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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며,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 - E.Kant
by Ko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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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23.07.23
    학생과 교사간의 규칙에 관하여.
  2. 2020.08.13
    국가, 종교, 민족, 사회적 정체성 문제.
  3. 2015.05.16
    공교육에 대한 단상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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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학교는 교육 기관이며 사회화 기관이다. 학교란 단순히 공교육을 받는 장소일 뿐 아니라 학우, 선후배와의 관계 및 교사들과의 관계 맺음을 겪으며 다른 사람에 대한 경험을 쌓는 곳이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합리적인 규칙을 제시하고 그렇게 제시된 규칙을 지키는 것이다.

 

1.

명시적 규칙을 지키는 것은 사회화에 있어서 아주 중요하다. 사회적 관계 대부분은 명시적 규칙이 아닌 눈치와 경험으로 대표되는 사회성을 기반으로 형성되나 그러한 경험과 지식이 부족한 아이들에게 명시적 규칙은 사회화의 첫 걸음이다. 그리고 그 규칙의 첫번째는 바로 시간 약속이고, 두번째는 과목에 맞는 교과서를 챙기는 것이다.

 

2.

제도적 교육을 제외한 사회화는 부모에 의해 형성된다. 사람이 가장 먼저 맺는 사회적 관계가 바로 부모자식간의 관계이고 이 사이에서도 명시적, 암묵적 규칙은 발생한다. 부모는 자식에게 올바른 사회적 규칙을 가르쳐야 하며 이것이 잘 이루어진 아이가 사회성이 좋은 어른으로 클 가능성이 높다. 어렸을 때부터 다른 사람들을 많이 만나보게 하고 많은 경험을 해주는 일이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러한 규칙을 잘 익힌 아이들이 학교 규칙 역시 잘 지키는 편이다. 부모가 자식 교육을 똑바로 시키지 못했거나, 그럴만한 깜냥이 되지 못하는 나쁜 부모인 경우 자식 역시 그처럼 반사회적이고 이기적일 가능성이 높은 것처럼 말이다. 학교에서 문제를 일으킨 아이 때문에 부모를 불렀을 때 그 부모가 자기 자식은 잘못하지 않았다는 둥 오히려 교사에게 따지는 것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3.

한국 사회는 과거 가혹한 사회문화적 환경이 형성되었었고, 이는 학교 교육현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교사들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학생들에게 폭력을 휘두를 수 있었고 이에 대해 어떠한 불평도 할 수 없었다. 심지어 촌지를 비롯하여 교사에게 뒷돈을 챙겨줘야 아이에게 부당한 폭력과 차별을 하지 않을 정도였다. 이는 90년대, 비교적 최근까지 잡으면 2000년대 초반까지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문제는 한국 사회의 중요 비판점이 되었고 학생에 대한 과도한 폭력이 문제되어 체벌 자체를 금지하는 방향으로 방침이 바뀌어갔다. 하지만 문제는 교사가 잘하는 것과 학생들이 교권을 존중하는 건 별개의 문제라는 것이다. 

 

4.

어느 지점이든 적당한 합의점을 찾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과거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지나친 폭력을 행사했던 것처럼 그것을 방지하자 학생들의 과도한 방종을 막을 방법이 없어졌다. 이는 폭력만이 학생들의 방종과 교권에 대한 도전을 방지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학생의 인권을 존중하는 만큼 교권에 대한 존중 역시도 있어야만 했다는 것이다.

 

즉, 현재까지 한국의 교육 현장은 적절한 중간 지점을 찾는데 실패했다는 말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우린 아직 그 지점을 찾지 못했다. 그리고 그러한 이유는 단순히 적절한 제도적 규칙을 형성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또한 지금 일부 학생들의 지나친 방종은 제한된 교권만큼이나 그들의 행위에 대한 적절한 제약 없이 발생한 반동적 현상에 불과하다.

 

5.

사회화에서 규칙은 아주 중요하다. 사회적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짐승이나 다를 바 없으며 반사회적이라는 평가를 받기 쉽다. 학교 교육 현장에서 발생하는 학생들의 방종과 교권에 대한 도전은 그것을 적절히 다룰 수 있는 근거가 없기 때문이고, 그러한 근거는 규칙에 의해 마련되어야 한다.

 

단순히 마련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것이 제대로 작동할 수 있게끔 해야 한다.

 

가령, 현재 교사는 학생에게 벌점을 부여할 수 있다. 그 근거는 교사의 정당한 지시를 따르지 않았거나, 수업을 방해하거나 하는 경우이다. 이것은 대체로 아주 정당한 경우이긴 하지만 실제로 잘 집행되지 않는 경우도 아주 많다. 벌점이 내신 점수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이유로 부모가 학교에 전화하거나 직접 찾아와서 난장을 피운다. 결국 교사는 학생의 벌점을 취소할 수밖에 없고 이런 경험을 겪다보면 벌점을 부여하겠다라는 말은 어디까지나 무의미한 공갈이 된다.

 

이는 제도가 있음에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예시이다.

 

6.

학생이 학생다워야 한다면 교사 역시 교사다워야 하고, 서로 지킬 것을 지키는 게 사회적 약속을 이행하는 것이다. 학생은 정당한 교권에 도전하지 않고 교사는 학생에게 부당한 지시/차별을 가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것을 지키지 않으려는 이들은 언제든, 어디에든 있을 것이고 이러한 선을 넘는 이들에겐 분명한 책임을 부여해야 한다.

 

먼저, 학생이 교권에 도전하는 경우 교사는 직접 체벌이나 부당한 지시를 내리는 대신 분명한 경고를 해야 한다. 그리고 그 지시 역시 무시한다면 벌점을 부여하고, 이것이 정당하다면 되돌려서는 안 된다. 벌점을 부여하는 것은 교사의 권리이지만 그에 대한 검증은 있어야 하고, 그 조치가 정당하다면 교육청 등 상위 기관에서는 이를 보증해야 한다. 즉, 벌점을 취소 받고 싶다면 정당한 근거와 논리를 제시하여 교육청과 같은 상위 기관과 논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사를 괴롭힐 게 아니라.

 

만약 그러한 벌점을 누차례 받았음에도 태도와 행실에 개선이 없는 경우 더 강력한 조치들이 취해져야 한다. 가령, 미국의 Detention 조치나 Discipline card 조치 같은 것이 있다. 학교 교육 현장은 장난이 아니고 장난으로 넘어갈 수 있는 것도 아니며, 행동에 대한 책임의식을 부여하는 장소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성인이 되어서도 미성년자 시기의 감각으로 일을 벌이고 소아적 정신이 받아들일 수 없는 책임을 지게 되는 경우를 피할 수 있다.

 

만약 그럼에도 교권에 대한 도전, 수업 방해, 다른 학생에 대한 폭력 및 위압 행위가 반복된다면 정학, 전학, 퇴학, 경찰 고발 등의 조치를 시행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정도까지 도달하는 학생은 많지 않을 것이나, 그런 만큼 그러한 조치를 받을 만한 행위를 한 학생에게는 그만큼 강경한 조치의 필요성이 인정될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교사의 학생 인권 침해 역시 확실하게 제한되어야 한다. 정당한 지시가 아닌 이상 심의될 수 있고 차별이나 부당한 벌점 부과, 교사의 지위를 기반으로 학생의 행동이나 자유를 억압하는 행위, 적절한 학생 지도 및 계도 없는 제재 남용과 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교사에게 수업 권리를 일시 정지할 수 있고 시말서(학교와 학생에게 각각 제출), 교원 자격 박탈, 경찰 고발 등의 조치가 시행될 수 있다.

 

물론 교사의 권위와 위계가 더 상위에 있는만큼 교사는 더 큰 책임감을 가져야 하고 잘못된 조치에 대해 더 큰 제재를 받을 수 있다.

 

이러한 관계가 교사에게 너무 불리할 수도 있겠지만 결국 교사가 받는 스트레스는 해결할 수 없는 현상과 무한히 책정되는 책임 때문이니만큼, 자신이 할 수 있는 영역을 분명하게 정해준 뒤 그에 따라 학생을 지도/계도/제재할 수 있는 것은 그들에게 더 합리적인 교육 환경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학생 역시 불필요한 말썽이나 부당한 반항 따위를 하지 않는 한 벌점을 비롯한 제재 받지 않을 것이고 아무런 문제 없이 학교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오히려 문제 학생이나 문제 교사를 적절히 걸러낼 수 있기 때문에 더 편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문제 있는 교사의 존재는 학교 생활을 어렵게 만들고 문제 있는 학생은 다른 학생에게 큰 폐혜를 일으킨다.

 

7.

이 모든 것은 지킬 건 지키고 할 건 하는 책임의식에서 비롯되며, 그 근거는 정당하고 적절한 규칙에서 찾을 수 있다. 완벽한 규칙은 있을 수 없지만 적절한 규칙은 있을 수 있으며 그렇게 적절히 제시된 규칙은 학생과 교사 양자를 적절히 만족시킬 수 있을 것이다.

 

지금껏 한국 교육 환경은 이러한 규칙이 제대로 제시되지도, 집행되지도 않은 상황에 가까우며, 단지 당장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조치가 있었고, 그에 따른 반동이 발생한 것에 가깝다.

 

물론 대부분의 학생-교사 관계는 건전하거나 오히려 좋다고 할 수 있고, 교사의 지시나 행위가 부당하지 않는 한 학생은 별 불만이나 문제 없이 따른다. 그러나 어떤 학교의 어떤 학생, 어떤 교사는 문제적이고 어떤 학부모 역시 문제적이며, 그들의 패악은 적절히 다뤄질 수 없다는 문제가 있었다. 교권은 제약되었으나 그만큼 책임은 늘었고 반대 급부로 학생과 학부모의 패악질을 제어할 수단과 방법은 매우 부족하다.

 

이 탓에 교직을 그만두거나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며, 학생이 교권에 대한 도전을 넘어서 교사를 폭행하거나 성희롱 하는 사례 역시 발생한다. 상식적으로 그러한 상황은 반드시 가해자에게 책임을 물어야 하나 실제 제도는 그러한 현실을 다루는 데 실패하고 있다. 적절한 합의점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는 학생들을 부당한 폭력과 차별, 지시에서 보호하는 만큼 학생과 학부모의 부당한 폭력과 괴롭힘에게서 교사를 보호해야 한다. 교사를 보호하는 것은 문제적이지 않은 대다수의 평범한 학생들을 보호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 관계로, 학생(+학부모)-교사의 이분법적 관계로 규정지을 수 있는 게 아니다.

 

8.

학교는 교육 기관이며, 사회화 기관이기도 하다. 자신의 지위와 역할에 따라 자신이 해야 할 것과 하면 안 되는 것, 지킬 것과 어기면 안 되는 것을 익히는 공간이라는 의미이며, 학교와 교육청이 제시한 규칙이 바로 그러한 사회적 약속이 될 것이다. 학생들이 이것을 얼마나 잘 지키느냐가 바로 사회화가 얼마나 잘 되었느냐를 의미하는 것이고 그것은 사회에 나가서도 기본적인 사회적 규칙을 준수할 수 있을 거라 기대할 수 있는 근거가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 중요한 것은 정당하고도 적절한 규칙이 제시되고 실제 시행되며, 그것이 학부모의 지리한 괴롭힘, 제지되지 않는 학생의 방종 등 현실적 요소들에 의해 좌절되어서도, 형해화 되어서도 안 된다. 규칙이 부당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을 거부할 이유가 없다. 그것을 지키는 것이 자신의 권리를 지킬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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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일뽕이라 불리는 이들이 실제 사회, 생활에서 어떠한 모습으로 살고, 어떠한 입장과 처지에 있는지는 개인마다 다 다를 것이고, 그렇기에 성급히 정의내릴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야기를 하기 위해 이 글에선 크게 두가지 범주로 나눠보려고 합니다.


하나는 한국 사회의 주류 정체성에 편입되지 못한 이들.

다른 하나는 한국 사회의 주류 정체성에 편입되지 않아도 되는(혹은, 않고자 하는) 이들.



그러나 먼저, 일뽕으로 한정 지었지만, 정체성이라는 건 언제나 한가지 뿐만은 아니고, 이러한 사례가 한국이 아닌 다른 국가에서, 그리고 일뽕이 아닌 다른 종류로 발생 가능하다는 것을 짚어야합니다. 따라서, 일뽕이라 한정지은 것은, 그것을 대표적 예시로 하고자 함이지 그것이 다가 아님을 알아야 하죠.


한 국가, 한 집단 내에서도 여러 정체성이 나뉘지만, 기본적으로 그러한 집단을 이룰 수 있는 거대하고 포괄적인 정체성이 있긴 합니다. 가령 우리가 한국인의 정체성을 가지는 것처럼요. 한국인이란 정체성을 이루는 여러 구성요소들이 있죠.


근데 가끔 이 정체성을 부정하거나, 편입되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말 많은 이유들이 있는데, 학교를 예시로 설명하자면, 엄청 잘나가는 애들이 있고, 평범한 애들이 있고, 그 평범한 애들 사이에도 끼지 못하는 애들이 있습니다.


편의상 각각 탑, 미드, 바텀이라는 간단하고 익숙한 개념으로 설명하자면, 일진이나 공부를 잘하면서도 집안 좋고 잘난 인싸들이 탑, 평범한 애들이 미드, 왕따 등 따돌림을 당하는 이들이나 특별히 친구로 지내지 않는 아싸가 바텀이라고 규정하겠습니다.


이중에서 가장 많은 건 미드 계층이고 학생이라는 집단의 주류 정체성에 해당하는 이들입니다. 좀 직관적으로 설명하자면, 흔히 '애들'이라고 하면 해당되는 이들이 이 계층이죠. 


탑 계층의 경우 인기가 많고, 영향력도 큽니다. 다만 역시 소수에 불과하죠. 먹이사슬의 최상위층이고 미드 계층은 이들을 동경하거나 두려워합니다.


바텀 계층은 모두가 싫어하거나 호감을 보이지 않고, 적극적으로 괴롭힘 당하거나 무시 당합니다. 친구가 없거나 자기들끼리만 어느 정도 알고 지내지만 그마저도 그리 적극적이지 않고 그들의 불행에 나서주지도 않습니다. 다시 말해 서로가 서로를 지켜줄 수 있는 집단은 아닙니다.


여기서 계층의 동경, 호감 등 방향성을 읽어낸다면 미드 계층은 탑 계층을 두려워하거나 동경합니다. 이는 사실 비슷한 개념이기 때문에 자기들이 탑 계층이 될 수 있다면(될 능력이 있다면) 기꺼이 되고자 하고, 그러한 탑 계층의 구성원과 알고 지내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반대로 바텀 계층에 대해선 혐오 내지는 무시를 받기 때문에 누구도 그 계층에 편입(추락)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같이 알고 지내고 싶어하지도 않고, 적극적으로 괴롭히거나 배척하기도 합니다.


현실 사회에도 이러한 구조는 어느 정도 적용이 되는데, 상류층과 중산층을 포함하는 서민 계층, 그 아래의 하위 저소득층이나 수급자 등등이 해당되죠.



한국에 존재하는 주류 정체성의 비중은 서민에 의해 형성된 것들이 많습니다. 근데 여기서 중요한 건, 탑 계층(상류층)은 그 아래로 떨어지기 싫어하고, 미드 계층(서민)은 바텀 계층으로 떨어지고 싶어하지 않다는 거죠. 그리고 하위 계층은 위로 올라가고 싶어하지만, 그럴만한 수단이나 능력 등등 부적합한 경우가 있으며, 집단으로 읽을 경우 그 이상으로 교육이나 재산, 빚 등등의 문제를 가진 경우도 있고요.



인터넷에서 보는, 가령 디씨 역갤 같은 곳에서 보였던 일뽕의 경우 실제로 한국이 못났고 일본이 우월하기 때문에 일뽕에 빠진 게 아닙니다. 그저 그들이 한국의 주류 정체성에 편입되지 못했기 때문에 반동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 뿐이죠.


사람은 집단에 소속되어야 하고, 개인으로서 존재하기 어렵습니다. 무엇이 되었든 집단 등 특정 정체성에 소속되길 바라고, 되도록 그게 자신의 자부심과 명예욕, 과시욕 등을 충족시켜주길 바라죠. 되도록 비교되고 우월하고자 합니다. SKY 대학생들이 하위 대학생들에 비해 더 큰 자부심과 명예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때때로 그걸 (적극적으로까진 아니더라도) 비교하며 과시하기도 한 것처럼요.


문제는 일뽕을 비롯한 하위 계층 중 주류 정체성에 편입되지 못한 이들이 새로운 정체성을 찾게 되는데, 주로 외부에서 찾게 되죠. 내부에서 자신이 소속될 수 없기도 하고, 소속될 가치가 없는 정체성을 거부하기도 하기 때문에요.


한국의 경우 가장 가깝고, 비슷하며, 이입하기 좋고, 정보를 얻기도 상대적으로 쉬우며, 무엇보다 한국보다 우월한 지위에 있고 지금도 어느 정도 그러한 위치에 있는 일본에 이입하는 겁니다. 즉, 한국의 주류 정체성에 편입되지 못하자 그에 대한 반동적 태도로 한국보다 우월한 일본의 정체성을 가지려 하는 거죠. 다시 말해 자존감의 문제입니다.


반드시 일본일 필요는 없습니다. 누군가는 일본일 수도 있고, 미국일 수도 있으며, 심지어 이해는 어렵겠지만 북한일 수도 있죠. 이 경우는 좀 드물긴 합니다만, 실제 종북 중 일부가 그러한 계층적 패배자이자 교육 수준이 낮고 심지어 정신적 문제도 있는 등의 경우가 있곤 하는 걸로 압니다. 정말, 아주 드물게요. 


얘넨 이석기 같은 부류와는 또 다릅니다. 자신을 핍박하고 잘 살지도 못하게 괴롭히는 한국은 밉지만 한민족을 배신할 순 없고, 그런 한민족을 핍박한 타 민족을 빨 수는 없으니 한국과 한국인들을 짓밟아줄 강력한 무력이나 정체성을 찾으니 그게 북한이었던 괴랄한 경우죠.


일뽕은 자기들이 한국인들보다 우월하고 그런 이유로 한국을 업신여깁니다. 왜냐면 자기들이 열등한 위치에 있으면서 주류 정체성에 편입되지 못하고 있거나, 그러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대신 자신의 위치를 남들이 무시하거나 조롱하기도 하고, 그게 아니더라도 본인 스스로 열등감을 가지기도 하죠.


그러니 외부 정체성으로 자신의 자존감을 채워야 했습니다. 위에서 열거한 일본인 이유가 있지만, 실은 거기에 하나를 더 추가해야 합니다. 매우 저열하고 말초적인 이유인데,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화한 경험이 있어서죠. 그러니 식민지배를 당한 후진국 한국과 한국인보다 정신적 일본인인 본인들이 훨씬 우월한 거고, 그 우월한 위치에서 한국인을 조롱하고 무시하는 겁니다.


날 병신으로 보는 한국인들을 원 없이 비웃고 조롱하고 공격하기 위해서요. 자존감을 회복하기 위한 방법 중 하나인 남을 공격하는 겁니다. 쓰러뜨리거나, 그러지 못한다면 꾸준히 자신보다 낮은 위치에 있음을 확인하고자(or 그렇게 믿고자) 깍아내리는 거죠.


학교의 찐따들이 평범함을 거부하고 일진 같은 잘나가는 애들을 도리어 증오하다시피 거부하는 이유는 그들이 별났나거나 일진 같은 애들을 엄청나게 증오하기 때문만은 아니고, 그러한 위치에 도달할 수 없기에 다른 정체성을 찾는 겁니다. 현실에서 쳐맞고 다니는 애들이 인터넷에선 여포이거나, 커뮤에 심각하게 빠져 중독되는 일이 발생하는 이유죠.


현실에서 주류 정체성에 편입되지 못하고, 스스로 그러한 정체성을 구성할 수 없으니 가상세계로 파고드는 겁니다.


미국 슬럼가 등 거리의 흑인 무리들이 백인 중산층이나 상류 엘리트를 무시하고 정부의 권위를 씹는 이유는 그러한 우월하고 안전한 정체성에 포함되기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다 봅니다. 심지어 될 가능성조차 없으니, '저 포도는 신 포도'인 셈이죠. 마찬가지로 사회의 찐따들이 한국인의 주류 정체성에 평범하게 편입될 수 없으니 외부 정체성을 가져오는 거고요.


ISIS가 한창 흥할 때 유럽에서 그러한 이념에 동화되거나 받아들이는 이들이 생기곤 했었죠. 실제 테러까지 이어지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지만, ISIS로 향하거나 하는 이들이 생기긴 했습니다. 심지어 한국에서도요. 이 또한 외부 정체성을 찾기 위함입니다.


이민자 1세대야 그렇다쳐도, 2세대 밑으로는 그곳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랐음에도 유럽의 주류 정체성에 편입되지 못하고 여전히 이민자, 무슬림, 그것도 테러나 저지르는 문제적 민족이라는 인식에 차별 당하고 공격 받으니 자신을 배척하는 유럽의 주류 정체성을 본인 스스로가 배척하고(내쫓긴 게 아니라 내 발로 나간 거다. 라는..) 대신 외부의 속시원한 정체성을 찾았던 겁니다. 그게 ISIS였던 거고요.



뭐.. 여기까진 차별 받거나 열등감이 있는 하위 계층에 대한 거고..


맨 위에서 말했던 한국 사회의 주류 정체성에 편입되지 않아도 되는(혹은, 않고자 하는) 이들. 에 해당하는 이들은.. 쉽게 말해서 정몽준 아들 같은 케이스입니다. 워낙 잘 살고 남들 머리 위에 있는 천상계의 상류층이다보니 그 아래에 있는 이들과 다르다는 거죠. 쉽게 말해 난 너희와 달라. 이겁니다. 


미드 계층이 바텀 계층과 동일시 되기 싫어하고, 그들과 아예 같이 있는 걸 배척하기도 하는 것처럼, 상류층은 그 하위 계층과 적극적으로 어울리진 않죠. 아예 무시하는 건 아니더라도. 하지만 탑 계층에 있던 이가 그 하위 계층과 동일시 되면 기분은 나쁠 수 있습니다. 계층 정체성에 위기감을 느낀다면 아예 손절해버리기도 하고요.


하도 잘나고 잘살고 있으니 아득아득 사는 이들이 천박해보이고 그런 천한 서민과 동일시 되기 싫다 이겁니다. 같은 한국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남들과는 다르다는 엘리트 의식, 선민사상. 이런 의식이 주류 정체성은 아니죠. 얘네가 일뽕 같은 것에 빠진다면 프랑스어를 쓰던 러시아 왕족, 한자를 쓰던 양반 계층처럼 서민보다 우월하다는 우월주의 때문이지 주류 사회, 주류 정체성에 편입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겉으로는 잘나가고 잘 사는 그들을 서민은 동경하거나 부러워하죠. 단지 그런 차이일 뿐입니다. 뭐 이런 우월주의나 선민사상 같은 거야 상류층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거긴 합니다. 하위 계층에서 볼 수 있는 열등감과 자존감 문제로 외부 정체성을 끌어오는 것도 특별한 일은 아니라고 보고요. 모든 이들이 그렇지는 않을 뿐.


이러한 문제는 단지 그 뿐만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ISIS의 정체성을 받아들인 이들이 그렇듯, 반사회적 문제로 이어지기도 한다는 겁니다. 원래 소득이나 교육 수준이 낮을수록 범죄율이 높다고는 하지만, 이 사회의 정체성이 아니고, 다른 사회의 정체성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러한 간극에서 반사회적인 행위가 나타나기 쉽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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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 보면 많은 책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는 지성을 기르고자 하는 이들에게 있어서 꼭 필요한 책이 있는 반면 비이성적이고 비논리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지뢰도 많죠. 만약 어떤 사람이 이러한 비이성과 비논리, 비합리를 경계하고 막기 위해 어떤 사고방식이 올바르며 어떤 태도를 가지는 것이 옳은 것인가 하는 책을 냈다고 해봅시다. 분명 이 책을 읽으면 더 높은 수준의 사고가 가능하고 미신적이고 비논리적인 것을 제대로 논파할 수 있게 되겠죠.


하지만 문제는 사람이 책을 선택한다는 겁니다. 그런 류의 책이 수 천권이 있지만 정작 유사과학, 미신, 음모론 따위로 점철된 책을 고르는 사람은 분명 존재한다는 거죠. 또한 그 뿐만 아니라 잘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 마치 이것이 맞는 내용인 것처럼 보이는 책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러다보니 제대로 지성을 쌓아가는 사람이 존재하는 반면 머리에 똥쓰레기 같은 정보를 집어넣는 사람이 생길 수도 있죠. 실제로 그렇고요. 그렇다면 이런 문제점을 어떻게 해결해야할까요?


어떻게 보면 방법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방법은 존재합니다. 바로 공교육이라는 거죠. 실제로 이 공교육이라는 것을 통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중세시대 사람보다 좀 더 합리적이고 현대적 이성의 태도를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공교육의 목적은 국가마다 다르지만, 저에게 있어서는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이성적인 사고가 가능해야하며, 동시에 민주시민으로서의 덕목을 가질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봅니다. 이는 서로 다른 것이 아니고 상호보완적입니다. 전자가 전제되어야 후자가 가능하기 때문이죠.


왜 사람은 이상한 것을 믿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 인간은 본래 충분히 이성적인 존재가 못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러한 교육을 철저히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고도 생각합니다.


최근엔 수호령이나, 차크라, 귀신의 존재를 진심으로 믿는 사람을 본 적 있습니다. 저는 그 사람에게 어떤 것이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판단인지 답변했고 거증의 의무를 들이대며 스스로 증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지적했죠. 물론 그것들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스스로 있다고 주장하고 그것에 대해 불변하는 믿음을 보내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태도를 바꾸거나 자신이 틀렸음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기실 모든 비논리적이고 비합리적인 인간군상이 이와 같은 태도를 취하죠. 당연히 그 사람은 증명하지 못했고 말입니다.



만약 그가 여러 책과 공부를 통해 이성적인 사고를 할 수 있었다면 그런 미신적이고 종교적인 요소에 대한 믿음을 배재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죠. 실제로 책을 고르고 사야하는 사람은 그 본인이기에 그러한 지식이 있다고 해서 자연스레 머리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렇다면 만약 그 사람이 공교육으로서 그런 이성적인 사고를 하는 법을 배웠다면 그러한 믿음에 빠질 수 있었을까요?


아마 아니겠죠.


그렇지만 이것도 마냥 현실적인 이야기는 아닙니다. 먼저 그러한 교육이 -다른 나라는 몰라도- 한국에서 가능한가 하는 것이 첫번째이고, 현재도 공교육에 대해서 반발을 하는 것이 학생일터인데, 그런 것을 가르친다고 모두 제대로 답습하고 실제로 이행가능한가라는 것이 두번째입니다.


뭐.. 실제로 그렇죠. 특히 후자가 생각해볼 법한 이야기인 데, 현재에도 학교와 공부라는 것에 학을 때고 반발심이 강하며 자신의 학교를 좋아하기 보다 욕을 하며 교사와 교육제도에 대해 조롱하며 비난하는 것을 보면 이러한 분명히 이성적인 사고력을 키우게 하는 교육이 반드시 성공한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물론 공교육이기에 일단 가르치면 따라오는 애들이 많기는 하겠지만요.


하여간, 그러한 문제점은 -현재의 교육도 마찬가지지만- 교육에 대한 부담부터 때는 것이 먼저일 거라고 봅니다. 학교 공부가 어렵고 마치 성적이 모든 것을 재단할 것처럼 여기며 실제로도 그러하며 그 외의 가치는 모조리 묵살, 혹은 무시 당하는 현재의 사회문화적 분위기도 문제이고, 교육을 이수 받기에 높은 난이도도 문제라 할 수 있을 겁니다.


만약 학생들이 좀 더 자유롭고 덜 무거운 교육이라는 짐을 졌다면 좀 더 교육과 학교, 교육제도에 대해서 덜 비판적이고 유하게 대했을 겁니다. 압박이 심하면 반발이 심하듯이 압박이 적으면 반발도 적은 것이 이치이니까.



다시 앞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많은 이들이 이성적인 사고관을 가질 수 있다면 인간은 좀 더 미신적이고 종교적이며 비합리적인 것을 믿지 않고 피했을 것이며, 뻔히 보이는 거짓말과 증명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 어렵지 않게 논파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고능력과 판단력은 사회를 살아감에 있어서도 상당히 큰 도움이 될 것이고 이는 국가적인 이익으로 다가올 것이고요.



각국이 다른 교육제도와 교육방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나라마다 교육의 목적과 가치가 다름을 의미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현재의 교육제도가, 정확히는 현재 한국 교육이 가르치는 것이 쓰레기이거나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치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현재 한국에선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이치에 맞는 이성적인 사고가 상당히 부족한 것이 사실이고 이것은 교육을 통해 교정할 수 있다고 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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