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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며,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 - E.Kant
by Ko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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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 속의 뇌'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13.07.03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1)


Cogito, ergo Sum.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가 남긴 유명한 말입니다.


그러나 이 말의 진짜 의미에 대해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이 짧은 문장 하나로 르네 데카르트는 철학계 최고의 스타로 발돋움했습니다. 그 어려운 철학계에서 한방에 스타가 될 정도면 이 문장이 가진 의미의 가치는 얼마나 될까.



감각은 인간을 속일 수 있습니다. 기만할 수 있죠. 감각하기에 따라 뜨거운 물도 따뜻하게, 혹은 따뜻한 물도 뜨겁게. 반대로 차가운 물도 미지근한 물로 느낄 수 있습니다. 같은 방식으로 상대주의에 의해 객관적 진리란 있을 수 없죠. 데카르트는 이 점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감각은 때떄로 인간을 기만하므로, 감각으로 얻어지는 정보는 확실할 수가 없다는 것. 하지만 감각이 아닌 이성의 추리를 통해 얻어지는 지식은 확신 할 수 있습니다.


예컨데 수학적 추론, 논리의 영역이죠. 혹은 물질의 부피와 질량. 직관적인 사실입니다. 여기서 지식을 얻는 자신의 추론적 과정이 어떤 이유에 의해서든(사악한 악마나 전능한 신이 인간의 인식을 속이고 경험까지 조작할 수 있는 경우) 오류를 범하도록 조작되어있다면? 1+1=2인데, 우리는 1+1=3으로 생각하게 되는 경우. 이러한 직관적이고 객관적인 지식의 영역까지 부정했다면 자신이 확신할 수 있는 것은 회의의 주체인 나 자신 뿐입니다. 인간일 수도 있고, 인간과 다른 형태일 수도 있는 생각하는 주체는 존재하는 것이며, 생각하기 때문에 비본질적인 것(경험, 편견, 오류, 감각 등)을 의심하고 제거할 수 있죠. 이런 의심의 능력을 통해 최종의, 최후로 남는 명증한 진리가 바로 'Cogito, ergo Sum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내 감각과 이성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모든 지식과 추론적 과정이 진실을 담고 있지 않을 경우-왜곡되고 기만되어질 경우, 그것을 회의하는 나 자신은 확실히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문장입니다.



하나의 철학적 사유를 소개해보겠습니다. 일명 통 속의 뇌라는 사고실험인데, 굉장히 재미있고, 본문과 연관지어 생각하면 본문의 이해가 빠를 것입니다.


만약 우리의 뇌를 몸에서 때어낸 뒤, 통 속에 넣고 생명력을 유지시키며, 모든 외부의 자극을 컴퓨터로 만들어내 뇌에 주입하여 가상의 환경을 느끼게 만들 수 있다면, 그렇게 감각하는 뇌는 자기 자신이 진짜 세계와 마주하고 있는지, 아니면 주어지는 자극에 반응할 뿐인지에 대해 구분할 수도, 증명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진짜 이 세계에서 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통 속에 뇌만 담긴채 거짓된 감각만을 느끼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마 매트릭스가 생각날 겁니다. 진짜 세상에선 육체의 생명만을 유지시킨채 잠들어있고, 1990년대 후반이라는 환상 속에 모두가 살고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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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soulco.tistory.com BlogIcon 지성의 전당 2019.02.02 19:56 신고 address edit/delete reply

    안녕하세요.
    저는 지성의 전당 블로그와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데,
    존재한다 글이 있어서 댓글을 남겨 보았습니다.
    제가 또 댓글을 달았다면 죄송합니다.
    인문학 도서인데,
    저자 진경님의 '불멸의 자각' 책을 추천해드리려고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와 죽음에 대한 책 중에서 가장 잘 나와 있습니다.
    책 내용 중 일부를 아래 글로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제 블로그에 더 많은 내용이 있으니 참고 부탁드립니다.

    정보를 드리는 것뿐이니
    이 글이 불편하시다면 지우거나 무시하셔도 됩니다.
    ---

    인식할 수가 있는 ‘태어난 존재’에 대한 구성요소에는, 물질 육체와 그 육체를 생동감 있게 유지시키는 생명력과 이를 도구화해서 감각하고 지각하는, 의식과 정신으로 나눠 볼 수가 있을 겁니다.

    ‘태어난 존재’ 즉 물질 육체는 어느 시점에 이르러 역할을 다한 도구처럼 분해되고 소멸되어 사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 육체를 유지시키던 생명력은 마치 외부 대기에 섞이듯이 근본 생명에 합일 과정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육체와의 동일시와 비동일시 사이의 연결고리인 ‘의식’ 또한 소멸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추후에 보충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이러한 총체적 단절작용을 ‘죽음’으로 정의를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감각하고 지각하는 존재의 일부로서, 물질적인 부분은 결단코 동일한 육체로 환생할 수가 없으며,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의식’ 또한 동일한 의식으로 환생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정신은 모든 물질을 이루는 근간이자 전제조건으로서, 물질로서의 근본적 정체성, 즉 나타나고 사라짐의 작용에 의한 영향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타날 수도 없고, 사라질 수도 없으며, 태어날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는 불멸성으로서, 모든 환생의 영역 너머에 있으므로 어떠한 환생의 영향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신에 대한 부정할 수가 없는 사실이자 실체로서, ‘있는 그대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본체에 의한 작용과정으로써 모든 창조와 소멸이 일어나는데, 누가 태어나고 누가 죽는다는 것입니까? 누가 동일한 의식으로 환생을 하고 누가 동일한 의식으로 윤회를 합니까?

    정신은 물질을 이루는 근간으로서의 의식조차 너머의 ‘본체’라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윤회의 영역 내에 있는 원인과 결과, 카르마, 운명이라는 개념 즉 모든 작용을 ‘본체’로부터 발현되고 비추어진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자신을 태어난 ‘한 사람’, 즉 육신과의 동일성으로 비추어진 ‘지금의 나’로 여기며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로 착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한 사람’은 스스로 자율의지를 갖고서,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행동한다고 믿고 있지만 태어나고 늙어지고 병들어지고 고통 받고 죽어지는, 모든 일련의 과정을 들여다보면 어느 것 하나 스스로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책임을 외면하기 위해 카르마라는 거짓된 원인과 결과를 받아들이며, 더 나아가 거짓된 환생을 받아들이며, 이 과정에서 도출되는 거짓된 속박, 즉 번뇌와 구속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환영 속의 해탈을 꿈꾸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저는 ‘나는 누구이며 무엇이다’라는 거짓된 자기견해 속의 환생과 윤회는, 꿈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습니다. 더불어서 ‘누구이며 무엇이다’라는 정의를 내리려면 반드시 비교 대상이 남아 있어야 하며, 대상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는 그 어떠한 자율성을 가졌다 할지라도, ‘그’는 꿈속의 꿈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뚜렷하고 명백하다 할지라도 ‘나뉨과 분리’는 실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는 ‘나’에 대한 그릇되고 거짓된 견해만을 바로잡았을 뿐입니다.

    https://blog.naver.com/ecenter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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