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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며,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 - E.Kant
by Ko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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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트 카르텔'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22.12.16
    엘리트 카르텔과 하백의 신부들. 개혁과 혁명.
  2. 2022.11.13
    사회적 질병에서, 사회적 질서가 된 부패.
  3. 2022.11.12
    한국 언론 환경은 어떻게 이 꼴이 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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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나라 이후, 위나라의 건국 초반, 업의 유수 자리에 서문표가 부임했다. 업 땅은 위나라의 중요한 요충지 였으나 그리 개발된 곳은 아니었고 성안은 한산했으며, 민심도 좋지 않았다. 이에 서문표가 장로들을 모아 물어보니, 하백에게 신부감을 바치는 일로 고생하고 있기에 가난하기도 하다는 것이었다.

서문표는 군사들을 모아 하백에 신부를 진상하는 자리에 참석했다. 그는 큰무당 할멈에게 시켜 처녀들을 보았으나 하백의 신부가 되기에 못났다고 말하며 다시 예쁜 처녀를 구해 보내드리겠다며 큰무당 할멈이 직접 가서 하백에 전하라며 군사를 시켜 강물에 던져버렸다.

이후 큰무당 할멈이 돌아오지 않는다 하여 차례대로 제자들을 강물에 던졌고, 무당과 그 제자들이 하백께 진상을 알리기 곤란한 모양이니 지역 관리가 대신 알리라며 그 역시 강물에 던졌다.

그럼에도 돌아오는 자가 없자 아전과 고을 유지를 한 사람씩 강물에 던지려 했고, 이에 겁에 질린 이들은 모두 머리를 조아리며 이마에 피가 흐를 지경이었다. 서문표는 하백이 손님들을 오래 붙잡고 있는듯하며 모두 마치고 돌아가라고 하였다.

아전과 백성들은 크게 놀라고 두려워하며 이후로 감히 하백을 위해 신부감을 바쳐야 한다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이후 서문표는 백성을 모아 12개의 도랑을 파서 강물을 끌어와 논에 물을 대었으나 처음 백성들은 도랑을 만드는 것이 힘들고 번거롭다며 하려하지 않았다.

이에 서문표는 말했다.

"백성들이란 일이 이루어지고 나면 즐거워할 수 있을 뿐이지 함께 일을 시작할 생각은 하지 못한다. 지금의 백성들은 비록 나를 증오하겠지만 100년 뒤 그들의 자손은 내 말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서문표의 일화는 그가 얼마나 과감하고 현명한 지도자인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일화에서 우리는 업땅에서 이루어진 부패의 구조에 집중해보도록 하자.

 

종교는 인적 관계망을 제공하고 그들이 하나로 뭉칠만한 가치를 부여한다. 교회나 법당, 신당에 제사를 위해 사람들은 모이고 종교적 질서 아래 집단이 형성된다. 그리고 종교는 그들이 동의하고 의지할만한 가치를 제공하는데, 그것은 현생의 부귀영화거나 내세의 삶, 혹은 행복이다. 당장 자신의 불행과 고난을 신의 시련이며 이것은 훗날 보답받을 수 있으리라는 믿으며 버티게끔 하기도 한다. 한 사람이 감히 견딜 수 없는 고난을 그런 고난은 없으며 그것이 벌 받을 죄이기 때문에, 혹은 살아서든 죽어서든 언젠가 돌아올 보답을 위해서라도 견디게끔 만든다.

 

업땅의 사람들은 하백이라는 강의 신을 모셨고, 이는 고대에 잦았던 수해의 공포를 이겨내기 위한 수단이었다. 노한 강을 달래기 위해서 인신을 공양했고, 서문표가 던진 큰할매 무당은 그러한 제사와 의식을 맡았던 종교권력자였다.

 

사람이 모인다는 것은 이권이 발생한다는 말과 같다. 사람은 누구든 생존을 위해 자본을 지닌다. 여기서 자본이란 주머니속 고기 한점이 될 수도 있고 노동력이 될 수도 있으며, 특별한 기술이나 기교가 될 수도 있다. 종교적 질서 아래 권위를 획득한 자들은 이들에 대한 우위를 지닌다.

 

그러한 우위는 신자들에게 특정한 역할을 부여하거나 특정한 임무에 종사시킬 수도 있다. 이것은 정치적 권력과 결이 다른 면이 있기에 종교적 근거를 지녀야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사람이 모이는 곳에 돈이 있다는 말처럼, 종교를 중심으로 모이는 사람들은 어떠한 종류의 사람들에겐 사업수단이자 지지 기반으로 권력과 재산을 모으는 재료가 된다.

 

 

큰할매 무당은 수해의 공포에 시달리는 업의 주민들에게 제사를 위해 신부를 골라 공양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종교적 권위는 그것에 복종하게 만들었다. 지역 관리들은 통치에 큰 위험이 될 수 있는 종교적 지도자와 경쟁하기보다는 그들과 야합하는 것이 더 쉽다는 걸 알았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업의 삼로와 아전들은 해마다 백성들에게 세금을 거두어갔고, 수백 만전의 세금 중 하백에게 신부감을 바치게 하는데 20~30만 전을 썼으며, 나머지 돈은 무당들과 나누어 가지고 간다 하였다.

 

이후 무당은 돌아다니며 어려운 집안의 딸 중 아름다운 처녀를 보면 하백의 아내가 될 것이라 공표한 뒤 폐백을 주고 데려간다. 예쁜 딸은 가진 집안은 하백에게 시집보내질까 두려워 멀리 도망가기도 하였고 성 안은 더더욱 비어 사람은 부족해지며, 이는 노동력의 상실이 되어 더욱 가난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하백에 대한 믿음은 신부를 바치지 않으면 물이 넘쳐 사람들을 죽이게 할 것이라는 공포를 유지시켰다.

 

그렇게 무당이라는 종교권력과 관리라는 통지권력은 야합하여 백성들을 수탈했고 자신의 부와 권위, 권력을 유지하고 확대시키는데 사용했다.

 

강의 범람은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주었고, 이에 대한 공포는 압력이 되어 무언가를 해야한다는 요구를 만들었고, 그 요구에 응답한 것이 종교였다. 그 종교는 인신공양을 대책으로 내놓았고 수해의 공포는 인신공양의 공포보다 더 했기에 사람들은 그것에 합의했다.

 

공포에서 지켜주는 종교 지도자는 큰 권위를 얻었다. 단순히 제사와 의식을 집행하고 다루는 전문가로서의 종교적 권위 뿐 아니라, 공양될 사람을 선발한다는 인신에 대한 권력 역시 가졌기 때문이었다. 죽을 사람을 고르는 사람이라면 그들에게 밉보였을 때 다음 희생자는 자기 집안에서 나올 수 있고 그들과 친하게 지낸다면 그러한 위험에서 벗어날 것이다. 조금 더 친하다면 그가 싫어하는, 어쩌면 경쟁자 집안이 선택되길 청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집단 내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인신에 대한 생사를 결정지을 수 있는 권위를 지닌 종교 권력과 싸우는 것은 한정된 권력만 가지고 있는 정치권력에겐 상당한 부담이 된다. 아주 강력한 권력을 가지고 상당한 정치력을 지닌 자가 아니라면 어렵다. 설령 강제로 그들을 죽인다 하더라도 공백이 된 종교적 안정은 백성들에게 두려움을 일으킬 것이고, 정치권력에 대한 불만과 반발로 표출될 것이다. 여기에서 본래 두려워하던 수해가 발생한다면 우연의 산물이라 하더라도 정치권력의 책임이 된다. 종교권력을 제거한 뒤 새로운 종교적 질서, 혹은 정치적 질서로 편입시켜 강력하게 통제할 수 없는 한, 민란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업땅의 무당과 관리는 그러한 관계 속에서 이익을 발생시켰고, 그것은 부정부패라는 말로 정리되는 흔하고도 간단한 관계다.

 

 

서문표는 이러한 구조와 현상을 간파했고 해결책은 과감했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무당과 관리의 야합은 엘리트 카르텔이라 할 수 있고 그들이 행한 것은 부정부패가 될 것이다. 서문표는 그러한 구조를 천천히 개혁하는 것은 그들의 강력한 반발이 있을 것이라 예상했을 것이며, 심지어 주민들을 동원하여서. 그들은 그럴 힘과 영향력이 있으며 명분상 우위에 있다. 서문표가 무당의 인신공양을 막으려면 그들은 하백의 분노를 말하며 주민들의 두려움을 자극할 것이다.

 

따라서 서문표는 그들의 구조 자체를 없애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는 인신공양과 부패에 연관된 당사자들을 강 속에 집어 던졌고 그렇게 핵심 관계자들을 제거하는데 성공했다. 엘리트 카르텔은 끈끈한만큼 강력한 거부를 요구한다. 그들은 머리가 좋은만큼 웬만한 접근을 무력화하는데 뛰어난 능력을 발휘할 것이고 이는 개혁이 극히 어렵다는 의미가 된다.

 

가장 쉬운 것은 개혁이 아니라 혁명이다. 개혁은 많은 것을 필요로 한다. 정당성, 권위, 권력, 논리, 사회적 합의 등등.. 그러나 엘리트 카르텔은 이러한 조건을 흐리거나 방해하는데 능하다. 그들 역시 특정 영역을 독점한 전문가이자 권력자이기 때문이며, 그들의 존재는 대개 필수불가결하거나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기도 하다. 무엇보다 그들은 그 사회의 극소수에 속하는 높은 지적능력과 성취를 이룬 자들이다. 정당성, 권위, 권력, 논리, 사회적 합의는 그들 역시도 다룰 수 있다.

 

혁명은 파괴적이다. 엄청난 사회적 비용과 손실이 발생하는 일이고 무고한 피해자나 거대한 사회적 변혁 속에서 반드시 탈락하게 되는 이들이 발생한다. 개혁은 그것을 줄이고 필요한 것에 필요한 만큼의 영향력을 행사하게끔 하지만 그러한 개혁은 훨씬 저지하기 쉽고 방해받기 쉽니다. 혁명의 파괴적인 힘은 그러한 저항을 무력화하는데 효과적이다. 비용을 감수할만큼인가와 별개로 말이다. 또한 그 방향성은 완벽히 통제되기 어렵고 주변을 향해서 뻗어나가기도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혁명은 대체로 좋은 선택지가 되기 어렵다.

 

그러나 서문표는 개혁이 아니라 혁명에 가까운 결정을 내렸고, 그것을 성공시켰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것은, 무당과 관리를 수장시키는데 군사를 동원했다는 것이다. 서문표가 군사라는 무력을 대동하지 않았다면 그가 아무리 명성 있고 능력이 뛰어나다 한들 빠져 죽는 것은 그가 되었을 수도 있다. 무력은 논리와 정당성에 앞서 많은 것을 가능하게 해준다.

 

 

한국의 엘리트 카르텔은 부정하고 부패했다. 이걸 부정하는 사람은 눈을 닫고 귀를 막은 사람일 것이고 온전히 세상을 인식하는 사람이라고 하기 어렵다. 우리가 수집할 수 있는 모든 근거들에게서 온전히 객관적인 정보만을 추출하여 늘어놓기만 해도 그것을 분석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어떠한 모습의 현실이 모델링 될 것이다.

 

진보 정부는 그러한 부정부패의 구조를 개혁하고자 오랫동안 노력했다. 김대중도 그랬고 노무현도 그랬다. 노무현은 검찰개혁을 사실상 처음 시도한 사람이었고, 검찰의 보복에 자살을 선택했다. 노무현이 실제 죄를 저질렀기 때문이 아니다. 설령 그렇다 해도 부당했고, 그렇지 않아도 죄는 그것을 다루는 사람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는 70%의 지지를 등에 업고 검찰개혁을 시도했다. 그것이 과감했느냐, 충분한 권력을 동원했고 사용했느냐에 대해선 이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말이다. 윤석열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없었던 문 정부는 그를 검찰총장에 올렸고, 조국을 법무부 장관에 올려 검찰개혁을 시도했다. 그러나 윤석열 전 총장은 국가나 개인보다 검찰이라는 조직에 무한한 충성과 소속감을 가진 사람이었고, 조국은 법조계의 아웃사이더로 조직적 지지와 협조를 얻기 어려웠다.

 

검찰은 언론과 합작하여 개혁을 단행하는 이들에 반역했다. 그들의 과거를 끈질기게 파냈고 언론은 그것을 자극적으로 다루었으며, 물량으로 이슈를 키웠다. 추잡하고 천박한 방식으로 괴롭혔고 그것을 즐기기까지 했다. 기소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기소했고, 증거를 수집하기 위해서라면 어떻게든 수작을 부렸고 위법임을 만들기 위해 부족한 증거와 논리를 왜곡하거나 연출해냈다.

 

언론은 조국 일가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고 사소한 것이라도 기사화시켰다. 하루 종일 집앞에서 대기하며 그들의 인신에 제약을 가했고 어떤 기자는 짜장면을 시켜먹었는지 짬뽕을 시켜먹었는지 웃으면서 물어보았다. 아주 즐거운 얼굴로. 그리고 이후 보답받았다.

 

 

검찰과 언론은 엘리트 카르텔의 일부분일 뿐이지만 아주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그들이 담당하고 있는 영역이 강력한 영향력과 권력을 발휘하는 자리라는 것을 감안해도 그러하다. 그들은 검찰을 개혁하면 범죄자를 제대로 잡을 수 없다는 상투적인 주장부터 시작하여 특정 정권을 위한 검찰을 만들 것이라는 이미 스스로 해왔던 역사를 부정적으로 적용시키기도 했다.

 

검찰은 조국 일가를 수사하고 기소하여 검찰 개혁에 반대할 정당성을 확보했고, 검찰의 권위 아래 그것이 정당한 행위임을 인식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실제 다룰 수 있는 권한을 통해 검찰 권력을 휘둘렀고 문 정부와 검찰개혁에 반대 입장에 있는 시민들과 조국이 부정부패한 쓰레기라고 인식하게 된 중도층을 통해 검찰개혁의 저항에 사회적 합의를 개혁 입장에 있는 이들의 것과 경쟁시켰다.

 

그렇게 검찰개혁은 고꾸라졌다.

 

그 당시 70~50%에 달하는 문재인 정부의 지지율은 조국 정국을 겪으며 추락했고 그만큼 높았던 지지율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실패했다. 민주주의 국가가 대중의 지지와 합의에 의해 거의 모든 것이 결정될 수 있는 체제라는 걸 고려하면 매우 이례적이고 두려워해야할 일이다. 국민이 요구하면 체제의 구성원은 그에 순응해야 한다. 그런 체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지지율에 저항했고, 끝끝내 반대하는 이들을 결집, 확대시키는데 성공하여 국민의 요구를 분열시켰다.

 

힘을 잃은 국민의 요구는 그렇게 실패했다. 사실, 이것은 문재인 정부의 실책이기도 하다. 국정을 운영하고 통치를 하며, 명령을 집행하는데 필요한 대단한 권력이 있었다. 그들은 국민의 지지 및 요구에 무관하게 많은 수단을 동원하여 검찰개혁에 진전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 못한 이유는 그들이 그렇게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약점을 가진 이들은 어디에나 있듯, 조국의 예시와 같이 털어서 안 나오는 사람은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인적 구성원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특별히 문재인 정부가 타락한 인석 구성원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그러한 현실적 약점을 어떻게 다룰지에 대한 권한과 결정권이 검찰이 독점하고 있었고, 그들은 문재인 정부에 협조하지 않는 집단이었다. 단지 그 뿐이었다. 보수 정부가 문재인 정부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한 구성을 하고 있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다.

 

문재인 정부는 50~70%에 달하는 지지율을 오랫동안 유지해온 정부였으나 원하는 개혁을 많이 성공하진 못한 편이었다. 핵심 과제 중 하나였던 검찰개혁은 예시이자 대표이다. 그러나 윤석열 정부는 30% 안팍의 낮은 지지율로 원하는 거의 모든 것을 행하고 있다. 이는 문재인 정부가 민주주의의 원칙(지지율로 대표되는 민의)에 충실했기 때문이고, 그 충실이 지나쳤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윤석열 정부의 현실이 보여주듯, 문재인 정부는 지지율을 무시하고 원하는 것을 집행할 권력이 있었을 것이다. 저항받더라도, 누군가 반격에 죽어나가더라도 말이다.

 

 

검찰개혁의 실패는 이후 그러한 시도가 불가능하거나 극히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례라 할 수 있다. 대한민국 0.1%에 속하는 능력자들이 똘똘 뭉쳐 자신의 권력과 영향력을 발휘한다면 어디까지 저항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 것이고, 검찰은 이번에도 선거를 통해 선출된 행정부에게서 승리를 거두었다.

 

엘리트 카르텔의 강력한 힘은 개혁만으로 어렵다. 70%에 달하는 지지율조차도 그들이 다루는 권력과 권한 앞에서 무력화됐다. 민주주의의 실패로도 읽을 수 있을 법한 사건이다. 앞으로 어떤 정권이 얼마만큼의 지지율을 가지고 엘리트 카르텔에 대한 개혁을 시도하든 그들의 강력한 집단적 저항과 반발을 이겨내지 못할 것이라는 전례가 되었고, 그것은 상당히 합리적인 추정이 될 것이다.

 

 

대체로 개혁은 시민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는다. 역사상 개혁과 계몽은 지식인, 귀족과 같은 소수의 식자층과 계몽군주 같은 이들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시민은 개혁을 요구하고 조건을 정리할 정도로 배우지 못했고, 큰 흐름에 뭉칠 뿐이지 구체적으로 정리될 수 있는 세세한 목적으로 단결하기 어렵다.

 

서문표는 말했다.

 

"백성들이란 일이 이루어지고 나면 즐거워할 수 있을 뿐이지 함께 일을 시작할 생각은 하지 못한다. 지금의 백성들은 비록 나를 증오하겠지만 100년 뒤 그들의 자손은 내 말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시민은 개혁하기 어렵다.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그들이 요구할 때 집행할 수 있는 것 역시 그러한 지성과 능력을 지닌 소수의 엘리트라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민주주의 국가의 경우 그것은 행정부와 의회가 될 것이다. 민의를 반영하여 통치하는 집단이다.

 

무엇이 얼마만큼 잘못되었고, 그걸을 어디까지 어떻게 고쳐야하는가? 이는 수술에 비유되어도 좋을 정도로 정밀함을 요구한다. 시민은 단일한 집단이 아니고 지적으로 우월한 집단이 될 수도 없다. 어떤 주제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느껴도 그 문제를 진단하고 해결할 지성과 통찰이 부족하다. 심지어 그것을 다룰 윤리의식조차 보장할 수 없다. 민중의 손에 이루어졌던 혁명에서 지성과 통찰, 윤리의식을 느낄 수 있는가?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그것은 물리적 산사태와 같은 혁명이 된 것이다.

 

따라서 시민은 개혁을 요구할 수는 있지만 개혁을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시민 스스로는 개혁이 아니라 혁명만 할 수 있다고 봐야 한다. 계몽운동이 식자와 엘리트, 계몽군주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을 다시금 떠올려보자.

 

 

그런데 엘리트 카르텔에게서 우리는 그러한 존재를 기대할 수 있는가? 사법 카르텔에서 그럴 수 있을까? 언론 카르텔에서는? 의료 카르텔에서는?

 

그럴 수 없을 것이다. 검찰이라는 사법 카르텔은 언론 카르텔과 손잡고 개혁자에 대한 칼을 휘둘렀고 그 칼은 너무나도 위험한 것이었다. 한 사람은 물론 한 집안의 사회적, 정치적 생명을 완전히 끊어내어 수년, 어쩌면 평생을 고통 속에 가두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것을 벗어나기 위해선 스스로 칼을 잡고 가해자를 몰살시키거나 아니면 해외로 도망가서 새 삶을 꾸리는 것 외에는 없다. 후자의 경우 그들이 자살하지 않는 한에서 검찰은 조국 일가에게 의도했던 승리를 마무리한 것이다.

 

검찰의 저항은 자신에 대한 언터쳐블한 접근을 요구하는 것과 동시에 그것을 시도하는 자에 대한 강력한 반발과 보복이 예고되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조국 일가는 본보기였다. 필요 이상으로 지나치게 잔혹했고, 그 의미는 제2의 조국이 등장한다면 이렇게 될 것이라는 교훈을 남기려는 것이다. 죄인을 처벌하여 목을 거리에 효수하듯이. 그러한 경고를 알아들을 수 있는 자들은 감히 검찰을 개혁하겠다고 할 수 없을 것이고, 검찰 내부 인원의 배신을 사전에 차단하는 일이 된다. 살인의 가담자들은 소속감과 연대감을 느낀다. 같은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승리의 주역자들 역시 그러한 소속감과 연대감, 성취감을 공유한다.

 

 

그러한 이유로 엘리트 카르텔의 기득권에 위협이 되는 이들은 강력한 반발 아래 제거될 것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싹을 밟고 뿌리 뽑으려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엘리트 카르텔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그들이 한 사회를 지배하게 놔두어야 하는가? 국민들은 그들을 위해 부역하고 세금을 바쳐 주머니를 불리게 하고 하백의 신부로 간택되어야 하는가?

 

남은 선택지는 혁명 뿐일 수밖에 없다. 개혁에 불씨를 당기고 집행할 지도자가 없는 것을 어떡하란 말인가. 엘리트 카르텔에 의해 개혁이라는 선택지가 살해되었다면 남은 선택지가 혁명 뿐일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그게 문제다. 앞서 말했듯이, 혁명은 사회적 비용이 너무 크고 그 과정에서 탈락하는 피해자들이 발생한다. 그러한 비용을 누가 지불할 것이고, 탈락하는 자들은 누가 될 것인가? 엘리트 카르텔의 구성원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러한 비용 대부분은 가장 가진 게 없는 이들이 된다. 가장 많이 탈락하는 자 역시 가진 게 없는 순서로 이루어질 것이다.

 

 

난 혁명을 긍정하는 사람은 아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호오의 문제일 뿐이고, 내 현실의 삶에서 발생하는 피해에 대한 두려움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혁명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사람은 아니다. 혁명은 없는 것이 좋고 개혁으로 해결되는 것이 좋겠지만, 그게 불가능하다면 혁명을 해야할 수밖에 없다. 피해와 손실을 두려워 혁명조차도 반대할 정도로 무책임하지 않을 뿐이다.

 

 

업의 무당과 관리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공유하기 위해 하백의 신부를 뽑았다. 그들의 부정부패는 업 땅의 자원을 끝없이 빨아들이고 소모하게 만들었다. 그 상태가 변하지 않는다면 업 땅은 지속 가능한 체제가 될 수 없기에 필연적으로 멸망할 것이다.

 

서문표는 무당과 관리를 물 속에 집어넣어 죽임으로써 부정부패한 무리과 구조를 한꺼번에 일소했다. 그전까지 업땅의 백성들은 그들에게 저항할 수 없었다. 그들은 혁명을 하지 않았지만 서문표는 체제와 구조를 뒤엎어버리며 혼자서 혁명을 성공시켰다. 그럼에도 백성들은 그들의 이익을 위한 노동에 참여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이 우둔해서 였을까, 아니면 무당과 관리가 지배하던 체제에 순응한 결과 자신을 희생하여 스스로와 공공의 이익에 복무하는 것을 거부하려는 습관이 베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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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은 몸을 망칩니다. 가볍게 컨디션이 안 좋은 것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병은 치료되어야할 것이고 이것이 점점 심해지면 그만큼 건강도 안 좋아져 끝끝내 죽거나 죽음을 갈망하는 고통 속에 살게 되죠.

 

사회에도 질병이 있습니다. 인간이 사회를 구성한 이유는 더 안전한 환경에서 오랫동안 살아남기 위함이죠. 다시 말해, 지속 가능한 발전, 혹은 생존을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부정부패는 그 구성을 구조적인 맥락에서 형해화시키고 무력화시킵니다. 부정부패가 너무 심각한 사회는 반드시 붕괴할 것이고, 그 결과는 멸망이거나 혁명. 둘 중 하나가 되는 것이 역사가 말해온 예시들이죠.

 

 

후진국은 대부분 전근대에서 벗어나지 못하거나, 그 관성이 여전히 크게 남아 있는 사회입니다. 그들은 20세기 초중반부터 근대화를 시작한 경우가 많고, 그 근대는 200~400년의 역사적 경험을 거쳐 현대에 도달한 서구와 다르게 길어봤자 100년 정도에 불과하죠.

 

한 세대의 세계관은 그 시대 내에서 변혁되지 않습니다. 그 시대에 맞는 세계관을 갖추기 마련이고, 이 시대가 지나가면 그들 중 일부만이 새로운 시대에 어느 정도 적응할 뿐 대부분의 세대 구성원들은 새로운 시대에 다음 세대만큼 적응하고 받아들이기 어려워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100년이라는 시간에서 물질 문명이 아무리 발달했다고 해도 전근대적 세계관의 관성을 가진 이들은 여전히 사회에 큰 영향력을 미치기 마련입니다. 그들은(조부 세대), 혹은 그들의 자식 세대는 현 세대의 부모 세대이고, 그들이 살아왔던 시대 역시 현 세대보다 더 전근대적 관성이 남아 있는 후진적 세계였습니다.

 

그리고 전근대 사회는 정치, 제도, 행정 등의 고도화가 이루어지기 전 전통적 사회에 가까웠기 때문에 중앙집권과 문명의 역사가 긴 국가, 이를테면 한국, 중국, 일본, 이란, 터키 등의 국가라 하더라도 근대와 전근대의 간극을 쉽게 극복하기 어렵습니다. 단지 역사적 경험과 기반이 있기에 근대로 접어들기 수월한 면이 있을 뿐이지요. 그러나 그것을 넘어 현대 수준의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사회를 구성하기란 또 다른 이야기가 됩니다.

 

전근대 사회의 통치 수준에서 근현대 국가의 행정력과 치안력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허술하기 때문에 부정부패가 쉽게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회적를 경험하고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이들에게 부정부패는 너무나도 익숙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시대가 변하고 기술이 발전하여 부정부패의 적발과 처벌이 더 쉬워진 시대에도 그 시대의 관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크고 작은 범죄, 부정부패를 너무 가볍게 일으키곤 하죠.

 

 

문제는 이겁니다. 사회의 발전속도가 너무 빨라 전근대적 관성이 힘을 충분히 잃고 전근대 사회의 부정적 요소를 근대 이후에 접어든 사회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게끔 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한국의 발전 속도는 분명 경이로웠고 성공적이었지만, 문제는 전근대적 관성이 지금에까지 뿌리내려 그 악성 현상을 보편화시키는데에도 경이적이고 성공적인 결과를 낳았습니다.

 

한국은 45년 이후에도, 50년대에도, 60년대에도 부정부패가 많았습니다 70년대와 80년대도 말할 것이 없고 90년대는 물론 2000년대, 2010년대, 그리고 지금 2020년대에까지 부정부패가 많습니다.

 

물론 예전에 비해 분명히 부정부패는 줄어들었고, 그렇게 부정부패를 줄여오는 쪽으로 사회의 방향성을 잡고 실천해나갔기 때문에, 아직도 분명히 모자라긴 하지만, 우리는 동남아 국가나 필리핀처럼 발전이 정체되고 성장이 멈출 정도로 부정부패가 사회와 경제의 발전을 발목잡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한창 성장하던 경제개발기에 발생하지 않은 일이고, 오히려 한국 경제가 발목을 잡힌 것은 그 이후, 지금 시대라고 봐야합니다.

 

 

분명 밑에서 발생하는 부정부패는 줄어든 것이 맞습니다. 80~90년대까지만 해도 경찰들이 도로에서 뇌물을 받기도 하였고 여러 업종에서 크고 작은 횡령과 부정부패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래에서 발생하는 부정부패는 사회적 의식의 발전에 따른 사회 구성원들의 요구가 있었고 행정 및 치안력의 발전에 따라 법적 제재가 더 쉬워졌습니다.

 

그러나 위에서 발생하는 부정부패는 극적일 정도의 변화가 있진 않았습니다. 엘리트 카르텔의 부정부패는 예나 지금이나 심각하고, 단지 더 교묘하고 더 세련된 방식으로 진화한 것 뿐입니다. 고도화된 것이죠. 더 높은 수준의 교육를 받은 이들이 더 복잡해진 자본주의 사회의 지도층으로 얻은 경험을 가지고 더 높은 수준으로 발전한 제도상의 헛점을 파해하면서 이전 시대의 부정부패와는 차원이 다르게 부패할 수 있었습니다.

 

쉽게 말해, 더 큰 규모의 부정부패를 더 교묘하게 발생시키는 거죠. 차때기나 돈 봉투 대신 고급 정보를 제공하거나 은퇴 후 고연봉으로 고문, 법무팀, 이사 등으로 데려오는 식으로. 심지어 그마저도 여러번에 나눠서 돈을 얻을 수 있게 하거나 몇년 지나서 제공하는 식으로 증명하기 어렵게 했습니다.

 

엘리트 카르텔에게 부정부패는 말단이나 중간 관리급 공무원이나 기업에서 부정부패가 줄어든 격차만큼 크게 줄어들지 않았죠. 훨씬 교묘하고, 훨씬 비밀스러워진 그들의 내부거래와 뒷거래는 언론에 공개된 것 이상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다면, 전근대적 관성이 남아 부정부패에 익숙하고 당연시 여기던 세대가 그 전근대적 관성을 잃지 않은 채 그 관성을 그들의 다음 세대에게, 그리고 그 다음 세대에게 지속적으로 넘기고 그들 중 대부분이 엘리트 카르텔. 다시 말해 기득권이라는 이름의 사회지도층이라는 점은 이렇게 해석될 수 있습니다.

 

 

부정부패는 사회적 질병인데, 그 질병을 치료하기도 전에 사회적 질서로 뿌리내려 버렸다고요.

 

문제는 이렇게 사회적 질서로 뿌리내리게 된 이후부터는 그 치료가 극히 어렵다는 겁니다. 그 사회적 질서(부패)를 통해 이익을 얻고 특혜를 보는 엘리트 카르텔의 반발이 엄청나기 때문이고, 그 힘은 일개 정치인이나 대통령, 정권 단위에서조차 쉽게 물리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부정부패를 사회적 질서로 만들고 거기에 기생하며 성장동력과 발전여력을 빨아먹게 된 이상 한국의 발전은 다른 질서가 경쟁력을 갖추거나 새롭게 대체하기 전까지 동남아의 후진국처럼 부정부패에 의해 성장이 저해되고 발목이 잡힐 겁니다.

 

그리고 엘리트 카르텔에 의해 유지된 사회적 질서는 지배적인 질서이기 때문에 그 질서에 편입되고자 하는 이들, 그들의 힘과 영향력을 동경하는 이들, 그러한 질서를 받아들이고 익숙하게 여기게된 이들은 중산층과 서민들에게서도 나타나게 될 것이고, 이는 대중 계층에서 상당히 줄어든 부정부패가 다시금 확산될 여지를 암시합니다.

 

그 근간은 바로 계층이동이 경직되고 기존 도덕과 윤리규범이 도전받으며 엘리트 카르텔 역시 산업기의 활발한 변화가 있었던 것과 다르게 이제는 상당히 안정화되었다는 점 때문입니다.

 

이전 시대와 다르게 시간이 갈수록 노력과 성과만으로 성공해서 계층이동이 쉬운 시대가 아니지만 여전히 성공하고 싶은 이들은 더 이상 정직한 방식을 고수하기 어려워졌습니다. 부정한 방식으로라도 성공하고자 하는 이들이 나올 것이고, 그마저도 불가능한 이들은 그저 성공한 이들을 동경하며 그들의 사상과 가치관만을 받아들일 겁니다.

 

 

이런 상황이 개선되지 않고 지속된다면 우리 사회는 고려말, 조선말과 유사한 상태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부정부패에 발전이 발목잡힌 동남아, 아프리카, 남미 등의 후진국은 그 형태와 구성만 다를 뿐 부정부패라는 형식은 같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한국의 차이는 개발기에 발생했느냐, 그 개발기를 넘은 이후에 발생했느냐의 시간상의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아마 이는 강력한 중앙집권, 경제발전에 대한 강력한 열망, 구조적으로 활발했던 계층이동과 탈락, 민주화와 독재라는 체제상 이념적 충돌이 오랜 시간 동안 주요 의제를 장악했다는 점에 의했을 가능성을 추정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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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근대식 언론이 시작된 것은 구한말 대한제국-일제시기입니다. 그리고 이 시기는 여러 이데올로기가 경쟁하던 시기였고, 식민지배와 주권이라는 두 가치의 충돌이 있었던 때이기도 했으며, 내외적 헤게모니를 차지하기 위한 각축장이기도 했죠.

 

정치와 외교, 군사는 국가의 일이지만 언론은 민간에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다만 그 영향력이 너무 거대하기에 권력자들은 대중선전/통제 및 프레임 선점을 용이하게 해주는 언론에 대한 다양한 방식의 영향력 행사가 있어왔고 그 방식은 탄압과 처벌이라는 강경책과 돈을 입에 물려주고 내부자로 만들어주는 온건책으로 나뉘죠.

 

 

일제는 식민지 조선의 피지배민들이 일제에 순응하고 복종하길 바랬고 그걸 방해하는 민족지, 정론지에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탄압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말 잘듣는 언론에겐 상을 주기도 했죠. 이후 전쟁 때에도, 이후 독재시절에도 언론은 권력자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어떤 언론들은 대한민국 건국 이후 단 한번도 언론의 역할을 수행해본 적 없는 선동창구였을 뿐이죠.

 

독재시기에 부당함에 저항하고 진실을 찾으며 비판을 할 줄 알았던 기자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도태시켰습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역도태지만, 그들 입장에선 아닐 도태로 인해 저널리즘을 할 줄 알고 그러한 가치를 이해하는 기자, 언론사는 그 힘을 잃어가고 말 잘 듣고 잘 통하는 언론과 언론인들이 한국 주류 언론기조를 차지하기에 이르렀죠.

 

 

독재 시절에는 힘으로 찍어 누르는 방식을 자주 썼고, 지금도 후진국에서는 그런 식으로 언론을 탄압하고 언론인을 죽이거나 '착하게' 만들지만 어느 정도 그러한 세태에서 벗어난 뒤에는 그보다 훨씬 잘 먹히는 방식을 씁니다. 조용히 하라고 입에 돈을 물려주는 거죠.

 

사람 보내서 납치하고 고문하거나 협박하는 방식은 그러한 방식이 통할 수 있는 질서가 유지될 때나 가능한 방법이고, 그러한 방식은 제나름의 리스크가 있기 때문에 그러한 리스크를 무효화시키거나 어느 정도 감당 가능한 체제에서나 할 수 있는 겁니다.

 

당연히 민주화와 같은 체제, 질서의 변화에는 또 다른 방식이 필요한 거고, 기존에 있었던, 튀는 놈이 아니라 말 잘 듣는 언론을 길들이고 우리편으로 만들었던 안정적인 방식을 확대하는 게 효율적인 방식이 되었죠. 당장 나가는 돈은 아까울 수 있지만 옛적 방식을 썼다 발각됐을 때 발생하는 리스크는, 그걸 덮기 위해 써야할 자본은 일개 개인에게 물려주는 돈에 비하면 푼돈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판단과 평가는 선점되는 개념에 따르는 면이 큽니다. 어떠한 방향성을 잡아주고 어떠한 개념 요소를 짚어주는 것만으로도 생각의 흐름과 방향성, 그 판단의 중점이 되는 포인트가 잡히고 그렇게 흘러버리죠. 그렇기 때문에 언론을 장악하는 게 중요할 수밖에 없는 건 민주주의 사회일 때 더더욱 그렇습니다.

 

반대로 말하자면 그러한 프레임을 잡을 수 있고 선점할 수 있는 언론을 손에 넣는 건 권력자에게 굉장히 중요한, 어떤 면에서는 거의 1순위에 가까울 일이라는 거고요.

 

그렇다고 언론이 정치권력보다 더 강하거나, 언론이 정치인과 정당에게 갑의 위치에 있느냐 하면, 그건 아닙니다. 언론들 말처럼 우리가 정권을 만드네 어쩌네 하는 건 선거철 때 이야기고, 선거가 끝나면 정치인들 목이 뻣뻣해지는 것처럼 언론 역시 그에 굽힐 수밖에 없습니다. 정치권력이 어디에서 기인하고 누구 손에 있느냐는 권력의 정당성과 실질적 활용 범위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이유이고, 언론과 재계의 힘은 언제나 정치권력보다 한 수 아래일 수밖에 없는 구조를 지니죠.

 

 

그렇기에 언론은 권력자(정치, 경제 영역 모두)에게 밉보여선 안 되고, 가장 좋은 방법은 그들과 친구가 되는 겁니다. 혼맥으로 이어지는 것도 좋고 인맥이나 학벌로 이어지는 것도 좋죠. 민주주의에선 권력투쟁이 자본은 물론이고 법적 제도(선거 등)와 이미지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 법적 정당성에 합법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검찰 등 법 권력과 친해지는 것 역시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리고 권력자들은 어떤 영역에서든 대중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언론과 친해져서 나쁠 게 전혀 없고요. 정치인들은 자기 이미지를 좋게 만들어주고 불리한 부분을 축소해줄 수 있으며, 적대 진영에 불리한 이미지를 형성시켜줄 수 있고 경제인들은 자기 기업과 제품에 돈으로 환산되는 인식을 주입해줄 수 있으며, 검찰은 정치, 경제권력과 붙어먹으며 기소하고 처벌할 대상에 대한 대중의 반발을 줄여줄 수 있게 마사지해줄 수 있습니다.

 

 

그럼 언론은 어떻게 이익을 얻느냐, 정치인이 됐든 경제인이 됐든 검찰이 됐든 고급 정보를 가지고 있거나 그것을 생산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과 인맥관계를 맺고 그들과 인터뷰, 취재, 그마저도 아니라면 (폐쇄적인) 식사 자리에서 이런 저런 정보들을 주고 받는 겁니다. 이번에 어느 지역에 어떤 사업을 하게 되어서 땅값이 오를 거라든가, 이번에 기존 사업부 몇개를 접을 거니까 그쪽 관련 주식 빼놓으라던가, 누구누구 기소해서 어떻게 처리할 생각이고 이런 정보를 너한테만 흘려줄테니 기사화시켜라. 하는 식으로.

 

옛날에는 이런 이권거래가 술자리에서 직접적으로 오가는 돈이었다면 지금은 증거 없는 정보를 전달해주며 합법적으로 이익을 얻을 수 있게 해주는 식으로 바뀌기도 했고요.

 

그렇게 만들어진 엘리트 카르텔에서 언론의 역할은 결코 주인은 될 수 없겠지만 권력자가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종놈이 되는 건 아닙니다. 대체로 을의 입장에는 있지만 힘 좀 쓰는 을의 입장에 가까울 겁니다. 언론사란 결국 기업이고 그들은 투자를 받아야하는데, 기업의 광고비는 매우 중요한 수익요소이고, 고급 정보를 먼저 접하거나 만들어내는 위치에 있는 이들, 엘리트와의 접점이 끊어져 인맥을 잃은 기자 개인의 중요성은 떨어져 쓸모가 없어집니다.

 

 

좀 더 큰 그림으로 이 문제를 단순화시켜 그려보면 이렇습니다.

 

언론은 탄생 순간부터 강력한 정치권력에게 통제, 탄압되었고 거기에 순종한 이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이권을 받았으며, 경제권력은 경제적 이유로 언론을 활용해야 했고 마찬가지로 돈, 혹은 돈이 되는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언론을 길들였습니다.

 

언론은 그러한 이들과 담합하며 이익을 챙겼고 이건 언론과 기자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관계였고요. 이러한 관계는 언론과 정, 재계라는 껍데기 때문에 특수해보일 뿐, 이권이 얽힌 업계간의 담합이라는 뻔하고 흔한 부패일 뿐입니다.

 

여기서 저널리즘은 소수의 언론인들이 추종하는 가치일 뿐이고, 때때로 언론 껀덕지를 하기 위해 몇몇 기자와 평론을 할 때나 등장하는 것이지, 기본적으로 이익을 추구하는 기업의 자본주의적 원칙보다 우선되지 않고 그것으로 명성을 쌓지도, 권위를 형성하지도 않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길들여지고 형성된 한국 언론 환경은 당연히 저널리즘이라는 게 있었고 지금도 남아 있는 몇몇 서구 선진국과 비교하면 당연히 민망할 정도로, 엄밀히 말해서 한국의 저널리즘은 민주화 이후 자본과 권력에 의해 적지 않게 해체되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이는 세월호나 이태원 참사 때 보여주는 한국 언론과 타국 언론이 어느 쪽에 더 포커스를 맞추었느냐를 보았을 때 쉽게 판가름 될 수 있습니다. 정치인과 관료들이 사건을 정치화시키기 위해 청탁, 요구했을 때 언론은 자기 이익을 챙겨주는 이들이 원하는 바를 실행에 옮겼고, 사건의 본질을 흐리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사람의 죽음을 보상금이라는 돈으로 계산하려는 습성은 그들의 천박한 천민자본주의적 관점에서도 해석될 수 있지만, 그들에게 사건의 본질과 진실을 추구하는 저널리즘보단 돈이라는 자본을 더 우선시하는 가치관의 발로이기도 합니다.

 

반대로 해외 언론은 관심의 포커스를 피해자와 유족들에게 맞췄고, 돈보다 사람에 맞췄죠. 이것은 자국 내에서 발생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이해관계가 없다는 점도 있었겠지만, 세월호 당시 한국 언론이 보상금, 보험금을 얼마나 받을 수 있느냐를 계산하고 있을 때 일본 언론에선 수온에 따라 생존시간이 얼마나 되느냐를 계산하고 있었습니다.

 

이렇듯 저널리즘이 부재한 언론 환경에서 중요한 건 이익을 주고 받는 카르텔의 한 부분에 속하는 것이지 진실을 밝히고 본질을 파악하며, 그러한 정보와 의견을 대중에게 전달하는 게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언론)이 가진 강점(프레임 선점, 선동)을 스스로의 이익과 카르텔의 이익을 위해 활용하며 경제활동을 하는 거죠.

 

 

저널리즘을 추종하고, 할 줄 알았던 언론사나 기자들은 역도태되어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게 되었거나 그 영향력이 매우 약한데 반해, 지배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거대 언론사, 기성 언론사들은 그들의 입장과 이익에 따라 다른 논조를 가질 뿐 기본적으로 엘리트 카르텔과 얽혀 있거나 그 자체로 엘리트 카르텔의 일부입니다.

 

일제시대 때 천황폐하 만세를, 한국전쟁 때는 김일성 장군 만세를, 독재시기엔 박, 전 장군님께 철저히 순종하고 복종하던 언론과 그 아류, 혹은 복제, 혹은 친인척인 언론들이 한국 언론 환경에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게 한국의 언론 현실입니다. 그들은 힘의 논리와 그 힘에서 나오는 이익을 따르는 것이고 서구에서 이해되는 저널리즘과는 거리가 멉니다.

 

 

설령 저널리즘을 위해 비판성을 잃지 않은 이들은 어떻게든 따돌려지기 마련입니다. 직장에서 따돌려지고 한직으로 밀려나고 데스크에서 안 받아주고 수정 명령 내리고 때로는 내가 쓴 글을 다른 사람이 수정해서 논조가 바뀐 채로 올라가기도 하죠. 취재를 하거나 정보를 제공받을 수 있는 사람들은 만나주지 않고 정보를 얻을 수 없으니 아무리 발로 뛰고 찾아가도 제대로된 기사를 쓸 수가 없게 됩니다.

 

그러다보면 해고가 되든 기사를 실어주는 곳이 없어지든 하게 되는 법이죠. 그렇게 살기 싫은 사람들은 애초에 돈 주는 주인님들 시키는데로 하거나 결국 굽히고 굴복하는 이들 역시 주인님이 물려준 돈의 달달함에 입을 다물고 시키는데로 하게 됩니다. 뭐든 한번이 어렵지 두번이 어려운 게 아니라고, 한번 먹고 사는 게 어려워 좋게 좋게 달래주고 회유하는 과장님 말 듣고 한번 돈뭉치 입에 물어보면 다음엔 더 쉬워지죠.

 

삼성을 그렇게 비판했던 기자가 결국 이재용 가방 들어주는 건 언론에게 보여주는 메시지였고요. 그 양심을 저버리고 굴복했지만 여전히 떳떳하고는 싶어하는, 굴욕과 자존심이 충돌하는 복잡한 표정은 시사하는 바가 컸습니다. 일말의 양심이 남아 있는 사람들은 개새끼짓을 하고 있어도 자기가 개새끼라는 걸 알고 있고 그건 표정을 통해 드러나기 마련이거든요.

 

 

반대로 돈주는 쪽에 붙어서 돈벌겠다는 사람들은 잘 먹고 잘 삽니다. 기자 개인에게 줄 수 있는 돈은 그 기자가 써주는 기사가 가져다주는 이익보다 훨씬 적은 편이거든요. 이는 옛 시절보다 기자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자본의 폭이 커졌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물려줄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언론을 장악해놓으면 그 자체로 어마어마한 매리트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그에 대한 투자는 결코 아까운 것도 아닙니다.

 

그런 투자를 받는 기자와 언론사는 돈주는 물주들, 정보 제공해주는 이들에게 충성하는 거고 그들이 원하는 기자를 외주 받아 써주는 노동의 대가로 다양한 향응을 주고 받는 야합 관계가 됩니다. 이들은 자기들의 영향력과 힘이 어떠한지 잘 알고 있고, 그들이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이 대단한 사람들이 많다보니 자기가 그들과 만날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 가지고 자기들이 대단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기자들의 오만함과 허영심, 꼴 같잖은 자존심으로 표출되는데, 대표적으로 자신들이 지식인이라고 착각하고 있고 사회에 엄청난 힘을 발휘하는 지배층 내지는 그에 준하는 기득권이라고 생각하는 게 그렇습니다. 언론이 기득권이 아니라는 것도 아니고, 언론의 영향력이 그만큼 강력한 건 사실이지만 그 개개인은 언론사의 중역에 속하는 진짜 주인을 제외하면 그저 일벌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착각입니다.

 

그러나 그 착각은 엘리트 카르텔을 유지하고 그에 속하여 충실하게 일해주는 원동력의 한 축을 담당한다는 점에서 그 기득권의 유지 발전을 위한 충실한 행동력에 강력한 동인이 되어줍니다.

 

다른 걸 다 떠나서 경제인들이, 정치인들이 주는 크고 작은 이익들은 일개 기자 입장에서 너무나도 달달하죠.

 

이런 구조적인 조건 속에서 언론 환경은 저널리즘이 아닌 자본주의적 원칙에 충실한 사업이자 장사가 되었습니다. 한국 사회의 일부는 여전히 전근대적 가치관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법과 도덕, 윤리와 같은 보편적이고 지배적이어야 할 원칙과 규칙보다 나와 남의 구분을 우선시하여 나와 내가 속하는 집단의 식구에겐 특혜와 이익을, 남과 남이 속한 집단에겐 차별과 불평등으로 작동하기에 언론 역시 법과 정의, 평등, 공정과 같은 보편적이고 객관적으로 올바른 가치 기준보다 우리 식구와 남을 구분하는 것을 우선하고 그 구분에 따라 언론 권력을 행사합니다.

 

내게 돈 물려주고 정보 제공해주는 분들의 이권과 편의에 언론 권력을 행사하고, 그들을 비판하고 자신을 공격하는 이들에게 언론 권력의 온도와 논조는 뚜렷하게, 때때로 교묘하게 차별적이죠. 결코 공정하지도, 평등하지도 않은 기준으로 작동하는 언론 권력의 사회적 영향력은 그러한 저열한 언론의 태도를 직시하지 못하고 그럴 여유도 없는 대중들에게 굉장한 효과를 낳고요.

 

그렇게 정의와 불의가 뒤집히고 법조 카르텔과 정치 정당의 이중적인 모습을 보편적 원칙보다 개별적 사안으로 접근시켜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라고 인식시키며 사회적 갈등을 봉합시키거나 줄이기는커녕 오히려 조장하고 발생시키기도 하며 특정 책임집단에게서 책임을 형해화시키기도 하는 등 정의와 같은 가치는 물론 법적인 영역에서조차 불평등하고 불공정하게 작동하는 것이 한국 언론 지형입니다.

 

이러한 언론 환경은 식민지 시절부터 권력을 휘두르는 위정자들에 의해 형성되고 길들여진 것도 있지만 그것에 적응하고 그러한 가치를 추구하던 기회주의자들이 그 환경에 적응하면서, 그리고 그들에 반발한 언론과 기자들이 역도태되면서 만들어진 생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민주화가 이루어지고 수십년이 지나 21세기가 되고 이전 시대와 비교할 수 없게 발달한 사회가 된 대한민국에서 기존 부패의 영역과 구조 역시 더 교묘하고 세련된 방식으로 고도화되었고, 기득권과 언론의 영합, 야합으로 만들어진 엘리트 카르텔 역시 고도화되었습니다.

 

앞서 말했듯, 직접 돈봉투를 찔러주는 것보다 정보를 제공해줌으로써 합법적으로 이익을 얻어낼 수 있게 하고, 그것은 증거를 남기지 않기에 증인과 증언이 있다해도 아는 검사님과 몇다리 건너서 배정된 착한 판사님을 통해 얼마든지 무혐의, 운이 나빠봐야 집행유예를(그것도 다른 죄목으로)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훨씬 교묘하고, 더 세련된 방식으로 부패의 진화가 이루어진 것이죠.

 

문제는, 이걸 어떻게 일소할 수 있느냐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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