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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며,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 - E.Kant
by Ko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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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에 해당되는 글 9건

  1. 2015.10.27
    법치에 대한 이해 4편. 법치의 필요성과 공권력.
  2. 2015.10.17
    인간의 본성은 선한가 악한가에 대한 단상. 1
  3. 2015.10.17
    국정화 교과서 사태에 대한 비판.
  4. 2015.10.05
    법치에 대한 이해 3편. 법적 처벌의 목적과 기능.
  5. 2015.10.03
    3Dmax 바이패드 박스로 편하게 보는 법.
  6. 2015.10.03
    3Dmax 바이패드, 본, 헬퍼, 라이트 감추기. 1
  7. 2015.10.03
    3Dmax 축Pivot 정중앙으로 위치시키는 법 및 간단한 넙스 먹이기.
  8. 2015.10.03
    3Dmax 뷰포트에 이미지 띄우기. 2
  9. 2015.10.03
    3Dmax 뷰 큐브가 없어졌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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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05 - [취미/이야기] - 법치에 대한 이해 3편. 법적 처벌의 목적과 기능.


2015/08/14 - [취미/이야기] - 법치에 대한 이해 2편. 피해자 인권?


2015/08/09 - [취미/이야기] - 법치에 대한 이해 1편. 무죄 추정의 원칙.


2015/02/19 - [취미/이야기] - 국가의 역할과 정치의 목적.



위 링크의 맨 아래 글인 국가의 역할과 정치의 목적에서 기실 법치의 필요성은 거의 다 설명했다고 봐도 되지 않나 싶긴 하군요. 법치가 필요한 이유는 우리가 수 천년간 여러 형태의 국가와 사회를 역사적으로 경험해봤고, 그에 따라 거시적으로 더 나아지는 과정을 거쳐왔으며, 그 결과 이전까지의 모든 국가와 사회, 그리고 그것들을 실질적으로 구성하고 기능시키는 법률과 제도, 시스템보다 현재의 것들이 더 우월하다는 이야기가 되기에, 그러한 가장 나은 형태의 법치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누리고 영위하는 모든 종류의 권리와 자유, 안전은 보장될 수 없게 됩니다.


앞서의 글들에서 이야기왔듯이, 우리가 안전할 수 있기 위해선 어떠한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며 모두가 인정할 수 있는 권위를 지닌 단 하나의 권력, 혹은 폭력만이 존재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공권력이라 부르는 것이며, 그것의 현실적 한계는 존재할 지언정 역사상 모든 종류의 시스템 중에 가장 합리적이고 쓸만한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범죄자에 의한 피해에 대해 분노하고 그에 대한 어떠한 대안으로서 강력한 처벌 등을 주장하곤 하지만 그러한 주장은 반대로 본인의 권리를 조금씩 갉아먹는 행위이고, 그러한 범죄에 대해 분노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공권력에 의해 이루어지는 범죄에 대해서 분노해야 합니다.



법치의 존재 이유는 그것을 통해 공정하고 합리적인 사회를 이룩하기 위함입니다. 만약 우리가 누군가와 시비가 붙고 갈등이 생겼는데, 그에 따른 판단권자가 매우 비합리적이고 공정하지 못한 판결을 내린다면 우리는 그에 대해 불공평함과 억울함을 토로할 수 있고, 그러한 반응에 따라 판단권자는 되려 억울한 사람을 옥에 쳐넣고 처벌을 내리는 고전 민담의 탐관오리, 무능하고 인정없는 고을 원님의 행태를 보인다면 누구도 그것이 옳다고 하진 않을 겁니다.


그런 상황이 발생하지 않기 위해 어떠한 원리와 원칙이라는 이름하에 법률과 그에 대한 논리적인 해석이 필요한 것이고, 그것을 다룰만한 지성이 되는 사람들 중에서도 고르고 고른 이들을 훈련시켜 법관, 법학자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겁니다.



다시 말하지만 국가에서 허용되는 유일한 폭력은 공권력입니다. 아닌 곳도 있지만 그런 곳은 그러한 공권력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기 때문에 관습이나 예외적 허용에 의해 유지되는 것 뿐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법치가 제대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그러한 근본이 되는 법률의 합리성과 논리성, 현실적 적용 등에 대해 심도 있게 논해야 하며, 그러한 과정은 역사적으로 발전해왔고 지금도 뛰어난 지성을 가진 이들에 의해 논해지고 교육되어지고 있습니다.


그러한 법률이 일견 합리적이고 논리적이게 되었으며 현실적으로 적용해도 무방한 수준이 되었다면 그것을 실제로 적용하고 집행하는 주체가 필요합니다. 그들을 우리는 검사와 경찰이라고 부르고, 그들 또한 낮지 않은 수준의 교육과 훈련을 받죠. 그러한 교육과 훈련에 따라 일은 처리되는 거고요.


어떠한 공개되어져 있고, 감사監査할 수 있으며, 신뢰할 수 있는 원리와 원칙에 의해 절차가 진행되며, 그 과정상의 문제에 대해 역시 피드백이 가능할 수 있으며 반대로 본인은 나름대로 그 과정의 비밀을 보장할 수 있고, 역시 안전 또한 보장되며, 사람답게 대우를 받고 부당한 대우에 대해 고발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춘 것이 바로 현재의 시스템입니다.


이러한 절차는 헌법에서 이야기하는 인권을 보장할 수 있고, 그러한 보장에 따른 안전과 공정함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난 억울하지만 마치 처음부터 추악한 범죄자로 대우를 받고 그렇게 인식되어 어떠한 보호도 받지 못한 채 대중과 주변 사람들에게 직간접적인 피해를 본다면 그것 역시 우리가 분노하는 일입니다.


따라서 그러한 일이 발생하지 않기 위해 국가에 의한 법치가 이루어지고, 실질적인 집행과 관리는 그러한 국가의 공권력에 의해 이루어져야 하는 겁니다. 



반대로 말하자면 이러한 원칙이 무너지면 이 사회는 올바르게 기능할 수 없고, 그러한 법치를 통해 기대할 수 있는 모든 권리와 자유, 안전은 보장 받을 수 없음을 말합니다. 우리가 마녀사냥이나 인민재판을 보면서 그것이 불공정하고 비합리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듯이, 그러한 공권력이 없고 공정성을 기대할 수 없는 사적인 폭력에 의해 진행되는 유사법치 행위의 야만성은 매우 위험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력구제와 같은 사적폭력은 이루어져선 안 되며, 되려 법률에 의해 처벌을 받아야 하는 겁니다. 우리가 국가의 법치를 무시하고 자신의 정의를 우선하기 시작한다면 그러한 원칙이 없는 사회는 앞서 이야기한 것과 같은 야만적이고 위험한 사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지금과 같은 법치, 고도의 통치시스템이 없었던 촌의 시골동네나 과거의 도시나 지방처럼 집단 자체는 기능할 수 있습니다만, 그것은 집단의 입장에서일 뿐이지 그 안의 개인들은 충분히 보호받지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녀사냥과 인민재판에 의해 죽고 피해를 본 사람이 존재하는 것이고 그러한 사적폭력과 비합리적이고 비논리적인 집단의 폭력에 의한 희생자들이 많은 것입니다.


그리고 시스템은 그러한 상황을 최대한 줄이고자 하는 쪽으로 발달해왔고, 현재로서는 그 결과가 지금의 시스템이라는 것이지요. 예전에도 그렇게 살았다고 법치나 공권력을 무시한다면, 그러한 인민들의 야만적 폭력에 의해 자신이 처분될 때 억울하지 않을 수 있을지 자문해보길 바랍니다. 그렇게 처분된 사람들도 자신이 겪기 전까진 억울해하지 않았을테니까.



물론 이러한 이상적이고 원리적인 이야기와는 별개로 실제로 발생하는 법치의 무력함이나 비합리성, 미흡함은 존재하고, 그것을 집행하는 자들의 문제 또한 존재하는 것도, 그리고 법보다 주먹이 더 효과적이고 문제해결에 빠르고 확실할 때도 있다는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그리고 해야 하는 방법을 놔두고 사적인 폭력을 통해 해결해보려고 하거나 법이나 법치, 공권력을 무시하거나 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한 것들은 발전을 통해 보완되어야 하지 폐기되어선 안 되기 때문입니다. 법으로 해결 못 한다느니 경찰 불러도 별 소용 없다느니 하면서 자력구제를 하려는 사람이 늘어날 수록 법치의 발전은 더뎌지고 공권력의 신뢰는 점점 떨어지며 그만큼 사회적으로 개인은 위험에 더욱 노출이 됩니다. 그리고 그 피해자가 자신일 수도 있음을 우리는 항상 자각해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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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은 다음 팁에서 본인이 작성한 답변을 일부 수정, 추가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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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하지도 않고, 악하지도 않은 자연적인 본능과 성향만이 존재합니다. 인간이라는 것이 본디 짐승에서 진화한 생물이고, 그저 다른 생물보다 뛰어난 지성을 가졌기에 사회와 문명이라는 것을 이룩했는 데, 이러한 환경은 원시적 자연환경과는 다른 인위적 사회환경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회환경은 인간들끼리의 사회적 관계와 유대, 그리고 불문율이나 성문법 등의 새로운 규칙에 의해 지배 받고 지배하는 곳이기 때문에, 원시적 자연환경에서와는 전혀 다른 환경이라고 할 수 있죠.


자연환경. 즉, 야생에선 어떠한 도덕이나 윤리 따위는 존재하지 않고 기실 그러한 것이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서로가 서로를 지키는 시스템인 사회, 혹은 문명은 그러한 서로간의 신뢰가 깨어지면 결코 유지될 수 없는 특성을 지니고 있죠. 쉽게 말해서 누구나 쉽게 범죄에 해당되는 범주의 행동을 마구잡이로 하고 다니면서 어떠한 처벌을 받지 않는다면 사회는 곧 붕괴한다는 겁니다.


도덕이나 윤리 또한 인간적 기준에서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사회적 규약인 데, 이러한 규약은 역시 사회환경에서만 통용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생물학적인 인간이라는 개체와 사회학적 개인이라는 개체는 양립하면서도 모순되는 형태를 띄는거죠. 이는 아주 어린아이에게서 선한 모습을 볼 수 있으면서도 악마성에 가까운 악한 모습 또한 관찰할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교육이라는 것은 그러한 악한 모습에 대한 규제를 의미하고, 사회성이란 그 사회를 이룰 수 있는 능력을 말하죠.


달리 말하자면 아직 사회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동물에 더 가까운 아이들에게서 자연적인 형태의 선과 악의 모습을 둘 다 볼 수 있고 커가면서 그러한 사회화(교육)을 통해 그러한 악한 행동을 규제하게 됨을 의미합니다. 물론 그러한 교육이 생물적 본능이나 성향, 욕구를 완벽하게 제어할 수는 없기 때문에 인간은 커서도 짐승 같은 모습이나, 사회적이지 못한 모습, 또는 악한 모습을 보이곤 하는 거죠.


자연상태에선 어떠한 도덕과 윤리도 없고 사람의 본성이란 곧 동물적 본능과 욕구를 의미하는 바, 그러한 기준을 통해 선한가 악한가를 논하는 건 의미 없다고 봅니다. 인간의 본성이란 생물학적 진화를 통해 자연환경을 기준으로 적응되어온 결과이기 때문에 전혀 다른 사회적 환경, 문명을 기준으로 한다면 당연히 맞지 않을 수 밖에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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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날 이들을 보고 을미15적이라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번 국정화 한국사 교과서가 문제인 이유는 너무 많아서 지적하기도 힘들 정도입니다.


가장 먼저, 역사란 사실을 기반으로 가치판단하는 학문입니다. 어떠한 사실을 기반으로 그에 대한 주체적인 가치관, 사상을 만들어가는 그러한 학문이죠. 하지만 현 국정화 교과서의 가장 큰 문제점은 바로 그 사실을 왜곡한다는 점입니다. 잘못된 정보를 바탕으로 제대로된 판단을 하기란 불가능합니다.


식민지를 긍정하고, 독재를 정상화하는 비정상적 행태는 정상적이고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문제가 있다는 것을 느껴야 합니다.


역사란 사실을 기반으로 하기에, 주어져야할 것은 사실 그 자체이며, 그에 따른 판단을 하는 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이미 누군가가 내린 판단 그 자체를 답습하는 것은 역사가 아닙니다. 그러한 태도에서 바로 역사적 사실, 사건에 대한 여러가지 해석과 평가가 나올 수 있고, 기실 그러한 활동을 통해서만 발전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역사라는 학문입니다.


역사학에서 1차 사료 비판조차 통과하지 못하면 그건 역사를 논할 자격 자체가 없다고 말합니다. 가령 이순신은 노량에서 죽었는 데, 정작 명량에서 죽었다고 하면 그건 역사에 대한 기본도 없는 놈인거죠. 초등학생도 알 수출과 수탈의 차이도 제대로 구분 못하는 머저리가 그러한 교과서를 만들고 그러한 교과서를 찬성한다면 꼴이 훤합니다.



역사에 대한 관점은 공정해야 합니다. 화려하고 영광스러운 역사라고 해서 더 부풀려 써도 안 되며, 치욕과 굴욕의 역사라고 해서 줄이거나 감추어서는 안 됩니다. 역사는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또한 역사를 통한 통찰력과 지혜는 그러한 사실 자체를 통해 얻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더더욱 치욕과 굴욕의 역사마저도 담담히 배워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역사에서 어떠한 가치를 얻어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독재에 부정적으로 서술했다고 바꾸어야 한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독재 또한 우리의 역사입니다. 독재와 그 시기에 벌어진 각종 사실들을 보았을 때, 어떠한 판단을 내리는 지는 개인의 자유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보편적으로 옳다고 믿는 가치들을 기준으로 보았을 때, 분명히 부정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식민지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자들은 일본 우익이거나 아니면 그들과 영합해서 이익을 봤던 친일파 무리 밖에 없습니다. 적산 기업을 물려 받아 재벌이 되는 것에 성공한 모 정부 여당 대표처럼요.



누군가 북한의 주체사상을 배운다고 국정화 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건 선동입니다. 주체사상을 왜 배우는가. 그것을 알아야 비판하고 나쁘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옛말에 아는 것이 힘이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주체사상의 실상을 알게 된다면 그것에 빠져 북한을 찬양하게 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혐오하고 증오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교과서의 주체사상은 실제로 그것이 나쁘다는 것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주체사상을 배운다고 국정화를 해야한다고 하는 사람 중에 실제 교과서의 내용을 보여주며 주장을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면 그들 자신도 자신들의 주장이 터무니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죠.



누군가 대부분이 반대한다면, 그 이유는 반드시 있습니다. 물론 머릿수가 진리를 계량하는 기준이 아닌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어떠한 주장에 대해 대다수의 사람들이 반대한다면 주장하는 쪽에선 자기들 스스로 자신들의 주장을 다시 한번 돌아봐야 정상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어떠한 가치를 위해 하는 주장이 아니라 어떤 특수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하는 짓입니다. 현재 역사학계 대다수, 교육계, 심지어 일반 시민들 조차 반대하는 의견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걸 밀어붙힌다는 것은 어떠한 가치가 아니라 어떠한 목적을 위한다고 볼 수 밖에 없죠. 당연히 아이들에게 특정한 사상과 이념을 강제로 이식하기 위해서 입니다. 자신들의치부는 감추고, 그것을 영광인 것처럼 조작하기 위해서죠.



그들이 주장하는 좌편향이란 무엇입니까? 흔히 그들이 좌편향이라는 말을 어떨 때 사용하는 지 생각해봅시다. 자신들의 주장, 의견에 반대하는 이들에게 좌편향이라고 하며, 정부나 여당에 대한 비판에 대해 좌편향이라고 하고, 자신들에게 불리한 역사나 사실에 대해 지적하는 것을 좌편향이라고 합니다.


그들이 좌평향이라 지적한 것들을 살펴보면 실제론 역사 그 자체를 공정하게 서술했을 뿐입니다. 그러한 것이 좌편향으로 보인다면, 본인 스스로가 엄청나게 우편향적인 것이니, 반성과 성찰이 필요한 겁니다.



국정화를 한다는 국가는 몇 있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독재국가이고, 그렇지 않은 국가 또한 다음과 같은 한국과는 전혀 다른 사정으로 발행하고 있죠. 오직 한국만이 어떠한 정치적 목적을 위해 역사를 난도질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얼척없는 상황 덕에 교총마저도 탈퇴자가 늘어나는 게 현실입니다. 이건 정말이지 위험하고 심각한 일이죠. 최근 교육학의 가장 큰 화두는 어떻게 해야 교육에서 정치성을 제거할 수 있느냐 입니다. 공교육을 받으면서 어떠한 정치적 사상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닌, 어떠한 정치적 사상을 가질 것인가 라는 선택권을 위한 판단력과 지식을 길러주는 것을 목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죠.


하지만 한국은 그러한 시대를 역행하고 있습니다. 노골적으로 정치적 목적을 드러내며 실제로 그러한 문제가 있는 서술과 중립적이지 않은, 특정 이념에 편향적인 내용을 작성하여 아이들에게 강제로, 획일적으로 교육시키고자 하는 겁니다. 그러한 교육을 받게 된다면 결국 현재 끼인 20대와 30대는 이후 위, 아래 세대에게 빨갱이 취급이나 받겠지요.


참으로 어처구니 없습니다. 아직도 독재의 피해자들이 여전히 살아있고, 이제 겨우 막 반세기가 지나려고 하는 순간이며, 독재와  식민지에 대한 증거와 증언들이 이렇게나 많은 데 그것을 가리고자 한다는 사실이 너무나 어이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행동이 너무도 쉽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 또한 황당하기 그지 없지요.



세계 대부분은 검정제, 혹은 자유발행입니다. 이러한 시대를 역행하고 있는 대한민국이 매우 비정상적인 것이며, 시장경쟁를 추구한다는 그들의 주장과는 매우 상반된 언행이죠. 시장경제를 위해서라면 당연히 여러 교과서들이 나오고 그것들이 시장에서 경쟁을 통해 더 질 좋은 교과서가 선택 받고 그렇지 못한 교과서는 도태되야 맞으니까요. 그렇게 일정한 질이 보장될 수 있는 데, 이걸 완벽히 파괴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현 국정화 사태입니다.



그들은 국정화라는 표현을 피하고 올바른 교과서라는 말을 쓰기도 합니다. 올바른? 그렇다면 거기에 어떠한 정치적 목적도 없고 적치정 편향성도 없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절대 그렇지 않죠. 그들이 쓰는 올바른이란, 자신들에게 올바른, 자신들 기준에서 올바른이 맞습니다. 반대로 말하자면 그들이 아닌 이들에겐 절대로 올바르지 않다는 말이죠.


국정화 하자는 이들이 북한을 특히 예를 들어서 정당화를 합니다만, 반대로 말하자면 북한과 같은 수준의 독재국가로 돌아가고 싶다는 의지의 표명이라고 보면 됩니다. 북한이 왜 국정화를 하죠? 그리고 그 국정화 교과서에 어떤 서술이 있는지, 그것이 왜 문제가 되는지 정도는 누구나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한 교육을 받은 이들은 현재로 북한에 대한 충성과 애국심 따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세뇌교육이고 그 세뇌교육의 힘이라는 것이죠.


이러한 언행과 시도는 모두 자유민주주의를 역행하는 행위들입니다. 반헌적이고, 사상적으로 매우 위험하며, 정치적으로도 매우 심각한 문제이죠.



한국사 국정화를 하는 주체들도 참 재미있는 것이, 교과서 검정화를 시도한 게 바로 새누리당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몇 년 지나고서는 다시 국정화로, 그것도 악의적, 편향적 목적이 다분한 내용으로 다시 바꾸자고 하고 있죠. 자기들이 바꿔놓고 문제가 있다고 하는 겁니다. 더 재밌는 건 이번 국정화 이야기가 나오기 전까진 그러한 문제에 대해 지적한 적은 한 번도 없다는 겁니다. 적어도 제가 알기론 말입니다.


이전까지 이야기가 나오던 화제도 아닌 갑작스럽게 발생한 일이라는 것은 굉장히 이상하죠. 당연히 이상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상한 게 맞으니까요.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이겁니다. 지금까지의 검정 교과서로도 충분했다는 거. 그런데 갑자기 문제가 있다고 들고 일어납니다. 이상할 노릇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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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09 - [취미/이야기] - 법치에 대한 이해 1편. 무죄 추정의 원칙.


2015/08/14 - [취미/이야기] - 법치에 대한 이해 2편. 피해자 인권?


2014/07/28 - [취미/이야기] - 모든 범죄자에 대한 변호.


2014/06/21 - [취미/이야기] - 범죄자에게 더 많은 예산을 씁시다.



사람들이 형법에 대해 가지는 큰 오해 중 하나가 바로 법적 처벌이라는 것을 피해자의 복수 정도로 여기는 겁니다. 하지만 실제로 법이라는 건 누군가를 위한 복수 같은 걸로 작용하지는 않아요. 법의 처벌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고 목적입니다. 누군가 범죄를 저질렀다고 해서 그에 대한 복수로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죄를 저지르지 않게끔 하는 게 목적이라면 목적이죠.


기실 범죄자를 감옥에 가두는 것은 그들에게 어떠한 복수나 고통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사회와의 격리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예전부터 꾸준히 말해왔죠. 1차적으로는 사회와의 격리, 2차적으로는 교화와 갱생.


결국 범죄자 대부분은 사회로 돌아오기 마련입니다. 생계가 어려워 빵을 훔쳤다가 잡혔는데, 초범임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을 사형에 처해야할까요? 아니죠. 살인이나 성범죄, 혹은 강도 같은 강력범죄를 저질렀다고 해서 그들이 평생 교도소에 있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게 법이거든요.


법에서 정하는 처벌이라는 것은 해당 범죄자의 죄의 질, 반성유무 등등을 따집니다. 사람을 한명 죽인 사람과 사람을 연속적으로 십 수명을 죽인 사람과 같은 처벌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전자의 사람은 그 원인과 죄의 질이 후자의 사람보다는 떨어질 것입니다. 예컨데 특정인과 수 차례에 걸쳐서 말싸움을 하다가 갑자기 빡돌아서 배때지에 칼빵을 꽂았고 그 직후 바로 후회해서 119를 부른 사람이 있을 수 있겠죠. 사실 이런 게 일상에서 발생하는 살인죄의 가장 많은 표본입니다.


하지만 후자의 경우는 더 심각합니다. 대개 연쇄살인은 원인이 다양하지만 그 심리적 작용의 바탕에는 증오가 존재하며, 그러한 증오를 사회에 뿌려내곤 하죠. 그러한 결과로서 살인이 발생하기 쉽고, 또 그러한 살인은 계획적이기 마련입니다. 우발적 살인과 계획적 살인은 그 처벌의 수위가 다릅니다. 또 진짜 심각한 경우엔 사체훼손 등 사체를 심각하게 망가뜨리는 경우도 있죠. 어떤 경우엔 식인이나 시간을 하는 경우도 존재하고요.


그렇기 때문에 전자의 사람이 5년형을 받을 수 있고 후자의 사람은 20년형, 30, 40년형, 혹은 무기징역을 살 수도 있는 거죠.


따라서 언젠가 나오게 될 사람이, 그 사람의 범죄와 죄의 질 등의 요소를 따져서 이 정도 기간이면 교화와 갱생이 될 수 있을 거라 여겨지는 만큼의 형량이 정해지는 거고, 판사는 그에 맞게 판단하여 형량을 조절해서 선고합니다. 물론 원리적인 이야기죠. 실제로 교화나 갱생이 되느냐는 별개이고, 결국 처벌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형량이 아니라 교화 및 갱생 등의 재사회화가 되느냐입니다. 이 부분에 중점을 맞춰야 해요.


법에 문제가 있을 순 있죠, 실제로 많은 부분에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형법의 처벌에 있어서 형량보다 중요한 게 바로 범죄자 교도의 2차적 목적이라는 것이죠. 이게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범죄자 처벌에 대한 의미가 없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법이란 건 피해자를 위한 복수로 작용하지 않습니다. 피해자만이 사람이 아니고 사람이 살아있는 이상 가해자도 언젠가 사회로 복귀할 것인 데 교화나 갱생이 되지 않는다면 그건 진정한 의미에서 처벌을 한 게 아니죠. 단지 범죄의 발생을 늦춰놓은 것일뿐.


많은 범죄자들이 자신은 억울하다고 하는 데, 실제로 범죄에 대해서 억울한 사람은 없다고 보면 되지만 그들의 인생을 살펴보면 그러한 범죄자가 된 것도 이해가 갈 정도로 불우하고 고통스러우며 '억울한' 사람이 있기도 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가정에 불화가 많았고 술에 쩔은 아버지는 어머니와 자식들에게 폭력을 휘두르다 이혼, 혹은 배우자의 사망이나 도주, 혹은 그 가장 본인의 사망이 발생하고 그런 상황에서 아이가 제대로 자랄 수 없습니다. 그런 아이는 학교에서도 망썰을 부리기 마련이고 가정환경까지 소문이 나면 더더욱 비뚤어지죠.


그런 상태로 성인이 되면 범죄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들의 범죄행위가 객관적으로 억울하지는 않겠지만, 인간으로서 억울한 인생과 환경에 노출되어온 것은 사실이죠. 뭐.. 이건 그러한 법치와는 다른 이야기지만 말입니다.


사람들이 흉악한 사건에 대해 감정적으로 나오는 경향이 있고, 그러한 감정이 있다는 건 나쁜 일이 아니지만, 그러한 감정에 따른 판단은 나쁜 게 맞습니다. 판사는 재판장에서 특별히 감정을 보이지 않습니다. 최대한 억제하고 개인적 감정이 자신의 판단에 영향을 주지 않도록 하죠. 즉,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을 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판사가 감정을 보인다면 둘 중 하나죠. 판사로서의 자질이 부족하거나, 아니면 피고인에게 상황이 존나게 잘못 돌아가고 있거나.


보통 사람들이 흉악한 범죄에 대해 크게 분노하고 엄청난 형량이나 고통을 줘야 한다고 하지만, 실제 법에서 판단하는 건 다릅니다. 그 차이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해할 수 없는 판결로만 받아들이는 거죠. 물론 이건 재판의 상세 내용을 모르거나 아예 제대로 찾아보지도 않고 기사 제목만 보고 마는 경우 때문이기도 하죠. 기사로 나온 것과 실제 판결의 판례를 비교해 보면 일견 합리적이고 타당한 판단인 것도 수두룩 합니다.


법이라는 게 어려운 것이기에 뛰어난 지식을 갖춘 사람들 중에서도 소수의 사람이 법조인이 되죠. 그렇지만 이러한 기본적인 법치에 대한 개념은 일반인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어렵지 않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법치에 대한 이해가 너무 부족해서, 쉽게 한국 법체계에 대한 불신이 커집니다. 심지어 언론에서도 부채질하고 있죠. 더욱이 실제로 그러한 불신을 조장하는 행동을 법무부, 검찰청 등에서 저지르고 있기도 하고..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법치에 대한 이해는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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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바이패드입니다. 나중에 이걸 리깅하고 스킨 잡을 때 이 바이패드가 몸 밖으로 튀어나오게 한다던가 하면 매우 보기 불편하고 직관성도 떨어지죠. 바이패드가 몸 밖으로 튀어나와서 외곽선과 모델링과 곂치거나 보기 힘들게 한다든가, 와이어프레임 상태가 아니면 바이패드 안 쪽에 버텍스가 있어서 클릭하기 어렵다거나..


그럴 때 쉽게 해결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아예 바이패드를 안 보이게끔 할 수 있기도 하지만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다면 박스로, 그것도 외곽선만 보이게끔 설정해주면 됩니다.



방법은 박스로 보이게끔 하고 싶은 부분만 잡은 뒤 우클릭, 오브젝트 프로퍼티스를 클릭합니다.




그럼 위와 같은 창이 뜨는 데, 이미지에서 체크한 것과 같은 디스플레이 에즈 박스를 체크하는 거죠.




모든 바이패드를 잡고 박스로 디스플레이 한 모습입니다. 당연하지만 바이패드만 박스로 보이게 되고 다른 오브젝트는 F3로 와이어프레임만 보이게 하지 않는 이상 면이 확실히 보입니다.


당연하지만 이 방법은 바이패드나 본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 다른 오브젝트에게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방패나 칼을 만든 뒤 디스플레이 에즈 박스를 걸어주면 박스로만 보이게 되죠. 다시 원래대로 보이게 하고 싶다면 역시 체크한 것을 꺼주기만 하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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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간단하게 사람 비슷한 모델링을 만들겠습니다. 간단한 팁이니까 아주 간단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인체비례 이런 거 신경 안 썻죠.




바이패드를 설치할 때는 s를 눌러서 스냅을 걸어준 뒤 그리드에 맞춰서 만들면 편합니다. 




모션 탭에서 피규어 모드로 들어간 뒤 바이패드를 움직여서 모델링에 맞춰줍니다. 이때 움직인 한 쪽을 카피/페이스트 탭을 이용해서 반대쪽에서 복붙해주면 한결 편해집니다. 그리고 이렇게 바이패드나 본이 몸 속에 안 보이면 나중에 잡을 때 귀찮아지니까 일부로 몸 밖으로 튀어나오게끔 바이패드나 본의 크기를 키워주면 한결 편합니다. 




물론 이렇게 본만 잡을 수 있게 하면 더 수월하죠. 본만 선택되고 다른 것들은 선택되지 않습니다.




매우 간단하게 스킨을 잡고 포즈를 취해줍니다. 앞서 말했듯이 바이패드의 크기를 키워서 몸 밖으로 튀어나오게 해주는 편이 더 직관적입니다. 물론 더 직관적이고 볼 때 불편하지 않게 하는 방법도 있기는 하죠. 




바이패드 같은 것을 만들고 언하이드 올 같은 걸 눌러주면 저렇게 머리나 손가락 등에 초록색 상자가 보이는 데, 저런 헬퍼라고 합니다. 끝 부분의 헬퍼만 잡고 움직이면 관련된 본들을 다 같이 조작할 수 있죠. 애니쪽에서나 쓰인다고 하는군요.


하여간 저렇게 본(바이패드)와 헬퍼, 라이트가 보이는 데, 포폴 등의 최종 결과물을 만들 때는 저런 표시들이 없어야겠죠. 그때는 오른쪽 위의 디스플레이 탭을 들어갑니다. 아래는 각각 바이패드 오브젝트, 헬퍼, 라이트를 체크한 상태입니다.





다시 보이게끔 하고 싶다면 체크한 것들을 꺼주면 되겠죠. 저 항목들을 체크한다고 해서 바이패드나 라이트가 사라지는 건 아닙니다. Manage Layers를 통해 Hide를 걸어줄 수도 있지만 이게 더 편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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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와 같은 모델링을 아무런 모디파이 없이 잡고 있습니다. 모델링의 축이 옆구리에서 조금 떨어져 있죠. 그럴 때 축을 정중앙으로 옮기는 방법입니다.




모디파이 옆에 있는 하이어라키 탭에서 Pivot, Affect Pivot Only를 누른 뒤, Center to Object를 누르면 축이 모델링의 중앙으로 옮겨집니다. 반대로 어펙트 오브젝트 온리를 누르면 센터 투 피봇으로 변하며, 오브젝트가 피봇으로 이동하죠. 하이어라키 온리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어펙트 피봇 온리나 어펙트 오브젝트 온리를 누른 상태에서 피봇만, 혹은 오브젝트만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데, 전자의 피봇 온리를 누른 채 축을 움직이면 당연히 피봇만 움직이고, 후자의 오브젝트 온리를 누른 상태라면 피봇은 가만히 있고 오브젝트만 피봇을 벗어나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습니다.


왠만하면 피봇을 오브젝트의 정중앙으로 옮기지만 필요에 따라서 오브젝트를 피봇 쪽으로, 혹은 오브젝트는 놔두고 피봇만 이동시켜 축을 수정할 수 있습니다.




이대로 끝나면 너무 허술하니까 별 거 아닌 팁도 하나 추가, 모델링을 클릭한 뒤 우클릭, NURBS Toggles를 누르면 모델링이 넙스 상태로 변환됩니다.


그러나 이 상태에서 다시 에디터블 폴리로 전환시키는 게 아니라면 다시 우클릭, 넙스 토글을 클릭하여 토글 상태를 끌 수 있죠.





위 처럼 토글 상태로 변환됩니다.




같은 기능은 에디터블 폴리에서도 찾을 수 있는 데, 유즈 넙스 서브디비젼을 누르면 넙스 토글 모드로 들어가죠. 그 위에 있는 스무쓰 리절트를 끄면 넙스 토글 모드에서의 면이 스무스 그룹에서 클리어 올을 한 것처럼 각지게 보입니다. 물론 원래 클리어 올을 한 상태에서 스무스 리절트를 꺼야 그렇게 보입니다. 스무딩 그룹에서 스무스를 준 상태에서 리절트를 눌러도 각지게는 안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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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와 같이 빈 뷰포트 위에 이미지를 띄울 수 있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Alt + b를 누르면 위와 같은 창이 뜨는 데, 위의 files 버튼으로 파일을 불러옵니다. 만약 이때 불러오지 않고 그냥 끄면 어떤 오류 창이 뜨는 데 그냥 무시해도 좋습니다.


뷰포트에 이미지가 꽉찬 채로 보이게 하려면 match viewport로 설정하면 되지만, 그런 경우는 거의 없고, 그 아래의 match bitmap으로 설정해야 화면을 움직였을 때 이미지가 고정되어 보입니다. 오른쪽의 Lock Zoom/Pan로 켜야 합니다.




그럼 위와 같이 화면에 이미지가 뜨게 되죠. 이 상태로는 뷰포트 화면을 레프트로 하든 프론트로 하든 이미지는 뷰포트에 완전히 고정됩니다. 다만 뷰를 계속 바꾸다보면 이미지가 자기 멋대로 살짝씩 움직이는 경우가 있는 데 그때는 알트 + b를 누른 뒤 다시 아무 것도 안 건들이고 OK버튼을 누르면 다시 원래대로 되돌아옵니다.


또한 이미지가 화면 정중앙에 위치하지 않는 경우도 있으며, 이미지의 크기가 크면 큰만큼 뷰포트 상에서도 크게 잡힙니다. 그리드를 켰을 때 그리드가 심하게 작아보일 수 있죠. 이럴 땐 위 상태로 모델링을 한 뒤 다시 오브젝트를 줄여줘야 합니다.




당연히 퍼스펙티브 뷰에서도 이미지는 고정됩니다.




뷰포트 상에서 더 이상 이미지를 띄우고 싶지 않다면 다시 알트 B를 누른 뒤 디스플레이 백그라운드를 눌러주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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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와 같이 뷰 큐브라고 하는 맥스 화면 오른쪽 상단에 있는 화면을 돌리는 박스가 사라졌습니다.



이럴 땐 오른쪽 위의 화면 상태 버튼을 누른 뒤 Lighting and  Shadows에서 Configure..로 갑니다.




그럼 위처럼 뷰 큐브라고 써있는 탭이 있는 데, 그곳에서 show the view cube를 체크해주면 됩니다.




위와 같이 다시 돌아왔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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