꽂히며 죽을 뻔하기도 했지만, 결국 진실을 알고자 했고, 진실을 알게 된 바울은 크나큰 환멸과 배신감을 느끼게 됩니다. 롤프 또한 흔들리죠. 그렇지만 바울은 근본적으로 정의롭고 착한 녀석이죠. 그래도 죽게 둘 순 없다고, 이용만 당하는 건 익숙하다고, 그래서 이번엔 진짜 실망했다고 하죠. 그러면서 죽진 않게 지켜주면서요. 그래도 마지막 순간 모든 가치와 의미를 걸고 토드와 싸운 바울은 결국 기회를 잡고 자신의 모든 것을 되찾습니다. 토드를 쓰러뜨리고 삶을 막 포기하려던 레아를 구해냈거든요.
충동에 따라 다른 체육관 녀석들과 싸우기도 했고, 충동에 따라 지하 투기장에서 구르기도 했지만, 결국 마지막 순간을 위해, 그리고 그 순간에서도 충동이 아니라 의지를 통해 무엇을 하고자 했고, 그것을 위해 노력을 한 결과 바울은 그 의지에 보답을 받은 것이죠. 비록 전쟁을 막지는 못했고, 나오미의 죽음 또한 막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롤프와 레아를 구해내며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냈습니다. 도태되어야 하는 잡종이 아닌 누군가를 구해낸 영웅이었고, 사랑 받아 도태되지 않을 수 있게 되었죠. 작품의 시작과 끝은 그의 인생과 추구하는 가치와 함께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버려진 비루한 투견에서, 영웅으로.
크롬, 롤프의 경우.
크롬.. 롤프도 결코 쉬운 인생을 살았던 건 아닙니다. 보육원에서 버려진 아이로 키워지다 자식(아들)을 낳지 못했던 제국 총수의 눈에 띄어 제국에서 살게 되죠. 그 이전엔 토끼 헤스터와 친구로 지내며 다른 녀석들에게 괴롭힘 당하는 헤스터 대신 싸워주기도 했죠. 맹수와 토끼의 친우관계였습니다. 그런 관계도 제국에 입양되면서 거의 끊겼는 데, 그래도 몰래 찾아가 놀기도 하고 또 대신 싸워주기도 했죠. 그러다 들키기도 했고..
하지만 결국 자신의 맹수로서의 본성에 의해 멧돼지 녀석의 얼굴을 그어버리고 피 묻은 손톱을 자신에게 뻗는 걸 본 헤스터는 그대로 도망가게 됩니다. 어린 롤프에게 그건 굉장히 큰 슬픔이었겠죠. 자신의 유일한 친구가 자기를 맹수로 보고 두려워서 도망간다는 사실이.. 그리고 그대로 맹수로서 자라납니다. 그리고 허쉬의 기대에 들어맞는 촉망 받는 차기 총수로서 잘 활동해오죠.
그러다 과거의 잔재인 보육원 친구를 다시 만나게 되고, 친구를 위해 대신 싸워줬던 때처럼, 다시 싸우게 됩니다. 이번엔 자기 형제와. 친했던 사이는 아니지만, 그 날의 경험은 그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던 겁니다. 그래서 생각하고 고민한 결과 제국을 나가겠다는 선택을 하게 되죠. 제국의 차기 총수이자, 맹수가 아닌, 개인 롤프의 의지에 따른 판단으로써.
그러나 그레이 본즈 허쉬는 그걸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하고 큰 충격을 받게 됩니다. 분노하고 심지어 빌기까지 했습니다. 그래도 자신의 의지대로 선택한 이상 굽히지 않았고, 이미 말을 꺼낸 이상 되담을 수도 없었죠. 그건 허쉬 영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손톱을 뽑으라. 총수로서 한 말은 번복하기 어렵죠. 그래서 뽑았습니다. 그래서 뽑혔고요. 체면도 잊고 용서해달라 울부짖고 결국 맹수로서는 불구, 반폐인이된 몸으로 아마란스에 들어가게 됩니다.
롤프는 이때의 선택에 대해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의지대로 선택한 거니까요. 그 선택에 의해 상처 받고 고통받을 순 있지만, 그것도 결국 한 때, 자신의 의지대로의 선택은 자신을 배신하지 않습니다. 잃은 만큼 얻은 것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레이 허쉬는 후회합니다. 의지가 아니라 충동대로 선택한 결과니까요. 그 충동은 결곡 잊혀지지 않고 아물지도 않습니다. 그 선택 또한 자신을 배신하지 않죠. 정직하게 후회와 고통이 찾아오니까요. 잃은 것만 있고 얻은 것은 없는 것이 충동적 선택의 결과인 겁니다.
제국을 등진 롤프는 크롬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받고, 자신의 보육원 시절 유일했던 옛 친구를 만납니다. 헤스터를요. 보육원 친구들이 맡긴 유일했던 친구 헤스터. 헤스터는 알아보지 못하지만 크롬은 헤스터를 기억합니다. 그리고 그게 중요한 거죠. 다시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것 말입니다. 새로 얻은 친구인 셈이지요. 헤스터가 무서워 할까봐 알아보지 못하도록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다른 모두가 다 자신의 정체를 알아도, 단지 그 친구만 알지 못하면 된다고요. 다 커서 다시 만난 친구지만 자신의 이름도 정체로 감추고 지냈어야 했다는 겁니다. 그만큼 소중한 친구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기대고 싶은 누군가가 필요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걸 표현하고 내색하진 않지만 그 자체로 안심이 되는 그런 존재로서요.
알레사에 의해 거두어지고 그녀에게 큰 은혜를 입은 크롬은 아마란스에서 열심히 노력합니다. 그래서 징벌가라는 별명도 얻게 되었고요.
롤프, 크롬은 맹수 치고 유약하고 정이 많은 성품을 가졌습니다. 어렸을 때 헤스터라는 토끼와 친구가 되어 놀기도 했고, 보육원을 폐쇄하고 그곳 식구를 내쫓았다는 말 때문에 가족과 싸우기도 하죠. 맹수들은 같은 맹수가 아닌 다른 녀석들에 대해 그런 태도를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맹수 다운 것은 한스나 르넨이 더 맹수 답죠. 아니, 다른 부하들도 롤프보단 맹수답습니다.
결국 그런 본성 때문에 제국을 나오게 되었고, 아마란스에 몸 담게 되는 계기가 되죠. 하지만 맹수는 맹수라고, 어울리지 못하고 고독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모두와 정을 주고 받으며 한 식구로 지냈지만, 딱딱한 아저씨라는 말을 들을 정도는 되죠. 그런 애매한 성질은 판에게 여전히 고독함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는 평을 듣습니다. 그만큼 겉으론 맹수처럼 보이고, 딱딱하고 무너지지 않는 것처럼 보여도 실은 유약한 성품을 가지고 있고 위태롭다는 겁니다.
맹수에게 자비를 구하지 마라. 맹수를 이야기할 때 자주 나오는 표현이죠. 맹수들은 봐주지 않습니다. 그저 담담하게 가차 없이 처리해버리죠. 하지만 크롬은 그런 말을 하면서도 무언가 보여주기 위한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그가 맹수다운 맹수가 아니기 때문이죠. 마치 맹수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워너비인 것처럼, 맹수인 척 하는 듯한 느낌.. 그렇게 말하면서도 결국 친구를 위해 쓰러진 상태에서도 손을 뻗는 후버를 보고 도리안을 놔주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정에 약해요. 이 점은 알레사도 밝힌 적 있죠.
그렇기 때문에, 롤프는 제국의 후계자이자 총수로 어울리지 않는 겁니다. 정치적 판단, 제스쳐는 분명 뛰어나고 상황 판단과 명분 따위를 내세워 상황을 모면하거나 조절하는 일에 매우 능숙하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하들 성에 차는 결단을 내리는 건 절대 아닙니다. 친구들 다칠까봐, 자신이 사랑하는 알레사가 다칠가봐 아마란스와의 전쟁을 미루고 막으려 들죠.
그 탓에 인망도 줄어들고 불만은 더더운 커져가는 와중에 대놓고 조롱을 듣기도 합니다. 그러다 바울에게 패배했을 때 바울을 살리기 위해, 그리고 자신의 실수와 부족함을 인정하고 총수의 자리를 내려놓습니다. 그리고 그 상황 전후로도 계속해서 총수로서의 자신, 그리고 자신을 총수로 만들려 했던 아버지의 심정을 헤아리기 위해 고뇌하고 고민하죠. 어째서 이렇게 부족한 나를 총수로 만들려 하셨을까.
그리고 총수의 자리에 올라서서야 비로소 아버지의 시야로 보던 세상을 알게 됩니다. 어째서 자신의 손톱을 뽑았어야만 했는 지, 어째서 자신을 총수로 올리려 했는지 등등을..
속속히 밝혀지는 과거의 사실들과 새로운 사실들은 자신이 처한 모든 상황에 염증을 느끼게 합니다. 그래서 모든 걸 등졌죠. 오직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와 자신의 친구만 빼고요. 제국도, 총수도 다 필요 없고 자신이 원하는 것들만 무사하면 되는.. 그래서 총수의 자리를 내던지면서 조롱을 들어도, 르넨에게 무릎을 꿇는 굴욕을 당하면서도 감내할 수 있었던 것이고 다시 발톱이 뽑힐 것이라는 걸 알아도 견디고자 마음 먹었죠. 한번 해봤으니.. 그러나 그런 희망과는 다르게 일이 흘러갔죠. 그 중 그가 받아들이기 가장 어려웠고 믿고 싶지 않았던 사실이 바로 알레사는 사실 나오미라는 쌍둥이 자매였고, 목적은 제국과 아마란스의 공멸, 그리고 자신의 죽음. 처음부터 진심이 아니었을 수 있다는 사실..
크롬.. 롤프는 정에 약해요. 그래서 사랑에도 약하죠. 알레사-나오미의 가장 위험한 점이 믿음을 받는 것이고, 그래서 치명적이라곤 하지만 롤프는 끝까지 믿음을 버리지 않으려 했죠. 하지만 결국 사실은 사실이고, 그는 그저 받아들여야만 했습니다. 그녀의 죽음 또한 말이죠. 토드가 말합니다. 통곡이라도 할 줄 알았다고.. 하지만 그러지 않았죠. 이미 9년적 죽은 것이니까. 다시 토드가 말합니다. 이제야 맹수다워 졌다고..
토드의 경우.
바울도, 롤프도 모두 자기 인생을 살아오면서 자기 의지라는 게 조금이라는 게 개입되긴 했다는 점과는 다르게, 토드의 경우는 처음부터 자신의 의지 없이 암살자로 만들어졌습니다. 태생도, 성장도 모두요. 그렇다고 그의 모든 행동과 선택들이 정당하는 건 아니지만, 가장 끔찍한 삶이기도 했습니다.
태어나서 자랄 때까지 엄격한 교육과 환경 속에서 자라야만 했습니다. 애초에 태어난 거 자체가 어떠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만들어진 생명에 가까운 존재이기도 하고요. 그 자체로 의지와 인격이 있는 존재라기 보단, 하나의 도구로서, 도구적 목적을 위해 태어난 개체에 가깝습니다. 그런 토드에게 엄격한 교육을 시키긴 하지만, 토드의 부모 또한 그의 존재와 삶에 연민과 슬픔을 가지고 있었죠. 그래서 그걸 고쳐보려고도 했고요.
목적에 맞게 만들어진 도구이긴 해도, 생명은 생명이고 아이는 아이죠. 감정이나 욕망을 제어하기 위해 삭막한 존재로 키우긴 했지만, 그래도 초콜렛은 맛있었던 모양입니다. 주니까 받고, 나중에 그게 기억이 남아 생일 선물로 달라고도 하니까요. 또한 자신이 무언가를 키운다는 것에도 느끼는 바가 있었습니다.
앵무새를 키우면서요. 이 앵무새는 토드 바스커빌을 설명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상징이자, 하나의 아이덴티티입니다. 작품 내에서도 나오듯이, 토드는 이 앵무새라는 존재를 보았을 때 사냥도 못하고 알도 낳지 못한다며 마치 살아 있지 말아야할 것으로 보았죠. 그게 질투심 때문이든, 아니면 태어나 자라고 교육 받은 데로의 효율성과 목적을 따지는 하나의 사상 때문이었든 어린 아이가 할 만한 말은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토드는 그 앵무새에게 어떠한 성취, 애정 따위를 느꼈고, 긍정적 감정을 얻었으며 그걸 표현하기도 했지요. 자신이 말을 가르쳤고 그걸 어머니께 보여주며 자랑스러워 했어요. 성취감을 느꼈고요. 즐거워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앵무새도, 가문의 장로가 앵무새를 죽여봐. 라는 말 한마디에 굳어버렸죠. 그리고 실패작 취급을 받았습니다. 고작 10살 어린애에게 있어선 가혹한 일이었죠.
앵무새는 토드의 어린 시절에 가질 수 있었던 어린아이다운 요소들이자, 하나의 가능성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런 상징이 되는 앵무새를 토드는 본인의 손으로 죽이고 맙니다. 실패작이라는 말에 충격을 받아서, 자신의 가치를 확인하기 위한 행동이었죠. 똑같이 자신의 가치를 찾고자 했던 바울은 방황했고, 토드는 하루도 지나지 않아 증명하고자 했던 겁니다.
강박적으로요. 그리고 충동적이기도 했고요. 고작 10살짜리 어린애입니다. 그냥 어린애도 아니고 가문을 되살리기 위해 만들어지고, 교육받아온 도구적 목적을 위한 존재였죠. 즉, 자신이 해야할 일을 잘 알고 있었고, 본인 또한 그 환경과 압박에 순응하며 살았습니다. 장로가 했던 앵무새 하나 죽이지 못하는 암살자? 실패작이다. 라는 말은 토드라는 존재 그 자체를 부정하는 말이었습니다. 하루 아침에 자신의 존재가 부정당하는 건 굉장히 무서운 일이고 슬프고 위험천만한 일이죠. 그렇기 때문에 토드는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내야만 했고,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존재 자체를 스스로도 납득하지 못하는 위태로운 상황이었던 겁니다.
그래서 죽였지요. 역대 최고의 재능을 가지고 부모보다 뛰어난 실력으로. 그리고 그 순간 토드는 어린 시절에 가지고 있었던 좋은 것들을 모두 잃었습니다. 즐거움도, 애정도, 뭐가 됐든. 그 영향은 부모마저도 두렵게 할 정도였고요. 이때 토드는 이미 한번 자신의 가능성을 죽인 겁니다. 어쩌면 미래엔 남들처럼 살 수 있었던 기회를 스스로의 손으로 망가뜨린 거죠.
그리고 이어지는 그 사건에서 괴물이라 불릴만한 자신조차 자식이라고 살리고 대신 죽어간 아버지의 희생에 분노와 슬픔을 느꼈습니다. 자신이 저지른 복수라는, 그리고 존재 가치의 증명이라는 충동적 선택으로 또 하나 잃어버린 겁니다.
어머니는 나름의 자식에 대한 정 때문에, 그리고 그보다 더 큰 두려움에 떨면서 허쉬와 거래를 하고 계약을 맺습니다. 그리고 토드를 버리고 숨어살게 되죠. 토드는 그 점에 분노하고 웃을 수도 있었고, 울 수도 있었다고 말하며 자기만 괴물이 아닐 거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걸 증명하겠다고 하죠. 그렇게 15년 뒤에 당당히 찾아 뵙겠다고 마음을 먹습니다.
이는 마치 바울이 아마란스에 들어가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미 상황 자체가 그럴 수 밖에 없는, 선택지라곤 없는 상황에서 찾아오는 유일한 길이죠. 그리고 그걸 의지인지 충동인지 알 수 없는 결심과 함께 선택하는 모습과요. 하지만 어찌됐든 선택은 선택이고, 모든 선택은 결과를 낳습니다.
그렇게 살아온 14년이지만, 마지막 15년째에 문제가 생깁니다. 제국의 비밀요원이었던 알레사를 죽이고 나오미와 만났던 거죠. 그 문제 때문에 허쉬와 만나지만 허쉬는 실수라고 여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칙은 원칙이기 때문에 어머니와의 만남을 파토내버립니다. 그 때문에 토드는 복수심에 나오미의 계획에 동참해버리죠. 그 이후 나오미와 함께 아마란스와 제국의 공멸을 위해 움직입니다.
토드는 개판에서 가장 강한 캐릭터 중 하나입니다. 싸움이 아니라 살인을 목적으로 한다면 토드 이상의 존재는 없을 정도죠. 15년이 넘는 동안의 암살 경험, 격투 능력, 심지어 지적 능력과 통찰력마저 뛰어납니다. 혼자서 2진이라곤 해도 제국의 맹수우리 속에서 수 십이 넘는 제국의 패밀리를 참살하고 체력이 빠진 상태에서도 바울, 롤프와 연달아 싸우면서도 지치는 기색 없이 계속 싸우는 체력과 근성, 격투 능력은 말이 안 나올 정도입니다. 심지어 몇번은 죽일 기회까지 있었죠.
이런 격투, 암살능력보다 주목해야할 점은 토드의 지적인 능력인데, 롤프에 대해 허쉬와 같은 결론을 내리는 것부터가 상당한 통찰력을 지녔다는 걸 보여주죠. 한스는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것 앞에선 포기하게 되지만 롤프는 자기 한계를 모르기 때문에 계속 덤벼든다고 했던 허쉬의 말과 궤를 같이 하는 판단을 했습니다. 결국 한스가 롤프에게 지고 제국의 총수 자리를 넘길 것이라고요. 이외에도 얽히고 섥힌 알레사, 나오미, 허쉬, 제국, 바스커빌 가문, 아마란스, 롤프에 대한 진실과 본질을 꿰뚫어 보고 롤프, 바울에게 이야기하기도 하죠.
당연 일류 암살자 정도 되면 그만큼 머리도 좋아야 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토드라는 캐릭터는 무력도, 지력도 모두 최고의 캐릭터입니다. 하지만 그런 완성형 캐릭터조차도 자신의 한계를 넘지 못했고, 자신을 얽매는 괴물이라는 과거, 기회를 놓치고 충동적으로 행동했던 사실은 그런 존재조차도 발목을 잡고 결국은 승리, 증명이 아닌 실패와 죽음이라는 결말을 맺게 만듭니다.
그 죽음의 모양이 비참하진 않았으나, 그가 살아온 인생이 비참해진 셈이죠. 단지 어머니를 만나뵙겠다는 일념으로 십 수년이 넘게 남을 죽이고 살아왔지만 돌아오는 건 제국의 패밀리를 죽였다는 낙인이자, 만나고 싶지 않다는 어머니의 본심이었죠. 이미 한번 기회를 놓쳤고, 알레사를 죽인 이후에도 기회를 놓쳤죠. 이번엔 복수심에 자신을 던졌습니다. 의지가 아닌 충동으로.
그 결과 충동과 의지 사이에서 의지를 택한 바울은 모든 것이 불타는 와중에서도 모든 것을 되찾고 영웅이 되며 살아남았지만 토드는 충동과 의지 사이에서 충동을 택했고 모든 것이 불타는 와중에 자신의 증명이 실패로 돌아가며, 그저 악당이 된 채 재가 되어 사라지게 됩니다. 그도 이렇게 될 걸 알았을까요? 아니면 자신의 죽음을 직감했을 때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내려놓았을까요. 그의 죽음은 너무나도 담담했죠. 단지 현실인식이 빠르고 정확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마치 이렇게 될 줄 알았거나, 이렇게 되자 자신도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었던 자신이 틀렸다는 사실을 곧바로, 그저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은 이제 무대 뒤로 싸늘히 사라지고, 이제 무대 밖 새로운 무대에 서게 될 바울에게 진심 어린 조언과 충고, 그리고 쓸쓸한 자조의 감정을 내비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선택하기에 가장 힘들었던 환경 속에 있었던 캐릭터였던 것도 사실이긴 하지만, 충동과 의지 사이에서 생각하지도, 고민하지도, 고뇌하지도 않고 그저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면서 충동적으로 선택해온 것도 사실입니다. 단순 도구적 암살자로서 살아올 땐 판단은 자기가 하는 게 아니라고 했지만, 복수를 마음먹고 키 플레이어 중 하나로 활동할 땐 자신이 판단한다고 태도가 변했듯이요. 그 판단의 밑바탕이 스스로의 의지가 아니었을 뿐이지. 바울은 노력했고 고민했으며 고뇌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방황도 했고 충동에 빠져본 적도 있죠. 그래도 두번째 기회에서 바울은 그 기회를 잡았습니다. 충동이 아니라 의지로. 다만 토드는 그러지 못했죠. 그저 절박함과 복수심에 충동적으로 기회를 내던졌을 뿐..
알레사, 나오미의 경우.
나중에 밝혀지는 큰 반전 중 하나지만, 알레사와 나오미는 쌍둥이었고, 둘이서 한 사람을 번갈아가며 연기했던 겁니다. 제국의 스파이로 아마란스 내에서 활동하며 오래 들키지 않았던 이유였죠. 제국의 비밀 멤버로서 허쉬의 지령을 받고 버려진 허쉬 자신의 아들, 롤프를 거두어줍니다. 이때 롤프는 알레사에게 큰 은혜를 입고 그걸 갚고자 했죠.
하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서 알레사는 암살 대상에 오르게 됩니다. 같은 아마란스의 간부들이 알레사를 견제하기 위해 아예 암살해버리고자 하는 계획을 세웠고, 토드에 의해 실행되기 전에 토드는 허쉬의 재가를 얻어야 했습니다. 허쉬는 실수라고 여겼지만, 실은 딸인 르넨이 알고서 명단을 섞어 놓은 거였죠. 토드와 같은 판단을 내리면서요. 머물 곳이 없어지면 돌아올 거라고..
실제로 암살은 성공합니다. 비가 내리는 날, 헤스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갔다가 알레사는 암살 당하고 말죠. 그리고 살아남는 건 조금 뒤에 도착한 나오미였죠. 그걸 본 토드는 크게 당황하게 됩니다. 아마 처음으로 느끼는 죄책감이었을 겁니다. 자신이 죽인 사람을 다시 만나게 되는 상황. 알레사와 똑같은 얼굴을 한 나오미를 보고 말입니다. 결국 토드는 나오미 또한 처분하지 않고 허쉬를 만나러 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허쉬는 실수라고 밝힌 것에 실망하고 이제 이 짓은 그만두겠다고 말하며 돌아서려고 했지만, 같은 제국의 패밀리를 건드렸다는 이유로 어머니를 만나게 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또한 그 어머니인 사라가 만나고 싶지 않다는 것도 밝히면서요.
나오미는 토드에게 자신의 혈육이자 쌍둥이, 자신의 반쪽인 알레사를 죽게 만든 제국도, 아마란스도, 그리고 토드 또한 파멸시킬 거라고 공언하지만 혼자선 힘들죠. 물론 토드 또한 복수는 혼자서 힘듭니다. 그래서 나오미의 계획에 동참해버렸죠.
토드는 그걸 위해 간부 세명을 죽여줬고, 그 이후로 나오미와 함께 같은 목적을 지니고 행동하게 됩니다. 나오미는 여전히 알레사의 캐릭터를 연기하며, 혼자서 남들은 부르는 그 이름을 못 부른 채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며 지냅니다. 하지만 의외의 복병을 만났죠. 헤스터. 헤스터의 감각은 특별했고 그녀는 함부로 행동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8년을 기다렸죠.
이 부분이 중요한 부분입니다. 나오미는 아주 간단한 함정으로 헤스터를 쓰러뜨리고 누명을 씌웠습니다. 그리고 바스커빌에 의해 죽게 만들었죠. 그렇다면, 나오미는 8년 동안 정말 헤스터를 넘지 못했기 때문에 대치 상태로 있었던 걸까요? 나오미는 토드가 롤프를 죽일 거라는 걸 알았습니다. 하지만 롤프가 죽길 바라진 않았죠. 그를 사랑했기 때문일지, 토드가 롤프를 죽일까 두려워 간부 셋이 죽은 다음날 허쉬와의 통화를 하며 롤프가 살 수 있는, 그리고 허쉬 자신이 죽을 수 밖에 없는 비책을 알려줍니다.
나오미는 그렇게 8년을 기다렸습니다. 검은개가 안달이 나기 전까지 계속이요. 어쩌면 나오미는 그런 생활을 즐겼을 수도 있습니다. 즐겼다는 표현이 맞는 진 모르겠지만, 롤프와의 생활이 좋았던 건 사실이라고 봐야겠죠. 그래서 떠날 때 되자 그를 안아준 거고요. 이게 그를 속이려는 행동이었을 지, 아니면 진심의 발로였을 지는 개개인의 판단에 따르겠지만, 전 후자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헤스터가 감각이 뛰어나고 나오미보다 몇 수 앞섰다곤 하지만, 어렵지 않게 처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러지 않고 8년 동안 지내왔죠. 그래서 정도 많이 들었고요. 그러다 결국 토드가 안달을 내자 그에 등 떠밀려 계획을 진행시킬 수 밖에 없었던 겁니다.
그렇게 등 떠밀리자 결국 모든 일이 시작된 거죠. 바울을 영입하고, 토드와 함께 발 맞추어 연기를 하고 제국과 아마란스를 공멸시킬 섬세한 계획을 진행합니다. 그 동안 모두들 진심으로 나오미를 위해 살았습니다. 그러다 죽기도 했죠. 코스타는 죽는 순간까지도 알레사를 의심하지 못했습니다. 다른 모두도 끝의 끝에 가서야 진실을 받아들였고요. 그게 진심을 알게 되었다는 것만은 아니지만..
그러면서도 중간에 나오미는 공멸 계획 도중 증발해야 하는 순간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검은개에 의해 다시 전쟁터로 밀어 넣었죠. 그 또한 자신의 업보라면 업보일 겁니다. 또 그 전쟁터에 밀어넣은 토드 또한 그럼에도 죽게 둘 수 없었던 둘과 맞붙게 되고, 그 중 바울에게 죽게 되니, 이 또한 토드의 업보일 수도요. 결국 어떻게 보면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죽음에 다다르게 했던 교두보가 되었던 셈입니다. 아이러니하죠. 제국과 아마란스를 공멸하고자 했던 그들이 서로의 목숨을 앗아가게 만드는 요소로 작용했다는 게.
르넨이 말하죠. 너 진짜 여우였구나? 그만큼 알레사-나오미의 연기는 굉장히 뛰어났습니다. 다 밝혀진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녀의 진심에 대해선 의혹이 없을 수가 없었으니까요. 언제나 중의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상황이 발생하는 개판이라는 작품 속에서, 나오미 그녀는 자신이 살기 위해 문을 열어달라고 했고 그 와중에 롤프의 이름을 대기도 했죠. 아예 그 이전엔 기다릴테니 돌아오라고도 했고요. 결국 나가고자 했으나 문이 잠겨 있어 나갈 수도 없었기 때문에 그녀의 진심은 끝까지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토드도 말했죠. 진실보다 진심이 중요하지 않냐고. 토드는 그렇게 믿었습니다. 진심 같은 건 없었다고. 그리고 그걸 뒷받침하는 상황도, 해석도, 진실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요소들은 역시 그녀의 진심을 알기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떠나는 롤프를 안는 것도, 걱정하는 것도, 기다린다는 것도, 롤프도 안에 있다며 어떻게든 열어달라는 것도, 그리고 눈물도. 개판에서 가장 복잡하고 입체적이며 높은 완성도를 지닌 캐릭터를 뽑자면 다름아닌 나오미라는 캐릭터가 아닐까 싶습니다.
여러번 정주행한 독자조차도 알듯말듯 알 수 없게 만드는 그녀의 행동과 심리를 묘사하는 것이란 굉장히 섬세하고 정교한 작업이고,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관을 짠 것이기도 할 정도로 어려운 난이도거든요. 완성된 작가 현욱이 아니었다면 이런 캐릭터 창조는 어려웠을 겁니다.
넷의 결말.
과거에 시간이 멈춘 나오미와 토드와는 다르게, 바울과 롤프의 시간은 계속 흘렀습니다. 이는 그들이 성장할 수 있었고, 성장했다는 말이 되죠. 바울은 노력의 결과와 추구하던 가치를 얻어냈으며, 자기 자신을 증명했습니다. 레아를 구해내며 영웅이 되었죠. 바울은 성장했습니다. 롤프, 크롬 또한 마찬가집니다. 유약하고 정이 많았던 반푼이 맹수였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조건과 책임을 겪고, 자신과 관계된 사실들을 받아들이며 성장하여 맹수다움을 얻었습니다. 나오미의 죽음에도 위태롭지 않고 굳건할 수 있음을 얻어내며 말이죠.
그러나 나오미와 토드는 그 어떤 진보도 없었습니다. 그저 과거의 복수에 침식되어 그것만을 위해 살아갔죠. 그런 그들이 복수에 성공한다고 해서 얻을 것이란 아무 것도 없었을 겁니다. 복수란 과정을 음미하는 것이지, 그 결과에 취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복수에 성공한 뒤 그들은 끝 없는 갈증과 방향도 목적도 알 수 없는 갈망, 그리고 최종적으로 허무만을 느낄 겁니다. 그것에 어떠한 발전도 진보도 없죠. 그러나 사랑과 증오의 싸움에서 사랑이 이긴다는 말처럼 그들의 복수심과 증오는 성공하지 못했고 패배했습니다.
그들은 궁극적인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목전에서 실패해버렸죠. 다름아닌 그 자신들의 한계 때문에요. 발전할 수 있는, 미래를 보고 살아갈 이들이 나오미에게 배신을 당했다는 과거에 침식되지 않고 극복하고자 했고, 최종적으로 자의든 타의든 극복하게 되었죠. 말했듯, 바울은 승리했고, 롤프는 맹수가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이 하루아침에 바뀐 건 아닙니다. 토드의 말처럼요. 세상이 걸린 전쟁이 아닌 자기들끼리의 싸움이었고, 자기 자신을 극복하고 인정하는 과정이었습니다. 변하는 것은 세상이 아닌 자기 자신들이었죠. 무언가 변했지만, 그것이 무엇인가를 확실하게 말할 순 없습니다. 그저 그것을 느끼며 받아들이고 인정하며 살아가는 거죠. 그렇다고 아무 의미 없었던 건 아닙니다. 오히려 누구보다 큰 의미와 가치를 손에 거머쥐었다고 해야 맞을 겁니다.
누가 이런 결말을 생각했을까요? 이렇게 되리라 누가 알았을까요. 독자도, 캐릭터들도 몰랐을 겁니다. 그러나 모두가 보았고, 느꼈으며,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런 결말이었습니다. 작품적으로도, 캐릭터들의 인생으로도 말입니다.
총평.
완성된 작가, 현욱이 만들어낸 최고의 완성도를 가진 작품. 이 문장으로도 다 담아내기 어렵겠네요. 하지만 이 말처럼입니다. 이런 엄청난 수준의 작품성을 지닌 작품을 이런 완성도와 완전성으로 만들어내는 것은 내노라할 작가들에게도 어려운 일입니다.
짜임새, 구성, 연출, 스토리, 캐릭터 디자인, 작화, 캐릭터성, 메시지, 대사, 인물관계.. 다른 말이 필요 없습니다. 모든 면에서 완벽했습니다. 그야말로 완전한 작품을 뽑으라면 개판 정도가 아닐까 싶은 수준의 작품이었고, 이는 국내외를 포함해 모두 따져봐도 굉장한 수준이라는 건 인정해야할 작품입니다.
현재와 과거, 스토리 진행의 짜임새는 그야말로 완벽했고, 캐릭터 디자인과 캐릭터성은 그 자체로 살아있는 객체이며, 그들간의 유기적이고 짜임새 있는 관계는 하나의 세계속 살아있는 인물들의 얽히고 섥힌 인생 그 자체였습니다.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전개였고, 인물들은 할 수 밖에 없는 반응을 보여줬습니다. 그들의 심리 묘사는 정교하게 그들의 모든 것을 보여줬고, 이는 심리를 알 수 없는 나오미라는 캐릭터에서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이런 살아있는 캐릭터를 만드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닌데, 자기 데뷔작으로(설사 그렇지 않다고 해도) 이런 작품을 만들어냈다는 건 완성된 작가라는 말 말고 뭐가 필요할까요. 다시 말합니다. 모든 면에서 완벽한 작품이었어요.
덧.
작품 중간에 토드의 생모인 사라 바스커빌이 아주 중요한 말을 해줍니다. "필요 없기 때문에 도태되는 것이 아니야.. 사랑 받지 못하기 때문에 도태 당하는 거야.." 우리가 키우는 애완견들은 실제 야생에서 생존하기 어려운 품종들이 많습니다. 너무 약하고, 너무 작기 때문에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도태되어 없어지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주인에게,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기 때문입니다.
잡종 투견이든 암살자이든 그들의 생존은 그들의 필요와 쓰임새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했던 것은 단지 사랑할 수 있는 사람과, 사랑 해줄 수 있는 사람이었던 것이죠. 토드는 암살자로서 종의 정점이었지만, 레아는 새롭다고 했습니다. 그녀가 새로운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레아는 사랑할 수 있고 사랑 받을 수 있는 새로운 존재였기 때문이죠. 바울이 사랑해줬고, 또한 바울을 사랑해줬으니 반푼어치 잡종 투견이든 암살자 가문의 바스커빌 혈통이든 서로 도태될 일은 없겠죠.
'취미 > ㄴ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저승GO 리뷰 (2) | 2017.04.27 |
---|---|
무한전생-무림의 사부 리뷰. (5) | 2017.04.01 |
이차원 용병 사피엘-휴프노편 리뷰. (0) | 2017.02.03 |
소설, 킬 더 드래곤 리뷰. (0) | 2017.01.27 |
개판(박현욱 작가) 작품 심층 해석 13편. (1) | 2016.11.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