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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며,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 - E.Kant
by Ko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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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분제'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23.02.16
    민주주의 사회에 존재하는 사회적 역할과 전근대적 계급 관념.
  2. 2020.09.03
    전라도 혐오와 한국 혐오. 가해자의 피해자 혐오.
  3. 2017.12.23
    자본주의와 신분제 사회 권력의 특성에 대한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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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와 전근대 사회의 가장 큰 차이점 중 하나라면 계급이다. 그리고 민주주의 사회라 하여도 아직 전근대에서 탈피하지 못한 사회는 여전히 계급주의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어떠한 사회든 지구상 대부분의 국가는 자본주의가 지배한다. 단지 그 형태와 구성이 다르고 자본의 규모 등 정도와 수준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어떤 사회든 법적으로, 명시적으로 계급과 계급주의적 계층 및 신분은 존재하지 않는다. 민주주의의 가장 핵심적인 전제는 바로 모든 시민들이 평등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어떤 국민이 다른 국민보다 더 우월하거나 열등하다는 믿음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체계이고 그러한 믿음이 사회를 지배해선 안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계급은 존재한다. 더 많이 벌고 적게 벌고, 그러한 자본을 획득하게 해주는 권력과 권한을 가진 직업군에 따라 실질적인 계급이 발생한다. 이는 어쩔 수 없는 현실적인 현상이며 그저 더 평등한 사회를 추구하는 곳일수록 그러한 차이가 단순히 삶의 질이나 사회적 영향력과 무관하게 신분이나 계급처럼 작동하지 못하도록 억제한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회도 있고, 오히려 그러한 차이를 긍정하거나 추구하는 사회도 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민주주의의 가장 핵심적인 평등의 원칙을 부정할 수는 없다. 더 부패하고 더 전근대적인 사회일수록, 더 금권적인 사회일수록, 다시 말해 더 계급주의적인 사회일수록 더 노골적으로 신분적 계급이 기능한다.

 

***

 

옛 세대일수록 고위 공무원이나 정치인, 사장이나 회장, 고위 장교 등을 신분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고 대한다. 높으신 분이라 말하며 계급주의적으로 이해한다. 어떤 사람들은 전현직 대통령을 주군이라 부르며 왕으로써 충성의 대상으로 본다. 정당 내부의 헤게모니 싸움을 궁정 정치와 비슷하게 바라보며, 그러한 문법으로 이해한다.

 

이것은 요즘의 세대라 하여도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있다. 어떤 직군의 엘리트들은 마땅히 그러한 특혜를 가지는 것이 옳다고 믿고, 어떠한 대학에 입학하거나 졸업하는 것만으로도 사회적 신분을 획득한 것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이러한 신분은 그렇지 않은 하위 계급으로 분류되는 이들의 도전을 계급주의적 반란으로 받아들인다.

 

특이한 점은 그러한 계급을 노력과 성취로 얻어낼 수 있다고 믿는다는 점이다. 마치 공부해서 과거에 합격하면 양반 신분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들은 타인의 실력과 능력, 경력보다 명시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타이틀. 가령, 대학 졸업장이나 고난이도 국가시험 합격증이나 자격증, 특정 직업군 등을 기준으로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조건을 취득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어떠한 사람이든 계급과 신분을 초월할 수 있을만한 어마어마한 성과가 있지 않는 한 인정받지 못한다.

 

그리고 이러한 이해는 한국 사회가 그러한 요소들에 의해 실제 계급주의적 신분으로 기능한다는 현실에서 기인한다. 엘리트들은 자신들의 특혜에 언터처블한 접근을 요구하고 그들과 같은 위치에 서고 싶은 이들은 그러한 불공정한 가치를 보호한다. 불공정한 현상을 해소하기보단 그러한 것을 사회적 기능으로 받아들이며 그러한 범위 내에 진입하고자 하는 것이다. 즉, 검찰의 범죄적인 검사 기소율을 보고 검찰개혁에 동의하기보단 본인이 검사가 되거나 검사 지인을 두고 싶어 한다.

 

***

 

이는 한국 사회에서 발생하는 갑질과 차별을 발생시키는 관념이기도 하다. 교장, 교감, 사기업이나 공기업 부장, 임원, 과장급 이상 공무원, 경력과 계급이 높은 군 장교와 일부 부사관, 농협 간부 등 수십년 연차와 경력을 쌓은 옛 세대 사람들은 그 위치에서 계급적인 사고로 직원들을 받아들인다.

 

그들에게 공사구분은 다소 형해화된 관념이고 사적인 명령과 공적인 명령을 구분하지 못한다. 마치 왕에게 정무와 개인의 삶에 대한 개념이 다소 모호하듯이 말이다.

 

 

젊은 꼰대나 일부 대학생, 졸업생, 대기업 등에 입사한 젊은 세대 역시 당연하듯 앞서 열거한 조건에 따라 계급적 신분 관념을 받아들인다. 겉으로는 그러한 것이 없다고, 본인 역시 그러한 사고에 따른 것이 아니라며, 그저 현실적인 차이를 말하는 것처럼 말하지만 그것은 불공적하고 대체로 비현실적인 조건을 기준으로 합리화하는 것이 사실에 가깝다.

 

예컨데, 상위권 대학 입학 및 졸업이나 전문직 자격증 획득은 그 사람이 얼마나 풍족한 집안에서 태어나 얼마나 많은 사교육비를 지출했으며 그들이 사는 지역과 학군에 따라 결정되는 면이 크다. 이들의 노력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노력에 비해 더 편하고 수월했음을 그들은 인정하지 않는다. 혹은 인정하되, 그것을 당연한 것이라 말한다.

 

 

그런 식으로 부하 직원에게 사적인 심부름을 시키고 어떠한 무례를 저질러도 아랫 사람은 그저 받아들일 수밖에 없고 당연하게 의전과 대우를 받아야 하며, 심지어 부하 직원이 부장 등의 직위에 있는 이들을 위해 밥당번으로 직원이 같이 식사를 해주거나 품의로 밥을 사줘야 한데다, 대학원생이나 공관병을 노예처럼 쓰기도 하고, 청소업체 직원이나 가사 도우미를 천한 것 정도로 멸시하기도, 항공사 오너 집안의 입장에서 승무원을 비인간적으로 대우하는 등의 행동이 나타나는 것은 그들이 수직적 계급 관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민주주의적 기본 원칙에 먼 관념을 가지고 있다.

 

***

 

그렇다면 민주주의에서 계급을 발생시키는 요소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본인은 기본적으로 어떠한 직업군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 의사, 검사, 판사, 변호사, 교장, 장군, 고위 공무원, 지자체장, 정치인, 대통령 등 다양한 위치에서 강력한 사회적 영향력과 권력을 가지고 그들의 권익을 위해 집단화될 수 있는 엘리트들은 어떠한 역할을 맡고 있는 사람들이지 그러한 위치에서 계급화된 집단이 아니라고 봐야 한다.

 

즉, 계급이 아닌 역할로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떠한 권력이나 권한을 가지고 있고 그것이 다른 이들보다 더 강력하다 해도 그것을 자신이 그러한 신분과 계급을 가진, 더 우월한 지위에 서있는 사람이 아니라 그저 어떠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그러한 권한과 권력이 부여된 사람이라 인식해야 한다.

 

예컨데 검사는 가장 강력한 신분이자 매우 높은 계급이라 여겨지고 그렇게 이해하는 이들이 많다. 그들이 가진 권력이 너무 강력하고 그들에게 부여된 특혜는 극단적으로 불공정하다. 귀족 중에서도 가장 위계가 높은 귀족인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검사는 단지 용의자를 기소하고 범죄 사실을 입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역할일 뿐이라 이해해여야 맞다. 그리고 그러한 역할은 관련 자격을 취득한 사람이 맡을 수 있고 대체될 수 있는 종류의 것이다. 권력과 권한의 종류와 정도와 무관하게 그들은 자신의 능력과 자격에 따라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는 위치에 서있는 것이라 봐야 한다. 그들 스스로도 그렇게 여겨야만 한다.

 

가령, 그들은 자신들의 자격과 지위를 함부로 취소하거나 약화되지 못하도록 아주 강력하게 반발한다. 검사는 검사를 기소하지 않고 경찰, 군인, 공무원은 자기 식구를 감싸기 위해선 추악한 짓이라도 서슴치 않고 한다. 의사들은 코로나 시기 환자들을 인질로 삼고 의사를 더 늘릴 수 있는, 자신들의 미래 수입에 타격을 입히는 경쟁자를 만들지 않기 위해 집단행동에 나섰다. 양승태는 고위 법관직을 늘려 대법원장의 인사권을 확대하고 실질적인 4심제를 구상하려 했다.

 

 

이는 그들이 쉽게 대체될 수 없는 희소 자원으로 여겨지게 하기 위함이고 강력한 권력과 영향력을 나누지 않으려 했다. 공급이 늘면 당연히 권력도, 자본도 하향평준화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특정 업계에 노동자가 늘어나면 임금이 줄어들듯이.

 

 

다시 말해, 이 사회의 모든 구성원은 제각기 어떠한 사회적 역할을 맡고 있고, 이는 합리적인 이유로 대체될 수 있어야 하며, 그러한 대체를 위한 공급이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사회적 역할이 폐쇄적인 구조가 되어 불공정한 특혜를 강력하게 추구하는 세력이 되는 것은 반드시 막아야 한다. 자신들의 이익이나 권리를 위하는 것과 불공정한 특혜와 초법적인 영향력의 행사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이다. 이는 민주주의 체제의 구성을 형해화시키는 계급주의적 사고의 발로이다.

 

어떠한 직군이나 위치에 있든, 민주주의 사회의 모든 구성원은 계급이 아니라 역할에 따라 구분되고 이해되어야 한다. 대통령은 대통령 계급이 아닌 대통령의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이다. 정치인도 그렇고, 군인도 그렇다. 검사도, 법관도, 의사도, 재벌도. 그들은 그들만의 계급과 신분제적 위치에서 언터처블한 접근을 요구할 것이 아닌 그러한 어떠한 사회적 위치에서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는 부품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필요할 때 그러한 부품은 대체될 수 있어야 한다. 범죄를 저지른 의사와 검사는 바로 그 이유로 남들보다 더 공정하게 수사받고 그 위치에서 저지를 수 있는 범죄의 재발을 차단하기 위해 처벌받아야 한다. 자기 역할과 직군과 무관한 범죄라면 다소간의 불이익을 받고, 자기 역할과 직군과 유관한 범죄. 검사의 경우 기소권의 남용이나 기획수사, 불법수사 등 자기 권한을 부당하게 사용하여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 그 역할을 맡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재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경제범죄를 저질렀다면 그들은 그러한 행위를 저지를 수 있는 위치에 있지 말아야 한다.

 

반면 어디까지나 예시적인 성격으로 말하건데, 의사가 폭력을 휘두르거나 재벌이 차량사고를 일으켰다면 폭행을 처벌하고, 차량사고에 대한 처벌을 할 지언정 그들의 역할과 무관한 영역에서 발생한 범죄이기에 재범을 발생시키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그들이 자기 역할에서 대체되거나 자격이 취소될 이유는 없다.

 

한편 갑질은 수직적 권력의 고하에 따르는 사유가 크기 때문에 권력을 가진 어떤 이가 됐든 갑질을 발생시켰고 그 정도가 크다면 어떤 위치에서 어떠한 역할을 맡고 있든 그 위치에 있지 말아야 한다. 이는 역할보다 위치가 중요하다.

 

***

 

엘리트, 혹은 엘리트가 될 수 있는 조건을 가진 사람들은 그러한 조건을 자신의 계급으로 여긴다. 어떤 대학에 입학했고, 어떤 대학 출신이며, 어떤 자격증을 가지고 있고,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는지 등등. 남들보다 우월한 조건을 계급화한다. 그것이 이익으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일단 달성한다면 하위 계층에 비해 더 강력한 사회적 영향력과 이익을 보장한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만들어져 있다.

 

서울대 출신이기 때문에 타 대학의 더 뛰어난 학생에 비해 더 좋은 조건으로 사회에 진출할 수 있고, 엘리트 집단은 그 구성원이 어떠한 죄를 저질렀든 집단에 대한 반역이 아닌 이상 대부분 보호해줄 수 있다. 그들 스스로 역할이 아닌 계급의 관념으로 생각하고 움직이기 때문이다.

 

***

대한민국 헌법 제11조는 이렇게 작성되어 있다.

 

대한민국 헌법 제11조(평등권, 특수계급제도의 부인, 영전의 효력)
①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 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
②사회적 특수계급의 제도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어떠한 형태로도 이를 창설할 수 없다.
③훈장등의 영전은 이를 받은 자에게만 효력이 있고, 어떠한 특권도 이에 따르지 아니한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할 수 있기에 하는 사람들이 있고, 할 수 있기 위해 그렇게 만든 자들이 있다. 한국은 주변 다른 나라들보다 더 탈피했을 수는 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전근대 사회의 관념에서 탈피하지 못했다.

 

수평적 정의보다 수직적 정의가 더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고, 그것을 옳다 믿으며 더 우월한 계층과 열등한 계층으로 구분하여 실질적으로 계급화 되어 있는 사회에 가깝다.

 

성공하는 자, 성취하는 자가 상을 받고 보상을 얻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그것은 정의롭고 올바르다. 그러나 실패한 자, 성취하지 못한 자가 벌을 받는 것은 이상하고 불합리하다. 그것은 실제로 그들이 받는 벌이 아니다. 성공한 사람들이 열등한 패배 계급에 내리는 벌이다. 다분히 계급주의적 우월의식의 발로일 뿐이다.

 

실패하고 성취하지 못한 사람은 성공한 사람에 의해 갑질을 당하고, 그들에게 범죄 피해를 받아도 그들이 처벌 받는 것은 쉽게 기대할 수 없다. 적절하고 충분한 보상 역시 그러하다. 이것은 시스템에 의해 벌을 받는 것이 아니다. 그 시스템을 다루는 사람에 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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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일베를 위시한 호남혐오자나, 일본의 혐한은 가해자와 피해자가 명확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반성하기는커녕, 오히려 피해자를 조롱하고 공격하고 멸시하고 있죠. 지금까지도요. 오히려 있는 문제를 찾아내거나 없는 문제를 만들어내서까지도, 이유를 조작하고 날조해가면서까지 해대는 작업입니다. 


이것을 단순히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는 정도로 이해하는 것은 틀린 것만은 아니겠지만, 그것만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일은 아닐 것입니다.



1.

기본적으로, 앞서 말했듯이 전라도 혐오나 일본의 혐한은 공통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전라도가 경상도와 경기도 같은 우월한 지위에 있던 지역에 차별 및 상대적으로 착취 당했던 지역이었다는 것과,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것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쉽게 말해 수직적 위계서열이 있었으며, 어느 한쪽이 사실상 일방적 가해자의 위치에 있다는 점입니다.


좀 더 문제가 단순한 한일관계를 주 예시로 들겠습니다.


일본은 한국을 식민지배했고, 그러한 관계는 오랫동안 정신적 우월감을 가져다줬습니다. 그리고 해방 이후에도 수십년간 서구에서조차 가볍게 보지 않았으며, 대단한 경제적, 문화적 업적을 가진 세계대국인 일본에 비해 9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분명한 후진국, 개발도상국이었던 한국이 어느새 일본과 맞먹거나 그 위상을 넘보는 시점까지 오게 되었죠.


이는 일본에게 하여금 언제나 발 밑에 있던 한국이 자신과 맞먹으려 한다는 불쾌감을 안겨줬습니다. 언제나 내 아래에 깔려 있어야 할 아랫것인데, 당당히 허리를 펴고 선다는 게 싫은 거죠.


따라서 일본의 혐한은 단순히 이러이러해서 한국이 싫고 어쩌고가 아닌, 위상의 역전에서 찾아오는 위기감에 더 가깝습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이를 막을 방법이 거의 없기 때문에 그저 깍아내리며 정신승리를 하는 겁니다. 그 위기감을 절실히 느꼈을 때 무역공격을 감행한 것이고요. 사실상 실패했지만.


전라도에 대한 혐오도 그와 같습니다. 독재정권하에 착취와 차별을 받던 전라도가 자신의 위치를 복구하며 남과 같은 대우, 남과 같은 위상을 되찾는, 정확히 말하자면 정상화해가는 것을 거부하고자 하는 것이죠. 물론 독재시절 만들어진 차별의식을 밈으로써, 구시대적 정신의 계승을 통해 젊은 세대 또한 갖추게 된 것도 사실일 겁니다.



2.

이제 인간을 바라보자면.. 삶이 여유로울수록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은 직접적이게 됩니다. 트위터나 커뮤니티, 게임, 애니, 영화에서 여행, 스포츠, 술자리 등 인간관계나 이성관계마저도요. 경제가 되었든 시간이 되었든 여유가 부족하고 인간관계가 협소할수록 스트레스와 불만을 푸는 방법은 한정적이게 됩니다. 더욱 간접적이게 되죠.


물론 이 직간접적 방법들은 직접적일수록 더 건전하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오히려 문란해지기도 쉽고 더욱 직접적인 갈등에 휘말리기도 쉽죠.



3.

강약약강은 비열한 것이긴 하지만, 동시에 그게 당연하고 합리적인 본능적 태도임은 사실입니다. 정의로운가와는 별개로 말입니다. 조선시대 양민들이 계급적 차별이나 때때로 폭력의 피해자였지만 동시에 천민에 대한 잔혹한 가해자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훗날 신분제가 없어졌을 때도 그것에 반발했던 것은 자신들의 감정받이 역할을 하는 천민이 사라진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들이 자신들과 같은 취급과 자격을 얻게 됨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고요.


양반은 너무 고고하고 와닿지 않을진 몰라도 바로 옆에서, 바로 밑에서 치대는 천민은 곧바로 자신의 혐오와 차별 등 가해의 쾌감을 느끼게 해주는 창구였지요. 물론 실제 역사에서 그 정도로 노골적이고 광범위하며 직접적인 폭력을 행하는 수준은 아니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들의 존재는 양민들로 하여금 신분적 차별과 불만을 해소할 수 있는 역할을 했지요.


요는 감정받이 역할을 해줄 약자, 혹은 그러한 계급이 중간에 낀 이들의 감정받이 역할을 해주고 자존감을 회복시켜주는 용도로 사용된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이러한 구조는 결코 정의롭지도, 공정하지도, 심지어 항구적이지도 않습니다. 반드시 희생되어야 하는 최하위 계층에 계층적 불만을 거르고 걸러 쏟아낸다는 것이니까요.



4.

혐오와 차별은 그 자체로 우월한 지위를 안겨줍니다.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그런 것처럼 느껴지게 하죠. 이는 자신이 얼마나 대단하고 뛰어난 사람인가와 별개로 가해하는 대상에 비해 우월하게 느껴진다는 게 중요합니다. 거기에서 찾아오는 정신적 쾌감도 작지 않죠.



5.

이번엔 대상을 좀 더 한정지어보겠습니다. 인터넷에서 찾아볼 수 있는 일베류 혐오종자들의 경우 게임이나 다른 커뮤니티에서 갑자기 정치 이야기를 꺼내곤 합니다. 그리고 혐오자의 태도를 취하죠. 과거 일베는 왜 티를 낼까라는 글을 쓴 적은 있습니다. (https://konn.tistory.com/652) 그 글에서 일베는 사회 낙오자, 잉여인간, 정상적인 인간관계를 맺지 못하는 이들이라 한 적이 있죠.


그들이 갑자기 정치를, 그것도 혐오적 태도를 취하는 이유는 단순합니다. 그것 말고는 내세울 게 없기 때문이며, 혐오자의 태도를 취하며 자신의 빈약한 자존감을 회복시켜줄 수 있는 몇 안 되는 활동이기 때문이죠. 무언가를 혐오하고 차별하고 공격하면 자신은 아주 뛰어나고 대단한 사람이 된 것처럼 느껴지니까요.


삶이라는 경쟁에서 탈락한 패배자들이 자신의 자존감을 회복하고 자신이 훨씬 대단한 사람이라 느끼고 싶은 겁니다. 내가 이렇게 살아도 이만큼 아는 게 많고 뛰어난 능력을 지닌 사람이다. 올바르게 인식하고 사는 사람이다. 라고. 


그렇다고 일베나 일베류 사상과 맞서기엔 더 간단하고 더 노골적이며 더 직관적인 논리나 주장을 하는, 더욱이 그러한 공격에 조롱이라는 유머적 요소를 가미한 일베의 그것이 더욱 재밌고 받아들이기 쉽다는 겁니다. 제공하는 말초적 쾌감이 다르고 이해하기에 더 간단하고 직관적입니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문제다. 라는 긴 설명보다 저새끼가 개새끼다. 라고 표적을 가리키고 문제를 단순화(돈 때문이다, 관심 때문이다, 원래 전라도 종자라.. 등등)시킨 것이 더 이해하기 쉽습니다.


더 간단한 논리의 선동이 그러한 것을 판단하기 위한 지적능력이나 소모해야할 인지력이 부족한 이들에게서 더 쉽고 광범위하며 빠르게 받아들여지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무엇이 문제라면 그것이 왜 문제인지 제나름대로 분석하고 판단할 지적능력이나 그 능력을 활용할 정신력(인지력)이 필요한데, 여유롭지 못할수록 그렇지 못하다는 겁니다.



6.

인터넷 혐오종자 일베충들이야 그렇다치고, 그렇다면 다른 이들은? 더 잘 살고 더 여유로운 이들은 어째서 그러한가 한다면, 사실 그들은 그렇게 여유롭지 못하다는 점과, 오래전부터 그러한 가치관을 받아들였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이 여유라는 개념은 경제적일 수도 있고 정신적인 면일 수도 있습니다. 권력자임에도 아랫사람을 괴롭히거나 부당한 명령을 내리거나 사소한 것마저도 꼬투리를 잡고 굳이 찍어누르는 것은 자신의 권력을 끊임없이 재확인하고자 하는 불안감에서 비롯됩니다. 혹은 자신이 받는 스트레스를 자기보다 낮은 위계에 있는 이들을 통해 해소하려는 것이죠. 앞서 이야기한 감정받이.


혹은 젊은 시절 전라도에 대한 혐오적 가치관을 접하고 별다른 비판 없이 받아들인 이들은 그에 대한 비자발적 가치관적 붕괴나 자발적 편견포기가 있지 않는 이상 오히려 오랜 시간 동안 확고해집니다. 그냥 그러한 태도가 삶이 되는 거고, 자신을 형성하는 가치관, 혹은 세계관의 일부가 되는 거죠.


그러니 이에 대한 비판이나 의식개선보다는 그것을 온전히 보존하고나 하는 욕구와 이에 대한 공격에 방어적 태도를 발생시킵니다. 얼마나 합당한지와 별개로 그저 거부하고 보는 거죠.



7.

가해자가 도리어 피해자를 혐오하는 것은 일견 비합리적이고 이중적으로도 보입니다. 그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피해자의 말살을 의도하는 것처럼도 보입니다. 하지만 단지 그 뿐만은 아닐 것입니다. 정말 피해자가 아무 것도 아니게 되었다면 혐오하고, 조롱하고, 차별하겠지만 그 이상의 공격성을 보이진 않을 테니까요. 하지만 적극적이고 전략적인 작업을 하는 이유는 위상이 정상화되어 맞먹는 것에 대한 거부반응일 것입니다.



8.

이러한 것들을 조합해보면, 일본의 혐한론자는 자신들의 불만을 쏟아낼 창구로 한국을 선택한 것이고, 그 근거는 식민지 시절의 우월한 지위에서 출발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성장과 위상의 정상화는 천민이 양민과 맞먹으려 하는 받아들일 수 없는 계급적 반란으로 보이는 것이죠.


이는 단순히 한일관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닌, 흑백갈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노예 신분이었고 제도적 차별의 대상이었던 흑인이 자신들과 같은 위상을 가지며 맞먹는다는 것은 그로 인한 우월감을 느끼던 백인들에게 불쾌감을 안겼고, 마찬가지로 그러한 시대를 겪지 않았던 백인에겐 그러할 수 있었던 기회를 상실했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전라도가 자신의 위상을 회복, 정상화하는 것이 비호남 전라도 혐오자들에겐 덮어놓고 조롱하고 차별하고 혐오하던 대상이 사라짐에 따라 불쾌감과 위기감을 느낀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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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자기 전에 했던 생각은 이것보다 잘 정리가 되었는데, 일어나서 글로 쓰니 생각했던 것의 반도 제대로 못 썼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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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정에서 가장 중요한 건 혈통입니다. 왕의 자식, 왕가의 혈통이라는 것. 그리고 그것에서 권력과 권위는 발생하죠. 물론 그러한 권력이 발생하기 위해서 무력, 경제력, 영향력, 계약 등이 필요하긴 하지만, 왕이 되었다는 건 그런 것을 가지고 있다는 거기도 하죠.


하여간, 왕정에서 가장 중요한 지상가치는 혈통이고, 혈통에서 권력이 보장됩니다. 귀족으로 태어났다면 귀족의 권력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고, 왕족으로 태어났으면 왕족의 권력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며, 평민으로 태어났다면 평민으로서의 권력만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속적 권력은 정치적인 것이며, 실재하는 것입니다. 



반면 자본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지상가치는 자본 그 자체죠. 자본은 그 자체로 단순 물질일 뿐이지만, 그것이 실제로 시장을 돌며 권력으로 작용합니다. 즉, 왕정에선 혈통에서 권력이 나온다면, 자본주의에선 자본에서 권력이 나옵니다.


자본주의가 왕정, 귀족정, 독재, 민주정과 다른 점은, 그러한 권력이 실재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자본에 의해 권력이 나오지만 그러한 자본은 위임 받고 계약을 통해 보장될 수 없는, 움직이고 줄거나 늘어날 수 있는 것이죠. 자본을 가지고 있으면 권력이 생기는 것이고 그러한 자본이 줄어들면 그만큼 권력도 줄어듭니다.


이는 권력이 실제로 존재하며 작용하지만, 그 권력 자체는 실재하는 것이 아닌 셈이죠. 또 하나의 특이성은 왕정에서는 그러한 실질적인 무력과 권력의 존재에 대해 견제장치가 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자본주의에선 그러한 견제장치가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에겐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혹자는 이 말에 대해 대기업, 재벌, 자산가 등이 존재함을 지적할 수 있지만, 왕족이나 귀족들에겐 권력이 없어도 그러한 견제장치가 작용하지만 자본주의의 자본가들은 그러한 실재하지 않는 권력인 자본에 의해 늘어날 수도, 줄어들 수도, 없어질 수도, 심지어 초월할 수도 있다는 점이 다르죠.


따라서 그들 대기업, 재벌, 자산가 등은 언제든지 변화할 수 있는 자본의 유무에 따라 그 범주에 속할 수도, 빠져나갈 수도 있는 것이며, 그러한 것은 기존의 세속적 혈통이나 불변의 기준에 의해 구분 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현실에서 재벌이나 대기업, 부자들라고 범주화해서 특정할 수 있고 집단화시켜 부를 수 있지만, 그들은 왕족이나 귀족과 같은 분명히 집단화시켜 부를 수 있는 존재라고 할 순 없습니다. 혈통은 변하지 않지만 자본은 변할 수 있죠.



물론, 마찬가지로 현실에선 자본에 대한 견제장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견제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고 경험적으로도, 이론적으로도 여러 해석과 실전을 겪었기 때문이죠. 그렇기 때문에 실제로 법인세, 재산세, 누진세 등의 제도를 통해 그 자본을 견제하고 있죠.


하지만 자본의 권력은 다릅니다. 자본 그 자체를 견제하는 건 가능하지만 자본을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대해선 결코 용납할 수 없는 몇몇 요소를 제외하면 --심지어 불법이거나 비상식적인 사례가 있긴 할 정도지만-- 건드리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게 세속적 권력과 자본적 권력의 가장 큰 차이점이죠. 제도적인 견제장치가 개인, 집단에게 있어서 그 권력의 사용을 제한하고 견제할 수 있느냐 아니냐의 차이입니다. 왜냐하면 자본에 의한 권력은 실재하는 권력이 아니기 때문이고, 단지 실제로 현상으로 벌어질 수 있는 권력이기 때문입니다. 자본을 가진 것은 사실이고 자본주의 사회에선 그것이 곧 권력으로 작용할 수 있는 지상가치이기 때문이죠. 


신분제 사회에서는 기회가 되고 할 수 있다면 다른 이를 죽여서 귀족이나 왕이 되려고 했지만, 자본주의에선 자본을 얻기 위해 다른 이를 죽여서--혹은 짓밟아서-- 그 범주에 편입되고자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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