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hrodinger

블로그 이미지
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며,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 - E.Kant
by Konn
  • Total hit
  • Today hit
  • Yesterday hit

'중세'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8.02.12
    김형준 작가, 일곱 번째 기사 리뷰.
  2. 2014.08.22
    중, 근대 병기와 전술에 대한 짤막한 이해
  3. 2013.08.14
    로마가 위대한 이유 2
반응형


※ 본 리뷰는 작품에 대한 내용누설이 있습니다. 

김형준 작가의 일곱 번째 기사라는 소설과 알바트로스, 백룡공작 팬드래건 등 다른 여러 근대, 중세적 배경의 작품에 대해서 쓴 작품을 보면서 느낀 것은, 이 작가는 확실히 중세라는 배경에 대해, 그리고 근대라는 배경에 대해 역사 공부만큼은 다른 양판소 작가들이나 어중이 떠중이들에 비하면 확실히 탄탄한 편이구나 하는 점입니다.


저도 나름 한때 역덕후를 자칭했고, 지금도 남들보다 역사에 대한 지식이나 상식은 더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편인데, 그런 지식을 갖춘 제가 보기에도 상당히 설득력 있고 개연성 있는 전개를 이끌어나가죠.


더욱이 김형준 작가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그래도 판타지 소설이라고 느끼는 부분은 마법이나 다른 판타지적 요소가 아니라 한 인간 개인이 역사에 거대한 족적을 남기며 세계를 바꾸고 변혁시키는 하나의 신화적 행보입니다.



월광의 알바트로스에서 특히 강하게 드러나는 바이지만, 본 리뷰에서 대상하는 일곱 번째 기사에서는 한지운이라는 20대 예비군이 차원이동 후 겪는 일, 행보, 안배는 확실히 신화적인 면이 있죠. 


또, 개인적으로 다른 중고딩 수준에서 지식이 더 늘어나지 않고서 판타지니 중세적 배경이니 써갈기고 이세계로 이동한 주인공이 깽판을 치는, 한마디로 이고깽질이나 하는 잡스럽고 꼴사나운 전개가 아니라, 어느 정도 현실적인 면모를 가지고 작품을 시작했다는 점이 특기할만한 점인데, 현대인은 천재가 아니고 현대인이 중세, 고대로 간다고 해서 그 시대의 최고급 지성이 될 수는 없습니다.


뭐 이에 대해서 이야기할 것은 진짜 엄청나게 많지만, 현대인이 공교육을 통해 배우고 얻어낸 지식은 가공된 지식이고, 까놓고 말해서 그 자체로는 어디 써먹을 곳 없는 비실용적 지식입니다. 중고딩 애들이 중세로 간다고 해봐야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컴퓨터와 스마트폰을 잘 다루고 수능 공부 열심히 해봐야 금속을 주조하는 법도 모르고 가죽을 다루는 법도, 칼을 다루거나 말을 타거나 활을 쏘거나 짐승을 해체, 발골하거나 그걸 제대로 조리해내거나 하는 법 아무 것도 모르고, 그 이상으로 그 당시의 시대적 질서를 인식하거나 인지한 경우는 더더욱 없죠.


하지만 일곱 번째 기사에서 작가는 이러한 현실적 불가능성에 대해 나름 고심한 것이 보이고, 그 시대적 배경에서 나타나는 질서를 이용해 잘 이빨을 까면서 살아 남습니다. 


현대인이 가지는 현대적 지식은 중세와 같은 시기엔 그리 잘 사용할 수 없는 비실용적이라는 면 때문에 주인공인 한지운, 한 데 지운은 그러한 기술, 실용적 지식을 이용해 살아남는 게 아니라, 그 시기에도 먹힐 수 있는 비실용적 지식인 문화를 이용해 살아남고 명성을 얻게 되죠.


바로 시라는 요소인데, 중세에 시 따위로 허세부리려는 놈들이 적지 않기도 했고, 그러한 문학, 시라는 요소가 나름 고평가 받기도 한다는 건 사실이죠. 칼밥먹던 놈들이 이제 칼질 안 하려니 그런 노는 문화가 발달하게 되고 그 중 하나가 시인데, 고상하다는 귀족들이, 또는 귀족화되는 기사들이 그런 거에 뻑가던 점에서 착안하여 근대, 현대에 가까워져서야 등장하는 명시를 모아놓은 시집으로 명성을 얻습니다.


또한 초반부의 이웃 영지와의 결투는 정치적인 관계도 얽혀있지만, 그에 못지 않게 중세의 명예라는 가치를 나름 잘 표현해냈기도 하고요. 또한 영지를 발전시키는 영지물적 전개와 전투씬, 행정에 대한 전개는 상당히 출중하기도 하고요. 그만큼 중세라는 시기에 대한 역사적 지식과 통찰이 없다면 제대로 묘사할 수 없는 것들이 많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작가가 중세라는 배경에 대한 이해가 높은 편입니다. 이 부분은 일곱 번째 기사보다는 백룡공작 팬드래건에서 더더욱 드러나는 점이죠.


작가가 작품의 개연성을 위해 열심히 고민했고 잘 설명해냈다라고 여겨지는 부분은 문화와 언어라는 점인데, 작품의 근간이 되는 요소인 차원이동이라는 점을 이용해 어째서 언어가 비슷하고 문화나 종교가 비슷할 수 있느냐를 아주 잘 설명해냅니다.


지구도 시대에 따라 같은 영어라도 다른 언어 수준으로 차이가 나고 이는 전세계 모든 언어가 다 그런데, 차원이 다른 세계의 언어와 문화가 비슷하다는 건 말이 되지 않죠. 그러나 이는 기존에 왔던 이세계의 기사들이라는 설정으로 개연성을 맞추고 작품적 근간의 요소와 흥미로운 설정으로 만들어 사용합니다. 상당히 짜임새 있는 면면이죠.



이고깽 작품에서 나타나는 가장 큰 문제점은 이고깽이라는 용어에서 나타나듯 이세계로 이동한 고딩이 깽판을 치면서 노는 꼬라지 그 자체인데, 흔히 일본산 이고깽에서 자주 찾아볼 수 있는 쓸만한 지식은 하나도 없는 잡놈이 이세계 간다고 해서 뭐 잘나갈 이유가 있겠냐 싶은 바로 그런 점입니다.


까놓고 말해서, 논리와, 특히 합리라는 건 근대에 와서나 발명되는 겁니다. 그 이전 시대에 합리성이 없었다는 건 아니지만, 그러한 합리는 그 시대의 이치에 기준된 것입니다. 가령 중세의 합리란 중세의 신학, 종교관 그 자체에 기반되어 있었죠. 현대적 합리와는 전혀 다릅니다.


논리라는 것도, 제대로 교육 받지 못한 인간은 근대가 됐든 현대가 됐든 논리적 사고가 잘 안 됩니다. 논리라는 것도 인간 본연의 본능 같은 지성이 아니라, 그러한 논리적 사고를 훈련시켜부는 교육을 통해 만들어지는 능력이고 성장할 수 있는 겁니다. 근데 중세인들, 그것도 어느 정도 교육 받은 귀족이나 기사도 아닌 일반 평민이나 일개 용병 수준에서 그러한 논리와 합리성을 가진다는 거 자체가 역사에 대해 굉장히 무지한 서술이거든요.


그런 면에서 귀족과 평민의 차이를 어느 정도 잘 묘사해내고 있고 그러한 논리력과 합리성을 로젤리아가 갖춘 것은 수도의 아카데미에서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건 올바른 설정입니다. 


마찬가지로 한지운이 이세계로 와서 쉽게 인정 받을 수도 없고 믿음을 받을 수도 없으며 중점적인 역할을 하며 무언가를(주로 발전을) 진두지휘하며, 흔히 말하는 남의 나와바리 접수해먹고 주변 사람들이 무조건 믿고 따르는 식의 쌈마이식 전개와는 다르게 조심스럽고 계획적이며 나름대로 설득력 있는 주장을 통해 귀족이라 인정을 받고, 특히 로렌스와의 대담과 로젤리아와의 대담에서 나타난 정치, 종교에 대한 식견과 에드가 앨런 포의 명시에 대한 사기극 덕분에 뛰어난 인재라 인정 받게 되고 이러한 점은 수도와 왕국 전체로 퍼지게 되죠.


더불어 그 본인이 무언가를 진두지휘하는 건 나중에, 제한적으로 나오고 그 이전까진 헬포드, 로딕과 같은 이에게 굴려지며 훈련 받는 것은 그러한 인정 받고 그 집단에 녹아들 수 있는 요소로서 기능하기도 하며, 이후 발생하는 자기 생각과 계획되로 되지 않는 위기인 이웃 영지인 엥겔만 자작가와의 결투 같은 요소 등 이고깽 치고는 굉장히 겸손하고 계획적이며 개연성 있는 전개를 발생시키는 요소로서 크게 인정해야할 부분입니다.



웨이크필드 영지에서의 기사시합, 포를란의 성을 받는 점, 볼튼과의 인연, 루시엘과의 만남 등 작품 전체적으로 큰 줄기를 이루는 요소들이 등장한 챕터에서는 작품의 짜임새가 처음부터 잘 짜여져 있다는 평가를 줄 수 있고, 압실리언과의 영지전은 초반 전투씬과 프레드릭 영지와 그 기사들이 빠르게 명성을 얻고 정치적, 종교적 정당성을 얻으며 발전할 수 있는 요소가 된다는 점에서도 그렇고요. 특히 제대로된 전투씬이라는 점에서도 굉장히 특기할만한데 어줍잖게 머리속으로 헛발질 해대며 있어 보이는 전투씬을 그리고자 하는 양판소 작가들과는 다르게 중세라는, 역사라는 것을 공부한 이 답게 전쟁이나 전술에 대한 이해도가 얼핏 엿보이는데, 흔해 빠진 신박한 기책이니 개멍청한 적군이니 하는 클리셰에만 의존하는 게 아니라, 그러한 기책이나 멍청한 적군이라는 점에 대해서 정당한 개연성을 부여하고, 무엇보다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병사들의 훈련도와 뛰어난 지휘관의 요소를 분명하게 드러낸다는 점에서 정직하다고도 할 수 있을 정도고요.


이후에도 수도로 가서 생활하고 교수 역할을 하는 것도 상당히 재미가 있고 흥미로운 면면들이 많은데, 중세의 봉건적 질서와 교육방식, 정치에 대한 묘사가 꽤 뛰어나다는 점입니다. 특히 기억이 남는 막스 베버를 따오며 강의하는 부분은 독자가 보기에도 살당히 훌륭했으며 소설과 무관하게 그러한 개념과 철학에 대해서도 굉장히 잘 설명했다고 평가 할 수 있다고 보고요. 이 부분만큼은 소설과는 별개로 다른 이들이 철학을 공부하기에 자극이 될 수 있는 적절한 겉핥기로 써먹어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더군요.


더불어 이 강의 부분은 작가가 한지운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자신의 지적 욕구를 발산하고 시대를 바꾸고자 하는 욕망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역덕후라는 한번쯤 해봤을 더 나은 세상으로의 if와 마찬가지로, 작가는 한지운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일곱 번째 기사라는 소설 속 배경을 대상으로 그러한 활동을 하는 것이지요.


중세에서 근대로, 근대에서 현대로 이어지는 역사적 발전상 속에서 발생하는 수 많은 불의와 사건, 인류를 비탄과 절망으로 이끌고 피를 통해 발전해야했던 것을 더 나은 사상과 가치관으로서 교정할 수 있는 기회란 흔치 않았고, 작가는 한지운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그러한 것을 소설에서 실현시키는 것입니다.


강의를 시작하기 전에, 그리고 그보다 더 이전에 압실리언에서, 지스카드와의 대담에서처럼 자신이 이 세계에 와서 어떻게 해야할지, 무엇을 해야할지 충분히 고민하고 마음을 먹은 것처럼, 자신이 살아온 역사와는 다른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그가 그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할 수 있는가를 고찰하며 나온 것이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의 개념을 가져와 설명한 것입니다.


한 포를란 데 지운의 말처럼, 자신의 이상을 강요할 수 없으며, 아무 책임을 질 수 없는 행위를 할 수 없고, 반대로 자신이 영향을 준 것에 대해선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하죠. 자신에 의해 발생할 수 있는 혼란을 막아야 한다는 목적으로요. 그렇기 때문에 그 강의에서 한 포를란 데 지운은 학생들에게 막스 베버와 문학이라는 개념을 끌어와 자신들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개념을 설명하고, 갈림길과 표지판이라는 요소로 그것을 구체화시켜주죠. 그들로 하여금 더 정의롭고 더 현명한 미래를 만들라는 의도로 말입니다.


이는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요소이고, 한지운이라는 개인이 이세계로 건너와 하는 가장 중점적이고 그 세계에서의 인생을 바쳐가며 이루는 가장 훌륭한 행동이기도 합니다. 지운의 안배가 있었기 때문에 훗날 알바스토스 시대까지 큰 문제 없이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체제가 변화할 수 있었고, 사실 그 이상으로 알바트로스 시대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결과를 낳죠. 뭐, 그 이전에 맥시밀리언과 만나는 게 어느 의미론 더 컸다면 컸다고 할 수 있는 거지만..



하여간, 그렇기 때문에 한 포를란 지스카드 데 지운은 정치적, 종교적인 이유와 더불어 사랑하는 여인과 제대로 만나지도 못하고 수 년간 떨어져 지내고, 대부분의 소중한 동료들과도 떨어져 지내며 동방으로 떠나게 됩니다. 그곳에서 발생할, 현실에서의 십자군 전쟁에서 발생할 수 있는 온갖 불의와 절망, 죽음과 광기를 막기 위해서 말입니다. 십자군이 근 200년간 이루어진 지리하고 깊은 갈등을 만들어내는 사건이었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한지운의 행보와 목표는 위대하다고 해도 될 법합니다.


수도와 베넨시아 등에서 겪고 갈고 닦은 정치능력(사실 이 부분이 가장 이고깽스럽다고 봅니다만 작품적으로 용납 가능하죠.)과 전투 능력을 통해 동방에서 나름 세력을 만들고 그보다 더 거대한 역할을 해내게 됩니다. 마야 유스란은 뭐 알폰소랑 이어지니 뭐 별로 중요한 거 아니고, 진짜 중요한 선 제르 유스란이라는 인물인데, 그는 정말 시대의 거인이라는 말이 맞지 않을까 싶은 인물 중 하나죠. 정치적 식견도, 개인의 인격도, 군사 전문가, 지휘관으로서도 훌륭한 인물입니다. 서대륙인들도 제르 유스란은 어려워할 정도로요.


뭐 그런 인물이 어디에든 있는 거야 이상한 건 아니고요. 다만 진짜 중요한 점은 그러한 인물이 훗날 제롬을 데리고 여행을 떠나게 되는 한지운과의 대담을 통해 새로운 체제를 구상하고 구축하게 만들었다는 점입니다. 정확히는 구상은 지운이 하고 구축을 제르가 하게 되죠. 정말 아쉬운 점은 그것도 그렇지만 훗날 대부분의 역사적 영향력을 미치게 되는 체제와 시대를 만드는 거국적 구상을 한지운이 했는데, 그게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너무 심한 저평가를 받는다는 점입니다. 뭐, 배아픈 점이지만 현실적이라면 현실적이죠. 너무 비현실적으로 신화적이니까요.



이외에도 특기할만한 캐릭터가 있다면 역시 볼튼 백작인데, 어느 정도 의도적인 악역의 역할을 맡게 했다는 점에서 작위적이면이 약간 느껴지지만서도, 작품의 맥락상에서 발생할 수 있다는 개연성을 잘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그러한 평가를 일견 무색케하는 면이 있는 캐릭터입니다.


캐릭터 자체는 귀족으로서의 선민사상과 엘리트주의를 가진, 중세적 초고급 엘리트적인 면모를 가진 인물인데, 이는 한지운과 대비되는 캐릭터성이기도 하죠. 굉장한 정치적 능력을 지닌 인물이기 때문에 진짜 적이 되기 전까진 서로 웃으면서 자기 집에서 머물게 하기도 하고(사실 이건 루시엘의 충고와 본인의 판단 때문이긴 합니다만.), 아예 그 제르 유스란마저도 인정하는 거물이기도 하죠.


하지만 그가 너무 찌질하게 되어버렸는데, 솔직히 저는 그런 게일 볼튼이 좀 불쌍하다는 생각마저도 듭니다. 루시엘과의 계약을 통해 가문에 머무르게 했고 그러한 루시엘을 사랑했던 역대 볼튼과 마찬가지로, 게일 볼튼 또한 루시엘을 사랑하게 됩니다. 물론 이루어질 수 없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내주고 싶지 않고, 그런 여자가 다른 남자를 좋아하고 관심을 보이는 듯한 것을 보는 건 그 자체로 고통스럽죠.


자신은 해줄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주고, 해줄 수 있지만 당연히 그것을 원하지 않는 루시엘이고 마음조차 없으며 함부로 그럴 수도 없다곤 해도 볼튼은 루시엘을 그만큼 사랑하고 마음 속 깊은 곳에 소중한 것으로 두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운에게 관심을 보이는 루시엘을 보면서 가슴 아프고 그만큼 커다란 질투를 가질 수 밖에 없게 된 것이죠.


그런 이유로 볼튼은 괴물이 되어 버렸고, 어떻게든 공격하고 끌어내리고 박살내고자 했으나 그러한 모든 시도는 결국 실패하게 되었으며, 아예 동방에 건너가며 망가질대로 망가지게 되면서도 끝까지 지운에게 집착하며 그를 죽이고 파멸시키려고 하죠. 뛰어난 통찰과 무서운 흉계를 꾸몄으나, 결국 죽은 것은 지운이 아닌 알폰소. 이 부분이 가장 슬픈 장면인데, 굳이 비교하자면 은하영웅전설에서 키르히가 죽었을 때와 같은 상실감이 느껴지게 되죠.


물론 캐릭터의 성격은 정반대이고 키르히가 독자들에게 다가오는 중요성과 자리감과는 완전히 또 다르지만, 상실감과 슬픔이 주는 크기는 대충 맞먹지 않나 싶습니다. 초반부터 지운과 함께하며 거의 형제와 같은 수준으로 교분을 나누던 뛰어난 환상기사이자 분위기 메이커가 그렇게 희생하여 죽었다는 것, 프레드릭 영지에서 시작했으며 함께 했던 초기 멤버의 죽음이라는 점은 정말이지..


그 탓에 지운과 헬포드. 특히 지운의 상실감과 절망은 거대했고, 그만큼 웨인 프레드릭의 상실감 또한 결고 작지 않았죠. 그가 죽기 전의 상황과 대사들 또한 인상 깊습니다. 마야 유스란과 사랑에 빠져버리게 되자 자신의 목숨을 지운에게 줘야 하니 팔 하나 정도는 줄 수 있다고 하는 부분은 일곱 번째 기사라는 작품에서 등장하는 명장면 중 하나죠. 다른 말 뿐인 남자들과는 다르게 진심으로 자신에게 희생해줄 수 있으며, 비록 목숨을 내놓겠다곤 하지 않지만 그만큼 자신 또한 인정하고 사랑했던 남자인 한지운에게 바칠 수 있다고 하는 기사다운 전우애와 의로움은 그녀에게도 결코 마음 상하지 않고 오히려 그를 진정한 기사로서, 진심으로 인정할 수 있는 명대사가 아니었을지.


체스테인 J. 알폰소. 그는 타고난 기사였으나 기사로 살기보단 시인이고자 했던 인물로, 수준 낮은 시를 만들어내긴 했으나 시에 대한 열정만큼은 분명하게 진심이었던 이로, 아카데미에서도 그 때문에 비웃음을 당했지만 결코 실망하지 않고 절망하지 않은 채 시에 대한 열정 하나만은 우직하게 지켜나갔던 기사였죠.


그 때문에 지운이 귀찮고 고생하게 되었지만 그만큼 밝고 진심 어린 태도는 꾸며낼 수 없는 것인즉 지운 또한 그와 깊게 교분을 나눴던 것이고요. 어떻게 보면 어린아이 같지만 그만큼 시와 삶에 대해 순수했던 기사였던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죽어가면서 나는 훌륭한 기사였는가. 나는 훌륭한 시인이었는가. 나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하고 물어보는 장면은 그토록 슬프고 시릴 수 없었던 것입니다.


기사로서는 최고였지만, 그것은 단순한 검술의 재능이었고,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니었으며, 시인으로서는 낙제점을 받아왔던 이로 노력해도 성과를 보기 어려웠지만 그는 순수했습니다. 단순한 검술이 아닌 기사로서 그는 부러지지 않는 검이었고, 시에 대한 순수함으로서 그는 영원한 소년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지운은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물어보자 내가 본 최고의 기사, 그 누구보다 아름답고 순수한 노랫말을 지은 최고의 시인, 생애 최고의 친구, 영원한 우정, 나의 형제라고 답해주죠.


그의 마지막 유언은 이겁니다. '언젠가 꼭 지운경과 함께 달에 가고 싶었는데. 나 혼자 가게...' 그의 순수함을 문장으로 녹여냈다고 평가합니다.


알폰소의 죽음 이후 지운은 거의 제정신이 아닌 상태까지 무너지게 되고, 그의 유골은 함과 함께 고향인 프레드릭 영지로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웨인 프레드릭은 친히 함을 들고 눈물을 흘리며 거리를 걸었으며, 그 거리는 그의 이름을 따 알폰소 거리가 되었죠. 이 부분도 정말 감동적인 부분입니다. 기사 중의 기사인 웨인의 측근에 대한 사랑을 엿볼 수 있고, 그만큼 많은 우정과 신뢰를 나누었다는 것이니까..


훗날 돌아온 지운은 그의 묘비에서 가슴 먹먹함을 누르고 최고의 시인으로서 명문을 쓰고자 했으나, 쓸 수 있었던 건 나의 친구 나의 형제 체스테인 알폰소. 이곳에 머물다. 한 문장 뿐이었죠. 하지만 그것이 진정 지운이 가진 그에 대한 모든 것을 담은 진정한, 한지운으로서 그에게 바칠 수 있는 진심이었던 것입니다. 



에.. 좀 글이 무거워졌는데, 사실 위에서 썼어야 했는데 어쩌다보니 쓸 기회가 없어져서 문맥 중간에 추가하기에 어색해져서 그냥 이 뒤에 쓰는 거긴 합니다만, 이 작품에서 칭찬 받아야할 부분이 좀 더 있습니다. 짜임새야 좀 더 정리해주고 싶지만 글이 정말 너무 길어질까봐 줄이고, 중요한 건 정치라는 면입니다. 나중에 웨인 일행과 로렌스가 같이 오면서 웨인 프레드릭, 프림 왕, 지운이 같이 걸어가면서 은연 중 웨인과 지운을 자신의 아래, 자신의 인물로서 두는 듯한 은근하고도 교묘한 말을 할 때 지운이 역시 은근하고 교묘하게 잘 받아친다던가 하는 등의 정치적 수사와 정치성 그 자체에도 상당한 묘사를 보여줍니다.


전략전인 면에서 등장하는 정치적, 관계적 측면에서 이는 어지간히 큰 그림을 그려내지 않고선 나올 수 없는 설계이기도 하고 개인과의 대화에서 나타나는 정치적 수 싸움 또한 그러한 논리적이고 외교적 수사에 가까운 정치적 대화를 나누는 것도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전자야 공부 좀 한다면 누구든 해낼 수 있는 거지만 후자의 경우 경험이 없거나 그에 대한 기반 지식이 없다면 묘사하기 굉장히 어려운 거거든요. 굳이 찾아보자면 하얀늑대들의 윤현승 작가나 이차원용병의 탱알(금호) 작가 정도? 뭐 제가 아는 선에선 몇 안 되는 거 같네요.



뭐.. 일단 여기까진 칭찬이었고, 비판 비스무리한 것 좀 해보자면, 먼저 김형준 작가의 필체는 뭔가 구수하다는 겁니다. 무슨 향토적인 그런 게 아니라, 그냥 뭔가 되게 아재같다는 느낌이 든다는 겁니다. 중세 배경의 작품이기 때문에 그런 필체를 의도하고 쓴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뭔가 중세적인 분위기의 서술을 쓰고자 하는 그런게 보이긴 하거든요. 하지만 그런 부분이 어떤 면에선 읽을 때 지루함을 느껴지게도 합니다. 가령 제가 진짜 술술 읽힌다고 느끼는 글들은 앞서 말했던 하얀늑대들이나 특히 굉장히 잘 읽힌다고 느끼는 글이, 무한전쟁 시리즈의 광악 작가의 글입니다.


광악 작가의 글은 제 취향이 완전 저격되는 거라서 더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너무 술술 읽힙니다. 그래서 카카오 페이지에 연재되는 작품 중 평균 길이가 40페이지 가까이 되는 스페이스 니트라는 작품은 진짜 한 면 한 면 아까워하면서 봤을 정도였죠. 뭐 다른 엄청 잘 안 읽히고 읽는게 뭔가 고되다는 느낌을 주는 몇몇 작품들에 비해서 김형준 작가의 시리즈는 그런 문제가 덜하긴 해도, 뭔가 지루하다고 여겨지는 게 있습니다. 좋게 표현하자면 여유롭게 서술하고 묘사하는 거지만 말이죠.


그리고 또 캐릭터들의 포맷이 굉장히 고전적입니다. 뭐 사실 일곱 번째 기사는 나온지 10년 가까이 되는 작품이기 때문에 지금 와서 고전적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을 진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포맷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의 성격이 너무 진부할 정도로 정형화된 유형입니다. 가령 일곱 번째 기사의 헬포드 경과 백룡공작 팬드래건의 킬라이언 경은 성격이 완전히 같은 캐릭터성을 가지고 있고(그나마 킬라이언이 더 점잖은 정도?.. 단지 카르타와 나누었을 뿐이지만;) 로렌스와 빈센트 론은 대응되며 에인세와 로딕의 성격과 알폰소의 전투능력을 좀 비벼놓으면 엘킨과 비슷하기도 하죠. 여성 중에서 로젤리아와 가장 비슷한 건 루나 세이로드 정도?


뭐 사실 캐릭터라는 게 성격이 거기서 거기인 게 이상한 것도 아니고 독창적이고 비범한 포맷을 짜는 것도 어렵고 자연스러운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특히나 부각되는 점이 킬라이언과 헬포드의 캐릭터성이 너무나 유사하다는 점인데, 이는 솔직히 좀 아쉽기도 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렇다고 해서 포맷이 완전히 같은 것도 아니고 성격이 비슷한 게 이상한 것도 아니며 아예 다르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기 때문에 비판의 여지는 상당히 줄어들지만 이런 우직하고 우악스러운 성격의 근육돼지 기사 캐릭터의 캐릭터성이 너무 흔하다는 점은 일정 정도 비판의 요소가 되는 건 사실이기도 하죠.


더불어 몇몇 클리셰가 너무 흔한 것들을 쓴다는 점도 있는데, 백룡공작 팬드래건이나 월광의 알바트로스에서 나타나는 하렘적 요소나 마법, 능력자적 요소, 오크 같은 괴물 같은 것들도 흔한 클리셰적 요소들이죠. 물론 백룡공작 팬드래건에선 그걸 필력으로 버무려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게 사용했고, 월광의 알바트로스에서는 그냥 그럴 수도 있겠지 하고 넘어갈 수 있는 수준일 뿐입니다.


하지만 그보다 문제는 주인공이나 주변인의 무책임성과 시대상에 맞지 않는 아집적 연애관 같은 게 있긴 합니다. 가령 월광의 알바트로스 초반부의 주인공 어머니와 남편의 무책임성은 위선적이다 못해 역겨울 수준이라는 비판을 결코 피할 수 없고, 그런 문제 때문에 당 작품은 시작하기에 불편한 감이 크죠. 솔직히 저도 완결이 다 되가는 수준까지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에게 이입하기 어려울 정도의 감각을 줘버렸으니.. 뭐 이건 주인공의 문제라기 보단 주인공 주변인의 문제지만;


백룡공작 팬드래건에선 되도 않는 일편단심을 가지는 것도 있으며 좋다는 여자들은 많지만 그걸 죄다 무시하고 내치는 등 연애권력에서의 우위와 린제 콘라트라는 일편단심의 요소 하나만 가지고 남에게 열등감을 주고 자신을 우월감을 주는 식의 감각을 유도하는 구조적 연출은 역시 고전적이고 말초적인 쾌감을 주는 식으로 전개를 하는데, 뭐 고전적 연애관과 하렘식 연출이 딱 그런 모양새였죠.


좋다는 여자들은 많고 등 떠미는 사람은 많은데 정작 눈치는 못채고, 나중에 챈다고 해도 혼자 끙끙 앓거나 반대로 한명만 좋다고 대놓고 못 박아서 가슴앓이 만들고 그런 모습 독자들에게 보여주며 연애권력의 쾌감을 주기도 하는. 다르게 말하자면 언제든지 따려면 딸 수 있는 열매 같은 연출 말입니다. 


백룡공작 팬드래건은 2014년에 연재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고전적 구조를 사용했다는 점에서 비판의 껀덕지가 있습니다. 독자들도 그에 대해 답답해하거나 비판을 하곤 하죠. 물론 작품적으로 그렇게 작용할 수 있는 캐릭터성과 전개가 이어지긴 합니다. 다시 깨어난 앨런 팬드래건의 가치가 막대해졌다는 점과 여성으로서도 매력적으로 보이는 남성성을 가졌다는 것. 그 모습을 보고 사랑에 빠질 수 있으며 복수와 대의를 위해 여자에 눈 돌릴 시간이 없다는 점은 분명 비판을 막을 수 있는 정당한 전개였죠. 하지만 백룡공작 팬드래건이 워낙 많고 흔한 양판소적 클리셰를 모아놓다보니 근본적인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나마 필력 있고 실력 있는 작가가 쓴 글이기 때문에 그러한 비판점이 줄어들 수 밖에 없는 겁니다만.


사실 이렇게 길게 다른 작품 이야기할 생각이 없었는데 어쩌다보니 이렇게 나온 거고, 마찬가지로 일곱 번째 기사에서도 주인공 한지운은 로젤리아와 하룻밤을 보내고 자기 세계로 돌아가버리죠. 그 때문에 로젤리아는 임신을 하게 되었고 자식을 낳았으나, 본인이 키우는 게 아니라 루시엘에게 넘친 채 건국공을 도와 훗날 단풍 부인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되는 업적을 쌓았고요.


음.. 어.. 사실 앞서 자주 이야기했던 고전적이다. 라는 면에서 이 부분이 정점을 찍었다고 보는데, 과거라면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떠나야 하는 슬픔과 그래도 슬픔과 외로움을 달랠 자식을 세상에 남기게 해줬다는 선물이라는 면에서 과거라면. 과거라면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작품의 결말로서 작용할 수 있었겠지만, 시대는 변했고 그러한 고전적 가치관에서 벗어난 독자들에게 이는 무책임하게 싸질러 놓고 튄 놈 비슷하게 여겨질 수 밖에 없습니다.


뭐 본인이 임신을 시킬 것이라는 걸 모를 수도 있었고 남을 수 없다는 것도 개연성을 가지는 일이기 때문에 계속 이야기해왔듯 어쩔 수 없다지만 작품에서 전반적으로 보여줬던 자신의 행위에 대한 책임, 시대와 세계에 대한 책임이라는 것과는 대비되게 개인적으로 무책임하게 떠나버렸다는 점에서 위선적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고, 결국 로젤리아만 불쌍하게 되었죠. 심지어 이후를 살펴보면 자식을 직접 키우지도 못했고 그리 자주 만난 것처럼 보이지도 않은데. 로젤리아에게도, 자식에게도 죄 짓는 일입니다. 


이것도 작품을 쓴 시점과 현 시점의 가치관 차이라는 것으로 어느 정도 옹호를 받을 수 있다곤 해도, 그러기엔 작가 스스로 고전적 작품상의 느낌을 넣어주기 위해서 일부러 그렇게 결말을 만든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그러한 구조와 전개를 설정하여 이끌어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작위성이 겉으로 드어나보이지 않고 그거 말고 어떻게 할 수 있는 방향성이 없다라는 생각이 들게 했기 때문에 비판하기 어려울 뿐이죠.



하여간, 전체적인 작품은 저에게 믿고 보는 김형준이라는 믿음을 주게 만든 작품이었고, 객관적으로도 재밌으며, 일부 부분에선 얻을 것도 있는 훌륭한 수작이었다고 봅니다. 아무리 역사적인 배경의 분위기를 느껴지게 하는 필체와 고전적인 작품상의 느낌을 이끌어내는 서술은 반대로 현실적인 느낌을 주기 때문에 다른 판소에서 쉽게 느껴지거나 연출하고 의도되는 거창하고 어마어마한, 압도적 무언가를 만들어내기 어렵다는 점이 호불호가 갈릴 수 있지만 저는 도리어 그것에 고평가를 주고 싶고, 큰 틀에서 정확하게 짜인 스토리와 부담 없는 전개, 시각적으로 힘을 주는 연출 묘사 등 이 작품은 객관적으로 좋은 작품입니다.


그래도 판타지 소설이라는 점 답게 작품의 주인공은 그 시대에 있어서 신화적인 역할과 행보를 보인다는 점이 흥미롭게 여겨지는 점이기도 하고요. 작가의 이상을 너무 진하게 담아내서 전체적인 그림에서 개인 단위로 투영해나감에 따라 뭔가 불편함을 느끼는 부분도 솔직히 없다곤 못하겠습니다. 이는 월광의 알바트로스에서 특히 그렇게 느껴지고요.


하지만 그러한 역할과 변혁에 있어서 설득력 있는 전개와 역할을 개연성 있게 풀어냈다는 점은 김형준 작가가 어째서 필력 있는 작가인가에 대한 물음에 답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반응형
AND
반응형


본 글은 본인이 다음 지식인, 다음 카페 등에서 작성한 것 등을 바탕으로 했습니다.


-----------------------------------------


1.머스켓과 활.


당연히 머스켓이 압도적으로 좋죠. 활은 숙련된다면 사거리와 정확성 모두 어느 정도 선까지 보장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활은 숙련도가 필요하다는 것인데, 머스켓이 이 점에서 활을 찍어 눌렀습니다. 활은 꾸준히 쏴봐야 대충 이 정도 각도로 쏘면 맞겠구나, 이 정도 바람이 불면.. 이런 것에 대한 감이 있어야 하는데, 머스켓은 그런게 필요 없었어요. 그냥 모여서 탄막을 이루면 되거든요. 애초에 초중기까진 정확도도 크게 기대할만한 것도 아니었고.


게다가 위력에서도 머스켓이 더 강한데, 이전 답변에서도 활이 수십~수백J이라면 머스켓은 수천줄에 달할 운동에너지를 가집니다. 그래서 초기 머스켓을 제외하면 결국 상승하는 머스켓 성능, 화력에 못 당하고 중세 전쟁터를 주름잡았던 플레이트 아머가 결국 사장되고 간단한 천 옷을 입게 되지요. 신병을 만드는데 있어서 머스켓이 더 효율적이었는데, 궁수는 말했듯이 숙련도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머스켓은 그냥 쥐어주면 땡이거든요. 애도, 여자도 쥐어주기만 하면 이미 훌륭한 전력이라고 할 수 있는 사기템입니다.


기병은 근대에서도 꾸준히 사랑받는 병과였죠. 나폴레옹 시대, 그리고 그 이후까지 사용될 정도로. 그들의 위력은 충분히 강했지만, 그보다 더 강했던 것이 머스켓, 즉 총기였기 때문에 기병이 보병에게 막 돌격하면 그냥 시체되는 겁니다. 충분히 가까이 다가올 때까지 기다린 머스켓병이 코앞에서 발포하는 화망이란 기병에겐 손도 쓸 수 없는 죽음을 의미하죠. 그렇다고 기병이 정말 쓸모없었느냐는 아니지만, 결국 근접전을 거는 기병이 사라진 이유는 더 이상 쓸모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2.파이크병과 머스켓병


파이크병과 머스켓병이 혼재했던 적은 있습니다. 테르시오라고 찾아보면 알 수 있겠지만, 파이크병이 머스켓병을 보호하며, 적의 파이크병과 싸움을 벌일 때 머스켓병이 적 파이크병, 머스켓병을 녹일 때까지 버티는 것이었죠. 물론 기병도 막고.


그렇지면 그런 파이크병보다 머스켓병의 비율을 높히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결정적으로 창병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게 된 총검이라는 것이 발명되고 부터 아예 사장됩니다. 똑같이 창으로 쓸 수 있는데 총으로도 쏠 수 있으면 그게 더 좋기때문이죠. 파이크병이 없어진 이유도 역시 더 이상 쓸모가 없어졌개 때문입니다.



3.착검돌격.


후장식 소총 등 여러가지가 나오기 이전의 머스켓은 알다시피 장전속도가 느렸는데, 그런 전쟁에서 몇십초고 몇분이고 기다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두번 일제사격을 하고난 뒤에는 그냥 착검돌격하는 것이 더 좋았죠. 적이 장전하는 동안 함성을 지르며 달려오는 군대의 모습은 충분히 적의 사기를 떨어뜨릴 수 있었습니다. 신병에겐 보이지도 않는 머스켓탄보단 번뜩이는 칼날이 더 무서운 법이죠.


하지만 언제나 이런 전술을 썼느냐 하면 절대 아닙니다. 영국이 자랑하는 레드코트는 이와 같은 전술을 전세계의 원주민이나 훈련이 되지 않은 민병대와 같이, 정규 훈련이 되어있지 않은 규율이 맞고 멘붕, 모랄빵이 잘 터지는 적을 상대로 일제 사격 후 착검돌격을 했죠. 그렇게 몇배 많은 수의 병력을 깨부숴왔지만, 같은 근대 정규 사격 훈련을 받은 군대를 상대로는 거의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상대의 진영이 무너질 때까지 끝 없이 총알을 교환할 뿐이죠. 그러다 최후의 카드로나 총알이 다 떨어졌을 때나 착검돌격으로 근접전을 걸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여기서 머스켓을 줄이고 창 따위를 넣으면 어떻게 되느냐? 창은 집단을 이루었을 때 제성능을 발합니다. 물론 1:1에서도 칼보단 창이 유리하지만 대열을 이룬다기 보단 그냥 달려가서 난장판으로 싸우는 싸움판에서 혼자서 창 들고 돌격해봐야 큰 의미는 못 가집니다. 애초에 그러한 창병, 파이크병이 줄어든 이유가 머스켓병의 비율을 높히는 것이 더 좋기 때문이며, 처음 일제사격할 때 적보다 화력이떨어지면 돌격 후에 돌아올 피해 또한 클 것이 당연하지요. 창병은 그 차이를 매꿔줄 만큼 좋지 못하고 말입니다.



4.대포.


대포는 전장의 신입니다. 대포 한 문은 머스켓 1000정에 달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대포의 화력과 위력은 압도적이었죠. 대포도 그냥 알맹이만 있던 것이 아닌 산탄 등등 여러가지 썻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충분히 보병을 화력으로 짖눌렀죠. 이집트의 맘루크 카라콜 기병대는 나폴레옹의 보병대에게 돌격을 했으나 머스켓 방진의 일제사격과 대포에 의해 걸레가 되었습니다. 방진의 일제사격 또한 기병대에게 아주 좋은 효과를 볼 수 있었으나, 대포의 위력은 아주 대단했지요.


몽골 기병식의 전투방식은, 화포와 머스켓 중심의 화력 위주 방식에 쳐발린게 이미 오스만 제국 시절입니다. 찰드란 전투에서 사파비가 깨지고 백양왕조의 후준하산도 오스만의 화력 중심의 병력에 반나절만에 박살났죠. 


통짜 대포알이 아닌 산탄을 사용하면 대보병에게 더 큰 피해를 입힐 수 있었는데, 그런 대포의 산탄 집중사격은 화망에 들어간 보병에겐 공포 그 자체였을 겁니다.



5.플레이트 아머와 방패, 머스켓.


후기 플레이트 아머, 초기형 머스켓의 경우 플레이트 아머가 머스켓을 탄환을 막을 정도로 좋은 성능을 지녔습니다. 아예 Bullet Proof라고 해서, 총알을 맞은 흔적을 가진 아머는 진짜 총알을 막아낼 정도의 성능을 가진, 성능이 보장된 아머라고 인정받았죠. 하지만 그것도 얼마 안 가서 의미가 없어집니다. 머스켓병은 점점 늘어나고, 전장터는 이전과 같지 않게 되었으며, 전장의 주인공으로 활약하던기사와 기병은 고대와 같은 보조적인 역할을 강요받았습니다. 후방교란 및 기습, 적군 추격과 같은.


플레이트 아머는 모든 머스켓 탄환을 막을 수 없으며, 몇번 막는다 해도 수십 수백발이 몇번씩이나 빚발치는 전장터에서 더 이상 살아남을 수 없게 된 것이죠. 방패 따위를 아무리 좋은 것을 들고 있다고 해도, 결국 머스켓에 맞고 죽을 텐데, 그러한 노력과 돈을 들일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까놓고 말해서, 수십년 훈련하고 실전을 경험한 기사라고 해도, 어제 막 입대해 머스킷 하루 만져본 신병의 총알에 맞고 죽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겁니다.


역사상 창과 방패의 싸움은 언제나 창의 승리로 돌아갔습니다. 플레이트 아머와 머스켓도 마찬가지죠. 결국 쓸모가 없어졌기 때문에 사라진 겁니다. 그것으 여전히 유용하다면, 여전히 전장에 남아있어야 맞지요.



6.파르티안 샷


파르티안 샷이 무슨 대단한 스킬인게 아닙니다. 아니, 대단한 기술인 건 맞는데, 무슨 게임 스킬마냥 정확도, 피해량.. 뭐 그런게 정해진게 아니라, 그냥 도망갈 때 추격해오는 적군에게 마상에서 반격할 수 있는 기술입니다. 뒤를 돌아서 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쫓기고 있음을 상정한 것이죠. 추격하는데 도망가는 저 놈들이 몸을 돌리더니 우리편 애들이 죽네? 이거 쫓아가야 됌 말아야 됌? 이런거죠. 추격을 저지시키고 추격병을 더 죽인다는 것은 그 자신의 생존에 큰 영향을 주는 것이고 전술적으로도 큰 의미를 지닙니다. 몇번 당하고 나면 추격에 대해 고민하게 되고, 죽어야할 적은 죽지도 않고.. 그것도 부대단위로 그 짓을 하면 돌아불죠.


저놈이 또 활 쏘고 튀네, 근데 쫓아가면 또 죽을꺼 같애;; 뭐 이런.. 어디선가 몽골군이 전쟁에서 이긴 이유가 파르티안 샷이라고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있는듯한데, 절대 아니죠. 단지 기술일 뿐입니다. 전술적으로, 병력의 생존률을 따져 더 넓게 보면 전략적으로 도움이 됐을지언정, 단지 파르티안 샷 덕분에 이겼다고 하는 것은 심각한 비약이죠.


반응형
AND
반응형


서양 고대사에서 하나의 본좌로 여겨지는 대제국이었던 로마. 그 로마에 대한 수식어로 위대한이라는 단어가 붙는데, 그 로마가 위대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그 드넓은 영토와 도로? 강대한 군사력? 정치체제? 사회문화?


사실 로마가 진정 위대한 이유는 바로 법률에 있습니다. 


만민법과 시민법은 로마의 전국적인 법률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게 현대 국제법의 조상이라고 할 수 있죠. 사실 법학이라는게 꽤 오랜 전통을 가진 학문이고, 이 법학이야말로 로마의 진정한 유산이라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전국적인 법이라는 개념이 사실 국왕과 같은 통치자의 명령이 곧 법이었던 것이 근대 이전의 일반적인 예시였고, 지역이나 시대를 불문하고 국왕같은 통치자의 명령이나 칙령은 그 자체로 거진 전국적인 법이라고 할 수 있었죠. 


그렇다고 명령과 같은 불문법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암흑시대 게르만 왕국시대부터 게르만인들은 성문화된 자기 부족의 법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 법전은 암흑시대 게르만 전통 부족 관습법과 로마법을 토대로 만들어졌죠. 법이라는 게 통치의 근간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리 허술하더라도 시대나 지역을 구분짓지 않고 통치라는 것이 이루어지는 모든 곳에서 존재하기 마련이죠.


그런데 재밌는 건, 중세의 봉건시대같은 경우 봉건제도의 특성상 통일된 전국적인 법이 나타나지 못했던 시기였습니다. 동로마는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이 있었지만, 비교적 강한 중앙집권화를 보여줬던 프랑크 제국이 있었을 때까진 전국적 영향력을 지닌 살리카 법과 법원이 존재했으나 그 프랑크 제국이 무너지고 현재의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에 해당되는 지역의 3개의 국가로 쪼개지기 시작하며 전국적인 법이라는 개념은 사라지고 지역에 따라 법이 집행되던 시기였죠. 중세가 끝나고 봉건제가 약화되면서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지는 시기부터 다시 전국적인 법 개념이 등장하게 되는데, 중세 말기와 르네상스 시기를 거쳐 절대왕정이 형성되는 시기에 강력한 왕권을 가진 국왕은 그들의 강한 권력을 확립시키고 굳히기 위해 대대적으로, 전국적으로 통용이 될 법이 필요해졌습니다.


그런 법을 만들기 위해 찾은 것이 바로 고대의 로마법인데, 한마디로 고대의 로마제국의 법을 가져와서 자기네 방식으로 고친 뒤 적용하겠다는 겁니다. 이게 그 로마법 계수라는 것이죠. 이 로마법 계수를 통해 봉건적인 요소들이 사라지고 절대주의가 성립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더불어 이때 사용된 로마법이 바로 유스티니아누스의 로마법 대전이었습니다. 그래서 유스티니아누스의 로마법 대전 편찬이 그의 업적에서 가장 대단한 것으로 꼽히는 이유라고 합니다.


로마법의 계수는 15세기~19세기까지 지속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법학계에선 근세 전기의 계수는 전기계수, 18세기 이후의 계수를 후기계수라고 부르는데, 시민 혁명과 민족국가, 근대국가가 성립되며 18~19세기에 본격적으로 근대적인 법적편찬운동이 시작됩니다. 나폴레옹 몰락 이후 1871년 프로이센의 독일제국이 성립함과 동시에 독일의 통일법전이 편찬되기 시작하는데 이것이 바로 오늘날 대륙법계 국가들의 민법전의 기초라고 할 수 있죠. 그리고 이 (아직은 미완성이었던 독일의)법과 프랑스 민법전을 일본에서 수입하여 자기네 민법전으로 삼고 이후 우리나라는 완성된 독일의 민법과 일본의 민법을 수입하여 우리나라의 민법을 만듭니다.


이를 연속적으로 보게 될 시 현재 거의 전세계 법률은 로마에서부터 시작되는 건데, 현재도 이 로마법의 영향을 짙게 가지고 있는 것이 우리가 사용하는 법들입니다. 로마가 망한지 500년, 길게는 천년이나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로마의 법은 근대를 넘어 현대의 지금 시대까지 그 영향이 진하게 남아있다는 것을 본다면, 괜히 로마가 위대하다는 소리를 듣는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실 겁니다. 단지 영토가 넓고 강한 군사력을 지녔고 멋지고 웅장한 건물을 지었다고 위대한 것이 아니라, 후대의 수많은 민족, 국가에게 강렬한 영향을 끊임없이 미칠 수 있게 하는게 진짜 위대한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반응형

'취미 >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언론에 대한 단상.  (2) 2013.08.16
국가적 번역 기관의 필요성  (4) 2013.08.15
극복해야할 민족주의  (0) 2013.08.14
민족주의적 배타성과 국민감정  (2) 2013.08.13
프로메테우스와 에피메테우스  (2) 2013.08.09
AND

ARTICLE CATEGORY

분류 전체보기 (849)
취미 (849)
백업 (0)

RECENT ARTICLE

RECENT COMMENT

CALENDAR

«   2024/03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