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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며,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 - E.Ka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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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8.04.17
    천재의 죽음과 죄인의 고백, 아마데우스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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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리뷰는 작품에 대한 내용누설이 있습니다. 

 

 

작품은 살리에리의 고백으로 시작합니다. 자신의 죄악에 대한 죄책감으로 절규하듯 뱉어나다 끝내 자신의 목을 그어 자결하려고 하죠. 그러나 하인들에 의해 구조 당하고 정신병원에 갇히게 됩니다. 그리고 신부가 찾아와 자신의 이야기를 고백하라고 권하죠.

 

작품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천재성이 곳곳에서 부각되곤 하는데, 여기서부터 모차르트의 천재성은 부각됩니다. 신부에게 자신의 음악을 들려주었으나, 알지 못하고, 모짜르트의 곡을 들려주자 너무나도 쉽고 열정적으로 칭찬하죠. 유력한 궁정악장이자 작곡가였던 살리에리의 곡을 기억하는 사람은 이제 없고, 오직 천재의 곡만이 수 십년이 지나서도 기억되고 있음을 묘사합니다.

 

그렇게 자신의 고백을 통해 과거의 이야기가 시작되죠.

 

 

실제 역사가 어떠했든, 작품이 수 십년이 지난 지금까지 명작이라 여겨지는 이유는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정할 것입니다. 그만큼 잘 만들어졌기 때문이겠죠. 특히 작품이 끝날 때까지 살리에리의 질투라는 속성은 아주 높은 수준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질투라는 건 사람을 망치죠. 자신을 더 낮은 수준으로 끌어내리고, 더 추하게 만들죠. 살리에리는 궁정악장으로 왕정의 예법과 정치에 박식한 모습을 보입니다. 그러나 그런 격 있고 귀족적, 신사적인 태도의 모습과 대조되게, 아마데우스의 모습은 천박하고 방정맞죠.

 

그리고 그의 음악을 들은 살리에리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신의 범속함을, 평범함을. 그리고 질투는 거기에서 시작하죠. 자신의 노력과 열정이 부정당하는 현실 속에서 진정한 천재에 대해 절대 넘을 수 없는 벽임을 알았을 때, 열등감이 발생하고, 질투가 생깁니다. 그가 없었다면, 그만 없었다면. 자신이 그와 같고 싶고, 그 재능을 빼앗고 싶지만, 결코 그럴 수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됨을 압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자신을 끌어내리는 것이 질투이고, 추하게 만드는 것이 질투이니, 그러면 안 됨을 알면서도 결국 그렇게 하게 되고, 그러기 위해 변해가는 자신의 모습은 역겹기 짝이 없죠.

 

살리에리는 그러한 열등감과 질투를 이겨내지 못했고, 모차르트의 성장과 성공을 의도적으로 막았습니다. 심지어 한 순간의 충동이었으나, 볼프강의 아내에게 몸을 요구하기도 했죠. 물론 바로 내보내긴 했지만, 모차르트의 아내인 콘스탄체의 수치심은 돌이킬 수 없습니다.

 

 

내가 오직 원했던건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이었소. 하느님은 내게 그 열망을 주셨지만... 날 또한 벙어리로 만드셨소. 어째서? 말해 보시오. 하느님께서 내가 주님을 음악으로 찬미하는걸 원하지 않으셨다면 왜 내 몸을 좀먹는 그런 열망을 심으셨는지... 그러면서 왜 재능은 주시지 않으셨는지 말이오.

 

영화 『아마데우스』 중에서 -

 

 

모차르트의 행동은 오만하지만 자기 영역에 있어서만큼은 그것이 허용될 정도의 능력이 있었고, 그에 대해 자신만만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오만함은 사람들의 반감을 불렀죠. 너무 경박하고 방종하여 높은 사람들이 그의 태도를 싫어했지만, 천재 모차르트는 자유로웠던 것이고, 자유롭고 했던 겁니다. 그는 음악을 제외하면 생활과 인간관계에 있어서 어색하고 뻔뻔했지만, 그만큼 순수했죠. 

 

그는 진정 음악사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하나였습니다. 이러한 작품에서 묘사되는 모차르트의 특이성은 그가 범속하지 않은 천재임을 드러내는 장치이기도 하죠. 그러한 재능은 더 높은 수준의 음악 작품을 추구했고, 그러한 추구는 법, 통속에서 벗어나고자 했으며, 이러한 성향과 추구는 왕실과 다른 인물들간의 충돌이 벌어지는 이유이기도 했었습니다.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묘사하는 여러 장치들이 작품 속에서 많다고 했는데, 살리에리와 첫 대면을 할 때, 처음 들은 음악을 듣자 마자 똑같이 연주하고, 그 이상으로 편곡하여 더 다채롭고 아름다운 음악으로 진화시켜버리는 모습도 그렇고, 특히 인상적인 것들은 술집에서 거꾸로 피아노를 연주한 부분에서, 그리고 이러한 사소한 것보다 인상적인 부분은 마치 일상 그 자체가 음악의 영감이 된다는 듯, 장모님의 비난에서 음악적 영감을 받고 승화시켜 그 유명한 마술피리의 아리아 중 하나인 밤의 여왕의 아리아가 나왔죠.

 

그리고 중간 중간 곡 작업 중 단지 악보를 쓸 때에도, 보기만 함에도 머리속에서 음악이 완벽하고 충실하게 연주되죠. 이 부분이 정말 예술적이고 천재성을 부각시키는 연출로 여겨지는데, 그의 말처럼 머리 속에 곡이 있다. 그리고 난 그것을 옮겨 적는 것일 뿐이다. 하는 것처럼 그에게 있어서 음악이란 이미 완성된 것이고, 완전하게 창조되는 것이었습니다.

 

재밌는 점은 그러한 것을 살리에리는 통찰해냈죠. 단지 악보만 보고, 수정한 부분이 없다. 그저 처음부터 완성되어 있었다. 라고요. 그만큼 그의 음악적 실력이 출중하다는 점인데 말이죠.

 

 

그러한 천재성은 살리에리로 하여금 극도의 열등감을 발생시켰고, 심화되어 질투로 이어졌으며, 그의 삶을 파괴하게 되었습니다. 천재성이 천재를 죽인 거죠. 모차르트의 형편이 좋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밥줄을 끊으려 했고, 아버지의 죽음이 그를 괴롭게 한다는 것을 알고 정신적으로 괴롭히며, 종래엔 모차르트의 심력이 다해 죽음에 이르게 하죠.

 

하지만 살리에리의 수작에 의해 그렇게 되었음에도 그의 천재성과 음악성만큼은 누구보다 깊게 이해하고 인정하고 있었던 것 또한 살리에리였습니다. 본인이 회고하듯, 자신의 수작에 의해 공연은 몇 차례 할 수 없었지만, 그때마다 자신은 가서 관람을 했다고 하죠. 마치 자신만 그것을 독점하여 즐기고자 하고 싶기에.

 

그것이 질투의 속성입니다. 자신이 가질 수 없기에, 가지고 있지 않기에 생기는 복잡함. 가질 수 없기에 고통스럽고, 가질 수 없기에 그것에서 해방되기 위해 없애버리고 싶지만, 그것을 즐길 수 있다면 환희마저 느끼는 그러한 것. 살리에리는 모차르트의 재능을 가질 수 없기에 모차르트를 싫어했고, 싫어하기에 죽이고 싶어했으며, 그러면서도 그의 작품을 사랑했습니다. 눈앞에 보이는 모차르트는 음악에선 결코 가닿을 수 없었지만, 손에 닿는 인간이었고, 그렇기에 존재를 보는 것 자체로 자신을 괴롭게 했으니까요. 그럼에도 작품만큼은 음악인으로서 황홀했고.

 

결국 살리에리는 자신의 질투에 굴복했죠. 자신의 열정, 노력을 바쳤으며 기도를 통해 자신의 소원이 이루어졌다고 믿었고, 충실히 독실했던 살리에리가 그렇게 망가졌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기독교의 7대 죄악 중 하나가 질투라는 점이죠. 질투가 사람을 망치고, 사람을 죽이기 때문입니다. 독실했지만 천재를 옆에서 지켜봐야 했던, 그것도 방종하기 짝이 없는 자의 절대로 따라갈 수 없는 재능을 보아야 했던 범재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부담이었을지도 모르겠군요.

 

그렇게 살리에리는 신을 부정하고자 했습니다. 신이 자신을 버렸다면, 신의 거룩함을 노래할 수 있는 도구로 자신이 선택되지 않았다면 신을 조롱하고자 했습니다. 신의 아름다움을 음악으로 표현해주는 진짜 천재인 모차르트를 죽임으로써!

 

 

모차르트는 뛰어난 천재이자 음악가였지만 인간적으로 부족한 면이 많았습니다. 예의, 예절, 인격, 생활.. 아내를 사랑했지만 가장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하진 못했습니다. 자유로운 천재에게 그러한 것은 너무나 중요한 일이 아니었으니까요. 그래도 다른 것들에 비해선 중요했으니 그가 괴물이 아니라는 증거였지요.

 

앞서 말했듯, 그의 예의와 예절, 금기에 대한 도전은 그가 천재로서 자유로웠고, 창조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더 많은 시도와 더 많은 도전이 자신의 음악을 더 다채롭게 해주는 도구이며, 그러한 것을 통해 더 높은 수준의 음악을, 더 완벽한 예술을 펼칠 수 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오만한 천재는 반감을 사기 쉽고, 뛰어난 천재는 시대를 앞서 나가기에, 빈의 사람들은 그에게서 등을 돌리게 되기까지 합니다. 이해할 수 없었거든요.

 

아버지의 죽음은 그에게 크나큰 음악적 변화를 이끌어냈죠. 음악은 자신의 감성에서 창조되는 바, 그만큼 힘들고 괴로웠음을 보여주는 일면입니다. 살리에리는 그의 음악을 통해 그의 심경과 변화를 읽어냈고, 그를 죽이고자 하는 계획이 실행됩니다.

 

아버지가 썼던 가면을 하인에게 뒤집어 씌우고 진혼곡을 작곡하게 하죠. 바로 자기 자신의 진혼곡이 될 그 곡을.

 

인정 받지 못하는 모차르트는 점점 망가져갔고, 가정형편의 어려움은 아내와의 신뢰마저도 갈라지게 합니다. 아내를 배신하고 친구와 술마시고 놀 때 아내는 떠나갔고, 가정에서 한번 더 실패한 모차르트는 점점 더 힘들어져가죠. 공포스러운 아버지의 가면을 입은 자는 독촉하고, 불길한 곡을 쓰면서도 친구의 공연에서 연주하다 결국 쓰러집니다. 살리에리가 그의 집까지 옮겨주었으나, 결국 작업 도중 사망하게 됩니다. 그의 심력이 다해버린 것처럼 묘사되죠. 다만 진혼곡은 완성하지 못한 채 죽었고요.

 

 

살리에리의 회고는 모차르트의 장례식과 함께 끝났습니다. 살리에리는 그의 죽음에 죄책감을 느꼈습니다. 자신의 아이돌을 자신의 손으로 죽였으니까요. 추악한 죄인으로서. 그의 계획은 성공했고, 신을 조롱하고 욕보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거기에 즐거워했죠. 광오하게도, 자신이 신에게 한방 먹였음을 그는 믿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마치 자신이 신이라도 된 듯, 혹은 신과 같은 권위를 가진 자인양 다른 환자들에게 너의 죄를 사하노라며 웃으며 퇴장합니다. 그것은 모든 범속한 자를 대표하는 범인의 대표자로서의 권위이겠지요.

 

 

작품이 오랜 시간 동안 인정 받고 사랑 받는 이유는 그것이 시대를 초월한 감성과 심미성을 가지기 때문이겠죠. 그림과 음악이란 그런 것이죠. 영화에서도 그러한 예술성이 시대를 초월해 존재한다면, 아마데우스 또한 그러한 조건에 부합되는 작품이 아닐까 싶습니다.

 

고전적 미를 잘 살렸으며, 예술적인 감각과 감성으로 작품의 연출과 묘사를 이끌어낸 영화 아마데우스는 예술가의 일생과 인간의 감성을 섬세하게 작품에 담았죠. 그 구성, 연출, 묘사. 

 

앞서에서도 서술했듯이, 작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부각하고, 그러한 천재로서 사회와 규범에서 돌출되는 자유분방함을 보여줍니다. 심지어 그게 사치와 철 없음을 묘사하면서 그의 인격의 성숙을 비판하고 있음에도요.

 

처음 듣는 곡을 완벽하게 연주하는 것도, 그러한 것을 원작보다 더 다채롭고 더 아름답게 편곡하는 능력도, 모든 음악과 곡은 머리 속에 다 있어서 단지 옮겨적기만 하면 되는 비상함도, 작곡을 할 때 울리는 음악의 연출과, 악보를 보면 역시 연주되는 곡의 연출 등 그에게 음악은 최고의 음악가들에 비해 더 다양하고 다채롭고 황홀한 것이었습니다. 음악을 통해 신을 찬미하고자 했던 살리에리의 말처럼, 그것은 단연 신의 음성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안토니오 살리에리의 됨됨이와 성숙함, 사회적 존경에 대한 자격이 있음을 보여줬으나, 질투와 열등감에 빠져 파괴되고 몰락해가는 인격의 인간상은 더더욱 잘 묘사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찬미와 경외를 가지고 있으며 신실한 신자로서 자신의 소원을 들어준 하나님과의 약속을 충실히 이행했으며, 덕을 베푼 기독교인이었지만, 자신의 생활태도와는 전혀 다른 방탕하고 방종한 모차르트의 모습과 그러한 모습과는 전혀 걸맞지 않는 재능은 그에게 하여금 모차르트는 그의 재능에 자격이 없다는 생각도 들었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그의 음악을 동경하고 경배했으나, 그러한 작품이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라는 인간에게서 나왔음을 저주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저주는 그러한 찬미와 신의 음성을 대변할 도구로 신실하고 노력하는 자신이 아니라 범재에겐 불허되는 재능을 가진 천재 모차르트를 선택한 신에게까지 이르죠. 질투는 가속화되기에.

 

결국 범인의 한계를 넘지 못하고, 가져선 안 될 질투는 모차르트라는 천재를 죽이게 되었고, 자신 또한 32년간 죄책감 속에 갇혀 살다 정신병원에서 폐인이 되죠.

 

 

실제 역사와 차이가 꽤 있는 작품이지만, 단순한 작품으로서, 이만한 완성도와 예술성을 갖춘 음악 영화가 또 얼마나 있을까요. 단지 이야기로서, 작품으로서만 본다면 굉장한 걸작인 셈입니다. 고전 명작이라 이름 붙을만한 작품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죠. 

 

완성도 있는 짜임새의 극과, 섬세하면서도 도전적인 묘사와 직관적인 연출, 그것을 완벽하게 살리는 배우들의 정확한 연기. 감독판의 경우 3시간이라는 길이가 단점이라면 단점이지만, 너무 재밌어서 시간가는 줄 모르고 볼 정도의 영화죠. 도대체 이 작품에서 어디가 빠질만한 부분이 있었는가가 의문일 정도로.

 

마지막으로 범인의 대표자로서, 모든 범속한 자들의 평범함을 용서하는 살리에리의 판결로 글을 마칩니다.

 

 

난 세상의 모든 범인(凡人)을 대변한다오. 내가 그들의 대변자이지. 난 그들의 수호성인이야. 세상의 범인들이여! 내가 너를 용서하노라. 내가 너를 용서하노라. 내가 너를 용서하노라. 내가 너를 용서하노라. 내가 너희 모두를 용서하노라.

 

영화 『아마데우스』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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