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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며,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 - E.Kant
by Ko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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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5.02.19
    임진왜란, 배설 장군의 탈영 및 처형에 관한 기록. (2)
  2. 2011.02.08
    잡귀를 물리치는, 공신에게 하사되는 성검. 사인검


이 글은 본인이 다음 Tip에서 답변할 것을 일부 수정한 것입니다.


----------------------------


배설 장군의 후손이라고 해서 조상의 잘못을 쉴드치는 것도 어리석은 일입니다. 역사는 역사 그 자체로 존재하고, 여기에 있어서 어떠한 왜곡과 날조는 있어선 안 됩니다. 여러 기록을 봤을 때, 배설 장군은 탈영을 한 것이 사실이고 처형 당했습니다. 이 사실은 여러 기록을 통한 교차검증으로 알 수 있고, 이에 대해서는 억울한 죽음이라고 할 수 없다고 봅니다.



선조실록과 난중일기에선 배설 장군의 탈영에 관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수사(水使) 배설(裵楔)이 주사(舟師)의 차장(次將)으로 주장(主將)을 구원하지 않고 도망쳤으며 이제 또 주장의 명령을 어기고 어둠을 틈타 도망쳤으니, 정상이 지극히 미워할 만하여 율에 처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장계 내의 사연(辭緣)과 곧 선전관을 보내 법대로 시행한다는 뜻을 접반사 이덕형으로 하여금 경리에게 고하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남절(南截)과 송남수(宋枏壽)의 도망한 죄는 참으로 용서할 수 없으므로 이미 왕옥(王獄)에 잡아왔으니 국문하여 처리함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더구나 이렇게 도망한 사람들은 그 수가 매우 많으니 부득이 하나하나 잡아다가 문초해서 그 중에 범법한 정상이 가장 중한 자는 베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공론이 이와 같으므로 황공하게도 감히 아룁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송남수는 곧바로 처치하지 않을 수 없으니, 무엇을 기다릴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9월 2일 [양력 10월 12일]<경인> 맑다.

오늘 새벽에 경상수사 배설(배설)이 도망갔다. 


역시 선조실록이며, 체포와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간원이 박동량(朴東亮)을 개정할 것을 아뢰고, 또 아뢰기를,

“근래 국가의 기강(紀綱)이 크게 무너져 사람들이 법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예컨데 유염(柳㾾)·배설(裵稧)·조경록(趙景祿)·이몽구(李夢龜)·임충간(林忠幹)·이몽견(李夢見) 등은 큰 죄를 짓고서도 목숨을 부지하여 이 세상에 버젓이 살아가고 있으니, 이보다 더 분통스러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따위 도망자들조차 능히 체포하지 못하고 있으니 그러고도 오히려 나라를 다스릴 수가 있겠습니까. 조정에서는 이 문제를 심상하게 보아 태연한 채 괴이하게 여기지 않고 있어 세월이 이미 오래되었건만 한번도 명령을 내려 기어이 잡아들이려는 계획을 하지 않고 치지도외하고 있습니다. 지난번에 한 장의 하유(下諭)를 내리셨으나 어찌 임충간을 털끝만큼인들 경동시킬 수 있었겠습니까. 별도의 조치를 강구하여 철저히 추적하지 않는다면, 다시는 체포할 날이 없을 것입니다. 비변사로 하여금 엄격하게 법조를 세워 다방면으로 계책을 시행하도록 하고, 각도 감사(監司)와 수령들을 엄책하여 숨겨주지 못하게 하소서. 또 많은 현상금을 걸어 기어이 체포하게 하여 나라의 전형(典刑)을 바로잡으소서.”

하니, 답하기를,

“박동량의 일은 이미 윤허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하유하였다. 나머지는 아뢴 대로 하라.


마찬가지로 선조실록이며, 배설 장군의 처형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전 수사(水使) 배설(裴楔)이 복주(伏誅)되었는데, 그 아비 배덕룡(裴德龍)과 아들 배상충(裴尙忠) 등은 모두 방송하였다. 배설은 지난 정유년 7월 한산(閑山)의 전투에서 패전한 수범(首犯)이었으나 외지에 망명해 있었으므로 조정이 찾아내지 못했었는데, 이번에 도원수 권율이 선산(善山)에서 잡아 차꼬를 채워 서울로 보냈으므로 참수하였다.


선상배씨서암공파 카페에서는 김억추의 현무공실기, 이항복의 백사집, 정경운의 고대일록, 재조번방지 등에서 탈영과 관련한 기록이 없고 난중일기와는 다르다고 주장했다고 하셨습니다만, 자료를 찾아본 결과 사실은 달랐습니다.


먼저 김억추의 현무공실기는 김억추의 후손들이 20세기 초반에 저술한 책이며, 심지어 그 내용도 판타지 소설에 가까울 정도인 데, 후손들이 썼다는 사실을 감안해도 김억추에 대한 미화와 왜곡은 심각할 지경입니다. 대표적으로 꿈에서 관우의 계시를 받고 쇠사슬을 완력으로 짊어지고 울돌목 양쪽에 설치했다던가, 왜선에 단독으로 뛰어들어 검풍으로 수백명을 죽였다던가, 검을 한번 휘둘러 적선 수백척을 격파했다던가 같은 이야기가 당당히 적혀있지요. 이러한 사실을 감안한 바, 김억추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고 하여도 해당 저서의 기록을 신뢰하긴 어렵고, 그것과 별개로 다음의 근거들을 이유로 주장과 같은 기록이 존재한다 하여도 반박이 가능합니다.


김억추 본인도 그닥 뛰어난 인물은 아니었는 데, 1597년 정3품에 올라 전라우도수군절도사가 되어 이순신을 따라 어란포 해전과 명량해전에 참전했지면 수준 이하의 전투력의 추태를 보이다 결국 육지로 보직 변경을 신청해서 밀양부사 등을 거쳤죠. 괜히 후손들이 왜곡과 미화를 한 게 아닙니다. 


백사집의 경우에도. 


 “공(이순신 장군)이 통제사로 복귀했을 때 조선 수군이 막 패한 뒤여서 주선과 기계가 남아있는 것이 전혀 없었다. 공은 단기(單騎)로 달려 경상우수사 배설을 만났는데, 이때 배설이 거느린 전선은 겨우 8척이었고, 또 녹도에서 전함 1척을 얻었다.” 

 이 때 이순신 장군이 배설에게 앞으로의 계책을 물었다. 그러자 배설은 “배를 버리고 육지로 올라가 육군에 의탁해서 싸우는 게 낫다”고 했다. 이순신 장군이 “그 계책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하자 배설은 배를 버리고 달아났다. 배설은 이 때의 죄 때문에 훗날 사형 당하고 만다. 


출처 : http://leekihwan.khan.kr/345 

백사집 해석본 : http://blog.daum.net/collagen/979 


고대일록도 마찬가지입니다. 


<정경운의 고대일록> 


○1599년(기해) 2월 25일 을해(乙亥) 


배설(裵楔)이 잡혔다는 소식을 들었다. 배설은 몸을 피하여 도망을 쳤으나, 결국 잡혔다. 

스스로 만든 허물을 어찌 피할 수 있겠는가. 



○ 1599년(기해) 4월 17일 병인(丙寅) 


배설(裵楔)이 복주(伏誅)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설은 경상 우수사(慶尙右水使)가 되어 배를 팔아먹고 도망갔다가, 

산골짜기에서 출몰하곤 했다. 그의 아버지를 가두어 두었는데도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사람들에게 잡혀 몸과 머리가 서로 다른 곳에 있게 되었으니, 또한 마땅한 일이 아니겠는가 


재조번방지의 기록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순신이 진도(珍島)에 오니, 배와 기계가 쓸어버린 듯이 남은 것이 없었는데, 마침 경상 우수사(慶尙右水使) 배설(裵楔)이 전선(戰船) 8척을 거느리고 왔으며, 또 녹도(鹿島)의 전선 1척을 얻었다. 이에 배설을 속여 나아가 싸울 계책을 말하니, 배설이 말하기를, 

“일이 급박하니, 배를 버리고 육지로 올라가서 호남 진영(湖南陣營)을 택하여 싸움을 도와 공을 세우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하엿으나, 이순신이 듣지 않으니, 배설이 이에 배를 버렸다. 


http://db.itkc.or.kr/index.jsp?bizName=KO&url=/itkcdb/text/bookListIframe.jsp?bizName=KO&seojiId=kc_ko_i006&gunchaId=&NodeId=&setid=955432 


선상배씨서암공파는 배설 장군의 후손 되는 사람들이 만든 카페인 데, 전에 다음 지식인 시절 때 명량이라는 영화가 개봉하고 나서 알바를 동원한 것인지 배설 장군에 호의적이고 유리한 글만 올려대더군요. 근데 그 내용이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는 것이나 다름 없어서 퍽이나 불편했습니다. 


배설 장군이 가지고 갔던 배가 나중에 이순신이 얻게 되어 나중에 명량해전 때 사용되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난중일기의 기록들로 보아 배설 장군 그 본인은 칠천량 이후 PTSD로 의심되는 증세를 보였기 때문에 그 점을 감안하면 이해는 하지만 비판을 피할 수 없는 행동을 보여줬습니다. 그리고 그게 사실이지요.



백사기, 고대일록, 재조번방지를 포함해서, 난중일기, 조선왕조실록 등 교차검증이 되기 때문에 일부 기록에서 배설 장군에 대해 다른 정보가 기술되어있다고 해도 그 자체로 기존의 학설이 뒤집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자료가 잘못되었다는 근거가 될 뿐이고 별다른 실증적 증거가 없으면 배설 장군은 그냥 탈영한 게 사실이에요. 앞서 말했듯이 그 이유는 PTSD 때문이라고 할 수 있고요. 배설 장군이 겁쟁이인 게 아니라, 역시 이해할 수 있는 전쟁의 피해자 였을 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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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이사모 2016.07.03 23:02 address edit/delete reply

    김완의 해소실기,(참조) 배설 장군과 김완장군이 마지막까지 적들의 등선육박전에 맞서 사투를 벌이는 기록이 생생하다.

    칠천량 해전에서 적에 기습공격을 당한 배설 장군이 일본 요시아키 장군과 직접 배위에서 배세루를 잡으려는 요시아키 장군과 결투가 벌어졌다.

    일본군에 목표는 이순신이나 원균이 아니라 배세루 였다는 사실과 요시아키가 포위망에 갖힌 배설의 지휘선에 몸소 올라 칼을 휘두러다 배설장군의 칼에 오른쪽 팔이 베이고 칼을 놓친 상태에서 너무도 무공이 뛰어난 것을 확인하고는 장군에 체면도 버리고 바다로 뛰어 내려 구사일생으로 살아돌아 갔다는 기록이다.

    김완 장군을 포로로 잡은 요시아키 장군이 팔을 잃어버린 것은 분명히 칠천량 해전에서 배설 장군의 함선 위에서 이라는 것은 놀라운 기록으로 난중일기에 너무 빠지지 말고 일본측 기록을 함께 참고할 필요있다.

    • Favicon of https://konn.tistory.com BlogIcon Konn 2016.07.04 21:40 신고 address edit/delete

      개뿔,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http://cafe.daum.net/_c21_/bbs_search_read?grpid=SWL&fldid=1Db&datanum=5209

      경상우수사 배설의 경우에도 “배멀미(수질)로 제 정신이 아니었다(不省人事)”고 한다.

      기본적인 사료비판도 통과하지 못할 수준으로 배설에 대한 쉴드는 오히려 역사왜곡입니다. 당장 님이 제시하신 내용과 정반대되는 내용이 나오는 데 우습군요. 애초에 칠천량 때는 그런 선박 위에서의 전투는 제대로 일어나지도 않았고, 진형과 전열이 붕괴된 채 퇴각했다는 건 유명한 사실입니다.

      있지도 않은 이야기를 사실인양 말하며 왜곡날조하는 게 바로 역사왜곡이고, 좋게 봐도 판타지 소설이죠.






사인검이란 사인참사검으로도 불리며 조선시대때 만들어져 임금이 신하,무신에게 하사하는 검으로 알려져있다.


이러한 사인검은 인(寅)시,즉 호랑이를 나타내며 인년,인월,인일,일시에 장인이 만든다고 합니다.

인년은 12년마다 찾아오고 한달에 인일이 3번 돌아오므로 그때 제작한다고 한다,또한 같은 칼날은 두세개 만들다고 하고 그것은 인시에 만든것이 아니라 삼인검이라고 불린다.


또한 이검의 한쪽면에는 ‘四寅劍 乾降精 坤援靈 日月象 岡形 震雷 運玄坐 推山惡 玄斬貞’라는 전서체로 적힌 글귀가 있으며 한쪽에는 동서남북 28수의 별이 새져겨있고 왕의 도장이 새겨져있어 명령을 어긴자,불복종한자등을 허락없이 처형할수있는 막강한 권력을 가지기도 했습니다.

<▲27자의 전서체로 쓴 글귀>

<▲ 동서남북 28수의 별>


어쨋든 콘푸로스트먹고 호랑이기운을 받은 이검은 벽사파마의 기운을 가지고 있어 악귀를 물리친다는 의미가 있다고하는데,사실 재료가 연철이라 전투용이라기보다는 부적의 의미가 강할것같네요.


그리고 사인검은 조선왕조실록에서도 9건쯤 등장하는데 모두 "재앙을 물리칠수있는 도구"혹은 "사귀를 물리칠수있다"라는 점으로 위에서말한 벽사파마의 의미가 강하다 볼수있습니다.


이에대해서 재밌는 일화가 있는데 선조때의 문신,신흠이라는 자가 귀신에 의해 일어난듯한 변괴가 보이자 동양위 신익성이 장인인 선조에게 청원하여 사인검을 받아 아버지에게 바쳤다고합니다.


그후 신흠이 아들을 마중나가자 칼이 가출을 하는지 지혼자 붕떠서 날아가더니 집의 기둥에 칼이 박혀있었고 박힌자리에서 피가 새어나왔다고 합니다,악한것을 알아서 찾아가 베는 자동화기능쩌네요.


그리고 신흠은 문집 [상촌집]이라는 책에서 이런 글귀가 있는데

 

"세속에 의한 말에 의하면 인년,인월,인일,인시에 두드려 제조한 칼을 사인검이라 한다,이것이 잡귀를 물리친다고 하는데 갑인년 정월에 동양위가 나를 위해 이칼을 만들어 주었다"


참고로 동양위는 선조의 둘째딸과 결혼한 신흠의 아들.


아참,신흠이 사인검을 받고 기분이 좋아서 사인도가라는것을 지었다고 합니다.





사인도가 (四寅刀歌)

林有魈兮山有夔  숲에는 이매(魑魅)가 있고 산에는 귀신이 있고

陸有虎兮水有螭  땅에는 호랑이가 있고 물에는 이무기가 있어

夜而行兮晝而伏  밤이면 돌아다니고 낮이면 숨어버리며

攬余裾兮嚙余足  나의 옷깃을 끌어당기고 내 발을 깨무네.

橫中途兮不可制  길에서 횡행하니 제어할 길이 없고

爲民害兮勢漸猘  백성에게 해가되니 그 기세가 점점 더 거칠어진다.

我有刀兮名四寅  나에게 칼이 있으니 그 이름을 사인(四寅)이라 하네.

讋地祇兮通天神  지신(地神)을 두렵게 만들고 천신(天神)과 통한다.

白銀粧兮沈香飾  백은(白銀)으로 단장하고 침향(沈香)으로 꾸몄으며

光潑潑兮霜花色  빛이 번쩍이며 뿜어지니 마치 서릿꽃과 같다.

防余身兮奚所懼  내 몸을 보호하니 어찌 두려워할 바가 있으리

邪自辟兮罔余迕  삿된 것은 저절로 피하니 나를 얽어매지 못하리.

精爲龍兮氣爲虹  정(精)은 용(龍)이 되고 기(氣)는 무지개가 되어

橫北斗兮亘紫宮  북두성(北斗星)을 가로질러 자미원(紫微垣)까지 퍼지네.

行與藏兮惟余同  길을 다닐 때 몸에 감추어 함께하니 내 몸과 한 가지로 생각하네.

歲將暮兮倚空同  장차 늙어지면 함게 공동(空同)으로 돌아가리라.




어쨋든 사인검은 궁중에서 엄격하게 다루었고 일반인또한 보기가 힘들었습니다.

애초에 왕이나 왕이 신하에게 하사하는 검이니 말이죠.


하지만 이러한 성검을 좌도 방문이라하여 유학자들에게 규탄의 대상이 되었지만 왕실은 꾸준히 제작하였다고 하고 제작방법에서는 설이 분분하지만 어떤 장인께서는 인의 시기에 타조(打造)하여 만든다고 하는군요 뭐, 조선왕조실록에도 주(鑄)하여 만든다고 나와있는데


이표현이 청동기시대에 주물로 칼을 만들던때 유래되었다고 합니다,언젠가 鑄라는 단어는 칼을 만든다는 표현으로 관용어가 되어 정착했다고 하는군요



최초의 사인검은 태조때 제작되었다고 추론하고 있으며 실록에선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중종 37년,"사인검은 반드시 인년에 만들어야 하는데 이는 조종조(태조의 재위기간)의 옛일이며"


라고 나와있음으로 짐작하는 겁니다.


생각해보니 예전에 맥스다룰때 제가 사인검을 모델링해본적 있는데 렌더링샷이 남아있지는 않네요,시간나면 언젠가 인증게시판에 올리도록 하지여 ^^ㅋ




아,마지막으로 사인검과 관련된..민간설화? 하나 소개하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예전 일제시대때 대부분의 민간설화도 지워져서,동시에 사인검에 대한 일화,전설또한 많이 지워졌는데 그중 남아있는 전설이 있다면 해란강 전설이 있습니다.


해란강이란 간도의 용정부근을 두르는 강인데 고구려가 망한후 유민들이 간도부근에 흩어져 살았다고 합니다


뭐 딱히 유복하다고는 못하지만 살만할만큼 먹고살았는데 어느날 궁기라는 날개달린 강한 요괴가 수하요괴를 부리며 마을을 점령하고 사람을 헤쳤습니다.


물론 사람들도 당하고있지는 않았고 대항하였지만,요괴가 너무 강하여 결국 굴복하고 궁기는 자신을 모시고 처녀를 바치라고 명령합니다.


이때부터는 간도는 요괴의 앞마당이 됩니다..


한편 이곳의 마을어귀에는 해와 란이라는 오누이가 살고있었는데 궁기에 의해 부모님은 살해당했고 해도 궁기에 의해 죽임을 당할뻔했지만 란이 사정사정해서 해는 강에 던져져버립니다...


해는 강에 떠내려다가 가까스로 바위에 붙어 강에서 나왔고 마침 지나가면 스님들에 의해 살게됩니다.


그렇게 해는 스님에게 자신의 사정을 이야기해줬고 그스님은 자신이 알고있던 무승에게 무술을 배우게 되는데,그 기간이 5년이었습니다.


5년동안 무술을 배운 해는 복수를 하리라 마음먹었지만 무승은 해에게 기다란 쇠막대를 주며,


이것을 자유자재로 다루면 하산할수 있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어쩔수없이 해는 다시 이를 악물간 2년간 연마를 해서 자유자재로 다룰수 있는 경지가 되었는데

그때 무승은 해에게 기다란 검을 주게됩니다.


그것이 바로 사인검이 었고 그검을 받아든 해는 간도마을로 직행하게 됩니다.


마을은 요괴에의해 7년간 폐허가 되어버렸고 란은 마을에 남아 사람들을 보살폈습니다..


드디어 오누이가 만났는데 바로 다음날 란이 궁기에게 바쳐지게 된다는 사실을 알았고 란은 궁기를 방심하게 한후 해가 궁기를 처치하기로 합니다.



그렇게 다음날 아침이 오고 란은 궁기가 사는 궁으로 끌려갔고 해는 조용히 그뒤를 뒤따라 갑니다.


궁기가 사는곳에는 그동안 끌려온 여자들이 요괴에게 수난을 당하고있었으고 란은 정성껏 궁기를 모시며 술에 취하게합니다.


그리고 란은 해에게 이 사실을 알렸으나 이미 해가 궁기를 공격해올것이라는 사실을 변절자들에의해 알게된 이후였죠,둘은 포위가 되었으나 용감한 해는 사인검을 뽑아들고 요괴들을 추풍낙엽처럼 베어넘겼고 해의 검술과 마를 벤다는 사인검의 강력한 순양의 기운에 의해 베어진 요괴들은 한줌의 재가 되어 소멸되어 갔습니다.



한편 자신의 수하들이 죽어나가자 궁기는 날개를 펼치고 입에서 불을 뿜으며 해에게 덤벼들었으나 먼치킨 사인검의 강력한 기운은 궁기의 요기조차 어찌할수가 없었고


결국 궁기는 자신의 거대한 도를 휘두르며 해를 공격합니다.


보쓰몹이 다 그렇듯 높은수준의 검술을 보여주며 용호상박으로 싸웠으나


사인검의 강한 기운에 의해 궁기는 날개를 펴들고 하늘로 도망가려했습니다.


하지만 란은 다른 여성들을 설득하여 뜨거운 잿물을 가지고 성의 높은곳에 있었고

궁기가 날아오르자 뜨거운 잿물을 부었고,궁기는 비명을 지르며 추락하는것을 해가 사인검으로 두동강 내버립니다.


그렇게 마을은 요괴로부터 해방되고 그둘을 기리기 위해 그둘의 이름을 따 강이름을 해란강으로 짓게되었죠.




여기서 나오는 궁기는 중국의 요괴인데 중국 최초의 황제인 헌원에게 추방당한 제후일족을 일컫는 말이기도 한다는군요,아마 이들이 추방당하여 간도일대로 오게되고 거기서 깽판을 부리니 그곳에 살고있던 유민이 그들을 몰아낼때 그검을 얻을걸로 보입니다.


하지만 그검이 사인검일거같지는 않고 아마 요괴를 물리친다는 의미로 후에 사인검이라고 불리게 된거같네요.





아,그리고 요즘따라 도검관련 글을 많이 쓰는데 이러다가 도검마스터 될거같네요.


슐레딩거님이 칠지도를 부탁하셧는데 이건 쓸수도 있고 않쓸수도 있을거같습니다 ㅜㅜ



요즘따라 나치고는 나름 필력좋은(?) 글을 쓰네요,그동안 필력이 늘게된건지 우연인지..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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