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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며,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 - E.Kant
by Ko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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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이 거짓말을 하는 이유.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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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가 존재합니다. 수십만명이 입석할 수 있을 정도로 크고, 매우 웅장한 크기를 자랑하죠. 아마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많은 교회를 가진 나라가 아닐까 합니다. 통계를 찾아보지는 않았지만, 세계 어딜가든 이렇게 작은 나라에 이렇게 많은 교회가 모인 나라도 없지 않을까 싶군요.


성경에 보면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 하셨습니다. 또한 자신의 모든 재산을 내려놓고 봉사해야 자신과 같은 자리에 설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희생과 봉사를 업으로 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는 수모까지 겪었는데, 그 분의 자식들은 아버지의 이름을 망령되게 하고 참칭하여 돈과 권력을 쌓고 있습니다. 믿음을 가진 자가 곧 교회인 것인데,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를 만들고 그것을 자랑스레 생각하며, 십일조라는 이름으로 많은 돈을 걷고는, 세금조차 내지 못하겠다 합니다. 전 하나님의 은행에서 발행한 돈을 본 적 없는데, 과거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라며 황제에게 세금을 내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그들이 매일같이 보는 성경에도 적혀있습니다.


신앙심은 교회의 크기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며 말 뿐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불교에는 공염불이라는 말이 있는데, 생각하지 않고 단지 말로만 떠드는 불경을 의미합니다. 진심으로 생각하지 않고, 실천치않고 신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는 모습은 공염불이 아니고 무엇인가 생각되게 하는 군요.


수많은 대형교회와 목사들은, 그리고 그들을 믿고 따르는 신도들은 생각해봐야할 것입니다. 과연 나는 성경의 말씀대로 하고 있는가. 자기 좋을 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아닌가. 자신의 재산을 내려놓고 남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가. 그리하여 천국에 갈 수 있는가.



이태석 신부와 교황의 행보를 보고 무언가 느끼는게 있더라면, 진심으로 신의 사랑을 실천하고 진실된 모습을 마음에 담아내고자 노력하는 자를 보았기 때문이며, 그 진심은 타인에게 흘러갈 것이고 그들이 있기에 진정한 신앙이 남아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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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두순은 어린 여아에게 끔찍한 폭력을 휘둘렀습니다. 그리고 과장된 자료를 제하고도 진실 그 자체만 바라봐도 그 무자비하고 참혹한 폭력에 우리는 당연히 분노하지요. 그렇지만 국가는 그러한 인두겁을 쓴 추물이라 하여도 인권을 가진 인간이기에 그의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고 합니다. 또한 우리는 그러한 국가에 대해 분노하죠.


사실입니다. 인간이라면 그 어떤 흉악하고 잔인한 인간일지라도 그에 대한 권리는 보장받아 마땅합니다. 인권은 선언된 것으로, 자의적으로 정지되거나 부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조두순 개인에 대한 분노와 환멸, 증오조차 조두순이라는 추물에게도 인권이 있다는 사실을 조금도 손상시키지 못합니다.


우리는 말합니다. 


저런 악질 범죄자의 인권도 보장해줘야 하냐고. 네, 그렇습니다.

그런 판결을 내린 판사의 딸도 똑같이 당하면 그런 판결 내릴 수 있겠느냐고. 네, 그래야만 합니다.

상상만으로도 역겨운 고문방법을 내놓으며 그렇게 해야한다고 합니다. 아뇨, 절대 안 됩니다.


이 중 무엇하나 허용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삶의 근간을 이루고, 이루게 해주는 모든 시스템을 파괴하는 꼴입니다. 남의 인권을 부정한다면 자신의 인권 또한 부정됩니다. 범죄를 범죄자나 범죄자의 혈육에 똑같이 해준다면 자신도, 자신이 사랑하는 타인도 그렇게 됩니다. 필요 이상의 처벌은 그 자체로 중범죄입니다.



정당한 분노는 누구에게도 인정되는 것이지만, 위와 같은 식으로 나오는 것은 막나가자는 소리와 다를게 없게 됩니다. 그래야 한다면, 우리는 판사도 법도 제도고 뭐고 모두 폐지시키고, 다들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내 속 분풀이 충분히 될 때까지 범죄자 두들겨 패는 것을 규칙으로 해야겠지요. 그리고 그런 사회에서, 자신 또한 합리적이지도 않고 이성적이지도 않은 처분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충분히 명시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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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은 매우 합리적이고 평화적이며, 동시에 이상적이고 공상적인데, 그 이유는 대화로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없기 때문이라는 지극히 난감한 이유 때문입니다.


이 무슨 모순적인 말이냐면은, 사람이 다른 사람을, 혹은 다른 가치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분명 대화가 필요하지만 그 대화가 제대로 끝마칠 수 있는가는 전혀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죠. 가령 언제나 대한민국의 뜨거운 감자인 북한의 입장에 대해 우리는 그들을 이해해야 하고 대화해야 하며 꾸준한 지원을 통한 외교를 수립해야 한다. 라는 말을 한다면 이와 반대된 생각을 가진 누구나가 나타나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며 처음 의제를 띄운 사람의 주장과 논리를 반박하게 될 겁니다.


사상이나 이념, 혹은 가치관이라는 것이 재밌는게, 그것에 대해 완고한 입장을 가질 수록 이해의 장벽이 더 높아진다는 것입니다. 극단주의자들의 경우 그 완고함이 지나쳐 다른 것들을 이해한다는 기능이 마비되어있고 자신의 생각, 가치관이 올바른 것이라 굳게 믿게 되지요.


누구든 이러한 면은 가지고 있기 마련인지라, 모든 이를 이해할 수는 없는 법이겠지요.



대화라는 것은 많은 요소를 지니고 있습니다. 주장, 논리와 같은 형식적인 것부터 해서, 어투, 뉘앙스, 속 뜻 등등 애매한 것들도 있지요. 그리고 그 애매한 요소들이 가지는 차이란 너무나도 커서, 같은 말이라도, 설사 그것이 올바른 말이라도 다른 사람이 기분 좋게 받아드릴 수 없는, 혹은 아예 부정하게끔도 만들 수 있죠. 더 애매하게는 맞는 말인데 기분 나쁘게 말 한다고 말하는 사람을 싫어하고 욕하는 경우도 있지요.


뭐, 아무튼 이러한 요소들 때문에 우리는 서로 다른 가치관을 지닌 사람과의 대화가 힘든 것이라 생각합니다. 대화를 하다보면 나와는 너무 다른 생각에 화가 날 수 있고 짜증이 날 수도 있죠. 그런 감정이 글에 뻗쳐 상대방을 자극하다보면 건전한 대화는 물건너가고 치열한 논쟁과 첨예한 언쟁만이 남을 때도 있습니다.


아예 상대방이 극단주의자라서 대화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경우도 있지요.



대화로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가. 만약 모든 인간이 감정을 내비치지 않고 철저히 사무적인 태도로써 상대방과 논리와 합리성을 통해 대화를 한다면 분명 건설적인 결론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이들이 그렇지 않죠. 논리와 합리성이 우선시 되야할 대화에서 자신의 논리가 꺽였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해 온갖 반칙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고 아예 논리와 합리성 자체가 결여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과는 대화를 통한 결론을 만들어낼 수가 없죠. 따라서 대화로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대화로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는 답변이 나올 수 밖에 없지 않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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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정부와 언론에 대한 권위가 바닥인 이 나라에서 관련 음모론 하나둘 쯤 안 나오는게 어디 이상한 일이냐마는 최근 음모론적 사고방식을 가진 이와의 대화, 그리고 음모론이라는 것에 대한 생각 등등해서 한 마디 글 쓰는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뭐, 사실 이런 음모론이 하루 이틀 나온 것이 아니죠. 까놓고 말해서.. 정부, 혹은 보수나 우익이라는 집단이 해온 역사라는게 있어서 조작이나 은폐, 왜곡 따위가 진짜로 밝혀진 것들이 있고 그 내용이 상당히 충격적이기도 한 것들이 많아서 솔직히 저도 유병언 관련 음모론이 사실로 밝혀진다거나 심각한 조작, 은폐 따위가 진실로 드러난다고 해서 그렇게 충격을 받을 것같지도 않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선거와 의료보험 관련 이슈가 도는 지금 이 상황에, 왜 하필 지금 유병언 시체가 발견되었느냐, 왜 하필 아들 유대균이 잡혔느냐, 그리고 유병언의 시체가 얼마만에 백골이 됐고 지문은 어떻고 등등..


솔직히 나올 수 있을만한 이야기들이긴 하죠. 그것이 모아져서 만들어진게 음모론이고.. 문제는, 우리가 그에 대한 반박과 해명을 제대로 들었느냐입니다.


먼저, 관련 반박과 해명이야 검색하면 충분히 나오고 그게 잘 정리된 사이트도 있으니 여기서 다룰 것은 아니고,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겁니다. 생각없이 너무 의심만 하지 말자는 것. 물론 의심하는 것은 필요하죠. 거짓말할 수도 있고 조작에 은폐할 수 있고.. 하지만 우리 수준에서 생각할 수 있는 것들은 대부분 기자와 경찰, 검찰도 생각하고 있으며 사건이 크고 대중적일 수록 그러한 인위적인 무언가가 밝혀질 확률은 굉장히 높아지는데, 세월호 사건 당시 언론에 의해 밝혀진 여러 은폐, 조작, 왜곡 사안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새누리당-국정원-청와대-사이버사의 SNS 및 댓글조작마저도 터져나온 것을 보면 우리는 이러한 조작, 은폐, 왜곡 따위가 생각보다 어렵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어요. 만약 유병언 관련해서 무언가 뒷공작 따위가 있었다면 그것들은 얼마 안 가서 기자들과 경검에 의해 까발려질 겁니다. 더러운 정부의 수많은 뒷공작이 대부분 뽀록났듯이요. 특히 이런 대중적인 사건에선 더더욱.


누군가 말하듯이, 언론은 정부의 나팔수고 경검도 정부의 개인데 그럴리가 있느냐면 앞서 전술했던 국정원 사건은 어쩌다 터져나온 것인지부터 설명해야겠지요. 애초에 그런 초월적인 능력을 지닌 정부 따위는 반미 음모론자들이 잘 써먹는 논리구조라는 것부터 알았으면 좋겠지만요.



유병언 관련해서 나오는 음모론은 그저 망상일 뿐입니다. 애초에 우리가 그러한 이야기를 떠들어대는 것부터가 사실 큰 의미는 없어요. 그만큼 관심도가 높다는 것을 증명할 뿐이지 그 이야기들이 무언가를 밝혀낼 수 있을리가 없거든요. 노무현때도, 천안함때도 수많은 이야기가 나왔고 음모론들도 왕왕 나왔지만 결과적으로 어떻게 됐죠?


노무현은 정말로 자살한 것이고 천안함은 정말로 북한이 격침시켰어요. 그에 대한 증거는 이미 수두룩하고 아직도 음모론을 믿는 사람들은 그 증거를 철저히 무시하고 거짓되었다, 조작되었다, 왜곡되었다 따위의 헛소리를 나불 댈 뿐이죠.


이번 사건과 마찬가지로, 그런 음모론을 주장하는 사람이 증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닌 주제에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해야할 것은, 쓸데없는 음모론을 주장하거나 빠지는 일은 지향하고 드러나는 팩트들만 집중하자는 겁니다. 현재 진행되는 사건은 언제나 말이 많고 이것저것 뒤집히는 것도 있으며 나중에 가서 더 밝혀지는 것들도 있기 때문에, 뭐든지 사건이 진행되는 와중에는 말을 아끼고 판단을 성급히 하지 않으며 나중에 사건이 끝나갈 무렵이나 끝난 뒤에 확실히 판단하고 알아두는 것이 맞습니다.


과정 중에 무언가 잘못되었다면, 예컨데 실수가 있었거나 조작, 은폐 시도가 있었다거나 잘못된 행정지시가 있었다던가 하는 일이라면, 당연히 비판하고 꼬집어야할 부분이긴 하지만, 그런 사건 그 자체와는 다른 부분이 아닌 쪽은 쉽게 건드리지 말자는 겁니다. 앞서 말했듯이, 떠드는 우리가 직접 진실을 밝혀낼 것이 아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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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사람과 도덕적인 사람은 얼핏봐서 비슷한 의미를 가진 것 같지만 실상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착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 기준은요? 착하다라는 기준은 개개인이 보는 타인의 행동에 따라 달라집니다. 예컨데 매일 거짓말하고 친구 때리고 금품을 갈취하는 일진의 다른 일진 친구가 보기에, 그 친구는 자신에게 거짓말도 잘 안 하고 때리지도 않으며 금품을 갈취하지도 않은, 원만한 관계를 가지고 서로 재미있게 어울릴 수 있는 '착한' 친구가 됩니다.


다시 말하자면, 착하다는 것은 나의 기준에 따른 것이며 이 기준에 따라 나에게만 착한 사람일 수 있다는 것이죠. 따라서 착하다는 것은 부단히 주관적인 것이며, 그 주관적 평가가 많은 사람들에게 통용되어 많은 사람이 누군가를 보고 모두 착하다. 라고 해서 그가 도덕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반면 도덕적인 사람은 객관성이 보장되어야 합니다. 객관적으로 그의 행동이 도덕적인가. 가 바로 기준이죠. (나에게) 착한 친구가, 실상 도덕적 기준에 따라 판단해보니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습니다. 그것이 '착함'과 '도덕적임'의 차이이죠.



단지 실험자가 명령했다는 이유로 70%의 사람이 다른 사람을 전기고문했다는 밀그램 실험을 재현했을 때, 착한 사람이 더 높은 응답률을 보였다고 합니다. 공감을 잘하며 친절, 협력을 더 잘하는, 소위 착한 사람이 더 잔인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그러한 원만한 사람은 뒷담화를 더 잘 한다는 연구결과도 있습니다.



착함과 도덕적임은 다르며, 우리가 개개인의 관계가 아닌 생활태도적인 면에서 지향해야할 것은 착함이 아닌 도덕적임이 맞지 않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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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이 글은 작품의 내용과 결말을 품고 있습니다. 스포일러를 원치 않으신다면 작품를 본 뒤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뤽 베송 감독의 1999년작 잔 다르크를 봤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실망이었습니다. 원래 기대했던 내용이나 연출과는 동 떨어진 영화였어요. 개인적으로 조금 더 신성하고, 고전적이나 압도적인 연출로 잔 다르크의 성인으로서의 면모, 초월적 카리스마의 존재감을 지닌 초인으로 그려질 줄 알았습니다만..


열어보니 신성하지도 않고, 카리스마도 없으며, 그저 미친여자처럼 보일 뿐이었습니다. 솔직히 그녀가 전장이 도착하고 난 뒤 보여준 모습은 실망스러웠고, 그녀가 지휘했던 전투마저 투렐 공성전에선 처음엔 실패로 돌아갔죠. 맨 처음 그녀가 전투를 벌였을 때, 자기만 빼고 전투를 시작했다고 하며 뒤늦게 도착했을 때는 나름의 개연성이 있었습니다. 지휘관들은 그녀가 혼자 전장터로 나가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을 것이며, 병사들은 신의 계시를 받은 사자가 나타났으니 사기가 오를 수 있었죠. 그리고 혼자 넘어가 다리를 열었으니 그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투렐 공성전때 처음엔 실패했고, 심지어 자기 자신도 크게 다쳤죠. 그녀가 약속했던 승리는 실패로 돌아갔고, 신이 보호해줬어야 할 사자는 화살에 맞았으며, 프랑스군은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죠. 그런데 다시 그녀가 싸우자고 하니 다시 무기를 들고 사기를 높히고 지휘관들도 곧바로 찬성하며 따랐습니다. 전번의 승리가 있었다곤 해도 이건 있을 수 없는 개연성이라고 봅니다.


분위기도 모른 채 지치고 부상당해 널브러져있던 병사들에게 뜬금없이 일어나 무기를 들고 싸우라는 신의 사자가 좋게 보일까요? 전혀 압도적인 카리스마 따위는 보이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또 개활지에서 영국군에게 물러나라고 하던 것도 이상했습니다. 자기 혼자 나와서 물러가라, 그렇지 않으면 영국군은 모두 죽어 여기 묻힐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물론 거의 빌다시피하는 어조로 했지만, 영국군 장군은 그냥 물렸죠. 뭐, 어쩌면 두번의 싸움에서의 패배로 잔 다르크를 이해는 안 돼지만, 뛰어난 지휘관으로 여기고 물러 났을 지도 모릅니다만, 연출을 보면 전혀 아니죠. 그녀의 말에 굽히고 후퇴한 것 뿐.


차라리 잔 다르크가 제발 싸우지 말자, 서로 도움되지 않는다, 서로 피를 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등으로 평화와 상호이익을 이야기했다면 차라리 낫지 않았을까 싶기도 합니다. 당시 잔 다르크는 전번의 승리에서 너무 큰 충격을 받았기에, 마치 미친 것처럼, 빌다시피 협박하며 물러가라고 했을 수도 있겠지만..



역사에서의 잔 다르크와 비교하자면, 먼저 가난한 농부는 아니었고 부유한 부농까진 아니지만 끼니걱정할 정도는 아니었던 집안의 막내였죠. 영화와는 다르지만, 통설이라는 것도 있고 영화의 연출적 측면에서 넘어가는게 좋겠죠. 그녀는 독실한 신자였습니다. 하루에 3번이나 고해성사를 할 정도로 묘사되었으니 맞는 묘사라고 할 수 있겠죠.


잔 다르크가 샤를을 만날 때 샤를은 반신반의하며 시종에게 화려한 옷을 입히고 자기 자리에 앉게 하고, 자신은 초라한 옷을 입고 구석에 숨어서 잔을 지켜봤다고 했죠. 이때의 연출부터 솔직히 마음에 안 들었습니다. 당당하고 여유로운, 그야말로 신의 사자로서의 풍모를 지닌 아름다운 소녀가 시종을 보고는, 당신은 왕이 아니다. 라고 하며 곧바로 고개를 돌려 살피고는 딱 왕의 얼굴과 마주치자 그에게 걸어가 무릎을 꿇고, 신께서 보낸 사자로서, 당신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같은 대사를 했다면 훨씬 멋졌겠지요.


첫 전투때도 마찬가집니다. 프랑스군이 패주하는 와중에 성에서 하얀 갑옷과 하얀 말, 그리고 자신의 깃발을 들고 달려오는 잔 다르크의 뒷모습에 아침해가 찬란하게 비추어 더욱 화려하고 신성함을 더해주며, 그렇게 잔 다르크를 얼빠진 얼굴로 바라보는 병사들 옆을 멋지게 지나친 뒤 과연 신의 사자다! 신께서 우리를 보호하실 것이다. 라는 생각을 심어주게 만들어 사기를 높혀 다시 전쟁터로 나가게 만드는 연출이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보고,


오를레앙을 탈환한 잔 다르크는 잉글랜드에 충성서약을 하고 트루아 조약을 지지해서 프랑스 왕실의 의심을 사던 리슈몽 백작이 이끌던 군대와 만나 그에게서 니가 성녀라도 두렵지 않고 마녀라면 더 두렵지 않다. 라는 말을 들었지만, 영화에선 이 부분을 넣고 압도적인 카리스마와 초인으로서의 풍모를 보여 그에게서 충성을 바치는 모습을 이끌어냈다면 잔 다르크를 한층 깊이있게 표현할 수 있었지 않나 싶습니다.


더불어 투렐 공성전 이후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로 전장의 참혹함에 얼이 빠져 있다 포로를 죽여 이빨을 뽑으려는 병사를 말리는, 그야말로 아무 것도 모르는 여자로 표현하기 보다는 실제 잔 다르크의 일화인 가능하면 학살을 자제시키고 전장에서 죽어가거나 부상당한 영국군을 직접 어루만지며 눈물을 흘리며 위로하는 모습을 보여줬으면 더 아름다웠을 수 있었습니다.



그녀의 몰락 또한 좀 더 극적이고 인간중심의 정치적 요인을 풍부하게 표현했으면 좋았을 것 같았습니다. 프랑스 전역을 돌며 왕실에 돌아올 것을 호소했고, 이는 그럭저럭 먹혔지만, 그건은 성녀라는 이미지를 통한 것이므로 그녀의 말 한마디가 왕실을 위협할 수 있을 것이죠. 그러한 부분을 표현하며 그녀가 프랑스 왕실에 위험하고, 실질적으로 위험을 초래하기 전에 처리해야 한다는 식으로 흘러가며 기승전 구도에서 결을 향해 흘러갔으면 좋았을 것이라 봅니다.


파리 공선전 때 파리 시민들이 잔을 향해 괴물, 마녀, 창녀 등으로 욕을 하며 허벅지에 화살을 맞고 이후 그녀가 무너질 것을 예감하게 하면서도, 생피에르르무티에를 함락시키곤 프랑스 병사들의 약탈을 엄하게 막고 주민을 지켜주며, 휴전기간 동안 부르주에서 빈민 구제하는, 여전히 성녀인 모습을 부각시키며 파리로 호송되어 이단심문관에게 재판을 받을 때의 모습을 역사에 나왔던 그대로 했으면 어땟을까 합니다.


잔 다르크가 이단 재판을 받을 때의 일화가 굉장히 재밌는데, 주교 이하 신학 전문가 70여 명의 이단심문단이 만들어져 잔 다르크의 혐의를 입증하거나 자백을 받아내려고 했는데, 그들 모두 실패했거든요. 머릿수도, 재판의 성립과 과정까지 당시 기준으로도 말이 안 되게 불공평했지만 일자무식한 시골 소녀인 잔 다르크에게 모두 말로서 졌다고 합니다.


예컨데, 검과 깃발 중에 어느 것이 더 좋냐는 질문에 사람을 죽이는 것을 피하기 싫어서 깃발을 들었으며, 한 번도 사람을 직접 죽인 적이 없다고 대답했으며, 하느님의 은총을 받고 있느냐는 질문엔 만약 제가 은총의 상태에 있지 않다면 하느님께서 제게 은총을 베풀어 주시기를, 만약 제가 은총을의 상태에 있다면 하느님께서 제게 계속해서 은총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라고 말했죠.


이는 은총을 받았다고 하면 함부로 하느님의 은총을 받을 수 없다고 몰고 갔을 것이고, 반대로 없다고 말한다면 저주에 들렸다고 몰아갈 의도로 파놓은 함정이지만 도리어 역공을 먹인 셈이었죠.


결국 잔 다르크는 남장 혐의를 추궁했는데, 그것은 성경에 위배되는 종교적 범죄였습니다. 잔 다르크는 그것을 순결을 지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항변했지요.


이후 그녀를 바라는 백성들과 그녀를 차갑게 내치는 왕실과 그녀에게 어쩔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르게 만드는(다시 남장을 하게 만드는) 등 철저하게 잔을 불리하고 죽음으로 몰아가다 끝끝내는 화형 직전까지 신의 이름을 부르짖다 인간의 이름으로 죽음을 이르게 하는 장면을 극적으로 뽑아냈다면 정말 멋진 영화가 됐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실제 잔 다르크가 그랬듯, 죽기 직전에도 자신을 화형대로 몰아넣은 사람들을 용서한다고 말하면서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반부는 꽤 괜찮았고, 영화 자체도 제가 기대했던 것들을 제외하고 좀 더 무신론적이고 인간적으로 본다면 괜찮은 작품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신은 없었고, 그녀는 무식하지만 용감했던 소녀였으며, 미친여자로서 전장을 이끌었고, 결국 자신의 환각과 환청을 신의 암시라 믿으며 신의 사자를 자칭했을 뿐이었던 것이죠.


실제로 영화를 본다면 그렇게 연출되어있습니다. 전장에선 미친 여자처럼 소리지르며 병사들에게 싸우라 성벽을 오르라 외치고, 말에 타 칼을 머리 위로 휘두르며, 무식한 여자처럼 피로해 지쳐 널브러진 병사들에게 일어나 무기를 들라고 소리지르며 명령하죠.


전투를 치르는 와중에도 환각을 보고 가끔은 소리를 지르며 제정신을 차리는, 그녀는 신의 사자가 아니라 미친 여자였던 겁니다. 이단 재판을 받으며 감옥에 갇혀 자신의 환상과 말싸움을 하는 장면은 가히 잔 다르크가 미쳤음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는데, 실제로 그녀가 성녀로서 전쟁을 이끌며 프랑스에 승리를 가져다줬지만, 전투 중에 그녀가 이미 제대로 하고 있지 않음을 암시하는 피 흘리는 예수의 환상을 보았고, 감옥에서도 그녀는 환상을 보며 그녀의 행동과 주장이 반박당하고 조소당하며 신은 잔에게 무언가 시키지 않았으며, 암시 따위는 자기 멋대로 생각해낸 것들이고, 심지어 누군가를 죽이는데 즐거움까지 느꼇음을 깨닫게 하며 철저히 압박당하지요.


감옥에 갇혀 자신의 환상과 논쟁하고 화형에 처하는 장면은 가히 클라이막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밀라 요보비치의 광기와 공포에 휩쌓인 연기를 정말 멋졌고, 확실히 볼만한 가치가 있었습니다.


사실 신은 존재하지 않았고, 아니, 어쩌면 존재했지만 잔이 잘못 이해했거나 잔은 전혀 본 적도 없었을지 몰랐습니다. 무식하고 미친 여자였고 그녀가 전쟁을 이끌고 승리한 것은 그저 우연이었을지도 몰랐습니다. 제가 기대했던 신성함과 장엄함, 당당하고 압도적 카리스마를 지닌 초인으로서의 소녀가 아닌, 인간이었고 환상이었으며, 인간이었고, 정치로서 살해당한 소녀의 모습을 그려냈지요. 수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기대했던 것과는 많지 다르지만, 다른 방향으로서 상당히 재밌는 영화지요. 역사에서의 잔 다르크는 압도적인 카리스마로 수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고 전쟁을 이끌고 승리를 얻어냈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정말 신의 사자였는지, 아니면 단지 과대망상이나 환각, 환청 따위를 듣던 정신병 환자였던지는 몰라도, 그녀의 활약은 인간의 정치 속에서 죽었지요. 이 작품은 이 문장의 표현대로의 작품이었습니다. 그리고 괜찮은 수작이라는 것을 인정해야겠군요. 좀 오래된 작품이지만(사실 그리 오래된 것도 아니지만..) 추천하는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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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이 글은 작품의 내용과 결말을 품고 있습니다. 스포일러를 원치 않으신다면 작품를 본 뒤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If technology is a drug – and it does feel like a drug – then what, precisely, are the side-effects? This area – between delight and discomfort – is where Black Mirror, my new drama series, is set. The "black mirror" of the title is the one you'll find on every wall, on every desk, in the palm of every hand: the cold, shiny screen of a TV, a monitor, a smartphone."


"만약 기술이 마약이나 마찬가지고, 사용되기도 마약같이 사용되고 있다면, 그에 따른 부작용은 무엇인가? 불안함과 즐거움 사이의 모호한 존재가 바로 블랙 미러다. 타이틀에 나오는 '검은 거울'은 모든 벽과 책상에 있고, 모든 사람의 손바닥에 있다: 차갑고 번쩍거리는 텔레비전 화면, 모니터, 스마트폰이 바로 '검은 거울'이다."


-가디언지에 실린 찰리 브루커의 인터뷰.-


블랙 미러라는 영국 드라마는 기술의 부작용에 대해 풍자하는 드라마입니다. 처음 볼만한 것들을 찾아가 발견하게 된 작품인데, 주제가 주제인만큼 저에게 큰 관심을 끌게 만들었죠. 아직은 시즌1만 봤지만, 3개 모두 충격적인 내용이었습니다. 사실, 1화가 상당히 충격적이었죠..



기술이라는 것은 나날히 발전하지만, 인간은 수천년전과 크게 다를 바 없는 본능과 사고방식을 가진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에 불과한지라, 발전된 기술을 오남용하는 것이 불러올 파장을 생각하면, 우리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하지 않나 싶었습니다, 2, 3화는 미래의 기술이지만, 1화는 시기적으로 현재이고 현재 있는 기술, 매체를 악용한 것을 다루고 있죠.


지금은 단지 드라마속 이야기일 뿐이지만, 이러한 발전된 기술의 부작용, 오남용은 충분히 있을 수 있고, 여전히 경계해야 하는, 아니.. 오히려 지금도, 앞으로도 더욱 경계해야함을 시사한다고 봅니다. 1화의 일은 너무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동시에 매우 현실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니까요.




저에게 충격을 줬던 1화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어느 미친놈이, 영국 공주를 납치한 것을 트위터와 유튜브를 통해 중계, 공개합니다. 그리고 납치범은 영국 수상에게 돼지와 수간하는 것을 생중계로 보도하라는 요구를 하게 되죠. 당연히 정부에서는 보도를 통제하려고 하지만 이미 삽시간에 인터넷에 퍼지게 되었고, 몇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전세계인에게 이 정보가 공유됩니다. 납치범을 추적, 검거하려는 시도는 물거품으로 돌아가고, 결국 별 수 없게 되자 수상은 어쩔 수 없이.. 납치범의 요구대로 생중계로 돼지와 섹스를 하게 되죠.


그 장면을 지켜보던 시청자들은 처음엔 정말 방송한다고 하니 TV앞에 모여 좋아하며 수상을 비웃고 낄낄대지만, 이내 행위가 절정으로 향함에 따라 모두 충격을 받고 얼어붙지요. 이 방송은 전세계 13억명이 보게 됩니다.


그러나 공주는 예정된 시간이 되기 전에 풀려나고, 범인은 방송을 보고는 자살해버리게 됩니다.


수상은 돼지와의 섹스 후 구토를 하게 되고, 얼마 뒤 지지율이 상승하지만, 아내와의 관계를 파탄에 이르게 됩니다.



시작은 미친놈의 범죄로서 시작되었지만, 그 쇼의 판이 커지고 걷잡을 수 없게 된 것은 기실 대중과 그 대중의 눈과 귀가 되어준 트위터, 유튜브 같은 매체들 덕분이지요. 물론 트위터와 유튜브가 나쁘다거나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 전파과정은 당연 재미, 흥미 따위 때문이라고 봐도 무방하지요. 마치 마약같이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브루커의 말과 같이요.


물론 공주 납치, 수상의 돼지와의 수간이라는 주제는 모두의 흥미와 관심을 끌 수 있는 주제이긴 합니다만.. 



역시 기술에는 항상 윤리가 따라야하고, 오남용에 대한 경계와 어느정도의 대비책, 기술을 악용하지 못하게끔 억제할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사실, 2화는 그렇다치고 1화와 3화는 일상과 사람들에게 있어서 매우 도움이 되고, 필요하며 큰 가치를 지니지만 그것이 악용되었을 때 나타난 결말은 매우 비참하고 잔인하지요.


굳이 기술이 아니더라고 윤리나 도덕, 무언가를 오남용하거나 악용하는 경우가 많고 그에 대한 성찰이나 반성이 부족한 한국에 있어서 더욱 어울리지 않을까 싶은 드라마이기도 합니다. 물론 기술이라는 분야에 대해서도 적절히 들어맞고 말이죠.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찰리 브루커의 작품이었습니다.


혹시 같은 주제에 대한 관심, 혹은 이러한 구성의 드라마를 찾는 분이라면 주저없이 추천하고 싶군요. 굳이 저와 같은 흥미거리를 공유하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드라마로서 매우 훌륭하고 재밌는 작품이기에 역시 추천합니다.


개인적으로 2화와 3화 또한 매우 재밌었기 때문에 개별적으로 리뷰를 올리고 싶지만, 특별히 쓸 말이 떠오르지 않고 줄거리만 쌈박하게 요약할 것만 같아서 이렇게 리뷰해야겠습니다.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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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이 글은 작품의 내용과 결말을 품고 있습니다. 스포일러를 원치 않으신다면 영화를 본 뒤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보통 상상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번 쯤 해보았을 상상, 자신의 정신을 기계로 이식하는 것을 작품의 주요 요소로 한 작품입니다. 개인적으로 이러한 재미있는 상상을 주제로 한 작품을 좋아하는데, 이 작품도 나름 그런 흥미로움을 긁었다고 할 수 있죠.



자아를 가진 인공지능을 만들 수 있을까.


작품내에서도 나왔듯이, 인간의 의식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모르고서는 만들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미 있는 시스템, 인간(혹은 원숭이)의 의식을 컴퓨터로 이식하는 방법을 이용합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것은 성공하지요. 주인공의 친구인 맥스는 그것에 대해 의심합니다. 정말로 내 친구인 윌인가, 아니면 윌과 비슷한 다른 존재인가. 


사실 이것은 매우 당연히 나올 수 있는 의심입니다. 만약 업로드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윌의 근사치를 가진 다른 존재라고 볼 수 있는 것이지요. 어떠한 이유로 윌의 기억과 경험의 대부분을 알고 있지만, 몇가지가 부족하여 전혀 다른 존재일 수 있다는 겁니다. 예컨데 히틀러와 매우 비슷한 경험과 기억을 가지고 있지만, 그저 동물애호가가 될 수 있고 배트맨의 경험과 기억을 가지고 있지만 악당일 수 있지요.



인간을 초월한 지성.


윌이 수퍼 컴퓨터로 업로드 된 이후 그가 만들 것들을 생각해봅시다. 아주 대단한 것들이죠. 식물은 다시 살아나고 부서진 물건이 다시 원형으로 복구된다던가, 더러운 물이 아주 깨끗하게 정화됩니다. 그리고 말하지요, 의학적 응용의 한계는 사라졌다고. 이건 정말 대단한 겁니다. 더 이상 인간에게 육체적 장애는 사라진 것이 되니까요.


실제로 강도에 당해 죽을 뻔 한 사람을 거의 부활시키고 그 육체적 능력을 인간 이상으로 만들어줬죠. 그리고 많은 장애인들을 치유해주기도 했습니다.


위에서 나온 것들이 현실에 적용 된다면, 그야말로 인류학적으로 혁명과 같을 것입니다.



PINN은 선악을 구분하지 못했다.


주인공이 업로드 되는 수퍼컴퓨터의 인공지능인 PINN은 선악을 구분하지 못했다는 말이 나옵니다. 그저 충성했다고 하죠. 만약 윌이 정말 인간성을 가진, 정신을 가진 인간이라면 문제가 없겠지만, 윌과 비슷한, 그저 인간과 비슷할 뿐인 인공지능의 프로그램일 뿐이라면 인간은 인공지능의 판단을 예상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이로봇에서처럼, 인간을 보호해야 한다는 원칙을 확대해석하여 인간을 강력한 통제하에 두려는 시도와 같은 '인간이라면 하지 않을' 행위를 저지를 수 있겠죠.


그리고 윌은 자신의 인부들의 신체능력을 향상시켜주되, 그들에게 접속하여 그들의 육체를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됩니다. 다른 이의 몸으로 에블린과 대화, 신체접촉을 시도하는 윌의 의지는 언듯 매우 위험해보이기도 하죠. 게다가 그에게 치료 받는 사람들과, 나중에 나올 육체까지 만들어내는 것을 보면, 그를 경계하는 이들이 말하듯이 초인 군대를 만들 수도 있을 것이라는 예상 또한 못할 것도 아닙니다.



윌은 인간인가.


작품이 중반을 넘어가며 윌이 인간성을 가진 존재인지, 혹은 비슷한 근사치를 지닌 프로그램일 뿐인지 우리 스스로 의심하게 됩니다. 초인적인 육체능력을 지닌, 그리고 네트워크화 되어 윌의 의지에 따라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인부들, 에블린의 몸에서 일어나는 화학작용을 스캔하여 감정을 읽어내는 비인간적으로 보이는 행동. 그는 과연 인간일까요?


정답은.. 인간이었습니다. 업로드된 윌을 윌이 아닌 윌과 비슷한 인공지능이라고 판단한 '육체를 지닌' 인간들은 그를 위협요소라 여기며 공격을 시도했습니다. 에블린은 몸 속에 바이러스를 품고 윌과 접촉하죠. 윌은 그런 에블린을 의심을 하죠. 왜 다시 돌아왔을까, 왜 땀을 흘리고 심장이 고동칠까, 날 두려워하고 있지 않은가. 공격이 시작된 순간까지 질문을 하는 윌의 모습은 끝까지 관객으로 하여금 윌이 인간인가를 의심하게 하지만, 이내 공격에 상처를 입은 에블린을 안으로 대려간 윌은 그녀를 업로드시키며 동시에 바이러스를 받아들입니다.


그녀와 함께 죽으며 그녀에게 자신이 하고 있던 것들, 그리고 하려던 것을 보여주죠. 나노 입자들이 대기중에 퍼져 오염힘자를 제거하고, 숲은 다시 자라나며, 물은 너무 맑고 깨끗하여 아무 강에서나 마실 수 있는 세상. 그녀가 원했던,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단지 질병의 치료할 뿐 아니라 지구를 치유하는 것. 그것은 윌이 사랑한 그녀, 에블린이 원했던 세상입니다. 사람들은 윌이 자신의 기술력을 이용해 세상을 지배하려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오판이었죠. 윌은 인간처럼 보이는 인공지능이 아닌 인간적 판단을 할 줄 알았던, 뛰어난 지성을 가졌을 뿐인 인간이었고, 그렇게 자신이 사랑한 여자와 함께 죽음을 맞이 합니다.


윌은 네트워크화 시킨 마을 사람들과 자신의 기술을 이용해 군인들을 무력화 시켰지만, 아무도 죽은 사람은 없습니다. 에블린의 몸 속에 넣은 바이러스에 의해 윌은 죽게 되고, 그의 복제를 심어뒀던 모든 인터넷은 오류를 일으키며 세상은 어두워집니다.


그러나 죽은 해바라기는 다시 싱그럽게 피어나고, 공기는 맑아졌으며, 물은 정화되었죠.


사실 이러한 오해는, 윌의 모습에 의해 더 촉발된 감이 있다고 봅니다. '육체를 가지지 않은, 네트워크에 살고 있는 정신'. 육체가 없고, 단지 정신이 컴퓨터에 업로드 되어있다는 이유만으로 그는 인간임을 의심받았던 것이죠. 처음 PINN에게 했던 질문, 너에게 자각능력을 증명할 수 있는가? 에 대해, 윌은 PINN과 같은 대답을 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그 질문에 대답은 윌이 그것을 증명할 수 없음이라 판단했지만, 사실은 에블린의 말처럼 그것은 정말로 유머였을 뿐이었던거죠.



훗날 인간이 정말로 의식을 업로드할 수 있게 되는 날이 온다면, 우리는 똑같은 고민과 의심을 하게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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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거짓말을 했던 기억이 있을 겁니다. 기억이 잘 안 날지도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유치원에 다니던 어린 시절부터 거짓말을 하는 법을 배우지요. 사실 그것은 누구에게 배운 것이 아닙니다, 애초에 누구에게 배우고 할 것도 없이, 그저 스스로 깨우치는 것이지요.


거짓말을 한다면, 그 이유가 있을 겁니다. 그 이유를 알면 왜 거짓말을 하는지도 알 수 있지요. 어린 아이가 있다고 생각해봅시다. 그 아이는 유리컵을 가지고 놀고 있었는데, 위험하니 그러지 말라는 엄마의 말에도 신경쓰지 않고 놀다 실수로 그 컵을 깨뜨려버렸습니다. 너무 무섭고 놀란 아이는 엄마가 이걸 봤을 때 어떨지 대충 짐작이 갈 수 있겠지요. 왜 엄마 말을 안 듣고 컵을 깨뜨리냐는 야단을 맞을까 무서운 아이는 자기가 안 했다고 거짓말을 하게 됩니다.


즉, 책임에 대한 회피로써 거짓말을 하게 되는 겁니다. 자기 행동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이 두려워, 자신이 하지 않았다, 혹은 누군가 다른 사람이 했다는 식으로 책임에게서 회피하려는 것이 거짓말이라는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지요. 이는 나이를 먹어서도 무언가 책임지는 일이 다가왔을 때, 그 책임이 자신에겐 너무 무겁거나 두려워서 피하려 할 때 똑같이 나타납니다.


다른 양상은 자신에게 이득이 될 때인데, 친구가 가져온 카드나 팽이가 너무 탐이나 몰래 슬쩍하고는 혹시 못 봤냐는 친구의 말에 못 봤다고 거짓말을 하게 됩니다. 친구는 그것을 찾지 못할 것이고 결국 포기하게 되는데 그때까지 들키지 않으면 자신의 것이 되겠죠. 욕심에서 비롯된 일입니다.



거짓말이라는 것은 자신에게 이득이 되거나, 자신에게 피해가 될 때 하는 행동입니다. 자신이 책임지기 싫을 때, 무언가 얻게 된 방법이 공정하지 못할 때.


이 이득이라는 것도 연장선상에선 후자에 포함되는데, 친구의 팽이를 훔쳤는데 자신이 훔쳤다는 것이 들켰을 때 돌아올 평판, 신뢰에 대한 손해와 자신이 훔친 팽이를 다시 돌려줘야 되기 때문이지요. 결국 남는 것은 자신의 평판만 깍이는 것이니.



거짓말이 통하게 되면 무언가 비도덕적인 방법으로 이득을 보거나 책임을 지지 않게 되는 상황이 발생하게 되는데, 이 상황을 반복적으로 겪게 되면 거짓말쟁이가 되는 것이고, 학교에서 볼 수 있는 일진들의 특성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학교에서 일진들은 곧잘 교사에게 대들고 친구의 물건을 마음대로 가져가고 대상이 누가 되었든 거짓말을 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미 그런 행동을 수없이 했기 때문에 더 이상 양심의 가책 따위가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런 아이들은 스스로를 속이는 것에도 능하게 되는데, 분명 자기가 잘못한 행위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교사가 그것을 똑똑히 봤음에도 불구하고 면전에서 안 했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이 경우 잘 보면 오히려 잘못한 쪽이 더 억울해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이 바로 자기 자신을 속였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했고 자기 스스로도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책임에 대해 회피하고 싶은 강렬한 욕구가 결국 자기 감정마저도 속여 분명히 자기 스스로도 똑똑히 알고 있지만 안 했다고 말하면서 거짓된 감정이나마 정말로 억울한 감정을 느끼는 것이지요. 그렇게 자기 자신을 속이고 나면 양심의 가책 또한 덜하게 됩니다. 난 안 했으니까.



일진들은 이러한 책임을 지는 상황을 별로 겪지 못했습니다. 실제로 끝까지 고집부리며 거짓말을 하고, 어른들이 눈 감아주고, 봐주고, 상대하는데 질려서 결국 넘어가는 경우를 수도 없이 겪다보니 정작 제대로된 책임을 져본 적이 없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일을 벌이고 자기가 제대로 책임이지 못하는 어른을 애새끼라 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진, 양아치들은 나이를 먹어도 딱 그 수준인 것이고요. 혼날 때는 끝까지 고집부리며 안 했다고 딱 잡아때고, 자신이 했음에도 거짓말하고, 그렇게 제대로 처벌받지도 않고 고작해야 몇대 맞거나 안 좋은 소리 좀 듣는 상황이 빨리 넘어가기만을 바라는 것 뿐이지요. 자기 스스로 끝까지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책임을 져본 적이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니까.


그런 인간은 나중에 자기 앞으로 정말로 큰, 자기 스스로 져야할 거대한 책임 앞에선 아무 것도 못하고 벌벌 떱니다. 책임을 져본 경험이 없으니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고, 애초에 자기가 져야할 책임이라는 자각이 있었다면 하지 않았을 행동들일테니까요. 일진이 하는 폭력, 갈취, 괴롭힘 등등은 그 행동에 대한 온전한 책임과 처벌을 받아본 적이 없기 때문에 하는 행동입니다. 누가 저지하지 않으니 스스로 멈출 이유를 못 느끼니까요.


그렇지만 어쩌다 그런 거대한 책임이 잘 지나가고 나면은 스스로 아무 것도 아니네 하면서 허세부리곤 합니다. 실제로 그 상황에선 벌벌 떨고 무서워 했지만 일이 끝나고 나면 별거 아니었다고, 나 쫌 쩌는 놈이라며 없는 배짱 부리며 허세를 떠는 거죠. 법원까지 갔다가 결국 별 큰 처벌도 없이 일이 끝나는 경우 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일을 여러번 겪는다면? 이젠 법도 무서울게 아닌거죠. 학생 때처럼. 교사가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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