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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며,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 - E.Kant
by Ko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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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에 해당되는 글 9건

  1. 2023.06.28
    자본주의를 부정하는 보수 진영의 사교육 시장 정치 공격. (2) 3
  2. 2022.12.27
    자본주의의 한계에 대한 단상.
  3. 2022.10.29
    공산주의는 왜 실패했는가.
  4. 2022.09.23
    전근대 사회의 체면과 탐욕 문제. 2
  5. 2022.06.08
    덜 불공평한 것으로 만들기 위한 분배의 문명 발전 역사성.
  6. 2022.05.12
    자본주의는 또 다른 한계점을 맞이하는가. 4
  7. 2017.12.23
    자본주의와 신분제 사회 권력의 특성에 대한 단상
  8. 2015.02.08
    알바몬 광고 논란에 대한 단상. 2
  9. 2013.06.17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차이.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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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석 "고소득 일타강사 왜 악마화" vs 이철규 "초과이익은 범죄, 왜 비호"
https://n.news.naver.com/article/421/0006878668?sid=100
억대 시계 차고 수업… ‘공교육 수능 반발’ 일타강사들의 호화생활
https://n.news.naver.com/article/023/0003770768?sid=102
'카르텔' 직격한 尹..후순위 '사교육'이 '교육개혁' 핵심으로 부상
https://v.daum.net/v/20230618142429596
대통령실, 교육부 대입국장 교체에 "이권카르텔 증거…예의주시"(종합)
https://m.yna.co.kr/view/AKR20230616077451001?input=tw
[단독] 시대인재·종로학원 등 대형 입시학원 전방위 세무조사
https://v.daum.net/v/20230628144430963
[단독]국세청, 메가스터디 세무조사…대형 입시학원 타깃
https://v.daum.net/v/20230628122705906

 

대한민국은 자본주의 체제의 국가입니다. 당연히 자본시장이 존재하고, 규제와 제한은 있지만 자유시장을 형성하고 있죠.

 

그리고 사교육 '시장' 역시 그런 자본이 몰리는 시장입니다. 그러한 이유는 당연히 더 놓은 성적, 더 높은 학업성취를 목표로 돈을 지불할 의사가 있는 수요가 있고 그들에게 더 좋은 교육 서비스를 제공해줄 수 있는 공급이 있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고요.

 

이는 다른 시장과 같은 원리를 가지는 똑같은 시장입니다. 그 사회적 역할이 어떠하고 어떠한 영향력을 미치는지는 전혀 다른 문제이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사교육 시장은 범죄도 아니고 비도덕적 시장인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 윤석열 정부가 하는 것과, 보수진영이라는 병신들이 하는 걸 보세요.

 

초과이익은 범죄? 사교육 카르텔? 일타강사의 호화생활?

 

살다살다 한국에서 돈 많이 번다고 공개적으로 공격하는 건 처음 봅니다. 심지어 이건 그 진보좌파 진영에서도 공개적으로 하지 않는 말입니다. 근데 그걸 자유시장 운운하는 보수진영이 한다? 한국 보수는 보수가 아니라는 말에 대한 가장 강력하고도 확실한 증거이자, 자본주의 시장을 무력화하고 형해화하려는 반자본주의 세력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건 사실일 가능성이 꽤 높은데, 자본주의 시장에서 공정한 경쟁은 필수적인데 보수진영은 그 스스로 금융 등 경제범죄를 저지르거나 그러한 이들의 부정한 이권에 매우 온정적이고 처벌에 부정적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경제사범을 처벌하는데 가장 반대 목소리가 큰 것이 보수진영이고요.

 

 

근데 윤석열 정부와 보수진영은 공개적으로 자본주의의 기본 원리를 부정하는 반자본-사회주의적 정치공세를 펼치고 있습니다. 마치 공산당 빨갱이처럼요.

 

사교육 시장에서 발생하는 초과이익은 또 뭐고, 그 초과이익을 범죄화하거나 더 나아가 환수해야 한다는 게 도대체 자본주의 체제에서 어떻게 나올 수 있는 주장인지도 모르겠고, 명분도 없는 고소득자에 대한 공격이기도 한데다, 원리적으로 능력이 있으면 많이 버는 게 당연한 체제에서 많이 번다는 사실 자체를 공격하는 건 공산당이나 하는 짓거리라는 겁니다.

 

한국 보수진영이 자유도 아니고 민주주의도 아닌데 이젠 자본주의까지 부정하는 행태를 보이고 있으니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이들의 반국가적 행위를 정당 정치와 진영 논리와 무관하게 바라보고 판단할 줄 알아야 합니다.

 

 

전두환 시절 사교육 금지하던 시절도 아니고 사교육 금지하는 중국 공산당 짓거리나 하고 있으니. 한국 보수 진영의 통치 롤 모델이 중국인데, 딱 그대로 따라가는 모습이네요.

 

중국, 사교육 규제로 깊어진 교육 양극화
https://www.newspim.com/news/view/20220729001026
중국 사교육 금지 1년…"지하시장 형성, 교육 양극화 심화"
https://www.yna.co.kr/view/AKR20220727072600097

 

 

애초에 일타강사라는 사람들이 수십억, 수백억 수익을 얻는 이유는 그 수요 고객이 전국의 수많은 학생들이기 때문이고 그 정도 인구와 십수 년의 시간이면 어떤 업종이든 그만한 수익 얻습니다. 오히려 기간과 고객의 숫자를 고려하면 더 적게 번 감도 있을 정도로요.

 

근데 무슨 극소수의 학생에게 초거액의 수업료를 받는 것도 아닌데 돈 많이 번다고 공격하고 초과이익이라는 이상한 소리를 하고 있으며, 진짜 본질은 사교육 그 자체가 아니라 현 교육 환경과 입시 시스템 그 자체인데 그에 대해서는 제대로된 대안도, 연구도 하지 않으며 꼴랑 학원가를 공격하는 건 그들이 사교육 시장도, 교육 환경도 개선할 의지도, 능력도 없다는 거에 불과한 겁니다.

 

 

애당초 공교육이 충분한 효용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수십년 동안 실패해왔던 교육 정책의 결과가 지금의 사교육 시장이나 마찬가지라 볼 수 있는데, 그 수능조차 학력고사 시절의 문제 때문에 등장한 대안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문제점은 나오고 그 문제들 때문에 교육 정책은 계속 변화하고, 그렇다보니 공교육 체계를 신뢰하기 어려워지자 그 권위와 신용의 자리를 차지한 것이 현 사교육, 그 중에서도 인서울 대학 보내주고 실제적인 성적으로 결과가 나오는 명문 학원가들이며, 그들이 버는 수백억 넘는 수익과 일타강사들의 연봉으로 나타난 것에 불과합니다.

 

그럼 그런 학원과 강사들 때려 잡는다고 문제가 해결될까요? 구조와 환경이 변화하지 않았다면 지금 때려잡는 이들이 사라진다고 그들과 같은 자들이 영원히 사라지는 게 아닙니다. 또 다른 학원과 새로운 일타강사가 그 자리를 차지하는 거죠. 지금 얻어 맞는 사람들은 그저 억울하게 경쟁자에게 자리를 빼앗기는 거고요. 아주 불공정하게요.

 

 

그런데 이 시점에서 세무조사를 한다? 의도가 너무 뻔합니다. 해석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정치적인 공세죠. 세무조사라는 상투적인 수법을 쓰면서요. 이 역시 전두환 시절 자기한테 불법 정치자금 안 준 그룹 조질 때 쓰던 방식입니다. 

 

목적이야 뻔하죠. 세무조사로 성과 있으면 그걸로 언론 플레이를 하고, 그게 아니더라도 세무조사라는 어떤 기업이든 싫어하고 무서워하는 수단으로 기 꺽고 찍어 누르겠다는 겁니다.

 

정치적 목적이 너무 뻔해서 원래대로라면 언론은 입에 거품을 물고 비판해야하는 일이지만 정치 쉽게 하는 보수진영 국힘당 윤석열 정권이라 욕을 안 먹는 거죠. 문재인 정부였으면 하루에 수만 건의 비판 기사가 온 사방을 꽉 채웠을 것이고 신문에서도 1면을 꽉 채울 것이며 종편과 지상파를 가리지 않고 주요 시간대 뉴스에서 큰 비중으로 다룰 것입니다.

 

보수 정부라 그런 공격을 거의 안 받는 것 뿐이죠. 어차피 그들 지지자들은 뭘 해도 무조건적인 북한식 지지를 던질 것이기에 더더욱 부담 없이 부당한 정치 공세를 가할 수 있는 거죠. 어차피 본질부터가 검찰이고, 당연히 검찰과 같은 국가기관 동원해서 조지는데 익숙한 정권이니 상식과 공정을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당연히, 민주적 방법론과 민주적 전통 역시 기대할 수 없고요.

 

 

이런 뻔히 보이는 맥락을 읽지 못하고 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흐름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머리가 멍청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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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는 또 다른 한계점을 맞이하는가.
https://cafe.daum.net/Europa/38b2/4516

처음 자본주의에 가장 심대한 위협을 줬던 사회주의, 공산주의가 등장했던 때와 유사한 상황에 치달아가는 게 아닌가 싶은데, 문제는 공산주의는 소련의 멸망과 함께 이미 실패한 체제가 되었고, 이에 대한 도전이나 견제가 가능한 대안, 혹은 경쟁적 이념은 등장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세계는 명실상부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세상이나 마찬가지가 되었고요.
 
즉, 자본주의는 현재 견제할만한 사상이 없습니다. 자본주의는 사회주의, 공산주의라는 경쟁자 때문에라도 살아남기 위해 사회주의적 요소들을 받아들였습니다. 그게 아니더라도 자유주의나 프로테스탄트적이지 않은 전통적 기독교 윤리, 인본주의, 애국심, 참정권과 함께 이어지는 대다수 노동자들의 요구 등 다양한 관점과 사유로 노동법이나 노동환경은 점차 나아졌고 자본주의는 지나친 비인간성이 줄어들어 현재와 같은 체제에 이르게 됐습니다.

 

 

저번 글에서 언급했듯, 자본주의는 공산주의라는 경쟁 체제가 사라지고 자본주의의 폭주를 억누르고 견제할만한 방법이 없어졌습니다. 소련이 붕괴한 이후 자본주의는 세계를 지배하는 사상이자 체제가 되었고 자본주의가 아닌 체제들은 자본주의에 비해 경쟁력이 없습니다. 

 

독점 시장은 언제나 독점자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됩니다. 얼마나 물량을 풀 것인지, 개발에 얼마나 투자할 것인지, 가격을 얼마로 책정할 것인지 등등 독점적 지위는 그 자체로 사는 사람이 아쉽게 만드는 위치이죠. 그것은 체제 역시도 다르지 않습니다. 자본주의는 정치체제가 아닌 경제체제이고, 그 핵심원리상 패권을 추구하게 설계되어 있습니다.

 

더 많은 부를 획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그 방법은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세계의 정치, 사회, 문화적 규칙으로 게임을 하죠.

 

전근대 사회의 체면과 탐욕 문제.
https://cafe.daum.net/Europa/38b2/4528

 
11.
그들은 결코 자신의 탐욕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욕심을 가지는 게 무엇이 문제냐고 할 것이다. 욕심은 발전의 자양분이 되고 충분히 추구할 수 있는 것이다. 욕망은 욕망되어야 하고 그것이 법을 어기거나 비도덕적이지 않는 한 잘못된 게 아니다.
 
그러나 탐욕과 욕심이 죄악으로 여겨지는 이유는 그것이 무한하기 때문이며 절제될 수 없는 속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충분히 먹고 살 수 있으면서도 더 큰 이익을 얻고자 했던 파홈은 더 많은 땅을 얻기 위해 탐욕을 부리다 악마의 의도대로 죽게 되었다. 그가 중간에 절제했다면 더 넓고 훨씬 좋은 땅을 얻은 채 오랫동안 잘 먹고 잘 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종래에 그가 얻은 땅은 그가 누울 3아르신 뿐이었다.
 
파홈의 이야기는 톨스토이의 기독교적 교훈이 담긴 이야기일 뿐이지 현실세계의 당위나 운명으로 작동하지는 않는다. 부정한 사회일수록, 부정한 정치권력이 지배하는 사회일수록 파홈의 사례는 줄어든다. 정부가 부정하고 악한 이들에게 적절한 처벌과 규제를 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제는 그 자체로 공유지이다. 자원이 순환되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유한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에는 한계가 있고, 자원 역시 한계가 있다. 이것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자원은 한계가 존재하기에 순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본의 동맥경화가 찾아오면 자본주의는 지속 가능성에 한계가 찾아온다. 누군가 자원의 절대다수를 독점하고 분배하지 않는다면 모두가 고사할 것이다. 단지 가진 사람이 더 늦을 뿐이다. 그마저도 아무런 폭력도, 외부세계로의 도피가 없다는 전제 하의 이야기일 뿐이다. 대체로 그러한 한계 상황에서는 혁명, 쿠데타, 정부전복, 심지어 외침 등 다양한 방식의 폭력이 체제에 끝장을 내기 마련이다.

 

문제는 탐욕입니다. 욕심은 모든 인간이 다 가지고 있는 생물학적 본능이고 이것은 생존에 유리하게 해주는 동력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욕심이 지나쳐 탐욕이 되는 것은 공동체의 발전에 부정적인 힘을 발생시키죠. 언급했듯, 탐욕은 무한하며 절제될 수 없기 때문에 어느 문명 어느 사회든 무한하게 추구하여 공동체를 파괴할 수 있는 것들을 죄라 불렀고, 기독교의 칠죄종이나 불교의 오욕칠정이 그러한 것입니다.

 

본능적이기에 순수하고 자연스러운 욕구가 욕망이 되고, 그것이 지나쳐 탐욕이 됩니다. 그러한 탐욕은 끝없이 추구되며 자원과 인신을 무한하게 빨아들이죠. 그리고 자원의 독점은 올바른 곳에 적절하게 사용되지 못하기에 공동체를 파괴하게 만듭니다. 무한하게 자원이 제공되지 않는 한 순환하지 않는 자원은 그 양이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집단의 유지를 위해 소모되지 않기에 문제거리가 됩니다.

 

 

이러한 탐욕은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도덕적인 것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부를 얻는 것이 목적인 체제이기 때문이죠. 그러한 욕망이 발전과 경제성장을 가져온다고 말하고 이것은 전혀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러한 탐욕은 소수의 부자들이 막대한 재산을 축적하게 만들었고 순환하지 않는 자원은 분배되지 않기에 자본의 동맥경화를 발생시키고 있죠. 정상적인 자본의 순환이 이루어졌다면 물가와 임금은 지금과 다른 수치를 보였을 것이며 경제문제로 나타나는, 이 사이에서 발생하는 괴리 역시 지금보다 훨씬 낮은 수준의 사회적 스트레스를 유발했겠지요.

 

자본주의는 최대한의 부를 추구하는 체제이고 인간은 언제나 더 효율적인 방법을 찾죠. 그러나 그 효율적인 방법은 규칙에 대한 도전 역시도 시도하게 만들고 이는 자본을 부정한 방법으로 축적하거나 한계 이상으로 추구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자본주의의 모순이 발생하는 거죠.

 

더 많은 부를 추구하는 체제이나, 그것이 일정 임계점을 넘어갈 경우 부가 순환하지 않고 경제가 성장하지 않거나 둔화되거나, 오히려 후퇴하면서 자본주의의 유지를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탐욕이 지나칠 경우 공동체, 집단은 붕괴하는데 이것은 자본주의라고 해서 다를 게 없습니다.

 

단지 자본주의는 그것을 억제하지 않고 최대한으로 긍정했을 뿐입니다. 사람의 탐욕을 통제하는 경제체제 중 공산주의는 최대한 억제하는 식이었다면 자본주의는 그 반대였을 뿐이죠. 그리고 승리한 것은 자본주의보다 더 큰 한계와 모순을 지녔던 공산주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본주의가 존재하는 모든 경제체제 중 유일하게 영구적이며 항구적인 체제라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닐 뿐이죠.

 

 

자본주의에는 한계점이 존재합니다. 커다란 구의 형태로 존재하며, 이 이상 부는 성장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인구, 자원, 기술 등 다양한 이유로 발생하는 것이며, 이 한계점은 현 지구적 인류의 상황에 기초합니다. 인구는 소비할 고객이며 생산할 노동자이고, 기술은 그것의 속도와 규모를 확장시킵니다. 자원은 소비하고 생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자본, 돈으로 환산 가능한 가치들입니다.

 

다르게 말하자면 그 한계점에 도달할 정도로 인구, 기술, 자원의 혁신 따위가 없다면 그 21세기 이후 급격하게 확장되는 경제성장은 언젠가, 어쩌면 머지않아 그 한계점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한계점을 최대한 유예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먼저, 그 한계점은 한계 영역이라는 이름으로 커다란 구의 형태로 그려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부의 규모에 따라 크고 작은 구들이 존재하고요. 소수의 부자가 더 많은 부를 소유하고 있다면 자본주의의 한계 영역 내 적지 않은 영역을 차지하고 있을 겁니다.

 

그리고 대다수의 중산층, 서민, 빈자들은 그보다 훨씬 작은 구로 나머지 영역을 차지하고 있을 것이고요. 문제는 전 지구상 보유하고 있는 부의 양은 한정되고 있고 한계영역이 더 넓어지지 않는 한 최대한 부를 추구한 부자들에 의해 영역 내 거대 구형들은 더 크기를 키우겠지만 반대로 중산층과 서민들의 크기는 더 작아지며 영역이 줄어들 것이라는 겁니다.

 

점차 이 공간들은 좁아지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빈 공간들이 남아 있을 겁니다. 이론상 그 부분들은 더 작은 구체로 채워질 수 있는 부분이지만 커다란 구는 부피 대비 표면적이 적기 때문에 도형의 공간을 채운다는 목적에선 비효율적인 빈 공간이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해결할 방법은 더 큰 구체들을 쪼개고 쪼개어 부피를 줄이는 대신 표면적을 늘리는 식으로 한계점을 유예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더 나은 기술, 더 나은 합의, 더 나은 체제를 발생시킬 여유가 될 것이고요. 현실의 대다수 개인들에게도 부정적인 내용은 아닐 겁니다. 다만, 현행 자본주의가 추구하는 방향성과 다르며 오히려 공산주의에 가까운 개념으로 도달한다는 점이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방식으로든 자본주의의 한계점을 더욱 확장시키거나 개선하지 않으면 찾아올 미래 중 하나가 될 것이라 봅니다. 그때가 된다면 자신의 부를 나누기보단 그러한 한계에 도전하는 이들에 의해 자본주의 자체가 붕괴할 수 있는 것 역시 가능성 있는 미래 중 하나라고 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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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많은 사람들이 공산주의의 실패에 대해 사람의 욕심을 고려하지 않았다거나 지나치게 이상적이었다는 등의 피상적인 접근으로 분석하곤 한다. 이것은 관련 지식이 없는 사람들에 대한 가장 대표적이고 쉬운 설명이 될 수는 있으나 진실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이다.

 

백년전 사람들이 바보도 아니고 욕심에 대한 이해가 없을 수도 없고, 지나치게 이상적인 체제라면 반세기 이상 유지될 수가 없다. 이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이 글에선 어째서 공산주의가 실패했는지에 대해 개괄적으로 서술할 것이다.

 

 

자본주의의 시작과 예견된 한계.

인간 노동은 기계로 대체되었다. 기존 수공예 숙련공들은 기계의 등장에 따라 노동의 시장가치가 줄어들었고, 저임금 노동자에 의해 완성되는 면직물들은 더 싸게, 더 많이 팔려나갔다. 지금은 일부 영역에 불과하겠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 더 많은 노동은 기계로 대체될 것이다.

 

문제는 바로 그 부분에 있었다. 인간 노동이 기계로 대체되어간다면, 그리고 돈을 받지 않고 생산하는 기계를 통해 부를 축적한다면 노동자는 더 이상 설 자리가 없어진다. 직업이 없어졌기에 돈을 벌 수 없게 되고, 자본가는 그들의 주머니에 얼마나 많은 자원이 있든 살아남기 위해 소비하는 것으로 끝없이 자본을 축적할 것이다.

 

자본주의의 모순이다. 자본주의는 효율을 위해 비용을 줄이고 최대의 이익을 추구한다. 인간노동보다 기계가 더 효율적이고 더 많이 생산하며, 더 적은 비용을 발생시킨다면 기꺼이 그렇게 할 것이다. 바로 이 지점이 문제가 된다. 노동자, 대부분의 사람들이 직업을 가질 수 없어 돈을 벌 수 없다면 어떻게 소비를 한단 말인가? 노동자가 소비할 수 없는 시점이 바로 기업-자본가의 사망선고점과 같다.

 

자본주의에서 자원은 순환해야하고, 노동자가 돈을 벌면 그것을 통해 소비하며 경제는 발전한다. 그러나 노동자가 돈을 벌 수 없어 소비하지 못한다면 그들은 죽게 될 것이고, 소비할 사람이 없어 팔 수 없는 환경에선 자본가 역시 고사하게 된다.

 

그리고 당시 노동에 대한 인식과 그 권리보장이 처참했을 시기 어떤 사람들에게 그 미래는 그리 머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자본주의는 굉장한 가능성을 내포했지만 본질적 모순에 의해 필연적으로 종말이 찾아올 수밖에 없는 체제였던 것이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마르크스의 등장.

산업혁명기 노동의 가치는 낮았다. 노동자는 많았고 노동법과 같은 권리는 미비했다. 5살도 채 되지 않은 아이들이 돈을 벌기 위해 발암물질을 들이키며 굴뚝을 닦았고 10살도 채 되지 않은 아이들의 손가락과 팔뚝이 기계에 껴서 잘려나가고 비틀렸다.

 

누군가 일하다 죽는다해도 책임지는 사람은 없었고, 모든 책임은 노동자 개인의 과실이 되었다. 언제 어떻게든 해고해도 문제되지 않았고 비인간적인 노동환경은 끔찍하다못해 이전 시대 농노들보다 비참했다.

 

분명 시대는 발전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더욱 비참하고 잔혹한 삶을 살게 되었다. 이것에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낀 사람들이 있었다. 노동자들은 이러한 상황에 불만을 터뜨리며 자본가와 의회, 정부에 요구했고 그들의 방해와 강경대응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권리를 조금씩 얻어나갔다.

 

그리고 이런 자본주의의 비인간성과 모순을 통찰한 이들이 몇 있었다. 프로이센의 카를 마르크스가 그러했다.

 

마르크스는 기존 공상적이거나 이상적이었던 사회주의를 비판하며 더 현실적이고 더 과학적인 공산주의 이론을 전개했다. 철학의 대가였던 그는 자본주의를 분석하고 설명했으며 그 한계 역시 지적했다. 그는 자본주의가 발달한 끝에 공산주의로 도달할 것이라 말했고, 그 과정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핵심은 이것이다. 비인간적인 노동환경과 불합리한 부익부 빈익빈을 기본으로 하는 체제는 모순적이기에 반드시 무너질 수밖에 없고, 그러한 상황에 반발한 이들과 그러한 모순을 통찰한 이들에게 자본주의는 매력적인 체제가 아니었다. 따라서 그것을 대체할 무언가가 필요했다는 것이다. 공산주의가 그러했고, 이것에 호응했던 노동자-혁명가들이 그러했다.

 

 

혁명의 시대.

레닌은 러시아에 혁명을 성공시켰다. 세계 최초의 노동자 국가가 건국된 것이다. 그 이전에도 수많은 혁명가들이 자본주의 세계를 무너뜨리고 사회주의, 공산주의 세계를 만들려 했고, 파리 코뮌 역시 그러했다. 이들은 실패했지만 레닌은 성공했다.

 

이후로도 세계의 수많은 국가들에게 공산주의 혁명이 발생했다. 그러나 이 나라들이 어떤 곳인지 찾아본다면 이상한 사실을 하나 발견할 수 있다.

 

혁명이 발생하고 성공한 국가 중, 자본주의가 발전한 국가는 없었다는 것을.

 

실제로 자본주의가 발달했던 서유럽, 중부유럽과 북미에서 공산주의 세력은 있었지만 힘을 쓰지 못했다. 이것을 이미 체제를 장악한 자본주의가 경쟁체제의 성장과 발전을 억제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고, 단순히 체제의 경쟁력 면에서 자본주의보다 우위에 있을만한 것이 없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둘 다 맞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후진국에서 공산주의가 성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후진국민들에게 공산주의는 상당히 매력적인 부분이 있었을 것이다.

 

 

공산주의는 어떻게 후진국의 체제가 되었을까.

후진국들은 대체로 아시아와 남미, 아프리카와 같은 제3세계의 국가들이었다. 다르게 말하자면 서구의 밖이었고, 자본주의는커녕 유럽 문명 기준 중근세를 벗어나지 못한 국가들이었다.

 

그런 국가들은 제국주의 당시 서구의 침략을 받았다. 그리고 공산주의는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을 주장했던 사상이었고 그들을 신음하게 만들었던 자본주의를 거부하는 것이었다.

 

후진국 구성원들은 자본주의를 제대로 경험해본 적이 없고 교육수준이 낮았다. 이들에게 상상력의 발휘는 직접적이고 간단해야했다. 가령, 모두 잘먹고 잘 사는 게 뭐가 나빠?와 같은 문장은 그들에게 쉽게 이해되고 동의할 수 있는 개념일 것이다.

 

이러한 세계에서 인권은 머나먼 개념에 가까웠다. 전통적이고 관습적인 도덕과 규칙들은 있었지만 그만큼 폭력과 불합리 역시 만연했다. 그들의 세계는 협소했으며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선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다. 그런 곳에서 자본주의는 깊게 뿌리내리기 어려웠으며 기존 체제보다 우월하다 말하기 어려웠다. 자본주의가 처음 발흥했던 영국의 노동자들은 얼마나 비참했는가.

 

노동권 역시 서구와 비서구의 수준이 다르듯이, 20세기 초중반 혁명의 불길이 올랐던 국가들에게도 노동자들에게 권리는 산업혁명기 영국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렇다면 언제나 약자였던 그들에게, 아직 전근대적 관성하에 권력자에게 죽창을 휘두르던 민란과 반란의 인상이 남아있던 노동자들에게 공산주의가 말하는 것들이 어떻게 들렸을까. 전근대 지주보다 더 가혹하게 노동자를 다루는 공장주와 해가 뜨고나서 일을 하고 해가 지기 전에 돌아오던 농경 시절보다 더 통제되는 환경에서 시간은커녕 분 단위로 노동을 다루는 공장은 더욱 힘들었을 것이다.

 

논과 밭에서 그들은 그 스스로가 관리자이자 노동자였다. 자영농의 경우 그 스스로가 주인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농사를 지으며 스스로 해왔고 스스로 노력하고 노동을 조절해왔다. 오랫동안 농사해오며 배우고 깨우치고 알게 되는 것들도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공장에서는 단순 노동자 한명에 불과했을 것이고 스스로가 주인인 것도 아니고 무언가를 한다는 느낌조차 없었다. 단지 정해진 공정대로 반복해서 움직일 뿐이다. 더 나을 게 없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지독하고 비참한 환경에서 누군가 찾아와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이건 뭔가 잘못됐어. 뭔가 바뀌어야 해. 우리의 권리를 찾고 정당한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그렇게 기본적인 노동권과 사상, 공산주의 이론을 딱 필요한 만큼만 가르치고 지하조직을 만드는 것이다. 노동에 대한 인식과 실제 현실이 처참할수록 공산주의는 자본주의보다 매력적이게 들릴 것이다. 그들에게 공산주의 혁명은 좀 더 조직화되고 좀 더 큰 대의를 담은 민란과 다를 바 없었다. 지역 관리가 부정부패해서 백성들이 먹고 살기 어려울 때 들고 일어나는 것과 큰 차이가 없었던.

 

 

왜 실패했는가?

반대로 질문해도 좋다. 자본주의는 어떻게 지구의 대부분을 지배하게 되었는가?

 

답은 간단하다. 인간이 무언가를 하기 위해 필요한 자원을 어딘가에 투입해야 한다면 당연히 더 많은 자원을 가지고 있는 쪽이 우월하다. 그것이 노동력이 됐든, 땅이나 나무 열매, 종자, 혹은 기계와 같은 생산성이 됐든, 더 간단하게 돈이 되었든.

 

자원은 지구에 존재하는 원소만큼이나 다양하고 많다. 그리고 그것들은 제각기 다양하게 연관되어 있고 다양하게 가공될 수 있으며 조합될 수 있다. 부족사회는 부족의 인구만큼의 노동력을 동원할 수 있었고, 그러한 노동력이 채집하고 보관할 수 있는만큼의 자원만 동원될 수 있었다.

 

왕국은 왕국의 인구만큼의 노동력을 동원할 수 있었고 그러한 노동력이 채집하고 생산하고 보관할 수 있는만큼의 자원을 동원할 수 있었다. 체제와 수단에 따라 그 이하, 혹은 그 이상을 동원할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자본주의는 어떠한가. 자본주의는 자원의 효율적인 소비(혹은 투입)와 생산의 극대화를 추구한다. 따라서 그 어떤 체제보다 우월한 생산성을 갖추고 있고, 그 어떤 체제보다 압도적인 자원을 보유할 수 있다. 식량생산이 인구와 밀접한 관계를 맺듯이 어떠한 요소는 다른 요소와의 복합적인 관계성을 가진다.

 

다르게 말해서 자본주의는 공산주의보다 더 우월한 힘을 발휘하게 만드는 체제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이는 21세기 이전의 체제들간의 비교에 불과하다. 공산주의는 후진국에서만 성공한 체제이고, 애초에 자본주의는커녕 근대에 접어들지도 못했던 이들이 근대에 접어들기 위해 선택한, 그들의 요구에 부응한 거의 유일한 체제에 불과하다.

 

자본주의는 제국주의 국가들의 사상이었고, 그러한 서구 제국주의를 거부했던 후진국 피지배국은 서구의 그것을 그대로 답습하기보다 그것을 거부하는 공산주의를 택했다. 어차피 자본주의가 성공하지도 않았기에 자본가들은 그들이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이 혁명을 요구하는 이들을 억누르고 제압할 정도로 많지 않았다.

 

애초에 자원이 부족했던 국가들에게서 공산주의가 성공한 것이고, 당연히 기존의 자본주의 국가들과 경쟁이 가능할 리가 없었다. 가진 자원도 부족했는데 그것을 생산하는 체제 역시도 뛰어나지 못했다. 후진국 특유의 부정부패와 후진적 의식세계는 더 경쟁력 있는 사회를 건설하기도 어렵게 만들었다.

 

소련, 현재의 러시아 역시 그러한 후진적 의식와 부정부패에 의해 자원이 낭비되고 비효율적인 국가가 되었다. 이는 그들이 공산주의를 받아들였기 때문이 아니라 모든 후진국들이 다 그러하다. 민주주의가 됐든, 정치적 성숙성이 되었든 그것은 대중의 경험을 필요로 한다. 이는 곧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고, 민주적 전통과 관습이 충분히 뿌리 내리기 위해서 서구는 수백년의 시간을 보내어 겨우 지금의 수준에 도달한 것이다.

 

그것을 100년전 근현대에 도전한 후진국들이 이제 막 서구와 동등한 수준이 될 수는 없는 법이다. 공산주의 국가나 그랬던 국가들이 쉽게 독재를 벗어날 수 없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한국 역시 민주주의는 건국된 지 반세기는 더 지나야 가능했음을 인지하라.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다음 단계를 공산주의라고 말했다. 자본주의가 계속 발전하고 기계로 대표되는 압도적 생산성이 지구를 지배한 이후 자본의 존재는 그 의미를 잃을 것이기 때문이다. 가령, 기계가 모든 노동을 대체했을 때를 생각해보자. 자본가만이 무한하게 자본을 축적했으나 노동자는 더 이상 돈을 벌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은 오직 가진 돈을 모두 쓸 때까지 소비만 할 수 있다.

 

그마저도 더 이상 소비하지 못할 시점이 찾아오며 끝날 것이다.

 

자본주의는 그렇게 끝이 난다. 그러나 이를 분배의 방식으로 해결한다면 어떨까? 정부는 자본가-기업에게 세금을 걷고 노동자에게 돌려준다. 노동자는 그것을 통해 다시 소비하고 살아갈 수 있다. 자본가와 기업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막대한 세금을 내면서 노동자가 소비한 돈으로 계속해서 기능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자본가는 자신의 돈을 결코 풀려고 하지 않을 것이고, 정부는 (단기적으로는) 노동자보다 자본가의 편을 들었던 것이 실제 역사에서 증명된 바이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그런 맥락에서 등장한 개념이다. 노동자들이 단결하여 자본가에게서 자원을 강제로 빼앗을 수 있게 하는 막대한 권력을 말이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후기에 러시아나 중국을 비롯한 후진국에서 공산주의의 발생 가능성을 인정했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으나, 공산주의는 애초에 오래 유지될 수 있는 체제가 아니었다. 자본주의라는 체제와 경쟁을 했지만 동원 자원과 능력에 있어서 자본주의의 우월성을 압도할 수 없었고, 후진국의 전근대적 관성들은 부정부패나 정치적 성숙에 있어서 서구보다 더 나을 것이 없었다. 오히려 이전 시대와 크게 다를 바 없었거나 더 나빴다.

 

선진적 제도들은 더 많은 자원을 다룰 수 있었지만 만연한 부정부패에서 그것은 더 많은 자원 유출과 비효율을 발생시킬 뿐이었다. 이건 공산주의의 한계가 아니라 전근대에서 진정으로 벗어나지 못한 사회의 한계이다. 서구 유럽에서 공산주의 혁명이 성공했다면 유럽의 공산주의는 생각보다 더 잘 돌아갔을 것이다. 최소한 소련보다는.

 

기술적으로도 불가능했다. 소련은 만연한 부정부패를 방지하고 더 효율적인 행정 및 계획경제를 가능케하기 위해 오가스(OGAS)를 구상했지만 당시 컴퓨터 성능으로는 불가능했다. 공산주의 국가의 구성원들은 후진적 의식을 가졌기에 공과 사의 구분을 제대로 하지 못했고 부정부패했다.

 

그렇다고 부정부패를 충분히 통제 가능한 기술력이나 행정력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기술적으로 불가능하고, 행정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실질적으로도 유지 및 지속 가능한 체제가 아니었다. 단지 가진 자원과 생산을 통해 최대한 오래 버텼던 것 뿐이고 이는 체르노빌 등의 악재들이 없었다해도 기껏해야 수십년 더 이어졌을 것이다.

 

공산주의는 태생적으로 자본주의의 모순과 한계에서 비롯됐고 너무 일찍 발생했다. 자본주의는 아직 충분히 발전하지 못했고 공산주의를 적용한 사회는 자본주의가 제대로 탄생한 적도 없었다. 전 세계가 공산주의의 물결에 의해 자본주의가 멸망하고 지구상 유일한 체제로 공산주의가 작동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오래 유지될 수 없었다. 그것이 작동하기엔 시대가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체제 경쟁은 그런 의미에서 물리적인 것이 아니었다 정의해야할 것이다.

 

 

자본주의는 왜 끝장나지 않았는가.

공산주의와 그것을 추종하는 이들이 혁명을 요구했고 실제 행동으로 나타난 적도 많다. 자본가와 정부는 그들의 힘이 (아직 소련이 등장하기 전에서조차도) 무시할 정도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고 그들의 파괴적인 에너지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본주의는 등장한지 오래된 것이 아니었고, 노동자의 요구는 느리더라도 지속적으로 응답받았으며 그렇게 자본주의는 수정되었고 또한 발전하였다. 그 결과 자본주의는 그 모순을 '어느 정도' 교정할 수 있었고 덕분에 그 수명을 연장했다. 사회주의적 원리는 그들의 적 역시 성장시켰다. 혁명이라는 최악의 상황을 거부하기 위해서라도 그들은 노동자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자본주의는 균형을 맞춰갔다.

 

그리고 그 덕분에 자본과 노동의 균형은 어느 정도 맞아갈 수 있었으며 처음 지적되었던 자본주의의 모순과 한계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었다. 초기의 공산주의자들은 자본주의 역시 발전하고 수정될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했거나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그들의 믿음이 승리하리라 믿었겠지만 근본적인 한계는 공산주의가 더 심각했을 뿐이다.

 

자본주의 역시 언젠가는 끝이 날 것이다. 그것이 다시금 자본주의가 폭주하여 모순을 해결할 수 없게되었을 때가 되었든, 4차 산업혁명으로 대표되는 자동화와 인간 노동의 탈피를 통해서일지는 그때가 와봐야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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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전근대 사회에서 법보다 주먹이 가까운 까닭은 행정력과 치안이 기술을 기반으로 하여 구성원 개개인에게 빠르고 직접적으로 적용, 통제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장 발생한 범죄나 불만을 빠르고 정확하게 해결해줄 수 있느냐를 따졌을 때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며, 행정력의 수준이 낮을 수록 공정한 집행 역시 기대하기 어렵다. 이는 필연적으로 관료나 군인 개인의 부패 및 지역 유지와의 유착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1.

또한 전근대 사회는 대체로 적은 인구로 구성된 작은 공동체사회이곤 했다. 그리고 어떤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평생 얼굴보고 살 사이이기 때문에 웬만한 문제는 어떻게든 원만하게 합의하기 마련이고, 합의가 어려울 경우 공동체의 큰 어르신 역할을 하는 이, 요즘의 마을에서라면 이장 같은 위치에 있는 사람의 권위를 통해 합의를 이루어낸다.

 

문제는 이 작은 사회 속에서 누군가의 평판이 나빠진다면 이를 다시 원상복구 시키기 위해선 지대한 노력이 필요하고, 그럴 수 없는 문제를 발생시켰거나 지나치게 이미지가 망가질 경우는 복구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영화 더 헌트에서 주인공은 오해로 인해 누명을 썼고 결국엔 벗어났지만 모두에게 크나큰 낙인이 찍혀버렸고 어렸을 때부터 허물 없이 지냈던 친구들과도 알 수 없는 벽이 세워진 어색한 사이가 되어버리고 만다. 단순 오해로 인해 발생한 일조차도 이럴진데 뒤집을 수 없는 사건이라면 어떻겠는가.

 

2.

이러한 이유로 전근대 사회에서 법보다 주먹이 더 빠르게 문제를 해결하는 믿음직한 수단이 되었고, 작은 사회 내에서 입소문과 평판은 그 사람의 사회적 지위와 극단적으로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이러한 평판이 나빠져 집단 내에서 도태되거나 서열이 밑바닥으로 떨어져버리는 상황을 매우 경계할 수밖에 없다.

 

흔히 말하는 불가촉천민이 되어버리는 경우 개인이 할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다. 큰 희생이나 큰 도움을 주면서 자신의 지위를 어느 정도 복구해야만 하는데 결코 쉬운 일이 아니고 의도적으로 할 수 있는 일도 아닌 경우가 많을 것이다.

 

3.

문제는 전근대 사회에서 다른 지역으로 이주한다는 것은 그보다도 어려운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자신이 태어나고 살아온 지역사회는 자신의 조상대부터 살아왔던 인맥과 인연으로 이어져 있는 곳이고 살아오면서 만들어낸 인맥과 인간관계는 자기 혼자서 해결할 수 없는 일에 도움을 받거나 도와줄 수 있다.

 

정보를 제공하고 제공받을 수 있으며 개인 단위 노동력의 한계를 아웃사촌친구지인의 도움을 받아서 해결할 수 있다. 자기 집안 자식이 남의 집안 농작물을 서리했다 하더라도 나중에 아이고 형님, 형수님 하고 찾아와 다른 농작물을 선물해주거나 초대해서 밥을 한끼 해줄 수도 있다. 그리고 그럴 것을 서리 당한 집안도 안다. 그렇지 않을 경우 당한 쪽은 체면이 깍이고, 갚아주지 않은 집안은 평판이 깍인다.

 

조상 대대로 살아왔다는 역사성은 그들이 그 지역에서 앞으로도 계속 살아가야할 당위가 되고 밖으로 나가선 안 되는 금기가 된다.

 

이를 반대로 말하자면 지역사회를 떠난다는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고, 전쟁이나 재해, 재난, 집안 누군가가 관직을 얻어 이주하는 경우는 이유가 있고 정당한 사유가 될 것이다. 그러나 아닌 경우, 처음보는 모르는 동네의 누군가가 자신의 동네까지 와서 이주를 청하는 경우 대부분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무슨 사고치고 도망쳐왔나보군. 이런 사람을 받았을 때 어떤 문제를 일으킬지 알 수 없겠어.'

 

조상 대대로 살아온 이웃사촌들은 그러한 역사성으로 이어져있기 때문에 믿을 수 있다. 같은 지역에 태어나 같이 자라왔던 이들이기에 믿을 수 있다. 우리 공동체 내부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외지인은 그러한 역사적 연관이 없다. 그들의 뿌리를 알 수 없고 뭐하는 사람인지, 어쨰서 이곳에 왔는지 등등 많은 것을 알 수 없다. 대체로 사고치고 쫓겨났거나 도망쳐왔을 것이라는 의심은 어떤 면에선 합리적인 구석도 있다. 새로 적응하고 뿌리내리는 것도 쉽지 않다.

 

이러한 구조는 이주가 상대적으로 자유로워지는 도시, 공장으로 대표되는 근대에 접어들면서 해체되었다.

 

4.

지역 사회의 언터쳐블이 되지 않기 위해, 아니. 그저 자신의 평판이 나빠지고 체면이 상하는 것을 막기 위해 민감할 수밖에 없다. 특히 암묵적 인정받는 높은 지위와 권위를 가졌을 수록 그렇게 된다.

 

누군가 자신을 모욕하거나 무시한다면 설령 그것이 어느 정도 정당하다 하더라도 이를 옳고 그름의 문제와 도덕적인 문제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다. 가령, 내가 잘못한 것은 맞지만 저렇게 공개적으로 들고 나와 사람들 귀에 들어가게 만드는 것은 내 체면을 훼손시키는 일이고 내 평판을 떨어뜨리는 일이다. 따라서 더욱 강경하게 대응하고 실질적인 손해와 압박을 통해 굴복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행적 사회구조는 21세기에 접어들어도 전근대 사회에 가까운 사회일 수록 흔하고 보기 쉽다. 근본적으로 근대화, 혹은 현대화되지 못한 사회적 관계망 체계 및 지역사회의 형태, 무엇보다 개개인의 의식수준이 물질 문명의 발전속도와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한국 역시도 개발기엔 여전히 중세적, 왕조시대적, 전근대적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고, 촘촘하지 못한 행정력과 치안, 부패 문제는 법보다 주먹이 더 가까웠던 까닭이었다.

 

5.

현대에도 그러한 사회가 여전히 있고 전근대적일 수록 그러한 경우가 많다고 했는데, 몇가지 엄밀히 짚어야할만한 집단들이 있다.

 

하나는 독재국가이고, 다른 하나는 조폭집단이다.

 

독재국가에선 지도자나 당의 체면과 평판이 매우 중요하다. 이는 조폭집단에서 높은 위치에 있는 이들이 아랫사람에게 자신의 체면과 평판이 매우 민감한 가치가 되는 것과 완벽하게 동일하다. 조폭에서는 아무리 낮은 위치에 있다 하더라도 자신보다 낮은 말단이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건방지게 굴거나 대드는 것을 결코 허용하지 않는다.

 

반드시 보복과 처벌이 있기 마련이고 이러한 수직적 서열관계는 그것이 법과 제도상의 원칙이 아니라 폭력과 주먹에 의해 형성되는 관행과 경험적으로 구성되는 체계로 이루어진다.

 

독재자들이 자신에 대한 도전과 반항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 역시도 유사하다. 독재라는 권력독점을 끝 없이 유지하기 위해서 시민들의 반발과 정치/경제/특히 군 내의 반대세력을 무력화해야 하고 지속적으로 감시 및 통제해야 하는 것 역시 맞는 설명이지만 근본적으로 조폭세계와 다를 바 없는 전근대적 가치관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도전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누구라도 하나 용인하면 누구든 자신을 무시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북한은 그러한 가치관들이 혼재되어 있는 가장 대표적이고 적절한 사회라고 볼 수 있다. 독재자인 지도자의 체면과 평판은 무엇보다 중요하고, 실제 외교적, 군사적 성과와 발전보다 단순 지도자의 체면을 다른 것보다 더 우선하기 때문에 상식적으로 받아들일만한 제안이나 협상마저도 파토내고 독재자 개인의 가오를 살리는 쪽을 택한다. 조금이라도 굽히는 듯한 모습이나 동등한 모습을 연출하지 않고 파토내더라도 회담과 협상의 결정권에 자신이 주도권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6.

이는 한마디로 정의할 수 있는 형식이다.

 

나에 대한 도전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의 엘리트들은 어떠할까. 의사들은 자신의 지위와 특혜 언터처블한 접근을 요하고, 이는 검사나 판사 역시도 크게 다르지 않는다. 이에 대한 접근은 오직 더 강하고 위험한 특정 정치세력에게만 일부 허할 뿐이다. 그마저도 원래 그 집단의 구성원들이 정치세력의 구성원이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떠한 대가를 주고 받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자식이 서리한 농작물을 다른 것으로 갚아주는 것처럼.

 

여기에 권력, 특혜, 자본이라는 문제가 낄 경우에 현대사회의 문제가 된다.

 

전문직을 비롯한 엘리트들은 자신들의 권위와 이익에 민감하다. 그들은 똑똑하고 능력이 있기 때문에 남들보다 더 유리한 위치와 더 많은 수익을 얻어낸다. 기업가들은 특히 더 많은 자본을 얻어내며 그렇게 벌어들인 돈은 다른 법, 의료 등의 사회지도층 전문직에 비해 전문영역을 기반으로 하는 권력을 가지진 못하지만 자본주의 체제이기 때문에 어떤 면에선 그들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할 수도 있다.

 

문제는 그들이 자신의 이권을 단 하나도 내놓지 않으려한다는 사실 그 자체이다.

 

7.

엘리트 카르텔에 속하는 자들은 상식적이고 공정한 위치로 그들의 특혜를 재조정하는 것은 자신들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한번이라도 거기서 물러나 양보하게 된다면 그러한 일이 끝없이 반복되리라 믿는다.

 

첫 시도 자체를 도전으로 받아들인만큼 이는 공정과 불공정, 필요한 불필요, 정의와 부정의 문제와 같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이기고 지고의 문제가 된다. 그들은 자신이 노력과 성공을 통해 얻어온 것이고, 그러한 특혜와 권위, 언터처블한 지위를 얻기 위해 여기까지 온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그에 대한 외부자의 접근에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외부자들이 자신들의 이권, 다시 말해 밥그릇 문제로 귀결되는 그것을 건드리는 것은 체면의 문제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무언가 문제로 지적되는 요소가 '공정하게'. '정의롭게'. '상식적이게' 변화하는 것을 거부한다. 만약 그것이 성공하게 된다면 굴욕적인 패배로 인식하게 된다. 만약 그들에게 어떠한 문제가 바뀌기 위해선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요구할 것이다. 이는 불공정에서 올바름을 찾아가는 개혁이 아니라 자기 밥그릇을 보전해줄 거래로 여기는 것이다.

 

8.

이제 자본주의에 대해 특정해보자. 이러한 문제는 기업가에 대한 개혁, 자본시장에 대한 개혁 역시도 마찬가지다. 밥그릇에 대한 침해이자 권력자인 자신에 대한 도전으로 여기기 때문에 그러한 개혁과 공정한 변화를 거부하고 반발한다.

 

전근대적 체면 문제로 인해 개혁을 침해와 체면 문제로 받아들이고 거부한다. 모든 것은 결국 제어받지 않는 탐욕이 원인이다.

 

9.

공유지의 비극을 알 것이다. 본래 생태학, 환경과 관계된 것이지만 실제로는 경제학 쪽에서 더 자주 쓰이는 그것말이다.

 

모두가 사용할 수 있는 목초지가 있고 주변에 가축을 치는 이들이 있다면 자기 소유의 목초지 대신 공유지의 목초지에서 먹이는 것을 더 선호할 것이다. 그것이 자신의 손해를 줄이고 이익을 늘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목초지는 적당히 넓어서 모두가 일정량만 소모시킨다면 지속 가능하고 충분히 나누어 먹일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누군가 탐욕을 부려 이 목초지의 자원을 전부 소모시켜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다음부터는 먼저, 많이 먹이는 쪽이 무조건 이익이 된다. 이미 누군가 다 먹이게 된다면 그곳까지 가축을 끌고 오는 비용만 낭비될 뿐 얻는 건 전혀 없게 된다. 결국 이는 극소수를 제외하곤 모두에게 손해가 될 것이다. 특히, 사회적 신뢰가 파괴된다.

 

10.

자본은 순환되어야 한다. 기실, 모든 자원은 순환되는 것이 좋다. 자본주의에서 자본은 역시 순환되어야 한다. 물론 순환되기만 해야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의 발전과 함께 순환되어야 하고, 올바른 순환은 경제의 발전을 불러오기에 순환되는 것이 옳다.

 

공유지의 비극을 막기 위해 제안된 이론과 방법들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가장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심판의 존재이다. 공유지의 목초지를 누군가 독점하고 전부 소비하지 못하도록 심판이 그들을 규제하고 제한을 두는 것이다. 이것이 반드시 올바른 것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원론적으로는 효과적이고 필요하다.

 

그리고 자본주의 체제에서 그러한 역할은 정부가 담당한다.

 

기업과 노동자, 정부가 알아서 시장경제에 따라 균형을 맞춘다면 정말 좋은 일이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론적으로만 가능하고 누군가는 반드시 공유지를 소모시킨다. 편법, 불법, 관행과 부정, 로비와 엘리트 카르텔끼리의 관계망까지. 다종다양한 방식으로 원칙을 지키지 않고 가능한 것보다 더 많은 자원(이익)을 얻기 위해 움직이는 자들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남들보다 더 많은 이익과 성공을 추구하는데 제한되지 않는다면 법과 원칙, 정의를 지키려하지 않을 것이고 남들보다 더 교활하고 부정한 방식으로 이익의 극대화를 추구할 것이다.

 

문제는 정부와 정당이 그들의 방식에 호응하는 것이다. 법을 어겨도 얻어낸 것보다 훨씬 적은 푼돈으로 죄값을 치루거나, 이익에 비해 너무 약한 처벌이 가해지는 경우도 있으며, 아예 법적인 마사지를 통해 빠져나가게 해주거나 꼬리자르기 등으로 넘어가는 경우도 있다.

 

심지어 법이나 제도를 바꾸어 재벌대기업에게 유리한 환경을 조성해주기도 한다.

 

돈은 돌아야 하는데 물가는 오르고 임금이 오르지 않는다. 단기적으로는 기업은 지출이 줄고 수익이 늘어나기 때문에 경제적인 이익을 얻게 될 것이고, 기본적으로 이익을 늘리기 위한 단순하고도 논리적인 방식이다.

 

그러나 이것이 장기적으로, 그리고 전방위적으로 발생할 경우, 무엇보다 노동자의 임금상승을 제한하는 식으로 이루어진다면 노동자들은 적게 벌고 반드시 나가야할 돈은 많기 때문에 지출을 최대한 줄일 것이다. 그리고 이는 기업의 이익을 줄이게 되는 일이 될 것이다.

 

물론 이 또한 어디까지나 이론적인 이야기일 뿐이고 실제로 기업은 그래도 돈을 벌 것이다. 그러나 점차 사회의 성장동력은 줄어들고, 다양한 분야에서 부작용이 발생할 것이다. 한탕주의, 저출산, 사기나 횡령 등의 경제사범이 늘어나기도 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시민, 노동자들은 부를 쌓기 어려워지고 재벌대기업은 막대한 부를 쌓게 될 것이다. 이를 관리해야할 정부가 이 흐름과 순환을 건전한 방식으로 조성하지 않으면 자본의 동맥경화가 발생하게 될 것이다. 기업가를 비롯한 엘리트들은 이를 더 나은 발전이나 장기적 지속 가능성으로 보지 않고 체면과 자존심이 걸린 도전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한번 자신의 이권을 양보하면 두번이 될 것이고, 세번이 될 것이며, 끝없이 양보하고 내줘야할 것으로 여길 것이다. 그렇게 자본가는 정치권력에 예속된 존재가 될 것으로 예측할 수도 있다. 

 

11.

그들은 결코 자신의 탐욕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욕심을 가지는 게 무엇이 문제냐고 할 것이다. 욕심은 발전의 자양분이 되고 충분히 추구할 수 있는 것이다. 욕망은 욕망되어야 하고 그것이 법을 어기거나 비도덕적이지 않는 한 잘못된 게 아니다.

 

그러나 탐욕과 욕심이 죄악으로 여겨지는 이유는 그것이 무한하기 때문이며 절제될 수 없는 속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충분히 먹고 살 수 있으면서도 더 큰 이익을 얻고자 했던 파홈은 더 많은 땅을 얻기 위해 탐욕을 부리다 악마의 의도대로 죽게 되었다. 그가 중간에 절제했다면 더 넓고 훨씬 좋은 땅을 얻은 채 오랫동안 잘 먹고 잘 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종래에 그가 얻은 땅은 그가 누울 3아르신 뿐이었다.

 

파홈의 이야기는 톨스토이의 기독교적 교훈이 담긴 이야기일 뿐이지 현실세계의 당위나 운명으로 작동하지는 않는다. 부정한 사회일수록, 부정한 정치권력이 지배하는 사회일수록 파홈의 사례는 줄어든다. 정부가 부정하고 악한 이들에게 적절한 처벌과 규제를 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제는 그 자체로 공유지이다. 자원이 순환되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유한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에는 한계가 있고, 자원 역시 한계가 있다. 이것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자원은 한계가 존재하기에 순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본의 동맥경화가 찾아오면 자본주의는 지속 가능성에 한계가 찾아온다. 누군가 자원의 절대다수를 독점하고 분배하지 않는다면 모두가 고사할 것이다. 단지 가진 사람이 더 늦을 뿐이다. 그마저도 아무런 폭력도, 외부세계로의 도피가 없다는 전제 하의 이야기일 뿐이다. 대체로 그러한 한계 상황에서는 혁명, 쿠데타, 정부전복, 심지어 외침 등 다양한 방식의 폭력이 체제에 끝장을 내기 마련이다.

 

공유지의 지속 가능성을 유지하기 위해선 공정한 심판의 존재가 필수적이다.

 

정부는 자본주의 체제를 지속 가능하게 만들기 위해서 필요한 조치를 취해야만 한다.

 

엘리트들은 그러한 요구를 받아들이는 걸 체면이 깍이는 문제, 혹은 이권에 대한 도전으로 여겨선 안 된다. 이것은 그러한 문제를 초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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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에 따르면 인간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할 권리는 가진 똑같이 가치있는 존재이다. 그러나 실제 삶은 똑같지도 공평하지도 않다. 문명의 발전은 공평하지 않은 삶을 조금씩 덜 불공평한 것으로 만들어가는 사회적 진화 과정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사회의 진화는 순탄하거나 평화롭지 않다. 인간은 중요하고 질서 정연하게 더 정의롭고 공평한 세상을 만들어나갈 수 없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유시민, 후불제 민주주의. -p63

 

0.

이제는 오래된 책으로 취급받을만한 유시민씨의 후불제 민주주의 초반부에 이러한 내용이 나옵니다. 여기서 유시민씨는 문명의 발전을 공평하지 않은 삶을 조금씩 덜 불공평한 것으로 만들어나가는 사회적 진화 과정이라고 서술했습니다. 사실, 저도 그에 대해 예전에는 동의했습니다. 왕정에서 민주주의로 발전된 것은 숙명적이고 발전 과정상의 당연히 도달해야할 운명적인 단계로도 착각했던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역사적으로 많은 요인들과 우연, 필연들이 쌓이고 곂쳐져 발생한, 글자 그대로 진화적 우연의 산물입니다. 신생대의 어느 유인원이 나무에서 내려오고, 도구를 사용하면서 인간이 되어 지금의 문명이 만들어진 것은 어디까지나 우연의 산물이고, 단순히 불을 발견하거나 고기를 익혀먹었다는 것 외에도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가 된 것은 더 많은 우연이 있었으며, 그 우연을 기회로 삼았기에 가능했던 일이죠.

 

인간의 등장이 생태적 필연이 아니었던 만큼, 민주주의의 등장도 등장할 수 있는 여러 가능성 중 하나였을 뿐, 정치적 필연성을 가지는 체제가 인간 무리의 태초부터 존재하는 도착지, 혹은 경유지 따위는 결코 아닙니다.

 

하여간 어찌되었든 민주주의는 등장했고, 우리는 그 환경 속에서 살아갑니다.

 

 

1.

유시민씨의 말에 따르면 문명의 발전은 공평하지 않은 삶을 조금씩 덜 불공평한 것으로 만들어가는 사회적 진화 과정이라고 했습니다만, 민주주의가 우연적으로 등장했듯, 문명의 발전은 공평하지 않은 것을 조금씩 덜 불공평한 것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이 아니었습니다.

 

 

2.정치적 권력.

처음 인간이 무리를 이루었을 때는 혈연, 씨족으로 이루어진 소규모의 부족 단위였습니다. 이것은 짐승들이 무리를 이루는 것과 동일한 단위였고, 종적 차이와 개별 부족에 따른 구성원의 숫자에 차이가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 시기에 무리, 혹은 부족에는 부족장과 구성원이 있을 것이고, 그 외 세부적인 역할을 지닌 자들이 있었을 겁니다. 다만 이 역할은 다소 유연하기 때문에 남자라고 해서 사냥만 하거나, 여성이라고 해서 채집만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부족장과 구성원으로 이원화되어 구분된 조직을 갖추고 있을 것이고, 그들에게 경험과 노하우는 있을지언정 법이나 제도는 없었지요.

 

또한 집단의 부로 대표되는 경제력은 매우 낮으며 집단 내부에서도 그러한 경제력의 차이는 크게 뚜렷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부족장이 특별히 더 많은 자원을 독점하거나 차지한다면 내부불만을 감당할 수도 없고, 그걸 떠나서 집단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는 상황까지 도달할 수 있기에 그럴 수도 없었을 것이며, 설령 그러했다면 그 무리는 와해될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따라서 경제력이라는 지표와 그 경제력을 어디까지 독점할 수 있느냐, 다시 말해 부족장과 구성원간의 경제력 차이가 얼마나 차이가 날 수 있느냐를 고려했을 때 상위계급과 하위계급의 정치적 권력은 크게 차이나지 않습니다. 부족장이나 나이든 노인은 무리 내에서 존경과 존중을 받고, 때로는 부족장보다 나이든 노인의 권위나 존중이 더 높을 수 있으나 무리 내 모든 것이 부족장, 혹은 노인의 의중대로 돌아가지도 않고 그들이 축재할 수 있는 자원의 한계 역시 컸습니다. 오히려 수많은 부족사회가 남아있는 문화권에서 찾아볼 수 있듯이, 그러한 자원을 나누어야 생존과 권위를 유지시킬 수 있습니다.

 

 

그 이후 부족은 여러 부족을 합병하거나 정착을 통해 자원 한계가 늘어나는 등 인구와 자원이 늘어나게 됩니다. 그에 따라 부족국가와 도시국가들이 생겨나게 되었고, 정치적 권력의 총량 역시도 늘어나게 됩니다. 인구가 늘어남은 피지배민이 늘어나고, 자원이 늘어났다는 건(그것이 한계점에 가깝지 않다는 전제 하에) 권력자 개인이 차지하고 독점할 수 있는 자원의 양 또한 늘어난다는 의미입니다.

 

부족국가는 자원을 차지하거나 그것을 빼앗기지 않기 위한 목적을 중심으로 주변 지역을 정복하거나 합병했고, 국가화됩니다. 

 

왕은 이전 시대보다 훨씬 더 큰 권력과 자원을 독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중앙집권화 되지 않은 시기의 한반도 고대국가의 경우나 봉건제가 시행되었던 중세 유럽 등 왕이 다른 귀족들에 비해 압도적인 권력을 가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훗날 왕국, 혹은 제국들은 더 강력한 권력의 집중이 발생하게 되고 유럽의 경우도 봉건제에서 절대왕정화 되는 경우 역시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특히 프랑스에서 두드러진 것이며, 독일 역시 비슷하게 흘러갔으나 신성 로마 제국은 선제후로 대표되는 강력한 귀족집단에 의해 거대화된 봉건제와 유사한 면이 있으며, 황제 즉위를 위해서는 교황의 대관식이 필요했고, 신권에 의해 파문 역시 가능했죠. 빌헬름 시대에 와서도 군주는 법을 지켜야 했고, 영국에서도 여러 혁명과 개혁을 통해 입헌군주정의 기틀 아래 체제가 변화했고 끝내는 사실상의 공화정이 되었고요.

 

하지만 이 과정 동안 시민들의 권력은 아주 오랫동안 정체되어 있었습니다. 시민들 중 일부가 부를 얻어 계급화되거나 공장과 도시에 의해 구시대의 공동체 및 뒤르켐이 말했던 기계적 연대가 해체되고 재정립되는 과정에서 대중화가 되어 정치적 요구를 할 집단적 힘이 생겼으며, 정치사상의 발전과 왕-귀족간의 경쟁에서 끝끝내 왕이 후퇴를 하는 등의 사건을 통해 정치권력이 다소 분배되었기 때문에 시민이 정치적 권력을 가지는 국민국가가 형성되고 공화국이 건설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시기는 아무리 빨리 잡아도 300년이 조금 넘을 것이고, 고대의 공화국까지 포함한다 하더라도 고대의 여러 정치체제 중 하나였을 뿐이며 중세 이탈리아의 여러 공화국 또한 그들 문화권의 특징이지 현대 사회의 보편성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그들 역시 이탈리아의 통일 과정에서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이탈리아 왕국이 되었습니다. 이는 이탈리아 전체를 통일할 힘이 부족했기 때문이지 그들 공화국이 운명적으로 우월한 체제였기 때문이 아님을 말해주는 것처럼도 보입니다.

 

문명이 발전하는 동안 전체 정치적 권력의 총량은 커졌고 부 역시 집단의 크기만큼 늘어났으며, 개인이 독점하고 차지할 수 있는 양 역시도 늘어났습니다. 그러나 개인의 경제력은 오랜세월 동안 큰 차이가 없었거나 후퇴한 시기도 있었고, 투표하거나 입후보할 수 없으며, 시민들의 지지와 합의에 따라 더 높은 계급이나 법의 보호를 받는 역할을 맡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기에 정치적 권력은 사실상 (대중이 아닌)지역 민중이자 피지배민으로서의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때때로 목숨을 걸고 불만을 표하거나 조아리며 감히 요구를 허락받을 수 있었을 뿐이지 거칠게 말해 그들에게 명시적이고 제도적이며 정치적 권력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현실적으로도, 그들의 정치적 요구는 있었을지언정 정치적 권력은 없었습니다.

 

따라서 여러 우연과 논리 및 명분의 필요로 인한 사상의 발전과 함께 여러 요소가 조합되어 발명된 근대적 의미의 공화, 민주주의는 필연적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즉, 사회적 진화 과정상 등장 했다는 이야기는 앞서 지적했듯, 그것이 어떠한 방향성을 가지고 스스로 길을 찾아가는 필연, 운명적 개념이 아니라 우연적인 돌연변이의 등장과 환경과의 상호작용의 결과 그것들이 발명되고 채택되었음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습니다.

 

다만 그렇게 착각될 수 있었던 이유는 단지 아주 오래전, 거의 중세 이후 쯤부터 민주주의, 공화제에 도달할 수 있는 토양이 내제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 과정에서 그것들은 사라지거나 더 강력한 힘에 의해 무력화되어 도태될 수 있었던 가능성 역시도 실존하는 가능성이었죠.

 

그렇게 시민들이 정치적 권력을 분배 받은 것은 민주주의가 문명과 역사의 필연이기 때문이며 필연적으로 민주주의가 지구를 지배하는 원리가 될 것이기 때문인 건 아니었습니다. 단지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었을 뿐입니다.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국가나 아예 민주주의가 아닌 국가는 대체로 자원 덕분이지 그 체제가 강력하고 우월하기 때문에 유지되고 발전하는 것이 아니며, 정치 뿐 아니라 문화 등 체제의 경쟁력을 바라볼 수 있는 지표 역시도 단순히 돈을 많이 번다고 달성할 수 있는 게 아니고요.

 

이러한 이유로 시민들의 정치적 권력을 분배는 이전 시대까지는 없었거나 극히 제한되었다가 민주주의, 공화국의 시대가 와서야 정치적 권력의 빈부격차는 어느 정도 줄어드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문명, 정확히는 체제 발전상 도달한 운명적인 결과는 아니라고 봅니다.

 

 

3.경제적 권력.

정치와 경제는 밀접하기 때문에 정치경제라는 말이 나왔고, 언제나 겉보기 권력은 정치권력이 우월하거나 제도적으로 경제권력을 통제할 수 있기 때문에 정치가 앞에, 경제가 뒤에 붙는 까닭일 것입니다.

 

실제로 정치권력은 법과 제도를 통해 경제권력을 통제하고 장악할 수도, 파괴할 수도 있습니다. 공산주의는 자본주의 체제에 존재하는 기업이라는 개념을 해당 체제하에서 사실상 말살했던 바가 있습니다.

 

그러나 자본주의를 채택한 국가에서 독재국가나 전제군주정과 같은 정치권력이 과도하게 소수에게 독점된 체제, 혹은 경제권력이 전제군주의 소유인 경우 같은 특이 사례를 제외하면 자본의 힘은 무제한적으로 팽창했으며, 자본주의에서 자본의 증가는 선하고 정의로운 일이며, 마치 군국주의가 끝없이 전쟁을 필요로 하고 전쟁을 수행하려 하는 것처럼 자본은 끝없이 늘어나고 경제는 발전해야만 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단, 경제가 발전한다는 것과 자본이 증가하는 것은 완벽히 등치되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자본주의에서 돈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매우 많아졌고, 정치인 또한 돈이 있어야 정치를 하고 국가를 운영하며 본인 또한 먹고 살 수 있기 때문에 아주 중요한 것을 넘어 필수적이고 필수를 넘어 그 이상으로 추구해야할 것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이유로 자본권력은 정치권력에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다시 부족시대로 돌아가서, 부족이 구하고 모아둘 수 있는 자본의 양은 한계가 있었고, 그 기한 역시도 한계가 있었습니다. 식량이나 가죽, 도구 역시도 시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오래 저장하기 어려웠습니다. 즉, 앞서 언급한 바가 있듯, 부족장과 그 구성원의 경제적 갭Gap의 차이는 매우 적었습니다.

 

이는 집단이 커져가면서 부자와 빈자간의 간격이 크게 벌어졌습니다. 중세의 귀족과 신민은 이후 시대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그 차이가 적었지만, 그 당시 기준으로도 천지차이였고, 근세에서 근대까지 접어들면서는 압도적일 정도로 거대해졌으며 현대에 와서는 천문학적인 표현을 경제학적이다. 라고 바꿔야할 정도로 극단적으로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자본권력에서 발휘되는 힘은 민주주의를 통해 분배된 정치권력을 우습게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사실, 경제적 권력은 정치권력과 다르게 분배를 강제할 필요와 별개로 그것을 강제할 명분이 부족하고, 현실적으로 정치권력과 다르기에 개혁 내지는 혁명의 대상이 되기도 어렵습니다. 이는 할 수 없다는 게 아니라, 다수 대중들 스스로가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단지 자본주의가 경제체제로써 정치체제 내에 존립하는 것이기 때문에 법과 제도 아래에 통제받는 것일 뿐이지 자본권력은 실제로 정치권력에 도전할 힘이 존재합니다. 단지 강제력이 압도적으로 밀릴 뿐이며, 이것 또한 사회적 합의나 인정을 통해 용병, 혹은 사병화된 무장 직원을 대규모로 고용하여 정부의 군사력과 경쟁하거나 제도적 제한을 형해화, 무력화하는 식이 가능하다면 강제력 또한 갖출 수 있습니다. 단, 이것은 자본주의 아포칼립스와 같은 기업이 국가를 장악하는 시나리오에서나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례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닙니다. 동인도회사가 식민지를 정복하고 장악한 것이 유사한 사례입니다. 그러나 동인도회사는 완벽한 민간회사가 아니기 때문에 동일한 시나리오가 발생했다고 보긴 어렵습니다.

 

 

유시민씨는 마치 문명의 발전에 따라 덜 불공평해지는 것을 당연한 일이라 서술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불공평한 정치적 권력의 분배는 오랜 인류 역사상 최근인 근대에 도달해서나 가능해졌고 경제적 분배는 사실상 제대로 이루어지지도, 이루어지기도 어렵습니다. 그나마 있었던 공산주의는 실패한 체제가 되었고요.

 

정치적 권력은 엘리트라는 이름으로, 그리고 그들 사이의 사회적 연결망을 형성하며 사회가 고도화됨에 따라 민주주의하에서도 대중과 격차가 점점 벌어지고 있으며, 경제적 권력의 격차는 아주 자연스럽게 극단적으로 벌어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유시민씨가 서술한 "그런데 사회의 진화는 순탄하거나 평화롭지 않다. 인간은 중요하고 질서 정연하게 더 정의롭고 공평한 세상을 만들어나갈 수 없는 동물이기 때문이다."는 쪽이 전자보다 훨씬 더 사실에 가까울 것입니다.

 

 

4.불공평함의 해소.

그렇다고해서 덜 공평한 쪽으로 발전하거나 만들어지지 않았느냐에 대해서는 역시 부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 결과적으로 신민, 시민, 대중들은 점점 힘을 가지게 되었고 정치적 요구를 할 수 있게 되었고 참정권 역시 더더욱 확대되었습니다. 왕정을 비롯한 군주정은 무너지거나 군주가 통치하지 않는 입헌군주정이 되었으며, 여전히 많은 독재국가가 지구상에 존재하지만 그 중 일부 독재정 역시 사라졌습니다.

 

한국 또한 군주정과 식민지, 독재를 겪었으나 민주주의 체제를 확보했고, 점점 그것은 확대되었으며 부정부패로 대표되는, 만연했던 부조리와 불평등, 불공정 역시 줄어드는 쪽으로 나아갔습니다. 문명의 역사에서 군주정이 사라지고 민주주의를 만들어낼 수 있는 재료들의 탄생이 우연찮은 돌연변이적 사건에 의한 것이라도 그것이 길이 되어 방향성을 열어주었다면 결과적으로 한국을 비롯한 많은 국가들이 군주정과 독재를 거부하고 민주주의를 요구하고 정착시키는 것과 같이 문명의 발전상 조금씩 덜 불공평한 것으로 이행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불공평함의 해소가 큰 폭으로 가능해진 것은 역시 민주주의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고, 또한 민주주의를 지켜나가기 위해서라도 여러 방해와 저항을 뚫고 불공평함은 해소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덜 불공평한 쪽으로 나아가기 위해 노력해야하는 대의와 운명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단지 이 체제 속에서 태어나 이 체제를 유지하는 것에 동의한다는 이유만으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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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다른 곳에서 대화하다 나온 이야기인데, 전부터 생각을 좀 정리하던 게 있어서 여기에도 마저 정리하여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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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는 자본주의 체제 자체가 또 다른 한계점에 맞이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경제적 양극화, 부익부 빈익빈이 너무 심해졌습니다. 수치적으로도 수십 년 전과 지금은 말도 안 되는 임금격차, 자본 격차가 발생했어요. 부자와 그렇지 않은 사람의 격차는 80년대~90년대까지만 해도 그리 크지 않았던 걸로 압니다. 한국 또한 대졸자와 고졸자의 소득을 비교하면 예전에 비해 지금 격차가 훨씬 커졌고요.

 

 

 

문제는 어느 나라든 중산층이 얇아지고 있는 상황이며 이렇게 중산층에서 탈락하여 빈곤층, 저소득층이 되는 것은 정치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매우 위험하고 위태로운 상황으로 이어집니다. 사회불안과 불만은 더욱 커지고, 정치와 사회에 대한 고민과 관심 역시도 줄어들고 포퓰리즘이 횡행하게 됩니다.

 

또 이런 상황에서 파시즘이나 그와 유사한 극단주의가 발생하기 너무 좋은 환경이 됐죠. 나치 독일은 대공황과 인플레이션에서 급격히 성장했고요.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자신의 계층이 하락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경제적인 이익은 이념과 사상에 무관하게 호응받을 수 있는 주제이며, 그것이 설령 가능성이 없고 실현 의지조차 없더라도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처럼 하는 말, 혹은 국익을 저해하고 미래를 팔아서라도 당장의 생존에 직결되는 이익을 가져다준다면 사람들은 그것에 환호하고 지지를 표할 겁니다.

 

 

트럼프는 그러한 환경에서 당선되었죠.

 

 

 

문제는 이젠 물리적 방법(혁명)이나 정치적 방법(개혁) 역시 쉽지 않아 졌습니다. 혁명은 그 경제적 격차로 인해 사실상 불가능해졌습니다. 더 가진 사람들은 더 안전한 환경에서 보호받습니다. 예전처럼 테러, 암살을 하기에 쉽지 않게 되었고 운이 좋다면 설령 그런 공격에 부상을 입어도 발전한 의료기술의 덕을 볼 수도 있겠죠. 아무리 비싸도 의료비 내는 건 어렵지 않을 재산이 있으니까요.

 

부자들이 아닌 정권이나 정치 세력에 대해서도 마찬가집니다. 이전에 비해 전술적 자유도와 가능성은 너무나도 커졌고, 이를 훈련받지 않은 대중들은 결코 이겨낼 수 없습니다. 살상무기는 물론이고, 비살상무기를 사용하는 군대나 경찰집단 역시도 너무 강해졌습니다. 기술의 발전은 적을 상대하는 것 뿐만 아니라 대중과 국민들을 통제하는데에도 아주 효과적으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죽이지 않더라도요.

 

그렇다고 개혁 역시도 쉽지 않아졌습니다. 그 자본에 의해 언론, 학술계에 의도를 투영하기 쉬워졌습니다. 로비, 혹은 이권, 심지어 정치적 이념에 따라 학자들은 정치적 담론에 편향적일 수 있고 언론은 편파적으로 자기들이 지지하는 진영에 유리한 것만 취사선택할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무엇이 진실이고 객관적인 사실인지 구별하지 못할 것이며 알고리즘, 본인의 선택과 비토를 통해 원하는 이야기만 듣고 그렇지 않은 목소리를 거부하고요.

 

그렇게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걸 알아도 그걸 달성하기 위한 싸움이 너무 무용하고 무익한 걸로 싸우고, 그렇게 싸워서 얻은 것조차 무가치하게 됩니다. 이겨서 얻는 것도 없는데 싸우는 이유조차 핵심과 거리가 멀기 때문입니다.

 

 

처음 자본주의에 가장 심대한 위협을 줬던 사회주의, 공산주의가 등장했던 때와 유사한 상황에 치달아가는 게 아닌가 싶은데, 문제는 공산주의는 소련의 멸망과 함께 이미 실패한 체제가 되었고, 이에 대한 도전이나 견제가 가능한 대안, 혹은 경쟁적 이념은 등장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세계는 명실상부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세상이나 마찬가지가 되었고요.

 

즉, 자본주의는 현재 견제할만한 사상이 없습니다. 자본주의는 사회주의, 공산주의라는 경쟁자 때문에라도 살아남기 위해 사회주의적 요소들을 받아들였습니다. 그게 아니더라도 자유주의나 프로테스탄트적이지 않은 전통적 기독교 윤리, 인본주의, 애국심, 참정권과 함께 이어지는 대다수 노동자들의 요구 등 다양한 관점과 사유로 노동법이나 노동환경은 점차 나아졌고 자본주의는 지나친 비인간성이 줄어들어 현재와 같은 체제에 이르게 됐습니다.

물론 지금도 비인간적이고 지나친 부분들은 여전히 많이 보입니다만, 산업혁명 초기에 비하면 비약적으로 발전한 것 역시 사실이고, 그에 대한 이유 중 하나로 공산주의라는 강력하고 위협적인 경쟁자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죠. 노동자들이 혁명을 일으키기보단 자본가들의 이권 조금을 떼어 주는 것으로 그들의 불만이 역치(혁명)에 다다르기 전에 누그러뜨리는 쪽이 낫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소련의 멸망 이후 경쟁자가 없어진 자본주의는 다시금 산업혁명 당시와 유사한 상황에 놓이게 됐습니다. 지금의 노동환경과 자본-노동의 관계가 산업혁명 당시처럼 암울하진 않지만 지나치게 노동자와 자본가, 노동자 사이에서조차 많은 경제적 요소들의 갭Gap이 커진 상황은 지표상 얼마나 경제가 성장했든 불안한 상황이 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가지는 대부분의 불만은 경제적 원인 때문이고, 심지어 경제와 무관해보이는 사회적 갈등과 젠더갈등조차 경제적인 원인이 해결될 경우 적지 않게 해소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빈부격차는 말도 안 되는 수준으로 벌어지고 있고, 이는 코로나 상황이 더더욱 심화시켰습니다. 이 불만과 두려움이 공격성으로 이어지며 극단화 되면서 뚜렷하게 극단주의가 횡행하게 되는 게 지금의 현실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상황을 해소하기엔 모두가 잘못된 선택을 내리고, 올바른 선택을 내린 사람들조차 올바른 이유나 판단의 결과로 선택하지 않은 경우조차 많습니다. 어쩌다보니 결과적으로 그렇게 된 경우 역시 많다는 거죠. 또한 이 옳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다른 선택지에 비해 더 낫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지 객관적인 정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이유로, 문제는 경제가 아니라, 분배에 있습니다.

 

그 이전에 옳고 그름을 판단할 능력 자체가 거세되어가고 사멸해져가는 환경에도 있지요.

 

 

이 경제 문제에 대한 유일한 희망은 기계와 인공지능을 통해 인간노동의 완전 탈피를 통해 초과생산 초과수요로 자본 자체가 무의미해지는 것 정도 말고는 없지 않나 싶은데, 이것 역시도 자본주의 디스토피아가 될 가능성 역시 내포하고 있죠. 점차 진실과 거짓을 구분할 능력이 사라지고, 사람 또한 그럴 필요조차 못 느끼는 시대가 옴에 따라 우리는 정치적으로 교란된 메시지들로 인해 대중 대다수에게 이익이 오고 더 나아가 모든 인류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선택이 있다 하더라도 극소수의 기득권, 권력자에게 가장 유리하고 이익이 되는 선택을 위해 서로 피튀기게 싸울지도 모를 일입니다.

 

객관적이고 건조하게 바라보면 누구라도 알 수 있는 단순한 사실조차 정치적 이념과 진영논리에 따라 진실을 거부하고 피상적이고 파편화된 사실을 조합하여 전혀 다른 결과를 만들어내는 식으로 말입니다. 우리는 점점 넓은 시야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당연하지만 그 부와 권력을 쥔 능력 있고 실력 있는 사람이 자기 이익을 아무 이유 없이 때어줄 이유도 없고, 포기할 이유도 없습니다.

 

자본주의 디스토피아도, 사실 자본주의를 유지할 이유 자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계급의 존재 그 자체를 위해서 그러한 디스토피아 세상을 만들고 장기간 유지하는 것조차도 그런 이유에서 발생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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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정에서 가장 중요한 건 혈통입니다. 왕의 자식, 왕가의 혈통이라는 것. 그리고 그것에서 권력과 권위는 발생하죠. 물론 그러한 권력이 발생하기 위해서 무력, 경제력, 영향력, 계약 등이 필요하긴 하지만, 왕이 되었다는 건 그런 것을 가지고 있다는 거기도 하죠.


하여간, 왕정에서 가장 중요한 지상가치는 혈통이고, 혈통에서 권력이 보장됩니다. 귀족으로 태어났다면 귀족의 권력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고, 왕족으로 태어났으면 왕족의 권력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며, 평민으로 태어났다면 평민으로서의 권력만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속적 권력은 정치적인 것이며, 실재하는 것입니다. 



반면 자본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지상가치는 자본 그 자체죠. 자본은 그 자체로 단순 물질일 뿐이지만, 그것이 실제로 시장을 돌며 권력으로 작용합니다. 즉, 왕정에선 혈통에서 권력이 나온다면, 자본주의에선 자본에서 권력이 나옵니다.


자본주의가 왕정, 귀족정, 독재, 민주정과 다른 점은, 그러한 권력이 실재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자본에 의해 권력이 나오지만 그러한 자본은 위임 받고 계약을 통해 보장될 수 없는, 움직이고 줄거나 늘어날 수 있는 것이죠. 자본을 가지고 있으면 권력이 생기는 것이고 그러한 자본이 줄어들면 그만큼 권력도 줄어듭니다.


이는 권력이 실제로 존재하며 작용하지만, 그 권력 자체는 실재하는 것이 아닌 셈이죠. 또 하나의 특이성은 왕정에서는 그러한 실질적인 무력과 권력의 존재에 대해 견제장치가 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자본주의에선 그러한 견제장치가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에겐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혹자는 이 말에 대해 대기업, 재벌, 자산가 등이 존재함을 지적할 수 있지만, 왕족이나 귀족들에겐 권력이 없어도 그러한 견제장치가 작용하지만 자본주의의 자본가들은 그러한 실재하지 않는 권력인 자본에 의해 늘어날 수도, 줄어들 수도, 없어질 수도, 심지어 초월할 수도 있다는 점이 다르죠.


따라서 그들 대기업, 재벌, 자산가 등은 언제든지 변화할 수 있는 자본의 유무에 따라 그 범주에 속할 수도, 빠져나갈 수도 있는 것이며, 그러한 것은 기존의 세속적 혈통이나 불변의 기준에 의해 구분 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현실에서 재벌이나 대기업, 부자들라고 범주화해서 특정할 수 있고 집단화시켜 부를 수 있지만, 그들은 왕족이나 귀족과 같은 분명히 집단화시켜 부를 수 있는 존재라고 할 순 없습니다. 혈통은 변하지 않지만 자본은 변할 수 있죠.



물론, 마찬가지로 현실에선 자본에 대한 견제장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견제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고 경험적으로도, 이론적으로도 여러 해석과 실전을 겪었기 때문이죠. 그렇기 때문에 실제로 법인세, 재산세, 누진세 등의 제도를 통해 그 자본을 견제하고 있죠.


하지만 자본의 권력은 다릅니다. 자본 그 자체를 견제하는 건 가능하지만 자본을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대해선 결코 용납할 수 없는 몇몇 요소를 제외하면 --심지어 불법이거나 비상식적인 사례가 있긴 할 정도지만-- 건드리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게 세속적 권력과 자본적 권력의 가장 큰 차이점이죠. 제도적인 견제장치가 개인, 집단에게 있어서 그 권력의 사용을 제한하고 견제할 수 있느냐 아니냐의 차이입니다. 왜냐하면 자본에 의한 권력은 실재하는 권력이 아니기 때문이고, 단지 실제로 현상으로 벌어질 수 있는 권력이기 때문입니다. 자본을 가진 것은 사실이고 자본주의 사회에선 그것이 곧 권력으로 작용할 수 있는 지상가치이기 때문이죠. 


신분제 사회에서는 기회가 되고 할 수 있다면 다른 이를 죽여서 귀족이나 왕이 되려고 했지만, 자본주의에선 자본을 얻기 위해 다른 이를 죽여서--혹은 짓밟아서-- 그 범주에 편입되고자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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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부제를 달 수 있다면, '사회적으로 중요한 원칙은 어디로 갔나.' 라고 이름 붙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왜냐하면, 정말 중요하고 타협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강하고 완연하게 주장해야하면서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거나 반대를 표하는 작자들에게 분명하고 당연하듯이 그들이 얼마나 부끄러워 해야할 것인지를 알려줘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최저시급이라는 것은 그 사회에서 최소한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기준입니다. 한국의 최저시급이 그만한 수준에 도달했느냐는 여기에서 다룰 것이 아니며, 단지 이러한 사실만을 가지고 판단했을 경우, 그 오천 몇백원 정도 밖에 안 되는 시급조차 못 주겠다고 뻣대는 이들은 사회에 대한 파괴행위를 하는 것과 기실 다를 게 없습니다.


쉽게 말해서, 인간답게 먹고 살 수 있는 돈을 받아야할 사람에게 인간답에 먹고 살 수조차 없는 돈을 지급하는 것입니다. 극단적으로 예를 들자면 그러한 인간 때문에 누군가는 노동을 하고도 제대로 끼니조차 못 먹는 일이 발생한다는 겁니다. 이는 국가가 추구하는 방향이 아니며 오히려 국가가 가지는 의무에 비추어 생각했을 때 그러한 업주는 사회의 암세포와 다를 게 없다는 거죠. 사회를 좀먹고 해악을 끼치니까.



남에게 돈 때인 것에 대해서는 거품물고 발악할 사람들 많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 돈 때먹는 일에는 뻔뻔한 사람들도 많죠. 알바몬 광고에 반발하는 이들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정당하게 일은 했지만 그만큼 정당한 몫은 주고 싶지 않다는 거죠. 그러면서 하는 소리가, 그거 다 주면 업주는 뭐 먹고 사냐. 지금 먹고 사는 거 먹고 살지 뭘 먹고 삽니까. 그냥 뻔뻔하고 천박해서 돈 더 주기 싫은 거지 뭐 지 살림살이를 끄집어 내요.


반대로 돈은 받은 대로 받고 일은 일대로 안 하면 똑같이 최대한 비용은 덜 보고 이득은 더 취하고 싶은 거구나 하면서 인정하고 돈은 돈대로 줄까요? 당장 욕한바가지 날리고 잘라버리겠죠. 똑같이 이득은 더 보고 비용은 덜 내는 행동인데 말이죠. 그러한 업주들은 단순히 알바들에게 돈을 덜 주는 거라고 보면 안 됩니다.


사회의 신뢰와 그들이 좋아하는 '자본주의의 시장원리'를 박살내고 있는 거에요. 또한 이 사회가 가지고 있는 암적인 관행이자 악습을 뿌리 뽑지 못하게 하는 그 암세포 하나하나이며 사회가 분명하게 가지고 타협해서도 안 되는 원칙을 농단하며 파괴하는 이들입니다.


이거 절대 우스운 거 아니에요. 이 글을 보는 당신이 알바로 일을 하든, 아니면 회사에 취업하든 이 행태가 사라지지 않고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너무 당연시 되면 이 나라는 발전의 나사가 빠진 거고 그 피해자가 된 개개인, 역시나 여러분들은 그만큼 손해를 보는 거고 그로 인해 배부른 사람들은 당신을 고용한 그 사장, 업주라는 인간입니다. 친척이 땅사면 배아파 죽는다는 한국인들이 이렇게 자기보다 강한 사람이 자기 등쳐먹는 것에 대해서는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게 참 흥미롭기도 하네요.


다시 말하지만 그렇게 덜 받는 몇 백원, 몇 천원이 모여서 1년에, 10에 수 십만원, 수 백만원 수 천만원이 됩니다. 그만큼 자기 돈이 뺏기는 거라고요.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그 광고에 반발하는 이들은 정말이지 단순히 봐서는 안 될 이들인 겁니다. 명백한 경제사범이에요. 기업에서 돈 빼돌리고 분식회계해서 수 십억, 수 백억 부정부패 저지르는 놈들만, 정부 관료로서 사업 벌이면서 기업과 적당히 입 맞춰서 돈 빼돌리는 놈들만 경제사범입니까? 작은 범죄도 범죄입니다. 그리고 그런 작은 범죄가 흔하다면 그건 큰 범죄 하나보다 더 큰 피해를 입히는 거고요.


암세포가 어느 장기 한 쪽에 몰려있으면 치료하기가 쉽지만 온 몸에 산발적으로 퍼져있으면 의사 뒷목 잡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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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헷갈리시는데, 이 글에서 이것에 대해 정리하고자 합니다.


기본적으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정치체제가 아닌 경제체제입니다. 공산주의의 반대는 자본주의이고, 민주주의의 반대는 왕정, 과두정, 금권정, 귀족정 등 국민에게 주권이 없는 모든 체제를 아우릅니다. 이건 기본이니 알고 갑시다. 간혹 민주주의의 반대를 공산주의 사회주의라고 알고 있는 분들도 왕왕 계시더군요.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에 대한 명확한 정의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대충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사회주의, 공산주의가 있고 맑시즘적 맥락에서의 사회주의와 공산주의가 있습니다. 이 둘은 서로 일정한 차이를 지니고 있으며 이에 대해 혼동하기가 쉽죠.


전자의 경우, 계급간의 평등을 주장했던 모든 이념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매우 이상적이고 현실적이지 못한, 다분히 철학적인 성격을 지닌 이론들이었고, 마르크스는 자신의 저서인 <공산당선언>에서 이것들에 대한 비판을 하죠. 어째서 이러한 이념들이 이론적으로 불충분하고, 모자르며 어째서 실패 할 것인지에 대해서.


그리고 자신은 그에 반해 그러한 이상적이고 감상적이었던 기존의 사회주의와는 다른, 경제학과 유물론에 입각한 새로운 사회주의 이론을 주창하는데, 그것이 바로 "과학적 사회주의", 즉 공산주의입니다. 공산주의라는 명칭은 맑스가 생시몽, 오웬같은 철학자들과 다른 차별성을 강조하기 위해 붙힌 명칭이구요.



이후 마르크스가 비판했던 이론들, 다시 말하자면 마르크스의 과학적 사회주의(공산주의) 이론을 제외한 이론, 이념들은 현실적인 영향력을 잃고 사라집니다. 이제 '사회주의'라고 한다면 맑스의 사회주의를 의미하게 되죠. 그리고 마르크스는 자신의 공산주의를 조금 더 정교하게 수정, 보완하여 더욱 발전시키게 되는데, 여기서 또 (맑시즘적 맥락에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개념이 갈리게 됩니다.


전환적이고 과도기적인 체제인 사회주의와, 그 끝인 최종단계의 공산주의로 구분이 됩니다.


다시 말하자면 사회주의는 각종 혁명과 개혁을 통해 자본주의적 체제를 무너뜨리고 공산주의 체제를 완성시키기 위해 거쳐지나가는 하나의 과도기적 체제로서의 성격을 가지게 되고, 공산주의는 그러한 혁명과 개혁을 통해 만들어진 사회주의의 최종 형태, 즉 공산주의로 끝을 맺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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