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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며,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 - E.Kant
by Ko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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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2.11.12
    한국 언론 환경은 어떻게 이 꼴이 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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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근대식 언론이 시작된 것은 구한말 대한제국-일제시기입니다. 그리고 이 시기는 여러 이데올로기가 경쟁하던 시기였고, 식민지배와 주권이라는 두 가치의 충돌이 있었던 때이기도 했으며, 내외적 헤게모니를 차지하기 위한 각축장이기도 했죠.

 

정치와 외교, 군사는 국가의 일이지만 언론은 민간에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다만 그 영향력이 너무 거대하기에 권력자들은 대중선전/통제 및 프레임 선점을 용이하게 해주는 언론에 대한 다양한 방식의 영향력 행사가 있어왔고 그 방식은 탄압과 처벌이라는 강경책과 돈을 입에 물려주고 내부자로 만들어주는 온건책으로 나뉘죠.

 

 

일제는 식민지 조선의 피지배민들이 일제에 순응하고 복종하길 바랬고 그걸 방해하는 민족지, 정론지에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탄압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말 잘듣는 언론에겐 상을 주기도 했죠. 이후 전쟁 때에도, 이후 독재시절에도 언론은 권력자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어떤 언론들은 대한민국 건국 이후 단 한번도 언론의 역할을 수행해본 적 없는 선동창구였을 뿐이죠.

 

독재시기에 부당함에 저항하고 진실을 찾으며 비판을 할 줄 알았던 기자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도태시켰습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역도태지만, 그들 입장에선 아닐 도태로 인해 저널리즘을 할 줄 알고 그러한 가치를 이해하는 기자, 언론사는 그 힘을 잃어가고 말 잘 듣고 잘 통하는 언론과 언론인들이 한국 주류 언론기조를 차지하기에 이르렀죠.

 

 

독재 시절에는 힘으로 찍어 누르는 방식을 자주 썼고, 지금도 후진국에서는 그런 식으로 언론을 탄압하고 언론인을 죽이거나 '착하게' 만들지만 어느 정도 그러한 세태에서 벗어난 뒤에는 그보다 훨씬 잘 먹히는 방식을 씁니다. 조용히 하라고 입에 돈을 물려주는 거죠.

 

사람 보내서 납치하고 고문하거나 협박하는 방식은 그러한 방식이 통할 수 있는 질서가 유지될 때나 가능한 방법이고, 그러한 방식은 제나름의 리스크가 있기 때문에 그러한 리스크를 무효화시키거나 어느 정도 감당 가능한 체제에서나 할 수 있는 겁니다.

 

당연히 민주화와 같은 체제, 질서의 변화에는 또 다른 방식이 필요한 거고, 기존에 있었던, 튀는 놈이 아니라 말 잘 듣는 언론을 길들이고 우리편으로 만들었던 안정적인 방식을 확대하는 게 효율적인 방식이 되었죠. 당장 나가는 돈은 아까울 수 있지만 옛적 방식을 썼다 발각됐을 때 발생하는 리스크는, 그걸 덮기 위해 써야할 자본은 일개 개인에게 물려주는 돈에 비하면 푼돈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판단과 평가는 선점되는 개념에 따르는 면이 큽니다. 어떠한 방향성을 잡아주고 어떠한 개념 요소를 짚어주는 것만으로도 생각의 흐름과 방향성, 그 판단의 중점이 되는 포인트가 잡히고 그렇게 흘러버리죠. 그렇기 때문에 언론을 장악하는 게 중요할 수밖에 없는 건 민주주의 사회일 때 더더욱 그렇습니다.

 

반대로 말하자면 그러한 프레임을 잡을 수 있고 선점할 수 있는 언론을 손에 넣는 건 권력자에게 굉장히 중요한, 어떤 면에서는 거의 1순위에 가까울 일이라는 거고요.

 

그렇다고 언론이 정치권력보다 더 강하거나, 언론이 정치인과 정당에게 갑의 위치에 있느냐 하면, 그건 아닙니다. 언론들 말처럼 우리가 정권을 만드네 어쩌네 하는 건 선거철 때 이야기고, 선거가 끝나면 정치인들 목이 뻣뻣해지는 것처럼 언론 역시 그에 굽힐 수밖에 없습니다. 정치권력이 어디에서 기인하고 누구 손에 있느냐는 권력의 정당성과 실질적 활용 범위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이유이고, 언론과 재계의 힘은 언제나 정치권력보다 한 수 아래일 수밖에 없는 구조를 지니죠.

 

 

그렇기에 언론은 권력자(정치, 경제 영역 모두)에게 밉보여선 안 되고, 가장 좋은 방법은 그들과 친구가 되는 겁니다. 혼맥으로 이어지는 것도 좋고 인맥이나 학벌로 이어지는 것도 좋죠. 민주주의에선 권력투쟁이 자본은 물론이고 법적 제도(선거 등)와 이미지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 법적 정당성에 합법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검찰 등 법 권력과 친해지는 것 역시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리고 권력자들은 어떤 영역에서든 대중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언론과 친해져서 나쁠 게 전혀 없고요. 정치인들은 자기 이미지를 좋게 만들어주고 불리한 부분을 축소해줄 수 있으며, 적대 진영에 불리한 이미지를 형성시켜줄 수 있고 경제인들은 자기 기업과 제품에 돈으로 환산되는 인식을 주입해줄 수 있으며, 검찰은 정치, 경제권력과 붙어먹으며 기소하고 처벌할 대상에 대한 대중의 반발을 줄여줄 수 있게 마사지해줄 수 있습니다.

 

 

그럼 언론은 어떻게 이익을 얻느냐, 정치인이 됐든 경제인이 됐든 검찰이 됐든 고급 정보를 가지고 있거나 그것을 생산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과 인맥관계를 맺고 그들과 인터뷰, 취재, 그마저도 아니라면 (폐쇄적인) 식사 자리에서 이런 저런 정보들을 주고 받는 겁니다. 이번에 어느 지역에 어떤 사업을 하게 되어서 땅값이 오를 거라든가, 이번에 기존 사업부 몇개를 접을 거니까 그쪽 관련 주식 빼놓으라던가, 누구누구 기소해서 어떻게 처리할 생각이고 이런 정보를 너한테만 흘려줄테니 기사화시켜라. 하는 식으로.

 

옛날에는 이런 이권거래가 술자리에서 직접적으로 오가는 돈이었다면 지금은 증거 없는 정보를 전달해주며 합법적으로 이익을 얻을 수 있게 해주는 식으로 바뀌기도 했고요.

 

그렇게 만들어진 엘리트 카르텔에서 언론의 역할은 결코 주인은 될 수 없겠지만 권력자가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종놈이 되는 건 아닙니다. 대체로 을의 입장에는 있지만 힘 좀 쓰는 을의 입장에 가까울 겁니다. 언론사란 결국 기업이고 그들은 투자를 받아야하는데, 기업의 광고비는 매우 중요한 수익요소이고, 고급 정보를 먼저 접하거나 만들어내는 위치에 있는 이들, 엘리트와의 접점이 끊어져 인맥을 잃은 기자 개인의 중요성은 떨어져 쓸모가 없어집니다.

 

 

좀 더 큰 그림으로 이 문제를 단순화시켜 그려보면 이렇습니다.

 

언론은 탄생 순간부터 강력한 정치권력에게 통제, 탄압되었고 거기에 순종한 이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이권을 받았으며, 경제권력은 경제적 이유로 언론을 활용해야 했고 마찬가지로 돈, 혹은 돈이 되는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언론을 길들였습니다.

 

언론은 그러한 이들과 담합하며 이익을 챙겼고 이건 언론과 기자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관계였고요. 이러한 관계는 언론과 정, 재계라는 껍데기 때문에 특수해보일 뿐, 이권이 얽힌 업계간의 담합이라는 뻔하고 흔한 부패일 뿐입니다.

 

여기서 저널리즘은 소수의 언론인들이 추종하는 가치일 뿐이고, 때때로 언론 껀덕지를 하기 위해 몇몇 기자와 평론을 할 때나 등장하는 것이지, 기본적으로 이익을 추구하는 기업의 자본주의적 원칙보다 우선되지 않고 그것으로 명성을 쌓지도, 권위를 형성하지도 않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길들여지고 형성된 한국 언론 환경은 당연히 저널리즘이라는 게 있었고 지금도 남아 있는 몇몇 서구 선진국과 비교하면 당연히 민망할 정도로, 엄밀히 말해서 한국의 저널리즘은 민주화 이후 자본과 권력에 의해 적지 않게 해체되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이는 세월호나 이태원 참사 때 보여주는 한국 언론과 타국 언론이 어느 쪽에 더 포커스를 맞추었느냐를 보았을 때 쉽게 판가름 될 수 있습니다. 정치인과 관료들이 사건을 정치화시키기 위해 청탁, 요구했을 때 언론은 자기 이익을 챙겨주는 이들이 원하는 바를 실행에 옮겼고, 사건의 본질을 흐리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사람의 죽음을 보상금이라는 돈으로 계산하려는 습성은 그들의 천박한 천민자본주의적 관점에서도 해석될 수 있지만, 그들에게 사건의 본질과 진실을 추구하는 저널리즘보단 돈이라는 자본을 더 우선시하는 가치관의 발로이기도 합니다.

 

반대로 해외 언론은 관심의 포커스를 피해자와 유족들에게 맞췄고, 돈보다 사람에 맞췄죠. 이것은 자국 내에서 발생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이해관계가 없다는 점도 있었겠지만, 세월호 당시 한국 언론이 보상금, 보험금을 얼마나 받을 수 있느냐를 계산하고 있을 때 일본 언론에선 수온에 따라 생존시간이 얼마나 되느냐를 계산하고 있었습니다.

 

이렇듯 저널리즘이 부재한 언론 환경에서 중요한 건 이익을 주고 받는 카르텔의 한 부분에 속하는 것이지 진실을 밝히고 본질을 파악하며, 그러한 정보와 의견을 대중에게 전달하는 게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언론)이 가진 강점(프레임 선점, 선동)을 스스로의 이익과 카르텔의 이익을 위해 활용하며 경제활동을 하는 거죠.

 

 

저널리즘을 추종하고, 할 줄 알았던 언론사나 기자들은 역도태되어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게 되었거나 그 영향력이 매우 약한데 반해, 지배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거대 언론사, 기성 언론사들은 그들의 입장과 이익에 따라 다른 논조를 가질 뿐 기본적으로 엘리트 카르텔과 얽혀 있거나 그 자체로 엘리트 카르텔의 일부입니다.

 

일제시대 때 천황폐하 만세를, 한국전쟁 때는 김일성 장군 만세를, 독재시기엔 박, 전 장군님께 철저히 순종하고 복종하던 언론과 그 아류, 혹은 복제, 혹은 친인척인 언론들이 한국 언론 환경에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게 한국의 언론 현실입니다. 그들은 힘의 논리와 그 힘에서 나오는 이익을 따르는 것이고 서구에서 이해되는 저널리즘과는 거리가 멉니다.

 

 

설령 저널리즘을 위해 비판성을 잃지 않은 이들은 어떻게든 따돌려지기 마련입니다. 직장에서 따돌려지고 한직으로 밀려나고 데스크에서 안 받아주고 수정 명령 내리고 때로는 내가 쓴 글을 다른 사람이 수정해서 논조가 바뀐 채로 올라가기도 하죠. 취재를 하거나 정보를 제공받을 수 있는 사람들은 만나주지 않고 정보를 얻을 수 없으니 아무리 발로 뛰고 찾아가도 제대로된 기사를 쓸 수가 없게 됩니다.

 

그러다보면 해고가 되든 기사를 실어주는 곳이 없어지든 하게 되는 법이죠. 그렇게 살기 싫은 사람들은 애초에 돈 주는 주인님들 시키는데로 하거나 결국 굽히고 굴복하는 이들 역시 주인님이 물려준 돈의 달달함에 입을 다물고 시키는데로 하게 됩니다. 뭐든 한번이 어렵지 두번이 어려운 게 아니라고, 한번 먹고 사는 게 어려워 좋게 좋게 달래주고 회유하는 과장님 말 듣고 한번 돈뭉치 입에 물어보면 다음엔 더 쉬워지죠.

 

삼성을 그렇게 비판했던 기자가 결국 이재용 가방 들어주는 건 언론에게 보여주는 메시지였고요. 그 양심을 저버리고 굴복했지만 여전히 떳떳하고는 싶어하는, 굴욕과 자존심이 충돌하는 복잡한 표정은 시사하는 바가 컸습니다. 일말의 양심이 남아 있는 사람들은 개새끼짓을 하고 있어도 자기가 개새끼라는 걸 알고 있고 그건 표정을 통해 드러나기 마련이거든요.

 

 

반대로 돈주는 쪽에 붙어서 돈벌겠다는 사람들은 잘 먹고 잘 삽니다. 기자 개인에게 줄 수 있는 돈은 그 기자가 써주는 기사가 가져다주는 이익보다 훨씬 적은 편이거든요. 이는 옛 시절보다 기자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자본의 폭이 커졌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물려줄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언론을 장악해놓으면 그 자체로 어마어마한 매리트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그에 대한 투자는 결코 아까운 것도 아닙니다.

 

그런 투자를 받는 기자와 언론사는 돈주는 물주들, 정보 제공해주는 이들에게 충성하는 거고 그들이 원하는 기자를 외주 받아 써주는 노동의 대가로 다양한 향응을 주고 받는 야합 관계가 됩니다. 이들은 자기들의 영향력과 힘이 어떠한지 잘 알고 있고, 그들이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이 대단한 사람들이 많다보니 자기가 그들과 만날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 가지고 자기들이 대단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기자들의 오만함과 허영심, 꼴 같잖은 자존심으로 표출되는데, 대표적으로 자신들이 지식인이라고 착각하고 있고 사회에 엄청난 힘을 발휘하는 지배층 내지는 그에 준하는 기득권이라고 생각하는 게 그렇습니다. 언론이 기득권이 아니라는 것도 아니고, 언론의 영향력이 그만큼 강력한 건 사실이지만 그 개개인은 언론사의 중역에 속하는 진짜 주인을 제외하면 그저 일벌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착각입니다.

 

그러나 그 착각은 엘리트 카르텔을 유지하고 그에 속하여 충실하게 일해주는 원동력의 한 축을 담당한다는 점에서 그 기득권의 유지 발전을 위한 충실한 행동력에 강력한 동인이 되어줍니다.

 

다른 걸 다 떠나서 경제인들이, 정치인들이 주는 크고 작은 이익들은 일개 기자 입장에서 너무나도 달달하죠.

 

이런 구조적인 조건 속에서 언론 환경은 저널리즘이 아닌 자본주의적 원칙에 충실한 사업이자 장사가 되었습니다. 한국 사회의 일부는 여전히 전근대적 가치관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법과 도덕, 윤리와 같은 보편적이고 지배적이어야 할 원칙과 규칙보다 나와 남의 구분을 우선시하여 나와 내가 속하는 집단의 식구에겐 특혜와 이익을, 남과 남이 속한 집단에겐 차별과 불평등으로 작동하기에 언론 역시 법과 정의, 평등, 공정과 같은 보편적이고 객관적으로 올바른 가치 기준보다 우리 식구와 남을 구분하는 것을 우선하고 그 구분에 따라 언론 권력을 행사합니다.

 

내게 돈 물려주고 정보 제공해주는 분들의 이권과 편의에 언론 권력을 행사하고, 그들을 비판하고 자신을 공격하는 이들에게 언론 권력의 온도와 논조는 뚜렷하게, 때때로 교묘하게 차별적이죠. 결코 공정하지도, 평등하지도 않은 기준으로 작동하는 언론 권력의 사회적 영향력은 그러한 저열한 언론의 태도를 직시하지 못하고 그럴 여유도 없는 대중들에게 굉장한 효과를 낳고요.

 

그렇게 정의와 불의가 뒤집히고 법조 카르텔과 정치 정당의 이중적인 모습을 보편적 원칙보다 개별적 사안으로 접근시켜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라고 인식시키며 사회적 갈등을 봉합시키거나 줄이기는커녕 오히려 조장하고 발생시키기도 하며 특정 책임집단에게서 책임을 형해화시키기도 하는 등 정의와 같은 가치는 물론 법적인 영역에서조차 불평등하고 불공정하게 작동하는 것이 한국 언론 지형입니다.

 

이러한 언론 환경은 식민지 시절부터 권력을 휘두르는 위정자들에 의해 형성되고 길들여진 것도 있지만 그것에 적응하고 그러한 가치를 추구하던 기회주의자들이 그 환경에 적응하면서, 그리고 그들에 반발한 언론과 기자들이 역도태되면서 만들어진 생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민주화가 이루어지고 수십년이 지나 21세기가 되고 이전 시대와 비교할 수 없게 발달한 사회가 된 대한민국에서 기존 부패의 영역과 구조 역시 더 교묘하고 세련된 방식으로 고도화되었고, 기득권과 언론의 영합, 야합으로 만들어진 엘리트 카르텔 역시 고도화되었습니다.

 

앞서 말했듯, 직접 돈봉투를 찔러주는 것보다 정보를 제공해줌으로써 합법적으로 이익을 얻어낼 수 있게 하고, 그것은 증거를 남기지 않기에 증인과 증언이 있다해도 아는 검사님과 몇다리 건너서 배정된 착한 판사님을 통해 얼마든지 무혐의, 운이 나빠봐야 집행유예를(그것도 다른 죄목으로)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훨씬 교묘하고, 더 세련된 방식으로 부패의 진화가 이루어진 것이죠.

 

문제는, 이걸 어떻게 일소할 수 있느냐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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