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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며,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 - E.Kant
by Ko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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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제'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22.10.22
    체제의 주권자와 책임의 범위.
  2. 2022.09.23
    전근대 사회의 체면과 탐욕 문제. 2
  3. 2022.01.30
    체제 완결성과 다음 체제로의 이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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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가 현존하는 모든 정치체제 중에 가장 성숙한 체제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책임 요소 때문인데, 민주주의가 아닌 모든 체제는 주권을 소수만이 독점합니다. 군주정은 군주만, 과두정은 소수의 권력자들이, 금권정은 자본가들만이 독점하고, 귀족정 역시 귀족이라는 계층만이 주권을 독점하죠.

 

그러나 국가를 이루는 절대다수의 요소는 백성, 시민, 국민 등으로 지칭되는 개인들의 집합이죠.

 

따라서 국가의 중대사에 대한 결정권을 지닌 소수의 주권자들이 국가의 중요 향방을 가로지를 결정을 내릴 때, 가령 전쟁에 대한 결정을 내린다고 하였을 때 일반 백성들은 그 전쟁에 휘말릴 수 있지만 그 운명에 대한 어떤 결정권도 가질 수 없습니다.

 

가장 피해를 볼 계층이고 집단이지만 그들은 전쟁에 대한 어떠한 결정도, 자신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거대한 사건에 대한 어떠한 주장이나 반대 역시 펼 수 없죠.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국가 자체가 멸망하여 수많은, 거대한 비극을 양산한다 하여도 그것은 부당한 일일 뿐이지 그들에게 온당한 일은 아닙니다. 자기가 결정하지 않은 일에 휘말려 자기가 원하지 않은 싸움을 해야 했고, 그에 대한 근거 없는 책임을 짊어져야 하기 때문이죠.

 

 

그러나 민주주의는 주권이 국민에게 있는 바, 전쟁 등에 대한 사안에 결정권을 지닐 수 있습니다. 만약 그 결정에 의해 커다란 이익을 얻어도 그것은 국민의 공이며, 실패를 겪어도 국민의 실패이고, 국가 자체의 멸망이나 주권의 상실로 이어진다 하여도 그것은 국민의 잘못이고 책임입니다. 국민이 원했기 때문에 결정된 것이고, 국민의 오판에 의해 발생한 결과이니까요.

 

 

어른이 스스로의 행동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이고 그렇기 위해 자신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고려하여 함부로 행동하지 않는 책임감 있는 태도를 가지는 것이라면 민주주의 역시도 그러한 책임감이 필요합니다.

 

자신이 국가의 향방을 가를 수 있는 선택권을 지녔다면, 다시 말해 국가의 주권을 지닌 결정권자라면 누군가를 자신의 대표로 세울 때나 어떠한 법안, 어떠한 정책에 대해서도 책임감 있는 태도로 대해야 합니다. 이걸 우리는 민주적 소양, 혹은 공화적 소양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가 강한 이유는 그러한 주권자가 소수이지 않기 때문이고, 결정권을 소수가 독점하지 않았기 때문에 국가의 운명에 개개인이 책임을 져야하는 체제이기 때문입니다. 전쟁에 있어서 윗사람들이 멋대로 일으킨 사건에 민초가 휘말리고 그들의 이익과 안전에 희생 당하는 도구적 운명이 아닌 내가 만든, 그리고 내가 뽑은 대표들이 있고, 내가 주권을 가진 내 나라가 타국에 의해 유린당하거나 손해를 보거나, (내가 가진) 주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그것을 지켜야할 필요가 있으니 말입니다.

 

물론 이런 대단한 이유로 전쟁에 참여하는 이들은 많지 않을 겁니다. 단순히 교육과 사회적 분위기에 따라 형성된 가치관이 당연히 전쟁에 나가야 한다는 관념을 만들었을 것이고, 그 이유는 다양할 겁니다. 단순히 내 친구, 지인, 가족을 지키기 위해 한손 거든다는 것부터 시작해서 나라가 위태로울 때 이 한몸 바쳐야 한다는 등.. 단순히 적들이 개새끼고 개새끼들은 죽어야 하기 때문이라든가.

 

하지만 그러한 관념의 기저에 민주주의라는 체제에서 나고 자란 이들이 무의식의 기저에 깔린 가치관이 존재한다고 봅니다. 어떠한 이유나 사고, 사유를 해본 적이 없더라도 당연히 무엇을 해야 한다,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이 있는 것처럼요. 그리고 민주주의라는 체제는 그것을 의도적이든, 아니면 자연스럽게든 그러한 무언가를 만들고 국민들에게 심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민주주의가 가장 성숙한 체제인 동시에, 그러한 성숙한 의식을 필요로 하는 체제라고 생각하는데, 다르게 말하자면 그러한 성숙한 의식을 국민들이 가지지 않으면 진정한 민주주의에 근접할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민주주의를 여러 갈래로 구분할 때 실질적으로 민주성을 갖추었다기보단 단순히 법적으로, 절차적으로만 민주주의인 사회로도 구분되는 것일 겁니다.

 

실제로 법적으로는 민주주의지만 실질적으로 민주주의였던 적이 없었던 독재를 겪어보았고, 그 이후로도 제도적으로라도 민주주의적인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아주 오랜 시간을 필요로 했습니다. 우리의 90년대는 2010년대보다 덜 민주적이었죠. 우리가 실질적 민주주의냐, 절차적 민주주의냐를 논하는 것보단 단지 민주주의란 그런 것이라는 말일 뿐입니다.

 

 

그렇게 전쟁이나 주권의 상실, 멸망에 있어서 주권자의 결정이 중요하고 그 주권자가 책임을 지는 것이 온당하다면 독재나 과두정과 같은 민주주의가 아닌 국가의 경우 백성/시민/국민들에게 피해가 가는 것은 부당한 것에 가깝습니다. 반면 민주주의 사회의 경우 주권자인 그들의 실책이나 오판, 실패에 대한 책임을 온전히 국민들이 지는 것이 옳습니다. 원리적으로 그게 정당하죠.

 

그렇기에 민주주의에선 그나마 책임소재가 뚜렷하고 쉬운 편입니다. 국민이 무언가를 선택했고, 그게 실패했다면 그건 국민들 탓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어떻게든, 어떤 방식이든 책임을 지는 것이 당연한 것이죠.

 

 

그렇다면, 국민에게 주권이 없는 체제에서 국민들은 정말 아무런 책임이 없는 걸까요? 만약 민주주의 국가가 침략전쟁을 시작했다 패배했고 그들의 주권과 삶에 책임을 묻게 되었을 때 그 패배한 국가의 국민들이 최소한의 인권 침해를 제외하면 어떤 취급을 받아도 무방할까요? 그들이 선택했고, 이제 책임을 질 차례이니까?

 

반면, 독재와 같은 국민에게 주권이 없는 국가에선 국민(혹은 신민)에게 책임은 없을까요? 그들의 운명을 그들 스스로의 손으로 결정한 바가 없기 때문에? 그렇기에 주권을 독점한 자들이 어떤 취급을 받고 어떤 책임을 지게 되었든 그들이 지배하던 신민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도록 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요?

 

 

하지만 다른 관점에선, 그러한 독재, 과두정, 왕정이 유지되는 것에는 그들 신민의 역할도 있었습니다. 어찌됐든 그들에게 충성하거나 협조한 이들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고, 본심이 어찌됐든 그저 그저한 환경(체제)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당연히 그들에게 협조할 수 없었다는 것조차 책임으로 물어야할까요?

 

민주주의가 정치체제의 운명적인 결론이라고 생각하는 바가 아니지만 그들이 자신들의 운명을 선택할 권리를 추구하거나 열망하여 그러한 행동을 표출해오고 그것에 암묵적으로 동의하되, 실질적 힘이 없거나 기술적으로 통제되거나, 그저 두렵고 무서워 행동하지 않았다면 그들의 본심을 증명할 방법이 없다는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인정해주어야할 일일까요?

 

그럼 어떠한 이유로든,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권리가 없었던 신민들에게도 어떤 식으로든 책임을 묻는 게 정당할까요? 아니면 그들에겐 주권이 없었으니 민주주의의 실패자들에 비해 관대하고 온정적인 처분을 해야만할까요? 그들은 자신의 운명을 결정한 게 아니고 주권을 독점한 자들에 의해 도구로서 동원되었을 뿐이니까?

 

그렇다면 그들에 대한 처분 역시도 이전과 다를 바 없는 것 역시 정당하겠지요. 어차피 주권을 가진 적 없으니, 책임을 묻지 않겠지만 없던 주권을 그들에게 주지 않아도 무방하니까요. 물론 역사에서 필요에 의해서든 어떠한 이유에서든 그들에게 주권을 주는 경우가 있을 수는 있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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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전근대 사회에서 법보다 주먹이 가까운 까닭은 행정력과 치안이 기술을 기반으로 하여 구성원 개개인에게 빠르고 직접적으로 적용, 통제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장 발생한 범죄나 불만을 빠르고 정확하게 해결해줄 수 있느냐를 따졌을 때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며, 행정력의 수준이 낮을 수록 공정한 집행 역시 기대하기 어렵다. 이는 필연적으로 관료나 군인 개인의 부패 및 지역 유지와의 유착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1.

또한 전근대 사회는 대체로 적은 인구로 구성된 작은 공동체사회이곤 했다. 그리고 어떤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평생 얼굴보고 살 사이이기 때문에 웬만한 문제는 어떻게든 원만하게 합의하기 마련이고, 합의가 어려울 경우 공동체의 큰 어르신 역할을 하는 이, 요즘의 마을에서라면 이장 같은 위치에 있는 사람의 권위를 통해 합의를 이루어낸다.

 

문제는 이 작은 사회 속에서 누군가의 평판이 나빠진다면 이를 다시 원상복구 시키기 위해선 지대한 노력이 필요하고, 그럴 수 없는 문제를 발생시켰거나 지나치게 이미지가 망가질 경우는 복구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영화 더 헌트에서 주인공은 오해로 인해 누명을 썼고 결국엔 벗어났지만 모두에게 크나큰 낙인이 찍혀버렸고 어렸을 때부터 허물 없이 지냈던 친구들과도 알 수 없는 벽이 세워진 어색한 사이가 되어버리고 만다. 단순 오해로 인해 발생한 일조차도 이럴진데 뒤집을 수 없는 사건이라면 어떻겠는가.

 

2.

이러한 이유로 전근대 사회에서 법보다 주먹이 더 빠르게 문제를 해결하는 믿음직한 수단이 되었고, 작은 사회 내에서 입소문과 평판은 그 사람의 사회적 지위와 극단적으로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이러한 평판이 나빠져 집단 내에서 도태되거나 서열이 밑바닥으로 떨어져버리는 상황을 매우 경계할 수밖에 없다.

 

흔히 말하는 불가촉천민이 되어버리는 경우 개인이 할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다. 큰 희생이나 큰 도움을 주면서 자신의 지위를 어느 정도 복구해야만 하는데 결코 쉬운 일이 아니고 의도적으로 할 수 있는 일도 아닌 경우가 많을 것이다.

 

3.

문제는 전근대 사회에서 다른 지역으로 이주한다는 것은 그보다도 어려운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자신이 태어나고 살아온 지역사회는 자신의 조상대부터 살아왔던 인맥과 인연으로 이어져 있는 곳이고 살아오면서 만들어낸 인맥과 인간관계는 자기 혼자서 해결할 수 없는 일에 도움을 받거나 도와줄 수 있다.

 

정보를 제공하고 제공받을 수 있으며 개인 단위 노동력의 한계를 아웃사촌친구지인의 도움을 받아서 해결할 수 있다. 자기 집안 자식이 남의 집안 농작물을 서리했다 하더라도 나중에 아이고 형님, 형수님 하고 찾아와 다른 농작물을 선물해주거나 초대해서 밥을 한끼 해줄 수도 있다. 그리고 그럴 것을 서리 당한 집안도 안다. 그렇지 않을 경우 당한 쪽은 체면이 깍이고, 갚아주지 않은 집안은 평판이 깍인다.

 

조상 대대로 살아왔다는 역사성은 그들이 그 지역에서 앞으로도 계속 살아가야할 당위가 되고 밖으로 나가선 안 되는 금기가 된다.

 

이를 반대로 말하자면 지역사회를 떠난다는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고, 전쟁이나 재해, 재난, 집안 누군가가 관직을 얻어 이주하는 경우는 이유가 있고 정당한 사유가 될 것이다. 그러나 아닌 경우, 처음보는 모르는 동네의 누군가가 자신의 동네까지 와서 이주를 청하는 경우 대부분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무슨 사고치고 도망쳐왔나보군. 이런 사람을 받았을 때 어떤 문제를 일으킬지 알 수 없겠어.'

 

조상 대대로 살아온 이웃사촌들은 그러한 역사성으로 이어져있기 때문에 믿을 수 있다. 같은 지역에 태어나 같이 자라왔던 이들이기에 믿을 수 있다. 우리 공동체 내부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외지인은 그러한 역사적 연관이 없다. 그들의 뿌리를 알 수 없고 뭐하는 사람인지, 어쨰서 이곳에 왔는지 등등 많은 것을 알 수 없다. 대체로 사고치고 쫓겨났거나 도망쳐왔을 것이라는 의심은 어떤 면에선 합리적인 구석도 있다. 새로 적응하고 뿌리내리는 것도 쉽지 않다.

 

이러한 구조는 이주가 상대적으로 자유로워지는 도시, 공장으로 대표되는 근대에 접어들면서 해체되었다.

 

4.

지역 사회의 언터쳐블이 되지 않기 위해, 아니. 그저 자신의 평판이 나빠지고 체면이 상하는 것을 막기 위해 민감할 수밖에 없다. 특히 암묵적 인정받는 높은 지위와 권위를 가졌을 수록 그렇게 된다.

 

누군가 자신을 모욕하거나 무시한다면 설령 그것이 어느 정도 정당하다 하더라도 이를 옳고 그름의 문제와 도덕적인 문제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다. 가령, 내가 잘못한 것은 맞지만 저렇게 공개적으로 들고 나와 사람들 귀에 들어가게 만드는 것은 내 체면을 훼손시키는 일이고 내 평판을 떨어뜨리는 일이다. 따라서 더욱 강경하게 대응하고 실질적인 손해와 압박을 통해 굴복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행적 사회구조는 21세기에 접어들어도 전근대 사회에 가까운 사회일 수록 흔하고 보기 쉽다. 근본적으로 근대화, 혹은 현대화되지 못한 사회적 관계망 체계 및 지역사회의 형태, 무엇보다 개개인의 의식수준이 물질 문명의 발전속도와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한국 역시도 개발기엔 여전히 중세적, 왕조시대적, 전근대적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고, 촘촘하지 못한 행정력과 치안, 부패 문제는 법보다 주먹이 더 가까웠던 까닭이었다.

 

5.

현대에도 그러한 사회가 여전히 있고 전근대적일 수록 그러한 경우가 많다고 했는데, 몇가지 엄밀히 짚어야할만한 집단들이 있다.

 

하나는 독재국가이고, 다른 하나는 조폭집단이다.

 

독재국가에선 지도자나 당의 체면과 평판이 매우 중요하다. 이는 조폭집단에서 높은 위치에 있는 이들이 아랫사람에게 자신의 체면과 평판이 매우 민감한 가치가 되는 것과 완벽하게 동일하다. 조폭에서는 아무리 낮은 위치에 있다 하더라도 자신보다 낮은 말단이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건방지게 굴거나 대드는 것을 결코 허용하지 않는다.

 

반드시 보복과 처벌이 있기 마련이고 이러한 수직적 서열관계는 그것이 법과 제도상의 원칙이 아니라 폭력과 주먹에 의해 형성되는 관행과 경험적으로 구성되는 체계로 이루어진다.

 

독재자들이 자신에 대한 도전과 반항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 역시도 유사하다. 독재라는 권력독점을 끝 없이 유지하기 위해서 시민들의 반발과 정치/경제/특히 군 내의 반대세력을 무력화해야 하고 지속적으로 감시 및 통제해야 하는 것 역시 맞는 설명이지만 근본적으로 조폭세계와 다를 바 없는 전근대적 가치관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도전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누구라도 하나 용인하면 누구든 자신을 무시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북한은 그러한 가치관들이 혼재되어 있는 가장 대표적이고 적절한 사회라고 볼 수 있다. 독재자인 지도자의 체면과 평판은 무엇보다 중요하고, 실제 외교적, 군사적 성과와 발전보다 단순 지도자의 체면을 다른 것보다 더 우선하기 때문에 상식적으로 받아들일만한 제안이나 협상마저도 파토내고 독재자 개인의 가오를 살리는 쪽을 택한다. 조금이라도 굽히는 듯한 모습이나 동등한 모습을 연출하지 않고 파토내더라도 회담과 협상의 결정권에 자신이 주도권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6.

이는 한마디로 정의할 수 있는 형식이다.

 

나에 대한 도전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의 엘리트들은 어떠할까. 의사들은 자신의 지위와 특혜 언터처블한 접근을 요하고, 이는 검사나 판사 역시도 크게 다르지 않는다. 이에 대한 접근은 오직 더 강하고 위험한 특정 정치세력에게만 일부 허할 뿐이다. 그마저도 원래 그 집단의 구성원들이 정치세력의 구성원이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떠한 대가를 주고 받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자식이 서리한 농작물을 다른 것으로 갚아주는 것처럼.

 

여기에 권력, 특혜, 자본이라는 문제가 낄 경우에 현대사회의 문제가 된다.

 

전문직을 비롯한 엘리트들은 자신들의 권위와 이익에 민감하다. 그들은 똑똑하고 능력이 있기 때문에 남들보다 더 유리한 위치와 더 많은 수익을 얻어낸다. 기업가들은 특히 더 많은 자본을 얻어내며 그렇게 벌어들인 돈은 다른 법, 의료 등의 사회지도층 전문직에 비해 전문영역을 기반으로 하는 권력을 가지진 못하지만 자본주의 체제이기 때문에 어떤 면에선 그들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할 수도 있다.

 

문제는 그들이 자신의 이권을 단 하나도 내놓지 않으려한다는 사실 그 자체이다.

 

7.

엘리트 카르텔에 속하는 자들은 상식적이고 공정한 위치로 그들의 특혜를 재조정하는 것은 자신들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한번이라도 거기서 물러나 양보하게 된다면 그러한 일이 끝없이 반복되리라 믿는다.

 

첫 시도 자체를 도전으로 받아들인만큼 이는 공정과 불공정, 필요한 불필요, 정의와 부정의 문제와 같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이기고 지고의 문제가 된다. 그들은 자신이 노력과 성공을 통해 얻어온 것이고, 그러한 특혜와 권위, 언터처블한 지위를 얻기 위해 여기까지 온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그에 대한 외부자의 접근에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외부자들이 자신들의 이권, 다시 말해 밥그릇 문제로 귀결되는 그것을 건드리는 것은 체면의 문제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무언가 문제로 지적되는 요소가 '공정하게'. '정의롭게'. '상식적이게' 변화하는 것을 거부한다. 만약 그것이 성공하게 된다면 굴욕적인 패배로 인식하게 된다. 만약 그들에게 어떠한 문제가 바뀌기 위해선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요구할 것이다. 이는 불공정에서 올바름을 찾아가는 개혁이 아니라 자기 밥그릇을 보전해줄 거래로 여기는 것이다.

 

8.

이제 자본주의에 대해 특정해보자. 이러한 문제는 기업가에 대한 개혁, 자본시장에 대한 개혁 역시도 마찬가지다. 밥그릇에 대한 침해이자 권력자인 자신에 대한 도전으로 여기기 때문에 그러한 개혁과 공정한 변화를 거부하고 반발한다.

 

전근대적 체면 문제로 인해 개혁을 침해와 체면 문제로 받아들이고 거부한다. 모든 것은 결국 제어받지 않는 탐욕이 원인이다.

 

9.

공유지의 비극을 알 것이다. 본래 생태학, 환경과 관계된 것이지만 실제로는 경제학 쪽에서 더 자주 쓰이는 그것말이다.

 

모두가 사용할 수 있는 목초지가 있고 주변에 가축을 치는 이들이 있다면 자기 소유의 목초지 대신 공유지의 목초지에서 먹이는 것을 더 선호할 것이다. 그것이 자신의 손해를 줄이고 이익을 늘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목초지는 적당히 넓어서 모두가 일정량만 소모시킨다면 지속 가능하고 충분히 나누어 먹일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누군가 탐욕을 부려 이 목초지의 자원을 전부 소모시켜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다음부터는 먼저, 많이 먹이는 쪽이 무조건 이익이 된다. 이미 누군가 다 먹이게 된다면 그곳까지 가축을 끌고 오는 비용만 낭비될 뿐 얻는 건 전혀 없게 된다. 결국 이는 극소수를 제외하곤 모두에게 손해가 될 것이다. 특히, 사회적 신뢰가 파괴된다.

 

10.

자본은 순환되어야 한다. 기실, 모든 자원은 순환되는 것이 좋다. 자본주의에서 자본은 역시 순환되어야 한다. 물론 순환되기만 해야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의 발전과 함께 순환되어야 하고, 올바른 순환은 경제의 발전을 불러오기에 순환되는 것이 옳다.

 

공유지의 비극을 막기 위해 제안된 이론과 방법들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가장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심판의 존재이다. 공유지의 목초지를 누군가 독점하고 전부 소비하지 못하도록 심판이 그들을 규제하고 제한을 두는 것이다. 이것이 반드시 올바른 것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원론적으로는 효과적이고 필요하다.

 

그리고 자본주의 체제에서 그러한 역할은 정부가 담당한다.

 

기업과 노동자, 정부가 알아서 시장경제에 따라 균형을 맞춘다면 정말 좋은 일이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론적으로만 가능하고 누군가는 반드시 공유지를 소모시킨다. 편법, 불법, 관행과 부정, 로비와 엘리트 카르텔끼리의 관계망까지. 다종다양한 방식으로 원칙을 지키지 않고 가능한 것보다 더 많은 자원(이익)을 얻기 위해 움직이는 자들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남들보다 더 많은 이익과 성공을 추구하는데 제한되지 않는다면 법과 원칙, 정의를 지키려하지 않을 것이고 남들보다 더 교활하고 부정한 방식으로 이익의 극대화를 추구할 것이다.

 

문제는 정부와 정당이 그들의 방식에 호응하는 것이다. 법을 어겨도 얻어낸 것보다 훨씬 적은 푼돈으로 죄값을 치루거나, 이익에 비해 너무 약한 처벌이 가해지는 경우도 있으며, 아예 법적인 마사지를 통해 빠져나가게 해주거나 꼬리자르기 등으로 넘어가는 경우도 있다.

 

심지어 법이나 제도를 바꾸어 재벌대기업에게 유리한 환경을 조성해주기도 한다.

 

돈은 돌아야 하는데 물가는 오르고 임금이 오르지 않는다. 단기적으로는 기업은 지출이 줄고 수익이 늘어나기 때문에 경제적인 이익을 얻게 될 것이고, 기본적으로 이익을 늘리기 위한 단순하고도 논리적인 방식이다.

 

그러나 이것이 장기적으로, 그리고 전방위적으로 발생할 경우, 무엇보다 노동자의 임금상승을 제한하는 식으로 이루어진다면 노동자들은 적게 벌고 반드시 나가야할 돈은 많기 때문에 지출을 최대한 줄일 것이다. 그리고 이는 기업의 이익을 줄이게 되는 일이 될 것이다.

 

물론 이 또한 어디까지나 이론적인 이야기일 뿐이고 실제로 기업은 그래도 돈을 벌 것이다. 그러나 점차 사회의 성장동력은 줄어들고, 다양한 분야에서 부작용이 발생할 것이다. 한탕주의, 저출산, 사기나 횡령 등의 경제사범이 늘어나기도 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시민, 노동자들은 부를 쌓기 어려워지고 재벌대기업은 막대한 부를 쌓게 될 것이다. 이를 관리해야할 정부가 이 흐름과 순환을 건전한 방식으로 조성하지 않으면 자본의 동맥경화가 발생하게 될 것이다. 기업가를 비롯한 엘리트들은 이를 더 나은 발전이나 장기적 지속 가능성으로 보지 않고 체면과 자존심이 걸린 도전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한번 자신의 이권을 양보하면 두번이 될 것이고, 세번이 될 것이며, 끝없이 양보하고 내줘야할 것으로 여길 것이다. 그렇게 자본가는 정치권력에 예속된 존재가 될 것으로 예측할 수도 있다. 

 

11.

그들은 결코 자신의 탐욕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욕심을 가지는 게 무엇이 문제냐고 할 것이다. 욕심은 발전의 자양분이 되고 충분히 추구할 수 있는 것이다. 욕망은 욕망되어야 하고 그것이 법을 어기거나 비도덕적이지 않는 한 잘못된 게 아니다.

 

그러나 탐욕과 욕심이 죄악으로 여겨지는 이유는 그것이 무한하기 때문이며 절제될 수 없는 속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충분히 먹고 살 수 있으면서도 더 큰 이익을 얻고자 했던 파홈은 더 많은 땅을 얻기 위해 탐욕을 부리다 악마의 의도대로 죽게 되었다. 그가 중간에 절제했다면 더 넓고 훨씬 좋은 땅을 얻은 채 오랫동안 잘 먹고 잘 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종래에 그가 얻은 땅은 그가 누울 3아르신 뿐이었다.

 

파홈의 이야기는 톨스토이의 기독교적 교훈이 담긴 이야기일 뿐이지 현실세계의 당위나 운명으로 작동하지는 않는다. 부정한 사회일수록, 부정한 정치권력이 지배하는 사회일수록 파홈의 사례는 줄어든다. 정부가 부정하고 악한 이들에게 적절한 처벌과 규제를 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제는 그 자체로 공유지이다. 자원이 순환되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유한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에는 한계가 있고, 자원 역시 한계가 있다. 이것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자원은 한계가 존재하기에 순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본의 동맥경화가 찾아오면 자본주의는 지속 가능성에 한계가 찾아온다. 누군가 자원의 절대다수를 독점하고 분배하지 않는다면 모두가 고사할 것이다. 단지 가진 사람이 더 늦을 뿐이다. 그마저도 아무런 폭력도, 외부세계로의 도피가 없다는 전제 하의 이야기일 뿐이다. 대체로 그러한 한계 상황에서는 혁명, 쿠데타, 정부전복, 심지어 외침 등 다양한 방식의 폭력이 체제에 끝장을 내기 마련이다.

 

공유지의 지속 가능성을 유지하기 위해선 공정한 심판의 존재가 필수적이다.

 

정부는 자본주의 체제를 지속 가능하게 만들기 위해서 필요한 조치를 취해야만 한다.

 

엘리트들은 그러한 요구를 받아들이는 걸 체면이 깍이는 문제, 혹은 이권에 대한 도전으로 여겨선 안 된다. 이것은 그러한 문제를 초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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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집단이 기능하며 그것이 유지된다는 것은 그것을 이루는 어떠한 체제가 있다는 것이다. 작은 동아리나 모임에도 규칙은 있고 그것으로 규정하지 않는 크고 작은 관습과 약속이 있기도 하다.

 

그러나 어떠한 체제이든 그것은 결코 완전할 수 없고 필연적인 지속불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것은 환경의 변화나 내부적인 규칙의 형해화, 권력의 독점화, 구성원간 상호 신뢰 붕괴 등 다양한 원인이 있을 것이다.

 

같은 환경 내에서도 여러 집단이 존재할 경우 상호관계를 맺으며 유사해지거나 문화적 동질성을 가질 수는 있다. 그러나 완전히 같은 경우는 매우 드물고 이는 각 집단의 체제가 각기 다른 형태를 한다는 것이다.

 

 

한 체제가 태생적인 한계에 도달하고 그것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그 집단은 무너진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 집단을 유지하고 보호, 팽창시키던 체제는 완결된다. 감상적으로 표현할 수도 있겠지만 이는 해당 체제의 태생적 한계가 찾아왔기 때문이지 소수의 이기적인 권력자나 무능한 왕, 운명의 장난 때문이 아니다. 그 때가 아니라면 그 집단의 역량과 체제의 견고함 덕분에 조금 더 뒤에 이루어질 일일 것이다.

 

로마 공화정은 그들 체제의 뛰어남 덕분에 다른 경쟁자들을 제치고 우위를 점하며 생존을 넘어 정복자의 지위를 얻어냈다. 그것이 잘 작동할 때에 그들은 강대했고 실패와 패배는 복기되어 보완되었다. 능력자는 마땅한 대우를 받았고 실력자는 인정받았다. 그들의 정치사회적 전통은 그들을 부강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것은 영구적일 수 없었고 로마 공화정의 위대한 정복이 승리할 때마다 값싼 노동력인 노예들은 흘러들어왔고 이제 원정을 갔다 오기에는 너무 넓어진 영토를 마주해야 했다. 로마의 시민들은 토지를 팔고 스스로 노예가 되더라도 먹고 살아야 했고 로마의 보호들은 그렇게 라티푼디움이라는 대농장을 만들어 더 많은 부를 획득했다.

 

일부는 이러한 체제변화에 위험성을 경고하며 개혁을 주장했고 시도했다. 그러나 숫한 시도들은 실패로 돌아갔고 그들은 자신의 부를 포기하길 거부했다. 결국 그들의 위협적인 경쟁자인 카이사르 또한 암살당한 뒤 로마 공화정 체제는 완결되었고 제정으로 향하게 되었다.

 

누군가는 로마 부호들이 이기적이라 공화정이 무너졌다 할 수 있다. 누군가는 로마 시민들이 그들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로마가 체제의 한계에 도달해갔고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수정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른 사례를 좀 더 간략히 알아보자.

 

신라는 골품제를 통해 소국이 점차 커지면서 경주 주변의 여러 소국들을 흡수하며 옛 지배층을 등급화하였다. 이는 소국의 흡수를 용이하게 하고 경주 출신 왕족인 성골과 구분지어 왕권을 보전했다. 이는 정복지의 흡수와 통치를 수월하게 했고 기존의 정복지 왕족, 귀족과 본래 경주 일대 소국의 왕권에 계층적 차등을 두어 왕권의 침해를 방지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였다.

 

이 역시 로마와 마찬가지로 확장을 하기 위한 그들 나름의 유용한 체제였을 것이다. 그러나 왕이 될 성골이 부족해지자 여왕이 등극하게 되었고, 그마저도 사라지자 진골이 신라의 왕가를 이루게 되는 등 필연적인 계급적 변화가 있었다.

 

골품제는 왕족과 귀족, 평민 출신의 명확한 구분으로 일반적인 경우 침해될 수 없는 강력한 벽을 형성했다. 아무리 뛰어난 이라도 한미한 출신이라면 6두품을 뚫을 수 없었고 진골은 결코 성골이 될 수 없었다. 로마와는 상당히 다르게 실력자와 능력자가 혈통적 신분과 출신에 강하게 메여 있었던 체제였다. 이러한 체제는 확장 이후 안정적 유지와 발전에 큰 걸림돌이 되었고, 이후 고려가 건국될 때 골품제는 사라지고 그 문제들이 수정된 새로운 체제로 변화하였다.

 

고려 또한 과거를 도입하면서 골품제로 억눌려진 기회와 능력을 펼칠 수 있게 열어 놓았고 이는 고려의 관료제로 이어졌다. 그 역량은 수 차례의 전쟁을 견딜 수 있는 근거로 작동하였으나 동시에 음서, 공음전 등 체제의 한계를 예비하는 제도 또한 존재했기에 국가 내부 자원을 분배하지 못하고 자본이 흐르지 않게 되는 등 극심한 정치, 사회, 경제적 문제를 야기했다. 이것을 해결하려 노력한 이들은 있었으나, 근본적인 체제적 수정은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이러한 문제들이 수정된 새로운 체제, 조선으로 변화하였다.

 

조선의 경우는 강대한 왕권과 뛰어난 대왕들에 의해 선정이 이루어지고 견고한 관료제와 강력한 중앙집권국가를 만들었으나 양란을 거치며 왕권이 무너지고 유교적 질서가 해이해지는 동시에 무너진 권위를 세우기 위한 반동으로 교조화가 이루어지며 허례허식이 늘어 내부적 유연성을 경직시켰다. 정조 대왕의 개혁과 실학의 등장은 조선이라는 체제의 역량을 보여주었으나 내부적 한계와 정치의 문란이 곂치며 해결되지 못했고, 거기에 제국주의 시기와 곂치며 외부적 압박을 이겨내지 못하고 체제가 완결되었다.

 

이는 잘잘못을 떠나 사실로써 당시 조선의 역량이 외부적 압박을 이겨낼 정도로 견고하며 유연하지 못했고, 그러한 역량을 배양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로마가 아니더라도 어떤 집단에서든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다. 환경과 내부 조건이 극히 안정적이라면 발전없이 정체되더라도 아주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다. 환경변화가 없어 외부적 리스크가 없고 내부적 밀도 변화가 적어 똑같은 삶의 형태를 반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지의 정글속 원시 부족들이 수천년 넘게 그러한 삶을 반복했던 것처럼. 그들에게도 나름의 체제는 있고 단지 한계에 도달하기까지 아주 오랜시간이 걸렸을 뿐이다.

 

이처럼 한 체제가 태생적 한계를 지녀 발전 끝에 한계를 넘기 못하고, 혹은 미리 체제를 수정하지 못한 채 끝나는 것을 나는 체제 완결성이라 한다. 이 체제 완결이 이루어지고 나면 그 체제에 의존했던 집단은 멸망하게 되고 수정, 보완된 다른 체제를 가지게 된다.

 

이것은 다른 국가가 될 수도 있고 부족이나 도시 규모의 소집단이 될 수도 있으며 다른 체제에 정복되어 흡수, 혹은 예속될 수도 있다. 체제의 변화는 반드시 더 발전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더 나은 체제를 가지게 된다. 여기서 주의해야할 점은, 유럽. 특히 영국처럼 나라는 그대로이나 왕조만 다른 이름으로 바뀌는 경우는 해당된다 하기 어려울 것이다.

 

 

체제의 완결은 여러 형태로 찾아온다. 그러나 그 원인을 내부에서 찾는다면 그 어떤 분석이 있든 근본적으로 체제의 한계에 도달했다고 생각한다. 로마에 라티푼디움이 등장한 것은 너무 넓어진 영토와 값싼 노동력의 유입이 시작이었고, 이는 로마 자체의 팽창을 요구하는 제도와 체제에서 기인한다.

 

고려에 음서는 비록 녹봉도, 실권도 없는 말직을 받았고 무능하면 고위 관직을 얻을 수 없었으나, 능력과 실력에 무관하여 혈통에 의해 관직을 얻을 수 있어 과거 시험으로 관료가 된 이들에 비해 유리한 위치를 점할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이며, 공음전은 음서보다 심각하여 토지는 물론 수조권까지 세습하여 체제적으로 고려의 체제 완결에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한다.

 

때로는 외부적 요소에 의해 체제 완결이 발생하기도 한다. 소빙기가 찾아오며 흉년이 오고, 화산 폭발 등의 재앙에 의한 대기근이 발생하기도 한다. 지진에 의해 큰 피해를 보며 기독교적 세계관의 붕괴를 앞당기기도 하고 외세의 침략에 의해 멸망하기도 한다.

 

특별히 예외적인 사례가 아닌 이상 대부분 체제의 완결은 근본적으로 그들 체제의 한계에 근거한다. 심지어 외세의 침략이라고 해도 그러한 침략에 의해 멸망하는 것은 그 국가가 이미 병들고 쇠약해져 있을 때이며, 튼튼하고 강한 몸을 가진 이에게 병마가 쉽게 찾아오지 않고 싸움에서 쉽게 지지 않지만 나약하고 병든 몸에는 병마가 쉽게 찾아오고, 타인과의 싸움에서 육체적으로 불리한 조건을 가진다.

 

이처럼 나라가 부강할 때 외세의 침략이 발생한다면 피해는 입고 멸망을 앞당기는 치명상을 입을지언정, 멸망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나라가 쇠약해져 역량이 저하될 경우 외세의 침략에도 쉽게 무너져 멸망하게 된다. 외세의 침략은 온전히 외적이 강대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이 아니다.

 

 

그러나 모든 체제 완결 사례에 대해 아는 것은 아니나, 한가지 재밌는 점을 찾을 수 있었다.

 

로마 공화정이 제정으로 바뀌었고, 독일 제국이 바이마르 공화국이 되었다, 다시 나치 독일이 되었으며, 러시아 제국 이후 소련이 되었으나 스탈린에 의해 부하린, 트로츠키 등이 축출되고 사실상 일인독재가 되는 등의 체제 변화를 살펴본 결과, 더 많은 사람들이 권력을 가지고 있던 체제가 무너지고 다른 체제가 되었을 경우 대체로 소수가 권력을 독점하는 체제로 변화하였다는 것이다.

 

그 반대 또한 존재한다 말할 수 있다. 독일 제국이 멸망하고 바이마르 공화국이 되었으며, 조선이 멸망 후 식민지를 격고 대한민국이 되기도 하였으며, 대부분의 민주국가가 되었을 경우 왕정 국가가 멸망한 뒤 찾아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마찬가지로 소수가 권력을 독점하는 체제에서 똑같이 소수가 권력을 독점하는 체제로 변화하기도 하는 등 정치적 권력 소유자의 비율이 크게 변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반대로 다수가 정치적 권력을 가진 경우, 그러한 체제가 한계에 달해 완결되고 다음 체제로 이행될 경우 높은 확률로 소수가 권력을 독점하는 체제로 변화한다는 것이다.

 

이는 난세에서 힘 있는 유력자, 주로 가장 강한 힘을 가진 자가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실력을 행사한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10.26과 12.12는 혼란스러운 대한민국을 안정시키기 위한다는 명분을 대외적으로 노출했지만 언제나 있을 법한 난세의 실력자가 등장한 사건이다. 그들은 자신의 힘, 혹은 정치력으로 국가를 장악하여 권력을 독점했다.

 

카이사르가 의도했으나 옥타비아누스가 완성한 권력의 독점이다. 스탈린이 부하린과 트로츠키를 축출하며 완성한 권력의 독점이며, 김일성이 갑산파, 소련파 등을 숙청하고 완성한 일인독재처럼 말이다. 바이마르 공화국은 민주적인 법률을 가지고 있었으나, 당시에 없었던 방어적 민주주의 개념으로 스스로를 보호하지 못하는 체제적 한계를 가지고 있었고, 이 부분이 문제가 되어 히틀러와 나치당은 권력을 독점하게 되었다.

 

모든 권력은 대중의 지지가 없으면 성립될 수 없다. 단지 그 비율과 권력 획득 방식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독재라면 다소 낮은 지지를 보유한다 하여도 힘과 공포로 체제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에도 왕정국가는 존재하고, 어떤 독재국가라 하더라도, 심지어 축출되어 살해 당하는 순간까지도 그를 지지하는 사람이 아예 없는 일은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소수에 의한 권력 독점 또한 그것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성립될 수 있다. 때로 시민들은 스스로의 권리를 권력자에게 진상한다. 그렇게 민주주의에서도 독재는 발생할 수 있다.

 

이것을 막기 위해서라면 해당 국가에 적용된 민주주의 체제와 그것이 구체적으로 작동하는 제도들이 최대한 오랫동안 지속 가능하게 끊임없이 수정되어야 하며, 그러한 수정이 가능하게끔 내부적 역량과 유연성을 유지시켜야 한다.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 좋은 것은 뭐든 흡수해야 하는 것처럼 체제의 존립을 유지시키기 위해서 좋은 것은 흡수해야 하며 적용에 문제가 없을 지 살펴야 한다. 무조건 좋아 보인다고 기존 제도와 현실성, 충돌 여부를 생각치 않고 도입한다면 현실에 맞지 않아 문제가 생길 것이고 그렇다고 구태의연한다면 발전은 있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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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관련된 내용은 다소 이해하기 쉽도록 서사적이기 때문에 전문적이고 정확한 내용을 담는 것은 아닙니다. 가령 신라의 멸망 같은 경우 골품제는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이유에서 제한적인 영향력만을 발휘했을 뿐이고 음서제의 경우 글에서도 언급했듯이 음서만으로 고위직을 꿰차거나 녹봉을 받는 건 아닙니다. 실제 능력이 있는 자들은 과거와 음서를 모두 했었습니다. 음서만으로 관직을 가지는 사람의 대우는 그다지 좋지 못했습니다.

 

로마의 경우 체제가 완결됐다고 하기보단 변화되었다고 하는 쪽에 더 가깝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변화의 폭이 커지더라도 말입니다.

 

조선 후기에 성리학은 교조화되었지만 생각만큼 대단히 교조적이게 되진 않았으며, 실학의 등장 등 꽤 유연한 편이었습니다. 오히려, 성리학이 조선에 악영향을 미친 것은 지나치게 실용적이고 실천적인 면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는데, 당장 쓸데없는 짓이면 무조건 다 필요 없다 취급하기 때문에 (중근세적인 시대적 사상의 한계를 감안하더라도) 성리학 외 다른 학문이 성장할 환경이 조성되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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