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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며,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 - E.Kant
by Ko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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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22.12.27
    자본주의의 한계에 대한 단상.
  2. 2022.10.29
    공산주의는 왜 실패했는가.
  3. 2022.09.15
    소련식 적극적 공작과 가치관 선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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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는 또 다른 한계점을 맞이하는가.
https://cafe.daum.net/Europa/38b2/4516

처음 자본주의에 가장 심대한 위협을 줬던 사회주의, 공산주의가 등장했던 때와 유사한 상황에 치달아가는 게 아닌가 싶은데, 문제는 공산주의는 소련의 멸망과 함께 이미 실패한 체제가 되었고, 이에 대한 도전이나 견제가 가능한 대안, 혹은 경쟁적 이념은 등장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세계는 명실상부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세상이나 마찬가지가 되었고요.
 
즉, 자본주의는 현재 견제할만한 사상이 없습니다. 자본주의는 사회주의, 공산주의라는 경쟁자 때문에라도 살아남기 위해 사회주의적 요소들을 받아들였습니다. 그게 아니더라도 자유주의나 프로테스탄트적이지 않은 전통적 기독교 윤리, 인본주의, 애국심, 참정권과 함께 이어지는 대다수 노동자들의 요구 등 다양한 관점과 사유로 노동법이나 노동환경은 점차 나아졌고 자본주의는 지나친 비인간성이 줄어들어 현재와 같은 체제에 이르게 됐습니다.

 

 

저번 글에서 언급했듯, 자본주의는 공산주의라는 경쟁 체제가 사라지고 자본주의의 폭주를 억누르고 견제할만한 방법이 없어졌습니다. 소련이 붕괴한 이후 자본주의는 세계를 지배하는 사상이자 체제가 되었고 자본주의가 아닌 체제들은 자본주의에 비해 경쟁력이 없습니다. 

 

독점 시장은 언제나 독점자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됩니다. 얼마나 물량을 풀 것인지, 개발에 얼마나 투자할 것인지, 가격을 얼마로 책정할 것인지 등등 독점적 지위는 그 자체로 사는 사람이 아쉽게 만드는 위치이죠. 그것은 체제 역시도 다르지 않습니다. 자본주의는 정치체제가 아닌 경제체제이고, 그 핵심원리상 패권을 추구하게 설계되어 있습니다.

 

더 많은 부를 획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그 방법은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세계의 정치, 사회, 문화적 규칙으로 게임을 하죠.

 

전근대 사회의 체면과 탐욕 문제.
https://cafe.daum.net/Europa/38b2/4528

 
11.
그들은 결코 자신의 탐욕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욕심을 가지는 게 무엇이 문제냐고 할 것이다. 욕심은 발전의 자양분이 되고 충분히 추구할 수 있는 것이다. 욕망은 욕망되어야 하고 그것이 법을 어기거나 비도덕적이지 않는 한 잘못된 게 아니다.
 
그러나 탐욕과 욕심이 죄악으로 여겨지는 이유는 그것이 무한하기 때문이며 절제될 수 없는 속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충분히 먹고 살 수 있으면서도 더 큰 이익을 얻고자 했던 파홈은 더 많은 땅을 얻기 위해 탐욕을 부리다 악마의 의도대로 죽게 되었다. 그가 중간에 절제했다면 더 넓고 훨씬 좋은 땅을 얻은 채 오랫동안 잘 먹고 잘 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종래에 그가 얻은 땅은 그가 누울 3아르신 뿐이었다.
 
파홈의 이야기는 톨스토이의 기독교적 교훈이 담긴 이야기일 뿐이지 현실세계의 당위나 운명으로 작동하지는 않는다. 부정한 사회일수록, 부정한 정치권력이 지배하는 사회일수록 파홈의 사례는 줄어든다. 정부가 부정하고 악한 이들에게 적절한 처벌과 규제를 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제는 그 자체로 공유지이다. 자원이 순환되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유한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에는 한계가 있고, 자원 역시 한계가 있다. 이것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자원은 한계가 존재하기에 순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본의 동맥경화가 찾아오면 자본주의는 지속 가능성에 한계가 찾아온다. 누군가 자원의 절대다수를 독점하고 분배하지 않는다면 모두가 고사할 것이다. 단지 가진 사람이 더 늦을 뿐이다. 그마저도 아무런 폭력도, 외부세계로의 도피가 없다는 전제 하의 이야기일 뿐이다. 대체로 그러한 한계 상황에서는 혁명, 쿠데타, 정부전복, 심지어 외침 등 다양한 방식의 폭력이 체제에 끝장을 내기 마련이다.

 

문제는 탐욕입니다. 욕심은 모든 인간이 다 가지고 있는 생물학적 본능이고 이것은 생존에 유리하게 해주는 동력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욕심이 지나쳐 탐욕이 되는 것은 공동체의 발전에 부정적인 힘을 발생시키죠. 언급했듯, 탐욕은 무한하며 절제될 수 없기 때문에 어느 문명 어느 사회든 무한하게 추구하여 공동체를 파괴할 수 있는 것들을 죄라 불렀고, 기독교의 칠죄종이나 불교의 오욕칠정이 그러한 것입니다.

 

본능적이기에 순수하고 자연스러운 욕구가 욕망이 되고, 그것이 지나쳐 탐욕이 됩니다. 그러한 탐욕은 끝없이 추구되며 자원과 인신을 무한하게 빨아들이죠. 그리고 자원의 독점은 올바른 곳에 적절하게 사용되지 못하기에 공동체를 파괴하게 만듭니다. 무한하게 자원이 제공되지 않는 한 순환하지 않는 자원은 그 양이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집단의 유지를 위해 소모되지 않기에 문제거리가 됩니다.

 

 

이러한 탐욕은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도덕적인 것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부를 얻는 것이 목적인 체제이기 때문이죠. 그러한 욕망이 발전과 경제성장을 가져온다고 말하고 이것은 전혀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러한 탐욕은 소수의 부자들이 막대한 재산을 축적하게 만들었고 순환하지 않는 자원은 분배되지 않기에 자본의 동맥경화를 발생시키고 있죠. 정상적인 자본의 순환이 이루어졌다면 물가와 임금은 지금과 다른 수치를 보였을 것이며 경제문제로 나타나는, 이 사이에서 발생하는 괴리 역시 지금보다 훨씬 낮은 수준의 사회적 스트레스를 유발했겠지요.

 

자본주의는 최대한의 부를 추구하는 체제이고 인간은 언제나 더 효율적인 방법을 찾죠. 그러나 그 효율적인 방법은 규칙에 대한 도전 역시도 시도하게 만들고 이는 자본을 부정한 방법으로 축적하거나 한계 이상으로 추구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자본주의의 모순이 발생하는 거죠.

 

더 많은 부를 추구하는 체제이나, 그것이 일정 임계점을 넘어갈 경우 부가 순환하지 않고 경제가 성장하지 않거나 둔화되거나, 오히려 후퇴하면서 자본주의의 유지를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탐욕이 지나칠 경우 공동체, 집단은 붕괴하는데 이것은 자본주의라고 해서 다를 게 없습니다.

 

단지 자본주의는 그것을 억제하지 않고 최대한으로 긍정했을 뿐입니다. 사람의 탐욕을 통제하는 경제체제 중 공산주의는 최대한 억제하는 식이었다면 자본주의는 그 반대였을 뿐이죠. 그리고 승리한 것은 자본주의보다 더 큰 한계와 모순을 지녔던 공산주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본주의가 존재하는 모든 경제체제 중 유일하게 영구적이며 항구적인 체제라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닐 뿐이죠.

 

 

자본주의에는 한계점이 존재합니다. 커다란 구의 형태로 존재하며, 이 이상 부는 성장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인구, 자원, 기술 등 다양한 이유로 발생하는 것이며, 이 한계점은 현 지구적 인류의 상황에 기초합니다. 인구는 소비할 고객이며 생산할 노동자이고, 기술은 그것의 속도와 규모를 확장시킵니다. 자원은 소비하고 생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자본, 돈으로 환산 가능한 가치들입니다.

 

다르게 말하자면 그 한계점에 도달할 정도로 인구, 기술, 자원의 혁신 따위가 없다면 그 21세기 이후 급격하게 확장되는 경제성장은 언젠가, 어쩌면 머지않아 그 한계점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한계점을 최대한 유예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먼저, 그 한계점은 한계 영역이라는 이름으로 커다란 구의 형태로 그려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부의 규모에 따라 크고 작은 구들이 존재하고요. 소수의 부자가 더 많은 부를 소유하고 있다면 자본주의의 한계 영역 내 적지 않은 영역을 차지하고 있을 겁니다.

 

그리고 대다수의 중산층, 서민, 빈자들은 그보다 훨씬 작은 구로 나머지 영역을 차지하고 있을 것이고요. 문제는 전 지구상 보유하고 있는 부의 양은 한정되고 있고 한계영역이 더 넓어지지 않는 한 최대한 부를 추구한 부자들에 의해 영역 내 거대 구형들은 더 크기를 키우겠지만 반대로 중산층과 서민들의 크기는 더 작아지며 영역이 줄어들 것이라는 겁니다.

 

점차 이 공간들은 좁아지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빈 공간들이 남아 있을 겁니다. 이론상 그 부분들은 더 작은 구체로 채워질 수 있는 부분이지만 커다란 구는 부피 대비 표면적이 적기 때문에 도형의 공간을 채운다는 목적에선 비효율적인 빈 공간이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해결할 방법은 더 큰 구체들을 쪼개고 쪼개어 부피를 줄이는 대신 표면적을 늘리는 식으로 한계점을 유예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더 나은 기술, 더 나은 합의, 더 나은 체제를 발생시킬 여유가 될 것이고요. 현실의 대다수 개인들에게도 부정적인 내용은 아닐 겁니다. 다만, 현행 자본주의가 추구하는 방향성과 다르며 오히려 공산주의에 가까운 개념으로 도달한다는 점이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방식으로든 자본주의의 한계점을 더욱 확장시키거나 개선하지 않으면 찾아올 미래 중 하나가 될 것이라 봅니다. 그때가 된다면 자신의 부를 나누기보단 그러한 한계에 도전하는 이들에 의해 자본주의 자체가 붕괴할 수 있는 것 역시 가능성 있는 미래 중 하나라고 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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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많은 사람들이 공산주의의 실패에 대해 사람의 욕심을 고려하지 않았다거나 지나치게 이상적이었다는 등의 피상적인 접근으로 분석하곤 한다. 이것은 관련 지식이 없는 사람들에 대한 가장 대표적이고 쉬운 설명이 될 수는 있으나 진실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이다.

 

백년전 사람들이 바보도 아니고 욕심에 대한 이해가 없을 수도 없고, 지나치게 이상적인 체제라면 반세기 이상 유지될 수가 없다. 이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이 글에선 어째서 공산주의가 실패했는지에 대해 개괄적으로 서술할 것이다.

 

 

자본주의의 시작과 예견된 한계.

인간 노동은 기계로 대체되었다. 기존 수공예 숙련공들은 기계의 등장에 따라 노동의 시장가치가 줄어들었고, 저임금 노동자에 의해 완성되는 면직물들은 더 싸게, 더 많이 팔려나갔다. 지금은 일부 영역에 불과하겠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 더 많은 노동은 기계로 대체될 것이다.

 

문제는 바로 그 부분에 있었다. 인간 노동이 기계로 대체되어간다면, 그리고 돈을 받지 않고 생산하는 기계를 통해 부를 축적한다면 노동자는 더 이상 설 자리가 없어진다. 직업이 없어졌기에 돈을 벌 수 없게 되고, 자본가는 그들의 주머니에 얼마나 많은 자원이 있든 살아남기 위해 소비하는 것으로 끝없이 자본을 축적할 것이다.

 

자본주의의 모순이다. 자본주의는 효율을 위해 비용을 줄이고 최대의 이익을 추구한다. 인간노동보다 기계가 더 효율적이고 더 많이 생산하며, 더 적은 비용을 발생시킨다면 기꺼이 그렇게 할 것이다. 바로 이 지점이 문제가 된다. 노동자, 대부분의 사람들이 직업을 가질 수 없어 돈을 벌 수 없다면 어떻게 소비를 한단 말인가? 노동자가 소비할 수 없는 시점이 바로 기업-자본가의 사망선고점과 같다.

 

자본주의에서 자원은 순환해야하고, 노동자가 돈을 벌면 그것을 통해 소비하며 경제는 발전한다. 그러나 노동자가 돈을 벌 수 없어 소비하지 못한다면 그들은 죽게 될 것이고, 소비할 사람이 없어 팔 수 없는 환경에선 자본가 역시 고사하게 된다.

 

그리고 당시 노동에 대한 인식과 그 권리보장이 처참했을 시기 어떤 사람들에게 그 미래는 그리 머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자본주의는 굉장한 가능성을 내포했지만 본질적 모순에 의해 필연적으로 종말이 찾아올 수밖에 없는 체제였던 것이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마르크스의 등장.

산업혁명기 노동의 가치는 낮았다. 노동자는 많았고 노동법과 같은 권리는 미비했다. 5살도 채 되지 않은 아이들이 돈을 벌기 위해 발암물질을 들이키며 굴뚝을 닦았고 10살도 채 되지 않은 아이들의 손가락과 팔뚝이 기계에 껴서 잘려나가고 비틀렸다.

 

누군가 일하다 죽는다해도 책임지는 사람은 없었고, 모든 책임은 노동자 개인의 과실이 되었다. 언제 어떻게든 해고해도 문제되지 않았고 비인간적인 노동환경은 끔찍하다못해 이전 시대 농노들보다 비참했다.

 

분명 시대는 발전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더욱 비참하고 잔혹한 삶을 살게 되었다. 이것에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낀 사람들이 있었다. 노동자들은 이러한 상황에 불만을 터뜨리며 자본가와 의회, 정부에 요구했고 그들의 방해와 강경대응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권리를 조금씩 얻어나갔다.

 

그리고 이런 자본주의의 비인간성과 모순을 통찰한 이들이 몇 있었다. 프로이센의 카를 마르크스가 그러했다.

 

마르크스는 기존 공상적이거나 이상적이었던 사회주의를 비판하며 더 현실적이고 더 과학적인 공산주의 이론을 전개했다. 철학의 대가였던 그는 자본주의를 분석하고 설명했으며 그 한계 역시 지적했다. 그는 자본주의가 발달한 끝에 공산주의로 도달할 것이라 말했고, 그 과정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핵심은 이것이다. 비인간적인 노동환경과 불합리한 부익부 빈익빈을 기본으로 하는 체제는 모순적이기에 반드시 무너질 수밖에 없고, 그러한 상황에 반발한 이들과 그러한 모순을 통찰한 이들에게 자본주의는 매력적인 체제가 아니었다. 따라서 그것을 대체할 무언가가 필요했다는 것이다. 공산주의가 그러했고, 이것에 호응했던 노동자-혁명가들이 그러했다.

 

 

혁명의 시대.

레닌은 러시아에 혁명을 성공시켰다. 세계 최초의 노동자 국가가 건국된 것이다. 그 이전에도 수많은 혁명가들이 자본주의 세계를 무너뜨리고 사회주의, 공산주의 세계를 만들려 했고, 파리 코뮌 역시 그러했다. 이들은 실패했지만 레닌은 성공했다.

 

이후로도 세계의 수많은 국가들에게 공산주의 혁명이 발생했다. 그러나 이 나라들이 어떤 곳인지 찾아본다면 이상한 사실을 하나 발견할 수 있다.

 

혁명이 발생하고 성공한 국가 중, 자본주의가 발전한 국가는 없었다는 것을.

 

실제로 자본주의가 발달했던 서유럽, 중부유럽과 북미에서 공산주의 세력은 있었지만 힘을 쓰지 못했다. 이것을 이미 체제를 장악한 자본주의가 경쟁체제의 성장과 발전을 억제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고, 단순히 체제의 경쟁력 면에서 자본주의보다 우위에 있을만한 것이 없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둘 다 맞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후진국에서 공산주의가 성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후진국민들에게 공산주의는 상당히 매력적인 부분이 있었을 것이다.

 

 

공산주의는 어떻게 후진국의 체제가 되었을까.

후진국들은 대체로 아시아와 남미, 아프리카와 같은 제3세계의 국가들이었다. 다르게 말하자면 서구의 밖이었고, 자본주의는커녕 유럽 문명 기준 중근세를 벗어나지 못한 국가들이었다.

 

그런 국가들은 제국주의 당시 서구의 침략을 받았다. 그리고 공산주의는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을 주장했던 사상이었고 그들을 신음하게 만들었던 자본주의를 거부하는 것이었다.

 

후진국 구성원들은 자본주의를 제대로 경험해본 적이 없고 교육수준이 낮았다. 이들에게 상상력의 발휘는 직접적이고 간단해야했다. 가령, 모두 잘먹고 잘 사는 게 뭐가 나빠?와 같은 문장은 그들에게 쉽게 이해되고 동의할 수 있는 개념일 것이다.

 

이러한 세계에서 인권은 머나먼 개념에 가까웠다. 전통적이고 관습적인 도덕과 규칙들은 있었지만 그만큼 폭력과 불합리 역시 만연했다. 그들의 세계는 협소했으며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선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다. 그런 곳에서 자본주의는 깊게 뿌리내리기 어려웠으며 기존 체제보다 우월하다 말하기 어려웠다. 자본주의가 처음 발흥했던 영국의 노동자들은 얼마나 비참했는가.

 

노동권 역시 서구와 비서구의 수준이 다르듯이, 20세기 초중반 혁명의 불길이 올랐던 국가들에게도 노동자들에게 권리는 산업혁명기 영국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렇다면 언제나 약자였던 그들에게, 아직 전근대적 관성하에 권력자에게 죽창을 휘두르던 민란과 반란의 인상이 남아있던 노동자들에게 공산주의가 말하는 것들이 어떻게 들렸을까. 전근대 지주보다 더 가혹하게 노동자를 다루는 공장주와 해가 뜨고나서 일을 하고 해가 지기 전에 돌아오던 농경 시절보다 더 통제되는 환경에서 시간은커녕 분 단위로 노동을 다루는 공장은 더욱 힘들었을 것이다.

 

논과 밭에서 그들은 그 스스로가 관리자이자 노동자였다. 자영농의 경우 그 스스로가 주인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농사를 지으며 스스로 해왔고 스스로 노력하고 노동을 조절해왔다. 오랫동안 농사해오며 배우고 깨우치고 알게 되는 것들도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공장에서는 단순 노동자 한명에 불과했을 것이고 스스로가 주인인 것도 아니고 무언가를 한다는 느낌조차 없었다. 단지 정해진 공정대로 반복해서 움직일 뿐이다. 더 나을 게 없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지독하고 비참한 환경에서 누군가 찾아와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이건 뭔가 잘못됐어. 뭔가 바뀌어야 해. 우리의 권리를 찾고 정당한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그렇게 기본적인 노동권과 사상, 공산주의 이론을 딱 필요한 만큼만 가르치고 지하조직을 만드는 것이다. 노동에 대한 인식과 실제 현실이 처참할수록 공산주의는 자본주의보다 매력적이게 들릴 것이다. 그들에게 공산주의 혁명은 좀 더 조직화되고 좀 더 큰 대의를 담은 민란과 다를 바 없었다. 지역 관리가 부정부패해서 백성들이 먹고 살기 어려울 때 들고 일어나는 것과 큰 차이가 없었던.

 

 

왜 실패했는가?

반대로 질문해도 좋다. 자본주의는 어떻게 지구의 대부분을 지배하게 되었는가?

 

답은 간단하다. 인간이 무언가를 하기 위해 필요한 자원을 어딘가에 투입해야 한다면 당연히 더 많은 자원을 가지고 있는 쪽이 우월하다. 그것이 노동력이 됐든, 땅이나 나무 열매, 종자, 혹은 기계와 같은 생산성이 됐든, 더 간단하게 돈이 되었든.

 

자원은 지구에 존재하는 원소만큼이나 다양하고 많다. 그리고 그것들은 제각기 다양하게 연관되어 있고 다양하게 가공될 수 있으며 조합될 수 있다. 부족사회는 부족의 인구만큼의 노동력을 동원할 수 있었고, 그러한 노동력이 채집하고 보관할 수 있는만큼의 자원만 동원될 수 있었다.

 

왕국은 왕국의 인구만큼의 노동력을 동원할 수 있었고 그러한 노동력이 채집하고 생산하고 보관할 수 있는만큼의 자원을 동원할 수 있었다. 체제와 수단에 따라 그 이하, 혹은 그 이상을 동원할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자본주의는 어떠한가. 자본주의는 자원의 효율적인 소비(혹은 투입)와 생산의 극대화를 추구한다. 따라서 그 어떤 체제보다 우월한 생산성을 갖추고 있고, 그 어떤 체제보다 압도적인 자원을 보유할 수 있다. 식량생산이 인구와 밀접한 관계를 맺듯이 어떠한 요소는 다른 요소와의 복합적인 관계성을 가진다.

 

다르게 말해서 자본주의는 공산주의보다 더 우월한 힘을 발휘하게 만드는 체제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이는 21세기 이전의 체제들간의 비교에 불과하다. 공산주의는 후진국에서만 성공한 체제이고, 애초에 자본주의는커녕 근대에 접어들지도 못했던 이들이 근대에 접어들기 위해 선택한, 그들의 요구에 부응한 거의 유일한 체제에 불과하다.

 

자본주의는 제국주의 국가들의 사상이었고, 그러한 서구 제국주의를 거부했던 후진국 피지배국은 서구의 그것을 그대로 답습하기보다 그것을 거부하는 공산주의를 택했다. 어차피 자본주의가 성공하지도 않았기에 자본가들은 그들이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이 혁명을 요구하는 이들을 억누르고 제압할 정도로 많지 않았다.

 

애초에 자원이 부족했던 국가들에게서 공산주의가 성공한 것이고, 당연히 기존의 자본주의 국가들과 경쟁이 가능할 리가 없었다. 가진 자원도 부족했는데 그것을 생산하는 체제 역시도 뛰어나지 못했다. 후진국 특유의 부정부패와 후진적 의식세계는 더 경쟁력 있는 사회를 건설하기도 어렵게 만들었다.

 

소련, 현재의 러시아 역시 그러한 후진적 의식와 부정부패에 의해 자원이 낭비되고 비효율적인 국가가 되었다. 이는 그들이 공산주의를 받아들였기 때문이 아니라 모든 후진국들이 다 그러하다. 민주주의가 됐든, 정치적 성숙성이 되었든 그것은 대중의 경험을 필요로 한다. 이는 곧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고, 민주적 전통과 관습이 충분히 뿌리 내리기 위해서 서구는 수백년의 시간을 보내어 겨우 지금의 수준에 도달한 것이다.

 

그것을 100년전 근현대에 도전한 후진국들이 이제 막 서구와 동등한 수준이 될 수는 없는 법이다. 공산주의 국가나 그랬던 국가들이 쉽게 독재를 벗어날 수 없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한국 역시 민주주의는 건국된 지 반세기는 더 지나야 가능했음을 인지하라.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다음 단계를 공산주의라고 말했다. 자본주의가 계속 발전하고 기계로 대표되는 압도적 생산성이 지구를 지배한 이후 자본의 존재는 그 의미를 잃을 것이기 때문이다. 가령, 기계가 모든 노동을 대체했을 때를 생각해보자. 자본가만이 무한하게 자본을 축적했으나 노동자는 더 이상 돈을 벌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은 오직 가진 돈을 모두 쓸 때까지 소비만 할 수 있다.

 

그마저도 더 이상 소비하지 못할 시점이 찾아오며 끝날 것이다.

 

자본주의는 그렇게 끝이 난다. 그러나 이를 분배의 방식으로 해결한다면 어떨까? 정부는 자본가-기업에게 세금을 걷고 노동자에게 돌려준다. 노동자는 그것을 통해 다시 소비하고 살아갈 수 있다. 자본가와 기업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막대한 세금을 내면서 노동자가 소비한 돈으로 계속해서 기능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자본가는 자신의 돈을 결코 풀려고 하지 않을 것이고, 정부는 (단기적으로는) 노동자보다 자본가의 편을 들었던 것이 실제 역사에서 증명된 바이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그런 맥락에서 등장한 개념이다. 노동자들이 단결하여 자본가에게서 자원을 강제로 빼앗을 수 있게 하는 막대한 권력을 말이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후기에 러시아나 중국을 비롯한 후진국에서 공산주의의 발생 가능성을 인정했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으나, 공산주의는 애초에 오래 유지될 수 있는 체제가 아니었다. 자본주의라는 체제와 경쟁을 했지만 동원 자원과 능력에 있어서 자본주의의 우월성을 압도할 수 없었고, 후진국의 전근대적 관성들은 부정부패나 정치적 성숙에 있어서 서구보다 더 나을 것이 없었다. 오히려 이전 시대와 크게 다를 바 없었거나 더 나빴다.

 

선진적 제도들은 더 많은 자원을 다룰 수 있었지만 만연한 부정부패에서 그것은 더 많은 자원 유출과 비효율을 발생시킬 뿐이었다. 이건 공산주의의 한계가 아니라 전근대에서 진정으로 벗어나지 못한 사회의 한계이다. 서구 유럽에서 공산주의 혁명이 성공했다면 유럽의 공산주의는 생각보다 더 잘 돌아갔을 것이다. 최소한 소련보다는.

 

기술적으로도 불가능했다. 소련은 만연한 부정부패를 방지하고 더 효율적인 행정 및 계획경제를 가능케하기 위해 오가스(OGAS)를 구상했지만 당시 컴퓨터 성능으로는 불가능했다. 공산주의 국가의 구성원들은 후진적 의식을 가졌기에 공과 사의 구분을 제대로 하지 못했고 부정부패했다.

 

그렇다고 부정부패를 충분히 통제 가능한 기술력이나 행정력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기술적으로 불가능하고, 행정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실질적으로도 유지 및 지속 가능한 체제가 아니었다. 단지 가진 자원과 생산을 통해 최대한 오래 버텼던 것 뿐이고 이는 체르노빌 등의 악재들이 없었다해도 기껏해야 수십년 더 이어졌을 것이다.

 

공산주의는 태생적으로 자본주의의 모순과 한계에서 비롯됐고 너무 일찍 발생했다. 자본주의는 아직 충분히 발전하지 못했고 공산주의를 적용한 사회는 자본주의가 제대로 탄생한 적도 없었다. 전 세계가 공산주의의 물결에 의해 자본주의가 멸망하고 지구상 유일한 체제로 공산주의가 작동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오래 유지될 수 없었다. 그것이 작동하기엔 시대가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체제 경쟁은 그런 의미에서 물리적인 것이 아니었다 정의해야할 것이다.

 

 

자본주의는 왜 끝장나지 않았는가.

공산주의와 그것을 추종하는 이들이 혁명을 요구했고 실제 행동으로 나타난 적도 많다. 자본가와 정부는 그들의 힘이 (아직 소련이 등장하기 전에서조차도) 무시할 정도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고 그들의 파괴적인 에너지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본주의는 등장한지 오래된 것이 아니었고, 노동자의 요구는 느리더라도 지속적으로 응답받았으며 그렇게 자본주의는 수정되었고 또한 발전하였다. 그 결과 자본주의는 그 모순을 '어느 정도' 교정할 수 있었고 덕분에 그 수명을 연장했다. 사회주의적 원리는 그들의 적 역시 성장시켰다. 혁명이라는 최악의 상황을 거부하기 위해서라도 그들은 노동자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자본주의는 균형을 맞춰갔다.

 

그리고 그 덕분에 자본과 노동의 균형은 어느 정도 맞아갈 수 있었으며 처음 지적되었던 자본주의의 모순과 한계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었다. 초기의 공산주의자들은 자본주의 역시 발전하고 수정될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했거나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그들의 믿음이 승리하리라 믿었겠지만 근본적인 한계는 공산주의가 더 심각했을 뿐이다.

 

자본주의 역시 언젠가는 끝이 날 것이다. 그것이 다시금 자본주의가 폭주하여 모순을 해결할 수 없게되었을 때가 되었든, 4차 산업혁명으로 대표되는 자동화와 인간 노동의 탈피를 통해서일지는 그때가 와봐야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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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yErKTVdETpw 

 

 

커뮤니티와 가치관 형성 선점 효과.

https://konn.tistory.com/784

 

 

국정원이 디씨와 일베에서 심리학자까지 동원하여 공작을 했다는 사실은 알만한 사람은 모두 알 겁니다. 그리고 10여년이 지난 지금 그 당시 일베적 가치관을 받아들인 이들은 2030세대의 일부가 되었고 지난 대선 등에서 숫자로 보여지는 투표율로 자신을 드러냈습니다.

 

그들 모두가 일베적 가치관을 받아들인 사람들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그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이 일베적 가치관을 공유하는 자들일 가능성은 높습니다. 정확히는, 일베적 가치관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그들이 추구하는 이에게 표를 주고 그들이 반대하고 혐오하는 이에게 표를 주지 않았을 것입니다.

 

 

국가 정보조직이 국내정치에 관여하고 공작을 시도하는 것은 한국에서 오랜 역사나 다름 없는 일이고 그렇기 때문에 디씨-일베에서 이들이 공작을 했다는 사실 역시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무슨 공작을 하였고 무엇이 목표였는지입니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는 너무나도 뻔해서 말할 것도 없습니다.

 

하나는 그들의 극우보수화(그들식 표현으로 말한다면 애국보수화)일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진보좌파에 대한 혐오와 증오, 조롱심을 심게 하는 겁니다.

 

 

그것은 논리와 합리로 이루어지는 게 아닙니다. 일단 조롱과 폄하로 시작했고, 그것을 유머코드로 만들어 밈화시켜 인터넷 이용자에게 쉽게 스며들게 만들었고 익숙해지도록 했습니다. 어느 정도 성공하면 그것들은 자가복제되고 사용자들이 스스로 확대재생산하기 때문에 처음 스노우볼을 굴리는 게 중요했고, 성공했습니다.

 

진보좌파에 대한 기존 극우보수적 가치관을 지닌 이들은 혐오감을 지니고 있었고 사실상 종북 빨갱이 내지는 잠재적 종북 빨갱이로 바라보았기 때문에 기존의 토양을 이용하는데 너무 쉬웠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토양 위에 어린 청소년들은 노알라, 운지 등으로 대표되는 극우보수적 가치관과 정치관을 담은, 정확히는 그 감성적 토대를 쌓는 자료들은 성공적으로 작동했지요.

 

 

이것들은 점점 정치색을 강하게 드러내면서 구체화되었습니다. 노무현으로 대표되는 진보좌파의 아이콘을 땅에 떨어뜨리고 그의 자살로 인해 함부로 건드리기 어려운 고인이라는 점 역시 성역화의 해체라는 목적으로 공격되고 조롱삼았습니다. 여기에 도덕이나 윤리는 찾아볼 수 없었는데, 본래 디씨 자체가 그러한 성격의 커뮤니티였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용하기 좋은 환경이죠.

 

그렇게 노무현과 김대중을 조롱삼고 조리돌리며 공격했고 이것이 확대되자 보수색이 강한 곳일 수록 진보좌파임을 드러내는 것을 꺼리고 두렵게 만들었습니다. 마치 진보좌파거나 특정 정치인, 정치 정당을 지지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고 멍청한 것이며 질책 받아 마땅한 것처럼 만들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들은 진보좌파임을 부끄럽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드러내지 못하게 만들었죠. 소위 말해, 꼽을 주면서요.

 

"공화당원으로서의 당신 생각도 얘기할 각오가 돼 있어?"
"공화당원인게 무슨 소아마비라도 걸린듯이 말하는군."

 

 

그러면서 나타난 게 XX왕 이명박 시리즈였습니다. 5.18에 대한 조롱과 폄하, 조작과 왜곡은 오랫동안 있어 왔지만 다시 한번 크게 재점화되었던 것도 그 시기였고요.

 

이들의 조작은 아주 간단하고 이해하기 쉽게 작성되어 있으면서 사이다스러운 마초적 성격과 간결성, 유머감각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훗날 추가적인 정보와 사실들이 공개되면서 뒤집어지거나 재평가되기까지 합니다.

 

이를 통해 진보좌파는 조롱받아 마땅한 병신들이었고 이명박으로 대표되는 보수우파는 유능하고 애국적인 이미지가 형성되었죠. 애국보수라는 용어 자체가 극도의 자뻑이 담긴 단어이지만 이것은 그 자체로 우파인 것에 자랑스러움을 느끼게 해줍니다. 이들이 자신을 애국적이라고 느낄 때는 국가를 위해 무언가를 하거나 희생할 때가 아니라 국가의 적으로 상정된 진보좌파와 그러한 정치세력을 공격하고 비난할 때입니다. 더 나아가 북한을 공격하고 욕할 때도 포함되지만, 기본적으로 국내에 있는 같은 국민들을 대상으로 하죠.

 

애국보수라는 이들은 대체로 다른 정치진영에 있는 같은 국민을 대상으로 싸우고 조롱하고 공격합니다. 그리고 그들에 대한 싸움, 혹은 승리를 통해 자부심을 느끼고 신념의 강화를 반복하죠. 최근 이지성씨가 문재인과 윤석열 사진을 대조하며 자신이 우파인 이유라고 했지만, 피상적이고 맥락을 왜곡하는 사진 두장으로 무엇이 더 올바르고 애국적인지를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 반대되는 사진들도 많으니까요.

 

그러나 그 스스로는 자신이 우파임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자부심을 느끼고 있으며, 그것을 이야기하기 위해 문재인과 윤석열의 사진을 대비시켰습니다. 진보좌파는 저열하고 한심한 놈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본인의 행동이 자신이 우파인 이유가 멍청해서라는 걸 증명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의 생각이 사실일 가능성은 아주 낮지요.

 

 

국정원은 신세대 극우보수를 길러내기 위해 이명박 이전 10여년 동안의 민주화 시대를 겪은 이들에게 기존의 가치관/세계관을 주입해야할 필요성을 느꼈고, 민주화 시대에 해체되고 교정되고 정상화되어 없어지거나 약화된 수많은 군사독재 당시의 가치들(주로 악습과 일제식, 혹은 일제와 결합한 그것)의 명맥을 이어야 했습니다.

 

그러한 것들은 모든 것이 완전히 이어진 것은 아니지만 그 핵심적 논리와 가치관은 여전히 남아 천박한 실태로 드러나곤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꽤 성공적이게 되었습니다. 디씨와 일베에서 형성되고 유포된 디씨 문화, 일베적 가치관은 인터넷 커뮤니티 전반에 크고 작은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고 일베는 이제 일베 밖에서도 버젓이 그 모습을 당당히 드러내게 되었습니다. 일베 초기에 수많은 커뮤니티와 수많은 사람들이 일베에 적대적이었고 그들의 등장에 공격적으로 대응했던 것을 기억할 겁니다.

 

그러나 지금은 조금 과장해서 어디에서든 일베충들을 볼 수 있게 되었죠.

 

 

그렇게 국정원의 신세대 극우보수를 만들어 진보좌파에 적대감을 조성하고 조롱하게 만드는 공작은 매우 성공적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정보전과 심리전이 가능한 정보조직인만큼, 다양한 국가의 공작에 대해 연구했을 것이고 그 중 하나가 베즈메노프가 설명한 적극적 공작에서 따왔을 수도 있습니다. 베즈메노프는 교육을 예시로 들었지만 현대 정보사회에선 교육보다 훨씬 강력하게 작동하는 게 있는 법이죠.

 

 

이미 디씨 문화에 물들고 일베적 가치관을 가진 이들은 특정한 현상이나 사건에 대해 특정한 방식의 반응과 방향성을 지닌 표현을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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