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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며,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 - E.Kant
by Ko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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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에 해당되는 글 7건

  1. 2018.11.22
    이수역 사건 등에서 찾아볼 수 있는 페미를 하는 여성들의 정신적 기제. 4
  2. 2017.05.16
    성적 대상화와 성욕의 문제.
  3. 2017.03.19
    한국 페미니즘 운동의 근본적 한계. 4
  4. 2016.09.07
    메갈이 왜 페미니즘이 아닌가. 5
  5. 2016.08.17
    황제와 여기사 외 소설 리뷰 2
  6. 2016.07.23
    웹툰 작가들도 독자들에 대해 짜증은 가지고 있었을 겁니다. 18
  7. 2016.07.20
    넥슨 성우 사건 관련 메갈 물타기 선동으로 놀아나는 작태.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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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과 남성에겐 감각, 인지의 영역에 여러 차이가 있는데, 그 이유가 호르몬이 됐든 그 호르몬에 의한 뇌 발달의 차이가 됐든 실제로 그러한 차이가 존재한다는 건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한 차이가 그 자체로 문제가 되는 건 아니지만, 그러한 차이가 문제로 발생하는 건 생물학적인 작용과 현실적 규칙 사이의 충돌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러한 현실적 규칙은 도덕, 윤리, 법률 등 여러가지 사회적 규칙들을 말하는데, 남성의 본능적 충동이 살인이나 폭력을 더 쉽게 발생시킬 수 있고, 여성의 본능적 충동이 따돌림, 질투 등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모두가 그런 건 아니지만, 누구 말마따라 남성은 잠재적 살인마고 여성은 잠재적 아동학대범이라고 하죠..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주제는 한국에서 페미라 자칭하는 온갖 집단, 혹은 개인들의 인지적 오류와, 정신적 장애기제에 대한 겁니다. 


트페미를 비롯한 수 많은 꼴페미, 메갈, 워마드들의 여러 망발과 논리적 빈약성, 내로남불의 사례는 그러한 이유에서 발생하는 겁니다. 인지능력에 문제가 있어 오류가 발생하고,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어 장애적 기제를 가지고 사고를 합니다. 단적으로 이수역 사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의 모습을 볼 수 있죠.


이수역 사건에서도 여성들이 먼저 반사회적 표현으로 반사회적 공격을 남성들에게 가했고, 먼저 폭력을 휘둘렀습니다. 그래놓고 온갖 거짓과 조작으로 사건을 여성혐오를 당했다는 듯이 피해자 코스프레를 시작했지만, 여러 증언과 증거가 발표되면서 그들의 웃기지도 않고, 도대체 뭘 믿고 그런 소리를 했는지 이해가 안 되는 정신병적 거짓말임이 증명되고 있는 상황이죠.


심지어 --기존의 여러 사례들과 마찬가지로-- 그것에 동조하는 여성들의 모습은 더더욱 정상적이지 않는 모습입니다.


이는 여성들의 본질적 정신기제의 발동 때문인데, 하나의 종교성이죠. 무조건 자기들이, 자기 진영이 절대적으로 옳고, 무오하며, 도덕적으로 우월함을 넘어 절대적이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은 스스로 자기세뇌를 걸며 자기합리화, 인지부조화로 이어지죠. 그냥 이어지는 게 아니라, 아주 강력하게 발생합니다.



모든 극단주의는 정신병적이라 수차례 이야기한 바가 있는데, 그러한 페미들의 활동 또한 정신적으로 극단주의와 동일합니다. 오히려 정치에서 찾아볼 수 있는 극단주의보다 더 심각한 편향성을 가지고 있을 정도고, 이는 여성이라는 생물이 내포하고 있는 강력한 인지적 되새김 문제입니다. 어떠한 믿음에 빠르고 강력하게 자기세뇌를 걸죠.


정신병적이기 때문에 있지도 않는 사실을 조작해내고, 종교적이기 때문에 그것을 믿습니다. 모든 근본주의자들은 스스로를 신의 사자로서 올바른 행위를 하고, 그것은 정의로우며, 결과적으로 신, 혹은 자기 종교의 진영에 이로운 행위를 하는 투사라고 믿습니다. 현재의 페미는 그 자체로 극단적 종교이기 때문에 그것을 추종하는 이들은 근본주의자라고 할 수 있죠. 언제든지 테러리스트가 될 수 있고, 어떤 면에선 이미 그러한 행위를 하고 있는 폭력자들입니다.



심지어 감정적 오버는 살면서 한번쯤은 여성과의 갈등에서 겪어봤을만한 일일텐데, 여기에 앞서 이야기한 스스로 절대무오하다고 믿는 증상과 거기에서 파생되는 문제에 대한 절대회피는 답이 없는 문제로 만듭니다. 


흔히 커플들이 싸울 때 여성측이 잘못하거나 문제가 일부 있어도 결코 인정하지 않고 결국 남자 쪽에서 먼저 손을 들고 내 탓이오 하고 사과하게 되는 것처럼요. 이처럼, 분노한 여성은 논리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미친 코끼리처럼 주변의 모든 것을 부수고 공격하며 화가 풀려야 직성이죠. 그리고 현 페미를 한다는 여성들은 무언가에 분노해 있고(그것에 대한 옳고 그름, 정당과 부당과 무관하게) 주변의 모든 이들을 공격합니다. 단, 자신들의 거울상 이성질체에 대해서만 빼고요.(ex.일베, 안페협, 박사모)



하여간, 그러한 감정적 오버와 절대무오, 절대회피는 그들의 용어와 행위에서 어떻게 나타나냐면, 시선강간이라는 말도 안 되는 용어를 대표할 수 있습니다. 이거 말고도 웃기지도 않는 용어들과 논리들은 많지만, 저에겐 이게 가장 인상 깊었죠.


시선강간이라, 사람을 훑어보면 임신하거나 처녀막이 파열되나요? 정신병이 걸려버릴 정도로 강렬한 폭력을 물리적으로 격게 되나요? 전혀 아니죠. 물론 자신의 몸을 성적인 욕망 가득한 눈으로 훑어보고 뚫어지게 쳐다본다면 눈을 뽑아버리고 싶을 정도로 스트레스와 불쾌함을 느끼는 거야 당연합니다.


근데 시선강간이라? 이러한 표현이 나오는 이유는 감정적으로 오버해버렸기 때문입니다. 여성이 분노를 하게 되면 논리와 합리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물론 분노하게 되면 다 그렇죠. 남자든 여자든. 범죄자들이 잡히면 자기는 억울하다고 하는 이유도 결국 체포가 되었다는 현실에서 자신의 잘못과 죄를 인정하기 보단 누군가, 무언가가 잘못해서 내가 이 꼴을 하고 있다고 여기는 게 더 편하기 때문입니다. 인지부조화죠.


이건 단순한 경향성인데, 이런 게 있습니다. 남자는 화가 나면 먼저 설명을 듣고 화를 내든 풀든 삭히든 하는데, 여성은 먼저 화를 낸 뒤 이유를 듣는다고요. 


이게 사회적 현상과 얽히게 된다면 언제나 분노해 있는 그들은 논리와 합리를 완벽하게 등져버린 채 헛소리를 하되, 그러한 헛소리들을 스스로 무오하게 여기며 자기 진영에 대한 탄탄한 결속력을 갖춘 채 하나의 덩어리가 되어버린다는 겁니다. 


시선강간이라는 표현이 나온 이유도, 정확하고 객관적으로 판단하기 보다는, 자신의 감정과 기분에 마치 마약을 한 것마냥 깊게 빠져버려 오버해버리는 거고, 무오하다 여기기 때문에 나는 어떠한 잘못이 없고(이건 그럴 수 있지만.) 상대방이 절대악이자 파괴, 절멸해버려야 하는 종자가 되는 겁니다. 따라서 남성이 여성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최악의 폭력인 강간이라는 오버해버린 표현을 합쳐서 시선강간이라는 말도 안 되는 용어를 창조해낸 거고요. 


그 시선강간을 이미 쓰고 있고, 올바른 용어로 고친다면 성추행이 됩니다. 실제 판례도 있고요. 이 경우는 단순 한 문장으로 설명할만한 사건 아니다만.



그럼에도 시선강간이라는 표현을 쓰는 이유? 그것이 자신들을 무조건 올바르고 보호 받고 지지 받고 지원 받으며 모든 정당성과 명분과 싸움에 있어서 그러한 것들을 기반으로 하는 파워를 얻고, 상대방은 추악한 괴물이자 쓰레기 악당, 최악의 적이자 짓밟아 없애버려야 하고, 없앨 수 있는 그런 것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그러한 말도 안 되는 과장된, 감정적 오버 심각한 용어를 만들어서 쓰는 겁니다.



모든 인간들이 다 그렇지만, 경향성이라는 면에서 여성들의 약자 코스프레, 그러한 위치에서 발생하는 도덕적 정당성과 명분의 획득에 더 환장하는 편입니다. 문제는 그것을 얻는 방법과 과정이 없거나 어처구니 없는 수준이고, 그 상태에서 싸우려드니 그저 정신병자들처럼 보이게 되는 거죠. 


자기 스스로를 너무나도 무오하다 보기 때문에 절대적인 선의 위치에 서 있고, 내가 싸우는 사람, 남자들은 그 정극단에 서서 죽여 없애야 하는 존재가 되는 겁니다. 그냥 정신적으로 그렇게 집중해나가고 자기세뇌를 시켜요. 그렇게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나 스스로를 세뇌하고 정당화하는 겁니다. 


왜 이수역 가해자들이 스스로를 피해자라 지칭하고 거짓을 조작해내겠습니까? 그들 스스로 그러한 행위가 도덕적이지 않다는 걸 알고, 그것이 자신들에게 불리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지만, 그것을 인정하기엔 정신병적으로 편협하고 그러한 인지능력과 사고력이 작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신 그 남자들이 원인부터 과정에 결과까지 모두 잘못한 거라 믿는 것은 더 쉽죠. 아니라는 걸 알아도 스스로를 세뇌하는 건 인정하고 사과하는 정상적인 행동보다 더 쉽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페미를 한다는 인간 중에 정상인이 단 하나도 없고, 정상인이라면 스스로 페미를 한다고 말하지 않는 겁니다. 그것은 여성 특유의 경향성이 내포되어 발생하는 감정적 오버, 종교적 신앙, 강력한 자기세뇌, 인지부조화, 자기합리화로 점철된 변기통이기 때문이죠. 남성들이라고 그렇지 않다는 게 아닙니다. 여성들에게서 더 강력하게 발생한다는 것 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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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과 남성에 대한 이야기, 비판에 대해서 반드시 구분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여성(혹은 남성)의 성적 대상화와 남성(혹은 여성)의 생물학적 욕구 그 자체죠. 이는 분명히 다른 것이고, 구분되어야할 것들입니다. 많은 페미전사나 그들의 논리와 주장에 반박하는 이들이 논쟁을 하며 발생하는 문제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을 구분하지 못하거나 착각하는 경우거든요.


여기서는 여성의 성적 대상화와 남성의 생물학적 욕구라는 틀로써 표현을 하겠습니다. 그 반대의 경우도 충분히 가능하지만, 주로 문제가 되고 실제로 더 많이 발생하는 일반적인 사례가 이런 요소 때문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여성의 성적 대상화라는 것은 그 여성을 하나의 주체로서 보는 것이 아닌 남성의 전유물, 전리품 같은 객체로 본다는 사실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가령 수 많은 소설이나 영화, 드라마 등에서 여성을 남성 성공의 전리품이나 종속되어 헤롱 거리는 수동적이고 맹목적인 객체로 묘사하는 경우가 대표적이라 할 수 있죠.


이는 여자라는 존재를 생각하고 판단하며 스스로의 감정을 가진 주체로서 인식하는 것이 아닌 글자 그대로 물건이나 도구, 혹은 애완동물과 같은 수준으로 격하시킨다는 문제는 가집니다. 뭐 실제로 많은 남자들이 주변 여자들을 그렇게 대하지는 않을 거라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특정 성별이나 성별의 주체들을 객체화시켜 유희, 향락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인식과 가치관의 문제로 이어지는 거죠.


나는 여자를 그렇게 안 보는데? 라고 할 수 있지만 뭐, 특정 사상에 경도 된다면 그 반대되는 사상에 대해서 쉽게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도 못하는 경우는 이상한 문제가 아닙니다. 사실 저만해도 이러한 주장을 하고 있지만 정작 여성을 객체화시켜 바라보지 않느냐, 그러한 묘사에 불편함을 느끼지 않느냐, 성적 대상화 하는 것에 큰 반감을 가지고 있느냐 한다면 아예 아니라곤 말 못하거든요.


사실 남자라면 누구나 그럴 수 있고, 그러는 게 현 시대에 있어서 이상한 일도 아니라고 봅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그러한 사상, 관념, 인식, 가치관은 분명히 남성우월적이며, 성차별적입니다. 그리고 그렇다는 건 그러한 인식과 가치관이 자신의 시각과 생각, 행동으로서 나타나거나 발현될 가능성을 지닌다는 거죠.


누군가 메갈이나 워마드를 아예 안 한다고 해서 그러한 주장과 논리에 동조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사람이 메갈, 워마드와 같은 짓거리를 하거나 같은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근거가 되고 실제로 그런 경우가 적지는 않을 수 있죠. 뭇 남성들이 그런 여성에 대해 우려를 하거나 고깝게 보지 않는 이유와 비교해서 생각해보면 이해하기 쉬울라나요?


저 또한 이 문제에 대한 한계를 가지고 있고 그 문제에 대해 탈피하지 못하고 있으니 뭐라 더 이야기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하지만 난 남자지만 여자를 그렇게 보거나 대하진 않아. 라는 말이 반드시 맞는 말이라는 생각은 안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언행으로 표출하는 것과 그렇게 생각하는 건 다른 문제고, 다른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서로 연관성이 있다는 것 또한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이게 언제든 남성이 여성에 대한 우월감을 가지고 성범죄나 미소지니적 행동으로 이어짐을 의미하진 않습니다. 특정 시점이나 조건에서 특정 행동을 하게 유도될 수 있다고 볼 뿐이죠. 가정에서 간간히, 혹은 꽤 자주 마누라나 딸에게 대하는 태도 등으로.




뭐 이건 일단 이렇게 넘어가고, 남성의 생물학적 욕구 부분에 대한 이야기인데, 이건 이상한 것도 아니고 그 자체로 나쁜 것도 아닙니다. 많은 메갈이나 워마드 등의 꼴페미전사들이 자지로 대표되는 남성의 성욕 그 자체에 대한 원죄론을 주장하며 그 자체로 나쁘고 악한 것이라는 주장을 하는 경우가 있는 데, 이 경우 반대 논리도 성립되어야 합니다. 여성의 성욕 그 자체 또한 나쁘다고요.


당연하지만 이는 무조건 틀린 말입니다. 자연적으로 발생하고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 자체로 정당하고 선한 것입니다. 물론 자연계의 모든 것이 인간 문명에서 선하고 정당한 건 아닙니다. 인간은 문명과 사회라는 시스템을 만들어왔고, 이는 자연계가 아닌 인공적인 계(System)이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독자적이고 인공적인 법칙에 의해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살인과 강간, 절도나 강도 같은 것이 선과 악에 따라 구분될 수 있다는 말이죠.


하여간, 성욕 또한 생물학적으로 발생한 것이고 생물이라면 모두가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욕구이기 때문에 이것을 부당하게 억제하거나 그 자체로 죄악 취급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자극에 반응을 하는 것이 죄악인 것이 아니듯이, 우리가 배고픔을 느낀다고 해서 그것이 죄악이 아니듯이 성욕 또한 그 자체로 정당하고 선한 것입니다.


문제가 되는 부분은 이 성욕을 어떻게 표출하는가, 혹은 억제하지 못하는가의 문제죠. 우리가 성욕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자극 받았다고 해서 누군가를 성폭행하거나 강간하거나 성희롱해서는 안 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설계해온 법칙이 있고 그에 따라 돌아가야 정의로운 것이기 때문이죠.


따라서, 남성의 생물학적 욕구 또한 그 자체로 이상한 것도, 나쁜 것도 아닙니다. 많은 꼴페미들이 이를 오해하거나 자신들의 지적, 사상적 노력을 간편히 해결하고자 하는 욕구로부터 발생한 극단적인 사고의 한 일면일 뿐이죠. 쉽게 말해서, 복잡하고 어려운 거 생각하기 싫으니까 그저 저 좆대가리가 문제. 라는 간단한 명제 하나만 신성불가침의 법칙으로 설정해놓으면 만사해결이라는 무책임한 태도의 발로라는 거죠.


또한 그것은 남성혐오일 뿐이기도 하고요. 그렇기 때문에 남성의 생물학적 욕구, 성욕이라는 것을 화두로서 잘못되었다고 주장하고, 그 논리 위에 올려진 모든 주장은 비단 개소리가 되는 것입니다. 잘못된 근거/논리 위에 합리적인 주장이 있을 수가 없으니까요.



이런 주장 뿐만 아니라 꼴페미전사들이 주장하는 대부분의 논리나 주장을 사실 그 자체로 반대로 뒤집어도 통하는 면이 있습니다. 여성의 성적 대상화는 마찬가지로 남성의 성적 대상화에 대한 문제로 지적할 수 있고, 그것을 지적하고 비판하는 논리는 거꾸로 해도 적용되죠. 남성의 성욕 욕구를 공격할 수 있듯이, 여성의 성적 욕구 또한 공격할 수 있습니다.


이는 그 자체로 주장이 틀렸다는 것이고, 그와 동시에 논리 그 자체의 합리성을 보여주는 일면이기도 합니다. 다만 그런 논리를 주장으로 가공하면서 그것이 자기 자신을 비판할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할 뿐이죠. 여성의 성적 대상화를 지적하는 논리는 그것을 그대로 뒤집어 재범오빠 찌찌파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어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논리는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고, 그 논리를 어떻게 주장으로 가공하여 사용하는 지에 대한 문제입니다. 원리라는 것은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것이지 특정 세력에게만 유리할 순 없기 때문입니다. 공통 논리는 특정 대상을 향해서만 날을 세우지 않는다는 겁니다.


따라서 같은 논리는 스스로를 비판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올바른 주장을 하거나, 아니면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원리로서의 논리를 설계해 모두에게 적용하면서도 특정 세력을 비판할 수 있는 도구로 가공해야 합니다. 



뭐, 하여간 성 담론에 대한 논쟁에 있어서 특정 성별의 성적 대상화 문제와 특정 성별의 성욕 그 자체에 대한 이야기는 구분해서 사용하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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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여기서 말하는 페미니즘이란 최근 한국의 여성시대-메갈리아-트위터 페미니스트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형태와 논리에 한정됩니다.



기존, 서구와 같이 민주주의를 발전시켜온 나라들의 공통점은 특정한 시기와 개별 사안에 있어서 범주에 차이가 있을 뿐, 보편적으로 인권 전체가 향상되어 왔습니다. 남성의 인권 확대는 여성의 인권 확대까지 이르고, 노인에 대한 인권 확대는 반드시 아동에 대한 인권 확대로 이어졌죠. 이는 한 쪽의 인권향상은 당연히 사회공동체 모두의 인권의식에 변화를 주었기 때문이며, 그 변화는 다른 인권의 향상이 일어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흑인에 대한 인권 향상, 여자에 대한 인권 향상, 노인에 대한 인권 향상, 아동에 대한 인권 향상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졌고, 이는 인권에 대한 학문적 발전, 의식적 진보의 성과인 동시에 그것에 대한 향상을 이끌어왔습니다.



현 한국 사회에서 스스로를 페미라 말하는 자들의 실질적 남성혐오, 여성우월주의는 그들이 말하는 페미니즘과 완전 반대의 논리와 텍스트, (의식하든 그렇지 않듯) 레토릭을 가졌고, 이런 문제는 결국 자칭 페미 스스로의 고립과 사회적 분리만을 이끌어내죠. 이들의 페미니즘 운동은 보편적 인권 향상에 관심도 없고, 어떠한 기여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거부하고, 그에 따라 반대의 결과를 이끌어낼 뿐이죠.


뭐, 설령 그들의 논리와 행동에 따라 여성 집단의 인권향상이 이루어졌다고 쳐도, 이는 특정 집단의 인권향상일 뿐이고 그게 그들에게 있어서 이익일 진 몰라도 결과적으론 보편적 인권의 후퇴를 불러올 수 있다고 우려할 여지는 분명합니다.


무슨 말이냐면, 정규직 노동자만을 위하는 단체가 있다고 쳤을 때, 이들이 정규직을 위한 운동을 했을 때 바람직한 발전방향은 정규직 처우를 개선하면서 동시에 비정규직 처우 개선에도 이르는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론 정규직만을 위한 운동을 전개함에 따라 결과적으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갈등, 대결 프레임을 스스로 뒤집어 쓰게 되고, 이는 연대를 흔들리게 만들며, 서로 반목하게 만들면서 결국 전체 노동환경의 후퇴를 불러일으킨다는 거죠.


바로 이점이 한국 페미니즘 운동의 근본적인 한계입니다. 제 생각엔 이미 한국 여성과 페미니즘, 페미니스트에 대한 인식이 더욱 나빠져만 가고, 하나의 낙인이 생겨나 성갈등이 더 심해지고만 있으며, 그에 따라 한국 여성에 대한 공포증, 혐오증, 거부감만 더 커져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만, 설령 그들이 그런 활동을 통해 여성 인권에 대한 한정적 상승을 이끌어 냈다고 해도 이는 결코 이익인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남성의 인권엔 관심이 없고, 오히려 그것에 대해 증오심마저 품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다른 인권에 대해서도 어떠한 관심이 없죠. 아동이나 노인 등.. 그들은 자기들이라 여길 수 있는 범주에 대한 인권향상만을 원하고, 그 반대로 다른 범주에 속하는 이들의 인권을 후퇴시키는 것에 적극적으로 찬성합니다. 



이는 결과적으로 보편적 인권의 후퇴를 불러일으키죠. 남성과 여성의 연대를 통한 여성 인권 상승, 그에 따른 보편적 인권의 향상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남성과 여성의 성갈등을 통한 인권의 후퇴만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이 그렇습니다.


연대할 수 없는 진보운동은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근시안적으로 성공으로 보여도, 거시적으로는 실패할 수 밖에 없죠. 한국 페미는 연대를 거부하고 같이 힘을 합쳐야할 대상을 증오하고 공격하며 적으로 규정짓습니다. 이는 굉장히 저열하고 위험한 전략이며, 또한 싸울 대상을 잘못 고른 것이기도 합니다. 문제에 대한 피상적 이해는 이처럼 근본적으로 한계를 지니고,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원인으로 작용하곤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 페미니즘 운동은 근본적인 한계를 지닌 것이며, 이는 성별을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불행한 결과만을 낳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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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갈이나 워마드가 페미나치 소리를 듣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에코나치, 페미나치, 피보나치, 문법나치, 네오나치 등 뒤에 나치가 붙는 것들은 그 행태에 대한 비판과 조롱으로서 붙는 건데, 본질에서 크게 벗어난 극단주의자들을 나치에 비유하는 거죠.


여기서 본질 타령하면 그럼 그 본질이 뭐냐고 하는 이들이 있는데, 페미니즘은 여성이 불평등하게 차별, 억압 받고 상대적으로 낮은 여권을 신장시키며 성평등을 추구하는 운동 내지는 사상입니다. 이게 본질이죠. 메갈이 페미니즘이려면 여권의 신장을 주장해야 합니다. 남성의 거세를 주장할 게 아니라. 페미니 남성우월이니 어쩌고 할 꺼면 좀 배우고 입을 털어야 합니다.


리얼 페미니즘 알못들이 메갈 쉴드치려고 여성우월주의랑 페미니즘이랑 구분도 못하는 꼬라지보면 진짜 답답합니다.. 노동자들이 자본가들보다 권력이 적고 차별 받는다면 노동자들의 권리를 향상시켜야지 자본가들 머리를 돌로 까야 됩니까? 똥멍청한 거죠.


남성 권력이 강하기 때문에 그걸 낮추는 거랑 애비충 똥꼬충 명예ㅈㅈ 한남충 거리는 게 어떤 도움이 되는지 납득 가능한 합리적 설명 좀 들어보고 싶습니다. 남성권력을 휘두르는 걸 막는 거랑 그거랑 똑같은 짓꺼리 하는 게 진짜 도움이 된다고 생각할까요? 폭력에 대한 폭력은 개싸움이지 발전적 토론이 아닙니다.


미러링 어쩌고 하는 것도 우습기 짝이 없는 궤변에 불과합니다. 실상은 그저 방종한 욕구와 가학적 쾌락을 즐기는 데에 있어요. 성차별, 페미니즘, 남성우월, 여성혐오.. 자기들이 내세운 명분이라지만 그건 다 핑계에 불과합니다. 일베가 스스로 애국보수나 우파를 자칭하지만 실상은 방종한 집단에 불과하듯이요. 


미러링을 하려면 구체적인 대상을 가지고 그 논리를 그대로 사용해야 합니다. 있지도 않은 허수아비 만들어서 싸우거나, 자기들 가학적 쾌락을 위해 특정한 대상이나 논리 없이 남성을 혐오한 뒤 미러링이라고 변명하는 게 아니라요. 미러링은 구체적이고 특정한 대상과 논리를 가지고 하는 겁니다. 똑같은 주장과 논리에 단어 몇개 바꾸면 그대로 자기 자신에 대한 비판이 될 수 있도록 하여 그 논리적 허술함과 주장의 멍청함을 조롱하는 비판법이죠. 자세한 건 아래의 글로.


2016/05/20 - [취미/이야기] - 조롱적 비판. 올바른 미러링 방법.


앞서 말했듯 메갈은 성평등이니 그런 게 아닙니다. 자기들이 내세울 수 있는 성평등, 페미니즘, 여성혐오에 대한 대항, 남성우월에 대한 반발은 그저 변명거리에 불과합니다. 그들이 정말 그런 것들을 위해 움직인다면 여성의 권익과 권리를 위해 투쟁해야지 남성에 대한 혐오와 폭력을 휘둘러선 안 됩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건 일베가 자신들의 방종한 태도를 정당화하기 위해 애국보수나 우파와 같은 자유를 보장 받을 수 있는 요소들을 이용한 것과 같습니다. 메갈도 마찬가지로 사회적으로 용인될 수 있고 보장 받을 수 있을만한 명분과 정당성을 찾았을 뿐이고 그게 성평등이나 페미니즘과 같은 요소들일 뿐이죠. 하지만 그들이 주장하는 건? 남성에 대한 거세죠.


솔까 여성들이 진짜 성평등을 위할 줄 안다면 메갈 같이 해선 안 됩니다. 오히려 지금 같은 상황이 더 적기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그 동안 남성권력에 의해 억눌려졌던 여성이라면 이 반발 때 중심을 잡아야 합니다.


A 스프링과 B 스프링이 있다고 해봅시다. 이 때 B 스프링에 의해 A 스프링이 눌려왔다면 그 힘만큼 그 반발심도 더 강할 수 밖에 없겠죠. 그렇다면 A 스프링이 반발할 때 반대로 B 스프링도 똑같이, 혹은 더욱 압축될 겁니다. 지금의 상황도 마찬가지죠. 그 동안 여성이 억눌려왔다면 그 압력이 줄어들 거나 반발할 수 있을 때 더 크고 강한 반발력이 발생할 겁니다. 지금처럼요.


하지만 사람은 스프링이 아니죠.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기 때문에 지금 상태에서 적절한 균형점을 찾고 거기서 멈출 수 있다면 훨씬 성평등의 이상에 가까워질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지금과 같은 상태에서 개개인이 이런 생각을 가지며 성평등에 가까워지고 사태가 잦아들며 잘못된 생각을 고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안 듭니다. 하지만 언젠간 그럴 수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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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리뷰는 작품에 대한 내용누설이 있습니다. 


최근 카카오 페이지에서 본 몇몇 소설 중에 꽤 재미있다고 생각되는 작품들이 몇 있는데, 그 중 황제와 여기사, 시그리드, 마성의 황자와 나. 라는 3작품이 눈에 띄더군요. 재미도 재미지만 무엇보다 페미니즘적으로도 훌륭한 작품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요 몇 주 전 메갈과 관련된 이슈가 폭발하듯이 점화된 적이 있는데, 그 사건 이후로 알게된 작품이라 그런지 다른 의미로 더 재밌게 느껴지더군요.


사실 아직 다 본 것도 아니고 초반부에 불과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에서 얻을 수 있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시그리드


앞서 언급한 3작품 중 가장 적게 본 것이긴 합니다만, 어찌됐든 이 작품은 기사의 표본과도 같은 모습으로 살아왔다 누명을 쓰고 고문 당한 채 모든 것을 잃고 사형 당한 어느 여기사의 이야기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5년 전으로 돌아와 다시 한번 인생을 살 수 있는 기회가 생겼고, 그 기회에 따라 이번엔 다르게 살아보자고 마음 먹고 실천하는 게 내용이죠.


왜 이 작품을 다른 세 작품과 함께 뽑았냐면, 작품의 주인공이 되는 여성이 자신을 규율하는 사회적, 직업적 가치에 무비판적이고 절대적으로 순종하며 살았던 캐릭터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한번의 죽음 이후엔 그것이 설령 작품 내의, 시대적 상황 내의 젠더역할로서 나뉜 여성적 행동을 하게 되었다곤 해도, 분명한 것은 수동적이고 기계적으로 살아왔던 부품이, 주체적이고 인간적으로 교감을 하며 선택하고 책임지는 인간으로 변화함에 있다는 거죠.


기사의 표본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기사로서의 행동에 집작하고 스스로를 규율했던 것을 시대적, 성역할적 금제나 사회적 요구라고 생각한다면, 그러한 규율에서 어느 정도 타협하거나, 스스로 벗어나려고 했던 것이라 해석할 수도 있죠. 사실 이 작품은 페미니즘이나 성평등적이라기 보단 자유주의적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고 봅니다. 아직 끝까지 본 게 아니라 뭔가 더 생각해볼 모양새가 나올 수 있을 진 모르겠습니다만..


- 추가 설명.


최근 외전 조금 남겨놓은 채 완결까지 다 보고나서 내용을 추가합니다. 먼저, 시그리드라는 캐릭터와 연관되는 여러 인물들의 긍정적 변화와 미래의 변화는 매우 긍정적인 효과를 낳았습니다. 특히 본편 마지막회는 이런 종류의 회귀물에 있어서 굉장히 훌륭한 결말 묘사라고 생각하는 데, 대부분의 회귀물이 그 이유를 맥거핀으로 두거나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것에 반해, 시그리드의 회귀에 대한 묘사와 설명은 굉장히 극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외전에서 묘사되듯이, 원래 시그리드가 황제의 개로서 아무 생각도 없이 그저 황제에 대한 충심과 의심 없이 따르기만 하는 글자 그대로 도구적인 인간으로 살며 온갖 악행과 학살을 자행하는 쓰레기 같은 최악의 인물이었고, 그에 비해 방탕하긴 하지만 그래도 인간으로서의 개념은 있었던 베라무드의 충돌을 대비하며 본편과 외전의 인물상을 굉장히 부정적인 상황 하에서 그려내었죠.


로웬그린, 마리쉐즈 등 시그리드에 대한 평가 또한 볼만한 부분이었고요. 그만큼 시그리드라는 인물이 생각하고 판단하는 인간이 아닌 글자 그대로 도구적으로 움직이고 명령 받은 대로만 움직이는 개와 같은 존재로서 기능하는 데, 그러다 베라무드를 구해서 돌아온 뒤 최악의 사태를 맞이하죠. 시그리드가 빈민가에서 학살의 책임자로 일을 저지를 때 베라무드가 진짜 죽이려고까지 했던 것처럼요.


그 결과 시그리드는 쓸모가 다 한 뒤 누명을 쓰고(사실 누명건과는 별개로 그만한 악행을 한 건 맞지만.) 고문 받다 오러 코어를 뽑힌 채 처형 당했습니다. 베라무드는 그런 시그를 보고 이런 걸 원한 건 아니었다고 하지만.. 결국 본편 마지막화에서 아르카나와 베라무드는 서로 만나게 됩니다. 과거로 돌아가는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서죠. 모두가 후회하고 고통스러웠던 과거를 고치고 원하는 결말을 새로 쓰기 위해서요.


아르카나와 베라무드가 대화하면서 서로의 부탁을 약속합니다. 시그리드의 오러 코어를 들고 둘, 혹은 시그리드의 오러 코어이기 때문에 셋 중 하나가 과거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말하면서요. 그렇게 시그리드의 오러 코어를 매개로 마법을 사용합니다. 그리고 시그리드가 눈을 뜨죠.


이 부분이 정말 훌륭한 묘사였는데, 어째서 시그리드가 과거로 돌아오게 되었는가 하는 인과를 훌륭하게 설명하는 동시에 시그리드라는 인물이, 크나큰 배신을 겪고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준 것이기도 하며, 이는 그 자체로 두번째 기회를 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그리드 본인이 했던 악행에 대해 충분히 죄책감을 느낄 수도 있고, 자신의 선택을 바꿀 수도 있으며, 새로운 인간관계를 맺을 수도 있고, 충성의 대상을 고를 수도 있으며, 앞으로 발생할 죄악들을 막을 수도 있죠. 이 두번째 기회라는 게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기도 하는 것이, 어떤 죄인이라도 두번째 기회를 받을 자격이 있다는 이야기들처럼 시리에게도 이런 기회가 찾아왔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기회를 통해 새로운 인물로 거듭나게 된 거고 모두에게 최고의 선택이 될 수 있었던 운명의 장난이었던 셈이죠. 아르카나도 세리아의 죽음을 겪지 않고 미쳐서 황제의 개가 되어 빈민을 죽이거나 하는 악행에 가담하지도 않게 되었고, 베라무드도 시그리드와 다투거나 싸우지 않고 사랑하며 자신의 가치를 다시 깨닫고 둘째라며 자괴감을 느끼거나 하지 않으며 자신이 스스로 선택해서 사랑을 거머쥘 수 있었으며, 모리스는 형과의 갈등을 해결하고 알케르토 또한 사랑을 얻게 되었죠.


빈민들을 죽지 않아도 됐으며, 세리오스는 무사히 자신의 아내와 자식을 구할 수 있었고 서부와의 관계 또한 다시 원활해졌으며, 아웬 또한 위험해지거나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로웬그린과 마리쉐즈도 좋은 친구, 남편을 얻게 되었고요.


가장 큰 혜택은 시그리드 본인이 받았습니다. 인간적인 인물이 되었고 죽기 전 겪었던 죄악을 반복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그걸 막았으며 사랑하고 사랑 받을 수 있는 주체적인 인간으로 성장했으니까요. 다른 누구도 아닌 시그리드의 회귀가 모두에게 가장 좋은 결과를 안겨준 셈이고 모두를 성장시킨 핵심적 인물이 된 거고요.


다시 말하지만 이런 결말로 이끈 시그리드의 악행과 황제의 개로서의 활동, 그리고 그 결과 과거로 돌아가는 마법을 시리의 오러 코어를 통해 사용한 베라무드와 아르카나, 그리고 다시 돌아온 시리에 의한 모든 변화라는 짜임새는 굉장히 훌륭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마성의 황자와 나


참고로, 시그리드와 마성의 황자와 나는 같은 작가가 쓴 작품입니다. 그래서인지 인물의 묘사가 언듯 비슷한 면이 있죠. 비슷한 주제이기도 하고요. 개인적으로 작품 자체로도 상당히 재미있고 매력적이라고 봅니다. 특히 표지의 캐릭터는 너무 매력터지다보니 더더욱..


뭐 아무튼, 이 작품의 주인공인 레사는 자신의 직업적인 문제로 인해 성별을 숨긴채 일을 하는 여성입니다. 암살자가 직업이었죠. 작품의 시점에선 이미 때려치긴 했었지만.. 어찌됐든, 레사는 자신의 성별이 곧 비밀이자 컴플렉스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 구애 받지 않으려 합니다. 어떻게 보면 신경을 안 쓴다는 느낌도 들지만요. 여성이지만 남성이 할만한 일들을 하고 그런 것에 주눅들지도, 크게 열등감을 느끼지도 않습니다.


주인공인 레사는 여성이지만 남성으로서의 직업적 역할을 수행함에 있어서 별 문제나 무리가 없이 수행합니다. 어떤 면에선 다른 남자들보다 더 훌륭한 일처리를 해내죠. 남자로 성별을 숨겨야 한다는 이유이기도 하나, 남자들처럼 입고, 남자들처럼 행동하며(마초적인 건 아닙니다. 단지 특별히 여성적이지 않을 뿐..) 심지어 작품 내에선 (여성에겐) 형벌로서 여겨지는 짧은 머리까지 하고 다니죠. 이는 성역할의 구분은 없다라는 것을 드러내는 요소들이기도 하며, 실제로 레사가 그런 류의 험한 일을 해내는 것도 묘사되곤 하죠.


물론 이런 류의 남장여자 장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긴 합니다만.. 많은 남장여자 장르는 대개 약간 BL느낌이 들 정도로 예쁘장한 남장여자에게 남자가 호기심이나 호감 따위를 느끼고 성정체성을 고민하며 남장여자는 남자연기를 하지만 여성 본연의 약함을 드러내며 남자 주인공에게 다른 감정을 자극하는 모습도 꽤 자주 묘사한다는 걸 생각해보면 이런 식의 남성적인 남장여자의 작품이 적은 건 아니다만 그래도 꼽을 만한 요소라고 봅니다.


에.. 사실 그닥 성평등적인 작품이라기보단 어쩌다 그런 모양새가 살짝 나온 것이라는 게 합리적인 평가일 겁니다. 근데 재밌으니까... 쩝.




황제와 여기사


제목에 꼽히기도 한 작품이죠. 이게 가장 적절하고 최고인 작품인데, 주인공인 폴리아나는 아버지와 재혼한 새엄마, 그리고 배다른 여동생에 가정권력에서 밀려나 죽으라고 보내진 전장에서 살아남고, 왕과 동료 기사, 병사들과 같은 남자들에게 동료로서, 기사로서 인정 받으며 왕과 함께 대륙을 정복하는 것을 이야기로 합니다.


어째서 이 작품이 가장 페미니즘적으로도, 성평등주의적으로도 훌륭한 작품이나면, 작품 내에서 여자 기사라는 건 실제로 없는 것과 다름 없는 존재라는 겁니다. 원래 여자가 군에 간다면 어떻게든 후방으로 빠지게 하지만, 폴리아나의 부모는 그녀를 전쟁터에 내보냈죠. 죽으라고요. 그래야 자신의 새 딸에게 상속권이 넘어가고 귀족 작위가 유지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폴리아나는 죽어라 고생하며 남자들 틈에서 살아남았고 훗날 부모와 조국을 배신하고 자신을 인정해줄 수 있는 왕에게 충성합니다.


자 그럼, 여자로서 군대에서 '살아남는다'. 어째서 살아남느냐는 표현을 썻느냐면, 배경이 되는 시대가 중세 정도나 되는 시대이기 때문에 그런 시대에선 으레 있을 법한 여자는 열등하거나 할 일이 따로 있다는 성역할론과 은연적 무시 따위가 너무나 자연스럽게 나와야 하고 실제로 그랬기 때문입니다. 여자로서 군에 입대하자마자 주변의 무시와 조소, 조롱, 차별 따위를 겪어야 했고, 남들보다 약한 몸으로 살아남기 위해 더 독해져야만 했습니다.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특히 정신적으로.


여자이기 때문에 군대에서 고립되었고, 어떻게 어렵게 얻어낸 소대장 직위도 폴리아나의 '합리적 판단'을 상관에게 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여자라는 점을 공격하고, 경험이나 더 쌓으라며 면박을 주고 어렵게 얻어낸 소대장 직위를 바로 박탈시켜버리죠. 그 결과 대패를 겪으며 폴리아나도 죽을 경험을 했고요.


그러나 운이 좋았던 폴리아나는 그 곳에서 자신의 의지로 강간당하고 죽을 뻔한 상황에서 알몸이 된 채로 뼈가 부러지고 피를 쏟아내면서도 남자 3명과 죽어라 싸우며 절대 지지 않으려고 했고, 그 결과 새로운 왕에게 충성하고 새로운 이름과 인생을 살아갈 기회를 얻죠.


물론 왕이 인정했다고 폴리아나가 다른 기사들에게도 인정을 받았느냐 하면 그건 아닙니다. 새로운 이름을 받고 새로운 군에 몸을 담았음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기사는, 심지어 자신보다 어리고 직위도 낮은 애송이에게 대놓고 무시 받기까지 했죠. 단지 여자이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러나 폴리아나는 지지 않았고, 자신을 대놓고 무시하는 기사도 못 되는 꼬맹이인 도나우의 부랄짝을 걷어차며 자신이 해야할 일을 하죠. 여자이기 때문에, 혹은 여자로서와 같은 태도를 가지지 않고, 어디까지나 인간대 인간으로, 상관을 무시하는 하급자를 교육시켜주는 묘사입니다.


그 이후 강을 건너 싸워야할 때도 기지를 발휘하며 강을 건널 수 있을만한 곳을 찾았고, 그 곳에선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갑옷과 옷을 훌렁훌렁(물론 알몸까진 아닙니다.) 벗으며 자신이 해야할 일을 수행하죠. 위험한 일이었지만 말입니다. 그런 모습을 보고 그 동안 개무시해대고 기사만 되면 결투를 신청한다느니 하다 불알이 까여댄 도나우도 생각을 점점 고쳐먹죠. 이때까지만 해도 싸가지 없는 애송이였습니다.


전투 직전엔 다른 기사들과 통성명을 하고, 전투 이후의 승리엔 폴리아나도 여자이긴 하지만, 그래도 받아들여질 수 있는 기사이자 동료가 되었습니다. 그녀도 꽤 뿌듯해하죠. 나중엔 아이노를 제외한 모두에게 동료로 서스럼없이 받아들여지며 거의 벽 없이 지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여자'인 폴리아나가 '남성'의 행동이나 모습 따위를 '모사'하는 등 억지로 따라하는 게 아니라, 그런 성별 따윈 상관 없는 '객관적인 태도'. 즉, 기사로서만 행동한다는 점입니다. 이런 부분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것은, 자신이 머리를 빡빡 깍고, 손 마디는 굵으며 몸에 남자만큼은 아니지만 열심히 붙은 근육과 상처와 흉터, 착색된 피부를 가진 여성스럽다곤 절대 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어나서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여자가 아니었던 적은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고 하는 부분입니다.


여성이라는 성별을 가지고 태어나 남자 밖에 없는 군대에서 남자로서의 성역할을 수행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남성이라는 성별에 열등감을 가지지 않고 여자로서의 자신을 인식하되, 성역할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으며 그저, 단지 기사라는 '직업'으로서의 행동으로 자신을 규율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 자신은 여성이니 남성이니 하는 것에 얽매이거나 집착하지 않고 그저 한명의 인간으로서 기사라는 역할에 충실히 수행한다는 겁니다. 


이러한 모습은 폴리아나를 여성이나 남성이라는 성별로서 규정짓고 구분 짓지 않게 했으며, 모든 기사들과 병사들이 그녀를 전우애와 동질감을 가지는 '같은 기사'로서 대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역시 여자인 건 맞죠. 그녀도 여자인지라, 레비 경과 바우팔로 경이 혼담을 나눌 때 다른 사람에 대한 가쉽으로 왕과 수다를 떠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고, 주변 동료가 (진심어린 걱정으로서) 생리나 임신, 결혼 따위를 걱정해주고 조언해주는 모습은 그녀가 스스로 여자로서의 모습을 나타내지는 않지만 모두가 폴리아나를 '여자로서 인식'하긴 한다는 점을 묘사해줍니다.


이는 폴리아나를 (성역할적으로서의) 여성로서 보진 않지만 분명하게 (생리적으로) 여자로서 보고 인식하긴 한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이게 중요한 것이, 단지 그녀를 여자로서 보지 않고, 쟤는 생긴 것도, 하는 것도 남자니까 여자라는 인식이 없다. 같은 것이 아니라, 여성적이라고 할 순 없지만 어찌됐든 여자이긴 해도, 믿고 지낼 수 있는 같은 기자이자 동료라고 인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객관적으로 여자라는 성별로 인식을 한다 뿐이지, 거의 제 3의 성으로 대하고 느낀다는 건 또 별개죠..)


역시 이는 주변 남자들조차 폴리아나의 여자라는 성별을 (이제는) 차별하거나 무시하지 않고, 동등한 인격체이자 동료로서 받아들인다는 의미가 됩니다. 매우 성평등적인 모습들이죠.


여자로서 모질게 살아왔고, 차별 받고 무시 당하고 조롱 받으며 고생하고 고통 받다 자신을 인정해주고 이해해주며 의지할 수 있고 의지해줄 수 있는 동료들을 만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성별을 싫어하거나 혐오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며, 남자라는 성별에 열등감을 가지고 어줍잖게 따라하려고 들지 않는 직업적으로 객관적인 태도를 가진 폴리아나의 삶의 태도는 매우 페미니즘적이고 그녀를 대하는 이들의 모습은 극히 성평등적이죠.


이런 면에서 볼 때마다 이는 재미있는 작품으로서도, 페미니즘적으로도, 성평등적으로도 훌륭하고 재밌는 작품이라고 평가하게 된 겁니다. 그래서 가장 길고 자세하게 서술한 거고요.


현재 메갈이니 워마드니 미러링이니 남혐이니 똥을 싸고 있는데, 차라리 성평등이나 페미니즘을 위해선 이런 작품을 보고 부당함이 됐든 이성적 사색과 고찰이든 무언가 느끼는고 얻어내는 게 훨씬 나을 겁니다.


- 추가 설명


작품의 마지막은 굉장히 멋있었다고 할만 합니다. 황제의 기사로서 살다 죽고 싶어했던 폴리아나였고, 3명의 황비와 관계를 주고 받으며, 꼬이고 풀리는 인과는 결코 나쁘지 않았습니다. 여자이지만 여자로서 살 수 없었던 폴리아나였지만, 그 나이에서 황비와의 소통을 통해 여자로서의 생각, 즐거움을 (미욱하나마) 새롭게 깨닫게 되는 부분도 흥미로웠고, 남부의 황비가 아이만 남기고 죽은 부분도 폴리아나가 성장할 수 있었던 계기 중 하나였습니다.


무엇보다 멋있었던 부분은, 토리 황비가 술에 독이 있다는 걸 밝히는 부분이었는 데, 같은 여자이지만 남자에게 순종하며 가장 여자다웠던 토리가 그 불문율을 친우이자 다른 황비를 위해 깨부수고 전면에서 그들 북부 귀족들을 고발하는 부분이었습니다. 토리 또한 폴의 모습을 보고 성장했던 것이고, 폴을 보고 배운 것이었죠. 그러나 토리는 폴과 달랐고, 근위병에게 명령을 내렸으나,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죠. 이런 상황에 당황한 것도 있지만, 토리라는 전통적 여성이 내리는 (성권력적으로) 건방진 명령이었기 때문이라 봅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 뭘 보고만 있냐고 일갈하며 황비마마의 명을 받들라고 하자 모두가 지체 없는 움직임으로 죄다 제압해버리고 말죠. 같은 여성이지만 다른 차이가 드러나는 부분이었으며, 정말 멋있던 명장면이라고 봅니다. 황비의 명령, 황비의 명령을 받드는 폴리아나의 명령이라는 대비적 연계로 매우 훌륭한 연출이었습니다. 이 사건 이후 둘 다 황비의 자리에서 내려오게 되죠.


폴리아나는 이 이후에도 여전히 자신의 의무에 충실하지만 황제의 연심은 계속 깊어만 갑니다. 그러다 폴리아나가 프라우라는 꽃뱀에게 엮이게 되죠. 폴리아나는 그럭저럭 처음으로 여성으로서의 즐거움에 눈을 뜨고 진심으로 결혼할 생각까지 했지만, 결국 프라우가 숨겨놨던 자식을 보고, 그런 자식을 보고 널 꼭 귀족으로 만들어 주겠다는 건방진 소리를 하는 걸 보게 됩니다. 이는 황제의 명령에 따라 정보부, 도나우와 하우 형제가 조사하고 말한 이야기를 듣고 룩소스가 폴을 데려가 그 꼴을 보여줬던 거죠.


이에 대해서 어떻게 평가하며 길게 말하진 않겠지만, 그 결과 여성으로서의 즐거움마저 배신을 당한 폴리아나였습니다. 결국 결혼 따위 하지 않겠다고 마음 먹게 되죠.  그러나 황제의 생각은 다른 데, 이때부터 이야기할 게 나옵니다. 아 물론 이때 사고치고 황제의 자식을 배게 되지만..


황제는 노력가입니다. 폴리아나는 살면서 죽어라 노력했고, 정말로 죽기 직전까지 간 적도 있을 정도로 노력했던 인물입니다. 인생 자체가 여성으로서의 한계와 싸운 삶이고, 그런 싸움을 통해 노력하며 생존했던 노력가이죠. 즉, 폴리아나는 여자라는 한계 속에서 생존을 위해 투쟁하고 노력하며 살아왔던 인물입니다. 황제 또한 노력가이지만, 투쟁이란 삶의 무게에 있어 황제의 노력과 폴리아나의 노력은 그 무게가 다릅니다.


노력가를 좋아하고 본인 또한 노력하길 좋아했던 황제이기 때문에 이젠 자신이 폴리아나만큼의 노력을 해야 했다는 겁니다. 폴이 죽을 만큼 노력했듯이, 본인 또한 폴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죽어라 노력했어야 했죠. 이에 대해 사고치고 생긴 아이가 가장 큰 변수였습니다.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아이가 생겼다는 걸 안 폴은 자신의 영지로 들어가 1년에 가까운 휴가를 보냅니다. 그 와중에 출산을 하죠. 그리고 황제가 대륙 순방을 하다 폴의 영지에 들러서 결국 자신의 아이를 확인하게 되는데, 이때 룩소스의 입장과 폴리아나의 입장이 아주 크게 갈립니다. 이때 룩소스는 결국 폴이 자신과 결혼해야 할 거라는 사실에 크게 들뜬 상태나 마찬가지였죠. 그래서 폴리아나의 생각과 입장을 고려하지 못하고, 그 상황에서 청혼을 해버리고 맙니다.


하지만 폴리아나에게 있어서 결혼은 가장 큰 행복과 가치가 아니었고, 자신은 평생 폐하의 기사인데 어찌 그런 말을 할 수 있냐고 배신감마저 느낍니다. 스스로가 생각하듯, 전쟁 때 나온 온갖 욕이 그저 욕이 아닌 사실이 되어버린다는 것과, 자신이 그런 잡스러운 여자가 되어버렸다는 점, 또한 더 이상 폐하의 기사일 수 없게 만들어버린 룩소스에게 배신을 당한 것과 같은 거죠.


스스로 노력하고 선택한 삶이었고, 자신의 군주에게 하사 받은 천금보다 귀한 성씨였는데, 이걸 믿었던, 그리고 충성을 다 받쳤던 그 본인에게 빼앗기고 부정당한 겁니다. 폴리아나의 인생은 아무 의미가 없었던 것이 되어버린 거였죠. 그대로 결혼하게 되면 자신이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긴 윈터라는 성을 포기해야 했고, 기사로서 살았던 삶과, 기사로서 살아야할 삶 모두 사라져버리고 무가치한 것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폴은 배신을 당한 것이고, 슬프고 괴롭고 고통스러워 울었던 거죠.


결국 결혼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 고민이 오갔고, 결국 폴리아나는 선택하고 맙니다. 이 부분이 정말 멋진 최후반부의 명장면이죠. 폴리아나는 자신의 정체성이자 인생인 기사의 갑옷으로 무장하고 황궁으로 스스로 찾아갑니다. 그리고 선언하죠. 자신은 언제까지나 폐하의 기사일 것이라고. 이는 폴리아나의 스스로 선택한 운명이며, 온전한 자신의 의지입니다. 어떤 사회적 통념, 권력관계, 정치적 계산, 성권력 관계와 무관한 그런 선택이자 의지였죠. 나는 황제폐하 당신과 결혼하지 않고 기사로서 남을 것이라는 의지.


모두 놀라지만 황제는 이때 마음을 굳건히 먹고 폴의 의지와 선택을 존중하며 인정하고 돌려보냅니다. 그리고 본인의 굳은 결심을 모두에게 선언하듯 내뱉습니다. 이제 나는 폭군이 될 것이라고. 그러니 욕해도 되고, 심지어 아이노에겐 자신을 죽여도 된다고 하죠. 그렇게 무겁고 살벌한 분위기가 돌지만 아이노는 폴에게 빚이 있으니 (연애운..) 봐준다고 하고 충성을 바치겠다고 무릎 꿇고 다시 한번 선언하죠.


그 뒤 황궁은 상황이 달라지게 됩니다. 폴리아나는 몇년 뒤 자란 두 아이를 기르며 편안히 지냅니다. 여전히 그녀는 황제의 기사이고 윈터이죠. 그리고 도나우의 제안에 밖으로 놀러 나갑니다. 그리고 만나죠. 자신의 주군, 자신의 모든 것, 자신의 운명과 성을 내려준 황제를.


황제는 노력가입니다. 폴리아나도 노력가죠. 폴리아나는 생존이라는 기치로 노력을 했다면, 이번엔 황제의 노력은 그런 여자의 사랑을 쟁취하기 위한 노력이었습니다. 황제는 폴리아나의 준엄한 선언 이후 황궁과 제국의 모든 인텔리들을 모읍니다. 머리 좀 돌아간다 하면 기사라도 붙들어와 일을 시켰죠. 사촌형제도 마찬가지고 일을 시킬 수 있는 이들이라면 어떻게든 끌고와 일을 시켰습니다. 그게 바로 황제 본인이 말한 폭군이 되겠다는 말이었죠. 


그렇게 황제는 대륙의 법을 뜯어 고쳤습니다. 상속법 정도만 고치려고 했지만 해보니 이것저것 충돌하고 수정해야할 것이 많아져서 몇년 동안 미친듯이 일하고, 굴리며 대륙의 법을 뜯어고칩니다. 그에게 이런 노력은 폴리아나와 같은 투쟁이었습니다. 사랑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 결혼하지 않겠다 선언한 기사의 마음을 돌리기 위한 불가능한 노력.


그렇게 완성한 엄청난 두께의 법전을 내려놓으며 황제는 폴리아나에게 다시 한번 청혼합니다. 이번엔 다르게.


그리고 폴리아나는 그런 황제의 노력과 진심을 확인하고 외칩니다. 그 전쟁의 한 겨울에 벌거벗고 외쳤던 그 말. 누가 나에게 검을 다오! 이번엔 상황이 달랐습니다.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도나우, 하우, 비카 가문 등 자신이 알고 지냈던 모든 지인들이 달려와 자신의 검을 선택해달라고 하죠. 폴리아나를 중심으로 피어난 검의 꽃잎에 둘러 쌓인 폴리아나는 가장 처음, 그리고 가장 깊이 인연을 맺었던 도나우 경의 검을 선택하고 황제의 청혼을 승낙합니다. 그렇게 대륙의 역사를 또 한번 써야 했죠.


생각보다 훌륭한 결말이었습니다. 솔직히 폴리아나라는 인물에 대해 이해할 수록 룩소스와의 결혼은 맞지 않다고 생각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결말이라면 납득할 수 있을 정도로. 대륙의 첫 황제가 총애를 아끼지 않았던 여기사라는 특수한 존재, 그리고 그런 특수한 존재를 위해 대륙의 법을 전부 뜯어고칠 정도의 노력, 그런 노력의 결과 결혼에 성공.


원래 여성과의 결혼은 남성에게 결정권이 있고, 그게 다른 사람도 아닌 대륙의 황제라면 누군가의 사랑을 얻기 위해 노력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막말로 그냥 결혼하자고 명하면 그대로 따라야 했죠. 하지만 그런 황제가, 자신이 연모하는 여성을 위해 노력을 해야 했습니다. 이는 폴리아나를 여성으로 봄과 동시에 하나의 주체적 인간으로 봤다는 말이 됩니다. 작품 속 세계관의 사랑, 연애, 결혼관념과는 완벽히 다른 현대적이고 주체적인 사랑에 대한 노력과 결혼에 대한 관념이죠.


폴리아나는 여성입니다. 그리고 남성과 여성의 결혼에 있어서 더욱 적극적이지만, 그만큼 그의 의지에 끌려가는 것은 여성이죠. 아이노 경의 경우, 노력하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정치권력과 성권력을 바탕으로 시켈을 가져온 것에 가깝습니다. 그나마 잘 풀려서 그렇지, 아이노의 원래 계획은 그냥 시켈을 정치권력과 성권력으로 그냥 강제로 결혼해버리자는 개싸이코 같은(현대적 관점에서;;) 계획이었죠.


하지만 폴리아나와 룩소스의 관계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폴리아나는 여성이었지만, 어떠한 권력관계도 개입하지 않았고 정치적 계산 또한 들어있지 않았습니다. 단지 인간대 인간으로, 사랑하는 여자의 마음을 얻고자한 남성의 노력과 그 노력의 결과에 승낙한 여자이자 인간인 폴리아나가 있었죠. 즉, 동등한 관계로서 노력하고 쟁취해낸 결과였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결말마저도 페미니즘적으로 훌륭했고, 작품적으로도 훌륭했다는 평가를 주기 전혀 아깝지 않은 작품인 것이고요. 로맨스 소설로 추천해야 한다면, 전 주저 없이 이 작품을 가장 먼저 추천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뛰어나고 훌륭했던 작품이었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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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사건이 발단이긴 하지만 독자부심 부리면서 작가한테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고 품평도 하고 지 맘대로 욕도 하고 그러면서 자기잘못된 점이나 수준의 덜떨어짐은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갑'질하는 꼬라지 진짜 보기 싫었을 거에요.


물론 그걸 대놓고 드러낼 이유도 없고 그럴만한 사유도 없었겠죠. 이번 사건이 그 발단이 되었을 뿐.



진짜 웹툰들 보면서 댓글란 등에서 자기가 월급 주는 사장님인양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 이래라 저래라 등등.. ㅈ도 아닌 것들이 갑질 하는 꼬라지가 진짜 더럽고 역겹긴 했거든요.


독자도 독자로서의 선이 있고 작가도 작가로서의 선이 있는데, 그런 선에 대한 기준도 머리 속에 없고 오직 내가 봐주니까 니가 먹고 사는 거다. 라는 개사장 갑질하는 태도로 작가를 대하는 것들이 진짜 너무 많아요. 그러니 작가들이 독자들한테 감사하다 어쩐다 하지만 이면에는 진짜 ㅈ같은 새끼들이라는 염증도 달고 있었을 겁니다. 물론 감사하는 마음 자체가 거짓이고 위선은 아니겠지만요.


이번 메갈, 성우 관련해서 사실관계만 잘 파악했어도 그런 개소리들은 나왔을 리가 없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감정 섞인 조롱과 비난만 해댔으니 결국 서로의 아집에 따라 내가 옳고 너는 틀려로 귀결될 수 밖에 없죠. 그러니 진심어린 사과와 반성이 나올 수도 없고.

소비자와 판매자의 관계에 있어서 판매자가 을일 수는 있지만, 소비자가 절대 갑인 것도 아닙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지켜야할 선이 있어요. 흔히 갑질이라고 하는 게 왜 잘못되었는지 다들 알고 있을 겁니다. 심지어 작가들, 성우들에게 갑질 하던 놈들도 평소엔 대기업, 고위 공무원, 국회의원 등등 소위 고관대작 높으신 양반들 갑질 하는 거 욕 많이 했을 겁니다.

하지만 정작 자신들의 갑질에 대해선 한 없이 관대하고 그게 잘못되었다는 인식 자체가 없는 게 헬죠센 백성의 수준이라면 수준이겠네요. 그런 갑질해대는 독자들 보고 그런 갑질에 항상 노출되어 있는 작가들 입장에선 어떻겠습니까. 같은 창작, 표현을 하는 직종 종사자로서 (사실관계에 대한 파악은 잘 되어있지 않지만) 소비자들에게 마녀사냥 당하는 꼴 보면 감정이입하며 공감할 수 있겠죠.

물론 사실관계에 대한 인식 때문에 웹툰 작가들이 개헛소리 날리게 된 것도 사실이고 이건 웹툰 작가들에게 잘못이 있긴 하죠. 페미니즘이 아니라 혐오집단에 대한 문제였으니까. 심지어 그 메갈4가 봐준다는 소송 중 하나가 같은 웹툰 작가인 마인드C가 고소한 것도 있었죠.


웹툰 작가와 소비자, 예스컷은 완전 자충수 중의 자충수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피해만 주는 끔찍한 자폭이에요. 

진짜 멍청한 거죠. 이성과 합리성은 눈곱만큼도 없이 자폭질 자충수만 두는 꼴입니다. 그게 결국 자기네들에게 손해로 돌아올 수 밖에 없고 장기적으로 산업이라는 분야 자체에 큰 악영향을 끼칠 수 밖에 없는 상황인데 말이죠.

아무리 웹툰 작가들이 개헛소리 뻥뻥 날려주고 있다고 해서 예스컷은 진짜 아닙니다. 이건 진짜 너무 나아간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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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이 문제를 티셔츠 판매 수익이 메갈 쪽 소송 비용으로 사용된다는 것이지, 티셔츠 한 장이나 그것에 사용된 문구의 문제가 전혀 아니거든요.


근데 지금 메갈의 물타기 선동질은 그러한 본질이 아닌 겉으로 보이기 쉬운 '성우가 여성', '티셔츠 문구'로 국한하여 그것을 문제 삼고 있다는 거죠.


다른 단체, 다른 정상적인 페미 단체가 그 문구가 적힌 티셔츠를 판매하고 실질적으로 여성에게 도움이 되는 무언가에 투자를 한다고 하면 상관 없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 판매 수익이 메갈 쪽 소송비용에 사용된다는 겁니다. 이건 티셔츠 문구와 성별 문제와 완전히 무관해요.


메갈은 자기들끼리는 페미니 뭐니를 표방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혐오단체로 변질된지 오래이고, 그러한 상태에서 메갈 쪽을 후원하게 되면 당연히 비판이 생길 수 밖에 없습니다. 티셔츠에 뭐가 적혀있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에요. 혐오단체가 그 돈을 받는다는 게 중요한 거죠.



이걸 메갈 쪽에선 여성이라 짤렸다, 티셔츠 한 장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티셔츠의 문구 때문에 발생했다. 라고 물타기 하면서 선동하고 있는 거거든요. 굉장히 저열한 선동인데 이거에 다들 놀아나는 겁니다.



다른 쪽에서 나온 비유인데, 똑같은 신은 위대하다고 적힌 티셔츠라도 미국 이슬람 단체에서 만들어서 판매하여 그 수익을 불우이웃돕기나 노숙자 지원에 사용되고, 다른 한 쪽은 IS의 테러 지원금 및 식량구매에 사용된다면 어떻겠습니까?


당연히 전자에는 아무도 문제제기를 하지 않겠지만 후자는 분명하게 문제가 되죠. 왜냐? 그에 적힌 문구가 어찌됐든 그것이 실질적으로 혐오, 테러, 살인 등에 사용될 것이니까요. 문제의 본질이 바로 그겁니다. 어떤 문구인가가 아니라, 그 돈이 어디로 가느냐. 어떻게 쓰이느냐.


바로 이게 본질이에요. 


메갈은 아주 저열하게도 문제의 본질에서 한참 벗어난 표면적으로 보이는 문제인 성우가 여성인 점과 티셔츠의 문구가 페미니즘을 표방한다는 점을 들고 물타기 선동을 하고 있는 거죠. 여기서 놀아나는 꼬라지도 웃기지만, 무엇보다 그딴 짓을 하는 새끼들이 문제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그러니까 이딴 저열한 물타기 선동에 놀아나지 말고 문제의 본질을 제대로 좀 봅시다.



+그리고 이 사건과 완전 별개로 제가 생각하는 살짝 더 중요한 문제는 그 후원금이 어떻게 쓰이고 있느냐는 겁니다. 본인이 말한 목적에 따라 제대로 사용되고 있는지, 아니면 소위 '횡령'이라고 할 수 있게 지 멋대로 쓰이고 있는지. 그걸 알아야 한다고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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