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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며,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 - E.Kant
by Ko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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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24.02.14
    향수 :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 리뷰.
  2. 2024.02.14
    권력에 관하여 : 혐오와 차별의 정서적 근원 중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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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리뷰는 작품에 대한 내용누설이 있습니다. 

 

장 바티스트 그르누이의 첫 살인은 태어난 직후였고, 피해자는 어머니였습니다.

 

물론 그것이 그르누이의 의도나 목적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어머니의 무책임한 존속살해를 거꾸로 돌려버렸죠. 그러나 부모가 없는 고아인 그르누이는 고아원에 가게 되었고, 두번째 살해 시도에서 또 살아남은 뒤 무두상에게 팔려가게 됐습니다.

 

그리고 그 직후, 유모는 강도에게 살해당했죠. 그리고 몇년 뒤, 무두상은 다년간 가혹한 작업 환경에서 살아남은 그르누이를 인정하고 좀 더 나은 일을 시킵니다. 그리고 그르누이는 자신의 재능, 냄새에 극히 민감한 것이 찾은 진짜 첫번째 갈망을 마주하게 됩니다.

 

바로 미녀의 향기였죠. 본래 무두된 가죽을 파는 것을 도와주기 위해 따라갔지만, 그는 홀로 처녀를 따라갔고, 그 향기에 취해 우발적으로 그녀를 죽이게 됩니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게 그의 손으로 이루어진 진짜 첫 살인이었죠. 그리고 그르누이는 죽은 그녀의 옷을 찢고 자기가 갈망하는 향기에 흠뻑 취하게 됐죠.

 

처녀의 아름다운 알몸을 탐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르누이에게 여성이란 향기를 담은 매개채일 뿐 여체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습니다. 죽은 처녀의 몸 구석구석 코를 박고 향기를 맡았지만, 죽은 자는 썩기 마련이고 생기를 잃으며 향기 또한 떠나가게 되는 법, 그르누이는 사라져가는 향기를 어떻게든 챙기기 위해 손으로 퍼담으며 콧속에 밀어넣지만 시체는 시체였습니다.

 

돌아온 그르누이는 개처럼 얻어맞지만 육체의 고통은 지난 저녁 겪었던 환상적인 경험에 더더욱 강력한 갈망에 빠지게 됐습니다. 그러다 지난 날 보게 되었던 향수 가게에서 알게된 것처럼, 그는 여인의 향기를 담고 싶어 했습니다.

 

그르누이는 가죽을 퍼퓸 마스터 주세페 발디니의 가게에 배달하러 갔고, 그가 향수 제조사인 걸 알고, 무엇을 만들고 싶어하는지 아는 그르누이는 자신의 재능을 뽐내며 그가 원하는 것, 시장에 풀린 경쟁자의 최고 상품을 즉석에서 만들어 냅니다. 그리고 발디니는 그르누이를 필요로 하여 무두상에게 은화 50개를 값으로 치르고 자신의 제자로 삼죠.

 

그러나 무두상은 사고를 당해 곧바로 죽게 됩니다. 마치 이전 유모처럼요.

 

그 뒤로 그르누이는 뛰어난 향수를 만들어내며 엄청난 성공을 안겨줍니다. 그러나 그의 갈망은 단순히 좋은 향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향기를 담는 것이었죠. 처음 발디니에게 찾아갔을 때, 그는 향기를 온전히 담는 것을 원했습니다. 그리고 그건 모든 사물에 해당되는 말이었죠. 그리고 그 중 최고는 그의 갈망. 아름다운 여인의 채취였습니다.

 

발디니는 향수 제조법을 그르누이에게 가르쳤고, 그 중에서 12개의 향수 조합을 알려주며 전설 속의 13번째 재료를 이야기해줍니다.

 

그르누이는 발디니에게 배운 향수 제조법에 따라 사물의 냄새를 담아내려 했지만 그건 오직 꽃의 향기 뿐, 구리나 돌, 심지어 고양이의 냄새조차 담지 못합니다. 결국 그는 자신의 갈망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죽어갔고 발디니에게 들은, 그라스의 향수 제조법을 알게 되며 그곳으로 떠납니다.

 

그리고 그날 밤, 수백개의 향수 제조법을 남기며 떠난 그날 성공의 꿈을 꾸던 발디니는 이전부터 흔들리던 건물이 마침내 무너져 죽게 됩니다. 유모, 무두상과 마찬가지로요.

 

그라스로 떠나는 그르누이는 산, 정확히는 동굴 속을 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곳은 돌 냄새를 제외하면 그 어떤 냄새도 없는 특별한 곳이었죠. 그곳에서 거지꼴이 될 때까지 지낸 그르누이는 어느날 한가지 사실을 자각하게 됩니다. 바로 자신에게는 채취가 없었다는 걸요. 

 

그르누이는 그곳에서 일을 하며 천천히 준비하게 됩니다. 그라스의 향수 제조업자의 제자가 되어 냉침법을 공부하면서요. 그리고 그곳으로 가던 중 보게 된 로라라는 아름다운 여성을 보았고, 그녀를 찾게 됩니다. 어렵진 않죠. 냄새를 따라가면 되니까요.

 

충분한 실험과 준비 끝에, 그는 사회에서는 범죄라고 부르는 행위를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냉침법으로 향기를 뽑아내려 했지만, 실패했고 기름을 먹여 향기를 빼내는 방법을 시도했고, 성공하게 되었죠.

 

그리고 그의 범행은 꾸준히 성공했습니다. 천재적인 후각을 가지고 있는 그르누이는 남들의 시선을 피할 수 있었고, 개와 같은 뛰어난 후각을 가진 동물에게도 감지되지 않는 최고의 자객이었죠.

 

앙투안 리시는 아주 뛰어난 인물이었고, 그르누이의 범죄를 추적했고, 그의 마수를 피해 도망가며 거의 성공할 뻔 하지만 결국 그르누이는 마침내 로라의 여관 침실에 침투해 그녀를 살해하고 로라의 향기를 훔치는 데 성공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13번째 전설 속 향기 역시 손에 넣었지요.

 

그리고 감옥 속에서 그르누이는 자신의 몸에 향수 한 방울을 묻힙니다. 그리고 자신의 사형집행장에 도착하죠. 그러나 뭔가 이상했습니다. 마치 고관대작을 다루는 것처럼 조심스럽고 예의를 다하는 이들과, 마차를 타고 온 그르누이는 자신의 데리러온 남자의 화려하고 멋진 푸른 옷을 입고 있었죠.

 

그런 뒤 집행장에서 서자 방금 전까지 집행 연습을 하며 환호를 받던 집행인이 향을 맡은 뒤 무릎을 꿇고, "이자는 결백하다."는 말을 외칩니다.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사람들 앞에서 그르누이는 손수건에 향수를 묻힌 뒤 휘두르자 사람들은 활홀 속에 빠지게 되고, "주교는 이 자는 사람이 아니다. 천사다!"(He's no man. He's an Angel!)이라 외칩니다.

 

그리고 향수를 휘두를 때마다 사람들은 쓰러지고 갈망하고 환호하죠. 그러다 손수건을 놓치자 사람들은 그르누이가 아닌, 향수에 팔을 뻗으며 그것을 가지기 위해 몸을 던져댔습니다. 그런 뒤 극단적 활홀경 속에서 그라스의 시민들은 갑자기 집단 난교를 시작하게 되죠.

 

그럼에도 로라의 아버지, 리시는 검을 빼들고 그르누이 앞에 서서 나는 속지 않는다 하였지만, 코앞에서 느껴지는 향수에 결국 검을 떨어뜨리고 흐느끼며 도리어 사죄하고는, 그를 아들로 칭합니다.

 

그 뒤, 본능적으로 자신이 태어난 어시장을 찾은 그는 자신의 머리 위에 자신이 만든 향수를 들이 붓습니다. 거리의 부랑자들은 그의 몸에서 나는 향기에 매혹되어 달려들어 살점 하나, 피 한방울 남기지 않고 그를 없애버립니다.

 

 

자, 먼저. 그르누이는 몸에 채취가 없습니다. 그러면서 평생을 향기를 갈망하고, 그것을 손에 넣기 위한 목적으로 살아갑니다. 천재적인 후각은 그를 특별하게 만들어줬지만, 그 재능을 추악한 범죄에 사용했죠.

 

그르누이는 탄생부터 운명적 파멸과 함께 했습니다. 자신을 태어나게 한, 그리고 살해하려한 어미를 죽게 만들었고, 그를 길러 준 유모 역시 그가 떠나자마자 죽었으며, 무두장 또한 그르누이를 팔아서 떠나게 끔 한 직후 죽었으며, 발디니 역시 그르누이가 떠난 그날 밤 붕괴된 건물에 깔려 죽었습니다.

 

이는 아주 의미심장한데, 그에겐 돌아갈 곳이 없었습니다. 즉, 고향이 없고 보금자리가 없습니다. 그때그때 자신이 머무는 곳은 있었지만 그 어떤 곳이 그르누이가 소유한 곳이 없었고, 집으로 삼을 만한 곳도 아니었습니다. 직업이 있었고 머무는 곳은 있었지만 언제든, 또 언젠가 떠날 곳이었죠. 그는 진실로 태어난 이후 그 어디에도 속한 적 없는 존재입니다. 가족, 직업, 사회 속에서 철저히 유리된 아웃사이더였습니다. 마치 없는 사람처럼요. 그가 채취를 가지지 못한 것처럼.

 

채취가 없다는 것은 자기만의 고유한 무언가가 없다는 것입니다. 향기와 냄새를 메인 텍스트로 삼는 영화답게 그것은 매혹적이거나 필수적인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장바티스트 그르누이는 그런 게 전혀 없죠. 태어날 때부터 채취 없이, 냄새 없이 태어났습니다. 모두가 가지고 있으니 오직 장바티스트 그르누이 단 혼자서만 없는 것.

 

그는 세상 모든 사물이라면 가지고 있는 것을 잃은 채 태어난, 냄새로 작성된 세계 속에서 유일하게 세상에 없는 사람입니다.

 

천채적인 후각은 그에게 감미롭고 황홀한 향기에 대한 갈망을 낳았고 그것에 대한 강력한 소유욕을 낳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냄새를 가지고 싶어 했고, 그걸 독점하고 싶어 했습니다. 영원히 타인의 향기를 가지고 싶어 했죠. 스스로의 손으로 저지른 첫 살인 당시 그는 죽어가는 여인의 시신에서 사라져가는 향기를 그러모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사라져가는 향기에 절망하고 말았죠.

 

그러한 갈망이 더 뛰어난 향수 제조법을 추구하게 만들었고, 그것을 실험하기 위해 윤리나 도덕 같은 것은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못했습니다. 그건 사회에 속해 있는 사람에게나 적용되는 것이지 그르누이는 사회에 속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가 직업을 가지고 누군가의 밑에서 일한다 하여 사회에 속한 게 아닙니다. 본질적으로 인간으로서의 고유한 것을 가지지 모했고, 단 한번도 자기만의 적을 둔 적도, 뿌리를 내린 적도 없으며, 돌아갈 곳도 없는 그는 사회 속 무적자(無迹子)이기 때문이죠.

 

그렇게 스스로 사회 속 사람이 아닌 그르누이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만들기 위해 어떤 짓이든 할 수 있었고, 해야만 했습니다. 그것이 그가 태어난 이유이니까요.

 

그는 은밀하고 비밀스럽게 사람을 죽이며 그녀들의 향을 훔쳐갑니다. 모두 아름다운 처녀들 뿐이었죠. 오직 그들에게서만 채취할 수 있는 향을 모았습니다. 그라스는 그르누이의 희생자들이 발견되며 공포와 공황으로 빠져들었습니다. 위태롭고 속도감 있는 연출이 일품으로, 위기감이 고조되는 것을 잘 연출했죠.

 

그리고 리시가 로라와 함께 도망간 이후의 주인공 역시 오직 냄새로만 추적했고, 은밀하게 로라의 침실에 침입하는데 성공합니다. 여기에서 개조차 그의 채취를 느끼지 못합니다. 또한 리시가 꿈을 꾸고 일어나며 로라의 안위를 확인하는 것으로 한번 관객의 긴장감을 희석시킵니다. 그런 뒤에 로라의 침실에 다시 한번 침입한 그르누이를 쳐다보는 로라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아침이 되고, 리시는 로라의 방문을 열고 안위를 확인합니다.

 

이때의 연출이 좀 유치하긴 한데, 07년도 영화임을 감안하면 넘어갈 수 있는데, 나체로 사망한 로라의 모습은 작중 내내 아름다움이 강조되는 것과 대비되는 비참한 모습으로 관객에게 충격을 주는 완급 조절이 이루어집니다. 그르누이는 피해자의 향을 훔치기 위해 머리카락마저 깍아냈는데, 로라의 아름다운 적발이 깍인 채 나체로 침대 위에 쓰러진 모습은 어떤 면에서는 예술적이었지만, 그 그림이 아름다웠다기 보단 그 대비가 강렬하게 다가왔습니다.

 

체포된 이후의 그르누이에게 리시가 다가와 강렬한 증오를 통보하지만 그르누이는 13번째 재료를 이용해 전설적인, 또는 악마적인 향수를 만들어냈고, 사형 집행 당일 그것을 단 한 방울 뿌림으로서 자신을 데리러온 자들을 자신에게 매혹시킵니다. 심지어 자신이 입고 있던 옷까지 내주면서요.

 

이 지점이 꽤 중요한데, 그는 자신이 입은 옷마저도 벗고 타인의 옷을 입었습니다. 이제 진정 그의 모습은 존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옷을 버리고 타인의 옷을 뒤집어 쓴 그는 그저 가죽을 뒤집어 쓴 그림자와 다를 게 없었죠. 자신의 향수를 몇 방울 써 현장을 황홀경의 광란으로 만들어버렸지만, 정작 그는 그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하고 관심 받지 못하는 자임을 알게 됐습니다.

 

향수를 묻힌 손수건을 놓쳤을 때, 사람들은 그에게 매혹된 게 아니고, 그에게 사랑과 관심을 보낸 게 아니었으며, 그를 갈망한 게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난교의 현장으로 변한 곳에서도 강렬한 증오로 칼을 빼든 채 다가오는 리시에게 저항 없이 몸을 열어주었으나 리시조차 그의 향에 매료되어 도리어 자신의 딸을 죽이고 빼앗은 범인에게 무릎 꿇고 사죄한 뒤, 그를 아들이라 칭합니다.

 

그러나 이미 그는 알고 있죠. 그가 사랑한 것은 자신이 아니라 자신의 몸에 남아 있는 향수의 잔향이라는 것을.

 

그렇게 그르누이는 이 세상에 자신이 있을 곳도, 뿌리 내릴 곳도, 자신을 자신 그대로 알아봐줄 곳이 없다는 걸 깨닫고 마치 본능처럼 자신이 태어난 곳으로 돌아갑니다. 그곳에서 머리에 모든 향수를 쏟고는 달려드는 사람들에게 찢겨 죽죠. 그야말로 그 어떤 것도 남기지 않은 채.

 

그저, 자신이 뒤집어 입은 타인의 옷가지만 남긴 채 이 세상에 단 한번도 존재한 적 없었던 것처럼요. 그가 남긴 족적은 있을지언정, 그 주인이 누구인지는 이 세상 누구도 모를 일이 되었습니다. 채취 없이 태어나 냄새를 남기지 못한 그가 세상에서 가장 향기로운 향을 입었으나 그것은 자신의 것이 아니었고, 사람들이 원한 것은, 사람들이 바라본 것은 자신이 아니라 그저 향기 뿐이었으니까요.

 

다시 한번, 장바티스트 그르누이는 뿌리를 내린 적 없고, 내릴 수 없는 파멸적인 운명을 타고 났습니다. 보금자리가 없고 적迹이 없죠. 그런 의미에서, 그는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태어난 것 같은 인상을 줍니다. 마치, 시대의 어느 순간 어떤 것을 단 한번 만들기 위한 목적으로 태어나 목적이 다 하면 사라지는 그런 도구적 존재로요.

 

그는 향수 산업이 태동하고 발전하던 시기에 태어나 어떠한 물건, 세계에서 가장 치명적이고 매혹적인 향수를 단 한번 만들어보기 위해, 우주에 그러한 것이 있었음을 단 한번만이라도 기록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에 불과한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그는 세상에 무언가를 남길 필요 없었고, 머물 곳이 있어서도 안 됐습니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천재적인 후각을 타고 났고, 그것에 순수해야만 했죠.

 

향기를 담기 위해 불순물인 자신의 냄새마저 있어서는 안 됐고, 돌아갈 곳도, 뿌리 내릴 곳도 있어선 안 됩니다. 그가 운명을 달성하기 위해선 어떤 위협과 위기가 있어도 반드시 이겨낼 수 있었고, 이런 면에서 영웅 서사와 유사한 흐름이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마침내 달성하고, 그것을 세상 앞에서 증명한 뒤에 그의 모든 쓸모가 다하고 나서 그는 마치 이 세상에 단 한번이라도 존재한 적 없는 것처럼 뼛조각, 피 한방울 남기지 않고 세상에서 사라지면서 끝나죠.

 

 

그러한 쓸모를 '신의 사역'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꽤 재밌는 점이 있습니다. 신의  사역하심으로 인해 죽어야할 자가 결코 죽지 않았고, 그를 학대하거나 착취하려던 악인들은 모두 벌을 받고 죽었습니다. 주인공인 그르누이에 의해 살해 당한 사람들은 있지만, 그가 직접 죽인 사람은 그의 모친을 포함해서 모두 여자였죠.

 

성경에서 롯은 신과 악마의 내기로 인해 가족과 가축을 잃고 고난을  겪어야 했죠. 이처럼 신의 사역에 무고한 주변인의 죽음은 억울한 게 아닌 제나름의 가치를 지닙니다. 물론 현대인의 관점과는 좀 거리가 있죠. 그렇기 때문에 사회 속에 속하지 않은 아웃사이더 그르누이의 살인은 인세의 관점으로 평가할 수 없게 됩니다.

 

또한 사형 집행 당일 사형 집행자는 그를 보고 결백하다(He's an inocent!)고 했고 추기경은 그를 보고 천사라고 합니다. 가장 비천하고 천시 되는, 사람의 목숨을 끊는 자가 결백을 증언했고, 신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 중 하나인 추기경이 직접 천사임을 선언합니다. 그르누이가 신의 사역을 받는 자이기 때문에, 인세의 법률에 구속받지 않으며, 신의 역할을 수행하는 선택된 도구라면 그는 결백한 것이 맞고 천사와 같은 신성한 권위를 지닌 존재로 해석될 수 있다는 거죠.

 

 

스토리를 벗어나서 바라보면, 주인공 역할을 맡은 벤 위쇼의 위태로운 연기는 상당히 좋았습니다. 조용하고 조심스러우나 악마적으로 과감하기까지 한 행동과 표정 연기는 그의 과묵한 모습과 함께 관객을 몰입시킵니다.

 

이제는 고인이 된 알란 릭맨의 엄격한 귀족적 모습의 연기 또한 무게의 한 축을 담당했고요.

 

그러나 향수라는 주제를 가지고 향기라는 매체를 중심으로 풀어가면서도 그것에 대한 시각적 연출은 매우 부족했다는 점에서 많이 아쉬운데, 원작을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향기, 혹은 맛과 같은 감각을 시각적으로 풀어내는 작품들이 꽤 있었고 연출에 따라 매우 강렬한 경험을 간접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영화는 서사적 측면을 강조했을 뿐 향기 그 자체에 대한 미학은 기억에 거의 남지 않습니다.

 

그저 후반부, 향기에 따른 반응이 너무 강력해서 의도적인 게 아닐까 싶은 점도 있고요. 도리어 주인공의 천재적인 후각을 강조하는 모습을 더 중점적으로 보여주는 경향을 보여줍니다. 의도적인 거라면 다소 아쉽지만 후반부의 클라이막스를 위해 연출을 아낀 거라고도 해석해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아쉬운 건 아쉬울 수밖에 없는 연출적 한계를 지닙니다.

 

원작에서는 향기에 대한 묘사가 매우 충실하고 풍부하다고 하는데, 원작을 아는 사람이라면 매우 아쉬울 수 있겠지만, 단순 영화만 감상하겠다면, 연출적 부분보다는 서사적 지점에 집중한다면 원작이 있다는 점을 감안해도 상당한 짜임새가 있는 영화로 재밌게 볼 수 있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살짝 높은 점수를 주기엔 다소 아쉽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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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은 쓰는 것에 의미가 있고 지키는 것에 의미를 둬선 안 된다. 쓰이지 못하는 권력은 그 자체로 도덕적이지 못하고 문제적이다. 권력을 가진 자는 그것을 행사해야 할 필요를 요구 받고, 어떠한 결정, 판단, 결재, 거부, 임명 등 다양한 부분에 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조직은 필요한 조치들이 작동하지 않게 되고 이는 그 조직의 발전과 역량을 저해하는 것을 넘어 생존에 위협이 될 수 있다. 

그것을 적극적으로 행사해야 할 필요까진 없지만 필요한 권력을 적합하게 행사하는 것은 권력을 가진 자가 해야 할 필수적인 덕목이다. 앞서 권력을 지키는 것에 의미를 둬선 안 된다고 했지만 이는 권력을 그 자체로 지키기 위한 목적으로 쓰는 것을 의미한다. 어떠한 적합한 행사를 하는 것을 거부한 채, 그 권력자의 부덕함과 필요성을 부정한 뒤 새로운 사람을 그 자리에 올려 그러한 권력을 행사하게 해야 한다는 움직임을 방해하는 것은 역시 비도덕하고 문제적이다. 즉, 의무나 책임보다 감투를 지키는 자의 권력을 말하는 것이다. 

권력은 적합한 사람이 적절하게 행사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잘못 행사되거나 행사되지 않을 것이다. 권력을 가지고 행사할 의지도 있으나 무엇을 어떻게 행사해야할 지 모르는 사람도 있다. 부적절한 인사인 셈이다. 권력도 써본 사람이 잘 쓰는 것이고 써본 경험이 있어야 더 큰 권력을 다루는 법을 알게 된다. 능력과 경험에 비해 지나치게 큰 권력을 위임하는 것 역시 문제적이고 능력 있는 자에게 아무런 권력도 주지 않는 것 역시 문제적이다.

모든 사람들은 제각기 크고 작은 권력을 지닌다. 작게는 학급에서 주먹과 카리스마, 리더쉽으로 얻는 권력이나 반려동물간의 수직적 관계가 있을 수 있고, 가정에서 부모가 가지는 권력이 있다. 판매자와 구매자의 관계도 있으며 대통령과 각 부 장관의 관계나 사장, 혹은 대표와 직원들의 관계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것들 중 어떠한 관계는 권력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것들이 있다. 그것은 권력이라기 보단 의무에 가깝기도 하고 어떠한 사회적 관계와 다른 자격과 소양을 요구하는 관계도 있다.


사회구조적 관점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떠한 권력도 얻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이는 구매자-판매자의 관계나 고용주-직원의 관계와도 다르다. 후자의 경우 어느 정도 관계가 있을 수는 있다. 그러나 지금 말하고자 하는 것은 좀 더 큰 층위에서의 이야기이다. 가령, 인종차별이나 성차별적 관념에서 이루어지고 형성되는 것을 말한다. 진짜 권력을 가져본 적 없고 그런 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의 경우 내세울 수 있는 자부심이나 정체성이 부족하다. 


그렇기 때문에 생득적으로 부여되는 정체성으로 자신의 권력 구조를 형성시키길 바라는데, 피부색에 따른 우열로 인종차별을 가하며 권력 관계를 형성시키는 경우나 성별을 근거로 이성을 열등하고 나약하며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 존재로 격하시키는 경우가 그러하고, 민족에 따라 우열을 설정하는 경우가 그러하다. 이것은 실질적 권력 관계는 아니지만, 그것을 추구하는 성향 내지는 믿음에 따른 행사이다.

대부분의 인종차별주의자, 성차별주의자와 같은 이들이 대부분 저학력, 저소득자인 이유는 그들이 단순히 못 배웠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들보다 더 열등한 자들을 멸시하고 공격하며 자신의 사회적 층위에서 가해지는 스트레스를 해소하고자 함에 가깝다.

이는 노비가 해방될 때 양반이 아니라 양민들이 반발했던 것과 유사한 이유이다. 물론 그들에게 노비가 자신들과 맞먹으려 든다는 계급 반역적 현상을 거부하는 것 역시 결코 작지 않은 이유일 테지만, 아래로 가해지는 계급적 스트레스를 해소할 창구로 최하층민의 존재는 어떤 면에선 위안적일 지경이다. 또한 전근대적 사회엔 대체로 이러한 역할을 담당하는 받이용 계급이 존재하곤 한다.

그러나 현재 대부분의 사회엔 명시적 계급이 존재하지 않고, 다양한 이해관계와 이데올로기가 만들어져 있으며 더 다각적이고 복합적인 사회가 되었다. 전근대적 관념은 사멸하지 않았으나 다른 형태와 밀도를 가지고 있고 다양한 이유로 차별과 혐오가 발생한다. 저소득 하층민들에게 그들이 가장 밑바닥이 아니며 가장 쓸모 없고 무가치하지 않은, 자존감과 정체성을 무너뜨리지 않는 무언가가 필요하다. 

그들이 표심으로서 정치적 향방을 흔들 수 있는 존재가 되었을 때, 그것이 미디어와 진짜 권력자에 의해 유도되고 조장되었다곤 해도, 그들은 비로소 권력을 가지게 된 것과 다름이 없으며, 적어도 그들의 요구나 한 표가 실제 결과로 증명되었을 때 그들은 그렇게 믿을 것이다.

 


문제는 이것이다. 그들은 권력을 가져본 적도 없고, 행사해본 경험이 적다. 그들은 권력이 무엇이고 어떻게 써야 하며, 누구에게 줘야 하는지 등을 알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권력을 가지고 있을 뿐 그것을 쓰는 방법은 지나치게 원초적이다. 그들은 장기적이거나 생산적인 비전을 가진 게 아니고 그런 것을 구체적으로 요구하지도 않고 할 수도 없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보다 더 우월했으면 하는 것이고, 그들이 낙인 찍은 적을 몰아내거나 싸워서 물리치거나, 죽여 없애는 것이다. 

즉, 그들이 진짜 권력을 가지고도 그것을 어떻게 써야 하는 줄 몰라 써선 안 될 방식과 방향으로 그것을 휘두르는 것이고, 그렇게 하라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그들이 선거에서 행사하는 권력, 민주적 요구는 차별적이고 혐오에 근거하고 있는 셈이다. 좌파 빨갱이를 몰아내야 한다는 둥, 흑인들이 권력을 잡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둥, 이민자를 쫓아내야 한다는 둥, 여성의 사회적 진출보다 가정에 충실할 것을 요구하는 등의 것 말이다.


민주주의에서 모든 국민은 국가의 권력을 가진 자들임에도 왜 그들은 권력을 가진 적 없으며, 그렇게 느낄까? 바로 실제로 그렇기 때문이다. 정치인들에게 요구하는 이들 중 월 180만원을 벌며 대출 빚이 1억이 있는 가정의 고졸의 말보다 대기업 회장의 말이 더 강력하게 작용할 것이고, 지방 전문대 출신 직장인보다 인서울 재학생의 발언이 더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돈이 있고 권력이 있는 자들, 엘리트들은 그들의 돈과 권한, 인맥을 통해 사회적 분위기를 움직일 수 있다. 

특정한 의제를 공론화 시킬 수도 있고, 묻을 수도 있고 물타기를 하며 바꿔치기를 감행할 수도 있다. 특정 직종의 이권을 보호할 수도 있고 위협할 수도 있다. 그들의 규모는 국가에서 n%에 불과하거나 그 이하일 것임에도 그들의 힘은 국가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위 층위자는 언제나 권력 관계에서 을의 입장이었다. 누군가에 의해 고용이 되었고, 결코 높은 자리라 할 수 없는 위치에 있다. 그들은 사회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타인의 존경과 존중을 받기에 어려운 위치에 있다. 설령 겉으로 그러한 대우를 요구하고, 그렇게 보인다 해도 스스로가 가장 잘 아는 법이다. 그 자신 또한 그랬을 테니까.

그렇기에 그들은 스스로 우월할만한 것을 찾아야만 한다. 그들은 어떠한 이유로든 사회적 성취와 성공에 실패 했으니, 내세울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을 것이기에 가진 것이라곤 태생적으로 가지고 태어난 것. 스스로 노력하거나 얻어내지 않아도 가질 수 있는 생득적인 것이 공통적으로 선택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데, 인종, 민족, 그리고 성별이 그러하다.

왜 어떤 이들은 여혐 일베나 하고 어떤 이들은 남혐 페미나 하고 있을까? 그들의 사회적 신분과 경제 상황은 어떠할까? 일베는 그나마 더 넓은 범위의 사상을 다룬다.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외교안보적 영역에서 제나름의 세계관을 가진다. 그 세계관의 완성도와 논리성, 합리성이 어떠한지와 별개로 더 다양한 층위와 계층을 포함할 여지와 역량이 있다. 그러한 이유로 일베 류 가치관은 엘리트에게도 입맛에 맞는 논리와 주장을 형성하고, 사회 하층민에게는 더더욱 특별한 사상이 되어줄 수 있다. 

엘리트들은 그들이 우월하며 더 많은 특혜를 받아야할 이유를 말하고, 보수진영엔 진보좌파를 탄압하고 권력을 확보해야할 정당성을 제공해주며, 하위 층위에겐 증오하고 혐오하여 우월한 기분을 느끼게 해줄 것 내지는 공격해도 좋을 적을 제공한다.

 


반면 페미에겐 성차별에서 기인하는 남성 혐오적 정서와 논리만을 제공한다. 그리고 그것은 너무나도 처참할 정도로 부족하고 비합리적이기에 정신병적 증상과 구분되지도 않는다. 그들의 소아병적 펨셀꼴값병은 그들의 사회적 위치와 경제적 상황에서 기인하는 바가 크고, 설령 그렇지 않은 자들에게서조차 기묘한 사상적 중독을 제공한다. 

이는 여성 특유의 여성 편향적 태도의 끼리끼리 문화에서 근거하는 바가 어느 정도 있을 것이다. 여성의 잘못이나 비난에는 같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편을 들어주고 맞서 싸워주는 것, 총체적으로는 여성들 사이에서만 작동하는 공감 능력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이 여성들이 겪어온 차별과 핍박에 따른 약자들의 단합이라고도 할 수 있을지 모르나 그것은 40대 이상 세대에게나 통용될 것이고, 30대 초반 이전의 여성 세대에겐 정당성 없는 주장에 가깝다.

여튼, 이러한 맥락 속에서 사회적 지위나 경제적 상황에 모자람이 없다 하여도 남혐 하는 꼴페미가 될 수 있다. 혐오가 비합리적인 이유에서 기인한다 하더라도 기꺼이 혐오하는 자들은 언제든 어디든 존재할 수 있고, 뻔뻔한 가해자보다 모든 도덕적 정당성을 독점한 선한 피해자가 되고 싶어 하는 졸렬한 피해자도 있는 법이다. 

그들은 남성에게 피해를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피해를 받는 기분이 들기에 피해 망상에 빠진 것이고 누군지도 모를 여성이 남성에게 피해를 받았다고 그것이 자신인 것처럼 이입하여 타자와 자아의 구분을 하지 못한 채 가해자 전체 집단을 사악한 집단으로 매도하기를 즐긴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남성을 증오하고 혐오할 이유이고 명분일 뿐이지 실제로 그들 전체가 사악한 집단인지 아닌지가 중요한 게 아니다. 도리어, 그들이 사악해야할 필요가 있고 그렇게 만들어서라도 공격하고 싶어 한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피해자로서 모든 도덕적 정당성을 독점하고 싶어서 말이다.

그렇게 PC, 페미 진영은 사회적 신분도, 경제 상황도 좋지 못하기에 적을 찾고 낙인 찍어서 혐오한다. 일베 류 가치관보다 더 좁은 범위의 사상을 다루기에 확장성은 떨어지고 합리성은 더더욱 부족하지만 크게 보아 단 두개 뿐인 성별을 기준으로 했기에 단순하고, 단순한 만큼 다른 이해관계를 떠나 이분법적인 구성을 가능하게 해준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PC충 페미 세력은 일베보다 규모가 적다. 단지 더 시끄럽고 노골적으로 문제적일 뿐이다.

페미 진영이 가진 것도 없고 이룬 것도 없기에 그들이 (도덕적으로) 우월하고자 한 근거가 바로 생득적으로 부여되는 성별이다. 여성 혐오적인 남자들의 성차별이 그들이 성취한 것도, 가진 것도 없는 것에서 기인하는 태도였다면 페미 진영의 남성 혐오적 성차별 역시 같은 이유에서 근거한다고 볼 수 있는 셈이다. 

이성 관계에서도 못생기고 뚱뚱한 자신의 모습에 있어 관리를 하거나 다른 매력을 만들고 찾으려는 노력보단 먹고 자는 것만을 즐기던 이들이 자신의 못난 외모를 Do not need a prince라는 표어와 탈코르셋이라는 용어로 일부러 꾸미지 않는다는 둥 자기들 입맛에 맞는 명분을 찾은 것 뿐이지 본질은 게으르고 못생긴 것 뿐이다. 뛰어난 외모를 가진 자들은 타고난 만큼 대단한 노력을 평생 동안 하고 있다는 걸 고려하면 페미 진영은 소아병적인 궤변을 일삼는 것 뿐이다. 그들이 연애 시장에서 왜 선택 받지 못하는 Femsel이 되었겠는가? 그들이 선택 받을만한 매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이 왜 더 나은 경제적 위치에 서지 못했을까? 군대를 가지 않아 최대 2년의 시간에 특혜를 받는데도 말이다. 다른 여자들에 비해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 못했서라도 보는 것이 맞다.

모든 여성이 페미가 아닌 이유는 다른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서도 그들은 노력한만큼 성과를 얻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공부한만큼 성적이 나와 대학을 가고, 노력한만큼 직장을 가져 일하며 돈을 번다. 그들은 사회 생활과 무난한 인간 관계를 유지하는데 에너지를 쏟지 혐오와 차별에 힘을 쏟지 않는다. 수동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차별 정서나 공감대가 있을지언정, 페미라고 하긴 어렵다. 평범한 남성들도 어떤 영역이나 분야에 있어서 성별에 따른 차별적인 피해를 받거나 불합리하다는 생각을 가지곤 있지만 그렇다 해서 여혐 일베충이 아닌 경우가 있듯이 말이다.

그러나 페미들은 그렇지 않다. 사회적으로 성취가 낮고, 경제적으로 성공하지 못한 이들이 많다. 단지 방송국, 유튜브, 기자 등 눈에 크게 띄는 이들이 많아서 착시 효과가 유독 크게 느껴지는 것일 가능성도 있다. 그들이 직장이 있어야 하는 블라인드, 메이플 환불 및 탈퇴 등에서 보여주는 화력을 보면 간접적으로 그들의 수준이 드러난다. 하위에 속하는 자들이 생득적인 요소로 우월감을 얻고 싶어 하는 것이다. 일베가 가해자 내지는 행사자로서의 권력을 추구한다면 페미는 피해자로서 가해의 정당성을 독점하는 것을 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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