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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며,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 - E.Kant
by Ko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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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6.10.12
    진리, 본질,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에 대한 해석.
  2. 2013.08.09
    프로메테우스와 에피메테우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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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제가 다음 팁에서 답변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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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 인간의 특성을 인식론, 존재론, 가치론적 입장에서 말하면 인간은 진리를 추구하는 존재, 자신의 본질을 추구하는존재,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라고 하는데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래주실 수 있나요



답변 :


인간은 다른 동물과는 다르게 복잡한 사고능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이를 우리는 지성이라고 부르곤 하죠. 이러한 지성은 인간에게 하여금 더 깊고 넓은 사고를 가능하게 해줍니다. 앞의 현상과 뒤에 벌어지는 현상을 연관시킬 수 있고, 그러한 사고를 통해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추측할 수 있는 고등한 지적 능력을 가지고 있죠.


인간은 태초부터 많은 것에 호기심을 느꼈고, 그러한 의문을 해소하고자 했습니다. 그렇게 알아낸 (설령 불완전하더라도) 사실은 후대에 계속해서 이어졌고, 기록을 하게 되는 시대부터는 상대적으로 폭발적인 지식의 축적과 전파가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지식들은 인간으로 하여금 경험 이상의 지식을 갖추게 했는데, 가보지도 않은 곳의 지리와 특성, 본 적도 없는 동물의 신체적 특성과 해부학적 구조, 다뤄본 적도 없는 물건이나 물질의 사용법과 가공법 등 많은 것을 알 수 있게 되었죠.


이것들은 다시 더 많은 지식과 통찰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다시 더 깊은 사고로 이어졌고, 그러한 것은 필연적으로 진리라는 하나의 목적으로 다가서는 활동이 되었죠. 지식을 갖추고 갖추고자 하는 모든 이들이 그랬고, 그것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공통된 현상이었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과 제자백가들은 지금 시대에도 무시하지 못할 지성과 통찰력을 지닌 자들로, 진리를 추구했습니다. 알면 알 수록 자신이 모르고 있는 것을 뚜렷하게 느꼇고, 그러한 부족함에 갈증을 느꼈죠. 더 알고 싶다는 지식욕이었습니다. 지식이 생존에 유리하게 작용했으니, 모든 인간은 그러한 지식욕을 가지고 있죠. 이것이 인간만의 특성인지는 모르겠으나, 인간에게 아주 크게 작용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것은 곧 진리를 추구함으로 귀결되었죠.


그러한 지적욕구와 발전은 하나의 학문으로 정리가 되는데, 그것은 철학입니다. 철학은 모든 학문의 뿌리이죠. 생물학, 의학, 역사학, 논리학, 수사학, 문학, 심지어 공학과 수학마저도 철학에서 시작된 것들입니다.


그리고 철학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하나. 나는 무엇인가. 세상 모든 것에 대해 알고자 한다면 필연적으로 나올 수 있는 질문입니다. 나는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나는 어디로 가는가. 자신의 본질에 대한 질문이 나올 수 밖에 없고, 정답이 없는 이 질문은 수 천년 동안 인간들의 머리속에서 빠져나온 적이 없습니다. 그 누구도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죠.


인간의 지성은 많은 것을 알고, 많은 것을 알고자 했으니, 자기 자신에 대한 질문 또한 필연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외부 사물과 현상에 의문과 호기심을 가진다면, 역시 그것을 궁금해하는 자기 자신에도 의문을 품을 수 있는 지적능력과 사고력을 갖춘 동물이기 때문이죠. 그것도 상당히 고차원적으로.


그렇게 자기 자신에 대한 물음은 그 답을 내었든, 내지 못했든 인생과 삶에 대한 질문으로도 이어집니다. 어쩌면 그에 대한 답을 내지 못했기 때문에 선결문제로 넘어가는 것일 수도 있겠죠. 자신의 정체성은 그 자체로 정의하거나 풀어낼 수 없으니, 자기 자신을 정의하는 수단으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규정하려는 시도이죠.


존재론적으로 내가 어떤 인간인가는 그 자체로 정해지지 않았으니, 목적론적(혹은 가치론적으로) 어떻게 살았는가(어떤 인간인가)와 어떻게 살 것인가(어떤 인간이 될 것인가)를 판단을 내릴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태어날 때부터 어떤 목적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다는 전제하에 나올 수 있는 질문이며, 이 전제는 저로선 참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이들이 참으로 동의하는 명제일 겁니다.


따라서 인생에 대해 판단하고 평가를 내린다면, 그에 대한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기준을 정하는 것은 매우 까다로운 일이죠. 성공한 삶? 성공이라면 그 성공의 기준은? 부귀한 삶? 명예로운 삶? 자식을 많이 낳은 삶? 친구를 많이 둔 삶? 남들이 따라할 수 없는 기술을 가진 삶? 지적인 삶?


그러한 가치들을 따지고 평가하자 한가지 잣대가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들은 모두 무엇을 위한 것이며, 인간 스스로는 무엇은 위해, 무엇을 추구하며 사는가. 그것은 간단했습니다. 행복. 인간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하며 그것을 얻기 위해 노력하고 때로는 희생하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앞서의 모든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게 적용되고, 다르게 판단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두 행복한 것을 원하지, 불행한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평생 고통 받는 삶보다 행복한 삶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인간이라는 동물이 추구하는 생물학적 본능이기도 하죠.


따라서 인간의 삶을 평가하는 데 있어서 개인이든 타인이든 행복이라는 잣대는 모두 적용할 수 있고, 공통적으로 평가될 수 있습니다. 누군가 돈이 많고 높은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것을 유지하는 데 불행과 고통이 따른다면 그를 행복하다고 여기지 않고, 그런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도 버리게 되죠. 적어도, 실제로 겪어보면 포기하고 원래의 삶을 선택할 가능성은 높다고 봅니다.


비천한 자도, 명예로운 자도, 가난한 자도, 부유한 자도, 병든 자도, 건강한 자도 모두 그들의 삶에서 행복을 추구하고, 삶의 형태는 다를지언정 행복이라는 잣대는 모두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 비천하지만 행복한 것이, 명예롭지만 고통스러운 것보다 나을 수 있죠. 앞서의 모든 상태는 상대적이지만 행복을 느끼는 감정만큼은 개개인에게 있어서 절대적으로 작용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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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부터 내려져오는 전설이나 신화에는 어떠한 교훈이나 혹은 통찰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신비하고 흥미롭고, 또한 재미있는 이야기였기 때문에, 종교나 민족과 관련된 이유에서 현재까지 내려져오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작지만 분명 교훈을 남겨주는 이야기라고는 생각합니다.


이는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프로메테우스와 에피메테우스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죠.


프로메테우스, 먼저 보는 사람,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가진 이름입니다. 그 이름대로 프로메테우스는 매우 영리하고 현명했던 티탄이었죠. 제우스와 그의 형제자매에 의해 티탄족의 시대가 끝나고 올림푸스 신들의 시대가 열렸을때 프로메테우스는 가장 인간을 사랑했던 신이었죠.


인간과 신이 갈라서게 되어 신들과 인간이 각각 소의 어느 부위를 먹을 지 선택하는 일이 있었을때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지방으로 쓸모없는 뼈를 두르고 가죽으로 살코기를 덮도록 해 제우스에게 어느 것을 먹을지 선택하라고 했죠. 제우스가 그의 꾀에 넘어가지는 않았지만, 화를 속으로 삭히면서 뼈가 들어있는 쪽을 선택했습니다.(그리고 그에 대한 대가로 인간들에게서 불을 빼앗아 버리죠.)


또한 프로메테우스는 인간들을 위해 불을 훔쳐냈습니다. 이야기에 따라 다르지만 태양의 신이었던 헬리오스의 마차에서 불을 훔쳤다고도, 혹은 헤파이스토스의 대장간에서 불을 훔쳤다고도 하죠. 그리고 그는 코카서스의 바위산에 묶인 채 매일 제우스의 독수리에게 간을 쪼여먹히는 벌을 받게 됩니다. 그는 죽지 않기 때문에 간은 하루만 지나면 다시 복구되었고 그렇게 매일같이 같은 고통을 느껴야만 했죠.



제가 보는 프로메테우스는 그 이름답게 선각자, 현자인 인간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권력에 타락하지 않은 진정한 지식인은 일반인보다 더 넓은 시야로 세상을 보고 분석한 뒤 민중을 위해, 사람을 위해 자신의 소신껏 행동하지요. 신들이 권력자라면 프로메테우스는 민중의 편이었던, 민중을, 사람을 사랑했던 지식인이었을 겁니다. 권력자에 맞서 민중에게 고기를 선물했고, 권력자에 대항해서 감히 자신이 끔찍한 벌을 받을 지도 모르는 위험을 무릅쓰고 불을 훔쳐 인간들에게 선물했지요.


그렇지만 권력자를 기만하고 권위이자 권력인 동시에 힘이었던 불을 훔쳐 인간에게 건내준 프로메테우스는 벌을 받았습니다. 권력에 항거하고 불의를 두고보지 못하는 이가 권력에 대항하다 고통을 받게 된 것이죠. 마치 일제에 저항했던 독립운동가처럼, 독재에 항거했던 민주화운동가들과 수많은 지식인들처럼 말입니다. 잘못된 것들은 너무나도 많고, 그것에 일일히 저항하고 옳은 것을 이야기했다는 이유로 매일같이 간을 뜯어먹히는 프로메테우스처럼 고통받는 지식인들을 프로메테우스라는 신으로 표현할 것이 아닐까요?


인간들을 위해 선물해준 살코기가 무엇을 뜻하는지, 불이 무엇을 뜻하는지 어설프게 해석하며 장광설을 펴고 싶지는 않군요..



에피메테우스, 프로메테우스의 동생으로 이름의 의미는 나중에 생각하는 자입니다.


에피메테우스는 그 이름답게 형에 비해 어리석은 존재로 나오는데, 신들이 선물한 최초의 여자인 판도라를 아내로 맞았습니다. 프로메테우스는 선각자답게 제우스와 그 선물인 판도라를 조심하라고 경고했지요. 그렇지만 에피메테우스는 형의 충고를 무시하고 아름다운 판도라를 자신의 부인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판도라는 에피메테우스의 집에 있었던 만물에게 재능을 부여하고 남은, 필요 없는 것, 온갖 나쁜 것들을 담아놓은 상자가 있었는데, 호기심에 못이긴 판도라가 어느날 그 상자를 열어 버리고 말았죠.


인간에게 불행을 가져다줄 수많은 것들이 세상에 풀리게 되었고 그 때부터 인간의 모든 질병과 불행들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상자에 마지막으로 남았던 유일한 것은 바로 희망이었죠. 희망은 나중에서나 나오게 되지만, 결국 판도라가 연 상자 덕에 세상은 한번 멸망하고 맙니다. 만약 나중에 생각하는 자가 그 이름답지 않게 행동했다면 이런 불행도 찾아오지 않았겠지요.



에피메테우스는 우리들 일반인, 일반 민중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언제나 앞을 볼 줄 모르고, 영리하지 못하며 언제나 미련하게 행동하죠. 한번 겪은 일을 다신 반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해도 어느새 똑같은 일을 당하고 있는 이들, 아무 생각 없이 말하고 행동하며 그로 인해 결국은 후회하게 되는 어리석은 이들, 종국에는 세상을 멸망시키는 엄청난 일을 일으키는.. 일으킬 요소를 만들어놓은 힘을 지닌 이들. 바로 우리와 같은 보통 사람이자 대중들을 의미하는 것이겠죠.


세상에 널리고 널린게 바로 에피메테우스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생각하기 때문에 후회하고 어리석다 자각할 수많은 일들을 겪고 또 격겠죠. 판도라에 의해 상자는 열렸지만, 그 판도라를 아내로 맞은 것이 에피메테우스이기 때문에 세상을 멸망시켰던 것은 어쩌면 에피메테우스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어떻게 에피메테우스가 그렇게 커다란 사건을 일으킬 수 있었는지 생각해본다면, 우리들에게 있어서 커다란 충격이자 사건이었던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과 같은 거대한 사건들은 그러한 어리석은 자들이 세상에 너무나도 많았기 때문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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