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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며,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 - E.Kant
by Ko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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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에 해당되는 글 12건

  1. 2024.01.26
    천사의 존재를 믿는다고 답변하게 되는 이유.
  2. 2023.10.29
    False Patriot 틀린 애국심.
  3. 2022.10.23
    나는 진보적으로 보수적이게 되었다.
  4. 2022.10.20
    도덕과 자기검열이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맡는가.
  5. 2017.11.07
    오컴의 면도날 -가장 간단한 도덕률-
  6. 2015.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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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14.05.13
    나는 이성적이다. 쿨뽕. 4
  10. 2013.12.19
    판단을 하지 못하는. 2
  11. 2013.09.20
    도덕을 강요하는 법, 효도법. 10
  12. 2013.05.29
    일베에 대한 단상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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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사회가 형성되면 기준적 윤리 역시 형성된다. 그렇지 않으면 집단을 유지시킬 일정한 규칙이 마련되지 않기 때문이며, 규칙이 마련되지 않은 집단이란 언제든 해체될 수 있는, 혹은 애초에 집단 자체가 환상에 불과한 현상이 된다. 이러한 기준은 반드시 윤리일 필요가 없다. 그저 일정한 규칙이 존재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그러한 기준은 대개 윤리적 기준으로 형성되고, 그것을 요구하게 된다. 2023년 조사 기준, 천사가 실제로 있다고 믿는 성인의 수가 가장 많은 나라는 10명 중 7명으로 미국이다. 이는 미국인들이 그만큼 무식하거나 종교적이라는 의미도 되겠지만, 후자에 조금 더 집중할 경우 그것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미국인들의 신앙심이 투철하다는 것이라기보다는 그것이 자신의 생각을 통제하는 자기검열의 수단으로서 작동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봐야 한다.

기실 윤리적 기준은 스스로를 검열하게끔 하는 도덕적 지침이 되지만 도덕과 윤리는 같은 이름과 믿음으로 비도덕적이고 비윤리적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신앙에는 방향이 없이 깊이와 밀도만 존재하기 때문에 신앙심이 깊다는 것이 그 사람이 선하다는 의미 역시 아니다.

그런 관점을 수용한 후에 진행하건데, 미국인들에게 종교는 삶과 삶의 방식에 있어 아주 밀접한 것이고 종교적 믿음이 윤리에 작용하는 바는 아주 강력하다는 것이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종교적 신앙은 미국인들을 아주 강하게 검열하고 있으며, 그것은 본질적인 것이라기보다 피상적으로 요구된다. 즉, 자기 희생이나 약자에 대한 실천적 보호, 지원보다는 누군가 천사를 믿느냐는 비현실적인 것의 존재를 묻는 질문에 그렇다라고 말해야 하는 방식이다.

미국인들이 실제로 천사를 믿느냐 아니냐, 혹은 그것이 진짜로 있느냐 아니냐와 같은 것은 중요한 게 아니다. 그들이 그렇게 말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자신의 신앙심을 지키는 행위이기도 할 뿐더러, 그렇게 요구 받는 윤리적 기준의 존재 때문이다. 그들이 천사의 존재를 믿느냐는 질문에 아니다. 라고 답한다면 그들은 스스로를 규율하는 윤리적 기준에 위반하는 행동을 하는 것으로, 양심에 어긋나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일반적이거나 보편적인, 혹은 과반에 가까운 기준으로 작동하는 사회의 경우, 이것은 하나의 사회적 요구처럼 동작한다.

이것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소아성애와 결부시켜 생각해보자. 어떤 사람이 실제로 어떤 성향을 가지고 있든, 사실이든 그렇지 않든 소아성애적 표현을 하거나 그것을 드러낼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지금 기준으로 소아성애는 끔찍한 범죄가 되고 그 어떤 사회에서도, 특히 서구 사회에서는 가장 끔찍하고 비인간적인 범죄로 인정 받고 멸시, 차별, 배척 받는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소아성애에 속하는 행위나 가치관은 그리 드문 것이 아니었고, 10대 초중반의 아이들에 대한 성애, 결혼, 약혼, 성교나 성적 요구는 꽤 흔한 것이었으며, 그것은 그 시대의 사회적, 관습적, 문화적 사유로 인해 요구되는 형식이었다. 물론 지나치게 어린 아이에 대한 나이 차이가 나는 성인의 그것은 그 시대 기준으로도 지탄 받은 행위 였음은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물론 윤리적 기준은 시대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 중 하나이고 소아성애를 긍정하자는 말은 아니다. 다만 실제로 어떻게 생각하든, 심지어 별 의견조차 없든 그렇게 요구 받는 윤리적 기준, 도덕적 잣대가 존재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증명을 요구받을 때 일정한 답변이 정형화되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즉, 이렇게 말하지 않으면(자신의 신앙을 증명하지 않으면/자신의 혐오나 증오를 증명하지 않으면) 그 자체로 의심 내지는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것을 피해야만 하는 사회적 요구가 되는 것이다. 신을 믿고 신앙을 가진 자신은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천사를 믿느냐는 질문에 그렇다라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되고, 소아성애에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든, 심지어 그 본인이 소아성애자라 하더라도 그에 대한 증오나 혐오를 보여줘야만 한다.

서구의 범죄자나 갱, 혹은 그와 유사한 폭력 집단이 자신들의 소아성애에 대한 혐오와 증오를 증명하기 위해 소아성애자(혹은 동성애자)를 공격하여 폭행하거나 살해하는 것은 그러한 요구의 극단적 표현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스스로 그러한 것에 강렬한 적대감을 증명하기 위해 굳이 그러한 행위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행위는 심지어 범죄적인 것이라 하여도 사회적 윤리 기준에 편승하여 정의로운 것으로 여겨지거나 그에 준하는 행동으로 평가 받는다.

한국 사회에서도 그러한 기준이 있다. 반공이 국시이던 시절에 좌파적 사상에 대해서는 공공연하게 혐오와 증오, 적대감을 강렬하게 표현할 수록 그것은 바람직하고 정의로운 것처럼 평가 받는다. 심지어 그것이 당연히 실현 불가능한 말 뿐인 것이라 하여도 도리어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훌륭한 것이 된다. 가령 북괴 빨갱이에 대한 무제한적 살상과 학살을 통해 지구상에서 북괴 빨갱이를 절멸 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강력하고 폭력적 어조로 웅변한다면 모든 경우에 그렇지만은 않겠지만 어떠한 경우, 꽤 많은 경우 바람직하고 훌륭하며 애국적인 것이 될 것이다.

그것은 사회적 윤리/도덕적 기준이 그렇게 평가하도록 한 사회에 영향을 받는 모든 이에게 요구한다. 이러한 사회적 요구는 거대한 흐름으로서 존재하기에 개인의 사상이나 지성, 양심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모든 개인은 사회 속에서 진영논리에 종속될 수밖에 없고 영향을 받는다. 설령 본인은 어떠한 진영에 속하지 않는 팩트만 본인의 양심과 지성에 따라 공정하고 정확하게 말한다 해도, 그러한 언어는 특정 진영, 집단에 유익하게 될 수밖에 없다.

북한 문제에 관해 진보, 보수, 좌파, 우파적 기준에서 완전히 탈피된 새로운 의견이 나올 수 있을까? 불가능할 것이다. 반공이 국시인 시절에서 벗어났지만 아직도 한국 사회는 여전히 반공적 가치관을 정의롭고 바람직한 것으로 인정하는 사람들이 많고, 적어도 인구 절반에 가깝게 그러하기에 이를 보편적이라고 할 수 있거나, 최소 그에 준한다고 말해도 이상할 게 전혀 없다. 그리고 그들은 그 반대 절반에게 자신들의 윤리 기준을 요구한다.

북한에 대한 강렬한 적대감을 언어와 행동으로 증명하라고, 그러나 결코 북한에 대한 직접적 적대 행위, 공격 행위로 증명하지는 말하는 것이다. 소아성애를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자들이 직접적인 살해를 저지르는 경우는 극히 적은 것처럼, 그러한 범죄적 행위를 행하는 자들은 한국 내에서도 매우 특정할 수 있는 소수에 불과한 것과 같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에게 향해질 비난과 의심을 피하기 위해 그러한 상황이나 요구에 검증적 반응을 요구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바람직한 것일까? 자유주의적 관점 내에서 이러한 사회적 요구가 특정 답변, 태도의 강요로 작동하는 것은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모든 개인은 자신의 지성과 양심에 따라 자유롭게 생각하고 행동하며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며, 본인의 판단에 따라 결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사회 내에서 일정한 윤리적 기준이 형성되는 것은 아주 흔한 일이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자연스러운 일을 비윤리적이라 비난하는 것은 자연스럽지 못한 일이다.

소아성애에 관한 개인의 생각이나 관점이 어떠하든 그것은 자유로운 지성의 결과이겠지만 모든 개인은 오롯이 독립적일 수 없고 사회라는 집단의 흐름에 영향을 받는다. 어떠한 윤리, 도덕적 기준은 그 근간 논리와 사례가 존재해야 구성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생각이나 관점은 진실로 자유로운 사유의 결과일 수 없고, 설령 그러하다 치더라도 개인은 사회 속에 존재하는 객체이기 때문에 사회적 요구에 순응해야 한다는 판단을 내리는 것도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이는 자유가 합리성과 유리될 수 없으며, 외부적 조건에 배율적일 수도 없음을 이유로 한다.

사회도 국가도 타인도 없는 자연 속에서 어떠한 윤리적, 도덕적 요구도 받지 않는 자가 눈앞의 포식자를 두고도 자유로운 사고의 결과 그것을 피하지 않겠다는 판단을 내리는 것은 지적 능력을 자유롭게 활용한 것이겠지만 그 결과는 피식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한 사회 내에 존재하는 사람은 자유롭게 사고할 수 있으나 그 결과에 대해 공개적으로 표현할 경우 그에 대한 대가, 혹은 책임이라는 이유로 타인의 평가를 피할 수 없다.

이것은 자유에 따라야할 것이 책임이기 때문이며 나의 자유를 타인이 인정하는 것과 그 자유에 대한 결과로 따라오는 책임을 받아들이는 것은 서로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대저 자유를 근거로 특정한 표현에 대해 일반의 비난과 비판을 받는 경우 그 자유로운 표현의 결과 따라오는 책임을 자유와 혼동하는 경우가 존재한다.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지만 그에 책임이 부여되는 것은 응당한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그러한 책임을 부여 받는 것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본심이나 판단을 공개적으로 표현하지 않는 것은 흔한 일이면서도, 그 요구가 비이성적이거나 극단적일 수 있다. 사회의 보편적 윤리 기준은 그 사회 구성원의 윤리 기준의 평균에 기인한다.

그러나 특정한 가치에 있어서 유독 극단적인 요구가 이루어지는 경우와 합리적이지 않은, 때때로 감정적이거나 비합리적일 수 있음에도 그것이 도덕적인 기준을 충족하는 경우는 구분되어야 할 것이다. 전자의 경우 내국인에게 좌파적이거나 온건한 형식에 사상검증을 요구하며 그 기준을 충족시키기 못할 경우 비난하는 것이 그럴 것이고, 후자의 경우 적에게서 국가와 민족 등 사회 구성원을 지키기 위한 투쟁이나 행위, 사상을 비난하거나 폄하할 때가 그러하다.

특히 후자가 역사적 문제로 분노할 이유는 충분하나 현실적 필요로 그들과 무조건적으로 적대하거나 책임을 요구하지 못하는 경우가 그러할 것인데, 그러나 인간/집단의 감정 문제 역시 합리적으로 다뤄야할 문제인 고로, 합리적이지 못하거나 비이성적인 것 그 자체가 반드시 틀림의 영역에 속한다고 하는 것은 특정한 목적성을 가진 교조적인 태도일 것이다. 합리성을 어떠한 주장이나 가치에 합치시키기 위한 도구적 활용으로 말이다.

현실에서 찾아볼 수 있는 다양한 구체적 사례에 관해 어떤 것이 옳고 그르고, 그것이 어째서 그렇게 구분되어지는가에 대해서는 이 글에서 굳이 다루지 않겠다. 그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고 개별적으로 많은 근거와 논리, 사례를 열거하며 비교해야 하는 일이 될 것이기에 지리한 일이기도 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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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심은 사악한 자의 미덕이다.

- 오스카 와일드

False Patriot 틀린 애국심.

애국자는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긍정적인 미덕으로 여겨지며 공통된 지향점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애국에 대한 비판과 금언들이 그것을 경계하는 것은 그것을 내세우는 것이 실질적 긍정성에 도움이 되느냐와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가령, 입으로 애국을 말하는 자가 단기적으로, 그 이상으로 장기적인 관점에서 사회적 신뢰를 깎고 제도적 불공정과 경제적 불평등에 조력을 가하며, 정치적 경쟁을 자극하고 자의적인 기준에 따라 애국자와 비애국자를 가르며 비애국자로 구분된 자에 대한 공격성을 보인다. 그러한 행위는 공동체가 지켜야 할 공통된 도덕과 유리된 경우가 많으며 애국의 기준이 자신이 믿고 지지하는 정치적/사회적/경제적, 총체적으로 국가적 이념에 부합하지 않았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즉, 애국자는 적을 찾으며 자신의 애국심을 증명하려 한다.

그것은 자신의 국가를 이롭게 하기 위한 공통된 선행, 봉사, 발전이 아닌 자신이 구분 지은 적에 대한 배격, 차별, 증오, 혐오, 공격 등 배타적 성질의 행위로 나타난다. 그러한 활동에서 성취감과 충만함, 그만큼의 위기감을 느끼며 자신의 애국심을 강화한다. 

만약 그 적이 진짜 적이라면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구체적인 구분을 어떻게 할 것인가? 미래에 대한 평가와 판단은 관점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누군가 그것을 옳은 것, 해야 하는 것, 국가가 나아갈 길이라고 생각할 지라도, 누군가는 그것을 국가적 손실, 체제에 대한 위협, 안보의 파괴, 경제적 불평등 심화, 매국적 외교 등으로 상이하게 판단할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우리가 역사적 사건에 관해 판단할 때 일반적으로 해석되는 경향이 있고 어떤 것은 그러한 해석이 옳은 해석이 되는 것처럼, 현재 이루어지는 정치적 향방에 대한 해석은 사람마다 다를지언정, 역사적 관점에서 그것은 하나의 주류 해석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다.


다시 말해, 지금 우리는 확언 할 수 없다고 해도, 미래의 후손들은 현 정치적 상황에 있어 누가 애국을 했는지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가령 나치 시대 대부분의 대중들은 스스로를 애국자라 여겼겠지만 현재에 와서 나치에 반대하고 자유와 인권을 위해 투쟁한 이들에게나 애국자라는 평가를 붙힐 수 있을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모든 가치의 최상위에는 인권과 도덕이 존재한다.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행위는 애국적일 수 없다. 모든 공동체는 집단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 존재하고, 그것을 이룩하지 못한다면 존재 가치가 없다. 헌법에서 스스로 규정하는 국가 최고 규범적 가치를 실행에 옮기지 못하는 행정부와 정권은 집권 자격에 흠결이 존재할 수밖에 없고 인권과 그것을 기반으로 하는, 혹은 인권의 기반이 되는 범도덕적 원리에 단호히 반대하는 세력은 전체 집단의 생존과 번영이 아닌 특정 집단의 생존과 번영만을 추구하는 위험성을 내포한다.

문제는 그것이 민주주의적 원리, 혹은 자본적 우위, 무력의 독점을 통해 사회적 질서를 형성하는 경우를 생각해볼 수 있다. 자본주의에서 윤리란 자본의 축적을 의미하고, 독재에서 윤리란 독재자, 혹은 독재 정당의 절대 권력을 지키는 것이다. 이것이 말하는 윤리와 도덕은 우리가 인권을 기반으로 하여 인식하는 규범과 큰 차이가 있다. 그것은 타인, 혹은 대중, 국민, 시민이라 불려지는 자들의 권리를 인정치 않고, 그들 삶의 풍요와 행복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즉, 인권을 존중하지 않는 가치 체계이다.

인권을 존중해야 하는 이유는 당연하다. 그것이 다수의 행복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인간의 집단에서 행복은 매우 중요한 가치이며, 한 개인이 생명으로서 살아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절대 다수가 불행한 사회가 장기적으로 생존 가능하며 항구적 발전과 평화를 이행할 수는 없는 법이다. 불행과 불만은 충돌과 갈등을 빚고, 시간에 따라 증대하는 사회 비용의 엔트로피는 그 사회의 여력과 자산을 갈등과 분쟁의 해결에 투입하게 될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그 사회는 스스로 붕괴한다. 즉, 집단의 구조적 모순이 집단의 생존 가능성을 스스로 불능 상태로 만든다는 것이다.


물론 인권을 존중하지 않는다면 모든 집단이 붕괴하는 것은 아니다. 역사상 수많은 왕조와 국가들은 구조적 이유만으로 붕괴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역사상 대부분의, 혹은 적지 않은 집단은 내부 구조적 모순을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에 멸망하거나, 그 원인이 된 경우는 무수히 많다.

또한 인권에 대한 보장이 어느 수준이냐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민중 대다수가 비참하게 살아간다 하더라도 국가는 존립할 수 있다. 그들이 생존이 가능한 상태이기에 생존에 몰두하며 협력과 연대보다 상호 경쟁하는 것에 몰두하는 상태, 혹은 아예 생존만을 위해 남은 여력을 모두 투입해야 하기 때문에 그 이상을 추구하는 것이 불가능한 빈사의 상태. 전근대의 경우, 민주와 국민주권을 상상할 수 없는 체계 속 개인.

이러한 상태에서 첫번째의 경우 일정 정도의 권리는 보장이 되지만, 구조적 모순을 사회적 규칙으로 받아들이길 요구하고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인 이들에 의해 유지되는 경향이 크다. 극소수의 기득권이 어떠한 이유로든 막대한 특권과 자본을 독점하며 그것을 제도적으로, 사회적으로 인정 받아야 한다 믿는 경우 그러한 기득권에 도달하고 싶거나, 그들에 의해 사회의 안정과 발전이 이루어진다 믿는 그렇지 못하는 자들에 의해서 구조적 모순은 해소될 수 없다. 아니, 애초에 인식되거나 인정받지도 못한다.

지구상 대부분의 국가를 구성하는 민주주의 체계는 근본적으로 국민주권을 인정해야 하고, 그러한 국민주권은 본질적으로 인권을 보장하기 위함이다. 국민 스스로가 결정하고 책임지는 것으로 인해 소수의 집권 기득권에 의해 다수가 피해를 입는 상황을 방지하고 다수의 의견과 주장을 모아 더 나은 결론을 낼 수 있는 토론의 장을 만들기 위해서이다. 결정권자는 스스로 생각하여 선택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애국자라고 하는 이들은 자신이 믿는 어떠한 가치를 위해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고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것이 민주주의의 원리와 체계를 위협하는 것이 아님에도 그들에게 다양한 낙인을 찍고 국가의 적으로 규정한다. 그들의 적은 외부에 있지 아니하고 언제나 내부에 존재하며, 외부의 적과 싸우는 것보다, 외부의 적에게 비난하되, 싸우는 건 내부의 동조자를 향한다. 그들이 상상하는 국가에는 모종의 순수성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해치는 것에 병리적인 면역 반응을 일으켜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알러지 반응이지 병원균 반응이 아니다.

물론 내부의 적과 싸워야 할 것이다. 국가 정체성을 거부하고 외부 정체성을 받아들인 채 그것을 주류로 만들고자 하는 이들, 직간접적으로 잠재적 적국이나 경쟁국에 이익을 가져다주는 자, 국가의 원리와 규범을 형해화하고 파괴하려는 자들.

말은 언제나 옳다. 어떻게 규정하고 인식하는가의 문제에 있어 평범한 국민은 국가의 적으로 규정되어 사냥을 당할 때도 있고, 사회 개혁을 위해 노력하거나, 소수자의 권리를 요구하는 것이 국가의 적으로 공격 당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다시 돌아와서, 누군가의 애국이 누군가의 비애국이 될 수 있는가? 그렇게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스스로 애국을 한다 믿는 자들도 순수한 활동이 오판에 따른 비애국적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러한 가치판단의 문제에 있어 모든 이들의 행동이 결과적으로 애국심에서 출발한 것이라 할 수 있을까? 정녕 비애국적 행동은 없는가? 끝 없는 충돌과 논쟁을 발생시키며, 서로가 서로를 공화국의 적성 행위라 규정 짓기도 하는, 진보의 애국도, 보수의 애국도 모두 똑같은 애국일까?

나는 과감히 그렇지 않다고 말할 것이다. 나치 시대의 애국이 진정 애국이 아니었고, PATRIOT Act가 글자 그대로 애국적이지 않으며, 노동자의 안전과 권익을 위해 투쟁하는 것이 적성 행위가 될 수 없고, 노인에게 더 윤택한 삶과 청소년, 어린이에게 더 안전하고 부당치 않은 경험을 하게 해주는 것이 비애국적이라 할 수 없다. 사회적 안전망을 구성하여 취약한 이들이 한번의 실패만으로 그들의 삶이 복구 불가능한 상태로 남는 것을 방지하는 게 비애국적일 수 없다. 부정부패와 비윤리적 차별을 정당하게 처벌하고 방지하자는 것이 나라를 위한 일이 아닐 수는 없다.

그것이 국가 최고 규범이 규정한 인권을 지키는 행위이고, 민주국가의 주권자를 보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국민이 주권을 가졌다면 당연히 국민 한 사람 한 사람보다 다른 누군가가 더 우월할 수는 없다. 민주주의 사회에선 역할이 존재할 뿐 계급적 우열이 존재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단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것을 넘어 기회의 균등과 정당한 권리를 보장하고, 법적, 제도적 정의를 지켜 사회의 혼란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 역시 국민을 지키고 그들의 행복을 보장할 수 있는 것이다.

필요에 의해 자연스럽게 형성된 모든 집단은 목표를 가진다. 적과 싸우고 구성원을 지키기 위해 형성된 것이 전사 집단/군대이듯이, 국가란 모든 사람들이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되어야 하지 특정할 수 있는 소수 특권 계급을 위해 존재할 수 없고, 존재해서도 안 된다. 최소한 우리의 헌법은 그렇게 규정했다. 그렇다면 애국과 비애국을 구분 짓는 기준은 이미 준비된 것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부정부패의 처벌과 방지를 요구하는 것이 어떻게 비애국적인가? 당파와 진영의 소속에 근거하지 않는 한 부정한 자의 권력 행사는 보호 받아선 안 된다.

차별받는 소수자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운동이 어떻게 비애국적인가? 그들에게 투입되어야할 세금이 다른 곳에 쓰여야 한다는 목적이 있지 않고서야, 또한 그들의 표 행사보다 더 많은 이들에게서 받을 표가 계산된다면 그렇게 말할 것이다.

개인적 이익 내지는 부당한 보복을 우려하여 특정 정당이나 정치인에게 유리한 기소와 판결을 내리는 판검사를 비판하는 것이 어떻게 비애국적인가? 그것을 통해 이익을 얻는 자들과 그들의 권력을 지지하는 자들이 아닌 이상에야 비애국적이라 할 수 없다.

정치적 승리를 위해, 또는 정치적 책임을 피하기 위해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지 못한 사건을 정치화하는 이들에게 책임을 요구하는 것이 어떻게 비애국적인가? 그러한 책임이 특정 진영으로 향해 정치적 불리함을 만드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다수의 정의와 소수 이익의 대립 속에서 정의를 추구하는 것이 어떻게 비애국적인가? 그러한 대립에서 정의가 훼손되어도 이익을 원하는 자들은 비애국적이라 할 것이다.

군납비리를 저지른 지휘관을 해임하거나 처벌하라는 요구가 어떻게 비애국적인가? 스스로 군대를 약화시킨 지휘관이 병력의 전투력을 온존시키고 전쟁을 제대로 수행하리라 믿지 않는 한에야.


어떤 애국이 진짜 국가와 사회, 그리고 국민에게 도움이 되는 애국인지에 대해서는 그 사람이 얼마나 온전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느냐와, 그 가치관이 어디에 기인하여 형성되었는지로 알 수 있다. 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해 자본주의적 시장에 혼란을 가져와 경제를 왜곡시킨 경제사범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 올바른 가치관으로 나올 수 있는 결론인가? 더 나쁜 사람이 그 자리를 차지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은 처벌과 책임추궁이 제대로 이루어지는 사회에서는 나오기 어렵다. 일정 규모와 수준의 사회에서 대체하지 못할 것은 드물다. 그것은 CEO나 대통령이라 해서 다를 게 없다.

이 나라의 최고 규범은 인권과 자유, 민주를 기치로 삼았고, 그것을 단호히 거부하는 자들이 바로 비애국자이다. 말은 행동보다 강력하지 못한지라, 그들이 말하는 자유, 인권, 민주, 애국, 정의란 단어는 그들의 가치관에 맞는 의도를 내포한다. 그것은 단어 그대로의 뜻이 아니다. 목적에 따라 가공된 단어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너와 나의 구분으로 이루어지며, 여기서 말하는 너는 우리의 적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러한 사상에서 촉발되는 그들의 행동은 적에 대한 적개심과 증오, 폭력과 차별로 발현된다.

그렇다면 누가 애국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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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진보적으로 보수적이게 되었다.

 

한 때 나는, 그리고 지금도 스스로를 진보라 말한다. 모든 진보적 의제에 동의하거나 그 표현, 주장의 방식에 동의하지도 않고, 그들의 논리에 찬동하는 것은 아니지만 진보적 가치관을 가지고 있으며 진보적 의제에 더 설득력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대저 진보주의자들은 옛 것을 거부하거나 무용하다고 여기는 경우가 많다. 때로 그것들은 척결해야할 과거의 유물이고, 해악을 끼치는 곰팡이 비슷한 것으로 여기기도 한다. 그리고 나에게 그것은 산업시대의 유산들이었다. 산업시대의 것들은 대체로 인권과 거리가 멀고, 자유를 정면으로 거스른다. 발전과 자본을 위해서라면 무제한적인 희생과 강요가 필요했고 대체로 그렇게 되었다.

 

그러나 난 민주화 이후의 세상을 살아간 사람이고 자유와 인권, 분배와 평등의 가치가 규제와 희생, 성장과 독점의 가치보다 더 우월하다고 믿는다. 그것이 내가 옳다고 믿는 것들의 근간이며 이것은 어떠한 경우라도, 아니, 전쟁이나 종말과 같은 극단적인 상황이 발생하지 않는 한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입장을 보수주의자들이 불쾌하게 받아들일 것이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자유, 인권, 분배와 평등에 가치를 둔다. 특히 이 중에서 자유와 인권에 대해서는 그들 역시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보는 보수주의자들의 자유와 인권은 그들이 행동하는 바와 상당히 상반되어 있는 경우들이 많다. 내집단-외집단 편향을 감안하더라도, 실제로 그들이 추종하는 가치와 정체성만큼이나 자유와 인권에 대한 보수주의자들의 입장 및 주장은 가변적이었고 대체로 그들의 정치적 유불리(혹은 필요성)와 연관성이 깊었다.

 

 

따라서 나는 진보주의자로서, 보수주의자들이 신화처럼 여기는 산업시대의 그것을 거부한다. 그 모든 것을 거부한다는 것은 아니고, 그것을 역사로서, 그리고 그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의 희생와 노고로서 존중하는 입장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지금 시대에 산업시대의 가치들은 부적합하다고 본다.

 

 

그렇다면 나는 왜 진보적으로 보수적이게 되었는가?

 

진보란 과거의 것들을 부정하는 입장을 취하기 마련이고, 흥미롭게도 멀고 먼 과거보다는 가까운 시대에 국한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혁명기 진보주의자들은 왕정과 과두정에 대한 혐오를 보였지만 지금에 와서 그것들은 머나먼 역사의 이야기가 되었다. 대신 지금의 진보주의자들이 알러지 반응을 보이는 것은 아직 살아서 힘을 발휘하고 있는 가까운 시절의 과거이다. 나에게, 그리고 많은 진보주의자들에게 신업시대가 그러하듯 다른 나라의 진보주의자들도 30~60년전의 가치들은 부정하고자 할 뿐이다. 그것은 이제 역사가 되어야 하고 흙이 덮혀야할 유산들이다. 지금 시대에 맞는 가치가 아니다.

 

 

역사가 말하는 가치.

 

그렇기에 내가 보수적이게 되었다는 것은 시야 밖에 있던 역사적 가치를 시야 안으로 담고 그것들을 통해 내 문법과 시각으로서 가치를 추출하는 것으로 이루어졌다. 모든 지식들은 자기만의 원리와 시각 안에서 해석되기 마련이다. 나에게 조선의 역사는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다.

 

많은 사람들이 조선이나 유교, 성리학을 열등하고 저열한 무언가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러한 시각이 식민사학인 경우 역시 많았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조금이라도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에 대해 공부하거나 배우지 않는다. 지금에 와서는 많은 곳에서 조선과 관련된 재평가와 재인식이 이루어져있지만 여전히 조선은 망할만 했던 국가였고 열등한 국가였으며, 교조적이고 현실에 무가치한 학문을 국시로 삼은 비합리적인 국가로 인식된다.

 

그럼에도 조선의 역사와 성리학의 가치는 지금에도 배울 점이 많다. 특히 성리학은 그것이 어떻게 작동했고, 어떻게 사람을 통제했으며, 전근대 한반도에서 어떠한 역할을 맡았는지 알게 되었을 때 상당한 공학적 정합성마저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래서 그랬고, 그래서 그랬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게 나는 성리학적 가치를 재평가하게 되었고, 이를 현대의 다양한 문제들과 연관지어 비교해보곤 한다. 우리가 흔히 상식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념과 이익 앞에서 변질되고 무시되기도 한다. 비상식이 상식으로 둔갑되기도 하고 특정한 가치 앞에서 다른 것이 되기도 하며, 그러한 특정한 가치관 앞에서 다른 것이 더 우선되기도 한다.

 

가령, 내 사람이라면 그가 어떠한 잘못을 저질러도 일단 감싸안고 편을 들어주는 것이 그렇다. 잘못을 했다면 그것을 추궁하고 책임을 지게 하는 것을 우선하는 사람과는 다르게 작동한다. 물론 전자가 더 현실적이고 정치적 이익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이 부패와 카르텔을 형성시키는 동인이 되는 것 역시도 인정해야할 것이다.

 

 

성리학적 가치란.

 

이 부분은 길게 쓸 생각이 없다. 그러하니 최대한 간략하게 써보려 노력할 것이다.

 

성리학이 말하는 가치는 나에게 자기통제로 읽혔다. 삼강오륜으로 대표되는 원리와 원칙하에 식자는 스스로를 통제하고 성찰하여 그러한 가치를 스스로 추종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서양의 명예와 유사하게 작동하였는데, 남들이 보지 않는다 하더라도 스스로 알기에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 부덕한 행위를 하지 않아야 한다.

 

따라서 윗사람은 윗사람으로서 자신의 역할과 도리를 다하고, 아랫사람은 아랫사람의 도리를 다해야 한다. 왕과 신하, 백성으로 이어지는 수직적 계층은 부모와 자식으로 이어지는 수직적 계층과 동일시하여 정치-행정조직부터 가계까지 일관적인 정신적 통제를 이루어내려 하였다.

 

전근대의 행정력은 결코 지방까지 철저하게 작동하지 못했다. 대신 유교적 가치관은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를 통제하여 부정부패하지 않도록 정신적 자기검열을 하도록 했다. 그것은 정의로운 일이었고, 그들이 일생동안 배워온 것이었으며, 그러한 실천을 요구 받았다.

 

물론 그것이 언제나 완벽하게 작동하지는 않았다. 유럽에서도 불명예가 있었고 신앙인이라는 자들이 정치와 범죄에 종사했던 것처럼 조선의 관리, 선비들 역시 부의 축적을 즐기고 권력의 행사에 쾌감을 느끼며 미식과 여자를 즐기곤 했다. 때로 이것은 정치적인 관점에서 발생하기도 했고, 때로는 구조적인 문제로 발생하기도 하였다. 하급 관리는 충분한 봉급을 받지 못할 경우 자연스럽게 부정부패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지방 관청에서 벌이는 그들의 부정부패는 쉽게 적발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성리학적 가치와 정신은 나름 잘 작동한 편이었고, 조선이 500년간 존속할 수 있게한 원동력이었다. 조선인들, 특히 유학을 공부한 관리와 선비들에게 실천하는 유교적 맥락의 도덕은 매우 중요한 요소였음을 부정할 수는 없었고, 그것이 정치적 정당성과 원리로서 작동하는 사회에서 실질적 권력의 획득과 유지에도 중요했다.

 

핵심은 성리학적 가치가 유교적 원리하에서 도덕적인 자기통제와 실천을 중요시 했다는 점이다. 이를 통해 조선은 천문학적인 부정부패와 그덕에 제대로 집행되지 않은 정책 및 필요를 등한시한 파벌싸움으로 인해 멸망 시점을 앞당겼던 중국의 수많은 왕조들과 다른 지속가능한 발전의 한계를 늘릴 수 있었다.

 

물론 그러한 문제가 조선에 없었던 것은 아니었고 중국 역시 유학적 가치를 추종했던 국가였던 것은 동일하나, 그 양상과 정도, 규모의 면에서 양자는 비교 불가능하다. 무엇보다 중국은 온전히 유교적 가치관 아래에서만 돌아간 국가가 아니었다.

 

 

조선이 가져다준 보수성.

 

나에게 매력적이게 들린 것이 바로 그 부분이다. 자기통제. 개인은 스스로 배우고 익힌 성리학적 가치관에 통제된다. 법을 어기는 것이 아니더라도, 설령 어겨도 남들이 모른다 하더라도 자신의 사사로운 이익을 추구하기보단 자신의 공부가 가르쳐준 원리를 따르고자 한다는 점이다. 모든 선비들이, 모든 관리들이 다 그러진 않다는 것을 안다. 실제로 부정부패가 발생했다는 것도 안다.

 

그럼에도 그걸 지키고자 했던 사람들과 실제로 작동하긴 했다는 점 역시 사실이다. 그렇게 도덕적 타락을 스스로 경계하고 습관적으로 도덕적이었던 그들의 윤리성은 그것이 하나의 환상 내지는 모델에 불과하더라도 지금 시점의 우리 사회에게 시사하는 바를 찾을 수 있다. 극단주의의 확산과 함께 도덕이 해체되고 윤리가 형해화되며 상식이 양분화되는 이 시대에 자본주의를 비롯한 다양한 가치들은 우리에게 도덕적 자기검열을 요구하는가?

 

 

도덕적 선택과 우리가 추구해야할 가치.

 

더 많은 이익을 얻기 위해 도덕과 윤리, 때때로 법을 어길 수 있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수억 원을 받는 대신 몇년 감옥에 가겠다는 사람들은 이전 시절에 비해 훨씬 늘어났다. 극단화되는 부익부 빈익빈의 양극화는 한탕주의의 유행을 발생시켰고 이는 수십, 수백억 단위의 횡령 역시도 등장시켰다.

 

나는 사람들이 자기통제를 잃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려하고 있다. 이것이 진보주의자 특유의 호들갑과 별 것도 아닌 일을 침소봉대 하는 정신증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기에 함부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절대 아닐 것이다. 단지 요즘 사람들이 특별히 더 도덕적으로 타락하는 종자들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굳이 따지자면, 정치의 타락과 경제적 압박, 부모 세대가 이룰 수 있었던 미래를 자식 세대인 자신들은 도달할 수 없을 거라는 불안과 상실감이 그렇게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범죄와 비도덕적 선택을 하지 않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 이익을 위해 비도덕적 선택이나 범죄를 행하는 사람들은 충분히 그러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한 선택과 자신이 얻을 이익 사이에서 저울질 했고, 기꺼이 타락하는 대신 그것을 감수할 수 있을만한 막대한 이익을 추구했다. 그리고 그러한 선택을 합리적이고 영리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문제는 실제로 그러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비도덕적 선택이 이익을 가져다준다면 기꺼이 한다는 것은 그것을 뒤집을만한 패널티가 부족했을 때 가능한 일이다. 수백억을 횡령하고도 몇년, 십수년을 감옥에 있다 나온다면 남은 평생은 그간의 고생을 감당해도 될만한 것으로 여기게 해준다. 젊을 수록 더더욱 그럴 것이다. 우리가 죄인에게 충분한 제재를 가하는가? 수백억을 횡령했다면, 수백년을 감옥에서 보내게 하진 못하더라도 그러한 돈을 주머니에서 꺼내어 이익을 무의미하게끔 해야 한다.

 

선비들의 도덕적 자기통제는, 성리학적 가치관의 인민통제는 지금의 행정력, 치안력과 비교도 할 수 없었던 엉성한 사회에서 그 시대에 비해 잘 작동한 편이다. 그리고 성리학에서 말하길, 배운다면 모두가 선비가 될 수 있다고 하였다. 공부하고 배운 바를 실천한다면 누구든 도덕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이 될 수 있으리라 말했다.

 

우리에게 필요한 보수성은 산업시대에 인간을 공장에서 죽여 돈으로 찍어내던 그것이 아닌 그 이전 시대의 것일지도 모른다.

 

 

진보적이기에 받아들인 보수성.

 

백년도 전의 가치를 지금와서 받아들이는 것은 보수적이라 하는 것이 맞다. 그것이 이전 시대 우리 조상 사이에 보편적이었던 세계관이자 이제와선 역사라 받아들이는 전통이 되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것의 흔적은 적게나마 우리 사회 우리 정신에 남아 있을 것이다.

 

진보주의자인 나는 보수적 가치를 산업시대 발전기에서 찾지 않았다. 그것은 여전히 나에게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심지어 민주주의와 자유를 말하는 보수주의자들은 그 시절의 가치를 추종하며 독재와 그 원리를 가치로 받아들이는 식으로 자기 모순을 일으켰다.

 

그렇기에 나는 그보다 훨씬 구미에 맞는 가치들을 발견했고, 그것은 우리 역사의 과거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성리학적 가치가 이제와서 무용하다 할 수 있다. 동의한다. 지금와서 성리학적 세계관의 논리와 주장을 피며 사람들에게 그걸 지킬 것을 요구할 수 없고, 요구하라고 할 생각도 없다.

 

난 단지 성리학이 말하는 가치들을 보여주며 현대 이념과 사상에서 거리를 둔 도덕적 기준을 제시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할 뿐이다. 모든 성리학적 가치들을 제공할 생각도 없다. 현대 우리 사회에 적용 가능한 가치들만 추출하는 것이 맞다. 서구인들이 현대에 와서도 2000년된 성경에서 가치를 발견하고 모두 동의할 수 있을 법한 도덕과 윤리를 제공하는 것과 유사한 시도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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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도덕이란 자기검열이다.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자기검열이고, 도덕은 그 중 가치판단의 영역에서 옳고 그름을 구분하여 무엇을 검열할 것인지 선택하는 것이다.

 

1.

도덕은 할 수 있지만 하지 않으면서 지켜지는 규범이다. 이는 그것이 법적 처벌을 받을 정도는 아니지만, 누군가에게 크고 작은 유무형적 피해를 발생시키는 것을 피하면서 지켜진다. 작게는 실제 타인의 피해부터 크게는 보는 이로 하여금 기분이 나쁜 것까지 다양하다.

 

2.

그렇다면 왜 도덕은 지키는 것이 옳은가? 그것은 도덕이 규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는 도덕의 범위 내로 포함되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따져야 알 수 있다.

 

도덕이 지키고자 하는 것은 많지만, 가장 근본적인 것은 신뢰이다. 내가 저 사람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을 것처럼 저 사람도 날 존중할 것이라는 것. 내가 욕을 하지 않고 함부로 하지 않으면 타인도 나에게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을 믿는 것이다. 내가 불특정 다수, 내가 알지 못하는 누군가에게 직간접적인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노력하듯 타인도 그러하리라는 믿음이다.

 

이러한 믿음은 사회적 신뢰가 되어 어떠한 불문율이 되기도 한다. 가령 한국에선 밖에서 핸드폰이나 가방, 지갑 등을 놓고 주인이 없어져도 그 자리에 있거나 경찰서, 분실물 보관소 등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이는 남의 것을 함부로 가져가지 않는다는 기본적인 도덕률부터 시작해서, 자기가 자리를 점유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자신의 물품을 놓는 행위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이는 타국에서 줄을 설 때 직접 그 위치에 서있는 게 아니라 신발(슬리퍼)만 줄지어 놓고 본인은 뒤쪽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서 대기하는 것과 유사한 사회적 합의이다.

 

이것은 일종의 문화에 더 가깝다곤 하지만, 그러한 문화와 불문율을 깨고 물품을 훔치는 것은 범죄이지만 비도덕적인 행위이다. 단순히 법을 어기고 남의 것을 훔쳐가는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러한 문화/불문율을 깼고 사회적 신뢰에 대한 훼손을 시도한 것이기 때문에 더더욱 부도덕한 것으로 취급된다.

 

3.

도덕적인 행위는 본인에게 당장의, 직접적인 이익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사회적 신뢰는 거대하게 형성되는 것이고, 조직적/집단적 불문율 역시 그 구성원들의 암묵적 합의에 의해 만들어지는 규칙이고 질서이다.

 

그 집단의 규모가 크면 클수록 개인의 일탈은 사소한 문제로 보인다. 한두 명이 일탈을 저지르고 불문율을 따르지 않고 부덕한 행위를 한다고 해서 집단의 사회적 신뢰가 하루아침에 파괴되지는 않는다. 그들 몇명의 행동이 훼손하는 범위는 극히 협소할 것이다.

 

그러한 불문율은 모두가 일정 정도를 벗어나지 않고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때문에 내가 같은 피해를 보지 않을 수 있다는 신뢰하에 형성되는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 그 불문율을 어기고 사회적 신뢰를 훼손하면 이익을 얻을 수 있다. 자리를 맡아놓았다는 증표로 놓아둔 스마트폰을 누군가 가져간다면 그 사람은 스마트폰 하나만큼의 이익을 본 것이다.

 

그리고 어떤 이유로든, 그러한 생각을 더 많은 사람이 가지고 실천하게 되거나, 단순히 보복성으로 자신 역시 불문율을 지키지 않겠다는 의도로 자신이 당한 피해와 똑같은 가해를 저지를 경우 사회적 신뢰는 빠르게 붕괴한다.

 

더 이상 모두가 신뢰하던 질서-불문율은 신뢰할 수 없게 되고, 사회적 규칙으로 작동하던 양식은 누군가의 먹잇감이 될 뿐이다. 물론 법은 기능할 것이다. 물건을 훔쳐가면 신고하고, 접수받고 수사하며, 범인을 잡으면 처벌한다. 그러나 이는 사회적 신뢰를 깨뜨리는 비도덕적 행위가 법과 얽혀 있기 때문에 법적 제재가 가해지는 것이다.

 

4.

그렇다면 법과 무관한 비도덕적 행위는 어떠한가? 본래 비도덕적 행위자에겐 비난이 있었다. 단순히 말 뿐인 경우도 있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평판이 깎여 기본적인 인식 자체가 나빠져 사회생활과 인간관계에 지장이 생기는 경우도 있고, 소속된 집단(학교, 직장 등)에서 따돌려지거나 쫓겨나는 경우도 발생할 수 있다.

 

비도덕적 행위가 법을 어긴 것은 아니기에 법적 처벌을 받을 수 없지만 비도덕적이라 비난 받는 것 역시 온당한 평가에 따른 것일테다. 물론 언제나 선을 넘고 과하게 비난하고 공격하는 경우 역시 있을 수 있기에 반드시 비도덕적 행위자에 비난하는 것이 정당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비도덕적 행위가 만연하게 된다면 비도덕적 행위자에 대한 비난 역시 힘을 잃게 된다. 너무 흔하기 때문에 욕할 기력을 잃는 것을 떠나, 도덕의 영역이 협소해지고 도덕과 비도덕의 지위가 역전되는 것이다.

 

가령, 공개된 장소에서 적나라하게 욕설을 하는 것이 눈쌀을 찌푸리게 하여 지적을 받았다면, 지금은 그러한 성격의 캐릭터들이 범람하여 지적이 의미가 없어지고, 되려 지적하는 사람을 선비라거나 위선자 따위로 역공을 당하는 것이다. 그것이 불법은 아니지만, 상식의 영역에서 무엇이 도덕적인지는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만의 가치판단에 따라 그것에 의문을 제기하고 거부하는 것이다.

 

문제는 그러한 자들이 늘어나는 것이다. 그들이 협소하나마 일말의 보편성을 획득할 정도로 늘어나게 된다면 기존 도덕의 영역은 다양한 지점에서 도전 받고 반박되고, 무시되고, 훼손되고 파괴될 것이다.

 

5.

도덕적 행위를 하면 모두가 이익을 보고, 비도덕적 행위를 하면 누군가는 손해를 보고 자신은 이익을 본다. 이기적일수록 직접적인 이익을 얻게 된다. 모두가 이익을 얻기 위해선 비도덕적인 행위를 하는 것이 좋다. 누군가 전혀 모르는 남의 호의나 신뢰, 도덕적 행위를 기대하고 심리적 방화벽을 내렸을 때 비도덕적 행위자는 그 틈에 이익을 보게 된다.

 

피해자는 당한 이후 심리적 방화벽을 다시 세우게 된다. 대체로 타인에 대한 신뢰가 낮아지고 사회적 신뢰에 대한 믿음이 낮아지겠지만 그렇다고 가해자가 되지는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비도덕적 행위가 이익이 되고, 하지 않는 쪽이 손해를 보는 구조에서는 마냥 고집부릴 수만은 없다. 구체적 피해와 실질적 이득의 관계는 도덕-비도덕의 문제를 손해-이득의 문제, 혹은 생존-도태의 관계로 도치될 수 있다.

 

6.

그렇다면 그런 식으로 비도덕적 행위자가 늘어날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되는 것일까? 반드시 모든 도덕적 행위 선택자들은 비도덕적 행위자가 될 수밖에 없을까?

 

역사에서 우리는 특별히 더 도덕적이고 부덕한 시절을 고를 수 있다. 매우 정확하고 계량적으로 구분지을 수 있는 것은 아니기에 우리는 그것을 개괄적이고 극단적으로 고르는 것이 용이할 것이다.

 

가령, 전쟁이나 재난 상황이 오래 지속되어 도덕의 문제가 생존의 문제와 충돌할 때가 그러하다. 경신대기근은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게 만들었고, 자식을 바꾸어 잡아먹었으며, 전쟁이 길어질 때면 시민들은 범죄에 더 쉽게 매혹되었다.

 

태평성대라고 하는 세상일수록 여유가 넘치고 범죄가 적거나 공정하게 처리된다. 경쟁과 도태보다는 협력과 신뢰가 사회를 대표하는 정서가 된다.

 

곳간에서 인심난다는 말은 여유와 도덕에 대한 통찰이 담긴 말일 것이다. 우리는 더 여유로울 때 더 쉽게 도덕적인 선택을 한다. 단순히 베푸는 것을 떠나 타인을 배려하고 확실하게 이익으로 돌아올 자신의 비도덕적 선택을 포기하고 사회적 신뢰를 택한다. 그래도 무방하기 때문이다.

 

7.

도덕은 자기검열이다. 우리는 살아오면서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 배우고, 이것을 통칭하여 사회화라고 한다. 이것은 개개인에게 가치관에 뿌리내려 누군가 자신을 규제하고 제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자연스럽게 습관화된 관성에 따라 도덕적 반응을 한다.

 

주변에 차, 또는 보행자가 없기에 그냥 지나가도 상관 없는 도로/횡단보도를 지나치지 않고 신호를 기다리는 것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것은 학습에 의해 얻어진 지식이고, 실천을 통해 습관화한 것이다. 거꾸로 말하자면 학습받지 않았다면 사회 일반 도덕률에서 이격되어 있을 것이고,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것 또한 도덕적이진 않다. 또한 학습된 것은 언제든지 뒤집히거나 덧씌워질 수 있다.

 

도덕적 행위를 선호하는 사람이라도 환경 조건에 따라 언제든 비도덕적인 선택을 할 수 있다.

 

개인의 성향과 개성이라는 것은 개인 단위의 조건일 뿐 거대한 집단적 경향성을 계측하는 근거로 작동하기는 어렵다. 어떤 사회나 집단의 도덕적 성향이 개인의 성향과 개성에 의존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도덕적 선택을 하는 것은 환경 조건이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다.

 

8.

이러한 조건은 다양하다. 경제적 상황, 노동시간, 정치적 혼란, 군사안보적 위험, 지배적 이념.

 

단순화시키면 이렇게 양분된 것이다. 경제적 여유와 사회적 갈등 수준.

 

경제적인 여유가 있을 수록 사는 것 자체에 대한 부담은 줄어든다. 필요한 것에 쓸 돈이 많을 수록 기본적인 생활 수준은 더 높아질 것이고 경제적 부담에서 멀어질 것이다. 이는 심리적 여유가 되고 인지적 여유가 된다. 도덕적 선택은 그러한 여유에서 출발한다. 심리적 여유는 물질적 여유에서 찾아오는 법이다.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지만 그것은 그 사람의 개성이지 일반적으로 기대할 수준이 되지 않는다.

 

사회적 갈등 상황이 길어지고 다각화되어 다양한 분야에서 갈등이 발생하면서 그러한 이슈 인식에 있어 인지적 포화가 이루어질수록 도덕적인 선택에서 멀어질 것이다. 본인이 생각하고 지지하는 입장이 있을 것이고 이슈마다 자신만의 포지션이 있을 것이다.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여러 갈등들을 접할 수록 스트레스를 받게 될 것이다.

 

다양한 갈등에서 다양한 적, 혹은 바보들을 상대로 싸우거나 최소한 비판적인 생각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러한 부정적 정서들은 스트레스를 늘리고 심리적으로 공격적이게끔 한다. 어느 정도까진 상관 없겠으나, 지속되고 점점 많은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불만은 축적된다. 단순히 속으로 타인을 욕하는 것조차도 그 빈도가 늘어나고 후엔 말로만 하지 않을 뿐 습관적이게 될 수 있을 것이다.

 

핵심 자체는 스트레스가 될 것이지만 이러한 스트레스는 사회적 이슈에 따른 갈등 수준이 아닌 직장 생활이 될 수도 있고 인간관계나 게임의 결과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역시 이는 개인 단위의 경험에 한정되기 때문에 사회적인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선 그만큼 사회적 단위가 될 수 있는 현상을 지적해야 하기에 스트레스가 아닌 사회적 갈등 수준으로 짚은 것이다.

 

9.

사회가 각박해지고 삶에서 여유를 잃을 수록, 그리고 비도덕적 선택을 통해 이득을 얻고 제재가 적을 수록 비도덕적 선택의 폭과 그 영역은 넓어질 것이다. 만연한 비도덕은 도덕의 영역을 밀어내다못해 역전시킬 것이고 도덕적 행위나 사고를 위선과 선비질이라 폄하할 것이다.

 

도덕적인 선택이 손해로 이어지고 비도덕적 선택이 이익과 선망으로 이어진다면 더 이상 사람들은 도덕적일 필요가 없어질 것이다. 경쟁과 각자도생, 황금만능주의과 과정을 따지지 않는 출세지향으로 대표되는 사상들이 사회에서 도덕이 설 자리를 대체할 것이다.

 

사회적 신뢰가 작동하는 영역은 그런 성향의 이들에게 자신이 이익을 얻어낼 수 있는 기회의 장으로 비춰질 것이고 몇번의 피해로 인해 해당 영역은 훼손되어 파괴될 것이다.

 

그런 식으로 사람들은 도덕적으로 사회화된 습관을 버리고 비도덕적 습관을 받아들일 것이고, 더 어린 세대는 그들에게서 도덕이 역전된 가치체계를 받아들일 것이다. 도덕과 비도덕이 역전된 가치관으로 사회화되는 것이다. 내가 이익을 얻고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면 남들이 피해를 보더라도 그것이 법을 어긴 것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그것이 정당화되는 세계관이 형성되는 것이다.

 

이것은 한두 사람에게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기에 어느새 사회의 주류 정체성으로 받아들여지고 보편화될 것이다. 

 

10.

도덕은 자기검열이고 그것이 지키고자 하는 것은 사회적 신뢰이다. 내가 쓰레기를 버리지 않고 길에서 함부로 담배를 피지 않고 그러한 생각들이 많은 이들에게서 공유된다면 사회적 비용이 적어진다. 이는 소모되어야할 비용이 다른 곳에서 더 유용한 자원으로 활용될 것이다.

 

사회적 진보를 촉진시키거나 윤택하게 할 것이다. 그러나 비도덕적 선택들은 그러지 못하게 만들고 비용을 늘린다.

 

잘못을 했으면 욕을 먹는 것이 당연하다. 남들이 욕할 것이 뻔한 말을 했다면 당연히 욕을 먹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나 비도덕적 행위자들은 그러한 도덕 기준과 가치판단에 의문을 제기하고 공격한다. 알량한 논리와 주장이지만 지나치게 관용적이거나 지나치게 나이브한 바보들은 그들의 주장을 일부 수용하기도 한다. 가령, 패륜적 비난을 표현의 자유라고 주장하는 바보들에게 표현의 자유이니 제재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이 그러하다.

 

틀렸다. 자유에는 책임이 있고 그것이 법적 제재를 의미하지 않더라도 사회적 제재는 당연하고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개소리를 했으면 욕을 먹는 게 당연하다. 개소리를 크게 내거나 반복하는 사람은 쫓겨나는 것 역시 자연스럽다. 이는 수천년 동안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집단의 질서 유지를 위한 규칙이었다.

 

그러한 사회적 린치, 혹은 집단재판이 도덕적인 것만은 아닐 것이다. 때로는 쫓겨나는 쪽이 도덕적 정당성을 가지고 우위에 서 있을 수도 있고 정의로울 수도 있다. 그러나 쫓겨나는 소수자가 반드시 그런 선각자이거나 정의로운 의사일 거라는 것 역시 당연한 게 아니다.

 

자기검열이 부정적으로 사용되지만 도덕은 그것으로 작동한다. 남이 뭐라고 하지 않더라도, 누가 보는 게 아니라도 자기 스스로의 양심이라는 시스템이 스스로를 검열하게 만들어 규정된 도덕적 규칙 하에 자신의 행동을 제한하게 만든다.

 

지나친 자기검열이 표현의 자유와 사상적 자유를 억압하거나 제한한다고 할 수 있지만, 비슷한 강도로 제한이 풀려버린 것보다는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검열의 제한을 푸는 것은 쉽지만 한번 풀린 제한을 다시 묶는 것은 지나치게 어렵다. 

 

자기검열이라는 표현이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진다면 다른 용어로 바꿀 수도 있을 것이다. 자기통제라는 용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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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약 5년전 작성한 게시글입니다. 사실 이 블로그에 쓴 줄 알았는 데, 최근 찾아보니 없더군요. 다른 곳에 썼던 글이라 경어를 사용하여 작성하지 않았고, 일부 맞춤법을 교정한 것 외엔 원문 그대로 옮깁니다.





오컴의 면도날 (Occam's Razor)


"꼭 필요하지 않다면 더 많은 것들을 가져다 놓아서는 안된다(Pluralitas non est ponenda sine neccesitate)" 쉽게 말해 어떤 현상을 설명할 때 복잡한 가정을 하지 않고, 가장 간단한 설명을 고르는것이 맞을 확률이 높다는 것을 말한다. 같은 현상을 설명하는 두개의 주장이 있다면 , 간단한 쪽을 선택하라는 뜻.


단, 간단한 것이야 말로 진리라는 의미가 아닌 두 주장이 가설을 입증하는 정도가 동일할때 가장 간단한(설명이 가장 간결한) 것이 진실일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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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은 사회를 구성하는 것 중 하나이다. 이 도덕이라는 것이 한 국가,지역 내에서 보편적으로 잘 지켜질 수 있다면 그 국가, 지역의 이미지는 매우 깨끗하고 좋다라는 인식을 가지게 된다.


이는 개인에게도 통용된다. 개인의 도덕성이 깨끗하다면 그 사람은 도덕적인 인물로 인식될 수 있다.


도덕이라는 가치는 사람마다 다르게 다가온다. 또한 도덕을 쉽게 여기는 사람도 있고 어렵게 여기는 사람도 있다. 어떤 이는 마치 도덕이라는 것을 지키기 어렵고 이를 제대로 지키는 사람은 그야말로 성인군자라는 인식을 가진 사람도 있다.


하지만 도덕이라는것이 꼭 마더 테레사같은 고결함을 원한다는 것이 아니다. 도덕은 간단하고 또한 쉽게 실천할 수 있는 가치이다.


쓰레기를 버리지 않고 욕을 적게 사용하며,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태도를 가지며, 배려할 수 있는 마음가짐을 가지는 것으로도 족하다.


길을 가다가 쓰레기가 생겼다면 쓰레기통으로 버리는 것으로 족하며, 화가 난다고 무작정 욕부터 내뱉고 보지 않는 것으로 족하며 내가 불편하다고 다른 이를 불편하게 만들지 않는 것으로 족하다는 것이다.


마더 테레사나 부처, 공자같은 성인의 경지에 도달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이처럼 간단한 것이 도덕이다. 이런 도덕률이 사회전체에 통용된다면 어떻겠는갸? 그야말로 아름다운 사회가 아니겠는가? 이런 도덕률이 잘 지켜진다면 거리는 깨끗해질 것이며 인간관계에서 신경이 거슬리지도 않을것이고 그런 문제에 민감해지지도 않을것이다.


가장 간단한 절제, 배려를 통해 자신은 도덕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


이처럼 가장 간단한 도덕률이야 말로 가장 좋은 도덕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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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은 다음 팁에서 본인이 작성한 답변을 일부 수정, 추가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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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하지도 않고, 악하지도 않은 자연적인 본능과 성향만이 존재합니다. 인간이라는 것이 본디 짐승에서 진화한 생물이고, 그저 다른 생물보다 뛰어난 지성을 가졌기에 사회와 문명이라는 것을 이룩했는 데, 이러한 환경은 원시적 자연환경과는 다른 인위적 사회환경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회환경은 인간들끼리의 사회적 관계와 유대, 그리고 불문율이나 성문법 등의 새로운 규칙에 의해 지배 받고 지배하는 곳이기 때문에, 원시적 자연환경에서와는 전혀 다른 환경이라고 할 수 있죠.


자연환경. 즉, 야생에선 어떠한 도덕이나 윤리 따위는 존재하지 않고 기실 그러한 것이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서로가 서로를 지키는 시스템인 사회, 혹은 문명은 그러한 서로간의 신뢰가 깨어지면 결코 유지될 수 없는 특성을 지니고 있죠. 쉽게 말해서 누구나 쉽게 범죄에 해당되는 범주의 행동을 마구잡이로 하고 다니면서 어떠한 처벌을 받지 않는다면 사회는 곧 붕괴한다는 겁니다.


도덕이나 윤리 또한 인간적 기준에서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사회적 규약인 데, 이러한 규약은 역시 사회환경에서만 통용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생물학적인 인간이라는 개체와 사회학적 개인이라는 개체는 양립하면서도 모순되는 형태를 띄는거죠. 이는 아주 어린아이에게서 선한 모습을 볼 수 있으면서도 악마성에 가까운 악한 모습 또한 관찰할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교육이라는 것은 그러한 악한 모습에 대한 규제를 의미하고, 사회성이란 그 사회를 이룰 수 있는 능력을 말하죠.


달리 말하자면 아직 사회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동물에 더 가까운 아이들에게서 자연적인 형태의 선과 악의 모습을 둘 다 볼 수 있고 커가면서 그러한 사회화(교육)을 통해 그러한 악한 행동을 규제하게 됨을 의미합니다. 물론 그러한 교육이 생물적 본능이나 성향, 욕구를 완벽하게 제어할 수는 없기 때문에 인간은 커서도 짐승 같은 모습이나, 사회적이지 못한 모습, 또는 악한 모습을 보이곤 하는 거죠.


자연상태에선 어떠한 도덕과 윤리도 없고 사람의 본성이란 곧 동물적 본능과 욕구를 의미하는 바, 그러한 기준을 통해 선한가 악한가를 논하는 건 의미 없다고 봅니다. 인간의 본성이란 생물학적 진화를 통해 자연환경을 기준으로 적응되어온 결과이기 때문에 전혀 다른 사회적 환경, 문명을 기준으로 한다면 당연히 맞지 않을 수 밖에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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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먼저 전제해야될 것은, 이 글은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여성시대 카페 회원들을 변호하거나 쉴드치기 위함이 아니라는 겁니다. 좀 더 큰 그림에서 그러한 비판이 올바른 것인가, 또한 그 비판에 진정성이 있는 것인가를 다루기 위함입니다.



먼저 낙태라는 것이 대한민국에서 불법이긴 합니다. 그리고 낙태에 대한 도덕적, 윤리적 비판은 분명 유의미하죠. 그렇지만 그것이 반드시 올바른 것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가령 낙태 찬성론자들의 주요 근거 중 하나인 싸지른 남자는 도망가고 여자 혼자서 그 아이를 어쩔 수 없이 낳고 기르기가 굉장히 힘들고, 경우에 따라선 아예 불가능하며 그러한 것을 원인으로 마찬가지의 영아 살해가 벌어질 수 있음이 그것이죠.


그렇다면 아이와 자신의 건강과 생활을 망치며 결국 둘 모두 불행하게 만들 가능성이 매우 큰 이러한 현상에 대해 가만히 두고 봐야하느냐 하는 겁니다. 물론 이것은 제도와 시스템을 통해 어느 정도 커버할 수 있습니다. 소위, 복지라는 것을 통해요. 미혼모 따위를 국가가 지원하고 보조하는 형식으로 혼자 아이를 낳아도 생활을 영유할 수 있고 아이를 키울 수 있게 하는 것이라면 좋겠지요.


하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최소한 예정된 불행을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는 낙태를 허용하는 것을 검토해보자는 의견이 이러한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싸지른 남자는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고 멀쩡히 살아가는 반면 진짜 피해자라고 할 수 있는 여성은 낙태로 인한 처벌까지 받을 수 있다는 점이죠. 이것은 단순히 생각해봐도 불합리적입니다.



다만 저는 낙태 찬성론자는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반대론자도 아닌지라, 현재 낙태에 대한 제 생각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중립 정도로 아직 어느 쪽에 서지는 못하겠다는 것이죠. 판단이 서질 않아서 말입니다.



여성시대 카페 회원을 비롯한 수많은 여성들이 낙태를 했다는 사실에 대한 도덕적, 윤리적 비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 수 있습니다만, 그러한 비판을 넘어서 비난의 수준에서 그들을 싸잡아 공격하는 짓은 까놓고 말해서 꽤나 멍청한 짓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싸지른 놈은 따로 있거든요. 이런 경우 싸지른 남자에 대한 비판과 비난은 없고 단순히 애를 낳기 싫어서인지, 아니면 현실적으로 불가능해서인지, 심지어 그 중에서 싸지르고 도망갔기 때문에 더더욱이라는 이유가 존재하는 지도 따져보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여자만 욕하고 여자탓을 하는 것은 맞지 않죠.


이러한 시각은 남성우월적이며 동시에 비논리적이고, 비합리적인 비판태도입니다. 물론, 역시 낙태에 대한 여러 의견이 존재하고 이것은 현재에도 수많은 전문가와 학자들 사이에서도 큰 논쟁의 대상이 되는지라 어떤 의견을 가지든 그것은 자유이고 그러한 자유를 토대로 낙태에 대한 자신의 의견, 태도를 정할 수 있죠. 그렇기 때문에 그에 대해선 어떻게 할 말이 없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을 입 밖으로 내놓은 순간 그것은 공공에 대한 평가가 가능하고 그 자신의 낙태에 대한 입장이 어찌됐든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에 의한 비판 또한 가능하다는 점도 분명한 사실이죠.



주로 여시를 낙태충이라고 혐오하는 부류는 일베인데, 일베의 여성혐오를 생각하면 여시를 혐오하는 것은 그닥 이상한 일도 아니고, 그 중에서 특히 이미지가 나쁜(그리고 실제로 그런 멍청이들인) 여시를 욕하는 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딱히 낙태에 대해서 특별히 반대하거나 비판론적인 입장을 취하기 때문에 낙태를 저지르는 여시를 욕하는 것은 아닙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여시가 싫기에 낙태를 핑계삼는다. 라는 것이 맞겠지요. 욕은 하고 싶은데 그냥 막 이유도 없이 까는 건 좀 그러니까 낙태라는 도덕적, 윤리적으로 문제있는 불법행위를 핑계삼자. 하면서 낙태에 대한 입장을 세우는 거라고 볼 수 있죠. 낙태를 하기 때문에 까는 게 아니라, 까기 위해 낙태를 핑계삼는 겁니다. 그들이 혐오하는 대상에 대한 폭력을 휘두르는 태도와 마찬가지의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도덕, 윤리적으로 문제의 소지가 있고 동시에 불법인 낙태에 대해서 좀 더 쉽고 별 다른 양심적 저항 없이 이입할 수가 있는 겁니다. 나는 정당한 비판을 하고 있는 거야. 낙태는 나쁜 것이니까. 이러한 태도는 인지부조화인 데, 원래 낙태를 반대하고 그것에 대해 비판하던 게 아니라 여시를 낙태충이라 까기 위해 낙태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세운 것이고 그들을 혐오하고, 낙태를 더 비판하면서 그러한 태도에 스스로 더욱 더 경도되는 거지요.


그리고 그 동안의 자기 태도와 입장이라는 것이 있으니, 낙태에 대한 찬성론이니 뭐니 하는 것에는 더더욱 반대하고 비난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자기 스스로 가치관화 했으니, 그것을 부정하면 자신의 가치관이 부정당하는 것이며 이전까지의 입장과 태도는 모조리 비합리적인 폭력에 불과한 개뻘짓에 쓰레기짓에 불과하게 되니까. 동시에 그런 이유로 낙태에 대한 입장을 더더욱 신성불가침화 시키는 것이죠.



이러한 일베의 낙태 비판에는 진정성이 부족하고 순수하지 못합니다. 낙태가 왜 나쁘고, 어째서 하면 안 되는 지, 그리고 어째서 그에 대한 허용론, 찬성론이 존재하고 이것들에 대한 반박을 할 수 있는지 따위는 전혀 상관없습니다. 실제로 관심도 없죠. 단지 여시(여자)를 까기 위해 그것들이 필요하고 잘 써먹고 있을 뿐입니다. 합리적인 사유의 과정으로 만들어진 태도가 전혀 아니라는 거죠.


앞서 말하지만 전 여시를 쉴드치는 것도, 낙태를 찬성하는 것도 아닙니다. 여시에 대한 비판과는 별개로 올바르지 못한 비판/비난에 대한 비판을 하는 것이고, 그 비판의 주제가 되는 낙태에 대한 이야기를 했으며 이는 독자 스스로 돌아봐야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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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이 글은 작품의 내용과 결말을 품고 있습니다. 스포일러를 원치 않으신다면 작품를 본 뒤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If technology is a drug – and it does feel like a drug – then what, precisely, are the side-effects? This area – between delight and discomfort – is where Black Mirror, my new drama series, is set. The "black mirror" of the title is the one you'll find on every wall, on every desk, in the palm of every hand: the cold, shiny screen of a TV, a monitor, a smartphone."


"만약 기술이 마약이나 마찬가지고, 사용되기도 마약같이 사용되고 있다면, 그에 따른 부작용은 무엇인가? 불안함과 즐거움 사이의 모호한 존재가 바로 블랙 미러다. 타이틀에 나오는 '검은 거울'은 모든 벽과 책상에 있고, 모든 사람의 손바닥에 있다: 차갑고 번쩍거리는 텔레비전 화면, 모니터, 스마트폰이 바로 '검은 거울'이다."


-가디언지에 실린 찰리 브루커의 인터뷰.-


블랙 미러라는 영국 드라마는 기술의 부작용에 대해 풍자하는 드라마입니다. 처음 볼만한 것들을 찾아가 발견하게 된 작품인데, 주제가 주제인만큼 저에게 큰 관심을 끌게 만들었죠. 아직은 시즌1만 봤지만, 3개 모두 충격적인 내용이었습니다. 사실, 1화가 상당히 충격적이었죠..



기술이라는 것은 나날히 발전하지만, 인간은 수천년전과 크게 다를 바 없는 본능과 사고방식을 가진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에 불과한지라, 발전된 기술을 오남용하는 것이 불러올 파장을 생각하면, 우리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하지 않나 싶었습니다, 2, 3화는 미래의 기술이지만, 1화는 시기적으로 현재이고 현재 있는 기술, 매체를 악용한 것을 다루고 있죠.


지금은 단지 드라마속 이야기일 뿐이지만, 이러한 발전된 기술의 부작용, 오남용은 충분히 있을 수 있고, 여전히 경계해야 하는, 아니.. 오히려 지금도, 앞으로도 더욱 경계해야함을 시사한다고 봅니다. 1화의 일은 너무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동시에 매우 현실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니까요.




저에게 충격을 줬던 1화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어느 미친놈이, 영국 공주를 납치한 것을 트위터와 유튜브를 통해 중계, 공개합니다. 그리고 납치범은 영국 수상에게 돼지와 수간하는 것을 생중계로 보도하라는 요구를 하게 되죠. 당연히 정부에서는 보도를 통제하려고 하지만 이미 삽시간에 인터넷에 퍼지게 되었고, 몇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전세계인에게 이 정보가 공유됩니다. 납치범을 추적, 검거하려는 시도는 물거품으로 돌아가고, 결국 별 수 없게 되자 수상은 어쩔 수 없이.. 납치범의 요구대로 생중계로 돼지와 섹스를 하게 되죠.


그 장면을 지켜보던 시청자들은 처음엔 정말 방송한다고 하니 TV앞에 모여 좋아하며 수상을 비웃고 낄낄대지만, 이내 행위가 절정으로 향함에 따라 모두 충격을 받고 얼어붙지요. 이 방송은 전세계 13억명이 보게 됩니다.


그러나 공주는 예정된 시간이 되기 전에 풀려나고, 범인은 방송을 보고는 자살해버리게 됩니다.


수상은 돼지와의 섹스 후 구토를 하게 되고, 얼마 뒤 지지율이 상승하지만, 아내와의 관계를 파탄에 이르게 됩니다.



시작은 미친놈의 범죄로서 시작되었지만, 그 쇼의 판이 커지고 걷잡을 수 없게 된 것은 기실 대중과 그 대중의 눈과 귀가 되어준 트위터, 유튜브 같은 매체들 덕분이지요. 물론 트위터와 유튜브가 나쁘다거나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 전파과정은 당연 재미, 흥미 따위 때문이라고 봐도 무방하지요. 마치 마약같이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브루커의 말과 같이요.


물론 공주 납치, 수상의 돼지와의 수간이라는 주제는 모두의 흥미와 관심을 끌 수 있는 주제이긴 합니다만.. 



역시 기술에는 항상 윤리가 따라야하고, 오남용에 대한 경계와 어느정도의 대비책, 기술을 악용하지 못하게끔 억제할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사실, 2화는 그렇다치고 1화와 3화는 일상과 사람들에게 있어서 매우 도움이 되고, 필요하며 큰 가치를 지니지만 그것이 악용되었을 때 나타난 결말은 매우 비참하고 잔인하지요.


굳이 기술이 아니더라고 윤리나 도덕, 무언가를 오남용하거나 악용하는 경우가 많고 그에 대한 성찰이나 반성이 부족한 한국에 있어서 더욱 어울리지 않을까 싶은 드라마이기도 합니다. 물론 기술이라는 분야에 대해서도 적절히 들어맞고 말이죠.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찰리 브루커의 작품이었습니다.


혹시 같은 주제에 대한 관심, 혹은 이러한 구성의 드라마를 찾는 분이라면 주저없이 추천하고 싶군요. 굳이 저와 같은 흥미거리를 공유하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드라마로서 매우 훌륭하고 재밌는 작품이기에 역시 추천합니다.


개인적으로 2화와 3화 또한 매우 재밌었기 때문에 개별적으로 리뷰를 올리고 싶지만, 특별히 쓸 말이 떠오르지 않고 줄거리만 쌈박하게 요약할 것만 같아서 이렇게 리뷰해야겠습니다.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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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뽕. 국뽕이나 일뽕과 같은 맥락으로서의 의미를 지니는 이 단어는 사실 만들어진지 얼마 안 된 신조어입니다. 일명 쿨한 척하는 놈들을 비난할 때 주로 사용되지요. 예컨데, 모 커뮤니티에서 세월호 사건에 대해 이렇게 평하는 사람이 있더군요. 하루에도 수천명이 죽는데 고작 300명 더 죽은게 뭐 대수냐고.


이런 예시라면 쿨뽕이라는게 어떤 것인지 대충 감이 오실 겁니다. 이런 이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도덕, 윤리에 대한 감각이 없다는거죠. 예컨데 누군가 죽을 수 있거나, 죽음에 준하는 위험에 목도한 것을 보았을 때, 그들은 내가 당한 것도 아닌데 도와줄 이유가 뭐 있냐고 하지요. 세월호 사건 때 일베충들이 보여줬던 그런 사고로 슬픈걸 알겠는데, 왜 나도 슬퍼해야 하냐고 했던 것과 비슷한 구석이 있습니다.


그래도 전자는 그럴 수 있다곤 하지만, 후자는 괜히 나서서 욕을 벌어먹는 것이지요.


뭐, 사실 도덕이나 윤리라는 것이 강제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무시하는 것도 옳지 못하죠. 누군가 법적으로는 문제가 없지만, 도덕적,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는 행동을 했을 때 그들이 비난을 받는 것이 그 자체로 비난을 받을 이유가 되기 때문인 것처럼요.


쿨뽕을 빠진 사람들은 그렇습니다. 도덕이나 윤리에 대한 감각이 없어서 누군가의 죽음이나 타인의 슬픔을 제대로 공감하지 못하는 것같아요. 그저 남의 일이고 그렇기 때문에 관심도 별로 없죠. 여기서 문제가 되는 부분은 그러한 누군가의 사고, 참사에 대해 관심을 갖느냐, 소식을 듣고 그 슬픔을 곧장 바로 공감하고 슬퍼할 수 있느냐가 아닙니다. 사실 저도 참사 초반에는 별 느낌이 없었어요. 크게 슬프지도, 관심을 가지지도 않았고요.


하지만 곧 사건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분노하고 슬퍼했지요. 그들의 사연과 사건의 원인, 책임자와 관료들 등등.. 사실 그렇습니다, 모든 일에 관심을 가질 수 없는 일이고, 모든 일에 공감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작은 사건에도 감정을 이입하고 공감할 수 있는 반면, 엄청난 참사에도 똑같이 이입하고 공감할 수 있는 것은 아닐지도요.


쿨뽕에 빠진 자들에게 문제는, 그러한 것을 마치 자랑하듯, 그렇게 슬퍼하는 자들이 되려 무지하고 미개하고 위선에 빠진 것처럼 말한다는 겁니다. 앞서 이야기한 하루에 수천명이 죽는데 고작 삼백명 더 죽는게 뭐가 대수냐, 슬픈건 알겠는데 왜 나도 슬퍼해야 하냐, 자신과 관계도 없는데 왜 화내냐 같은 것들 말입니다.



공감능력은 중요한 능력입니다. 사회적 공감능력에 장애가 있다는 것은, 추후 소시오패스 성향으로 악화될 수 있다는 것이고 정신상담이 필요하죠. 하지만 중고등학생 때의 학생들은 괴로움이나 동요를 일부로 감추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가장하려는 태도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실 그건 일종의 중2병이죠. 이건 별 문제가 안 되죠. 어차피 아이들도 공감능력이 떨어져서 자기만 알고 이기적으로 때쓰는 일이 빈번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남을 배려할 줄 알게 되는 것처럼요.


애도의 감정, 측은지심 등은, 개인차나 상황을 무시하고 한 없이 강요하는 것도 안 될 일입니다만, 그런 것을 별로 느끼지 못하는 것도 문제가 있는 겁니다. 애초에 사회를 이루는 동물은 상호간의 공감능력이 이미 생물학적 차원에서 필수기능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역지사지, 기소불욕 물시어인, 황금률 등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근본적인 상호관계의 윤리적 기초가 바로 그런 공감능력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잔인한 동영상 등을 보고서 나는 아무렇지 않다며 웃기까지 하며 자신의 담력 따위를 자랑하려는 중학생들처럼, 이러한 사태에서 앞서 열거한 태도를 보이며 굳이 표현씩이나 하는 것은, 그러한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애새끼 수준이라는 것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게 아니라면 정신상담이 필요한 인간이거나.


분노해야 하는 일에 분노하는 것은 당연하고, 슬퍼해야 하는 것엔 슬퍼해야 하는 것이 기실 정상적인 반응이듯이, 그러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 덜 이성적이지도, 덜 합리적이지도 않음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쿨뽕들은 그러한 감정에 대한 반응을 느끼지 못하거나, 숨기면서.. 안 그런 척하며 자신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인간이다라는 것을 어필하려고 듭니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그 인간이 정상적이지 못하다는 것을 증명해줄 뿐이죠.


도덕과 윤리에 대해 공감하지 못하고 그러한 원리에 따라 행동하지 못하니 그들에게 도덕, 윤리적 비난은 의미가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 죽어가는 사람을 놔두고 혼자 도망가는 것이 옳다는 것이냐 라는 도덕적 비난을 던졌을 때, 그들은 이렇게 대답하지요. 그럼 내가 위험할지도 모르는데 굳이 모르는 사람을 구하기 위해 내가 그런 위험에 몸을 내던져야 하냐! 고 말입니다. 그렇지요, 내가 위험할지도 모르는데 굳이 모르는 사람을 구하기 위해 그런 위험에 몸을 던지는 것은 분명 생각해볼만한 일입니다. 무작정 그래야 한다! 라고 강요할 수도 없지요.


하지만 그러한 비난에 대해, 되려 큰 소리 치는 것도 멍청한 짓입니다. 차라리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 맞을 겁니다. 모르는 사람을 구하고는 싶었지만, 눈 앞의 위험에 너무 겁이 나서 그럴 수 없었다. 라고요.



이러한 쿨뽕에 대해 설명, 비판하기 위해 세월호 사건과 그때 보여준 행태를 서술했지만, 사실 이러한 태도는 다른 공간, 다른 분야, 다른 이유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것들입니다. 분명 차가운 이성은 필요하고 지향되어야할 태도이지만, 그것에 먹혀 스스로 감정에 무감각한 괴물, 비정상으로서 판단하고 주장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감정과 이성은 상호보완적이기도 하니까요.



이렇게 쓰고나니 저 또한 예전에 비슷한 행태를 보였던 것이 떠올라 문득 부끄러워 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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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집에 돌아왔는데, 아내가 다른 남자와 바람을 피우는 현장을 보았다. 자, 어떻게 반응할까?

 

1. 영국인 남편 : 일단 조용히 문을 닫고 아무것도 못 본 것처럼 밖으로 나간다.

 

2. 러시아인 남편 : 총을 들고 현장으로 뛰어든다.

 

… 그렇다면 한국인(Korean) 남편은?

 

→ 당장 미국 대사관으로 달려가서 자초지종을 다 말한 뒤 미국 대사에게 “저는 어떻게 해야 하죠?”라고 묻는다.

 

- 송경숙 한국외국어대학교 동양어대학 아랍어과 교수가 아랍인들에게서 직접 들은 아랍인들의 농담

 

(잉걸의 말 : 농담인데 도저히 웃을 수 없었음. ‘미합중국 서울 주(州)’라는 비아냥도 이것보다는 가슴 아프지 않았다. ‘도대체 이 나라 사람들이 얼마나 줏대없이 굴었으면 이런 말까지 들을까?’ 라는 생각도 들었다. 가슴이 아프지만 그래도 진실과 현실 - 절대 한국에 호의적이지 않고, 긍정적이지도 않은 세계 여러 나라의 인식 - 을 알려야 한다고 여겨 이 게시판에 소개한다. ‘알아야’ 대처를 하고 개선을 할 수 있을 것 아닌가?)


"내가 이라크 전쟁에 참전한 군인이다. 이라크의 신생 군대도 판단은 할줄 안다. 

그런데 어제 한국 합참에서 뭘 해도 되느냐는 전화가 매시간,매분 수도 없이 왔다. 

어떻게 한국군이 이라크군 보다 못한가?"


- 존 맥도널드 소장



한미 연합사 정보작전부장




사실, 판단력을 길러주는 것은 개인의 경험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지만, 동시에 교육의 영향도 십분 받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교육이라는 것, 공부라는 것은 그러한 판단력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을 가르쳐야하는 것인데, 정작 한국의 교육을 본다면 직접 판단을 내리는 훈련이 절대 되지 않는 구조이지요.


도덕, 윤리같은 과목은 물론 역사같은 과목은 그러한 판단력을 키우고 올바른 것을 선택하게끔 하는 가르치는 학문입니다. 그렇지만 한국의 교육답게 그러한 판단력보다는 그저 어떤 것이 옳다고 일방적으로 외우게끔 하는 셈이죠.


이러한 교육 덕에 한국 사람들은 올바른 선택이나, 판단력에 있어서 굉장히 약해져있다고 봅니다. 위 사례만봐도, 스스로 판단하여 일을 해결하지도 못하고 어떻게 해야하는가 남에게 지시를 받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요.


책임감이 약한 것은, 그만큼 판단에 확신이 없다는 것이고, 판단을 내리기 무섭다는 반증입니다. 내가 이러한 판단을 내렸는데 잘못되면 어쩌지? 하는 것. 그러니 최대한 책임을 지려고하지 않는 것이고 판단을 피하려고만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무언가 잘못이 된다면 판단을 내린 타인의 책임인 것이고.


이것을 생각해보면 병영문화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위에서 지시하면 밑에서는 일사분란하게 지시대로 따르는 것이죠. 그렇게 지시만 받고,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는 겁니다. 일이 터지면, 문제가 터지면 어떻게 해야할지 모릅니다, 판단을 내린 경험도 없고, 그런 교육조차 못 받았으니 스스로 어떻게 해야하는가라는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럴수록 책임에 대한 두려움은 커지죠.


무능한 중간 관리자들은 이러한 판단에 있어서 어떻게 해야할지를 몰라합니다. 그러니까 무조건 아랫사람 닥달하고 윽박지르며 까기만 하는 것이죠. (판단을 내려) 지시를 해야하는데, 정작 그걸 못하는 겁니다. 관리자인데 말이죠. 뭘해야 하나, 사실 그 자신도 잘 모르기 때문에 닥달만 하고 윽박을 질러대는 겁니다. 문제가 발생했다면 문제를 해결하는 기본적인 프로세스 --문제인식 -> 원인 분석 -> 해결방안 모색 -> 검토 및 적용 = 해결-- 조차 지시하지 못하고 왜 문제가 발생했느냐고 욕하고 윽박질러대는 꼴만 보여줄 뿐이죠.


그렇게 깨진 아랫사람들이 어찌저찌 해결하면 그 무능한 중간 관리자는 한 것도 없는 주제에 다시 이런 일 생기면.. 어쩌고 짓껄이거나, 자기가 잘해서(자기가 잘 호통쳐서 정신차리게 해줬다는 생각?) 해결된 것이다, 내가 아랫사람 잘 부린거다. 라고 생각하고 우쭐해하죠..


정치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국민이 판단을 내려 어떤 국회의원을 뽑아야할지 결정해야하는데, 누굴 뽑아야할지 모르고, 각 사건이나 인물에 대한 판단도 제대로 못 내리기 때문에, 그 한 표의 무게감을 망각하고 되잖은 인물들에게 계속 권력을 내주는 것이지요.


저번에 쓴 현대판 국보법에서 이야기했듯이, 보수정권, 정부는 이러한 경향을 더욱 확산시키려 합니다, 국민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판단할 겨를을 주지 않고, 국가가 강제로, 일방적으로 무엇이 잘못되었다고 정하고 그걸 국민들에게 강제하려는 것이지요. 국민이 스스로 판단하게 두지 않습니다, 국가가 무엇이 잘못되었다고 지정해주는 것입니다. 국민이 해야할 판단을 국가가 해버리는 것이고, 그냥 그렇게 국민이 받아들여 버린다면..


정말 왕조때나 다름없는.. 아니, 그보다 더 수준낮은 국민이 되는 겁니다. 가히 노예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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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 윤리와 법을 가르는 가장 큰 기준점은 바로 강제성이 있느냐 없느냐입니다. 도덕과 윤리는 사회를 구성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이고 한 축이자 틀이지요. 법 또한 그러한 틀이지만, 매우 강력한 강제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 강제력이 잘못된 근거로서 작용하게 된다면 악법이 되기 쉽습니다.


이번 효도법에 대해서 좋지 않게 생각하는 이유가, 그것이 도덕을 강요하는 법안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부모님께 돈 물려 받고 어떤 형식이든 효도를 하지 않는 것은 분명 옳은 행위가 아니고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을 만한 행동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는 유교적인 문화를 어느정도 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효도라는 것에 대해 신성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문화적, 역사적인 가치관은 금전적인 이해관계에 얽히면 쉽게 부서지는 모양입니다.



사실 젊은 이들은 효도를 하고 싶어도 못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물음을 던져봐야합니다. 왜냐하면 취직이 안되고, 혼자서 먹고살기도 힘이 드는데 거기에 효도를 강제하겠다고 하는 것은 마치 학생이 자살한다고 높은 층에서는 창문을 절반만 열라고 조치를 취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되거든요. 이는 원인은 놔두고 결과를 해결하겠다는 심보와 일맥상통합니다.


효도를 하기 위한 금전적 여유, 시간적 여유가 없는 이들에게 효도를 강제하겠다는 것은 그들에게 큰 부담만을 안겨줄 따름입니다. 지금 당장 돈도 시간도 없는데 거기에 효도를 하라며 없는 돈 없는 시간을 쪼개서 부양하고 효도하라는 것은 그냥 악으로 깡으로 갈아넣겠다는 것이거든요. 이것은 매우 비효율적이고 비합리적인 조치입니다.



따라서 효도법에 대해서는, 분명 효도는 해야한다는 관습적 도덕률에는 동의하는 바이지만 옳은 법안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악법이라고도 생각하고 있어요. 정말 효도를 하게 만들 것이라면 그러한 기반 환경을 제공하는 쪽으로 해결하는 것이 근본적인 해결법이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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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 사태와 5.18 이야기들을 기점으로 점점 일베가 공중파에서도 자주 보도되고 하나의 공론화가 되어가고 있는데, 이에 따라 일베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볼 기회가 자주 찾아오는 듯 합니다.



어제였나요? 일베 사이트 폐쇄와 표현의 자유에 대한 토론을 했었죠. 저는 일베 폐쇄에 대해 매우 찬성하고 있는 입장입니다. 개인적인 판단으론 이미 방어적 민주주의가 발동될 선을 넘었다고 보며, 이미 각종 패악질을 하고 있는 이 집단을 단지 표현의 자유라는 공허한 잘못된 판단으로 놔둘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표현의 자유.


표현의 자유 좋죠, 근데 이것에 대한 아무런 이해없이 표현의 자유를 외치며 개소리를 짖껄여대는 것이 일베충놈들입니다.

표현의 자유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그에 따른 의무를 먼저 져야합니다. 그것은 상대방을 억압하거나, 침해하는 일이 없고, 또한 그것이 허위사실이 아니며 단지 비난하기 위해서 사용하지 않는 것이죠.


단지 '모든 표현'이 가능하다면 명예훼손, 허위사실 유포죄란 존재해서는 안됩니다. 위헌일테니까요. 하지만 그것이 존재하는 이유는 표현의 자유과 상관없는 그것이 명백히 옳지 않기 때문입니다. 남을 욕하는 것은 자유가 아닙니다. 그것은 상대방을 위압하고 억압하는 것이죠. 거짓된 사실을 날조하여 유포시키는 것 또한 자유가 아닙니다. 그것은 분명 거짓이고 그러한 거짓은 사회를 혼란스럽게 할 따름이니 법적 강제력을 동원해서라도 막아야할 것이죠.


내가 남을 종북이나 빨갱이로 매도하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잘못된 것입니다. 표현의 자유라. 그렇다면 그 자유 한번 남용해보세요. 그 결과가 경찰서행이라면 그 의무 또한 자신이 책임져야할 것입니다.


윤리와 도덕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인데, 단지 법적인 구속력이 없을 뿐 그러한 것들에 위배되는 이야기를 꺼냈을 경우 사회적인 지탄을 받는 것은 절대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도덕률에 대한 배반을 표현의 자유라는 것으로 덮을 수 없는 것이죠. 그러한 망언을 뱉었다면 그에 따른 책임이 바로 사회적 지탄을 받는 것을 견디는 것입니다. 혹은 자신이 바뀔 수도 있죠.



사회는 기본적으로 도덕과 윤리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그 사회를 이루는 하나의 원리이자 원칙이에요. 내가 죽은 자를 모욕하고 능욕한다면(말로, 혹은 물리적으로) 그것은 사회의 지탄을 받아 마땅합니다. 이러한 도덕은 법적 강제력은 없지만, 사회적 합의로서 간접적으로 강제성을 갖기는 하지요.


하지만 그것은 현실에서나 영향을 받는 것이지 자기가 안주할 공간을 이리저리 바꿀 수 있고, 현실이 아닌 가상공간에서의 나라는 존재이기 때문에, 더불어 대부분 현실의 내가 누군지 모르기 때문에 이러한 도덕적, 윤리적 지탄에서 어느정도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그 예가 바로 일베라고 할 수 있죠. 한두명의 깽판질도 아니고 수천명, 수만명이 도덕적으로도, 윤리적으로도, 심지어 법적으로도 문제가 되는 문제가 될만한 이야기를 싸지릅니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의 표현의 자유라는 것으로 포장하려들지요.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도덕, 윤리에 위배되는 망언 또한 표현의 자유로 포장할 수 없습니다. 그것에 대한 책임이 바로 그 비판을 얻어먹는 거니까요.



이러한 경향성을 보이는 최대의 커뮤니티인 일베를 없애면 어떨까요? 과연 일베충이 모두 사라질까요? 예전에 이에 대해 글을 써본 적이 있습니다. 그때도 말했듯이 일베가 사라지면 현 인터넷 사회가 조금은 더 깨끗해 질 겁니다. 왜냐하면 일베는 수용소가 아니라 양성소거든요. 다른 글들에서도 꾸준히 밝혀왔듯이 일베는 근본이 유머사이트고, 단지 그 유머의 핀트가 매우매우매우 비뚤어진, 글러먹었다는 겁니다.


방심으로서의 유머와 그것을 통한 정치색 입히기, 점차 하나의 완성된 일베충으로.. 따라서 일베라는 곳을 없애는 것은 이러한 벌레 양성소를 구제하는 것과 다를바 없습니다.


다만 이렇게 만들어진 일베적 프레임은 단기간에 사라지지 않을 것인데, 그것은 이미 그 일베충이 일베의 색을 진하게 갖고 있고, 인터넷 사회에서도 그러한 색에서 자유로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심지어 현실에서도 일베를 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으로, 가치관적으로 일베와 비슷한 이들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일베가 망한 이후에 제 2의 일베가 탄생할 가능성은 분명 존재합니다. 그렇지만 제 3의 일베도 나올 것이고 제 4의 일베도 나올 겁니다. 일베가 망한 이후 여러개의 제 2의 일베들이 탄생하는 것이죠. 이러한 조각난 일베의 적자들은 일베충들이 다시 모이는 것을 어느정도 억제할 겁니다. 이중 경쟁에서 밀려나 적자의 수가 줄어들 수는 있겠지만 그중 두세개만 살아도 일베충의 세력은 전에 비해 약화되겠죠.


운이 좋아 그들끼리 생존을 위해 경쟁을 하고 싸움을 해서 스스로 몰락의 밑바닥으로 끌고 내려가면 좋겠군요.


그렇지만 이러한 일베가 마치 일본의 넷우익마냥 인터넷 밖으로 나가며 그러한 여론이 생기고 사회로 나와 활동한다면 어떨까요? 이미 변희재를 비롯한 여러 극우 인사들이 인터넷 밖에서 활동하기도 하죠. 그러한 성향을 보이는 이들도 다수 있습니다. 이런 이들을 필두로 일베가 인터넷 밖으로 나온다면 우리나라는 일본의 넷우익이 사회 밖으로 나와 활동하는 것과 같은 전철을 타게 되는 꼴을 보일 겁니다.


그야말로 안 좋은 것은 하나같이 따라하는 셈이죠.(하.. 어찌된게 이 나라는 일본이라는 예시를 두고 배우질 못하는 겁니까...)


그렇다면 현 시점에서 우리가 해야할 일은 정해져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이러한 현상의 원인, 근본을 파악하고 분석하며 히틀러 본인이 이야기했듯이 오직 최초 단계에서 자신들의 집단 운동과 사상에 대한 무자비한 타격만이 자신들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말처럼, 일베가 더 발전하기 전에 일베를 박살내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일베적 프레임과, 현실에서 보여주는 그러한 잘못된 가치관들(가령 지역차별, 여성혐오등)을 해소해야합니다.


그것이야말로 진짜로 일베를 제거하는 것일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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